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니엔 뿌자이(明年不在)”
박차순
1922년 전라도에서 태어남. 1942년 18세에 후난성, 난징, 우한에 4년간 동원됨.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면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피해자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추운 겨울을 잘 지내고 있는지, 식사는 잘하고 있는지, 살을 에는 듯한 환경에서 한 해를 넘기는 것이 그들에겐 남들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01년부터 중국 회이룽장성(黒龍江省) 오지에서 내륙 깊숙한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 이르기까지 수십 차례 생존자들을 만나 왔다. 사진가로서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삶을 기록해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박차순을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12월이다. 그는 우한에서 차로 두 시간을 더 들어간 샤오간(孝感)시 외곽에 살고 있었다. 운전기사가 길을 찾지 못해 그의 양딸과 여러 번의 전화 통화를 하고서야 겨우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추운 날씨를 피하고자 두꺼운 외투와 털모자를 쓴 채, 가늘게 들어오는 햇볕에 왜소한 몸을 더 움츠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한국에서 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어요.” 우리말로 인사말을 건네자 그는 무기력한 눈인사로 답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지만, 지역 특유의 사투리 때문에 베이징(北京)어는 물론이고, 우한 말로도 통하지 않아 그의 양딸을 통해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중국에서의 오랜 생활은 그에게서 고향에 대한 기억과 조선말을 빼앗아버렸다. 기억나는 조선말이 무어냐고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대전, 대구, 부산, 전주’ 등 한국 지명뿐이었다. 뒤섞인 가사로 간간이 부르는 ‘눈물 젖은 두만강’, 아리랑만이 그에게 유일한 고향이었다.
인생의 얄궂음이 이런 건가
그의 어릴 적 기억은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는 것이 전부였고, 이후로 더는 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엄마의 곁을 떠나 전주 부근의 외할머니와 백부(둘 이상의 아버지의 형 가운데 맏이가 되는 형)의 손을 오가며 키워졌다. 사춘기의 나이에는 식당과 술을 파는 가게에서 일했고, 적은 임금 탓에 주인에게 빚을 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경성의 매춘굴에 팔려 갔고, 거기서 다시 중국의 위안소로 팔려 가게 되었다. 18살에 중국 후난성(湖南省), 난징(南京)을 거쳐 우한의 우창(武昌)으로 갔다. 그가 간 위안소는 커다란 호수가 있고, 장제스(蔣介石) 동상이 보이는 곳이었다. 방이 모자라 가운데를 천으로 가린 채 양쪽에서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평상시에는 계급이 비교적 높은 군인이, 일요일에는 일반 병사 20여 명이 몰려왔다. 일본인 관리자가 모든 물품을 배급하고, 외출도 같이 해야만 할 정도로 생활이 엄격했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고서 일본군은 ‘위안부’ 여성들을 일본 조계지로 집결시켰다. 자신들의 앞날을 알 수 없는 여성들은 도망치기도 했지만, 다시 잡혀와 일본군에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무서웠고,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몰랐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위안부’ 생활을 부끄럽게 생각해 결국은 남기로 했다. 현지인의 도움으로 위안소를 도망쳐 나와 샤오간 시골 마을에 살게 되었다. 당시 우한 지역의 피해자들은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해 현지에 남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박차순은 도망을 도와준 사람과 결혼을 했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위안부’ 시절의 아픔이었을까, 자신의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갓난 여자아이를 입양해 키웠다. 그리고 1970년쯤에는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해야만 했다.
겹겹이 쌓여가는 힘
그가 사는 방은 창고를 개조해 햇빛 한줄기 들지 않아 습하고 냉기 가득한 시멘트의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방안에는 난방 장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한 켠에 놓인 침대 위에 겨울 이불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따듯한 물주머니를 어루만지는 손등에 깊게 패인 주름, 도드라지게 노출된 핏줄과 검버섯이 그동안 그가 겪었을 고난을 말해주고 있었다.
겹겹프로젝트 활동을 하면서 피해자를 위해 써달라는 후원금을 모아 피해자들에게 전달했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의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돈을 직접 만지기 어려웠고, 후원금은 엄한 사람들의 손에 쥐어졌다. 직접적으로 피해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그들의 생활환경과 건강을 챙기는 일을 하기로 했다.
2013년 11월,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박차순의 집을 수리하고자 25명의 시민과 68명의 후원인이 나섰다. 그가 따듯하게 겨울을 날 수 있도록 겹겹 회원들은 전기장판, 양모 이불, 겨울 생활용품 그리고 단열을 위한 건축자재를 비행기로, 버스로, 기차로 샤오간까지 손수 운반했다. 그의 방안으로 들어오는 냉기와 습도를 차단해 단열효과를 높이고,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벽은 이중으로 단열을 하고, 천장은 10cm 두께의 샌드위치 패널로 마무리했다.
온종일 공사를 지켜보며 초조해하던 그는 초저녁 잠을 청하다 공사가 걱정되는지 늦은 밤 깨어 방으로 왔다.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방문과 공사, 달라진 방의 모습과 새로운 가구로 어리둥절해하는 그의 모습이 그저 순진하게만 보였다. 같이 간 회원 한 명이 그에게 “무엇이 제일 갖고 싶어요?”라고 묻자 그는 더듬거리며 “엄마!” 그리고 “갖…고…싶…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고향의 기억은 없었지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2017년 11월 박차순의 양딸에게 그의 안부를 묻던 중 그가 한 달 넘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에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회원 네 명과 함께 방문했다. 겹겹 회원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살려 며칠 만에 한복을 만들고, 그가 기억할만한 고향 음식인 수수부꾸미, 주박울외장아찌, 단술 등을 만들어 그에게 전해달라며 한 보따리 보내왔다. 박차순은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우리를 반가워하면서도, 계속해서 “밍니엔 뿌자이(明年不在)”라며 내년에는 자신이 없으니 오지 말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이듬해 1월 18일 그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고, 장례식에 갈 수 없어 마음이 아팠다.
[사진 설명] 겹겹 회원들이 외벽의 곰팡이를 제거하고 흰 페인트로 칠하고, 따듯한 겨울나기를 위해 창고를 개조해 만든 방 전체를 단열하고 도배로 마무리했다. 그동안 박차순은 다른 회원들과 함께 시내로 나가 처음으로 발 마사지를 받고 외식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 설명] 박차순이 어릴 적 살았던 전주에서 채취한 흙을 전해주고, 틀니 제작을 위해 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한 달 넘게 지속된 허리통증과 심한 복통을 호소해 급히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병원에서는 적절한 치료가 없었지만, 박차순은 나흘 만에 일어나 기운을 차리고 퇴원을 했다.
기사 게재일: 202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