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순을 추억하다 1 - 김학순 할머니와 나

이희자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

  • 게시일2019.08.16
  • 최종수정일2022.11.28

 

김학순 할머니와 나 


김학순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신지 22년째, 또다시 광복절을 앞두고 있다. 할머니는 1997년 12월 16일 새벽, 74세 나이에 한 많은 삶을 영원히 마감하셨다. 이승과 이별하는 순간에도 할머니는 아마 한 맺힌 억울함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 떠나셨을 것이다. 할머니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일본 정부의 사죄가 지금도 그대로인데 저승에서나마 마음 편하게 계시겠는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일본 정부는 변해도 아주 나쁘게 변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보다 더 많이 우경화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2015년 12월 28일 그 사건이 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라는 발표가 나온 것을 보셨다면 할머니는 얼마나 분노하셨을까. '일본 정부는 우리들이 다 죽기 바라고 있다'고 말씀하시던 분노에 찬 모습, 그 쟁쟁한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를 때리 듯 생생하게 느껴지곤 한다. 할머니가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많은 젊은이들과 시민에게 일본군'위안부'의 참혹한 실상을 알려주며 일본의 사죄를 이끌어 내기 위한 호소를 쉼 없이 하셨을 것이다.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신 김학순 할머니가 생각나면 나는 천안 망향의 동산을 찾곤 한다. 거기에 황금주 할머니와 함께 잠들어 계시는 김학순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김학순 할머니는 살아 생전에 '나 죽어도 무덤 찾아 줄 핏줄 하나 없어 쓸쓸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때 우리 강제동원 유족들은 약속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떠나시면 저희가 딸 대신 아들 대신 매년 찾아뵙겠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며 우리 유족들은 해마다 12월 16일 망향의 동산을 찾는다. 가끔 일본 시민들도 함께 김학순 할머니 묘소를 참배하며 눈물로 사죄의 절을 올리기도 한다. 올해는 더욱 김학순 할머니가 사무치게 그립다. 여전히 일본이라는 나라가, 일본의 최고위층의 정치인들이 식민지배로 저지른 범죄와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우리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있는 현실이 자꾸만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김학순 할머니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여느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1991년 8월 14일 방송을 통해서였다. 이날 할머니는 자신이 과거 일본군'위안부' 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방송을 보면서 나는 할머니가 평생 이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우리 어머니나 고모, 이모와 같은 연배셨던 할머니. 나는 내 어머니가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쳐 살아내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철들고 깨달았지만 내 어머니 보다 더한 고통을 겪은 여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정신대'로 끌려갈까봐 우리 고모도 어린 나이에 시집가셨다고 들었다. 우리 어머니나 고모도, 우리 이모도 그 때 처녀들은 누구나 다 겪을지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1991년 내가 몸담고 있던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일본정부를 상대로 준비중이던 소송(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사건)에 합류하셨다.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할머니를 만났다. 처음 만난 김학순 할머니는 자그마한 몸집에도 강단 있는 모습이었다. 아무에게나 곁을 허락하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다.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고 심부름도 시키지 않으셨다. 할 수 있으면 언제나 혼자 다 알아서 하시는 분이었다. 아마도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이 만들어낸 모습인 것 같았다. 

김학순 할머니는 당시에 동사무소에서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는 쌀과 지원금 3만원, 취로사업에서 번 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대문교회에서 우연히 원폭피해자 이맹희 할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김학순 할머니는 이맹희 할머니가 일본에서 피폭을 당하고 어렵게 살아 온 사연을 듣고서 자신의 과거도 털어놓게 되었다. 이맹희 할머니는 여성단체에 얘기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1990년대 초부터 일본 정부의 관료라는 작자들이 '위안부'는 없었다며 여러 차례 망언을 해댔다. 뉴스에서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김학순 할머니는 엄연히 '위안부'였던 자신이 살아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나 싶어 분노했다. 결국 그녀는 여성단체에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아마 자신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그런 결심은 평생 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증언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김학순 할머니와 나. 1993년 망향의 동산 (제공 : 이희자)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한 활동에 김학순 할머니는 적극 나섰다.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에 많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뒤이어 일본의 전쟁 범죄를 폭로하고 나섰다. 그해 6월 김학순 할머니의 행동에 용기를 얻는 것은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만이 아니었다. 일본이 점령한 곳에는 여지없이 위안소가 세워졌기에, 북한, 중국, 대만,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네덜란드 피해자 포함) 등 각지에 퍼져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히고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 보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일본 사회도 큰 충격을 받았다. 학계는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뜻있는 시민들은 지원단체를 만들어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과 진상규명을 돕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하자 일본 정부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1993년 7월 일본정부는 정부대표파견단을 한국에 보내 5일 동안 김학순 할머니 등 '위안부' 할머니 16명의 증언을 들었다. 그리고 그해 8월 일본정부는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는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 일본군이 관여하였다고 인정했다. 또 일본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하며 그 '마음을 표현할 방식'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1993년 11월 호소카와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경주에 왔을 때 강제징병·강제징용 피해자·유족들이 경주에 내려가 회담장 앞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 이날 김학순 할머니도 몇몇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시위에 참석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우리는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사과만 반복할 뿐, 제대로 책임질 생각도 제대로 보상할 생각도 없는 일본정부를 규탄하는 시위였다.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정부의 사실 인정, 공식 사죄, 국가배상과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밝히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위안부'문제가 법적으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되었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또 피해 사실은 인정하지만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이라는 민간단체를 통해 할 것이며, 이 돈을 받는 피해자들에게만 총리 명의의 사과 편지를 보내겠다는 '조건부 사과' 원칙을 밝혔다.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크게 분노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평생에 잊지 못할 상처를 안긴 일본이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한다면서 국가의 자존심이나 명분 따위를 지키기 위해 이것저것 조건을 다는 모습이 또다시 그들을 분노케 만들었던 것이다.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 법정에 소송을 낸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며 "민간인에게 기금을 모아 보상을 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구걸하니까 마지못해 도와준다는 식이어서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국민기금 측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개별적으로 찾아다니며 설득에 나섰지만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대부분 이를 또 하나의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기금의 수령을 거부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1994년 6월 김학순 할머니는 도쿄지방법원에 출석하여 일본정부 측과의 대질신문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생생히 고발했다. 이 자리에서 김학순 할머니는 "부끄러운 것은 '위안부'였던 내가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를 제대로 인정하지도 사죄하지도 않는 일본정부"라고 비판했다. 할머니는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일본정부의 사실 인정과 공식적인 사죄"라고 강조했다. 할머니는 법원 출석 후 각종 행사에 참여하여 증언하고, 일본 국회 앞에서 피해자·유족들과 함께 농성을 벌였다. 

그 후에도 김학순 할머니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에 대한 소송에 참여하고, 각종 집회에 나가 증언하고, 국내외 언론과 인터뷰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할머니는 여기저기에서 초청을 받을 때마다 마다하지 않고 참석을 하곤 하셨다. 증언을 하고 나면 보통 사례비로 2~30만원을 받으셨는데, 할머니는 5만원씩 봉투에 담아 주변의 '위안부' 할머니에게 나눠주기도 하셨다. 누가 돈이라도 조금 드리고 가면 혼자 쓰지 않고 할머니들을 불러 함께 식사도 하셨다. 특히 김학순 할머니가 자주 만난 할머니는 황금주, 김상희, 강순애 할머니 등이었다. 김학순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셨던 분은 나눔의 집에 계셨던 강덕경 할머니였다. 강덕경 할머니는 김학순 할머니가 나눔의 집으로 오시길 바랐는데, 김학순 할머니는 가고 싶어 하시면서도 서울의 지인들이나 동대문교회의 지인들, 신앙 문제 등의 이유로 가지 못하셨다. 하지만 나눔의 집에 가지 못하신 또 다른 이유는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공동생활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로 인해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을 상기하게 되는 일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덕경 할머니는 1997년 2월 세상을 뜨셨다. 마지막 중환자실에 계실 때 김학순 할머니가 아픈 몸을 이끌고 병문안을 다녀오신 것이 두 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많이 우셨고, 많이 괴로워 하셨다. 장례식장까지 다녀오신 후 할머니도 지병이 악화되어 이화여대부속 동대문병원과 목동병원을 오가는 중환자 신세가 되셨고,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오랜만에 장구를 잡고 즐거워하시는 김학순 할머니. 1995년 무렵 (제공 : 이희자)

 

김학순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하게 싸웠다. 할머니가 가는 길은 언제나 난생 처음 가는 길이었다. 그만큼 두렵고 힘든 길이었음이 분명하지만 할머니는 묵묵히 원래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었던 것처럼 그 길을 걸어 나갔다. 할머니의 옆에서 난 많은 것을 배웠다.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나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유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어떻게 싸워야할지를 알았다. 

30년을 싸웠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다. 2015년 12월 한국의 박근혜 정부와 일본의 아베 정부는 '위안부'문제에 대해 양국이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은 무시한 채 적당히 덮고 적당히 얼버무리는 기만적인 합의였다. '일본 정부가 갖은 망언과 망발로 사실을 감추려 애를 쓰지만 진실은 숨길 수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던 김학순 할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과연 한일 양국의 '12.28합의'를 보고 어떤 심정이 어떠셨을까. 그동안 세상은 많이 변해왔지만 어느 순간 또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과거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견고한 세상에 냈던 조그만 파문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꿔왔는지 알고 있다. 진실의 힘은 강하다. 그것이 이 세상을 바꿀 우리의 유일한 무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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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희자

1944년 군속 동원으로 아버지를 잃은 강제동원 유족으로 1989년부터 아버지의 기록을 찾기 위해 유족회 활동을 시작했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투쟁을 이어왔다. 2001년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를 창립, 강제동원 생존피해자, 유족들과 함께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운동, 야스쿠니반대국제공동행동 등 일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인한 피해 진상규명과 권리회복을 위해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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