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중국 여성에 대한 잔혹행위 기록하기

페이페이 치우(Peipei Qiu)

  • 게시일2023.05.15
  • 최종수정일2023.07.11

2017년 페이페이 치우 교수가 펑주잉 할머니 댁에 방문한 모습 ⓒ페이페이 치우

 

필자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은 20여 년 전의 일로, 당시 나는 한일 ‘위안부’ 피해구제(redress) 운동을 주제로 졸업 논문을 쓴 바사대 학생과 함께 작업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은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아시아에서 침략 전쟁을 벌이는 동안 일본군이 설치한 강간소인 일본군 ‘위안소(ianjo)’로 수많은 중국 여성들이 납치되었지만, 그들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련이 중국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공백은 ‘위안부’ 제도의 전체 범위와 범죄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심각한 걸림돌이 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위안부’ 제도의 큰 피해자 집단 중 하나가 중국 여성들이었고, 이들의 고통은 일본군 성폭력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고자, 나는 중국인 ‘위안부’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여성들의 전시 트라우마를 글로 써나가는 일은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매우 힘든 작업이었다. 당시 필자가 만성질환을 앓고 있던 터라 더욱 그러했다. ‘위안부’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 역시 고된 과제였다. 일어일문학 강의, 여타 행정 업무와 연구 프로젝트와는 별개로 야간과 주말을 이용해 일본어, 중국어, 영어로 된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며 연구에 매진해야 했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다층적인 논의를 제공하고자 전쟁 중에 발표된 중국 민간인과 군인의 목격담, 전 일본군 장병이 작성한 문서, 중국에서 전시 잔혹행위를 목격한 외국인의 보고서와 일기 등의 자료를 활용했다. 생존자와 목격자의 증언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중국 학계의 쑤즈량(Su Zhiliang), 천리페이(Chen Lifei), 캉지안(Kang Jian), 천쥔잉(Chen Junying)과 협력했고, 그 외에도 다수의 중국 및 일본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고 번역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잔혹행위를 겪은 후에도 정의를 위해 싸워 온 여성들의 용기가 중국 ‘위안부’에 대한 책을 완성하는 데 힘이 되어 주었다.

『중국인 위안부: 제국 일본 성노예의 증언(Chinese Comfort Women: Testimonies of Imperial Japan’s Sex Slaves)』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총 세 군데의 대학 출판부, 즉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출판부(2013년), 옥스퍼드대 출판부(2014년), 홍콩대 출판부(2014년)에서 출간되었다. 중국계미국인사서협회(Chinese American Librarians Association)에서 논픽션 분야 올해의 최우수 도서(Best Nonfiction Book of the Year)로 선정하기도 한 이 책은 일본 제국군의 성노예 제도로 삶을 파괴당한 수십만 중국 여성들의 고통을 온전히 폭로한 최초의 영문 단행본이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일본의 만주 및 상하이 침략 초기(1932년)부터 난징 대학살(1937년) 이후 급속한 전쟁 확장과 1945년 패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국 본토에서 군 ‘위안부’ 제도가 확립된 과정을 추적하여 위안소 확산과 일본의 침략전 전개 간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1부에서는 또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일본 점령군이 피해자 가족에게 강요한 몸값, 소규모 부대가 교전지와 점령지에 설치했던 수많은 임시 위안소,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큰 피해자 규모 등 ‘위안부’ 제도의 숨겨진 측면 역시 조명한다.

2부에서는 위안소 생존자 12명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공동 연구자인 쑤즈량과 천리페이가 생존자들의 모국어로 녹음한 내용을 필자가 영어로 번역했다. 지리적 구분과 전쟁의 연대기적 전개에 따라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분류함으로써, 전쟁의 전체적 맥락을 배경으로 이들의 증언을 제시했다. 각 생존자들의 이야기는 전쟁 전의 삶에서 시작하여 성노예 기간과 전후에 겪은 고난으로 이어지며 위안소 생존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겪어온 고통을 드러낸다.

3부는 위안소 생존자들의 전후 삶과 중국 내 ‘위안부’ 피해구제 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생존자들이 전후에 사회적 편견과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오랜 세월 차별과 배척, 빈곤에 시달려야 했던 현실을 짚어본다. 또한 중국인 피해자들의 소송을 둘러싼 주요 법적 논쟁과 사건, 그리고 중국인 생존자들을 지원하는 초국적 활동(activism), 특히 일본인들의 활동에 관해서도 논의한다. 끝으로, ‘위안부’들의 고통과 삶의 이야기가 그 국적과 상관없이 전 세계인에게서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출간 후에도 필자의 ‘위안부’ 문제 연구는 계속되었다. 방대한 증거 앞에서도 일본의 정부 관료들과 극우주의 작가, 활동가들은 ‘위안부’ 제도의 본질이 군 성노예제였음을 끈질기게 부인하고 있고, 이런 사실이 심히 우려스럽다. 일본 부정론자들의 흔한 수사(修辭)는 ‘위안부’들이 민간 업자가 전장에서 운영한 매춘소의 전문 매춘부였으며, 일본 제국주의 정부나 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 ‘위안부’들이 일본 점령국 국민으로서 겪은 극악한 잔혹행위는 ‘위안부’ 제도의 범죄적 성격은 물론 일본군이 이 전쟁 범죄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중국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적인 납치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었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문화역사자료위원회 주도로 1995년 발간된 전국 조사 보고서인 ‘일본군이 중국 침략 당시 저지른 잔학 행위에 대한 조사 기록집(Qin Hua Rijun baoxing zonglu)’에는 이러한 성노예화 사례가 다수 기록되어 있다. 그중 한 사건은 1932년 겨울 일본 관동군 8사단 16여단 부대가 베이퍄오현 차오양시 지역을 점령했을 당시에 벌어졌다. 군대는 점령 즉시 지역 여성들을 군 막사로 납치해 끌고 가 성노예로 삼았고, 동시에 인근 마을의 여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임산부, 어린 소녀, 노인을 포함하여 1천 명이 넘는 현지 여성이 자신들의 집에서 강간당했다.1

자신의 영원한 증언 영상을 마주한 펑주잉 할머니 ©백정미

 

베이퍄오현에서 일어난 일은 단독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특히 1937년 난징 대학살을 기점으로는 현지 여성을 납치하여 성노예로 삼는 일이 일본군에게는 정규 군사 행동이 되었다. 중국인 ‘위안부’의 대다수는 강제로 납치되었다. 후난성 웨양 마을의 생존자 중 한 명인 펑주잉(Peng Zhuying, 1929년생)은 2020년 우리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일본군이 1938년 자신의 고향을 폭격했다고 밝혔다. 가스 폭격으로 인해 펑은 시력을 잃었고 어머니와 남동생은 사망했다. 1939년 그의 언니는 일본군에게 붙잡혀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다. 1944년, 열다섯 살에 불과했던 펑도 일본군에 납치되어 한 달간 구금 상태에서 ‘위안부’ 역할을 강요당했다. 납치 당시 펑은 일본군에 의해 발에 부상을 입었다. 언니는 감금 중에 배를 찔렸다.2

펑주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앞서 언급한 책에 증언이 실린 12명의 생존자들은 모두 일본군에 납치되어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군 장교들은 병사들이 여성들을 폭력적으로 납치하는 것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직접 납치에 가담하기도 했다. 실제로 많은 위안소가 군 막사나 진지 안에 세워졌다. 소규모 일본군 부대가 전장 곳곳에 설치한 수많은 임시 위안소에서는 주로 현지 중국인 여성들이 노예가 되었다. 야전 부대는 계속해서 이동했으므로, 이렇듯 급조된 위안소들에서는 노예로 잡힌 여성들이 자주 교체되었고 따라서 피해자 범위도 크게 확대되었다. 허베이성 사회과학원 연구원 허톈이(He Tianyi)의 조사에 따르면 1943년 말까지 일본군은 허베이성 남부에 1,103군데의 진지를 구축했으며, 이로 미뤄볼 때 중국 북부에 구축된 일본군 진지는 총 1만 군데가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점령기간 동안 각 진지에서 보통 10~20명의 현지 여성을 노예로 삼았으므로, 일본군 진지 내 노예로 동원된 현지 여성의 수는 중국 북부에서만 10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였을 것이다.3

분명한 사실은 ‘위안부’는 매춘부가 아니었으며, 펑주잉과 언니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위안부’ 거의 대부분이 금전적 대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일본 점령 지역에서 납치된 많은 ‘위안부’의 가족들은 구금된 여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군에 거액의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산시성 우샹현 출신의 하오웨롄(Hao Yuelian)은 1943년 초여름 집에서 일본군에게 집단강간을 당했을 때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이후 하오는 다른 마을 주민들과 함께 난구의 일본군 진지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군은 하오를 비롯한 여성과 소녀들에게 현지 남성들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강제로 지켜보도록 한 후 방에 가두고 강간했다. 군인들은 전투가 없을 때마다 여성과 소녀들을 지속적으로 강간했다. 하오는 곧 심한 병에 걸렸고 하혈을 했다. 군인들이 납치해 온 다른 마을의 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까지 고통은 한 달 가량이나 지속되었다. 가족들은 하오를 고문에서 풀어주기 위해 점령군에게 몸값을 지불했다. 하오는 병세가 깊어 군인들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점령군은 돈을 챙기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하오는 또다시 일본군에 납치되어 진지로 끌려갔다. 매일 저녁 군인들이 무리지어 와서 그를 집단 강간했다. 한 달 만에 하오의 몸은 심하게 상해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우연히 마을 주민이 하오를 본 덕분에, 아버지와 오빠가 그가 갇혀 있던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둘은 군인들이 없는 틈을 타 하오를 피신시켜 집으로 데려왔고, 그는 이후 몇 달간 병석에 누워 있었다.4

일본군이 점령지 주민들의 삶을 완전히 통제함에 따라 이러한 공개적 납치와 착취는 만연했다. 1930년대 초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까지 일본 제국군은 아시아에 위안소를 광범위하게 설치했고, 위안소의 대부분이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의 침략이 지속된 중국 본토에 세워졌다. 잔혹한 범죄 행위가 이러한 임시 ‘위안 시설’에서는 흔하게 일어났다. 2017년 하이난섬 바오팅현에서 필자가 만난 생존자 천롄춘(Chen Liancun)은 열여섯 살에 붙잡혀 지아마오 진지에 구금되었다. 천은 낮에는 빨래 등의 강제 노동을 했고, 밤에는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는 탈출을 시도했지만 다시 붙잡혔고, 기절할 때까지 구타를 당했다. 천이 병들어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일본군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갈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천은 다시 군 막사로 납치됐고,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노예로 살아야 했다.

‘위안부’들의 트라우마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치유되지 못했다. 일본군의 성폭력은 이들 여성들의 신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고,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들 중 다수가 불임이 되었다. 2018년 여름 필자가 하오웨롄 할머니를 방문했을 당시, 할머니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할머니는 매일 밤 일본군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렸다. 할머니의 양녀는 할머니가 침대 옆에 놓아둔 칼을 보여주었다. 폭행당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여전해 칼을 곁에 둔다고 했다. 그 칼을 보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필자가 방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8년 9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중국인 ‘위안부’의 영원한 증언(Eternal Testimony)〉 온라인 인터뷰에 참여한 펑주잉 할머니 ⓒ페이페이 치우

 

21세기가 2분기로 접어드는 이 시점에도 일본군 ‘위안부’ 제도하에서 자행된 잔혹행위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우려는 일본의 역사 부정론자들의 집요한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고통이 끊이지 않고, 여성 강간이 여전히 무력 분쟁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오늘날 세계에서 ‘위안부’의 이야기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 되살리는 일은 중요하다. 필자는 현재 ‘위안부’정의연대(Comfort Women Justice Coalition),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쇼아재단(Southern California Shoah Foundation), 중국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박물관(Nanjing Museum of the Site of the Lijixiang Comfort Stations in China)과 함께 중국인 ‘위안부’의 영원한 증언(Eternal Testimony)을 인터랙티브 방식으로 전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USC쇼아재단에서 개발한 ‘증언의 차원 시스템(Dimensions in Testimony System)’을 사용하여 생존자 펑주잉 할머니의 증언을 기록하고 표출하여, 시청자가 할머니와의 생생한 실시간 대화를 통해 그 삶의 경험에 대해 묻고 답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현재 거의 완성 단계에 있는 이 프로젝트가 ‘위안부’의 유산을 보존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미래 세대가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교훈을 얻고 더 이상의 반인도적 범죄를 막기 위한 행동에 나설 수 있기를 바란다.

『중국인 위안부: 제국 일본 성노예의 증언』 저서는 자료센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archive814.or.kr/center/data/detail.do?controlNo=2302
 

각주

1. Guan Wenhua, “Rijun dui Beipiao funü de lingru” (Japanese troops’ sexual violence against women in Beipiao), in Qin Hua Rijun baoxing zonglu, ed. Li Bingxin, Xu Junyuan, and Shi Yuxin (Shijiazhuang: Hebei renmin chubanshe, 1995), 69.
2. ‘위안부’정의연대(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진행한 2020년 10월 19일자 인터뷰.
3. Peipei Qiu with Su Zhiliang and Chen Lifei, Chinese Comfort Women: Testimonies of Imperial Japan’s Sex Slaves, (London 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40-41.
4. 이 이야기는 2018년 8월 5일 필자가 하오웨롄과 그 양녀와 나눈 대화 및 다음에 수록된 하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다: Zhang Shuangbing, Paolou li de nüren—Shanxi Rijun xingnuli diaocha shilu [Women detained in the strongholds— Investigation records on the Japanese military sex slaves in Shanxi Province](Nanjing: Jiangsu Renmin Chubanshe, 2011), 167–68.

글쓴이 페이페이 치우(Peipei Qiu)

페이페이 치우 교수는 1994년부터 뉴욕의 바사대학교에서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학과 여성학을 강의하고 있다. 지난 2013년 일본 점령 시 중국 본토에서 자행되었던 군‘위안부’ 제도와 위안소 생존자 12명의 이야기를 담은 『중국인 위안부: 제국 일본 성노예의 증언(Chinese Comfort Women: Testimonies of Imperial Japan’s Sex Slaves)』을 출판했다.
https://www.amazon.com/Chinese-Comfort-Women-Testimonies-Imperial/dp/0199373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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