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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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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상영작 소개 1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상영 기간 : 8월 14일(수) ~ 8월 20일(화) 상영작 🎬 오키나와의 할머니 | 일본 | 야마타니 데쓰오 | 1979년 🎬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 | 일본 | 박수남 | 1991년 🎬 50년의 침묵 | 호주 | 네드 랜더 | 1994년 🎬 일용할 양식 | 호주 | 루비 챌린저 | 2018년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하는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한다. 2024년 8월 14일부터 8월 27일까지 퍼플레이 온라인 극장에서 함께할 수 있는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는 '입을 떼다', '귀를 열다' 두 개의 주제로 나누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결을 포착해 담아낸 국내외 영화를 소개한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을 비롯해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작품도 여럿 포함돼 있다. 웹진 <결>은 영화제 관련 소식과 함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컨텐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 (1)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1)_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2)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2)_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3)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3)_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4)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4)_ 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그들의 눈 속에 타오르는 파란 도깨비불을 보았다!” 일본어로도 한국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던 재일조선인의 참담함을 마주한 저널리스트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박수남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 이면은 절박하고 저릿한 사명이지 않았을까.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증언이 시작된 1990년대 이후, 박수남 감독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피해자들의 증언에 시선을 맞추며 기록화에 나섰다. 증언을 적절하게 구획하고 담아내기가 쉽지 않은 탓에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에 다가갔지만 모두가 필사적으로 기록했다는 점만은 다르지 않았다. 1990년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룬 영화들은 그동안 숨겨져 있던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며,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길지 않은 일본군'위안부' 주제 영화의 역사 가운데 앞부분을 차지하는 이 영화들은 각각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영화제의 첫 번째 섹션 '입을 떼다'에서는 이러한 초기작들을 모아 당시 사회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다루었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배봉기의 삶을 좇은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의 <오키나와의 할머니>(1979, 86분), 오키나와에 끌려온 조선인들의 강제동원과 착취 그리고 천황제의 황민화 교육에 주목한 박수남 감독의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1991, 100분), 네덜란드 출신의 '위안부' 피해자 얀 루프 오헤른의 이야기를 담은 <50년의 침묵>(1994, 57분), <일용할 양식>(2018, 15분) 등 네 편이다. 이 영화들은 각기 다른 시각과 접근법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다루면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 <2024 기림의 날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이 영화들을 통해 다시금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복잡성과 무게감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 <오키나와의 할머니> (1979) 이중의 타자화, 제국 앞의 오키나와인과 조선인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의 <오키나와의 할머니>는 1970년대 후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배봉기를 중심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야마타니 감독은 와세다대학 재학 중 독립영화 제작 단체를 설립해 오키나와에서의 집단자결, 강제이주 등 아픈 역사를 다룬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영화는 조선을 포함해 전쟁 중 성노예로 동원된 식민지의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어하는 감독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후 야마타니 감독은 일본군'위안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취재 여행을 하던 중, 오키나와에 남아 살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배봉기를 알게 된다. 배봉기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도 계속 오키나와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1972년,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약 30년 동안 미군의 통치 아래 있던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다. 이때 배봉기는 오키나와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일본 국적의 신원 보증인을 얻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렇게 배봉기의 과거가 밝혀지며 '위안부' 생존자로서의 이력이 드러나게 된다. 오랜 취재 여행을 통해 드디어 마주한 일본군'위안부' 생존자 배봉기 앞에서 야마타니 감독은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인터뷰를 전개할 지 쉽게 알 수 없다. 말보다 먼저 그가 겪어왔을 험한 시간이 마음을 먹먹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접근법 없음'의 곤궁함과 방법론적 부재가 이 영화의 특이성을 구축한다. 영화는 또 패전 앞에서 항복보다 집단자결을 강요당한 오키나와인, 전쟁 상황 속에서 조선인을 죽여야 했던 오키나와인 등 제국 일본에 대해 주변부적 위치에 존재해 온 오키나와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기록 없는 거주민으로 살아온 조선인 배봉기의 존재 앞에서 오키나와의 주변부화는 다시금 상대적인 것이 된다. 이 이중의 대상화, 타자화는 각자의 역사를 청취하는 일본인, 피해와 가해의 위치를 오가는 오키나와인과 카메라를 지닌 감독이라는 위치가 얽히면서 전후 냉전과 탈식민, 젠더의 문제들이 각각의 학문 분과에서 논할 사안이 아니라 한데 서로 연결된 결합물임을 보여준다.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2.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1991) 황민화라는 폭력 혹은 오키나와에서의 아리랑 박수남 감독의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은 일본에 잔류한 재일조선인들의 삶과 고통을 기록한 작품이다. 감독은 일본어와 한국어 어느 쪽의 언어로도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는 재일조선인들을 만나며, 글로는 이들의 표정과 감정을 담아낼 수 없음을 절감한다. 그래서 영상으로 이들의 한을 기록하기로 결심하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 앞서 만든 박수남의 데뷔작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는 히로시마의 조선인 원폭 피해자를 인터뷰해 그들의 고통과 상처를 담아냈다.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은 데뷔작에 이어 오키나와의 강제동원을 다룬 두 번째 작품이다. 영화는 모두 강제동원된 조선인이라는 결과에 수렴하나 오는 길은 저마다 달랐음을 보여준다. 누구는 징병으로, 누구는 노동력으로, 또 누구는 성노예의 형태로 끌려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소재는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피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들어 기록하고, 그 피해를 식민지배국 일본과 일본인의 착취 구조가 가져온 결과임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다뤄져 왔다. 그랬을 때 가해국 일본과 피해국 조선 사이의 입장을 명확한 구분하면서 그 차이를 극대화해 드러내는 담론적 장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입장은 일본(인)의 가해 행위와 그 가해 행위를 불러온 구조가 낳은 결과의 총합이고, 이로 인해 조선(인)이라는 존재의 속성, 주체와 행위자로서의 조선인을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박수남 감독이 본 오키나와의 조선인에게 가해진 착취는 천황제 아래 모든 인간을 황민화하려는 동원 체제의 결과였다. 조선인에게 가해졌던 동원과 착취는 그보다 40년 앞서 일본에 병합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도 드리워져 있었다. 박 감독은 강도는 다를지라도 인격을 살해할 정도의 강력한 피해, 혹은 강력한 폭력을 통한 융합을 주장하는 사건의 진원지는 천황제의 황민화 교육임을 기어이 들춰낸다. 영화는 중반에 이르기까지 황민화 교육이 한국인의 정신에 새긴 성공적 결과들을 전시한다. 이후 황민화 교육의 동원과 착취의 가장 바깥에서 커다란 피해를 입은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등장한다.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은 황민화에 기반한 동원이 일본인, 오키나와인, 조선인, 그리고 조선의 여성들 모두를 대상으로 삼아 서로를 타자화하도록 만들면서 확산되어갔음을 보여주고, 한편으로는 그 상호적 대상화와 타자화 과정마저 평등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고발한다.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3. <50년의 침묵> (1994) 침묵 너머의 연대 얀 루프 오헤른의 삶과 용기를 담은 <50년의 침묵>은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네덜란드 여성 오헤른이 50년간의 침묵을 깨고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1923년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태어난 오헤른은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에게 1944년 강제 연행을 당한다. 오헤른은 당시 연행된 200~300명에 이르는 '위안소' 성노예 여성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약 석 달 가량 붙잡혀 있었고, 약 50년간 그 누구도 오헤른의 피해를 입에 올리지 않았기에 이야기는 묻혀져 있었다. 그러다 1991년 김학순이 미디어 앞에서 최초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히고 나섰다. 이 증언은 전 세계의 뉴스 채널에 보도되었고, 이를 보고 용기를 얻은 오헤른은 피해 증언에 참여하기로 한다. 1992년 12월, 남북한, 중국, 필리핀, 대만, 네덜란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함께하는 역사적인 국제 공청회가 일본 도쿄에서 열리게 된다. 이 다큐멘터리는 오헤른이 50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입을 떼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 초반에는 오헤른이 대가족과 함께 보낸 행복한 어린 시절, 여름에 할아버지의 리조트에서 보낸 즐거운 기억 등이 홈무비 장면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따뜻한 추억의 순간 뒤로 이어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은 관객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온다. 나아가 영화는 오헤른이라는 한 인물의 용기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증언에 용기를 얻은 다른 네덜란드 여성들이 피해 증언에 나서며 연대를 이루는 과정까지 담고 있다. 오헤른은 이후로도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전쟁 성폭력 반대 운동에 나서며 활발히 활동한다. 2007년에는 한국 영화 <아이캔 스피크>의 모티브가 된 미의회 하원의 청문회에 이용수와 함께 증언하기도 했다. <50년의 침묵>은 공개된 증언의 힘과 피해자 간의 연대, '위안부' 문제가 국가와 민족적 대립의 단위를 탈피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1990년대에 제작된 이 영화들은 '위안부' 문제를 사회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초기의 혼란과 다양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각 영화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며, 그들의 고통과 용기를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입을 떼다'라는 제목 아래 마련한 상영작들은 당시 영화들이 어떻게 '위안부' 문제를 조망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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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안해룡, 이토 타카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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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안해룡, 이토 타카시 인터뷰 남과 북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함께 만나는 사진전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가 3월 6일부터 11일까지 여성가족부 지원,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주최로 인사아트센터 제2전시장에서 열렸다. 사진전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에서는 북측에서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리경생(1917~2004)을 비롯하여 김대일(1916~2005), 곽금녀(1924~2007) 등 14명과 김복동(1926~2019), 황금주(1922~2013), 윤두리(1928~2009) 등 남측 피해자 10명의 사진과 증언이 전시되었다. 일본의 포토 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伊藤孝司)가 북측을, 다큐멘타리 감독 안해룡이 남측 피해 생존자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1991년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김학순이 기자회견에서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임을 증언한 이래 남과 북의 ‘위안부’ 피해자를 기록한 사진이 한 자리에서 전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북측 피해자 사진이 전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는 것은 최초이다. 아래의 인터뷰는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전시와 관련하여 전시 전 안해룡 감독과 이토 타카시 작가가 이메일로 나눈 서면 인터뷰로, 이토 타카시 작가가 어떻게 북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담고 있다. 안해룡 조선인의 강제동원이나 군인, 군속,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에 관해서는 어떻게 취재하기 시작하셨나요? 이토 다카시 저는 처음에 원폭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가졌어요. 처음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본인 원폭피해자를 취재하다가 조선인도 피폭을 당했다는 걸 알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몇 번이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갔었지만 조선인 원폭피해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어요.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이 문제는 반드시 취재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인 원폭피해자를 처음에 취재했고, 한국에 가서도 원폭피해자를 만났습니다. 이 취재 때문에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안해룡 그러면 한국인 원폭피해자 이후에는 어떤 취재를 하셨나요? 이토 다카시 원폭피해자를 취재하면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힘든 고통을 겪은 한국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한국인들을 취재하고, 이후 이런 인연으로 강제동원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국에도 자주 가게 되었지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취재하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1991년 10월에 처음으로 실명으로 일본군‘위안부’의 피해를 실명으로 증언한 김학순 씨를 만났습니다. 이것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1991년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문스크랩을 하면서 취재를 계속했습니다. 안해룡 북한까지 방문해서 취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을 가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한국에서는 강제동원 피해자, 군인 군속,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여성들을 취재했고, 한국 이외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를 돌며 일본에 의한 전쟁 피해자들을 취재했습니다. 그런 곳도 취재를 해서,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계속해서 전부 다 취재했어요. 유일하게 가지 못했던 곳이 북한이었어요. 1991년에 신청을 해서 이듬해인 1992년에 강제연행 등을 조사하는 그룹이 북한에 간다고 해서, 거기에 참가해서 처음으로 갔어요. 강제동원 피해자를 비롯해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10명 정도를 만났습니다. 너무 짧은 시간밖에는 취재를 할 수가 없어서 저는 전혀 만족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취재를 하고 싶어서 처음으로 단독으로 간 것이 1998년이에요. 안해룡 두 번째 방북을 해서는 어떤 취재를 하셨나요? 이토 다카시 평양과 원산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그리고 강제동원 되었던 사람들, 그리고 군인 군속으로 전선에 끌려간 사람들, 종교탄압을 받은 불교도, 기독교들을 취재했어요. 안해룡 취재 때 가장 인상에 남은 사람이나 장소는 어딘가요? 이토 다카시 그때 가장 많이 만난 것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인데요. 그녀들도 해방 후에 일본인과 얼굴을 마주하고 만난 일이 거의 없었어요. 몇 십 년 만에 만난 일본인인 저에 대해서 자신의 원한을 굉장히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일본인이라는 것과 남자라는 것을 심하게 추궁했는데요. 남성인 저에게는 굉장히 괴로운, 듣다 보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걸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취재를 했지만 굉장히 괴로운 취재였어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북한 정부 관계자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피해자들과 일상적으로 만나던 북한 정부기관 관계들이 통역을 해주었는데요. 가끔 여성이 통역을 해주는 경우가 있었어요. 할머니들의 비참한 경험을 듣고 저에게 통역을 해주면서도 그녀 자신이 진심으로 느끼는 슬픔과 분노가 저에게 전해졌어요. 통역자 본인의 감정도 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피해자 본인뿐만이 아니라 젊은 세대 여성들도 그것에 대해서 굉장한 비참함을 느낀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요. 안해룡 북한의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났을 때 한국의 피해자들과 다른 점이 있었나요? 이토 다카시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북한의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특별히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일본군에 의해 끌려간 지역이 한국과 북한의 피해자들이 미묘하게 달랐어요. 북한의 피해자들은 만주나 중국 대륙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한국의 피해자들은 대만이나 미얀마 등 남쪽으로 끌려간 경우가 많지요. 안해룡 북한에서 만났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가운데 인상이 남는 분이 계신가요? 이토 다카시 1998년에 만난 정옥순 할머니입니다. 처음에 만난 그녀는 머리에 베일을 쓰고 있었어요. 굉장히 멋쟁이 할머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머리에 있는 상처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어요. 일본군이 그녀의 몸 전체에 문신을 새겼어요. 다른 여성들과 함께 위안소에서 도망치려다 들켜서 군인들이 몸에 문신을 새긴 거예요. 가슴과 배, 그리고 입 안까지 아이가 낙서를 한 것 같은, 무얼 새겼는지 알 수 없는 문신이었어요. 그녀는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자신의 혹독한 경험을 내게 남김 없이 털어놓았어요. 들으면서 말이 나오질 않았어요. 그녀는 눈앞에 있는 일본인인 저를 향해서 자신의 원한을 풀듯이 이야기를 했고, 중간에 일어서서 저에게 다가왔어요. 저로서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제 눈앞에서 하는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녀의 고통이 정말 절실히 전해져왔습니다. 정말 괴로운 취재였어요. 그녀들이 얼마나 참혹한 경험을 했는지 정말 가슴속에 새겨졌다고 할까요? 그런 취재가 되었어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취재한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피해를 당했지만, 이 가운데 할머니들이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피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실체란 어떤 것인가?’라는 것을 아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어요.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매우 비인도적이고 잔인했다는 것이 그녀들이 받은 피해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안해룡 북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모두 몇 분을 만나셨나요? 이토 다카시 1992년에 처음으로 4분의 할머니들을 만났고 그 후 모두 14명의 할머니들을 만났어요. 안해룡 지금도 생존하고 계신 할머니들이 있나요? 이토 다카시 2017년에 취재를 하러 갔을 때 만날 수 없을까 요청했어요. 하지만 제가 만났던 14명 중 13명이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고, 나머지 한 분도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만날 수가 없었어요. 안해룡 여러 차례 한국과 북한에 가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취재해오셨는데, 오랜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이토 다카시 한국이나 북한의 피해 할머니들이 처음에 저를 대할 때 굉장히 경계를 했어요. 이는 일본인 남자가 인터뷰를 하러 왔기 때문에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에게 물건을 던진 할머니도 있었고, 저에게 역으로 질문한 할머니도 있었어요. 자신이 생각하는 일본에 대한 비판 같은 것을 이야기 하면서, 저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제가 인터뷰를 당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어요. 몇 번이나 만나서 얘기를 하는 가운데 신뢰관계가 생겨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어요. 저도 그녀들과 진심으로 마주 대하고 인간끼리 정면으로 부딪쳐서 서로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관계가 만들어지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입장이 있지만 사람 사이에서 정말 마음을 서로 나눈 것 같았어요. 이분들이 잇달아 돌아가시고 있는 것이 괴롭습니다.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를 만나는 과정에서 느낀 점이 있다면? 이토 다카시 역시 그녀들, 할머니들이 당한 피해는 너무나 심각했어요. 예를 들어 전후 해방 후에 육체적으로 입은 상처 때문에 결혼을 포기했다는 사람도 있고, 결혼한 경우에도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편에게 두들겨 맞는 경우도 있어서 계속 과거의 경험을 숨겨왔다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실제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도 많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정도로 심각한, 말도 안 되는 피해를 당한 사람이 역시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안해룡 북한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일본과 어떻게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토 다카시 일본과 북한 사이에는 국교가 단절되어서 국교정상화 회담을 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도 대화를 하려고 하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처럼 북일 관계가 악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피해자에 대한 논의가 실제로 이루어질지는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예요. 저는 피해자들이 모두 돌아가신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저질러진 매우 중대한 일본의 범죄가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이 범죄 행위에 대해 일본이 명확하게 청산을 하지 않는 한, 이 피해를 당한 사람, 가족,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서 계속 비판할 것이고, 이는 다음 세대까지 계승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일본이 과거에 대해서 명확하게 청산을 하지 않으면 이것은 일본의 미래에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취재를 이렇게까지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토 다카시 일본 내에서도 저처럼 이렇게 일본의 과거의 가해를 계속 기록하는 것이 지극히 보기 드문 존재가 되었어요. 일본 사회가 더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한국의 피폭자와 처음 만난 뒤 계속 이 문제를 취재를 해왔는데요. 그 만남이 없었다면 저도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하나의 운명과 같다는 생각도 들고. ‘일본 내에서 저 혼자일지라도 일본의 가해에 대해서 정면으로 마주보고 확실하게 기록하는 저널리스트가 있어도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도 있구요. 이렇게 취재한 것이 제대로 된 기록으로 남아서 한국이나 북한, 아시아에서 피해를 당한 나라의 사람들과 제가 취재한 내용이 공유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글/번역 안해룡 행사개요 제목 사진전 <남과 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일시 2019년 3월 6일(수)~3월 11일(월) 장소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 제2전시장 주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주관 아시아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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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가와타 후미코와 나의 접점을 되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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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일 논픽션 작가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 씨(이하 가와타)가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대표작을 묻자 그는 『빨간 기와집: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1987년/가와타 후미코 지음, 오근영 옮김, 꿈교출판사, 2014)를 말했다고 한다. 이 책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이하 전쟁, 전후, 전전 등에서 가리키는 전쟁은 모두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의미함) 때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군‘위안부’로 오키나와에 끌려간 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키나와에서 살아야 했던 고(故) 배봉기(향년 77세) 씨의 생애를 정성껏 취재해 쓴 장편이다. 가와타는 오랜 세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취재를 거듭하는 동시에 ‘전후 보상 실현 시민 기금’ 공동대표나 아시아 각지의 위안소를 조사한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 센터’ 공동대표, ‘재일 ‘위안부’재판을 지지하는 모임’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며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강연회나 심포지엄이 아닌 가와타와 나의 접점은 두 번에 그친다. 첫 번째는 1997년경 내가 진행하던 일본군‘위안부’ 문제 수업을 가와타가 취재해 이듬해 『수업 종군 ‘위안부’: 역사교육과 성교육으로서의 접근법』1에 실어준 것이다. 이 책 속에는 15명의 중·고교 교사들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수업 실천이 담겨 있다. 나의 실천은 〈평화학습과 성교육을 거듭하는 가운데〉라는 주제로 소개되어 있다. 나는 히로시마 교사로서 히로시마가 경험한 전쟁의 피해와 가해 측면을 객관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중시했다. 히로시마를 인류 최초 원폭 피해지로 삼아 전쟁의 참혹함과 핵무기의 무서움을 학생들이 인식하도록 하는 동시에 아시아 침략 거점이었던 군도 히로시마의 역사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사회과 수업으로 역사를 공부하는데 그 이외에도 홈룸 수업2 등을 통해 1학년은 일본과 코리아3의 역사를, 2학년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3학년은 현재의 민족차별 문제를 공부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내가 근무했던 중학교의 성교육은 학교 전체에서 행하는 강연회나 담임 교사들의 홈룸 수업으로 진행됐고, 나는 보건체육과 교사로서 보건수업에 임하며 인권이 바탕에 놓인 성교육을 했다.4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3학년 마지막 보건수업 때 언급했다. 학생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려면 그동안의 성교육 쌓기가 중요하다. 1학년 때는 교과서를 중심으로 2차성징을, 2학년 때는 성교·임신·출산을, 3학년 때는 낙태·피임·성감염증·문화와 성 그리고 성폭력·성과 전쟁에 관해 가르쳤다. ‘위안부’ 수업에서는 주로 한국 피해자들이 그린 그림을 교재로 사용했다. 내가 할머니들과 교류하면서 접한 그림에 그들의 실화를 얹어 교재를 만들어 수업 때 이야기했다. 가와타가 편집한 책에는 “나는 수업 후 학생들의 반응을 보고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진실만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 지금 다시 읽으면, 그런 점이 논픽션 작가 가와타의 눈에 띈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두 번째 접점은 직접적인 만남이 아니라 가와타와 내가 서로 다른 시기에 동일 인물을 인터뷰하며 생긴다. 나는 2004년쯤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마르디엠 씨를 만났다. 그는 날씬하고 자세가 좋은 사람이었다. 마르디엠 씨는 1942년 5월경 일본인들에게 속아 칼리만탄(보르네오)의 반젤머신(Banjarmasin) 교외 트라완(Telawang) 위안소로 끌려가 ‘위안부’가 됐다. 내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것은 치카타라는 위안소 관리인이 ‘위안부’들에게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던 이야기다. 위안소에서 치카타의 폭력으로 여성이 죽었을 때 마르디엠 씨와 ‘위안부’ 피해자들은 항의의 뜻으로 친구의 시신을 일부러 치카타에게 보이고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가와타는 나보다 더 먼저 1995년 가을에 ‘전후 보상 실현 시민 기금’의 조사단으로서 인도네시아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청취 조사를 실시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1992년경부터 일본군‘위안부’ 관련 보도가 나오기 시작해, 일본의 변호사나 시민단체들의 조사로 이어지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커밍아웃이 증가해, 가와타 등이 조사한 시기에는 6500명을 넘었다.5 마르디엠 씨가 사는 욕야카르타의 LBH(법률부조협회)에는 약 420명의 ‘위안부’ 조서(본인의 등록에 의함)가 작성됐다. 그 무렵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 인도네시아 정부는 개인에게 배상하는 대신 3억8000만엔(약 90억 루피아)을 양로원 건립비로 충당했다. 마르디엠 씨는 이런 방식을 거절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호소했다. 가와타는 마르디엠 씨가 말한 위안소에서의 ‘슬픈 두 가지 기억’-초경도 없던 13세의 몸으로 첫날 6명의 일본 병사들로부터 강간당했을 때의 출혈과 참을 수 없는 통증, 임신이 알려지자 마취 없이 낙태 수술을 받게 됐을 때의 격통과 아기에게 마리티야마라는 이름을 붙여 매장한 것-을 소개했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 마르디엠 씨가 일상에서 겪은 일들도 듣게 된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남편의 유족연금을 받으러 갔을 때 차례를 기다리던 수급자들이 마르디엠 씨를 가리키며 ‘일본 매춘부’라고 욕한 일이라든지, 일본 장교의 현지 처였던 여성이 낳은 아이는 ‘일본인의 아이’라며 주위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된 사실도 소개하고 있다. 마르디엠 씨의 증언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이후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멸시와 냉대의 대상으로 여겨졌음을 말해준다. 가와타는 그저 보도하기 위해 취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다가가 그 마음을 대변하려고 했다. 공감하려는 자세가 있었기에 당사자들이 마음을 열고 힘들었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가와타는 당사자의 인생과 그와 관련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부상시켜 갔다. 가와타는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치쿠마쇼보(筑摩書房), 1993, 한국어 번역본 없음)에서 재일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인 송신도 씨의 피해 경험과 전후의 보다 무거운 삶을 그려냄으로써 일본 사회의 성차별과 민족차별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싸우는 생존자들의 용기와 삶의 태도의 숭고함이 전해진다.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였던 배봉기 씨의 증언 기록에는 오키나와전에 휩쓸린 주민 ‘집단 자결’(집단 강제사)과 배봉기 씨가 본 돌격대의 모습도 소개된다. 웹진 〈결〉에 실린 “역사적인 가해와 피해를 큰 틀에서 말한다면 배봉기 씨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피해를 매우 가혹하게 받고 도카시키에까지 왔다. 이러한 배봉기 씨가 234고지를 다시 찾아가 가해자인 일본군의 죽음을 애도하고 명복을 빈 것이다.”(가와타 후미코, 배봉기 이야기 - “그 전쟁 속에서 용케 살아남았어.”, 2020.11.17)라는 글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 또한 전쟁이라는 국가폭력 틀 속에 위치시켜 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던진다. 90년대에 내가 실천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수업에서 이러한 시각은 약했다. 여성 인권 문제로서 비인도적 사실만을 강조하는 수업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학생들의 반응을 보면서 나는 이 수업을 가해자인 일본 병사들을 전쟁이라는 국가폭력 아래 놓인 존재로, 즉 구조적 관계 속에서 볼 필요성 또한 있다는 내용을 더해 바꿔 나갔다. 가와타의 작품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나에게는 인도네시아에 사는 손자가 두 명 있다. 그래서 마르디엠 씨 일을 포함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알려주고자 한다. 내가 재학 중인 성공회대의 친구가 배봉기 씨 연구로 4월에 가와타를 인터뷰할 계획이었다. 입원 중이었던 가와타는 “한국의 학생이 올 거니까 병원에서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보고 들은 진실을 젊은 연구자에게 반드시 전하고 싶다는 가와타 후미코의 저널리스트로서의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 각주 1. 川田文子(편집), 『授業 「従軍慰安婦」-歴史教育と性教育からのアプローチ』, 教育資料出版社, 1998. 2. 민주적인 반을 만들기 위해 학급 담임 교사가 담당하는 수업. 3.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총칭으로 사용함. 4. 일본 중·고등학교에서는 보건체육과 교사가 보건수업도 한다. 중학교의 경우 연간 35시간이다. 5. 1995년 8월~1996년 11월 '전 병보 연락중앙협의회'(일본군 보조병으로 일한 인도네시아 병보들이 전시 중 강제로 공제 적금된 급료의 환불을 요구하는 단체)에 등록한 피해 여성 수는 인도네시아 전국에서 19,573명. 일본 장교의 현지 처와 일본군으로부터 강간당한 피해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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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1부〉 -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하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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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하는 문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하면 일본군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잔혹한 폭행을 당한 무구한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이러한 피해가 빈번히 일어난 곳 중 하나는 당시 전쟁터였던 중국이다. 일본군은 전쟁 중 중국 여성에 대해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다. 전쟁터와 점령지, 도시와 농촌에서 공공연하게 여성을 끌고 가 성적 유린을 자행했다. 지금까지 발표된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에는 허우둥어(侯冬娥, 1921년생)라는 분이 있다. 허우둥어는 가이산시(蓋山西)로 유명한데, 가이산시는 산시성(山西省) 최고의 미인이라는 의미다. 그녀에 대해서는 단행본과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와 있는데, 잔혹하게 피해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보여주는 모습이 잘 담겨 있다. 그녀는 중국에서 최초로 일본 정부를 제소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허우둥어를 비롯한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몇 명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허우둥어(侯冬娥), 류멘환(劉面換) 완아이화(万愛花) 1938~1939년 사이에 산시성 위현(盂縣) 주변이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허우둥어가 살던 지역까지 점령되었던 것은 1941년 가을 경이었다. 1942년 여름 무렵, 일본군이 촌장의 딸을 끌고 가려고 하자 촌장은 일본군에게 딸 대신 당시 미인으로 이름 높았던 가이산시(허우둥어)를 데려가라고 말한다. 그렇게 끌려간 허우둥어는 일본군의 모진 폭력으로 몸이 완전히 망가지게 되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함께 끌려갔던 어린 여성을 대신하여 일본군의 폭력을 견뎌주었다는 다른 피해자의 증언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당찬 여성이었다. 일본군에 끌려가기 전 그녀는 마을 최초로 공산당원이 된 여성이었으며, 부인 구국회 회장 등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중국에서 벌어진 잦은 정치 운동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끌려간 사실이 문제가 되어 당원자격을 박탈당했다. 허우둥어는 그 충격으로 자살 미수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94년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그녀의 삶은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죽기 얼마 전에는 과거 피해를 함께 입었던 분을 찾아가 “우리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몇 번씩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류멘환(劉面換, 1927년생)은 15세 때 한간이 된 마을 사람이 무장한 일본군 3명을 데리고 집으로 들이닥쳐 어딘가로 끌려갔다. 모진 성폭력을 당한 후 부모님이 마련한 재물을 괴뢰정부(유지회)에 바치고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풀려난 후에는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쏟아졌고,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괴로워했으며, 결혼 후 자녀들에게 심한 폭력을 휘두르는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을 겪었다. 그녀는 “일본군은 내 일생의 재난을 만들었다”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피해자인 완아이화(万愛花, 1930년생)는 14살이었던 1942년에 공산당원이 되어 항일사업, 선전과 군화 만들기 등 공산당 아동 당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활동 기간이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았던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약 4년에 걸쳐 한간과 일본군에 의해 몇 차례에 걸쳐 특정 장소에 끌려가 심한 고문과 성폭력의 수난을 겪게 된다. 그녀의 입에서 공산당원의 이름이 나오게 하는 것이 고문의 목적이었다고 한다. 완아이화는 일본군으로부터 풀려난 후 양녀를 얻어 이곳저곳을 떠돌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녀는 허우둥어와 함께 처음으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소하였으며, 2000년 11월에 도쿄지방재판소 소송에서 본인 심문을 받았다.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 난얼푸(南二僕), 위안주린(袁竹林) 린야진(林亞金) 난얼푸(南二僕, 1912년생)는 1942년 봄 집으로 들이닥친 일본군들에 의해 일본군 거점으로 끌려가 일본군 소대장에게 1년 8개월 정도 지속해서 폭력을 당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일본군과 오래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기도 하였다. 풀려난 후에도 낙인은 사라지지 않아 사회적 압력으로 괴로워하다가 자살하였다. 살아있을 적 그녀는 항상 ‘일본 놈’들의 악행에 관해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위안주린(袁竹林, 1922년생)은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사람인데, 세탁일로 간신히 연명하며 살고 있었지만, 아이도 제대로 먹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여성이었다. 1940년 봄, 장슈잉(張秀英)이라는 여자가 여관의 청소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집에 응하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관우 사당을 ‘위안소’로 개조하여 만든 곳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마사코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신체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배분받은 7평 정도의 그녀의 방 앞엔 일본식 이름이 적힌 명패가 걸렸다. 위안주린은 일본군의 성적 유린을 견뎌야만 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8살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위안주린은 어머니와 함께 우한 근처의 산간마을에서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마을에서 열린 정치집회에서 딸이 일본인에게 강간을 당한 비참한 경력을 이야기한 것이 그들의 생활에 큰 화를 불러왔다. 사회적, 정치적 박해를 받으며 오지로 쫓겨가 오랜 시간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녀는 “나의 고통은 일본인이 돈으로 배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결백과 사과를 요구한다”고 말하였다. 린야진(林亞金, 1924년생)은 하이난성(海南省) 바오팅현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일본군이 바오팅현 인접 지역인 산야를 점령하였다. 1940년 산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파견대가 바오팅현에 침입해 병영을 세웠다. 1943년 10월경 린야진은 여성 4명과 함께 벼를 베고 있다가 무장한 일본군들에 의해 거점으로 끌려갔다. 그녀들은 ‘이상한 건물’에 갇혔는데, 대문으로 들어가 각각 작은 방에 갇혔다고 한다. 매번 유린을 당한 후 규정에 따라 반드시 하반신을 씻어야 했다. 일본인은 그녀들에게 약을 먹도록 강요했다. 약은 흰색과 빨간색으로 납작하고 새끼손가락 손톱만 한 크기였다. 평소 건물 대문은 항상 일본군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함께 붙잡힌 4명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가족들이 음식물을 보내고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모진 폭력으로 3명 모두 사망하였으나 린야진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린야진은 문화대혁명 시기 ‘일본 창녀’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린야진은 “나는 일본인을 증오한다. 꼭 일본인이 사죄하고 배상하도록 하겠다. 지금 나는 늙어 일도 못 하고 있다. 아직도 이 모욕을 당하고 있다.”라고 반복적으로 작은 소리로 말하곤 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피해를 입은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연구를 대표하는 수즈량은 일본군이 중국에서 ‘위안부’를 충당한 방식에 대해서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 번째 전쟁터와 점령지 도시와 농촌에서 공개적이고 폭력적으로 여성을 끌고 간 경우. 두 번째, 여종업원과 세탁부를 구한다는 명목의 속임수. 세 번째, 점령지의 형세가 안정되면 유지회(괴뢰정부)를 통해 모집. 네 번째, 여성 포로로 잡힌 여성을 활용. 마지막으로 대도시에서 일본군과 괴뢰정권이 기존 창기를 활용하였다. 앞에서 소개한 피해자들을 이 범주에 굳이 맞추어 본다면, 첫 번째 방식에 허우둥어, 류멘환, 린야진, 난얼푸가 해당되고, 두 번째 업자(장슈잉)의 속임수로 인한 피해자가 위안주린, 그리고 네 번째, 여성 포로에 해당하는 경우가 완아이화이다. 창기에서 피해자가 되었다는 분은 일본인 피해자 중에는 존재하지만, 아직 중국인 피해자 구술에서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창기였다가 피해자가 된 분이 피해를 밝히고 나오기는 어디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유지회, 한간 등이 어떤 방식으로든 피해자들의 피해에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피해자들의 구술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피해자들의 피해 실태를 무례를 무릅쓰고 정리하다 보면 일본군이 침략을 자행해가는 과정에서 행한 여성들에 대한 폭력의 어떤 양상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일본군은 전쟁터에서 여성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을 군인들에게 ‘위안품’으로 제공하여 ‘위안소’(강간 캠프)에서 지속적으로 폭력을 자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가 일단락되고 유지회(괴뢰정부)가 들어서면 ‘위안품=여성’의 공급을 그들에게 위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안주린의 경우처럼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가 전면에 드러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본군이 업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산시는 치열한 전쟁터가 된 지역이었기에 전시 강간과 유사한 피해자가 많다. 위안주린은 우한이라는 도회지와 가까운 곳에서 취업 사기로 피해자가 되었다. 중국의 전시 강간 피해자 중에는 ‘위안소’에서 조선 여성을 목격했다고 증언하는 이도 있다. 조선 여성들이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으로 끌려가 중국의 피해 여성들과 조우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이 문제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일본군은 군대의 이동에 ‘위안소’를 대동했는데, 전시 강간 억제가 이러한 조치 요인의 하나였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위 피해자들의 상황을 보면 전시 강간과 ‘위안소’의 경계를 가르기 쉽지 않다. 단지 전쟁 수행을 위해 일본 군인들에게 여성을 ‘위안품’으로 제공한다(받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이, 작동하는 권력의 차이에 따라서 폭력의 양상을 달리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경계의 모호성은 ‘상업적’ 조건을 갖추면 면책될 수 있다는 일본 우익의 주장이 얼마나 철학적으로 빈곤한가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중국의 피해자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피해의 내용을 너무도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먼 곳으로 끌려가 피해를 입은 조선의 피해자들과는 또 다른 2차 피해를 겪었다는 것을 피해자들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창기 해방사업을 통해 실제로 성매매시장을 없앴다. 성매매시장은 사라졌지만, 창기에 대한 ‘오욕’은 온존하였다. 더구나 피해자들에 대한 적의 유린이 창기로 뒤바뀌어 그 오욕이 더욱더 깊게 새겨졌다. 위에 소개한 피해자들은 모두 전후 중국에서 일어난 정치 운동 속에서 ‘일본 창녀’, ‘역사적 반혁명’, ‘마을의 창피’라는 비난과 질시를 견뎌야 했다.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들이 전후 처한 상황을 시야에 넣게 되면 이 문제를 사유하는 것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일본제국주의가 벌인 전쟁과 그 전쟁에서 혹독한 피해를 입은 여성들, 즉 가해와 피해로 전선을 나누면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이라는 요구가 도출된다. 그런데 다른 각도에서 피해자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전후 피해자들이 처한 위치를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 읽으면 사회적 약자의 싸움이 얼마나 지난한지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 문제를 통한 사유의 사정거리는 어디까지일까? 그것을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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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도미야마 다에코의 예술-운동: 비/인간 존재의 ‘포스트 메모리’를 기다리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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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와 동시대인의 죽음 앞에서 외할머니의 100살 생신에 다녀왔다. “내가 100살이래”라며 환하게 웃으시는데, 한 세기를 살아낸 그 작고 늙은 몸이 부러워졌다. 그러다 문득, 1922년생이면 일본군‘위안부’나 근로정신대로 끌려갈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최근 2~3년간 ‘위안부’ 생존자만이 아니라,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분들도 세상을 떠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세기의 저물어감이란, 당사자뿐 아니라 당사자와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려 했던 동시대인들의 죽음과 함께이다. ‘위안부’로 끌려가기 직전 도망쳤던 경험을 지니고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활동을 펼쳐 온 윤정옥은 1925년생이고[1], 윤정옥과 함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만들었던 여성학자 이효재는 1925년생으로 2020년에 세상을 떠났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위안부’의 모습을 기록해 온 재일조선인 박수남은 1935년생이다. 평생을 식민주의·전쟁·가부장제·자본주의와 대결하며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성)착취와 (성)폭력을 알리는 예술-운동을 펼쳐온 도미야마 다에코는 1921년생으로, 100세를 맞이한 2021년에 세상을 떴다. 그의 작업 전체상이 연세대학교 박물관의 〈기억의 바다로: 도미야마 다에코의 세계〉(2021년 3월 12일~6월 30일, 이후 8월 30일까지 연장)에서 소개되던 중이었다. 올해 5월, 1924년생인 김양주 님이 별세하면서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는 11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 트라우마적 경험은 세어질 수 없는 일생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그/녀들 주변에는 간발의 차이로 끌려가지 않았던 여성들, 위안소를 주변에서 목격했던 오키나와 주민들[2], 구조적 가해성을 깨닫고 ‘위안부’의 피해를 알리기 위한 예술 운동을 펼쳤던 도미야마 다에코와 같은 동시대인들의 세어질 수 없는 경험들도 있다. 김숨의 소설 『한 명』(현대문학, 2016)이 ‘위안부’ 경험을 증언할 당사자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는 것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그 경험을 한명 한명의 자리에서 어떠한 미래의 기억/기록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현재적 물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동시대인들과의 연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일본군‘위안부’의 증언과 경험에 대해서 여러 형태의 재현이 시도되고 있는 것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당사자성’에 시간, 공간, 존재의 이행을 삽입하는 것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피해를 직접 경험하지도, 당사자와 친밀하지도 않은 위치에서 ‘위안부’의 경험에 대한 포스트 메모리[3]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도미야마 다에코가 ‘위안부’의 삶에 공감하며 벌였던 예술-운동은, 당사자와 친밀한 관계가 없는 비체험자의 위치에서, 뒤늦게 당사자와 마주한 가해자의 위치에서 그 간극을 극복하고 연결되고자 형식과 내용을 혁신했던 과정이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당사자가 사라질 시대의 재현을 향해, 세 가지 물음을 던진다. #석판화와 슬라이드: 어둠을 표현하고 장르를 파격하고 운동을 촉발하다 첫 번째 물음. 새로운 기술과 형식의 도입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도미야마의 표현법은 당대의 문제와 첨예하게 싸운 결과물이다. 40년대에는 전쟁에 대한 거부를, 50년대에는 탄광 노동자의 투쟁을, 60년대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탈식민을 향한 몸짓을, 70년대에는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지지를, 80년대에는 광주의 들끓는 저항적 힘에 대한 공감을, 80~90년대에는 일본군‘위안부’의 고통을, 2000년대에는 911테러 속 지워진 팔레스타인 난민과 팔려 간 아시아 여성들을, 2010년대에는 3.11의 재난 속 ‘자연’의 모습을 그렸다. 메타포를 거부하는 이 예술-운동을 관통하는 것은, 1937년 하얼빈의 여학생 시절 마주했던 식민주의와 전쟁의 참혹함이다.[4] 거리에 굴러다니던 시체, 버려지고 팔리는 아이들, 매독으로 얼굴이 망가진 채 쓰레기 더미에서 자는 여성을 마주하며 등교했던 도미야마는, “이건 얼마나 어두운, 얼마나 깊은 어둠인가…”라고 전율했다.[5] 이 원체험은 1937년이란 시간, 하얼빈이란 공간, 개인화된 공포에 갇히지 않고, 식민주의·자본주의·전쟁·가부장제로 인한 폭력과 고통에 저항하는 사건과 마주할 때마다 떠올라 매 순간 변형되며, “포스트임페리얼/포스트콜로니얼한 상황”을 “마치 자기 일처럼 인식”할 수 있는 힘이 된다.[6] 석판화와 슬라이드는 바로 이러한 식민주의·자본주의·전쟁·가부장제로 인한 어둠과 슬픔을 담아내기 위해 고심한 기술이자 형식으로, 주류 미술계의 문법에 파격을 가했다. 먼저 석판화(Lithograph)를 보자. 도미야마는 일본인이라는 가해자의 위치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어둠과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석판화를 선택한다. 츠치모토 노리아키가 도미야마 다에코를 찍은 영화 〈튀어라 봉선화: 나의 지쿠호 나의 조선〉[7]은 “이 영화를 지쿠호 탄전과 그 땅 밑에 잠들어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에게 바친다”는 문구로 시작한다.(봉선화/00:10) 첫 장면에서 츠치모토는 도미야마에게 왜 그렇게 어둠에 천착하는가를 질문한다. 그러자 도미야마는 자신은 일본인이지만 식민지 전쟁 당시 만주와 조선에서 봤던 일본인들을 정말 증오했다고 말한다.(봉선화/01:10) 그리고 “어떤 조선인(某鮮人)”이라고 적힌, 탄광에서 사망한 무명의 조선인 유골과 만났을 때의 전율을 고백한다.[8] 그 유골 앞에서 화가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강제동원되어 지쿠호 탄광에 묻힌 조선인 광부들의 “깊은 고독과 한의 소리를 듣”고, “조선인의 뼈를 기리고 기억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9] 그러나 유화로는 이 짙은 어둠을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도미야마는 당시 미술계의 주류였던 유화를 버리고, 1971년 여름 석판화 기계를 주문한다.[10] 처음 탄광을 그리고자 했을 때는 말이죠, 유화로 그렸기 때문에 10년간 계속 실패했어요. 역시 그것을요 처음부터 흑백 리토그래프로 그렸더라면 더 많이 그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러한 검은색은 안 나오죠. 다른 것으로는요.(봉선화/7:00) 〈튀어라 봉선화〉에서 클로즈업되는 작품 〈땅 깊은 데서의 원한〉, 〈신세타령〉 연작, 〈지쿠호 탄전〉 연작, 〈남태평양 해저에서〉에는, 깊은 어둠 속에 묻힌 하얀 뼈나 해골이 두드러진다. 일본 내부에 불발탄처럼 숨어 있는 조선인의 뼈-가해의 증거-와 대면하면서 전후 일본의 번영이 어떤 고통 위에 세워진 것인지 드러낸다. 다음으로 슬라이드 작품을 보자. 슬라이드 형식은 김지하의 민주화 운동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중지당하자 모색된 것으로, 검열에 대한 저항을 계기로 품고 있다. 도미야마는 1975년 중반, 나카지마 마사아키 목사와 함께 ‘니혼 텔레비전’의 방송 프로그램 〈종교의 시간〉에서 “암흑 속 그리스교도 김지하[11]”를 기획하지만 “국제친선을 해친다”는 이유로 중지된다.[12] 그러자 방송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슬라이드를 만들고 영어판을 제작한다. 도미야마는 슬라이드가 “절절히 마음에 호소해 오는 독특한 미디어”였다고 말한다.[13] 이후 도미야마는 슬라이드 제작을 본격화하고, 1976년 이후 9개의 슬라이드 작품을 만든다. 음악, 미술, 영상이 어울어진 종합 예술인 슬라이드는 “미술관의 권위나 화랑 비즈니스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던 도미야마가 작품을 보여줄 장을 스스로 만들기 위해 생각해낸 기법”이었다.[14] 많은 작품을 30분 정도의 영상에 담아 쉽게 이동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슬라이드는 예술-운동에 적합한 미디어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기와라는 운동성뿐 아니라 표현적 급진성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5] 슬라이드를 제작할 때, 하나의 작품은 분절되고 콜라주 형태로 재구축된다. 이 과정에서 유화, 석판화, 실크 스크린, 콜라주, 설치미술 등 각 장르가 지닌 질감과 표현법이 뒤섞인다. 이는 미술의 장르적 권위에 저항하고, 예술 문법에 길들여진 시각에 파격을 선사한다. 특히 〈바다의 기억〉[16]은 슬라이드 제작과 상영과정 자체가 정치적 운동이자 예술적 파격이었고, 나아가 비가시화된 존재들을 위한 아카이브의 구축이었다. 슬라이드 〈바다의 기억〉은 도미야마의 일본군‘위안부’ 경험을 다룬 〈바다의 기억〉 유화 연작(〈먼 남쪽 나라 자바〉, 〈가룽간 제삿날 밤〉, 〈남태평양 해저에서〉)을 기반으로 한다. 이들 연작은 1987년 5월 말 극단 ‘68/71 쿠로이로 텐트’에 의해 〈바다 울고 꽃 밀려든다〉로 상연되고, 7월에는 다큐멘터리 〈바다 울고 꽃 밀려든다 - 쇼와 일본 여름〉으로 제작된다.[17] 다시 1988년 영국 런던의 개인전에 맞춰, 슬라이드 〈바다의 기억〉이 제작된다.[18] 그런데 도미야마가 ‘위안부’의 존재를 알고 <바다의 기억>을 제작하게 된 계기에는 〈튀어라 봉선화〉의 상영 운동이 있었다. 상영회에 온 많은 조선인 한국인들이 남방에 ‘위안부’로 끌려가 소식이 끊어진 친구의 이야기 등 강제동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19] 1987년 ‘쿠로이로 텐트’의 〈바다 울고 꽃 밀려든다〉 상연도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아카이빙하는 예술-운동의 성격이 명확하다. 1987년 당시, 거기에 온 젊은 여성 관객들은 위안부에 대해서 대부분 몰랐다. 조선인 강제연행으로 일본에 온 나이 든 재일조선인들은, 너무 고통으로 가득 찬 과거를 아이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한다. 하물며 위안부가 된 여성들은 더욱 과거를 봉인해 버렸다. 거기에 역사의 거대한 어둠이 있었다. 富山妙子, 위의 책, 2009, 208쪽 슬라이드 〈바다의 기억〉은 1989년 5월에는 베를린에서, 8월에는 리버티 오사카에서 연속하여 상영된다.[20] 예술과 정치의 접점에서 나타난 파격의 형식인 슬라이드, 그것은 상영되는 장소마다 풍부한 이야기, 급진적 표현, 정치적 운동성을 담고 변화한다. 이어지는 글>> 도미야마 다에코의 예술-운동: 비/인간 존재의 ‘포스트 메모리’를 기다리며 (2) 각주 ^ <국제법X위안부> 세미나에서 이지은 선생님의 발언을 통해 이 사실을 처음 접했고, 나아가 윤정옥의 위치성을 사유하게 되었다. ^ 洪玧伸, 『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 インパクト出版会, 2016. ^ 배주연, 「포스트메모리와 5.18-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을 중심으로」, 『서강인문논총』,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0.4, 12-15쪽; Marianne Hirsch, The Generation of Postmemory: Writing and Visual Culture After the Holocaust,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2012, p.5. ^ 富山妙子, 『アジアを抱く―画家人生 記憶と夢』, 岩波書店, 2009, ⅴ쪽. ^ 영상 <「금지된 이미지(禁じられたイメージ)」展>, 2015년 중 3분 37초. 이하 ‘금지/시간’으로 표기. ^ 마나베 유코, “도미야마 다에코란 누구인가”, 「경계를 넘는 화가-도미야마 다에코의 삶과 예술」,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학술행사 자료집, 2020년 11월, 18~19쪽 ^ 츠치모토 노리아키(土本典昭) 작, 〈튀어라 봉선화: 나의 지쿠호 나의 조선(はじけ鳳仙花 わが筑豊わが朝鮮)〉, 제작:幻燈社, 1984년작. 이하 이 영상에서의 인용은 ‘봉선화/시간’으로 표시. ^ 富山妙子, 앞의 책, 2009, 202쪽. ^ 富山妙子, 위의 책, 2009, 203쪽. ^ 富山妙子, わたしの解放, 筑摩書房, 1972, 334쪽. ^ 김지하는 민주화 운동의 대표에서 보수정권의 지지자로 급격하게 태도를 바꾸었다는 점에서 민주화 운동의 동력에 대한 성찰을 요청하게 하는 아이콘이다. 그러나 도미야마가 1970년대의 김지하의 민주화 운동에 촉발되어 벌였던 예술-운동의 의미는 현재의 김지하와 별도로 조명될 필요가 있다. ^ 富山妙子, 앞의 책, 2009, 172쪽. ^ 富山妙子, 위의 책, 2009, 172-173쪽. ^ 富山妙子, 「アジアの視座からー画家として女として」, 富山妙子、浜田和子、萩原弘子, 『美術史を解き放つ』, 時事通信社, 1994, 77쪽. ^ 하기와라 히로코, 「도미야마 다에코- 논의와 혁신을 만들어내는 예술가」, 연세대학교 박물관 편저, 『기억의 바다로: 도미야마 다에코의 세계』, (2021.3.12.~2021.6.30./8.31까지 연장),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148쪽. 이 단락의 설명은 이 페이지의 요약임. ^ 「바다의 기억(海の記憶)」(1988): 원화와 텍스트-도미야마 다에코, 음악- 다카하시 유지, 촬영-모토하시 세이이치, 조명-가토 스미히로, 영번역-더글라스 라미스, 제작-히다네 공방. 이하 이 영상에서의 인용은 ‘바다/시간’으로 기입. ^ 이미숙, 「경계를 넘는 연대와 재귀적 민주주의」, 『5.18과 이후: 발생, 감응, 확장』, 전남대학교 출판문화원, 2020, 196~197쪽. ^ 위의 글. ^ 富山妙子, 앞의 책, 2009, 207쪽 ^ 小林宏道編、「年報」、연세대학교 박물관 편저, 앞의 책, 210-2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