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봉기 이야기 - "그 전쟁 속에서 용케 살아남았어."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

  • 게시일2020.11.17
  • 최종수정일2020.11.19

 

 

가와타 후미코는 2014년 한국어로 번역된 『빨간 기와집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에서 오키나와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배봉기 씨의 증언을 생생하게,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풀어낸 바 있다. 이 글에서는 배봉기 씨뿐 아니라 오키나와 주민들과 일본군 장병들의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오키나와 게라마 군도의 미군 비행기 공습이 있었던 당시 배봉기 씨와 '위안부'들이 겪었던 상황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내가 성매매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장가 중 마비키(間引き, 원래 뜻은 '솎아내기'로 이 글에서는 갓 태어난 아이를 생활고 때문에 죽이던 에도시대의 영아 살해 풍습을 뜻한다)를 노래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마비키 자장가는 예를 들자면 이런 노래다.

만약 이 아이가 계집아이라면
거적에 싸고 줄로 묶어
눈앞 작은 시내에 휙 풍덩풍덩
밑에서는 물고기가 쪼아먹고
위에서는 새가 쪼아먹고

이 자장가에서 마비키의 대상은 여아다. 이런 가사의 자장가도 있다.

계집아이면 잉께버려라
사내아이면 거둬들여라

여기서 '잉께버려라'란 '뭉개라'는 뜻의 사투리로 살해를 의미한다.

근대 초기에는 일본 인구의 80%가 농민이었다. 농민의 대다수는 소작농이었고, 이들은 수확한 작물의 34%를 토지세(地租)로 납부하고 지주에게도 34%의 소작료를 내야 했다. 당시엔 농업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확물의 양이 적었다. 소작농들은 가뜩이나 적은 양의 작물밖에 수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수확한 작물들의 대부분을 토지세와 소작료로 지불하고 빈궁 속에 허덕이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생활고로 인해 갓 태어난 아이의 생명을 끊는 풍습이 생겼고, 영아 살해 풍습을 노래한 자장가도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 아이들은 가까스로 살해를 면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집의 애보개로 보내졌다. 조금 더 성장하면 공장에서 일하거나 주인집에 기거하는 가정부로 일해야 했으며, 심지어 부모가 전차금을 받고 게이샤로 보내거나 유곽에 들여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마비키 자장가와 딸을 파는 에도 시대의 풍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성매매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1977년 가을, 친구가 아래와 같은 부제가 붙은 신문 기사를 보여주었다.

전쟁 중, 오키나와에 동원된 한국 여성
30년 만에 '자유'를 손에
불행한 과거를 고려해
- 법무성, 특별 재류를 허가(교도통신 발신, 1975년 10월 22일 자)

이 기사에서 말하는 '불행한 과거'란 위안소로 동원된 것을 의미했다. 이 기사에는 여성의 뒷모습 사진도 함께 실렸다. 나는 기사를 대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국가가 여성의 인생을 엄청나게 훼손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사진 속 여성은 그 당사자이고…….

위 기사의 당사자인 배봉기 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12월이었다. 내가 배봉기 씨의 반생애와, 배봉기 씨와 함께 오키나와 게라마 군도(慶良間諸島) 위안소로 동원된 조선인 여성들의 발자취를 좇은 책 『빨간 기와집』을 출판한 것은 1987년 2월이다. 배봉기 씨를 처음 만나고 약 10년 후에 세상에 나온 책인데 배봉기 씨의 반생애를 고스란히 담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 이상 시간을 들여도 다 쓸 수 없을 것 같아 중간발표를 한다는 심정으로 발간했다. 아직도 중간발표 상태 그대로이지만, 누군가 내게 대표작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직도 이 책을 꼽는다.

배봉기 씨를 비롯한 조선인 여성이 각각 7명씩 배치된 위안소가 있던 오키나와의 도카시키(渡嘉敷), 자마미(座間味), 아카·게루마(阿嘉・慶留間)섬은 오키나와 전투의 참담함을 상징하는 미군 비행기 공습이 발생한 섬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내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오키나와의 전투에서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1945년 6월 23일 우시지마 사령관과 조 이사무 참모장이 자결하였고 오키나와 수비군 제32군의 전투태세가 해제되었다. 이후 미국 군정의 통치 아래에서 타 지자체들과는 다른 역사를 걸은 오키나와에서는 연구자와 각 지자체 등에 의해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나 역시도 오키나와에 있는 지인과 연구자들의 도움으로 배봉기 씨와 직접 접한 주민들, 그리고 전(前) 일본군 장병들의 수많은 증언을 들었다. 또한 도카시키섬에 주둔했던 해상 정진 제3전투부대의 진중일지(陣中日誌) 등 배봉기 씨를 포함한 4명의 '위안부'가 이 전투부대 취사반에 소속되었을 당시 전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도 입수하였다.

『빨간 기와집』에서 배봉기 씨의 인생 전체를 다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주민들과 전 장병들의 증언과 자료를 배봉기 씨의 증언과 대조하며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에 도착한 이후의 상황, 특히 전시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었다.


 

 

게라마 군도 상륙과 동시에
위안소를 설치한 일본군

일본군이 게라마 군도에 상륙한 것은 1944년 9월 9일이다. 해상 정진 기지 제1대대와 제2대대가 자마미섬에 주둔했고, 제3대대는 도카시키섬에 주둔했다. 그 뒤를 이어 해상 정진 제1~3전투부대가 게라마 군도에 도착했다. 기지 대대는 기지 구축과 수비 임무를 맡았고 전투부대는 125㎏의 폭뢰 2기를 실은 상륙용 주정으로 목표 함선에 다가가 폭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돌아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특공작전을 수행했던 전투 대원은 '지원자'란 명목의 20살도 되지 않은 젊은이들이었다.  특공 선박은 전투부대에 각각 100척씩 배치되었다.

도카시키섬에서 위안소로 정해진 곳은 군항과 가까이 자리잡은 나칸다카리 일가의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와집이었다. 이 집을 위안소로 빼앗긴 나칸다카리 일가는 어업조합의 빈방으로 거쳐를 옮겼다. 축사의 가축들이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칸다카리 일가의 장녀인 하쓰코 씨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가축들의 먹이를 주러 위안소에 드나들었고, 매월 1일과 15일에는 조상 신을 모시는 제단에 향을 피우러 위안소에 들렀다. 하쓰코 씨는 그럴 때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위안소의 조선인 여성과 얘기를 나눴다.

위안소의 옆집은 군용 매점에 해당하는 주보(酒保)로 바뀌었고 그 집의 안주인인 신자토 요시에 씨가 주보 일을 맡았다. 병사들은 주보보다는 위안소에 가기 전 들르는 대합실로 신자토 씨의 집을 사용했다. 군은 도카시키 섬의 일반 주민들이 위안소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편 도카시키 마을의 여자청년단은 임원 회의에서 위안소 설치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성매매가 이루어진 적이 없는 도카시키섬에 위안소가 설치된다면 풍기가 문란해지고 여자 청년이 병사들에게 '위안부'로 오인될 수 있다는 것 등이 그 주된 이유였다. 고하구라 요코 여자청년단장 등이 위안소 설치에 반대하기 위해 제3전투부대장인 아카마쓰 가지를 찾아갔다. 아카마쓰 전투부대장은 "전투부대 구성원은 대부분 20세 미만의 지원병인데, 위안소는 나이가 많은 소집병으로 구성된 기지대 부대용으로 설치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당시 위안소는 군의 회계를 담당하는 주계부 관할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이노우에 도시카즈 주계부 하사에게도 강하게 항의했다.

스즈키 쓰네요시 해상 정진 기지 제3대대장은 마을 사무소에 근무했던 고하구라 요코 여자청년단장을 찾아가 위안소 설치 이유를 설명했다. 일본군은 주요 주둔지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있으며 현지 여성의 몸을 군인들로부터 지키는 것도 위안소 설치 목적 중 하나라고 말이다. 이를 들은 고하구라 요코 단장은 더는 위안소 설치 반대 운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도카시키섬의 위안소에 배치된 7명의 조선인 여성에게는 각자 창녀나 기녀들이 사용하는 일본식 이름이 붙여졌다. 당시 30살로 가장 나이가 많았던 배봉기 씨는 아키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사람은 24살의 기쿠마루, 하루코와 가즈코는 23살, 스즈란은 20살, 아이코와 밋짱은 16살로 가장 어렸다.

위안소가 개설되었을 무렵, 주보 일을 맡았던 요시에 씨는 눈이 새빨개지도록 울어서 퉁퉁 부어오른 아이코와 밋짱의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고 한다.

4개의 방이 있었던 나칸다카리 일가의 집은 6실의 위안소로 개조되었고 축사 일부도 위안소 용으로 개축되었다. 축사 옆 방을 배정받은 기쿠마루는 하쓰코 씨가 가축들에게 먹이를 주러 오면 종일 "산양 울음소리가 시끄럽다"라고 투덜댔다. 기쿠마루는 이 곳에 오기 전 중국에서 하루에 수십 명의 일본 군인을 상대했다며 타고난 듯 굵은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해 주변인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급하게 마무리해야 할 특공 기지 구축 작업을 마친 휴일에는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위안소를 찾아왔다. 병사들은 방에 들어오기 무섭게 각반을 풀어 놓았다. 그러면 배봉기 씨는 바로 그것을 다시 감아 놓았다. 병사가 방을 나설 때 빨리 각반을 두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군인이 방을 나서는 시간이 늦어지면 기다리던 다음 병사가 벽을 치며 빨리 나오라고 재촉했기 때문이다.

1945년 2월 중순, 게라마 해상 정진 기지 제1~3대대가 독립 대대로 개편되어 기지 부대는 일부만 남고 모두 오키나와 본섬으로 이동하였다. 대신 조선인 징용병이 도카시키섬에 들어왔다. 이후 위안소는 한산해졌다.

 

1945년 3월 23일 아침, 공격이 시작되다

1945년 3월 23일 아침, 공습경보가 울렸다. 하루코가 "언니, 빨리 피해야 돼!"라고 재촉했지만, 아무도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하루코는 네 살배기 아이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도카시키의 위안소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강을 낀 건너편 산 너머로부터 집채만 한 크기의 미군기가 나타나더니 위안소 위를 뒤덮었다.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나(배봉기)는 기쿠마루, 스즈란, 가즈코와 함께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하루코와 아이코, 밋짱은 부엌으로 몸을 피했다. 욕실에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사방에 검은 연기와 먼지가 자욱하게 차올라 앞이 보이지 않고, 천장이 삐걱거리면서 물건들이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위안소 건물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기쿠마루가 욕실을 나왔다. 나도 기쿠마루를 뒤따라 나가다 출입구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정신없이 강기슭 쪽으로 달려 가시가 무성한 판다누스(Pandanus boninensis, 일본령 오가사와라제도가 원산지인 열대식물) 수풀 속으로 숨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미군기가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고 지면은 계속해서 흔들렸다.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총탄이 귓가의 공기를 갈랐다. '이번에는 맞겠다, 이번엔 정말 맞겠다.' 나는 두려움에 계속해서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미군기가 위안소로부터 멀어진 사이에 우리 일행은 강 건너편의 방공호로 도망쳤다. 강을 건널 때 "우리도 데려가!"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위안소 앞에 허벅지가 피투성이가 된 밋짱과 아이코의 모습이 보였다. 온몸을 뒤덮는 공포에 손발이 덜덜 떨려 부상당한 두 사람까지 데리고 올 여유가 나에게는 없었다. 나는 그때 하루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부엌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잠시 공습이 뜸해진 틈을 타 오키나와 본섬에서 상관의 작전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게라마 군도에 온 스즈키 대장은 당번병을 데리고 위안소로 달려갔다. 위안소에는 중상을 입은 하루코만 남겨져 있었다. 미군기는 파도처럼 공습을 계속해왔다. 당번병이 중상을 입은 하루코를 업고 강을 건너려고 할 때 하루코는 기관총에 맞아 즉사했다. 하루코를 업고 있던 당번병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날 밤 배봉기 씨 일행은 긴급 의무실로 대체된 국민학교에 도착했고, 거기서 밋짱과 아이코를 다시 만났다.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밋짱과 아이코가 아프다고 울자 "죽은 사람도 있는데 울고 있을 때냐"라며 옆에 있던 스즈키 대장이 화를 냈다. 

배봉기 씨가 말했다.

"하루코는 스즈키 대장의 여자였으니까."

미군 공습 이후 아카마쓰 전투부대장은 지도에만 의지해 도카시키섬에서 가장 깊은 산골인 234고지에 복곽진지(複郭陣地), 즉 최후 저항을 위한 진지를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진지 구축을 위해 게라마 해협 근처 진지에서 234고지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3월 27일 오전 2시였다. 비가 많이 오던 밤이었다. 파출소 순경이 주민들은 어떻게 할지를 물으니 아카마쓰 대장은 복곽진지 예정지 뒷쪽 계곡으로 피난할 것을 지시했다. 온나 강가에 방공호를 파고 오두막을 지어 몸을 피했던 주민들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걸으며 234고지로 향했다.

다음 날인 28일에는 복곽기지 구축이 시작된 곳에서 산봉우리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편 계곡에서 330명의 주민이 자결했다. 한 가족은 방위 대원으로부터 받은 수류탄을 둘러싸고 자결했고, 어떤 사람은 낫으로 목을 베었으며 어떤 사람은 굵은 나뭇가지를 꺾어 가족을 때려죽였다. 남자가 있는 가족 중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하쓰코 씨의 부모님과 여동생도 그 골짜기에서 목숨을 끊었다. 아비규환 속의 골짜기에 박격포가 떨어졌고 하쓰코 씨는 중상을 입은 채 며칠 동안 흙 속에 묻혀 있다가 구조되었다.

도카시키 마을은 징병율이 3년동안 전국 1위를 기록했다. 어업 종사자들이 많아 마을 주민들의 체격이 좋았기 때문이다. 막사가 지어질 때까지 장병들은 국민학교나 민가에 머물렀다. 중국에서 귀환한 병사들과 일본 병사들이 남자는 전차로 치어 죽이고 여자는 강간한 후 목을 졸랐다는 등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여러 잔학 행위를 주민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27일에 도카시키 섬에 상륙한 미군은 이미 234고지 근처의 A고지로 다가오고 있었다. A고지는 주민들이 피란 중인 골짜기 근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하쓰코 씨는 먼저 죽은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미군들에게 몸을 더럽힐 바엔 죽겠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고 한다. 그 후에도 '집단 자결'이라 불리는 참극이 자마미와 게루마, 그리고 그 외 오키나와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사망자 수가 가장 많은 곳이 도카시키였다.

내가 도카시키로 갔을 때 배봉기 씨에게 하쓰코 씨와 요시에 씨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해주었더니 배봉기 씨는 "그럼 만나러 가 볼까"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그 전쟁 속에서 용케 살아남았어."

약 30년 만에 상봉한 하쓰코 씨와 요시에 씨는 배봉기 씨의 손을 잡고 감격에 젖어 떨리는 목소리로 "그 전쟁통에서 용케도 살아남았구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배봉기 씨는 두 사람의 환대에 조금 주저하는 듯 보였다. 하쓰코 씨와 요시에 씨는 복잡한 심경으로 7명의 조선인 여성들을 대했고 그 모습을 마음에 담고 있었지만, 일본어도 오키나와 사투리도 서툴렀던 배봉기 씨에게는 두 사람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하쓰코 씨는 위안소로 사용되었던 방들이 부정을 탔다는 생각에 무녀에게 액막이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마당에 사당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일까. 배봉기 씨는 사당 앞에서 합장했다. 

 


공습이 끝난 후 234고지에서의 생활

게라마 상공을 선회하던 미군기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춘 1945년 3월 24일 저녁, 배봉기 씨는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안소 상황을 보러 갔다. 완전히 불에 탄 위안소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불에 탄 옆집 근처에 화재의 잔해로 상반신이 뒤덮인 하루코의 시신이 있었다. 며칠 후 제3전투부대의 지넨 초보쿠 부관과 하루코를 평소 예뻐했던 하사관이 234고지에서 내려와 부패한 하루코의 시신을 시신이 있던 자리에 묻어주었다. 

요시에 씨는 가족이나 친척들이 찾아왔을 때 알 수 있도록 마당에 묻혀 있던 뼈를 유골 단지에 담아두었다가 도카시키 마을의 전사자와 전몰자의 영을 기리는 시라타마 위령탑이 세워졌을 때 합사했다고 배봉기 씨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렇게까지 해 주시다니 감사하네요."

숙소에서 배봉기 씨는 감동한 듯이 말하면서도 "하지만 찾으러 오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라고 덧붙였다. 배봉기 씨와 함께 조선에서 징집되어 부산을 떠난 61명 여성들의 행선지는 가족들에게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이 게라마 제도를 공습할 때 배봉기 씨 일행은 군으로부터 지급받은 모포 한장으로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총탄과 호우를 견뎠다. 공습이 잦아든 3월 말, 일행은 인기척이 끊긴 촌락 구석에서 오두막을 발견했다. 마을 사람이 공습에 대비해 지어놓은 피란용 오두막이었다. 오두막에 남아있던 식량을 다 먹고 먹을 것이 떨어지자 위안소에서 요금 정산을 맡고 있던 가네코가 군과 의논을 한다며 234고지로 향했다. 배봉기 씨와 기쿠마루, 가즈코, 스즈란도 가네코를 따라 234고지로 향했고, 이들은 제3전투부대 취사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관공서 병사 주임이었던 도야마 마준 씨도 합세해 총 다섯 명이 234고지 골짜기로 향했다. 도야마 씨가 제3전투부대의 취사장 터를 가리켰다. 그곳은 계곡물이 1m 정도 정체되는 곳으로 계곡의 폭도 둔덕도 넓었다. 맑은 계곡물이 그 곳에서만 푸른 빛을 띠어 깊이가 꽤 깊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둔덕 옆에는 찰흙으로 만든 취사반 아궁이가 있었다. 거기서 배봉기 씨 일행은 건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멀건 잡탕죽을 매일 만들었다. 게라마 공습 첫날 제3전투부대의 식량고가 불에 타 비축되어 있던 6개월분의 식량 중 2개월 분량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취사장 옆에는 짐승들이 골짜기에서 산 쪽으로 나가는 길이 있었다. 가진 것이라곤 빈약한 무기밖에 없던 제3전투부대의 작전은 어둠을 틈타 미군을 향해 돌격하는 것뿐이었다. 돌격할 때는 짐승들이 다니는 취사장 옆길을 이용했다. 배봉기 씨는 돌격에서 끔찍한 상처를 입고 귀환한 병사들을 자주 보았다. 돌아오지 못하는 병사들도 많았다.

우리가 234고지를 다시 찾았을 때 배봉기 씨는 그 당시 짐승들이 다니던 길 근처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감고 오랫동안 손을 모아 기도했다. 역사적인 가해와 피해를 큰 틀에서 말한다면 배봉기 씨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피해를 매우 가혹하게 받아들이며 도카시키에까지 왔다. 이러한 배봉기 씨가 234고지를 다시 찾아가 가해자인 일본군의 죽음을 애도하고 명복을 빈 것이다. 

하쓰코 씨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330명이 '집단자결'한 도카시키의 골짜기로 향했다. 하쓰코 씨가 속삭였다.

"마지막 분향이 끝나야 사자의 영혼이 승천할 수 있는데 여기서 죽은 분들은 승천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고 해요."

 

죽음의 공포보다 괴로웠던 굶주림

제3전투부대 취사반에 들어간 배봉기 씨 일행은 각 부대에 배급을 마치고 냄비 바닥에 남아 있는 건더기가 많은 잡탕죽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배 곯는 것은 총탄에 맞는 것 이상으로 괴로워요."

당시를 회상하던 배봉기 씨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배봉기 씨는 도카시키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루는 아카마쓰 전투부대장이 목욕을 한다기에 징용병들이 드럼통에 계곡물을 길어서 채우고 배봉기 씨가 불을 지폈다. 폭음이 들린 순간, 천막을 관통한 기관총탄이 드럼통에 탕탕 구멍을 뚫었고 뜨거운 물이 튀어 올랐다. 

"빨리, 도망가!"

이노우에 하사가 소리쳤다.

"도망이고 뭐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움직일 수 없었어."

눈앞의 커다란 나무가 폭탄에 맞아 갈라진 일도 있었고 박격포의 파편이 등 뒤로 날아온 적도 있었다. 배봉기 씨는 게라마가 공습을 당할 때도, 234고지에서도 찰나의 우연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경험을 거듭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보다도 굶주림이 더 참기 힘들었다고 배봉기 씨는 말했다. 제3전투부대의 진중일지에는 1945년 7월부터 영양실조로 사망한 병사들에 대한 기록이 잇따랐다. 영양실조로 사망한 병사의 기록은 패전 때까지 12명에 달했다. 전사나 병으로 사망한 사람들보다도 많은 숫자다.

이러한 굶주림 때문이었을까. 1945년 6월 말, 소네 기요시 일등병은 약 20명의 조선인 징용병을 이끌고 미군에 투항했다. 이때 두 명의 '위안부'도 함께였다. 배봉기 씨는 소네 일등병이 미군에 투항한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기쿠마루와 스즈란이 없었다고 했다. 

소네 일등병은 게라마 상공을 날던 특공기가 미군의 공격에 격추되어 떨어질 때마다 "아아, 오늘도 젊은이가 개죽음을 당했어."라고 우울해하며 이 전쟁에서 일본은 패배할 거라고 확신했었다. 그는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에 투항하기로 마음먹었다. 혼자서 살아남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밀고 당할 우려가 있었기에 일본군에게 함께 투항하자고 하기에는 위험했다.  그는 투항을 하기 직전에 조선인 징용병들의 수장에게 말을 걸었다. 짧은 고민 끝에 투항을 결의한 징용병들이 소네 일등병에 동참했다. 당시 기쿠마루와 스즈란은 이들과 같은 참호에서 잠을 잤었다. 배봉기 씨와 가즈코가 잠을 자던 참호까지는 징용병 수장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수용소를 나와 오키나와를 정처없이 떠돌다

계속해서 제3전투부대에 머무르던 배봉기 씨와 가즈코는 1945년 8월 26일, 마을 국민학교 교정에서 시행된 미군과 제3전투부대 사이의 무장해제식에 참여했다. 배봉기 씨와 가즈코는 그 후 제3전투부대와 함께 오키나와 본섬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곧바로 오키나와 본섬의 이시카와 민간인 수용소로 옮겨졌다. 이시카와 수용소에 언제까지 있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전쟁 이전부터 오키나와에 체류하며 미군의 작업반장을 맡고 있던 조선인 마쓰야마가 가즈코에게 드나들더니 결국 가즈코는 먼저 수용소를 나가게 되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이 세운 기획주택이나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판자 조각, 천막 등으로 얼기설기 지은 집에 머물게 되면서 수용소가 한산해진 무렵, 배봉기 씨는 수용소를 나왔다.

"처음에는 어디에 가도 마음이 불편했지. 여기에서 하룻밤, 저기서 사흘 밤, 길어봐야 일주일. "부엌일을 시켜달라."라고 부탁하면 아직 젊으니 '부엌일은 됐으니 접대나 하라'는 거야. 온종일 걷다 보니 손님은 술을 마시고 있는데 나는 졸면서 꿈까지 꾸고. 그러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면 또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져서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온다고 거짓말하고 나왔지. 온종일 걷다 보면 날이 저무는데, 깜깜해져도 잘 곳이 없으니 또 술집으로 갈 수밖에. 당시에는 작업화를 신고 있었어. 일본군의 작업화. 그걸 손에 들고 일부러 맨발로 걸었지. 낯선 나라에 와서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말도 안 통하고, 가진 돈도 없고. 자포자기 심정이었지. 인간이 그리 되더라고."

배봉기 씨는 몇 안 되는 옷가지를 챙긴 보자기 하나만 달랑 머리에 이고 일 년 동안 계속해서 걸었다고 한다. 배봉기 씨의 이야기를 듣던 내가 어두워져서 또다시 술집에 들어갈 바에야 같은 곳에 머무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짜증이 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불안해서 그래, 불안해서 그랬다고!"

배봉기 씨가 일 년간 계속해서 정처 없이 걸었던 곳은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가장 큰 전쟁의 화를 입어 잿더미가 된 중부부터 남부 지역이었다.

사람이 낯선 타국에서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가진 돈도 없는 상황에서 맨몸으로 살 수 있을까. 일 년이나 맨발로 드넓은 오키나와 땅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던 이야기는 배봉기 씨가 여러 번 경험했던 극한의 상황 가운데에서도 가장 아프게 와 닿은 극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배봉기 씨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배봉기 씨는 "아, 젠장! 나고는 어떤 곳이지? 나고에나 가봐야겠다."라고 하며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이후 배봉기 씨는 나고, 고자(현 오키나와 시), 아케나, 가데나 등을 거쳐 떠돌이 생활을 수 년째 지속하다 난조시에 정착했고, 필자는 난조시에 정착한 배봉기를 1977년 12월에 처음 만났다. 이때 시작된 배봉기 씨와의 만남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기 시작한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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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는 1943년 일본 이바라키 현에서 태어났다. 1966년에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1977년부터 작가로 활동. 1977년 말, 일본군'위안부' 피해 최초의 증언자 배봉기를 만난다. 배봉기의 인터뷰를 토대로 오키나와(沖縄) 게라마제도(慶良間諸島) 위안소로 끌려간 조선 여성의 발자취를 따라간 저서 『빨간 기와집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여성이야기(赤瓦の家―朝鮮から来た従軍慰安婦)』가 대표작이다. 이 외에도 『바로 어제의 여자들(つい昨日の女たち)』, 『류큐코의 여자들(琉球弧の女たち)』,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皇軍慰安所の女たち)』, 『전쟁과 성(戦争と性)』, 『인도네시아의 '위안부'(インドネシアの「慰安婦」)』, 『'위안부'라고 불리는 전장의 소녀(イアンフとよばれた戦場の少女)』, 『할머니의 노래(ハルモニのうた)』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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