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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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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 1.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2. [에세이] <김복동>이 남긴 것 3.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4.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5.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늘 꼿꼿했던 그녀의 등을 기억합니다 류광옥 (법무법인 가로수 변호사, 웹진 결 편집위원) 이 글을 쓰기 위해 우선 떠오르는 것들을 낙서처럼 적어 봤습니다. 수요시위, 재일조선학교,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나비기금……. 상당히 많은 단어가 떠올라 메모지가 금세 채워졌습니다. 무엇을 써야 할까? 고민하며 메모에 적힌 단어들을 다시 살펴보다가 메모지에 '등'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메모지에 빼곡히 적혀 있는 다른 단어들과는 달리 왜 '등'이라는 단어를 적었는지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다큐멘터리 <김복동>을 본 많은 사람이 울었을 겁니다. 조금 울거나 영화 내내 울거나. 하여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울 수 있는 만큼 울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큐멘터리 <김복동>에서 제게 가장 마음 아프게 다가왔던 것은 그녀의 '등'이었습니다. 아흔을 넘긴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곧게 뻗은 그녀의 등과 목, 그녀는 자세에서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있을 때조차도 그녀는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허리를 세우고 꼿꼿이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그녀의 등에 유독 눈길이 갔던 이유는 저의 어머니 때문이기도 합니다. 10년 전 수술을 받은 곳이 덧나면서 얼마 동안 누워계신 후 다시 일어난 어머니의 등은 완만하게 굽어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등 펴셔요", "바로 앉으려고 해 보셔요" 계속 재촉하게 됩니다. 제가 그녀의 옆에 있었다면, 지금 그녀가 제 옆에 있다면, 저는 그녀에게 등을 펴라는 재촉은 하지 못하겠지요. 불필요한 말일뿐만 아니라, 아마 오히려 그녀가 제게 "등 좀 펴라" 핀잔을 줄 것 같습니다. 단상 아래의 김복동 윤지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자료팀장) 나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하 박물관) 자료실에서 자료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박물관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산하 기관이다. 올해 서른 살이 된 정대협은 기존의 활동을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로 물려주고, 역사를 기억・기록하는 기능은 박물관에 남겨두었다. 대다수 사람은 정대협, 정의연, 박물관에서 일한다고 하면 누구보다 이 역사를 잘 알고, 누구보다 피해자와 가깝고, 어느 기관보다도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나는 이곳에서 일한 지 3년이 되었고, 할머니들과 만나는 날은 생신이나 어버이날, 시위 당일 정도이다. 또한 할머니와 관련된 직접적인 정보는 개인정보로 보호되어 공공기관에서 관리되고 있고, 그간의 연구조사 사업 역시 각각의 연구소와 사업을 발주한 정부 기관에서 관장한다. 글을 쓰면서 가장 고민스러운 점은 내가 과연 한 단체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누군가의 면모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이다. 내부자로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정보 수준을 제공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 글을 기회로 내 기억 속의 단상 아래 내려온 김복동을 부분적으로나마 되짚어보았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딱 두 개다. 보이지 않거나, 항상 누군가에게 둘러싸여 있거나. 할머니가 생활하시던 서울시 마포구 쉼터 지하엔 박물관에서 옮겨다 놓은 이러저러한 자료들이 있었고, 그걸 정리하느라 일주일에도 몇 번씩을 오갔었다. 자료정리를 도와주었던 학생들에겐 할머니들과의 만남이 귀한 시간이 될 거란 생각에 가능하면 오가며 인사드릴 기회를 마련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2층에서 생활하시던 김복동 할머니는 뵐 수가 없었다. 그리고 쉼터에서 일상 행사를 열 땐 활동 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었다. 공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이 북적일 땐 언제나 보이지 않는 단상 위에 계신듯한 느낌이랄까? 대다수 피해자 할머니들에겐 외부에 노출되는 단시간의 모습과 그 밖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상의 시간이 공존한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김복동의 일상의 시간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노령과 병환 중임에도 스스로 공식활동으로 일정을 빼곡히 채우셨고, 늘 단상 위의 시간을 준비하고 계셨다. 살아내는 모든 시간이 오롯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도 사람도 다른 것엔 곁을 잘 내어주지 않으셨는데, 할머니의 온도가 차갑게 느껴졌던 분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이유이지 않을까. 임종 한 해 전에 진행된 할머니의 인터뷰에 기반한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김숨, 현대문학, 2018)가 쓰이기까지도 수많은 설득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우리 곁에 있었지만, 지금도 그때도 그녀를 만나는 건 단상 위에서이다. 보이지 않을 땐 뭔가 다른 모습이 있을 거란 생각, 혹은 보이는 모습이 전부일 것이라는 생각, 의심할 필요도 추앙할 필요도 없다. 그저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이해하고 내가 본 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간혹 수십 년을 사귀어온 친구, 가까운 가족 사이에도 저 친구가 저런 면이 있었어? 하며 놀란다. 우린 할머니의 삶을 모두 알지 못한다. 할머니가 증언해온 어린 시절 단편적인 이야기와 67세가 넘어 인권운동가로 성장하기까지의 활동 몇몇을 알 뿐이다. 할머니의 20대는? 30대는? 그리고 40대, 50대는? 지금 서 있는 곳을 바꾸어야만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달처럼, 우리 세대가 부지런히 자리를 옮겨가며 피해자를 바라보아야만, 그들의 온전한 삶과 역사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쨍하고 해 뜰 날 백시진(정의기억연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2014년 1월 8일 평화로에선 수요시위 22돌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수요시위 버전 <해 뜰 날>이 울려 퍼졌다. 김복동 할머니의 “쥐구멍에도 해 뜰 날이 온다”는 발언에서 착안한 순서였다. 할머니께서 주문처럼 자주 말씀하셨던 이 말은 희망의 표식이면서도 본인의 운동 원칙이었다. 밤이 지나면 동이 트듯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도 언젠가 해 뜰 날이 올 테니 좌절하지 말고 문제 해결만 바라보고 향해 간다는 원칙 말이다. 김복동 할머니의 굳은 의지는 시공간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2015년 7월 김복동 할머니는 미국 시카고 소녀상 건립사업 관련 캠페인 중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활동가 라스미아 오데와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라스미아는 성폭력 및 고문 피해자로 1980년대 국제 사회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한 피해를 증언하였다. 김복동 할머니와 라스미아가 만났을 당시 라스미아는 미국 연방정부의 공격으로 미국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있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그에게 연대의 메시지와 함께 나비기금을 전달하였고 이 일화는 SNS를 통해 알려졌다. 어찌 보면 짧은 만남이었겠지만 적어도 나의 활동 방향을 설정하는데 큰 지표가 되었다. 나는 올해 2월 팔레스타인에 다녀왔다.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연대하기 위해 그리고 김복동의 유지를 잇기 위해서였다. 나는 현지 활동가들에게 김복동 할머니와 라스미아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도 전시 여성폭력 피해자들에게도 제국주의·식민주의·군국주의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언젠가는 해 뜰 날이 올 테니 희망을 잡고 살아가자는 김복동 할머니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들은 김복동의 연대에 감사를 표하면서 팔레스타인에서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실제 다양한 강연회를 기획하고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중 지역 청년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많이 알려야겠다며 대학 강연을 계획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강연 행사는 코로나19로 취소되었지만, 여전히 그곳에는 할머니의 메시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실 내게 김복동 할머니는 약간 어려운 사람이었다. 항상 같은 표정을 짓고 계셨고 곁을 잘 내어주지 않는 분이었다. 그런 김복동 할머니가 내 마음에 이렇게 크게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김복동이 남긴 희망과 의지의 메시지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최근 몇 달간 다양한 일들을 겪으면서 나도 할머니의 말을 주문처럼 되뇐다. 해 뜰 날은 돌아온다고. 지금이 어떤 상황이어도. 아무리 막막하더라도. 미국에서 만난 김복동 김현정 (배상과교육을위한위안부행동 대표) 2012년은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 일명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된 지 5주년 되는 해였다. 당시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시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한 기초작업을 다지고 있던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CARE, 당시 가주한미포럼)'은 글렌데일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전시회, '위안부의 날' 선포식, 캘리포니아주립대(칼스테이트 LA)강연회 등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하원 결의안 121(HR 121)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러 미국에 오신 김복동 할머니와 윤미향 대표를 로스앤젤레스에서 맞게 되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이미 만 86세의 고령임에도 자세는 꼿꼿하고 목소리는 카랑카랑하며 쉬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담배 한 개비의 여유를 즐기면서 거침없는 화법으로 일본과 아베를 향해서는 직격탄을 날리는 분이셨다. 우리 활동가들을 향해서는 걸쭉한 농담을 건네시는 멋진 활동가이셨다. 당시 여러 행사를 준비하고 할머니 일행을 챙기느라 바쁘게 뛰던 나를 며칠 관찰하시던 할머니가 “솔밭이 다 닳겠네” 하시는 바람에 다 같이 어찌나 웃었는지. 대중강연을 하실 때는 늘, “나이는 87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입니다”로 시작하셔서 당신이 겪으신 고초와 끌려다니신 수많은 국가, 장소들을 일일이 또렷하게 열거하셨다. 관중들은 그 고통의 깊이에 깊은 한숨을 쉬었고, 카랑카랑 또렷하게 증언하시는 할머니의 총기에 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곤 했다. 미국의 주요 TV 방송국인 Fox News에서 카메라맨을 보내 뉴욕의 기자와 전화 인터뷰를 하실 때는 할머니의 말씀에 감동한 기자가 눈물을 흘렸고, 이는 일본 정부의 역사 부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뉴스 보도로 이어져 화제를 모았다. 이후 한국을 찾아 수요시위에서 인사를 드렸을 때는 이미 할머니의 눈이 많이 나빠지신 상태셨다. 멀리서나마 건강을 기원했지만 안타깝게도 2019년 1월 세상을 떠나셔서 미국에서도 로스앤젤레스 시의회, 샌프란시스코 시의회 등에서 추모의 시간을 가지고 글렌데일 소녀상과 샌프란시스코 동상 앞에서 추모제를 지냈다. 할머니의 활동가 정신은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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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박필근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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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결>은 202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박필근’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경북지역의 유일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로 알려지는 그는, 일본군에 의해 16세 당시 강제로 끌려가 공장에서 위안소로 옮겨져 2차례의 탈출 시도 끝에 겨우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포항의 작은 집에서 포항여성회를 비롯한 지역의 많은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박필근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지역 창작자들이 함께 모여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을 만들어 그의 삶을 알리기도 했었죠. 이렇게 역사는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를 넘어 단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박필근과 또다른 많은 박필근들. 그 모든 소중한 이름을 우리가 계속해서 불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2021 기림의 날 특집] 박필근을 만나다 1. [논평] 박필근을 기억하다 2. [포토스토리] 사진으로 만나는 박필근 3. [에세이] 소중한 우리 할머니, 박필근 - ‘시간과 기억을 잇다’ 4.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창작판소리 ‘박필근뎐’과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노트 1994년 1월 12일[1] 박필근 생존자를 만났을 때, 필자는 예순일곱 살로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열여섯 살 당시 입은 피해가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음을 강하게 느꼈다. ‘남사시러바[2]’라며 고개를 숙이고 울먹울먹 하는 모습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포항여성회가 2019년에 진행한 「박필근 할머니와 가족 구술생애사」(이하 「구술」로 표기)에서도 “그 말 모하니더(못한다)”, “넘사시럽니더” 하며 인터뷰가 중단되는 상황이 몇 차례나 반복되었다고 한다[3]. 이 글에서는 위안소로 동원되는 상황을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죽장에 박필근 할머니, 고향이 월평리이고 ... 띠는 용띠고, 노망 안 했니더” 2019년 위와 같이 당신을 소개했던 박필근은 1928년생으로 2021년 현재 아흔네 살이다. 1994년 당시 조사에서는 경북 영일군이었는데 1995년 포항시로 통합되었다. 60여년 흙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다 2019년부터 새로 지은 집에서 지내고 있다(경북도민일보 2019. 4.22). 많은 아픔과 역경을 겪었는데 남은 생은 건강하고 평안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죽장면 월평리[4]에서 9남매의 여덟째로 막내딸이었다.” “아버지가 땅을 좀 가지고 농사를 지었지만 비료도 없고 해서, 만날 천날 요런 감자를 쌔가리 감자 요만큼 한 거 삶아가 저 콩이파리 저걸 우리가 뜯어 고마 채반을 넣고 쩌가...” “엄마 젊지, 머슴 둘이 있지. 내가 무슨 일 했노? 떡을 해도 나는 맨날 찰떡만 먹고, 얼매나 잘 살았는지 이 동네에서 젤 잘 샀았니더.” “농사 많이 짓지. 아들네 주고 학교 보낸다고”(「구술」) 어린 시절에는 잘 살았고 막내로 귀여움 많이 받았는데 감자와 콩이파리 먹던 이야기는 40년대 이후 공출[5]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오빠들과 남동생은 학교에 보냈고 특히 남동생은 육군사관학교까지 나왔다.(2019. 6.30 녹취문) “시집을 보내면 신랑이 있이먼 거기 안 뽑혀 가고” “어디 가가 피 빼고 우얀동 죽인다 캐네 다 치아불고요(결혼시키고)[6]. 뭐 열시 살 먹은 애, 열니 살 먹은 애, 열다섯 살 먹은 애 다 치아불고” “시집을 보내면 신랑이 있이먼 거기 안 뽑혀 가고” 하여 언니들 네 명은 다 결혼했다. “학교도 못 가고 아무것도 몬(못) 하고. 그저 엄마 졑에만(곁에만) 있고, 그때는 밭에도 안 나가 봤니더. 차도 한번 못 타 봤고요.” 일제강점기에 이렇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여성들이 일찍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흔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1938년 3월 경부터 조선 남부에서 여성들을 군에 봉사하게 할 목적으로 전쟁터로 동원한다는 ‘유언비어’가 발생하여 전역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7] 『매일신보』도 「조혼하지 말자! 여자는 징용치 않는다」(1944. 5.16)고 보도할 정도였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초대 공동대표였던 고 이효재 교수도 “나는 일제의 처녀공출 위협을 직접 겪었”다(『동아일보』1997. 2.12)고 했다. “집에 있다가 차가 와가 얹어가 가뿌랬지” “내 열여섯 살에 “무신(무슨) 영장 같은 게 이런 게 왔다 카** 종이쪼가리 이래가, 글을 알아야 보지? 열여섯 살이라도 내가 학교 앞에도 못 가봤는데 막냉이다 보니 열여섯 살에 뭘 아는겨? 이래가 뭐 안 가마(가면), 엄마 아부지를 끌고 간다 카대. 무슨 모집인지 처자(妻子) 모집한다 캤지. 일곱명인가 죽장면에서 (갔다) (지금) 다 죽어버렸다 카대. 떠날 때 치마저고리에 머리를 땋고 긴 머리로 (갔다).” “어매 아부지 밭에 갔다가 (혼자) 집에 있다가 차가 와가 얹어가 가뿌랬지(가버렸지) 뭐”.(「구술」) “일본사람이 와서 어디 가서 하룻밤을 재웠다. “일본말 하니 우리가 일본 사람인 줄 알았지 뭐” “기차를 어디가 탔는동 (모른다) 그거를 집인 줄 알고 드갔드만 그게 차가 가드라 칸 게. 방인 줄 알고 타고 보니 가더라.(배였음)” (같이 탄) 사람이 많았다. “내가 배로 타고 뱃멀미를 앓아가 뱃멀미...”(「구술」) 일본인 남자 서너명이 여자들을 데리고 갔는데 “그것도 한, 한 태에 다 안 가디더. 또 이래 가다가 또 어데 가고 또 저거는 또 몇 십명 또 빠치(배치) 노내고(놓고) 또, 또” 이런 막내를 보낸 부모들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박필근은 “우리 어매 매일 저녁 울고, 그 나 때문에 일찍 돌아간 기다”라고 한탄했다. 열여섯 살이었다고 하니 1943년경으로 추정된다. 94년 조사에서는 차에 타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구술」에는 일본 순사가 탄 트럭이 왔다고 하고, 6.16 녹취록에서는 아들이 들은 것에 의하면 “열여섯에 붙들려 가가....방직공장 취직해준다 하믄서 데리고 갔다 하대”. 박필근뿐 아니라 1942년 일본으로 간 김봉이(가명)의 경우도 일본 모집 공장이라고 쓰인 영장 통지서가 나왔다고 한다.[8] 그런데 여성들은 영장이 나오는 국민징용령[9]의 대상이 아니었다. 여성노무 동원을 위해 1944년 8월 23일 공포·시행된 여자정신근로령(『매일신보』 1944. 8.26, 8.28. 참조)에 의해서도 영서(令書)가 나올 수 있는데, 조선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동원하지 않았다. 1944년 4월경부터 조선총독부의 이른바 ‘관의 알선지도’에 의해 2년 기한으로 항공기제작공장, 기계제작공장 등지로 동원되었다.[10] 모리야 요시히코(守屋敬彦) 전 교수의 의견을 참고하면 여기서의 영장은 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안부’ 동원에 관여한 행정기관에서 공장에 간다는 명목으로 임의로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11] 조선에서는 경찰이 ‘군위안부’를 직접 징모하거나 인솔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경찰은 도항에 필요한 신분증명서를 발급하였고 징모에 협력하였다.[12] 당시에 관부연락선[13]을 타려면 경찰서에서 발급한 도항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그 지키고 있는 거 일본 말로 ‘게비(경비)’ 들이라 카대요. “일본인동 뭐 북해도인동 뭐 일본이지.” 담이 높은 공장으로 들어갔다. 기숙사가 있어서 몇 명이서 한방을 썼다. 처음에 베 짜는 공장을 보여줬다. 기숙사에 가두어 놓고 앉아있었다. “지키고 있는 거 많~엤지요. 그 지키고 있는 거 일본 말로 ‘게비(경비)’ 들이라 카대요.” 같이 있던 애들이 “(도망) 가면 마 죽인다 카더이다.” 거기서 파란 군복[14]을 줘서 입고 머리를 단발로 잘렸다. 이름표도 달렸다. “모자도 ‘센토보시(전투모)’ 일본놈들 쓰는 거 쓰고예”(「구술」) “저거가 일본말 하니 내 아는교, 내 조선말 하니 저거가 아는교?” 나중에 뭐 엄마는 ‘오까상’이고 아부지는 ‘오또상’이고 할머니** ‘오바상(할머니)’이고, ‘오지상(할아버지)’이고 이런 간단한 일본말을 일본 남자가 가르쳐줬다. 새벽에 종 흔들어가(흔들어서) 일본남자가 깨웠다. 그는 군복[15]을 입고 어깨에 뻘건 게 있었던 것 같다. 기숙사에 있던 식당에서 ‘하시(젓가락)’를 가지고 밥 한 숟가락 먹고 ‘덴고(점호)’를 하고 훈련을 시키주고. “체조 하고 뭐 이러니까네, 체조를 할 줄 알아야 하지요?” ‘유미유까바[우미유까바 바다로 가면] 야마유까바(산으로 가면)’[16] 군가를 불렀다. “훈련(하면서)도 맞고 얼렁 안 가면 얼렁 안 간다고 짝대기 집고 그냥 때리는 거”, ”못 하면 차고 때리고“ “며칠에 한번씩 군인동 일본 사람인동 우리를 끄집고 가가요, 희한한 짓도 다 하고요.” 컴컴하고 창고도 같고 학교도 같은 데 같은 방에 있던 8명의 여자들이 교대로 너이(4명)밤에 불려나갔다. 바닥에 뭐가 깔려있었다. 창고가 컴컴해서 “그 안에 일본놈인동, 군인동, 한국놈인동 모르죠”. 거기서 말을 안 들으면 방망이로 아무 데나 때렸다. 일이 끝나면 기숙사로 다시 데려다 줬다. 창고에 갔다 오면 “개구리같이 퍼져가 일어서지도 몬하고 말로 다 몬한다.” 한 일년쯤[17] 있다가 “그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요. 마 여기 있어도 죽으, 그래 난 죽는교. 우리 엄마나 한 번 더 보고 *자고 그래 나갔지요. 이래 변소 가니까 구녕 요만한~ 게 어여어여 가지고 고 구녕을 내가 가, 밤중에 깄지요(기었지요). 십리를 깄다 카먼 알지요. 같은 방에 있던 여자 서이 나왔니더[18]” “그캐 춥기는 춥고 물에 빠져가 경운기 불 때니깐 가니까네 누꼬하니 내 왔다 하니 나도 한국 있다 여 오니 거 가만 있으라 카이. 닷새 있었니더. 전단지 옷 다 갈아입히고 닷새 있다 부산서 열닷새 만에 여기”(「구술」). 「구술」에 의하면 탈출에 성공한 것이 두 번째였고 첫 번째 탈출시도는 실패하여 구타를 당해 다리에 ‘험태(상처)’가 생겼다고 한다. 집에 와서 곧 해방이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1945년 2월경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필근은 기차로 부산으로 이동한 후 관부연락선을 탄 것으로 추정되고 귀국할 때도 재일동포가 연락선을 태워줬다고 한다[19]. 동원된 장소가 일본 시모노세키(下關)[20]가 있는 야마구치현 부근이 아닐까 추정한다. 당시의 충격으로 창고에서의 세세한 상황을 잘 기억하지 못해 “누가 다녀갔는지 몰랐다”고 하여 노무자를 상대한 ‘기업위안부’[21]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아들에게 “첨에 가면은 그 그 일본 군인들이 ‘나래비(줄서기)’를 선다 카드라”(「구술」) 하는 것으로 보아 군위안소로 판단했다. 박필근 생존자처럼 공장에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낮에 ‘덴꼬(점호)’를 하고 군가를 부르며 체조 훈련을 한 점에서는 여자근로정신대와 비슷하고 밤에 창고 같은 건물로 이동해서 일본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던 경우는 처음이다. 1942년경 일본 나가사키현으로 동원된 H의 경우도 처음에 6개월은 공장에서 일하다 나중에는 요일을 정해 부대 근처로 가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는데, 생활하는 데는 따로 있었다고 한다.[22] 여성들을 공장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하고 교대로 위안소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대개 위안소에서 생활하면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던 것에 비하여 사는 곳과 위안소가 분리된 점도 다른 점이다. 일본의 경우 오키나와를 제외하고는 군위안소가 많지 않기에 일본 내의 군위안소에서 피해를 입은 이번 사례는 귀중하다. 1991년 김학순 피해자의 공개증언 이후 일본정부는 고노담화(1993. 8.4)[23] 등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사과했다. 그 후 2007년 아베 내각에서는 “위안부 ‘강제연행’을 했다는 문건[24]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실체를 부정하며 2015 한일 ‘합의’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국가범죄와 전쟁범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본군 위안소는 군 시설이며 국가(군·정부)에 의해 성립되었다.[25] 고향으로 돌아왔어도 조그마한 동네라 수군수군 흉보는 마을사람들, “남캉같이(남들같이) 이 세상 못 살아보고” 아들, 딸과 살기 위해 부지런히 품을 팔아야 했던 박필근의 귀국 후 고난도 “그 말도 다 몬합니더”. 관련 자료를 보면 경상도 출신 여성들이 위안소에 많이 있었다는데 2021년 현재 경북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존자는 박필근뿐이다. 포항여성회에서 정기적으로 방문할 때마다 쌀을 사달라고 요청하시면서 새 쌀은 쌓아두고 묵은 쌀을 드신다고 한다. 살아오면서 얼마나 힘드셨으면 저러실까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시 한 번 아들과 딸 그리고 포항여성회의 보살핌을 받으며 건강하게 생활하시기를 기원한다. “일본놈 사과도 받고 싶고 배상도 받고 싶은” 박필근 생존자의 바람이 살아있는 동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성폭력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역사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일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각주 ^ 면담에는 박필근과 딸, 관련 공무원 3명, 안연선(한국정신대연구소)이 함께 했는데 진행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필자가 포항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여 추가 면담을 하지 못했다. ^ 남사스럽다: 남에게 놀림과 비웃음을 받을 듯하다. ^ 다만 아들에게는 수시로 일본은 독종이라는 등 욕도 하고 당시 동원과정, 탈출과정 등에 대해 하소연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와 녹취록 자료를 제공해주신 포항여성회(금박은주회장)에 감사드린다. ^ 1934년 4월 1일 죽남면과 죽북면을 죽장면으로 합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월평리는 갈뫼봉(438m) 서편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청송군(靑松郡)과 경계를 이루는 꼭두방재(415m)에 이르기까지 밖골, 안골, 우마동, 살마골, 꼭두방과 같은 작은 자연부락이 산재(散在)하고 있다. 1914년 소월, 고평, 현내리 일부를 병합하여 월평리(月坪里)라 하였다.(포항시 죽장면 홈페이지 참조) ^ 일제는 1939년<미곡배급통제법>을 제정하여 미곡의 시장 유통을 금지하고 농민의 자가 소비분 대부분까지도 헐값으로 강제 공출시켰으며, 그 대신 만주 등지에서 들여오는 콩이나 피 등의 동물용 사료를 배급하였다. 그 뒤 미곡 공출실적이 저조하자 1943년<식량관리법>을 제정하여 맥류·면화·마류(麻類)·고사리 등에 이르기까지 40여 종에 대하여 공출제도를 확대하고, 강제 공출을 이행시키기 위하여 무력까지 사용하는 등, 전시군량 확보를 위하여 온갖 강압적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총생산량 중 공출량의 비율은 1942미곡년도에 45.2%, 43년에는 55.8%, 44년에는 63.9%로 증가하였다.(『한국사 – 근대 – 민족운동의 전개』 1942-1945의 총독정책 참조) ^ 윤수만(충남 보은 46)은 1943년 8월 23일 고목인송의 집에서 동인의 내연의 처 신재룡 외 1명에게, “최근 광업자는 여공으로 모집된 처녀를 돌려보내지 않는다. 때로는 피를 뽑고 귀택시키기 때문에 그 처녀는 귀택 후 얼마 안 되어 사망한다”는 말을 해서 1943년 11월 27일 벌금 100원 판결을 받았다.(공훈전자사료관) ^ 藤永壯, 「戰時期朝鮮における『慰安婦』動員の『流言』『造言』をめぐって」, 松田利彦ほか編, 『地域社會から見る帝國日本と植民地-朝鮮·臺灣·滿洲』, 思文閣出版, 2015 참조(1938년 3월말에 경상남도 밀양, 양산 지역에서는, 16~20세의 처녀 및 16~30세의 과부를 강제로 끌어모아 전쟁터로 보내고 “낮에는 밥짓기나 빨래 등의 노역을 시키고 야간에는 군인과의 성적관계를 시켰다”라고 말한 세 명이 육군 형법으로 4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2004), 여성과 인권, 270쪽 ^ 일본이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노동력 동원을 목적으로 국가총동원법 제4조[징용] 규정에 따라 1939년 7월 8일 제정 공포해 실시한 인력통제법령[칙령 451호]이다. 「국민징용령」은 일본 정부가 「국민징용령」 및 국민직업능력신고령에 의거하여 등록한 자 중에서 선정하여 징용 영장을 발령·교부하여 송출하는 방식이다.(세계한민족문화대전) ^ 『‘조선여자근로정신대’방식에 의한 노무동원에 관한 조사』(2008),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138쪽. 관의 알선지도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각 기업이 동원할 노동자 수를 서로 조정하고, 조선총독부 기구가 동원과정(모집, 전형, 송출)에 적극 개입하는 형태이다(22쪽). ^ 일제 강제동원을 연구해온 모리야 요시히코 전 교수에 의하면 “관알선 단계에서도 징용영장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그건 정식 영장이 아니라 지역 군이나 면에서 임의로 만든 것입니다. ‘영장 나왔으니까 너는 가야 한다’는 식으로 써먹은 것이죠”(김호경·권기석·우성규, 『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2010), 돌베개, 61쪽) 참조. ^ 윤명숙,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2015), 이학사, 536쪽. ^ ‘부관’(釜關)이라는 이름은 부산의 앞글자(釜, 부)와 시모노세키의 뒷글자(關, 관)를 딴 것이다. 일본에서는 종종 어순을 바꾼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또는 관부항로(關釜航路)라고 부른다. 관부연락선은 1905년 9월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중국의 동북지방·몽고 등지로 진출하기 위하여 만든 국책해운회사였던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氣船株式會社)에 의하여 처음 개설되었다. 그러나 이 연락선은 일본의 한국 침략의 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징용으로 끌려갔으며 일본인들의 수탈에 농토를 잃고 북해도 탄광으로 가기 위하여 관부연락선에 몸을 맡겨야 하였다. 최초로 취항한 연락선은 이키마루(壹岐丸, 1,680톤)라는 배로 11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그 뒤 3,000톤급의 쇼케이마루(昌慶丸)·도쿠주마루(德壽丸)·쇼토쿠마루(昌德丸) 등이 운항되었다. 1935년부터는 북중국·만주·몽고 등지로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여객과 화물의 격증에 대비하여 당시로서는 최신예인 7,000톤급의 대형 여객선 공고마루(金剛丸)·고안마루(興安丸) 등을 운항하였으며 시간도 7시간 반으로 단축하였다. 이들 연락선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징발하고, 전선과 일본 본토를 운항하는 데 투입되었으나, 미군에 의하여 격침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5년 3월부터 사실상 관부연락선은 두절되었으며, 그 뒤 광복이 된 뒤에도 한일 간의 국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연락선이 오가지 못하였다.(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공장에서 입는 작업복으로 추정된다. ^ 국민복으로 추정된다. 이는 일제하 일본 군부의 강요로 입었던 국방색의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복식. ^ 1939년에 나온 일본군가. 海行かば (바다로 가면) 海行かば水漬く屍 / 山行かば草むす屍 / 大君の邊にこそ死なめ / 顧みはせじ (바다에 가면 물에 잠긴 시체 / 산에 가면 풀이 돋은 시체 / 천황의 곁에서 죽어도 /돌아보는 일은 없으리) ^ 「구술」에서 박필근은 “몇 달 안 있었니더”라고 하고 아들은 일본어 욕을 잘 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2~3년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94년 딸의 증언에 의하면 딸이 결혼한 후 같이 도망나온 피해자 중 한 명을 만난 적이 있는데 곧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 포항MBC 2020. 8.14 인터뷰 영상 ^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에 있는 도시. 1943년 12월말 야마구치현에 132,526명의 한국인들이 살았다(재외동포사총서 10 『일본한인의 역사』(상)(2009), 국사편찬위원회 참조) ^ 기업의 생산성을 위해 동원·착취되었던 상황을 강조하여 ‘기업위안부’로 부르기로 한다. 정진성, 『일본군성노예제』(2004), 서울대학교 출판부, 341쪽. 기업위안소는 주로 일본 홋카이도와 규슈의 탄광에 설치되었다.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2』(2018), 푸른역사 참조 ^ H의 구술. 『들리나요? 열두소녀의 이야기』(2013), 대일항쟁조사위원회, 236~273쪽 참조 ^ https://www.awf.or.jp/k6/statement-02.html “위안소는 당시 군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운영되었으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위안부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하였으나 그 경우도 감언이나 강압적인 방법 등으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또한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조선의 경우 1941년 ‘관동군특별대연습’을 계기로 관동군이 2만명의 위안부를 모집해 주도록 조선총독부에 요청했다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 모집에는 부도군읍면의 행정계통과 경찰의 적극적·조직적 개입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실제로 모집된 것은 3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하종문, 「위안소와 일본군·일본군의 가해체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묻는다』(2001), 풀빛, 93쪽. 그런데 패전 후 조선총독부가 문서를 대대적으로 소각했고,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조선총독부 자료에 노무, 외사, 경무 관련해서 1944과 1945년 자료가 하나도 없는 실정이 이를 증명한다. ^ 2005년 나가이 카즈는 <야전주보규정개정>(1937.9.29.) 사료를 통해 위안소 자체가 ‘군대에 속해 있는 군시설’이라는 점을 들어, 일본군관헌의 개입은 당연한 사실이므로, 강제연행에 군관헌의 직간접 개입의 유무 논란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永井和, 「陸軍慰安所の創設と慰安婦募集に關る一考察」,『二十世紀硏究』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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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일본인 ‘위안부’ 다마코 씨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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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의 공습을 겪다 사이판에 공습이 시작된 것은 1944년 6월 11일이다. 이날, 일본군의 항공기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항공모함 15척을 포함한 775척의 미군 함정이 마리아나 제도를 둘러쌌다. 일본군은 13일에 함포 사격을 받았고, 15일부터는 미해병사단이 상륙을 개시했다. 사이판에는 43,682명의 일본 육·해군이 있었으나, 압도적인 미국의 공격에 패퇴를 거듭했다. 중부 태평양 함대 사령 장관인 나구모 추이치(南雲忠一) 중장을 비롯한 군 참모들은 7월 6일에 자결하였고 이후 조직적인 저항은 종식되었다. 당시 일본군 전사자는 41,244명에 달했다. 1943년 시점에서 사이판의 민간인 거주자는 약 4만 명으로 추정되며 피란민은 극히 일부였다. 1944년의 인구수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몰자는 약 1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공습이 시작되었을 때 다마코 씨는 하녀인 기누코, 어린 게이샤와 함께 메이세이루를 뛰쳐나왔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몰랐다. 다마코 씨는 망설임 끝에 일행과 떨어져 혼자서 산속으로 도망쳐 헤맸다. 섬을 쪼갤듯이 작렬하는 포탄 소리와 귓가를 스치는 총탄 소리에 덜덜 떨며 우왕좌왕했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천연 수로 안에 있었다. 사이판에는 천연 수로가 무척이나 많았다. 저녁이 되고 공습이 잦아들자 전사자의 시신을 옮기고 있는 일본군들이 나타났다. 수로 앞에서 그 작업을 보고 있는데 낯익은 병사가 다마코 씨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에서 지내는 거야?” “여기 수로 안에요.”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하니 병사가 커다란 깡통에 밥과 고기를 넣어서 다마코 씨에게 가져다주었다. “수로에서 다른 사람들도 힘들어했지. 모두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데 아 정말, 돼지와 다를 바 없었어. 배를 채우긴 했지만, 더러워서 울컥했다니까.” 미군이 상륙하고 날이 갈수록 식량도 물도 떨어져 벼랑 끝에 내몰린 민간인들은 집단 자결을 하거나 뛰어내려 자살하고 또는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사이판 북단 곶의 절벽에서 민간인이 차례차례 몸을 던지고 있다는 정보는 다마코 씨의 귀에도 들어왔다. “공습이 무서웠지. 미국도 무서웠고. 수로 밖에서는 자꾸 나오라고 하고. 밖에서는 총탄 소리가 ‘탕, 탕’ 들리니까 이제 죽겠구나 싶었어.” 다마코 씨와 다른 민간인들은 모래밭에 말뚝을 박고 천막을 친 임시수용소에 연행되었다. 조금 상황이 진정되자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군 작업에 나서게 되었다. 다마코 씨는 세탁장에 가도록 지시를 받았으나, 이틀 만에 못 하겠다면서 제초작업으로 바꿔달라고 노무 담당에게 부탁했다.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세탁장에는 절대 가지 않을 거라고 고집을 부렸더니 제초작업반으로 옮길 수 있었다. 제초 작업반에 들어가니 미군병사들이 젊은 여성들을 졸졸 따라다녀 용변도 볼 수 없었다. 손 씻는 세면대 앞에는 미군병에 의한 성폭력, 폭행을 방지하기 위한 MP(Ⅿiritary Police, 헌병의 약칭)들이 서 있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여성들은 서로를 둘러싸 가림막을 만들고 그 안에서 용변을 보았다. 미군병사들의 요청을 받은 작업반장이 여성들을 관리했다. 수용소 안에는 은밀한 루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미군병사들은 여성들이 갖고 싶어 할 만한 물품을 대가로 주었고 영어가 통하는 작업반장은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미군병과 여성들을 알선해 리베이트를 받았다. 공습 전에는 평범한 주부였어도 극심한 전쟁의 화를 입고 가족을 잃자 넋이 나간 상태에서 미군병에게 몸을 맡기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날, 캠프의 반장을 맡던 여성이 다마코 씨를 불렀다. 아이를 캠프에서 돌볼 것이라고 했다. 부모를 여읜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다마코 씨는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캠프에서 돌본다고 하니 뭐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반장을 따라나섰다. 유아부터 중학생 정도까지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반장은 캠프에서 아이들을 돌보게 되면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으로 판단해 독신자였던 다마코 씨에게 아이들을 떠맡기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다마코 씨는 남자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보았다. 큰 아이들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여자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한번 둘러본 후에 다시 한번 한 명 한 명 보고 7살짜리 아이를 데려왔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에 대해 묻자 모른다고 했다. 미군으로부터 받아 낸 과자를 들고 돌아오니 아이는 오랜 기간 단 것이라곤 구경도 못했던지 엄청 좋아했다. 다음 날, 군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물이 길어져 있었다. 작은 빈 깡통으로 몇 번이나 길어온 물이었다. 아직 7살인데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본토로 돌아가는 배가 오면 아줌마랑 같이 갈래? 너 오키나와 출신이지. 그냥 사이판에 남을래?” 그 아이는 다마코 씨를 따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취사장은 캠프 내에 묵고 있는 사람들의 인원수와 이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뿔뿔이 헤어진 가족을 찾으러 모두가 취사장으로 몰려들었다. 다마코 씨와 지내던 아이의 아버지도 어느 날 취사장으로 아이를 찾으러 왔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데리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작업을 마치고 나면 다마코 씨는 자주 그 아이와 아버지가 있는 캠프로 찾아갔다. “당신, 홀몸이라면 내 도지가 되지 않을래?” '도지'는 오키나와의 방언으로 아내를 의미한다. “그 사람과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내가 아이를 아끼니 나를 배려해 주었던 거겠지.” 본래 다마코 씨는 본토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후 오키나와 출신 남성의 교제 요청을 받아 함께 살 것을 약속하고 오키나와로 향하는 인양선에 올랐다. 남양흥발의 소작농으로 사이판에 와 있던 농부였다. 배는 인누미 수용소에 도착했다. 미사토손(현 오키나와 시) 남서쪽 언덕에 있는 미군 캠프 부지에 1946년 8월부터 1년간 인누미 수용소라고 불리는, 해외 인양자들을 위한 수용 시설이 조성되어 있었다. 다마코 씨는 그곳에 들어갔다. 식사는 미군이 지급해주었으나, 수용시설은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오두막집이었다. 이후 다마코 씨는 몇 군데의 수용소를 전전했다. 오키나와도 전쟁의 화를 크게 입어 집 다운 집은 남아있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대부분 불탔기 때문이다. 다마코 씨는 사이판에서 함께 돌아온 농부의 고향으로 갔다. ‘오키나와 교쿠사이(沖縄玉砕)[1]’ 소식을 사이판에서 들은 농부는 가족이 분명 살아남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내도 아이도 살아있었다. 마땅히 갈 곳도 없던 다마코 씨는 좁은 오두막집에서 농부의 아내 그리고 그의 자식과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이야, 나는 그 남자랑 매일같이 싸웠어. 매일, 매일. 주변 사람들 보기 창피했지. ‘다마코, 또 싸워?’라고 묻는데, 싸우는 게 아냐. 이 자식이 날 쫓아낸대. 죽여버릴 거니까 꺼지래. 내가 어디로 가? 집도 절도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 나 보고.” 결국, 다마코 씨는 그 오두막을 나왔다. “오키나와 사람한테 버림받고 여기저기 떠돌면서 말이야. 참 가여웠지. 거지같은 차림으로 이곳저곳 걸었는걸. 그래서 또 장사를 하게 되었어. 미국 장사. 아빠(사이판에서 함께 온 농부)는 나무에 매달려 죽었어. 목을 매고 말이야. 제 성질을 못 이겼을 거야. 나랑 헤어지고 나서 엄마(부인)랑 싸웠겠지. 목매달아서 죽었어.” 다마코 씨는 미사토손 노보리 강(登川)에 있는 농가에 방을 빌렸다. 군 작업의 반장을 맡고 있던 통역사가 미군을 다마코 씨 곁으로 데려왔다. 보수는 통역사와 반으로 나눴다. 세들어 살던 농가의 아이도 그 모습을 보고 따라 배웠는지 미군을 데려왔다. 미군은 마을 아이에게 “여자 있어? 잠 잘 여자 있어?”라며 앞장 세운 것이다. 다마코 씨는 당분간 그 농가에 머물다가 그 곳을 떠났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일'을 그 집안 사람들이 꺼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갈 곳도 없이 미군이나 오키나와 남자들에게 몸을 맡기면서 매일 정처 없이 떠돌았다. 어느 날,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한 남자를 만났고 물을 떠서 남자에게 마시게 했다 그 남자의 아내는 전쟁으로 사망했고 아이가 한 명 남아 있었다. 편안하게 잠들 수조차 없는 간이 시설이 빼곡한 곳을 전전하는 생활에 지쳐 있던 다마코 씨는 “나 좀 데려가 주지 않을래요?”하고 그 남자에게 부탁했다. 남자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남자의 8살짜리 딸이 다마코 씨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토에서 온 여자라서 싫다고 면전에다 말하며 사사건건 반항했다. 다마코 씨는 계모라서 아이를 괴롭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 아이를 혼내고 싶어도 혼낼 수 없었다. 큰맘먹고 남자에게 이야기하면 남자는 화를 내며 아이를 심하게 꾸짖었다. 아무리 꾸짖는다고 해도 아이가 다마코 씨를 따를 것 같지는 않았다. “애한테 뭐라 하지 마요, 아저씨. 내가 나가면 되니까.” 집을 떠날 각오로 그렇게 말한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남자는 함께 술을 자주 마셨던 이시카와(가명) 집으로 다마코 씨를 데려갔다. “본토 여자가 왔는데, 나는 괜찮은데 아이가 싫어해서.” 다마코 씨는 이시카와와 함께 살게 되었다. 1947년 상반기 즈음부터였다. 나하가 모두 불타버린 1944년 10월 10일, 이른바 10・10 공습으로 인해 이시카와가 운영하던 정육점이 불타 이시카와 부부는 길가에 내몰린 신세가 되었다. 그 후 이시카와는 심신질환에 빠진 아내와 헤어져 혼자서 오두막에서 살면서 자그만 밭을 일구며 비칠비칠 불안한 걸음으로 마을에 물건을 팔러 다니고 있었다. 다마코 씨는 이시카와와 함께 살게 된 후에도 세면기를 들고 마을로 나가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할 때가 있었다. 이시카와가 병으로 쓰러져 수입이 끊기기에 이르렀을 때다. 여전히 불탄 흔적이 남은 마을에 호텔 같은 건 없었고 성병 예방과 임신을 피하기 위해서는 샅을 씻는 세면기는 필수품이었다. 세면기를 품에 안은 다마코 씨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야유했다. “조선 년, 조선 년, 조선 년은 삼등 국민.” 이시카와와 살았던 지역의 사람들은 다마코 씨를 ‘본토 사람’이라고는 했지만 어른들은 다마코 씨를 '조선인'이라고 여겼고 이를 듣게 된 아이들도 철석같이 그렇게 믿었다. 다마코 씨의 ‘위안부’ 경험이 알려져 조선인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이시카와는 1962년 8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혼자서 살게 된 다마코 씨는 이웃과의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기에 고향인 요코하마로 돌아갈 생각으로 수십 년 만에 본가에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답장은 없었다. 본토의 유곽을 전전했던 전쟁 이전의 생활. 지명되어 유곽에서 위안소로 향했던 전시 중의 삶. 생활이 빈궁하여 세면기를 끌어안고 미군을 상대로 ‘몸장사’를 하러 마을로 나간 적도 있던 전쟁 이후의 삶. 이러한 다마코 씨의 전쟁 이전, 전시 중, 전쟁 이후의 삶을 한 사람의 일본 여성이 걸어온 발자취로서 필자는 청취했다. ‘조선년’이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각주 ^ ‘교쿠사이(玉砕)’는 옥과 같이 아름답게 부서져 내리는 모양으로, 전력으로 싸워 명예와 충절을 지키며 떳떳하게 죽는다는 뜻이다. 1944년 일본군 대본영은 본토 수호의 명목으로 오키나와에 주둔한 제32군에 ‘옥쇄’를 명령했다. 이후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해 참혹한 지상전 전투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일본군은 수많은 오키나와 도민을 총동원하여 희생시켰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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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김학순 할머니, 창작판소리로 되살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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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판소리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 관람 후기 1991년 8월 14일 공개적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삶이 창작판소리로 되살아났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그녀들의 서사를 테마로 한 2024 남산소리극축제 '여설뎐: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 무대에 오른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이다. 자전적 서사에 기반해 극을 창작하는 여성과 작품, 예술인 이야기에 주목해온 연극학 연구자 이지예 씨가 이 무대에 다녀온 감상을 전해왔다. 맑고 투명한 보랏빛 어스름이 포근히 내려앉는 시간,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선선했다. 저 멀리 막 조명을 켠 N타워가 보이는 여기는 서울 남산국악당, 올해 2회를 맞은 '2024 남산소리극축제'가 열리고 있는 현장이다. 은은한 조명이 켜지자 초록 잔디와 부드럽게 선을 이루는 한옥 처마가 더욱 돋보이는데, 개방감 있는 야외마당은 소리극축제를 함께 즐기기에 이보다 좋을 수 없는 무대였다. 5월 8일부터 18일 사이에 열린 올해 남산소리극축제가 기획한 테마는 '여성 서사'. '여설뎐: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라는 제목 아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소리극 4편과 창작판소리 2편, 총 6편의 소리극과 창작판소리로 선보였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학생 투사들의 의리와 애환을 그린 시대극 '이화소리'를 시작으로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남장을 하고 대장군에 오른 여성영웅을 그린 '정수정전', 제주도 설화와 귀여운 동물 요소를 버무려 일상 속 환경 오염에 대한 관심을 자극한 어린이 음악극 '청비와 쓰담 특공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속 힘없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담아낸 '배달의 신이 된 여자-배달순'과 함께 3.1운동의 불꽃인 유관순의 일대기 '유관순 열사가'와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의 생애를 담은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가 그 작품들이다. 이 중 오늘 내가 만날 무대는 '우리소리 모색'의 대표이자 소리꾼인 정세연 대표가 작창과 각색, 소리까지 맡은 창작판소리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다. 새로이 발견한 추임새의 효능감 마당은 소리로 먼저 열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밝고 경쾌한 자락의 소리와 함께 우아한 흰색 한복을 입고 소리꾼이 등장했다. 첫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궁금증이 풀렸다. 그 노래가 인사였던 것. 소리꾼은 노래를 마치고 정성스레 관객을 맞았다. 감사와 함께 마음을 담아 준비했으니 잘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는 인사에 이어 공연이 어떤 작품인지 소개했다. 이어 판소리에 빠질 수 없는 '좋다~!' '잘한다' '얼씨구~' 추임새 연습도 잠깐 했다. 그런데 살짝 고백하자면 추임새를 따라하는 내 마음은 많이 시끄럽고 무거웠다. 여전히 해결이 난망한 일본군'위안부' 문제이기에 답답하고 갑갑한 제자리 걸음과 그 안에서 매번 느끼는 무력감과 부채감, 나날이 더해지는 시간에 대한 압박감을 접어두기 힘들었기에 나는 습관적으로 경건하고 엄숙한 얼굴만을 준비해왔던 것 같다. '위안부' 문제를 만나기에 다른 적절한 얼굴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추임새를 따라하다 발견했다. 피해자에서 증언자로, 증언자에서 운동가로 걸음을 쉬지 않으셨던 할머니의 삶을 담은 노래를 들으며 서로 주고 받는 '좋다, 잘한다, 얼씨구'는 더 없이 어울리는 추임새일 수 있는 거였다. 새로이 발견한 추임새의 효능감이었다. 구성지고 풍성한 소리, 공연은 편안하고 따뜻했다 드디어 시작된 공연, 소리꾼은 국악과 양악을 넘나들었다. 대략 30분, 길지 않은 공연은 창작 레퍼토리와 익숙한 레퍼토리의 변주를 고루 품고 있었고, 덕분에 익숙하고 편안한 것으로부터 오는 반가움과 새롭고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신선함을 함께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 구비구비 고저장단으로 김학순 할머니의 생애를 풀어가는 정세연 소리꾼의 소리는 때론 구슬펐고 때론 아름다웠다. 해금 연주자와 고수는 때로 밀고 때로 당기며 애처로움과 긴장을 극대화하는가 하면 중간중간 다른 배역으로 무대로 호출돼 극을 풍성하게 엮었다. 그때마다 무대 위 세계는 다른 시간과 공간이었다. 두 명의 코러스 공연자들과의 부드러운 호흡도 깔끔했다. '평화의 소녀상'과 의자에서 모티프를 따지 않았을까 싶은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끌고 밀고 기대고 앉는 등 소리꾼이 공연 내내 다양하게 활용한 의자는 '위안부' 시절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공간으로, 숨죽이며 탈출을 상상하는 순간으로, 막막하고 무거운 현실에 대한 상징으로 활용됐고, 마지막에는 할머니가 평화롭게 앉을 수 있는 자리로 함께 했다. 비교적 간결한 이야기 구조와 다양한 장면으로 연출된 무대, 소품의 활용 등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는 국악을 어렵고 낯설어 하는 관객이 듣기에 아주 편안하고 따뜻한 공연이었다. '인권운동가' 김학순 할머니 이야기 적어 아쉬워 하지만 아쉬움도 털어놓아야겠다. 무엇보다 김학순歌라기에는 '김학순 할머니'의 이야기가 너무 적었다. 학순의 탄생 순간과 어린 시절 고향 이야기, 어려운 살림에 기생 권번에 수양딸로 팔려간 이야기 뒤에 납치돼 전쟁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다시 가혹하고 신산했던 이후의 삶이 극의 중반까지 이어졌다. 다음 장면은 '위안부' 역사에 대한 일본의 발뺌과 왜곡에 분노한 할머니가 폭발하듯 터트린 증언. 하지만 곧 할머니의 목소리는 240명의 피해 할머니에 대한 호명으로 바뀌었고, '할머니들은 평화운동가와 인권운동가가 되어 다시는 이 땅에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오늘도 증언을 하고 계신다'는 설명으로 넘어가더니,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짧은 발화 이후에 딸들에게 드넓은 벌판을 훨훨 날기를 주문하며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막을 내렸다. 솔직히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러운 마무리라 박수도 제대로 치지 못했다. “일본의 사죄를 위해 항변하고, 여성인권 운동가로 거듭나기까지. 투지 넘쳤던 그녀의 삶을 그려 나간다.” 고 하지 않았나! '그 증언' 이후 할머니는 얼마나 많은 이들과 얼마나 많은 언어로 사실을 고발하고 진실을 외치셨던가! 진실과 정의에 대한 믿음으로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한 마음을 용기 있게 전하고 다니신 '평화와 인권 활동가' 김학순 할머니를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정작 그 서사를 제대로 담지 못한 것 같아 기운이 빠졌다. 무거운 주제이고, 민감한 이야기라 매 걸음이 조심스러웠을 창작자의 마음을 상상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하고 싶은 이야기라 이 작품을 쓰셨겠다 싶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삶을 한 번 더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는 자리를 자꾸만 만들고 싶어 오늘과 같은 작품을 쓰고 만들고 다듬고 노래했을 것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역사를 기억하는 일의 의미, 다른 세대와 이 기억을 나누고 새로이 하는 일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또 공연의 길이가 짧아 더 많은 이야기가 담기지 않아 아쉬운 마음도 컸지만,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더 많은 관객을 만나기에 유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국악당 같은 무대뿐 아니라 더욱 다양한 역사와 교육의 현장에서 김학순歌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추신, 국악당의 다정했던 환대 아울러 꼭 남기고 싶은 관람 후기가 있다. 남산국악당 측의 다정하고 성숙한 환대이다. 국악당 측은 저녁시간 차가워진 밤공기에 관객들이 불편할까 무릎 담요를 준비해 필요한 관객들에게 제공했다. 금지가 없는 것도 좋았다. 플래시만 주의하면 공연 내내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었고, 공연장 내 음료 반입도 허용됐다. 이런 환대는 이틀 전 다른 극장을 찾았다가 앞자리 관객이 안내원에게 주의받던 장면과 대조적이었다. 앞자리 관객이 잠시 무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는데, 곧바로 안내원이 달려와 뒷 관객의 관람에 방해가 되니 '바른 자세'로 앉아 달라 '부탁'하는 거였다. 물론 친절하고 공손했지만 아직 공연이 시작되지도 않은 때였다. 관객들이 감각과 상상을 무대 위 다른 세계로 이입할 준비를 하는 시간을 방해한 건 정작 안내원이었다. 실제로 요즘의 관극 문화에 대해 생각하느라 한참 동안 공연에 집중하지 못했고 정신을 차렸을 땐 극이 시작한 지 꽤 지나 있었다. 그런데 국악당에서는 달랐다. 휴대폰을 꺼 달라는 안내도, 자리를 옮기지 말라는 안내도 없었다. 안내가 없었어도 공연 중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고, 누구도 음료를 쏟지 않았다. 그 안내 없음이 새삼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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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인터뷰 ‘위민 인 블랙 런던’ 수 핀치 인터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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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 - 에이드리언 리치 여성연대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해외 전시 성폭력 및 여성인권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글로벌 여성평화운동 단체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25주년에 항의하는 의미로 일군의 여성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1988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각자 처한 지역과 상황에 따라 전쟁, 군사주의와 폭력이 여성들에게 다르게 경험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위민 인 블랙은 고정된 조직이 아니라 실질적 소통과 행동을 강조합니다. 서울의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이 ‘위민 인 블랙 런던’의 수 핀치(Sue Finch)를 서면으로 인터뷰한 내용, 지금 만나 보시죠.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신시아 콕번의 웹사이트를 살펴보던 중, 2004년 12월 온라인상에서 위민 인 블랙 시위에 남성을 참여시키는 사안을 두고 내부적으로 논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위민 인 블랙에서는 생물학적 남성도 함께 참여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젠더 문제와 관련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위민 인 블랙 내부에 어떠한 고민과 실천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 핀치 위민 인 블랙은 개별 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에서 전시 강간과 폭력에 이르기까지 양방향으로 전개되는 폭력 연속체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룹마다 지역 상황에 따라 이러한 폭력 연속체의 각기 다른 부분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죠. 일부 위민 인 블랙 그룹에는 남성도 참여하고 있고, 여성으로만 구성된 그룹도 있습니다. 군사주의 및 전쟁 반대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길 바라는 여성들은 흔히 여성만으로 조직을 따로 구성하기를 택한다. 왜일까…?[1] 신시아 콕번은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립니다. 반군사주의 및 반전 여성주의는 그 정의상 다차원적이며, ‘몸의 정치’(body politics)뿐 아니라 훨씬 더 폭넓은 주제를 그 범위로 삼고 있다. 먼저 자본주의,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와 식민지화, 계급 착취, 세계 시장 진출에 대한 비판은 군사주의와 전쟁의 원인과 동인으로 명백히 지목되고 있으므로 반드시 포함될 수밖에 없는 주제이다. 다음으로, 많은 경우에 전쟁은 국가 내 및 국가 간 민족주의와 관련되어 있는 까닭에 이러한 여성주의는 인종/문화/종교/민족 역시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주의는 계급과 인종이라는 중요한 상호 관련 영역에서 젠더 관계의 작용을 인식하고 있고, 그 관계가 교차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여성주의는 전시에 부인되어 온 국제 인권과 여권은 물론 국제 정의의 발전을 옹호한다. 여성 활동가들이 유엔에서 보여 준 노력이 시사하듯 이러한 여성주의는 정치 체계에서 여성이 소외되고 과소대표되는 데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즉, 이러한 여성주의는 통전적(holistic) 여성주의라 할 수 있다.[2]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유엔 등 여러 국제기구에서 만드는 여성 인권 국제규범들이 위민 인 블랙 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역으로 위민 인 블랙이 여성 인권 국제 규범을 만드는 데 참여한 경험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WILPH(평화와 자유를 위한 여성국제연맹)는 유엔과의 관계에서 상호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아시아에 속한 저희 입장에서는 여성 인권 국제규범들이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듭니다. 가령 1세계가 규범을 만들고 3세계는 분석의 대상에 머무른다는 비판도 제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 관한 위민 인 블랙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수 핀치 위민 인 블랙은 WILPF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습니다. 2000년 10월 31일 ‘여성, 평화, 안보에 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325호’ 채택이란 결실을 맺기까지 WILPF의 여성주의적 목소리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결의안 1325호는 유엔의 평화 및 안보 노력 전반에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고 젠더 관점을 통합할 것을 모든 행위자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력 분쟁 상황에서 젠더 기반 폭력, 특히 강간 및 기타 형태의 성적 학대로부터 여성과 소녀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 조치를 취하도록 모든 분쟁 당사자들에게 촉구합니다. 하지만 유엔여성기구(UN Women)는 2015년 안보리 결의안 1325호에 대한 글로벌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이러한 약속이 아직 이행되지 않았음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습니다. “세계는 결의안 1325호의 채택을 지지하면서도 군비 지출 감축, 무기 가용성 통제, 비폭력적 형태의 분쟁 해결 촉진, 평화 문화 조성이라는 여성운동의 핵심 요구 사항을 간과했다.” 위민 인 블랙은 여성이 평화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확신합니다. 여성은 전 세계 인구의 52%를 차지하지만 평화와 안보 문제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주목받는 경우는 드뭅니다. 여성의 참여가 상징적인 방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이뤄질 때만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성들의 기여가 있어야 현장의 필요에 대한 전체적 그림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유엔여성기구에 따르면 평화 협정 체결 과정에 여성이 참여할 경우 평화 협정이 최소 15년 이상 지속될 가능성이 35% 증가합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1979년 인도에서 시작된 위민 인 블랙 비모차나(Women in Black Vimochana)의 마두 부샨(Madhu Bhushan)은 “우리는 전쟁에 반대하는 여성으로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여성으로서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더 광범위한 사회적 폭력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요. 당신이 ‘Women in Black: A Women’s Peace Movement’에서 여성평화운동의 개념을 설명하며 이 말을 인용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말은 ‘여성이라는 젠더로서 반전운동에 참여한다’는 선언처럼 들리는데, 전시 성폭력처럼 전쟁 피해 일반에 비춰볼 때, 여성과 여성의 신체에 가해지는 보다 특수한 형태의 폭력이 존재한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성이라는 젠더로서 반전운동에 참여한다’는 언술 속에 반전운동을 여성성으로 젠더링하는 인식이 투영되어 있지는 않은지 비판적인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 요컨대 전쟁의 반대 항으로서 여성성이 강조되면서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특정한 방식으로 고착되고, 그로 인해 여성에 대한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강조되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수 핀치 남아시아의 여성주의 작가이자 활동가인 리타 만찬다(Rita Manchanda)는 ‘여성의 관점은 주변부로부터 또는 ‘아래로부터’ 오기 때문에 힘의 비대칭성을 수반하는 집단 간 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더 뛰어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3] 이것이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더 ‘타고난 평화 조성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신시아 콕번은 『반군사주의 - 평화 운동의 정치적, 젠더적 역학(Antimilitarism – Political and Gender Dynamics of Peace Movements)』(2012)에서 일본, 한국, 스페인, 우간다, 영국에서의 국제적인 반전·반군사주의 평화 운동을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10년의 주기마다 인간의 폭력은 미디어와 무기의 발달에 힘입어 더 큰 도달력을 얻고, 우리의 정신, 관계, 세상을 파괴할 수 있는 힘도 더 많이 보유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존은 폭력이 정상적이고 불가피하다는 통념을 폐기하고, 폭력은 선택의 문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 낡은 통념을 대체하는 전 세계적이고 획기적인 운동을 머지않은 미래에 전개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덜 폭력적인 대안, 덜 폭력적인 생각, 말, 의도, 정책, 전략 및 행동이 거의 항상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보다 훨씬 덜 폭력적인 사회를 향해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길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위민 인 블랙의 각 그룹은 다양한 정치적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특히 전쟁을 겪은 여성들에게는 젠더와 군사주의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은 여성 개인에 대한 남성 폭력에 맞서 싸우고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행동의 핵심으로 삼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닌 사회적 산물인 젠더에 관한 것이란 점입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여성운동으로서 국제적 차원의 연대활동을 넓혀가다 보면 분쟁 지역의 특수한 맥락을 놓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가령,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민족, 젠더, 계급 등 여러 층위의 문제가 교차하는 복잡한 사안인데, 그중에서도 민족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어떤 지역에서는 여성운동에 있어서 민족이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상과 관련하여 초국적 여성연대의 실현을 지향하는 위민 인 블랙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수 핀치 계급 지배, 인종 우월주의, 여성 종속의 상황은 구조적 억압, 폭력의 위협, 공공연한 무력의 결합이 있었기에 그 오랜 세월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이 요소들은 서로 교차되고, 때로는 모순되기도 하지만 서로를 통해 형성되고 행사되기도 하면서 제도 그 자체로서 표현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가족, 교회, 기업, 군대, 국가 등이 그 예가 되겠지요. 무력 분쟁 속에서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간과 납치를 당하고, 특정 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인해 대량학살의 대상이 되며, 약탈적 기업에 의한 수탈을 경험합니다. 이들은 가부장제, 인종 차별, 자본주의가 맞물려 군사주의와 전쟁을 일으키고 영속화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Cynthia Cockburn, Antimilitarism – Political and Gender Dynamics of Peace Movements, 2012.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한국의 경우에는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파병하는 등 국제적 군사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군이 해외 주둔지에서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례가 보고된 바는 없습니다(외교관의 경우는 있었습니다). 군사화된 남성성/군사주의적 남성성 자체에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내재해 있다는 시각이 있는데요, 한때 위민 인 블랙 런던에서 이상의 문제를 둘러싸고 이것을 부각할지 말지 서로 입장이 나뉘었던 적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과테말라에서 ‘블루 헬멧’(Blue Helmet, 파란색 방탄모를 착용하는 유엔 평화유지군을 가리키는 말)에 의해 자행된 강간, 음핵 제거, 페미사이드에 대해서 활발한 연대 운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엔 평화유지군이 전장에서 저지른 성폭력에 대해서는 위민 인 블랙 내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청해 들을 수 있을까요? 수 핀치 유엔 평화유지군에 의한 성폭력 문제는 2011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위민 인 블랙 국제회의에서 세르비아의 제네 우 크르놈 프로티브 라타 소속 여성들에 의해 제기되고 규탄되었고, 이어서 2015년 위민 인 블랙 국제회의와 함께 방갈로르에서 개최된 세계여성법정을 비롯하여 이후 회의들과 여성법정들에서 꾸준히 제기되었습니다. 법정에서 상영된 한 영상 증언에서는 11살 정도로 보이는 아프리카 소녀가 마을을 휩쓴 무장 남성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하고 어머니가 살해당해야 했던 경험을 머뭇거리며 이야기합니다. 그런 후에 이 소녀는 응당 자신을 보호했어야 할 유엔군에게 다시 강간을 당했습니다. 내레이터는 이 파란 방탄모의 강간범들이 ‘평화 유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저지른 범죄로 인해 기소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불처벌’(impunity) 원칙을 지적하고, 법정의 모든 사람들은 이를 규탄했습니다. 각주 ^ CynthiaCockburn, From Where We Stand: War, Women’s Activism and Feminist Analysis, Zed Books, 2007. ^ Cynthia Cockburn, From Where We Stand: War, Women’s Activism and Feminist Analysis, Zed Books, 2007. ^ Manchanda et al., Women Making Peace: Strengthening Women’s Role in Peace Processes, South Asia Forum for Human Rights,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