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검색
-
- 2024년 좌담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1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개최 20주년인 2020년,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국제법 관련 자료를 함께 읽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젠더 기반 폭력을 새로운 시각으로 공부하는 모임인 '국제법×일본군'위안부'세미나팀'이 출발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러 보고서와 판결문, 의견서, 포로 심문서 등을 읽으며 무력 충돌 하 젠더 기반 폭력, 국제 전범 재판에서 보이는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불처벌 문제, 범죄 행위로서 식민 지배와 이에 대한 불처벌 문제 등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며 논의를 발전시켜 왔다. 세미나팀이 최근 함께 읽고 토론한 자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Ⅱ: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2023. 이하 선집)이다. 웹진 <결>은 이를 좌담으로 정리,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라는 주제로 소개한다. 시리즈는 전범 자필진술서의 등장 배경과 사료적 가치, 겹겹의 함의 등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는 토론으로 3회에 걸쳐 구성했다. <1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1)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2부>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2) '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3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3) 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 장원아: 이번에 세미나팀이 읽은 책은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Ⅱ: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 책이 나온 배경과 맥락이 궁금했어요. 🧶 김수용: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이 붙잡거나 소련에서 인계 받은 일본군 포로, 만주국 관료 등을 전범관리소에 수용하고 '인죄탄백(認罪坦白. 숨김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다)'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일본군 포로들이 자신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죠. 이 기록이 전범 재판에서 기소를 위한 증거자료, 즉 자필진술서로 정리돼요. 오늘 읽는 선집에는 그중 푸순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었던 일본군 전범 6명이 작성한 진술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자필진술서 중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것들을 선별해 번역한 것이 이 자료집입니다. 사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가 주목 받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중국이 전범 재판을 하고 오랜 세월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일본의 역사 왜곡이 심해지자 이에 대한 반발로 자필진술서를 공개했죠. 2015년과 2017년에 출간된 『중앙당안관 소장 중국 침략 일본 전범의 자필진술서 선편(中央欓案館藏 日本侵華戰犯筆供選編)』(이하 『선편』)이 그거예요. 중국 당국이 일본이 '위안소'를 운영했던 증거가 중국에 있다면서 관련 내용을 발표한 거죠.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장원아: 『선편』은 842명 진술서를 120권으로 발간했는데, 자필진술서는 계속 자신의 범죄행위를 쭉 열거하는 방식으로 써져 있잖아요. 이 책에는 그중 6명의 진술서가 실려 있고요. 저는 읽으면서 120권 모두 이런 내용의 반복이라면 얼마나 기괴한 군상의 나열인가 싶었어요. 🧶 심아정: 예전에 김수용 선생님과 시베리아 억류 조선인 포로와 관련된 공부를 하면서 전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김효순의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일본인 전범을 개조한 푸순의 기적』(서해문집, 2020)과 김원이 쓴 『기구한 인연: 무순전범 관리소장 김원의 회고록』(한울, 1995)을 읽고 나서도 문제의식이 생겼는데, 막상 자필진술서를 꼼꼼하게 읽고 나니까 장원아 선생님 말씀대로 '기괴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성찰이나 가해자성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뭐랄까… 약간 소름 끼쳤어요. 일본 군인들 스스로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행위의 '팩트'를 나열하고 있는 것이요. 이 자료는 전범 재판을 앞두고 쓰인 자필진술서잖아요. 저는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가해 병사 2명이 증언할 때 무참한 강간 장면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듣고 너무 속상했거든요. 피해자들과 한 자리에서 가해 증언을 지켜봐야 하는 마음이 많이 힘들었어요. 그때 증언하던 가해 병사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읽은 진술서에 겹쳐져 보여요. 🧶 조시현: 자필진술서라는 형식은 가해자인 일본군이 피해자인 일본군'위안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드러내기 때문에 여러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해요. 전범 스스로 자신이 행한 범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그다지 논의되지 않았던 주제잖아요? 자필진술서를 '문학적 글쓰기'라고 한다면 일종의 독백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군'위안부'와 병사의 접촉(encounter) 측면에서 가해자 입장인 병사가 '위안부'를 직접적인 수신인으로 상정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필진술서라는 형식을 통해 '위안부'와 관련된 일을 말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이 진술서를 읽는 주체는 중국 당국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수신인이 부재하는 독백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한편으로 병사들의 진술서를 놓고 가해자의 시각과 피해자의 시각을 나란히 놓으면 일종의 대화 효과가 발생하는 것 같고요. 물론 전범의 입장에서 서술된 일본군'위안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요. 현재로서는 생존한 피해자, 가해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일본군과 일본군'위안부'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물론 생존해 있다 해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자리에 있게 하는 조건을 만들기도 어렵죠. 2000년 법정에서 '가해자 증언'이라는 형식을 통해 구 일본군 병사 두 명이 피해자 입장에 선 이들을 만났는데, 그때를 제외하고 서로 대면한 경우는 거의 없었죠. 이런 상황들을 고려할 때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이 모두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랬을 때 자필진술서를 통한 병사들의 발화가 '말을 거는 행위'이자 '대화의 가능성'이라고 한다면, 그런 측면에 주목해 논의를 전개할 수도 있겠지요. 🧶 심아정: 저는 자필진술서가 '가해자성'과 관련해 분석의 토대가 되는 문건이라는 생각은 드는데, 이를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돼요. 중국에서의 전시 상황을 더 자세히 이해해야 할 것 같아요. 🧶 김수용: 전범들이 본격적으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시기가 주로 '삼광작전(三光作戰. 일본군이 행한 조직적인 전쟁 범죄를 중국에서 일컫는 말)' 이후라는 점과 포로로 포획된 지역이 동북지역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아요. 동북지역에서 소련의 포로가 된 후 5년 정도 억류되어 있다가 1950년에 중국으로 이송되죠. 이들은 주로 산둥성을 비롯해 화베이에서 전쟁을 치른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공산군과 게릴라전을 치렀던 사람들인 거지요. 🧶 심아정: 병사들의 태도도 눈에 띕니다. 원문을 전부 번역한 진술서에서 다른 가해 경험은 소상히 이야기하는데, 일본군'위안부' 관련 진술은 꺼리는 듯해요. 저만의 느낌인지 모르겠는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병사들이 그저 한마디씩만 언급하고 넘어가는구나 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양적으로 적다기보다는 뭔가 '꺼림칙한 마음'이 있어서 언급을 회피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왜일까'에 대해 자꾸 짚어보게 돼요. 그런데 일본 전범들이 인죄를 할 때 상정하고 있는 '중국 인민'에 여성의 자리는 있었을까요? 상세한 범죄 고백, 회피하는 듯한 '위안부' 진술 사이 🧶 장원아: 심아정 선생님의 질문과 관련해 저는 이 사람들이 '강간하면 안 된다'라는 인식은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강간은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행위니까요. 강간하면 안 되고 죽이면 안 되고 때리면 안 되고… 이렇게 '불법'으로 지목된 행위인 강간의 피해 대상으로서 중국인이든 조선인이든 여성의 자리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법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여성의 자리가 생겨난 거지 그 이상은 아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자료를 읽을 때 법정에 제출하기 위한 용도의 진술서라는 점을 고려해야 될 것 같아요. 🧶 심아정: 죄를 열심히 기억해내서 말 몇 마리, 보리 몇 단까지 자세하게 서술하고, 다 함께 머리를 모아 궁리해서 세부적인 디테일들을 하나하나 맞춰가며 가해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곧 죄를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진술서를 통해 알게 됐어요. 이 자료를 보기 전에 읽은 2차 자료들, 그러니까 김효순의 책이나 김원의 회고록 등에서는 감동을 받기도 했는데, 막상 이렇게 날것으로 된 진술서를 직접 두 눈으로 보니 굉장히 느낌이 달랐어요. 🧶 김수용: 심아정 선생님은 진술서를 읽고 여성의 자리에 대해 고민하는데요, 부끄럽게도 저는 그런 문제를 잘 포착하지는 못했어요. 반면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진술서를 작성한 시점이 1950년대 초반이잖아요. 당시에 과연 이들에게 성폭력에 대한 의식이나 관련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고민, 반성이 있었는지 물을 수 있을까라는 부분이요. 🧶 심아정: 1950년대에 여자를 대상으로 저지른 폭력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그들에게 없었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꺼림칙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전범 개개인한테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관해 물을 수 있느냐 없느냐와는 별개로 우리는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야만 한다는 거예요. 🧶 조시현: 저 또한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어떤 침묵, 부작위를 파헤쳐야 된다고 생각해요. 침묵의 원인은 아마도 구조와 관련 있을 텐데, 현재의 논의 수준에서는 가부장제 때문이야라고 하고 말아버리는 것 같아요. 🧶 김수용: 『침화일군폭행총록(侵华日军暴行总录)』이라는 자료가 있어요. 산둥성을 침략한 일본군의 범죄 내역을 기록하고 있는데, 중국 측에서 조사한 것으로 보이는 이 자료에 '부녀자를 납치, 감금해서 20일간 능욕한 후 살해' 했다거나 신체의 어느 부분을 훼손했는지 등 상세한 서술이 나와요. 마을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된 것 같은데, 일본군'위안부'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급이 없어요. 대개 마을에서 성폭행을 한 다음에 '위안소'로 끌고 가서 '위안부'를 시키는 수순이었잖아요. 이런 정황을 고려할 때 성폭행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언급하면서 '위안부'에 관한 내용은 없다는 게 특이해요. 이 대목을 읽고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기록에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내용은 제외되었을 가능성과 당시에 강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이요. 🧶 심아정: 전장에서 일본 군인들은 여성 강간에 대한 죄책감이 없었던 것 같아요. 군인 수기를 보면 대개가 오히려 자랑거리로 여기죠. 전범 진술서에서도 전범의 65%가 강간 경험을 밝히고 있어요. 물론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강간'과 당시 감각이 완전히 다를 수 있을 거예요. 현시점에서는 우리의 언어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이 지점에서 고민이 많아요. 🧶 김수용: 전범들은 자필진술서를 쓰기 전에 선행 학습을 했다고 해요. 『자본론』, 『공산주의사』, 『제국주의 이론』 같은 책들을 공부하고 나서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거죠. 생애를 돌아보고 침략 전쟁에 이용된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이 전쟁에 참가하게 됐는지 학습한 다음에 자필진술서를 서술했고, 죄에 대한 인지 과정은 한참 뒤에 이뤄져요. 진술서가 기계적이고 비인간적 느낌이 드는 이유 🧶 장수희: 죄행이 너무 자세히 적혀 있어 업무 일지를 옆에 두고 보면서 썼나 싶을 정도였어요. 🧶 김수용: 전범 중에 한 사람이 기억력이 엄청 좋았나 봐요. 그 사람이 '언제는 뭘 했고, 언제는 뭘 했고…'라는 식으로 일지처럼 사실 위주로 서술해서 제출했더니 “네가 뭘 잘못했는지, 그 일이 왜 잘못인지를 써”라면서 진술서를 반려했대요.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반나절만에 '내가 언제 누구를 어디서 죽였고', '어느 집을 불태웠고'라는 내용의 진술서를 제출했나 봐요. 그것도 반려를 당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지금 전쟁 일지, 업무 일지를 쓰라는 게 아니다. 지금 너의 글에는 네가 그런 행위를 했을 때 피해자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빠져 있다'라고 했대요. 이 글은 선생님들 지적처럼 진술서, 요컨대 법적인 문서잖아요. 진술서라는 형식 때문에 사실에 대한 기술이 두드러진 것 같아요. 그런데 전범 증언을 읽다보면 어떤 병사가 자필진술서를 쓰면서 오열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자필진술서와 확실한 차이가 있어요. 지금 우리가 읽은 자필진술서는 기술이 엄청 건조하잖아요. 법적 문서의 성격이 강한 자필진술서는 형식상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자필진술서를 작성하기까지 병사들이 매일 밤마다 토론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한 글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요. 인죄 후에는 참관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발전상을 견학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전쟁을 치른 지역을 방문해 피해자나 그 유족과 대면하는 과정도 진행되었다고 해요. 이 과정에서 전범들이 자신이 저지른 가해의 실체를 목격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 참관 학습을 '인죄의 여행'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 장은애: 이 진술서에서 뭔가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느낌이 드는 게 수용된 전범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진술서가 작성된 과정을 알아야 된다고 하신 말씀과도 맥이 닿아 있는데, 진술서가 이러한 방식으로 작성될 수밖에 없도록 이끈 어떤 힘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전범들이 진술서를 작성하고 사상 교화 과정을 거친 후에 교화 프로세스의 일환으로 자신들이 전쟁 범죄를 저지른 마을에 찾아갔다고 해요. 그때 중국 정부 측에서 일본군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한 여자(전쟁 당시 7살)에게 마을 안내를 하도록 시켜요. 그랬더니 여자가 '내가 저 사람들한테 마을 안내를 해야 하느냐, 너무 고통스럽고 괴롭다'라고 호소했다고 해요. 이 대목을 읽고 고민이나 성찰이 부재한 상태로 기계적 진술을 하게 만든 다른 쪽의 힘, 그러니까 중국 쪽의 '듣는 귀'에 대해서도 의식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어요. 진술서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묵음 처리'된 원인에 대해 생각할 때 진술이 일본군 전범과 중국 사이의 양자 구도 속에서 생산된 거라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구도, 공산주의 체제 하 중국의 변화 그리고 이러한 국내외적 변화와 맞물린 중국의 정치적 선택들까지 폭넓게 고려할 필요가 있어요. 텍스트 외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진술서에서 드러나는 한계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전범 개인에게 돌리면 안 될 것 같다는 거죠. 🧶 김수용: 자필진술서에서는 다른 전쟁 범죄에 비해 위안소나 일본군'위안부' 관련 증언이 적은데, 1997년 중귀련에서 발행한 소식지는 '위안부'나 전시 성폭력 관련 내용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어요. 자필진술서가 1950년대 초에 작성된 것이라 '위안부' 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하지 않았다면 1990년대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사회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와 증언 이후, 전범들의 인식이나 증언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닌지 궁금해요. 🧶 심아정: 그런데 좀 꺼림직스러운 부분은 위안소나 '위안부' 관련 진술 비중이 적은 것보다 어쩐지 무언가 켕겨 그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 같다는 거예요. 후지이 다케시 선생님이 2000년 법정 때 증언한 두 가해 병사를 언급하면서 법정이 열리기 전에 중귀련 회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다른 설문에는 답신율이 굉장히 높았던 반면, 일본군'위안부' 관련 답신율은 15%밖에 안 됐다고 지적했어요. 그때 왜 그랬을까, 저도 궁금했던 기억이 나요. 🧶 김수용: 전범들이 진술서를 쓸 때도 말 한 마리 죽인 거, 보리 불태운 거까지 말하면서 강간이나 성폭행 관련 얘기는 가장 뒤늦게 나와요. 전쟁 상황이라도 성폭행이나 강간을 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그들에게도 있었는지 끝까지 숨겨요. 나머지 죄는 명령 때문이라는 변명이 통하는데 전시 성폭력 문제는 그러기 어렵거든요. 꺼리는 거겠죠. 꺼려졌을 거예요. 심지어 중귀련에서도 일본군'위안부' 얘기는 많이 나오지 않아요. 🧶 조시현: 선행 논문이나 자료집을 보면 전범들은 강간과 위안소에서의 행위를 범죄로 자백하고 있어요. 흔히 위안소를 '이용'했다는 말을 썼지만, 이를 강간이라고 인식하고 범죄라고 진술한 거죠. 저는 이게 굉장히 흥미로운데, 그런 인식이 일부에서 나타난 건지 전반적인 것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위안소에 간 행위를 강간 행위로 파악하는 케이스가 있다는 점은 명확합니다. 용어 사용에서 발견되는 특이점과 번역 문제 🧶 조시현: 언어(용어) 문제도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자료집은 번역문과 원문을 함께 싣고 있어요. 번역문과 원문의 용어 차이를 살펴보는 건 번역하는 한국의 입장, 전범 재판을 한 중국의 입장, 일본인 전범의 입장을 교차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돼요. 교화 과정에서 전범들은 여러 언어를 학습했어요. 가령, 만주국의 괴뢰적 성격을 강조하는 '위(僞) 만주국'이라는 표현을 비롯해 '항일', '애국', '인민' 같은 용어들 말이에요. 전범들은 중국의 입장에서 항일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반영된 용어들을 수용, 차용해서 자필진술서를 작성했는데, 그것이 굉장히 흥미로운 결과를 낳은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전범들이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자신의 입이나 손으로 기입(register)하게 된 거죠. 그때 자신과 타자간의 충돌이나 심리적 갈등이 발생했고, 나아가 이것이 반성의 계기로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자필진술서는 두 개의 시선과 인식이 교차되는 현장이었을 수도 있는 거죠. 또 연합군의 포로 심문 문서랑 비교해 봐도 자필진술서는 흥미로운 논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아요. 포로 심문서는 포로가 한 말을 다른 누군가가 기록한 것이잖아요. 그 포로 심문서를 읽을 때는 화자의 '퍼스널리티'를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었어요. 반면에 자신의 살인 행위를 덤덤하게 기술한 '자필' 진술서를 읽을 때는 어떤 사람인지가 그려지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중국에서 작성된 자필진술서와 연합군 포로 심문 문서의 차이는 극명한 것 같아요. 🧶 김수용: 그렇긴 한데, 전범이 기술한 범죄 목록을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조시현 선생님이 말씀하신 퍼스널리티를 파악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계속해서 향응을 받았다고 서술한 진술에 대해서는 '이 사람은 무슨 뇌물을 이렇게 많이 받았어?'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고, 이 과정에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드러나는 측면이 있죠.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확실히 자필진술서는 연합군 포로 심문 문서와 달라요. 자필진술서의 경우 서술자가 중국과 일체화하는 경향이 크잖아요? 중국 인민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중국이 일본을 물리친 것을 '정의로운 반격'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인 피의자 조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낯선 장면이에요. 🧶 조시현: 자료집을 번역할 때 굉장히 수고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핵심 단어들이 원문의 뉘앙스 차이를 감안하며 번역됐는지 궁금했어요. 매번 일본군'위안부'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원자료에 사용된 용어가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예컨대 여성들을 '위안소'로 데리고 가서 노역을 시켰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원어를 확인해보니 노예의 노(奴)자를 쓰고 있어요. 노역(奴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통해 어떤 일본군의 경우에는 피해당한 여성을 '노예'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거죠. 그야말로 '성노예'라는 표현을 선취할 수 있었다는 거죠. 이런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고, 해제와 번역과 더불어 원래 표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원문까지 수록되어 있는 것이 정말 다행이다 싶어요. 인죄(認罪)와 탄백(坦白)의 법적 의미 🧶 조시현: 중국에서 전범은 '탄백'과 '인죄'의 과정을 거쳤어요. 이 두 개념은 곧 있을 전범 재판에 대한, 즉 법적 절차를 전제하고 나온 것이죠. 법적인 측면에서 인죄는 죄가 있음, 곧 유죄를 인정한다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영미식이죠.(기소에 대한 인정 여부 절차. 이른바 arraignment 절차) 우리나라의 경우 제도적으로 피고의 유죄 인정 여부를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아요. 형을 계산하는 양형 때 고려하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영미권에서는 죄를 인정하면 그 인정을 바탕으로 재판 처리를 해요.(유죄협상제. plea bargaining) 그 인죄 개념을 중국 공산당도 사용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어요. 또한 형사재판의 경우 자백만으로는 유죄 판결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 보편적 원칙이에요. 그러니까 중국이 어떻게 판결을 내렸는지는 전범 재판 기록을 대조해 봐야 명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어쨌든 추가 증거가 필요한 경우는 어떤 때이고, 또 특정 범행을 인정할 때 필요한 입증 증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특히 일본군'위안부' 관련 증언의 경우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됐을 문제였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렇다면 '굳이' 얘기한 셈인데 왜 했을까, 증거가 있었던 걸까, 혹시 보강 증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등 수사관의 입장에서 추론을 확대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자필진술서는 수사, 기소, 처벌, 재판을 포함한 법적 절차를 염두에 두고 작성된 문서라는 점을 충분히 질문해봐야 해요. 다음으로 이 문서의 특징 중 하나가 개인의 생각이나 감상, 양심의 가책 등과 관련된 표현이 굉장히 제한적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형법상 범죄행위의 주체 이외에 무슨 주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게 돼요. 그런 의미에서 일본군 전범들의 주체성에 관해 얘기하려면 다른 맥락들을 시야에 둘 필요가 있어 보여요. 구체적으로 중귀련 활동과 진술서를 교차해 볼 필요도 있고요. 관련해서 자필진술서와 전쟁 수기는 확실히 성격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본질적으로 진술서의 성격 내지 형식은 작성자 본인의 인적 사항과 범죄행위가 기술된 수사 문서잖아요. 이처럼 진술서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료에 다시 접근하면, 가해자측 증언을 통해서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어떤 증거를 얻기 위한 하나의 루트로서 이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실제로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기보다는 이미 알려진 사실에 대한 보강 증거일 경우가 많기는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일본군의 인식을 드러내는 여러 표현들을 통해 생각할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자료의 유용성이 있는 것 같아요. 또 이 자료를 제대로 독해하려면 진술의 형식이나 체계 같은 것을 알고 가야할 것 같아요. 법적 문서로서의 진술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이 자료를 다시 보면, 법적인 절차 속에서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죄로 자백한 것과 윤리적인 반성과 사죄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어요. 윤리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회개하고 반성하고 사죄하고 범행 사실을 인정했다고 해서, 즉 '인죄, 탄백'이 바로 법적 의미의 사죄는 아닌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중귀련 방식의 사죄 말고도 추가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귀환 이후 중귀련의 활동은 분명 사죄의 과정인 것 같아요. 이 자료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사죄는 일회성이어서는 안 된다, 계속돼야 하는 행위이자 과정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비로소 진정성이 드러나고, 그게 진짜 화해로 가는 길이니까요. 사실 법학 용어에는 '용서'라는 개념이 없어요. 기소를 안하고 풀어주거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형을 면제해서 석방을 한다든지 하죠. 다 용서와 무관한 일이에요. 용서는 보다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료를 읽고 사죄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심도있게 고민해보고, 중귀련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해 왔는지 주목하는 것이 의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 2020년 에세이 이름들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것 -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 서평
-
'위안부' 관련 기록물의 행간을 읽어내고 엮은 책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큰 어려움 중 하나는 관련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직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문서의 상당수를 파기하였다. 일본군에게 불리한 문서들이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활용되거나, 일본군의 전시 잔학행위가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자료를 파기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를 동원하거나 관리하면서 작성된 문서들도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은 아시아·태평양의 여러 지역에서 수많은 여성을 위안소로 강제동원했고, 이들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명부나 명단을 만들었다. 명부는 일본군이 만든 제도 속에서 여성들이 이름과 숫자로 적혀 통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자, 일본군의 범죄행위를 분명하게 보여줄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명부 중 아주 일부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2019)은 현존하는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를 분석한 연구를 모아서 정리한 책이다. 7명의 저자가 이 책의 집필에 참여했으며 책은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의 발굴 현황과 이것이 작성된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본론은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된 명부들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명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글을 덧붙이는 형태로 되어있다. 부록에는 책에서 다룬 중요 자료의 일부가 원문 형태로 제공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2010년대의 연구 성과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명부나 명단들이 발견된 것은 이 문제가 알려진 1990년대부터이지만, 비교적 최근에야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연구 성과가 점점 축적되면서 명부에서 여러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연구성과들을 편집하여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명부 문제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도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는 데에 이 책의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고, 거기에서 무엇을 읽어 낼 수 있을까? 강정숙 선생님의 글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名簿) 종류와 연구의 의미」도 이 문제를 다루지만, 여기서는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명부는 작성한 주체와 목적을 중심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군이 '위안부'를 동원하고 위안소를 운영하기 위해 생산한 명부들이다. 책의 첫머리에 실린 한혜인 선생님의 글 2편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명부의 네 가지 분류 일본군이 만든 '위안부' 관련 명부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여성들을 모집하여 위안소로 이동시킬 때에 필요한 명부, 위안소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명부, 군인‧군속의 인원을 파악하기 위한 명부, 전후 귀환 과정에서 만들어진 명부 등이다. 전쟁이 확대되면서 일본군은 중국을 시작으로 아시아·태평양 여러 지역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들을 동원했다. 전시에 민간인 여성을 전장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의 허가가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문서들이 작성되었다. 도항(渡航) 허가서나 신분증명서, 승선명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명부들은 일본군'위안부'의 동원 실태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지만, 대부분이 파기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예외적으로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특요원('위안부') 명부가 남아있는데, 이는 여성들을 대만의 지룽(基隆) 항에서 중국 남부의 하이난으로 도항시킬 때 작성한 것이다. 최종길 선생님의 글이 이를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두 번째로 위안소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명부가 있다. 지역에 따라 위안소를 관리하는 주체가 달랐는데, 일본군이 이를 직접 관리하기도 했고, 현지의 행정기관이나 경찰이 관련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위안소 관리를 위해서는 위안소 내의 인원을 정리한 명부의 작성이 필수적이었고, 이는 정기적으로 작성, 보고되었다. 관련 문서들 대부분이 사라졌으나, 연합군이 전후에 작성한 「ATIS 조사보고서 120호, 일본군의 편의위락시설」에는 필리핀에서 연합군이 일본군으로부터 획득한 위안소 관리 문건의 예시와 서식들이 남아 있다. 작성된 명부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명부 작성을 위한 예시와 서식은 일본군'위안부'를 관리하기 위한 절차와 체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서식에 따르면 위안소 관리를 위해 '위안부'의 영업허가증, 업자가 작성하는 위안소 영업 허가 신청서 및 영업 보고서, 성병 검진 보고서, 교체 허가 신청서, 위안소의 종업원 명단 등이 작성되어야 했다. 위 명부들은 모두 일본군'위안부'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명부들이다. 특히 종업원 명단은 성명, 출생일시, 직업, 거주지, 본적 등 상세한 내용을 모두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작성된 명부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명부 작성을 위한 예시와 서식은 일본군'위안부'를 관리하기 위한 절차와 체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세 번째로는 일본군이 군인‧군속의 인원을 파악하기 위해 만든 명부와, 현지의 조선인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조선인들의 인원을 관리한 명부가 있다. 전자로는 「유수(留守)명부」와 「복원명부」, 후자로는 「진화계림회명부」 가 있다. 이 명부들은 본래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명부 안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볼 수 있다.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에서는 전쟁 말기 일본군이 '위안부'를 간호부로 편입했던 정황이 확인되고, 「진화계림회명부」에서는 위안소 업주로 직업을 등록한 조선인들의 기록을 통해 중국 진화에 위안소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는 한혜인 선생님의 글에서, 「진화계림회명부」는 쑤즈량·천리페이 선생님의 글과 윤명숙 선생님의 글에서 각각 자세히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후 귀환 과정에서 만들어진 명부들이 있다. 일본이 패전한 이후 각지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이 스스로 조직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었거나, 연합군이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귀환시키는 과정에서 만든 명부들이다. 이 명부들은 조선인의 강제동원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로 활용되지만, 그 안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흔적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강정숙 선생님은 「팔렘방조선인회명부」를 바탕으로 인도네시아 팔렘방의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피해자의 동원 상황을 분석하고 있다. 책에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연합군은 전후 포로로 잡힌 조선인 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를 발견하고 이들에 대한 보고서와 명단을 작성하기도 했다. 버마 미치나에서 연합군에게 붙잡힌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보고서인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와 중국 쿤밍의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포로들을 조사하고 작성한 「쿤밍의 조선인과 일본인 전쟁포로」가 그것이다. 이 두 보고서에 첨부된 명단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과 주소, 나이, 동원 시기가 남아 있다.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에서 버마 마니차로 동원된 여성들 20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한국 정부에 피해자로 신고하지는 않았다. 명부를 통한 연구의 어려움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를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의 글들은 일본군'위안부' 연구의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명부를 분석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보통 명부가 제공하는 정보들이 매우 단편적이고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명부가 작성된 역사적 맥락이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명부 속 이름만으로는 의미를 찾아내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는 아직 분석되지 않은 조선인의 승선명부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 승선명부에는 전쟁이 끝난 후 태평양의 여러 지역에서 귀환한 조선인들의 이름, 귀환일시, 직업, 주소 등이 남아있다. 대부분이 남성이지만 때로 여성의 이름도 발견된다. 이들이 '위안부' 피해자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이를 설명해줄 또 다른 자료가 없다면 추가적인 연구와 분석을 진척시키기 어렵다. 피해자의 증언, 동원 지역에 관한 자세한 정보, 문서 기록이 교차하지 않는다면 명부 그 자체로는 연구를 지속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명부에 기록된 내용들이 개인정보라는 점은 연구를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물이다. 지금은 논문이나 연구 결과물에서 피해자의 이름이나 주소, 인적 사항을 공개하고 있지만,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시작되던 1990년대에는 이런 정보를 학계나 일반에 공개하기 쉽지 않았다. 피해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은 이의 정보까지도 자료 공개로 인해 노출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우려하여 자료를 제공하는 공공기관이 처음부터 이름이나 여타 정보를 가린 문서들을 공개하기도 했다. 자료 활용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명부를 바탕으로 피해자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세한 증언을 바탕으로 피해 지역의 명부에서 다른 피해자의 이름을 찾아낸 사례들이 몇몇 있다. 증언이 자료와 만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발굴된 명부의 수많은 이름 중에서 이렇게 피해자로 밝혀진 사례는 손에 꼽을 만큼 적고, 여전히 많은 이름들이 베일에 싸인 상태로 남아있다. 연구자 개인 혹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명부에 남아있는 이름과 주소를 바탕으로 더 많은 피해자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피해자를 찾아내는 것이, 피해자 본인이나 가족이 바라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점이 또 발목을 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연구를 지속할 가능성 역시 갖고 있다. 많은 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가운데, 가족의 기억과 증언을 통해 명부를 바탕으로 피해자와 피해사실을 더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는 귀환자의 승선명부를 바탕으로 피해자가 태평양의 트럭 제도로 동원되었음을 확인한 사례도 있다. 다만 이것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다. 덧칠된 이름들에서 역사 발견하기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다른 자료와 달리 명부는 특정 지역으로 동원된 사람들의 수, 출신지, 연령과 같은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이런 정보는 두 가지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다. 첫 번째로 명부를 활용해 특정 지역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다. 중국 진화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팔렘방과 같이 명부가 발견된 지역에 관한 연구는 그곳에 얼마나 많은 '위안부'가 동원되었고, 얼마나 많은 위안소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증언과의 비교검토, 현지 조사가 함께 이루어진다면 명부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지역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일본군'위안부' 제도 전체의 모습을 되짚어볼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제도를 설명할 때 곤란한 부분 중 하나는 전쟁 당시 얼마나 많은 일본군'위안부'가 존재했는지, 그 중 조선인의 비율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추정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주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략적인 비율을 가늠하게 해주는 몇몇 자료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특정 지역의 연구는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어떤 지역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동원되었는지, 그들의 동원 시기는 어떠했는지, 그곳에 얼마나 많은 일본군이 주둔했는지 확인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실증적으로 규모를 추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군이 점령했던 모든 지역의 위안소가 동일한 방식으로 운영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겠지만, 여러 지역의 사례를 종합한다면 더욱 정확한 추정이 가능할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명부 연구는 아직 가능성이 많이 남아 있는 분야이다. 발견되었지만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명부도 많고, 새롭게 해외 자료보관소들에서 발견되는 명부들도 있다. 이 명부들에 관한 연구는 모두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실태를 밝혀내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연합군, 점령지의 조선인 조직들에 관한 연구와 함께 명부를 작성한 이들이 가졌던 시각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책 본론에 수록된 서민교 선생님의 일본군에 대한 연구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안소를 설치한 주체인 일본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놓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연구의 분야와 시야가 확장될 필요가 있다. 명부에 대한 연구는 일본제국의 식민지와 점령지에 대한 문제, 인종주의적 시각의 문제, 전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 등 여러 주제와 결합할 수 있고 결합해야 한다. 앞으로도 활발한 연구 성과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 목차 1부. 은폐의 기술, 제도 속에 숨겨지는 이름 발견되는 이름, 이른바 '위안부' 명부 - 한혜인 일본군'위안부'제도의 운영과 기록되지 않는 이름 - 한혜인 타이완척식주식회사의 위안소 운영 실태와 가려진 명칭 - 최종길 2부. 숨겨진 '위안부' 이름 발견하기 중국 저장성 「진화계림회명부」 속 '위안부' - 쑤즈량・천리페이 인도네시아 「팔렘방조선인회명부」 속 '위안부' - 강정숙 보론 기록과 기억의 사이에서, '위안부' 관련 명부 연구 - 강정숙 중국 당안관 자료 현황과 자료 해제(「진화성구 근황표」와 「진화계림회명부」) - 윤명숙 중일전쟁기 일본군 상황과 일본군위안소 설치 - 서민교 부록 자료 1. 인원 및 물자수송의 건 자료 2. 지나사변 이후 중남 중국에서 군에 대한 협력사항 자료 3. 타이완척식 관계 하이난도 도항자 인명표 자료 4. 하이난도 조사대용 및 군용자재 공급의 건 자료 5. 독립기념관 소장 수용인원명부 자료 6. 1946년 종전 당시 일본군 육군 주요 부대 편람
-
- 2019년 좌담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첫 번째 날 두 분의 답변을 들어보니 '탈분단적 시각'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남한의 '분단적 시각'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총련을 포함한 해외동포단체 등에서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을 가지고 운동 혹은 연구 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음에도, 남한의 주류 언론에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은 깊이 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위안부' 문제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동원되는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 내에서 출판되는 혐한서적에서 '위안부'는 헤이트스피치(혐오발언)의 단골 소재입니다. 일본과 맥락은 다르지만, 남한 역시도 마찬가지로 '위안부' 문제를 이용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남한의 언론에서는 누군가의 과거의 잘못에 대해 반성을 요구하거나 책임을 물을 때, 주로 ''위안부' 문제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예시로 들곤 합니다. 헤이트스피치와는 상당히 다른 결이지만, 어떤 논리를 만들기 위해 '위안부' 문제를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선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으로 '위안부'문제를 다루는 운동 혹은 연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한에서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적 차원에서 '한-일 프리즘'을 벗어나 다양한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기란 요원하기만 합니다. Q1. 그렇다면, 두 분께서 생각하시기에 '한-일 프리즘'을 벗어나 다양한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기 위해 운동적 측면에서 어떤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수요집회나, 소녀상 프로젝트 등으로 대표되는 남한의 대중적 캠페인이 보다 더 폭넓은 시각을 담기 위해선 어떤 부분이 보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Q2. 서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시간입니다. 본 대담 주제와 관련하여 정영환 선생님께서 박노자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박노자 선생님께서 정영환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1.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2.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3.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3 박노자 A1. 네, 정영환 선생님께서 훌륭하게 지적하신 대로 사실 굳이 운동 진영에는 이렇다 할만한 '주문'을 할 것은 그다지 없습니다. 초기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운동가들은 이미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인 전시 성폭력 문제의 일환으로 인식하여 그렇게 연대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보기에 귀중한 것은, 최근에 별세하신 김복동 할머니처럼 '위안부' 피해자들이 직접 베트남에서의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과 손을 잡고 연대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콩고 등지에서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도 - 위에서 정영환 선생님께서 지작하셨듯이 - 참 귀중한 성과죠. 문제는, 정영환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무엇보다 매체와 교육체계, 그리고 나아가서는 정치권입니다. 매체들은 예컨대 중국이나 필리핀, 아니면 파푸아뉴기니 여성들이 납치, 감금당하고 성노예화 당한 이야기를, 한국 독자들에게 과연 얼마나 자주 합니까? 아마도 다수의 한국인들은, '위안부' 피해자들 중에 네덜란드와 인도, 파푸아뉴기니 출신의 여성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과서에서도 '위안부' 전쟁 범죄의 국제적 성격이나 세계적 규모 등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돼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와 동시에 한국 정치권은 베트남 전쟁 시절의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당연히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적어도 대통령, 국회 차원에서 사과와 배상을 하고, 교과서에 한국 전쟁 시절의 한국군 범죄상을 정확히 기술하고 재발 방지 조치를 취하는 등 일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성해야 할 것인가를 나서서 행동적으로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정영환 A1.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연구나 활동을 하는 저에게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입니다.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획일적이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인식은 일본 리버럴들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혐한과 반일, 특히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등가로 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못합니다. 한국 사회가 그간 '위안부'문제에 대해 지속적이며 대중적인 관심을 가져왔던 것은 사실이고 그 자체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긍정적인 역할을 다해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점을 유보하면서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남한에서의 대중적 캠페인이 국내용으로 끝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애초에 증언을 하셨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일본문제입니다. 피해자의 출신지역은 다양하고 피해의 양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공통된 것은 모든 피해자들이 일본군, 정확히 말하면 천황의 군대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성노예제 피해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들의 치유와 경험의 공유나 다양한 문화적 재현 등, 남한의 국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도는 귀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동시에 일본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지는가, 이후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일본사람들이 자신들 나라의 과거의 만행을 직시하여 기억하는가, 이것이 '해결'을 위한 필수적인 쟁점이 됩니다. 아울러 Q1의 전제가 된 부분에 관해 보충 설명을 드리자면 총련을 포함한 재일동포단체에서도 여전히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주된 운동과제가 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총련 내부의 문화도 젠더 평등, 젠더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많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재일조선인 운동 내부의 젠더 불평등을 극복하려고 하는-주로 여성의-활동가들이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자진해서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에 입각한 실천을 시작하고 있다는 설명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최근 매해 4월 23일에는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을 기념하여 젊은 재일동포들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한 다양한 액션을 벌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날은 1977년에 배봉기 할머니 증언을 총련의 기관지 <조선신보>가 처음으로 보도한 날입니다. 남한에 국한된 시각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기념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1970년대 분단과 대립이 격렬했던 시기에는 남한에서 이런 증언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공유할 것은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이런 분단과 반공주의적 시각으로 인해 남한 사회가 외면해왔던 해방후의 역사를 다시 묻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본 온라인 대담은 팀과 커뮤니티를 위한 민주주의 플랫폼 '빠띠'에서 이루어졌다 Q. 박노자가 정영환에게 묻다 정영환 선생님께 여쭈어보고 싶은 것은, 일본 사회에서의 전쟁 범죄 문제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지금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차적으로, 일반인들이 식민주의와 전쟁의 사실을 과연 어디까지 인식을 하고 있습니까? 젊은 일본인들의 상당수가 아예 조선과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조차도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수차례 들었는데, 대체로 이 부분에 대한 대중적 '앎'의 형태와 지형에 대해서 한 번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A. 정영환이 박노자에게 답하다 박노자 선생님, 중요한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갖는 주제이고 또 매우 우려하고 있는 점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젊은 일본인들이 일본의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의 관해 제대로 된 지식을 배울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원래 수험의 관계상 비중이 높지 않는 근현대사는 수업에서 안배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교과서의 내용도 19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서 가해의 사실을 학교교육에서 가르쳐야한다는 기운이 한때 있기는 했는데 1997년이후 극우파의 역공의 결과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포함한 가해사실의 서술은 대폭 줄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학생들이 근현대사에 대해 거의 백지 상태로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저는 대학에서 주로 1, 2학년 학생들을 접할 기회가 많은데 역시 식민지배나 침략전쟁의 사실 자체를 모르거나 지식이 거의 없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우려가 되는 것은 서점이나 인터넷 상에는 '혐한', '혐중' 서적들이 넘쳐 청년들이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도 처음 접하는 정보가 이런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쓰여진 대중역사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학생들이 애초부터 '혐한'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고 일본의 가해 사실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학생도 있기는 한데 그런 관심을 품은 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통로가 너무나 좁다는 사실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젊은 층을 포함한 일본 대중들의 '앎'의 형태를 생각할 때,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중요합니다만, 그와 더불어 사실을 인식하는 틀이나 프레임을 매체들이 어떤 형식으로 제공하는지에 더욱 주목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TV 등의 대중매체는 기본적으로 '친일/반일' 프레임으로 대외관계를 해석하는 메시지를 거듭 제공하고 있습니다. 일본문화, 혹은 일본인이 외국에서 얼마나 환영을 받고 있는지 일본을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들(주로 구미권출신자)이 일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등등, 소위 일본 '스고이(대단하다)'의 대합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침략이나 가해사실을 적시하는 비판은 정치적 의도를 갖고 일본을 '혐오'하는 '반일'로 표상이 됩니다. 작년 2018년 10월의 강제징용문제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반응에도 나타나듯이 일본 사회의 전쟁 범죄 문제에 관한 인식은 반성은커녕 오히려 비판에 대한 반발이 우세합니다. 대법원판결 직후 아베총리는 '국제법상 있을 수 없는 판결이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는데 주류 언론들은 기본적으로 이 주장에 동조하였습니다. 1965년의 한일협정에서 최종적으로 '해결'이 되었는데 한국이 이 약속을 어겼고, 이 판결은 한일관계의 악화를 초래한다는 분석이 TV나 신문에서 반복되었습니다. '반일' 한국 때문에 외교관계가 악화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 '친일/반일'프레임은 상당히 강력합니다. 주류언론의 인식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그래서 '일부 매체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반일'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반론을 하게 됩니다. 즉 이 프레임 자체를 의심하고 일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제 관점에서 볼 때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게 지금 일본의 현실입니다. Q. 정영환이 박노자에게 묻다 이번 대담에서는 주로 '분단/탈분단'이 주제가 되었는데 저는 박노자 선생님께 좀더 다른 각도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즉 한국자본주의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한 질문입니다. 남한의 주류사회의 '위안부'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면 계급적 관점의 부재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족' 담론의 틀 내에서 '위안부'문제를 재현할 때 젠더적 관점과 함께 계급적 관점이 결여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국자본주의하의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성착취 구조나 성매매'문화'와 일본군'위안부'의 재현방식에는 연관성이 있을 것인데 박노자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분석을 하십니까? 또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A. 박노자가 정영환에게 답하다 정영환 선생님, 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자주 생각해왔습니다. 상당수 한국 지식인들이 '민족주의가 문제'라고 재단하지만, 사실 '민족주의'라는 관념은 하도 다의적이라서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 정확히 "어떤" 민족주의가 "어떻게" 문제되는지를 명기하는 게 중요합니다. 식민지라는 트라우마를 지니는 것도 '민족주의'와 이렇게저렇게 엮일 수 있는 부분인데, 식민지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를 '문제'로 삼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식민 모국이 과거에 대한 '책임'을 전혀 제대로 지지 않은데다가 한국의 지배층이 오랫동안 식민지적 습성들을 그대로 간직해온 부분들이 커서, 그런 트라우마가 크다는 건 그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일 뿐입니다. 진짜 문제,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되는 민족주의의 종류는 바로 자국 우월주의적인 태도와 국가주의적 태도, 소위 '국익주의'나 '대한민국주의' 같은 현상들입니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이런 현상들이 또 한국 자본이 침투하고 있는 지역들, 특히 동남아에 대한 불량하고 우월주의적 태도와도 불가분의 연관을 가집니다. 세계체제라는 먹이사슬에서 한국 자본들은 이미 준핵심부와 같은 위치에 올라 있습니다. 구미권 자본들이 한국의 금융권 등을 좌우하는 동시에 한국 자본들이 동남아 등지에서 저임금 노동 착취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한국 언론들이 '국익'을 위한 베트남,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정당화하고 당연시합니다. '진보언론'들마저도 미얀마 등지에서의 한국 토건 자본들의 이권 챙기기 등을 반기고 있죠. 한국 자본과 함께 각종의 섹스관광 등의 국내의 가부장적 추태들이 대량 수출되고, 한국 언론매체에서 한국인 가족의 '며느리' 역할과 한국 남성들의 성적 욕구들을 '해결'해주는 동남아 여성상이 계속 등장됩니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와 같은 현수막들을 10여 년 전만 해도 국내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아류 제국주의라고 할만한 분위기 속에서는 동남아나 파푸아뉴기니 등지의 성노예들의 비극은 자연스럽게 대중의 눈과 귀로부터 멀어지죠. 쉽게 이야기하면 한국 자본이 구미권과 일본 자본의 뒤를 열심히 쫓아가는 상황에서는 국내인들의 "제3세계"와의 연대 의식 등이 계속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정말로 부단히 국내 여론 공간에서 문제 제기해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DAY 3>에서 계속됩니다.
-
- 2019년 논평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2부 - 역사의 교차, 문화의 번역
-
이 글은 『여성문학연구』 47호(2019)에 실린 「일본의 #MeToo 운동과 포스트페미니즘: 무력화하는 힘, 접속하는 마음」의 내용을 요약‧수정한 것이다.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1부. 역사수정주의, 백래시, 그리고 ‘위안부’ 문제 2부. 역사의 교차, 문화의 번역 매개로서의 ‘위안부’ 문제 1부에서는 일본에서 미투운동이 잘 드러나지 않는 배경으로서 1990년대 이후 백래시와 역사수정주의가 결합하여 전개되었고, 그 중심에 늘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일본의 우파들은 ‘위안부’ 문제의 부정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도덕적 신념을 키워왔고, 최근에는 유엔 등 국제적인 무대에서 ‘위안부’ 역사를 부정하는 활동에 진력하고 있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를 자신들의 자원으로 삼는 것은 물론 우파들만이 아니다. 일본의 페미니즘 운동 역시 성적 존엄성의 회복을 요구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미투 운동의 시조로 되새기고자 하였다. 일본의 페미니스트들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지원운동이 '전시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창출하고, 국제적으로도 '성노예제'라는 말을 공유하게 한 성과를 말하면서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의 역사를 현재의 일본 사회와 적극적으로 접속시킨다. 그리고 미투운동이 확산되지 않는 원인을 여전히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와 사회의 체질에서 찾고 있다. 미투운동과 ‘위안부’ 문제를 연결하려는 구도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강조되었으며, 한국 시민사회를 본보기로 삼는 움직임 또한 나타났다. 젠더 연구자인 무타 카즈에(牟田和恵)는 ‘위안부’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위안부문제는 #MeToo다!〉라는 짧은 동영상을 제작하여 수요집회의 모습과 함께 ‘위안부’ 운동을 이끌어온 활동가와 연구자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영 페미니스트 예술가집단인 내일소녀대(明日少女隊)도 "‘위안부’문제는 #MeToo다"를 내세워 각지에서 '망각에 대한 저항' 퍼포먼스를 펼쳤다.[1] 그 동안 지속해온 ‘위안부’ 연구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비롯한 지원운동, 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의 추진, ‘위안부’ 소녀상을 둘러싼 시민사회의 호응, 그 속에서 한국‧일본‧재일조선인들 사이의 참조와 연대의 축적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인식의 지평이 가능했다. ‘위안부’ 피해의 역사와 연결할 뿐 아니라, 한국의 현장을 참조대상으로 삼고 일본의 미투운동을 임파워하고자 하는 시간적, 공간적 접속은 미투운동과 ‘위안부’ 운동 양쪽에서 네이션의 스케일을 벗어나는 동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이토 시오리와 서지현이라는 두 상징적 인물을 비교하는 방식보다도 훨씬 더 다이내믹하고 복잡한 시선의 교차를 낳고 있다. 2018년 8월 12일의 집회 포스터 〈일본군 ‘위안부’ 메모리얼데이 in 도쿄 김학순씨부터 시작된 #MeToo〉 내일소녀대 ‘망각에 대한 저항’ 퍼포먼스, 2018년, 로스앤젤레스 미투 지원운동의 조용한 확산 2019년 4월 10일 '이토 시오리의 민사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Open the Black Box'가 결성된 것은 특기할만하다. 원래 'Fight Together With Shiori(FTWS)'라는 이름으로 준비모임을 가졌던 몇몇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 모임은"성폭력 피해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에 있는 블랙박스를 하나하나 열어가는 시작"이라는 취지를 가지고 정식 발족했다.[2] 이토의 기자회견 후 지원 서명운동을 시작한 #WeTooJAPAN 발기인인 후쿠하라 모니카(福原桃似花)를 비롯하여 변호인단과 기존 여성운동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50명이 모인 이 자리의 중심에 일본에서 일본군‘위안부’ 지원운동을 이끌어온 재일조선인 2세 양징자(梁澄子)가 있었던 점도 상징적이다. 다른 하나의 움직임은 성폭행에 대한 사법 판단에 항의하는 플라워시위다.[3] 2019년 4월 이후 매월 11일 전국 대도시에서 200~400명의 여성들이 모여 자신들의 성폭력 경험을 공유하는 시위를 진행 중이다. 항의 행동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3, 4월에 성폭행과 관련해서 전국의 지방법원에서 나온 연이은 무죄판결이었다. 2019년 3월 12일 후쿠오카 법원은 준강간죄로 고발된 남자에게 "남자는 여성이 합의했다고 착각했다"면서 무죄판결을 내렸고, 4월 4일 나고야 법원은 친딸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성적으로 학대한 아버지에게 딸이 "저항하려면 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다. 일본의 여성들은 이 시대착오적 판결에 항의하면서 피해자들에게 다가가는 마음을 담아 꽃을 들거나 꽃무늬 옷을 입고 시위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 시위를 '플라워 시위'로 명명했다. 모임을 기획한 중심인물인 기타하라 미노리(北原みのり)는 작가이자, 사업가로서 일본의 페미니즘 운동을 이끌어 온 인물이다. 그는 한류에 열광하는 여성들의 욕망을 지지하는 사람이자, ‘위안부’ 운동에 개입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일 양국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축적되어 온 ‘위안부’ 운동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한국과의 소통을 어떻게 일본 페미니즘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로 만들 것인가, 앞을 가로막아 서는 벽에 어떻게 균열을 일으킬 것인가, 그리고 여성들 스스로가 어떻게 자신들의 문제를 가시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그녀를 포함한 일본의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계속되는 고민이다. 이 글을 끝맺으려는 참인 2019년 12월 18일 오전, 이토 시오리가 일으킨 소송에 대한 1심 판결이 내려졌다. 피고 야마구치에 대한 330만 엔의 배상 판결과 함께 재판은 그의 행위의 불법성을 명시하였고, 증언의 진정성을 법적으로 인정하였다. 피고에게 한없이 관대했던 그동안의 일본의 성폭력 판결내용을 생각했을 때, 이날의 판결은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토가 시작한 미투 운동은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이 판결이 그가 버텨낸 고통의 시간을 상쇄할 수 없고, 재판 투쟁이 끝이 난 것은 아니지만 성폭력 고발의 정당성을 인정한 이 판결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크다. 이토의 투쟁과 지원 운동이 지금도 자기책임을 따지는 분위기 속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피해자에게 큰 용기를 안겨줄 것이며, 이를 계기로 일본의 미투운동은 서서히 확장될 것이다. 플라워 시위 문화번역의 실천과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 2019년은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 2016)을 비롯한 한국의 페미니즘 문학이 일본에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82년생 김지영』 일본판은 2018년 12월 출간 후 나흘 만에 3쇄를 찍고, 4달 만에 13만 부를 찍는 돌풍을 일으켰다. 2020년 1월 20일 현재도 아마존 재팬 '아시아문학 작품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 뿐 아니다. '아시아문학 작품' 베스트 10 중 7개가 한국의 여성작가들의 작품이 차지하고 있고, 최근 "한국‧페미니즘‧일본"이라는 특집을 꾸민 『文藝』 2019년 가을호는 1933년 창간 이래 86년 만에 이례적인 3쇄를 찍는 기록을 세웠고 결국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친 한국의 여성주의 서사는 지금 일본에서 일부의 매니아층을 넘어 대중성을 획득하는 과정에 있다. 아마존 재팬에 달린 200개 이상의 리뷰에는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 "나도 김지영", "여성의 일상에 있는 무한한 절망", "비통한 감각", "절망 끝의 희망",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는 등 작품에 대한 공감을 열정적이고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부러움과 동경 또한 리뷰에서 읽어낼 수 있다. “일본의 수준은 한국보다 낫다"고 안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반대편에는 침묵을 강요하는 일본 사회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확실히 존재한다. 이들에게 한국의 사회문화적 동력은 하나의 모델을 제공한다. 직접적 정치참여를 통해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는 한국을 선망하는 모습은 그동안 촛불시위를 비롯한 사회운동 과정에서 종종 볼 수 있었는데, 폭발적인 미투운동을 거쳐 ‘김지영’ 신드롬 속에서 더 광범위하게 표출되고 있다. 사이토 미나코(斎藤美奈子)는 '일본에서 균등법, 기본법 제정 등 페미니즘의 제도화가 비교적 빨리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82년생 김지영』에 해당되는 페미니즘 입문서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다나카 미츠(田中美津)나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등 1970-80년대 저작들이 너무 빛 바래버린 현실 속에서,"K페미는 J페미의 '30년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토로하였다.[4] 다만, 한일 간 문화적 참조 관계의 역전을 강조하는 서사는 식민주의와 근대화론의 위계질서를 거꾸로 설정하는 민족주의적 욕망으로 회수될 위험성이 있다. 한국이 압축적 근대를 거쳐 신자유주의 사회의 길을 가면서도 개개인의 욕망이 집합적인 사회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탈식민 분단국가로서의 폭력의 경험과 상실감, 트라우마에 노출되면서 동시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규범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선적인 문화적 소비와 위계화의 욕망을 넘어, 서로 다른 역사성을 교차시키는 문화번역의 실천이 요구된다. 또한 이 과정을 곧바로 한일 여성연대 등으로 정리하는 안일함도 피해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시스젠더 이성애 국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둘러싼 공감은 늘 주류 여성들 간의 지적 교류에 머물고 마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재일조선인 여성 연구자, 활동가들에 의해 촉발되어 온 경험을 마지막으로 다시 상기시키고 싶다. 미투와 ‘위안부’ 문제의 접속,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문화번역의 과정은 지식인들의 담론을 넘어 대중들의 동시대적인 정동과 맞물리면서 진행되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연대의 형태조차 없는 수많은 마주침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키워가는 일이다. 역사를 해결하거나 관계의 균열을 봉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갈등의 역사를 직시하고 더 말하는 과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文藝』 2019년 한국‧페미니즘‧일본” 특집호 표지 각주 ^ https://tomorrowgirlstroop.com/ianfu ^ https://www.facebook.com/opentheblackbox ^ https://www.flowerdemo.org ^ 斎藤美奈子, 「世の中ラボ 【第106回】いま韓国フェミニズム文学が熱い」, webちくま 2019.2.21. http://www.webchikuma.jp/articles/-/1629
-
- 2021년 에세이 [여행에세이]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 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추천코스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 → 경상감영공원 → 대구근대역사관 → 경찰역사박물관 → 북성로→ 서문시장 → 계산성당 → 서상돈 선생의 고택과 시인 이상화의 고택 #대구 근대골목에서 만나는 ‘희움’ 대구시 중구의 <대구 근대골목투어> 5개 코스 중 1코스에는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하 역사관)이 포함되어 있다. ‘대구근대골목’은 2012년 한국관광의 별,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고, 2013년에는 ‘지역문화브랜드대상’을 수상, 2014년에는 대한민국 걷기 좋은 길 등에 선정되었으며 최근 2019년도에도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는 등 많은 방문객과 지역민의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역사관은 1997년부터 대구·경북 지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복지지원사업과 문제해결활동을 전개했던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중심으로 시민들의 온정과 뜻이 모여 세워진 뜻깊은 장소이다. 많은 피해자가 세상을 떠나시게 되자 그들이 겪은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활동하며 평화와 여성인권이 존중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2015년에 개관되었다. 역사관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의 일본식 건물로서 당시의 시대성을 자연스럽게 재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안부’문제의 발생과 건물의 건립이 동시대라는 점에서 정서적 울림을 지니고 있다. 역사관 건축 리모델링 중 도배 속지로 사용된 1927년 신문이 발견됐고 다른 시대를 나타내는 여러 흔적들이 나오기도 했다. 1930년대 중반 지어진 일본식 상가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당시의 원형을 재현하고자 했으며 뒷마당 쪽 부속 건물들은 원형과 관계없다는 판단 아래 철거하고 재증축하여 전시 공간을 확보했다. 대구 중심가에 위치한 역사관 주변은 400여년 영남의 정신적, 지리적 중심지이며 일본 제국주의 자본이 최초로 이식된 곳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5만 명 이상 거주 했으며 현재까지 일본식 상가, 주택 등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어 역사적 공간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어 근대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기도 하다. 역사관이 위치한 곳은 과거 일본인의 생활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서문로에 자리하여 대구, 경북 등 지역 출신의 ‘위안부’ 피해자의 기억과 흔적이 함께 하는 곳이다. 특히 고(故) 문옥주 님의 생전 활동영역과 굉장히 가깝고, 이용수 님의 생가 및 어린 시절의 공간과도 멀지 않으며 당시 많은 피해자가 끌려가신 대구역과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또한 역사관 주위는 조선시대부터 대구지역의 최대 중심가였던 곳으로 인근에 서문약령시장, 서문시장, 경상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역사관 인근에 있는 경상감영은 현재 경상감영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1930년대 식산은행건물은 현재 대구근대역사관이며 맞은편 중부경찰서에는 경찰역사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모두 도보로 이동가능한 아주 가까운 거리이며 대구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근대사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대구 역사관은 과거 행정구역인 대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구읍성의 구역 안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는 그 흔적만 확인할 수 있는 대구읍성은 일본과 기이한 인연이 있다. 이 성벽은 임진왜란 전에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여 만들어졌는데, 1905년경부터 일본인의 거주 및 확장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한 친일파 조선인 박중양과 일본인에 의해 불법 해체됐다. 이를 둘러싼 동성로, 서성로, 북성로 및 남성로는 과거 대구의 희미한 경계이자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거리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1900년대 초 대구 서성로와 남성로에는 지역 유지들이, 동성로와 북성로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다고 한다. 때문에 역사관 인근의 북성로에는 특히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근대 지역경제의 중심이 된 곳으로, 한국 전쟁 후 미군부대가 들어서면서 대신동에 있던 공구상회들이 이 곳으로 옮겨오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수물자를 상인들이 팔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공구골목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장인과 공인의 흔적이 남아있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도 여기에 있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역사의 흔적들에 현대의 젊은 감성을 접목시킨 다양한 문화공간, 카페 등이 생기며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힙’한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역사관의 서쪽에는 과거 교역의 중심인 서문시장과 3.1운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선교사 주택, 계산성당과 제일교회, 성모당이 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 선생의 고택과 저항시인 이상화의 고택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동성로 일대는 현재의 지역명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상업거래와 많은 시민이 모이는 중심지이다. #새로운 세대로 이어져 나갈 ‘역사’를 희망하며 그리고 이곳은 최근 들어 많은 젊은 작가들과 예술가가 찾아와 도시재생을 꿈꾸는 곳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물론 전국 각지의 여행객들 역시 꾸준히 늘고 있다. 모두가 각기 다른 이유를 갖고 ‘대구근대골목’을 방문하겠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이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을 통해 아주 잠시라도 ‘위안부’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고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과거가 과거로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끊임없이 이야기되며, 다음 세대에 의해 새로운 역사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소개] 지상 2층의 일본식 건물로 1층에는 매표소, 희움스토어(굿즈 및 도서 판매), 상설전시관이 있다. 2층 기획전시실에는 현재(2021년 9월 14일 기준) <익숙한 기억, 낯선 기록>이라는 이름의 사료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며, 1930년대 일제강점기 당시 공문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발행한 군표 등 일제강점기의 다양한 사료를 잘 보여준다. 또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와 서강대학교 ‘영원한 증언팀’에서 기획·제작한 <영원한 증언> 체험 베타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이는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관람객이 일본군‘위안부’피해자와 대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역사관은 2021년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시사업(여성가족부 주관)에 선정되어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증언> 전시를 기획 중이며 올해 개최할 예정이다. ‘위안부’피해자의 증언 및 생애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탐구하고 다양한 전시방법(VR 및 미디어)을 통해 시민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역사관은 앞으로도 전쟁과 여성인권, 피해자 중심 문제해결을 위해 사실적 증거와 자료를 발굴·연구하여 객관적으로 문제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이를 통해 역사적 맥락이 우리 개개인의 삶과 맞닿아 있음을 관람객이 인식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기획 중이다.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의 목표 기억, 일제 침략기와 성노예라는 고통스러운 피해자들의 삶을 기억 약속, 피해자들의 상처와 기억을 우리의 역사로 안고, 반드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 기록, 명예와 인권을 되찾기 위한 피해자들의 노력과 함께한 사람들의 운동의 기록 희망, 평화와 인권의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희망 기사 게재일: 2021.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