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검색
-
- 2024년 인터뷰 디아스포라 감독이 ‘위안부’ 문제를 말하는 법
-
디아스포라 감독이 '위안부' 문제를 말하는 법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담은 영화를 만든 아르헨티나 국적의 한인 동포 2세 세실리아 강 감독. 계기는 우연히 들은 김복동 할머니의 연설이었다. 그때까지 '위안부'라는 단어조차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는 그는 몇 년 후 김복동 할머니의 부음을 듣고 소명처럼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아르헨티나 한인 사회 20대 젊은 여성들이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을 낭독하며 출발하는 영화는 2023년 11월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마르델플라타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과 '관객상', 모든 경쟁 부문 최우수 영화상인 '시그니스상', 그리고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아직 국내에서는 개봉하지 않았지만 후세대와 공감대를 형성해가야 하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내게서 출발한 배>를 놓고 세실리아 강 감독과 마주 앉았다. 아르헨티나에서 날아온 일본군'위안부' 영화 "말하기는 치유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고, 치유를 시작하기 위해 용감하게 침묵을 깼습니다. 그리고 이는 다른 여성들이 말할 수 있는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지금, 2022년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상처를 치유해야 할까요? 왜 우리는 매주 수요일마다 여기 있어야 하나요? 왜 우리 여성들은 말하는 게 그토록 어려울까요? 왜 우리는 매일 말 그대로 죽도록 맞으면서도 우리가 겪은 모든 일들에 침묵해야 하나요? 왜 우리는 남성들의 일상적인 학대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다고 여길까요? 우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말하기가 상처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만 말하기는 분명 우리의 상처를 더 빨리 낫게 할 수 있습니다." 2022년 7월 4일이었다. 장대비 쏟아지는 1550차 수요시위에 참여한 멜라니 정은 직접 적은 연대 발언을 또박또박 읽어내려 갔다. 머나먼 아르헨티나에서 날아온 이 동포 2세 여성은 이미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과 나눔의 집을 방문해 일본군'위안부'의 아픈 역사를 만나고 온 터였다. 역시 아르헨티나 동포 2세 감독인 세실리아 강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내게서 출발한 배(PARTIÓ DE MÍ UN BARCO LLEVÁNDOME)>는 이렇게 주인공 멜라니 정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하고 점점 깊이 인식하는 과정을 좇으며 전시 성폭력과 일상의 폭력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가 또 다른 가해자임을 담담히 담아내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영화, 한인 동포 2세 감독,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여성 인권에 공명하는 아르헨티나 젊은 20대 여성들의 목소리…. 국제사회와 공유는 물론 후세대와 어떻게 만나고 접촉면을 넓혀 나갈지, 묵직한 과제를 앞에 둔 국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영화 <내게서 출발한 배>는 세대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함의를 전하는 작품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장기 상영을 할 만큼 주목받고 있다. 아직 국내 개봉은 하지 않았지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2024 학술 콜로키움'에 참석한 세실리아 강 감독을 만나 영화 이야기를 나눴다. 시작은 김복동 할머니의 '위안부' 연설… 사망 소식 듣고 '뭔가 해야겠다' 생각 Q. 부모님께서 아르헨티나로 이민가신 이듬해인 1985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한인 2세이신데, 먼 남미에서 어떻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하셨을까요? 🧶 세실리아 강 : 2013년이었습니다.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마지막 실패>의 한국 부분을 촬영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어쩌다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 회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김복동 할머니의 연설을 처음 들었습니다. 아직도 생각나는 게 열네 살 무렵 일본으로, 중국으로 끌려다니며 하루에 20~30번이나 강간을 당하고 옆에서 다른 여성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해야 했던 고통, 그 상처와 기억을 안고 어렵게 집으로 돌아온 후에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못한 현실, 침묵하면서 느껴야 했던 수치심… 굉장히 구체적이었던 할머니의 말씀이에요. 정말 놀라고 충격이었어요. 더구나 용기있게 나서서 증언하시는 이유가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라 후세대에게 절대로 같은 불행이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적인 사실을 제대로 교육했으면 좋겠다, 그거 하나였어요. 제 삶에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울림이었습니다. 그 순간까지 일본군'위안부'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위안부'라는 완곡한 표현도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동시에 서른이 넘도록 아무 것도 몰랐던 스스로가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Q.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고 깊이 공감하는 경험과 이후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나아가 자신의 전문 분야와 연결한다 해도 제작비가 만만찮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정에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뒤따르기도 하고요. 어떤 사명감이나 숙제로 받아들이셨던 건가요? 🧶 세실리아 강 : 처음부터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참담한 마음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지만 이 정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제가 이 주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지도 몰랐고, 개인적으로 책임감을 가져야 된다는 사실 자체가 벅차기도 했고요. 다만 당시에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제 마음 속에 이 주제가 일종의 소명처럼 계속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2019년 1월에 김복동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이 제게도 변화가 있었어요. 2023년 말에 매우 극우적인 정당이 정권을 잡아 문제가 더 악화될 거라는 우려가 많은데, 한인 사회를 포함해 아르헨티나는 8시간마다 여성 한 명이 희생당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가정폭력이 심각해요. 그러다 10년 전부터 미투운동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요. 그 영향을 받았고, 특히 젠더 문제에 대한 생각이 많이 변했어요. 제 작업 안에서 폭력 문제, 여성 인권 문제를 좀 더 직접적으로 고민하게 된 거예요. 증언 낭독, 할머니 존중하고 희망에 집중하는 방식 Q. 아르헨티나 여성 감독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영화화 할 것인가, 즉 어떤 내용과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가 등 본격적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 세실리아 강 : 무겁고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를 어떻게 전달할 지 고민이 많았고, 사실 두려움이 컸어요. 최대한 피해 할머니들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나리오를 맡은 버지니아 로포 작가와 계속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가 처음으로 동의한 부분이 이 영화가 할머니들을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대신 관객들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역사의 어두운 부분보다는 희망에 집중하자는 것이었어요. 역사가도, 학자도 아닌 제가 '위안부' 문제를 역사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그때 작가가 과거의 역사를 지금 여기로 가져와서 젊은 여성들한테 할머니들의 증언을 읽어보게 하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주셨어요. <20년 후에>라는 다큐로 유명한 예술가이자 인본주의자인 브라질의 에두아르도 쿠티노(Eduardo Couthino) 감독에게 영감을 많이 받아온 터라 그의 인터뷰 형식도 빌려 왔고요. 한인 사회 20대 여성들의 인터뷰가 이어지는 영화의 도입부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Q. 세실리아 강 감독께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게 되는 개인적 경로와도 유사한 흐름입니다. 🧶 세실리아 강 : 맞아요. 아날로그적 방식일 수 있지만 최대한 가까이 느껴지는 주제와 구조여야 한다는 게 중요했어요.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에서 받은 강렬한 경험이 바탕이라 영화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방식을 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인터뷰에 참여할 여성들 캐스팅을 앞두고는 한인 2세라 해도 세대가 달라 오래 전의 일, '나와 상관없는 일'로 느끼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어요. 그런데 다큐를 찍으면서 그런 편견들이 무너졌습니다. 여성들 대부분이 '위안부'의 의미는 대략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몰랐어요. 그러다 보니 인터뷰 초기에는 질문을 해도 답변을 주저했고요. 이후 할머니들의 증언을 1인칭 시점으로 낭독하면서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고, 점점 문제에 접근하게 됐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여성들이 일상생활에서 겪고 있는 작은 차별과 억압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또 다른 충격이었어요. 여성들은 아르헨티나에 살면서 동시에 한인 사회 구성원이잖아요.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부모 세대는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사는 삶 자체가 매우 고됐기 때문에 한국의 전통 문화를 중요시하고 지키려는 의지가 큰데, 이것이 젊은 세대에게는 억압적일 수 있어요. 한국에 오게 되면서 아르헨티나 한인 사회 여성들이 어느 부분에서는 1970년대, 1980년대를 살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이런 문화와 차이에 집중하면서 여성들과 점점 유대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거듭된 각본 수정과 표류, 속도전 후의 감동 Q. 이후 영화는 인터뷰이 중 한 명인 멜라니 정의 비중이 커지고, 멜라니는 점점 주도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현장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또한 애초의 설계였나요? 🧶 세실리아 강 : 캐스팅 인터뷰에서 멜라니가 연기를 공부하는 배우 지망생인 걸 알았어요. 너무 반가웠죠. '센스 오브 미러링(Sense of Mirroring)'이라 해야 하나, 같은 예술 계통이라는 동류의식이 생기면서 먼저 당겼어요. 대본 리딩을 시켰는데 하고 싶은 연기를 애드립으로 해보겠다며 황금주 할머니의 증언을 낭독하는 거예요. 단순히 읽는 게 아니고 무언가 개인적인 경험까지 녹여낸 연기였어요. 할머니의 증언이 멜라니의 일상에 어떤 울림을 주는지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멜라니의 내러티브로 중심이 옮겨 갔습니다. 전개 과정도 의도적인 건 아니었어요. 재정적인 이유로 첫 스크립트에서는 한국 방문 장면을 넣지 않았거든요. 본격적으로 작업을 할 무렵 코로나사태가 터졌고, 각본도 여러 번 바뀌었어요. 그 중간에 다른 일로 싱가포르 일정이 생겨 한국까지 들르게 됐어요. 이런 때 촬영하지 않는 게 말이 되나 싶어 멜라니와 상의해 시나리오를 다시 썼죠. 돌아보면 아르헨티나에서의 촬영이 강렬한 열정이었다면 한국에서의 촬영은 적은 예산과 빡빡한 일정 속에서 기복과 시차, 바다에서 표류하는 듯한 느낌으로 가득 찬 '감정적인 오디세이'에 가까웠어요. 조사하고 섭외하고 준비해서 촬영까지 마친 기간이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으니까 엄청난 속도였거든요. 장마 기간이었던 데다 한국말을 그나마 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 제작진 6명 모두 고생을 엄청 했고요. 사운드맨부터 방문을 허락해준 기관 관계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한국 촬영은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렇게 해서 멜라니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과 나눔의 집을 방문하고, 수요시위에도 참여할 수 있었어요. 두 곳에 전시돼 있는 황금주 할머니의 기록을 만났을 때, 오자마자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촬영하느라 정신없던 와중에 너무나 멋진 발표문을 쓴 멜라니의 연대 발언을 들었을 때 저희 모두 얼마나 감동했는지 몰라요. 덕분에 아르헨티나 여성이 '위안부' 문제에 다가가는 과정이 잘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Q. 꾸준히 황금주 할머니 이야기가 등장하잖아요.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걸까 궁금했어요. 🧶 세실리아 강 : 그렇지는 않아요. 여러 할머니의 증언이 있었는데, 멜라니가 먼저 읽고 선택한 거예요. 황 할머니의 증언에 좀 더 마음이 닿았던 것 같아요. 영화적인 우연이 겹친 결과였어요. Q. 영화 제목이 시적이에요. <내게서 출발한 배(A Boat Departed From Me Taking Me Away)>에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 세실리아 강 : 제목은 제가 좋아하는 아르헨티나 여성 시인 알레한드라 피사르니크(Alejandra Pizarnik)의 시에서 따왔어요. 196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열정적으로 페미니즘을 지향한 분이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말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잖아요. 시는 그렇다면 여성들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요. 다하지 못한 할머니들의 말은 물론이고 현재도 여성들에게는 하고 싶은 말 이상의 것이 있다는 의미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에 중의적으로 '위안부' 역사가 모두에게 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고요. Q.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미 개봉했다고 들었습니다. 🧶 세실리아 강 : 2024년 7월, 240석 규모의 대중영화관인 중남미미술관(MALBA) 극장에서 <내게서 출발한 배>가 개봉했는데, 놀랍게도 지금까지 상영 중이에요. 또 영화 전문 공연장인 산 마르틴 극장 아트하우스에서도 2주 동안 상영했는데, 만원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상영관이 늘어나고 있고요. 기대 이상의 호응이라 저희도 당황하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의 관심과 장기 상영 이유 Q. 현지에서는 낯선 이야기일 텐데, 그렇게 관심을 받는 이유가 뭘까요? 🧶 세실리아 강 : 무엇보다 그동안 어디서도 접한 적 없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입소문이 난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제가 그랬듯이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겪은 고통과 상처가 아르헨티나 여성들에게도 깊이 전해지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군사 독재 시절을 거치며 폭력과 범죄를 경험한 아르헨티나 역사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상영회에서 관객 중 누군가는 영화 속 수요 시위 장면을 언급하면서 '비슷한 두 사건'을 연결 짓는 발언을 해요. 수요 시위를 보면 1970년대 군사 독재 시절 납치되거나 실종된 자녀와 포로로 태어난 손자에 대한 진실을 요구하며 매주 목요일 대통령궁 앞 마요 광장에서 열린 '마요 광장의 할머니들'의 목요 행진이 떠오르니까요.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속담도 있는데, 목요 행진과 수요 시위 모두 기억과 진실,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또 다시는 그런 역사의 참상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연대의 감정을 느끼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아르헨티나에서도 케이팝(K-Pop)을 비롯해 한류가 엄청난 인기예요. 한류에 빠진 이들의 관심이 한국 문화 전반으로 넓어지면서 영화까지 영향을 받는 것 같기도 합니다. Q. 영화제 수상 소식도 들었습니다. 🧶 세실리아 강 : 2023년 11월에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마르델플라타 국제영화제'에 참여해 국제 경쟁 부문에서 첫 선을 보였어요. 기대 없이 참여했는데, 찬사와 함께 '심사위원 특별상'과 제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관객상', 모든 경쟁 부문 최우수 영화상인 '시그니스상', 그리고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았어요. 엄청난 영광이죠. 예상 못한 수상인데다 덕분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분들과 나눌 수 있게 돼 너무나 기뻤습니다. Q. 한국 개봉 계획은 어떤가요? 🧶 세실리아 강 : 아르헨티나 관객뿐 아니라 한국 관객들도 만나고 싶은데 아쉽게도 아직 상영 계획을 잡지는 못했어요. 아르헨티나인이지만 한인 교포 2세라는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가진 감독의 관점으로 담아낸 일본군'위안부' 이야기를 한국 관객들이 어떻게 보고 이해할지 굉장히 궁금해요. 만약 한국에서 상영되면 중첩된 기억과 역사, 경험을 훨씬 더 폭넓게 이해하고 열린 논의와 토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디아스포라 정체성과 시선 담은 작품 꾸준히 소개하고파 Q.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주요 고민 중 하나는 앞으로 후세대와 어떻게 공감대를 형성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때 아르헨티나의 젊은 한인 여성들과 공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내게서 출발한 배>가 던지는 메시지가 인상적인데, 관련해 영화가 어떻게 활용되면 좋겠다 하는 기대가 있을 것 같습니다. 🧶 세실리아 강 : 저의 영화가 어떤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미래 주역인 젊은 세대 사이에서 다뤄지지 않는다면 어떤 역사적 사건도 의미를 잃어갈 수밖에 없잖아요. 이들 미래세대와 만나는 기회를 많이 그리고 다양하게 만들어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역할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의 내러티브에 동의할 수도, 거부감을 느낄 수도, 반대 의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 Q. 꾸준히 아르헨티나와 한국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예민하게 포착한 작품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앞으로도 이 정체성을 이어나갈 예정인지, 향후 작품이나 활동 계획과 함께 말씀 부탁드립니다. 🧶 세실리아 강 : 어릴 때부터 항상 다르다고 느꼈어요. 가끔 '강제이주' 당한 느낌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해요. 외모부터 문화까지, 너무나 다른 세상 사이에 있는 존재였던 거죠. 10대 때는 특히 불편한 게 많았어요. 모든 디아스포라가 거치는 과정일 거예요. 그런데 그 다름이, 외모가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관점이 다른 것이 어느 순간 저의 특별한 정체성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 덕분에 남다른 시선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도 이 다큐멘터리를 꼭 찍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개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으로서 제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이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촬영하는 과정에서 많이 배웠고, 저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가면 다음 작품인 <장남> 촬영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이민 1세대인 아버지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처음 시도하는 픽션 영화이기도 해요. <내게서 출발한 배>를 선보이고 나니까 이제야 말로 제가 완전히 준비된 것 같습니다. 픽션, 논픽션을 떠나 언젠가는 코미디적 요소 가득한 영화도 만들고 싶은 꿈도 있고요. 영화로 계속 만나 뵙겠습니다.
-
- 2020년 인터뷰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해주세요
-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 주제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와 대면하고 사유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2019년 12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 – 세 번째 노래들>이 뮤지션 30여 명의 참여로 발매됐다.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는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보컬로 활동하던 송은지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2012년에 황보령을 포함한 여성 인디 뮤지션들의 참여로 첫 앨범을 발매했고, 2013년에 <이야기해주세요 – 두 번째 노래들>이 나왔다. 작년 발매된 3집에서는 송은지뿐 아니라 황보령도 앨범 전체의 콘셉트를 잡는 기획팀으로 활동했다. 프로젝트의 방향을 논의할 때면 기획팀 서상혁이 자리를 마련했고, 이후 실제 앨범 발매를 앞두고는 저작권 업무를 비롯한 앨범 발매 관련 실무를 이윤혁이 맡아 진행했다. 이들은 이번 앨범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처를 직시하지 못했던 과거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겪고 있는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한 시도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시지보다는 좋은 음악으로’ 이야기를 건네길 원한다. 2012년에 시작한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었는지, 세 번째 앨범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어떤 고민과 시행착오를 겪었는지를 직접 듣기 위해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에서 기획팀을 만났다. 음악으로 ‘위안부’ 문제와 여성을 이야기하다 Q. 안녕하세요. 먼저 웹진 <결> 독자분들께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말씀해주세요. 송은지 : 저희 할머니께서 오랫동안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셨어요. 할머니가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회가 여성의 신체에 부여하는 기능이 시효를 다했을 때 여성이 소외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언젠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위안부’ 할머니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할머니에서 출발한 씨앗이 ‘위안부’ 할머님들에 대한 작업으로 이어진 거죠. 여러 의미를 담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2006년 무렵에는 시각을 확장하고 싶어 뮤지션들끼리 여성주의를 공부하는 모임을 하기도 했어요. ‘릴리스의 시선’이라는 모임이었는데, 함께 책을 읽고 토론도 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 모임에 있던 멤버들이 1집에 많이 참여했죠. 모임 멤버들에게 여성 뮤지션들의 시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노래해보자고 제안했어요. 이후에 2집까지 발매하자 수익금이 조금 발생했는데요, 이번 3집은 수익금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결정이기도 했어요. 물론 ‘돈을 기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몇 년 동안 했죠. 1, 2집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에너지의 측면에서 부작용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번 작업은 결국엔 다시 음악으로 돌아와 그 여정을 마무리 짓는 과정이었어요. 혼자가 아니라 되도록 함께 이 마음을 나누는 방향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기획팀을 꾸리게 됐어요. Q. 프로젝트를 시작하던 무렵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성평등 인식이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지금은 ‘홍대 여신’이라는 말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일종의 혐오 표현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지요. 그런데 1집 때 관련 기사를 찾아보면 참여한 뮤지션들을 ‘홍대 여신들’이라고 표현한 기사들이 많더라고요. 송은지 : 당시의 ‘홍대 여신’ 트렌드가 너무 화가 나고 싫었어요. 활동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야기해주세요> 1집을 발매했을 때 ‘홍대 여신이 모였다’ 이런 식으로 보도가 되는 거예요. 여성의 아픔을 이야기하는데 칭찬이랍시고 ‘홍대 여신’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니 화가 났죠. 그런데 앨범 홍보를 해주는 기사에 대고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황보령 : “좋은 뜻인데 왜 싫어하냐”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별걸 가지고 다 기분 나빠한다’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송은지 : 사실 앨범을 기획한 의도와도 중요하게 닿아있는 부분이잖아요. ‘여신’이라고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홍대 인디신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여성 뮤지션들의 이미지가 뭉뚱그려 포장되고 소비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말 멋진 작업을 하는 여성 뮤지션들이 함께 마음을 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황보령 : 저는 정말 억울했어요. 전 언제나 장군, 칼잡이 같은 이미지였는데 여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막 화를 내고 다녔죠. (웃음) 경계를 넘어, 음악인으로서 ‘위안부’ 문제 사유하기 Q. 송은지 님이 다른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라고 하면 떠오르는 관습적이거나 구태의연한 요소들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습적인 요소란 무엇인가요? 송은지 : 제가 처음 수요시위에 참여했을 때 그런 인상을 받았어요. 거의 30년 동안 한결같은 방식으로 시위가 계속되고 있잖아요. 현장에는 매번 ‘바위처럼’ 같은 민중가요가 나오고요. 우리가 ‘위안부’ 피해자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시위에서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할머니들이 마이크를 들고 “사과하라! 배상하라!” 외치는 모습으로만 기억된다면, 사람들이 점점 더 거리를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죠.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같은 에너지로 공감하고 분노하기란 쉽지 않잖아요. 누군가는 지겨워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회피하고 싶어질 수도 있죠.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할머님들에게 힘을 실어드릴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시위가 아닌 다른 경로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일본군‘위안부’ 이슈가 역사 속에 박제된, 피해 당사자만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1집 때는 <이야기해주세요>가 뮤지션 각자의 경험을 담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작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시 참여 뮤지션들에게 ‘결과물 자체가 하나의 몸이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는데, 이제서야 말하지만 이런 모호한 제안을 다들 승낙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이윤혁 : 예전에 송은지 씨가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임에도 사람들이 피로해하는 게 보일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관습적인 요소를 환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Q. 3집에는 남성 뮤지션들도 프로젝트에 참여하셨잖아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니라 젠더 권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남성의 관점에서 이 사안을 바라보는 지점이 여성과는 다를 것 같거든요. 남성으로 태어나 자의든 타의든 젠더 권력에 가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남성 멤버들의 참여가 조심스러운 부분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서상혁 : 전 사실 역사를 바라볼 때 존재 대 존재의 관점에서 더 많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인들도 가해자로서의 역사가 있는 것처럼, 피해자와 가해자의 고정된 입장에서 벗어나 상황과 맥락을 알게 되면 다른 방식의 대화가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황보령 : 저도 전쟁에 관해서는 모두가 피해자라고 주장해요. 국가와 성별의 경계에서 벗어나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때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송은지 : 사실 1집 때도 남성분들이 참여를 안 하신 게 아니에요. 당시 모금 공연에도 남성 뮤지션들이 참여를 해주셨어요. 다만, 제가 앨범이라는 형태에 집착하는 옛날 사람이다 보니, 앨범을 여성 뮤지션의 가시적인 결과물로 구성하고 싶다는 고집이 있었던 거죠. 이번 3집에서는 1집 모금 공연에 참여해주셨던 남성 뮤지션분들에게 먼저 연락을 드렸어요. 이윤혁 : <이야기해주세요>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으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본 결과물이에요. 저희는 어쨌든 음악이라는 예술의 관점에서 이 사태를 바라보고 기록해서 후대에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이라는 매개체 덕분에 한국에서 살아가는 남성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단도직입적으로 ‘‘위안부’에 대해서 논해봐!’라고 하면 딱딱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있기 쉬운데, 우리가 이 문제를 음악으로 다뤘기 때문에 달라질 수 있었다고 봅니다.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음악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잘 모르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를 자기 자신의 문제로 사유해본 경험이 적기 때문이죠. 이런 측면에서 <이야기해주세요>는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프로젝트에 참여한 뮤지션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사유하고 각자의 언어로 만드는 과정이 절대 쉽지 않았을 거라고 보거든요. 특히 음악이라는 장르 특성상 3~4분 이내의 시간에 그 사유의 과정과 감정을 압축해 전달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창작의 고통이 있었을 것 같아요. 황보령 : 맞아요.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원래 작업하던 록, 트랜스, 테크노 장르로 전형적인 ‘슬픔’의 분위기를 탈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앨범 전체의 맥락을 생각하는 동시에 새로운 메시지를 만드는 과정이 정말 어려웠어요.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개인 앨범에 수록했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을 편곡해서 실었어요. 울지 않고 공연을 하기가 힘들 정도로 감정적인 곡인데, 가사나 메시지가 할머님들의 역사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좀 더 희망찬 느낌으로 편곡했죠. 송은지 : ‘포기한다고 몇 번 전화하려고 했었다’고 말씀하신 뮤지션분들도 있어요. 어떻게 곡을 써야 할지 다들 굉장히 어려워하시더라고요. 그래도 결국에는 완성을 해주셨고, 그럴 때마다 정말 감동이었어요. 이윤혁 : 저희 앨범이 ‘위안부’라는 주제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무거운 분위기의 음악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죠. 그런데도 기획자로서 뿌듯한 것은 곡들의 스펙트럼이 정말 다양하고 뮤지션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서 표현한 방식이 너무 다르다는 점이에요. Q. 말씀하신 대로 다른 장르와 성격을 가진 뮤지션들이 참여해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게 된 것이 이번 앨범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자칫하면 다양한 메시지들이 섞여 어수선해 보일 수도 있잖아요. 기획팀의 고민이 있었을 것 같아요. 서상혁 : 긴 대화를 통해 우리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평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리고 참여하는 뮤지션들에게 이 문제를 시작으로 평화와 연대에 관한 상상을 염두에 두고 작업해주시길 요청했죠. (이번 앨범은 CD1, CD2 두 장의 CD로 나눠서 발매됐다. 직접적으로 일본군‘위안부’를 소재로 한 노래는 CD1에, ‘평화와 공존’이라는 확장된 주제의 노래는 CD2에 담았다. -편집자) 송은지 : 3집 기획에서는 ‘평화와 공존’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기로 했기 때문에 수록곡들의 주제가 소수자 이슈와 같은 다양한 이야기로 확장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참여 뮤지션들에게 이렇게 요청을 드렸지만, 많은 분이 이슈를 확장하기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자체에 대해 고민하기를 선택하셨더라고요. 그게 각자에게 당면한 어떤 과제처럼 느껴진 것 같아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수행해주신 결과물이 앨범에 담긴 거고요. 이윤혁 : 저는 개인적으로 결과물이 오히려 더 모호하고 흐릿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거꾸로 표현하면 구호보다 음악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름다운 음악을 우연히 듣고 나서 ‘이 음악이 어떻게 생긴 거지?’ 하며 궁금해지는 게 음악 팬의 마음이고, 음악의 존재 목적이기도 하잖아요. 노래가 좋으면 이 앨범이 만들어진 계기와 과정을 찾게 되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까지 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서상혁 :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을 환기하고 감정을 느끼는데, 그 감정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잖아요. 음악 자체가 프리즘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빛이 통과하는 대상에 따라 산란하는 방식이 달라지듯, 이 음악들을 듣고 청자들은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할 수 있겠죠. 단지 좋은 음악으로 기억되길 Q.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뮤지션들의 사유가 담긴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기를 기대하시나요? 송은지 : 간단해요. 좋은 음악, 아름다운 음악으로 감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다음에 메시지가 전달된다면 감사한 일이죠. 1집에서 가장 많이 신경을 썼고 개인적인 욕망과 닿아 있던 부분은 ‘여성 음악인들의 결과물을 담고 싶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음악을) 만들어보자’라는 거였어요. 그것이 3집에서는 ‘할머니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로 발전한 것 같아서 뿌듯합니다. 서상혁 : 코로나 19가 전 세계적으로 일상을 멈추게 한 지금 상황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만 잘한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여러 주체가 협력하고 연대해야 하는 상황이죠. 마찬가지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내 것으로 가져와 당면하는 것, 실제로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황보령 : 음악이 먼저고, 구호는 나중이에요. 그게 저희가 말하고 싶은 것과 딱 맞는 것 같아요. 이윤혁 : 음악을 잘 들어주세요. 앨범에 16곡이나 실려있으니 이 중에 자기 취향에 맞는 곡이 한 곡 정도는 있을 거예요. (웃음)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와 관련해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서상혁 : 이걸 계기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야외에서 공연하기 어려운 상황인 만큼 새로운 방식으로 참여 뮤지션들과 기획 공연을 가볍게 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 송은지 :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어야 할 시점인 것 같아요. 무엇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인지 대화를 나누는 공연이나 모임이 많아지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이 앨범에 담긴 음악들도 할머님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제안이잖아요.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정말 음악은 사랑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Credit 기획/진행 : 현승인 인터뷰/글 : 금혜지 사진 : 팝콘(popcon) 일시 : 2020년 4월 21일 화요일 장소 : 서울시 마포구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
- 2023년 인터뷰 ‘틈새’의 시점에서 본 일본군‘위안부’ 운동 〈1부〉
-
기나긴 사회적 침묵 끝에 1990년대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공개 증언이 나올 수 있었던 배후에는 탈냉전과 민주화, 탈식민 여성주의 인식론이 열어젖힌 새로운 담론공간이 존재한다. 종전에 민주화운동의 하위 부문으로 치부되던 여성운동 또한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성차별과 성폭력을 비판하면서 진영이 재편되었다. 이 시기 민족과 계급, 여성 차별의 모순이 중첩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헌신했던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199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며,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야마시타 영애 분쿄대학교 교수는 1988년부터 1998년 10년간 한국에서 유학하면서 한국정신대연구소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일본인 어머니와 조선인 아버지를 둔 자이니치 일본 국적자이며, 지난 2012년 한국에 소개된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위안부 문제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박은미 옮김, 한울아카데미)의 저자이기도 하다. 내셔널한 공동체의 안과 밖, 그 사이-틈새라는 어려운 자리/비판적 위치에서 한국과 일본 사회를 경험하며 ‘위안부’ 문제를 성찰해 온 야마시타 교수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이헌미 학술기획팀장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선생님께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어떻게 관여하게 되었고, 어떤 활동을 주로 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이효재, 윤정옥 교수와의 만남은 어떠했나요? 1988년 9월에 한국으로 유학을 가서 그다음 해 3월에 이화여대 여성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유학 전에 스즈키 유코(일본의 여성사 연구자) 선생님과 교류가 있었는데 제가 한국에 가겠다고 하니 “‘위안부’ 문제도 같이 (공부)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지만 한국에 갈 땐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윤정옥 선생님이 1987년경에 일본에 ‘위안부’ 조사를 위해 오셨는데, 그때 아사히신문의 마츠이 야요리 기자가 윤정옥 선생님을 소개하는 칼럼을 쓰셨어요. 그 글을 통해 윤정옥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효재 선생님은 민주화운동으로 학교에서 퇴출된 후 일본에 잠깐 체류하신 적이 있었고 그때 우연히 뵐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효재 선생님을 지도 교수님으로 삼아 한국에 갔습니다. 이효재 선생님이 1989년 10월 가족법 개정 운동 집회에 가자고 하셔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다 같이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윤정옥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요. 제 소개를 하면서 “저도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전화번호를 물어보셨고, 그 후 이화여대 식당에서 자주 만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그다음 해 7월에 윤정옥 선생님이 ‘정신대연구반’을 만드셨을 때 저도 함께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여성학과 학생 4명이 모였어요. 윤정옥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모임을 가졌고, 그렇게 ‘위안부’ 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Q. 1988년 9월에 이화여자대학교로 유학을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에 정체성을 찾기 위해 오면서 여성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신 것이 인상적입니다. 학부 전공은 무엇이었고 유학 결심과 전공 선택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요. 초등학교는 민족학교, 중학교는 일본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부터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중학생 때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부터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술에는 국경이나 국적이 크게 관계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신문을 보다가 ‘여자는 만들어진다’라는 제목의 연재 기사를 읽게 됐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그때까지는 성 정체성도 흔들리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머리를 길러본 적도 없고 치마보다는 바지가 좋았어요. 민족학교 다닐 때 고학년이 되니까 선생님이 ‘머리를 기르라’고 하시는 거예요. 기악합주부에서는 남학생만 지휘자가 될 수 있었어요. 오빠는 집안일을 하지 않는데 저만 해야 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고요. 그런데 기사를 보니까 이게 남녀차별 문제라는 거예요. 그렇게 여성 문제에 눈을 떴고, 대학 입시 때는 이미 미술에 관심이 없는 상태였어요. 하지만 갑자기 진로를 변경하는 게 힘들었죠. 그래서 미대를 몇 군데 지원해 한 군데 합격했어요. 그렇지만 거의 학교에 가지 않고 그림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에게 미대를 그만두고 다른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일단 다니고 있는 대학을 졸업하라고 하셨죠. 그래서 졸업 후 여자대학인 쓰다주쿠대학교에 학사 입학(3학년에 편입)을 했어요. 조선어를 제1외국어로 시험을 볼 수 있었고, 다행히 국제관계학과에 붙었습니다. 그렇게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게 됐어요. Q. 한국에 처음 오신 건 언제였나요? 1979년에 처음으로 오빠와 둘이서 아버지의 고향에 갔어요. 그때는 할머니와 친척분들을 뵈었고, 7개월 후인 1980년 2월에 혼자 다시 갔어요. 한국이 너무 궁금했거든요. 전국 일주를 하면서 마지막에 서울에 올라와 이화여대를 찾아갔어요. 그 근처 책방에서 이화여대에서 출판한 『여성학』(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9)과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이효재 엮음, 창작과 비평사, 1979)이라는 제목의 책을 우연히 발견했어요. 그것을 사서 나중에 읽으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당시 일본에도 여성학이 도입되었지요. 그러나 대학에는 여성학과 같은 곳은 없었고, 저는 한국 여성사와 현재 상황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국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Q. 한국에 1988~1998년까지 10년간 계셨는데, 석사를 마친 후 유학은 끝난 건가요? 석사를 마친 후에 연구생을 거쳐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96년경에 과정을 끝냈습니다. 또 94년 가을학기부터 동국대 일어일문과에 ‘외국인 초빙교수’로 취직해서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열심히 활동하던 때였기 때문에 한국에 계속 있고 싶었죠. Q.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는데 서울의 인상이 어땠는지요. 관련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한일 과거청산의 맥락에서 종종 놓쳐지는 것이 1990년대 글로벌한 탈냉전과 한반도에서 지속된 냉전 및 남북 체제경쟁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에 자극받은 북한은 1989년 평양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했지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일본 자이니치 사회에서 이러한 모순적 변화(탈냉전이 되었지만 냉전이 계속되는)를 혹시 느끼셨는지요. 사실은 더 일찍 한국에서 유학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선언 전에는 사실상 가지 못했던 거지요(민족학교 출신인 것도 있고 해서 부모님이 말렸습니다). 그래서 88년에 서울에 갔을 때는 정말 기뻤어요. 올림픽 직전이라 활기도 엄청났고요. 자이니치 사회는 매우 복잡해요.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이니치의 경험이 다 달라요. 그런데 일본의 자이니치 조직은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이었어요. 또 당시 젊은 세대들은 이미 조총련이나 민단과 거리를 두었지요. 저의 경우는 80년대 초반에 자이니치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나그네’라는 젊은이들의 독서 모임에 가끔 나갔어요. 하지만 여기도 거의 남자들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1984년 쓰다주쿠대 학부를 졸업할 때쯤 ‘조선여성사독서회’라는 자이니치 여성 모임을 만들었어요. 주로 한국에서 구입한 여성 관련 서적을 같이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민족학교 출신자들이 중심이었지만 곧 다양해졌어요. 민족학교 출신자들이 모인 것은 아무래도 한국어 책을 읽었기 때문이에요. 저에게 자이니치 사회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어요. Q. 선생님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내셔널리즘의 틈새’,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국민국가 사이의 정체성을 ‘야마시타 영애’라는 이름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는 듯합니다. 야마시타 에이아이와 야마시타 영애, 그리고 최영애라는 세 개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민족학교 다닐 때는 최영애였고 일본 중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야마시타 에이아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어요. 그 뒤로 ‘나는 조선인(최영애)인가, 일본인(야마시타 에이아이, 영애=英愛의 일본어 독음)인가’ 고민을 했습니다. 1977년쯤 마츠이 야요리 씨 주최로 ‘아시아여성모임’이 생겼고, 대학 입학 후 우연히 그 모임을 알게 되어 나가게 됐습니다. 그 모임에서 어느 날 나의 아이덴티티와 이름에 관한 고민을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한 분이 “그럼 야마시타 영애라고 하면 어때요?”라고 하셨죠. 자이니치와 결혼한 분이셔서 그런지 감각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 발상이 너무 멋있고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바로 ‘야마시타 영애’라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Q. 야마시타는 어머니의 성인가요? 맞아요. 저는 부모님이 혼인신고를 하기 전에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혼인신고를 했을 때는 어머니와 저, 오빠 모두 아버지 국적으로 바꿀 수도 있었어요. 그랬으면 저도 최 씨가 되었겠지요. 그런데 부모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죠. 이유는 모릅니다. 그래서 호적과 주민등록상에도 ‘야마시타 에이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권상의 영어 표기도 ‘EIAI’로 되어 있던 걸 1998년에 ‘YEONG-AE’로 바꿨어요. Q.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 방일 직전, 정신대 문제에 대한 여성계(한국교회여성연합회, 한국여성단체연합, 서울지역 여자대학생 대표자협의회) 연합성명서, 7월 윤정옥 교수와의 정신대연구반(훗날의 한국정신대연구소) 발족에 어떻게 합류하게 되었고, 어떤 활동들을 하셨는지요.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님인 이영자 선생님이 이화여대 여성학과에 강의를 오셨었어요.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목의 수업이었는데 너무 재밌었죠. 그래서 인기가 많았어요. 5월 초순쯤 수업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학생들과 식사하던 중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에 가서 식민지 시대의 징용, 징병에 관해 말한다고 하는데 여성 문제인 정신대(‘위안부’의 의미로)에 대해서는 얘기를 안 한다. 우리가 이것을 요구해야 하지 않겠냐”고요. 그 말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때 거기 있던 친구들이 역할 분담을 하면서 활동을 하게 됐어요. Q.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연합성명서까지 이어진 건가요? 그렇죠. 여성학과 친구들이 다방면으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여성연합을 포함한 여성계의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로 이어졌어요. Q. 정신대연구반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그것이 나중에 한국정신대연구소로 이어지고, 정대협에서 일본 창구 역할을 담당하시면서 일본 NGO와의 연락, 통번역을 맡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대협에는 언제 합류해서 어떤 형태로 근무하고 또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요.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7월에 연구반이 생겼고, 8월경에 윤정옥 선생님에게 정보가 하나 들어왔어요. 일본의 6월 국회 회의록이었는데 “모토오카 쇼지 의원이 조선인‘위안부’에 대해 질문을 했고, 일본 정부는 ‘그것은 민간업자가 한 거다’”라는 식으로 대답한 내용이었어요. 윤정옥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죠. “이런 게 일본에서 왔는데 문제적이다, 일본 정부에 대해 공개서한을 쓰기로 했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이 한국어로 쓰시고 제가 일본어로 번역했습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의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을 회의에서도 검토했고요. 그리고 공개서한을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에 보내고 또 10월 말에 윤영애 총무님, 김혜원 선생님을 비롯해 세 분이 일본에 가서 직접 국회의원들에게 전달했어요. 제가 통역을 맡았고요. 그런데도 일본 정부로부터 어떤 답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 후 바로 정대협을 만들게 되었어요.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으니 전담 단체를 만들자는 것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까지는 교회여성연합회가 중심이었어요. 공개서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답신은 계속 없었어요. 기한이 지나고 세 번 정도 독촉장을 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참 지나서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답을 하겠으니 대사관으로 나오라고. 그래서 정대협 대표들이 대사관에 가셨어요. 근데 그때 대사관 측의 반응이 너무 실망스럽고 인간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효재 선생님, 윤정옥 선생님, 윤영애 총무님 모두 화가 나셨죠. 그때 일본 측에서 제대로 대응하고 문제에 대해 깊게 논의했다면 사태가 이렇게 커지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는 처음부터 통역이나 번역 같은 잡일을 했습니다. 김학순 님이 일본 정부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신 직후부터 정신대 신고 전화가 폭발했는데 저도 서툰 한국어 실력으로 신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벨이 울리면 긴장하며 수화기를 든 기억이 납니다. 자원활동가였던 셈이죠. 아무 직함 없이 그냥 실행위원회도 참석하고 그랬어요. 정대협 구성 단체인 정신대연구회 회원이기도 했고요. 92년인가, 이미경 선생님이 총무였을 때 정대협 조직을 개편하면서 국제협력 일본 담당이라는 역할이 생겼던 걸로 기억해요. Credit 인터뷰어: 이헌미 인터뷰이: 야마시타 영애 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일시: 2023년 5월 16일 화요일 장소: 한국여성인권진흥원(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50 센트럴플레이스 3층)
-
- 2019년 좌담 독자에게 묻는다. 2019년 웹진 〈결〉 어땠나요?
-
[독자토크] 독자에게 묻는다 2019년 웹진 <결> 어땠나요? 2019년 10월 18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는 2019년 한 해 동안 진행된 웹진 <결> 사업을 독자로부터 평가받고 의견을 듣는 독자 간담회 시간을 가졌다. 일본군’위안부’ 이슈의 전문가뿐 아니라 미디어 종사자, 연구자, 자원활동가, 주부 등 다양한 독자들로부터 웹진 <결>이 목표했던 메시지가 어느 정도 전달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웹진 <결> 편집팀은 보다 심층적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10월에 진행했던 독자 간담회에서 주요한 의견을 피력한 세 분을 모시고 별도의 독자토크를 진행했다. 독자들은 어떤 글을 가장 좋아했고, 의미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웹진을 이용하면서 어떤 부분을 불편해했을까. 독자토크 일자 : 2019년 10월 31일 사회 : 현승인, 최지은 (슬로워크) 패널 : 김연정 (요크대학교 여성학 박사수료) / 이상미 (웹진’아이돌로지’ 에디터) / 김보경 (슬로워크 콘텐츠 팀) *본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의 입장은 각 소속 기관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처음 만난 웹진 <결> 어땠나요? 현승인 안녕하세요. 독자 토크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와 웹진 <결>을 보고 느꼈던 첫인상을 말해주세요. 먼저 제 소개를 하자면 웹진 <결>의 편집을 맡은 현승인입니다. 최지은 저는 슬로워크에서 웹진 <결> 사업의 PM을 맡고 있는 최지은입니다. 김연정 안녕하세요. 저는 여성학을 전공하고 있는 김연정입니다. 요크대학에서 박사수료를 했어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늘 관심이 있었고요. 웹진 <결>을 처음 보고 ‘어..?’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실 정부에서 하는 사업이라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거든요. 생각보다 굉장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다루고 있어서 깜짝 놀란 거죠. 한국에서는 이 문제를 주로 한일관계에 치우쳐서 이야기하거나, 피해자 중심으로 많이 다루잖아요. 그런데 웹진 <결>은 그런 부분에서 균형을 잘 잡으려고 하는 노력이 보였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신이 난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걸 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긴 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걸 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했을까 싶고요. 이상미 저는 웹진 ‘아이돌로지’의 에디터 이상미라고 합니다. 저는 웹진 <결>을 처음 모바일로 접속을 했었는데, 흥미를 끌 만한 글이 몇 가지 있었어요.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글처럼 대중매체를 다루는 글이 흥미로웠어요. 관심이 가는 글에 ‘연결되는 글’들을 타고 가다가 꽤 깊은 곳까지 들어갔던 것 같아요. ‘자료해설’과 같이 어려운 콘텐츠를 보면서 굉장히 깊이 있게 다루시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피해자화하거나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서, 전체적으로 건조하게 문제를 다루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보통 ‘위안부' 문제는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둔 것이 많았잖아요. 김보경 저는 지금 슬로워크 콘텐츠 팀에서 기획 업무를 하고 있는 김보경이라고 합니다. 저는 첫인상으로 좀 어려울 것 같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어요. 웹진 <결>을 처음 들어갔을 때 보이는 썸네일 이미지들이 딱딱해서 그런지, 읽기도 전에 내용이 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랄까, 사이트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잘 차려입은 느낌이에요. 그래서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그래도 카테고리 정리가 잘 되어있고, 타이틀을 짧고 굵게 잘 써서 눈길을 끄는 좋은 요소들이 있는 것 같아요. 웹진 <결>을 주변인에게 추천한다면? 김연정 ●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웹진 <결>에서 처음 본 글이었어요. ‘위안부' 할머니를 피해자화하는 문제에는 논쟁 지점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문제를 활동가의 관점에서 평이한 언어로 잘 정리했다고 생각해요. -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이 글도 추천하고 싶어요. 대한민국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위안부' 문제를 탈분단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화두를 잘 던졌다고 생각해요. 아쉬운 점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간결하게 다루다 보니 깊이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어요. 나중에 각각의 논쟁 지점을 따로 떼어서 기획 기사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위안부'를 다루는 영화를 소개하고 비평하는 글도 좋았어요. 누군가에게 추천할 때 약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어려운 전문용어와 학술 이론이 많아서 해당 학문의 전공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이상미 ●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 김학순을 추억하다 -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썸네일이 <허스토리> 포스터 이미지여서 제일 먼저 살펴봤어요. 제가 <허스토리> 단체관람을 뛰었을 정도로 이 영화를 좋아했거든요. 이 글은 기존 <허스토리>를 다루던 기사들과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로웠어요.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관점에서 영화의 의의와 한계를 깊이 있게 짚어 주잖아요. 그만큼 호흡이 긴 편이라서 버거운 감이 있긴 하지만요. 그래도 많이 알려진 영화이기 때문에 웹진 <결>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기 좋을 것 같아요. -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일본의 페미니즘과 백래시 문제가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되어 있어요. 제가 일본 거주 경험이 있는데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 페미니즘이 가시화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늘 답답함이 있었거든요. 저도 그렇고, 제 주변에도 페미니스트들이 많기 때문에 이 글에 많은 관심을 가질 것 같아요. - <김학순을 추억하다> 이건 정말 쉽게 다가왔어요. 담백하고요. 저는 김학순 할머니를 뵌 적도 없지만, 할머니에 관한 증언들이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어요. 이건 굳이 대중문화나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어도 누구나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보경 ● 김학순을 추억하다 ●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한국 정부가 취해 온 조치와 미결 과제의 대응 방향에 대한 전망 - <김학순을 추억하다> 할머니들에 관한 에세이들이 좋았어요. 학창 시절 때에는 ‘위안부'라고 하면 늘 피해자, 상처받은 사람으로 배웠던 것 같아요. 사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모두가 알고 있긴 하지만, 깊게 알지는 못하잖아요. 큰 관심도 없고요. 이런 사람들에게 <김학순을 추억하다> 같은 에세이를 추천하면 좋을 것 같아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한 사람의 삶을 보여주잖아요. 한 명의 삶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위안부' 문제도 고민해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비슷한 맥락에서 이 인터뷰가 좋았어요. 사실 다른 글들은 많이 어려웠어요. 그런데, 이 인터뷰는 쉽게 읽혔어요. 할머니들의 활동을 출근과 퇴근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공감이 갔고요. 역사 교과서를 통해 배운 ‘위안부’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서, 피하고 싶은 어두운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글을 통해 할머니들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할머니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우리가 할머니들을 너무 피해자화했다는 사실도 깨달았고요. -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한국 정부가 취해 온 조치와 미결 과제의 대응 방향에 대한 전망> 예전에는 수요집회를 자주 나갔었는데, 잘 안 나가게 됐던 때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시점부터였어요. 합의 반대 시위가 격해지면서 관여하는 것이 점점 무서워졌거든요. 처음에는 가볍게 집회에 참여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어느 순간 부담스럽고 무섭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예민한 문제들에 대해 외면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웹진 <결>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더라고요. 이런 이야기들을 어디서 자세하게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웹진에서 이런 부분들을 계속 잘 정리해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웹진 <결> 메인 화면 웹진 <결>, 너무 어려워요!? 현승인 <결>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어렵다는 의견들이 있네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글의 길이, 가독성, 호흡 등을 모두 포함해서 웹진 <결>의 어떤 점이 어려웠나요? 김보경 전반적으로 내용이 어려워요. 특히,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등 다른 나라의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글들이 힘들었어요. 저는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최근에 친구가 제게 “일본의 식민지는 한국인데, 왜 할머니들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거야?” 묻더라고요. 사람들은 생각보다 ‘위안부' 문제의 배경을 잘 알지 못해요. 이런 상황에서 웹진 <결>의 글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전쟁의 맥락을 다 설명해줘야 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어려워서 더 안 보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오히려 전쟁의 배경보다,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초점을 맞춰서 공감대를 높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김연정 애당초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에 소화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글의 호흡이 길 수밖에 없고요. 비교적 쉽게 접근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 보이기는 하지만, 내용이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독자분들의 문해력이 상이하다 보니 어디까지 배려해야 할지도 고민이겠고요. 저는 웹진 <결>이 어쩔 수 없이 학술지적 성격을 띨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보통의 학술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학술지는 전공 중심이기 때문에 잘 모르는 내용은 자책하면서 더 공부하면 되는 문제인데, 웹진 <결>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전공이 모였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사방으로 넓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죠. 결국엔 타깃을 분리해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떤 글은 전문성을 갖춰 깊이 있게 접근하는 반면, 어떤 글은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 대중성을 고려하는 식으로요. 글마다 타깃을 달리 하는 거죠. 현승인 어려움을 알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웃음) 편집자 입장에서는 어디에 기준을 맞춰야 할지 정말 헷갈려요. 아까 이상미 님께서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가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이 글도 쉬운 글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현재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도가 높고 전문적인 콘텐츠가 대중들에게 많이 소비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글에 비해 비교적 언어의 친숙함이 높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카테고리'와 ‘엮어보기' 최지은 웹진 <결> 내용상의 어려운 점을 이야기했으니, 다른 것도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웹진은 두 가지 리터러시에 관한 고민이 있어요. 첫 번째는 텍스트 리터러시, 두 번째는 디지털 리터러시에요. 텍스트 리터러시만큼 디지털 리터러시 역시 어디에 기준을 맞춰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웹진 <결>은 상대적으로 웹에서 많이 쓰이는 기호 표현 등으로 리터러시를 낮췄다고 생각했는데, 어렵다는 의견도 많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웹진 <결>을 사용하실 때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김연정 저는 좀 어려웠어요. 디지털 문맹이라 그런지 다른 분이 말씀해주시기 전까지는 ‘햄버거' 기호를 누르면 카테고리를 볼 수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그렇다고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이 ‘전체기사보기'가 있어서 그중에서 보고 싶은 것들을 골라보는 게 편했거든요. 김보경 저도 ‘옛날 사람’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디지털 활용을 잘 못 하는데요, 저한테는 오히려 쉬웠어요. ‘카테고리’ 정리가 잘 되어있었고, ‘엮어보기' 기능이 좋았어요. 특히, ‘인물'에서 김학순 할머니 관련 글들을 한눈에 모아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상미 저는 ‘엮어보기' 기능을 알고 있긴 했는데, 사용해보지는 않았어요. 뭘 아는 게 있어야 그 안에서 엮어보든지 말든지 할 테니까요. (웃음) 그래도 좋은 기능이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특정 영화와 관련한 글들을 찾아보는 등 관심 주제가 생기면 많이 이용할 것 같아요. 나중에는 오히려 ‘카테고리'보다는 ‘엮어보기'를 많이 이용하지 않을까 싶어요. 최지은 제가 요새 느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시대에 같이 있다는 인상을 많이 받아요.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으로 캡처 후 스마트 펜으로 밑줄을 그어서 자기 글을 SNS에 올리지만, 누군가는 기본적인 웹 사이트 접근도 어려워하시죠. 이 격차가 너무 크다고 생각해요. 이 중에 우리의 독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거의 다 있을 확률이 높겠지만요. 누군가는 인쇄해서 봐야 하고 누군가는 핸드폰으로 캡처해서 보고 있겠죠. (웃음) 중심을 어디에 잡아야 할지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웹진 결 카테고리 설명 엮어보기.jpeg 2020 웹진 <결>에 바란다 현승인 혹시 앞으로 웹진 <결>에서 보고 싶은 콘텐츠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콘텐츠의 형식에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희망하는 콘텐츠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어요. 김연정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와 같은 글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보다 많은 대중에게 쉽게 읽히면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주잖아요. 개인적으로는 ‘위안부'를 재현하는 데 있어서 소녀 아니면 할머니,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재현하는 문제에 대해서 짚어주는 글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보경 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단순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위안부' 할머니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대상화되지 않은 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텍스트도 좋지만, 영상으로 담으면 그 자연스러움이 더 고스란히 표현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리 전문가분들이 글로 풀어서 설명한다고 한들, 하나의 영상만큼 그분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잘 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이상미 독자들이 흥미를 쉽게 가질만한 소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대중문화를 다루는 글이 흥미를 끌기 쉽다고 생각해요. 영화와 같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보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쉽다고 생각하거든요. 영화라든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보는 ‘위안부’ 문제와 같은 글들이 더 많아지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건 제 개인적인 바람이고요. 솔직하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처럼 계속하시면 될 것 같아요. 몸집이 커지고 콘텐츠가 늘어가다 보면 모두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해요. 최지은 하다 보면 해결될 문제라니. 엄청나게 큰 응원인데요. 김연정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 정말 찬사를 보내요.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은 전쟁과도 같다고 생각해요. 정부에서 하는 사업인 경우 내셔널리즘에 빠지기도 쉽고요. 이런 부분에서 웹진 <결>이 치열한 전쟁터에서 정치를 잘해가시면서 진행하시는 게 눈에 보여요. 앞으로 더 용기 내서 전선에서 싸워주셨으면 좋겠어요. 계속 용기를 잃지 말아 주세요. 김보경 이건 꼭 말하고 싶었어요. 제가 친구들이랑 얘기할 때 ‘위안부' 문제가 궁금하면 어디를 보라고 자신 있게 얘기를 못 했거든요.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웹진 <결>을 보라고.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좋더라고요. 현승인 좋은 의견 정말 감사합니다. 격려가 큰 힘이 됩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와 웹진 <결> 편집팀을 대표해서 2020년에는 보다 나은 웹진 <결>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것으로 2019년 독자토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내년 독자토크 때는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다시 한 번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 2019년 자료해제 일본군은 중국 점령 후 어떻게 ‘위안부’를 제도화했는가? (1)
-
상하이당안관 소장자료 『日僞上海特別市政府』 문서철 중 일본군‘위안부’ 관련 사료 일본제국은 일본군‘위안부’제도를 전시 노동 동원이나, 군동 원처럼 일원화된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여러 제도를 이용하여 불법을 은폐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운영했다. 몇몇 학자들이 위안소와 ‘위안부’를 유형화하거나 분류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작업은 특별한 ‘위안부’피해를 규명하는 데는 유용할 수 있지만, 전체상을 알기에는 부족하다. 실제로 일본제국은 전시 상황에 따라, 식민지든 점령지든 전장지든 매우 유연하게 여러 방식으로 ‘위안부’를 제공하고 이용했다. 여기에서는 중국 점령 후, 상하이에 설립된 일본 군용 ‘위안부’ 제도에 대한 사료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 다양성의 일면을 보겠다. 이번 소개할 상하이당안관 소장 상하이 특별시 관련 사료, 『日僞上海特別市政府』철은 그 다양한 일본군‘위안부’제도의 한 유형으로, 일본이 상하이를 점령한 후, 상하이 해군특별육전대(上海海軍特別陸戰隊)를 주둔시키면서 세운 친일정부를 이용해 만든 ‘위안부’제도에 관한 것이다.[1] 사료의 역사적 배경 :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상하이시에는 아편전쟁 이후,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에 의해 프랑스 조계지와 영국, 미국, 일본의 공동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중국 국민당 장개석이 중화민국으로 중국을 다스리게 된 1928년에 상하이시는 상하이 특별시로 개칭되었다. 그래서 상하이 지역은 상하이 특별시, 프랑스 조계지, 공동조계지로 나누어져 각각 행정체계가 달랐다. 상하이 특별시는 국민정부에 의해 지배되었지만, 프랑스 조계지의 경우에는 프랑스 식민지의 일부로 취급되었고, 공동조계지는 각국의 총영사와 영국, 미국, 일본 등의 관료 및 중국인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공부국(工部局)이 담당하였다. 따라서 조계지는 중화민국의 치외법권 구역이었다.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은 공동조계지 중 소위 일본 조계지로 불렸던 곳인 훙커우(虹口)에 집중해서 거주했다. 상하이에는 각기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미군, 영국군, 프랑스군, 이탈리아군이 주둔해 있었다. 일본 역시 1932년 10월 1일 소위 제1차 상하이사변 이후부터 일본해군 특별 육전대를 주둔시켰다. 주둔지는 조계지역 밖의 자베이(閘北)의 지앙완루(江湾路)에 사령부를 두었다. 주둔군의 규모는 초기 2,500명에서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하이 사변 당시에는 5,000여 명으로 늘었다. 제2차 상하이 사변 때, 일본은 해군 특별 육전대 이외에도 육군으로 구성된 상하이 방면군을 파견하여 시가전을 벌였다. 그 결과 상하이 특별시를 점령하고, 1937년 12월 첫 친일정부인 대도(大道) 정부를 앞세웠다. 1938년 10월 이후 난징(南京)에 세워진 친일정권인 유신정권이 들어서자 대도 정부를 없애고, 상하이 특별시로 편입했다.[2] 1941년 상하이 방면군과 함께 황푸장(黄浦江)에 정박해 있는 미군함과 영국포함을 장악하여, 공동조계를 접수한 일본은 상하이 지역 전체를 손아귀에 넣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군은 이 시기에 생산된 사료이다. 사료의 의의 및 금후 연구 방향 본 상하이 특별시 관련 자료는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한 후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군의 행정력이 모두 미치는 상하이 특별시 지역에서의 위안소 설립과 '위안부' 동원, '위안부' 및 위안소 관리 등 제도 설립에 일련의 행정문서이다. 일본군과 점령지 친일정권이 합심하여 일본군‘위안부’제도를 만들어 갔던 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일본군과 상하이 특별시는 1939년에는 일본군을 위한 오락소 및 위안소 개설과 ‘위안부’동원에 관련한 문건을 주고받았고, 1941년에 이르러서 ‘창기취체규칙’ 등 관련법을 만들었다. '창기취체규칙'은 기본적으로 창기에 관련한 불법적 행위를 규제하는 데 목적을 둔 규칙이다. 원칙대로라면, 규칙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규칙에 따라 창기, 즉, ‘위안부’를 동원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위안소가 만들어지고, ‘위안부’ 동원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에서 ‘창기취체규칙’을 만든 것은, 일어날 수 있는 불법적 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동원한 ‘위안부’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제도적 사후 승인이라 할 수 있다. 본 사료를 통해 일본제국이 ‘위안부’ 제도를 어떻게 전쟁 수행을 위해 만들고 이용했는지를 보다 긴밀하게 연구할 수 있다. 또한 난징, 베이징, 텐진 시의 유사 사료와 비교 검토도 가능하고, 더 나아가 식민지 타이완과 조선에서 ‘위안부’ 동원체계의 유사성과 차이점 등을 다양하게 연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 위안소 설치에 관한 사료군 상하이 특별시의 행정체계는 시장을 필두로 사회국, 공안국, 재정국, 공무국, 교육국, 위생국, 토지국, 공용국으로 구성된다. 일본군이 점령한 후, 상하이 특별시는 상하이 방면군 육군 특무부가 관할했다. 육군 특무부는 상하이 육군 특무반을 두고 총무과, 시부(市府)과, 계획과, 서무과, 선전과, 조사과 등 6부로 구성하고, 상하이 특별시 정부를 앞세워 통치했다. 겉으로 보면 중국인 시장과 중국인 관료들이 행정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결정은 육군특무반에 보고·승인되는 절차를 거쳤다. 여기에서 소개할 사료는 1938년 10월 상하이 특별시를 점령한 후, 총 조계지를 제외한 지역에 일본군 위안소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관한 사료이다.[3] 사료에 의하면 일본군 위안소는 육전 대본부가 있는 자베이(閘北) 지역(지도상 1지역), 미군과 영국군의 함대가 정박해 있어 일본군이 경비하고 있었던 황푸강(黄浦江) 근처의 푸둥(浦東)(지도상 2)과 차오전(草鎮) 지역(지도상 3)에 설치되었다. 푸둥과 차오전의 주둔군들은 1941년 미군, 영국군 함대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① 소장번호 『R-3-134』 「가오챠오구 분국의 보고, 시민 양수이창이 동구포상로 6호에서 위안소 개설 상황」 「爲據 高橋區 分局 呈報 市民 楊水長 在東溝浦上路 六號 開設 慰安所 情形 祈鑑 核備 査由」 소장번호『R-3-134』의 「가오챠오구(高橋區) 분국에 시민 양수장이 東溝 浦上路 6호에 위안소를 개설 상황 보고하기 위한 예비 조사 사유에 대한 안건」은 앞의 [그림1]에 표시된 2 지역, 푸둥 지역에 설치하는 위안소에 관련한 사료이다. 본 사료는 상하이 특별시 경찰국 보고문건으로 상하이 특별시 경찰국장이 시장에게 보내는 문건이다. 첨부 문건으로는 명부와 지도가 있다. 1939년 2월 25일, 푸둥의 둥고우(東溝) 분주소의 순관(巡官), 즉 경찰이 가오챠오구(高橋区)의 분국(分局)에 보고한 것을 토대로, 상하이 특별시 국장이 시장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이 문건을 보면, 위안소를 개설하려는 시민 양수장은 상하이 특별시의 「지령」으로, 일본군 푸둥헌병대와 둥고우육군경비대, 둥고우지도관공소 등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위의 기관에서 허가를 받은 양수장은 위안소 개설허가증과 더불어 위안소 고용인원의 성명, 연령, 출신지 등을 기록한 명부, 위안소 약도를 갖추어 지역 경찰서에 보고하게 되어 있다. 먼저 위안소에서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사고가 났을 때는 위의 헌병대, 육군경비대 등에 보고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 위안소는 일본 육·해군을 상대로 하는 것으로 “중국인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위안소에는 위안소를 관리하는 고용인과 통역, 그리고 위안부 7명을 고용하고 있다. 고용인으로는 남성 1명과 46세 여성 1명을 고용했다. 위안부는 7명으로, 연령별로 보면 23세 1명, 22세 2명, 21세 1명, 20세 1명, 17세 1명, 15세 1명을 고용하고 있다. 위안부들의 출신지는 상하이 3명 창수(常熟) 1명, 단양(丹陽) 1명, 창저우(常州) 1명, 장두(江都)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1939년 당시 15세의 여성도 고용되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② 소장번호 『R1-4-364』 「가오챠오 경찰서 보고에 의하면 양수이창이 차오전(草鎭) 71호에서 위안소를 개설」 「爲據 高橋警署 呈報 楊水長 在草鎭 七一號 開設 慰安所 抄具 略圓 轉報鑑核備査由」 소장번호[R1-4-364] 가오챠오 경찰서 보고에 의하면 야수이창이 차오전 71호에서 위안소를 개설 본 문건은 상하이 특별시 경찰국에서 시정부로 보내는 보고건이다.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이 문건은 상하이시 정부 「지령」으로 분류되는 서류이다. 결재라인은 주임, 과장, 주임 비서를 거쳐 비서장에서 시장까지 거치는 문건이다. 본 문건에서 나오는 위안소는 앞의 [그림1]의 3 지역이다. 1939년 10월 13일 난탕자이(南塘宅) 39호에 고용인 1명 통역 1명 기녀 5명, 여고용인 1명을 두고 양수장이 위안소를 개설했다. 위의 사료에서 위안소의 개설 목적은 일본군의 오락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기녀 중 특히 초심자(純系)는 일본군에게 공급하기로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초심자를 일본군에게 공급한다는 것은 원래 기녀가 아니었던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난탕자이 39호 위안소는 1940년 12월 26일, 영업 부진이라는 이유로 기녀 5인, 남녀 고용 3인과 함께 차오전 71호로 장소를 옮겼다. 위안소의 장소를 옮길 때도 일본군 푸둥북부대 연락관 사무소, 일본군 푸둥헌병분견대 및 가오챠오경비대, 차오전 부대에서 영업허가를 받았다. 이 서류에서는 핫토리(服部) 반장의 소속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다른 문서 등에 비추어 보아 일본군 특무기관의 지역반 반장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관련해서는 좀 더 조사가 필요하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각주 ^ 이 사료는 2013년 「한·중 연구자 네크워크 구축과 상하이·난징지역 ‘위안부’관련 자료조사 ^ 神戶輝夫, 「日中戦争における文化侵略(4)」, 『大分大学教育福祉科学部研究紀要』,2001년. ^ 지도는 다음 사이트에서 인용하여 필자가 사료에서 위안소 설립지역을 표시 가공했다. https://minkara.carview.co.jp/userid/203735/blog/c89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