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지문날인 비판에서 시작된 연대의 지평, 다카지마 다쓰에
다카지마 다쓰에와의 만남
2018년, 한국 대법원이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을 명령하자,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일환으로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강하게 반발했다. 양국의 입장 차는 한일 관계를 급속히 냉각시켰다. 그런데 2020년, 일본 가톨릭계는 한일 갈등 속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식사과와 책임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냈다. 일본 가톨릭 정의와평화협의회(이하 정평협)는 '위안부' 제도를 "국가가 승인한 강간과 노예화"라 규정했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의 유죄 판결을 상기시키며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또한 미투와 성직자 성폭력 문제 등은 일본군'위안부'문제의 구조적 책임 회피가 낳은 현실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평협은 또 2000년 여성법정의 성사를 위해 헌신한 다카지마 다쓰에의 활동을 특별히 조명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해 온 필자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그녀를 정평협은 핵심 주역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헌신을 기리며, 그녀에게 깊은 존경을 표했다.
자료 조사를 위해 방문한 정평협 사무실에서, 활동가 히루마 노리코 씨를 통해 다카지마 다쓰에의 유고집 『그날이 오면(その日がくれば)』을 받았다. 이 책은 가톨릭 도쿄교구 소속 오쿠라 가즈미 신부가 2004년 그녀의 삶을 정리해 엮은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89년 마치다 성당에서 시작되었다. 이 만남은 다카지마가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그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인권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다카지마의 유고집 『그날이 오면』은 표지부터 소박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반려견과 함께한 사진 속 그녀의 미소는, 말보다 행동으로 시대를 살아낸 이의 깊이를 보여준다. 제목은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에서 따온 것으로, 한글 원제에 일본어 발음과 의역이 병기되어 있다. 그녀의 생애처럼, 책 제목 또한 국경과 언어를 넘어선 연대와 기억의 표상으로 읽힌다.
가난과 차별 속에서 피어난 연대의 씨앗
다카지마 다쓰에는 1950년 9월 23일, 야마나시현에서 재일한국인 아버지 김호룡(일본명 가나이 세이지로)과 일본인 어머니 아사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어머니는 세 남매를 홀로 키우기 위해 폐품을 수집하고 부업을 전전했다. 손발에 장애가 있던 큰딸의 병간호와 자녀 교육을 병행하기 위해, 어머니는 리어카를 끌며 생활을 이어갔다.
오쿠라 가즈미 신부는 "다카지마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헌신적으로 돌본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을 키워낸 어머니에 대한 보은이 담겨 있다"고 회고했다.
이지메의 기억, 그리고 '지로쵸'라 불리던 소녀
다카지마는 '위안부 재판을 돕는 모임'에서 만난 한 재일 한국인 여성의 자녀가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버지가 재일 한국인이었지만, 그 이유로 직접적인 이지메를 겪은 기억은 없다. 다만 손발에 장애가 있는 언니를 돌보느라 늘 긴장 속에 지냈고, 가정 형편 또한 어려워 이지메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재일한국인'이라는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언제나 주머니에 돌을 넣고 다니며 대항하는 강인함 덕분에 '지로쵸(근대 야쿠자의 원조로 꼽히는 두목 시미즈노 지로쵸)'라는 별명을 얻었다. 게다가 러브레터를 자주 받는 인기 있는 소녀이기도 했다.
상처를 딛고, 가족 속에서 다시 선 사람
196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카지마는 긴키일본투어리스트(KNT)에 입사했고, 1974년 그곳에서 만난 다카지마 세이조와 결혼했다. 이듬해 아들을, 1977년에는 딸을 낳고 남편의 전근에 따라 요코하마로 이주했다. 결혼 후 그녀는 어린 시절 가족관계에서 받은 상처로 깊은 내면의 고통을 겪었고, 훗날의 백혈병 치료보다 그 아픔을 치유하는 일이 더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가족의 따뜻한 지지를 통해 그녀는 자기혐오 없이 삶을 단단히 살아내는 강한 사람이 되었다.
지문날인 문제에서 시작된 연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다
아이들을 가톨릭계 유치원에 보내면서 다카지마는 자연스럽게 신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84년 크리스마스, 그녀는 요코하마 스에요시정 성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이듬해 남편도 "가족은 같은 세계에서 함께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 이후 다카지마는 독서와 공부에 몰두했다. 평소 책을 좋아하던 그녀는 당시 시간적 여유까지 더해져, 일반인이 따라가기 힘들 만큼 열정적으로 책을 구입하고 탐독했다.
다카지마의 사회 참여는 1955년부터 시행된 외국인 지문날인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등록 대상자의 86%가 재일 한국인이었기에, 이 제도는 곧 재일한국인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었다. 1980년 한종석 씨가 지문날인을 거부한 이슈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유럽 출신 가톨릭 신부 콘스탄틴 루이와 에드워드 등이 이에 동참했다. 다카지마는 이들을 지원하며 처음으로 인권운동의 현장에 발을 디뎠다.
이후 마치다 성당으로 교적을 옮기며 오쿠라 가즈미 신부와 인연을 맺었고, 한국에서 철수한 일본 기업 스미다에 의해 해고된 한국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1990년 가톨릭 도쿄교구 정의와평화위원회가 발족되자 정식 회원으로 가입했고, 이듬해에는 걸프전 이후 난민을 지원하는 '이라크전쟁난민구원기금' 활동에도 나섰다. 또 현장의 소통을 잇기 위해 '액션 포 피스 마치다'라는 모임을 만들어 회보를 직접 기획·발행하며, 신앙을 삶으로 실천하였다.
다카지마는 1992년 '일본의 전후 보상에 관한 국제 공청회'에 참석하며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그 뒤로 피해자들의 증언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 그녀는 행동하는 연대를 멈추지 않았다.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며 헌신을 이어갔고, '국민기금' 반대 운동, 2000년 여성법정 실무 지원, 로라 마싱(Lola Massing.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 토마사 살리노그(Tomasa Salinog)의 존칭)의 집짓기 프로젝트 등 수많은 일을 감당했다. 늘 '시타바타라키(下働き)', 즉 보이지 않는 곳에서 꼭 필요한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이었다. 전시 성폭력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네트워크, 바우넷 재팬(VAWW-NET Japan)의 초대 사무국장이었던 김부자 씨는 "다카지마가 대리로 전반적인 일을 감당해주었기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다카지마는 이후 2대 사무국장직을 직접 맡기도 하였다.
병마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실천의 삶
1999년, 필리핀 로라 마싱의 집을 짓고 돌아온 뒤였다. 39도에 달하는 고열이 계속되었던 다카지마는 결국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6개월간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그녀는 직접 의학서를 읽고 병에 대해 이해하며 치료 방향을 주도적으로 결정했다. 경과가 호전되자 2000년 말과 2001년에는 다시 필리핀과 한국을 방문했지만 병이 재발했고, 조혈 줄기세포 이식 후 '이식편대숙주병(GVHD)'[1]으로 고통을 겪었다. 2003년 1월 28일, 다카지마는 끝내 세상을 떠났다. 도쿄 성이그나시오 성당에서 약 700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그녀의 장례미사가 거행되었다.
차가운 세상에 건넨 따뜻한 속삭임
다카지마는 시민모임 '액션 포 피스 인 마치다'의 기관지를 만들며 기획, 편집, 인쇄까지 도맡았다. 매호 실린 칼럼 '눈물의 교차로'는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제목은 도쿄 미나미센주역 인근의 거친 거리에서 따온 실제 장소였다. 그녀는 취객들의 고성과 악취가 나는 그곳을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지만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곳"이라 표현했다. 수많은 인생의 사연이 오가는 공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 그의 시선이 드러난다.
다카지마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의 연대는 단지 재일한국인의 딸이라는 출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고등학생 시절, 한국계라는 이유로 취업에서 탈락한 경험은 그의 인권 감수성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연대는 그 이상의 공감과 책임에서 비롯됐다.
겨울이면 그녀는 이지메로 인한 장애 여학생의 사망과 오키나와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의 외로운 죽음을 함께 떠올렸다. 그리고 사회적 폭력과 무관심을 "겨울바람보다 더 차갑다"고 말하며, 이렇게 속삭였다.
"우리는 그저 탄식하고만 있을 수 없다."
연대는 감정이 아니라 책임의 공유
1993년, 다카지마는 재일 한국인이며 '위안부' 피해자인 송신도 씨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에 참여했다. 도쿄에서 증언을 마친 송신도 씨를 미야기 자택까지 함께 동행하며 이틀간의 여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송신도 씨는 위안소에서의 참혹한 기억을 안고 일본 외딴 어촌에서 홀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다카지마는 그의 예민하고 다소 제멋대로인 요구에 당황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얕았는지, 그리고 연대란 상처의 깊이를 함께 감당하며 책임을 나누는 일이라는 사실임을 새삼 깨닫는다.
국민기금이라는 '위로'로는 넘을 수 없는 책임의 벽
김학순 씨의 증언을 계기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으로 확산되자, 일본 정부는 '국민기금'을 설립해 민간 기부금 형식의 위로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다카지마는 이 기금이 국가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녀는 '위안부' 문제는 우연한 사건·사고가 아니라 일본 정부의 명백한 국가 정책에 따른 인권 침해였기에, 정부가 직접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해자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주며 자신도 위로 받는 듯한 감정에 경계심을 느꼈고, 단순한 시혜가 아닌 제도적 책임을 묻기 위해 국회와 재판장까지 뛰었다. 그녀는 국가의 공식 책임 없는 국민의 선의의 지원이 정의 회복과 진정한 화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깊이 성찰하며 행동에 나섰다.
'2000년 여성법정'을 가능하게 한 사람
필리핀에서는 한국이나 대만에 비해 '국민기금' 수령에 대한 저항이 약했고, 피해자 대부분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 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수령했다. 그러나 로라 마싱은 다카지마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기금 수령을 거부했고, 다카지마는 그녀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짓기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녀는 이것이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함께 싸우는 연대의 표시"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의 필리핀 피해자에 대한 지원은 이후 '자유 할머니들(말라야 롤라스, Malaya Lolas)'을 지원하는 활동으로 확대되었다. 필리핀의 활동가 인다이 사호르의 제안으로 전시 성폭력 피해에 대한 국제재판 개최 논의가 시작된 후에는 마쓰이 야요리 등과 함께 '바우넷 재팬'을 결성, '2000년 여성법정'이 열리는 데 결정적인 조력을 했다. 이 법정은 법적 구속력은 없었지만 "시민의 힘으로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남기며 국제 인권운동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다카지마는 백혈병 투병 중에도 모금과 실무를 감당하였고, 법정 참가자들의 숙박과 행사 진행을 위해 행사기간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할 정도로 헌신했다. 많은 이들이 그녀 없이 '2000년 여성법정'은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라 회고한다. 그녀는 말 그대로 '조용한 기적'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생을 던져 '지금-여기'의 윤리 실천
로라 마싱의 집이 완공된 무렵, 다카지마는 자신의 건강이 더는 허락하지 않음을 느꼈다. 그녀는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위안부' 운동 등 관련 자료를 정리하며 "백혈병에 안 걸리면 이상할 정도"라는 혼잣말을 남겼다. 삶 전체를 이 문제에 쏟아 부은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본래의 나'가 누구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다카지마는 왜 이토록 집요하게 여성에 대한 국가폭력을 성찰하고 책임을 요구했을까? 전후 보상 실현을 위한 시위를 준비하던 중 아들이 "위험한 일은 하지 마세요. 제 미래에 제약이 될 수도 있어요"라고 말했을 때, 다카지마는 조용히 이렇게 답했다.
"아들아, 미래는 네게만 있는 것이 아니란다. 김 씨의 아들에게도 있는 거야."
'김 씨의 아들'은 재일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하고 있던 초등학생이다. 다카지마에게 '위안부' 문제는 단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는 모든 차별을 지속시키는 구조의 반영이었다. 필리핀 피해자 로라 마싱의 고통, 송신도 씨를 비롯한 한국 피해자들이 겪은 폭력 그리고 재일 조선인 아이의 고통은 모두 같은 연속선 상에 있는 인권 문제였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논리적 분석보다 감각적 직관에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을 '짜깁기' 하듯 연결하며, 언어 너머의 진실에 다가간다. 다카지마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그의 연대에 닿는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여기, 우리가 책임져야 할 과제를 묻고 있다.
각주
- ^ 조혈모세포이식 시 수혈된 림프구가 면역 기능이 저하된 숙주, 즉 수혈 받은 사람의 신체를 공격해 발열과 발진, 간 기능 이상, 설사, 범혈구 감소증 등의 증상을 일으키는 질환
연결되는 글
-
- 2만 1085통의 엽서와 1만 589명의 시민, 그리고 감동의 오사카 활동가들
-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청소년 시민들이 주인공들이고 희망이다.
-
-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실천인 이유
-
마침내 10여 년 만에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하는 <표현의 부자유전>을 성사시킨 일본 시민들의 연대 실천
-
-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를 보고
-
관부재판 원고들의 일이나 그들과 함께 투쟁한 우리들을 잊지 않고, 잊히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은 그들이 준 선물이며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