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양심, 도쓰카 에쓰로 국제 변호사 인터뷰 1부

도쓰카 에쓰로 (戶塚悅朗)

  • 게시일2019.11.15
  • 최종수정일2019.12.02

 

1991년 8월, 김학순의 공개회견을 통한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 이후, 1992년 유엔 인권위원회(CHR, 현 인권이사회)에서 ‘성노예(Sex slave)’ 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식 제기한 한 명의 일본인 변호사가 있었다. 자국 기자들로부터 가장 큰 비난을 받아가면서도 목소리를 굽히지 않았던 도쓰카 에쓰로(戶塚悅朗). 이듬해 유엔 인권위원회 차별방지·소수자보호 소위원회에서 전시 노예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국제 공론장에 올라왔다.

1942년 출생, 한국 나이로 올해 78세의 노법률가는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한일 양국과 세계를 오가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의 불법성을 알리는 등 국제 인권과 평화를 위한 법률 활동에 힘쓰고 있다. 연구소에서는 지난 8월 기림의 날을 앞두고, 일본의 대표적 양심 도쓰카 에쓰로 변호사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자연스레 들어선 인권 변호사의 길

Q. 선생님 안녕하세요, 웹진 결 독자를 위해 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1973년에 변호사가 되었고, 인권 의식이 높았던 故 카시와기 히로시(柏木博) 변호사 밑으로 들어가 많은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다른 분야에는 그리 의욕이 생기지 않았는데, 동기 변호사에게 스몬 병 소송을 소개받고는 대규모의 약물 피해자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후로 정신병원에서의 자의적 구금이나 학대 사건에 몰두했죠. 

인권 변호사가 된 것은 받아온 교육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릿쿄대학이라는 미션스쿨 부속 중학교에 입학해서 쭉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받았어요. 거기서 알게모르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대학은 이학부 물리학과에서 공부했습니다. 동기들은 주로 원자력 산업으로 진출했는데, 저는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을 깨닫고 그 분야를 떠나면서 ‘길 잃은 어린 양’이 되어버렸어요. 이후 인공지능 공학을 공부하려고 미국유학을 준비했는데, 영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차선책으로 심리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들어가 밤에 영어 공부를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쳐버렸죠. 그래서 취업 문제도 있고, 법학부 출신인 아버지께서 권하기도 해서 결국 법학부에 편입했습니다. 이후 국가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는데, 발령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인권변호사가 되기 위해 사법시험을 치렀습니다. 합격한 것은 매우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1984년 8월에 제네바의 유엔인권소위원회에 처음으로 참가했습니다. 유엔 경험이 있던 선배 변호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사단법인 자유인권협회(JCLU)를 거쳐 국제인권연맹(ILHR) 대표로 참가할 수 있었죠. 인권변호사가 되고 한동안은 정신의료 관련 인권 활동에 몰두했는데, 1987년 정신보건법이 성립되어 시행되는 것을 보고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활동하면서 거의 '번아웃' 상태가 되었거든요. 영국에서는 런던정경대(LSE) 대학원(LLM 코스)에서 인권 보장을 위한 국제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일본 내의 인권 보장을 위해 국제법을 연구하다 ‘위안부' 를 발견하다

Q. 1992년에 유엔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제기하셨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개인통보제도 관련 협약 비준 등 인권 보장을 위한 국제법을 일본에 도입하려고 연구를 시작하면서, 이와 관련된 유엔 인권 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인권보장을 위한 국제법을 도입해 좀 더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1992년 2월 17일, 비정부기구인 국제교육개발(IED)을 대표하여 “‘위안부’는 성노예(sex slaves)”라고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유엔에 조정을 요청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해 5월,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 에서 노예 금지 위반 뿐만아니라 국제 노동 기구(ILO) 제29호 강제근로협약 위반에 관한 조사를 요구한 것도 중요한 활동이었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에는 어떻게 처음 관심을 두게 되셨나요? 

故 모토오카 쇼지(本岡昭次) 참의원 의원과 협력 관계가 있었는데, 1990년 경부터 모토오카 의원이 ‘위안부’ 문제에 힘을 쏟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관계 문헌을 많이 읽기도 했고, 내부적으로 조언을 해드리거나 모토오카 의원의 국회 질문을 도와드린 적이 있습니다.


강렬했던 반향, 반발이 더 큰 동기가 되다

Q. 유엔에서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을 당시의 반응은 어땠나요?

1992년 인권위원회(CHR)에서의 ‘성노예' 발언은 제가 그 때까지 유엔에서 했던 발언 중 가장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첫 번째로, 한국 정부가 먼저 환영의 발언을 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로, 일본 정부의 세자키 카쓰미(瀬崎克己) 대사가 이제까지 없었던 신중하고 성실한 자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제가 발언 전 회의 장소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발언할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라며 정보를 구하더군요. “제가 합니다”라고 답하니 굉장히 놀라워 했습니다. 발언자가 한국 측에서 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모양입니다. 제 발언에 대한 당시의 응답은 최근의 일본 정부와는 완전히 달리, 성실했습니다. 세 번째로, 발언 직후 가장 유력한 유엔 NGO 중 하나인 국제사법재판소(ICJ)의 스탭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 여성지위위원회나 인권소위원회의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 쪽에서 다뤄보는 것은 어떨까요?” 하고 구체적인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이런 반응들은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어요. 

마지막으로 가장 놀라웠던 반응은 마이니치 신문을 제외한 일본인 저널리스트들이 보인 감정적인 반발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인 특파원은 모두 남성이었는데, 그렇게 극단적이고 심한 반응은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너무도 이상해서 요즘의 넷우익과 다를 바가 없었어요.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그러고도 법률가냐?”라는 모욕적인 발언을 들었을 때는 “나도 자격을 갖춘 변호사”라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철저히 연구해서 법적 논쟁을 해 보자고! 어느 쪽이 법적으로 옳은지 유엔이 판단해 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경험들은 이후 제 연구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고, 유엔 활동을 일회성의 발언으로 끝낼 수 없었던 이유가 되었습니다. 1994년 마침내 ICJ 보고서가 나왔을 때에는 ‘나도 법률가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죠.

1992년 2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발언을 하고 얼마 후, 모토오카 의원을 통해 재일조선인 단체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았고, WCC(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 한국 정대협으로부터도 지원 요청을 받았습니다.

 

2부에서 계속 됩니다.

 

연결되는 글

글쓴이 도쓰카 에쓰로 (戶塚悅朗)

1992년 2월 유엔 인권위원회(CHR)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일본의 인권변호사다.

 

1942년 생으로, 1973년부터 1982년까지 스몬(SMON) 약품공해소송의 피해자 소송대리인이었고, 1982년부터 1988년까지 정신장애인 인권 옹호에 전념하면서 유엔에 이 문제를 제기해 일본의 정신위생법 개정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런던정경대(LSE)와 워싱턴 대학에서 국제 인권법을 공부했고, 1992년 NGO 국제교육개발(IED)을 대표해 조선인의 전시 강제 연행 문제와 ‘위안부' 문제를 유엔 인권위원회(CHR)에 제기했다. ‘위안부'의 호칭으로 "Sex slave(성노예)"를 사용할 것을 제창하며 일본 정부의 보상 및 사죄, 유엔의 대응을 요청해 왔다. 1993년부터 국제우호협회(IFOR)를 대표하여 국제 인권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2000년 일본 참의원에 처음 발의된 ‘전시 성적 강제 피해자 문제 해결 촉진 법안’ 작성에 참여했다. 고베 대학 국제 협력 연구과 조교수와 류코쿠 대학 법과 대학원 교수를 역임했고, 1993년 동경변호사회 인권상, 1996년 한국여성단체연합회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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