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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우익적이거나 양심적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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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문제 연구 참여한 마치다 타카시 창원대 교수의 제언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연구 활동에도 참여한 일본인 마치다 타카시 교수는 자신에게 '양심적'이라는 한국인들의 감사에 때로 '공포'를 느낀다. 그 호의를 의심하거나 부정해서가 아니라 가해와 피해, '혐한 우익'과 '양심적 지식인'이라는 경직된 한국사회의 이분법이 자신이 놓인 현실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활동은 '반일'이 아니라 과거 자국사이자 전쟁에 참여한 '내 아버지(할아버지)'의 기억을 대면하는 성찰의 문제, 가해의 책임에 관여하고자 하는 의지의 문제라고 토로하는 그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해후의 장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라도 일본인의 관심이 다층적으로 이해되기를 소망한다. 웹진 <결>은 다양한 개인 정체성 위에서 역사에 대한 책임, 역사적 경험과 기억, 그 공유에 대해 숙고를 이어가고 있는 마치다 타카시 교수의 울림 있는 목소리를 전한다. 민속학 연구자이자 대학에서 일본어를 강의하는 원어민 교수인 나는 1972년 일본 규슈(九州) 지방에서 태어났다.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한 것은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으로 일본 사회가 뜨거웠던 1991년, 당시 나는 도쿄의 한 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이듬해 3학년 때 관부재판이 시작됐고, 1993년 4학년 때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이 "이(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실수를 절대로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발표하는 모습을 뉴스에서 봤다. 잘 알려진 '고노담화'이다. 그리고 며칠 뒤인 1993년 8월 15일, 자민당 정권이 무너지고 집권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가 전몰자 추도식전(戰歿者追悼式典)에서 최초로 아시아 국가들의 희생에 대한 일본의 가해 책임을 인정했다. 당시 나와 친구들은 마침내 일본이 전후 책임을 다할 때가 되었다고 흥분했었다. 그리고 불과 3년 후인 1996년 '자국의 과거사를 미화하려는 단체' 혹은 '보수적 주장을 펼치는 단체'로 평가받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출범하고 그 명단에 유명한 작가와 학자, 정치인들의 이름이 오른 것을 보고 꽤 큰 충격을 받았던 사실도 떠오른다. 아버지가 겪은 전쟁, 전후 아들이 받은 반전평화수업 짐작해 보건대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전쟁터도 굶주림도 모르는 꼬맹이가 뭘 안다고!" 였던 것 같다. 사실 과거 일본의 전쟁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생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속에 자리한 최초의 발화자는 2005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다. 1920년생인 아버지는 1941년 육군 보병으로 비상소집돼 타이완을 거쳐 필리핀, 자바 등지에 주둔했고 현재 파푸아뉴기니인 뉴브리튼섬 라바울(Rabaul)에서 패전을 맞았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라바울로 향하는 수송선이 격침됐을 때 캄캄한 밤바다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식량이 떨어진 상황에서 다양한 동식물을 먹는 등 급박했던 생존과 사투의 모험담이 주를 이루었고, 그 끝은 대개 "옛날 일본은 세계를 상대로 싸운 강력한 나라였는데 지금의 일본은 한심하다.", "천황의 나라는 지지 않는다고 믿고 싸웠는데 전부 거짓말이었다. 우리는 국가에게 사기 당했다." 같은 향수와 피해자 의식이 혼재된 회고였다. 아버지와 학교, 두 전쟁의 기억 사이에 끼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생 때였다. 가장 먼저 여름방학 중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날인 8월 9일 등교해 받았던 평화교육이 떠오른다. 복도에는 원폭 피해를 보여주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고, 공습 등 전쟁 피해를 다룬 영화를 보는 '반전수업'이 진행됐다. 수업은 피해와 가해의 문제를 파고들지 않고, 전쟁이란 비참한 것이기에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모험담과 거리가 멀었기에 하루는 학교에서 배운 반전적인 내용을 직접 묻기도 했다. 자신의 기억에 대해 아들에게 '비판'받은 아버지는 귀찮아 하셨다. 짐작해 보건대 그의 입장에서는 "전쟁터도 굶주림도 모르는 꼬맹이가 뭘 안다고!"였던 것 같다. 가해 사실과 대면한 단카이 세대 젊은 교사들의 태도 한국어 실력이 부족했기에 노인의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자 노력했다. 가해 국가에서 태어난 인간의 예의라고도 생각했다. 중학교에서는 교원조합에 소속된 '단카이 세대' 교사들에게, 특히 사회과 수업에서 사상적 경향이 반영된 수업을 받았다. 이들은 교과서 내용을 넘어 제국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의 잔학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90년대 일본에서 '자학사관'으로 비판받게 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다만 이 젊은 교사들은 교장, 교감 등 관리직과 불화해 자주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거나 사라졌다. 사춘기에 들어선 내게 이 교사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나는 전교집회에서 당시 교칙이었던 남학생 두발 규제(반삭발)에 반발하며 "군국주의 유물이니 철폐하라"라고 연설해 전교생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나중에 교장이 언론자유 남용이라며 호되게 꾸짖었지만 지금도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막연하게 진보적인 분위기 속에서 단카이 세대 교사도, 그들에게 충실한 중학생이었던 나도 과거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는 글로 적힌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다. 중국이나 한국 등 인접 국가와 일본 사이 국가 간 피해·가해 사실은 언론 속의 문제일 뿐 일상생활과는 별개였다. 고등학교,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근현대사 지식이 늘었고, 한국인 유학생 친구도 생겼다. 자연스럽게 고민이 깊어졌다. 그리고 1980년대는 뉴아카 붐 영향으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아사다 아키라(淺田彰) 등을 읽는 것이 상식이었다. 이 사상가들은 대체로 진보적(liberal)인 성향이었기에 '과거의 가해 사실에 대한 성실한 태도'는 1990년대 일본에서 책을 좀 읽는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한 정치적 자세였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한 나는 매년 지도교수를 따라 한국 농촌조사를 나갔다. 이때 종종 마을 노인들께 식민지 시기와 전쟁에 대한 책망 어린 말을 들었다. 당시 한국어 실력이 부족했기에 노인의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자 노력했다. 그래야 조사를 계속할 수 있기도 했지만 가해 국가에서 태어난 인간의 예의라고도 생각했다. 피해 할머니 앞에 정직한 인간으로 서는 일 '일본인=가해자'라는 역할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고, 그렇다고 피해자 편에 서는 '양심적 일본인'을 연기할 재주도 없었다. 2000년 9월 나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에 갔다. 일본에서 왔다고 자기소개를 하는 내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박두리(1924~2006) 씨는 "일본 사람은 반갑지 않다"며 고개를 돌렸다. 박 할머니는 "일본 사람이 많이 오는데 아무 것도 좋아진 게 없잖아"라고도 했다. 아직 초보적인 한국어 수준이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눔의 집〉 직원은 기분 상해하지 말라며 달랬는데 기분이 나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단지 과자 선물을 든 채 어떻게 서 있어야 하나, 일본인으로서 어떻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야 하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나는 '일본인=가해자'라는 역할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고, 그렇다고 피해자 편에 서는 '양심적 일본인'을 연기할 재주도 없었다. 그 어느 것도 나의 정직한 모습이 아니었다. 몇 시간 뒤 〈나눔의 집〉에서 점심을 먹게 됐다. 식탁에 앉자 주방 쪽에서 박 할머니가 밥그릇을 들고 와서 내게 던지듯 건네며 "먹어"라고 했다. "할머니, 저 밥이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더 먹어"라고 했다. 그녀에게 나는 반갑지 않은 일본인이지만 동시에 잘 먹게 생긴 청년이었다. 나는 직관적으로 이분 앞에서 표면적인 속죄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너희가 왔다고 내게 도움이 될 것도 없고 일본인을 용서할 마음도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밥은 먹고 가라'는 단호한 몸의 언어, 이 작은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내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란 이분 앞에서 일본인에 남성이고,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내가 어떻게 정직한 인간으로 서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의 나는 밥그릇을 손에 들고 어떤 표정, 어떤 말, 어떤 행동이 정답인지를 모르고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그러하다. 딱 한 번 아버지에게 물었던 위안소 이야기 "조선에서 온 여자들이 많았지.(...)" 아버지의 말은 어디까지 진실이었을까.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약해진 노인에게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를 초청한 대학축제 '증언을 듣는 모임'에서 사회를 맡게 되었다. 입장료를 받는 행사였음에도 행사장이 꽉 찰 정도로 성황이었다. 이 행사를 통해 'VAWW-NET JAPAN(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Network JAPAN. 전시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과 이어졌고, 그 인연으로 같은 해 12월 도쿄 구단회관(九段會館)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도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게 됐다. 이런 활동에 관여하다가 귀향했을 때 딱 한 번 아버지에게 위안소 이야기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는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조선에서 온 여자들이 많이 있었지, 불쌍하게. 더러운 곳이었어. 군인들이 잔뜩 줄을 섰어. 지금 들어있는 놈이 나오기도 전에 다음 놈이 팬티를 벗을 정도로. 그런 곳이었어. 저런 데 나는 가지 않았어. 조선 남자들도 많이 있었는데, 군대에서 막노동을 했지. 전쟁에 져서 포로가 되면서 그놈들은 미군의 하수인 노릇을 했는데, 나도 많이 얻어맞았어. 어쩔 수 없지. 전쟁 중에는 그놈들도 내게 맞았으니까." 아버지의 말은 어디까지 진실이었을까?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는 그런 것이었고, 나는 몸이 약해진 노인에게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양심적 일본인'이 될 자신을 점점 잃어가는 이유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지만 '반일'적 퍼포먼스를 포함한 정치적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일본에 있을 때보다 더 부담을 느꼈다. 2001년 여름, 한국으로 유학을 온 나는 20년 이상 이 나라에 살고 있다. 한국에 와서도 일본군'위안부' 관련 보도를 자주 접했다. 차이가 있다면 일본에 있을 때보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데 더 부담을 느끼게 됐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 그 운동은 '반일'이 아니라 과거 자국사에 대한 성찰의 문제였고, 피해자·생존자와 관계성 때문에 도움이 되고 싶은 바람이 전부였다. 그러나 2000년대 한국에서 생활하는 나는 '위안부' 문제가 정치화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 주변에서 이뤄지는 '반일'적 퍼포먼스를 포함한 정치적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늘 한국 사회에서 기대하는 '양심적 일본인'이 될 자신이 없었던 내게 2022년 창원대학교 동료가 관부재판에 관한 전시 기획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다며 참여를 제안했다. 일본어 자료가 많은데 읽을 사람이 마땅히 없어 도와달라는 그의 제안에 생각해보겠다고 답했다. 이 문제에 관계되는 한 정치성에서 자유롭기 어렵고, 그 속에서 스스로 얼마나 정직할 수 있을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결론은 프로젝트 참여였다.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 문제를 외면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일본에서 진행된 지원 활동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인 이유와 다르지 않은 선택이었다. 물론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도 내가 얼마나 정직한지, 내가 쓰는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트럭 앞에 내게 보이지 않는 휠체어가 없는지 불안과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혐한 우익'과 '양심적 일본인' 사이에서 공포를 느끼다 '양심적 일본인'이라는 라벨링은 개인의 다의적이고 개별적인 인격을 한국 사회의 공식화된 기억의 내러티브 속에 맥락화하고 배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본인 교사들에게는 '역사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다.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 불필요한 갈등이 생길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나의 한국 생활을 하면서 "일본인이 있으니 역사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장면은 수없이 재연되었다. 내가 불쾌하게 느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세대나 인생 내력과 관계없이 나는 일본인으로서 이 문제 앞에서는 '가해자' 자리에 앉게 된다. '양심적 일본인'은 그 구조의 거울과도 같다. 2022년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 프로젝트와 관련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 취재 기자는 내게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 줘서 감사하다"고 말했고, 나는 순수하게 손사래를 쳤다. 부정하는 나의 태도를 기자는 겸손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분명 '호의적인'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자신이 인격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기자가 설정한 '선악'과 '민족' 내러티브에 배치되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나는 나를 '양심적'이라고 표현하는 한국인의 호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또 그러한 일본인 개개인의 '양심'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때로 공포심까지 느끼는 것은 마치 일본에는 과거 역사를 부정하는 '혐한 우익'과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하는 '양심적 일본인' 두 종류밖에 없는 듯한 몰이해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공식화된 기억을 비판할 시 곧바로 '우익'으로 라벨링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하지만 그 두 종류는 모두 나의 속성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실에 사는 한국인이 그런 것처럼 일본인도 흑과 백 두 종류가 아니라 서로 다른 농담(濃淡)을 가진 회색의 삶을 살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가해자이고 다른 부분에서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애초 정치적 보수·진보나 역사의 피해·가해로 한 개인의 삶 전체를 설명할 수도 없다. 나도 일본군 병사였던 사람의 아들이자 한국 사회에 사는 소수자이며, 지도교수를 신경 쓰는 제자이면서 학생들을 신경 쓰이게 하는 교사다. '양심적 일본인'이라는 라벨링은 그러한 개인의 다의적이고 개별적인 인격을 한국 사회의 공식화된 기억의 내러티브 속에 맥락화하고 배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전후 책임 성찰 그리고 가족사와 마주하는 일본인의 기대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전후 책임'에 대한 성찰은 나의 피와 살에 대한 성찰이고, '나'의 신체적 역사성은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인의 관심이 다층적으로 이해되길 바라는 이유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어떤 사람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질 때는 각자 고유한 문제의식과 배경이 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전후 책임'에 대한 성찰은 나의 피와 살에 대한 성찰이 아닐 수가 없고, '나'의 신체적 역사성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990년대 전후 보상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았을 때 그들은 우선 '내 아버지(할아버지)'의 기억과 마주 보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처럼 가족사의 기억을 통해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전쟁 실상에 접근하고 싶은 마음, 그 죄를 씻는데 가족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자 하는 의지 속에서 1990년대 전후 책임 문제에 관여해 나갔다. 적어도 다음 세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새로운 해후의 장, 소통의 기회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양심적이거나 우익이거나 하는 이분법적 인식, 그리고 그것을 선/악으로 단순화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좀 더 성숙한 시선으로 서로의 역사를 바라볼 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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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그녀들의 법정 1부 - 단 800자의 기자합의문이 해결을 담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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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 한일합의' 이후, 그녀들의 법정 1부. 단 800자의 기자합의문이 해결을 담을 수 있는가 2부. 합의 이후, 양국 정상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3부. 12.28 합의는 헌법소원청구 대상이 아니다? ‘12. 28. 한일합의’ 이후, 그녀들의 법정 영화 <허스토리>(민규동, 2018)가 보여주듯이, '위안부' 생존자들은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다양한 소송을 전개해 왔습니다. 12.28 한일합의 이후에 진행되었거나 진행 중인 소송만 해도 5건입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당사자가 된 소송으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한 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대한민국과 일본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 두 건, 그리고 소송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피해자 할머니들이 관련된 소송으로 두 건의 정보공개청구소송이 있습니다. 1991년 12월 6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동경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한 이래 피해자 할머니들은 여러 건의 소송을 일본법원에 제기해 왔지만, 번번이 좌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일본법원은 피해자 할머니들의 피해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모든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었다고 판단하였죠. 피해자 할머니들이 지금 한국의 법정에 서게 되기까지 겪은 일들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 글에서는 2015년 12월 28일 이른바 ‘12.28 한일합의’가 이루어진 이후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송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과거의 법정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도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제기한 소송의 변호인단 중 한 사람으로, 법정에서는 피해자 할머니들을 대리하여 원고의 자리에 서는 사람입니다. 더 많은 분이 피해자 할머니들의 주장에 귀 기울여 주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고 있지요. 따라서 이 글은 피해자 할머니 입장에서의 부당함과 소송을 제기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법정에서의 절차와 정치한 법리 등 좀 더 상세한 법률적 정보를 알고 싶은 분들에게는 부족한 글이 될 겁니다. 또,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학계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다는 점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 800자의 ‘위안부 합의’ 기자회견문, 이것으로 ‘최종적 그리고 불가역적’ 해결을 담을 수 있는가 피해자 할머니들이 12.28 한일합의 이후 가장 먼저 제기한 소송은 정보공개청구소송입니다. 한일합의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2016년 1월 18일 대통령비서실에 정보공개청구를 했고, 2016년 2월 1일에는 외교부에도 정보공개청구를 했습니다. 대통령비서실과 외교부는 정보공개청구에 대하여 각각 1월 27과 2월 15일에 모두 비공개 결정을 내렸고, 이 비공개 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했지만 결정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정보를, 왜 공개해 달라고 요구했을까요? 한일합의는 양국 외교장관이 국내외 기자를 불러 모아 기자회견을 하는 형식으로 발표되었는데요, 양국 외교장관이 번갈아 발표한 합의 내용은 통역까지 포함하여 약 15분 분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자회견문이 그대로 ‘위안부 합의’라는 타이틀로 공개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자회견문은 약 350자, 일본의 것은 약 450자 정도로 합하면 약 800자 정도였는데요. 그 800자가 30년 가까이 피해자 할머니들과 시민단체들이 싸워 온 이 문제에 대한 ‘위안부 합의’라는 것이었죠. 그것 말고는 어떠한 합의문이나 문서도 발표되지 않았고, 실제로 발표문 이상의 그 어떤 내용도 문서로 추가 작성되지 않았습니다. 기자회견문은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출연하여 피해자 할머니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업을 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이 회견으로 지금까지의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고 따라서 우리 정부는 앞으로 일본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겠다고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 합의가 최종적 그리고 불가역적이라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기자회견문만으로 부족했던, 명확히 밝혀야 하는 내용을 묻다 저희 법률가들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일본이 ‘법적 책임’을 인정한 것인지, ‘법적 책임’의 기본요소인 ‘위안부 피해 사실’을 인정한 것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피해자 할머니들이 요구한 것은 일본에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책임’ 즉 ‘법적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식민통치 체제를 이용하여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성노예 생활 강요라는 불법행위를 하였으므로 그 불법행위로 인한 할머니들의 피해를 배상하라는 것입니다. 이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첫 단추가 바로 일본이 ‘식민통치 체제를 이용하여 피해자들에게 성노예 생활을 강요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어야 하고요. 하지만 기자회견문만으로는 일본이 ‘사실 인정’을 하였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까지 일본이 인정해 왔던 사실보다도 오히려 후퇴하였다고 볼 여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위안부’ 합의라고 하는 저 기자회견문의 내용을 분명히 밝혀야만 했습니다. 외교부 회의록 공개 요청, 합의 과정에서 ‘강제연행’을 어떻게 다루었나 시간순으로는 대통령비서실에 정보공개청구를 한 것이 먼저이지만, 외교부에 정보공개청구를 한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외교부에 공개를 요구한 정보는 어떤 과정에서 합의문에 ‘강제연행’이 아니라 ‘군의 관여’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 정부는 ‘군의 관여’하에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을 뿐, 위안소로 ‘위안부’를 강제적으로 끌어오고, 끌려온 ‘위안부’를 상대로 말로 표현하기조차 두려운 성노예 생활을 강요하였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부는 강제모집과 성노예 강요 등의 책임을 모두 민간에 떠넘기거나 아예 그건 모두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피해자 할머니들은 일본에게 ‘군의 관여’로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강제적으로 위안소로 끌려갔고 거기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교부 장관이 합의문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강제연행’ 표현 및 그 사실을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정보공개를 요구했습니다. 양국이 ‘군의 관여’라는 용어를 선택하고 그 의미에 관해 협의한 문서와 강제연행 사실을 인정했는지 여부를 협의한 문서 등을 공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법원은 국가 간의 합의나 조약의 내용이 불분명할 경우 회의록 등을 통해서 그 내용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고 한 적이 이미 있었거든요. 그러나 외교부는 비공개 협의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한일 간의 협의 내용은 ‘외교문서’이므로 공개대상정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서는 ‘외교 관계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를 비공개 정보로 정하고 있으니 그 규정을 비공개 사유로 든 것이죠. 외교문서가 공개되면 그로 인해 일본과의 신뢰 관계에 큰 타격을 줄 것이고 국제관행에도 어긋난다고도 주장하였습니다. 외교부는 특히 외교에 관한 사항은 고도로 전문적인 영역이어서 다른 정보보다도 더 많은 재량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한편으로는 협의 과정에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그 의사를 반영했으며 할머니들이 고령인 점을 고려하여 시급하게 해결하기 위해 애를 썼다고 주장했습니다. 3심에서는, 외교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들의 법적 권리가 함부로 침해되지 않기를 이 정보공개청구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1심에서는 외교문서라 해도 일률적으로 모두 비공개정보라고 할 수는 없고 외교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공개로 인해 국익을 현저히 해할 것인지도 알 수 없다고 판단해서 공개하라고 했지만, 항소심에서는 외교부의 주장대로 이 정보는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라고 판단하여 비공개를 정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외교부에 대한 정보공개청구소송은 현재 대법원에 있습니다. 항소심은 ‘공개가 되면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였지만, 현저히 해하여진다는 ‘국가의 중대한 이익’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고 하는 것인지는 전혀 밝히지 않았죠. 대법원이 위안부 합의 과정에서 작성된 문서를 공개한다고 해서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외교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들의 법적 권리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되니까요. 한일합의 이후 일본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군의 관여라는 것은 위안소의 설치에 관한 것뿐, ‘강제연행은 없었다’, ‘강제연행했다는 것은 완전히 날조된 이야기이다’라고 연이어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사안은 ‘성노예 문제가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 문제일 뿐’이라며 성노예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런 서글픈 상황 속에서 ‘위안부’ 관련 소송들이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낼지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대통령비서실을 상대로 한 정보공개소송과 헌법소원에 관해 설명하겠습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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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 두레방은 결코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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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 두레방은 결코 멈출 수 없다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 회복 활동을 비롯해 불법 성매매 문제, 군사주의로 인한 폐해를 알리며 한국 최초의 미군 '위안부' 운동을 주도해 온 두레방의 공간이 대규모 개발사업을 명분으로 철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전국의 시민사회단체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옛 성병관리소' 건물인 두레방 철거가 '빼뻘마을' 여성공동체를 내쫓는 일이자 원형이 보존돼 있는 근현대 역사문화적 공간을 폐기하는 일이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두레방 김은진 원장이 의정부시와 동두천시에 있는 '옛 성병관리소'를 역사문화평화공원으로 활용하자는 제안과 함께 현장 상황을 전해왔다. 기지촌 여성들의 보금자리, '두레방(My Sister's Place)'의 역사는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작 지점에 '문혜림'이라는 여성이 있다. 2022년 세상을 떠나 지금은 고인이 된 문혜림은 헤리엇 페이 핀치벡(Harriett Faye Pinchbeck)이라는 본명을 가진 미국인. 고 문익환 목사의 동생 문동환 목사의 부인인 그는 사회사업가로, 국적 덕분에 미국 우편 시스템을 이용해 국제사회에 한국의 인권 상황을 알려 민주화를 도운 인물이기도 하다. 미군 부대에서 알코올, 약물 문제를 겪는 미군을 상담해주던 사회사업가 문혜림의 눈에 성매매를 하는 한국 여성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세상 밖으로 내쳐진 사람들이었다. 문혜림은 '나라도 그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장로교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여신도회전국연합회 프로젝트를 통해 1986년 의정부시 캠프 레드크라우드 옆에 두레방을 세웠고 후에 고산동, 일명 '빼뻘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빼뻘'의 유래는 배나무가 많아 '배벌'로 불린데서 출발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데, 우리말이 익숙지 않은 미군들의 발음 때문에 와전됐다거나 기지촌에 한 번 발을 들이면 좀체 빼기 어려워 나왔다는 설도 흔하게 들을 수 있다. 두레방, 기지촌 여성들이 서로 돕고 쉬며 이야기하는 곳 '서로 도와가면서 일하는 공동체'라는 '두레'의 뜻을 연결해 '여성들이 서로 돕고 모여서 쉬며 이야기하는 공간'으로 탄생한 두레방은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기지촌 여성들이 자존감을 회복하며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다각도로 활동했다. 일상적으로는 상담, 한글과 영어 교육, 공동 식사, 요리교실, 야유회, 탈성매매를 위한 빵 만들기, 카드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으로 여성들의 자립을 도왔다. 또 기지촌에서 발생하는 불법 성매매 문제, 군사주의로 인한 폐해와 실태를 알리고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한편 여성들을 위한 전문 상담, 의료·법률 지원, 치유 프로그램 운영, 자활사업 연계, 출판·영상자료 제작 등의 활동을 진행했다. 또 나날이 늘어나는 혼혈아들을 위한 놀이방, 공부방도 운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레방은 매우 정치군사적인 영역인 '기지촌'이라는 곳에서 여성들을 위한 보다 현실적인 지원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해결과 민관 협력 체계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는 2012년, 인권 침해 피해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교육과 홍보 등을 목표로 한 '기지촌여성인권연대' 발족으로 이어졌다. 두레방과 기지촌여성인권연대는 관련 조례 제정과 함께 기지촌을 조성하고 관리하며 성매매를 조장한 국가에 대한 책임을 묻는 국가손해배상 소송, 특별법 제정, 국제연대 활동을 활발하게 벌여왔다.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 제정 이후 '성매매 피해 지원 상담소'로 지정받은 두레방은 2006년부터 '두레방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 또 2009년에는 '두레방쉼터'를 설립해 1990년대 중순부터 국내 기지촌으로 유입된 성매매 피해 이주여성을 돕고 있고, 2021년에는 '평택여성인권상담센터 품'을 설립해 반성매매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권 개선부터 조례 제정, 국가 책임 인정한 대법원 판결까지! 기지촌 미군 '위안부' 운동을 주도해온 두레방의 주요 성취들 지난 38년 동안 기지촌을 둘러싼 착취 구조와 인권 침해 상황을 인식한 두레방은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을 회복시키겠다'는 선언을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기지촌 미군 '위안부' 운동을 주도해 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성취는 의정부시 안에, 빼뻘마을 안에서 여성들과 통과해온 시간이다. 수많은 상처를 딛고 사회와 화해(통합)하기, 홀로서기(자활), 자기 존중감 회복하기(치유 프로그램) 등은 여성들과 지금까지 살던 영역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모색해온 과정이었다. 법률 제정 등 사회적 성취에 기여한 부분도 상당하다. 2004년 2월의 성매매방지법 제정에 앞장선 것을 비롯해 기지촌 여성 명예 회복과 지원을 위한 법률 제정 활동, 조례 제정 운동, 이주여성을 위한 E-6-2비자대안 네트워크 활동 등이다. 모두 여성들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사회와 거대한 군사화가 취약한 한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극복하는 연대활동이었다. 이를 위해 두레방은 성매매피해상담소(2006), 외국인여성지원시설(2009), 평택여성인권상담센터 품(2021) 등을 등록, 운영하며 국가 예산을 받아 공식적으로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여성을 지원하는 체계를 마련했다. 두레방은 의정부시 역사상 여성단체 최초로 등록된 비영리민간단체였다. 2020년 4월 29일은 기지촌 여성운동에서 역사적인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날이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경기도의회에서 '경기도 기지촌 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가 통과된 날이기 때문이다. 두레방이 7년 동안 헌신한 성과였다. 2022년 9월 29일도 기념비적인 날로, '기지촌 성 산업 제도를 국가폭력으로 인정한' 대법원의 원심 확정 판결을 이끌어낸 일은 두레방 기지촌 여성운동의 쾌거였다. 2014년 6월 25일,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여성 122명이 국가가 기지촌을 조성하고 여성들의 성매매를 방조, 묵인, 관리한 책임이 있기에 이를 배상하라는 취지로 집단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지 8년 3개월만의 일이었다. '기지촌 정화 운동'은 판결에서 정부의 책임을 판단하는데 인용된 대표적인 증거였다. 1969년 주한 미군 감축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여러 이해관계가 뒤섞여 있던 기지촌 일대에는 인종 갈등, 성병 등의 문제가 더해지면서 혼란이 극심했다. 그동안 여성들에게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다, 자긍심을 가지고 국익을 위해 헌신하라'며 정책적으로 기지촌 성매매를 장려해온 박정희 정권은 1971년 대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승리하자 불안한 정치적 위상을 회복하는 출구로, 또 주한 미군의 주둔을 보장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대통령 직속기구 '기지촌정화위원회'를 만드는 등 '기지촌 정화 운동'을 추진했다. 핵심은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 정화'였다. 당시 미군 측은 심각한 성병의 책임을 여성들에게 전가시키고, 이들에 대한 관리를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이후 클럽, 길거리 등을 불문하고 이른바 '토벌'이라고 불리는 불심검문이 이뤄졌고, 여성들이 무차별적으로 체포됐다. 이때 미군으로부터 성병이 있다고 지목당한 여성은 정당한 검사 절차 없이 바로 '몽키하우스'라고 불리는 성병관리소로 보내져 감금, 격리 치료를 당했다. 이 과정에서 독한 치료제로 인해 고통받은 것은 물론 페니실린 부작용으로 쇼크사하는 등 수많은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이 인권을 유린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두레방은 또 19대, 20대, 21대 국회에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 발의에 기지촌여성인권연대와 함께 했다. 하지만 법안이 현실화되지는 못하고 임기 만료로 모두 폐기됐다. 그럼에도 두레방은 다음 국회에서도 '기지촌 여성 특별법'을 다시 발의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속에서 기지촌 미군 '위안부'에 대한 낙인을 제거하고자 노력해 여성을 피해자로 위치시키고 미군 성매매가 범죄임을 명확히 한 점, 1980~1990년대 한국 상황에서 성산업은 성착취라는 사실을 공식화하고 반성매매 운동을 촉발시킨 부분 등 두레방이 이끌어낸 사회적 인식 변화도 꼭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철거 위기의 두레방과 원형 간직한 '옛 성병보건소' 이런 두레방은 최근 또 다른 커다란 시련과 과제에 직면했다. 첫째는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여성이 떠나간 기지촌의 빈자리를 대체해온 '이주여성' 문제다. 이들의 불안한 존재론적 특성은 여성의 빈곤화와 인신매매성 이주로 연결되면서 인종 차별, 계급 차별, 성 차별이라는 삼중의 인권 사각지대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두레방은 이들 이주여성들을 위해 법률, 의료, 각종 노동 인권 침해 관련 지원과 상담, 나아가 보호 시설, 안정적인 숙식, 귀국 지원까지 감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 당황스러운 문제는 두레방 이전이다. 1979년에 준공된 두레방 건물은 원래 기지촌 여성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검진받던 '옛 성병보건소'였다. 두레방은 의정부시 소유의 이 '아픔'의 공간을 2000년부터 임대해 평화교육의 장, 국제 인권 운동의 장, 기지촌 여성 운동의 장으로 탈바꿈시켜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두레방에게 시내로 이전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발단은 2022년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조사업'이다. 일명 '새뜰마을사업'으로, 국가균형발전위가 선정한 신규 사업 대상지 68개소 중에 의정부시의 현 빼뻘마을이 포함돼 두레방 건물을 부수거나 고쳐서 커뮤니티센터를 짓겠다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이름이라 별다른 설명 없이도 개발 방향이 읽힌다. 옛것은 미련없이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2024년 1월 11일 의정부시청 여성보육과 과장과 팀장이 두레방을 방문해 사무실 이전을 종용했다. 1월 22일에도 균형개발추진단 도시재생과 과장, 재생정비사업팀장 외 주무관 2인이 두레방을 찾았다. 이들은 '두레방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보강해 사용할 계획이다. 건물을 활용해 빼뻘마을 라이프 푸드 팝업스토어(쿠킹클라스-통닭만들기 등)를 진행하고, 등산객도 유치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반복하는 논리는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현재 빼뻘마을에는 미군도, 여성들도 많지 않은데 두레방이 꼭 그곳에 있어야 하냐는 것이다. 이에 두레방은 고령의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빼뻘마을에 단 한분이라도 살아계시는 한, 곁에서 지속적인 지원과 지지를 담당해야 하는 단체라고 응답했다. 둘째는, 그럼 공간을 의정부 시내로 옮기란다. 하지만 성매매피해지원상담소가 시내로 가면 내담자들이 업주의 눈치를 보고 상담하러 올 수 없지 않겠는가. 더욱이 시내로 가면 거동이 불편한 고령의 기지촌 여성들은 방문하기 어렵다. 셋째, 현 빼뻘마을의 교통이 너무 불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지난 24년 동안 두레방은 아무 불편 없이 역할을 수행해 왔다. 넷째, 기초생활보호대상자인 고령의 기지촌 여성을 지원하는 일은 그만해도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두레방의 정체성은 기지촌 여성 지원이다. 지원을 멈추는 것은 늙고, 연약하고, 외롭고, 병든 이들을 국가에서 또 외면하는 일이다. 경기도는 '기지촌여성지원조례'를 제정했고, 두레방은 그 조례에 맞추어 지원하고 있다. 다섯째, 보조금은 의정부에서 받으면서 아웃리치는 동두천 등 타 도시로 많이 나간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성매매피해지원상담소 보조금 예산은 매칭펀드(여성가족부 50%, 경기도 25%, 의정부시 25%)이며, 어느 지역에 있든 요청하는 모든 내담자를 지원해야 한다. 동두천으로 특히 많이 가는 이유는 기지촌 이주여성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국내에서 성착취 피해 이주여성 지원 사례가 가장 많은 곳이 바로 두레방이다. 두레방이 '빼뻘마을'에 계속 있어야 하는 이유 빼뻘마을이 깨끗하고 안전한 마을로 거듭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두레방은 그 과정에서 약자의 역사가 무시되고 고스란히 삭제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전쟁 후 스스로 거름이 되어 도시 경제를 일으키고 가족과 나라를 먹여 살린 기지촌 여성들, 국가폭력에 희생된 기지촌 여성들의 삶과 역사를 지우려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정부는 그간 노년이 되면 아파트를 주겠다고 속여왔다. 그런데 아파트는커녕 기지촌 여성들의 보금자리요, 사랑방이며, 최후의 공간인 두레방을 빼앗으려 한다! 언니들은 분노했다. 만나주지 않는 시장을 만나기 위해 시청 앞 거리로도 나섰다. 시장과 만남은 성사되었으나 결론적으로 "(2025년 6월까지) 1년간 유예기간을 가지며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 현재까지 시장의 답변이다. 두레방은 빼뻘마을에 계속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 캠프 스탠리가 아직 반환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빼뻘마을은 아직도 기지촌이기 때문이다. 두레방은 '옛 성병보건소' 건물을 기지촌 여성들의 고통과 상처로 가득한 장소를 치유와 회복의 장소로 변신시켰다. 두레방이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상담소지만, 기지촌 여성들의 공동체이기에 이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기지촌 현장인 빼뻘마을과 두레방은 군사주의의 폐해와 여성 인권에 대해 교감할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미군기지와 기지촌과 여성들의 삶, 두레방의 역사가 응축돼 있는 '옛 성병보건소' 건물은 아픈 역사를 후대에 알리고 교육하는데 더 없이 훌륭한 공간이다. 더욱이 한국에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 자체로 근현대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공간이자 유일한 건물이기도 한 '의정부 옛 성병보건소'는 물론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역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켜 보존해야 한다. 1970~1980년대 기지촌 미군 '위안부'가 된 여성들, 한때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로 명명되기도 했던 이들은 기지촌 쪽방에서 고령의 독거노인으로 외로움을 안고 만성질환, 빈곤과 싸우며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제도가 짊어져야 마땅한 책임까지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둡고 은폐된 성매매 공간인 기지촌에서 수십 년 동안 '국가안보'라는 명분 아래 이용당하고, 버려지고, 고쳐지지 않은 트라우마를 안고 지금껏 살아온 기지촌 여성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에서 추진하는 두레방 이전은 단순히 공간을 옮기는 사안이 아니다. 기지촌 여성들의 보금자리, 최후의 공간을 빼앗는 인권의 문제이다. 기지촌 여성 공동체 의미 담은 '평화여성인권박물관'을! 지난 2024년 5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예술가들과 '두레방×ㅃㅃ보관소' 연대로 '거품·소음·웅성거림' 전시 프로젝트가 있었다. 기지촌 여성들의 아픔이 스며있는 미술치료 결과물, 공예작품, 사진자료, 인터뷰 영상이 설치된 전시장이 바로 두레방 건물이었다. 그리고 '공존과 공생의 마을재생을 제안하다' 포럼을 열어 두레방이 왜 빼뻘마을에 계속 있어야 하는지 목소리를 공유했다. 이 자리에서 제안된 가장 현실적인 공간 활용 대안이 '기지촌여성박물관' 혹은 '평화여성인권박물관'이었다. 우리 사회 여성 인권을 둘러싼 또 하나의 이야기의 집인 두레방은 지난 8월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역사적 가치를 기록하고 보존해 후대에 전할 수 있는 기억의 공간으로 만들기로 했다. 전시회 마지막날인 6월 5일 열린 '공존과 공생의 마을재생을 제안하다' 포럼에서 발표한 이원재 문화연대위원장의 제언도 연결된 내용이었다. "생태와 사람 그리고 시간에 대한 존중이 없는 도시재생은 있을 수 없다. 1년 유예가 아닌 60년의 성찰로 함께, 다양하게 숙의해야 한다. 두레방 공동체를 시민들이 함께 축적하고 의미화하는 커뮤니티아트센터 형태면 좋겠다." - 이원재 문화연대위원장 두레방은 여전히 기지촌 여성들의 공동체 공간이다. 이 공간을 지켜내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대중들의 공감을 얻는 것이다. 이를 위해 두레방은 국가인권위원회에 '두레방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알릴 것이다. 9월 경기여성정책컨퍼런스 주제로 '두레방 이야기'가 확정됐다. 정기적인 포럼을 계속할 수도 있다. 지금처럼 기지촌 평화기행이나 다크투어 등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경기도는 물론이고 전국의 시민들을 만나고, 나아가 세계와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것이다. 두레방 공간은 부끄러운 장소, 감추어야 할 역사가 아니기에 결코 멈출 수 없으며 갑자기 '쫓겨' 나서도 안 된다. 두레방의 정체성이 성매매피해지원상담소로 제한되어서도 않된다. 두레방 활동의 사회적, 역사적, 지역적 가치와 의미는 앞으로도, 더 다양하게 공유되고 해석돼야 한다. 두레방은, 두레방 언니들은, 두레방 활동가들은 마지막까지 빼뻘마을에서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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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인터뷰 일제강점기로의 시간 여행, 상상해본 적 있나요? - 『푸른 늑대의 파수꾼』 김은진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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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청소년 문학, 판타지. 김은진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 『푸른 늑대의 파수꾼』은 이처럼 주목할 지점이 많은 작품이다. ‘위안부’ 문제를 말하면서도 시간 여행이라는 판타지 요소를 이용해 장르적 재미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보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를 들여다보고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주인공 수인을 통해 그 시절 여학생들이 가졌던 열정과 포부를 보여주며 당시 그들의 삶이 지금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 조선의 명가수가 꿈인 소녀,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노랫가락을 맛깔나게 뽑아 앙코르 요청을 끌어내는 소녀, 뒷간에서 볼일을 보면서도 노래를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소녀. 그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덧입혀져 왔던 고정관념이 한풀 벗겨지는 순간이다. 제9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출간된 이 책은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주인공 수인은 흑백 영화 같은 일제강점기 경성 거리를 거닐고 자기 목소리로 말하고 노래하는, 한마디로 컬러풀하기 그지없는 소녀다. ‘위안부’ 할머니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생기발랄한, 현재의 10대보다 더 10대다운 소녀로 제시한 점은 앞으로 나올 청소년 소설이 어떻게 역사와 그 속의 인간을 살려야 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일 낮,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과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로 한층 몰입감을 더했던 그날의 대화를 전한다. Q. 웹진 <결>의 독자분들을 위해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단편동화 「애꾸눈 칠칠이 아저씨의 초상」으로 등단했고, 지금은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출판사 편집자, 무대 연출 회사 PD로 일했어요. 우먼센스, 쎄씨, 여성중앙, 쉬즈, 라벨르 등 여성 잡지 프리랜서 기자와 MBC가이드, 금호건설 등 사보 필자로 글을 썼고 기업 사사(社史) 집필도 했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좇기 시작한 때가 2010년이라고요. 처음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 안에 물음표가 쌓이고 쌓여서였던 것 같아요. 90년대 중반에 일본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를 본 적이 있어요. 분명 슬프고 감동적인데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남는 거예요. 이게 뭘까 싶었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7년에 미국 LA에서 5학년 한인 여학생이 수업 거부를 했다는 기사를 보게 됐어요. 내용을 들여다보니, 학교에서 역사 보조교재로 사용하는 『요코 이야기』(일본계 미국인 작가의 소설) 때문이었어요. 부모님에게 들었던 역사적 사실과 책 내용이 완전히 달랐던 거죠. 책에는 일본이 패망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한국 남성들이 일본 소녀들을 성폭행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거든요.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동아시아 국가에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선 어떤 언급도 없이요. 프랑스에서 여성 교수가 일본 우익재단으로부터 소송을 당했다는 한겨레 기사도 제게 궁금증을 남겼어요. 전쟁 범죄 사실을 왜곡하는 사사카와재단(笹川財團)이 관련된 학술대회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며 50여 명의 교수들이 성명을 냈는데, 일본재단이 당시 여성 박사 한 명을 표적 삼아 거액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을 건 거예요. 비슷한 맥락의 기사들을 접하며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인식하게 됐어요. 전쟁 피해국의 시민으로서 어떻게든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2010년에 취재를 시작했죠. Q. 책은 비교적 밝은 톤을 유지해요. 그러한 성격을 취한 이유가 있었나요? 제가 초고를 쓸 때 ‘왜 굳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해?’라는 반응이 꽤 있었어요. 일제강점기는 고통스럽고 뒤돌아보기 싫은 시기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있는 거죠. 근데 역사를 외면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다면 쓰긴 써야 할 텐데 ‘어떻게’ 써야 할까가 고민이었죠. 그래서 장르를 통해 읽는 재미를 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Q. 청소년 문학이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는요? 창작 초기에 동화와 청소년 문학을 찾아 읽기 시작하면서 어린이/청소년 문학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죠. 그 재미와 감동, 예술성을 저도 구현해보고 싶었어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소설로 풀어내면서 힘들었던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할머니들의 소녀 시절을 재구성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피해자분들의 증언집도 여러 권 봤는데 상상이 잘 안 되더라고요. 좀 헤매다 옛날 동아일보 기사를 보게 됐고, 1920년부터 1940년 폐간 전까지의 기사들을 일일이 타이핑하면서 읽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당시의 언어, 풍물, 공간들이 조금씩 그려지더라고요. 그 시대의 소녀들에 대한 기사도 꽤 있어서 참고가 많이 됐어요. 수인이가 수예로 상 타는 내용이 책에 나오잖아요. 실제로 그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있던 이야기예요. ‘오엽주 미용실’, ‘시간 기념일’, ‘양조장 탈취 사건’도 기사에서 발견했고요. 그렇게 1년 이상 밤낮으로 기사를 봤어요. 나중엔 그 시대를 살아본 착각이 일 정도였는데, 그런 기분이 들고 나서야 글이 써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책의 배경이 되는 곳들을 혼자서 탐색하기도 했어요. 집필 전부터 여러 지역으로 답사 다니는 걸 좋아했고, 그중에는 경기대 건축과 안창모 교수님이 진행하는 서울 답사 프로그램도 있었어요. 거기서 들은 풍월을 기반 삼아 서울역부터 남대문, 시청, 광화문, 경복궁, 서촌, 인왕산까지 많이도 걸어 다녔네요. [1] Q.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쓰되 문학적 재미를 함께 고려해야 했잖아요. 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한 게 있나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자료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라는 범죄의 토대가 되는 그 시기에 동아시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앎’을 단단한 기반으로 삼은 뒤 상상력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Q. 가수를 꿈꾸는 당찬 여학생으로 묘사된 주인공 ‘현수인’ 캐릭터는 길원옥 할머니를 모티브 삼아 만드셨다고요. 평양 출신이고 기생학교에 다니셨던 게 모티브가 됐어요. 2010년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전화를 드렸더니 충정로 쉼터에 있는 할머니를 연결해주셨어요. 대화를 나누다 할머니가 ‘가막소에 아버지가 잡혀갔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에피소드가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평양 출신에 이런저런 이유로 경성으로 오게 되는 소녀’라는 큰 설정을 잡을 수 있었죠. 당시 기생학교는 노래 잘하고 흥 많고 진취적인 소녀들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 거예요. 요즘으로 치면 재능 있는 엔터테이너가 되는 거죠. 그런데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기생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생겼잖아요.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길게 말씀을 안 하시더라고요. 소설을 통해 기생에 대한 편견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또 증언집을 보면 할머니들 중에 ‘동네에서 노래 한 자락 했다’는 분들이 꽤 계세요. 발랄하고 흥 많고 똑똑한 캐릭터를 통해 피해자 할머니들의 소녀 시절과 요즘 청소년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Q. ‘수인’이 시간 여행을 함으로써 직접 운명을 바꾸는 이야기도 좋았을 텐데, 시간 여행의 주체를 중학생 ‘햇귀’로 삼은 이유가 있나요? 중요한 건 ‘현재’의 우리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이기 때문이에요. 일본군 강제 위안부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는데, 이게 결국 폭력이잖아요. 그러다 청소년 폭력이 눈에 들어왔죠. 1990년대 중반, 서초구에서 고등학교 남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어요. 그 아버지를 인터뷰해 기사를 썼고, 너무 마음이 아픈 동시에 제게 어떤 물음표가 남았던 기억이 나요. 시간이 흘러 2011년 대구 중학생 자살 소식을 듣고 생각했어요. 왜 학생들의 자살은 끊이지 않고 청소년 폭력은 더 심해지는 걸까. 혹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어떤 식으로든 일조한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들었어요.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역할을 문학으로써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이 땅의 청소년들이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용감하게 자신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책에 녹이고 싶었어요. Q. 덕분에 수인의 미래는 바뀌지만 하루코가 비극을 맞아요. 안타까운 결말입니다. 하루코는 자신을 보호해주는 울타리를 벗어나 알을 깨고 나간 거예요. 죽음을 택했지만 한편으로는 성장했다고 할 수 있죠. 자신이 몰랐던 진실을 알게 됐으니까요. 그리고 하루코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떤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됐는지 돌이켜보게 만들고 싶었어요.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무고한 이가 치르게 된 희생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어요.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새로운 세대를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야 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룬 문학작품은 그리 많지 않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고통스럽고 또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에 어떤 경계선을 넘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학교에 강연을 나갈 때면 학생들에게 일본군 강제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문학을 여러분 중 누군가 써주길 바란다,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하곤 해요. Q. 국내에선 ‘청소년 문학’ 하면 ‘학생들이 읽는 책’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어요. 현재 청소년 소설의 위상과 역할은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세요? 청소년 소설을 검색해보면 학부모들이 감상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청소년 문학이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다’는 평도 있고요. 청소년 문학의 재미를 아는 분들이 늘어나면 저변이 확대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단어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림책, 동화책 하면 어린이만 보는 거라고 많이들 생각하지만, 글을 안다면 모든 연령이 읽을 수 있잖아요. 청소년 문학이라는 장르에 붙어 있는 연령도 독서 시작 연령을 말하는 것이지, 끝 연령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Q. 일본군‘위안부’ 하면 국가적으로 얽힌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길 바라시는지요. 국제사회에 일본군 강제 위안부 문제가 한국과 일본의 감정싸움인 것처럼 비춰질 때가 많은데, 이건 명백히 일본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행한 범죄에 관한 이야기예요. 처벌받지 않은 범죄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건 국제사회 시민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 부분을 항상 기억하면 좋겠어요. Q. 현재 진행 또는 계획 중인 작업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려요.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쓰고 있어요. 또 하나는 장르물인데, 단편으로 썼던 걸 장편으로 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자료조사를 하며 쓰다 보니 시간이 걸리고 있는데, 이른 시일 내에 소식 전해드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Credit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김은진 작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6월 17일 목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403-13 카페 콜린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각주 ^ 본문 중 ‘일본군 강제 위안부’라고 표기된 부분은, 일본군‘위안부’를 지창하는 작가 개인의 고유한 표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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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당신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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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라는 말에는 따옴표가 붙어 있다. 국가적 성 동원을 미화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은폐하는 완곡어법에 유보의 뜻을 표명하기 위함이다. ‘위안부’의 초기 용례는 1938년 일본 경찰과 육군성 공식 문서에서 발견된다.[1] 그것은 전쟁이 사무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날마다 피해를 상상하지 않은 채 명명할 수 있도록”[2] 정화된 언어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남자를 위로하는 존재’라는 성역할 고정관념 안에서, 여성의 성을 군수물자로 보급한 일제 공권력과 전시 행정의 폭력성을 비가시화한다. 피해가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생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여성운동이 만들어낸 “피해자의 치욕에서 가해자의 범죄로”의 성폭력 패러다임 변화 덕분이었다. 전통적으로 전시 강간은 상례로 묵인되면서 피해 여성의 수치로 여겨져 법적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연방 붕괴와 내전 당시 발생한 집단강간이 전시 성범죄 문제의 전환점이 되었다. 전시 강간을 우발적이고 개인적인 ‘사고’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수행된 전쟁 범죄로 파악하는 ‘성노예’ 금지 국제 사법 규정이 출현한 것이다.[3] 때맞춰 1992년 유엔 인권위원회 실무그룹에서 “위안부’는 성노예”라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 차별방지·소수자보호 소위원회가 1993년 8월 전시 노예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으로 공론화되었다.[4] 한국의 정대협과 일본 및 아시아의 시민단체들은 이후 유엔과 유럽 및 미국 의회, 민간법정들에서 전시 성폭력 및 성노예 프레임을 가지고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2020년 5월 25일, 이용수 님은 기자회견에서 피해자를 성노예로 지칭하는 것에 반감을 표시했다. “미국 사람 들으라고, 미국이 겁내라고” 하는 더러운 소리[5]라는 것이다.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강박적으로 유보의 뜻을 담아 따옴표 쳐진 위안부라는 기호에서, 따옴표를 뗀다면, 괄호 안에 우리는 어떤 이름을 적어야겠는가이다. 도대체 한국 사회는 지난 30년의, 아니 1945년부터 기산한다면 77년의 ‘위안부’ 역사로부터 무엇을 알게 된 것일까? 정부 등록 피해자 240명 가운데 살아 있는 생존자의 숫자를 헤아리는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마치 형사소송에서 당사자가 사망하면 소송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피해자들이 사라지면 소멸된다고 여기는 그것이 무엇일까. 나아가, ‘위안부’ 제도는 실증되고 인정한 ‘사실’인데, 왜 ‘위안부’는 ‘문제’로 남아 있을까. 여기에서 문제화,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일본군‘위안부’ 생존자 정부 등록과 피해구술 채록은 역사학자뿐 아니라 여성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의 개입과 활동으로 시작되고 유지되었다. 그런데 항상 최종 진실의 판단을 ‘편협한 의미의 실증’에게 맡기려는 반복되는 시대착오적 습관은 태만하고 단순하다. 진상의 규명이 사실 그 자체가 말을 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이해관계와 입장들로 구성된다면, 식민지배, 전쟁, 권위주의 국가폭력 과거사에 대한 증언이 특정 맥락에서 가지는 수행성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홀로코스트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나치 범죄의 가장 절실한 증인은 절멸 수용소에서 죽은 동료들이라고 역설했다. 시대에 대한 완벽한 증인은 없다. ‘위안부’ 생존자들 또한 전시 성동원과 ‘죽음정치’의 궁극적 증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 몫까지 함께, 자신이 누구인지, 전쟁 때 어떤 일을 겪었는지 ‘커밍 아웃’했다. 그리고 이제 그 분들도 따옴표 쳐진 ‘위안부’라는 호칭을 가진 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증언 이후의 삶보다는 과거의 피해에 생존자들을 정박시키는 ‘피해자’라는 이름 또한 ‘위안부’라는 따옴표 쳐진 기표의 질적 대체물이 될 수 없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사회적으로, 국제적으로 인정하고 어떤 이름을 붙이든, 그들이 겪은 사건의 폭력성은 되돌릴 길이 없다. 오카 마리는 “‘서발턴’이란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이 담론적 폭력을 당하지 않고서는 표상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부여된 이름”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을 묻는 일보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부를 때 교섭되고 있는 것을 묻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력하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속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현재의 무력함을 극복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6] 그러므로 지금, ‘한 명’의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부 등록 생존자 숫자를 세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240명과 20만 명 사이에서 ‘가라앉은 자’들의 이름을 불러내야 한다. 그리고 지금도 가라앉고 있는 자들을 ‘구조(救助)’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대목에서 “생존자가 말하기를 통해 커밍 아웃을 했다면, 청자들은 그 증언을 통해 앎을 획득해 가는 비커밍 아웃할 책임이 있”[7]다고 한 도미야마 이치로의 논의를 상기하게 된다. 구조화된 성폭력의 피해자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말할 때, 그 앞에는 반드시 마주한 다른 얼굴들이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 그들에게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 밝힐 차례다. 각주 ^ 박정애, “총동원체제기 식민지 조선에서 정신대와 위안부 개념의 착종 연구: 정신대의 역사적 개념 변천을 중심으로”, 아시아여성연구 59(2), 2020, 63쪽. ^ 제임스 도즈 지음, 변진경 옮김, 『악한 사람들: 중일전쟁 전범들을 인터뷰하다』 (파주: 오월의봄, 2020), 115쪽. ^ 크리스틴 친킨, “대한민국 법원으로 간 ‘위안부’ 생존자들, 마지막 도전?”,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 자료집, 30-31쪽. ^ 세계일보 2014.8.29. https://www.segye.com/newsView/20140828004633 2022.6.10. 검색완료. ^ 연합뉴스 2020.5.25. https://www.yna.co.kr/view/AKR20200525115300053 2022.6.10. 검색완료. ^ 오카 마리 지음,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서울: 현암사, 2016), 28-29, 254쪽. ^ 권김현영, “침묵은 말이 되었지만 말은 의미가 되었을까?”, 『전쟁, 여성, 폭력: 일본군 ‘위안부’를 트랜스내셔널하게 기억하기』(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기억의 연대 e-시리즈, 2019), 70쪽에서 인용. 같은 곳에 실려 있는 도미야마 이치로, “증언 ‘이후’: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이미 타인의 일이 아니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