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 기반한 현전의 증언은 어떤 감각을 만드는가?

송혜림

  • 게시일2022.09.13
  • 최종수정일2023.06.12

1. 문자와 육성의 상이한 정동

‘위안부’ 증언집 1권은 일본의 역사 은폐와 왜곡에 반발하여 일본군‘위안부’의 실상을 증명하고 고발하기 위한 진상규명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 2년간의 채록 작업 후 1993년도에 발간된 증언집 서두에는 ‘위안부’ 제도에 대한 해설이 약 15쪽 분량으로 수록되어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 후에 ‘위안부’의 증언이 소개되는 배치는 실증적 증거로 ‘위안부’ 증언을 위치시켰음을 알 수 있다. 증언집 1권에서 첫 번째로 수록된 증언은 최초 ‘위안부’ 증언자인 고(故) 김학순의 증언이다.

“컴컴하고 정신도 없어 그날은 대체 거기가 어딘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언니하고 나는 방에 들어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있더니 낮에 양아버지를 끌고 갔던 장교가 방에 들어와 나를 포장친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언니하고 떨어지는 것만도 무서워서 안 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끌려 옆방에 가니 그 장교는 나를 끌어안으며 옷을 벗기려 했다. 안 벗으려고 하다가 옷이 다 찢겨져 버렸다. 결국 그 장교에게 내 처녀를 뺏겼다. (...) 날이 밝고 군인이 간 뒤 언니가 포장을 밀치며 내게 왔다. 둘은 한심하고 기막혀서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1]

증언은 ‘위안부’ 사건의 잔혹한 경험과 증언자가 느낀 심정이 1인칭의 문어체로 기록되어 있다. 증언집은 ‘위안부’ 증언을 연대기적 순서로 재구성하고 사건의 사실적 차원을 명백히 드러낼 수 있도록 편집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수록된 증언의 서사 속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위안부’ 사건이고 이들의 언어는 전체적으로 정제되고 완결된 느낌을 준다. 그러나 1991년 공개 증언 당시 김학순의 육성은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영상 속 그는 괴로운 기억을 회상하며 감정이 격양되고 말을 중단하며 온전한 설명에 실패한다. 이는 뒤죽박죽된 시간성과 행간의 감정을 제거하고 가필된 문자의 증언과는 대조된다. 무엇보다 강력한 정동으로 증언하는 고통에 청자를 연루시킨다. 

“그 울면서 안 당하려고 쫓아 나오면 붙잡고 안 놔줘요 (몸을 기울여 달아나가는 그때의 자신과 붙잡는 일본군의 동작을 취한다) 붙잡고 안 놔줘요 이노무 새끼가, 일본노무 새끼가, 군인노무 새끼가(말이 빨라지고 어조가 격양됨). 그래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해요. 그, 말도 못해요. 그 당한 얘기는 말도 못 해요. 가슴이 아파서 (목이 멘다) 말도 못한다고요.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한동안 흐느낀다. 감정을 억누르며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당하고 있는 사람을 몰라요. 한국에서 이것을 몰라줘요. 일본에서는 더군다나 없대요, 모르니까! (거의 내지르는 목소리)”[2]


2. 현전의 증언이 자아내는 정동

오늘날 대부분의 증언은 ‘매개’되어 전달된다. 실제로 증언하는 현장에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뉴스의 토막 난 클립으로, 전문을 생략하고 특정 구절만 뽑아낸 기사에서, 운 좋게 기록 영상을 보는 기회가 아니면 우리는 쓰여진 기록으로 증언과 만난다. 따라서 증언 연구의 윤리적 성찰은 기술(Technology)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증언의 청취와 기록, 편집과 보관이라는 전 과정에서 증언의 의미가 굴절되거나 탈락되는 변형을 막기 위해 도구를 고민하고 기술을 검토해왔다. 녹음, 촬영 기술과 더불어 자료를 아카이빙하여 온/오프라인으로 일반인의 접근권을 향상시킬 수 있던 까닭도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오픈 소스가 증가하며 증언 아카이브의 저작권 문제나 2차 창작의 윤리성에 대해서도 활발한 논의가 가능해졌다. 뿐만 아니라 청자와 증언을 어떻게 매개할 것이냐는 전략에 따라 기술은 실험적으로 활용된다. AI 기술은 ‘현전’의 정동을 만들어내는 데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기술이다. 5.5만명에 달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증언을 인터뷰한 쇼아 재단(The USC Shoah Foundation)은 생존자의 증언을 촬영하고 데이터화하여 일반인과 상호 대화가 가능한 AI-증언자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3] 프로젝트 책임자인 헤더 마이우(Heather Maio)는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죽은 이후에도 후세대들이 그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식을 고안했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증인인 생존자에게 직접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받는 경험 자체가 중요하다고 전제한다. 즉, 증언자가 자신의 앞에 ‘현전’해 있다고 느끼는 것이 핵심적인 것이다.

‘현전’의 중요성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지적한 바 있는 ‘음성 중심주의’에서 기원한다. 로고스 중심의 서양 철학에서는 ‘목소리’가 영혼과 본질적이고 즉각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이유로 쓰여진 ‘문자’보다 우월하게 여겨졌다. 음성 중심주의는 “존재 일반의 의미를 현전으로 간주”하며 결과적으로 무매개적 현전에 대한 관념적 우위를 고착시켰다고 볼 수 있다.[4] 실제로 고해상도의 AI-증언자와 마주하는 느낌은 기이하고 놀랍다. 얼굴의 주름과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보여주며, 까다로운 질문에도 여유롭게 대답을 해낸다. 재생되는 영상과 들려오는 육성은 스크린 너머 마치 증언자와 실제 대화 중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진보한 기술로 인해 증언은 몇 겹의 매개를 거치고도 현전하는 감각으로 인식된다. 이는 지금-여기의 ‘나’가 시공의 간극을 초월해 당사자와 직접 만나게 되는, 생생하고 ‘진실’되게 역사의 기억을 나누어 가지는 체험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만남이 자아내는 강력한 정동을 알기 때문에 쇼아 재단은 재단 내부에서 제기된 수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5] 여기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적극적인 동참 의지도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재단은 각 증언자당 1주일을 할당해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2,000개에 달하는 ‘예상 가능한’ 질문에 대해 묻고 답변을 기록한다. AI가 발전함에 따라 질문과 답변 사이의 연결 관계는 더욱 정교화될 것이다. 재단이 데이터화할 수 있는 정보량 자체는 앞으로 변하지 않겠지만(더 추가될 수 없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지 모른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고령인 생존자 일부가 작고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진화하는 AI의 본질상 기술이 구현해내는 상호작용은 더욱 매끄러워질 것이다. 예측하건대 향후 AI 기술은 역사적 증언에 국한되지 않고 한 개인의 삶을 기록하여 영구하게 보관하는 보편적 툴로 상용화될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만남 ⓒ백정미


3. 현전의 기술은 무엇에 가담하는가

그러나 이러한 기술의 진보가 역사 인식의 감각을 형성하는 데 있어 긍정적이기만 할까? 기술 그 자체의 윤리를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기술을 통해 나와 타자,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분석하는 일일 테다. 나아가 기술이 새롭게 형성하거나 강화하는 감각의 특정 양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감각의 세대차는 급변하는 매체 환경에 의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가령 ‘터치 제스처와 햅틱 기술’은 기기-정보를 지각하는 감각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웹상의 화면을 새로 고침 하기 위해 화면을 잡아당기는 터치 제스처는 카지노의 슬롯 머신에서 착안한 결과다. 손가락으로 화면/정보 양식을 확대하거나 축소하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거나 페이지를 프레임 밖으로 휙 날리는 신체적 감각이 축적되면서 “데이터를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는 사고양식”이 형성된다.[6] 이처럼 특정 기술이 상용화되고 경험이 누적되면서 주조되는 감각과 그러한 감각에 연관되어 강화되는 인식틀이 존재한다. 

한국에서도 AI 기술을 활용한 인터랙티브 전시가 이루어졌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서강대학교의 영원한 증언팀이 주관하여 2018년부터 진행해 온 〈영원한 증언(Eternal Testimony)〉이 그것이다.[7]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AI는 사전 촬영된 증언을 기반으로 관람객과의 대화 기능을 탑재했다. 그러나 실상 대화라기보단 단편적인 문답에 가깝다. 관람객에게 제공되는 추천 질문지를 훑어보더라도 사전에 증언자와 이루어진 인터뷰 자체가 ‘위안부’ 경험에 편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정된 답변의 데이터로 기본 질문과 어긋나는 물음에는 엉뚱한 답이 나온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냐는 질문에 ‘위안부’ 때 종일 굶던 설움을 말하고, 편찮으신 곳은 없냐는 염려에는 위안소가 마을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회상을 한다. 아흔 세가 넘은 생존자의 말을 청하고 듣는 증언의 장에 그들의 ‘현재’는 없고 오로지 ‘위안부’였던 ‘과거’만 존재한다. 

여기서 기술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 재현과 보다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고해상도의 스크린은 주름의 깊은 골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노환으로 떨리는 손끝의 움직임을 잡아낸다. 생생하고 정교한 피해 생존자의 형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붙잡아 놓는다. 그러나 동시에 음성인식이 잘못 되거나 질문에 적절하지 못한 답이 제시될 때, 큐레이터는 ‘할머니의 귀가 어두워서’라는 수사를 쓴다. 여기서 ‘나이가 듦’은 기술에 유리한 형태로 전유되고 있다. 그간 페미니즘 운동의 투쟁은 피해자를 ‘피해자’ 정체성에 가두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증언에서 실체적 사실만을 강조하는 전략은 본질론적 논의로 미끄러질 위험이 높다. 대중이 만나는 증언이 ‘위안부’ 과거를 입증하는 실증적 언어에 국한되지 않고 한 개인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보다 풍부한 언어로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은 ‘피해 당사자’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형태로 가담해서는 안 된다. 후세대가 ‘증언’을 계승한다는 것은 ‘증언’의 내용을 그대로 암기하는 복제가 아니라 그 ‘증언’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고통에 감응하며 증언이 함의하는 사회적, 정치적 실천을 이어받아 재구성하는 데 있을 것이다. 〈영원한 증언〉에서 증언이 “영원해야” 한다고 말할 때, 이 ‘영원함’이 불변하는 증언자의 정체성과 증언의 내용을 지시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당사자에게 과도하게 부여되는 증언의 책임을 나누어 가지는, 수많은 타자들의 실천이 영원히 지속됨을 의미해야 할 것이다. 


4. 계속될 증언의 시도를 위해

가상을 동원한 현전만이 청자를 증언에 연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2022년 개봉한 박문칠 감독의 〈보드랍게〉는 현전의 환상이 걷어진 곳에서 다른 방식의 정동을 만들어낸다.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순악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미투 운동가인 젊은 여성 세 명이 김순악의 증언을 낭독한다. 이들은 텍스트로 남아 있는 할머니의 증언을 읽으며 자신이 겪은 폭력과 고통의 경험을 ‘위안부’ 생존자의 과거와 연결 짓는다. 이 장면은 “각자의 ‘상상력과 창조적 몰두’를 통해 과거와의 연루를 상상하는 후속 세대의 포스트메모리 구축작업을 시각화”하며, ‘당사자성’에 대한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8]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2021)는 제주 4·3에 대한 후세대의 기억과 애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9] 작품 속 피해 생존자 딸인 ‘인선’은 어머니가 죽은 후 어머니가 옷장 깊숙이 숨겨놓았던 사진과 편지, 스크랩한 기사와 전단지들을 발견한다. 남몰래 모아온 4·3 자료들 위로 힘주어 그은 밑줄이나 메모로 패인 흔적, 변색된 신문의 바스라지는 귀퉁이는 어머니 ‘양정심’의 침묵과 집념의 물화이기도 하다. ‘인선’은 엄마가 모은 자료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역사의 공백, 증언이 실패했던 지점 위로 새로운 진실을 드러내는 수행을 한다. 즉, ‘현존’이 아닌 ‘부재’에서 증언을 잇는 적극적인 실천을 시작하는 것이다. 최근의 아름다운 작품들이 시사하는 것처럼, 증언과 어떻게 관계 맺느냐에 따라 쓰여진 문자 속 공백이 육성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과거와 이어줄 수 있다. 분명 기술은 이 관계 맺음의 양상을 다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선행 질문은 ‘증언-궁극적으로 역사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이다. 실증의 언어, 현전의 언어, 피해 당사자의 언어로 증언을 묶어 둔다면 기술은 이 담론을 강화하는 데 그치게 될 것이다.  

 

각주

  1. ^ 한국정신대연구소·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강제로 끌려간 군 위안부들』, 한울, 1993, 37-44쪽. 
  2. ^ 1991년 8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사무실에서 이루어진 김학순의 첫 공개 증언 중 일부. 김학순의 행동과 어조 변화, 울음 등 이 증언을 듣는 데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소를 필자가 괄호 안에 옮겼다. KBS시사직격 유튜브, [85회full] ‘위안부’ 공개 증언 30주년 - 김학순, 다시 우리 앞에 서다 (재업로드) | #시사직격 KBS 210813 방송분 14:45~15:15 참고.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1SjO4v7Ig8k)
  3. ^ ‘Artificial intelligence preserving our ability to converse with Holocaust survivors even after they die’, CBS NEWS, 2022.3.27 (마지막 접속일: 2022.7.21) (https://www.cbsnews.com/news/holocaust-stories-artificial-intelligence-60-minutes-2022-03-27/)
  4. ^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김웅권 역, 동문선, 2004, 31쪽.
  5. ^ 재단 내부에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죽음 이후에도 AI로 영원히 ’살아있게’ 만드는 시도에 윤리적 문제는 없는지 숙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또한 AI 제작이 홀로코스트 사건을 ’디즈니화(Disney-fy)’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도 존재했다. 위 기사 본문 참조. 
  6. ^ 김성익 외 9인, 『연구자의 탄생』, 돌베개, 2022 중 윤보라, 「몸 없는 공간의 젠더를 연구하기 위해」, 148-154 참고.
  7. ^ 〈영원한 증언〉은 2021년 6개월간의 베타 전시를 마친 뒤 재정비하여 국내외에서 공식 전시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필자는 2021년 10월 22일 서강대학교에서 열린 베타 전시를 관람했다. 
  8. ^ 김지언, “일본군 ‘위안부’ 재현의 포스트메모리적 양상 분석 - 다큐멘터리 영화 〈보드랍게〉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26, no.1 (2022): 271-304쪽 참고. 
  9.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2
글쓴이 송혜림

숲을 좋아하고 초록의 생명에서 힘을 얻습니다. 고통 속에서 실패하게 되는, 그러나 그 실패를 무릅쓰며 감행하는 증언에 귀 기울입니다. 실증의 언어로 요구받는 증언을 정동의 언어로 확장하고자 하는 목표로 공부합니다. 그러나 읽어야 할 책은 너무 많고 들려져야 할 이야기도 많은 반면, 저의 걸음이 더뎌 조바심을 느낍니다. 먼 곳과 여기를 연결하는 좋은 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연세대 비교문학 협동과정 박사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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