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피해자법에 대한 역사적 검토: 보호·지원을 넘어 인권의 문제로

이재임

  • 게시일2023.07.31
  • 최종수정일2023.08.21
본고는 필자의 2021년 석사논문 「일본군‘위안부’ 피해와 피해자의 의미: 한일청구권협정 부작위 위헌소송을 중심으로」의 2장의 2절과 3절을 수정, 보완하여 작성한 것이다.

 

2023년은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이하 위안부피해자법, 법률 제4565호)이 제정된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1993년, 위안부피해자법은 “국가가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하여” “일본군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를 “보호하고 지원”할 것을 명시했다(제1조 목적). 현재 이 법은 여러 차례 개정되어 피해자들의 생활 안정과 복지뿐만 아니라 국민의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변모했다.

30년의 세월 동안 위안부피해자법은 한국 사회의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그 피해자들을 보는 시각의 변화를 반영하며 바뀌었고, 또 그것을 바꿔온 기제이기도 했다. 가령, 현재로선 당연해 보이지만, 국가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변화는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이 글에서는 법 제정 30주년을 맞이하여 위안부피해자법의 제정 경위와 내용의 변화, 그 의미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1. 위안부피해자법의 제정 경위

위안부피해자법은 1993년 3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부 의안으로 제출되어 같은 해 4월 국회에서 통과되고, 6월에 제정되었다. 이러한 법안은 일본 정부에 법적 배상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한일 간 도덕적 우위는 가져가되 피해자는 우리 정부가 구제하겠다는 방침에서 나온 것이었다.[1] 외무부는 법 제정이 당시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 제기한 손해배상소송,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유엔 인권위 제소와는 별개의 조치라고 밝혔다.[2] 이러한 조치에 일본 정부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언론들은 보도했다.[3] 

법에 따른 지원으로는 피해를 신고한 생존자에게 생활보호기본금 500만 원 및 생활지원금 15만 원 지급, 영구임대주택 입주, 의료 무료 혜택 등이 결정되었다. 외무부에 따르면 이러한 금액은 법규나 제도상의 제한, 다른 국가지원대상자와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정한 것이었다. 외무부는 근로정신대나 강제징용자 등 다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선 장기적 대책을 마련할 것이지만, “종군위안부 보호 조처를 먼저 다룬 것은 가장 반인륜적이고 해결이 시급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4] 

이러한 조치는 단순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경제적 상황이 열악하다는 실상이 알려졌기 때문은 아니다. 국가 차원의 보호·지원을 요구하는 일본군‘위안부’ 운동[5]의 목소리와 그것을 추진하려고 했던 외무부의 시도는 이전 정권부터 있었다. 그렇다면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기점으로 한, 굴욕적인 대일 외교를 청산하라는 운동의 지속적인 요구가 한국 정부의 일견 급진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움직임을 만들어낸 것일까? 먼저 한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급진적’이었다거나 그렇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화를 둘러싼 운동의 흐름과 한국 정부의 대처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1990년대 냉전의 붕괴는 뒤늦게 2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를 불러왔고, 1987년 민주화와 함께 한국 사회는 되돌아온 식민지기와 전쟁의 기억, 그것에서 비롯된 고통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두고 들끓었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원폭 피해 및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 한일 여성 연대를 기반으로 한 기생관광 반대 운동의 교차점에서 등장했다.

1990년 10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외 여성단체들은 한일 정부에 일본 정부의 ‘정신대 문제’에 대한 사실인정, 공식사죄, 보상, 역사교육 등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으나 거듭된 부인과 책임회피가 이어졌다.[6] 이에 맞선 1991년 8월 김학순의 기자회견에서의 공개 증언, 그리고 12월 일본 정부에 대한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소송’ 제소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 간 현안 과제”로 ‘격상’시켰다.[7] 

故 김학순님의 1991년 12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 기자회견 모습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1992년 1월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위안소 제도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를 보여주는 자료를 발표하자, 가토 내각 관방장관은 정부의 관여를 인정하고, 관계성청 자료조사 방침을 발표했다. 곧이어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국 정부는 선 진상규명, 후 보상 또는 배상 방침을 세우고, 자체 진상규명 작업을 맡을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 구성 계획을 밝혔다. 이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는 한국 정부의 “피해 여성에 대한 응급생활보호조치”를 요구했으나 묵살되었다.[8] 

이에 비하면 김영삼 정권의 위안부피해자법 제정은 한발 나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여전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외교 관계의 장애물로서 해소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고, 진상규명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일본 정부의 배보상을 정부 차원에서 요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993년 8월 진상조사 발표와 함께 설치, 관리 및 이송에 관해 구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한 고노 내각 관방장관 담화에 한국 정부가 만족하며 이 문제를 더는 한일 외교 현안으로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9] 

정대협은 위안부피해자법 제정을 환영하긴 했으나 이것이 일본 정부를 대신한 “물질적 보상”인지, “민족 수난의 희생자에 대한 동포적 차원의 위로와 생활 지원”인지 질의했다. 또한, 중대한 인권침해[10]를 입은 피해자는 배상의 권리를 갖는 주체이며 이들을 대신해 정부가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11] 주지하듯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일본 정부의 민간을 경유한 금전적 보상이 법적 책임에 따른 것이 아닌 시혜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닌지, 그럼으로써 피해자들을 단순 수혜자로 만드는 것이 아닌지를 경계해왔다. 운동이 1996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이하 2015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을 통한 의료·복지 사업에 반대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1996년 정대협은 국민기금에 반대하는 한편, 피해자를 위해 생활안정지원금을 증액해달라고 요청했다.[12] 이러한 일본 정부의 조치를 두고 법적 책임과 정부의 향후 대책을 고려해야 한다는 김대중 대통령과 한일 관계가 경색되어선 안 된다는 외무부가 갈등을 빚었지만, 1998년 5월, 한국 정부가 2차 지원금을 지급하되, 민간의 배상 요구에는 개입하거나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 요구하진 않는 것으로 국민기금 사태는 일단락되었다.[13] 

종합하자면, 1990년대 위안부피해자법과 그에 따른 지원은 정부가 민족의 자존심과 도덕적 우위, 한일 관계를 둘러싸고 내린 타협책이자 (그래서 다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보다 신속하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 상정한 출발점이었다.

 

2. 위안부피해자법의 내용과 그 변화

먼저, 명칭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이 법의 정식 약칭은 위안부피해자법이지만,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받은 피해자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제명과 조항에 ‘피해자’가 들어간 것은 2002년 일부 개정된 「일제하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 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법률 제6771호)에서부터이다.[14] 민주화 이후 과거사 청산 운동과 반성폭력 운동의 전개가 ‘피해자’ 용어를 일상화했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겠으나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후술할 노무현 정권의 대일 과거사 청산 작업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법 개정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는 명명을 제도화한 것이라는 데서 의의가 있다. 관련해서는 다음 절에서 다루고자 한다.

현재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관련 명칭(특히 가족주의적 호칭)과 관련해 열띤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은 명명하는 작업이 갖는 정치성을 잘 보여준다. 주지하듯 일본군‘위안부’, 정신대, 종군위안부, 일본군 성노예와 같은 각 호칭은 주로 사용된 시기, 맥락이 다르며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다. 위안부피해자법 제정 당시에도 위안부라는 명칭이 적절한지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당사자의 자존심(또는 ‘프라이버시’ 침해)과 인권 문제가 있으니 성적 피해 여성과 같은 표현이 어떠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외무부가 당시 실제로 사용된 용어로서 그 역사성을 살리는 게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15] 

전술했듯 1993년 위안부피해자법은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한 자” 중 “생존자로 법 적용대상자로 결정·등록된 자”를 대상으로 “국가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들을 보호·지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정됐다. 지원 내용으로는 “생활보호”, “의료보호”, “생활안정지원금의 지급”이 있었고, “임대주택의 우선임대”도 명시됐다. 이후 위안부피해자법은 여러 번 개정되었으나 중요한 변화만 정리해보고자 한다.

스스로 인도주의에서 벗어나는 할머니들 ⓒ백정미

 

2002년 개정 법안에서는 “국가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한다는 어구는 삭제되고 피해자를 보호·지원해 “이들의 생활안정을 기”할 뿐 아니라 “기념사업을 수행”해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에 이바지”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어 2005년 개정 법안(법률 제7637호)에서는 기념사업이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것임을 명시하게 되었고,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을 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되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수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념사업 등의 사업내용도 획정되고 다양해졌다. 지원 내용 역시 점차 확장되었다. 

이처럼 피해자뿐만 아니라 국민을 대상으로 한 기억/기념 조치의 제도화, 피해 회복을 인권이라는 중대한 가치와 연관 짓는 법문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보는 시각의 전환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사회공동체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해야 할, 공적 역사/기억의 일부로 삼게 된 것이다.[16]

이러한 2000년대 법 개정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의 국제인권레짐의 정착과 과거사 청산작업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노무현 정권은 과거사 피해자들의 고통의 치유 및 해소가 사회 재통합과 화해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를 위해 과거사청산 메커니즘을 이행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17] 피해자 보호·지원에서 나아가 이들의 명예회복, 진상규명, 기념사업, 역사교육을 법에 명시하게 된 것은 20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요구해온 바가 그 법적 기반을 다지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2005년 개정 법안이 제2조의2(국가의 의무)를 추가해 “진상규명”과 “역사교육”에 대한 적극적 노력, 그리고 피해자 “발굴”과 생활 안정을 위한 조치 강구를 국가의 의무로 명시한 데 이어 2017년 개정 법안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법률 제15207호)은 “피해자의 권리·의무와 관련된 정책” 수립에 있어 피해자 등의 의견 청취, 국민에 “정책의 주요내용”의 “적극 공개”를 규정했다. 

이러한 2010년대 후반의 법 개정은 2015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국민과 같이 호흡하는 민주적 절차와 과정”이 없었음을 문제화한 문재인 정권에서 이뤄졌다.[18] 2015 위안부 합의가 고위급 외교 인사들의 비밀협상으로 진행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처음으로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위안부피해자법의 제·개정에 따른 변화>

 제명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제·개정 시기

1993년 제정, 시행 2002년 일부개정, 2003년 시행 2005년 일부개정, 2006년 시행

2017년 일부개정, 2018년 시행

정의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일본군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성적학대를 받으며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 좌동  좌동 
대상 일군위안부 중 생존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활안전지원대상자 등), 국민 좌동  좌동 
담당 부처 보건사회부 여성부 여성가족부  좌동 
목적

국가가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하여 이들을 보호하고 지원함

피해자를 보호·지원하고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기념사업을 수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을 기하고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에 기여함 피해자를 보호·지원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기념사업을 수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을 기하고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에 기여함 좌동 
지원 내용 생활보호, 의료보호,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임대주택 우선임대 생계급여, 의료급여,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임대주택 우선임대 생계급여, 의료급여,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간병인 지원, 임대주택 우선임대, 국적회복 등의 지원 생계급여, 의료급여,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간병인 지원, 장제비 지원, 임대주택 우선임대, 국적회복 등의 지원, 법률상담 등의 지원
사업 내용 X 기념사업, 역사적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 및 조사·연구, 교육·홍보 및 학예활동 기념사업, 역사적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 및 조사·연구, 교육·홍보 및 학예활동, 
국제교류 및 공동조사
기념사업, 역사적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 및 조사·연구, 교육·홍보 및 학예활동, 피해자의 명예회복 위한 국제교류 및 공동조사 등 국내외활동, 위령사업
국가의 의무 X X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인권증진을 위하여 진상규명·올바른 역사교육 등에 대한 적극적 노력, 피해자의 적극적 발굴과 안정적 생활유지 위해 필요한 조치 강구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인권 증진 및 이와 관련한 진상 규명, 올바른 역사교육 등을 위한 국내외적 적극 노력과 필요한 조직과 예산 확보, 피해자의 적극적 발굴과 안정적 생활유지 위해 필요한 조치 강구, 피해자 권리·의무 관련 정책 수립시 피해자(그 대리인 포함) 의견 청취 및 정책 주요 내용 국민에 적극 공개

 

3. 위안부피해자법의 제·개정의 사회적 의미

첫째로, 위안부피해자법이 최초 법이 제정될 때처럼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하여” 보호·지원을 하는 데서 나아가 “복지증진” 등 복합적인 목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인도주의적 대응은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인해 기본적인 인간적 삶의 수준을 영위하는 데 어려운 이들의 긴급한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을 의미한다.[19] 국가의 지원이 30년 동안 이어진 현재,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바가 인도주의적 대응이 아니라는 점은 쉽게 동의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법적 책임에 의거한 배상을 일본 정부에 요구해왔고, 국가가 외교행위를 통해 피해자의 이해관계를 대리해주길 정부에 요구해왔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는 누락되었으나 개인의 청구권을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한다고 선언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일본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에 대한 법적 책임은 없다는 단언, 그리고 한국 정부의 수세적인 태도의 배경이 되었다. (남성으로 재현되곤 하는) 징용·징병 피해자의 청구권에 대해 체결한 협정과 그에 따른 보상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청구권 역시 변제됐다고 여겨지게 된 점은 전쟁 피해 여성들이 마주하게 된 모순적 상황, 즉, 체계적으로 참여가 박탈된 계약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종속되는 상황을 드러낸다.

그러나 2005년 개정법의 의안이 발의되었을 당시 국가의 의무 조항에 포함되어 있던 “배상(에 대한 적극적 노력)”은 법 목적이 생활 안정과 복지증진에 있다는 사유로 삭제되었다.[20] 또한,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1항에 따라 개인 배상청구권이 소멸되었는지에 관한 해석상 분쟁이 존재하기에 제3조의 해석상의 분쟁 해결조치를 취할 의무를 다하라는, 즉,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배보상 문제를 우선 외교적으로 해결하라는 2011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21]에도 불구하고, 졸속으로 이뤄진 2015 위안부 합의는 또다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피해자 지원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둘째로, 위안부피해자법이 ‘피해자’로 그 대상을 호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전술했듯 1990년대 한국 정부의 방침이나 현실주의적 국가 외교정책의 관점에서 피해자는 잔여적 복지 지원으로 고통이 해소되어야 할 존재로 여겨졌다. 반면, 2000년대와 그 이후 과거사청산 흐름에서의 법 개정에서 ‘피해자’는 적절하고, 실효적이고, 신속한 방식으로 마땅히 피해가 구제되어야 하는 인권 주체이자, 또 그러해야 한다고 요구를 하는 정치적 주체로 여겨지게 되었다. 법의 ‘피해자’라는 호명 자체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와 피해자를 통해 우리 사회가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응답을 요청하는 것이 사회에 환기하는 과제는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일부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고령의 피해 생존자들의 고통 경감, 즉, 개개인에 대한 인도주의적 조치로 문제의 해결방식과 목적을 한정하는 것은 2015 위안부 합의 이후 강력한 흐름이 되어왔다. 전술했듯 국가의 의무 조항에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반영되었으나 누가 피해자인지, 무엇이 피해자를 위한 것인지, 피해자의 입장은 무엇인지는 계속해서 논의되어야 할 열린 문제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이라는 정의의 ‘내용’을 정하는 데 있어 우리가 계속해서 ‘피해자’ 기표를 통해 ‘당사자’를 설정할지, 법과 외교를 통한 ‘방법’을 어떻게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가져갈 수 있을지와 같은 질문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글쓴이는 양국 정부 간의 대화가 동북아안보체제의 강화를 위한 것이 아닌, 여성의 경험과 젠더 관점을 바탕으로 평화구축 메커니즘의 일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각주

  1. ^ 정부 의안. 의안번호 140239. 1993.5.7. 동아일보, “挺身隊(정신대) 보상 日(일)에 요구않겠다”, 1993.03.13.
  2. ^ 한겨레, “정부 구호조처 배경·의미 ‘종군위안부 피해’ 인도적 배려”, 1993.03.30. 
  3. ^ 한겨레, “종군위안부 물적 보상 한국 불요구방침 호의”, 1993.03.15.
  4. ^ 한겨레, “정부 구호조처 배경·의미 ‘종군위안부 피해’ 인도적 배려”, 1993.03.30.
  5. ^ 이 글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주도한 활동(1998~1990.11.16.)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0.11.16. 결성, 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의 활동을 가리킨다.
  6. ^ 한교여연 외 38개 여성단체, “공개서한: 내각총리대신 가이후 도시키 귀하”, 1990.10.17.; 한교여연 외 38개 여성단체, “공개서한: 노태우 대통령 귀하”, 1990.10.17.
  7. ^ 대한민국 국회사무처, 「제161회 국회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 제1호」, 1993.5.10., 76쪽.
  8. ^ 한국교회여성연합회(1992), 『정신대문제 자료집: 종군위안부 발자취를 따라서』, 96쪽.
  9. ^ 매일경제, “謝罪(사죄) 뜻 표명…誠意(성의) 보였다”, 1993.08.05.
  10. ^ ‘중대한(gross) 인권침해’란 국제법 규범을 위반하는, 피해자 숫자가 대규모이고 피해가 막대하며 장기적 영향을 미치는 피해를 의미한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1990년대 부상한 국제 전시 성폭력 이슈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며 국제인권법, 국제인도법에 근거해 그 불법성을 중대한 인권침해로 재정의하고 법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다.
  11. ^ 정대협,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3월 13일 자 지시에 대한 우리의 입장”, 1993.3.14.
  12. ^ 이효재·윤정옥·성봉희(정대협),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대한생활안정지원금증액”, 청원번호 150040, 1996.09.19.
  13. ^ 김수아(2000),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담론 구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석사학위 논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편찬위원회(2014),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한울아카데미.
  14. ^ 이미경 의원 등 29인, 의안 번호 1393, 2001.12.31. 발의.
  15. ^ 대한민국 국회사무처, 「제161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록 제5호」, 1993.5.17.; 매일경제, “군대위안부法案(법안) 명칭논란”, 1993.04.30.
  16. ^ 2017년 개정법부터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제11조의2).
  17. ^ 대통령비서실편집부(2006), 『노무현 대통령 연설문집 제3권』, 대통령비서실, 306쪽. 2005년 한일회담 관련 문서의 전면공개와 ‘한일협정문서공개를위한 민관공동위원회’ 구성과 후속 대책 발표, 그에 따른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법 제정과 변화한 대일기조방침의 표명은 이 지점을 잘 보여준다. 
  18. ^ 한일일본군위안부피해자문제합의검토태스크포스,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2015.12.28.] 검토 결과 보고서」, 2017.12.27, 30-31쪽. 이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 중심적 접근’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피해 여성의 존엄과 명예의 회복, 상처 치유에 있고, 피해 구제과정에서 피해자의 참여가 가장 중요하며, 정부는 피해자의 의사와 입장을 수렴해 외교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19. ^ 조시현(2012),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인도주의 문제인가?: 한·일 정부의 최근 입장에 대하여」, 『민주주의 법학』 49, 165-193쪽.
  20. ^ 여성위원회 심사보고서, 2005.6, 14쪽.
  21. ^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3조 부작위 위헌확인」 소송(2006헌마788, 2011.8.30.)
글쓴이 이재임

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젠더/사회사를 전공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여성 문제, 포스트식민주의, 몸, 젠더 정치에 관심이 있다. 「낙태와 아동학대 사이에서: 영아살해 처벌의 의미 변화에 대한 역사적 분석, 2010-2022년」(2022)을 썼다. 현재는 박정희 정권에서의 밀수·마약의 문제화에 관한 논문을 준비 중이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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