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와 일본 국회 입법운동 (2)

도츠카 에츠로(戶塚悅朗)

  • 게시일2023.07.24
  • 최종수정일2023.10.16

4. 입법해결운동의 어려움: 현실적인 두 개의 벽!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는 데 있어 두 가지 큰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 사태의 해결을 위해서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피해자 측이 환영할 만한 법안을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길이었다. 필자는 입법 해결을 위한 개인적인 구상안1을 만들어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피해자 측에 설명하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하지만 몇 번이고 회의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필자가 작성한 입법 구상안에 대한 동의를 얻을 수 없었다.

둘째, 국회 내에서도 어려움이 있었다. ‘조약의 항변’을 돌파할 필요가 있었다. ‘조약의 항변’을 이유로 ‘입법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정부와 국회(보수파) 관계자들은 국가 보상을 위한 입법행위 자체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위배된다고 보았다. 그러한 입법행위는 조약을 준수해야 할 국가공무원인 국회의원의 헌법상 의무에 위배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의원입법 노력 자체를 막으려 했다. 이 논리를 뚫고 참의원 법제국의 협력을 얻어내지 못하면 의원들이 법안을 제출해도 인쇄되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 두 개의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토오카 쇼지 참의원 의원을 중심으로 국회의원들과 입법운동에 나선 필자와 다른 시민들은 5년 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필자는 필자의 구상안이 한국 피해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한 채 1998년 2월 미국 시애틀 워싱턴대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 직전에 당시 정대협 고문이었던 박원순 변호사에게 왜 필자의 구상안이 환영받지 못하는지 이유를 작성해달라고 한 뒤, 그 의견서를 모토오카 의원과 참의원 법제국 책임자에게 전달했다. 참의원 법제국 직원들은 정대협의 의견서를 진지하게 읽은 뒤, 어떤 법안이 피해자들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을지 성실하게 연구해 주었다. 거기서 생겨난 것이 바로 ‘사죄’를 목적으로 하는 모토오카 법안이었다.

1999년 9월 8일 모토오카 쇼지 참의원 의원은 노나카(野中) 관방장관에 대한 국회 질문에서 의원입법에 의한 보상 법안이 조약 위반도, 헌법 위반도 아니라는 답변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그 결과 참의원 법제국으로부터 공식적인 협력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전시 성적강제피해자 문제의 해결 촉진에 관한 법률안’(통칭 ‘모토오카 법안’)의 입안에 성공했다. 이 법안에는 필자의 구상안에는 없었던 ‘사죄’라는 단어가 들어있었다. 이 법안을 가지고 한국을 방문한 모토오카 의원은 직접 정대협 대표를 만나 설명했고, 환영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모토오카 쇼지 참의원 의원은 두 가지 어려운 장애물을 극복하고 입법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2000년 4월 10일 제147회 정기국회에서 모토오카 의원이 중심이 되어 마련한 법안이 민주당 법안으로 참의원에 제안된다. 2000년 10월 30일 제150회 임시국회에는 민주당, 공산당, 사민당이 각각 비슷한 법안을 동시 제안함에 따라 3당이 협의하여 법안이 단일화되었다. 2001년 3월 21일 제151회 국회에 3당 공동 제안 법안이 제출되었고, 이후 2008년 제169회 정기국회까지 10회에 걸쳐 야당 공동 제안 법안이 참의원에 계속해서 제출되었다.그러나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찬성하지 않아 입법에는 실패했다.
 

5. 회상: 왜 입법이 실현되지 못했는가?


2009년 9월 대망의 정권교체가 실현되면서 민주당 중심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 정권이 성립되었다. 하토야마 총리를 누가 설득할지가 과제였다. 필자에게는 아직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하토야마 총리는 첫 방문 국가로 한국을 선택했을 정도로 한일 관계를 중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나 한국의 시민운동 모두 왜 일본 정부가 이 법안을 국회에 제출해서 입법 해결을 추진하도록 강력하게 압박하지 않았는가?’라는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필자가 그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수요집회에서 발언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집회는 세미나와 달리 입법 운동의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장소였다. 정대협 관계자에게 ‘연구에 더욱 힘써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다. 세미나를 개최하지 않더라도 필자의 논문 등을 관계자들 사이에서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본 정부와 국회에 ‘입법을 통한 해결’을 압박할 절호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한국 정부나 운동단체 모두 일본 정세에 대한 정확하고 적확한 정보가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위안부'문제로 한일의 단절된 벽을 넘어서기 위해 활동하는 모토오카 쇼지 의원과 오카자키 도미코 의원의 모습 ⓒ백정미

 

입법해결운동의 주축으로 활약하던 민주당의 여성 국회의원 오카자키 도미코(岡崎トミ子) 참의원 의원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정대협의 부탁으로 서울 주재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서 발언한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오카자키 의원은 일본 국회에서 보수파 의원들로부터 “일본의 국회의원이면서 ‘반일’운동을 했다”는 부당한 공격을 받고 민주당 내 직책에서 물러나게 되어 입법해결운동도 정체되고 말았다. 수요집회는 한국의 국내 운동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내 운동의 실효성이 떨어지지 않으려면 연구 활동에 힘을 쏟아 일본 정부와 국회를 압박해 ‘위안부’ 문제를 입법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2000년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가 이끌던 민주당의 차기 내각을 모토오카 의원이 설득했을 때, ‘모토오카 법안’을 의원입법으로 국회에 제출하기로 결정한 것은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 본인이었다. 2009년 하토야마 정권이 들어섰을 때, 모토오카 전 참의원 부의장(2004년 정계 은퇴)이 상경해 하토야마 총리를 만나 ‘모토오카 법안’을 민주당 내각의 정부 법안으로 국회에 제출해 달라고 요청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히라노 히로부미(平野博文) 관방장관4이 사전에 ‘무슨 일로 총리를 만나려는 것이냐?’라며 자유로운 면담을 방해했다. 히라노 관방장관은 모토오카 의원에게 “‘위안부’ 문제의 입법 해결을 요청하려는 게 아니냐? 모토오카 씨가 부탁하면 하토야마 총리는 아마 진행하자고 할 게 뻔하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 ‘위안부’ 문제 이야기를 꺼낼 요량이라면 면회를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때문에 모처럼 하토야마 총리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모토오카 전 참의원 부의장은 요청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필레 유엔인권고등판무관에게 연락하여 빠른 시일 내에 일본을 방문하여 총리를 만나 달라고 요청했다. 필레 씨는 곧바로 일본 정부에 방일 수용을 요청했지만 외무성은 다양한 구실을 대며 방일 시기를 최대한 늦추려 저항했다. 가까스로 방일 및 하토야마 총리와의 면담이 성사됐고, 총리는 심야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필레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면담은 2010년 5월에야 이루어졌다.5 얼마 지나지 않아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사임을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이는 바람에 입법 해결의 절호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입법 해결을 가로막은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여성차별이다. 필자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 시애틀의 워싱턴 대학에서 젠더 문제를 연구했다. 그 결과 일본의 여성차별은 구조적이고 심각한 문제로, 쉽게 개선할 수 없는 매우 어려운 문제임을 뼈저리게 느꼈다.6 일본의 남성 중심 사회야말로 ‘위안부’ 문제를 일으킨 근본 원인이다. 결국 이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일본 국회가 자력으로 입법 해결을 하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입법운동의 한계는 일본 국회에서 여성 의원 숫자가 극단적으로 적고, 열세라는 틀림없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모토오카 쇼지 저 『‘위안부’ 문제와 나의 국회 심의』(2002년 4월) ⓒ도츠카 에츠로

 

『국제인권법 정책연구』(통산 4호, 2008년 12월) ⓒ도츠카 에츠로

 

각주

1. 일본변호사연합회는 입법 해결을 제언했지만, 그 법안은 작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가 개인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밖에 없었다. 戸塚悦朗, 「従軍「慰安婦」被害者個人賠償法案」, 戦後補償実現キャンペーン‘96, 『戦後補償法案を考える』, 1996년 4월 26일, 65-67쪽.
2. 本岡昭次,『「慰安婦」問題と私の国会審議』, 本岡昭次東京事務所(2002년), 115쪽.
3. 그 사이에도 정계개편이 이어지며 격동이 계속되었다. 모토오카 쇼지 의원은 2001년 8월부터 참의원 부의장으로 임명되면서 위치가 바뀌었기 때문에, 오카자키 토미코 참의원 의원 등 야당 여성 의원들이 입법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이어받게 되었다. 앞의 책 本岡 『私の国会審議』, 앞의 논문 戸塚 「市民が決める「慰安婦」問題の立法解決」.
4. 히라노 관방장관은 전 마쓰시타전기산업노조 출신으로 민주당 내 보수파였다. 민간 노조도 연합 차원에서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한 기부운동을 펼쳤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은 충분히 할 만큼 했다. 입법 해결은 필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5. 戸塚悦朗, 「「パンドラの箱」をあけようーー菅政権は国連勧告を尊重して 希望に満ちた未来を拓くことができる)」, 季刊, 『中帰連』, 2010.11, 48号30-37쪽.
6. 戸塚悦朗, 『ILOとジェンダーー性差別のない社会へ』, 日本評論社, 2006.

연결되는 글

  • ‘위안부’ 문제와 일본 국회 입법운동 (1)
    ‘위안부’ 문제와 일본 국회 입법운동 (1)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은 국가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운동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입법 해결을 목표로 하는 시민운동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996년 12월에 ‘‘위안부’ 문제의 입법 해결을 요구하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도츠카 에츠로(戶塚悅朗) 2023.07.17

글쓴이 도츠카 에츠로(戶塚悅朗)

변호사. 전 류코쿠대학 법과대학원 교수. 국제인권법 실무를 전공하고, 최근에는 한일구조약의 효력문제 및 안중근 재판의 불법성에 관한 연구를 추진해 일본의 탈식민지화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주저로는 『일본이 모르는 전쟁책임』(현대인문사), 『ILO와 젠더』(일본평론사), 『역사인식과 한일 ‘화해’로의 길-징용공 문제와 한국대법원 판결을 이해하기 위해서』(일본평론사)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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