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타 여성의 마을(かにた婦人の村). 일본에서 매춘방지법이 제정(1956년)된 뒤 후카츠 후미오(深津文雄) 목사 등이 탈성매매 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해 1965년 일본 지바현 다테야마시에 설립한 공동체. 위안소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 『마리아의 찬가(マリヤの賛歌)』를 출간(1971년)한 시로타스즈코(城田すず子, 가명)가 1984년 후카츠 후미오 목사에게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히고, 함께 지냈던 여성들을 추모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며 기부금이 모였고, 이것으로 1985년 지바현 소재 가니타산에 '아아 종군위안부(噫従軍慰安婦)'라는 '위안부' 추모비가 세워졌다.
리틀빅혼 국립전쟁기념지(Little Bighorn Battlefield National Monument)몬태나주 크로우 에이전시(Crow Agency) 인근에 위치한 이 국립공원은 1876년 리틀빅혼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으로, 미국-아메리카 원주민 전쟁 중 가장 유명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블랙힐즈에서 금광이 발견되며 영토를 침탈당한 라코타·샤이엔족은 생존을 걸고 맞서,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 제7기병연대를 전멸시켰다. 평소 부족 단위로 흩어져 있던 원주민들이 힘을 합쳐 거둔 이 승리는 미국 육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로 꼽힌다. 하지만 이 대승은 오히려 미국 정부의 대규모 보복과 토벌을 불러왔고, 결국 평원 원주민의 저항이 꺾이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이곳에는 양측 전사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나치 정부는 베를린을 재건축해 유럽을 대표하는 세계수도로 만들겠다는 ‘세계수도 게르마니아(Welthauptstadt Germania)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었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템펠호프 공항이 건축되었다. 냉전 초기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했을 때, 연합군은 당시 서베를린에 속해 있던 템펠호프 공항으로 수송기를 보내 물자를 날랐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공중다리(Luftbrücke)이다. 현재 템펠호프 공항에는 항공수송 작전 당시 사고로 목숨을 잃은 파일럿들을 추모하는 사망자 위령비가 남아 있다.
타갈로그어 ‘비하이 나 풀라(Bahay na Pula)’는 ‘붉은 집’ 혹은 ‘핏빛 집’이라는 뜻의 나무로 지은 집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여성들을 감금해 성폭행을 하고, 남성들을 살해하는 현장으로 이용된 붉은 집을 보존해 추모 기념관을 만들자는 주장이 있다.
시로타 스즈코(城田すず子 가명, 1921~1993). 일본인 '위안부'로서의 경험을 증언한 피해생존자. 대만, 사이판, 축섬(트럭섬), 팔라우의 위안소를 전전하다 일본이 패전하자 1946년 3월 미군 군함을 타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1971년 위안소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 『마리아의 찬가(マリヤの賛歌)』를 출간했다. 이후 시로타는 함께 '위안부' 생활을 했던 여성들이 매일밤 꿈에 나타나 견딜 수 없다며 위령탑을 세워 그들의 영혼을 달래주고 싶다고 밝혔다. 이것이 알려지며 모인 기부금으로 1985년 일본 지바현 소재 가니타산에 '아아 종군위안부(噫従軍慰安婦'라는 '위안부' 추모비가 세워졌다. 1990년에는 한국에서 방송된 〈광복45주년 특별기획: 태평양전쟁의 원혼들 제2편 침묵의 한〉에 출연하여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도 했다. 1993년 작고했다.
이 글은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첫 번째 '위안부'로 기억하지 못했던 배봉기를 기억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전하려 했을까.
창원 시민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는 뜻에서 기림일 행사에 참석하고 진행을 돕는 것으로 마음을 다해주었다.
베를린 ‘위안부’ 운동 40년과 소녀상 ‘아리’ 존치운동에서 확인하는 빛나는 연대
세계 최대 난민촌에서 생존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로힝야들의 제노사이드 역사와 여성들이 키우는 희망
할머니와 옷깃 한 번의 스침이라도 있었거나 이마저도 없지만 일본군‘위안부’의 고통에 공감했던 많은 분들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할머니가 편안하시길 빌고 할머니를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