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결>은 202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박필근’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경북지역의 유일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로 알려지는 그는, 일본군에 의해 16세 당시 강제로 끌려가 공장에서 위안소로 옮겨져 2차례의 탈출 시도 끝에 겨우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포항의 작은 집에서 포항여성회를 비롯한 지역의 많은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박필근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지역 창작자들이 함께 모여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을 만들어 그의 삶을 알리기도 했었죠.
이렇게 역사는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를 넘어 단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박필근과 또다른 많은 박필근들. 그 모든 소중한 이름을 우리가 계속해서 불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2021 기림의 날 특집] 박필근을 만나다
1. [논평] 박필근을 기억하다
2. [포토스토리] 사진으로 만나는 박필근
3. [에세이] 소중한 우리 할머니, 박필근 - ‘시간과 기억을 잇다’
4.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창작판소리 ‘박필근뎐’과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노트
1994년 1월 12일[1] 박필근 생존자를 만났을 때, 필자는 예순일곱 살로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열여섯 살 당시 입은 피해가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음을 강하게 느꼈다. ‘남사시러바[2]’라며 고개를 숙이고 울먹울먹 하는 모습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포항여성회가 2019년에 진행한 「박필근 할머니와 가족 구술생애사」(이하 「구술」로 표기)에서도 “그 말 모하니더(못한다)”, “넘사시럽니더” 하며 인터뷰가 중단되는 상황이 몇 차례나 반복되었다고 한다[3]. 이 글에서는 위안소로 동원되는 상황을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2019년 위와 같이 당신을 소개했던 박필근은 1928년생으로 2021년 현재 아흔네 살이다. 1994년 당시 조사에서는 경북 영일군이었는데 1995년 포항시로 통합되었다. 60여년 흙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다 2019년부터 새로 지은 집에서 지내고 있다(경북도민일보 2019. 4.22). 많은 아픔과 역경을 겪었는데 남은 생은 건강하고 평안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에는 잘 살았고 막내로 귀여움 많이 받았는데 감자와 콩이파리 먹던 이야기는 40년대 이후 공출[5]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오빠들과 남동생은 학교에 보냈고 특히 남동생은 육군사관학교까지 나왔다.(2019. 6.30 녹취문)
일제강점기에 이렇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여성들이 일찍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흔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1938년 3월 경부터 조선 남부에서 여성들을 군에 봉사하게 할 목적으로 전쟁터로 동원한다는 ‘유언비어’가 발생하여 전역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7] 『매일신보』도 「조혼하지 말자! 여자는 징용치 않는다」(1944. 5.16)고 보도할 정도였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초대 공동대표였던 고 이효재 교수도 “나는 일제의 처녀공출 위협을 직접 겪었”다(『동아일보』1997. 2.12)고 했다.
이런 막내를 보낸 부모들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박필근은 “우리 어매 매일 저녁 울고, 그 나 때문에 일찍 돌아간 기다”라고 한탄했다. 열여섯 살이었다고 하니 1943년경으로 추정된다. 94년 조사에서는 차에 타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구술」에는 일본 순사가 탄 트럭이 왔다고 하고, 6.16 녹취록에서는 아들이 들은 것에 의하면 “열여섯에 붙들려 가가....방직공장 취직해준다 하믄서 데리고 갔다 하대”.
박필근뿐 아니라 1942년 일본으로 간 김봉이(가명)의 경우도 일본 모집 공장이라고 쓰인 영장 통지서가 나왔다고 한다.[8] 그런데 여성들은 영장이 나오는 국민징용령[9]의 대상이 아니었다. 여성노무 동원을 위해 1944년 8월 23일 공포·시행된 여자정신근로령(『매일신보』 1944. 8.26, 8.28. 참조)에 의해서도 영서(令書)가 나올 수 있는데, 조선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동원하지 않았다. 1944년 4월경부터 조선총독부의 이른바 ‘관의 알선지도’에 의해 2년 기한으로 항공기제작공장, 기계제작공장 등지로 동원되었다.[10] 모리야 요시히코(守屋敬彦) 전 교수의 의견을 참고하면 여기서의 영장은 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안부’ 동원에 관여한 행정기관에서 공장에 간다는 명목으로 임의로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11]
조선에서는 경찰이 ‘군위안부’를 직접 징모하거나 인솔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경찰은 도항에 필요한 신분증명서를 발급하였고 징모에 협력하였다.[12] 당시에 관부연락선[13]을 타려면 경찰서에서 발급한 도항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일본인동 뭐 북해도인동 뭐 일본이지.” 담이 높은 공장으로 들어갔다. 기숙사가 있어서 몇 명이서 한방을 썼다. 처음에 베 짜는 공장을 보여줬다. 기숙사에 가두어 놓고 앉아있었다. “지키고 있는 거 많~엤지요. 그 지키고 있는 거 일본 말로 ‘게비(경비)’ 들이라 카대요.” 같이 있던 애들이 “(도망) 가면 마 죽인다 카더이다.”
거기서 파란 군복[14]을 줘서 입고 머리를 단발로 잘렸다. 이름표도 달렸다.
“모자도 ‘센토보시(전투모)’ 일본놈들 쓰는 거 쓰고예”(「구술」)
“저거가 일본말 하니 내 아는교, 내 조선말 하니 저거가 아는교?” 나중에 뭐 엄마는 ‘오까상’이고 아부지는 ‘오또상’이고 할머니** ‘오바상(할머니)’이고, ‘오지상(할아버지)’이고 이런 간단한 일본말을 일본 남자가 가르쳐줬다.
새벽에 종 흔들어가(흔들어서) 일본남자가 깨웠다. 그는 군복[15]을 입고 어깨에 뻘건 게 있었던 것 같다. 기숙사에 있던 식당에서 ‘하시(젓가락)’를 가지고 밥 한 숟가락 먹고 ‘덴고(점호)’를 하고 훈련을 시키주고. “체조 하고 뭐 이러니까네, 체조를 할 줄 알아야 하지요?” ‘유미유까바[우미유까바 바다로 가면] 야마유까바(산으로 가면)’[16] 군가를 불렀다. “훈련(하면서)도 맞고 얼렁 안 가면 얼렁 안 간다고 짝대기 집고 그냥 때리는 거”, ”못 하면 차고 때리고“
“며칠에 한번씩 군인동 일본 사람인동 우리를 끄집고 가가요, 희한한 짓도 다 하고요.”
컴컴하고 창고도 같고 학교도 같은 데 같은 방에 있던 8명의 여자들이 교대로 너이(4명)밤에 불려나갔다. 바닥에 뭐가 깔려있었다. 창고가 컴컴해서 “그 안에 일본놈인동, 군인동, 한국놈인동 모르죠”. 거기서 말을 안 들으면 방망이로 아무 데나 때렸다. 일이 끝나면 기숙사로 다시 데려다 줬다. 창고에 갔다 오면 “개구리같이 퍼져가 일어서지도 몬하고 말로 다 몬한다.”
한 일년쯤[17] 있다가 “그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요. 마 여기 있어도 죽으, 그래 난 죽는교. 우리 엄마나 한 번 더 보고 *자고 그래 나갔지요. 이래 변소 가니까 구녕 요만한~ 게 어여어여 가지고 고 구녕을 내가 가, 밤중에 깄지요(기었지요). 십리를 깄다 카먼 알지요. 같은 방에 있던 여자 서이 나왔니더[18]”
「구술」에 의하면 탈출에 성공한 것이 두 번째였고 첫 번째 탈출시도는 실패하여 구타를 당해 다리에 ‘험태(상처)’가 생겼다고 한다.
집에 와서 곧 해방이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1945년 2월경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필근은 기차로 부산으로 이동한 후 관부연락선을 탄 것으로 추정되고 귀국할 때도 재일동포가 연락선을 태워줬다고 한다[19]. 동원된 장소가 일본 시모노세키(下關)[20]가 있는 야마구치현 부근이 아닐까 추정한다.
당시의 충격으로 창고에서의 세세한 상황을 잘 기억하지 못해 “누가 다녀갔는지 몰랐다”고 하여 노무자를 상대한 ‘기업위안부’[21]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아들에게 “첨에 가면은 그 그 일본 군인들이 ‘나래비(줄서기)’를 선다 카드라”(「구술」) 하는 것으로 보아 군위안소로 판단했다.
박필근 생존자처럼 공장에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낮에 ‘덴꼬(점호)’를 하고 군가를 부르며 체조 훈련을 한 점에서는 여자근로정신대와 비슷하고 밤에 창고 같은 건물로 이동해서 일본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던 경우는 처음이다. 1942년경 일본 나가사키현으로 동원된 H의 경우도 처음에 6개월은 공장에서 일하다 나중에는 요일을 정해 부대 근처로 가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는데, 생활하는 데는 따로 있었다고 한다.[22] 여성들을 공장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하고 교대로 위안소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대개 위안소에서 생활하면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던 것에 비하여 사는 곳과 위안소가 분리된 점도 다른 점이다. 일본의 경우 오키나와를 제외하고는 군위안소가 많지 않기에 일본 내의 군위안소에서 피해를 입은 이번 사례는 귀중하다.
1991년 김학순 피해자의 공개증언 이후 일본정부는 고노담화(1993. 8.4)[23] 등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사과했다. 그 후 2007년 아베 내각에서는 “위안부 ‘강제연행’을 했다는 문건[24]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실체를 부정하며 2015 한일 ‘합의’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국가범죄와 전쟁범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본군 위안소는 군 시설이며 국가(군·정부)에 의해 성립되었다.[25]
고향으로 돌아왔어도 조그마한 동네라 수군수군 흉보는 마을사람들, “남캉같이(남들같이) 이 세상 못 살아보고” 아들, 딸과 살기 위해 부지런히 품을 팔아야 했던 박필근의 귀국 후 고난도 “그 말도 다 몬합니더”.
관련 자료를 보면 경상도 출신 여성들이 위안소에 많이 있었다는데 2021년 현재 경북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존자는 박필근뿐이다. 포항여성회에서 정기적으로 방문할 때마다 쌀을 사달라고 요청하시면서 새 쌀은 쌓아두고 묵은 쌀을 드신다고 한다. 살아오면서 얼마나 힘드셨으면 저러실까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시 한 번 아들과 딸 그리고 포항여성회의 보살핌을 받으며 건강하게 생활하시기를 기원한다.
“일본놈 사과도 받고 싶고 배상도 받고 싶은” 박필근 생존자의 바람이 살아있는 동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성폭력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역사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일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