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의 침묵, 억압된 기억, 지각한 정의

정용숙중앙대학교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

  • 게시일2020.09.18
  • 최종수정일2022.11.28

반세기의 침묵, 억압된 기억, 지각한 정의 

과거사 청산과 화해에서 독일은 일본의 대립 모델로 여겨진다. '과거사 청산 모범국 독일'의 이미지를 완성한 계기는 2000년 독일 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설립한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을 통한 외국인 강제노역 배상이었다. 그런데도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여전히 남아 있다. 독일제국의 아프리카 식민지 '헤레로 전쟁'에 대한 사과와 배상이나, 냉전의 기억이 나치의 기억을 대체한 장소들(가령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이 그렇다. 

전시에 국가와 군대가 자행한 성 착취와 성범죄 역시 뒤늦게 공론화되었다. 그리고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나치 정부가 '미풍양속' 보호와 성매매 근절을 명목으로 수용소에 격리한 여성들, 성병과 동성애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하겠다며 독일 방위군이 직접 만들고 관리한 유곽에 동원된 점령지 여성들, 남성 수인(囚人,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수용소에 갇힌 사람을 뜻하는 용어로 죄수와는 구별되어 사용된다)들의 노동력 '제고'를 위해 친위대가 수용소 안에 설치해 운영한 매춘소에 동원된 여성 수인들,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에 주둔했던 독일군의 성폭력 피해자들, 그리고 종전 후 동유럽과 독일에서 자행된 연합군(특히 소련군과 미군)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다.

 

은폐된 성 착취의 역사가 드러나기까지

이 이야기들이 반세기 넘게 침묵 된 끝에 세상에 나온 과정 그 자체가 이 일이 사회적으로 다루어져 온 방식을 말해준다. 함부르크의 사회학자 크리스타 파울(Christa Paul)은 1989년 가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나치 정부 시절, 수용소에서 남성 수인을 위한 강제 성매매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렵게 수용소 수인들과 피해자를 찾아내 인터뷰하고 조사 결과를 『강제성매매(Zwangsprostitution)』(1994)라는 책으로 펴냈지만, 당시에는 대중적 관심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십여 년이 지난 후 빈 대학 연구팀이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유곽을 재발견해 전시회 <나치 수용소의 성(性) 강제노역>(2005)으로 대중에 공개해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이미 종전 직후부터 내내 드러나 있었다. 다만 보지 못했을 뿐이다. 부헨발트 수용소 생존자였던 정치학자 코곤(Eugen Kogon)은 수용소 폭력을 다룬 『친위대 국가』(Der SS-Staat)를 1946년에 출간했는데 여기에 '수용소 유곽(Bordell im KZ)'이라는 제목이 붙은 2쪽 반 분량의 독립된 절이 있다. 이 책은 나치 폭력 연구의 고전이 되어 수많은 연구자가 읽고 인용했지만, 이 부분에 관심을 기울인 이는 없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1947)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독일인만 드나들 수 있는 사창가가 있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책은 1950년대 중반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이 부분을 눈여겨본 이는 없었다. 

코곤의 서술에는 의도했든 아니든 성매매에 대한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담겨 있다. 그는 멀리서 본 매춘소 여성들의 얼굴에 난 부스럼 딱지를 성병의 흔적으로 단정하고 원래 난잡한 여자들이었을 것으로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매춘소 여성들 얼굴의 부스럼은 오랜 수용소 생활로 인한 영양실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코곤은 이들이 원래 여성 수인들로 6개월 후 석방을 대가로 매춘소에 자원했다고 언급했다.

성매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태도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독일의 사회학자 볼프강 조프스키가 1993년 출간한 나치 연구서 『테러의 질서: 유대인 수용소』에서는 이들이 "매춘부(Hure)"라는 멸칭으로 언급된다. 이는 당시에나 수십 년 후나, 가해자나 증언자나 연구자 모두 인습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수용소 유곽은 만들어질 때부터 이미 '수치 중의 수치'로 은폐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유곽 막사는 눈에 띄지 않게 지어졌고 관련 문서는 "기밀"로 관리되었다. 수감자들 사이에서 이곳은 시치미를 뚝 떼고 "모처(Sonderbau)"로 통했다. 종전 후에도 나치 과거사의 집단기억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유곽 막사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부터 철거되기 시작해 지금은 두 곳만 남아 있다. 최대 희생자이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유대인 집단에만 피해자 연구가 집중된 결과 주변부 희생자들(동성애자, 집시, 유전병자, 범죄자, 성매매 여성 등 사회 주변 집단)의 존재는 가려졌다. 수용소 시설을 기념관(Gedenkstätte)[1]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유곽의 존재는 의도적으로 묻혔다. 가령 구동독의 부헨발트 수용소 기념관에는 탐방객이 혹시 이에 관해 질문하거든 가능한 한 말을 아끼라는 안내 지침이 있었다. 이 일의 증인인 수용소 생존자 단체들 역시 유곽을 하찮게 치부하고 기억에서 배제했다. 

 

기억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기

이 문제가 역사학의 관심사로 들어온 것은 1990년대 기억연구가 활성화되면서부터다. 그 배경에는 1980년대 여성사와 구술사의 성장이 있었다. 페미니즘 운동에 자극받은 여성사 연구자들은 성을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만들고 나치 연구에 젠더 범주를 추가했다. 전쟁을 둘러싼 여성의 경험이 발굴되었고 성을 매개로 한 폭력과 "잊힌" 소수 집단 피해자가 조명되었다. 2000년대 중반에 비로소 독일 사회가 이 문제에 호응한 것은 조직적 강간이 전쟁 무기로 사용된 구(舊)유고슬라비아와 르완다 내전의 참상이 알려지며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이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2007년 9월, 성(性) 노역 여성 수인 동원이 시작된 라벤스브뤽 구(舊) 여자수용소에서 열린 여름 대학은 <20~21세기 전시 강제성매매>를 주제로 나치 수용소의 성 강제노역, 동아시아 일본군‘위안부’, 동유럽 전시 강간을 나란히 다뤘다. 수용소 매춘소에 관한 로베르트 좀머(Robert Sommer)의 박사학위 논문 「수용소 유곽(Das KZ-Bordell)」이 2009년 출간됨으로써 이 주제는 나치 역사의 한 장으로 학문적 시민권을 획득했다.

강제수용소 성(性) 노역 문제를 최초로 제대로 제기한 크리스타 파울은 우연히 이 일을 알게 되었을 때 혼란을 느꼈다고 썼다. 독일 역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장으로 구석구석 파헤쳐졌다고 믿은 나치의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가 여전히 있었기 때문이다. 성매매를 금지하는 동시에 특수 목적 성매매의 포주 노릇을 수행한 나치의 이중성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이 문제가 오래도록 침묵에 갇혀있었던 이유는 첫째, 성매매 여성에 대한 인습적 편견과 성적 폭력에 대한 낮은 사회적 감수성이 전후 시대에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주변부 피해자들에게는 나치 피해자의 법적 지위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독은 정치범과 인종범죄 피해자만, 오스트리아는 정치범만을 인정했으며, 반파시즘 운동의 계승자를 자처한 동독 정부는 모든 책임 인정을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인종주의 성 정책의 결과인 나치 전시 성폭력은 유대인이 배제된 나치 범죄였다. 그 공론화를 위해 피해자 이미지를 일원화하는 홀로코스트 집단기억을 극복해야 했다. 

 

겹쳐진 맥락에서 피해를 복원하는 일 

지난 십여 년간 독일의 전시 성폭력 연구는 진전을 거듭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유럽에서 자행된 독일군의 성범죄를 넘어 마지막까지 터부시된 주제였던 연합군의 성폭력에까지 도달했다. 미리암 겝하르트의 『군인들이 왔을 때』(2015)는 성폭력의 가해자를 "붉은 군대" 뿐만 아니라 연합군 전체, 특히 미군으로 확대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전시 성폭력 문제에서는 전범국과 연합국 모두 자유롭지 못하며, 이 때문에 역사적 정의 담론의 국가적 한계가 지적된다. 독일 여성들의 전시 성폭력 피해를 역사적으로 다루는 일은 정치적으로 까다롭다. 독일인의 피해를 말함으로써 나치 범죄를 상대화하고 독일을 가해자가 아닌 희생자로 전도시킬 수 있다는 주장,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독일의 전쟁범죄를 부인하려는 이들에게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들 때문에 이 문제가 최후까지 침묵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를 이제는 꺼낼 수 있는 이유는 꾸준한 과거사 정리 노력으로 독일 사회가 더 다양한 소수집단 희생자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치 국가와 군대의 성폭력 피해자를 인정하고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작업은 느리게 진전하고 있다. 이는 이제 공공역사 차원에서 다뤄지고 있으며 피해자의 복권에도 이바지했다. 그러나 피해 사실에 대한 인정과 배상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인정과 배상이 이루어진다 해도 이제는 너무 늦어 상징적인 의미에 그친다. 그러나 강제노역 피해 배상 집행 완료 후 새롭게 밝혀진 과거사는 과거사 정리에는 종료가 없음을 독일 사회가 깨닫게 했다. 나치 시대의 역사 연구는 갱신되고 확장되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중이다. 주변부 피해자 배제의 오랜 역사는 극복되고 있지만, 지각한 정의는 피해자 집단들에 골고루 미치지 못했다. 국민국가를 초월한 정의의 공평함과 담론의 공정성 요구는 타당하지만 여전히 미래지향적 목표일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한 공론장의 논의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다.

 

라벤스브뤽 여자수용소 기념관의 벽. 수용소에 끌려온 여성들의 출신국가가 적혀있다. ©wikimedia commons

 

 

각주

  1. ^ 공공의 공간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을 목표로 역사적 장소의 맥락 정보를 제공하는 시설. 기념관이 위치하는 장소의 역사와 이곳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특별한 임무라는 점에서 박물관과 구분된다. 1945년 이래 독일에서 이 개념은 특히 나치 희생자를 기억하는 장소에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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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정용숙

서양 현대사/독일사 전공. 중앙대학교 DAAD-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 연구 분야는 (탈)산업화와 노동자 가족, 탈산업 시대의 산업유산. 이외에도 퍼블릭히스토리 차원의 역사교육에 관심을 두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나치 국가의 매춘소와 강제성매매 – 그 실제와 전후 시대의 기억」(2018), 「산업유산의 디즈니랜드? 루르 산업투어리즘과 역사적 진정성」(2018) 「Beyond the Bifurcated Myth: The Medical Migration of Female Korean Nurses to West Germany in the 1970s」(2018) 등이 있다.

yongsuk.j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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