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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소녀상, 인권·평화 메시지 안고 이탈리아 스틴티노에 당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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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상, 인권·평화 메시지 안고 이탈리아 스틴티노에 당도하다 2024년 6월 22일, 남유럽의 변방 이탈리아 사르데냐섬 스틴티노시에 해외로는 14번째, 유럽에서는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에 이어 2번째로 '평화의 소녀상'이 제막되었다. 알고 보니 스틴티노시는 여성인권변호사 출신이 현직 시장이고, 소녀와 여성들이 자신의 삶과 기회를 주도할 수 있는 세상을 희망하는 '소녀의 권리 헌장'을 채택하고 성폭력 피해 여성을 기리는 벤치까지 설치한 성평등 도시였다. 토리노대학교 주세삐나 데 니콜라 교수가 시장 인터뷰를 포함해 제막식 이후 현지 소식을 보내왔다. '깎아내'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내는 행위인 조각. 이 도구적 활동을 인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 활동으로, 또 특별한 경험과 기억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념하는 메시지와 상징으로 발전시켜 왔다. 조각상이 표현과 의사소통, 지식과 통제의 도구 역할을 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타임캡슐로 비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이 녹아 있는 조각상은 나아가 한 나라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공하기도 한다. 기념 또한 개인은 물론 특별한 경험을 공유한 공동체의 의지와 행위를 응축한 행위이자 불법부당한 권력의 폭력으로 고통받거나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이다. 또 과거를 되짚어보고 현재의 문제를 다루는 또 하나의 수단이기도 하다. 폭력적인 갈등이 끝난 후 사회적 회복을 촉진하거나 희생자를 위한 추모 의식, 불공정과 차별의 극복, 그리고 정당한 단죄 욕구를 반영하려는 의지인 기념 행위는 사회 전 영역에서 화해와 포용, 지속 가능성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으로 연결된다. 국가를 비롯해 크고 작은 수많은 공동체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기념 동상을 세우는 배경이다. 남유럽의 변방 이탈리아 스틴티노시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2024년 6월 22일, 오래 전부터 아름다운 바다와 매혹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관광지로 각광받으며, 전 세계 부호들의 요트가 정박해 있는 유명 휴양지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 스틴티노시가 전쟁과 여성 인권에 대해 말하는 용기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곳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함께 전시 성폭력 문제, 평화의 메시지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것이다. 시청에서 약 200m 떨어진 해변가, 스틴티노시가 제공한 공공부지에 자리잡은 소녀상은 해외에서는 14번째, 유럽에서는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에 이어 2번째로 설치됐다. 소녀상은 어떻게 남유럽의 변방인 스틴티노시까지 올 수 있었을까.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기억연대)'의 제안을 인권변호사 출신의 리타 발레벨라(Rita Vallebella) 스틴티노 시장이 수용하면서 성사됐다. 이는 현지 언론의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기리는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아프리카의 여성들, 그리고 가정폭력을 겪는 여성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모든 여성을 대표합니다." 지역 언론 <today.it>[1]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밝힌 리타 발레벨라 시장은 소녀상으로부터 여성의 몸에 대한 잔혹행위와 함께 지역사회와 국가, 국제사회에서 평화를 대변하고자 하는 영감을 받았고, 이를 스틴티노 시민들이 수용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발레벨라 시장의 이력과 스틴티노시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면 이곳에 소녀상이 올 수 있었던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2년 전 선출된 발레벨라 시장은 변호사로, 여성과 폭력에 관한 문제에 항상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고, 유럽의회에서 자문 역할을 했던 경험도 가지고 있다. 또 스틴티노시는 '소녀의 권리 헌장(Carta dei Diritti della Bambina)[2]'을 채택한 사르데냐 섬 지자체 중 하나이다. 이 헌장은 소녀와 여성들이 자신의 삶과 기회를 주도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2023년 3월,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중 하나를 접하고 있는 스틴티노시의 포르토 베키오(Porto Vecchio)에는 성폭력 피해자인 모든 여성들을 기리는 세 개의 빨간 벤치도 설치돼 있다. 또 다른 지역 신문 <Unione Sarda>에 따르면, 평화의 소녀상 개막식에는 시민들과 스틴티노 시장, 한국에서 온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을 비롯해 인근 도시의 시장과 부서장들 외에 지역 아동 및 청소년 권리 보호 기관, 권리 및 평등 기구의 지역 대표, 여성폭력방지협회 회장, 사르데냐 섬의 또 다른 도시인 사사리(Sassari)시의 여성 권리 보호를 위한 변호사네트워크협회 등도 참석했다. 평화의 소녀상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스틴티노시가 보여준 관심과 참여는 이 도시가 정의와 인류애에 대한 헌신, 여성 폭력에 대한 관심과 해결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 곳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024년 8월 26일, 발레벨라 시장과 직접 전화 통화가 연결됐다. 그녀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여성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폭력 문제에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정의기억연대의 요청으로 제막식 등의 행사 홍보대사로 선정된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여성 인권을 위한 활동과 싸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스틴티노시는 성폭력을 주요 주제로 하는 국제회의의 무대가 될 겁니다." 이탈리아의 비극적인 전시 성폭력 사례인 '마로키나테' 사건 전쟁은 지구상의 많은 지역에서 여성의 몸을 도구로 사용해 왔다. 실제로 여성의 성적 예속 현상과 군사적인 남성 패권은 전쟁 중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 여러 전쟁에 연루된 많은 여성들이 겪은 공통의 경험이다. 이는 이탈리아의 역사에서도 발견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발생했던 '마로키나테(Marocchinate)'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이곳은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서 약 90km 떨어진 프로시노네시(Frosinone)의 치오치아리아(Ciociaria) 지역에서 수천 명의 여성이 겪은 사건으로, 일본군'위안부'의 문제처럼 오랫동안 침묵 속에 덮여 있었다. 비극은 1944년 5월, 프랑스 장군 알퐁스 주앵(Alphonse Juin)이 나치 점령군이 주로 주둔하고 있던 몬테카시노 마을에서 이탈리아를 둘로 나누고 있던 구스타프 선을 돌파하고 마을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의 지휘 아래 모로코 출신 남성들로 이뤄진 군대 '구미에르(Goumiers)'를 소집하면서 촉발됐다. "저 산 너머, 오늘 밤 당신들이 무찌를 적들 너머에는 넓은 땅이 있다. (…) 여인과 포도주, 집이 가득한 땅이다. (…) 당신들이 승리한다면 그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빼앗거나 파괴하거나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들이 그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면 말이다."[3] 이후 50시간 동안 구미에르에게 치오치아리아 지역을 누빌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주민들은 며칠 동안 혼란과 공포에 빠졌다. 이때도 비극은 속임수와 지켜지지 않은 약속 속에서 벌어졌고, 많은 시민들(특히 여성들)이 구미에르 군대에 의해 자행된 신체적, 성적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됐다. 당시의 공포를 전하는 수많은 증언 중에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어머니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던 자녀들의 기억도 있다. 또한 '마로키나테'의 피해자인 어린 소녀 가운데는 자신들이 겪은 폭력과 사회적, 심리적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결정한 경우도 있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로키나테의 희생자들도 집단적인 차별과 역사적인 소외의 대상이 되었고, 이는 그들을 하위 사회 영역에 머물게 했다. 특히, 현재는 대부분 사망한 당시의 생존자들은 여러 인터뷰에서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고립과 소외, 차별을 당한 경험을 보고했다.[4] 그럼에도 국가는 모호한 입장을 보이며, 마로키나테 사건을 이미 법적으로 다루고 해결된 다른 모든 전쟁 범죄와 같은 수준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피해자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 슬픈 역사적 사건은 알베르토 모라비아(Alberto Moravia)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비토리오 데 시(Vittorio De Sica) 감독의 영화 <라 치오치아라(La Ciociara. 두 여인)>에서 주인공 소피아 로렌(Sophia Loren)의 연기로 고발되기도 했다. '전쟁은 적군도 아군도 없고 승리와 패배도 없으며 남는 건 오직 죽음과 상처 뿐'임을 전하는 열연으로 소피아 로렌은 1962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일 정부의 비문 제거 요청 단호히 거절한 스틴티노시 시장 다시 '평화의 소녀상' 이야기로 돌아오자. 제막식 소식을 전하던 지역 신문과 언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과 일본 간의 논쟁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논쟁은 <Il Foglio>, <La Repubblica> 같은 일부 전국지에도 보도됐다. 신문 <Il Foglio>[5]는 "개막식에는 사실 이탈리아 기자들보다 아시아 기자들이 더 많이 있었다. 일본은 오랫동안 다른 나라에 이 동상이 세워지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고 소개했다. <The Post Italy>[6]의 보도는 좀더 상세했다. "스틴티노시에서의 동상 개막식은 사토시 스즈키(Satoshi Suzuki) 주이탈리아 일본 대사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리타 발레벨라 시장을 만나 행사 연기와 조각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비문의 재고를 요청했다. 그 비문에는 일본이 자국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강간당한 여성들의 가족에게 결코 보상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 정부에 따르면 그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7]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발레벨라 시장에게 물었다. 시장은 일본 대사가 비문에 쓰인 내용뿐만 아니라 비문 자체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던 사실을 전했다. 이에 대한 발레벨라 시장의 답변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저는 피해자들의 편에 서 있습니다. 이는 일본의 식민지 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 군인들의 성적 쾌락을 위해 동원된 수십만 명의 한국인과 중국인 여성들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이번 결정에 대해 정치적 목적을 갖고 해석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일본 대사에게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한 것은 누구를 반대하거나 누구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분쟁 중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습니다." 발레벨라 시장은 비문과 관련해 확인한 후 내용에 오류가 있으면 수정할 의향이 있으나, 공식적인 입장을 듣기 위해 한국 당국에 직접 연락했지만 현재까지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이어 소녀상과 비문은 모든 사항이 명확해질 때까지 현재 상태로 유지될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시장은 또 소녀상 설치 후 위협과 모욕을 담은 가짜 이메일을 많이 받고 있다는 어려움(일본의 극우 지지자들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과 함께 스틴티노시를 방문한 아시아 관광객들이 평화의 소녀상에 꽃다발과 편지를 놓고 갔다는 소식도 알려주었다. 일본 정부가 2020년 9월 소녀상을 먼저 설치한 독일에 지속적으로 행사한 외교적 압력은 물론 존치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 베를린시의 카이 베그너(Kai Wegner) 시장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발레벨라 시장은 독일에서 일어난 것처럼 찬반 시위가 발생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확실한 것은 스틴티노시에 설치된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논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틴티노시 평화의 소녀상이 응시하고 있는 미래 한편 유럽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곳이 독일과 이탈리아라는 점은 상징적이다. 두 나라가 1940년 9월 27일 일본과 함께 체결한 '삼국 동맹(Tripartite Pact)'을 체결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세 나라 간의 군사 동맹을 공식화했으며, 이후 이들은 '추축국'으로 불렸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유럽에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도력을 인정'했다고 한다.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과거와 독일의 나치 과거를 고려한 일종의 '무의식적인 책임감'일까.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자행한 '위안부' 문제는, 특히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 동안 학자, 연구자, 문서화된 조사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 문제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도 포함되며, 네덜란드 등 당시 이 지역에 있던 서양 국가들의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스틴티노시에 소녀상이 설치되면서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문제는 점점 국제적인 이슈로 확대되고 있다. 이제 관련 당사자들은 국제 기관인 유엔(UN) 등을 통해 궁극적인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피해자들에게 존엄성을 되돌려줘야 한다. 이를 위해 '위안부'라는 용어 대신 보다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피해 여성들이 수십 년 동안 겪어온 낙인을 지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쟁 피해자'나 '강제 수용자'라고 부르면서 모든 폭력, 피해, 학대를 겪은 사람들과 동등하게 다루면 어떨까. 스틴티노시 평화의 소녀상이 응시하고 있는 곳은 이러한 관점을 확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각주 ^ https://www.today.it/attualita/stintino-capitale-delle-donne-sardegna-corea-giappone.html, 2024년 7월 2일. ^ 소녀의 권리 헌장 은 F.I.D.A.P.A. BPW Italy (이탈리아 여성 예술, 직업, 사업 협회 – Business and Professional Women)에서 작성한 문서로, BPW (국제 전문 여성 단체)의 다른 국제 지부들과 협력하여 작성되었다. 이 문서는 UN(유엔)의 "아동 권리 헌장"을 확장하고 각색한 버전으로, 성별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소녀와 여성을 위한 평등과 존중의 문화를 촉진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 헌장은 소녀의 권리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기관의 관심을 높이고, 그들에게 보호를 보장하며 어린 시절부터 성 평등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 Stefania Catallo. (2017) "La Memoria Scomoda della Guerra: le Marocchinate" Universitalia. ^ 2022년 3월, 아리안나 스파치아니(Arianna Spaziani)가 작성한 연구 '침묵의 시작과 끝: 변영주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본 위안부의 증언, 낮은 목소리', 로마 사피엔자 대학교(Sapienza University of Rome) 학사 논문, 지도교수 주세삐나 데 니콜라(Giuseppina De Nicola). ^ https://www.ilfoglio.it/esteri/2024/06/25/news/il-passato-fra-tokyo-e-seul-che-torna-e-mette-in-mezzo-la-nostra-stintino-6682249 , 2024년 6월 25일. ^ https://www.ilpost.it/2024/06/23/statua-corea-giappone-stintino/ 2024년 6월 23일. ^ 스틴티노시 평화의 소녀상 비문 일부. "일본 정부가 계속해서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독일, 필리핀 등 여러 나라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일본은 여성과 인류에 대한 전쟁 범죄를 책임감 있게 인정하고 그러한 잔학행위를 기억하는 데 정의로운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 https://womenandwar.net/article/?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28456807&t=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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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오늘날 일본의 성 착취와 여성혐오에 맞선 콜라보(Colabo)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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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개인적이지 않은 목소리들(Voices No Longer Personal)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Until we find each other, we are alone).” -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여성 연대(solidarity)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세계 여성 폭력의 현주소를 성찰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와 인종 차별의 잔재가 높은 여성살해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가정폭력을 피해 거리로 내몰린 가출 청소년들이 성착취와 성매매 산업의 먹잇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시아 칵번(Cynthia Cockburn)이 제시한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사회적 구조와 규범이 전시와 평상시를 관통하는 성폭력의 근본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연속체론(continuum theory)을 상기시킵니다. “전쟁? 나에게 전쟁 이야기를 하지 말라. 나의 일상이 이미 충분히 전장과도 같다(War? Don’t speak to me of war. My daily life is battlefield enough)”고 말하며 오늘도 분투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사야카 채터니(Sayaka Chatani) 교수와 헬렌 스캔런(Helen Scanlon) 교수의 글로 만나보시죠. 8년 전, 아유미는 절망 끝에 콜라보(Colabo)에 전화를 걸었다. 아유미는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쫓겨나 할머니 집으로 갔지만, 그곳에서 삼촌에게 강간을 당해 임신했고 낙태 수술을 받았다. 아동복지센터 직원에게 삼촌에게 당한 일을 털어놓았지만 직원은 아유미를 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센터는 아유미가 병적인 거짓말쟁이라는 부모의 말을 믿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아유미는 돈 한 푼 없이 도시를 배회했고, 성 착취의 쉬운 표적이 됐다. 도쿄의 밤 산업만이 소녀가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지친 아유미는 비슷한 상황에 처한 친구들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했지만, 그중 한 명에게 속아 학교 교사들을 위한 난교 파티에서 매춘을 해야 했다. “처음 유메노 씨와 통화할 때 너무 힘들어서 큰 소리로 울었어요.” 아유미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1] 아유미는 빈곤, 성적 착취, 노숙,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부재라는 깊은 심연 속에서 살아온 수많은 소녀들 중 한 명이다. 소녀들의 옷과 휴대용 통신 기기는 지난 수십 년간 변화를 거듭했지만, 곤경에 처한 소녀와 여성을 착취하는 성 산업은 변함없이 건재할 뿐 아니라 그 모집 방식이 더욱 교묘해지고 성 서비스는 더욱 다양해졌다. 성 착취의 확산에 기여하는 것은 비단 업계 관계자와 소비자만은 아니다. 일본 사회 전체가 이들에게 방대한 공간과 자유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 사회에서 성 서비스는 고도로 상업화되었고, 소녀들의 가치를 성적 도구로 전락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소녀들의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기본적인 자기 존엄성마저 훼손되고 있다. 이것이 일본군‘위안부’의 역사를 정직하게 마주할 수 없는 사회의 모습이다. 성폭력이 폭력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콜라보는 아유미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2011년에 설립된 콜라보는 성 착취와 성폭력,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소녀와 젊은 여성들을 위한 또래 조직으로 활동해 왔다. 2023년 2월, 필자는 웹진 〈결〉의 편집부로부터 콜라보에 관한 글을 기고해 줄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받았고 이에 흔쾌히 응했다. 콜라보에 대한 괴롭힘과 훼방이 날로 심해지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콜라보와 설립자인 니토 유메노(Nitō Yumeno)에 대한 공격은 소름 끼치게도 ‘위안부’ 여성들을 지지하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최근 몇 년간의 반발을 떠올리게끔 했다. 필자는 먼 곳에 있는 콜라보의 작은 지지자이자 니토의 출판물을 읽는 독자에 불과하지만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사회적인 여성혐오의 가공할 위력은 콜라보에 대한 추악한 부정주의와 왜곡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이 익숙한 데자뷔는 필자에게 잠 못 이룰 분노를 안겨 주었다. 콜라보의 사명은 단순명료하다. “우리는 모든 소녀들이 의식주를 누리고 사람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사회, 어려움에 놓인 소녀들이 착취당하거나 폭력에 노출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2] 니토와 콜라보의 도움으로 삶을 회복한 소녀들을 포함한 콜라보의 직원들은 이러한 소녀들이 처한 상황에 귀 기울이고, 음식과 쉼터를 제공하며,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또한 변호사에게 법적 도움을 구하며, 산부인과에 동행하고, 소녀들을 대신해 시의 관료 및 학교 관리자와 협의에 나서기도 한다. 대다수 공공 프로젝트와 달리 콜라보의 돌봄 활동에는 정해진 종료 시점이 없으며, 측정 가능한 결과에만 의존해 성과를 평가하지도 않는다. 공공 쉼터나 관공서에서 일반적으로 준수하는 엄격한 프로토콜을 따르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입소문으로 콜라보를 찾아온 많은 소녀들은 그 신속한 대응에 놀라워한다. 콜라보는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소녀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족 같은 분위기”나 “생존을 위한 팀” 등-를 제공하며, 무조건적이되 구속하지 않는 자매애를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콜라보의 설립자인 니토는 이 소녀들의 큰언니이자 선구적 활동가이다. 그 역시 고교 시절 부모의 학대, 학교와의 단절, 성 착취, 자살 충동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경험이 있다. 니토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소녀들의 곤경을 더 큰 사회적 문제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 농업 교사 겸 난민 활동가를 비롯한 여러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변화의 촉매제가 되었던 또 다른 사건으로 니토는 필리핀 여행을 자주 언급한다. 여행 기간 니토는 일본식 이름을 가진 10대 매춘부들을 찾아다니는 일본 남성들을 목격했다. 그는 2011년 지진 이후 미야기현뿐만 아니라 도쿄도에서 10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이것이 지금의 콜라보로 이어졌다.[3] 니토는 공개 강연과 저작을 통해 성 산업에 동원된 소녀들의 암울한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4] 그는 소녀들을 노리는 모집책들이 어떤 수법을 사용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녀들의 증언을 통해 이들이 왜 이런 남성들을 믿게 되는지 알 수 있다. “매니저는 매우 친절했고 제 말을 잘 들어주었어요.” “모집책이 (성 서비스를 제공할 여자를 보내 달라는) 다음 콜이 오기 전에 단체 대기실에서 쉴 수 있다고 했어요.” 콜라보는 이러한 모집책들이 그래 왔듯, 길거리에서 소녀들에게 말을 걸며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소녀들의 아이디어를 통해 탄생한 야간 버스 카페는 음식, 옷, 생필품이 갖추어져 있고, 성 착취 대상을 노리는 남성들에게서 안전한 임시 피난처가 되어 준다. 소녀들은 이곳에서 콜라보의 직원과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니토는 콜라보를 ‘또래’ 단체로 운영하기 위해 세부적인 사항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콜라보 직원들은 연대하려는 소녀들과 옷차림과 말투를 비슷하게 맞춘다. 보통 식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첫 상담에서 소녀들은 직원들이 “아동복지센터의 직원과는 매우 다르”다는 인상을 받는다. 니토의 유튜브 영상과 트위터 게시물에는 “きもい(징그럽다),” “うざい(짜증난다)” 등의 은어가 자주 사용되며, 이는 소녀들의 본능과 표현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콜라보의 직원들은 몰이해한 학교 교사들과 달리 소녀들의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고 조언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콜라보는 소녀들의 생일을 함께 축하하는데, 다수의 소녀들에게는 단지 태어났단 사실만으로 축하를 받는 일조차 처음 겪는 일이다. 니토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콜라보의 활동은 ‘소녀들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소녀들과 함께 하는 것’임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조차 ‘지원’의 한 방식으로 간주되는 현실이 답답하다.”[5] 이 소녀들에게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는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할머니들의 증언에 깊이 공감한다. 2016년, 소녀들은 일본군에게 착취당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전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들의 전시회인 ‘우리는 매매되었다(We Were Bought)’를 개최했다. 명품 가방을 원해서 중년 남성을 이용했다는 식의 흔히 퍼져있는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소녀들은 고통받고 있다. 소녀들은 전시회를 통해 노숙, 학대, 따돌림, 성폭력은 물론 경찰, 교사, 아동복지센터의 방관, 손목 자해[6]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출판물을 살펴보면 소녀들은 사회적 담론을 내면화한 결과 “살아남기 위해 즐기는 척해야 했다,” “SM 섹스 플레이의 여왕이 되는 걸 목표로 삼기도 했다” 등의 증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 ‘위안부’ 여성들과 콜라보 자매들이 보여준 용기는 소녀들이 이러한 덫에서 벗어나 학대와 성 착취라는 더 넓은 역사적 시각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니토 유메노는 소녀들의 대변자로서 트위터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소녀들에게 스토커, 포주, 부모를 피할 수 있도록 소셜 미디어에 자신을 노출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한편, 소녀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로 결심한 니토는 온라인 여성혐오 공격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니토가 주목한 문제 중 하나는 온천 휴양지 마을의 마케팅 전략이다.[7] 명백히 성적 대상화된 10대 초반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침대에서 깜짝 방문을 기다리고 있어요” 같은 노골적인 대사를 내뱉는 식이다.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일상적인 성 상품화에 대한 니토의 강력한 비판은 안타깝게도 이를 무해한 환상과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으로 여기는 이들의 분노를 샀다. “급진 페미니스트의 공격을 받고 있다”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남성들 중 일부는 지난 수년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니토와 콜라보에 대한 스토킹과 협박을 일삼아 왔다. 2022년 여름, 전례 없는 규모의 사이버 괴롭힘이 시작됐다. 이러한 괴롭힘을 주도한 히마소라 아카네(Himasora Akane)[8]라는 트위터 계정 소유자는 콜라보의 공식 페이스북 계정과 웹사이트에 게재된 사진 및 데이터를 심각하게 왜곡해 지속적으로 계정에 올렸다. 예를 들어, 콜라보는 소녀들이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월 생활비를 계산하고 있는 사진을 올리고, 141,000엔에서 163,000엔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히마소라는 소녀들이 해당 금액을 사회 복지 보조금으로 수령해 왔다는 인상을 주도록 자료를 조작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보조금을 불법으로 취득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또한 콜라보의 전체 연례 보고서와 도쿄도 위탁 프로젝트의 보고서를 비교하면서, 보고서 형식이 달라 존재할 수밖에 없는 수치 차이를 공적 자금 남용의 증거로 지적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얼핏 보기에도 앞뒤가 맞지 않지만, 그의 공세가 계속되면서 일종의 운동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콜라보 법률팀의 집계에 따르면, 히마소라 아카네는 2022년 7월 12일부터 11월 28일까지 불과 몇 개월간 콜라보를 공격할 목적으로 총 900건의 트윗(최소 17만 건 이상 리트윗)과 27건의 웹 포털(note.com) 게시물, 30건의 유튜브 동영상(조회수 1,198,181회)을 유포했다. 이 매체들을 통해 그는 콜라보가 소녀들의 사회 복지 보조금을 가로채고 열악한 환경에서 노예처럼 부리며 공짜 노동력으로 사용하고 있고, 세금을 도둑질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끊임없이 날조했다. 2022년 11월, 그는 도쿄도에 콜라보 프로젝트에 대한 감사를 요청했고, 그 결과 발표된 제3자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콜라보는 공적 자금을 횡령하기는커녕, 자체 자금까지 동원해 위탁 프로젝트를 완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감사 과정에서는 필수 제출 대상이 아니었던 추가 자료까지 검토되었지만, 히마소라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가 콜라보와 니토에게 저지른 짓은 명예훼손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에 콜라보 법무팀[9]은 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으로 콜라보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필요한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끔찍한 결과는 트위터와 유튜브에서 여성혐오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히마소라의 주장은 쉽사리 반박 가능할 정도로 허술했지만,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게시물을 열심히 퍼 나르며 ‘좋아요’와 감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오타 케이코(Ōta Keiko) 변호사[10]는 말한다. “왜곡이 심할수록 관심과 ‘좋아요’를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유포됩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요컨대 여성혐오로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합니다.” 히마소라는 계정을 통해 “당신(니토)이 모에에(萌え絵: 어린 소녀를 성적 대상화하는 경향이 있는 애니메이션 작화)를 태우는 짓을 중단하면 나도 멈추겠다”라고 말했다. 이는 그의 괴롭힘이 온천 홍보 캐릭터에 대한 니토의 비판을 상대로 한 보복 행위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일련의 혐오 운동은 빠르게 확장되었고, 가담자들이 ‘페미니스트’로 간주하는 대상에 대한 반발을 실체화했다. 이들이 내세우는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콜라보의 실제 활동이 어떠했는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러한 운동은 날로 힘을 얻었다. 그 결과는 심각했다. 2023년 초, 선출직 관료를 포함한 다른 가해자들이 버스 카페에 모여들어 콜라보를 소리쳐 비방하면서 이를 촬영하기 시작했다.[11] 콜라보는 소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해자들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확보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2023년 3월, 도쿄도는 ‘안전’을 이유로 법적 보호가 보장된 장소에서조차 버스 카페 운영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또한 도쿄도는 콜라보의 기존 프로젝트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콜라보가 겪어야 했던 이 모든 역경은 비극적이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왜곡과 여성혐오,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와 지원자들을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돈벌이꾼으로 가스라이팅하는 패턴을 목도해 왔다. 우리는 눈앞에서 그런 일이 몇 번이고 일어나도록 방치했다. 하지만 콜라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여성 자원봉사자들이 버스 카페에 모였고, 이들은 가해자들을 막아서는 보호벽이 되어 주었다.[12] 또한 도쿄도의 결정에 항의하고자 모인 여성들도 있었다. 니토 유메노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4월에 다른 장소에서 버스 카페를 다시 열었다. 그는 말했다.[13] “버스 카페를 운영할 수 없었던 한 달 동안 임신한 소녀들에게서 많은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 한 달은 많은 소녀들에게 매우 길고 힘든 시간이었을 겁니다.” 콜라보는 현재 전적으로 시민들의 기부로 운영되고 있다. 기부 관련 정보는 공식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14] 니토의 주요 저서 목록 Nitō Yumeno, Nanmin kōkōsei: Zetsubō shakai o ikinuku ‘watashitachi’ no riaru(난민 고교생: 절망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Tokyo: Eiji shuppan, 2013. Nitō Yumeno, Joshi kōsei no urashakai: “Kankeisei no hinkon” ni ikiru shōjotachi(여고생들의 암흑세계: 인간관계의 빈곤 속에 사는 소녀들),Tokyo: Kōbunsha shinsho, 2014. Nitō Yumeno ed., Atarimae no nichijō o teniireru tameni: seisakushu shakai o ikiru watashitachi no tatakai(평범한 일상을 위해: 성 착취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투쟁), Tokyo: Kage shobō, 2023. 니토의 소셜 네트워크 계정 https://www.facebook.com/yumenyan https://twitter.com/colabo_yumeno 콜라보 공식 웹사이트 및 소셜 네트워크 계정 https://colabo-official.net/ https://www.facebook.com/colabo.official 각주 ^ Nitō Yumeno ed., Atarimae no nichijō o teniireru tameni: seisakushu shakai o ikiru watashitachi no tatakai(평범한 일상을 위해: 성 착취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투쟁), Tokyo: Kage shobō, 2023, 29-30. ^ https://colabo-official.net/projects-english/ ^ Nitō Yumeno, Nanmin kōkōsei: Zetsubō shakai o ikinuku ‘watashitachi’ no riaru(난민 고교생: 절망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 Tokyo: Eiji shuppan, 2013. ^ 고도화된 대규모 성 산업은 미성년 소녀들에게 다양한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표면적으로 ‘여고생(joshi kōsei)’을 공공연히 성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이러한 관행을 조장하며, 이를 ‘JK 비즈니스’로 명명한다. 따라서 이들은 소녀들에게 교복을 입고 ‘관광객’을 접대하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콜라보는 약 5,000명의 청소년이 이러한 ‘JK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감독자 없이 노래방과 같이 고립된 공간에서 고객들은 ‘옵션’으로 성 관련 서비스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 단계에 접어들면 더욱 명백한 성 산업에 발을 들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게 된다. 이들 중 다수의 소녀들과 이미 성인이 된 소녀들은 성 산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한다. Nitō Yumeno, Joshi kōsei no urashakai: “Kankeisei no hinkon” ni ikiru shōjotachi(여고생들의 암흑세계: 인간관계의 빈곤 속에 사는 소녀들),Tokyo: Kōbunsha shinsho, 2014. ^ Nitō ed., Atarimae, 6. ^ Nitō ed., Atarimae, 80-89. ^ https://twitter.com/colabo_yumeno/status/1460060377379602434?s=20 ^ https://twitter.com/himasoraakane ^ https://colabo-official.net/wp-content/uploads/2022/11/221129.pdf ^ https://colabo-official.net/wp-content/uploads/2023/01/cee5ab6bd71bcd6ccd475b2 ^ https://www.facebook.com/yumenyan/posts/pfbid029WTQHe2gJmHfcxDNVF5aJe6X5omapu8fz6a2dGyib6vJjThhrmQoP4ZwsQPbKf8Kl ^ https://www.kanaloco.jp/news/social/article-966619.html ^ https://www.jcp.or.jp/akahata/aik23/2023-04-21/2023042113_01_0.html#top ^ https://colabo-official.net/sup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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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되살아나는 목소리〉를 통해 본 영화 〈침묵〉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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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수남 감독이 제작하고 있는 장편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의 가편집본을 보며 박 감독님과 감독님의 따님이자 이 영화의 프로듀서인 박마의 씨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전작인 <침묵>(박수남, 2017)의 한국 쪽 제작에 도움을 드렸던 인연으로 나는 감독님의 신작에도 함께 하게 되었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박수남 감독이 일생 찍어왔던, 하지만 긴 시간 깡통 속에 갇혀 있던 과거의 필름 촬영본들이 복원되어 주 재료가 되는 영화이다. 이는 근현대 동아시아의 식민지배와 전쟁, ‘군함도’의 현장 촬영 등을 포함한 조선인 강제징용 및 원폭 피해자 분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반성과 사과는커녕 극단적으로 우경화 되어가고 있는 일본 사회에 일갈하는 이야기이다. 박수남 감독이 평생을 바쳐 이야기하고자 했던 조선인 피해의 역사가, 묻혀 있던 소중한 자료들을 통해 보여지고 들려질 것이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많은 부분 전작 <침묵>과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으며 동시에 영화 <침묵>을 내외적으로 확장하는 자료들과 내러티브, 그리고 박수남 감독의 삶의 역사가 담겨질 예정이다. <침묵> 제작 당시 박수남 감독과 여러 문제로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있다. 박 감독님은 자신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많은 부분들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거나 해석될 수 있는 부분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 같은 것이 있었다. 예를 들면 박수남 감독의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은 대단한 것이었는데, 남북한 그리고 일본 모두는 국가로서 자격 없음, 피해 당사자인 재일조선인과 ‘위안부’ 피해자, 원폭 피해자, 강제징용 피해자만이 말할 권리와 외칠 권리와 배상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을 하는 듯했다. 그 이유는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것들이었고 내가 조금의 반론을 할라치면 ‘그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북한과의 일방적인 관계 단절은 물론, 남한사회 시민단체들에 대한 실망이 컸고, 특히나 함께 운동했던 사람들의 배신과 변절에 상처가 많았다.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 함께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박수남 감독의 글과 영화를 꾸준히 응원하고 지지해온, 이제는 노년이 된 소수의 일본 시민운동가들뿐인 것 같았다.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고 배제당하며 소수자로서 살아왔을 박수남 감독은 코마츠카와 사건(재일조선인 문제)[1]을 통해 민족에 대한 고민이 심화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평생 강제징용 조선인, 원폭피해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오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찾아냈고 이 문제들의 해결이 인생의 큰 목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박수남 감독은 영화 속에서 민족 개념을 앞세워 이 피해의 역사를 드러내는 데에 집중했고 그런 그의 태도가 다소 경직된 이야기 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널리즘 다큐(탐사보도/고발다큐)에 기반한 박수남 감독의 전작들을 보면, <침묵>에서 주요 사건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일본 내에서의 활동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고 다른 영화적 장치 없이 등장인물의 인터뷰와 내레이션으로 그 의미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익숙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건강상 문제로 가졌던 긴 공백기를 끝내고 다시 영화운동에 나서는 박수남 감독에게는 새로운 무엇이 필요해 보였다. 특히 ‘위안부’ 피해자분들을 ‘언니’라 부르며 가족처럼 지냈던 그이기에 이전 영화들과 달리 감독 개인의 역사, 관계의 역사를 이야기로 만들어 영화 속에 넣어보자고 제안했다. 잠시 생각하던 박 감독님은 ‘그렇게 합시다’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렇게 감독님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 이야기들이 생략되고 압축되어 영화 <침묵>의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비국민으로 살아야만 하는 일본 땅에서 조국인 남북한은 박수남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는 어떤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본인을 둘러싼 모든 불의와 부당함과 차별과 부조리함에 맞서 싸워왔다. 그것이 오롯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강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던 박수남 감독, 조금의 틈에도 공격당하기 일쑤였던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삶은 그렇게 다른 소수자들과 연결되어 함께 싸울 수밖에 없는 절대 절명의 것이었다. 다른 소수자들의 삶을 동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연대의 운동이 아니라 어쩌면 집단의 저항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소수자 운동을 할 때 가장 주의할 점에 대해 ‘절대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기, 누구든 100% 믿지 않기’ 등이라고 말했었다. 자신을 포함해 소수자들의 자기 극복의 목적과 이를 실천하는 과정이 다른 소수자들을 억압하는 또 다른 권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구조 속에서 우리 모두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고 인식하는 것, 그리고 소수자들 각각의 차이와 그 정도를 이해하는 것, 이를 공감하고 존중하기 위해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더불어 모두 공존할 수 있는 그런 삶을 그는 꿈꾸고 있었다. <침묵>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재일조선인들이 말하는 국가와 민족은 소위 남북한 땅에서 말하는 그것과는 개념이 다름을 알게 되었다. 이는 분단 전 ‘조선’이라는 실체 없는 국가와 민족을 지칭함을 넘어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으로서 그리고 존재 자체로서 국민국가의 신화에 균열을 주는 세계 인민으로서의 발화인 것이다. 정착했지만 정착할 수 없는 사람들, 부유하며 끝없이 불안한 마음들, 자신을 부정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 이제 이들이 각자의 존재로 증명하는 역사 긍정에 주목하게 된다. 세상 모든 불의한 것들을 부정하고 그것들과 싸워나가는 박수남 감독의 모습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모습에서 작은 희망을 보게 된다. 편집 중인 <되살아나는 목소리>의 한 장면,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박수남 감독이 일본의 ‘60대 맹인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입학식에서는 으레 기미가요(일본 국가)를 불렀던 상황인 것 같다. 기미가요가 흘러나오자마자 보란 듯이 당당히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리는 박수남 감독의 모습이 보인다. 태어나고 자란 곳을 부정한다는 것, 이미 체화된 언어를 부정한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박수남 감독 특유의 시니컬함과 당당함 뒤에 잠깐이지만 고립되고 외로움 가득한 사람이 보였다. 어쩌면 그녀 전체 삶을 관통해왔을 불안함과 외로움 그리고 침묵의 시간들, 그 침묵의 시간을 형상화하고 재현하기 위해 펜 대신 카메라를 선택한 그녀, 이제는 건강이 허락지 않아 예전처럼 현장을 누비진 못하지만 과거의 필름 화면들을 들으면서(감독님은 시력 악화로 영상의 소리만으로 이미지를 파악하고 있다) 따님과 함께 치열하게 편집을 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강한 힘을 느낀다. 한 개인의 삶이 정치가 되고 우주가 되는 경험을 한다. 이 시간이 ‘침묵’을 넘어 ‘되살아나는 목소리’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전하기를 희망한다. 각주 ^ (편집자 주) 1958년 당시 18세였던 재일교포 이진우가 일본인 여학생 두 명을 살해한 사건. ‘이진우 사건’이라고도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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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이 일으킨 성폭력(2) - 위다닌시, 드리스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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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다닌시 씨 이야기 자바섬 서부의 수카부미는 네덜란드식민지시대 때부터 유명한 고급 피서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위다닌시 씨는 수카부미에서 자동차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와룽키야라 마을에 살고 있었다. 위다닌시 씨의 집에서 도보로 약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네덜란드인이 살았던 낡은 집이 있었다. 와룽키야라 마을로 온 일본군은 그 집을 군영으로 삼았다. 마을 사람들은 일본군을 매우 무서워했다. 멀리서 일본군의 모습이 보이면 샛길로 피했다. 샛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길에서 스쳐 지나갈 때는 고개숙여 인사해서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 얽히게 되면 성가신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일본 군정 하에서 조직된 도나리구미(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국민을 통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최말단의 지역조직) 등에게 스파이 용의자 등으로 밀고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일본군이 마을에 온 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일본군이 군영으로 삼은 네덜란드인의 낡은 집에서 어린 여성들이 강제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무 농원에서 일하던 부모님이 집을 비워 저녁에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위다닌시 씨는 대문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나가봤다. 일본군 몇 명이 찾아와 있었다. “간호부로 일하지 않을래?” 어눌한 인도네시아어로 한 군인이 말했다. 당시 위다닌시 씨는 15살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사 일을 돕고 있었다. 위다닌시 씨는 돈을 벌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일본 군인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그 제안은 거절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위다닌시 씨는 무서워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몇 명의 일본군에게 둘러싸여 집에서 조금 떨어진 트럭이 세워진 곳까지 걸어갔다. 눈이 가려진 채로 끌려간 곳은 네덜란드인이 살던 낡은 건물이었다. 위다닌시 씨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죽 장화를 신은 군인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강간했다. 그 군인은 위다닌시 씨가 집에서 끌려왔을 때 병사들을 지휘하던 자였다. 그의 이름이 다나베(タナベ)라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다른 사람들도 차례로 다나베의 뒤를 이어 위다닌시 씨를 강간했다. 낡은 건물이었지만, 위다닌시 씨가 묵은 방은 하얀 회반죽 벽에 아래쪽은 목재로 마감한 세련된 방이었다. 거기에는 처음 보는 6명의 어린 여성들만 있었다. 이들은 거의 매일 그 낡은 건물을 찾아오는 일본군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성병 검사는 일주일에 한 번, 식사는 당번병이 가져왔다. 위다닌시 씨는 거기에 온 병사가 요금을 지불하는 모습은 본 적도 없고 직접 금전을 받은 적도 없었다. 이들은 마당에 나가는 것조차 금지당한 채 계속해서 강간을 당했다. 병사들이 방에 들어오면 위다닌시 씨는 “꺼져”라고 욕을 했다. 그때마다 얼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맞았다. 병사에게 저항하여 식사를 받지 못한 날이 이어졌다. 칼을 빼 들고 “찔러 죽여버린다”고 위협하는 병사도 있었다. 목덜미에 군용 칼끝을 갖다 대고 폭력적인 체위를 강요하는 군인도 있었다. 자주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살해당할 수 있다는 공포 이상으로 강간을 당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4개월 후 일본군 부대가 보고르로 이동하면서 이 여성들도 보고르로 연행되었다. 보고르에서 일본군은 이전에 네덜란드군이 쓰던 시설에 주둔했고, 군 부대 규모는 와룽키야라 마을보다 훨씬 컸다. 근처의 위안소에 와룽키야라 마을에서 온 위다닌시 씨 일행이 포함되어 ‘위안부’의 숫자는 20명으로 늘어났다. 일 년 후 20명 중 4명이 반둥으로 이동되었다. 위다닌시 씨도 반둥으로 이동되어 반둥의 위안소에서 또다시 일 년을 보냈다. 와룽키야라 마을에 있던 부대와는 보고르, 반둥에서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 부대의 병사는 식별할 수 있었다. 마침내 일본군이 패전하면서 위다닌시 씨는 위안소의 생활로부터 해방되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군에게 유린당한 자신의 몸이 저주스러웠다. 위다닌시 씨는 당시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차마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결혼한 언니가 반둥에서 가게를 하고 있었기에 언니네 가게까지 7㎞를 걸어가 그곳에서 일하며 지냈다. 집으로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다. 인도네시아군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새로운 국가로서 나아가기 시작한 때다. 위다닌시 씨는 일본군에게 당했던 일을 부모님에게 숨기지 않고 말했다. 부모님은 자취를 감춘 딸이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딸 찾는 건 포기해. 찾으려고 하면 죽여버린다.” 부모님은 일본군에게 협박을 받았던 것이다. 딸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는 불안감, 머릿속에 떠오르는 딸의 불운, 아버지도 어머니도 일본군에게 위협을 당했고 비탄이라는 감각조차 잃은 채 피폐해져 갔다. 아버지는 어디에도 표출하지 못했던 분노를 5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딸에게 퍼부었다. 일본군의 말과 행동을 통해 아버지는 딸의 불운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하지만 위다닌시 씨가 일본군에게서 받은 피해는 일본군의 잔학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우울해하는 나날이 늘어갔고 건강이 나빠져 일 년 후 돌아가셨다. 위다닌시 씨는 그 후 반둥 출신의 남성과 결혼했다. 남편은 18년 전에 죽었다. 남편에게는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굴욕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기억을 봉인하고 전쟁 이후의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 누워있을 때면 봉인해 두었던 먼 옛날의 기억이 봇물 터지듯 선명하게 밀려들어 왔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불쾌한 감정, 혐오심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라 아픈 몸과 함께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드리스 씨 이야기 드리스 스만포 씨의 아버지는 네덜란드군의 하사관이었다. 드리스 씨는 네덜란드 학교에 다니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드리스 씨가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4년, 집 정원 앞에서 말에 올라탄 일본인 군인이 드리스 씨를 가만히 주시하는 일이 이따금 있었다. 어느 날 밤 그 군인이 집으로 찾아와 “딸을 데려가겠다”라고 부모님에게 통보했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부모님이 살해당할 것이라고 직감한 드리스 씨는 군인을 따라갔다. 수카부미 부눈 거리에 있는 커다란 집에 도착한 드리스 씨는 자신을 끌고 온 가나가와(カナガワ)중위로부터 자신의 아내 역할을 하라는 말을 들었다. 드리스 씨와 같이 장교 등이 혼자서만 끼고 살던 여성들을 인도네시아에서는 ‘친타’라고 불렀다. 가나가와 중위는 드리스 씨가 다른 일본 병사들 근처에는 가지 못하게 주의를 주었으며 외출을 금지했다. 가나가와 중위 곁에는 시중을 드는 당번병인 마치다(マチダ)가 있었다. 가나가와는 평일에는 업무로 집을 비웠고 마치다만 집에 남아 드리스 씨를 감시했다. 드리스 씨는 어머니가 보고싶었지만 마치다의 감시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일본군이 부모님의 집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끌려올 것이라 생각하며 포기하고 말았다. 어느 날 드리스 씨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안 가나가와 중위는 점차 발길을 끊었다. 당시 드리스 씨는 임신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을 때 태내의 생명을 지우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는 젊을 때의 중절은 나중에 몸에 안 좋다며 드리스 씨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신 4개월 무렵이 되자 가나가와 중위는 전혀 집에 오지 않았기에 드리스 씨는 마치다에게 허락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1945년 7월 17일, 불안한 마음을 가진 채 출산했다. 남자 아이였다. 처음 신생아의 얼굴을 봤을 때를 회상하며 드리스 씨는, “슬펐어요.” 이 한 마디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아들, 에디 씨가 10살이 되었을 때 드리스 씨는 아이가 있는 남성과 결혼했다. 에디 씨는 새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고 자신도 예뻐해 준다고 느꼈다. 드리스 씨와 남편의 사이에서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내가 드리스 씨와 인터뷰를 했을 때 이미 드리스 씨의 남편은 돌아가셨고, 드리스 씨는 남편이 데려온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보다 그 아들이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디 씨는 가나가와 중위가 혹시 살아 있다면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드리스 씨는 굳은 표정으로 “만나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오랜 세월 가나가와 중위와 얽힌 모든 기억을 봉인한 채 살아왔던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인도네시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 지역, 점령지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성폭력으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①군이 통솔하여 설치한 위안소, ②소수의 장병과 소부대가 멋대로 만든 ‘강간소’(강간소는 중국에서 사용한 용어로서 이 원고에서는 위다닌시 씨가 처음 끌려갔던 네덜란드인의 낡은 집이 해당된다), ③친타와 같이 한 명의 군인(장교)에게 속한 여성의 사례, ④주둔지 근처의 민가로 침입 후 여성을 납치하여 성폭행하는 경우, ⑤군사 작전 때 한 명 또는 여러 군인들에 의한 성폭력, ⑥항일 세력에 대한 보복으로서의 성폭력, ⑦집단 학살 때의 성폭력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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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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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안세홍(비영리 단체 ‘겹겹프로젝트’ 대표)은 25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14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진에는 그들의 가슴 속 깊은 한이 담겼지요. ‘이것은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당도한 사진 속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안세홍 작가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에서 전합니다.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1) 이수단 이야기 –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4) 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听不东 (팅부동)[1], 왜 같은 말을 자꾸 물어” 백넙데기 1922년 전라남도 승주군에서 태어남. 1939년 18세에 중국 난징, 우한으로 6년간 동원되었다가 중국에 남겨짐. 중국의 옌볜(延边)에서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조선인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만났지만, 내륙 깊숙한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汉)까지 위안소가 설치되고 피해자가 남아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에야 비행기로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당시에는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양쯔강(长江)을 따라 난징(南京)을 거쳐 3일 넘게 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군은 중국 내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해 국민당의 수도이자 교통의 사통팔달인 우한을 점령하려 했다. 일본군은 국민혁명군과 5개월이 넘도록 ‘우한전투’를 치열하게 벌이고서야 우한을 차지했다. 이후 이곳에는 대규모의 일본 해군과 육군 본부가 주둔했고, 군을 위한 위안소도 도시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설치되었다. 대표적으로 양쯔강 가까운 지칭리(积庆里)의 한 골목에는 20개의 위안소가 생겨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300여 명의 일본/조선 여자가 있었다. 그 골목은 도시개발 속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어 그 형태가 유지될 수 있었고, 시에서도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보존하고 있다. 이곳을 처음 찾은 2001년에는 3명의 생존자를 만날 수 있었지만, 90년대 초반에는 13명의 피해자가 생존해 있었다. 우한 시내에서 피해자 하상숙과 김의경을 만나고, 또 다른 피해자 백넙데기를 만나기 위해 하상숙을 따라 택시를 타고 시 외곽으로 갔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 시간을 달려 황피(黄陂)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시장통으로 보이는 골목길에는 상가 문이 닫혀 있고, 그 가운데 백넙데기의 집이 있었다. 그의 집 근처에 다다르자 미리 연락을 받은 그의 아들 내외가 먼저 반겨주었다. 언뜻 작은 식당을 하는 듯 보였고, 피해자가 사는 2층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한국에서 왔어요.” 그는 나의 말을 알아듣는지 마는지 경계하는 눈웃음으로 들어오라는 손짓만 할 뿐이었다. 다른 피해자들과 다르게 우한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교류가 없어 간단한 조선말조차 잊은 지 오래인 듯 보였다. 하상숙을 통해 중국어로 얘기를 나누었지만, 그 조차도 황피 특유의 사투리가 심해 의사소통이 녹록하지 않았다. “할머니 어디서 태어났어요?”라고 묻는 말에 그는 짧게 “세평리”라고만 답을 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지도에서 전라남도 승주군에서 세평마을을 찾을 수 있었고, 호적을 찾아보았지만 그의 이름은 없었다. 남편은 술집으로, 술집은 위안부로 팔아 넘겨 백넙데기는 소작농 집에서 6남매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린 나이에 민며느리[2]로 갔다. 혼례는 치르지 않았지만 남편과는 부부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를 술집에 팔았고, 거기에서 또다시 중국으로 팔려 왔다. 어려서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아서인지 엄마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 120원에 팔려 갔다. 그 돈은 누가 어떻게 가져 갔는지 그는 몰랐다. 처음 도착한 베이징에서는 반점에서 두 달 동안 밥과 빨래를 했다. 그리고 20여 명의 여자들과 상하이를 거쳐 난징에 도착하자마자 일본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흘 동안 있다가 군부대를 따라 우한으로 왔다. 위안소 주인은 장교로 퇴역한 일본인 2명이었다. 우한에서 좀 더 시골로 들어가 군부대가 있는 곳을 옮겨 다니며 군인을 상대했다. 하루는 일본군을 받지 않으려 하자 주인이 들어와 왼쪽 검지를 칼로 잘라버렸다. 잘린 손가락을 사진으로 찍으려 하자 그는 본능적으로 다른 손으로 재빠르게 가렸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위안소에서의 생활에 관해 묻자 “팅부동, 왜 자꾸 같은 말을 물어”라며 화를 냈다. 피해자들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도망가는 일본군이 알려줘서 알았다. 백넙데기와 다른 여자들은 남아 있는 돈을 모아 배를 타고 양쯔강을 따라 한커우(汉口)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결국에는 그곳에 남아 살 수밖에 없었고, 피붙이 하나 없이 여자 혼자 사는 것이 어려워 지금 있는 곳에서 남편을 만나 살았다. 중국도 북한도 아닌 무국적으로 살아남기 나이, 생년 등을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옆에 있던 며느리는 신분증이 따로 없다며, 낡고 작은 수첩을 들고 왔다. 겉면에는 외국인 거류증이라고 쓰여 있었고, 안쪽에는 그의 사진과 5년마다 공안의 확인 도장이 찍힌 내용만이 있었다. 이름도 백넙데기가 아닌 이잉란(易英兰)이라는 중국식 이름이 있을 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50여 년의 세월 동안 시골 마을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요원했다. 일본, 한국, 북한, 중국 등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얘기를 나누는 중간에도 백넙데기는 한국으로 귀국을 준비하는 하상숙을 따라가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머물 곳도 없고 가족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곳을 벗어나려는 그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사진을 찍는 동안 “쌰오 이쌰오(笑一笑)” 웃어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쓴 웃음만이 파인더에 들어오는 것이 그동안 그가 겪은 역경을 보는 듯했다. 2018년 경남지역 역사 동아리 고등학생들과 역사 투어를 위해 난징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가장 컸던 위안소를 전시관으로 개조한 난징리지샹구위안소전시관(南京利济巷慰安所旧址陈列馆昨开馆)을 찾았다. 그곳에는 위안소 제도의 역사와 함께 피해자 개개인의 방이 마련돼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잉란의 이름으로 된 백넙데기의 방[3]이었다. 다른 피해자에 비해 사진이나 유품은 적었지만, 이렇게나마 그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어 반가웠다. 조선인이 아닌 중국인으로나마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에 그 방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사진설명] 점심시간이 되자 그는 만두를 담은 작은 그릇과 나무젓가락을 내밀며 얼른 먹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은 여느 시골 할머니들과 다를 바 없이 친근해 보였다. [사진설명] 작은 서랍장에 담긴 그의 옷가지와 물건이 그가 가진 전부이다. 무엇 하나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만큼 남루해보이지만, 그는 하나하나 다 소중히 여겼다. 각주 ^ “못 알아듣겠다”는 뜻의 중국어 ^ 훗날 며느리로 삼기 위해 데려다 기르는 여자아이 ^ 피해자의 이름으로 된 방에는 위안소를 묘사한 방도 있고, 피해자의 유품을 모아놓은 방도 있다. 기사 게재일: 202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