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봉기 할머니를 기억하다-조선반도의 분단을 넘어서

박김우기朴金優綺 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 사무국원

  • 게시일2019.03.09
  • 최종수정일2019.11.20

배봉기 할머니를 기억하다 

 

“가고 싶어도, 못 가잖아”

수십 년간 떠나온 채, 지금도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고향 충청남도 신예원(新禮院). 일본인 기자가 함께 가자고 권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거기에도 미군기지가 있잖아”

 6세 때 일가가 뿔뿔이 흩어져 식모살이하다가 결혼과 재혼 후에도 남편이 일하지 않아 집을 나온 배봉기 할머니는 29세 때 함경남도 흥남에서 “입을 벌리고 자다 보면 바나나가 떨어져서 입에 들어온다”는 “여자 소개인”의 말에 속아 1944년에 오키나와(沖縄) 도카시키 섬(渡嘉敷島)으로 연행되었다. ‘아키코’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다른 6명의 조선 여성과 함께 일본군의 성노예를 강요당했고, 미군에 의한 공습과 함포사격이 거듭되는 가운데 굶주림에 허덕이다 포화 속에서 살아남았다.

1945년 8월 일본군의 무장해제 후에는 미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혔지만, 거기에서 탈출하여 오키나와를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는 가운데 취객을 상대하는 ‘서비스’, 야채 장사, 빈 병 수집 등을 하면서 “어디에 가도 편하지가 않다”며 일본군이 작업할 때 신던 신발을 손에 들고 오키나와 전체를 맨발로 헤매다녔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 오키나와 현 본부 전임 활동가였던 김현옥(金賢玉) 씨, 김수섭(金洙燮) 씨 부부가 1975년에 배봉기 할머니를 만났을 때 그녀는 자주 “우군(일본군)이 져서 분하다”고 말했다. 전쟁 당시보다도 전후에 혼자서 살았던 것이 “훨씬 괴로웠다.”어려서 일가가 뿔뿔이 흩어진 것도,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도, 이국땅에서 고독하게 산 것도 모두 자신의 ‘팔자’라는 말을 했다. 그런 배봉기 할머니에게 김 씨 부부는, 할머니의 경험은 팔자 탓이 아니라 조선을 식민지화해서 많은 조선 여성을 군대의 ‘위안부’로 삼은 일본 탓이라고 설명했지만, 일본인한테도 조선인한테도 끊임없이 속아왔던 그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조선말도 조선 음식도 잊은 채 사탕수수밭 한가운데에 고즈넉이 놓인 창고에서 살았던 그녀는 전쟁의 후유증을 앓아 타인을 심하게 기피했다. ‘위안부’였던 과거가 알려져서 근처 아이들에게 돌을 맞자, 나하(那覇) 여기저기를 헤매면서 “나는 조선사람이다”라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방안에서는 냄비를 식칼로 두드리며 마구 소리쳤고, 두통을 억누르기 위해 고약을 가위로 잘라 붙이다가 그 가위로 자신의 목을 찌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모두가 배봉기 할머니를 기껏해야 몇 차례 찾아가서는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거절당해 더 방문하지 않게 되었지만, 김 씨 부부는 끈질기게 계속해서 찾아갔다. 그렇게 배봉기 할머니를 만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김 씨 부부는 배봉기 할머니와 처음으로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 오키나와 바다나 하늘을 처음으로 ‘관광’한 배봉기 할머니는 “고향 사람이 좋다”고 기쁜 듯이 말하면서 오키나와 국수를 맛있게 드셨다. 그 후 배봉기 할머니는 먼저 김 씨 부부에게 외출하자며 부르게 되어 조금씩 자신의 과거도 말하게 되었다.

이렇게 배봉기 할머니는 1977년 4월에 조선신보사의 취재를 받아들일 결의를 하고 자신의 피해를 조선총련의 기관지인 <조선신보(朝鮮新報)>에 처음으로 상세히 고백했다. “지옥이요, 이 세상의 지옥이었소”라고 하면서 오키나와 전투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했던 조선인 군속에 대한 기억을 언급하기도 했다.

배봉기할머니가 자신의 피해를 처음으로 상세하게 고발한 조선신보기사 (1977.4.23) (출처 : 조선신보)

 

그 후 10여 년 동안 배봉기 할머니와 김 씨 부부는 매달 함께 조선 요리나 불고기를 먹으면서 부모·자식처럼 지냈고, 어느새 그녀는 “역시 조선사람은 조선 것을 먹어야지.”라고 말하게 되었다. 김 씨 부부와 함께 오키나와 사람들과도 교류하며 조선전쟁(한국전쟁)에 관한 것이나 그때 오키나와에서 미군기가 출격했던 것, 그 가해자성을 인식하고 한미군사훈련이나 조선반도의 분단에 반대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있다는 것 등을 천천히 인식해 갔다.

그리고 1988년에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 알고 지낸 일본인 기자가 배봉기 할머니의 고향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자, 조선반도 지도에 있는 고향을 가리키고 있던 배봉기 할머니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태어난 고향보다도 오래 살아온 오키나와에는 거대한 미군기지가 있다. 자신의 고향에도 미군기지가 있고 조선 민족은 남북으로 분단된 채, 돌아가 봤자 어쩔 수도 없다. 조선이 통일되고 외국 군대가 나가면 돌아가겠다고. “통일될 거야. 통일돼서 함께 돌아가면 되지.”라고 김수섭 씨가 말하자, 배봉기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겨우 눈물을 그쳤다.

 

자신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 신예원의 위치를 가리키는 배봉기할머니 (1988년) (출처 : 김현옥씨 제공)

 

고향에 가고싶지만 가지 못한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배봉기할머니 (1988년)

 

배봉기 할머니는 1989년에 세계청년학생소년축전 참가를 위해 임수경 씨가 평양의 비행장에 내려서는 모습을 TV로 보고 “너무 기쁘네”라며 눈물을 흘렸고, 쇼와(昭和) 천황 히로히토 사망 보도를 접했을 때는 히로히토가 “사죄하길 바란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조선어로 “원수를 갚아달라”고 거듭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북일 관계가 개선된 것을 무엇보다 기뻐했다. “통일되면 셋이서 함께 돌아가자”고 김 씨 부부와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1991년 10월에 배봉기 할머니는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소하기 49일 전의 일이었다.

 

배봉기할머니의 추도식 (1991.12.6 / 김현옥 제공) 이 날은 우연하게도 김학순할머니가 일본정부를 제소한 날이다. 김학순할머니께서는 이 추도식 앞으로 조의금을 보내셨다. 오키나와현지사, 나하시장도 꽃을 보냈다.

 

 

배봉기 할머니를 기억하는 ‘4.23 액션’

내가 김현옥 씨한테서 위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2012년의 일이었다. 피해 증언이나 관련 서적을 통해 배봉기 할머니의 존재를 알고 있기는 했지만,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숨소리마저 들릴 듯한 그녀의 인간적인 에피소드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또한 그러한 배봉기 할머니 곁에서 마음으로 교류해 온 사람들이 김현옥 씨 같은 조선총련의 전임 활동가였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김현옥 씨는 당시 나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배봉기 할머니는 만년에는 이미 조선이 왜 식민지가 되었고 남북으로 분단되었는지, 자신의 인생은 팔자 탓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의한 것이며, 나라를 빼앗긴 백성은 이렇게 된다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정확히 받아들이고 몸으로 이해한 것 같아요. 배봉기 할머니 자신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의 체험이나 견문을 통해 인권을 스스로 되찾았어요.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배봉기 할머니와 지낸 나날은 조금도 자랑스레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들은 배봉기 할머니가 ‘위안부’여서가 아니라 동포였기 때문에 함께 지낸 것입니다.”

 

생전의 배봉기할머니와 김현옥씨 (1987년 / 김현옥 제공)

 

인터뷰를 끝냈을 때 나는 어느새 흐느껴 울고 있었다. “우군이 져서 분하다”는 말을 내뱉게 할 정도로 배봉기 할머니를 ‘황국신민’화했던 일본제국주의의 폭력, “전후가 훨씬 괴로웠다”는 말을 하고 고향에 “가고 싶어도 못 가잖아”라며 울게 만든 동아시아의 냉전과 조선반도의 분단. 미군기지의 지속적 주둔이 보여주는 오키나와에 대한 구조적 차별과 폭력. 그러나 이 구조적 폭력에 맞서, 김 씨 부부와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자신의 피해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세계를 향해 처음으로 고발하며 “사죄하길 바란다.” “통일되면 돌아가자”고 하며 히로히토의 사죄와 조선반도의 통일을 희구하기에 이른 배봉기 할머니. 그리고 깊은 동포애를 가지고 그녀와 함께 살았던 김 씨 부부. 그 모든 것을 모른 채 살아온 나 자신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 후 내가 전임 활동가로 속해 있는 ‘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인권협회)’의 회보인 <인권과 생활(人権と生活)>에 김현옥 씨한테서 들은 내용을 거의 모두 반영한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배봉기 할머니의 반생을 간접적으로 청취한 자의 책임을 다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느꼈다. 더 많은 사람이 특히 배봉기 할머니와 같은 재일조선인들이 그녀의 존재를 알고 기억하고 그 유지를 이어가지 않으면 그녀의 존재는 또 다시 어둠에 묻혀 버릴지도 모른다는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또한 그 무렵에는 제2차 아베 내각이 발족하여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일본의 국가책임을 부정하고 생존자의 존엄을 짓밟는 발언들이 일본의 정치가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 시기이기도 했다.

배봉기 할머니의 존재를 더욱 널리 알리고 일본군 성노예제의 국가책임 부정 논조가 휘몰아치는 일본의 상황에 저항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이 <조선신보>에 게재된 4월 23일을 기념하여 일본군 성노예제에 관한 일본의 공식 사죄나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성노예제 부정을 용서치 않는 4.23 액션: 배봉기 할머니를 기억하며’라는 이름으로 2015년 4월 23일에 일본의 국회의원회관 앞에서 배봉기 할머니, 김학순 할머니, 박영심 할머니, 리계월 할머니, 김복동 할머니, 송신도 할머니 등 6명의 증언을 낭독하며 일본의 공식사죄,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4.23 액션’의 주최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포함한 성이나 민족에 따른 차별이나 폭력에 대한 학습회를 개최해 온 인권협회의 ‘성차별 철폐 부회’로 했다. 급히 꾸린 액션이었지만, 약 80명의 참가자 중에 10~20대 재일조선인 학생이 다수를 점했다. 김 씨 부부나 한국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당시)에서도 연대의 메시지가 도착했고, 예전에 오키나와 땅에서 배봉기 할머니와 교류가 있었던 국회의원 이토카즈 게이코(糸数慶子) 씨도 참가하여 발언했다. 참가자 전원이 “일본 정부는 할머니들에게 사죄하라!”, “일본군 성노예제 부정을 용서치 마라!” “조선 민족의 존엄을 지키자!” “역사 부정 절대 반대!” “공식 사죄! 법적 배상!” 등의 구호를 조선어와 일본어로 외쳤다.

아울러 이 ‘4.23 액션’ 취재가 계기가 되어 <한겨레신문>은 2015년 8월 8일 1면에 크게 배봉기 할머니의 사진을 게재하여 특집 «우리가 잊어버린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그 이름, 배봉기»를 게재했다.

 

2015년 4.23액션을 일본 국회의원회관 앞에서 열었다 (2015년 / 출처 : 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 성차별철페부회) 10-20대 재일조선인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약 80명이 모여 일본정부의 공식사죄, 법적배상을 요구하였다.

 

조선반도의 분단을 넘어

그 후에도 성차별 철폐 부회는 4월 23일을 기념하여 배봉기 할머니만이 아닌 일본군 성노예제의 피해를 본 모든 사람을 기억하고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극복을 향한 행사를 매년 거행하고 있다. 2016년에는 도이 도시쿠니(土井敏邦) 감독이 ‘나눔의 집’에 계신 생존자들의 일상을 기록한 영화 «‘기억’과 살다(“記憶”と生きる)»의 상영회를 개최했고, 2017년에는 나와 리행리(李杏理) 씨,  김미혜(金美恵) 씨가 발표자로 참가하여 한일 ‘합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피해자나 배봉기 할머니에 초점을 맞춘 심포지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조선반도의 분단: 비가시화되는 피해자를 응시하며(日本軍『慰安婦』問題と朝鮮半島の分断~不可視化される被害者を見つめて)»를 개최했다.

2018년에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테마로 한 조선학교 학생들의 예술전, 양징자(梁澄子) 씨의 토크, Gisaeng 씨와 김성수(金成樹) 씨의 미니 라이브, 김기강 씨와 홍미옥(洪美玉) 씨의 연극 «캐러멜(キャラメル)»을 섞은 복합 이벤트 «지금 일본군성노예 문제를 마주보다: 피해자의 목소리×예술»을 이틀간 개최하여 재일조선인이나 일본인, 한국의 참가자가 연 400명 이상 방문했다.

올해는 ‘4.23 액션’ 개최 5주년을 맞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본군 성노예 문제: 조선반도의 분단을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식민지 조선의 유곽과 위안소를 테마로 한 이야기를 김영(金栄) 씨한테서 들을 예정이다. 또한 조선반도의 탈분단을 향한 기운이 여느 때보다 높아지는 상황을 수용하여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극복과 조선반도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메시지를 적은 종이 나비를 세계에서 모아 조선반도의 지도 위에 붙여 커다란 통일기를 만드는 퍼포먼스도 예정되어 있다. 남북조선에서 많은 나비들이 도착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배봉기 할머니가 아직도 이루지 못한 소원을 이어받아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극복과 조선반도의 평화통일을 향해 앞으로도 열심히 전력을 다하고자 한다.

 

번역 임경화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글쓴이 박김우기

박김우기 朴金優綺 (ぱくきむ・うぎ/wooki park-kim). 재일조선인3세 인권활동가. 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 사무국원, 조선대학교 강사, 가수. 조선학교차별문제를 비롯한 재일조선인의 인권문제나 일본군성노예문제 극복을 위한 활동을 벌인다. 유엔주최 〈마이노리티 포럼〉에서 일본 첫 파네리스트로서 재일조선인 아이들 교육권에 관한 보고를 했다(2017년). 논문으로 〈北海道における朝鮮人強制連行・強制労働と企業「慰安所」〉, 〈現代日本における「上下」からの差別と排外主義――朝鮮学校への差別、ヘイトスピーチ・ヘイトクライムと国連の是正勧告〉, 공저로《「慰安婦」問題の現在》, 《ヘイト・クライムと植民地主義―反差別と自己決定権のために―》등이 있다.

pied112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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