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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할머니의 방 - 강일출 할머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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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할머니의 방 1. 할머니의 방 1부 - 이옥선 할머니 편 2. 할머니의 방 2부 -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 편 3. 할머니의 방 3부 - 박옥선 할머니 편 해방, 또 다른 피해의 시작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는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인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선언이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날인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항일인사들과 그들을 환영하는 시민들이 종로 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하면서 해방의 기쁨과 환희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만세’ 소리로 가득 찼으며, 해외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도 귀국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아시아 각지로 끌려갔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게는 이 같은 해방의 기쁨과 환희가 전달되지 못했다. 1945년 7월 포츠담선언 이후, 일본군은 본국으로의 회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이들의 안중에 없었다. 일본군은 피해자들에게 해방이 된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고 자신들만 귀국길에 올랐다. 이에 낯선 타국에 방치된 피해자들은 오롯이 자신의 힘만으로 앞날을 대비해야 했다. 피해자들에게 놓인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이들 중 일부는 도보나 기차 등을 통해 스스로 귀국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연합군에게 발견되어 귀국선을 탈 수 있었다. 그리고 대만, 필리핀 등 상대적으로 멀리 끌려간 피해자들은 귀국을 포기하거나 귀국을 위해 중국관내로 모여드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에도 해방 이후 귀국을 포기하거나 귀국할 방법을 찾지 못해 중국에 남아있는 피해자가 상당하였다. 귀국을 포기한 피해자들이 어떠한 이유로 귀국을 포기하였는지 그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이옥선 할머니(부산)는 “내가 이마에 ‘위안부’ 간판 써 붙이고 어떻게 부모형제 얼굴을 보느냐?”라고 말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피해자와 돌아가지 않으려는 피해자들이 중국 관내에 많아지기 시작하자 중국 정부는 이들에 대해 ‘무녀’, ‘기녀’, ‘풍기문란’ 등의 이유를 들어 강제송환을 추진하였다. 이에 강제송환을 피하려는 피해자들은 중국 국적의 남성과 결혼해 거류증을 발급받아야 했다. 강일출 할머니는 강일출 할머니도 해방 이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 체류한 피해자 중 한 명이다. 할머니는 1928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열 두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사로 생활을 이어나가셨는데, 땅과 논·밭 등이 많아 사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이에 강일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와는 달리 어릴 적부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어린 여성들을 차출한다는 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어느 날 마을 이장이었던 할머니의 전(前) 형부가 할머니의 언니가 이혼 후 다른 남자와 재혼한 일에 앙심을 품고 할머니를 밀고하였다. 이 때문에 할머니는 1944년, 17살이 되던 해 중국 흑룡강성의 한 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끌려간 할머니는 얼마 뒤 장티푸스에 걸려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고 겨우 물만 마시는 신세가 되었다. 일본군은 할머니가 군인들에게 장티푸스를 옮길까봐 할머니를 산으로 끌고 가 태워 죽이려고 하였다. 다행히 할머니는 당시 일본군이었던 조선 사람의 도움을 받아 죽음 직전에 살아날 수 있었다. 그렇게 죽음을 피한 할머니는 해방 직후 조선족 남자를 만나 혼인하고 길림성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 남편마저 6.25전쟁에서 사망하자, 할머니는 시댁을 떠났다. 시댁에서 나온 할머니는 중국군의 간호사로 입대하였으며, 전역 후에는 길림시의 한 병원에서 30여 년간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1991년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 국내의 시민단체들은 해외거주 피해자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때 한 시민단체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를 찾는다는 신문광고를 낸 적이 있었는데, 강일출 할머니는 그 광고를 보고 직접 시민단체에 연락을 하셨다 한다. 그렇게 할머니는 고향을 떠난 지 5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국내로 돌아온 할머니는 잠시 친척집에서 생활하시다 2000년 3월에 나눔의 집에 입소하셨다. 강일출 할머니의 방 강일출 할머니는 강인하면서도 따뜻하고 항상 자신감이 넘치신다. 치매를 앓고 계시지만 역사문제와 나눔의 집 일에 관심이 많으시다. 2016년에는 할머니가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그림이 모티브가 되어 ‘귀향’이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 영화의 흥행으로 인해 강일출 할머니는 유명한 할머니가 되었지만, 정작 할머니는 치매로 인해 자신이 유명해진 사실을 알지 못한다. 가끔 영화 얘기를 하면서 ‘귀향’의 주인공이 할머니라고 설명하면 금방 잊어버리긴 하시지만 무척이나 좋아하신다. 또 새로운 사람을 보면 증언을 해야 한다는 기억이 남아있어서인지 낯선 사람들에게 항상 “역사문제를 똑바로 알아야 해!”, “일본놈들이 우리나라 불바다로 만들었잖아!”, “다신 그런 나라가 오면 안 돼!” 등의 이야기를 반복하신다. 또한 강일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에 대한 질투와 샘이 대단하신데, 직원이나 방문객이 다른 할머니와 친하게 지내거나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무척 화를 내신다. 한번은 점심시간에 강일출 할머니가 계신 것을 모르고 이옥선 할머니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강일출 할머니가 아는 모든 욕을 들어야 했다. 오래전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셨던 할머니들은 강일출 할머니에 대한 내성이 생기셨는지 할머니의 어떠한 시비에도 반응하지 않으신다. 처음에는 이 모습이 참 신기하면서도 의아했다. 그러나 최근에 나눔의 집에 오신 속리산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강일출 할머니의 텃세를 견디다 못해 몇 번 크게 싸우기도 하셨다. 다툼 이후 강일출 할머니는 계속해서 속리산 할머니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계셨는데 어느 날 속리산 할머니가 갑자기 강일출 할머니에 대한 칭찬을 하셨다. “강일출이는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아, 자식들도 다 있으니 얼마나 좋아. 부러워” 이 말을 들은 강일출 할머니는 언제 싸웠냐는 듯이 웃는 얼굴로 표정을 바꾸시고 “아이고~ 언니야~ 고마워~” 라고 말해 주위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박장대소 한 일이 있었다. 이날 이후 지금까지 직원들은 두 할머니가 다투시면 강일출 할머니에게 “할머니, 속리산 할머니가 할머니는 키도 크고 인물도 좋대”라며 귓속말을 한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은 서로 친하지 않으시다. 오히려 서로에게 무관심하시거나 다투는 일이 더 많다. 심지어 강일출 할머니와 속리산 할머니처럼 갈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할머니들도 계신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사이도 좋지 않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시는데 왜 할머니들은 굳이 이렇게 함께 살아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강일출 할머니의 방 강일출 할머니 방의 각양각색의 장롱들 강일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과 달리 방에서 거의 생활을 하지 않으신다. 할머니는 주무실 때를 제외하고는 방에 잘 계시지 않는다. 항상 거실에 나와 TV를 보시거나 직원들과 얘기를 나누신다. 따라서 할머니의 활동무대는 주로 나눔의 집 거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일출 할머니의 방에는 할머니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소품들은 거의 없는 편이다. 할머니의 방은 나눔의 집 복도 끝 제일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다른 방들도 많은데 굳이 왜 가장 안쪽 방을 쓰시는지는 잘 알지 못하였는데, 얼마 전에 2009년 지금의 생활관이 완공될 때 고(故) 김군자 할머니와 고(故) 배춘희 할머니 그리고 강일출 할머니가 가장 먼저 방을 ‘찜’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일출 할머니가 가장 안쪽 방을 고르신 이유는 그 방이 다른 방에 비해 조금 더 넓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앞서 소개했던 다른 할머니들의 방보다 조금 더 큰 편이다.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직사각형 구조로, 다른 할머니들의 방과 마찬가지로 방 맨 끝 창문 아래 돌침대가 놓여져 있다. 침대 다리 방향 왼편으로 장롱 2개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장롱 맞은편에는 화장대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서랍장, TV, 냉장고, 또 다른 장롱이 차례대로 자리 잡고 있다. 처음 할머니의 방을 보았을 때 색깔과 모양이 전부 다른 장롱 3개가 한 방에 있는 것이 좀 의아했다.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이옥선 할머니가 “강일출이는 죽은 할머니 사진도 못 걸게 해! 무섭다고, 근데 자기 방에는 먼저 간 할머니 물건들을 다 갖다 놨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제서야 그 각양각색의 장롱들이 돌아가신 할머니들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은 못마땅해하고 질투하시지만 직원들에게는 참 친절하신 편이다. 또 사람들을 좋아해 직원들이나 방문객들을 보시면 본인 옆에 앉으라며, 옆자리를 툭툭 치신다. 그렇게 옆자리에 앉으면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떠날까 봐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붙잡아 놓으신다. 가끔 할머니가 거실에 없으면 방으로 찾아가곤 했는데, 역시나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내가 금방이라도 방에서 나갈까 봐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다. 그 이야기는 보통 어릴 적 할머니 고향집에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많았다는 것과 할머니가 막내라 부모님이 많이 아껴주었다는 것, 그리고 할머니의 집이 부자라 손님들에게 항상 식사를 대접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에 관한 이야기도 해주시려나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대신 머리 뒤에 흉터를 자주 보여주시는데 어떨 때는 일본군에게 맞았다고 하시고, 어떨 때는 포탄에 맞아 생긴 흉터라고 하시고 또 어떨 때는 어릴 적 감나무에서 떨어져 난 상처라고 하신다. 할머니 증언집에 일본군에게 맞은 상처라고 쓰여 있지만 굳이 할머니의 기억을 바로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2019년 나눔의 집은 더이상 신규 입소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 할머니를 더 모시겠다며 증축공사를 강행해 정원을 20명으로 늘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할머니의 물건들은 외부에 방치돼 장맛비를 맞았다. 이 중에는 강일출 할머니의 물건들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강일출 할머니의 물건들은 다른 할머니들의 물건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다. 덕분에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직원들의 노력으로 비교적 빨리 복원되었지만 그 사이 할머니는 치매로 인해 자신의 방을 완전히 잊어버리셨다. 장맛비를 맞고 훼손된 가구들 일본군‘위안부’운동과 할머니 우리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공론화된 지 벌써 30년이 지났고 해외 거주 피해자들이 국내에 돌아온 지도 어느덧 2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시민단체와 정부 그리고 할머니들의 노력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는 많은 성과를 이뤄냈다. 아직까지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부인하고 있지만 국제 사회는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일제가 저지른 중대한 전쟁범죄이자 인권침해라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할머니들은 노구를 이끌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피해 사실을 알렸으며, 일본과의 소송도 불사했다. 또한 매주 수요일에는 일본대사관 앞에 앉아 일본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할머니들의 희생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포함한 일제의 반인륜성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라는 굴레를 넘어 우리사회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할머니들이 일본군'위안부'피해자로서 가져야 할 역할에 대해서만 그 필요성을 강조하였을 뿐, 피해자가 아닌 박옥선, 이옥선, 강일출로서 가져야 할 권리와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의 삶을 살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피해자의 삶보다 누군가의 어머니와 할머니, 또 누군가의 친구 그리고 누군가의 박옥선, 이옥선, 강일출로 살아왔다. 지난 30년간 피해자로서 최선을 다한 할머니에 대한 우리사회의 보답은 이들을 피해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 우리사회의 구성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겪었을 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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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저문 증언의 시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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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 특집: 역사, 증언, 그리고 문학 1991년 김학순의 증언 이후 30년.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을 ‘듣는’ 우리는 어디까지 와있을까. 낯선 땅으로 ‘끌려간 소녀’, 고통의 기억을 몸에 새긴 ‘할머니’, 문제해결을 위해 국제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여성인권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그저 ‘피해생존자’로 한정하고 손쉬운 프레임 안에 가둬온 것은 아닌지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6년 이후 또렷해진 페미니즘 담론과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지 질문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복수의 구술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2016,현대문학)은 발표 이후 꾸준히 이 ‘재현’의 문제를 논하기 위한 재료로 이야기되어 왔으나, 이 의제가 갖는 중요성과 무게에 비해 충분히 논의되었는지 의문이다. 2021년 9월, 동명의 소설이 연극으로 재탄생하여 무대에 올랐고,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극중 상황과 마찬가지로 정부 등록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가고 있다. 웹진 <결>은 피해 당사자이자 목격자, 증언자이자 기록자로서의 ‘한 명’들의 기억이 현재 한국 문학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어떤 차원에서 고민되어야 할지 진지한 논의의 장을 제안하고자 한다. 소설 『한 명』을 포함한 김숨 작가의 글을 중심으로 네 명의 필진이 ‘위안부’ 문제의 재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 줄 것이다. 이 각각의 질문이 앞으로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01. 소설 『한 명』이 연극 <한 명>이 되기까지 | 국민성 02. 묻기에서 듣기로 단수에서 복수로, ‘위안부’ 서사 규범의 변화가능성 - 증언소설로서의 김숨의 『한 명』 | 권김현영 03. ‘한 명’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려면 | 강희정 04. 저문 증언의 시대에서 | 박혜진 구술사는 약자로서의 소수자가 권력이 된 주류 역사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보편을 점거한 주체의 관점으로 쓰이는 역사에 균열을 내고 주변화된 잔여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역사의 이면을 그리는 동시에 불완전한 역사의 빈틈을 메운다. 그러나 몇몇 개인의 이야기에서 역사적, 정치적, 사회문화적 의미를 도출해 내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대표성의 부재와 재현의 불완전성이 장벽처럼 가로막혀 있는 탓이다.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가 개인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시대를 반영하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는 근거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착각하고 합리화하는 존재인 인간이 기억하는 불완전한 이야기가 어떻게 사료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까. 기시 마사히코의 『망고와 수류탄: 생활사 이론』(정세경 옮김, 두번째테제, 2021)은 개인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생활사 이론이 가지는 보편적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질적 조사에서 그려지는 디테일이란 ‘리얼리티의 복수성’을 부르짖기 위한 것이 아닌 우리들의 기억이나 경험, 이야기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무엇이었다는 것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구술자로서 바로 지금 내 눈 앞에서 존재하며 천천히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이러한 몇 겹으로 포개어진 ‘사실’을 최후의 독자에게 건네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디테일이라는 것은 실재에 도달하는 길이기도 하다.” -기시 마사히코, 『망고와 수류탄』, 29~30쪽. 실재에 도달하게 만드는 생활사 이론은 ‘선택’이 아니라 ‘증식’의 세계관을 지향한다. 모순의 상황 속에서 각자의 구술은 모순을 정돈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설을 최대한 늘려 나감으로써 인간이 구술하는 상황에 대한 상상력의 경계, 혹은 진실의 경계를 넓혀 나가는 데에 의미가 있다. 인간과 시대에 대한 전면적 이해는 “그 상황의 가혹함을 축소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이해’” 위에서 가까스로 가능해진다. 우리는 구술사 혹은 생활사가 전해 주는 “인생 이야기”의 무게를 통해 그들이 살았던 역사의 실재에 도달한다. 전쟁이 끝나고 76년이 지났다. 전후를 기준으로 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은 지금, 우리는 전쟁의 상처가 몸에 새겨진 이들과 함께 이 세상을 살고 있다. 전쟁을 체험했고, 무엇보다 전쟁의 피해를 온몸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살아 있으며, 이들의 증언은 전쟁의 성격에 대한 진실을 한층 실재적으로 구성한다.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의 표현처럼 우리는 ‘증언의 시대’를 살아 온 것이다. 서경식의 증언은 이야기를 통한 증언이며, 무엇보다 증언하는 주체와 전달자, 그리고 증언이 도달하는 사람을 ‘연결’하는 증언이다. 일본군‘위안부’ 송신도 님의 증언을 이야기로 전달하기 위해 서경식은 자신의 어머니를 감정 이입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문장이 탄생했다.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라.” 이때 서경식이 대상화와 소비의 문제를 깊게 고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단서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와의 대담을 묶은 책 『책임에 대하여』(서경식, 다카하시 데쓰야, 한승동 옮김, 돌베개, 2019)에서 그는 다시 한번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라”에 대해 언급하며 이러한 방식이 야기할 수 있는 한계 지점에 대한 우려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위안부 출신 송신도 씨와 같은 해에 태어난 어머니를 ‘자료’로 제공한다는 것은, 내가 어머니를 소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식과 늘 대면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인데, “그래도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내 어머니가 송신도 씨의 운명을 좇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일이 ‘위안부’가 이른바 추상적 언설의 대상이 아니라 살이 붙고 피가 통하는 존재임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시 마사히코와 서경식의 말에서 공통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주류 역사에 균열을 내는 증언의 말하기에서 중요한 것이 ‘추상적’인 것과 구분되는 ‘실재’적 감각이라는 점이다. 추상적 언설의 역사에서 구체적 감각의 역사로 전환되는 사이, ‘증언의 시대’가 있다. 2016년에 출간된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현대문학)은 증언의 시대가 맞은 새로운 전환점을 ‘호명’한 소설이다. 『한 명』은 그때까지 자신도 ‘위안부’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채 살아온 어느 화자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증언자를 만나러 가는 이야기다. 상상된 마지막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증언의 시대가 도달한 어느 지점을 상상한다. 증언의 시대가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는 이 소설은 ‘저문 증언의 시대’를 묘사한다. 그리고 그 일몰의 시간을 빌려 증언의 시대가 서 있는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증식의 세계관을 형상화한다. 마지막 시간을 목전에 두고 그리는 증식의 세계관이 어떤 의미를 형성하고, 또 문학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실재적 가능성이 될 수 있을까. “마흔일곱 명에 아홉 명을 더하면…… 가게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계산할 때에는 그럭저럭 돌아가는 덧셈과 뺄셈이 그녀는 잘 안 된다.” -김숨, 『한 명』 부분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계산할 때에는 문제없이 돌아가는 연산이 ‘위안부’의 수를 헤아릴 때에는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들의 수를 헤아리는 것이 정량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산의 법칙으로 바라보면 이들의 세계에는 마이너스만 존재하는 필패의 세계에 가깝다. 증언하는 자들의 존재가 소멸을 향해 간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이상 증언의 시대는 저물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변수가 발생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줄어들기만 하는 세계에서 증언의 힘이란 한계가 분명한 일시적 진실에 불과한 것이다. 사라지고 말 진실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한계 시간을 늘리기 위해 필요한 상상력이 무엇일까. 김숨에게 증언이 증식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면, 그때의 증식은 한 세대에서만 일어나는 옆으로의 증식이 아니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아래로의 증식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마지막 증언자를 만나러 가는 주인공은 경험자이지만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그를 만나러 올 사람은 체험자가 아닐 것이다. “살아 있는 증인이 있는데, 세상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니까. 눈물이 나고 기가 막히고 감감해서…….” 김학순 여사는 그래서 자신이 당한 일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중략)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가 238명이라고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어떻게 한 명밖에 안 남았을까 싶어, 고개를 흔드는 그녀의 귀에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벽에 덩그러니 걸린 시계를 바라본다. 테두리가 둥글고 검은 바늘시계다. 시간이 없다…….” -김숨, 『한 명』 부분 부재의 증거가 증거의 부재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이 순간에도 적용된다. 증언의 시대가 ‘실재적 감각’을 통해 기존의 역사에 균열을 냈다면 실재하는 증언자가 사라지고 없을 저문 증언의 시대는 실재를 대체하는 다른 감각의 출현이 필요하다. 증언자가 없다고 해서 증언의 시대가 끝나는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끝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김숨의 소설이야말로 그 자체로 포스트 증언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생존자의 목소리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 명』에 등장한 ‘위안부’의 증언은 ‘증언록’이 아니다. 그렇다고 ‘구성’된 이야기 속에 증언록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기록을 배치한 이 소설을 ‘픽션’이라고만 부를 수도 없다. 증언록과 픽션 사이에 위치한 『한 명』을 편의상 ‘증언소설’이라 부른다면, 이때 이 증언소설은 증언할 수 있는 피해자이자 생존자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기억을 보존할 수 있는 새로운,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다. 문학은 한 사람의 기억을 한 시대의 기억으로, 한 시대의 기억을 공동체의 기억으로 추상화할 수 있다. 이때의 추상화는 증언의 시대 이전의 추상화와 전혀 다르다. 전자의 욕망이 하나의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라면 후자의 욕망은 복수의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한 명』을 다 읽었을 때 기분이 생각난다. 경기 종료가 가까워져 오는 시간에 아직 체력이 바닥나지 않은 교체 선수가 가벼운 몸짓으로 그라운드를 향해 뛰어오는 걸 보는 것 같았다. 벤치에는 더 많은 선수들이 앉아 있고, 따라서 연장전으로 가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은 상황. 선수에서 다른 선수로 이어지는 사이 증언의 현장성과 일관성은 변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증언이 생존자들의 증언이 지닌 가치를 반감시킨다고는 볼 수 없다. 가혹함을 축소하는 역사에 반해 가혹함의 가능성을 증식함으로써 그들이 거기 있었다는 존재감을 부여하는 ‘이야기’들이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은유와 상징의 힘으로 거듭 태어나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살아 있는 현재적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소설이 고전이 된다. 『한 명』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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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평화는 집단의 노력이다”!?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를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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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is a group effort”. 20여 년 전, 헤이그 NGO 국제평화회의장 한구석에 걸려있던 현수막에서 이 말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전율을 느꼈다. 분단이라는 군사적 긴장 관계 속에서, 협정이 체결되면 평화가 ‘정착’된다는 말에 익숙해져 있던 탓이었을까. 평화란 법과 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던 나에게 이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평화가 어떤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집단의 노력”이라니! 말문이 트이는 것 같은 쾌감과 함께 새로운 난제에 맞닥뜨린 듯한 마음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집단적 노력이라는 사회적 과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 ‘위안부’문제연구소는 여성가족부의 후원하에 오는 10월 13-14일 양일간 일정으로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이하 컨퍼런스)>를 개최한다. 컨퍼런스는 집단의 노력으로서의 평화는 결국 여성을 비롯한 타자들의 인권과 맞닿아있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사법 정의의 문제, 전쟁의 성별성(gender)과 평화교육, 기억이라는 정치의 문제를 심도 있게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과거를 아는 것과 과거에 대해 해석하는 현재라는 맥락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여성의 지위를 보여주는 현재의 지표라는 점에 주목하는 논의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위안부’ 이슈가 논의될 때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 중의 한 가지가 배상과 사죄, 그리고 명예 회복이라는 말이다. 여성학자 김정란은 성폭력 상황에서 “명예롭지 않은 유일한 당사자는 가해자”라는 점을 상기하며, 성폭력을 “여성의 명예 실추와 연관시키는 사고방식”의 “후진성”을 역설한다. “성차별적 사고는 상해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수치심을 피해자에게 떠넘김으로써 가해자 처벌의 기회를 축소할 위험”마저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명예 ‘상실’을 전제함으로써 이미 그들이 담보하고 있는 존엄과 명예를 오히려 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질문한다. 일상에서 숨을 쉬듯 아무런 의심없이 당연하게 간주 되어 온 인식이 얼마나 반여성적인 폭력일 수 있는지 제기하는 그의 시선은 시사적이다(김정란, 경향신문 2020년 6월 24일, 기고,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명예와 존엄을 허하라). 사전에는 명예(名譽)란, “자기의 도덕적, 인격적 존엄에 대한 자각 및 타인의 그것에 대한 승인과 존경”이라고 나와있다. 이름 명(名), 기릴 예(譽)라는 한자의 조합, 누군가의 이름을 기린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누가 누구의 이름을,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기리는가. 강물이 흐르면 강기슭의 형상이 변화하는 것처럼 사람의 이름을 기리는 명예라는 가치 또한 시대 인식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그 의미가 달라진다. 명예는 고정된 가치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를 전제로 한다면, 명예의 회복과 미회복의 경계를 결정짓는 것은 타인과 ‘나’와의 관계, 즉 사회의 의식이다.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명예와 존엄을 허하라”는 칼럼의 제목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논의의 틀 자체, 즉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할 때 당위로서 여겨지는 성차별적 전제를 문제 삼고 있다. 컨퍼런스 기조 발제를 맡은 크리스틴 친킨은 “젠더 정의는 성인지적 차원에 대한 관심을 요구할 뿐 아니라 성과 인종, 식민주의와 계급 문제에 기반한 차별과 억압의 교차점에 있는 피해를 시정하려고 노력한다”고 논한다. “차별과 억압의 교차점에 있는” 피해와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차별과 억압은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화 하는 고정관념 때문에 가시화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겨우 그 실상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고통을 당한 사람의 입장을 중심으로, 피해자가 소외되지 않는 방식으로 논의가 전개되기 어려운 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문제, 혹은 상처라는 흔적을 ‘어떻게’ 다룰 것 인가라는 질문은 차별과 폭력에 대한 접근법을 집약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컨퍼런스 3부에서 토론을 맡은 도미야마 이치로는, 경험이란 공유해야 할 “소재”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성의 시작”이라 역설한다. 이러한 관계성, 사회성을 만들어나가는 실천을 통해서 억압이라는 기존의 상황은 다른 식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명예는 선험적으로 회복 혹은 미회복이라는 확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맺는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통하여 비로소 그 윤곽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1990년 한겨레신문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 연재를 통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윤정옥은 “종전이 되고 나서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우리들이 잊었기 때문에 그들은 두 번 죽은 셈”이 되었다고 언급하며, 그들을 “잊었”던 우리 사회의 유기(遺棄)의 시간에 대한 내성적 논의를 촉발시켰다(오키나와타임스, 1992년 3월 4일). 2011년 한국 정부가 한일 청구권 협정을 근거로 ‘위안부’ 문제를 방치한 것은 피해자의 행복추구권 등을 침해하는 “위헌 행위”라는 취지의 헌법재판소 판결은, 늦게나마 우리가 “잊었”던 그 시간에 대한 책임을 법의 언어로 명시하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정의와 평화의 물결을 잇다>라는 컨퍼런스 주제는 이러한 겹겹의 쟁점을 다각적인 고찰을 통해 재구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보호의 대상으로서 ‘꽃’과 ‘할머니’라는 표상, 혹은 강제냐 자발이냐를 다투는 이분법적 논의는 고통의 체험을 딛고, 혹은 그 고통과 더불어 폭력 이후의 삶을 살아온 이들을 존중하는 논의로 나아가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문제가 다루어지는 형식과 위상을 재고한다면, 평시와 전시가 연동하는 의례로서의 전시 성폭력 문제는 ‘배상’과 ‘사죄’로만 환원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여성문제이면서 민족 문제인 ‘위안부’ 이슈는 외교 관계를 통해 ‘해결’되어야할 사안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숙의(熟議) 과정을 통해 “집단의 노력”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진행형의 과제이다. 여성문제다, 민족문제다라는 주장이 아니라 “여성문제이면서 민족 문제”라는 점을 어떤 방식으로 논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조직하자.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 https://www.icwrp2021.com 기사 게재일: 20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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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소녀상만사 새옹지마 -독일 '평화의 소녀상' 이야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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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 2020년 7월 11일 토요일에 최윤정 건축사와 함께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이하 괴테대학교) 베스트엔드 캠퍼스 사회학관 로비에서 전시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보러 갔다. 최 건축사가 말했다. "로비가 크니까, 소녀상이 작아 보이네." "그러게.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 보여. 귀엽지?" 한미합동훈련도 쉬게 하는 코로나19의 위력은 독일에서도 유효하다. 모든 것이 천천히 가는 세상, 평소라면 매일 수천 명이 오가는 괴테대학교 사회학관에서 소녀상은 쉼표를 즐기는 중이다. 이 글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소녀상 건립이 공론화된 2016년부터 지금, 여기 이 쉼표 지점까지의 이야기다. 1_괴테대학교 사회학관 로비에서 전시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jpg 2016년 8월, 독일 프라이부르크 수원 사람들이 기증하려던 '평화의 소녀상' 2016년 8월 12일,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수원에서 온 메일이었다. 수원 시민이 참여한 '독일 평화의 소녀상 수원시민 건립추진위원회(이하 '수원추진위')'에서 독일 프라이부르크시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려고 하니 독일 현지에서도 협력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공관의 방해 공작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2016년 9월 말에 프라이부르크 시장이 '평화의 소녀상' 건립 계획을 취소해버렸다. 당시 연락을 주고받던 수원추진위 이주현 집행위원장과 통화하던 중 나는 그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평화의 소녀상'을) 우리한테 보내세요." 일반 공관의 무례함으로 인해 독일 땅에서 발생한 표현의 자유 침해를 기정사실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수원에서는 당시 수원추진위를 해체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그러고 나서 독일 전역 동포사회 단체와 개인들에게 연락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모임을 10년 가량 지속한 단체 관계자들에게도 연락했다. 수원에서 추진한 일은 '물건너 갔다'고 보는 시각이 있어 여러 시간 전화 통화를 하며 설득했다. 메일을 통해 독일 내 건립추진위 조직을 호소했더니 독일 전역에서 20여 명이 모여 '독일 평화의 소녀상 건립 독일 건립추진위원회(이하 '독일추진위')'가 구성되었다. 몇 달이 지나면서 참여자는 70여 명으로 늘어났다. 2016년 10월 초 수원추진위 대표단이 독일에 와서 독일추진위와 협약식을 맺었다. 수원추진위는 소녀상을 보내주고 독일추진위는 소녀상을 건립할 장소를 찾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때 마침 독일 루르 지역에서 재독 한인교회협의회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는 수원추진위 대표단과 함께 한인 교회협의회 총회장에 가서 독일 '평화의 소녀상' 건립 프로젝트 계획을 소개했다. 누군가 내게 질문했다. "추진위는 누구를 대상으로 합니까?" "재독 동포 사회 4만 명 모두가 추진위라 생각합니다." 누구든 원하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놓는다는 취지였다. 2017년 3월 8일[1]에 '안점순 할머니와 함께하는 봄나들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바이에른주 레겐스부르크시 인근 비젠트 시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에서 '평화의 소녀상' 건립식이 열렸다. 수원과 프랑크푸르트에서 각각 40여 명, 그 외 레겐스부르크, 루르 지역, 베를린 등에서 40여 명이 참석해 모두 120여 명이 모였다. 2_ 2017년 3월 8일 독일 비젠트 시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에서 촬영한 안점순 할머니와 소녀상.jpg 2017년 3월, 독일 비젠트,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 비문없는 '평화의 소녀상' 건립식 다음 날, 현지 관계자에게 연락이 왔다. 독일의 일본 대사관에서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소녀상 철거 문제가 불거지자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의 비르트 이사장은 타협안으로 소녀상은 그대로 두고 대신 소녀상의 비문을 철거할 것을 제안했다. 비르트 이사장 역시 프라이부르크 시장과 마찬가지로 일본 대사관의 방해를 겪어보니 견디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독일추진위 일각에서는 비문 수정을 일본 측에 부탁해보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고 비문 수정에 관한 의견을 개별적으로 교환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던 중 공원에 서 있는 소녀상에서 이미 비문이 철거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확인해본 결과, 건립식 당일에 비문을 부착하지 못했고 건립식 이후 부착하기로 한 비문이 부착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후 공원에서는 비문을 철거하고 소녀상을 유지할 것이며 이 일이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일본공관원과 나눈 이야기를 담아 사무국장인 내게 메일로 보내왔다. 이에 대해 나는 "비문이 없는 소녀상은 상상할 수 없다"는 메일을 보냈는데 이 메일로 인해 사무국장 업무 중단 요청과 사퇴 요구를 받는 등 빗발치는 항의에 직면했다. 하지만 철거 타협안을 용인할 경우 좋지 못한 선례를 남기게 되므로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고, 10월에 공원이 겨울 휴장기에 들어갈 때까지 다른 장소가 나오면 옮기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한쪽에서는 한번 세운 것이고 "고마운" 공원주를 배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소녀상을 옮기는 것에 반대했다. 전자의 경우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본 정부의 역사수정주의적 공격을 독일 내에서 이슈화하는 계기로 삼아 일본이 내세운 한일 프레임에서 벗어나 바이체크 전 대통령이 이야기한 기억문화의 맥락으로 사안을 보자고 했다. 후자의 경우는 "우리의 역사의식을 독일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일본과 독일이 동맹국이므로 독일에서는 많이 힘들 것"이라는 관점이 작용했다. 소녀상 건립이라는 결과물을 환영한다는 점에서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건립을 추진하는 목적과 철학이 다른 데서 기인한 의견 차이였다고 하겠다. 결국, 독일추진위 일각에서 주도하여 2017년 5월 19일 회의가 소집되었고 독일추진위 추용남 대표는 비문이 없는 상태 그대로 평화의 소녀상을 그 공원에 두겠다고 하며 이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간 전체 일정과 업무를 조직하고 추진해 온 사무국과 실무팀 5인은 그러한 결정을 존중하되 동조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사실상 4월 중순부터 사퇴 요구를 받았던 사무국장과 함께 사무국 사퇴를 선언하며 '비문 있는 소녀상'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한국인이라 하여 모두 같은 의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 사이에서도 의견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이 일은 '한국인'이란 틀이 어디까지 유효한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평화의 소녀상' 비문 문구를 둘러싼 논쟁-2차 세계대전이냐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냐 '평화의 소녀상' 비문 문구를 둘러싼 시비는 일본 정부가 소녀상 건립을 방해할 때 단골로 써먹는 메뉴 중 하나다. 역사 부정을 위해서다. 하지만 독일추진위 내부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피해 시기와 그것의 표현 방식을 두고 논란이 발생했다. 본래 수원에서 보내준 '평화의 소녀상'에서 제공한 비문 원본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이를 내가 독일어로 번역하고 정다니엘 목사가 교열을 보고 10월 초 수원추진위 관계자들과도 검토하고 수원에 보내려고 할 때 지연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코리아협의회 대표가 전화를 걸어와서 '2차 세계대전'이 아닌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세 시간의 전화 끝에 그렇다면 최종 교열자인 정다니엘 목사와 연락해서 '2차 세계대전'을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고치기만 하고 수원추진위 측에 서둘러 문구 수정 요청을 해달라고했다. 그러나 당시 코리아협의회 대표는 수정본을 바로 넘기지 않고 비문 전체를 수정해서 2017년 1월에 최종 수정본을 내놓았다. 이로 인해 2016년 11월 수원에서 소녀상을 보낼 때는 소녀상에 비문을 부착할 수 없었다. 2017년 2월 중순, 소녀상 건립 장소 공원주와 중재자인 레겐스부르크 원불교 교당 관계자를 만났을 때 나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비문을 제시하였으나 교당 관계자는 내 서류철에서 삐져나온 10월 버전('2차 세계대전'이 들어 있는 수원 버전)을 보고 이 텍스트를 선택하게 됐다. 2016년 10월에 결정한 버전으로 비문 내용을 확정하고 작가들에게 내용을 전달했다. 문구가 새겨진 비문은 작가들이 건립식을 앞두고 독일에 입국할 때 직접 들고 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비문은 건립식 당시 좌대에 얹어져 있었을 뿐, 부착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일에 접착제를 사용하여 비문을 좌대에 부착하려 했으나 전날 쏟아진 폭우로 소녀상이 젖어 있어 비문을 붙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당시에 비가 오지 않아 비문을 붙였더라면, '평화의 소녀상'에서 비문만 철거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늦어진 비문 제작과 건립식 전날의 폭우라는 우연이 겹치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표현을 양보했는데 본의 아니게 '2차 세계대전'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비문을 선택하게 된 셈이다. 내가 '아시아태평양 전쟁'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용어를 우선한 것은 무엇보다도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인들에게 전달성이 높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 프랑크푸르트 전시를 준비하면서 교수님들을 만날 때도 "이 문제는 2차 세계대전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교수님들도 전시 오프닝 때 "유럽의 안경을 벗고 이 문제를 바라보자"라고 하였다. 이 문제는 독일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비문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며, 지난 몇 년간 논의가 이어져 왔다. 미국 단체인 ''위안부'행동(CARE, 전 가주한미포럼)'에서 나온 캘리포니아 고등학교 교사용 '위안부' 교재에서는 "1930년대 초반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또 2019년에 프랑크푸르트 전시를 계기로 풍경세계문화협회가 발간한 책자에서는 최초의 위안소가 1932년에 상하이에 생겼다는 점을 고려하여 '1937-1945'를 '1932-1945'로 수정했다. 최근 호사카 유지 교수가 발간한 『일본의 위안부 문제 증거자료집 1』(2018, 황금알)에 첫 위안소가 1931년 11월에 세워졌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앞으로는 '1931-1945'로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페이스북을 통해 윤명숙 박사의 고견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윤 박사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진보적인 학자들의 경우 1931년에서 1945년까지의 기간을 '15년 전쟁'이라 부른다고 한다. 2017년 8월, 독일 본, 여성박물관 두 번째 기회 그리고 익명의 편지들 독일의 첫 '평화의 소녀상'이 비젠트 시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에 세워진 후, 독일 본에 있는 '여성박물관' 마리안느 피첸 관장에게 소녀상 이야기를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2017년 8월, '여성박물관'으로부터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기로 하였다는 편지를 받았다. 새로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업무의 일관성을 확보하고 활동 자금도 조성해야 했다. 공익협회 신설에만 6개월이 소요되었다. 2018년 4월 28일, '풍경세계문화협회'라는 이름으로 공익협회 법원 등록까지 마치고 우리의 프로젝트를 외부에 공개했다. 한국의 케이티브이(KTV, 국민방송)와 연합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한국에도 전했다. 이날은 필리핀 마닐라 해안도로에 4개월가량 서 있던 '필리핀 위안부'상이 철거(2018년 4월 27일)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여성박물관'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한다는 프로젝트를 발표하자, 독일 뒤셀도르프 일본 총영사관 공관원들이 '여성박물관'에 방문했다. 소녀상 건립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본 시의 문화국 관계자도 소녀상 건립 문제와 관련하여 의견을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여성박물관'에 소녀상을 세우는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수많은 익명 메일 폭탄이 쏟아졌다. 그때 본 여성박물관에 온 메일과 그 후 다른 파트너 단체에 제기된 일본 공관 측 주장들을 모아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한국인들이 말하는 '위안부' 역사는 일본을 폄하하기 위해 만든 거짓말이라는 주장 ② '위안부'는 '공창'이었으며 월급도 많이 받았다는 주장 ③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과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통해 최종적으로 완전히 해결되었음에도 한국은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다는 주장 ④ 소녀상으로 인해 독일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본인이 인종차별을 받고 피해를 볼 것이라는 주장 ⑤ 소녀상 건립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북한과 연관이 있거나 돈을 목적으로 한다는 주장 ⑥ 소녀상 건립 활동을 사람들은 한국 국가와 한통속으로 일한다는 주장 ⑦ 성폭력 문제는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데, "왜 하필 '위안부'"에 집중하냐는 문제 제기 ⑧ 소녀상 옆에 일본의 핵 피해자 동상을 함께 세우자는 제안 수많은 익명의 메일 내용 중 단순한 역사 왜곡과 한국인 험담 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두 나라만의 문제로 국한하려는 시도들이 눈에 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만의 문제로만 환원하려는 것은 독일과 같은 제3국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전쟁 성범죄가 많은데, 왜 하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집중하냐는 도발도 눈에 띈다. 이 문제 제기는 "왜 오래된 이야기를 가지고 그러느냐","왜 하필 일본에 관한 이야기냐"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런 질문들에는 "왜 안 돼?"라는 반문만이 효력이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두 번째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2018년 8월에서 10월로 미뤄졌다가 결국 무산되었다. '여성박물관' 관장이자 아티스트이기도 한 마리안느 피첸은 독일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었고, 메일 폭탄을 비롯해 불확실한 위기감 조성에도 소신을 갖고 대응했다. 하지만 당시 박물관이 처해 있던 상황은 마리안느 피첸 관장에게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훗날 우연히 알게 된 바에 따르면, 2018년 봄에서 여름까지 일본 측은 베를린 외교가에서 '여성박물관'의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한일전'으로 부각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또한, 일본과 독일 본 시 사이의 투자 문제가 걸려있어 '여성박물관' 측도 외교적으로 처신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도 있었다. 본 시의 '여성박물관' 기억에는 경계가 없다 독일에서 '평화의 소녀상' 건립 활동을 하는 내게 어떤 독일인 친구가 물었다. "왜 독일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니?" "왜 안 돼?" 되물었다. "왜 넌 아시아 라면은 먹으면서 아시아 역사는 싫어?" "오... 라면과 역사를 어떻게 비교하니?" '여성박물관'의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반대하는 수많은 익명 메일 속 내용과 같이 비본질적인 질문은 본질을 훼손하는 효과가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라는 개별성을 희석시키면서 구체적인 역사적 논쟁을 자연스레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독일에는 한국이 개발도상국일 당시에 한국의 민주화에 연대한 친한파 독일인들이 많은 편이다. 그렇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아직 독일에서 충분히 알려져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친한파 독일인들의 친절함을 넘어서는 국제 연대는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일까. 비록, '여성박물관'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울 수는 없게 되었지만, '평화의 소녀상'과 관련된 전시는 계획대로 진행하였다. 슬로건은 '기억에는 경계가 없다'로 정해져 있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문제가 아니며, '위안부'라는 사안 자체가 국제적인 문제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세계 곳곳에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사진을 수집하여 달력으로 제작했다. 독일어, 영어, 한국어 세 언어로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한 이 달력은 2017년 9월부터 제작을 시작하여 10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의외로 달력에 사용할 만한 사진들이 많았다. 5~6명이 분담하고 사진의 저작권을 확보했는데, 배경과 목표를 설명하자 많은 분들이 흔쾌히 높은 해상도의 사진을 보내주시고 사진 이용을 허락해주셨다. '위안부'행동의 김현정 대표는 직접 찍은 많은 사진을 보내주었고, 일본 나고야의 이두희 선생은 오키나와의 아리랑비를 찍은 사진을 비롯해 소중한 자료들을 구해주었다. 이렇게 수집한 사진들은 전문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달력으로 탄생했다. 경계가 없는 시간과 기억을 표현하기 위해 요일 역시 없앴다. 1,000부를 발행하여 후원인들과 관심 있는 분들, 그리고 기관에 배포하였다. 14.95유로로 가격을 책정하고 판매하여 소녀상 건립과 행사 진행에 필요한 최소 경비를 확보하는 데에 보태기도 하였다. 달력에 들어간 사진을 포함하여 세계 곳곳의 기림비 사진 30점을 모아 2018년 8월 4일부터 8월 30일까지 본 '여성박물관'에서 <전쟁과 분쟁지역 여성에 대한 폭력>이란 이름의 전시를 개최하였다. 전시장 내부의 큰 벽에는 필리핀 레이테(leyte) 지역의 피해자 르데디오스 펠리아스 할머니가 겪은 전쟁 이야기를 23편의 그림일기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을 독일어 번역과 함께 걸었다. 사진전 외에 2018년 8월 18일에 열린 국제심포지엄 <'위안부'-끝나지 않는 이야기>에서도 마리안느 피첸 관장과 함께할 수 있었다.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을 위한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의 와타나베 미나 사무국장과 '위안부'행동의 김현정 대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의 교육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저널리스트 그리셀다 몰레만스는 유럽인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첫 소녀상 건립 당시 수원추진위의 집행위원장이었던 이주현 목사는 비문 철거 문제를 언급하였고, 이두희 선생은 일본에 있는 일본군'위안부'기림비에 대해 설명했다. 국제심포지엄을 통해 독일에서 자주 환기되는 '역사 성찰에는 마침표가 없다'는 정신을 우리 활동의 기조로 삼을 수 있었다. 이 심포지엄의 가장 큰 의의는 한일 양국 간의 문제에서 벗어나 일본군'위안부' 문제 그 자체를 주제로 심화한 것이었다.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각주 ^ 본래 2016년 12월 10일에 임시 건립할 예정이었으나 11월, 베를린 인근에 영구 건립지가 날 수 있다고 해서 임시 건립 계획이 취소되었고 다음 해인 2017년 3월 8일로 ‘평화의 소녀상’ 건립이 미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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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소설 『한 명』이 연극 〈한 명〉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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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 특집: 역사, 증언, 그리고 문학 1991년 김학순의 증언 이후 30년.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을 ‘듣는’ 우리는 어디까지 와있을까. 낯선 땅으로 ‘끌려간 소녀’, 고통의 기억을 몸에 새긴 ‘할머니’, 문제해결을 위해 국제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여성인권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그저 ‘피해생존자’로 한정하고 손쉬운 프레임 안에 가둬온 것은 아닌지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6년 이후 또렷해진 페미니즘 담론과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지 질문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복수의 구술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2016,현대문학)은 발표 이후 꾸준히 이 ‘재현’의 문제를 논하기 위한 재료로 이야기되어 왔으나, 이 의제가 갖는 중요성과 무게에 비해 충분히 논의되었는지 의문이다. 2021년 9월, 동명의 소설이 연극으로 재탄생하여 무대에 올랐고,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극중 상황과 마찬가지로 정부 등록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가고 있다. 웹진 <결>은 피해 당사자이자 목격자, 증언자이자 기록자로서의 ‘한 명’들의 기억이 현재 한국 문학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어떤 차원에서 고민되어야 할지 진지한 논의의 장을 제안하고자 한다. 소설 『한 명』을 포함한 김숨 작가의 글을 중심으로 네 명의 필진이 ‘위안부’ 문제의 재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 줄 것이다. 이 각각의 질문이 앞으로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01. 소설 『한 명』이 연극 <한 명>이 되기까지 | 국민성 02. 묻기에서 듣기로 단수에서 복수로, ‘위안부’ 서사 규범의 변화가능성 - 증언소설로서의 김숨의 『한 명』 | 권김현영 03. ‘한 명’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려면 | 강희정 04. 저문 증언의 시대에서 | 박혜진 소설 『한 명』(김숨, 현대문학, 2016)은 대학로에서 꾸준히 활동해 온 극단 유목민이 김선영의 『애니깽』(한라출판사, 1990), 신경숙의 『리진』(문학동네, 2007)에 이어 <공연예술 중장기 창작지원사업> 레퍼토리로 선택한 세 번째 소설이다. 극단 유목민은 역사극의 비중이 현저하게 낮아진 연극계에서 역사연극을 시리즈화할 의도로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역사 소재로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검증된 소설문학을 연극적 미학과 형식을 갖춘 희곡으로 각색하여 공연하기로 했는데, 이는 일회성으로 그치는 행사성 공연이 아니라 극단의 장기적인 레퍼토리 사업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였다. 필자가 극단 대표인 손정우 연출로부터 프로젝트 참여 제안을 받은 것은 2020년 12월 20일, 세 번째 각색 작업이었고 작품은 미정인 상태였다. 그날부터 각색하기에 적합한 작품을 찾기 위해 연출과 상의하기 시작했다. 우선 시대적 배경은 근대로 한정하고, 사건 중심의 작품으로 갈 것인가, 인물 중심의 작품으로 갈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면서 서로 작품을 추천하고, 읽고, 토론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다양한 소재의 소설이 많았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독창적인 해석과 상상력으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독자로서 신선했고, 극작가로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다만 무대로 형상화하기에 마땅한 작품을 찾지 못해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다. 그렇게 3개월여의 시간이 흘렀다. 공연 일정이 잡힌 상태에서 작품 선정을 못하고 있으니 불안감과 피로감으로 스트레스가 쌓여갈 때쯤 연출이 김숨 작가의 소설 『한 명』을 추천했다. 하지만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는 말에 읽는 것조차 내키지 않았다. 소재가 주는 충격이 너무 강력해서 겁이 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미 다양한 장르에서 다뤘기에 변별성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무엇보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어떤 소재를 다루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작가관이다. ‘위안부’ 문제를 필자는 작가가 아닌 같은 여성으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객관화할 자신이 없었다. 20여년이 넘는 극작 활동에도 이 소재에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이유다. 그러나 프로젝트의 기획의도에 마땅한 작품을 찾아야 했기에 일단 읽어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화자인 ‘그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참혹한 실상이 눈앞에 그려질 만큼 생생하고 세밀한 묘사에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힘들었다. 답답했다.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장면에서는 저 아래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목울대가 얼얼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가족을 생각하고 고향을 생각하는 소녀들을 대할 때는 처연해서 감정이 북받쳤다. 책을 펼쳤다 덮었다 반복하다 보니 300페이지도 안 되는 책을 다 읽는 데 3일이나 걸렸다. 객관화가 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참혹하다’, ‘끔찍하다’, ‘잔혹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단어로도 적절한 표현을 찾기가 힘들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지독하게 잔인한 괴물일 수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그 대상도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왜 왜 왜… 질문만 되풀이했다. 김숨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증언록을 읽으면서 본인도 놀랐다고 했다. 우리가 잘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도 했다. 필자 역시 그랬다. 소설 『한 명』을 읽고서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한 것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빙산의 일각만 보았을 뿐인데. 그만큼 소설의 내용은 필자에게 충격을 주었다. 어떤 소설적 상상도 넘어설 만큼 가공할 만한 역사적 사실. 그 사실을 오롯이 기억한 채 살아야만 했던 아흔세 살의 ‘그녀’가 들려주는 삶과 기억들. 필자는 여러 편의 고전과 소설을 각색했다. 희곡을 현대적으로 각색하기도 하고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원칙은 하나다. 원작에 충실할 것. ‘원작에 충실하지 않으려면 창작을 하면 되지 왜 각색을 해?’라는 생각으로 각색 작업을 할 때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무대 형상화가 될 수 있는 구성에 주안점을 두려고 한다. 그런데 소설 『한 명』은 증언에 의해 밝혀진 역사적 실재와 작가의 상상적 개입이 적절하게 어우러졌다고는 하나, 증언들이 너무 강해서 원작을 살리는데 주안점을 두다 보면 다큐멘터리가 될 것이 뻔했다. 그럼 연극적 미학은 소멸될 것 같았다. 연출은 모티브만 가져와서 새로운 창작을 하기를 원했다. 그러면 굳이 왜 각색을 해야 하나. 그렇다고 필자의 원칙대로 각색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아 고민이 깊어졌다. 끔찍하고 처절한 피해자들의 삶을 굳이 무대에서 보여줘야 할까. 아니, 어떻게든 만들어서 보여줄 수 있다 한들, 실제 피해자들이 겪은 그 어마어마한 고통과 참혹함이 재현 가능할까. 흉내만 냄으로써 대상화되진 되진 않을까. 관객은 이 무거운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을까. 선뜻 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작품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시 읽기를 시도했다. 그러다 지치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리모컨만 눌러댔다.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필자는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오락프로그램을 찾아본다. 채널을 돌리다 내전을 겪고 있는 중동 지역의 상황과 그로 인해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소설 『한 명』의 상황이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사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은 여성을 폭력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한다. 다큐멘터리는 ‘위안부’ 이야기가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작품화할 이유를 찾았다. 문제는 차별화였다. 소설 『한 명』이 다른 ‘위안부’ 이야기와 다른 점이 뭘까. 같은 소재를 다룬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대부분의 작품이 피해자들이 겪은 지옥살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한 명』은 지옥살이에서 벗어난 이후의 삶을 또 하나의 플롯으로 구축하고 있었다. 『한 명』은 화자인 ‘그녀’를 통해 ‘위안부’ 피해자 20만 명의 삶을 들려주면서도, 그 후유증으로 인해 그들이 겪어야 했던 지옥살이 못지않은 고통과 번뇌의 참혹한 삶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위안소에서 해방된 지 73년이 지났지만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다. 어떤 경험이나 기억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 경험은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물론 일시적이었을 테지만 그 자체로도 엄청난 고통이다. 하물며 폭력의 수위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위안부’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는 어떠하겠는가. ‘그녀’가 ‘위안부’로서 살아야 했던 7년은 온전한 정신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잔혹한 경험이었고, 지우려 발악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끔찍한 기억이었으며 그로 인해 73년 동안 잠들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험한 과거가 창피스러워서, 너무 부끄러워서 형제자매에게도 죽은 어머니한테도 말하지 못한다. 게다가 혼자 살아서 돌아왔다는 죄책감까지 안고 살아간다. 어느 날 피해자들이 신고를 하고 매체를 통해 고백을 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그녀’의 숨바꼭질은 계속된다. 이전에는 누구의 잘못인지도 몰라서 항변 한 번 해보지도 못한 채 철저히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다시피 하며 살았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만든 감옥 속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간다. 폭력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번 가해진 폭력은 피해자에게 평생의 올가미가 되기 때문이다. 소설 『한 명』을 각색하기로 결정하고도 방향성에 대해 연출과 계속 의견을 주고받았다. 여전히 잘못을 부인하고 있는 일본에 대한 피해자의 호소를 부각시켜 국제적인 문제화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폭력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피해 당사자, 즉 개인의 삶에 미치는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집중할 것인지…. 고민 끝에, 험한 과거의 기억 속에 갇혀 폭력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순간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는 ‘그녀’의 기구한 삶을 보여줌으로써 폭력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와 고통을 안기는지를 보여주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연극 <한 명>의 희곡은 필자 혼자서 완성할 수가 없었다. 연습을 시작하는 7월 이전까지 공연 대본화를 위해 손정우 연출과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수정보완 작업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의견이 달라 부딪힌 적도 있었다. 필자가 작품에서 빠지겠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연출은 집요했다. 그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래서 더 의미 있는 작업이기도 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쟁은 여성을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킨다. 김숨 작가는 소설 『한 명』을 통해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해서, 연극 <한 명>은 연출의 재창작에 가까운 각색 요구에도 불구하고 소설 『한 명』의 내용을 충실하게 살리려 했다. 작가가 ‘그녀’를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극 <한 명>이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을 향한 폭력의 위험성, 횡포성, 공포성, 잔혹성을 대변할 수 있다고 본다. 바람이 있다면, 연극 <한 명>이 소설 『한 명』과 함께 여성이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을 향한 불씨가 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전히 잘못이 없다고 말하며 피해자들의 바람과 요구를 외면하는 가해자들이 ‘그녀’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와 함께 머리 숙이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김숨 소설가 김숨은 1974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느림에 대하여」가,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당선되어 등단했다.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소설 『바느질하는 여자』(2015), 『한 명』(2016), 『흐르는 편지』(2018),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2018),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2018), 『듣기 시간』(2021), 소설집 『간과 쓸개』(2011), 『국수』(2020) 등이 있다. 기사 게재일: 2021.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