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당시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오늘날의 나마비아)에서 독일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헤레로인과 나마인들이 독일 제국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 제국은 헤레로인과 나마인을 사막으로 내몰았고 독일군의 봉쇄로 사막에서 탈출할 수 없었던 헤레로인과 나마인 수만 명이 탈수와 기아로 사망했다. 1985년 UN이 발표한 휘태거 보고서는 이 사건을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 사례 중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독일 정부는 2016년에 이 일을 인종학살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나미비아에 대한 메르켈 수상의 공식 사과는 독일 사회 각계의 요구에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독일 한인 2세들이 2008년 베를린에서 결성한 이주민 자조단체에서 출발하였다. 처음에는 파독 노동자 2세를 비롯한 한인 커뮤니티의 관점을 대변하며 독일 정부·지자체에 정책을 제언하는 한편, 학술 워크숍, 아시아영화제, 전시회 등을 통해 독일 사회에 한국을 알려왔다. 이후 중국, 베트남계 등 다른 아시아계와 연대해 반(反)아시아계 인종차별에 대응하는 쪽으로 활동을 넓혔고, '아시아계 독일인(Asiatisch-Deutsch)'이라는 자기규정과 정체성을 독일 사회에 뿌리내리게 한 대표적 시민단체로 성장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Auschwitz Birkenau)독일 제3제국 최대 규모의 강제수용소였던 곳으로, 요새화된 벽, 철조망, 발사대,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에서 대량 학살이 벌어진 현장이다. 조사와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가 유대인이었던 150만 명의 수용자가 이곳에서 ‘체계적으로’ 굶주림과 고문을 당한 뒤 살해되었다.
독일 베를린 미테구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의 고유 이름. 아르메니아어로 '용기'를 뜻한다. 평화의 소녀상이 해외에 처음 설치된 곳은 주민의 약 40%가 아르메니아계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튀르키예에 의한 집단학살의 기억을 공유한 아르메니아인들의 연대가 이곳 평화의 소녀상 건립의 동력이 되었다. 한편 '아리' 이전부터 코리아협의회가 보유해온 플라스틱 모형 소녀상의 이름은 '용이'로, 역시 '용기'에서 따온 것이다. 용이는 현재 코리아협의회가 운영하는 베를린 일본군 '위안부' 박물관 '무언다언(無言多言)'에 놓여 있다.
과거사 청산과 화해에서 독일은 일본의 대립 모델로 여겨진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글은 나치 정부로부터 피해입은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다.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미국보고서 자료해제 2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미국보고서 자료해제 3부.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
전범 자필진술서는 전쟁 범죄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 사죄의 의미나 용서 등 여러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면에서 여러 화두를 던지고 있다.
전쟁 후 네덜란드는 전범재판을 위한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Temporaire Krijgsraad in Batavia)을 실시하였는데, 이 재판은 전쟁 중 행해진 성폭력과 일본군‘위안부’ 관련 사건을 다루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독일의 소녀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 건립되었을까. 이 글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소녀상 건립이 공론화된 2016년부터 지금, 여기 이 쉼표 지점까지의 이야기다.
무책임한 일본 정부를 압박할 때 자주 소환되는 '과거 청산 모범국' 독일. 그러나 독일에서도 성 강제노동 피해자들은 이중 삼중으로 배제되었고, 지금까지 법적 피해자 지위 인정은 물론 배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독일의 소녀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 건립되었을까. 이 글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소녀상 건립이 공론화된 2016년부터 지금, 여기 이 쉼표 지점까지의 이야기다.
평화의 소녀상은 이제 여성 인권의 상징으로, 베를린 미테구 모아빗에서 수많은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평화를 전파하게 되었다. 아픈 자에 공감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평화이다. 베를린 주민들은 이제 평화의 소녀상을 향해 외친다. “평화의 소녀상은 우리의 소녀상!“
베를린 ‘위안부’ 운동 40년과 소녀상 ‘아리’ 존치운동에서 확인하는 빛나는 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