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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좌담 일본군‘위안부’ 투쟁 영역의 확장 〈1부〉 - 부딪치는 차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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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제국과 식민지, 남성과 여성, 국가와 인민 사이의 차별적 권력 구조에 맞서 소수자와 인간, 여성의 몫을 확보하기 위한 지난한 투쟁의 역사와 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청년좌담에서는 젊은 연구자이자 활동가인 이은진, 이재임, 최성용과 만나 이들의 삶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어떤 의미와 동인이 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동세대 신진 연구자들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원들과의 문답을 통해, 기지촌 여성들의 생애 구술 채록, ‘피해’와 ‘피해자’를 둘러싼 법적 담론 분석, 한국 사회의 일본군‘위안부’운동과 담론에 대한 탈식민적 비판 작업 등을 만나 보시죠. -좌담 일시: 2022년 9월 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장소정, 이안 -대담: 이은진(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이재임(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최성용(성공회대학교 국제문화연구학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선생님들의 전공이 다양하고, 일본군‘위안부’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본인 소개를 비롯해 각자의 관심 분야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리며, 동시에 다양한 맥락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만나고 글로 풀어내는 과정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은진 저는 현재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기획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셰어는 ‘재생산 정의(reproductive justice)’라는 개념을 주요하게 가져가고 있는데요, 현재의 불평등이나 부정의를 페미니스트로서 바라볼 때 성과 재생산을 둘러싼 힘의 작동 방식을 주의 깊게 살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는 ‘위안부’ 이슈가 성과 재생산에 관한 한국 사회의 지형을 살피는 데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어요. 인권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있던 상태에서 2017년에 법대 석사를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2014년에 미군 기지촌 여성분들이 국가 대상으로 진행한 손해배상 소송을 접하게 됐죠. 소송 과정에서 승소를 위해 피해자의 증언이나 구호가 정형화되는 면이 있잖아요. 그런 것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 차에 친구에게 미군 기지촌 여성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구술집을 펴내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와 인류학 전공자, 영상 전공자 셋이서 팀을 이뤄 평택의 ‘이모들’을 만나는 구술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기획, 채록, 편집, 출간 전 과정이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인류학의 민족지 이론, 미학의 재현 이론, 페미니즘의 피해자 중심주의 등 여러 갈래의 흐름들이 작업의 기반이 되었는데요, 일본군‘위안부’ 증언 연구도 중요한 참고 지점이었습니다. 그때 제 지도교수님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집 4권의 저자인 양현아 선생님이셨어요. 그래서 때로는 교수님께 조언을 구하기도 하면서, 이제는 20년이 된 증언집의 의미를 어떤 부분에서 계승하고 어떻게 더욱 새롭게 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미군 기지촌 여성 구술집을 출간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일본군‘위안부’ 이슈와 마주하게 됐습니다. 그 이후 1년 정도 일본군‘위안부’연구회의 간사로 지냈고, 석사 졸업 후 셰어에서 일하게 되고 나서도 ‘국제법X위안부 세미나’에 참여하는 등 ‘위안부’ 이슈와의 느슨한 연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성용 저는 활동가와 연구자의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고, 비평이나 칼럼을 쓰는 일도 하고 있어요. 관심 분야는 청년, 노동, 젠더 등입니다. 박사논문의 문제의식은 ‘위안부’와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동떨어져 있기도 한데요, ‘폭력은 어떻게 사회를 만들어내는가’라는 질문이 가장 중심에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국가(폭력)이란 무엇이고 그게 이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왔는지, 혹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심성들을 만들어냈는지 질문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 제주 4‧3 사건 등 전쟁과 학살의 경험, 국가폭력에 대한 역사들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 것 같아요. 지난번 오키나와로 필드워크를 갔다가 배봉기 할머니를 도왔던 김현옥, 김수섭 부부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위안부’ 문제를 조우하게 됐습니다. 일본에 계시는 이영채 선생님, 우쓰미 아이코 선생님 등 B·C급 조선인 전범을 연구하신 선생님들을 만나며 영향을 받았고요. 그러면서 식민주의 문제, ‘위안부’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위안부’ 관련해서는 정의연 사태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지난 정부의 일종의 ‘3대 사태’라고 하면 조국 사태, 정의연 사태, 박원순 사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정의연 사태는 당시 지형이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있었죠. 조국 사태 이후 이른바 친조국과 반조국이 갈라진 상태에서 정의연 사태가 터진 후 진영 논리의 자장 안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어요. 윤미향 의원이 총선에 출마했을 때 좌파라는 사람들조차도 여성혐오적 뉘앙스로 ‘위안부 팔아서 국회의원 해먹는다’는 말을 했는데,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윤미향 의원, 정의연, ‘위안부’ 운동 등이 여전히 대상화된 ‘여성’으로서 재현되고 이야기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요. 너무 많은 지형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세세하게 뜯어서 얘기하지 않고 친/반으로만 이야기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컸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글을 쓰게 됐습니다. 이재임 석사와 박사 모두 여성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박사과정 중이에요. 현재는 법과 사회가 폭력이나 범죄를 다루는 방식을 연구 관심사로 삼고 있습니다. 2017년에 학부 논문을 썼는데 당시 『제국의 위안부』가 학부 내내 이슈였어요. 역사를 전공하고 있었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시기였기 때문에 『제국의 위안부』를 주제로 논문을 쓰겠다는 결정을 자연스럽게 했어요. 『제국의 위안부』를 어떻게 비판할까 고민하면서 정영환 선생님의 책과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논문을 읽고, 소녀상에 대한 글도 읽으면서 역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운동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막연한 책임감과 정의감을 갖게 됐고, ‘위안부’를 석사 연구 주제로 삼고 싶어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Q.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2020년의 ‘정의연 사태’ 등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일본군‘위안부’운동 관련 다양한 이슈가 있었습니다. 또한 페미니즘 리부트, 미투 운동을 통해 여성운동과 일본군‘위안부’운동이 만나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여러 이슈가 신진 연구자에게 시사하는 쟁점은 무엇인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이슈들을 결합하고 혹은 해체할지 궁금합니다. 이은진 페미니즘 리부트, 미투 운동을 계기로 ‘위안부’ 운동이 여성운동과 만났다는 서술에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에요. ‘위안부’ 운동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에도 여성운동이었어요. 2000년 법정의 이름도 여성국제법정이었고, 피해자들 또한 다른 나라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과 계속 연대해왔는데 이것을 페미니즘, 여성운동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국의 위안부』에서는 마치 민족주의 운동이기만 했다는 식으로 서술하는데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 아니고요. 그렇다고 ‘위안부’ 운동은 나름대로 페미니즘 운동을 했다는 식으로 방어적인 대응을 하는 게 능사는 아니고, 지금은 내부를 돌아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위안부’ 운동이 페미니즘 운동이었냐 아니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위안부’ 운동이 어떤 페미니즘 운동이었고 앞으로는 어떤 페미니즘 운동이고자 하는가를 돌아봐야 할 때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즘 노선이 다변화됐고, 내부에 갈등도 많은 상황이잖아요. ‘생물학적 여성’의 안녕만을 도모하는 것이 곧 페미니즘 운동이라고 주장하면서 트랜스젠더 등 다른 소수자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는 흐름도 존재하고요. 이제 90년대의 프레이즈인 ‘민족에서 여성으로’ 이후 한 단계 더 나갈 필요가 있어요. ‘여성으로’가 무슨 뜻인지, 어떤 페미니즘이어야 하는지, 젠더를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지, 다른 억압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거기서 ‘위안부’ 운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건 셰어에서 활동하면서 구체화되고 날카로워진 문제의식이기도 해요. 셰어는 이전부터 장애계와도 소통하면서 낙태죄 문제를 고민했던 사람들이 구성원으로 있고, 낙태죄 폐지 운동을 거치면서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어요. 상호 교차성을 활동의 중심에 두고 있고, 낙태죄 폐지 운동을 여성 신체에 대한 자율성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던 인구 통제, 이를 위해 계속해서 이뤄졌던 재생산 억압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만들려고 했던 단체입니다. 그때 주요했던 구호가 ‘낙태가 범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낙태죄 폐지는 비정상인 승리의 역사가 될 것이다’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러 억압을 포괄적으로 함께 보고 있어요.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지금의 페미니즘 지형과 연결되고, 젠더화된 힘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진전시킬 수 있기를 바라요. 지금의 페미니즘 지형에선 ‘국가’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도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여성이든 성소수자든 소수자의 권리가 국가에 의해서 담보될 때의 한계가 있거든요. 경찰, 군대, 감옥 역시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일조하고 있는데, 페미니즘 운동의 목표가 오로지 국가의 더 많은 개입을 촉구하는 것이어선 안 됩니다. 일본군‘위안부’ 운동 역사가 30년이나 된 만큼 물론 어느 정도는 제도화되어야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운동과 국가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계속해서 급진적인 운동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성용 셰어에서 재생산과 관련하여 개념을 확장시켜 나간 게 놀랍습니다. ‘위안부’ 운동도 그러한 잠재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민족에서 여성으로’라는 구호와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퍼져나갔고, 저도 그 자장 속에 있는 사람인데요. 이제는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을 넘어 다른 이야기들을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성공회대 조경희 선생님이 쓴 글[1]을 보면 90년대 재일조선 여성들이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수용하고 이해해갔는가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어요. ‘여기’에서의 교차성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재일 조선인으로서 전후 일본 사회에서 지속되는 식민주의 문제를 온몸으로 겪어온 집단이기도 하고, 동시에 여성이기도 하고, 한쪽만 이야기하는 운동이나 논의에 대해선 스스로 온전히 대변할 수 없었던 불편함들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김학순 증언 이후 ‘위안부’ 문제를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들이 어떤 위치에 서게 됐는지 자각해갔다는 이야기였어요. 교차성이라는 게 ‘여기’의 맥락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게 한국 사회에서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의 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페미니즘 리부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자면 ‘우리에겐 (페미니즘) 계보가 없다’고 했다가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는 방향으로 논의가 바뀌어간 것을 기억하는데요. 지난 8월 한 달 정도 출장 목적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흑인운동 관련 전시와 서점을 방문하고 공연도 봤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폭동(riot)’의 역사를 계속해서 상기하더라고요. 역사와 계보를 스스로 만들어나가고, 과오를 되짚어가며 토론하고 있었어요. 운동에 참여했거나 관심 있게 지켜봤던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집합 기억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었죠. 그것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운동들은 그러한 노력을 얼마나 해왔나 고민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제게 ‘우리에겐 계보가 없다’라는 말로부터 이어지는 고민인 것 같아요.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치면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청년 세대 여성들이 ‘위안부’ 운동을 조우했을 때 ‘최초의 미투 운동’이라는 수사를 사용한 것은 그들 나름대로 자기 맥락 속에서 계보를 찾고 역사를 구성해나가려는 시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미투 운동이든 ‘위안부’ 운동이든 최초로 증언을 하게 될 때의 용기와, 증언이 부정되는 경험들,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해나가는 경험들이 다르면서도 유사한 패턴을 갖고 있잖아요. 그런 과정들 속에서 과거를 통해 용기와 교훈, 위로를 얻기도 하고 동시에 ‘위안부’ 운동도 현재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만나면서 새로운 질문을 마주하며 상호 참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재임 요즘 ‘위안부’에 대한 석사 논문을 학술지에 투고하기 위해 고민 중인데,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스트가 된 사람들이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얼마나 여성운동으로 여기고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석사 논문을 쓸 때도 ‘위안부’ 운동이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시사점을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역으로 고민했던 것 같아요. 제가 주목했던 것 중 하나는 피해와 피해자를 보는 시각이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지금 페미니스트 운동이 놓여있는 지형이기도 하죠. ‘위안부’ 피해자를 둘러싼 담론들이 그 지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피해를 개인의 고통이자 불운한 사건으로 보고, 피해자에게 보호나 지원 등 인도주의적 조치를 해주면 끝이라는 문제적인 인식 말이에요. 이러한 지적이 페미니스트 연구자들, 페미니스트가 된 사람들에게 ‘위안부’ 운동을 내 문제라고 여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석사논문을 썼습니다. 각주 ^ 조경희, 2020, 「포스트 식민 페미니즘의 (재)소환: 1990년대 재일여성들의 ‘위안부’ 운동과 정체성 정치」, 『문화과학』, 2020년 겨울호 (통권 제104호), 문화과학사. ‧이은진 발언 참고 https://www.ildaro.com/8525 https://view.pong.pub/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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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본군‘위안부’와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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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여 년간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논의는 한국뿐만 아니라 많은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논제가 되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한국, 중국, 필리핀, 대만,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버마, 태국, 베트남 여성들 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던 네덜란드 국적의 여성들1도 포함한다. 전쟁 후 네덜란드는 전범재판을 위한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Temporaire Krijgsraad in Batavia)을 실시하였는데, 이 재판은 전쟁 중 행해진 성폭력과 일본군‘위안부’ 관련 사건을 다루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먼저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8일 공표된 주요 전쟁범죄인의 소추 및 처벌에 관한 협정, 소위 런던협정은 주요 전범재판을 위한 국제군사재판소(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2 이렇게 준비된 재판 협정은 아시아에서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일본의 주요 전범들은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IMTFE)에서 재판을 받기로 결정되며, 극동지역에서 기소된 수많은 사건은 싱가포르, 홍콩, 바타비아 등 국가별 법정에서 재판이 이루어졌다. 이 판결은 주권을 인정하는 배경에서 국내법에 따라 행해졌으며, 대부분 국제법의 큰 틀을 따르고 있다.3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대행 후베르투스 판 무크(Hubertus van Mook)는 1945년 9월 11일 전쟁범죄 조사국의 설립을 명령하였고4, 1946년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국제법 규범에 따라 전쟁범죄를 판결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절차적인 법적 틀을 임시군사재판이 갖출 수 있도록 4개의 조례를 통과시켰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일본의 BC급 범죄는 임시군사재판(Temporary Courts Martial)에서 재판받아야 했으며, 1946년 8월 5일부터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1949년 12월까지 총 448건의 재판이 이루어졌고, 피고인의 수는 1038명에 이른다.5 그중에서도 바타비아 군사재판은 일본군이 네덜란드 여성들을 ‘위안부’로 활용한 사건을 판결하였으며6, 이는 2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법에 근거한 전쟁범죄재판 중에서 강제 성매매를 목적으로 여성을 납치한 전범을 다룬 유일한 재판이었다고 평가된다.7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네덜란드 외교부(Ministerie van Buitenlandse Zaken)와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Nationaal Archief)가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의 중요 자료에 대한 접근을 판결 이후 75년간 제한했기 때문이다. 1946년에 개최된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의 기록은 2022년 1월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해지게 되었으며, 1949년의 마지막 판결 자료는 2025년에야 공식적으로 접근 가능하다. 이러한 접근 제한은 관련 사건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피고인의 사생활 또한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2022년부터 단계적으로 모든 접근 제한을 해제하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8 이와 같은 자료 접근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국제적 담론에 자극을 받은 네덜란드 연방의회 하원의 요청으로 1993년 바르트 판 풀헤이스트(Bart van Poelgeest)가 바타비아 임시재판기록의 공문서를 검토 및 조사하였다. 복지의료문화부 장관은 “네덜란드 정부의 공문서 보관소에 있는 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의 일본군에 의한 강제 성매매]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할 필요성”을 느낀다고 언급하였다.9 그 연구 결과는 ‘일본 점령 시기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의 네덜란드 여성들의 강제 성매매에 관한 네덜란드 정부조사 보고서’(Verslag van de resultaten van een onderzoek in Nederlandse overheidsarchieven naar gedwongen prostitutie van Nederlandse vrouwen in Nederlands-Indie tijdens de Japanse bezetting, 1993/1994)로 출판되었으며, 여전히 조사범위와 정보의 규모면에서 현재 ‘위안부’ 관련 연구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자바 섬에서의 ‘위안부’ 동원의 형태를 시기별로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2년 일본의 동인도 점령 후 ‘위안부’를 조달하기 위해 제3자를 이용하였는데, 이 경우 수용소 바깥에 있던 유럽인 남녀, 인도네시아인, 그리고 중국 출신의 민간인들이 주로 원주민 여성의 모집을 담당했다. 1943년 중반까지 여성들은 주로 일본인 장교나 민간인의 가정부로 조달됐으며, 이 시기 일본인들은 민간 매춘부를 찾거나 사설 매춘 시설을 이용했다. 동시에 일본인들은 호텔 주인이나 개인이 소유한 건물을 일본인을 위한 매춘 시설로 전환할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유럽인과 원주민 매춘부는 매춘 시설의 주인이나 기타 알선업자에 의해 모집되었다.10 1943년 중반 이후, 군대와 군당국이 포주와 알선업자들의 지원을 받아 위안소를 직접 관리하기로 결정하였다.11 이 정책은 바타비아, 반둥, 페칼롱간, 마젤랑, 세마랑, 본도오소 지역에 적용되었다. 위안소에 보내질 유럽 여성들은 집단수용소와 수용소 외부에서 모집(동원)되었으며, 군과 헌병대가 이들을 동원하고자 물리적 힘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12 하지만 1944년 4월 2일 제16군 사령부는 세마랑 위안소에서 네덜란드 여성을 이용한 강제 매춘이 일어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싱가포르와 도쿄에 전보했다. 4월 말 도쿄에서 네덜란드 여성과 인도-네덜란드(유라시아인) 여성이 고용된 모든 위안소를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5월 초 그 위안소들은 폐쇄되었다.13 이때부터 유럽 여성의 위안소 동원은 금지된다. 1944년 중반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까지 자바섬의 일본인들은 기존의 사설 매춘 시설이나 중계업자를 통해 유럽 여성을 알선하였으나,14 군에 의해 직접적으로 운용되지는 않았다. 정부 보고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200명~300명의 유럽 여성15(주로 네덜란드인)이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었으며, 이 중 65명은 명확히 강제 성매매의 피해자임을 밝히고 있다.16 즉, 자바섬 중앙에 위치한 문틸란(Muntilan) 수용소와 세마랑(Semarang)지역 근처의 여러 수용소에서 30명~35명의 유럽 여성이 강제 동원됐으며, 세마랑에서 플로레스(Flores)로 이송된 여성이 7명, 페카롱간(Pekalongan)에서 최소 3명, 본도오소(Bondowoso)에서 최소 6명, 자바(Java)에서 티모르(Timor)로 이송된 수가 5~10명, 자바섬에서 암본(Ambon)으로 알 수 없는 수의 유럽 여성이 이송되었다.17 이 통계는 강제 동원된 유럽여성들의 수이며, 자발적 매춘의 경우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네덜란드 정부 보고서는 “1943년 중반부터 1944년 중반까지 다수의 유럽 여성을 성매매를 위해 동원하고 위안소로 이송할 때 강제적으로 행해진 것이 분명하다”18고 기록한다. 또한 ‘강제’성이 증명되지 않은 자발적 지원이라 할지라도, 기근과 질병 등으로 인해 많은 수용자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열악한 집단 수용소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 ‘자발성’이란 개념은 상대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도 명시한다. 이는 수용소 바깥에 거주하던 유럽인에게도 해당되는 상황이다.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이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일본당국의 강압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19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거나, 일본당국의 강요에 의해 동의서를 작성한 경우에 자발적 지원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정부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럽 여성들이 제안에 동의하지 않은 경우가 수없이 많았지만, 일본당국이 물리적인 힘을 가하면 거부할 수 없었다. 바티비아 임시군사재판소는 ‘강제 성매매(forced prostitution)’라는 용어의 범위를 이렇게 폭넓게 해석”20했으며, 일본군이 유럽 여성을 동원하기 위해 강제와 무력을 사용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동안의 네덜란드 사료를 집대성한 더 용(De Jong)의 조사에 따르면, 1943년 말 자바에 있는 일본 제16군 사령부는 마겔랑과 세마랑에 있는 집단 수용소에서 12명의 여성을 모집하여 새로 설립된 매춘업소로 데려갔다. 당국은 자원봉사자로 일하게 된다고 말했으나 이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 수용소에서 약 18세~30세 사이의 여성을 모집하여 12명을 선발했다. 이 중 (질병을 앓던 2명을 제외하고) 10명을 보내야 했던 암바라와 수용소의 리더는 이에 항의했으나, 만약 저항한다면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는 40명의 사람들이 대신 목숨을 잃게 될 거라는 협박을 들었다고 했다(1945년 12월 오헤른의 인터뷰. IC,238).21 지명된 소녀들에게는 15분 동안 여행 가방을 꾸릴 시간이 주어졌다. 헤어질 때 여러 소녀들이 어머니를 놓지 않으려는 가슴 아픈 장면이 벌어졌다.22 이들은 세마랑의 위안소로 보내졌고, 구타당하고, 고집을 피우면 부모가 고통받을 것이라는 협박을 들었고, 저녁이 되면 리볼버나 총으로 위협당하며 침실로 끌려가 일본 장교에게 강간당했다. 이후 한 명은 자살을 시도했다.23 2022년 1월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는 네덜란드군사정보국(NEFIS)이 1945년 이후 조사한 세마랑의 게단간(Gedangan) 수용소 사건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1944년 3월 초 한 그룹의 여성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탄 버스가 위안소로 이송되었다. 정보국 보고서에 따르면, 그들은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3일 뒤 일본인들은 이들이 남자들을 ‘받아야(ontvangen)’ 한다고 말했다. “반응은 격렬했다. 우리는 자살을 하자는 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학대에 대한 공포가 가장 컸었다”고 증언 기록에 적혀 있다. 그녀의 손님은 군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있었다. 그들은 시간당 3길더(네덜란드 화폐 단위)를, 하룻밤에 7길더를 지불했다. 어떤 이들은 그녀를 폭행하기도 했다.24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과 강제 성매매관련 전쟁범죄의 판결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인을 대상으로 한 ‘위안부’ 동원은 주로 1943년 중반부터 1944년 중반까지 행해졌으며, 바타비아 재판에서 강제 성매매로 기소된 4건의 사건은 다음 사건번호들을 포함한다.25 i. Case No. 40/1946. 피고인 와시오 아오치 (Washio Awochi). ii. Case No. 72/1947. 12명의 피고인. 이들의 신원은 열람가능한 판결문에 공개되지 않았으나, 더 흐로트(De Groot)에 의해 공개됨.26 iii. Case No. 72A/1947. 1명의 피고인 (이케다 쇼이치 (Ikeda Shoichi) 대령으로 추측)27 iv. Case No. 34/1948. 노사키 세이지 (Nozaki Seiji) 장군. i. 유엔전쟁범죄위원회(UNWCC)는 전쟁범죄재판 보고서(Law Reports of Trials of War Criminals)에 이른바 ‘사쿠라 클럽’을 운영한 민간 호텔 관리인 아오치 와시오(Washio Awochi)의 사건(Case No. 40/1946)28을 게재했다. 아오치는 ‘일본 헌병(Kempeitai)과의 직접적 그리고 간접적 협력을 통해 여성들을 위협하고 강제로 일본 민간인 남성을 위한 성매매 행위를 하게 한’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ii. 강제 성매매 등을 목적으로 일본군 관계자가 네덜란드인 부녀자를 연행한 ‘자바섬 세마랑 소재의 위안소 관련 사건’(Case No. 72/1947)으로 기소된 일본인 12명 가운데 1명이 사형, 8명이 징역형, 2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29 iii & iv. 이케다 쇼이치 사건(Case No.47A/1947)과 노자키 세이지 사건(Case No.34/1948)은 여성과 소녀들을 속임수를 이용해 수용소에서 유인한 비자발성이 입증된 사건이다. 또한 이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위협과 강압이 사용되었다는 것도 입증되었다. 이들은 ‘강제 성매매’와 ‘강간’의 전쟁범죄로 각각 15년 유기형, 12년 유기형을 선고받았다.30 판결문은 일부 여성과 소녀들이 자발적으로 징집되었더라도 당시 그들이 직면한 비인간적인 상황은 ‘도덕과 인간성에 어긋나며(contrary to morality and humanity)’ 범죄적이었다고 진술하고 있어, 그러한 강제적 상황이 동의에 의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일본군이 수용소의 ‘무력한 상황과 의존적이며 종속적 관계’를 조직적으로 이용하여 여성과 소녀들에게 성매매 행위를 시켰다는 설명도 분명히 했다.31 상기 사건들은 일본군이 민간인의 협력과 대행을 통해 조직화된 시스템으로 성매매를 강요했음을 증명해 준다. 유엔전쟁범죄위원회(UNWCC)는 네덜란드의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이 ‘전쟁범죄에 관한 국제법의 기존 지식을 가장 구체적으로 활용하여 법에 따른 합리적인 판결’을 내렸다고 평가하였다.32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의 결과는 분명히 네덜란드의 여성인권에 접근하는 동시대 타 국가들과의 차이를 증명해 보였으며, 세계대전 중 강제 성매매를 목적으로 부녀자를 동원한 전쟁범죄를 국제법에 의거해 처벌한 최초의 재판이다.33 또한 민간인 매춘업소 소유주뿐만 아니라 군인 개인이 강제 성매매에 가담함으로써 전쟁법규와 관례를 위반하여 유죄판결을 받은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기도 하다.34 다시 말해, 네덜란드가 시행한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은 역사상 최초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였고, 오늘날까지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일본군의 개입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각주 1. 네덜란드 국적의 여성들은 순수 유럽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네덜란드인과 현지인의 혼혈인 유라시아인(Eurasian)을 포함한 개념이다. 2. Jørgenson & Friedmann, 2014, p. 335. 3. Piccigallo, 1979, p. 175. 4. Loe de Jong, Het Koninkrijk der Nederlanden in de tweede wereldoorlog 1939-1945, Part 12, Staatsuitgeverij, ’s-Gravenhage, 1988, p. 892. 5. 동일인이 여러 차례 재판을 받았던 경우도 있었으므로, 실제 피고인의 수는 이보다 적다. 6. (1) 1946년 제44호(전쟁범죄의 개념 규정에 관한 총독령). 네덜란드가 제정한 조례 1946년 제44호는 39개 항목의 전쟁범죄를 정의하고 있다. 특히, 제1조 7항은 ‘강제 성매매를 목적으로 소녀 또는 여성의 납치’(Abduction of girls or women for the purpose of enforced prostitution)에 관한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같은 해 (1946년) 제45호(전쟁범죄 형법에 관한 총독령) 제4조는 ‘전쟁범죄를 저지른 자 또는 저질렀던 자는 사형 또는 무기나 1일 이상 2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제5조는 ‘전쟁범죄의 미수, 종범(從犯) 및 공모는 그 범죄와 똑같이 처벌한다’고 밝히며, 제9조는 ‘부하가 전쟁범죄를 저지른 경우, 상관이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실 또는 저지를 것이라고 알거나 적어도 그것을 당연히 추측했음에도 부하의 전쟁범죄 수행을 용인했을 때는 그 사람도 전쟁범죄와 동일하게 처벌할 수 있다(equally punishable)’고 명시한다. 즉, 명령권자와 지휘관의 책임을 범법자와 동일하게 처벌가능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Ordonnantie begripsomschrijving oorlogsmisdrijven No.44. 1946, Ordonnantie strafrechtsomschrijving No.45, See also Jørgenson & Friedmann, 2014, p.338, Piccigallo, 1979, p.177). 7. Soh, 2001; Jørgenson & Friedmann, 2014, p. 331; Friedman, 2015. 8. 1995년 네덜란드 문서보관법 15조 4항에 근거함. Archiefwet 1995. aritkel 15 lid 4. https://vng.nl/sites/default/files/2019-11/beperkt-waar-het-moet_20190726.pdf. 9. Dutch Government, 1994, p.2 10. Dutch Government, 1994, p.5. 11. Dutch Government, 1994, p.8. 12. Dutch Government, 1994, p.8. 13. De Jong, 1988, 11b. p.799. 14. Dutch Government, 1994, p. 14. 15. 여기서 ‘유럽’여성의 개념은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러시아, 벨기에, 영국 등 순수혈통 백인(totoks)을 의미할 뿐 아니라, 혼혈인 유라시아인(indos)을 포함한다. 당시 인도네시아 인구는 약 7천만명이었으며, 동인도의 유럽인은 대략 36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16. Dutch Government, 1994, p. 2. 17. Dutch Government, 1994, p.18. 18. Dutch Government, 1994, p.18. 19. Dutch Government, 1994, p. 18. 20. Dutch Government, 1994, p.2. 21. De Jong, 1988, 11b, p. 798. 22. De Jong, 1988, pp. 798-799. Algemene recherche. p.v. M.R, 8 jan. 1946, p. 4 (IC, 3) 23. De Jong, 1988, p.799. General Criminal Investigation Service. p.v. E.I., 1946년 1월 7일, p.6 (a.v., 12) 24. Nationaal Archief. Openbaar2022. Nr. 2278. “Bundel 5A, Semarang en Midden-Java”: Bangkong, Gedangan, Halmaheira, Karangpanas, Lampersarie”. 25.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은 총 171건의 사건을 다루었고, 총 419명을 기소하였다. 이 171건 중 4건이 일본의 강제 성매매와 관련된 것이다. 총 15명의 일본인이 기소되었고, 그중 1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De groot, 1990, p.23). 26. De Groot, 1990. pp.32-33, 66, see supra note 19. 27. No.72A/1947 판결문 참고 (https://www.law.cuhk.edu.hk/en/research/crj/document/Batavia-Judgment-No-72A-1947.pdf) 28. No.40/1946 판결문 참고 (https://www.law.cuhk.edu.hk/en/research/crj/document/Batavia-Judgment-No-40-1946.pdf) 29. 1) 동북아역사재단(2020) 2) De Groot(1990) 3) ICC Legal Tools Database(https://www.legal-tools.org/) 4) Jørgenson & Friedmann(2014). 30. De Groot, 1990, p. 406. Supra note 19. 31. Jørgenson & Friedmann, 2014, pp.339-340. 32. Piccigallo, 1979, p.177. 33. 바타비아 임시재판은 ‘위안부’ 강제동원을 국제법에 의거하여 유죄로 판결한 최초의 사례이다. ‘위안부’ 강제동원이 법정에서 유죄로 다루어진 사례는 일본 나가시키 항소법원 형사 제1부가 1936년 9월 항소심 판결에서 인정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이 판결문에는 나가사키 현에 사는 여성 15명을 ‘식당 종업원이라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꾀어 중국 상하이의 해군 지정 위안소에 보낸 뒤 성매매 시킨 민간인 10명이 받은 유죄판결이 기술되어 있다. (KBS News, 2021.06.27). 이는 전쟁 당시 일본 사법이 ‘위안부’ 모집과정에서의 문제를 범죄로 재판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34. 바타비아 임시재판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Yoon, B.S. 2010, p.16; Askin, 1997, p.302; Jørgenson & Friedmann, 2014, p.331. <참고문헌> 동북아역사재단(2020). 일본군 위안부 문제 자료집 2: 위안소 운영 실태와 범죄 처벌. 일제 침탈사 자료총서 92. 동북아역사재단. KBS News. (2021). “강제연행 공문서 없다”더니…日“3월31일 판결문 제출받아”.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19323 Askin, Kelly D. (1997). War crimes against women: prostitution in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s. Den Haag: Martinus Nijhoff Publishers. De Groot, L.F. (1990). Berechting Japanse oorlogsmisdadigers in Nederlands-Indië: Temporaire Krijgsraad Batavia. 's-Hertogenbosch: Art & Research. De Jong, Loe. (1988). Het Koninkrijk der Nederlanden in de Tweede Wereldoorlog. Deel 1 t/m 13. ’s Gravenhage: Staatsuitgeverij. Dutch Government. (1994). Report of a Study of Dutch Government Documents on the Forced Prostitution of Dutch Women in the Dutch East Indie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Unofficial Translation. The Hauge. Friedman, Sylvia Yu. (2015). Silenced No More: Voices of 'Comfort Women'. Freedom Campaign Publishers. Jørgenson, Nina.H.B. & Friedmann, Danny (2014). Enforced prostitution in international law through the prism of the Dutch Temporary Courts Martial at Batavia, FICHL Publication Series, 21, 331-354. Piccigallo, Philip R. (1979). The Japanese on Trial: Allied War Crimes Operations in the East, 1945-1951.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Soh, C. Sarah. (2008). The Comfort Women: Sexual Violence and Postcolonial memory in Korea and Japa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Tweede Kamer. (1993/1994). Verslag van de resultaten van een onderzoek in Nederlandse overheidsarchieven naar gedwongen prostitutie van Nederlandse vrouwen in Nederlands-Indie tijdens de Japanse bezetting. 23 607 nr. 1. Yoon, Bang-Soon. (2010). Imperial Japan's Comfort Women from Korea: History & Politics of Silence Breaking, Journal of Northeast Asian History,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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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귀향하지 못한 '위안부', 애도되지 못한 기억: 배봉기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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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하지 못한 '위안부', 애도되지 못한 기억: 배봉기라는 이름[1] 2025년 3월 10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본군'위안부' 최초 증언자 배봉기의 소식이 전해졌다. '배봉기의 유해를 국립 망향의 동산에 안장하자'고 요구하며 시민모임을 조직하고 있는 시민단체 '배봉기의 평화'가 그녀의 유골함이 손상된 채로 오키나와에서 한국으로 이장되었다는 사실을 담은 사진과 글을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배봉기라는 존재를 식민주의와 냉전, 국가와 남성에 의한 폭력의 응축된 장소로 바라보아온 김신현경 교수는 그동안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침묵을 강제한 구조를 되물으며 배봉기의 삶과 죽음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기억하기를 제안한다. 가장 이르고, 공식적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1991년 가을, 오키나와의 허름한 숙소에서 한 여성이 홀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름은 배봉기.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전쟁터로 끌려가 일본군'위안부'가 되었고, 국적도 없이 오키나와에서 살아가다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재일 조선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1975년, 일본 정부에 재류특별허가를 신청하면서 자신이 오키나와에 '위안부'로 끌려왔음을 밝혔다. 이는 오늘날까지 확인된 가장 이르고, 공식적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다. 우리가 '위안부' 운동의 시작점으로 기억하는 1991년 김학순의 증언보다 16년이나 앞선다. 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최초 증언자'로 기억되지 않았다. 배봉기는 1914년 충청남도 예산군 신례원에서 머슴 아버지와 품팔이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민며느리와 보모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함경남도 함흥에 정착해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녀는 1943년, '여자 소개꾼'들로부터 "일 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데를 소개받는다. 흥남역에서 출발해 경성, 부산, 시모노세키, 모지, 가고시마를 거쳐 도착한 곳은 오키나와의 도카시키 섬. 그 '일자리'가 바로 '위안부'였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 중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배봉기는 그 참혹한 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녀의 삶은 계속된 투쟁이었다. 미군 점령하의 오키나와에서 그녀는 '무국적 조선인'으로 분류되었고,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면서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체류 자격을 얻기 위해 그녀는 다시 '위안부'였던 자신을 말해야 했다. 이처럼 '위안부' 피해자임을 가장 먼저 증언했지만, 한국에서 그 '최초'는 오랫동안 드러나지 못했다. '위안부' 운동 역사에서도 그녀의 이름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 사회에서 조용히 잊힌 이름은 마지막 순간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배봉기의 죽음의 의미는 단지 한 개인의 사망이 아니었다. 사망 소식을 접한 두 재일조선인 단체, 곧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총련)은 그녀의 유골을 어디에, 누구의 이름으로 묻을 것인가를 두고 갈등을 벌였다. 누구의 '죽음'인가, 어디에 '묻혀야' 하는가, 그리고 누가 그녀를 '대신해 말할 자격'이 있는가. 배봉기의 주검을 둘러싼 이 경합은 단순한 장례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살아온 시간 속에 깃든 식민주의와 냉전의 긴 그림자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망자를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가. '누구의' 유골인가?: 민단과 총련의 유골 소유권 분쟁 1980년대 말부터 동아시아 지역은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휩싸였다.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집권과 개혁으로 촉진된 글로벌 탈냉전, 1987년 한국의 민주화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사회운동의 언어로 재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70년대부터 기생관광과 유신 반대 운동을 벌여온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1988년 개최한 '여성과 관광문화'라는 제목의 국제 세미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기생관광'이라 불리던 산업은 한국 정부가 일본인 남성을 대상으로 적극 장려한 성매매나 다름없었다. 이 세미나에서 나중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초대 공동대표를 맡은 이화여대 교수 윤정옥은 오랜 현장 조사와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정신대와 우리의 임무'라는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고, 이는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산하 정신대연구위원회 설치와 1990년 1월 한겨레신문 연속 기고로 이어졌다. 이는 한국 사회 여성운동에 굵직한 흐름을 형성했다. 1990년 11월, 여러 여성 단체들이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결성했고, 이 단체는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인 사회 의제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이라는 이름의 여성이 공개 증언을 통해 자신의 위안부 경험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일본 제국주의의 가해를 고발한 그녀의 증언은 이후 전 세계를 향한 연대의 출발점이 되었다. 배봉기도 이런 변화를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녀를 돌봤던 총련 활동가 김현옥의 2012년 인터뷰에 따르면,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한국의 고향에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가고 싶지만 고향에도 미군기지가 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1989년 북한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남한 여대생 임수경에게도 관심을 보였으며, 1990년부터 시작된 북일수교협상에 특별한 기대를 걸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그녀가 1991년 10월 18일 홀로 사망했다는 소식에 한국 언론은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소식을 듣고 오키나와를 직접 찾은 정대협 윤정옥 대표가 전한 부고는 한겨레신문에 짤막한 기사 한 줄로 실렸을 뿐이다.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의 삶이 아닌, 죽음 이후 남겨진 유골에 쏠렸다. 배봉기의 1주기를 앞두고 총련은 그녀가 생전에 "외국 군대 없는 통일 조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것을 유언처럼 해석하며, 오키나와에 유골을 남겨두겠다고 발표했다. 반면 민단 측에서는 그녀의 조카, 즉 언니의 아들이 등장해 유골을 고향으로 가져가겠다고 나섰다. 두 주장은 결국 법정 싸움으로 옮겨갔다. 그녀는 사망한 지 닷새가 지나 발견되었기에 사후에 어디에 있고 싶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1987년 출간된 『빨간 기와집』, 1989년 인터뷰, 1991년 나온 다큐멘터리 <아리랑의 노래>, 2017년의 <침묵> 속 배봉기의 말들을 들여다보면, 그녀의 마음은 단순히 어느 나라에 속하고 싶은지를 넘어서는 감정이었다. "고향에 갔는데 집이 없더군요…. 너무나 쓸쓸한 거예요." "가보고는 싶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외로울 뿐이에요." 그녀의 말은 고향이라는 장소가 더 이상 안전하거나 따뜻한 공간이 아니게 된 이들에게 귀향이 갖는 복잡한 감정을 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배봉기를 둘러싼 이념적 해석은 오히려 그녀의 말을 지우는 방식이었다. '포스트식민' 페미니스트 학자 가야트리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서발턴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의미망의 부재를 지적한다. 기록된 배봉기의 목소리와 별개로 그녀의 '말'은 양쪽 모두에게 재현되고 대변되는 방식으로 이용되었다. 민단은 그녀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여성'으로, 총련은 '분단된 조국을 거부한 여성'으로. 그렇게 각각의 정치적 기억 속에서 그녀는 또다시 침묵하게 되었다. 귀향하지 않은 '위안부', 외면한 한국 사회 배봉기의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감정과 복잡한 정치적 맥락은 남한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더욱 메말라갔다. 민단과 총련이 벌인 '대신 말하기'의 정치는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감정을 안고 떠났는지에 대한 관심을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그 침묵의 정치에 남한 사회는 조용히 동조하고 있었다. 물론 1991년 당시 민단과 남한 정부가 같은 목소리를 낸 것은 아니었다. 남한은 냉전이 빠르게 해체되던 국제정세 속에서 새로운 외교 전략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미 소련과 수교를 마친 상태였고, 중국과 수교도 추진 중이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 일명 '7·7 선언'과 남북총리회담을 계기로 남북 관계에도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하지만 북방 진출을 꾀하는 일본과는 미묘한 긴장 관계에 있었고, 북한 역시 사회주의 체제가 허물어지는 속에서 경제난과 외교적 고립을 타개해야 했다. 이런 와중에 1991년 1월 북일수교회담이 열렸고, 이후 2년여 동안 총 8차례 회담이 계속됐다. 특히 북한은 1992년 6차, 7차 회담에서 일본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 배봉기의 죽음과 1주기 즈음은 '위안부' 문제가 북일 외교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총련은 이 정치적 흐름을 적극 활용하고자 했고, 반대로 민단은 이를 견제하려 했다. 그래서 배봉기의 유골을 두고 민단이 조카를 내세워 법적 소유권을 주장한 것도 단순한 가족의 의지라기보다, 하나의 정치적 제스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남한 사회와 정부는 이 모든 일에 거의 침묵했다. 배봉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를 둘러싼 갈등에 대해서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1975년 그녀의 삶이 처음 언론에 소개되었을 때와 비슷한 침묵이었다. 다만 1975년의 침묵과 1991년의 침묵은 성격이 다르다. 1970년대는 냉전의 강고한 시기였고, 총련과 관련된 이야기를 공론화하는 일은 사실상 금기였다. 반면 1991년의 남한은 탈냉전과 민주화를 겪고 있었다. 유엔 동시 가입,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비핵화 선언 등 남북한 화해 무드를 강조하던 그 시기에는 오히려 민감한 이슈를 피하는 전략이 필요했던 것이다. 배봉기의 죽음도 그렇게 화해를 해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덮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침묵은 또 다른 배제였다. 제국의 신민으로 동원되어 귀향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은 한 여성의 생을, '화해의 시대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지워버린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냉전의 유산이 남긴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니었을까. 이 무렵,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남한 사회에서 본격적인 의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일본, 한국, 북한에서 열린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국제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1992년 9월 1일부터 6일까지 북한에서 열린 3차 토론회는 남한 주요 언론에도 보도될 만큼 이목을 끌었다. 남북한, 일본, 미국, 독일의 여성들이 함께 모여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했고, 북한은 이를 민족문제로 정의하며 남북의 공동 대응을 강조했다. 일본 참가자들은 가해국의 시민이자 천황제 사회의 피해자로서 연대의 주체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연대의 장에서도 배봉기처럼 '돌아오지 못한 위안부'의 죽음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한편 같은 해 12월 6일, 배봉기의 49재가 치러진 날, 김학순이 도쿄지방재판소에 '위안부' 피해자로는 최초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같은 날, 일본과 한국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가 역사화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 같은 시간의 병치는 우리가 어떤 문제를 중심에 놓고 기억해왔는지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돌이켜 보면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국가 간 관계 속에서 기억을 조직해 왔지만, 그 국가 경계 바깥에서 살아가다 조용히 사라져간 이들에게는 쉽게 시선을 주지 못했다. 배봉기의 죽음은 그 틈에 존재했다. 제국, 냉전, 분단이 만들어낸 질서 속에서 생을 꾸렸고, 그 경계 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한 복합성과 감정의 결은 당시 사회운동 안에서도, 정부의 대응 안에서도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그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어떻게 애도할 것인지 선뜻 답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지금도,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다. 기억인가, 재소유인가 그러나 지금, 배봉기의 유해는 다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시민단체 '배봉기의 평화'는 2025년 3월 10일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사진과 글에서 그녀의 유골이 오키나와에서 한국으로 이장되는 과정에서 유골함이 손상되어 흙과 섞인 채로 방치된 상태였다고 전했다. 이 모습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그녀는 어디에 묻혀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누구의 기억으로 그녀를 말하려 하는가. '배봉기의 평화'는 '일본군'위안부' 최초 증언자 배봉기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에 협조를 요청하며 '배봉기의 유해를 국립 망향의 동산에 안장하자'는 요구를 중심으로 시민모임을 조직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이 다시 호명되는 일이 반갑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녀가 '최초의 증언자'로 불리는 것은 소중한 인정일 수 있다. 다만, 그러한 호명이 국가주의적인 서사로 제한될 가능성을 경계하게 된다. 더욱 성찰해야 할 것은 배봉기의 증언이 들리지 않았던 바로 그 이유가 아닐까? 그녀의 말은 이미 존재했지만, 그것을 지워버린 것은 바로 식민주의와 냉전, 그리고 국가 중심의 기억 체계였다. 이 체계를 문제 삼지 않은 채, 그녀를 다시 '국가의 이름으로' 기념하는 일은 애도를 제도화하고, 기억을 다시 권력의 틀 안에 가두며, 그 기억을 가능하게 했던 사유와 노동의 흔적을 지우는 방식이 될 수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배봉기라는 존재를, 식민주의와 냉전, 국가와 남성에 의한 폭력의 응축된 장소로 바라보아 왔다. 그녀가 품었을 복합적인 감정들—꿈에서는 자주 갔지만, 현실에서는 도달할 수 없었던 고향에 대한 감정—을 가능한 한 온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유골을 어느 일방이 '가져가는' 방식이 아니라, 그녀를 기억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시는' 애도의 방식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오키나와의 이웃들과, 한국의 사람들이, 국가의 대결 구조를 넘어서 그녀를 기릴 수는 없었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배봉기를 다시 기억하는 일이, 단지 '국가가 인정한 최초 증언자'라는 새로운 호칭을 붙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녀의 말이 왜 들리지 않았는지를 묻고, 그 침묵을 강제한 구조—식민과 냉전, 그리고 지금까지 '위안부' 운동을 감싸온 국가주의적 해결 틀 자체를 되묻는 일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한 애도는 체제와 제도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그녀를 기억한다면, 그 기억은 이제 다른 방식의 말하기, 다른 감각의 연대, 다른 시간의 윤리로 이어져야 한다. 편집자주 ^ 이 글은 김현경, 「냉전과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의 잊혀진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한국여성학』 제37권 제2호, 2021)라는 제목의 논문의 Ⅴ장 ‘주검을 둘러싼 경합: 지워지는 목소리’를 바탕으로, 웹진 『결』의 목적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DOI: 10.30719/JKWS.2021.06.37.2.203) 또한 이 논문은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 민족주의와 망언의 적대적 공존을 넘어』(김은실 엮음, 휴머니스트, 2024) 에 「배봉기의 잊힌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이라는 제목으로 수정, 보완되어 재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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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자료해제 포로 심문보고서, ‘위안부’ 관련 연합군 기록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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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미국보고서 자료해제 1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 조사보고서 제120호 2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 3부.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 4부.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 심문회보 제2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자료집 전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링크이동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자료집 ‘위안부’ 관련 연합군 기록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 연합군은 다양한 부대에서 일본군 포로심문 보고서를 남겼다. 영국군이 주도하던 동남아시아 총사령부(SEAC) 산하의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SEATIC), 미국의 전시정보국(OWI) 등과 함께 맥아더가 사령관으로 있던 남서태평양 총사령부 산하의 연합군 번역통역부(ATIS) 등이 대표적이다.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문서 중 포로 심문보고서는 노획문서와 함께 ‘위안부’ 관련 연합군 기록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연합군은 군사 정보 획득을 위해 일본군 포로에 대해 자세한 심문기록을 남겼다. 주로 군사 관련 내용이었으나 병사들의 삶 전체를 심문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병영 생활 정보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위안소와 ‘위안부’는 군사적 중요도는 크지 않았으나 병사들의 병영 생활과 관련해 종종 나타나는 문제였다. 특히 연합군이 심리전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흔적이 엿보인다. 앞서 소개한 120번 조사보고서와 마찬가지로, 포로 심문보고서 역시 일본군 병사들의 병영 생활 전체를 조감하면서 심리전에 활용하기 위해 ‘위안부’ 문제에 접근했다고 보인다. 연합군번역통역부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는 일본에서 1997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 만든 『‘종군위안부’ 관계 자료집성』(전 5권) 에도 일부 포함되었고 정진성 편 『일본군 ‘위안부’ 관계 미국자료』(전 3권, 선인, 2018)에 2건이 게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심문보고서는 2017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일본군 전쟁범죄 ‘위안부’ 자료집』(1~3)에 실려 있다. 특히 이 자료집은 위안소와 ‘위안부’가 언급되는 일부분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심문보고서 전체를 완역했기에 다른 자료집들과 차별화된다. 일본군이 주둔한 곳에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증거 연합군 번역통역부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는 총 783건이었으며 이 자료집에 수록된 것은 모두 45건이다. 즉 783건 중 45건에서 위안소와 ‘위안부’ 관련 내용이 나타난다. 비율로 보면 약 5.7%에 해당한다. 45건에 나온 일본군 병사들의 신상 정보를 확인해보면, 직업에 있어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각각 절반이고 교육에서는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고루 분포해 있다. 이는 일본의 사회적 구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문 보고서는 1942년 12월 31일부터 1945년 5월 21일까지 3년 5개월여에 걸쳐 기록됐다. 위안소와 ‘위안부’가 언급된 지역은 다양하다. 뉴기니 인근 뉴브리튼섬의 라바울이 19번, 마닐라, 다바오, 타클로반 등 필리핀이 7번, 벨라완, 암본, 마랑, 아마하이 등이 포함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가 5번, 상하이 광저우 등의 중국이 4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싱가포르 그리고 말레이시아가 각각 1번씩 언급되었다. 지역명이 없거나 불분명한 것은 12번이다. 연합군번역통역부(ATIS) 포로 심문보고서에 언급된 지역과 빈도수 남서 태평양 사령부 관할 지역에서 포로가 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심문보고서임에도 버마와 태국을 제외한 동남아시아 전체에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는 일본군의 이동에 따라 여러 지역의 위안소를 경험한 병사들이 많았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일본군이 주둔한 곳이면 거의 예외 없이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특히 라바울에 대한 언급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포로 대부분이 남방 전선에 투입된 병력이었다는 것과 라바울이 남방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라바울은 사실 남방 최전선에 해당하는 지역의 일본군 중심지였다. 위치상으로 뉴기니 바로 옆 뉴브리튼 섬에 있는 라바울은 일본군이 뉴기니와 호주 침공을 위해 10만의 병력을 집결시킨 전략 거점이었다. 그런데도 라바울은 일본 패전 시까지 연합군에게 점령되지 않았다. 이것이 라바울의 위안소가 병사들에게 자주 목격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연합군번역통역부는 1943년 7월과 11월 사이 심문보고서 형식(Interrogation Report Proforma)을 체계화했다. 심문보고서의 전체 형식은 먼저 포로의 성명, 번호, 계급, 소속 부대, 생포 장소와 시점, 신장과 체중, 연령, 주소 및 직업 등의 기초 정보를 기술하고 본문으로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본문은 대체로 1. 서언, 2. 이력, 3. 생포, 4. 부대 또는 전력, 5. 식별, 6, 인물, 7. 취역 함정, 8. 적의 장비, 9. 적의 방식(enemy method), 10. 통신, 11. 방어, 12. 적의 보급, 13. 사기와 선전, 14. 적의 의도, 15. 손실 또는 사상자, 16. 화학전, 17. 지형(지역), 18. 의무, 19. 연합군, 20. 특별 첩보, 21. 일반 등으로 구성되었다. 본문의 서언에서는 포로의 태도나 지능 등에 대한 간략한 평가가 내려졌고 이력은 입대 후 생포되기까지의 과정을 날짜별로 정리한 것이었으며 이하 대부분은 군사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본 자료집과 직접 관련되는 위안소, ‘위안부’와 관련된 내용은 특별 첩보, 사기와 선전 등의 항목에 집중적으로 분포했다. ‘사기와 선전’ 항목 중에서도 전투 복무의 상황(Conditions in Fighting Services)이라는 소항목에 위안소 및 ‘위안부’ 관련 내용이 나타난다. 이상을 통해 보건대 연합군에게 위안소와 ‘위안부’는 애초 특이한 정보로 인식되었다가 점차 선전전의 소재로 의미가 있다고 파악되었던 듯하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보고서의 배포선이다. 보고서의 배포선은 애초 9곳이었는데, 1944년 9월 무렵에는 무려 39개까지 증가하였다. 이 단계에서 배포선은 남태평양 전구를 넘어 중국·버마·인도 전구는 물론 미 전쟁 부까지 확대되었다. 1945년 들어서는 배포선이 총 88개소 273부로 확대된다. 남서 태평양 총사령부 참모부서에서부터 거의 모든 단위부대, 심지어는 연대급 전투부대에도 배포되었고 영국,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등의 연합군 정보부대와 미 전략첩보국까지 배포망이 확대되었다. 이렇게 배포선이 대폭 확대되었다는 것으로 위안소와 ‘위안부’ 문제가 연합군 내에서 광범위하게 인식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통제했다는 증거 군사적 부분을 제외하고 포로 심문보고서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위안소 및 ‘위안부’ 관련. 둘째, 전쟁범죄와 관련될 수 있는 잔혹 행위. 셋째, 일본군의 군대 생활 및 의식이 그것이다. 첫째와 관련된 보고서 내용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조선인 ‘위안부’의 존재를 진술하는 보고서로 총 24개이다. 둘째는 조선인에 대한 언급은 없고 일본과 중국인이나 현지인 ‘위안부’를 언급하는 보고서이다. 총 11개가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은 ‘위안부’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다만 위안소의 존재를 진술하는 보고서인데 총 10개가 된다. 45개의 제한된 보고서이기는 하지만 조선인 ‘위안부’가 제일 광범위하게 존재했음을 증명해주는 자료라고 판단된다. 보고서 진술 내용은 상당히 소략하다. 대체로 특정 지역의 위안소 설치 여부, ‘위안부’ 인원과 국적, 요금 등이 언급되는 정도이다. 위안소의 소유와 운영에 대해서는 포로들의 진술이 엇갈리지만, 군의 통제 속에 있었다는 점에서는 대부분 동일한 입장을 보여주었다. 즉, 사설이건 군 직영이건 중요한 것은 당시 일본군 병사들도 위안소가 군의 직접적 통제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라바울에는 이미 1942년부터 위안소가 설치되었음이 확인된다. 한 병사의 심문 보고서는 1943년 1월 라바울에는 두 개의 위안소가 있었으며 조선인과 일본인 합쳐 100명의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1943년 2월에 생산된 제45호 포로심문보고서는 필리핀 지역의 위안소 중 일부는 군 내부에 설치되었음을 알려준다. 위안소는 일부 일본군 병사들에게조차 추잡한 것으로 인식된 경우도 있었다. 1943년 4월 14일 자 포로심문보고서 제54호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일본 도쿄 제대 출신의 해군 경리장교 이나가키 리이치(Inagaki, Riichi)는 육군과 해군이 위안소를 설치한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매우 추잡한 것이고 혐오스러운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he asserted that the subject was an ugly one, abhorrent to him.”) 일본의 최고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도쿄 제대 출신의 장교가 보기에도 일본군의 위안소는 용납되기 곤란한 것이었다. 상당히 독특한 성격의 포로 심문보고서도 있다. 독일군 잠수함 승조원들의 제676호 심문보고서가 그것이다. 독일과 일본은 동맹 관계였기에 상징적 의미로 독일 잠수함이 바타비아의 일본 해군기지에 파견되어 있었다. 이 잠수함이 미군 공격으로 싱가포르 근해에서 침몰당했고 승조원들은 포로가 되어 심문보고서를 남기게 된다. 독일군 장교들은 동맹 관계에 있던 일본군에 대한 경멸과 적대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위안소였다. 독일군들은 자신들은 절대 출입할 수 없고 일본군 장교만 출입하는 위안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또 네덜란드 여성들이 동원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추축국 동맹 관계에 있었음에도 위안소는 오직 일본군만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위안소의 의미와 관련해 상당한 시사를 준다고 보인다. 이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직접 통제하고 있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일본군의 독점적 특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폭력적 병영 생활과 인종주의 연합군번역통역부의 포로 심문보고서가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일본군의 군대 생활과 의식 및 전시기 일본의 내부상황에 대한 적지 않은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점이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이 일본제국의 군대라고 한다면, 일본군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포로들은 전반적으로 일본제국의 군국주의와 천황주의 이데올로기를 상당한 정도로 내면화한 것으로 보인다. 제59호 보고서의 주인공은 심문 과정에서 천황이 언급될 때마다 바로 기립해 차렷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제63호 보고서의 주인공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전쟁 책임이 없다는 인식을 보여주었고 제60호 보고서는 미국이 중국을 도와주고 있기에 미국과의 전쟁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심문보고서는 또한 일본군의 병영 생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계급과 함께 연공서열로 구축된 일본군의 내부 규율이 매우 가혹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규율화는 폭력의 만연과 밀접히 관련된다. 제664호의 포로는 입대 첫해를 선임병들에게 입에서 피가 날 정도로 따귀를 맞으며 생활한 것으로 기억했다. 군대 내부의 문제와 함께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추축국 동맹 간의 균열이었다. 앞서 언급한 독일군 잠수함 승조원 심문보고서는 일본군과 독일군 관계의 이면을 잘 보여준다. 두 국가는 동맹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심각한 갈등관계였다고 보인다. 독일군 포로의 진술은 일관되게 일본과 일본인 그리고 일본군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일본군 포로들 역시 독일에 대한 태도를 묻는 말에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독일의 원조를 묻는 말에 모든 일본군 포로들은 한결같이 별다른 것이 없었다고 했고 히틀러와 천황의 비교에 대해서도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동맹 속의 적대감은 특히 인종주의와 깊이 관련된다. 심문관의 판단에 따르면 독일군 대부분은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일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고 했다. 즉 바타비아의 독일군 포로들이 보기에 일본군은 백인종 대 황인종의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보였고 일본군 사병들은 독일군이 일본군 지휘부를 출입하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군 포로들의 태도와 정확하게 조응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독일의 인종적 우수성과 일본의 열등함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인종과 황인종의 전쟁이라는 일본의 인종주의 구도는 다른 한편으로 황인종 내부의 차별과 억압을 내장한 것이었다. 제30호 심문보고서의 포로는 중국인은 일본인보다 열등한 인종으로 차별적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일본은 근대 서구가 만들어낸 인종주의의 피해 대상이자 가해자라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다. 근대 서구와 백인에 대한 열등감을 아시아의 또 다른 ‘유색인종’에 대한 우월감으로 상쇄하고자 한 전략으로 읽히기도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되어야 하겠지만 인종주의와 관련한 연구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일본군 위안소의 요금 제도는 인종별로 차등화된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유럽 여성들은 특별히 높은 가격이 책정되었고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 등의 순서가 보통이었다. 인종주의에 오염된 일본군의 실태를 보여주는 일례이다. 일본군의 입장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은 인종 간 전쟁을 위해 동원된 ‘황인종’이자 일본 제국 내부의 최하위 사회적 약자인 식민지 여성들이었다. 일본군은 사회적 반발과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복수의 가능성이 가장 적은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듯이 ‘위안부’는 식민지 조선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나와야 했을 것이다. 1. 이나가키 라이치의 포로심문 보고서 표지 2. 이나가키 포로심문보고서 내용.jpg 3. 이나가키 포로 심문보고서 중 위안소 언급(밑에서 두 번째 문단).jpg 4. 이나가키 포로 심문보고서 중 식인행위(canniblaism) 언급 부분.jpg 5. 독일군 잠수함 승조원 포로 심문보고서 표지.jpg 6. 독일 잠수함 승조원 포로 심문보고서 중 위안소 언급 부분(상단 Prostitution 항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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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일본군‘위안부’ 증언의 과거와 미래(1): 증거로서의 증언과 행위로서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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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의 증언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김학순의 증언 이후 시민운동이 본격화되었으며, 학계는 사료 발굴 등 학술적 실천으로 응답하였다. 피해생존자의 증언은 대중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로서 사회적 호소력과 파급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증언은 듣는 이의 의도나 목적에 따라 자의적으로 편집‧해석되기도 했으며, 역사를 왜곡하고 피해생존자를 공격하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특히 증언의 수집과 연구는 시민운동진영과 학계가 긴밀하게 협조하여 진전시킨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역사부정론의 공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양쪽의 인식의 간극은 크게 벌어졌다. 요컨대, 증언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 대중이 가장 잘 아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잘 모르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증언에 대한 학계의 고민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증언을 깊고 넓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일본군‘위안부’ 운동 초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증언을 수집하고 채록하는 것이었다. 이는 증언자가 고령인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위안소 제도에 대한 사료와 연구 기반이 부족한 상황에 기인했다. 실제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현 정의기억연대)가 1993년에 처음 발간한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의 해설은 “군위안부 문제의 주안점은 우선 진상을 밝혀내는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하고 우선적인 과제는 피해자들의 경험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1] 이러한 기획 의도에 따라 1집에 수록된 증언은 징모 과정, 위안소 시스템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연대기 순으로 재구성되어 있으며, 문어체 형식으로 가필되어 있다. 더욱이 초기 운동은 법적 투쟁과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에 증언은 ‘증거’의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위안소의 실체를 밝히는 학계의 연구가 축적되고, 1990년대에 이르러 여성구술사에 대한 인식이 진전되면서 증언 연구는 증언의 ‘증거’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구술 행위’ 그 자체에도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증언은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독백이 아니다. 증언은 말하는 이가 듣는 이와의 관계 속에서 과거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재현하는 행위이며, 증언집은 조사자와 피해자의 상호 대화와 소통의 산물이다.[2] 한편, 증언의 구술성에 주목할 때, 증언자 특유의 말투뿐 아니라 표정, 손짓, 휴지(休止), 침묵 등 비언어적 요소 또한 증언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이를 문자 텍스트로 옮기기 위한 방법론 또한 중요한 증언 연구의 한 부분이 된다.[3] 2000년 이후 발간된 증언집은 증언자의 입말을 살리면서, 비언어적 요소의 의미를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호들을 도입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증언집 4권의 “무수히 열리되 닫히지 않는 따옴표들의 행진”[4]이라든가 증언자 구술의 장단이나 강약까지 표현하려 한 증언집 6권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의 ‘일러두기’가 이러한 고민의 결과이다.[5] 증언을 ‘행위’로 인식하게 되면서, 증언이 당사자에게 미치는 심리적‧인식적 변화에도 학술적 연구가 진행되었다.[6] 증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발화 장소의 성격에 따라, 혹은 청중의 국적이나 성별, 나이에 따라 증언 행위가 달라지는 것은 증언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증언자의 주체성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발전은 증언의 진실성에 대한 공격에 의해 쉽게 가려지거나 왜곡되었다. 사실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대중조차도 증언이 달라지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는 ‘증거로서의 증언’이 대중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증언자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탓이다. 흔히들 증언자를 ‘살아있는 증거’라고 하면서도, ‘살아있는’이라는 의미를 삭제한 채 ‘증거’로서만 인식하려 드는 것이다. 증언자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경험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주체적 존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증언 연구는 역사부정론자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또 증언 청취와 해석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부단히 갱신되었다. 예컨대 전형적인 피해자상에 부합되는 증언만이 청취되고 과잉 대표되었다는 비판은 1990년대 후반부터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 중 일부는 식민지적 차이를 삭제하고 일본 정부를 면책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지만,[7]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의 피해자성이 정조 규범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입각하여 강조된 측면이 있음은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증언을 통해 ‘할머니’라는 호명에 담을 수 없는 피해생존자의 다양한 주체성을 밝히거나, 피해가 과거뿐 아니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읽어내는 연구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8] 한편, 증언의 사실적 진실성은 증언의 불변성이나 일관성이 아니라, 역사학과의 상호보완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 역사학계는 피해자의 증언을 실마리로 역사적 단서를 찾아내거나, 역사적 맥락과 실증 자료를 통해 증언의 공백을 보완하고 피해의 전체상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축적해 왔다.[9] 이러한 연구에서 증언은 피해생존자 당사자의 경험에 대한 진술이기도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에 대한 증언으로 확장된다.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는 증언을 ‘사실 검증’이라는 편협한 잣대를 넘어 깊이 있게 청취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최근에는 증언 연구의 범위를 확장하는 연구들이 제출되고 있다. 구술 증언 외에 ‘회고’, ‘수기’ 등의 양식으로 발표된 증언이나, 참전 군인의 회고록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1991년 이전에 출판 상업주의에 의해 외설적으로 소비되었던 인터뷰 기사나, 새로 발굴된 피해생존자의 수기를 분석하여 당시 ‘위안부’ 증언이 재현되던 방식을 살핀 연구들을 예로 들 수 있다.[10] 참전 병사들의 전쟁회고록 속에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위안부’ 목격담을 선별하여, 자료적 가치를 밝히고 군인들의 ‘위안부’ 인식을 밝히는 연구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11]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30년 이상 지속되고, 증언이 축적됨에 따라 운동 초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으면서 증언에 대한 인식 변화를 살피거나, 증언 수집과 채록 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이 수행되고 있다.[12] 더불어 지금까지 ‘위안부’ 운동과 이에 관한 연구가 정대협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문제의식을 가지고, 각 지역의 자생적 운동에 관심을 돌리는 경향이 감지된다. 지역의 ‘위안부’ 운동 연구는 증언 자료를 더욱 풍부하게 확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각주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소 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한울, 1993, 15쪽. ^ 2000년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증언팀, 「이 증언집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풀빛, 2001, 35~36쪽 참조. (이하 서명과 페이지만 표기) ^ 이선형,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증언의 방법론적 고찰」,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 증언집 4권은 “이 따옴표는 증언 내용이 편집자의 말과 단어로 가필되지 않았고 증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구성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자 “증언자가 말하고 있음을, 지금 현재 독자에게 말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독자로 하여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증언참여자가 되기를 촉구하는 기호”라고 밝히고 있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35쪽.)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부설 전쟁과여성인권센터 연구팀,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여성과 인권, 2004. <http://contents.nahf.or.kr/iswjViewer/item.do> ^ 황은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의식 변화 과정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심영희, 「침묵에서 증언으로: ‘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귀국 이후의 삶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2000; 사카모토 치즈코, 「전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증언’의 정치학」,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이에 대한 비판은 김부자, 「피해증언과 역사수정주의적 페미니즘」, 『한국구술사학회 학술대회』, 2019 참조. ^ 대표적으로 양현아, 「증언과 역사쓰기-한국인 “군 위안부”의 주체성 재현」, 『사회와역사』, 2001; 양현아, 「증언을 통해 본 한국인 ‘군위안부’ 들의 포스트식민 상흔(Trauma)」, 『한국여성학』, 2006. ^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2019. 2.25~3.20)은 서울시와 정진성 연구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전시로,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역사적 맥락 위에서 재구성하고, 발굴한 기록물을 통해 증언의 여백을 보완하여 대중에게 전달하였다. 그외 피해자 증언에 기반한 역사학계의 성과로 강영심, 「종전 후 중국지역 ‘일본군 위안부’의 행적과 미귀환」, 『한국근현대사연구』, 2007; 박정애, 「만주 지역의 일본군 위안소 설치와 조선인 ‘위안부」, 『아시아여성연구』, 2016 등 참조. ^ 이지은, 「민족국가 바깥에서 등장한 조선인 ‘위안부’와 귀향의 거부/실패」, 『사이(SAI)』, 2020; 배지연, 「비극적 모빌리티 서사와 증언의 문제」, 『한국비평문학회』, 2022. ^ 후루하시 아야, 『비판적으로 읽는 일본 군인 회고록 속 '위안부'』, 동북아역사재단, 2021. ^ 이지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 초기 증언의 교차적 듣기」, 『역사학연구소』,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