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미테구의 평화의 소녀상은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아리’[1]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아르메니아어로 ‘용기’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만 살아온 내가 아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온라인상에서 우연히 전단지 속 문구를 접하면서였다. 2022년 3.1절과 3.8 여성의날을 기념하여 베를린 아리 앞에서 열린 집회의 홍보글이었는데, ’평화의 소녀상’과 나란히 쓰일 수 있다고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단어들이 있었다.
“우리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출신과 종교, 젠더를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열등하게 취급하고 희생시켜온 역사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식민주의, 제국주의, 인종차별, 성 차별, 가부장제, 퀴어 혐오, 트랜스 혐오, 장애인 차별, 카스트, 계급 차별, 그리고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며, 반드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마침 변희수 하사와 이은용 작가[2]의 1주기가 막 지난 초봄이었다. 3.1절에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트랜스 혐오 반대를 함께 외친다는 사실이 낯설었고, 반가웠고, 감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처음 보는 단어가 눈길을 끌었다. ‘FLINTA*’였다.
“FLINTA*들이 펼쳐온 과거와 현재의 페미니스트 투쟁과 반식민 저항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 평화의 소녀상은 단지 하나의 역사적 사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폭력과 페미사이드, 그리고 그리고 이에 대한 은폐에 맞서온 FLINTA*의 수많은 반식민주의 투쟁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투쟁을 위한 기념비로 세워졌습니다.”
FLNTA는 여성*, 레즈비언, 인터섹스,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에이젠더(Frauen*, Lesben, Intergeschlechtliche, Nichtbinäre, Trans und Agender Person)를 뜻하는 단어들의 앞글자를 딴 단어로, 뒤에 붙은 별표는 남성형과 여성형 명사가 엄격히 구분되는 독일어의 이분법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이다. FLINTA 뒤의 별표 역시 6개의 알파벳 머리글자 안에 다 담기지 않는 다양한 젠더·퀴어 정체성들을 아우르는 의미이다. 이로써 FLNTA*는 젠더와 성적 규범 속에서 차별받아온 모든 이들을 일컫는 용어가 된다.
아리는 미테구에 도착한 직후부터 추방 위협에 맞서야 했다. 일본 정부의 외교적 압박 속에서 베를린 미테구청은 철거 명령을 내렸고, 이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존치운동 측은 베를린의 탈식민-퀴어-페미니즘 운동의 흐름과 함께 싸움의 언어를 만들어왔다. 2024년 6월 20일 코리아협의회와 연대단체들이 미테구청장에게 보낸 공개서한에도, 같은 해 7월 31일 주민 2,216명이 서명해 구의회에 제출한 청원서에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온라인 청원문[3]에도 “평화의 소녀상은 FLINTA*의 반식민주의 투쟁을 기리는 기념물”이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베를린에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날(9월 28일)을 기념해 해마다 열리는 ‘별무리(Byulmuri)’ 축제 홍보 계정 역시 ‘아리는 이민자, 소수자, FLINTA* 공동체의 일부’라고 소개한다. 2025년 제3회 별무리 축제에서 코리아협의회 한정화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언어에서 요즘 사용되는 이 ‘젠더 별표(Gender Sternchen)’, 이 작은 별표들, 이들이 모두 함께 모이면 우리가 정말 큰 힘을 만들어내고 함께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요.”
FLINTA*의 이름으로 싸울 때, 싸울 때, 과거 일본군‘위안부'에게 가해졌던 폭력은 현대의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 퀴어들이 겪는 폭력 옆에 나란히 놓여 지금 여기의 문제가 된다. 2025년 별무리 축제 다음날, 아리에서 멀지 않은 베딩 전철역 앞 광장에서 FLINTA* 혐오 범죄를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 이 집회는 며칠 전 베딩의 한 공원에서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된 신원 미상의 피해자를 추모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사회자는 “FLINTA*로서 이토록 비극적이고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이미 그전에 막대하고 교차적인 차별을 겪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위를 마무리하는 묵념 직전, 사회자는 “오늘 이 자리에 코리아협의회 분들도 와 계시다”라면서 “다음 주 평화의 소녀상 아리를 지키기 위한 시위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알렸다.
실제로 아리를 위한 10월 집회에는 베딩역 집회를 조직했던 풀뿌리 단체들이 그대로 참여해 “독일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여성”과 트랜스젠더, 퀴어에 대한 혐오가 증가하는 이 시기, 우리는 페미사이드와 가부장적 폭력에 맞서 싸운다”고 외쳤다. 그 외에도 ‘극우에 반대하는 할머니들(Omas gegen Rechts)’, 필리핀 여성 단체인 '가브리엘라(GABRIELA) 독일 지부’, 아시아계 이민 2세들의 단체 ‘코리엔테이션’ 등 다양한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연대 발언이 이어졌다. 그 속에서 FLINTA*는 피해자, 생존자, 연대자의 이름으로 계속 불려나왔고, 참여자들은 밤늦도록 함께 아리를 위한 구호를 외치면서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베를린의 일본군‘위안부’운동은 40년 전까지 거슬러가는 오랜 연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86년 11월, 베를린 재독한국여성모임과 베를린 일본여성회가 ‘기생관광’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함께 논의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독일 통일이라는 전환 속에서 두 단체는 남한뿐 아니라 북한, 필리핀, 네덜란드의 피해 생존자와 구 유고슬라비아 전시 성폭력 피해 지원 활동가들이 함께 자리하는 국제컨퍼런스를 공동 개최하고 소책자를 제작해 배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두 단체가 함께 진행한 편지시위 캠페인은 독일 내 70여 개 여성·시민사회 단체들이 동참하는 큰 흐름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편지시위에 참여했던 성노동자 권리 단체 히드라(HYDRA), 이주여성 지원단체 아기스라(Agisra), 독일 동아시아 선교회(DOAM), 메디카 몬디알레(Medica Mondiale), 베를린 독일-일본 평화포럼 등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아리를 위한 연대활동에 함께 하고 있다.
이 기나긴 베를린 ‘위안부’ 운동의 언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피해자와 연대자를 부르는 이름이다. 1990년대 편지 시위의 수신인은 ‘친애하는 여성 여러분(Liebe Frauen)’이다. 1993년 두 한·일 이주여성단체가 함께 발간한 ‘위안부’ 자료집의 권두시는 ‘우리의 어머니’, ‘눈물에서 피어난 한국의 꽃’과 같은 민족주의적 여성상을 담고 있다. 이처럼 90년대의 운동이 ‘민족의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강조했다면, 2020년대 베를린의 운동은 이를 ‘FLINTA*’로 확장해가고 있는 것이다.
2025년 10월 17일 새벽, 아리는 20여명의 경찰 병력에 의해 끝내 철거되었다. 다음날 지역 커뮤니티 라디오 방송은 아리가 있던 자리에 모인 주민들과 활동가의 목소리를 전했다. 이들은 각각 다른 언어와 억양으로 아리가 있던 공간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 ‘커뮤니티’와 ‘친구’들을 만난 곳이며,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첫 접점’이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2021년부터 해마다 아리 앞에서 미국 애틀랜타 총격 사건 희생자를 추모해온 베를린의 아시아계 이주민 모임 ‘인 메모리, 인 레지스탄스(In Memory, In Resistance)’[4]의 활동가 보기와 타이키의 말이다.
“동상과 위안부 문제를 위한 투쟁 속에서 우리는 인종차별, 성차별에 대해 배웠고, 나아가 독일의 이중잣대와 위선, 그리고 일본과 독일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어요. 이 동상은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정치적인 것뿐만 아니라 일종의 ‘겸손함’도요. 이미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고, 세대를 넘어 사람들을 연결하는 거대한 투쟁에 참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해주었으니까요.”(보기)
“저는 아리와 저 자신을 정말 많이 동일시해왔어요. 그래서 아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너무나 크게 느껴집니다. 이 도시에서 제 자리를 조금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저는 우리가 이렇게 많다는 것, 우리가 함께 모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타이키)
아리는 포기되지 않았다. 아리가 철거된 한 달 뒤, ‘FLINAT*에 대한 폭력 철폐의 날(11월 25일)'을 맞아 열린 반제국주의·반전 집회 <너희의 전쟁, 우리의 피>의 포스터와 홍보글은 가두행진의 출발지가 ‘평화의 소녀상 아리(Friedensstatue Ari)’라고 알렸다. 철거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자리를 아리의 이름으로 불렀다. 극우에 반대하는 할머니들도 매달 그래왔듯이 12월에도 둘째 주 수요일에 아리가 있던 자리에서 수요추모기도회를 열었다. 12월 23일에는 코리아협의회 주최로, 108개 종이 연꽃과 페미사이드 피해자들을 잇는 붉은 그물을 든 사람들이 유대인 강제 이송지였던 화물 창고에 모여 희생자들을 추모한 뒤 아리가 있던 빈자리로 행진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리고 2026년 1월, 아리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예술·도시학 센터 ZK/U(Zentrum für Kunst und Urbanistik) 앞에 1년간의 임시 자리를 얻어 돌아왔다. 아리의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코리아협의회는 그 자리가 이전과 같은 공공부지가 아니라 비영리단체가 운영하는 사유지에 임시로 머무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짚으며 “장기적 존치와 공공 공간으로의 복귀를 위해 계속 투쟁한다”라고 밝혔다.
아리가 철거되기 열흘 전,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다. 극우에 반대하는 할머니들의 수요추모기도회가 막 끝난 참이었다. 아리 주위 삼삼오오 모여 있던 할머니들 사이로, 인도를 지나던 키 큰 청년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프리카계와 아랍계 혼혈로 보였다. 그는 아리 앞에 무릎 꿇고 몸을 숙였는데, 발등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리고 바로 일어나 연극적인 어조로 무언가를 짧게 외치더니 원래 가던 길로 사라졌다. 곁에 있던 분에게 청년이 했던 말을 묻자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너 여기 있고 나도 여기 있다, 우리 여기 함께 있자.”
청년이 아리에게 말을 건넨 미테구 모아비트는 거주민의 절반 이상이 이주 배경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베를린에서도 이주민의 비율이 높은 동네이다. 2020년 동상 제막식 직후 미테구청이 보낸 철거명령서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신청서와 달리 전시 성폭력을 상징하는 보편적 기념물이 아니’기에 독일의 공공 장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에 존치운동 측은 되물었다. ‘서구인의 외양을 하지 않고 서구인의 옷을 입지 않은 아리는 보편적 상징이 될 수 없는 것인가?’ 이러한 항변은 지역 주민들의 공감과 연대를 가져왔다.
모아비트에서 40년을 살았다는 주민 요하네스 슈네베르크는 2025년 9월 28일 집회에서 “유색인종의 고통은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인가요, 미테구청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코리엔테이션 활동가 키우 트린 피 반은 10월 7일 집회에서 철거명령은 ‘아시아계 FLINTA*들의 목소리가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음을 보여준다’면서, 이는 ‘식민주의적 가부장적 사고에 깊이 배어 있는 인종차별적 배제 메커니즘을 드러낸다’고 강조했다. 같은 집회에서 미투아시안즈(Metoo-Asians e.V.)의 윤서옥의 발언도 공감을 얻었다.
“혹자는 아리를 보고 “보편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시아 여성의 얼굴을 하고 희한한 복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우리가 여러 행사와 시위에 함께하며 경험한 바로는 아리가 필요한 사람들은 아리에게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과 속삭이고 마주하고 그 상처에 대해 말할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아리를 둘러싼 사람들이 가진, 다른 모습을 한, 같은 상처들을 깨닫고, 이것이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고 존재하는 사회 구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대하고 투쟁합니다.”
베를린에서 40년 간 이어져 온 일본군‘위안부’ 운동, 그리고 지금의 아리 존치운동이 갖고 있는 힘이 여기에 있다. 이 운동이 주류에서 벗어난 혹은 밀려난 소수자들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지난 5년 간 아리 앞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우 인종주의 테러[5], 야지디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이태원 참사와 팔레스타인의 비극까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일어난 일들을 함께 기억하고 애도했다. 그리고 아리는 여기 있어야 한다고, 아리는 우리의 것이라고 외쳤다. 나는 이러한 아리 존치 운동을 ‘퀴어한 연대’로 읽었다. 이는 물론 LGBTQ처럼 하나하나씩 나열되는 성적 정체성들의 집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울 것이다. 퀴어한 연대란 아리 주위에 모여온 사람들이 아리를, 성과 인종, 국경을 가로질러 위태로운 자리에 놓인 몸들이 함께 나타나 추모하고 애도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왔다는 의미이다. 이들은 “아리는 보편적이다(Ari ist Universell!)”, “우리가 아리다(Wir sind Ari)”라고 외치면서 저마다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자리에서 출발하는 보편을 만들어왔다.
글을 시작하며 변희수 하사와 이은용 작가의 이야기를 잠시 비추었다. 세상을 떠난 친구들의 숫자가 열 손가락을 넘어갈 즈음, 나는 베를린의 아리와 이를 둘러싼 싸움을 알게 되었다. 나고 자란 땅에서도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소수자들과 살던 땅에서 떠나온 이들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함께 해방을 꿈꾸며 투쟁할 수 있다고, 거기서 시작하는 평등의 가능성을 믿으며 우리가 만난 아리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