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회복을 통합한 국가폭력 조사의 길을 열다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의 윤경회 간사 인터뷰 1부
(1) 치유회복을 통합한 국가폭력 조사의 길을 열다
(2) “우리는 서로의 용기, 서로의 증언자”
Q : 안녕하세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사회적 참사와 과거사 조사 활동에 참여한 특이한 이력이 눈에 띕니다. 자기소개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 윤경회 : 개인적으로 오늘 웹진 <결>과의 인터뷰는 저에게 특별해요. 제 이력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닿아 있거든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던 대학 1학년 새내기 때 공익광고 제작에 관심이 많아 다큐멘터리를 꽤 봤어요. 그때 <낮은 목소리2>를 만난 계기로 역사다큐 감독을 꿈꿨는데, 이것이 사회문제에 대한 천착으로, 학생운동으로 연결된 거예요. 그러다 '대한민국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 업무를 수행했고, 고양성폭력상담소에서 상근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조사위)'는 전임 팀장께서 건강문제로 공석이 되어 지원하게 되었구요. 2023년 3월 13일부터 출근했으니 조사 활동 종료일인 12월 26일까지 9개월을 남긴 상태에서 제가 합류하게 된 거죠. 이듬해 6월 조사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5·18조사위 활동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한 뒤에는 피해자 분들과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이하 '열매')'를 만들고 간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활동 종료 9개월 남기고 합류하고 보니…
Q : 5·18민주화운동 당시 발생한 성폭력 피해에 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종합적이고 실체적인 진실에 다가가지는 못했었죠?
🧶 윤경회 : 맞습니다. 과거에도 성적 피해 사례가 언급된 적 있고, 연구자들이 진행한 구술 채록이 언론이나 다큐에 소개되기도 했어요.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공식화된 것은 2018년 말입니다. 피해자 김선옥 님의 5월 8일 인터뷰를 계기로 발족한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의 조사 활동을 통해서요. 하지만 공동조사단 활동 기간(2018.6.8.~10.31.)이 채 다섯 달도 안 됐고, 법적 권한에도 한계가 있어 종합적인 피해 실상을 확인하기는 어려웠어요. 이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근거해 2019년 12월 27일 출범한 '5·18조사위'가 2020년 4월 공동조사단의 조사 자료를 인계 받아 검토하고, 5월 11일 직권으로 성폭력 사건에 관한 조사를 개시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2021년 1월 5일 '성폭력'을 조사 범위에 포함하는 법 조항이 신설되면서 본격적인 조사 활동에 들어가게 되고요.
Q : 활동 종료 9개월 전이면 조사가 상당히 진전된 상황에서 합류하신 거네요.
🧶 윤경회 : 시기상으로 그래요. 처음에는 인계 받은 조사 자료를 검토, 취합해 심의 안건까지 담은 보고서를 정리하면 될 줄 알았어요. 그 일만으로도 빠듯한 시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자료를 검토해보니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법적 효력을 가지려면 피해자의 동의부터 구체적인 피해와 관련한 질문과 답변, 간인까지 마친 진술 조서 형식이어야 하는데, 피해 입증 자료로 인정받기 어려운 단순 녹취록에 불과했어요. 이유를 봤더니 조사관이 피해자를 만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드러나지 않은 분들까지 찾아내기 위해 이전 자료나 연구까지 뒤져 전수조사해 연락했지만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냐', '피해를 밝힌 적이 없다'며 완강히 거부하는 분들이 많았던 거예요. 상황이 그러니 만나만 주십사 겨우 설득해 확보한 자료가 녹취록이었던 건데, 내용도 빈약했어요. 이분들에게는 온몸에 새겨진 40년 전의 피해를 처음으로 언어에 실어 말하는 경험이다보니 내용 여기저기가 거시기, 거시기예요. 또 울음으로 끊긴 부분도 많아요. 피해자가 우시니 조사관도 울고… 이야기가 중단되는 거죠.
단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도 없도록!
Q : 피해 입증 자료 전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는 많이 당황하셨겠어요.
🧶 윤경회 : '큰일났구나!' 겁이 덜컥 났죠. 힘들게 진술하고 곧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하고 계신 분들께, 새 팀장이 와서 다시 조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상황이잖아요. 실제로 '전임은 어디 갔냐', '우사스럽게 또 하란 말이냐', '이리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안 했다'… 두어 달 동안 엄청 원성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연락을 드리고, 계속 다니다가 한 피해자의 가게에서 5시간 동안 기다린 적이 있어요. 그때가 조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운 결정적인 기회였던 것 같아요. 끝내 조사 동의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간 쌓여온 피해자들의 경험을 대변해주셨거든요. 그동안 관심이 고마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피해 경험과 아픔을 성심을 다해 얘기했는데, 어느 순간 자신들이 넘고 헤쳐온 삶의 애환은 빠진 채 여고생, 군용 트럭, 집단 강간 같은 자극적인 용어들로 그 이야기가 소비되더라는 거죠. 그러고 난 뒤에는 다시 찾아오는 사람도, 국가의 성의 있는 조치도 없었고요.
한편으로 피해자의 '말하지 않을 권리'도 저희에게 굉장히 어려운 딜레마였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피해자의 욕구이자 권리잖아요. '증언'의 의미도 있고요. 반면 말하고 싶지 않은 피해 경험도 있었어요. 한 예로, 5·18 당시 전남합동수사본부 조사 과정에서 성고문을 당했거나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됐다가 조사받으러 상무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집단적인 성적 침해 피해가 있었어요. 문제는 그 피해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용기 있는 여성의 증언이 다른 여성에게는 엄청난 공포였어요. 1980년대 정조 관념 속에서 함께 연행돼 구금, 조사받은 여성들은 '너도 그랬어?'라는 시선을 받을까봐 너무너무 무서웠던 겁니다. 누군가 밝힌 사실이 아무런 윤리의식 없이 인용, 재인용되거나 험하게 다뤄지는 걸 끔찍한 공포 속에서 봐야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Q : 보고서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질문을 다시 받으셨던 거네요.
🧶 윤경회 : 정말 난감했어요. 동시에 고마웠고요. 피해자들이 왜 진술을 거부하는지, 왜 적지 않은 분이 광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 살고 계신지, 그 고충과 저희가 뭘 모르는지를 알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작전을, 조사 설계를 다시 짰어요. 조사의 목적과 방향은 '단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도 없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첫째, 5·18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 피해자의 상황과 처지를 고려한 조사 방법과 40년 전 사건의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현실적인 판단 기준을 마련해 진상조사를 추진할 것, 둘째, 사건 후 피해자와 가족이 겪은 신체적, 정신적 피해 실상은 물론 사회관계적 피해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해 이들의 치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국가의 책임 있는 조치를 연계·도출할 것, 셋째, 국민들이 피해자의 오랜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상규명조사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함으로써 국민통합에 기여할 것 등을 설정했습니다.
이를 위해 조사팀을 새로 꾸렸어요. 5급 팀장과 6급과 7급 조사관 각 1명, 총 3명이 전부였지만요. 설득이 안돼서 결국 소수의 피해자만 조사에 동의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것, 조사를 통해 피해자라는 확신이 들었다면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국가의 통지서를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공유한, 기어코 이 일을 해내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한 인력이라는 점이 달랐달까요. 조사는 사람이 하는 거니까요.
'국가폭력 피해' 전문가 없어 조사와 '치유적' 상담 병행
Q : 상담 전문가가 동행한 조사 활동이 인상적입니다.
🧶 윤경회 : 네. 다행히 전문위원을 위촉할 수 있어 성폭력, 국가폭력에 대해 이해가 있는 상담 전문가를 포함시켰어요. 피해자와 만남은 단 한 번의 조사, 그럼에도 의미 있는 조사여야 해요. 하지만 그 조사가 피해자에게는 트라우마를 재경험하는 시간이에요. 언어에 실어 누군가에게 피해 경험을 말하려면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재현해야 하는데, 몸으로 경험한 폭력이라 벌벌 떨고, 구토를 하고, 심지어 손발이 이렇게 퉁퉁 부어요. 인지적 과정이 아니라 몸으로 재현이 되는 거예요.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이하 성폭력특례법)」도 없던 때, 성폭력이 부녀자에 대한 정조의 죄였던 때, 여성으로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라 저수지로 뛰어들어야 했던 때의 피해 경험은 요즘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였어요. 성폭력 피해자 상담을 해온 저도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요. 이 때문에 조사 과정의 말하기가 치유적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준비된 상담자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국가폭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제대로 이해하는 상담 전문가가 없어요. 그간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으니까요. 결국 조사팀이 전문위원과 같이 감당해 가면서 조사와 상담을 겸하기로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지한 또 하나의 자각이 있어요. 저희가 공권력, 그러니까 군인이나 합수단 수사관에게 피해를 당해 국가와 사회에 불신이 높은 분들을 만난다는 사실이었어요. 이번에는 저희가 국가기관이고 공무원이에요. 이들이 피해를 인정받고 배·보상을 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저희인 거예요. 1980년대와 완전히 다르게, 조사 과정 전체가 공권력이 신뢰를 회복하는 '치유적 경험'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조사 활동 시작부터 함께 한 2명의 국방부지원단도 다르지 않았어요. 피해자들께 과거에는 가해자였지만 지금은 은폐된 진실을 물 위로 올리는데 조력하는 군인이라는 점, 이들의 도움으로 피해를 입증할 수 있도록 해 새로운 군인을 경험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감각 기억'과 '핵심 장면'에 주목하다
Q : 그때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재개된 셈이네요.
🧶 윤경회 : 그렇죠. 그런데 피해자 진술은 또 다른 난관의 연속이었어요. 이야기를 들어도 사건이 구성되지 않았거든요. 이들에게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장면이라 할 수 있는 강간의 시간에 대한 기억이 지워져 있었어요. 특별한 인상 착의는 없고 군복 아니면 그냥 '메리야스' 입은 남자예요. 과거의 자료나 증언을 놓고 보면 진술이 일관되지도 않고요.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취합되는 사전 정보가 있었습니다. 사건 발생부터 40년이 지난 일, 피해를 언어로 말해 보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충격적인 트라우마는 '블랙아웃', 즉 기억을 상실시킨다는 사실 등이요. 미국 9·11테러 10년 후 피해자를 추적해보니 사건 발생이 낮이었는지, 밤이었는지 기억하는 비율이 50%에 불과하다는 조사도 있어요.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무엇을 입증 자료로 쓸 수 있을까 검토하다 보니 반복되는 얘기가 보였습니다. 감각과 장면이었어요. 강간을 당할 때 느꼈던 감각, 그때 씩 웃던 군인의 표정, 장갑 낀 손, 하혈로 젖은 옷을 입고 숙소로 돌아갈 때의 축축함, 군용 트럭에서 우루루 내리는 군복 입은 사람들이 겁이 나 막 뛰었던 순간, 무서워서 셔터를 내릴 때 눈앞에서 누군가 대검에 찔려 피가 솟구치는 장면…. 이를 저희는 '감각 기억'과 '핵심 장면'이라고 명명하기로 하고, 이를 중심에 놓고 피해를 입증할 만한 진술을 서사적으로 듣기로 했습니다.
Q : 서사적으로 듣는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이었을까요?
🧶 윤경회 : 녹음기를 켜놓고 피해 장소를 어떻게 가게 됐는지, 무엇을 겪었는지,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 오늘날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등을 피해자가 기억하고 말하는 대로 쭉 듣는 거예요. 그러면 조사관이 피해자의 삶을 '서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동시에 의미 있는 진술을 위해 무엇을 물어야 할지 감지하는, 어찌보면 피해자의 기억과 언어에 대해 학습하는 시간이기도 했고요. 그런 뒤 조사관이 피해자의 핵심 진술이 시간 순으로 드러나게 진술내용을 정리해요. 물론 자의적인 해석 등 부수적인 위험이 있기 때문에 진술 조서를 정리한 다음에는 소리내 읽어드리고, 마지막으로 그 내용에 피해자가 합의하면 정식 진술 양식인 '간인(間印. 함께 묶인 서류의 종잇장 사이에 걸쳐서 도장을 찍음)'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어요.
그런데 소리내 읽을 때 피해자와 저희 모두 놀라운 경험을 했어요. 피해자의 말을 조사관이 '이런 뜻이냐'고 확인하고 문장으로 표현할 때 자주 일어났는데, 에코랄까, 공명이랄까, 동시에 시공간이 울리는 느낌이에요.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을 통해 피해가 적절한 언어로 구성되고 제3자가 이해할 만한 새로운 글로 바뀌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하나의 매듭이 풀린 것처럼 '치유'의 경험을 하는 게 보였습니다.
'시공간 울리는 경험' 바탕으로 19명 설득... 유형 분석 가능해져
Q : 피해자와 조사관이 어떻게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본 같습니다.
🧶 윤경회 : 그런 시간을 거쳐 진술에 동의하고 대인조사와 기록조사, 실지조사를 추진한 피해자는 총 19명입니다. 전수조사 때 파악한 52건의 피해 의혹 사례를 놓고 보면 적은 수치로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피해자와 조사관이 듣고 말하며 공명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이 결과도 어려웠을 거예요. 왜냐면 그 울림의 경험 속에서 차츰 조사를 거부하는 분들을 설득하는 '요령'이 생겨났거든요. 피해자의 신뢰를 얻는 것은 결국 지지하고, 최선을 다해 듣고, 의미 있는 질문과 정보를 찾으면서 진실에 다가가려는 저희 조사관의 태도와 의지라는 걸 여러 번 느꼈어요. 나중에 19건이 유형 분석을 하기에 충분한 숫자라는 연구자와 전문가의 평가까지 들어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Q : 이렇게 방향부터 태도까지 재설계해 진행한 '5·18조사위' 진상 규명 활동을 취합해 정리한 것이 결과보고서군요. 그 주요 내용을 소개해 주세요.
🧶 윤경회 : 조사위에서는 확인해야 할 것을 세 가지로 봤어요. 첫째는 5·18 당시 성폭력 피해 사실이 있었는가 진위 여부 파악, 둘째는 어떤 상황에서 피해가 발생했고, 책임 소재는 어디에 있는가였어요. 이건 출범 전부터 쟁점이었는데, 국가폭력이 아니라 군인 개인의 일탈일 수 있다는 시각이 있었거든요. 여기에 마지막으로 조사 재설계 과정에서 추가한 것이 사건 발생 후 현재까지 43년 동안의 신체적·정신적·사회관계적 피해였습니다.
그리고 40년만의 조사에서는 피해자들의 특성과 상황에 맞춰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조사 방법과 판단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확인 과정에 '피해자 중심적 접근' 원칙을 적용하기로 했어요. 피해자를 아픈 사람, 고통받는 사람, 약자, 배·보상을 바라는 수혜자로 보는 우리 안의 시각을 교정하고, 본인의 피해를 포함해 당시 5·18을 겪은 목격자이자 진상 규명을 위해 참여하는 권리 주체이자 국가에 증언을 각오한 증언자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을 바탕으로요. 이를 위해 피해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드리는 것은 물론 치유와 회복에 필요한 정책적 제안을 권리로 보장하고 분석해 보고서에 담기로 했습니다. 피해 진술의 일관성, 구체성, 합리성 등을 따지는 2020년의 형법 기준을 들이대면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피해를 가리기 어려우니까요. 이렇게 해서 집계된 피해 사례가 19건이었고, 최종 보고서에는 16건에 대해 '진상규명'으로 의결했습니다.
전직 계엄군의 참회와 반성 덕분에 확인된 성폭력 진상
Q : 3건은 왜 포함되지 못했을까요?
🧶 윤경회 : '진상규명불능'으로 판단된 3건 중 1건은 '진상규명불능' 원안이 가결된 것이고, 2건은 '진상규명' 원안이 부결된 건이예요. 2건 모두 시내버스에서 이루어진 성폭력인데, '대낮 도심의 시위진압작전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없다'는 통념이 강하게 작용했어요. 한 분이 이의신청을 했지만 조사활동기간 만료로 재조사 기회도 주어지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최종적으로 19건 사례를 종합 분석한 결과 먼저 성폭력 피해가 계엄군의 조직적인 작전으로부터 야기된 폭력이라는 사실, 즉 '국가의 책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피해 발생 상황은 크게 세 덩어리였어요. 하나는 광주를 고립시키려 주변 지역을 에워싸면서 진행된 외곽봉쇄작전에서 계속 발생해요. 매복을 위한 정찰 요원을 서너 명씩 보내는데, 이들이 찾고 이동하는 작전 구역 내 야산, 산골짜기 등에서 피해가 일어난 겁니다.
또 다른 피해는 도심의 시위 진압 작전이 이뤄진 터미널과 초등학교, 금남로 등지에서 나타나요. 당시 도심 집회에 대응하는 계엄군의 작전은 해산이 아니라 연행하고 체포하는 방식이었어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사진 기록에 남아 있는 것처럼 연행 후에는 속옷만 남기고 옷을 다 벗겨요. 대개 남성들이 탈의한 모습이지만 여성도 다르지 않았어요. 1979년 부마항쟁 때 시위에 참여하는 여대생들이 늘어나자 이를 새로운 현상으로 본 군 당국이 5·18 때는 창피를 당하면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해 초기부터 시위 진압 대책으로 강제 탈의를 지시하고 실행했습니다. 공용 터미널에서, 초등학교 앞에서 속옷만 빼고 다 벗겨진 여성들은 군용 트럭에 실려 전남대나 조선대 운동장으로 이동해요. 그렇게 이동하는 도중에 트럭 안에서 군인들의 추행이 자행됐어요. 계엄군에게 여성을 강간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강제 탈의 지시는 이동 트럭, 후미진 골목, 수색하는 집 등의 사각지대에서 폭력과 야만성을 부추기는 기제가 됐던 거예요.
Q : 당시 계엄군의 강제 탈의 지시를 뒷받침하는 문서 기록이나 군인들의 진술도 있나요?
🧶 윤경회 : 지시 내용이 담긴 문서는 남아 있지 않았어요. 계엄군 지도부 중에 협조적인 이도 없었고요. 다만 꼭 강조하고 싶은 부분 중 하나는 5·18 성폭력 피해에 대한 진상 규명에서 피해 당사자의 용기 있는 증언이 결정적이었지만, 당시 투입된 계엄군의 참회와 반성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5·18조사위'의 주요 활동에는 당연히 계엄군에 대한 조사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국가의 책임을 판단하려면 군의 작전과 지시 상황, 피해와 연관성을 알아내야 하니까요. 그래서 당시 광주 금남로에 최초 투입된 제7공수여단 33대원을 전수조사하기 위해 총원 298명 중 주소지가 파악된 199명에게 서한문을 보내고 전화와 문자로 진술조사 참여를 요청했어요. 제가 입사하기 전 그만둔 6급 조사관의 조사 활동이었어요. 이중 약 10%인 29명이 응해 대인 조사가 이뤄졌고요. 이들을 통해 옷을 벗기라는 대대장의 지시가 있었고, 현장에서는 자기가 봐도 '미쳐 있었다'고 할 정도로 곳곳에서 여성들에 대한 추행이 벌어졌다는 증언을 확보했어요. 심지어 대검을 옷을 벗기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대원 중 1명은 대검을 날카롭게 갈아서 출동했다는 진술도 있었어요. 실제로 등에서 날카로운 것이 느껴진 뒤 옷이 벗겨지고 피를 흘렸다는 사례가 4건이고, 군용트럭에 오르다 대검에 찔려 결국 자궁을 잃은 피해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증언을 통해 전직 계엄군도 피해자들처럼 평생 수치심과 공포감을 지고 살아왔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국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 군인이 폭력의 주체였다는 부끄러움, 혹시 알아볼까 겁이 나서 제대 후에는 광주 쪽으로 아예 발길을 못한 분도 있었어요. 또 부마항쟁 때처럼 사나흘이면 광주도 진압될 거라던 예상이 어긋나니까 엄청나게 공포스러웠다는 거예요. 강도 높게 훈련받은 군인인데도 점점 인파가 늘고 차량 시위까지 격렬해지는 와중에 옆에 있던 동료가 맞고 다치고 쓰러지는 걸 보니까 눈이 돌았다고, 무서우니까 더 폭력적이 되더라는 이야기까지 하셨어요.
인터뷰어 : 소현숙, 손정미
인터뷰이 : 윤경회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5년 5월 9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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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윤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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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의 간사이다. 2023년 3월부터 2024년 6월까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조사를 담당한 조사4과 3팀장으로 일했고, 진상규명조사보고서를 펴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 업무를 수행했고, 고양성폭력상담소에서 일했다.
- 글쓴이 웹진 <결>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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