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순을 추억하다 3 - ‘우리들이 죽고 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야스다 치세 (保田千世)시민운동가

  • 게시일2019.08.14
  • 최종수정일2019.09.05

 

‘우리들이 죽고 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들이 죽고 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김학순 할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항상 말씀하시던 이 말은 내 마음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피해자분들이 대부분 돌아가신 지금, 이 말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일본 국내 혹은 UN 인권기구 등에서 ‘‘위안부’가 성노예는 아니었다.’, ‘강제연행은 없었다.’ 등의 주장을 반복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말을 증명하듯, 지금도 전시와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1991년 12월,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처음 일본에 오셨을 때, 당시 탔던 일본항공의 학 마크가 일장기로 보여 무서웠다고 한다.  2003년, 도쿄도교육위는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학교 행사에서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의무화했고, 이에 따르지 않는 교사는 처벌했다. 의무화 이후 첫 졸업식 때, 처분이 두려워 주저하는 나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워 준 것은 김학순 할머니의 말씀이었다.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나는 차마 기미가요를 부를 수 없었다.

도쿄에서의 할머니들의 숙소는,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에 있는 와세다호시엔(早稲田奉仕園)​이었다. 나는 동료 교사들과 함께 숙소 및 재판소에서 할머니들을 도왔다. 한국어를 몰라 김학순 할머니가 ‘물 주세요’ 하시면 우유를 갖다 드리는 등의 실수가 잦았지만, 한국어와 일본어 발음이 비슷한 토마토는 좋아하셨던 것이 마음속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큰 방에 모여 함께 잠을 잤던 할머니들이 사소한 일로 실랑이를 벌일 때도 김학순 할머니는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했다. 침착한 성격과 더불어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밝히고 나섰다는 점에서 김학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았다. 강순애 할머니는 “학순 언니, 학순 언니” 하며 김학순 할머니를 잘 따르셨고, 김학순 할머니와 사이가 좋았던 황금주 할머니는 김학순 할머니가 기르던 거북이를 이어받아 길렀다. 

김학순 할머니는 당신을 만나러 온 많은 지원 봉사자를 누구나 똑같이 대해주셨다. 김학순 할머니께 ‘기념으로 사인해 주세요’ 하고 소장을 내밀면, 할머니는 표지 뒷면에 당신의 이름을 작은 글씨로 써주셨다. 친한 일본인 지원 봉사자들과 선물을 주고받던 할머니들도 계셨지만, 김학순 할머니는 모든 봉사자와 담담하게 교제하셨고, 그 자리에 있던 봉사자 전원에게 장롱에 다는 장식용 노리개를 나누어 주시기도 했다. 할머니들이 한국에서 가져와 식사하실 때 반찬으로 드시던 김치 중 김학순 할머니가 가져오셨던 도라지 김치는 처음 먹어본 맛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김학순 여성인권운동가 (제공 : 나눔의 집)

 

1994년, 전후 50년을 앞두고 국회 앞에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2주간의 단식투쟁을 했을 때, 김학순 할머니는 새하얀 한복 차림으로 앉아 장구를 치셨다. 강순애 할머니의 꽹과리 연주에 장단을 맞추기도 하시고, 독주를 하기도 하셨다. 그 자리에 도착한 자원봉사자들은 할머니의 장구 소리에 넋을 잃고 귀를 기울였다. 자원 봉사자들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김학순 할머니가 혹독한 단식투쟁을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할머니는 강한 의지로 이겨냈다.

1997년 12월,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받지 못한 채로 돌아가셨다. 나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돌아가시기 직전 동료들과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할머니의 병문안을 다녀왔었다. 병세는 상당히 악화되어 할머니는 호흡 장치를 하신 채로 주무시고 계셨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얼굴을 뵐 수 있어 조금이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식투쟁이 몸에 무리를 준 듯하다. 단식투쟁까지 한 결과가 '아시아여성기금' 뿐이고, 여성기금을 받느냐 마느냐로 할머니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그 사이에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신 것이 할머니의 죽음을 앞당긴 것 같아 일본인으로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김학순 할머니의 묘는 망향의 동산에 있다. 연고가 없는 할머니를 위해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의 공동대표이자 유족인 이희자 씨가 할머니 생전에 묘자리를 마련하는데 힘을 써주셨다. 덕분에 이희자 씨 부친의 묘 앞에 김학순 할머니와 황금주 할머니의 묫자리를 나란히 마련할 수 있었다. 이희자 씨는 김학순 할머니의 기일마다 추도식을 열었다. 5주기에는 일본인 봉사자들과 함께 건강했던 황금주 할머니도 참석하셨다. 하지만 이제는 황금주 할머니도 김학순 할머니의 옆에 잠들어 계신다. 이희자 씨는 지금도 두 할머니의 기일에 매년 추도식을 열고 있다. 김학순 할머니의 묘 앞에는, 할머니께서 생전에 가장 좋아하시던 무궁화꽃이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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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야스다 치세 (保田千世)

일본의 시민운동가. 야스쿠니무단합사철폐소송 재판지원회 회원, 전 도쿄도립고등학교 교사. 1992년 일본에서 열린 ‘위안부’ 피해자들의 집회를 보면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해마다 서너 차례씩 한국을 찾아, 주한일본대사관 집회에 참여했다. 일본에서 위안부 증언 집회가 열리면 안내를 맡았다. 2012년, 위안부 피해자 황금주(93) 할머니의 삶을 다룬 '모래시계가 된 위안부 할머니'를 번역해 출판했다. 2013년에는 지난 20여 년간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해온 개인의 경험과 황금주 할머니와의 인연을 다룬 「일본 시민사회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역사와 책임>의 기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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