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2)

김성운 김효연

  • 게시일2023.09.04
  • 최종수정일2023.09.04

우리는 전쟁이 인간에게 남기는 심원한 고통에 관해 얼마나 아는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뿐 아니라 원폭 피해자와 사할린 잔류자의 인권 문제 또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배제되었다. 특히 원폭 피해는 전시 성폭력과 유사하게 몸에 직접 작용하여 성적 재생산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일종의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한다. 이에 웹진 〈결〉은 연구자 2인의 글에 원폭 피해자들의 일상을 담은 김효연의 사진 작업 ‘감각이상’을 병치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글: 김성운 X 사진: 김효연

*이 에세이는 김성운 교수의 논문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어머니와 산다면(母と暮せば)」, 「태양의 아이(太陽の子)」를 중심으로」, 『일본연구논총』 56집, 2022, 91-116를 요약, 정리한 글입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폭심지 반경을 붉은 색으로 나타내는 ‘그라운드 제로’ 원폭 지도, 히로시마(김효연, 감각이상 023, 2019) ⓒ김효연

 

Ⅲ. 〈태양의 아이〉: 피해자성의 거부

〈어머니와 산다면〉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과정, 등장인물들의 부상과 상실을 통해 미국과의 전쟁이라는 맥락을 다시금 상기시킴으로써 원폭의 ‘재역사화’에는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인이 입은 피해만을 강조하는 ‘피폭 내셔널리즘’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태양의 아이〉(2021)는 일본인들이 원폭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는 아시아·태평양 전쟁기 교토대학의 아라카쓰 분사쿠(荒勝文策) 연구실에서 원폭 연구를 진행했던 젊은 과학자들의 고뇌와 좌절을 그리고 있다. 핵분열을 뜻하는 ‘fission’에서 따온 ‘F호 연구’로 알려진 이 비밀 프로젝트는 당시 해군 함정 본부가 1943년 5월 아라카와 연구실에 의뢰한 연구로, 전황이 급박해진 상황에서 일본 역시 미국처럼 원폭의 개발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1]

1938년 독일 핵물리학자들이 핵분열을 발견한 후 미국을 포함하여 핵무기 개발에 뛰어든 국가는 미국과 일본을 포함, 모두 6개국이었다. 전시 일본의 핵무기 개발 과정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 역사학적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이것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일본이 전쟁 중 핵무기를 실제로 개발했다는 사실은 앞서 언급한 ‘피폭 내셔널리즘’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으로, 언론 매체가 기꺼이 다룰 만한 소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교토대학 아라카와 연구실의 ‘F호 연구’보다 더 많이 알려진 것이 도쿄대학 이화학 연구실의 물리학자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의 이름을 딴 ‘니고(ニ号) 연구’이다. 1941년 6월 육군 항공 기술 연구소의 야스다 다케오(安田武雄) 중장은 당시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았던 니시나에게 핵무기 연구를 의뢰했다. 의뢰를 받은 니시나는 1943년 초에 정식 연구보고서를 육군 측에 제출했고, 육군은 이를 근거로 같은 해 5월 니시나 연구소에 핵무기 개발을 명한다. 전쟁의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던 당시 총리 도죠 히데키(東条英機) 역시 이 프로젝트에 큰 기대를 걸었다. 1944년 봄 이후에는 이 계획이 정부의 연구 동원 회의에서 관민 공동의 국가 프로젝트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라늄이었다. 야스다에 의하면 원폭 1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우라늄을 확보하는 것은, ‘대동아공영권’을 다 뒤져도 수십 년이 걸리는 일이었다. 한편 미국은 하루에도 수십 기의 원폭을 제조할 수 있는 양의 우라늄을 확보했고 이러한 소식이 일본에도 알려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의 관계자들은 핵무기 개발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전세를 단숨에 뒤집을 수 있는 가공할 만한 ‘신형 무기’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해졌다. 44년 2월, 물리학자이자 귀족원 의원이었던 다나카다테 아이키쓰(田中舘愛橘)는 “라듐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영국 함대를 궤멸시킬 수 있는 폭탄”을 개발할 것을 군부에 촉구했다. 1940년 마이니치 신문이 우라늄-235를 ‘꿈의 동력원’으로 소개한 이후 원폭에 대한 지식은 대중들에게도 확산되었다. 1944년 7월 2일 아사히 신문은 ‘결전의 신병기’ 특집에서 “10~15그램만 있으면 대도시 1~2개 주민 정도는 식은 죽 먹기로 날려버릴” 수 있는 폭탄에 대해 소개했다. 같은 시기 대중잡지 『신청년(新青年)』에 실린 다테카와 겐(立川賢)의 소설 「샌프란시스코를 날려버리다」는 일본군이 ‘원자력 항공기’로 태평양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원폭을 투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전시 핵무기 연구는 결국 미국의 그것을 따라잡지 못했고, 일본의 전쟁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미국의 원폭에 의해 종결되었다. 이후 미국의 원폭조사단에 따르면 일본의 ‘니고 연구’는 미국 ‘맨해튼 프로젝트’의 1942년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언론인 스기타 히로키(杉田弘毅)는 ‘니고 연구’에 시간이 좀 더 주어졌더라면 일본이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 아니라 최초의 핵 사용국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영화는 교토대학 아라카쓰 연구실의 젊은 과학자 이시무라 슈와 그의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라카쓰 연구실은 해군의 의뢰를 받아 핵분열을 이용한 ‘신형무기’ 제작 실험에 돌입한다. 우라늄-235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 실험이 번번이 실패로 끝나지만 실험광 슈는 원자가 붕괴할 때 발생되는 청록색 빛깔에 이끌려 동료들과 실험을 지속해 나간다. 그러던 중 해군 파일럿에 지원했던 동생 히로유키가 일시 귀환한다. 동료들이 모두 가미카제 작전에 출격하는 상황에 자신만 빠질 수 없다는 괴로움을 토로하며 바다에 빠져 자살하려는 동생을 슈는 구해낸다. 이렇게 전쟁이 젊은이들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놓는 가운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슈를 비롯한 아라카쓰 연구팀은 히로시마로 향한다. 그곳에서 원폭의 위력을 목도한 슈는 그가 그토록 간절히 추구해온 과학적 진리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우라늄 농축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아라카쓰 연구실 과학자들(영화 〈태양의 아이〉 캡처본)


〈태양의 아이〉는 일본에서 원폭을 개발하는 과정을 미국과의 경쟁으로 묘사한다. 아라카쓰 연구실의 과학자들은 엄청난 살상력을 지닌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하나오카: 원자핵 폭탄이라고 하는 것은 살상 능력 면에서도 차원을 달리할 거예요.
오카노: 샌프란시스코라면 어림잡아 20만 명은 죽을 거야.
기도: 30만입니다. 제 계산으로는.
하나오카: 우리들이 여기에 가담해도 되는 것일까요?
기도: 지금 그런 걸 생각해도 의미는 없어.
(중략)
기도: 우리가 하지 않으면 미국이 할 거야. 미국이 만들지 않으면 소련이 만들겠지. 먼저 원자핵 폭탄을 만드는 자가 세계의 운명을 결정해.

이렇게 일본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이나 소련과의 경쟁을 의미했다. 결국 미국에 의해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고, 폐허가 된 히로시마를 시찰하고 오는 기차 안에서 연구실의 과학자들은 “일본은 원자핵 폭탄에 당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원폭의) 개발 경쟁에서 졌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에요. 일본의 과학자는 패배했습니다!”라며 분개한다. 이렇게 히로시마를 폐허로 만든 원폭은 미국과 일본의 개발 경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단지 과학기술이 우수한 미국이 일본보다 먼저 개발에 성공했을 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태양의 아이〉는 일본의 핵무기 개발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원폭의 ‘재역사화’를 시도함과 동시에, 원폭 개발 경쟁에서 일본 역시 가해자가 될 수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태양의 아이〉에서 나타나는 원폭의 ‘재역사화’ 역시 3.11 이후의 일본 사회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이후 일본 사회는 핵에너지의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강화해왔고, 그것이 앞서 언급한 ‘피폭 내셔널리즘’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일본 정부의 원자력 에너지 정책으로 일본 사회는 원자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점차 탈바꿈했고 이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원전 시설 폭발 이후 수개월간 방사능 물질이 대기와 토양을 오염시켰고, 방사능 오염수는 바다를 타고 주변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 유일의 원폭 피해국인 일본이 결국 자국민은 물론 타 국민에게까지 방사능 오염의 피해를 입히는 가해국이 되었고, 이러한 전환의 가능성이 〈태양의 아이〉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영화는 기존 원폭 영화의 ‘피폭 내셔널리즘’ 문법을 수정하고 있다. 원폭 투하의 역사적 맥락, 즉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는 맥락을 다시금 상기시킴으로써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정부와 군부의 과오를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두 영화 모두 원폭의 경험을 일본으로 한정하며, 전시 일본의 침략의 역사를 진지하게 다루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미국의 원폭 투하를 초래한 태평양 전쟁이 사실은 1931년 일본 관동군의 만주 침략으로부터 시작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일부였다는 사실, 더 나아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병합으로 시작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아시아 이웃들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의 대략 10%가 재일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각주

  1. ^ 杉田弘毅, 『検証非核の選択: 核の現場を追う』, 岩波書店, 2005, 15-16. 전시 일본의 핵무기 개발에 관해서는 이 책을 참조함. 

 

참고문헌

·川口隆行, 2021, 「대재난의 망각과 상기―포스트 3.11의 역사적 지층―」, 『일본학보』 129집.
·강태웅, 2009, 「원폭영화와 ‘피해자’로서의 일본」, 『東北亞歷史論叢』 24집.
·서동주, 2014, 「일본 고도성장기 ‘핵=원자력’의 표상과 ‘피폭’의 기억」, 『日本學報』 99집.
·장정욱, 2011,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원자력의 미래: 아직도 계속되는 원자력 마피아의 거짓말」, 『프레시안』,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36817.
·Kenzaburo, Oe, 2011, “History Repeats”, New Yorker (28 March)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1/03/28/history-repeats.
·Yoshimi, Shun’ya, Trans. Shi-Lin Loh, 2012, “Radioactive Rain and the American Umbrella”,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71, No. 2.
·木村朗子, 2016, 「五年後の震災後文学論」, 『新潮』 113(4).
·佐藤忠男, 2016, 「知らせることが、大切なこと」, 『キネマ旬報』 1718.
·杉田弘毅, 2005, 『検証非核の選択: 核の現場を追う』, 岩波書店.

연결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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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폭을 그린 영화들 역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재고찰에 참여하면서 3.11 이전의 원폭 영화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성운, 김효연 2023.09.04

글쓴이 김성운

시카고대학교 역사학부에서 일본 TV 방송의 성립 과정을 냉전의 맥락에서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는 덕성여대 사학전공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논저로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어머니와 산다면(母と暮せば)」, 「태양의 아이(太陽の子)」를 중심으로」(2022), 「Japan’s Got Talent: The Rise of Tarento in Japanese Television Culture」, 『Reconsidering Postwar Japanese History: A Handbook』(2023, 공저) 등이 있다. 현재는 현대 일본의 미디어, 핵에너지, 젠더, 퀴어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글쓴이 김효연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20대의 대부분은 현장에서 영화를 만들고 공부하며 보냈다. 현재는 잊혀지거나 감추어진 사건, 장소가 개인과 집단의 삶에 가져오는 변화에 관심을 두고 사진과 영상매체를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와 그 세대를 추적한 작업으로 제12회 상상마당 KT&G SKOPF 올해의 최종작가(2019)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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