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검색
-
- 2023년 인터뷰 ‘위민 인 블랙 베오그라드’ 스타샤 자요비치 인터뷰 (2)
-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 - 에이드리언 리치 여성연대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해외 전시 성폭력 및 여성인권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글로벌 여성평화운동 단체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25주년에 항의하는 의미로 일군의 여성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1988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각자 처한 지역과 상황에 따라 전쟁, 군사주의와 폭력이 여성들에게 다르게 경험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위민 인 블랙은 고정된 조직이 아니라 실질적 소통과 행동을 강조합니다. 서울의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이 ‘위민 인 블랙 베오그라드’의 활동가 스타샤 자요비치(Staša Zajović)를 서면으로 인터뷰한 내용, 지금 만나 보시죠.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위민 인 블랙’ 베오그라드 활동에서 예술가들과의 결합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요? 또 활동과 예술의 결합이 일정한 성과를 낳았다면 그 성과가 무엇인지요? 예를 들면 2010년 7월 7일 〈신발 한 켤레 한 생명 A pair of shoes one life〉이라는 기념물을 세우기 위해 캠페인을 했는데, 대량학살 희생자들의 수와 같은 8732켤레의 신발을 세르비아 전 지역으로부터 수집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전쟁에 대해 저항의 미학적 차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는데요, 이 기념물이 정치적으로 어떤 효과를 발생시켰고, 기념물을 마주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 궁금합니다. 스타샤 자요비치 우리가 30년 동안 협력해 온 집단 중 하나인 ‘LedArt’는 당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는 나라에 살 때 미학보다 윤리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우리는 저항의 미학을 창조했습니다. 우리가 세운 공적인 기념물이 우익들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개개인들의 기념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묘지로 가서 무덤 파는 사람에게 8372라는 숫자가 적힌 돌 조각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신발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나는 스레브레니차에서 있었던 행진에 갔고 많은 생존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신발도 없이 도망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만큼의 신발을 모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많이 모으지는 못했습니다. 레스코바츠, 크루셰바츠 등 여러 도시의 사람들이 그 신발을 기부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누군가에게 신발을 요청할 때마다 그 사람은 스레브레니차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써야 했는데, 그러한 행동 자체가 고통의 사회화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백 개의 신발을 모았습니다. 연민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정서적, 도덕적 의미에서 중요한 행동인데 세르비아에서는 매우 어렵습니다. 공감의 부족으로 인해 세르비아가 치른 전쟁의 후과는 이제 세르비아 자신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범죄는 처벌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이들입니다. 모든 사람의 고통은 위계적이지 않고 동등해야 합니다. 우리는 크네즈 미하일라 거리 전체를 신발로 점거했고 막대한 경찰력이 동원되었으며 모든 사람은 무슨 일인지 궁금해했습니다. 희생자들은 당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일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 했으며, 여기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인간성과 존엄성에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세르비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신발과 메시지를 요청하는 것이 매우 피곤해서 우리는 신발을 많이 수집하지 못했습니다. 2008년 우리가 영화 "스레브레니차의 여성들"을 처음 개봉했을 때, 4번이나 큰 스크린에서 상영되었고 아무도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의 여성들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많은 사람이 울었던 평화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불행하게도 스레브레니차 때문에 공격을 받습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스타샤 자요비치님은 원래 활동하던 ‘반전 행동 센터(Centre for Antiwar Action)’에서 활동가들이 평화운동을 하면서도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을 간과한 채 가부장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느끼고, 군사주의에 저항하려면 페미니스트가 주도하는 평화운동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위민 인 블랙’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에는 이러한 고민도 있었을 것 같은데, ‘위민 인 블랙’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 관점/페미니스트들과의 교류 등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궁금합니다. 스타샤 자요비치 문제가 발생한다면 서로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면 되기 때문에 이것이 충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위민 인 블랙’ 안에는 처음부터 남성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정한 공통 교육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위민 인 블랙’ 베오그라드는 남성과 문제가 없었던 유일한 그룹이며, 남성들 가운데에는 탈영병, 반자유주의자, 게이 남성 등이 있었습니다. 남성들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으며 우리는 항상 함께 일했지만, 남성들은 공적인 필요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습니다. 여성이 자신의 견해와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오해가 없도록 모두를 안심시키며 우리가 서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 여성이 공개적으로 눈에 띄는 것이 왜 중요한지 등을 설명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함께 배워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트랜스젠더들과도 일했습니다. 이것은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라 연대의 한 형태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여성 법정을 준비하는 과정이 굉장히 길고 세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때 “보살핌과 책임의 페미니스트 윤리의 정치 덕분에 새로운 페미니스트 지식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1]고 언급하셨는데, 지금 스타샤 님 또는 ‘위민 인 블랙’ 베오그라드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 윤리는 무엇인지, 여성 법정을 통해 만들어낸 페미니즘적 지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여성 법정을 조직하는 활동가들이 그 과정에서 죄책감을 갖게 되는 등 트라우마를 겪었다고도 하셨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떤 대응과 고민, 공동의 노력 등이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스타샤 자요비치 여성 법정을 조직하는 과정은 5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 기간 우리는 구 유고슬라비아의 100개 도시에서 온 여성들과 함께 일했고 7개국에서 온 여성들을 모았기 때문에 독특한 법정이었습니다. 페미니스트 배려 윤리는 내가 나 자신을 돌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를 돌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타인에게 저질러진 범죄의 피해자를 보살피는 것이 지식과 윤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전쟁을 반대했지만, 당신의 이름으로 범죄가 저질러지면 그것은 사실이 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대답해야 합니다. 소수의 사람만이 범죄에 관해 이야기하게 된다면 이는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 대다수가 무관심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관심은 후에 더욱 혹독한 대가로 돌아올 것이기에, 범죄에 대해서는 모든 국가가 나서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품위와 연민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고 그 범죄에 대해 처벌받지 않은 사람들은 전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여성들이 전쟁에 동원된 군인의 어머니들과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군인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들을 전쟁에 보내지 않기 위해 어떠한 투쟁을 벌였는지 그들은 서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공장의 민영화로 일자리를 잃은 여성의 입장은 살인으로 세 아들을 잃은 여성과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공감이 생긴다는 것을 끊임없는 만남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 출신의 모든 여성이 같은 입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 간의 차이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하는 한편으로, 여성들 사이의 공통 분모를 찾는 것을 중요 과제로 삼았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서로 입장과 상황이 다른 여성들이 여성 법정을 통해 어떻게 의견을 조율하고,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합니다. 스타샤 자요비치 서로 다른 입장에 처한 여성들을 한데 모으는 건 힘든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여성의 지식 수준이 동일한 것도 아닙니다. 특히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학교에 갈 특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 라다 이베코비치[2]는 한나 아렌트를 연구했고 페미니스트 인식론에 대해 끊임없이 강의를 했는데, 이는 교육 수준이 다른 모든 여성들이 한나 아렌트, 야스퍼스, 요나스 등의 철학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존중해야 합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글을 읽으면서 특히나 마음을 울렸던 장면이 있는데요, 전쟁 중 자신이 살았던 지역에 따라 다양한 위치에 있었던 여성들이 전쟁 후 베오그라드라는 한 공간에 모여 살게 되었을 때 펼쳐지는 신산한 삶의 풍경이 그것이었습니다. 폭력을 자행한 가해 지역에서 온 여자들, 전쟁 당시 피해 지역에 있으면서 자신의 아들, 남편, 형제 등을 전장에 보내야 했던 여자들, 가해자 집단에 속한 남성의 파트너로 살아가는 여자들이 뒤섞여 한 공간에 살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여성들이 어떠한 관계들을 맺으며 생존했는지 궁금합니다. 이들 여성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종주의를 거절하는/뛰어넘는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실천했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스타샤 자요비치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모든 여성들은 ‘위민 인 블랙’ 창립 30년이 되었을 때 베오그라드로 왔고, 그들이 정말로 원해서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있으며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베오그라드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훌륭한 활동과 지원의 경험이 있으므로 시련이 있어도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는 여름을 함께 보내고 서로 사귀는 것을 좋아하며 따로 정해진 프로그램 없이 온전히 그들의 의지에 따라 생활하고 있습니다. 모두 친구입니다, 만나서 같이 일하고, 같이 울고 웃고, 같이 요리하고, 베오그라드에 오는 걸 제일 좋아해서 근처 숙소에 같이 가서 시간을 보냅니다. 일반적으로 세르비아에서는 강간이라는 전쟁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참전용사는 인정하면서 여성은 철저히 혼자가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2015년 여성 법정 이후에 가해자 또는 공범자들이 다시 권력을 잡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황이 궁금합니다. 자기가 사는 마을에서 여전히 자유롭게 활보하는 가해자들을 대면해야 하는 상황에서, 구속력이 없는 법정에 대한 ‘위민 인 블랙’ 베오그라드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불처벌로 인한 원한과 복수심이라는 심정은 어떻게 이야기되고 존중받을 수 있을까요? 스타샤 자요비치 세르비아에서 페미사이드(여성살해)가 가장 높습니다. 지난해에는 12개월 동안 24명의 여성이 살해됐는데, 올해는 4개월 반 만에 무려 18명의 여성이 살해됐습니다. 모든 것이 모든 수준에서 잔인하기만 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국영 텔레비전의 프로그램들조차도 일종의 범죄처럼 보입니다. 세르비아 사람들에게는 메인 미디어 외에 다른 미디어가 없기 때문에, 이는 모두 금지되고 폐지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90년대보다 더 나쁜 상황입니다. 세르비아의 여성들은 어디에서나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부 기관과 검찰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경찰은 때때로 가해자를 체포하기도 하지만 모든 수준에서 불처벌의 풍토와 관행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아이들에게 매우 슬픈 일입니다. 아이들이 폭력에 대해 배우고 이후에는 직접 범죄를 저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위민 인 블랙’ 베오그라드가 최근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된 활동이 있는지, 또는 전하고 싶은 우려나 의견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스타샤 자요비치 작년에 우리는 세르비아 곳곳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약 20개의 거리 시위를 벌였습니다. 우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제국주의적 범죄 국가라고 생각하고 러시아의 전쟁 반대자들과 베오그라드에 온 난민들, 탈영병이나 반전 운동가들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푸틴 대통령에 대해 전쟁 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세르비아는 푸틴에게 제재를 가하고 푸틴을 옹호하는 선전을 제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민간인들, 그리고 전쟁에 반대하는 러시아인들과 뜻을 같이 할 것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각주 ^ (thanks to the politics of feminist ethics of care and responsibility has resulted in production of new feminist knowledge)” Staša Zajović et al., “Women’s Court: About the Process,” Women in Black, 2015. ^ Rada Iveković and Young-Gyung Paik, “Women’s Solidarity in Our Troubled Times of Gendered Violence and War,” Kyeol, 2022. (https://kyeol.kr/en/node/467)
-
- 2019년 에세이 김학순을 추억하다 4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
[기림의 날 특집] 김학순을 추억하다 <논평> 소현숙 -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에세이> 1. 이희자 - 김학순 할머니와 나 2. 나카가와 히사코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3. 야스다 치세 - 우리들이 죽고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4. 노부카와 미츠코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학순 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1991년 8월 14일, 한국의 김학순 씨가"나는 일본군의'위안부'였다"고 증언했다. 나는 그 신문 기사를 보고 "아, 역시" 하고 탄식했다. 약 이십 년 전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이었던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 전쟁은 인간을 악마로 만들어버린다. 전장에서 여자나 아이들을 발견하면 강간하거나 윤간하고, 필요 없어지면 연못이나 하천에 내버린다. 나는 그러지 않았지만 말이다." 김학순 씨의 증언이 있고 아직 3년이 채 못 되었던 1994년 5월 4일, 일본의 나가노 시케토 법무대신이 태평양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니고 '위안부'는 공창이었다,는 고노담화를 뒤엎는 발언을 했다.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5명과 그 가족들이 일본 정부의 태도를 규탄하고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 나는 일본을 찾은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고, 그때부터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과 인연을 맺어왔다. 김학순 씨가 1994년 10월 초 사이타마현에서 열린 증언 집회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일본인은 입을 두 개 가지고 있다. 한 입으로 사죄하면서도 다른 입으로는 '위안부는 돈을 벌러 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상한 나라다" "일본이 경제 대국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번 와보니 아무래도 다들 그렇게 풍족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다" 원내 집회 당시, 의원회관 앞에 버티고 앉은 작은 몸집의 김학순 씨는 의연했고, 그 모습에서는 고상함마저 느껴졌다. 그 후로도 나는 학순 씨에게 국제전화로 안부를 묻거나 근황을 알려 드리기도 했다. 1997년 1월 11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7명의 피해자에게 비공개로 아시아여성기금이 지급됐다. 국민기금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찬반이 분분했고, 나는 그 정도 결과밖에 내놓을 수 없었던 시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이후 이용수 씨가 "김학순 씨가 화가 났으니 만나러 오라"고 전화를 여러 번 하셨다. 나는 3월쯤 김복선 씨와 이용수 씨와 함께 병문안을 위해 김학순 씨 댁을 방문했다. 그러자 학순 씨는 첫 마디부터 "왜 양측이 납득할 만한 결과를 내지 못했느냐"고 혼을 내셨다. 나는 "정말 그렇네요. 죄송합니다"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학순 씨는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쉬고 있었다. "보세요. 문옥주가 죽고, 강덕경이 죽고, 다음은 나일 겁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런 말씀 마세요. 100살, 200살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라고 답했다. 나는 카스텔라, 네슬레의 골드 블렌드, 매실장아찌를 선물로 들고 갔다. 학순 씨는"나는 커피는 안 마시지만, 매실장아찌는 좋아해"하고 말했다. 나를 포함해 학순 씨, 김복선 씨, 이용수 씨 등 총 다섯 명이 학순 씨 댁에서 떠들썩하게 저녁 식사를 요리해 먹었다. 학순 씨와 복선 씨는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 같이 등걸잠을 잤고, 다음날 학순 씨의 배웅을 받으며 김복선 씨와 이용수 씨와 나는 돌아왔다. 이후 6월에 한국에 갔을 때, 학순 씨가 입원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김복선 씨와 함께 병문안을 하러 갔다. 학순 씨가 매실장아찌를 좋아한다고 해서 가다랑어포 맛, 차조기 맛 등의 매실장아찌를 가져갔다. 학순 씨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내가 "그걸 하고 있으면 편하세요?" 하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간 매실장아찌를 몇 개나 드셨을까……. 8월에 한국에 갔을 때 김복선 씨와 다시 한번 병문안을 하러 갔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교회 사람들이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입원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병세가 별로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었지만, 한국에 가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12월 16일, 학순 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항공권을 구해 한국으로 갔다. 당일에는 김복선 씨 집으로 갔고, 다음날 김복선 씨, 문필기, 김윤심, 김은례 할머니와 함께 장례식장인 아산병원으로 갔다. 이미 와 계신 할머니들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작게 웅크려서 울고 계셨다. 할머니들께 학순 씨는 의지할 수 있는 리더, 언니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할머니들께서 낙담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다. 다음 날 아침, 장례식이 끝나고 학순 씨를 태운 버스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던 수요집회에 들러 화장장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학순 씨가 사용하던 수첩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일본에서 노부카와가 왔다'고 쓰여 있었지만 나는 그날 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헷갈리셨나? 내가 오기를 기다리셨던 걸까'하고 생각했다. 뼈가 되어버린 학순 씨를 태운 버스는 천안에 있는 '망향의 동산'으로 향했다. 학순 씨는 생전에 미리 마련해 놓은 묘지에 묻혔다. 사람들은 각자의 추억을 담아 삽으로 흙을 뿌렸다. 저녁을 먹고 다시 서울로 버스가 향할 즈음에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나와 이용수 씨는 약간 번화한 거리에 내려서 저렴한 숙소를 찾아 함께 묵었다. 학순 씨와 작별한 기나긴 3일이었다. 그 후, 도쿄에서도 추모회가 열려 김순덕 씨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학순 씨의 용기와 다정함을 그리워했다. 1년 뒤에도 망향의 동산에서 1주기 행사가 열려 일본에서 온 참석자들도 학순 씨를 회상했다. 학순 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많은 자매와 함께 있어 시끌벅적하겠지요. 옆에는 황금주 씨도 계시고, 친하게 지내셨던 김복선 씨도 계시고, 강순애 씨가 계시고, 배족간 씨도 계시고, 박복순 씨도 계셔서… 외롭지 않으실 거예요. 저도 다시 만나게 되겠죠. 그날까지…. 안녕히.
-
- 2020년 에세이 2주간의 소녀상 관찰기
-
평화의 소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과거사 문제를 의제화하는 사회예술로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한편에서는 소녀상으로 인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연약한 소녀의 모습으로만 각인되고 소녀와 할머니 사이의 시간이 사라지며,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까닭은 평화의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녀상은 ‘위안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함께 소환된다. 소녀상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 웹진 <결>은 소녀상을 직접 관찰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소녀상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누구보다 많은 소녀상을 자세히 관찰한 김세진 작가와의 인터뷰, 그리고 2016년 '효녀연합'으로 활동했던 어효은 작가가 하나의 소녀상을 2주간 관찰하고 느낀 바를 적은 에세이를 준비했다. 두 개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소녀상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갖추기를 기대한다 [소녀상을 마주하다] 1. [인터뷰] 김세진 - 전국의 소녀상을 만나다 2. [에세이] 어효은 - 2주간의 소녀상 관찰기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 '약 2주간 소녀상을 관찰하고 에세이를 작성하는 일이 있는데, 할 수 있을까?' 에세이 기고 제안을 받았을 당시 해보고 싶은 마음과 무겁고 걱정되는 마음이 함께 올라왔다. 사랑, 감정, 경험, 관계, 일 등 다양한 소재로 에세이를 써왔지만 모두 내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 쓴 글이었다. 소녀상을 바라보며 아픈 역사를 기억하자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분들의 마음을 헤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눈물을 흘렸고 가슴도 아팠지만 그건 나의 삶이 아니었다. 어떤 글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소녀상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과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시도해본다는 생각 속에 생계 활동의 일환을 이유로 작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곧 나는 이 작업을 몇 번이고 포기할 뻔했다. 몇 년 전 동료와 함께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시위에서 일본대사관 맞은편 소녀상을 지키며 함께 싸웠다. 오랜 기간 연극을 해 온 나는 무작정 퍼포먼스를 만들어 동료들과 함께 거리 공연을 했다. 많은 사람에게 상황을 알리고 싶었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소녀가 되어 울분에 차 소리치고 분노했다. 추위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은 아픔에 마주하며 분노하는 마음이었다. 몸과 마음이 아팠다. 시간은 흘러 유난히도 길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이 왔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의 삶을 살았다. 소녀를 점점 잊어갔다.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 어쩌면 만회할 기회가 주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한 마음을 안고 소녀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왕십리광장의 평화의 소녀상 약 2주간의 기간을 두고 소녀상을 관찰했다. 내가 관찰한 소녀상은 서울 왕십리역에 있는 성동구 평화의 소녀상이다. 왕십리역은 여러 호선이 겹치는 역이라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많은 사람이 소녀를 스쳐 간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1,000회를 맞은 2011년 12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중심이 된 시민 모금으로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세워졌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분들이 일본군에 끌려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던 14~16세 때 모습을 재현해 만들었다. 성동구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의 인권과 명예 회복뿐 아니라 미래세대인 청소년이 아픈 과거를 잊지 않도록 역사적 교훈을 남기고자 지역 내 초·중·고교 학부모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되었다. 지난 2017년 2월부터 뜻을 함께한 학부모들이 모여 성동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건립 모금 바자회, 소녀상 배지 제작 등을 통해 두 달 만에 학생, 구민 등 1,000여 명으로부터 6,000만 원에 가까운 기금을 모금했고 그해 6월 10일 왕십리광장에 소녀상이 건립되었다. 광장에는 네 개의 동상이 함께 세워져 있다. 인도 맞은편에는 뜯긴 듯한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의자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왼 어깨 위에 새가 앉아있다. 옆에는 빈 의자가 놓여있다. 오른편에는 비둘기를 한 손으로 높이 들어 올리고 있는 소녀가 서 있다. 금방이라도 함께 날아오를 듯하다. 의자에 앉아있는 소녀와 비둘기를 들어 올린 소녀 사이에 측면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소녀가 있다. 무릎을 감싸 안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길 쪽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뒷모습이 보인다. 마지막 동상은 소녀가 아닌 할머니의 모습이다. 광장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야만 할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김학순 할머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한국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하고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할머니의 공개 증언 이후 국내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고 필리핀, 네덜란드 등 세계 각지의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왕십리광장에 있는 김학순 할머니 동상 옆에는 할머니의 사진과 글이 함께 세워져 있다. 잊어서 미안해요 성동구에 4년째 살고 있는 나는 왕십리광장을 수십 번도 넘게 지나쳤다. 소녀상의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었고 사람이 많이 오가는 장소에 세워졌다는 것에 감사함과 자부심을 느꼈다. 네 개의 평화의 소녀상이 한 곳에서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 모두들 한 번쯤은 쳐다보고 지나치게 된다.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소녀상 지킴이를 하고 있는 청소년은 소녀에게 겨울엔 모자와 목도리를, 크리스마스엔 예쁜 머리띠를 해준다. 지금은 현대를 살아가는 여느 소녀같이 분홍색 후드티를 입고, 어여쁜 꽃 마스크를 쓰고 있다.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첫날은 동상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기에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소녀의 두 눈을 응시했다.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잊어서 미안해요.' 속으로 말을 건넸다. 마주하고 싶지 않아 아무도 곁에 없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평생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제대로 된 사과와 치유를 받지 못한 채 살아오신 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김학순 할머니 동상을 보면서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작년 1월, 트라우마 상담을 받았다. 과거의 상처는 끈질기게 일상을 가로막고 나를 절벽 아래로 끌어내렸다. 누구도 만날 수 없었고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길 원했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받아야 하는지 몰랐다. 어린 시절 마음에 생겨버린 구멍은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것 같았다.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살고 싶지 않았다. 죽는 것은 더 두려웠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담소를 찾았다. 상담하며 내면에 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아팠던 그 날의 기억들이 떠올라 많이도 울었다.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상처 가득한 어린아이였다. 일일이 나열하기 힘든 사건들. 이제는 괜찮다고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비집고 나오는 납덩이 같은 감정들. 다시 마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 어렵게 느껴졌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분들은 그렇게 끔찍한 일을 겪고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 한이 얼마나 깊게 뭉쳐있을까. 소녀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잊고 있었던 사건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아픈 과거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소녀에게 투사되었다. '보고 싶지 않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다 없었던 일이었으면 좋겠어', '그냥 나도 남들처럼 행복한 어린 시절을 갖고 싶었을 뿐인데, 왜',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분명히 일어난 일이었고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안은 채 거리를 두고 소녀를 찾아갔다. 새로운 형태를 발견하고 기록했다. 동상에 꽃이 놓여있거나 동상의 발뒤꿈치가 들려있는 모습을 본 것 등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더 깊게 느껴지려고 하면 차단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소녀상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선 사람들도 있었다. 소녀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다 늦은 밤 소녀를 찾았다. 그날따라 기운이 없어서 차가운 돌 벤치 위에 앉아 가만히 동상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생각에서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프구나.'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나의 아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소녀의 아픔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소녀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기도 한 것이었다. 순간 울컥하고 마음 안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랐구나. 함께 공감해주고 따듯하게 안아주길 바랐구나.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바랐구나. 마음에 쌓인 울분을 참을 대로 참아 결국은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 것이구나.' 자신의 깊은 상처를 타인에게 이야기하고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으려고 목소리를 내는 행동이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인가. 나는 지금도 용기가 없다. 고작 여섯 살 정도였던 아이의 성기를 더러운 손으로 만지던 아빠의 지인, 어린아이가 울자 입안에 혀를 밀어 넣었던 삼촌,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코피가 날 정도로 뺨을 때리던 남교사, 그 밖에 일일이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다시 마주치고 싶지도 않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해지고 싶었고 차가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이지 않게 묻어두려 해도 한 번 깊이 파인 상처는 남아있는 것이었다. 덮을수록 곪아서 결국엔 터지고 마는. 상처를 다시 꺼내어 투쟁하는 삶이란 마치 매일 전쟁을 치르듯이 살아내는 삶이라는 생각을 했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외치고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 소녀는 친구였다 소녀상을 관찰하던 중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마치 관찰카메라 프로그램 피디가 된 기분이었다. 지나가던 한 행인이 멈춰 서서 소녀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려간 소녀의 마스크를 다시 묶어주었다.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어도 괜찮냐고 묻자 쑥스러워하며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관심 어린 손길이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또 한 장면은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걸어오다가 소녀상을 향해 나비처럼 날듯이 달려오는 모습이었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사랑스러운 아이는 밝게 웃으며 맑은 목소리로 “안녕~”하고 소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픔을 투사하는 대상도 아니었고 외면하고 안쓰러워할 존재도 아니었다. 순수한 아이에게 소녀는 친구였다. 마음에 새겨진 아픔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기억하는 것, 행동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너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한 존재를 기억하고 사랑하면 좋겠다. 누군가는 공감하며 아파하고 누군가는 묵묵하게 곁에 있고 누군가는 분노하며 투쟁하고 누군가는 아이같이 반갑게 인사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행동하면 좋겠다. 포기할 뻔했던 집필을 마치며 그 자리 그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소녀에게 고맙다. 소녀상 나는 본다. 그날의 기억을. 나는 본다. 상대의 두 눈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떳떳한 마음으로. 나는 본다. 아픔을 숨기지 않는다. 뜨거운 눈물을 두 눈 가득 담고서 나는 본다. Credit 글/사진 : 어효은 편집 : 현승인
-
- 2023년 인터뷰 ‘위민 인 블랙 런던’ 수 핀치 인터뷰 (1)
-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 - 에이드리언 리치 여성연대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해외 전시 성폭력 및 여성인권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글로벌 여성평화운동 단체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25주년에 항의하는 의미로 일군의 여성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1988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각자 처한 지역과 상황에 따라 전쟁, 군사주의와 폭력이 여성들에게 다르게 경험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위민 인 블랙은 고정된 조직이 아니라 실질적 소통과 행동을 강조합니다. 서울의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이 ‘위민 인 블랙 런던’의 수 핀치(Sue Finch)를 서면으로 인터뷰한 내용, 지금 만나 보시죠.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국제 여성운동 단체로서 ‘위민 인 블랙’의 차별점은 무엇인가요? 중심이나 체계화된 조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민 인 블랙은 어떻게 연결되고, 어떻게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위민 인 블랙의 정체성이 기존 여성운동에 대한 반성과 비판적 성찰에서 출발했다면,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수 핀치 위민 인 블랙은 어떠한 조직이라기보다는 행동 방침입니다. 제가 위민 인 블랙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지만, 1988년 이래로 위민 인 블랙이 발전해 온 역사를 살펴보면, 여러 다양한 국가에서 군사화된 가부장제에 내재된 폭력에 맞서 행동해 왔음을 알 수 있고, 우리가 이러한 남성 폭력의 연속체(continuum)에 결연히 저항하도록 서로를 하나로 연결하는 주제들이 어떤 것인지도 명확해지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강간, 여성 살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착취가 만연해 있다. 젠더화된 억압과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여성주의적 행동(activism)이 시급하게 요청되는 한편, 군사주의와 전쟁의 남성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본질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고 변화를 위해 이뤄지고 있는 현재 운동의 범위와 규모를 보다 널리 알림으로써 이러한 행동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 군비 지출(연간 2조 달러)도 증가 추세에 있다. 국가의 막대한 군사 예산은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쓰일 수 있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할 자원의 낭비다. 이러한 흐름에 항의하고, 더 많은 시민을 행동으로 불러 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정보의 제공이 시급하다. 또 한 가지 시급한 것은 남성들이 폭력과 군사주의의 산물이 아닌 남성성의 형태를 채택하고 여성들이 이를 지지하는 것이다.[1] 활동가이자 작가인 신시아 콕번(Cynthia Cockburn)은 위민 인 블랙의 핵심 이론가 중 한 명으로, 2019년 별세 전까지 여성주의적 반군사주의에 관한 여러 저서를 집필하고, 앞서 제가 인용했던 위민 인 블랙의 역사 대부분을 기록했습니다. 위민 인 블랙은 폭력, 군사주의, 전쟁에 맞서 평화와 정의를 위해 5개 대륙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제 웹사이트와 컨퍼런스, 그리고 이론, 영감, 행동의 공유를 통해 연결된 네트워크죠. 위민 인 블랙은 1988년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계기는 1987년 말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반이스라엘 민중 봉기)로, 이스라엘 유대인 여성들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여성들, 그리고 점령 지구 내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연합해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점령을 끝낼” 것을 탄원하며 점령에 반대하는 집회를 연 것이었죠. 첫 번째 위민 인 블랙 집회가 열린 지 6개월 후, 평화 활동가들이 미국 전역에서 비슷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0년대 후반 이탈리아 여성주의자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방문 중 위민 인 블랙과 만남을 가졌고, 이들은 귀국 후 로마, 페루자, 그 외 여러 도시에서 ‘도네 인 네로(Donne in Nero, 이탈리아어로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을 의미)’라는 이름으로 집회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이탈리아 여성들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 건너가 베오그라드의 여성주의 활동가들이 1990년대 보스니아 및 코소보 전쟁에 항의하는 제네 우 크르놈 프로티브 라타(Žene u Crnom protiv Rata, 세르비아어로 전쟁에 반대하는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 against War)을 의미)를 형성할 수 있도록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같은 시기 1992년 인도의 여성주의자 코린 쿠마르(Corinne Kumar)는 위민 인 블랙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길라 스비르스키(Gila Svirsky)와 만나 고향인 방갈로르에서 집회를 이어갔죠. 영국의 위민 인 블랙은 제네 우 크르놈 프로티브 라타, 평화와 자유를 위한 여성국제연맹(WILPH, Women’s International League for Peace and Freedom)과 그린햄 커먼 여성평화캠프(Greenham Common Women's Peace Camp)를 지원하고자 식량과 물품을 싣고 트럭을 운전한 여성들의 모임에서 발전했습니다. 제네 우 크르놈 프로티브 라타에서 영감을 받아 스페인과 벨기에의 여성들 역시 위민 인 블랙 그룹을 형성했고, 전 세계 여성들의 아이디어를 연결하고 확산하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로서의 위민 인 블랙도 이로부터 시작됩니다. 스페인의 무헤레스 데 네그로(Mujeres de Negro, 스페인어로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을 의미)와 위민 인 블랙 벨기에는 이후 계속해서 위민 인 블랙 네트워크 내 국제 협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무헤레스 데 네그로가 콜롬비아를 방문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열정적으로 폭력과 전쟁에 반대해 온 여성운동의 본거지 중 하나인 콜롬비아에서 위민 인 블랙 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고, 이후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로 위민 인 블랙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2018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개최된 위민 인 블랙의 제17회 국제 컨퍼런스에는 16개국에서 100명이 넘는 여성이 참석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 난민 여성에 대한 노예제, 식민지화, 무력 분쟁, 빈곤, 아파르트헤이트 등의 영향을 논의했습니다. 각각의 위민 인 블랙 그룹은 현지 상황 속에서 성장하면서 고유의 여성주의적 행동 접근법을 확립한 한편, 국제 컨퍼런스 및 웹사이트를 통해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한국에서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군사기지 문제가 지속적으로 야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미군의 사드 배치 문제, 미군기지 이전 및 반환 문제 등에 대한 시민들의 반대운동이 계속되는 중입니다. 관련하여 1980~90년대 영국에서 위민 인 블랙이 그린햄 커먼 미국 공군기지 미사일 배치 철수 운동을 벌이며 활약했고, 그 결과 미사일 배치를 막아냈다고 들었습니다. 반기지 운동으로서 ‘미사일 배치 저지’라는 실질적 성공을 거둔 해당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소개와 함께 이 활동이 위민 인 블랙에 어떤 경험과 의미를 남겼는지 청해 듣고 싶습니다. 수 핀치 그린햄 커먼 여성평화캠프는 위민 인 블랙의 주요한 전신(前身)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980년 영국 정부는 잉글랜드 남부의 그린햄 커먼에 핵탄두 탑재 지상 발사형 미국 미사일 96기를 배치하기로 미국 정부와 합의했습니다. 폐비행장에서 그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지구 생명을 위한 여성(Women for Life on Earth)’ 소속의 활동가 36명이 몇몇 남성 및 어린이들과 함께 웨일즈에서 그린햄까지 120마일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린햄에 도착한 후 여성들 중 일부가 정문과 울타리에 쇠사슬로 자신을 몸을 묶었고, 그린햄 커먼 여성평화캠프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여성평화캠프는 국제 여성평화운동에 영감을 주었고 이는 위민 인 블랙의 기원으로 이어졌습니다. 반핵 시위와 초기 평화주의 운동의 전통을 토대로 성장한 그린햄 캠프는 핵무기 반대에 대한 여성주의적 관점, 영국의 평화와 정치 활동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태도와 관행에 대한 여성주의적 저항을 제시했습니다. 캠프는 창의적 시위, 여성주의적 임파워먼트(empowerment), 비폭력에 대한 관점, 핵무기와 전쟁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발전시키며 19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 세월 동안 1,000명이 넘는 여성들이 투옥되기도 했죠. 4년 만인 1987년에 미-소 중거리 핵전력(INF) 조약이 체결되었고, 1991년에 이르러 그린햄에 배치된 순항 미사일도 철거되고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그린햄 여성들이 위민 인 블랙이 되었습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유고 내전 당시에 위민 인 블랙 런던이 지원활동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특히 전시 성폭력 피해와 관련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지원 및 행동이 전개되었는지요? 수 핀치 1992년에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반대하는 몇몇 그린햄 여성들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의 반민족주의 여성 단체에 연락을 취해 그들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베오그라드의 위민 인 블랙, 즉 제네 우 크르놈은 여성 난민을 위한 인도주의적 원조를 요청했고, 이에 따라 모든 분쟁 당사국의 실향민과 난민 여성,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활동가 네트워크를 위해 인도주의적 원조와 기타 지원을 모아 전달하는 ‘구 유고슬라비아 지원 여성회’(WATFY, Women's Aid To Former Yugoslavia)가 조직되었습니다. 1992년 9월, 트럭 세 대를 몰고 류블랴나와 자그레브에 구호품을 전달한 아홉 명의 여성이 베오그라드에 당도했습니다. 이들은 제네 우 크르놈을 만나 위민 인 블랙 집회에 합류합니다. 시안 존스(Siân Jones, 현재 위민 인 블랙 웹사이트(www.womeninblack.org)의 국제 조직가)는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제네 우 크르놈의 정치적 견해는 계시와도 같았죠. 가부장제, 전쟁, 군국주의, 여성 폭력의 연속적 성격이 이토록 명확하게 이해된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WATFY는 제네 우 크르놈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반전 침묵 집회와 검은 옷 집회라는 아이디어를 영국 전역의 네트워크로 전파했고, 이렇게 영국에서 위민 인 블랙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강간이 전쟁 무기로 사용되는 데 대한 새로운 정보 역시 네트워크에 공유되었습니다. 국제법상 이미 전쟁 범죄로 명문화된 전시 강간의 기소를 촉구하려는 포괄적 캠페인이 전쟁 범죄에 반대하는 여성들(Women against War Crimes)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연합 활동가들은 로비와 캠페인을 벌이면서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 여성들과 함께 1993년 런던에서 대규모 시위를 개최했습니다. 이들은 또한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비롯, 모든 전쟁의 당사자들이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자행한 개인 및 집단 강간, 성노예화, 고문 행위에 대한 기소가 이뤄지도록 국제적 압력을 가하는 여성 활동가, 단체 및 변호사들의 국제 연합에 합류하게 됩니다. 국제법상 범죄로서의 강간에 대한 최초의 유죄 판결은 1997~1998년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이뤄졌습니다. 이후 설치된 재판소들도 일련의 기념비적인 소송들에서 강간이 고문의 한 형태이고, 강간과 성폭행이 집단학살 행위를 구성할 수 있으며, 노예제 또는 성노예화를 포함한 성폭력이 전쟁 범죄 및 반인도 범죄로 기소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각주 ^ Cynthia Cockburn, Introduction to Women in Black: Against Violence, for Justice, Merlin Press, 2023.
-
- 2021년 에세이 이용수 선생님 방문기 ‘아니, 기뻤어요.’
-
지난 9월,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의 축사를 이용수 선생님께 부탁드리고자 대구로 향했다. 가능하다면 선생님의 근황을 듣고 컨퍼런스에 기대하시는 바를 간략히 들으면 되리라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을 짧은 지면에 풀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한 마디로 뵙고 난 소감을 전해야 한다면 나는 이 방문기의 제목을 '기뻤어요'나 ‘아니, 기뻤어요’라고 정하고 싶다. 선생님께 들은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기도 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기처럼 투명하고 선선히 하시던 말씀 “아니, 기뻤어요.” 9월 15일, 대구 서문로 대구 중앙로역에 내려 몇 걸음만 떼면 바로 저만치에 야트막한 2층 건물이 보인다. 한창 솟아오르고 있는 콘크리트 빌딩 숲 속에 소롯이 자리를 잡고 있는 목조 건물. ‘희움’ 희움. 나도 모르게 ‘기쁨이 움트는 곳’이라고 읽는다. 한 번 시작된 오독(誤讀)은 반복된다. 본래 뜻은 ‘희망을 꽃피움’이라는 희움을 나는 자꾸 ‘기쁠 희’에 ‘움틀 움’ 혹은 ‘움막 움’이라고 멋대로 기억하곤 한다. 희움에 들어서서 이런 엉뚱한 생각을 궁글리고 있을 때 간사님께서 초록 라벨이 붙은 디카페인 음료를 내어주신다. 안녕 라일락 아직 선생님은 오지 않으셨다. 기다리는 틈을 타 전시관 안뜰로 향한다. 초록 잎을 무성히 내민 라일락 나무가 그늘 한 켠을 내어 준다. 안녕. 라일락님. 3.1 운동 직후인 1920년대부터 100여 년을 이 곳에 있었다는 이 나무 하나만을 보려고 여기 오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희움 주변은 온통 역사의 현장이어서 거리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희움 정문 앞 마당엔 3.1운동 당시 행진 경로 표식이 박혀 있다. 열 걸음 안되는 대각선 맞은편에는 1930년 일본 제국주의 자본이 투입된 식산은행 건물이 그대로 남아 대구 근대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키 큰 라일락이 지켜본 그간의 이야기만으로도 이 곳에 온 보람은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을 즈음 택시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연보라 하얀 갖신과 연보라색 한복으로 단장하신 이용수 선생님이 지팡이에 의지해 들어오셨다. 라일락 빛깔이 곱게 잘 어울리신다.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 시작을 축하합니다.” 카메라가 켜지고, 쨍한 조명 앞에서 원고 없이 긴 문장을 한 호흡에 말해내기란 방송인들도 어려운 법이다. “먼 데 있는 저희 문제를 해결해 주러 오신 국제(사회) 여러분들께 뭐라고 말할 수 없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또박 또박, 틀림없이 이어지는 말들에 감탄할 때쯤, ‘흐-읍’ 선생님은 얕게 숨을 고르시고는 돌연 “조선 때, 식민지 때, 무법 때...”로 돌아가신다. 당신이 끌려간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국제 사회 여러분들께’, ‘피해자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나니 그 이야기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아마도 지난 30년 가까이 카메라가 켜지고 나면 어김없이 돌아온 질문들 때문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이명 “양손을 묶고 (그들이) 전기를 한 번 돌린 때 제가 크-게 엄마라고 한 번 불런 거이 기억이 납니다. 그랬는데 지금 머리에서 귀에서 그 때부터 지금까지 소리가 납니다. 머리에서 나는지 귀에서 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머리와 귀를 울리는 이명은 당신 스스로의 비명. 울부짖음. 매일 그렇게 엄마, 엄마 부르짖고 계시는구나. 내가 어떻게 하마 “추우나 더우나 아이들이 줄로 서가 있어요. 안아 돌라고. 내가 안아줍니다. 쪼맨한 사람들이 와서 울어요. 너거가 무슨 죄가 있노. 너거를 와 울리노.” “이 생각을 하면은 내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이 문제를 해결할게 차라리 내가 죽으라카믄 죽겠어요.” “내가 어떻게 하마 이걸 해결을 할까 생각할 적에 무식한 내가, 배우지도 못한 내가 돌지도 않고 열심히 해보자 해서 지금까지 왔어요.” 한 번 말을 시작하시면 2시간 가까이 끊김이 없으시다. 간간히 ‘허-억’ 하고 가쁘고 벅찬 숨을 몰아쉬고는 이내 이야기를 이어 가신다.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를 끊지 못하는 나는 선생님의 기분이 나아지게 할 질문이 무엇일지 궁리할 뿐이다. 그 와중에도 선생님은 정연하게 말을 이어가고 계셨다. 이런 피해는 외국에도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선생님,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였나요?“ 100여 년의 시공간을 오가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툭 끊겼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시다. 질문이 적절치 않았던 걸까? 잠시 머뭇거리시는 선생님께 함께 간 동료가 고쳐 질문을 드린다. “가장 기분 좋으셨을 때요. 선생님.” 원투원 “원투원.” 이내 흐트러졌던 페이스를 바로 잡으신 선생님의 첫마디는 ‘121’이었다. “제일 좋아서 많이 울었을 때가 마이클 혼다 의원(등이) 워싱턴에서 121 결의안 통과했을 때요.” “의장님이 잘 걷지도 못하시는데, 자기 사무실에 저를 앉혀 놓고 여자 비서가 (돕고).. 근 한 달로 미국 국회에서 살았습니다. 이 분들이 땀을 뻑뻑 흘리매..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의장님이 이 결의안 통과시키면 뭘 사줄라캅니까 물어요. 김치하고 불고기 사 달라 합디다.” “의사봉을 딱딱딱 세 번 치고 이용수 할 때(결의안이 통과될 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너무 놀라고 좋아서요. 춤도 췄어요.” 툭툭 탁! 선생님의 발은 저절로 리듬을 타고 어깨가 들썩였다. 미 하원 121호 결의안 통과 순간의 기쁨이 춤사위 속에 일렁인다. 보조개가 어여쁘시구나. “모두 감사한 분들 덕분이지요.” “처음에 김학순 할머니가 시작했잖습니까?” “형님 아우님들(한테) 가마(=가면) 내가 해결하고 왔다 해야지요.”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북한… 고맙고 그리운 사람들이 오가는 인터뷰 속에서 선생님의 기분이 한결 나아지신 듯했다. 이제 카메라를 꺼도 될 것 같다. 더 하실 말씀은 없는지 묻고, 이 여정들 속에서 혹시 힘들지는 않으셨는지 여쭈었다. 선생님은 한껏 울고 난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답하셨다. “아니, 기뻤어요.” 여성과 교육 카메라와 조명이 철수하자 선생님은 마알간 얼굴로, 얼른 희움보다 큰 장소에 교육관을 짓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 희움은 지붕에 비가 샌다고 일러주신다. “비 오마 여기 물이 차가지고 (이 사람이) 밤새도록 퍼냅니다.” 곁에 서 있던 서혁수 희움 대표가 머쓱해하며 부러 아무일 아닌 듯 “뭘 밤새도록 퍼내요” 라고 얼버무린다. 그런 티키타카의 경쾌함과 애달픔이 공존하는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 지 몰라 나도 일단은 짐짓 웃어 본다. “여가 확장이 돼야지. 빨리 교육관을 지어야지. 역사를 아르켜야지.” 모든 피해생존자 선생님들이 배움과 교육에 대한 열망이 남다르셨지만 이용수 선생님은 자신과 미래세대 교육에 대한 염원이 그 천 배는 넘을 것이라고 누군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당신 스스로가 70세에 경북대 대학원에서 2년간 철학을 공부하셨고 대구 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제가 법학을 할라켔어요. 변호사가 되어가지고 당당하니 변론하고 싶다 했을 적에 그 소리를 어디 가서 했냐 하면 2007년 도 7월... 워싱턴에서 원투원 결의안 하러 6월 28일날 갔어요. 제가 증언을 이래 하고 나니까 의장이 말을 잘한다꼬 변호사하면 좋겠다 하는 거예요. 그래라도(=그렇지 않아도) 내가 법할 공부를 할라켔는데 어려워서 못했습니다 카이 뒤에서 우리 동포들이 막 박수를 치며 웃었어요.” “이 역사관 저는 이거보다 넓혀가지고 교육관을 짓겠습니다. 지어서 교육을 시켜가지고 올바른 ‘위안부’ 역사, 세계가 다 알고 또한 세계가 다 알고 있는 이 ‘위안부’ 역사를 해결해서 저 할머니들한테 가서 제가 해결하고 왔다고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 선생님의 말 속에서 나는 ‘여성과 교육’, ‘여성과 정치’, ‘여성과 경제’ 등 무수한 버전의 ‘여성과 OO’을 본다. 그래서. 당신의 ‘기뻤어요’라는 한 마디를 바톤 삼아 내 손에 담아 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