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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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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자 만들어진 <나눔의 집>은 1992년 개소 이래 ‘위안부’ 문제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정부에 등록된 생존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총 스무 분. <나눔의 집>에 거주하고 계신 할머니는 여섯 분. 안타깝지만 우리는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도 남지 않은 날을 준비해야만 한다. <나눔의 집> 역시 마찬가지다. <나눔의 집>이 앞으로도 후손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데 앞장서는 기관으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은 젊은 연구자임과 동시에 활동가다. 그를 만나 일을 통해 만났던 할머니들의 일상과 연구자 및 활동가로서 개인적인 목표, 그리고 <나눔의 집>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들어보았다. 김대월 학예실장.jpg 고대사 전공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나눔의 집에서 학예실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대월이라고 합니다. 박물관 전시 총괄, 할머니들 유품 보존관리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할머니의 내일 展> 전시 기획 총괄을 맡고 있고요,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과정 중입니다. Q. 나눔의 집에서 일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원래 전공은 고대사예요. 고대사를 주제로 석사까지 마치고 학원 쪽 일을 했었어요. 학원에서 7, 8년 정도 일을 하다 보니 강사라는 직업에 회의가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공부하려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일본군‘위안부’ 관련 수업을 듣게 되었어요. 사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대략적인 것만 알고 있었지, 깊이 알지는 못했거든요. 공부를 하다 보니 박사 논문 주제를 여성독립운동가 혹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생각을 할 때쯤 정말 우연히 <나눔의 집> 채용공고를 본 거예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넣어봤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 하더라고요. 그리고 일사천리로 이렇게 됐어요. Q. <나눔의 집>은 활동의 성격이 강한 곳이잖아요. 김대월 선생님 같은 연구자가 <나눔의 집>에서 일하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저도 합격하고 되게 의아했어요. 이 분야에서 활동한 경력이 거의 없잖아요. 그런데 들어와 보니까 그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나눔의 집>에 있으면 돈을 쓸 일이 없어요. 돈을 쓸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요. 그만큼 외진 곳에 있어요. 차가 없으면 출퇴근도 어렵죠. 그리고 <나눔의 집> 특성상 주말에 일해야 해요. 월급은 적고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굳이 오려고 하지 않죠. 면접 봤을 때 제 역량에 관한 질문보다 주말에 일을 할 수 있는지, 출퇴근은 잘 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근처에 방 하나 얻겠다고 했죠. (웃음) Q. 어려운 결정일 수도 있는데 비교적 쉽게 생각하셨네요? 저한텐 전혀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어요. 시골에서 사는 것도 좋아하고 낚시도 좋아하고 그래서요. <할머니의 내일 展> ‘퇴근’ 후 할머니의 일상을 보여주다 Q. <나눔의 집>에 입사하신 지 1년 남짓 만에 학예실장이 되어 전시총괄을 맡게 되셨는데요, 일하실 때 특별히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나요? 저는 전시와 진열은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전시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메시지 없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단순히 펼쳐놓는 것은 진열에 불과하죠. 기존 <나눔의 집>은 진열 위주였어요. 그래서 여러 번 건의를 했더니, ‘그럼 네가 해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하나둘 맡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요. Q. 전시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셨나요? 할머니를 피해자로만 보지 말자는 거예요. 인터넷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이름을 검색하면 할머니가 수요집회에 나온 모습, 힘차게 팔 휘두르는 모습, 그리고 할머니에게 망언했던 사람들… 그런 이미지들만 나와요. ‘출근’하셨을 때의 모습만 나오는 거죠. 그런데 저는 주로 ‘퇴근’했을 때의 모습을 보거든요. 제가 아는 할머니의 모습과 언론에 나오는 모습이 너무 다른 거죠. 그래서 ‘퇴근’했을 때의 할머니 모습도 사람들이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할머니들을 피해자로만 보지 말고 하나의 인간으로 봐달라는 거죠. 지금 전시하고 있는 <할머니의 내일 展>에서는 이런 점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가지고 있을 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게 전시의 모토예요. Q. 할머니들의 활동을 ‘출근’이라고 표현하셨는데, 특별히 그렇게 표현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수요집회를 나가시고, 인터뷰하는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인권활동가라는 직업으로서의 활동이 ‘출근’이라면, 그 밖의 모든 활동은 ‘퇴근’ 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일상을 보내세요. ‘출근’했을 때의 모습은 보통 할머니의 24시간 중에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근’했을 때의 모습만 보고 ‘퇴근’ 후의 모습은 보지 않죠. ‘퇴근’ 후의 할머니들의 일상은 다른 보통 할머니들과 똑같아요. 평소에는 저랑 고스톱도 치시고요, 과자 선물이 들어오면 서로 시샘도 하고 그래요. 어떤 할머니는 커스터드가 먹고 싶은데, 다른 할머니에게 드리면 화도 내시고 그러죠. 자기는 왜 안 주냐면서요. (웃음) ‘월’ 자 발음을 잘 못 하셔서 저를 “대열이~” 이렇게 부르시는데, 찾아가면 “아이스크림 좀 먹자” 그래요. 그럼 저는 “그래? 할머니, 그러면 한두 시쯤 나갈까?” 하고요. 저는 할머니들과 이런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출근’하는 모습만 본 사람들이 <나눔의 집>에 방문하면, ‘할머니 어떻게 그런 고생을 버티셨어요’ 하면서 펑펑 울고 가세요. 그러면 할머니도 의아해하죠. ‘쟤는 왜 울지?’ Q. <할머니의 내일 展>에서는 주로 ‘퇴근’ 후의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겠군요? 그렇죠.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만 기억되기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하나의 이웃으로, 사람으로 봐주길 원했어요. 다행히도 서울에서 전시했을 때 깜짝 놀랄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요. 전시에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할머니들을 피해자로만 기억해서 죄송해요’ 이런 말들이 쓰여 있더라고요. 블로그에도 전시 내용에 공감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올라왔어요. Q. 현재 독일에서도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네. 독일 베를린에서 전시를 하고 있어요. 코리아협의회라고 <나눔의 집>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독일의 시민단체가 있어요. 그 단체의 도움으로 독일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는데, 국내 전시 내용과는 조금 달라요. 독일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방향으로 전시를 구성했죠. 나치와는 어떤 점이 같고 또 다른지를 보여주고, 할머니들이 해방 이후 어떻게 생활하셨는지 그런 것들이요. 작은 전시장이라 사람이 별로 안 올 줄 알았는데 오프닝 때 100명 가까이 오셨어요. 전시장이 꽉 차서 밖에 줄을 설 정도였어요. 독일 사람들이 인권에 참 관심이 많다는 걸 느끼게 되었죠. 할머니의내일 리플렛.png 어제 없는 오늘 없고, 오늘 없는 내일이 없듯이 ‘내일’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를 통해 오늘을 보며 내일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나눔의 집>은 <할머니의 내일>을 통해 피해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할머니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할머니들은 항상 피해자라는 수식어와 함께 피해자로서의 모습만이 노출되어왔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할머니는 안타까움과 연민의 대상으로 기억될 뿐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기쁜 일에는 웃고, 슬픈 일에는 눈물을 보이며, 작은 일에도 토라지고 샘을 내는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다만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20년 넘게 할머니들이 생활해 오신 <나눔의 집>에는 할머니의 喜怒哀樂(희로애락)과 수많은 추억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나눔의 집>에서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할머니들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아닌 우리와 똑같은 사람임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할머니의 내일 展> 리플렛 내용 중 피해자로 박제될 수 없는 보통의 일상 Q.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의 평소 스케줄은 어떻게 되나요? 아침 식사하시고 직원들이랑 좀 노시고 프로그램도 하시고요. 외출 프로그램 있으신 할머니들은 외출하시고 병원 가실 할머니들은 병원 가시고 그래요. 점심시간 때 할머니 방에 가면 민원이 많으세요. 남대문시장에 가야 한다, 옷을 사야 한다, 그러면 체크해놨다가 스케줄 봐서 모시고 가요. 저는 사회복지를 전공하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꽃꽂이, 마늘 까기, 멸치 똥 따기, 이런 소소한 활동들이 할머니들의 활력을 더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에 이옥선 할머니는 김치도 직접 담그셨어요. 93세이신데요. 배추를 배차라고 하시는데, ‘배차를 소금에 절여라.’ 해서 소금에 절여드렸더니 ‘고춧가루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고추가루 사다 드리고. ‘기름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참기름, 들기름 사다 드리고. 할머니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하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저는 그걸 기록하는 일을 해요. 할머니가 남대문시장에 가면 옷 사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고 기록해서 서버에다가 ‘201X년 OO 할머니 남대문시장 나들이’ 폴더를 만들어서 저장하죠. 이런 일상의 모습들을 데이터베이스화 해놨다가 이번 <할머니의 내일 展> 전시에서 썼습니다. Q. 지적해주셨듯 할머니들은 증언 이후 줄곧 ‘출근’의 모습만 언론에 비춰짐으로써 그들 또한 보통의 사람이란 사실이 가려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본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의 개인적인 모습을 알리는 것을 내려놓으신 것 같기도 해요. 부산 이옥선 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통해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시는 것 같아요. 이옥선 할머니는 인터뷰를 하면 그다음 날에 컨디션이 좋아지세요. 반면에 속리산 할머니[1](대구 이옥선, 이하 ‘속리산 할머니’)같은 경우에는 나가서 쇼핑하셔야 힘이 나는 분이시고요. Q. 일상에서의 말투나 화법이 언론에서 인터뷰할 때와 차이가 있을까요? 똑같은 할머니도 있고요. 다른 할머니도 있고요. 이옥선 할머니가 두 분이 계시잖아요. 부산 출신 이옥선 할머니는 언론이 오면 좀 정제된 말투나 언어를 쓰시는데, 속리산 할머니는 평소랑 똑같이 말씀하세요. Q. 최근에 한일 간의 외교적 갈등이 심화되었잖아요. 최근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요? 알고 계세요. 뉴스를 보니까요. 평상시에 뉴스를 보면서 부산 이옥선 할머니는 아베 집안의 역사가 안 좋다고 말을 하세요. 12.28 합의를 한 박근혜 대통령도 안 좋아하시고요. 속리산 할머니는 일본은 안 될 나라라고 하세요. 전쟁이 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데, 갖가지 못된 방법으로 죽였다면서요. 그래서 그 죄가 있기 때문에 일본은 곧 망할 거다, 이런 식의 인식을 보이세요. Q. 최근에 소녀상을 테러한 한국 청년들이 <나눔의 집> 와서 반성도 하고 사죄도 하고 그랬는데, 화가 많이 나셨겠어요. 그때 영상공개를 아주 일부분만 했거든요. 속리산 할머니가 너무 화를 내셔서요. 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하면 되지, 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막상 그 사람들이 오니까 소리 지르시면서, “일본한테 돈 받고 하는 거냐, 돈도 안 받으면서 거기서 천왕 만세까지 외치냐. 이놈의 새끼들”이라고 하면서 지팡이 집어 던지시고 엄청 화를 내시더라고요. 부산 이옥선 할머니도 화가 많이 나셨어요. Q. 사과하러 왔던 사람들이 반성하긴 했나요? 네. 울기도 하고 자기도 할머니랑 자랐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면서 펑펑 울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그 중에 한 명은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랑 같이 왔어요.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후손이시래요. 그러니까 더 속상해하시면서 무릎 꿇고 자신의 잘못이라며 싹싹 빌었죠. 사과하러 오기 전에 확인 차원에서 제가 그 사람들을 따로 만났어요. 할머니들한테 무슨 위해를 가할지도 모르니까요.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이 사람들도 사회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회 인식이라든지 좀 달라요. 어느 사회에서도 자기들을 받아주지 않는 거죠. 친구도 많지 않고요. 그런데 극우 집회에 가면 자기들을 대우해 준다는 거예요. 자기가 뭔가 투사가 되는 것 같고. 그곳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자신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느끼는 거죠. 그러다 보니 인정받기 위해서 더 극한 발언과 행동을 하는 것 같다고 본인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우리 사회가 그들을 보듬어주지 않기 때문에 특정 세력이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 사회의 2차 피해를 기록하고 싶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연구자로서 개인적인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할머니들이 한국 사회로부터 당한 2차 피해를 기록해보고 싶어요. 증언집에는 ‘위안부’ 피해 이후의 삶에 대한 내용이 적어요. 아무래도 증언의 내용이 당시의 피해 상황에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아쉬운 부분이죠. 한국 사회 내에서 할머니들에게 가해진 2차 피해도 심각했는데 말이에요. 속리산 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전쟁이 끝나고 고향인 대구에 돌아와서 보니까 그 동네에서 자기만 살아 돌아왔더래요.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와서 ‘왜 너만 살아서 돌아왔나, 내 딸은 어디 갔냐’ 물어보면서 매일 괴롭히더래요. 그렇게 돌아오고 싶었던 고향인데 6개월 만에 고향을 떠나셨어요. 아빠한테 말도 안 하고요. 걸어서 속리산까지 가서 그곳에서 평생을 사시다가 <나눔의 집>에 오셨어요. 할머니가 어렸을 적 국악을 배우신 적이 있었는데, 속리산에 관광객이 오면 장구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생계를 유지하셨대요. 할머니가 돈을 많이 버니까, 그때 스님이 그랬대요. ‘위안부가 무슨 돈이 필요하다고 저렇게 돈을 버냐’면서요. 저는 이런 기록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논문 쓰려고 하는 주제도 한국 사회의 2차 가해예요. 1945년에 해방이 되었잖아요. 1946년까지는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등장해요. 그런데 1990년에 윤정옥 교수님이 한겨레 신문에 ‘위안부’에 관한 글[2]을 쓰기 전까지 약 45년 동안 일본군‘위안부’를 말하는 우리 사회의 목소리가 없었어요. 그럼 약 45년 동안 한국 사회가 이 문제를 몰랐냐는 거죠. ‘위안부’가 무슨 돈이 필요하냐고 말했던 그 스님도 ‘위안부’를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모른 척을 했다는 거죠.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에 증언을 하고 난 후에서야 갑자기 몰랐던 사실을 알았던 냥 되게 들끓었잖아요. 알고 있었으면서 침묵했다는 것도 2차 가해라고 생각해요. 1991년 이후 한국 사회도 크게 다르진 않았어요. 그때만 해도 아직 할머니들이 젊으셨을 때니까 심리치료 등을 통해 피해자들을 신경 쓰고 살폈어야 했는데, 정부는 계속 돈 문제에만 집중했어요. 그리고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에서의 외교적 카드로만 이용하고요. 이렇게 할머니들은 개인이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서만 대상화된 거죠. 이외에도 수많은 2차 가해가 있는데, 일본이 아닌 한국 사회의 내부 비판이 되어버려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Q. <할머니의 내일 展>도 비슷한 맥락에서 기획된 거군요. 네, 맞아요. 학교 폭력 피해자, 성폭력 피해자 등을 피해자로서만 대상화해서 바라보면 안 되잖아요. 이런 인식들이 할머니들의 문제로 인해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어요. 그들을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아야 피해자들도 아픔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Q.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의 인권 의식이 좀 더 성숙해지시길 바라시는 거군요. 뭐랄까. 한국에서 피해자라는 수식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잖아요. 그러니까 이 문제를 통해 성숙한 인권 의식을 바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은 거죠. 만약 한국 사회의 인권 의식이 충분히 성숙했다면, 애초에 <나눔의 집>은 필요하지 않았을 거예요. 굳이 이렇게 모여 살지 않고 각자의 영역에서 보통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계셨겠죠. Q. 언젠가는 <나눔의 집>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도 계시지 않을 때가 찾아올 텐데요. 앞으로 <나눔의 집>은 어떤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개인적으로 <나눔의 퓨집>은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셔도 계속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눔의 집>은 단순 요양 시설이 아니니까요. 현재 할머니들이 생활하시고 있는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박물관이에요. 할머니들 사진, 소품 등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게 제 주장이에요. 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이 공동생활하는 사례도 유례가 없을 뿐더러 그분들이 생활했던 공간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도 없거든요. 이런 부분에서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각주 ^ 편집자 주 : 나눔의 집에서는 두 분의 이옥선 할머니가 거주하고 있다. 언론을 통해 자주 소개된 부산 출신의 이옥선 할머니와 비교적 언론 노출이 적은 대구 출신의 이옥선 할머니다. 대구 출신의 이옥선 할머니는 본인을 속리산 할머니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본 인터뷰에서는 할머니의 희망에 따라 속리산 할머니로 표기했다. ^ 한겨례신문 1990년 1월 4일자. 윤정옥 교수의 ‘정신대 취재기’는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10400289113001&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0-01-04&officeId=00028&pageNo=13&printNo=507&publishType=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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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고 김양주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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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주 님은 1924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나 1940년 마산 봉우제로 모이라는 말에 따랐다가 일본 순사들에게 끌려갔다.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만주의 위안소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해방되자 피난민 대열에 끼여 군함을 타고 진도에 도착했다. 이후 식모살이, 청소 등을 하며 대부분의 생애를 어렵게 살았지만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등록을 하고 수요시위에도 참가했다. 경남 창원에서 향년 98세로 눈을 감은 김양주 할머니의 마지막을 정리해보려 한다. 2022년 5월 1일, 일요일 밤. 10시가 다 돼 가기에 집안 정리를 하고 조용히 쉬면서 슬슬 잘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 이때 울리는 전화. 내 가족은 모두 집에 있고 각자의 공간에서 쉬고 있는 일요일 밤에 울리는 전화라니. 반갑거나 기쁜 전화는 결코 아니다. 하필이면 이날은 아침에 아이가 다쳐 응급실에 갔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확진을 받았다. 응급이긴 하지만 상처 부위가 얼굴 쪽이라 성형외가 전문의가 아니면 치료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다른 병원 응급실을 알아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치료도 못 받고 상처만 가린 채 월요일에 확진자 외래진료가 가능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정신없이 보냈다. 그런 하루를 마치려고 하는데 울리는 전화라니.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이하 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님께서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해 미안하다고 하셨다. 아직 용건을 말씀하신 것도 아닌데 머리가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좋은 소식은 분명 아니야. 웬만한 일로는 전화하실 분이 아닌데 전화를 하셨다는 것은 그래, 그것뿐이야.’ 역시나였다. 밤늦게 전화해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신 후 차분하게 김양주 할머니께서 좀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셨다. 자려고 누워있던 몸이 할머니의 부고로 찬물을 끼얹은 듯 꼿꼿해졌다. 대표님께서 혼자서 일 처리하기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한마음병원’으로 와 줄 수 있냐고 물으셨다. 가겠다고 했더니 운전하지 말고 택시를 타고 오라고 덧붙이셨다. 병원에 도착해 입구를 찾아 헤매다 창원시청 일본군‘위안부’ 담당 직원을 만나 함께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병원 복도에는 대표님, 할머니의 아들, 할머니의 간병인까지 세 분이 계셨다. 이 세 사람은 한두 살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70대 후반이다. 할머니께서 향년 98세였으니 가장 가까운 분들의 나이도 그만큼 많다. 세 분이 장례를 어찌할 것인지를 의논하셨다. 대표님은 할머니의 아들(실제로는 양자)이 유족이므로 모든 의사결정을 하도록 장례식에 대해 설명하셨다. 하지만 유족 분은 고령인데다 충격도 받으셔서 복잡한 장례 절차를 주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유족의 주도로 장례 형식은 어떻게 할지, 비용과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할지 등을 결정해야 했지만 이경희 대표님 중심으로 장례를 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빈소를 어디에 차릴지부터 정하기 어려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있었던 병원 측에서는 이곳에서 장례식을 진행했으면 하는 의사를 보였지만 유족이신 홍종수 어른은 ‘마산의료원’으로 가고 싶어 했다. 집에서 가깝고 자신이 알고 있는 곳이라 편하신 것 같았다. 이로써 장례식 장소가 결정됐다. 한마음병원에서 마산의료원으로 고인을 먼저 보내고 남은 사람들은 시청 직원의 개인 승용차로 뒤따랐다. 마산의료원에 도착하자 병원 장례식장 직원으로부터 쏟아지는 설명과 질문을 들어야 했지만 유족 분은 어느 하나도 쉽게 결정 내리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모든 의사결정은 이경희 대표님이 하셔야 했다. 대표님은 병원 장례식장의 장례 절차와 행정처리, 비용 등에 관해 설명을 들은 뒤 이를 쉽게 해석하고 요약해서 유족에게 다시 설명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의사를 물었다. 이 과정이 길고도 지루하게 이어졌다. 빈소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이며, 장례 기간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유족에게 설명을 하고 의사결정을 하게 해야 했지만 마산의료원에서 장례를 진행하면 좋겠다는 결정 이후 유족 되시는 분은 아무런 결정도 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고, 대표님이 알아서 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이경희 대표는 복잡한 상황은 쉽게 설명해 주고 해야 할 일은 대신해 주기로 작심하신 듯 담담하게 장례 절차를 밟아 갔다. 일본군‘위안부’피해자 할머니의 삶이 마지막에 잘 정리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기에 대표님은 장례식을 지역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부고 내용이 결정됐다. 마산의료원으로 빈소를 정하고 시민장례위원회의 주도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양주 할머니의 별세를 외부에 알렸다. 빈소가 꾸려지고 나서도 선택의 순간이 계속됐다. 빈소는 어떻게 꾸밀 것인지, 장례 방식은 어떻게 할 것인지, 특정 종교의식으로 치를 것인지, 전통의례로 치를 것인지 매 순간 선택해야 했다. 할머니께서 말년에 성당을 다니며 세례를 받은 적이 있기에 장례 방식은 천주교의 장례 절차를 따르기로 결정하고, 이전에 일본군‘위안부’피해자 할머니의 장례를 도와줬던 상조회사에 연락해 장례를 대행하도록 했다. 할머니가 운명하신 후 빈소, 장례 방식, 상조회사 등을 결정하니 자정이 넘었다. 장례 기간은 4일이 되었다. 이틀째 날이 밝았다. 아침 일찍부터 대표님은 지난 밤 할머니의 장례 주관이 지역 시민단체 장으로 결정됐으니 장례위원회를 꾸릴 수 있도록 실무를 맡을 집행위원 선정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급하게 시민단체 몇 군데에 연락을 드려 오전에 시민장례위원회 집행위원회를 소집할 수 있었다. 오전 10시쯤 경남진보연합, 창원진보연합, 여성연합, 여성연대, 진보대학생네트워크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가 모여 할머니의 마지막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의논했다. 그래서 결정된 것이 4일장 중 이틀째에는 할머니의 부고를 알리고 단체 등에 공동장례위원장과 장례위원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고 장례비용에 포함되지 않는 기타 경비는 여러 시민단체가 분담하기로 결정했다. 장례 사흘째에는 추모식을 진행하기로 하고 추모식 진행자, 추모공연, 추모사 등의 내용을 결정했다. 시민장례위원회의 진행 방향이 결정되자 장례 일정은 숨 가쁘게 처리해야 했다. 부고장을 만들어 띄우고, 장례위원 모집 공지를 돌려야 했다. 시민단체 SNS 계정 몇 군데에 공통으로 공지를 올리니, 이 공지를 본 시민들이 각자가 속한 단체에 소식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자 창원지역 시민단체 대부분이 할머니의 부고를 접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은 지역 언론사였다. 방송과 언론에서 할머니 부고 기사가 송출되자 관공서에서 조문과 조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후부터는 정·관계에서 조문이 이어졌다. 지방자치단체장을 시작으로 여성가족부, 외교부 장관의 조화가 속속 도착했다. 늦은 오후가 되자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조화가 왔다. 이미 자리 잡았던 각계각층의 조화를 정리하고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인의 조화를 맨 안쪽으로 우선한 뒤 나머지 조화를 정리했다. 할머니가 살아있을 때, 건강하셨을 때 이 같은 관심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덧없는 푸념이 나왔다. 조문객의 발길도 이어졌다. 할머니의 마지막을 애도하는 시장, 시의원, 도의원을 시작으로 정·관계 대표와 관계자의 조문이 이어졌다. 이경희 대표님은 연이은 조문객을 맞았고 그동안의 할머니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느라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정의기억연대 실무자와 이나영 이사장이 조문을 오고, 대구의 이용수 할머니와 대구지역 활동가분들도 조문을 위해 오셨다. 이용수 할머니가 오시자 장례식장에 일순간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용수 할머니는 이전에 다른 할머니들의 장례식장에서도 다짐했던 말을 재확인하는 말을 했다. 먼저 좋은 곳에 가서 편히 있으시라, 반드시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를 받아 내겠다, 국제사회에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제기하겠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늦은 저녁에는 여성가족부 장관이 조문을 왔다. 이경희 대표는 유족인 홍종수 님을 여성가족부 장관과 인사를 나누게 하고, 도움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하시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여성가족부 장관의 조문을 끝으로 장례 이틀째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사흘째 날이 되었다. 오전에 조문객이 한가한 틈을 타 저녁에 있을 추모식 진행자와 추모 공연, 추모사를 해주실 분들에 대한 섭외를 요청드렸다. 다를 흔쾌히 수락해 주었고 촉박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주고자 애썼다. 흔한 장례식장의 풍경도 있었다. 조문객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밥과 국은 얼마만큼 추가 주문을 해야 하는지, 비품은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지 역할을 맡은 분들이 빨리 결정을 내려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하고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그래도 뭔가를 토대로 삼아 유추하고 요량하여 필요한 양을 결정해 주어야 했다. 이때가 가장 어렵기도 했다. 다음날이 발인이라 할머니를 모실 유골함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상조회사에서 두세 종류의 유골함을 안내하고 유족과 이경희 대표님이 의논을 했다. 유골함이 결정되자 유골함 겉에 각인할 문구를 제작해야 했다.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인데 시간이 촉박했다. 1시간 내로 내용이 결정돼야 했다.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양주 할머니 모두가 기억하겠습니다>를 유골함에 새기기로 하고 유골함 제작에 들어갔다. 사흘째 낮부터는 창원지역 시민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언론보도를 접한 시민, 학생을 시작으로 시민사회단체의 조문이 이어졌다. 조문객이 이어지는 와중에 한쪽에서는 저녁에 있을 추도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조문객이 머무는 공간을 추도식장으로 마련하고 식순을 확인하는 등 추도식 준비를 하는 동시에 발인 준비도 해야 했다. 할머니의 관 운구는 창원지역 청년 대학생으로 구성된 진보대학생네트워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학교 수업과 겹침에도 기꺼이 시간을 내준 대학생들에게 고맙다는 말밖에 전할 게 없었다. 발인 형식과 절차를 의논하고 있을 때 장례 기간 내내 함께해 주신 월남성당 신자분들께서 발인 미사를 해주시겠다고 전해왔다. 발인 때 신부님께서 미사를 집전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화장은 창원시립상복공원에서 하기로 하고 최종 시간을 통보받자 발인 시간이 확정됐다. 발인 시간은 오전, 화장 시간은 9시로 결정됐다. 오후부터는 더 많은 시민 조문객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특히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조문객이 더욱 늘었다. 이어 추도식 시간이 되었다. 추도식까지 총 90여 명의 공동장례위원장이 되겠다는 신청이 있었고, 장례위원은 150여 명으로 구성됐다. 저녁 7시가 되자 1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추도식이 시작됐다. 경남여성연합 윤소영 대표의 진행으로 엄숙한 추도식이 시작됐다. 정의기억연대와 거제통영시민모임의 추도사가 이어지고 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가 김양주 할머니의 삶을 되짚어 보았다. 가수 김산 님의 ‘마른 잎 다시 살아나’가 흐를 때는 가슴이 미어지기도 했다. 조문객들 사이에서 간간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추도사가 이어졌다. 끝으로 이경민 님이 할머니를 보내는 추모곡을 부르는 순간에는 모두가 비통의 눈물을 흘렸다. 1시간 30분가량의 추도식을 마치고 저마다 할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나흘째 발인 시간이 되었다. 이제 할머니와 작별해야 했다. 이른 아침부터 성당 신부님의 장례 미사가 진행됐다. 미사가 끝나고 난 뒤 시민사회단체의 마지막 영결 인사가 이어졌다. 다들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고 있었다. 누구 하나가 터뜨리면 눈물바다가 될 지경이었다. 발인과 영결식이 끝나자 많은 조문객들이 방문했던 빈소가 말끔히 정리되고, 고인을 운구하여 마지막 화장의 단계로 갔다. 대학생 청년들이 위패와 영정을 들었고 고인의 관도 그들의 손으로 옮겼다. 버스로 30여 분을 달려 화장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고인이 한 줌의 재로 남는 데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얀 유골함에 담겨 유족에게 전해지고 곧이어 납골당에 모셔졌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양주가 납골당 안치 번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유골함을 봉안하는 유리문이 닫히는 순간 할머니는 이제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 장례식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마지막까지 함께한 분들과 상복공원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서로 수고했다고 인사했다. 정말로 끝이 났다. 할머니와 옷깃 한 번의 스침이라도 있었거나 이마저도 없지만 일본군‘위안부’의 고통에 공감했던 많은 분들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할머니가 편안하시길 빌고 할머니를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할머니가 운명했다는 전화에서부터 납골당에 봉안되는 순간까지 4일 동안의 일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것들을 챙길 때마다 김양주 할머니가 생각날 것 같다. 이제 다들 또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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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다큐멘터리 〈코코순이〉 제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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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코코순이〉(2022)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8월 미얀마(옛 버마) 미치나 지역에서 연합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20명의 조선인 ‘위안부’ 가운데 한 명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를 심문해 기록으로 남긴 한 보고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코코순이〉는 또 끝내 찾지 못한 나머지 19명의 조선인 ‘위안부’를 기리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이들 ‘위안부’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사실이 왜곡되고 조작됐는지, 또 그런 보고서가 어떻게 악용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전쟁 당시 연합군 측은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일본계 미군 병사들을 통해 조선인 ‘위안부’들을 심문했고, 심문과 보고서 작성을 담당했던 미국 전쟁정보국(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OWI) 심리전팀은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라는 보고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코코순이〉는 그 보고서에 작성된 20명의 ‘위안부’ 명단 가운데 KOKO SUNYI로 기재돼있는 한 여성이 실제로 누구인지 찾아내고, 그 보고서가 무슨 이유로 엉터리로 작성되게 됐는지, 또 그 보고서 내용이 어떻게 일본 극우세력들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제작됐습니다. 〈코코순이〉 제작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는 그해 4월 국사편찬위원회 내 한시적인 조직이었던 〈위안부-전쟁범죄 조사팀〉으로부터 일본군 포로심문보고서 제48호와 49호, 그리고 관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다큐멘터리 제작을 결심했습니다. 당시 저는 KBS 보도본부의 시사다큐 프로그램 〈시사기획 창〉에서 취재와 제작을 담당하는 기자였습니다. 저를 포함한 〈시사기획 창〉 특별취재팀은 국사편찬위원회 〈위안부-전쟁범죄 조사팀〉의 황병주 편사연구관, 김득중 편사연구관과 함께 3개월에 걸친 취재에 나섰고, 그해 8·15 광복절 특집 ‘위안부’ 2부작 ‘전쟁범죄’와 ‘국가는 그들을 버렸다’ 두 편을 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만도 ‘위안부’와 관련한 각종 증거 자료와 사료 등을 확인하기 위해 6개 나라를 방문하는 등 광범위한 취재를 진행했지만, 여전히 미흡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많았고 편집 등 후반작업 과정에서도 많은 아쉬움이 남아있었습니다. 제작자들이 흔히 표현하는 ‘아이템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던 상황이었던 겁니다. 무엇보다 특히 아쉬웠던 점은 그 당시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행정복지센터 제적부를 통해 찾은 ‘박순이’라는 할머니가 일본군 포로심문보고서 제49호에 기록돼있는 코코순이(KOKO SUNYI)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정도까지만 확인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극우단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텍사스 대디’라는 미국인을 직접 인터뷰하지 못했다는 점도 끝내 아쉬웠습니다.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매춘부로 비하하는 일본 극우단체들과 텍사스 대디의 연관성을 정황 정도로만 확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018년 8월 15일과 21일 KBS 1TV를 통해 2부작 방송이 나간 뒤 제 나름대로 세웠던 계획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내용들을 확인하고 또 당시 진행했던 각종 인터뷰와 자료 등을 묶어 책으로 내는 것이었습니다. 현업에 치이면서 2년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2020년 5월 우연히 지인을 통해 KBS미디어의 독립영화 제작 담당인 김형진 PD님을 소개받으면서 갑자기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으로 계획이 급선회했습니다. 〈시사기획 창〉을 통해 2부작으로 방송했던 내용을 다큐 영화로 재제작하기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제가 나름대로 마련한 전제 조건이 몇 개 있었습니다. 박순이 할머니와 코코순이의 연결고리가 직접 관련이 있는 당사자를 통해 확인돼야 하며, 텍사스 대디를 직접 인터뷰함으로써 일본 극우단체들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확인해야 재제작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코코순이를 비롯한 조선인 ‘위안부’ 심문 관련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아쿠네 겐지로에 대한 추가 인터뷰가 꼭 성사되어야 했습니다. 90대 중반의 아쿠네 겐지로는 전쟁 당시 심문관으로 참전해 미얀마 미치나에서 코코순이를 비롯한 ‘위안부’ 20명을 목격하고 실제로 그들과 대화를 나눴던, 그리고 그 ‘위안부’들이 생포됐을 당시 함께 붙잡힌 평양 출신의 간호사 김 씨를 직접 심문하기도 했던, 이 다큐 영화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명입니다. 2020년 10월 본격적인 영화 제작이 시작됐지만, 곧바로 벽에 부딪혔습니다. 박순이 할머니의 주변 인물을 찾는 일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습니다. 박순이 할머니 주변 인물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박 할머니의 비동거 친족으로 기록된 1946년생의 한 남성이었습니다. 박순이 할머니가 영면에 드실 때 그 곁을 지켰고, 동사무소에 사망신고도 직접 했던 것으로 확인된 70대 남성으로, 이름은 박원학 씨였습니다. 취재를 시작하면서 저는 박원학이라는 인물은 박 할머니의 비동거 친족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18년 취재 당시 〈시사기획 창〉 특별취재팀은 스위스 적십자사의 문서보관소에서 20명의 조선인 여성들과 어린 아이 등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파키스탄의 카라치항에 대기하고 있다는 문서를 발굴한 바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그 이듬해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서남아시아에는 조선인이 매우 드물었고, 미얀마 미치나에서 포로가 됐던 코코순이 등 20명의 ‘위안부’들이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의 비카너 수용소에 수용됐다는 연합군 측 보고서 내용까지 확인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카라치항에서 배를 기다리는 20명의 젊은 여성들이 미얀마 미치나에서 포로로 붙잡혔던 바로 그 조선인 ‘위안부’들일 가능성은 매우 높았습니다. 저는 당시까지 확인된 모든 정황과 기록을 토대로 박원학 씨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던 어린이 가운데 한 명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은 박순이 할머니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어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박원학 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은 경상북도 영천시 동부동사무소였습니다. 2008년 박순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사망신고서가 접수됐던 곳입니다. 박원학 씨에 대한 각종 정보가 있는 곳이었지만, 동사무소 관계자들은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사실관계 확인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또 2018년 취재 당시 제적부에서 박순이라는 존재를 함께 찾았던 함양읍 행정복지센터 민원과 관계자 역시 현업에서 떠난 상황이어서 협조가 불가능했습니다. 박순이 할머니가 노년에 살았던 함양 인근 노인정과 노인복지센터까지 일일이 뒤지면서 박원학 씨의 흔적을 찾는 지난한 작업이 계속되던 중 결정적인 단서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왔습니다. 2018년 취재 당시 함양읍 행정복지센터에서 촬영했던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살피던 중 센터 측 컴퓨터 화면이 찍힌 영상에 결정적인 단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취재진은 박원학 씨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제주도로 향했고, 그곳에서 박원학 씨의 친척과 지인 등을 통해 박순이 할머니의 외손자를 만나게 되면서 박원학 씨가 박 할머니의 사위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손자를 통해 박 할머니의 둘째 딸을 만나면서 코코순이와 박 할머니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모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극우단체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의혹의 인물 텍사스 대디를 만나는 것은 박 할머니 가족들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인터뷰 섭외 과정부터 난항이었습니다. 텍사스 대디라는 인물은 매우 조심스럽게 선별적으로 외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을 만날 때는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제작진의 인터뷰 요청을 단칼에 거부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겁니다. 이에 제작진은 미국 현지의 한 영상 제작업체 이름을 빌려 그 업체 이름으로 다시 인터뷰 요청을 시도했습니다. 인터뷰 내용도 미국 내 보수주의 유튜버들의 활동이라고 밝히는 이른바 ‘언더커버’ 전략을 썼습니다. 결국 텍사스 대디와의 인터뷰 도중에 ‘위안부’ 이슈에 대한 질문이 본래 목적이었음을 밝혔고, 잠깐 동안의 반발은 있었지만 텍사스 대디 역시 예정된 인터뷰를 계속 진행하면서 큰 문제 없이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극우단체들 사이에서 텍사스 대디라는 애칭으로 통했던 토니 모라노 씨는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모두 틀린 내용을 왜 그렇게 집요하게 주장해왔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이 다큐 영화를 제작하면서 세 가지가 가장 아쉬웠습니다. 첫 번째로, 아쿠네 겐지로와의 추가 인터뷰가 성사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쿠네 겐지로는 2018년 첫 인터뷰 당시에도 여러 차례 인터뷰 장소를 바꾸고 시간도 변경하는 등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공영방송에서 ‘위안부’들에 대한 집중적인 질문을 하자 인터뷰 내내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실제로 이틀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던 당초 계획과는 달리 둘째 날 인터뷰 일정은 본인이 일방적으로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2018년 당시 아쿠네 겐지로는 ‘위안부’가 찍혀있는 사진에서 한 여성을 가리키면서 그 여성이 특히 기억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제작진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당시 아쿠네는 ‘위안부’ 20명을 다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정한 한 여성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됐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심문 과정에서의 언어 문제, 의사소통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인터뷰가 잡혀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봤을 때 그 판단은 실수였습니다. 2021년 제주도와 미국 뉴저지에서 각각 박순이 할머니의 외손자와 둘째 딸을 만났을 때 비로소 아쿠네가 가리킨 여성이 코코순이 즉 박순이 할머니였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아쿠네 겐지로를 다시 만나고 싶었고, 다시 만나서 어떻게 무슨 이유로 코코순이를 지목해서 특별히 기억이 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쿠네는 끝내 인터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아쿠네와 코코순이의 스토리는 다시 어둠 속에 갇혔습니다. 두 번째는 중국 내몽골의 한 마을을 직접 취재하지 못한 점입니다. 해당 마을은 박순이 할머니가 60년 동안 살았던 조선인 집단 거주마을입니다. 박 할머니의 둘째 딸에 따르면 그 마을에는 또래 할머니들이 한평생 자매처럼 지냈다고 했는데 이름도 없이 모두 대구댁, 진주댁 등으로만 불렸다고 회상했습니다. 또 모두 어디에선가로부터 그 집단 거주마을로 이주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얘기도 제작진에게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을 직접 방문해 그 또래 친구 할머니들에 대한 취재도 같이 해보고 싶었습니다. 일본군포로심문보고서 제49호에 적혀있는 ‘위안부’ 20명의 주소를 보면 대구와 진주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진주 출신은 4명으로 기억합니다. 여담이지만 사실 제적부를 전수조사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처음으로 타겟을 정한 곳도 진주였습니다. 하지만 진주시청이 6·25 당시 폭격으로 화재가 발생하면서 제적부가 대부분 소실됐다는 얘기를 듣고 함양으로 선회한 바 있습니다. 중국 내몽골 현지 취재를 추진하던 당시에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대유행이던 때였고, 특히 중국의 경우에는 중국 입국 과정에서 무려 3주일의 격리, 그리고 한국으로 귀국한 뒤에도 2주일의 격리를 거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여러 촬영 장비를 가지고 중국에 들어가는 것도 당시로서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중국이 외국인들의 국내 취재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중국 현지 취재는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미얀마 미치나에 대한 재촬영 불발이었습니다. 제작진은 이미 2018년 ‘위안부’ 2부작 취재·제작 당시 미얀마 미치나에 있는 조선인 위안소를 최초로 발굴한 바 있었습니다만 〈코코순이〉 재제작을 위해서는 당시 취재의 허점을 보완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부족한 영상에 대한 보충 촬영과 조선인 ‘위안부’를 목격한 현지 주민의 추가 인터뷰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돼 미얀마 대사관을 통해 정식 입국 절차를 밟았고, 그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미얀마 대사관으로부터 입국 승인 소식을 기다리던 2021년 2월 1일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바로 미얀마 군부 쿠데타였습니다. 결국 미얀마 미치나의 위안소 관련 분량은 대폭 조정됐고, 애니메이션과 각종 하이라이트 효과, 문서 CG 등으로 모자라는 영상과 부족했던 설명을 대체하게 됐습니다. 〈코코순이〉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간단명료합니다. 70여 년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 역사 왜곡을 조금이라도 더 논리적으로 반박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현대사의 비극을 아프게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코코순이〉 제작진은 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모든 행적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중에 단 한 분, 코코순이로 기록돼있는, 경남 함양 출신의 박순이라는 분이 일제 강점기 경성지역에서 유흥업을 하던 일본인 위안소 업주의 농간에 속아 미얀마로 끌려갔다가 일본군과 함께 포로로 붙잡히고, 미군이 주도하는 심문을 거친 뒤 다시 미치나를 떠나 인도와 싱가포르를 거쳐서 중국 내몽골 지역의 한 외딴 마을에서 살다가 결국 2004년도에 고향으로 돌아오셨고 4년 뒤 영면에 드셨다는 것만이 확인됐을 뿐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두 500개가 넘는 위안소를 설치해 운영했습니다. 일본 정부나 군부가 직접 운영한 위안소와 민간업자들에게 위탁한 위안소를 모두 합친 숫자입니다. 한국을 포함해 중국,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와 인도에까지 설치됐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며, 그곳으로 끌려간 ‘위안부’ 숫자만도 많게는 2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그곳을 거쳐 갔던 수많은 코코순이들의 행적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제작진은 영화 제일 마지막에 국사편찬위원회 황병주 편사연구관의 인터뷰 내용을 배치함으로써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 당시에 동남아시아나 중국, 남태평양 등에 수백 개소의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게 확인이 되고 있죠. 거기에 끌려가신 ‘위안부’ 숫자도 많게는 20만 명까지 보는 분들도 있을 정도로 대단히 많은 분들이 끌려가서 고생하셨죠.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던 이분들의 삶이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현재 우리는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건지 귀국은 하신 건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인 거죠. 이분들의 삶을 한 분이라도 더 확인해서 널리 알려서 같이 공유하는 게 현재 우리들에게 남아있는 중요한 숙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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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오리발, 무성의, 냉담에 맞서 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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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발, 무성의, 냉담에 맞서 싸우다 '관부재판' 이끈 김문숙의 삶 김문숙(1927-2021)은 영화 〈허스토리〉에서 배우 김희애가 연기한 '원고단장 문정숙 역'의 실제 인물이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 동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3명과 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 등 총 10명의 원고단은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원에 제소했다. 김문숙은 원고단과 함께 일본의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관부재판을 승리로 이끌었다. 일본 사법부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 정부는 피해여성 1인당 30만 엔씩을 배상하라"는 승소판결을 이끌어낸 것이다. 역사적인 '관부재판'을 이끈 김문숙, 무엇이 그를 '위안부' 운동으로 이끌었을까? 김문숙의 삶의 궤적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문숙의 역동적이고 광활한 삶 전체를 관부재판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화여대 약학과를 중퇴한 그는 1963년에 경기대 관광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부산에서 아리랑관광여행사를 세웠다. 1985년에는 초대 부산여성경제인협회장을 맡을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지만, 김문숙은 이 무렵부터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부산여성의전화, 부산여성폭력상담소 등의 설립 및 운영에 매우 헌신적이었다. 특히,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회장 직을 맡으면서 김문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자신의 삶을 한 순간도 분리시키지 않았다. 관부재판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소임이 끝났다고 여기지 않았다. 2004년에는 사비를 털어 〈민족과여성역사관〉을 설립하고, 역사적 정의를 회복하는 일에 몰두했다. 2021년 작고할 때까지 김문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함께 했다. 현재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김문숙이 남긴 역사적인 기록물들을 이관받아 아카이빙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기생관광 반대운동과 김문숙의 부끄러움 사업가로서 안락한 삶이 보장되었던 김문숙은 왜 '위안부' 문제에 뛰어 들었을까? 부산에서 여행사 대표로 사회적 입지를 확실하게 다진 김문숙이 60대에 '위안부' 문제라는 '가시밭길'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사업가에서 여성운동가로의 변신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기생관광 반대운동은 김문숙의 전회(轉回)에 도화선이 되었다. 1968년 한국 정부는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기생관광 정책을 추진하고, 외국인 관광객에 한해 유흥음식세를 면제하는 한편 접객 여성에 대한 성병 검진과 서비스 교육을 강화했다.[1] 그리고 1970년대부터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의 남성 단체 관광객들에게 기생파티는 대표적인 관광 상품으로 소개되었다. 1972년 일본교통공사가 발행한 관광안내서에는 '한국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는 나라.'[2] 라는 문구가 버젓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 여러 폐해를 파생시킨 기생관광이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자 한국과 일본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났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부산에서 기생관광 반대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가운데 김문숙이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싸워왔지만 근절되지 않는 기생관광을 조직적인 여성 운동으로 발전시킬 방법을 모색하던 중 그는 한 일본인 관광객에게 항의를 받았다. 일본 남성은 "전쟁 시에는 처녀들이 몸 팔러 얼마나 왔는데, 그때야 우리가 돈이 없어 얼마 못 줬지만 지금은 많이 주는데 왜 반대하느냐."[3]고 따졌다. 김문숙은 경악했다. 동시에 여성운동가를 자처해 온 자신이 20세기 최대의 여성 수난사인 ''위안부' 문제' 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4] 부끄러움의 원천은 자신의 무지였다. 김문숙은 역사적 사실을 직접 파악하기로 결심했지만, 이내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 한국에서는 '한 조각의 자료'도 찾기 힘든 실정이었다. 김문숙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는 '무성의'했고, 일본 정부는 계속 '오리발'을 내밀었다. 한국 국민들은 '냉담'했다. 때로 결핍이 강력한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처럼 김문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점차 몰입하게 되었다. 한국에 '위안부' 관련 자료가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자료가 없다고 해서 문제를 공론화시킬 수 없다는 입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왜 제대로 된 자료가 없는 것인가? 그 역사적 맥락에 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김문숙은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물론이고 '위안부' 문제에 무관심한 한국인에게 비판적이었다. "전쟁에 희생된 군인이나 민간인들은 그 혼령을 모시고 역사에 기록을 남기는데, 성의 도구로 쓰이다 죽어간 이 여성들은 아무데서도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정신대 문제는 여성운동의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지금도 온 동남아를 휩쓰는 일본 남자들의 매춘관광 문제, 우리나라에서 성행하는 매매춘 문제는 여성운동이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지금 매매춘 문제의 뿌리에는 정신대 수난사가 은폐돼 있어요. 정신대의 수난사에 대한 진실 규명과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 민족과 여성의 해방은 불가능합니다."[5] 왜 그토록 오랫동안 '위안부'의 존재를 몰랐을까? 김문숙은 분초를 아껴 움직이면서도 운동 과정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을 한 자 한 자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개인의 기록이 역사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직접 글을 쓰고 나서야 자신이 왜 오랫동안 '위안부'의 존재를 몰랐는지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김문숙은 식민지 시기 명문이었던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북여고) 재학 중에 군수공장으로 가거나 종군 간호원이 되어 일본에 충성하라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위안부'에 대한 언급은 기억에 없었다. 일본인 교장은 학생들에게 황국 여성이 될 것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김문숙이 학교에서 배운 내용은 철저하게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내용이었다. 학창 시절 '식민지 교육에 세뇌된 철부지'가 아니었다고 스스로 부인하기 어려웠다. 특히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인권 향상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해왔던 김문숙이었기에 '위안부'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 더욱 수치스럽고 통탄스러웠다. 이화여대 중퇴 후 경북 중등교원 양성소 지리과를 나와 진주여고 교사로 일한 것조차 마음에 걸렸다. 일제 말기에 교사 자격증이 있으면 공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교사 자격증부터 따서 동원을 피할 수 있었던 여성이 당시 몇 명이나 되었을까 되짚어 본 것이었다.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진 김문숙은 불행한 역사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부터 절박한 심정으로 역사 공부에 매달렸다.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며 통시적인 관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인이 망각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들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조사했다. 그때부터 독학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혼자서 공부하고 혼자서 자료를 모으는 일은 외롭고도 치열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김문숙의 삶의 방향은 또 한 번 달라지게 된다. 김문숙은 인생의 목표를 '위안부' 문제 활동가로 완전히 새롭게 설정했다. 김문숙에게는 당장 자료집 출간이 시급한 과제였다. 1990년 자비를 들여 정신대의 자취를 좇은 취재여행기 『말살된 묘비-여자정신대』를 펴냈다. 하지만 한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자료집 출간 약 한 달 전인 1990년 11월, 김문숙은 평생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천착한 윤정옥 교수 등과 함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발족시켰다. 이듬해인 1991년 5월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여성의 역할' 심포지엄에 이어 8월에는 '아시아태평양지역 전후 보상 국제포럼'에 참가하며 '위안부'문제가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목격했다. 하늘의 별을 따는 각오로 진행된 '관부재판' 1991년 8월, 피해 생존자 김학순의 공개 증언은 부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에도 큰 분기점이 되었다. 기자회견을 자청해 "당시 당했던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 평생 가슴 속에만 묻어두고 살아왔지만 요즘 서울거리에 일장기가 나부끼고 국민 모두 과거를 잊은 채 일본에 매달리는 걸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6]며 고발한 김학순의 증언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해 10월, 김문숙은 부산에 '정신대신고전화'를 개통했다. 이듬해인 1992년 1월에는 일본 언론에 10대 초반의 나이 어린 조선인 제자들을 정신대에 보낸 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아온 일본인 교사 이케다 마사에의 고백이 전해졌다. 김문숙은 식민지 시대 초등학교 5, 6학년 학생들을 근로정신대에 보낸 사실을 고백하며 "정신대 동원 명령은 거절할 수 없는 천황의 명령"이었음을 밝힌 이케다의 양심선언에 박수를 보냈다. 일본 정부를 향한 비판이 점점 거세졌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1992년 7월 "군의 관여는 인정되나 강제연행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다."[7]는 입장을 발표하며 문제의 본질을 회피했다. 김문숙은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자비로 냈던 『말살된 묘비-여자정신대』의 일본어판 출간을 결심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책 출간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사법적 정의와 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지를 멈출 수 없었던 김문숙은 '하늘의 별 따기'를 어떻게든 시도해야 했다. 일본 법정에서 사법 투쟁을 벌이는 관부재판의 서막을 열어젖힌 것이다. 1992년 12월, '위안부' 및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에 '부산 군대위안부·여자 정신대 공식사죄 및 배상청구 소송'을 접수했다. 피해자들의 건강 상태와 경비 등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 부산에서 가까운 지역을 선택한 것이었다. 1993년 9월 시모노세키지부 제3법정에서 이뤄진 첫 구두변론을 시작으로 1998년까지 총 23번에 걸쳐 진행된 재판. 거동조차 불편한 피해자도 있었지만 변론은 계속됐다. 무료로 변론을 맡아준 13명의 변호인단과 200여 명의 일본 후쿠오카 후원회 회원들의 도움이 컸으나 6년 동안 소요된 경비는 만만찮았다. 김문숙은 그 비용을 기꺼이 떠안았다. 1998년 4월 27일,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은 '입법부작위에 의한 국가배상책임에 대해 원고측 주장을 일부 인정'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각 30만 엔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위안부' 피해자의 소송 중 유일하게 원고의 청구가 인용된 역사적 판결이었다. 물론 2001년 히로시마 고등재판소에서 시모노세키 지부의 판결을 취소하고 원고 소송을 기각한 데 이어 2003년 최고재판소마저 항소를 기각해 원고측 최종 패소가 확정됐지만 1998년 판결의 의미는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93세에도 김문숙은 역사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관부재판 과정에서 김문숙이 가장 실망한 부분은 일본 정부에게 공식 사죄의 의무는 없다는 재판부의 태도였다. 한국 정부의 무관심에도 다시 한 번 큰 상처를 입었다. 이는 김문숙이 역사 교육에 직접 나서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사회에서 배제된 위치, 주변적 위치에 놓인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기록하고 모으는 일을 실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2004년 9월, 사재 1억 원을 들여 조성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민족과여성역사관>이 문을 열었다. <MBC 다큐에세이 그 사람 - 허스토리 실제 주인공 수향 김문숙>에는 매일 역사관에 출근해 방문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역사의 진실을 강조하는 김문숙의 일상이 기록되어 있다. 전 재산을 여성운동에 내놓을 정도로 배포가 컸지만, 김문숙의 생활은 소박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검소하게 살아가는 김문숙의 일상이 다큐멘터리에서 잔잔하게 조명되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김문숙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김문숙이 펴낸 책 가운데에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창문을 닫고 원고지를 당겨 본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이며, 내가 내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옳게 사는 것일까?" [8] 인생을 '배움의 연속'이라 생각했던 김문숙은 93세에도 일과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21년 김문숙은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며 스스로를 성찰하고 역사를 공부했던 김문숙에게 '앎'이란 정의, 윤리, 용기, 자긍심과 같은 뜻이었다. 김문숙은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를 찾기 어려웠던 한국의 현실에 분노하며 〈민족과여성역사관〉을 건립하고, 5톤 트럭 2대 분량의 역사 자료를 평생에 걸쳐 모았다. 일본 정부의 오리발, 한국 정부의 무관심, 한국 사회의 냉담함과 맞서 싸워온 김문숙의 삶이 그 속에 켜켜이 녹아 있다. '김문숙 아카이브'가 곧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역사에서 길을 찾고 싶다. '김문숙 아카이브'에서 역사의 난제를 대면하고, 그 해법의 단초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각주 ^ 박정미, 「발전과 섹스-한국 정부의 성매매관광정책, 1955년-1988년」, 『한국사회학』 48(1), 2014 참조.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외 민족과여성 역사관, 2018, p.10.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앞의 책, p.12. ^ 김문숙, 「정신대를 두 번 죽인다」, 『사월의 비는 오월의 꽃을 실어온다』, 예인당, 1993, p.32.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앞의 책, p.33.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앞의 책, p.64에서 재인용.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앞의 책, p.72. ^ 김문숙, 「소인의 탄식」, 『사월의 비는 오월의 꽃을 실어온다』, 예인당, 1993,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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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인터뷰 [김진아-김한상 대담] 여성 재현의 윤리와 난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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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여성 재현의 윤리와 난제들>이라는 주제로 김진아 감독과 김한상 교수의 온라인 대담을 마련했다. 김진아 감독의 미군 ‘위안부’[1] 3부작 제작기를 시작으로, 여성의 몸에 대한 매체적 재현, 뉴미디어를 통한 대안적 재현 방식, 피해자를 착취하지 않는 재현에 대한 고민을 거쳐 AR을 통한 젠더 헤게모니 균열까지 ‘매체를 통한 재현’에서 교차하는 두 대담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진아는 UCLA 영화과 종신교수로 한국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영화감독이다. 주요 필모그래피로는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2002), <그 집 앞>(2003), <두번째 사랑>(2007), <서울의 얼굴>(2009), <파이널 레시피>(2014) 등이 있다. 최근작 <동두천>(2017)과 <소요산>(2021)은 몰입형 매체를 활용한 미군 ‘위안부’ 3부작의 첫 두 편이다. 김한상은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주요 연구 분야는 시각문화, 아카이브, 인종주의, 이동성, 영상사회학 방법론 등이다. 그는 최근 웹진 <결>을 통해 <동두천> 등에 나타난 ‘보여주지 않음’이라는 재현의 윤리를 논하며, 일본군‘위안부’ 피해 기억 재현에 있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식에 대해서도 함께 짚은 바 있다. (>>관련 글: ‘시체 구덩이’의 응시와 ‘위안부’ 피해 기억의 재현) 목소리를 갖지 못한 자들에 대한 윤리적 재현 김한상 김진아 감독님과 ‘여성 재현의 윤리와 난제들’이라는 주제로 대담을 나누게 되어 반갑게 생각합니다. 감독님께서 미군 ‘위안부’ 3부작 중 두 작품을 제작하셨고 최근 영화제를 통해 두 번째 작품을 선보이셨죠. 그 과정에서 작품에 대해 논의하며 대담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결과 오늘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진아 ‘여성 재현의 윤리와 난제들’이라는 주제를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미군 ‘위안부’ 3부작은 여성과 관련된 여러 폭력과 그것을 감내하는 여성의 고통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난제를 고민하면서 나온 작품들이에요. 현재 세 번째 작품을 제작 중인데, 이 모든 것은 제가 대학교 1학년 때인 1992년에 있었던 윤금이 씨 살해사건에서 비롯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건이 예술가로서의 제 정체성을 만들어준 것 같아요. 같은 해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김보은·김진관 사건 등 여성인권과 관련해 굵직한 사건이 많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도 윤금이 씨 살해사건으로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건 이전에도 미군 ‘위안부’가 한국에 존재하고 기지촌에서 어떤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지 모두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 문제가 그토록 크게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그 사건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군 ‘위안부’는 한국에도 미국에도 속하지 못하고, 보호받지도 못하고, 우리 사회의 멸시까지도 감내해야 했던 분들이죠. 그분들의 아이들 또한 기존의 인종과 국가 등의 개념을 교란시키는, 정형화될 수 없는 불편한 존재들로 여겨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윤금이 씨 사건을 완전히 체화해서 제 일처럼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관련 시위에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학생회에서 시위를 위해 대량으로 준비한 조악한 찌라시에는 윤금이 씨 사체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어요. 사진을 봤을 때 제가 후기식민지 사회에 사는 여성이라는 처절한 자각이 심장에 낙인으로 찍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학생들은 시위하는 내내 그 이미지가 끝없이 유포되는 것에 괴로워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진이 유통되지 않게 막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때의 죄책감과 부채감을 절대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기지촌 범죄의 미군 가해자를 한국 법정에 세우는 승리를 이끌어냈다고는 하지만, 그 이미지를 재생산해 피해자에게 또 다른 피해를 입혔다는 것, 역사의 전진을 위해 피해자를 또다시 희생하게 만든 이 부채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타인의 고통, 특히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약자들을 재현할 때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그러다 보니 영화에 등장하는 재현의 관습에 불만을 갖게 됐습니다. 그 후 미술, 비디오 아트, 다큐멘터리, 극영화 등 여러 장르와 형식의 작업을 관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재현 윤리’에 대한 고민이 언제나 제 작품의 미학적 기조가 되었습니다. 몸의 부재: absence of body 김한상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홀로코스트나 과거 잔혹한 행위의 이미지 재현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학자 수잔 크레인 같은 경우 재현 문제에 있어 ‘보지 않기를 선택하기’라는 문제도 제시했고요. 감독님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어떻게 하면 여성의 몸을 통한 재현이 가능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기간도 있었고, 도시를 탐구하며 그 속에서 여성의 시각으로 후기식민지를 바라보는 재현이 가능한지를 탐구하는 시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경로를 거치면서 어떻게 VR(가상현실)이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재현 전략에 당도하게 됐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김진아 제 필모그래피를 훑고 나면 ‘이 사람은 여기에 당도할 수밖에 없었겠구나’라고 명백히 알게 되는 지점이 있어요. 영화인으로서 첫 작품인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2002)를 찍을 때부터 여성의 몸이 영화라는 영상 언어 안에서 재현되는 방식에 굉장한 저항심을 갖고 있었어요. 대안적 시각언어를 연구하기 위해 초기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들과 미디어 액티비스트들의 작품을 공부하고 제 몸을 촬영하며 치열하게 실험했고, 여성의 몸이 프레임 안에서 어떤 식으로 재현되는지 고민했습니다. 그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보는 시선이 남성 화자들과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무언가를 보고, 시간을 거슬러 존재할 수 있도록 기록-촬영한다는 행위 자체가 기본적으로 피사체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믿는데, 이 신념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죠. 저는 제가 촬영하는 피사체를 모두 저의 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5년간 <비디오 일기>를 찍으며 훈련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후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 분류(어머니 혹은 창녀)를 뒤집고 싶어 만든 작품이 <그 집 앞>(2003)이에요. 임신한 여자가 낯선 남자하고도 관계를 갖고, 6분간 자위행위를 하기도 하고, 유부남과 바람피우는 여자가 오히려 금욕적으로 스스로의 몸을 가학적으로 대하는 등 가부장제 사회에서 만들어진 관념에 부합하는 허구적 캐릭터가 아닌 몸의 욕망을 가진 진짜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두번째 사랑>(2007) 같은 경우에는 백인 사회에서 아시아 남성과 백인 여성,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재현되는 방식을 전복해보고 싶었고요. <서울의 얼굴>(2009)은 미군 ‘위안부’ 3부작을 만들게 된 사고의 기초를 만들어줬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에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부터 2006년까지 제가 한국에 갈 때마다 촬영했던 랜덤한 영상들이 편집을 통해 하나의 작품으로 묶여 있어요.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재현의 의미인데, “서울이라는 도시를 보고 싶다”는 선언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영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도시를 ‘본다’는 것이 진정 무엇을 뜻하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어요. 물리적으로도 자신보다 큰, 한 개인의 이해를 넘어서는 시간과 공간의 유기적 집합체인 도시를 어떻게 하면 ‘본다’고 감히 말할 수 있나요? 그래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재현한다’(타인과 공유할 수 있도록 기록하여 표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고민했습니다. 후기식민지 사회의 특이점인 지리적 기표와 기의 사이의 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노력했고요. 결국 공간을 본다는 것은 시간을 보는 것이고, 풍경이나 광경을 본다는 건 실은 그곳에 없는 걸 보는 것이란 것을 인식하게 됐습니다. 무언가의 재현은 무언가의 부재의 재현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죠. 서울이라는 도시에서는 언제나 비슷한 패턴이 반복됐는데 제 기억 속의 무언가를 촬영하러 가면 그것은 없고 다른 것이 있었어요.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재현하려 하지만, 정작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기호학적 딜레마가 일어나는 것이죠. 그렇게 후기식민주의 사회의 모순을 지리적으로 풀어낸 게 <서울의 얼굴>이었다면, 미군 ‘위안부’ 3부작에서는 여성 몸에 가해지는 초국가적 폭력과 그것의 재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죠. 이전에는 VR 매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는데,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가상현실 영화에 대한 컨퍼런스 모더레이터를 맡게 되면서 좋은 논문들을 많이 접하게 됐어요. 그러다 머릿속에 불이 켜지듯 떠오른 단어가 ‘absence of body’였습니다. 몸(사체)의 부재를 통해 윤금이 씨 사건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어요. 이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언어의 영역을 넘어서는, 감히 형언하기 어려운(ineffable)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해야 하는 딜레마가 있는데 그걸 역설적으로 ‘보여주지 않음, 설명하지 않음’으로 극복하려는 것이죠. 하지만 일반 상업영화 틀 안에서는 그런 방식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그러다 몰입형 매체를 만나게 되었을 때 이것은 미술, 영화, 사진, 시, 연극 등 다른 모든 예술의 형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공감을 유도할 수 있는 매체라는 걸 확신했죠. 재현의 대안적 경로와 확장 가능성, VR과 AR, XR 김한상 <동두천>(2017)은 관객이 VR 기어를 쓰면 동두천의 한 장소로 들어가게 되고, 주변의 소리와 풍경을 통해 어떤 곳인지를 파악하면서 사건이 일어난 장소까지 가게 됩니다. 윤금이 씨 살해사건이라는,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문제적인 재현의 역사를 지닌 사건을 다루려는 새로우면서도 대안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관객 참여가 가능하려면 장소와 기술적인 도구뿐만 아니라 VR의 세계로 들어가겠다는 참여 의사나 용기 또한 필요할 텐데요. 재현의 대안적 경로로서 VR을 더욱 확장시키고 보다 많은 이들이 경험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진아 저도 고민이 많은데 참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아요. VR 영화가 2D 영화에 비해 굉장히 제한적인 접근 경로를 갖고 있고, VR계에서 와이드 릴리즈(wide release)라고 하면 오큘러스(VR 하드웨어 기업) 앱에 올리는 정도일 텐데, 그조차 오큘러스가 있는 사람들만 볼 수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고민의 결론은 이것이었어요. 그래도 이게 맞다. 제가 VR로 영화를 만들게 된 초심을 돌아보자면 ‘부채감’에서 시작하게 된 것이거든요. 공론화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피해자의 사진이 활용되었다는 엄청난 오류를 되돌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파장을 덜 일으키고, 사람들이 덜 보게 된다 하더라도 좀 더 윤리적인 재현의 방법을 택하고 싶습니다. 현재는 AR(증강현실)이라는 몰입형 매체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 매체가 유통과 배급 면에서 민주적인 측면이 있거든요. 거의 모든 소프트웨어가 무료이기 때문에 기술만 있으면 그것을 활용해 작품을 만들어 앱스토어에 올릴 수 있어요. 무료 배급도 가능합니다. 그렇게 만든 작품들이 AR <증강현실 소요산>(2022)[2]과 XR <확장현실 소요산>(2022)입니다. XR <확장현실 소요산> 앱을 활용하면 성병 관리를 위해 국가가 설립하고 미군 ‘위안부’들을 감금 치료했던 소요산 낙검자 수용소(일명 몽키 하우스) 복도 안을 직접 걸어다닐 수 있어요. AR 앱을 다운로드한 후 실행시키면 카메라가 자동으로 실행되고, 그 카메라로 보면 내 방이 소요산 수용소 복도가 되어 그곳을 걸어다니며 체험할 수 있죠. AR <증강현실 소요산>을 통해서는 3D 모델링된 수용소 외경도 볼 수 있는데, 이제 곧 없어질 장소를 사람들이 반영구적으로 볼 수 있도록 아카이브(보존) 해놓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사용하는 몰입형 매체의 형식을 다층화, 다면화해 이슈 전달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김한상 공적인 박물관이나 미술관 제도 등을 통해 VR을 확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진아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VR을 상영하는 건 물론 환영입니다. 영화처럼 상영의 개념보다는 공공 전시의 개념으로 더 많은 분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를 해도 좋을 것 같고요. 관객의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VR 체험의 감각 김한상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통해서 윤금이 씨 사건과 같은 비윤리적 재현에 대한 반성, 역사에 대한 성찰적인 재현이 가능하다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상설 전시를 모색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요산> 같은 경우 아카이빙을 말씀하셨는데, 기본적으로 어떤 장소에 들어가 그곳을 보고 느끼며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화 속 장소가 대단히 참혹한 폭력이 자행된 곳이라는 점에서 관객의 성차에 따라 그것을 체험하는 감각이 다를 것 같은데요, 관객에게 직접적인 공포 혹은 두려움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을지요. 김진아 관객의 반응에 대해서는 많은 국가에서 상영이 이뤄졌던 <동두천>이 중요한 사례 연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간이 함의하고 있는 폭력의 잠재성에 대한 공포를 사전 지식 없이도 관객들이 느낀다는 게 놀라웠었어요. 그런데 그게 명확하게 젠더화, 인종화, 국가화되어있습니다. 일단 한국 여성들이 가장 무서워하세요. 그다음으로 공포를 강렬하게 느끼는 관객층은 동아시아 여성들이었어요. 식민지 사회를 거쳐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은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에 사는 여성들의 반응이 확연히 달라요. 동양인 다음으로 공포를 느끼는 관객층이 동양인을 제외한 유색인종인데 그중에서도 여성들이 훨씬 더 무서워하고요. 백인 여성들도 예민한 분들은 무서워하지만 공포를 가장 느끼지 못하는 건 백인 남성들이에요. <동두천>을 국제 프리미어로 상영했던 베니스영화제에서 제가 만난 관객은 모두 백인이었는데, 특히 남성들의 경우 영화의 정서를 공포와 결부시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어요. 혹시 무섭지 않았냐고 물어봤더니 무섭진 않고 “disturbing(충격적인)하다” 정도로 답하더라고요. 심지어 많은 백인 남성들은 그 공간에서 자신이 폭력 피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굉장히 적극적으로 고개를 돌려가며 그 공간을 살펴봤거든요. 신기해하는 거죠. 물론 끝에 가선 숙연해지긴 하지만,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시발점이 달라요. 대부분의 한국 여성 관객들은 동두천 입구가 보이고 밤 신이 시작되면서부터 무서워하세요. 후기식민지 사회의 트라우마라는 게, 그걸 직접 겪지 않은 젊은 여성들에게도 이렇게까지 대물림되는구나 싶어 굉장히 착잡하고 슬펐어요. 김한상 체험을 통해 과거 역사를 알고 문제의식을 갖는 게 중요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체험 자체가 가져올 수 있는 트라우마가 우려된다는 점에서, 윤리적 미디어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독님께서도 AR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신 것 같은데요, 그러한 점에서 다른 방식으로 AR 작업을 확대할 계획이 있으신지요. 김진아 젠더 폭력이 일어났던 공간에 간다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럽고 무서운 일이죠. 실제로 내 몸을 이용해 그 공간 안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 세계를 방문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몰입형 매체를 경험할 때 느껴지는, 매체 자체가 제공하는 불안과 공포감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제 특강에 참석하신 에린 정 교수님(존스 홉킨스 대학 정치학과)이 가투(가두 투쟁·길거리에서 행하는 투쟁)를 통해 윤금이 씨 사건이 제 안으로 들어와 체화된 것과 VR의 평행점을 짚어주셨어요. 요즘에는 피켓을 들고 농성을 하지만, 과거 90년대 초반까지는 폭력적인 공권력에 저항할 때 최전방에 자신의 몸을 집어넣었단 말이죠. 최루탄을 맞고 경찰들이 휘두르는 곤봉에 머리 깨져가면서 말이에요. 단식투쟁 등 몸으로 하는 모든 투쟁이 그런 맥락인데, 굉장히 비극적이고 비효율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방식의 투쟁이지만 그것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라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대변하고 싶은 약자를 위해 신체에 가해지는 위험을 무릅쓴 것이죠. 저 또한 그러한 시기를 겪고 25년이 지난 후 VR을 만나게 됐는데, 제일 인상적인 것이 VR 기계를 쓰는 순간 나 자신 또한 가상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몸의 부재)을 자각하는 순간 누구나 공포감을 느끼죠. 나는 시선을 갖고 있고, 소리도 들리고, 가상의 존재들도 보이지만 상황과 환경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몸은 없는 거잖아요. 어떻게 생각하면 관객 자신이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신체적 주체성을 포기하고 가상현실 안으로 들어가 다른 존재를 만나면서 사건이 매번 새롭게 일어나는 거죠. 그런 점에서 VR이 굉장히 혁명적이라고 생각했어요. AR에서는 여성의 주체성과 관련해 다른 차원에서 유의미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여성들이 구조적 젠더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던 역사적 공간을, 관객인 또 다른 젊은 여성이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관찰하며 탐사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임파워링하다고 생각해요. 수동적 관객이 아닌 능동적 탐색자라는 위치가 여성 체험자에게 엄청난 힘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VR과 정반대되는, 증강현실이라는 매체가 가진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관계를 뒤집는 민주적 매체 여성의 몸을 여성에게 돌려주기 김한상 가투와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참여적이고 초월적 영매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VR은 굿이나 마당극과 연결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김진아 제가 VR을 처음으로 경험한 게 해저 탐험이었어요. 다큐멘터리에서 숱하게 본 이미지들이 펼쳐질 뿐인데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내 몸이 없어서 느끼게 되는 공포감이란 걸 그때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두 가지를 깨달았죠. VR을 경험할 때 관객은 심리적으로 수동적 관찰자/피해자의 입장에 가깝다는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이 매체가 연극과 비슷하다는 것이었어요. VR을 처음 보고 즉각적으로 느낀 건 VR이 영화보다는 연극, 특히 관객들이 객석이 아니라 툭 터진 공간의 한가운데 모여 앉아있고, 배우들은 사방팔방에서 뛰어나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는 그런 실험극과 비슷하다는 거예요. 가운데 모여있는 관객은 360도로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동시다발적인 사건들을 볼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고, 주의를 기울이는 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대사를 들을 수도 있고 놓칠 수도 있는 거죠. 관계를 맺고자 하는 대상에 따라 내러티브가 달라지는 실험극과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 흥미롭다고 생각했어요. 관객과 연출자의 권력관계가 완전히 뒤집히는,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민주적인 매체인 거예요. 주체로서의 ‘나’는 그 안에서는 신체를 잃게 되니까 Spectral Figure(유령의 형태)가 되는 것이고, 그와 관련하여 관객에게 일어나는 VR만의 특이한 심리 기제가 있을 것 같아요. 김한상 여성의 몸을 재현하는 문제는 재현적 미디어가 만들어지면서부터 계속된 문제고, 지금 이 시대에도 난제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얘기할 때 성차에 따른 윤리를 생각하지 않는 부분이 여전히 존재하고, 그에 대한 문제 제기를 감독님이 작품으로써 해오신 것 같습니다. 오늘 대담을 통해 그 문제의식에 대한 화두를 다시금 던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몰입적 미디어라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이 공공기관이나 교육적 환경을 통해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될 수 있기를 바라고,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진아 여성 재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여러 매체를 섭렵하며 꾸준히 영상작업을 해왔는데 혹자는 ‘그래서 네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에 답을 한다면, 저는 여성의 몸을 여성 자신에게 돌려주고 싶어요. 영상 매체 안에서 여성의 몸이 은유나 알레고리, 상징이 되는 순간 그의 목소리는 완벽하게 삭제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원하는 건 여성의 몸을 다른 무엇의 은유나 상징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존으로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렇게 함으로써 여성에게 자신의 몸과 목소리를, 힘과 생명을 돌려주는 것이죠. 그런 방식이 기존의 남성중심적 영화 문법과 서사에 익숙한 분들에겐 어렵고 불편하겠지만요. 각주 ^ 군부대 위문을 명목으로 국가가 동원한 여성 성착취에 대한 일반적 용어로 사용했으며, 2018년 ‘기지촌 미군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 고등법원 판결문의 용어를 준용하였음. ^ 김진아 감독이 소요산 낙검자 수용소를 소재로 만든 영화는 총 세 작품으로, <소요산>(2021), <증강현실 소요산>(2022), <확장현실 소요산>(2022)이 있다. 본 대담문에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증강현실 소요산>은 AR <증강현실 소요산>으로, <확장현실 소요산>은 XR <확장현실 소요산>으로 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