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검색
-
- 2024년 논평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동원
-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한 지 30여 년, 그렇다면 가해자인 일본 군인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경험하고 기억했을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최근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I, II -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이하 선집) 시리즈를 발간했다. 2015년부터 2017년 사이 중국의 당안관은 일본군 전범의 진술서 842건을 120권으로 엮은 자료집 『중앙당안관 소장 중국 침략 일본전범 자필진술서』를 발간했는데, 선집은 그중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중국 당안관이 발간한 일본 전범의 진술서는 총 6만 3,000쪽에 달할 만큼 방대한 분량으로, 이것이 공개되자 언론에 보도되고 학계의 관심과 연구로 이어지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연구소에서는 그중 사단장, 정보장교 등으로 전쟁의 명령자급에 있던 이들의 진술을 선별하여 1편으로 묶었고, II편에서는 헌병, 영사관 경찰, 철로 경비병 등 전선에서 직접적으로 명령을 집행한 이들의 진술을 담았다. 중국 '전범 개조정책'이 낳은 특별한 포로 진술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은 포로로 잡힌 일본군을 푸순, 타이위안 등지에 위치한 중국 전범 수용소에 수감하였다. 김효순의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일본인 전범을 개조한 푸순의 기적』에 따르면 중국은 당시 유례없는 '전범 개조정책'을 실행하였다. 연합군의 전범재판이 처벌에 치중하였다면, 공산당이 이끌었던 중국 정부는 처벌보다는 인간의 개조에 강조점을 두고 전범을 관리하였다. 항복한 적의 다수는 개조할 수 있다는 마오쩌둥의 사상에 근거를 둔 이 정책은 '전범의 인격을 존중하라' '절대로 구타하거나 욕하지 마라' '일본인의 습관을 존중하라'와 같은 명령으로 구체화 되었고, 실제로 전범관리소 직원보다 양호한 식사와 인도적인 수감생활을 경험하게 하여 일본군 전범들로부터 감화와 죄의 자각을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진다. 소위 '인죄탄백(認罪坦白)' 운동으로 알려진 이 과정은 숨김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는 뜻인데, 이를 통해 점점 '감화'된 일본군 포로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반성하며 자필 진술서를 작성하였다. 일반적으로 포로를 심문하는 담당자가 기록을 남기는 것과 달리 일본 전범들이 자필로 범죄행위를 세세하게 기술한 진술서가 나온 것에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다. 이를 토대로 1956년 중국 정부는 특별 군사 법정을 열고 전범 재판을 진행하였고,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전범 대부분은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고, 45명만 기소돼 금고 8년에서 20년의 형을 받았다. 사형수나 무기형은 한 명도 없었다. 석방된 포로들은 본국 귀환을 보장받았고, 1956년부터 시작된 전범의 본국으로의 귀환은 1964년 마지막 전범 3명이 복역을 마치면서 마무리됐다. 가해자가 말하는 '위안부' 동원 자신들이 행한 범죄를 낱낱이 고백한 이 진술서들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된 진술들이다. 위안소의 설치 및 운영, '위안부' 동원과정에 관한 내용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예컨대, 1편에 실린 일본군 제117 사단장 히라쿠 스즈키의 진술을 보면,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동원 과정에 일본군이 체계적으로 관여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나는 중국 차오현에서 위안소를 설치할 것을 부관 호리오 소좌에게 명령하고 이것을 설치하기 위해서 중국 인민 및 조선 인민 부녀자 20명을 유괴해서 위안부로 삼았습니다. 중국과 조선 인민을 유괴하여 이른바 위안부로 삼았는데 이 부녀자의 수는 약 60명이었습니다.” 아직도 일본의 전쟁 범죄와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거짓이라고 하는 일본 우익과 역사 부정론자들이 존재하지만, 전쟁을 수행한 군인들이 작성한 이 진술서를 통해서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동안 피해자의 증언이나 일본군, 일본 정부가 작성한 공문서 자료는 많이 공개되었지만 이처럼 일본군인 개인의 시점에서 작성된 가해 경험이 공개된 경우는 드물었다는 점에서 이 전범진술서의 사료로서의 의미는 적지 않다. 귀환한 일본군 전범들의 반전평화운동 죄를 인정하고 고백한 전범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흥미롭게도 본국으로 복귀한 전범들은 이후 일본에서 남은 인생을 반전평화운동에 매진하며 보냈다. 이들은 '침략 전쟁은 절대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발표하고 '중국귀환자연락회'(이하 중귀련)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생계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죄를 고백한 책자를 발간하는 한편, 민간인 학살, 약탈과 방화, 생체해부, 전시 성폭행 등 그들이 행했던 전쟁 범죄를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강연 활동도 펼쳤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 사실을 밝힌 2명의 증인도 중귀련 회원이었다. 일본 사회의 노골적인 냉대에도 꿋꿋하게 세계 평화에 대한 발언을 지속한 중귀련은 회원들이 고령으로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서 2002년 공식 해체됐다. 그러나 그 활동의 의미를 숭고히 여긴 일본 시민단체 활동가와 학자, 언론인, 일반 시민들은 이후 '푸순의 기적을 이어가는 모임'을 만들어 중귀련의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드러나는 범죄의 잔학성에 다시 한번 놀라면서도 죄의 고백 이후 반전평화를 위해 헌신한 일본군 전범들의 삶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평화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지 새삼 느끼게 한다. 연구소에서 발간한 선집에는 전범 진술서 번역문과 함께 진술서의 요지, 자필진술서 작성의 역사적 배경과 진술자들의 개인 이력 등을 담은 전문가의 해제, 그리고 진술서 원본 자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된 새로운 자료로서 이 선집은 학계 전문가나 일선 학교의 교사, 관심 있는 일반 대중에게 전시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과 여성인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 2019년 에세이 김학순을 추억하다 1 - 김학순 할머니와 나
-
[기림의 날 특집] 김학순을 추억하다 <논평> 소현숙 -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에세이> 1. 이희자 - 김학순 할머니와 나 2. 나카가와 히사코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3. 야스다 치세 - 우리들이 죽고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4. 노부카와 미츠코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김학순 할머니와 나 김학순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신지 22년째, 또다시 광복절을 앞두고 있다. 할머니는 1997년 12월 16일 새벽, 74세 나이에 한 많은 삶을 영원히 마감하셨다. 이승과 이별하는 순간에도 할머니는 아마 한 맺힌 억울함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 떠나셨을 것이다. 할머니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일본 정부의 사죄가 지금도 그대로인데 저승에서나마 마음 편하게 계시겠는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일본 정부는 변해도 아주 나쁘게 변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보다 더 많이 우경화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2015년 12월 28일 그 사건이 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라는 발표가 나온 것을 보셨다면 할머니는 얼마나 분노하셨을까. '일본 정부는 우리들이 다 죽기 바라고 있다'고 말씀하시던 분노에 찬 모습, 그 쟁쟁한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를 때리 듯 생생하게 느껴지곤 한다. 할머니가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많은 젊은이들과 시민에게 일본군'위안부'의 참혹한 실상을 알려주며 일본의 사죄를 이끌어 내기 위한 호소를 쉼 없이 하셨을 것이다.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신 김학순 할머니가 생각나면 나는 천안 망향의 동산을 찾곤 한다. 거기에 황금주 할머니와 함께 잠들어 계시는 김학순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김학순 할머니는 살아 생전에 '나 죽어도 무덤 찾아 줄 핏줄 하나 없어 쓸쓸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때 우리 강제동원 유족들은 약속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떠나시면 저희가 딸 대신 아들 대신 매년 찾아뵙겠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며 우리 유족들은 해마다 12월 16일 망향의 동산을 찾는다. 가끔 일본 시민들도 함께 김학순 할머니 묘소를 참배하며 눈물로 사죄의 절을 올리기도 한다. 올해는 더욱 김학순 할머니가 사무치게 그립다. 여전히 일본이라는 나라가, 일본의 최고위층의 정치인들이 식민지배로 저지른 범죄와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우리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있는 현실이 자꾸만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김학순 할머니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여느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1991년 8월 14일 방송을 통해서였다. 이날 할머니는 자신이 과거 일본군'위안부' 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방송을 보면서 나는 할머니가 평생 이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우리 어머니나 고모, 이모와 같은 연배셨던 할머니. 나는 내 어머니가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쳐 살아내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철들고 깨달았지만 내 어머니 보다 더한 고통을 겪은 여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정신대'로 끌려갈까봐 우리 고모도 어린 나이에 시집가셨다고 들었다. 우리 어머니나 고모도, 우리 이모도 그 때 처녀들은 누구나 다 겪을지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1991년 내가 몸담고 있던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일본정부를 상대로 준비중이던 소송(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사건)에 합류하셨다.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할머니를 만났다. 처음 만난 김학순 할머니는 자그마한 몸집에도 강단 있는 모습이었다. 아무에게나 곁을 허락하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다.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고 심부름도 시키지 않으셨다. 할 수 있으면 언제나 혼자 다 알아서 하시는 분이었다. 아마도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이 만들어낸 모습인 것 같았다. 김학순 할머니는 당시에 동사무소에서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는 쌀과 지원금 3만원, 취로사업에서 번 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대문교회에서 우연히 원폭피해자 이맹희 할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김학순 할머니는 이맹희 할머니가 일본에서 피폭을 당하고 어렵게 살아 온 사연을 듣고서 자신의 과거도 털어놓게 되었다. 이맹희 할머니는 여성단체에 얘기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1990년대 초부터 일본 정부의 관료라는 작자들이 '위안부'는 없었다며 여러 차례 망언을 해댔다. 뉴스에서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김학순 할머니는 엄연히 '위안부'였던 자신이 살아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나 싶어 분노했다. 결국 그녀는 여성단체에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아마 자신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그런 결심은 평생 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증언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한 활동에 김학순 할머니는 적극 나섰다.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에 많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뒤이어 일본의 전쟁 범죄를 폭로하고 나섰다. 그해 6월 김학순 할머니의 행동에 용기를 얻는 것은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만이 아니었다. 일본이 점령한 곳에는 여지없이 위안소가 세워졌기에, 북한, 중국, 대만,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네덜란드 피해자 포함) 등 각지에 퍼져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히고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 보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일본 사회도 큰 충격을 받았다. 학계는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뜻있는 시민들은 지원단체를 만들어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과 진상규명을 돕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하자 일본 정부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1993년 7월 일본정부는 정부대표파견단을 한국에 보내 5일 동안 김학순 할머니 등 '위안부' 할머니 16명의 증언을 들었다. 그리고 그해 8월 일본정부는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는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 일본군이 관여하였다고 인정했다. 또 일본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하며 그 '마음을 표현할 방식'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1993년 11월 호소카와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경주에 왔을 때 강제징병·강제징용 피해자·유족들이 경주에 내려가 회담장 앞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 이날 김학순 할머니도 몇몇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시위에 참석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우리는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사과만 반복할 뿐, 제대로 책임질 생각도 제대로 보상할 생각도 없는 일본정부를 규탄하는 시위였다.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정부의 사실 인정, 공식 사죄, 국가배상과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밝히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위안부'문제가 법적으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되었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또 피해 사실은 인정하지만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이라는 민간단체를 통해 할 것이며, 이 돈을 받는 피해자들에게만 총리 명의의 사과 편지를 보내겠다는 '조건부 사과' 원칙을 밝혔다.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크게 분노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평생에 잊지 못할 상처를 안긴 일본이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한다면서 국가의 자존심이나 명분 따위를 지키기 위해 이것저것 조건을 다는 모습이 또다시 그들을 분노케 만들었던 것이다.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 법정에 소송을 낸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며 "민간인에게 기금을 모아 보상을 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구걸하니까 마지못해 도와준다는 식이어서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국민기금 측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개별적으로 찾아다니며 설득에 나섰지만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대부분 이를 또 하나의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기금의 수령을 거부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1994년 6월 김학순 할머니는 도쿄지방법원에 출석하여 일본정부 측과의 대질신문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생생히 고발했다. 이 자리에서 김학순 할머니는 "부끄러운 것은 '위안부'였던 내가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를 제대로 인정하지도 사죄하지도 않는 일본정부"라고 비판했다. 할머니는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일본정부의 사실 인정과 공식적인 사죄"라고 강조했다. 할머니는 법원 출석 후 각종 행사에 참여하여 증언하고, 일본 국회 앞에서 피해자·유족들과 함께 농성을 벌였다. 그 후에도 김학순 할머니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에 대한 소송에 참여하고, 각종 집회에 나가 증언하고, 국내외 언론과 인터뷰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할머니는 여기저기에서 초청을 받을 때마다 마다하지 않고 참석을 하곤 하셨다. 증언을 하고 나면 보통 사례비로 2~30만원을 받으셨는데, 할머니는 5만원씩 봉투에 담아 주변의 '위안부' 할머니에게 나눠주기도 하셨다. 누가 돈이라도 조금 드리고 가면 혼자 쓰지 않고 할머니들을 불러 함께 식사도 하셨다. 특히 김학순 할머니가 자주 만난 할머니는 황금주, 김상희, 강순애 할머니 등이었다. 김학순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셨던 분은 나눔의 집에 계셨던 강덕경 할머니였다. 강덕경 할머니는 김학순 할머니가 나눔의 집으로 오시길 바랐는데, 김학순 할머니는 가고 싶어 하시면서도 서울의 지인들이나 동대문교회의 지인들, 신앙 문제 등의 이유로 가지 못하셨다. 하지만 나눔의 집에 가지 못하신 또 다른 이유는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공동생활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로 인해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을 상기하게 되는 일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덕경 할머니는 1997년 2월 세상을 뜨셨다. 마지막 중환자실에 계실 때 김학순 할머니가 아픈 몸을 이끌고 병문안을 다녀오신 것이 두 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많이 우셨고, 많이 괴로워 하셨다. 장례식장까지 다녀오신 후 할머니도 지병이 악화되어 이화여대부속 동대문병원과 목동병원을 오가는 중환자 신세가 되셨고,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김학순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하게 싸웠다. 할머니가 가는 길은 언제나 난생 처음 가는 길이었다. 그만큼 두렵고 힘든 길이었음이 분명하지만 할머니는 묵묵히 원래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었던 것처럼 그 길을 걸어 나갔다. 할머니의 옆에서 난 많은 것을 배웠다.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나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유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어떻게 싸워야할지를 알았다. 30년을 싸웠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다. 2015년 12월 한국의 박근혜 정부와 일본의 아베 정부는 '위안부'문제에 대해 양국이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은 무시한 채 적당히 덮고 적당히 얼버무리는 기만적인 합의였다. '일본 정부가 갖은 망언과 망발로 사실을 감추려 애를 쓰지만 진실은 숨길 수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던 김학순 할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과연 한일 양국의 '12.28합의'를 보고 어떤 심정이 어떠셨을까. 그동안 세상은 많이 변해왔지만 어느 순간 또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과거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견고한 세상에 냈던 조그만 파문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꿔왔는지 알고 있다. 진실의 힘은 강하다. 그것이 이 세상을 바꿀 우리의 유일한 무기일 것이다.
-
- 2022년 논평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의 틀로 사유한다는 것
-
1. ‘여성됨’의 문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여성인권의 문제”라는 말은 이제 어지간히 분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여성혐오 세력, 안티페미니스트 세력이 활개를 치고 있고,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이를 제재하기는커녕 혐오 세력의 눈치만 보는 상황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여성인권의 문제”라는 말은 재천명되어야 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이 글을 통해 ‘미투’(MeToo·성폭력 고발 운동) 시대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의 틀로 사유한다는 의미를 점검하고자 한다. 여성인권(women’s human rights)이라는 가치가 국제사회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근래의 일이다. 국제사회는 냉전 체제의 종식 이후 사회권과 자유권으로 이원화되어 체제 경쟁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인권을 보편적 이념으로 제시하고자 했고, 이때 인종, 민족, 종교 등의 이슈와 함께 여성인권이라는 범주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는 1993년 비엔나에서 열린 제2차 유엔세계인권회의와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세계여성회의에서 ‘여성인권’이 구체적으로 명문화되었다. 여성인권과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문장은 아마도 “여권은 인권이다(Women’s rights are human rights)”일 것이다. 1995년 베이징 여성회의에서 당시 미국의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인권은 여권이고 여권은 인권이다”라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계속되는 전시 성폭력, 지참금 살인, 여아살해 등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의 사례를 예로 들어 ‘여성으로서의 권리’가 보편적 인권과 별도로 논의될 수 없음을 설파하였다. ‘인권=여성인권’임에도 여성인권이라는 동어반복이 필요한 이유는 ‘여성됨’ 그 자체로 경험하게 되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차별과 폭력이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 성매매, 아내구타가 대표적이다. 성폭력, 성매매, 아내구타는 여성 개인에 대한 폭력을 넘어 여성 집단을 예속화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물론 개인 여성과 여성 억압적 제도 사이에는 여성 스스로가 동의하는 모양새를 취하도록 만드는 다양한 문화적, 절차적 개입이 있는 경우가 많다. ‘여성됨’은 성역할 규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극단에 전시 ‘위안소’ 제도가 있다. 그러므로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의 문제로 사유한다는 것은 (‘남성됨’과 극단으로 상반되는) ‘여성됨’에 대한 구조적이고 비판적인 인식을 견지한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의 증언이 있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1년이다. 이러한 증언은 1980년대 말, 한국에서 정치적 수준의 민주화가 달성되는 과정에서 여성운동 단체가 성장하고 활동이 가시화되었던 시대적 배경 속에 자리한다. 특히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경찰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 사건이 교도소 내 단식투쟁을 동반한 피해자의 적극적인 공론화를 통해 세상에 드러남으로써 성폭력에 대한 민중의 비판적 문제의식이 만들어질 수 있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쳐서야 “남편도 자식도 모두 죽고 없는 지금 눌러온 한을 어딘가에 털어놓고 싶다”는 김학순의 바람이 실현될 수 있었다.[1] 냉전 종식 이후에야 국제사회에서 보편적 인권으로서의 여성인권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될 수 있었듯이, 한국에서도 1990년대가 되어서야 김학순의 증언이 청취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수 있었다. 과거 여러 지면을 통해 드러난 김학순 이전의 ‘위안부’ 피해자가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김학순의 증언을 ‘최초’로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혜인은 이를 두고 “당시 한국 사회는 이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말했다.[2] 어쩌면 당시 청취자들은 이들의 호소를 인식할 만한 인권의 프레임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학순의 증언은 ‘여성됨’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여성인권이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청취된 최초의 피해 증언이었다. 보편적 인권으로서의 여성인권이라는 국제사회적 프레임 역시 제3세계를 비롯한 전 세계 여성 개인들의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폭력’을 청취하면서 만들어졌다. 동시대라는 지평에 놓여있긴 해도 엄밀히 따지면 시기적으로 김학순의 증언은 비엔나 인권회의를 앞선다. 특히 1995년 베이징 여성회의에서 르완다와 보스니아의 내전 당시 발생한 전시 강간, 무력 분쟁에서의 성폭력 피해 문제가 주요한 관심사로 대두되었다.[3] 그밖에 1세계 백인 중산층 여성 중심의 글로벌 페미니즘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과 도전을 통해 여성인권의 보편성은 끝없이 의심되고 도전받으며 변화를 거듭하는 과정에 있다. 인권의 보편성과 상대성이라는 쟁점, 인권의 담지자로서의 여성 개인과 집단정치적 개념으로서의 여성인권이라는 쟁점은 이처럼 서로를 견인하며 종합되었다. 자유권, 사회권 외의 연대권으로 분류되곤 하는 3세대 인권이라는 말이 대표하듯이 인권 패러다임은 항상 진화 중이다. 그렇다면 여성인권 이슈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에서 서로를 어떤 방향으로 견인해야 할까? 2. 여성해방의 문제 일찍이 “서구의 시선 아래” 제3세계 여성들의 현실을 단일한 방식으로 분석하곤 하는 유럽중심 여성주의를 비판했던 찬드라 모한티는 전 세계 여성들이 반자본주의 실천에 개입해야 한다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4] 많은 전문가들 역시 “인권이 전문적 권리체계로만 치달으면 거시적 사회변동과 분리된 미시적 개입 테크닉으로 왜소화”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5] 진화의 과정 중에 있는 여성인권의 문제의식 역시 협소한 권리 증진의 실험실과 재판장을 넘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확산과 연동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마리아 미즈와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이 쓴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꿈지모 옮김, 동연, 2013)라는 책에 함께 생각해볼 만한 일화가 등장한다. 이 책의 부제는 “힐러리에게 암소를”이다. 베이징 여성회의 몇 달 전 힐러리는 그라민 은행의 여성 전용 소액대출(microcredit) 사업을 통한 여성들의 자립 성공 사례를 확인하고자 방글라데시를 방문했다. 방글라데시의 농촌마을에서 여성들과 회견을 가진 힐러리는 농촌여성들로부터 “자매님, 당신은 암소가 있어요?”라는 질문을 받았고, 암소가 없다고 답한 힐러리에게 여성들은 “불쌍한 힐러리! 그녀는 소도 없고, 자신의 소득도 없고, 딸도 하나밖에 없다네”라며 동정했다고 한다.[6] 이러한 사례는 방글라데시 여성들이 단순히 원조 대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발전과정에 적극 참여하며 자급의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보여주기에 더없이 훈훈한 일화다. 하지만 암소를 소유한 방글라데시 여성과 암소가 없는 힐러리라는 대결은 어쩐지 범박하다. 각각 사회권과 자유권을 상징하는 듯한 모양새이다. 우리는 이 경제체제가 둘을 대결시키고 취하는 이득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높은 이자 수익을 통해 달성한 그라민 은행의 성공은 누구로부터의 수익이며 어디로 재투자 되었는가? 채무자 여성의 수를 늘리는 발전 전략이 왜 가난한 여성들의 해방 전략으로 제시되고 있는가? 힐러리가 베이징 여성회의에서 언급한 여성에 대한 폭력의 사례들은 여성 억압적 문화에서만 기인한 문제인가? 결국 힐러리와 방글라데시 여성의 대결은 자유권과 자유권의 경합에 머물고 있다. 김학순 할머니는 당시에 동사무소에서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는 쌀과 지원금 3만원, 취로사업에서 번 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대문교회에서 우연히 원폭피해자 이맹희 할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김학순 할머니는 이맹희 할머니가 일본에서 피폭을 당하고 어렵게 살아 온 사연을 듣고서 자신의 과거도 털어놓게 되었다. 이맹희 할머니는 여성단체에 얘기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중략)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증언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7]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의 틀로 사유한다고 했을 때 이 장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명의 식민 지배의 피해자는 왜 가난한 여성 노인의 형상으로 등장한 것일까? 폭력의 제도화와 여성 배제의 경로 문제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명예대표를 지낸 이효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전개과정”이라는 글에서 정대협 활동 초기 생존자 지원 활동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했다.[8] 위로행사, 생존자 복지활동, 일본군‘위안부’ 생존자 생활대책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의 활동들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경제적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무시하고 배제했던 이들을 경제적으로 보살피는 활동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을 통해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차관 2억 달러를 지급받았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경제 성장이 촉진되었으나, 국제사회적 여성인권에 대한 명분도 제기되지 않았던 시기 이 돈이 ‘위안부’ 피해자를 대상으로 지급될 리 만무하다. 이후 피해에 대한 배상이 아닌, 한국 사회의 민주화 이후 복지비용 명목으로 ‘위안부’ 피해자에게 생계비와 임대주택 입주권이 지급되고 의료혜택이 주어졌다. 이러한 이슈는 여성인권의 시각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고민하도록 만든다. 김학순의 증언은 경제 발전과정과 사회 구성에서 배제된 경로와 위치성을 드러내는 증언이기도 하다. 피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가해자와 사회는 자신들의 불인정을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를 통해 현시한다. 우리는 성폭력 ‘사건’ 이후, 혹은 ‘미투’ 이후 피해자에 대한 따돌림, 해고, 승진 누락, 좌천의 많은 사례를 목격했다. 법정에서의 승리가 여성들의 사회적 승리로 이어지지도 못했다.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 누가 피해를 증언하며 피해자가 되길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간 여성인권 개념을 통해 피억압자, 피해자로서의 여성이 국내, 국제사회에 자신의 피해를 드러낼 수 있었다면, 이제 여성인권 개념을 통한 사회적 재편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인권 의 가치를 고려한 배상 문제는 사회의 재분배 전략과 함께 가야 한다. 피해자의 말을 청취하고자 하는 여성주의의 윤리는 현재 우리가 도달한 성장의 불법성과 폭력성을 인지하고 배제된 자들 중심의 사회적 재편을 모색하는 정치학의 같은 말일지 모른다. 각주 ^ 조현욱, “나는 정신대” 처음 밝힌 김학순할머니, 중앙일보, 1991.8.15. ^ 한혜인, 우리가 잊은 할머니들...국내 첫 커밍아웃 이남님, 타이에서 가족 찾은 노수복, 한겨레, 2015.8.7. ^ 베티 리어든, 『성차별주의는 전쟁을 불러온다』, 황미요조 옮김, 나무연필, 2020, 223쪽. ^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경계없는 페미니즘』, 문현아 옮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5. ^ 조효제, 비엔나 인권체제 25년, 한겨레, 2018.6.5. ^ 마리아 미즈, 베로니카 벤홀트-톰젠,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꿈지모 옮김, 동연출판사, 2013. ^ 이희자, 김학순을 추억하다 1: 김학순 할머니와 나,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 https://kyeol.kr/ko/node/179 ^ 이효재,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전개과정, 『한국 여성인권운동사』,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엮음, 한울아카데미, 1999, 218-223쪽.
-
- 2019년 논평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
[기림의 날 특집] 김학순을 추억하다 <논평> 소현숙 -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에세이> 1. 이희자 - 김학순 할머니와 나 2. 나카가와 히사코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3. 야스다 치세 - 우리들이 죽고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4. 노부카와 미츠코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신문에 나고 뉴스에 나오는 걸 보고 내가 결심을 단단하게 했어요. 아니다. 이거는 바로 잡아야 한다.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오. 그래서 결국 나오게 되었소. 누가 나오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정신대 위안부로 고통 받았던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일본은 종군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 하니 말이나 됩니까.” 1991년 8월 14일 오후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에서 개최된 기자회견에서 김학순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던 피해자임을 폭로했다. 아직도 “일장기만 보면 억울하고 가슴이 울렁 울렁하다”는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자신이 당한 고통을 만천하에 알렸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그때의 아픈 기억을 얘기할 때면 스스로 진정하느라 한참씩 말을 멈추곤 하던 김학순. 그러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스스로 나서 그동안 파렴치하게 발뺌해 온 일본 정부와 이 문제를 수수방관해 온 한국 정부를 준엄히 비판한 김학순. 그녀의 이 용기 있는 증언으로 그때까지 뜬소문에 불과했던 일본군‘위안부’는 비로소 실체를 가진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반세기 넘게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위안부’ 피해를 공개적으로 증언하고 일본의 사실인정과 공식사죄를 주장한 김학순. 그녀는 누구인가? 증언에 따르면, 김학순은 1924년 중국 지린에서 출생했다. 식민지 치하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짐을 싸 만주로 떠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태어난 지 백일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활이 막막해진 어머니는 두 살 된 어린 학순을 데리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친정에도 의탁할 수 없었던 학순의 어머니는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면서 어려운 삶을 이어갔다. 학순이 열네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재혼했지만, 의붓아버지와의 동거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학순은 마음을 잡지 못하고 겉돌았고 어머니와 관계가 소원해져 버렸다. 그러던 차에 기생집의 수양딸로 팔려간 김학순은 평양의 기생 권번에서 2년 정도 춤과 판소리, 시조 등을 배웠다. 권번을 졸업하고 17세가 된 김학순은 기생 영업을 위해 1941년 양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떠난 지 일주일 만에 도착한 베이징에서 김학순은 일본 군인들에 의해 군용트럭에 강제로 실려 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밤새워 달려 도착한 철벽진이라는 곳에서 그녀는 일본군 중위에게 강간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악몽 같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몇 차례 도망쳐도 봤지만, 그때마다 붙잡혀 모진 구타를 당해야 했다. 4개월 남짓 지났을까 군인들이 전투 나간 어느 날 빈틈을 타고 불쑥 찾아온 조선인 은전장수 덕분에 그녀는 그 지긋지긋한 위안소를 기적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 김학순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이 조선인 남성과 함께 살며 중국을 떠돌다 1946년 6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귀국 직후 콜레라에 어린 딸을 잃었고, 곧이어 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된 김학순은 남의 집 식모살이며 날품팔이 등으로 모진 삶을 이어가야 했다. 반세기가 다되도록 침묵하던 그녀는 어떻게 용감하게 나서서 증언을 하게 된 것일까? 그녀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성들을 ‘위안부’로 동원해 놓고서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잡아떼는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가 무엇보다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침묵 속에 머물렀을 수도, 그리하여 ‘위안부’문제는 역사 저편의 먼지 속에 감춰지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사실, 그녀의 증언 이전에도 ‘처녀공출’이니 ‘정신대’니 하는 일을 사람들이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포착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해방직후 미군정 하에서 한국 여성에 대한 미군의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회 명사들이 그 대응책으로 일본군에 있었던 것과 같은 ‘위안소’가 필요하다고 버젓이 말하지 않았던가. 여성의 성을 언제든지 남성의 성욕을 풀기 위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인식, 나아가 성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해 온 한국 사회에서는 강간당한 여성은 오히려 몸이 더럽혀진 죄인에 불과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위안부’ 피해는 개인적 수치일 뿐 구조적 폭력으로 인식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의 말을 듣는 ‘귀’가 생기기까지 1980년대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성장한 여성운동의 줄기찬 노력이 있었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계기로 성폭력을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규정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온 한국 여성운동 세력은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가시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기독교 여성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기생관광’ 반대운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게임을 준비하면서 당시 한국 정부는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일본 남성들의 ‘기생관광’을 부추기고 있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은 것도 억울한데, 아직도 기생관광으로 성적 수치를 당해야 하는가’라는 울분 속에서 교회여성단체는 기생관광을 ‘현대판 정신대’라고 규정하고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민족적 성 침탈의 역사로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자신은 ‘정신대’를 모면했지만, “또래의 많은 처녀들이 일제에 끌려갔던” 그 기억으로부터 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찾아 나선 윤정옥 등은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발족하였고, 일본군 ‘위안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로써 드디어 한국 사회는 피해자들의 ‘말’을 들을 준비를 마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까지도 이 문제를 풀 결정적 고리인 ‘위안부’ 피해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여론의 압력에 밀려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시 일본 총리에게 전시 강제연행자의 명부를 만드는 데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군위안소는 민간업자의 단순한 상행위이며 군 위안부는 업자가 데리고 다녔다”고 대응하면서 일본 정부의 관여를 전면 부인했다. 김학순이 스스로 ‘위안부’의 피해자였음을 폭로하고 최초로 대중 앞에 나섰던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였다. 반세기 만에 피해자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된 한국의 대중들 앞에서 엄연히 ‘위안부’였던 자신이 살아 있는데도 진실을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에 분노하여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로 한 것이다. 증언 이후 김학순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 나서 사죄와 피해배상을 요구하며 인권운동가로서 남은 생을 이어갔다. 8월 14일 김학순의 용기 있는 증언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의 증언 이후 같은 ‘위안부’ 피해를 입은 생존자들이 200명 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증언의 연쇄는 해외로까지 이어졌다.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일본의 침략을 당했던 다른 아시아 피해 국가들에서도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폭로가 잇달아 나왔다. 이로써 ‘위안부’문제는 한일 간의 문제가 아닌,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김학순의 증언에 탄력을 받은 진상규명운동은 한국은 물론 북한, 일본과 중국,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의 연대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또, 피해자의 등장에 충격을 받은 역사가들에 의해 일본군의 직접적 개입을 보여 주는 많은 증거 자료들이 발굴되었다. 김학순의 생생한 증언과 잇따른 움직임 속에서 더 이상 발뺌이 어려워진 일본 정부는 고노담화를 통해 군과 관헌의 관여와 동원에서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군의 관여가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고 전반적인 책임은 민간업자에게 있다는 태도를 고수하면서 도의적 책임만을 인정할 뿐, 법적 책임이나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거부해 왔다. 그나마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엔 고노담화조차 부정하며 역사왜곡을 일삼고 있다. ‘김학순들’의 처절한 증언을 듣고서도 아베 정권과 일본의 우익들은 피해자들의 말에 귀를 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 얼마 전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 전시회에서 소녀상이 철거되자, ‘내가 소녀상이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자. 김학순의 증언이 있은 지 30년, 그녀의 용기에 의해 피해자의 말에 공감하는 열린 ‘귀’들이 계속해서 전 세계에서 확산되고 있지 않은가.
-
- 2021년 논평 몸 안에서 궁글린 목소리들 - 에밀리 정민 윤의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에 대하여
-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에밀리 정민 윤, 한유주 옮김, 열림원, 2020) 일본군 ‘위안부’, 증언의 끝은 있는가 증언, 그 목소리란 어떻게 퍼져가는 것일까. 에밀리 정민 윤의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에밀리 정민 윤, 한유주 옮김, 열림원, 2020)[1]을 읽고 난 후 수년 전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일본군‘위안부’의 재현에 관한 한 강연에서 존 바에즈[2]가 「메리 해밀턴(Mary Hamilton)」을 부르는 동영상을 청중들과 함께 감상하며 끝을 맺은 적이 있다. 이 강연은 1년 쯤 후에 긴 논문이 되고, 두어 해쯤 후에는 강연의 기획자인 문학평론가 오혜진이 편한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권보드래 외, 민음사, 2018)에 조금 수정되어 수록되기도 했지만[3], 강연 당시 내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신해 들려준 것만 같은 그 노래의 울림까지 담지는 못했다. 「메리 해밀턴」은 한국인들에게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번안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그 구절을 부르노라면 바람과 비에게라도 묻고 싶은, 사라진 것은 정말 무엇일까 하는 막막함과 슬픔을 어린 시절의 나도 어렴풋이 느끼곤 했다. 이 노래가 번안을 통해 상실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차마 지시할 수 없도록 만드는 깊고 투명한 서정성으로 박정희 독재에 저항했던 포크송이었다는 사실[4]을 군부독재 시절을 지나서야 후일담처럼 알게 되었다. 그 원곡이 영미 전통 발라드의 하위장르인 살인 발라드(Murder Ballad) 중 하나인 「메리 해밀턴」이라는 것[5], 더불어 스코틀랜드에서 기원한 가사가 이토록 사무치게 다가온 것은 전적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그 증언의 종식은 있는가를 생각하면서부터다. 시적 화자인 메리 해밀턴은 왕의 아이이기에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죽여야 했던 왕비의 궁녀로, 교수형에 처해져 죽임을 당한 자, 그러니까 영혼이다. 노래 말미에는 자신 말고 다른 세 명의 메리들이 더 있었다고 전한다. 그 노래하는 영혼은 자신만이 아니라 그저 메리들일 뿐이었을 궁녀들의 비극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강연을 준비하던 당시, 남은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를 셈하는 것이 아베 정부와 박근혜 정권이 맺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를 둘러싼 긴급한 절박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 셈을 중단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죽으면 끝이라는 건가? 애초에 일본군‘위안부’가 몇 명이고 그 생사가 몇인지 셈할 수 있는 존재였던가? 게다가 이미 생존자들이 목격한 잔인하고도 숱한 죽음에의 증언이 있지 않았는가. 이 노래는 죽음이 증언의 끝, 역사의 종말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증언의 끝은 없으며 따라서 역사의 종언 또한 섣부른 것이다. 에밀리 정민 윤의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은 그 증언이다. 이 시집은 수어 년 전 나를 사무치게 만들었던 「메리 해밀턴」처럼, 아니 보다 더 강렬하게 단번에 폐부에 깃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엔 「황금주」, 「진경팽」, 「강덕경」, 「김상희」, 「김윤심」, 「박경순」, 「김순덕」이 있기 때문이며, 더하여 이들의 기억과 고통, 증언을 전하는 ‘나’가 있기 때문이다. ‘찾은 시’, 증언의 시적 전승 에밀리 정민 윤의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을 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 Comfort Woman』(박은미 옮김, 밀알, 1997)나 이창래의 『척하는 삶 A Gesture Life』(정영목, 알에이치코리아, 2014)처럼 일본군‘위안부’를 디아스포라 정체성과 결부지어 포스트식민의 상흔을 다룬 재미 코리안 문학의 계보 속에서나 근년 간 증가한 문학과 영화 텍스트의 경향성 속에서 다룰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무엇보다 이 시집은 몸을 멈칫하게 만드는 일본군‘위안부’ 증언의 강렬한 시적 전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들은 시간적 전개에 따라 감춰진 진실-일본군‘위안부’였음-을 드러내는 서사 양식과 달리, 청자들 앞에 나타나 단번에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말한다. 극적 현전이랄 수는 있지만, 직접성의 환영을 의도한 효과는 단연코 아니다. 이 시들은 ‘찾은 시’(found poetry)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시들이 “시각예술에서 자주 쓰이는 ‘콜라주’와 비슷하게, 존재하는 텍스트를 부분적으로 이용해 새로운 형태나 내용의 시를 만드는 기법”으로 쓰였으며, 사용된 텍스트들은 녹취, 채록, 번역된 증언 텍스트이며, 그것을 “단순 복제하지 않고, 내용과 언어를 선택적으로 추출하여 재배열하고 내 언어도 소량 추가하여 시라는 형태로 변형시켰”[6]다고 한다. 이것을 나는 증언의 시적 전승이라고 하고 싶다. 이 시집의 제작 과정은 아카이브를 파헤쳐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상을 구축하는 지적인 과업일 뿐만 아니라 마치 전통예술의 전수자와 같이 몸의 수행(performance)을 요구한다. 에밀리 정민 윤에게 있어 문서고의 언어들이 시로 변형되는 과정은 자신의 몸에 부딪는 말들을 몸 안에서 궁글리면서 목소리로 표출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38선까지 내내 혈혈단신으로 걸었다. 미군들이 내게 DDT를 너무 많이 뿌렸고 이가 전부 떨어져 나갔지 12월 2일이었다 나는 자궁을 잃었고 이제 일흔이다. -「증언들」(황금주) 부분(43)[7] 규칙적이지 않은 행갈이와 긴 휴지인 듯한 띄어쓰기가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와 관련하여 상호참조적인 텍스트가 없지 않다. 네 번째 증언집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증언팀, 풀빛, 2011)가 가장 적절한 예일 것이다. 사회학자 김수진에 따르면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준비하면서 증언팀은 “증언을 문서자료를 보충하는 객관주의적 인식론에 기초한 자료로 위치시켰던” 시각에서 “증언을 서발턴[8] 역사쓰기”로 전환시키고자 했다고 한다. 그것은 구술 채록자 및 연구자의 위치를 묻는 자에서 청자로 이동시키면서 구술 발화자를 중심에 두는 구술 방법론 및 다시 쓰기의 전환이었다.[9] 증언4집의 증언 연구자들이 고민했던 것과 유사하게, 에밀리 정민 윤의 시에서 행갈이와 긴 휴지는 증언자들의 지속되는 고통과 오랜 침묵, 떠듬거림과 머뭇거림에 대한 시적 일탈을 통한 미메시스[10]일 것이다. 하지만 분량상 증언 텍스트보다 짧아진 시적 증언은 여타의 증언 텍스트보다 단도직입적으로 트라우마의 근원이 된 성노예 강간 경험과 해방되어 조선으로 살아 돌아왔어도 여성-몸의 고통 속에서 환기될 수밖에 없었던 이후의 삶을 응축한다. 위의 「증언들」처럼 “나는 자궁을 잃었고/이제 일흔이다”처럼 살아온 나날들인 세월을 셈하기도 무색한, 트라우마에 달라붙어버린 삶으로서 말이다. 이 시들에서는 묻는 자도 청자도 존재하지 않기에 시제인 ‘위안부’피해자가 우뚝 서 있는 것만 같은 현전성은 증언의 용기와 주체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시인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만을 다루었다면 이러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증언의 시적 전승이 지닌 힘은 여러 매개를 거친 증언 텍스트들과의 비교, 대조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없이는 시가 쓰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승자 자신에게서 그 힘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전승자는 왜 증언을 전승하고자 했는지 자신이 깨우친 역사를 통해 자신의 삶을 맥락화하고 병치시킴으로써 그 힘을 생성시켰던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포함된 집단과 연루된 집단의 역사와 사회적 삶에 대한 증언자이자 목격자로 자신을 전면에 내세운다. 어린 시절 한국에 살다가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간 시인은 자신이 포스트식민과 냉전의 역사가, 그리고 인종적 위계를 만들어낸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가 부조해낸 아시아 여성 몸으로 존재했음을 증언의 시로 말한다. “귀가 해year라고 말할 때 목은 귀ear라고 말했고”(「종 이론」(81)), 백인 소녀들과 같지 않은 검은 직모의 머리카락과 탄 듯한 피부색을 지닌 “나”(「머리카락」(88))는 역사와 당대를 자신, 여성의 몸 위에 이렇게 교차시킨다. 역사적 트라우마의 기억은 현재에도 지속되는 “일상의 불운” 속에서 환기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오리엔탈리즘의 젠더화된 스테레오타입 속에서 ‘나’를 야만적인 유혹자로 간주하여 끊임없이 회귀하는 자아의 실정성을 얻으려는 자들에게 명령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나를 만지지 마라」(76~77)) “일상의 불운”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에서 “일상의 불운 An Ordinary Misfortune”은 여덟 번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제이다. 한 온라인 라디오 방송[11]에서 시인은 “‘일상의 불운’이라는 시제를 통해 ‘위안부’피해자뿐만 아니라 몸에 가해지는, 특히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한다. 어느 역사책에서 일본군‘위안부’를 언급한 부분에서 본, 가난한 여성들이 성착취를 당하는 것은 너무 빈번한 일이어서 일상의 불운 “ordinary misfortune”이었다는 구절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것을 시제로 삼아 시를 쓰기 시작했고, 번역자 한유주와의 대화를 통해 일상의 불운이라 번역되었다고 한다. ‘평범한’이나 ‘보통의’보다는 ‘일상’을 이야기하고 싶었고, ‘불행’보다 ‘불운’이라는 번역어를 택해 ‘순간’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2016년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12]이 떠올랐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여든 여성들의 행렬과 포스트잇 물결이 알려주듯, 살해당한 것은 당신이 아닌 나일 수도 있었으며, 이 살인사건은 구조화된 여성혐오 폭력이었다. 에밀리 정민 윤이 “일상적 불운”이라 명명한 것은 이러한 구조화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불운이란 터질 듯 들어찬 전차. 너무 약한 칵테일. 바에서 한 미국 남성이 하는 말 : 미국이 없었다면 한국에서의 네 삶이 완전히 달라졌겠지. 의미: 고마워해라. 캐나다 여자 친구가 던지는 질문 : 너희가 그냥 잘 지내면 안 돼? 너희 : 일본과 한국. 의미 : 넘어가라.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넘어가라, 넘어가라, 넘어가라, 기차에 탄 소녀들. 목적지 : 위안소. … (하략) -「일상의 불운」 부분(25) 이 시집의 첫 번째 「일상의 불운」은 “내 불운이란 터질 듯 들어찬 전차”와 같이 대중교통수단에서 여성들이 겪곤 하는 성추행처럼 일상의 불운의 연쇄를 따라 과거로 거슬러 가면 위안소라는 목적지로 향하는 “기차를 탄 소녀들”을 마주하게 되고, 그들은 “콘돔” “돌격1호”가 연거푸 발사되는, 병들고 죽어도 그만인 과녁일 뿐이었음을, 또 다른 「일상의 불운」에서는 너무 능하게 쓰이는 “나무”와 같아 베어지고 버려지는 “마루타”(「일상의 불운」, 35~36)였음을 폭로한다. 이 시 외에도 통사적으로 완결된 문장을 이루지 못한 단어들, 구의 단속적 연쇄로 이어진 에밀리 정민 윤의 많은 시들은 독자에게 현기증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능란한 언어적 역능에 찬사를 보내고 싶지만 그의 의도는 다른 데 있다. 오히려 단어와 단어 사이에 맥락들을 넣어 독해하는 해석 공동체의 일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어느 말엔가 걸려 넘어진다. 실족한 그곳에서 성찰할 것을 청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율적 가상 속에서 분리된 것들을 연결하라고 말한다. 정치, 운동, 역사와 같은 일들이 진영화된 정치열 속에서 소진되어버리고 협애한 의미에서의 당사자 외에 정치적인 것을 확장하는 성찰과 연대에 냉소적인 한국의 분위기에서 에밀리 정민 윤의 시 작업이 통쾌한 일침이 되기를 바란다. 물론 그는 자신의 시의 해석 공동체 일원들이 “우리 종들”(our species), 즉 다른 종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잔혹함의 속성을 지닌 인류일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점을 부기해둔다. 배 속에 플라스틱을 가득 담은 채 떼죽음을 당한 향유고래를 통해 인류세의 폭력을 다룬 「변신」(127~132) 같은 시는 에밀리 정민 윤이 가닿을 정치적이고도 윤리적인, 그리하여 진정 문학적으로 감당해야 할 세상사가 어디까지인지를 말해준다. 각주 ^ 이 시집의 원서는 다음과 같다. Emily Jungmin Yoon, 『A Cruelty Special To Our Spescies』, HaperCollins Publishers, 2018. ^ (편집자 주) Joan Baez(1941년생).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인권 운동가, 반전 평화 운동가이기도 하다. ^ 이혜령, 「그녀와 소녀들」, 오혜진 편,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민음사, 2018. ^ 박기영의 연구에 따르면, 존 바에즈의 「Mary Hamilton」의 번안곡은 한국 모던포크 성립기(1968~1975년), 그리고 대마초 파동 직후인 1976년도까지 나온 포크 음반 170장의 앨범 중 7회나 수록되었다고 한다. 그 번안인 「아름다운 것들」은 한국의 첫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평가받는 방의경이 노랫말을 쓴 것으로, 양희은과 서유석의 대표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박기영, 「이식 그리고 독립: 한국 모던포크 음악의 성립과정(1968~1975년)」, 단국대학교 대중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121~136쪽, 222쪽 참조.) 번안곡의 비중이 적지 않았던 한국 모던포크 음악의 퇴조에는 1975년 긴급조치 9호 공포에 따라 이루어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약칭 예륜)의 공연활동 정화대책과 불건전 외국 가요백서가 놓여 있다. 존 바에즈는 불온, 반체제, 반전을 노래하는 포크 뮤직 가수 중 하나로, 밥 딜런, 비틀즈, 존 레논 등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박소현, 「한국의 정치적 지형에 따른 서양 대중가요의 유입에 대한 분석: 1910년부터 1987년까지의 번안가요를 중심으로」,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2021, 89~92쪽 참조.) ^ 「메리 해밀턴」은 1960, 70년대 흑인 민권운동, 반전운동 등에서 불렸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 대중가요로 번안된 영미 전통의 살인 발라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이노신, 「영미 전통 민요로서의 발라드(Ballad) 연구 : 살인발라드(Murder Ballad)를 중심으로」, 『비교문학』74, 한국비교문학회, 2018. ^ 에밀리 정민 윤, 「한국어판 서문: ‘찾은 시’를 통해 들여다본 우리 종족의 잔인함」, 앞의 책, 18쪽. ^ 에밀리 정민 윤, 앞의 책, 43쪽. 이후 인용은 본문에 괄호 안 쪽수로 표기한다. ^ (편집자 주) subaltern. 여성이나 노동자, 이주민과 같이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되고 억압당하는 사람. 또는 그런 무리. ^ 김수진, 「트라우마의 재현과 구술사 : 군위안부 증언의 아포리아」, 『여성학논집』 제30집 1호,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2013 참조. ^ (편집자 주) mimesis. 예술 창작의 기본 원리로서의 모방이나 재현. ^ <네시이십분 라디오> 89회-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 에밀리 정민 윤, 2021.02.27.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13/episodes/23958113 (2021.11.29.검색완료) ^ (편집자 주) 2016년 5월 17일 한 남성이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에 있는 주점의 공용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 당시 이 남성은 앞서 화장실에 들어온 남성 7명은 그대로 내보내고, 처음으로 들어온 여성을 타깃으로 삼아 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