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회의 1부 -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웹진 <결> 편집팀

  • 게시일2019.03.11
  • 최종수정일2019.11.12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의 발행을 앞두고 10인의 편집위원이 모여 웹진의 앞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2019년 1월 31일, 2월 25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편집위원 좌담회는 지금껏 ‘위안부' 문제가 논의되어온 방식과 한계, 그리고 앞으로 웹진 <결>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자리였다.
권명아 (동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김헌주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  소현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  여순주 ((전)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 / 윤명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팀장)  / 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 임경화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연구교수) /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 / 정용숙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 / 허윤 (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

소현숙 

본 좌담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웹진이 앞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역할을 해나갈지를 모색하기 위한 자리다. 우선 웹진 편집위원님들께서 각자 어떻게 '위안부' 문제와 접속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관한 문제의식이나 고민은 무엇인지 말씀해달라. 먼저 저부터 이야기하자면, 2000년대 초반 석사과정 때 ‘위안부’ 생존자들의 구술증언 작업에 참여하면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접하기 시작했다. 저는 여성/젠더사 전공자로서 어떻게 이 여성들의 삶과 경험을 역사 속에 기재할 것인가에 관심이 많다. 사실 식민지시기 여성의 삶을 말할 때, ‘위안부’ 경험이란 것은 일반 여성들의 경험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저는 그런 경계를 허물고 식민지하에서 평범한 여성들의 일상과 위안소로 동원된 여성들의 경험, 평시와 전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극단적인 경험에 녹아 있는 평범함이라 할까, 또는 평범한 일상 속에 감춰져 있는 극단성이랄까, 그런 연결성에 관심이 있다. 식민지하 여성들이 경험해야 했던 전반적인 차별과 억압의 맥락 속에서 ‘위안부’로 동원되었던 여성들의 경험을 역사적 언어로 풀어내고 싶다.

허윤

저는 여성 문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민족 문학 담론의 젠더를 질문하는 작업을 해왔다. 민족 문학 속에서 주체가 되는 여성은 주로 피해자로서의 여성인 경우가 많다. ‘위안부’ 서사 역시 (마찬가지 목적으로) 동원되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어서 늘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저의 세대적 경험상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위안부’의 표상은 [여명의 눈동자]였던 것 같다. 뭔가 가련하고 비장한, 하얀 한복을 입은 사람의 이미지가 박혀있어서,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위안부’ 이미지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것은 박사 논문을 쓰면서부터다. 1950년대 한국문학에서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정신대’를 기억하는 사람, 소문으로 들어본 사람이 오히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정신대’ 여자들을 재현하지 않았다. 당시는 ‘위안부’라고 하면 미군 ‘위안부’를 지칭하는 시기였는데, 미군 ‘위안부’를 타락한 여자로 재현하면서 "저런 여자들이 민족을 더럽히고 있다"라는 방식으로 담론을 재생산하곤 했다. 일본군 ‘위안부’가 부재한 기억 장에 관심을 가졌던 셈이다.

이선이

'위안부' 문제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딩링이라고 하는 중국 문학가의 작품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딩링이 1941년에 쓴 「내가 노을마을에 있었을 때」는 일본군 ‘위안부’가 되어야만 했던 중국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일본군에 의해 성폭력을 당하고 ‘위안부’가 되어, 이후 공산당에 의해 스파이로 활용된다. 그런데 그 여성을 바라보는 중국사회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고 이에 대한 작가의 위화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딩링의 작품을 접한 이후 ‘위안부’ 피해자 구술집을 통해 중국의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딩링이 문제를 제기 했던 방식처럼 지금의 내가 ‘피해자’의 시점에서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용숙

서양 현대사, 독일사 연구자다. '위안부' 문제 관련 전공자가 아니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인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는 뭔가 복잡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주제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서양사 연구자는 한국 사회의 어떤 필요나 요청에 부응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2015년에 열린 여성 인권과 전시 성폭력을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해외 사례 발표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위안부 문제’와 간접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한 지식도 인식도 부족한 상태에서 유럽 사례를 가지고 발표를 했고, 이후 내용을 더 보강하여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유럽의 전시 성폭력과 독일군과 친위대가 기획하고 실행한 강제성매매에 대한 논문을 썼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과거사 청산의 모범국”으로 알려진 독일에서도 전시 성폭력에 대한 문제는 반세기 넘게 침묵 되었고, 그 기억 자체가 억압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도 공론화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제대로 된 피해자 인정이나 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문제들을 보면서 서양에서 전시폭력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동아시아와 비교할 지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순주

한국 정신대연구소 활동을 20년 넘게 했다. 주로 증언집 작업을 해왔다. 한국 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뿐 아니라 중국 등에 계시는 할머니까지. 굉장히 다양한 분들을 만났다. 최근에 과거에 진행했던 피해자의 구술 인터뷰 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디지털로 변환하고 녹취록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했는데, 이 작업을 하면서 관련 활동을 꾸준하게 해온 입장에서 반성을 많이 했다. 어떤 경우에는 연구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위안부' 피해자를 만나면서 준비라 너무 부족해서 인터뷰 내용에 지장을 주기까지 했더라. 할머니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해서 똑같은 질문을 만날 때마다 계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연구자라는 하는 사람들의 준비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구나 하고 새삼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윤명숙

일본 유학생 시절, 대학원 석사 때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님께서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 증언을 하셨고, 그 직후에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당시만 해도 나 역시 일본군‘위안부’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다. 그런데 얘기를 들으면서 이 문제가 계급문제구나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석사과정 연구 주제도 여성사회주의자 독립운동에서 ‘위안소・조선인 위안부 실태’로 바꾸었다. 이때는 '위안부'는 군인이 총검을 앞세워서 처녀의 머리채를 잡아채 트럭에 싣고 끌고간다는 식의 강제연행 문제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대학원 세미나 수업에서 ‘위안부’ 동원을 계급문제로 접근하는 시각으로 처음 발표했을 때,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런 시각으로 박사논문도 썼는데, ‘여성주의 시각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 문제를 여성차별 문제로 바라보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나는 ’위안부’ 문제가 식민 정책에 의한 일상적 폭력이나 계급차별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민족차별 문제에 더 중점을 두었다. 여성주의 시각과 관련해서는 최근 공부중인데,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깊게 사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위안소・위안부 문제’를 천착하다보면 국가라는 것을 깊게 사유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위안소・위안부 문제’를 연구한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힘든 주제이긴 하다. 아마도 처음에 이 문제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후회하지는 않는다.

김헌주

7년 전부터 한국사연구소에서 '위안부' 관련한 자료들을 정리 및 해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원래 기존의 연구 분야는 근대사회사 쪽이었는데,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위안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위안부’ 자료를 정리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자료는 엉뚱하게도 아주 일상적이고 건조한 내용이 담긴 문서였다. 장교는 '위안소'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활용하고, 사병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활용하는지. 그리고 각 계급마다 돈을 얼마를 내는지, 위생검사는 어떻게 하는지 등이 적혀있는 문서들이 많았다. 이 건조한 문서들을 보면서 약간 묘한 느낌이 들었다. 끔찍한 일을 겪었던 ‘위안부’ 피해자들이 상대했던 사람은 그냥 평범한 일본(군)인들이었다. 이들은 군인이지만 동시에 전쟁터에 나와서 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 보내면서 눈물 흘렸던 일본인들이었던 것이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떠오른 대목이었다.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제 ‘위안부’ 문제를 기존에 논의되었던 민족주의적인 문제의식과 방식을 넘어 그 수준과 범위를 더 확장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임경화 

일본학 전공자로 전공은 달라도, 연구대상으로서의 일본을 생각할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나에게 회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그래서 일본에서 전개되어 온 논의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년 동안 지속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가 일본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 수정주의 주장이 나올 때마다 그에 논박하고 대중적으로 설득하는 작업도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나는 그것을 한국어로 옮기고 있기만 하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 그 이유는 일본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일본학계에 지나치게 종속적이라는 사실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한국에는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적인 논리를 내면화한 ‘일본학’이 존재하지만, 그에 맞서는 학문으로서의 다른 ‘일본학’을 구상하고자 한다면, 나 스스로 주체적으로 이 문제를 파고들어 고민하고 행동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경희

일본의 식민주의와 근대성, 통치성 등에 관심이 많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재일조선인 문제에 관해서도 쓰거나 강의를 해왔다. 90년대 초중반에 재일조선인 대학생들끼리 민족적인 활동을 하면서 조선인 강제동원(당시는 강제연행) 문제의 일환으로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되었다. 공부 모임도 했고 당시 헌책방에서 센다 가코 책을 찾아서 읽었지만,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2000년에 여성국제전범법정이 개최되었고, 정치압력에 의한 NHK의 영상개편 문제가 있었다. 히로히토의 유죄를 선고한 법정은 확실히 천황제 국가 일본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었는데, 이에 대해 너무나 노골적인 억압이 일어났다. 이미 90년대 후반부터 우파진영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나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가 시작했었고 리버럴 진영에서도 국민기금을 통한 민간협상을 시도하는 등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는 늘 일본 사회의 반동적 움직임의 중심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해오지 않았다는 점에 늘 부채의식이 있다. 열심히 활동하는 재일 선배 연구자들을 보면서 “내가 아니어도..” 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으려고 한다.

권명아

전시동원체제의 연장에서 ‘위안부 문제’를 고민해왔다. 증언 문제뿐 아니라 좁게는 일제 말기 전시동원체제만 이야기하더라도 '위안부' 동원이라는 건 전시동원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뗄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전시동원체제를 젠더정치의 맥락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사와 좀 다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젠더 연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기존의 지배적인 학문 체제와는 다른 역사상을 구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 역시 그룹화되어 있거나, 혹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정립하기 위해서는 전시동원체제 역사상을 젠더적 관점에서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위안부' 문제 연구를 하게 되었다. 또 전쟁과 폭력의 경험과 증언, 국가 주도 기념의 한계와 대안적인 기념 정치 등의 맥락에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다.

 

(왼쪽부터) 김헌주, 소현숙, 허윤, 이선이, 정용숙, 여순주, 윤명숙, 권명아

 

 

민족주의적 접근은 왜 보완이 필요하나

이선이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삶을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민족주의’가 피해자분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족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삶의 터전인 국가 안에서 자신의 지위와 장소를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윤명숙

그렇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 시각만으로 바라보게 되면 일본군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일을 했는가와 같은, 민족 차별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민족 차별의 문제도 있지만, 여성차별, 성(性) 문제, 계급의 문제, 식민 지배 청산 등 다양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이슈다. 특히, 미투 운동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여성 인권에 관한 이야기와도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만 바라보던 경향이 있어서인지 상대적으로 이런 부분들이 거의 이야기되지 않았던 면이 있다.

김헌주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식민지 전시체제의 강제동원이라는 구조, 즉 민족문제가 우선으로 거론되지만,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된ᅠ맥락에는ᅠ조선ᅠ사회ᅠ내부의 가부장제도ᅠ한몫했다. ‘위안부’ 동원에 조선인ᅠ업자들이ᅠ개입한ᅠ부분, 한국전쟁기의 위안소 운영,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를 바라보는 같은 민족의 불편한 시선 등 다양한 측면들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가려지는 면이 많았다.

윤명숙

1990년대 일본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여성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은 민족주의 관점을 중심으로 운동을 진행해갔다. 동시에 수용되어야 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와 민족주의 관점이 대결 구도로 이야기되었다. 90년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ᅠ해결ᅠ운동이ᅠ처음ᅠ불붙었을ᅠ때는ᅠ식민지ᅠ문제와ᅠ강력하게 결부되어ᅠ있었기ᅠ때문에ᅠ민족주의ᅠ색채가ᅠ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지금까지 정도로 점화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조경희 

현재는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민족주의적인 시각으로만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려고 하는 경향이) 어느 정도 극복이ᅠ되었다고ᅠ생각한다. 실제로는 지난 20년 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식민주의의 문제, 전시 성폭력의 문제 등 다양한 시각으로 다루고자 하는 담론이 많이 형성되었다. ‘민족주의 시각으로만ᅠ바라보면ᅠ안ᅠ된다’는 비판 자체가 한국 사회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담론이라 생각한다. 물론, 여전히 많은 사람이 ‘네 딸이나 여동생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봐라’라는 식으로 문제를 접근하는 것을 보면 보편적인 여성주의 시각이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소현숙 

최근에 민족주의적 해석을 넘어서 한국의 가부장성이라던가, 피해자들의 해방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존의 연구에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사실들이 발굴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해방 직후 미군정시기, 열차에서 미군에 의한 한국 여성의 성추행이 일어났다. 이례적으로 이 사건이 신문에 보도가 되었는데, 당시 사회적 명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지에 대해서 논의를 했다. 거기서 한다는 이야기가 ‘미군들의 성욕이라는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제때처럼 위안소를 만드는 게 좋겠다’ 이런 이야기를 버젓이 한다. 한국사회의 가부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런 사료들은 그동안 역사적 사료로서 포착되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에 '위안부' 문제를 다양하게 바라보는 문제의식이 생기니까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새로 발굴되기 시작한 거다. 

윤명숙 

실제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와는 별개로, 민족주의 관점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강하거나 강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국내 미디어가 주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을 중심으로 뉴스나 이슈를 전하게 되고, 이때 대중들은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기사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여전히 이 문제를 민족주의적인 시각으로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김학순의 공개증언이 있은 지 28년이나 지났다. 우리 사회도 해결 운동과는 별도로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사회의 우리들, 즉 바로 나의 문제로 더 많이 사유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왼쪽부터) 김헌주, 권명아, 소현숙&nbsp;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윤명숙

한가지  문제를 제기해보자면, 우리가 '위안부'ᅠ문제ᅠ해결이라고ᅠ얘기했을ᅠ때ᅠ'해결'을ᅠ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도 사실은 공적인 장에서 논의된 바가 없다. 1990년대 초부터 ‘위안부’ 피해자들이 계속 커밍아웃을 했고, 약 28년 동안 굉장히 다양한 얘기들을 하셨는데, 이 사회는 누구의 관점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해결'인지에 대해서 논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권명아 

할머니들의 ‘사과를 원한다’라는 이야기에 대해 누군가는 “할머니들은 왜 사과를 요구할까. 그럼 사과는 누가 해야 하는가. '위안부' 문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당시 지도자? 일본군? 일본 국민? 한 때 일본에서 있었던 일억총참회설처럼 일본 전 국민이 사과를 하면 되는 일일까?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과거가 바뀌나?” 라는 말들을 한다. 물론 과거는 바꿀 수 없다. 백만 번을 사과하고, 일본의 일억 총 인구가 참회를 한다고 해도 과거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는 바뀔 수 있다는 거다. 사과를 요구한다는 것은 바로 그 의미다. 예를 들어 일본의 ‘위안부’ 문제 관련하여 시민사회 운동하시는 분들에게 “어쩌다 이런 활동을 하시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거의 공통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순간 이전처럼 살 수 없었다.”라고 말을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니까 개인의 미래가 바뀐 것이다. 이처럼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역사적인 잘못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다.

임경화 

해결이라고ᅠ했을ᅠ때,ᅠ공식 사죄, 피해배상, 추모와 기념, 역사교육, 재발 방지와 같이 큰 틀 안에서 공유되고 있는 것들은 있다. 이렇게 공유되어있는 틀 말고, 우리가 해결이라고 했을 때, 과연 그것만이 해결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논의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해결의 방식은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운동을 해야한다는 관점을 웹진에서 제시해주면 좋을 것 같다.

이선이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가ᅠ제기된 이후,ᅠ일본ᅠ사회의ᅠ많은ᅠ양심적인ᅠ지식인들이ᅠ이 문제를 통해 일본 사회를ᅠ바꾸려는ᅠ노력을ᅠ함께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ᅠ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엄청난 시간, 노력, 비용이라는 자원이 들어가는 것에 비해 이 논의가 한국 사회를 그만큼 성숙시키고, 한국사회의 (여성)인권이 성장하도록 하는데 얼마나 기여했는가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운 것 같다.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제국과 일본군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앞으로 한국 사회가 보다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한 지렛대로 이문제를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지점이다.

소현숙 

한국사회가 아예 진전이ᅠ없었다고ᅠ생각하지는ᅠ않는다.ᅠ예를ᅠ들면ᅠ2014년 미군ᅠ위안부,ᅠ기지촌ᅠ여성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 하여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ᅠ제기했다. 여성의 성을 국가가 동원한 것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부만 승소하는 다소 미흡한 판결이 나왔지만, 그럼에도 한국사회가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피해자들이 스스로 피해자임을 자각하고 문제제기를 할 수 있었던 과정에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운동과 연구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을 한다.

이선이 

지난 편집회의 때 임경화 선생님께서 이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가져가기로 마음을 먹어서 이곳에 왔다는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아까 김헌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내용(건조한 문서로부터 보이는 악의 평범성)도 이 문제를 나의 문제로 가져가는 사유가 되는 것 같다. 웹진 안에서 ‘위안부’ 문제가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계속 물을 수 있다면, 이 문제가 일본제국의 전쟁범죄를 넘어서 보다 더 확장된 사유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헌주 

한국에서 여성을 대상화한 유흥문화는 일반적이며, 남성들은 그 문화의 소비자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제쳐둔 채로, '위안부' 문제를 대면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그런 차원에서 건조하게 이용하는 일본군 남성의 모습과 평범한 ‘위안부 문제’에 분노하는 한국 남성 사이에 괴리라는 게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ᅠ군대ᅠ문화에서ᅠ'위안부' 문화의ᅠ연속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현숙 선생님께서 관련된 사례를 잠깐ᅠ말씀하셨지만, 한국전쟁기 특수 위안대가 설치될 당시에 그 목적이 군의 사기 증진이었다. 일본군‘위안부’를 만든 맥락과 똑같은 것이다. 또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2월 30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휴가를 나와서 귀향해 있는 장병들을 위해서 국가 차원에서 보상을 해주기 위해 각 지역마다 위안소를 만들어서 장병들을 위로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연장선상에서 1960, 70년대의 양공주 문제 즉 미군 위안부 동원이 가능했던 것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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