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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그들의 싸움에서 우리의 ‘문제(question)’를 재발견하기: 학술 콜로키움 〈증언 이후〉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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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의 없는 “정의의 집”과 진실 없는 역사 전쟁 지난 4월 28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학술 콜로키움 <증언 이후: 일본군'위안부' 피해 재현의 윤리와 폭력>을 개최하였다. 이번 콜로키움 말미에 발표자 중 한 명인 김수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대리 전장으로서의 한국 역사와 일본군‘위안부’”라는 말로 현재 일본군‘위안부’ 사회·인권·학술 운동이 맞닥뜨린 전쟁 같은 상황을 요약했다. 조금의 부족함도 지나침도 없는 표현이다. 주지하다시피 한일 양국의 내셔널리즘 그리고 국내외 정치와 국제 외교적 셈법의 격랑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두고 충돌할 때마다 그간 쌓아온 운동의 노력과 성취는 침식당할 수밖에 없었다. 근래의 사건들로는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이른바 ‘정의연 사태’ 그리고 이번 콜로키움에서도 화두에 오른 ‘램지어 사태’에서 그 파장은 여실히 드러났다. 특히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증언과 투쟁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던 지난 30여 년의 경이로운 운동의 도정이 진상 규명과 사과, 화해 없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라는 막다른 길로 순식간에 뒤바뀌거나, 그녀들의 목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복화술에 의한 것인 양 그녀들의 운동 주체성과 진정성을 박탈하는 일들이 공공연히 벌어졌다. 이러한 형국 속에서 문득 60여 년 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날카롭게 스케치했던 정의 없는 “정의의 집(배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풍경이 떠올랐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서두에서 이른바 유대인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의 핵심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심판하기 위해 열린 예루살렘 재판이 ‘정의’를 다시 세운다는 명목하에 마치 한 편의 ‘쇼’처럼 수행되고 있는 양상을 꿰뚫어 보았다. 이 재판 이면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민족주의적(종족주의적) 이분법에 기초해 이제 막 건국된 이스라엘 국가의 정체성을 수립하려는 시온주의적 욕망과 이 재판으로 인해 다시 거세어질지 모를 국제적인 반독일 정서에 대한 서독의 우려가 함께 요동치면서 정작 ‘정의’라는 본질이 희미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유대인들의 분노와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20세기 인류 역사의 전체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인간의 폭력성과 비이성적 광기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집합체인 아우슈비츠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아렌트의 교훈은 지금의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맞닥뜨린 ‘진실 없는 역사 전쟁’, 그러니까 진실을 내세우지만 진실에는 관심 없는 지극히 정치적인 이 역사 전쟁의 상황에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그들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무용한 싸움으로부터 재발견이 요청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령 이번 콜로키움 라운드테이블에서 논의했던 “우리가 아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모르고 있는가”와 같은 문제―를 설정하고 성찰함으로써 운동의 패러다임을 갱신해 나가는 쓸모 있는 지혜를 발휘할 때인 것이다. 콜로키움 1부 발표 중 「증언과 증언 ‘사이’를 청취하기: 증언의 사회적 의미 획득/부과 방식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사를 다시 돌아보며 다양한 주체들의 초국적 연대가 갖는 역동성을 재발견하려 했던 하나의 시도, 2부 발표자 에밀리 정민 윤(Emily Jungmin Yoon)의 일본군‘위안부’ 증언에 대한 ‘찾은 시(found poem)’와 같은 또 하나의 시도 그리고 한국에서의 ‘위안부’ 전시가 부딪히는 비장소성과 고도의 정치적 대립을 동시에 넘어서기 위한 역사박물관의 도전적인 시도. 이런 시도들이 모이고 축적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들의 싸움에서 우리의 문제를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2. ‘위안부’ 증언과 재현 근저의 ‘본질주의’ 문제 “일본군‘위안부’ 피해 재현의 윤리와 폭력”이라는 콜로키움의 주제가 시사하듯, 흔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경험이라고 표현되곤 하는 ‘위안부’ 피해에 대한 재현은 종종 언어를 초과하거나 언어로는 유실되고 마는 경험을 언어로 정확하게 재현하는 일이 가능한가, 언어로 간명하게 재현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옳은가, 폭력적이지는 않은가 하는 등의 문제를 던진다. 이러한 문제의 근저에는 재현(representation)으로는 동일하게 재현전(re-present)할 수 없는 대상의 본질이 내재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증언에 법적 증거의 권위를 부여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그러한 본질주의가 작용한다. 이지은의 발표에서 언급되었던 ‘위안부’ 피해 당사자의 삶과 경험이 ‘살아있는 증거’이자 ‘증거로서의 증언’으로 인식되는 경향은 ‘진상’ 규명이라는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목적과 연관성을 지닌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실’ 또는 ‘본질’은 그 경험의 주체인 당사자에 의해서 드러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달리 말하면, 재현이라는 2차 과정을 거치지 않아야 한다―는 관념이 일본군‘위안부’ 문제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지은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이른바 사회적인 시선의 2차 가해를 감수하는 커밍아웃을 통해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촉발시킬 수밖에 없었던 딜레마에 대해서도 지적하는데, 이 딜레마 역시 ‘위안부’ 증언과 재현의 본질주의가 낳는 모순이다. 다른 한편으로 본질주의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삶이 ‘위안부’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일정하게 규정된 전형적인 피해자상(피해자의 표상: representation)과 일치하지 않을 시, 오히려 그 당사자의 존재와 증언이 부정되는 모순 또한 야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지은의 논의는 당사자의 삶과 경험을 ‘살아있는 증거’로 인식할 때 피해자 생애 전체에 ‘위안부’로서의 삶의 진실성을 강요하는 폭력이 가해질 수 있음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한편 「귀 기울인 응시를 위하여―현대사박물관에서 ‘위안부’ 문제 재현하기」는 ‘위안부’ 재현의 한 방식인 전시가 맞닥뜨리는 비장소성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위안소 유적지가 남아있지 않은 현대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의 ‘위안부’ 전시는 ‘실제 사건이 일어났던 동일한 장소 또는 바로 그 현장에 서 있는 체험’을 관람객에게 제공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역사박물관의 해법은 피해 생존자들이 스스로를 ‘살아있는 증거’로 주장해 왔다는 점에서 현장성의 부재를 그녀들의 육성과 육체성으로 돌파하려는 것이었다. 김수진 학예연구관은 피해 생존자의 납판 초상과 증언하는 육성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하여 관람객이 그녀들의 존재와 이야기 그 자체에 몰입하게 만드는 재현 전략을 구사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육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의 재현은 피해 생존자들에 대한 실감이 마치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인식에 앞서 주어지는 듯한 효과를 낳을 수 있다. 토론자인 이나라는 피해 생존자의 “육체성과 현존성”을 경험하는 일이 피해 생존자들이 겪은 재난에 대한 역사 속 “침묵과 부재의 흔적을 지우는 일과 같지 않”다고 지적한다. ‘살아있는 증거’로서 피해 생존자들의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위안부’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종종 램지어 사태와 같은 역사 수정주의의 반격에 위태로워지는 현실은 현전에 대한 재현의 본질주의적 환상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함을 역설한다. 오늘날 이 세계에서 존재에 대한 진실의 문제는 단순하게 그 존재의 ‘본질’로 수렴되는 것도, 그것으로써 획득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알거니와 식민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남성중심주의의 역사와 정치·사회 제도, 권력 구조와 법체계가 복잡하게 얽힌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전성에 대한 환상은 강력하여 다른 한편으로 영상 자료의 권위로써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증명하려는 경향으로 지속되고 있기도 하다. 3부 기조 발제 「공공 기억에서 시각적 자료 활용의 성별성」에서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조선인 ‘위안부’ 추정 여성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 자료가 미디어를 통해 대중적으로 유통되면서 마치 그러한 영상 자료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사실 또는 진실을 판정하는 권위를 지닌 듯한 인식이 나타나고 있는 경향을 짚는다. 여기에 비단 영상 매체의 기술이 담보하는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세계의 ‘경찰 국가’인 미국 정부가 보관한 자료는 객관성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권위에 대한 신뢰가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전쟁 ‘성범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발제자인 김한상이 지적했듯, 영상 매체를 통해 ‘위안부’의 성폭력 피해가 스펙터클로 소비될 수 있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일본군‘위안부’ 증언과 재현의 본질주의에 내장된 윤리적인 문제가 쟁점화된다. 3부 기조 발제 이후 전체 토론에서 명확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았던 것처럼, 사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거슬러 올라간다면 존재론과 인식론의 근본 체계까지 검토해야 할 거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깔린 본질주의를 타파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식의 당위론으로 아무런 구체적인 실천 방법도 이론적 해법도 없이 말하는 것은 이번 콜로키움의 결론도, 이 글의 주장도 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이 문제를 다양한 사안들 속에서 발견하며 인식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본질주의적인 환원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문제를 재구성하는 일의 중요성을 확인한 것은 중요한 의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학술 연구와 운동의 방식은 ‘합의’나 ‘화해’처럼 명확한 매듭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매듭이 잘못 매듭지어져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파국을 맞이하지 않도록 문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칼에 끊어야 하는 상황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문제의 가닥을 고르고 얽힌 쟁점들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3. 증언을 연장하고 운동을 확장하는 일 “Why don’t you guys just get along? The guys: Japan and Korea. Meaning: move on” 이번 콜로키움에 참석했던 시인 에밀리 정민 윤의 시집 『A Cruelty Special to Our Species』의 권두 시편 ‘An Ordinary Misfortune’에 실린 어느 캐나다인 친구의 질문이다. 이 순진함을 가장한 폭력적인 질문의 구도, 즉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마치 한일 양국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지나간 과거를 둘러싸고 반복되는 무의미한 싸움의 전장처럼 단순하고 납작하게 인식되는 구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언제나 있어 왔고, 또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포스트콜로니얼, 포스트모던, 트랜스내셔널 시대의 역사학, 사회학, 문학, 정치학 그리고 인권과 평화, 페미니즘 운동을 교차하는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는 점은 그러한 노력을 더욱 강력하게 요청하는 요인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납작하게 만드는 그들의 싸움으로부터 우리의 문제를 재발견하는 실천으로 증언의 연장과 운동의 확장이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연장과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정치·사회·문화적 실천은 결국 이번 콜로키움의 논의를 통해 그 문제성을 재확인한 재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광활한 침묵의 문학사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서사 아카이빙을 수행한 장수희의 작업이나 세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위안부’의 증언들을 ‘찾은 시’의 시적 발화로 재구성한 에밀리 정민 윤의 작업은, 난제로서의 일본군‘위안부’ 증언과 재현에 도전하는 시도이자, 앞으로 올 그러한 시도들에 중요한 참조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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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오키나와 사람들과 '위안부' - 기억을 공간화하며 '위안부'의 삶을 증언하는 사람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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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혼, 그리고 오키나와 "할머니의 집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고국(故國)에 대해서 할머니는 그리 기쁜 추억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이라고 고국보다 나은 추억이 있을까. 나는 또 문득 전후(戰後)에 유령이 되어 떠돌았다는 소문의 '하루에'를 떠올렸고 그의 유골을 고국의 '망향의 동산'에서라도 쉬게 해줄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 1981년 9월3일자 한국일보, 끌려간 사람들 <8> 韓‧日歴史(한‧일 역사)의 彼岸(피안)을 캐는 現地調査(현지조사) - 寃魂(원혼)되어 떠돈다는 挺身隊(정신대)유골 「望郷(망향)의 동산」에 묻어 줄 수 있을지… 윤정옥은 최초의 '위안부' 연구자이다. 위 기사에서 윤정옥이 말하는 할머니는 전후에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일본 오키나와에 남은 배봉기이다. 배봉기는 김학순의 증언이 있기 16년 전 오키나와에서 존재가 확인된 '위안부'피해자였다. 1975년 당시 일본에서 배봉기의 이야기는 실명이 아닌 A씨로 보도되었다. 배봉기는 왜 A라는 이니셜로 자신의 과거를 말해야 했을까?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지상전이 벌어졌던 오키나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27년간 미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미국의 통치 하에 있던 오키나와는 1972년이 되어서야 일본 행정구역 안으로 편입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5년, 오키나와에서는 전쟁 때 강제로 끌려왔다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어려운 삶을 이어왔던 조선인 여성 한 명이 불법체류자로 추방된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바로 배봉기의 이야기였다. 배봉기는 불법체류자로 추방되는 것을 피하고자 익명으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배봉기를 위한 청원 활동과 신분 보증 등의 협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 결과 배봉기는 예외적으로 체류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1980년, 윤정옥은 일본의 입국관리소가 '위안부'였던 여성 A씨에게 특별히 체류허가서를 내주었다는 기사가 실린 1975년 10월 22일자 석간 『류큐신보』를 손에 쥐고 오키나와에 방문했다. 당시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활동을 해온 재일조선인 김수섭, 김현옥이 배봉기를 보살피고 있었다. 당시는 분단의 아픔을 그대로 이어간 군사독재 시절이었기 때문에 조총련의 도움을 받는 일본의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간 윤정옥은 정부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정부의 감시를 받았던 경험 때문일까. 윤정옥은 1990년에 설립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기억연대, 이하 정대협)를 운영할 때, 정부가 주는 보조금을 거부하고 독립적으로 기관을 운영하며 재정적 어려움을 감수하였다. 한편, 일본 사회는 오키나와에서 들려온 배봉기의 이야기를 일본 사회 내의 첫 번째 '위안부' 증언으로 여론화하지 못한 채 김학순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정옥은 배봉기 등을 취재한 기록을 정리해 1990년 한겨레 신문에 4차례에 걸쳐 글을 연재했다. 이를 통해 배봉기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배봉기처럼 오키나와에 끌려와 본명을 찾지 못한 채 죽어간 '하루에' 같은 여성들의 이야기도 전해졌다. 이후 '위안부' 문제 진상규명을 위한 증언 조사의 시작과 함께 추모비 건립이 추진되었다. '위안부' 문제 가시화 초기에 한국 국회가 주목한 것은 생존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죽은 자들이었다는 점도 상기해야 하리라. 1991년 10월 24일, 대한민국 국회의사록에서 처음으로 '위안부'(당시에는 정신대라고 호칭함) 문제가 <정신대문제대책에 관한 청원의견지시의 건>이라는 문건으로 공식 등장했다. 독립기념관에 정신대 희생자위령비를 건립하는 안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애국선열의 시비나 어록에 한하여 건립부지를 허가해 왔던 독립기념관은, 정신대 위령비 건립에 대해서는 부지의 포화 상태를 이유로 불허했다. 이에 대해 문화공보위원회는 추후 일제강점기 희생자 비석을 세울 때 정신대 문제가 포함되어야 된다는 청원의견을 의결했다. 이것이 '위안부' 문제에 관한 대한민국 국회의 첫 번째 기록이다. 죽은 자와 산 자, 진상규명과 추모 공간, 연구와 운동 등 모든 것이 맞물리며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어떻게 '위안부' 문제와 만났고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것일까? 이 글은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첫 번째 '위안부'로 기억하지 못했던 배봉기를 기억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1975년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로의 '복귀 불안'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당시 전쟁 책임의 문제로 배봉기를 기억했던 오키나와 사람들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전하려 했는가를 기록하고자 한다. 1992년, '위안소' 지도를 만들다 윤정옥이 1981년 한국일보 기사를 통해 배봉기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지 10년이 지난 1991년에야 한국 사회는 첫 번째 증언자를 만났다. 자신의 실명을 밝히고 피해사실을 증언한 김학순이다. 배봉기는 김학순의 증언이 있던 그해 10월에 숨을 거두었다. 두 피해 여성은 서로 만날 수 없었으나, 정대협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안부도 주고받았다. 배봉기는 긴 삶의 여정 끝에 자신과 같은 체험을 증언으로 승화시킨 용기있는 여성들을 볼 수 있었다. 1991년 12월, 김학순을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 3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첫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일본 내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은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법적 배상과 공식사죄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오키나와에서는 김학순의 등장이 전혀 다른 방식의 운동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2년 오키나와 여성사 연구그룹은 획기적인 지도를 발표한다.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20주년을 되돌아보는 심포지엄에서 오키나와전 당시 오키나와에 설치된 121개의 '위안소'[1] 위치를 표기한 지도를 발표한 것이다. 그림1. 오키나와에 설치된 121개의 ‘위안소’ 위치를 표기한 지도.jpeg 이들이 김학순의 증언 후 불과 1년여 만에 121개의 '위안소'(현재146개소)위치를 지도[2]에 표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키나와 전장의 기억을 다룬 증언집들이 일본 본토로 복귀한다는 정치적 '불안감'이 증폭된 7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발간되어왔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현사 제9권 오키나와전 기록1』(1971년),『오키나와 현사 제10권 오키나와 전 기록2』 등은 주민의 관점에서 오키나와전을 기록한 것이다. 이 책들 속에서 '위안부'에 관한 기억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1992년에 이은 후속 조사에 의해1994년에는 약 130곳의 '위안소'가 지도에 표기되었다. 또 다카자토 스즈요, 고가 노리코, 홍윤신 등이 이어간 증언 조사와 연구를 통해 2020년 현재에는 총 146곳의 '위안소'가 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왜 지도였을까? 1992년 당시 지도 작성 및 증언 조사의 중심 멤버였던 가카즈 가츠코는 김학순의 증언 직후 숨을 거둔 배봉기에 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기억이 이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배봉기의 존재를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오키나와 여성들을 움직였다는 것이다.[3] 한국과 일본 내 '위안부' 문제 운동 전개 방식이 피해 당사자의 증언을 동력으로 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오키나와 여성들은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를 목격한 주변부의 기억들을 운동의 중심에 두었다. 그들은 여전히 오키나와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 모를, 제2의 배봉기들의 삶이 침해받을 가능성을 염려했다. 좁은 섬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내는 것이 오히려 피해자들의 평온한 삶을 위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문제의식이 이들 사이에서 생겨났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피해 당사자가 아닌 피해 목격자의 증언을 찾고, 폭력의 장소였던 '위안소'를 전쟁책임의 소재로 표기하는 새로운 운동으로 이어졌다. 지도 위의 점들은 전쟁책임의 소재를 목격한 표식이기도 했다. 그 표식 안에 전쟁 당시 침묵했던 자신들의 가해성에 대한 문제의식 또한 녹아 있다. 1992년 이후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본제국에 의한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조선인에 관해서는 가해자라는 문제의식을 구체화했다. 오키나와 '위안소' 지도는 '위안부'를 기억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기억의 공간화'로 이뤄낸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 속의 기억을 그림과 향토사로 그려내는 사람들 그렇다면 1992년 당시 오키나와 여성사 연구그룹이 '위안소' 지도를 그릴 수 있도록 한 오키나와 주민의 증언은 어떤 것이었을까? 중요한 것은 오키나와 여성사 연구그룹이 '위안부'나 '위안소'를 본 적이 있는지,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지만을 질문하고 듣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목격 증언을 통해 자신들이 겪은 전쟁 체험을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본 풍경,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배경이었던 마을과 학교, 산 등이 어떻게 일본군의 진지로 변했는지, 그리고 자신은 또 어떻게 총력전에 동원되어 어떤 폭력을 경험했는지를 증언했다. 그 가운데 '위안소'에 관해서도 설명하게 되었다. 이때 전혀 의도치 않은 지점에서 '위안소'의 위치를 특정한 사례가 나타나기도 했다. 오키나와 요미탄촌에서는 주민들에게 자신이 태어난 집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고, 당시 함께 살던 사람들의 상황을 설명해 전쟁피해를 드러내도록 했다. 이 작업을 할 때 일본군이 집을 빼앗아 '위안소'로 삼아버려 살 곳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의 집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요미탄촌의 각 마을 전시 상황도 및 집 이름 등의 일람표(読谷山村の各字戦時概況図及び屋号等一覧表)』(요미탄촌사편찬위원회, 2002년)는 일본군이 비행장 근처의 마을이나 산악지대에 숙소를 짓고 주민들이 살고 있던 민가를 접수해 '위안소'를 설치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다수의 민가가 군대에 의해 조직적으로 '위안소'로 접수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위안소'라는 공간이 주민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지 가늠하게 한다. 일본군에게 집을 빼앗긴 주민들은 자신들의 전쟁 체험을 증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전시하 감금 상태에 있었던 여성들의 삶도 증언하게 된 것이다. 그림으로 남아있는 '위안소'도 있다. 요미탄촌 기나 마을의 『기나 향토사(喜名誌)』의 편집위원 미야하라 료슈(1924년생)는 자신의 전쟁체험과 함께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여러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그 안에는 '위안소'로 사용된 '오키쿠'라는 빨간 기와집을 그린 그림[4]이 있다. 미야하라는 자신의 그림 위에 다음과 같이 썼다. "특공병사(特攻兵)의 숙박소 기나 마에바루의 사탕수수밭 근처에는 요리점 풍의 빨간 기와집이 있었습니다. '오키쿠'라고 불린 이 집은 항공병의 숙소였습니다. 내일의 목숨이란 게 없는 항공병들이 부르는 구슬픈 군가가 매일 밤 흘러나왔습니다." 그림2. 미야하라 로슈가 그린 빨간 기와집 그림.jpg 미야하라가 그린 빨간 기와집 오키쿠는 마을에서 떨어진 밭 한가운데에 있었다. 민가의 목재까지 징발해 멋지게 지은 요리점 풍의 오키쿠는 미군의 표적이 됐고, 지은지 2개월 후인 1944년 10월 10일 미군의 나하 공습으로 흔적 없이 불에 타버렸다. 오키나와에서는 민가가 '위안소'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는데, 전쟁 중에 '위안소'로 사용된 시설과 성병 검사로 쓰인 병원 등은 미군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미야하라의 그림은 이후 『요미탄 촌사 제5권(자료편4)─전시기록(상권)』(2002년)의 <여성들의 오키나와전 체험> 편에 요미탄촌 전체의 '위안소'와 함께 소개되었다. 오키나와전 생존자가 자신의 전쟁체험을 전쟁 후에 향토사(喜名誌, local history) 편집위원이 되어 기록으로 남겼고, 그것이 또 작은 마을이 속한 지역 단위의 오키나와전 상황을 보여주는 편찬 기록에 반영되었다. 이는 주민의 시점으로 오키나와전 전체 상황이 기술된 사례이다. 전후에 미군의 군사시설이 들어와 완전히 사라진 마을도 있다. 『고완마을 향토사 -오키나와전 미점령하의 잃어버린 부락의 복원 (小湾字誌─沖縄戦・米占領下で失われた集落の復元)』(1995년)은 현재 미군 군사시설의 설립으로 사라져 버린 고완이라는 마을의 전쟁 전 모습을 그림으로 복원해 놓았다. 1989년 호세(法政)대학 오키나와 문화 연구소와 고완마을 향토사 조사위원회, 우라소에시 고완 마을 향토사 편집 위원회는 공동으로 대대적인 증언 조사를 시행했다. 증언을 통한 데이터 수집과 복원에 참여한 사람들만 1500명이었고, 800명 이상의 주민 증언에 의해 당시의 집, 마을 풍경, 성지, 공동시설, 담의 위치, 정원의 풍경 등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 그림으로 복원되었다. 그 안에는 '위안소'에 관한 기억도 존재한다. 그림3. 그림으로 복원된 고완마을.jpeg 그림으로 복원된 고완마을[5]을 보면 해안가에 궁(宮)이라고 표시된 류큐 왕족의 아름다운 별장(빨간색 점선 원)이 있었고, 이 별장이 '위안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키나와의 전통문화와 관계된 장소가 군사시설의 하나인 '위안소'로 이용됨으로써 파괴된 것이다. 오나하(小那覇)라는 마을에서는 지도[6]에 일가족이 모두 사망한 집에 검은 점(●)을 그려 넣었다. 오나하 마을은 일본군이 설치한 비행장 옆에 있었는데, 이 마을의 검은 점이 표기된 집들 사이에도 위안소가 있었다. 그림4. 위안소가 표기된 오나하 마을 지도.jpeg 오키나와 주민들의 '위안부'에 관한 기억은 '위안소'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자하 리츠코(1932년생)는 전쟁 고아였다. 그녀는 오키나와 북부에 설치된 미군의 민간인 포로수용소(수용지구)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와 함께 생활했다고 증언했다. 자하리츠코는 당시 미군이 '위안부'들만 따로 모아 민간인 수용소 안의 고아원에서 자신과 같은 전쟁고아들을 돌보게 했다고 한다.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은 아기들은 영양실조에 걸려있었고, 밤새 서럽게 울다 다음날이면 싸늘하게 죽어갔다. '위안부'들은 이 어린 주검들을 나무 상자에 담아 묻어 주었다고 한다. 수용소 안의 고아원이던 집에는 지금도 주민이 살고 있다.[7] 이처럼 전쟁으로 인해 오키나와 주민들이 빼앗겼던 일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군사폭력과 전쟁의 아픔으로 '위안소'와 '위안부'는 실체화되었다. 주민들은 총력전 하에서 군에게 노동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집도 '위안소'로 빼앗기는 상황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위안소'와 '위안부'들을 목격했고 그 폭력의 현장들을 자신의 체험으로 기록하고 있다. '위안소'와 '위안부'를 본 오키나와 주민들의 기억은 현재 눈 앞에 보이는 군사기지와, 보이지 않는 과거의 군사기지라는 장소성을 매개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 ^ 이 글에서의 위안소는 일본 군부, 군인과 군속, ‘위안부’, 오키나와 주민 등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이 겹쳐지고 지속되는 장소를 의미하기에 따옴표 처리를 하였다. ^ 출처 : 전국여성사연구회교류 모임 실행위원회, 『제5회전국여성사연구회 교류 모임 보고집 (第5回全国女性史研究会交流のつどい報告集)』, 보고집편집위원회 편, 1994년. ^ 2003년 10월 9일, 나하(那覇, 필자와의 인터뷰) ^ 출처 : 홍윤신 『오키나와전의 기억과 위안소(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인팍토 출판회, 2015년, 164쪽 ^ 출처 :『고완마을 향토사-오키나와전 미점령하의 잃어버린 부락의 복원 (小湾字誌─沖縄戦・米占領下で失われた集落の復元)』,호세대학 오키나와 문화연구소, 고완마을 향토사 조사위원회, 우라소에시 고완마을 향토사 편찬위원회, 1993년, 43쪽 ^ 출처 : 홍윤신 『오키나와전의 기억과 위안소(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 인팍토 출판회, 2015년, 249쪽. ^ 2007년 10월 6일, 오키나와 나고시(名護市, 필자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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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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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방향 2부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1부 :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2부 :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3부 :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좌담회 일자 : 2019년 6월 5일 사회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패널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 조양현 (외교안보연구소) /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본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의 입장은 각 소속 기관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2015년 12.28 한일 합의의 배경과 쟁점 Q. 박근혜 정부 때 맺었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12.28 합의)는 당시에도 많은 문제점을 지적받았습니다. 특히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인했다는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12.28 합의는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게 된 걸까요? 조양현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이 나온 이후, 이명박 정부는 일본 정부에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성의 있는 대응을 요구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노다 정부, 민주당 집권의 마지막 정부였어요. 비교적 리버럴한 정부였기 때문에 기대를 걸었지만,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부의 입장은 생각보다 더 완고했어요.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2012년은 특사파견, 사사에 안(案), 3점 세트와 같은 이야기들이 나올 때인데, 그게 봄에 다 파탄이 났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 해 여름에 독도를 가지요.* 그러다 보니까 한일관계는 경색되고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끝이 납니다. *편집자 주 2012년 이명박 정부의 독도 방문: 2012년 8월 10일, 광복절을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독도를 공식적으로 방문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상당한 불쾌감을 내보였으며, 당시 한-일 관계 악화의 계기가 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관련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이 문제가 한일관계에서 중요한 현안이라는 입장을 취했어요. 그래서 일본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정상회담도 쉽지 않은 상황이 계속 이어지지요. 아베 그리고 박근혜 정부 둘 다 보수적인 입장에서 과거사에 대해 양보하지 않으려는 구도가 지속됩니다. 그러다가 2014년 5월에 헤이그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리는데, 그때 오바마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아베 총리가 미대사관 공관에서 만납니다. 한국에서는 박근혜, 오바마, 아베의 삼자회동이 핵안보정상회의보다 오히려 더 크게 보도가 되었죠. 그러면서 우리가 그 당시 요구했던 외교부 국장급 회의도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국장급 회의를 10여 회 하고 결과적으로 2015년,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해의 12월 28일, 서울에서 양국의 외교장관이 합의를 발표하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12.28 한일 합의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완전히 해결되었는가. 일본이 우리가 요구했던 법적 책임, 사과, 배상 내지는 보상을 이행했다면 법적으로 해결이 되었겠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정치적인 해결이었고, 정권이 이룬 합의일 뿐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두 번째, 한국과 일본, 양국의 의사로 합의한 것인가. 이 부분은 굉장히 민감한 부분입니다.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중재를 했다는 것은 마치 50년 전 국교정상화 교섭 당시 미국의 역할을 방불케합니다. 한국과 일본 두 국가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해서 양국이 조금씩 양보한 애매한 결과가 나온 거죠. 한국의 승리도, 일본의 승리도 아니기 때문에, 양쪽 모두 편의대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합의가 된 거죠. 세 번째는 구속력이 있느냐 입니다. 협정이 아닌 합의문을 발표했다는 데서 드러나듯이, 다음 정부에서 정치적 입장 승계를 거부할 수 있는 특성을 가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기정 2012년도 노다 정부 말기에 나왔던 사사에 안(案)이 있었죠. 일본의 내각 총리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편지로 사과를 하고, 주한일본대사가 직접 사과, 그리고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인도적 조치의 자금 지원을 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상당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국의 입장은 일본 정부가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국가의 법적 책임에 추가적으로 요구하는 ‘ 사사에 안(案)+α’를 내놓았지만, 일본 정부는 역으로 ‘ 사사에 안-α’를 주장했어요. 결국 당시에는 유예되었고, 정권 교체가 되면서 일본 안에서도 동력을 잃으며 유야무야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이 사사에 안(案)이 기초가 된 12.28 합의에서는 ‘도의적’이라는 수식어가 빠지면서,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이 조금 더 명확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나이브하게 보자면 시민운동하는 사람들이 요구해온 3점 세트, 즉 ‘책임 인정, 사죄, 예산상의 조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던 것 같아요. 물론, 이것을 실질적인 배상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일본 정부의 책임인정과 이에 따른 예산 조치’가 이루어진 부분에서는 예전보다 진일보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게다가 사사에 안(案)은 일본의 민주당이었던 노다 정부가 가져온 제안이었지만, 2015년의 12.28 합의는 역사수정주의를 공공연하게 천명했던 아베 정부를 상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합의 후반부 내용입니다. 즉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문구가 포함되고, 소녀상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더 이상 국제무대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일본을 비난, 비판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이 거세어져서 합의가 결국 엎어진 거죠.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Q. 말씀하신 대로 12.28 합의는 국내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시민단체 측에서 이 합의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세 분이 생각하시기에 이 합의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시나요. 남기정 양국의 외교장관이 공개적으로 발표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국민과 국가를 구속하는 것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우리의 평가와 관계 없이 UN에서는 일단 합의를 환영하는 멘트가 나왔고요. 그런 사정이 있기 때문에 당시 정부도 파기나 재협상을 요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합의라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합의의 재해석 등을 통해 제3의 해법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편집자 주 문재인 정부의 12.28 ‘위안부' 합의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은 2015년 한일 양국 정부간 ‘위안부’ 협상에 절차적, 내용적으로 중대한 흠결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는 점에 유감을 표하며, 피해자 중심 해결 원칙 아래 후속조치를 마련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 다음 달인 2018년 1월 9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2015년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문제해결이 될 수 없다”며 “2015년 합의가 양국 간 공식합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음을 감안해 일본 정부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시현 여기에 관해선 할 말이 많아요. 글도 많이 있고요. 그동안 안 했던 이야기를 조금 하면요, 해방 이후 지금까지 피해자들의 권리 주장 요구가 양국 정부에 의해서 어떻게 다뤄져왔냐는 거예요. 이게 이 문제의 역사성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면서 현재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이 패전하자 해외의 전쟁터에서 군인, 군속, 노무자, 또 ‘위안부’ 피해자들이 귀환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조선인연맹을 설립해서 귀환 활동과 생활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합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 단체들이 권익옹호활동을 한다는 게 실효적이진 않았을 거예요. 일본의 경우에는 조선인연맹 등 귀환자 단체들이 미군정 당국과 교섭을 한 흔적이 있고, 임금 등 미수금 문제, 가혹행위 등의 부분에 대해 책임을 요구했습니다. 이분들이 귀환해서도 미군정 당국, 그리고 이승만 정부를 상대로 계속 권리주장을 해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1949년 이후에 정부가 해결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되었고, 1951년 대일평화조약 체결 후 정식으로 시작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회담을 거쳐 1965년 협정 타결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피해자들은 사실 ‘노무자’이고, 프롤레타리아예요. 가진 것 없는 하층 계급이었기 때문에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피해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배제되는 과정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그들의 권리가 억압되었다고 하는 것이 저의 가설입니다. 입증을 해야겠죠.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서도 이런 긴 흐름 속에서 해방 이후 일본, 또는 한국 정부가 어떻게 대일 과거사 피해자 문제를 다뤄왔는지가 연결되는데요. 1965년 당시 우리는 독재 정부하에 있었습니다. 한일협정 체결 반대운동이 격심했으나 결국 관철되었어요. 그런데 남은 문제들 중에서 유골 문제가 1965년 이후에 한일 사이에서 협의가 돼요. 이건 뭐냐, 협정으로 다 끝난 게 아니지 않느냐는 거죠. 일본 입장에서는 청구권협정 바깥, 즉 법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도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접근한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정책의 기본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80년대 후반 노태우 방일을 계기로 원폭피해문제가 제기되고 이에 대해 일본 정부의 약간의 지원이 있었는데, 역시 근거는 인도적인 것이었습니다. 90년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민기금 역시 법적 해결이 아니라 청구권 협정과 무관한 인도적 차원이라고 저는 바라보는데,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특히 도덕적 책임론을 강변합니다. 법적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이 다 끝났지만 우리는 그 외에 추가적으로 국민기금을 통해 도덕적인 책임을 다 했다는 것이 일본의 기본적인 입장이자 선전 내용이기도 한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위안부’ 합의를 바라본다면 거기에는 법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안 들어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위안부’에 대한 행위가 무엇이었는지 법적 성격도 묻지 않았고요.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법적인 책임을 아주 탈색시켰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2015년 12.28 합의는 공식적인 합의문이 없는 가운데 양국 외교장관들의 발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양국정상이 전화통화를 통해서 그 내용을 추인하는 형식이었죠. 전부 다 구두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구두합의인 셈입니다. 물론 정부 간, 또는 국가 간에 구두합의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국제조약으로 바라볼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법적인 합의, 즉 조약이라는 것은 국제법상의 합의이기 때문에 법적인 내용이 들어가야 되는데, 그런 것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한국에서는 합의가 되자마자 논란이 제기되었고, 정치권에서는 국회비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시민사회단체에서는 합의가 법적 조약이 아닌, 정치적 합의이기 때문에 법적인 구속력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합의에 대한 국제반응 역시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초기 반기문 사무총장과 미국 정부의 환영 멘트를 포함한 국제반응과는 달리, 이후 합의의 문제점이 UN의 각종 인권보장기구에서 제기됩니다. 피해자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합의가 부족하다는 지적들이 나왔죠. 개정하라는 권고도 있고요. 남기정 저는 그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이해해요. 그러나 우리 운동단체가 합의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인용하는 UN 산하 인권기구들에서의 문제제기나 권고도,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를 실현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합의’의 개정을 권고하는 등 일단 합의가 성립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개정을 하라는 것이지 합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돼요. 합의가 피해자 인권과 충돌한다는 문제제기를 인정하지만, 합의 그 자체는 있다고 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인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조시현 구속력과 관련해서 말씀드리면, 조약이 아니면 국가를 구속하지 않기 때문에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조약이라고 하더라도 뭐 바꿀 수 있는 거예요. 한번 맺은 조약은 영원불멸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처럼 일본 정부의 과도한 발언들이 보도가 되고 있는데, 조약은 바뀝니다. 역사 상황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고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식 조약의 과정을 밟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핵심적인 것은 청구권 협정과의 관계예요. 이것이 조약이 되어버리면 청구권 협정을 수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는 일본 정부의 기본 방침과 모순이 되는 거예요. 청구권협정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조약의 형태로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 정부로서는 ‘한일 합의가 조약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조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일본도 부정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법적 효력은 없는 것이 되고요. 만약에 법적 효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게 장관 간의 합의, 즉 정부 간의 합의인지 또 대통령과 내각총리대신 사이의 합의, 국가 원수 간의 합의인지도 불분명해요. 이것을 국가 간의 합의가 아니고 정부 간의 합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시 박근혜정부, 아베 정부에게는 구속력이 있을 수 있겠죠. 정치적인 합의의 성격이라는 것은 합의한 정부의 운명에 따라서 좌우될 수 있다는 겁니다. ‘위안부’에 대한 정책은 역대 정부에 따라 쭉 바뀌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정책을 형성할 수 있고, 이를 수정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양현 약속과 정의라고 할까요, 한 번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한다는 가치가 있는 반면, 정의의 차원에서는 바른 방향을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가 있을 것 같아요.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가치 체계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일본이 한국에 붙이는 ‘약속한 것을 바꾸는 나라,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낙인에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논리는 무엇일까요. 그 당시의 절차적인 부적절성을 지적하는 겁니다. 국민 정서, 피해자들의 이해관계가 고려되지 않은 담합이었다는 거죠. 탄핵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이 부분에 대해 국민의 관심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국민의 관심은 정의가 과연 실현되는가이고, 이는 문재인 정부에게 대단히 큰 부담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계승을 위한 정치적 비용이 상당히 컸고, 결국은 바꾸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황적으로 계승하지 못하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고요. 현실적인 대안에 대한 충분한 논의 없이 계승하지는 못하겠다고 발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대안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거든요. 지금 정부의 입장을 어떻게 봐야 할지요. 한국은 일본에 적극적이고 성의 있는 대응을 주문했어요. 그런데 일본은 합의를 깬 것 자체를 문제 삼아서 뒤로 빠지고 있죠. 12.28 합의 후 키시다 대신은 돌아가자마자 언론에 대놓고 “일본이 잃는 것은 10억 엔 외에는 없다”고 했어요. 우리 국민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발언을 하고 아베 수상은 국회에서 한국에 양보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어요. 그러니까 우리에겐 합의를 지키라고 하면서 일본 쪽에서는 합의를 지킬 생각이 없는 것 같은 행동을 취했던 거죠. 그런 맥락에서 대선 이후 문재인 정부의 대응은 무엇이었는지가 아쉬웠던 부분이거든요. 합의에서 이 부분은 절차적인 부족함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고치자, 이런 구체적인 대안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현재 화해·치유재단 문제가 사실상 해체 단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자연스럽게 새로운 기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는데, 이에 대한 정부 입장은 무엇인지 애매하고요. 그렇게 봤을 때 그 당시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부분보다는 정부의 대안에 대해 우리가 비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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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좌담 피, 땀, 눈물: 일본군‘위안부’ 풀뿌리 운동사의 흔적을 매만지며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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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5일, 창원대학교박물관에서 여성인권운동가 김문숙(1927-2021)의 생애와 관부재판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전시 〈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가 개관했다. 이번 전시는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이사장이 설립한 부산의 ‘민족과 여성 역사관’(2004-2023)이 폐관하면서, 경상도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민간기록물 조사정리 연구사업과 함께 이루어졌다. 5톤 트럭 2대 분량의 방대한 소장 자료가 뜻깊은 전시로 탄생하기까지는 이 연구팀에 참여한 세 명의 대학원생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가 존재했다. ‘연구보조원’이나 ‘조교’라는 이름으로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자신의 삶과 연구자 정체성을 고민하는 대한민국의 대학원생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씨를 청년좌담에서 만나 보았다. -좌담 일시: 2023년 5월 4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사진: 오늘의 나 고(故) 김문숙을 만나다 Q. 여러분이 참여한 작업이 전시로 구현됐을 때의 소감은 어떠했나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나 남겨진 고민이 있으신가요? 장찬영 김문숙 이사장님의 책상을 재현하기 위해 효영 씨와 노력했던 게 떠올라요. 역사관에 ‘작은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있었는데, 이사장님께서 학생들이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두신 곳이었어요. 그 공간과 사무실에 있던 책까지 모두 박물관으로 가지고 왔는데도 전시 공간이 다 채워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상자를 계속 가져와 그 안의 책들로 공간을 꾸몄죠. 그러다 보니 전시관 한가운데에 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신동규 교수님이 그걸 보고 “이 많은 걸 너희 둘이서 다 한 거야?”라고 물어보셨는데 교수님도 책이 그만큼이나 필요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준비 과정에서는 그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웃음) 이사장님의 신문 스크랩을 모아둔 상자를 보면서 개인으로서 정말 대단한 업적을 남기셨다는 걸 깨달았고요. 김효영 전시에 쓰인 영상도 저희가 대부분 작업했는데 전시 당일까지 “이 장면은 빼는 게 좋겠다, 넣는 게 좋겠다”라는 식으로 의견이 달랐어요. 그래서 오픈 10분 전에 급하게 장면을 빼고 틀었던 게 기억납니다. ‘나 때문에 망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떨리기도 했고, 국제관계학을 공부하면서는 절대 해볼 수 없는 경험을 했어요. (웃음) 민경택 자료 정리하면서 봉투가 하나 있기에 보니까 이사장님이 친구분에게 쓰신 편지였어요. ‘아, 애국하기 너무 힘들다. 지친다. 쉬고 싶다. 근데 결국은 해야 한다.’ 이러한 글을 친구분들과 주고받은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애국이란 단어가 신기하기도 했고, 이사장님의 약한 모습을 보니 인간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장찬영 자료를 옮기고 전시가 완성되는 순간까지 매 순간이 에피소드였어요. Q. 창원에서 부산의 역사관까지 오가며 쉴 새 없이 일하면서도 모두 싫은 내색 없이 열심히 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하나요? 김효영 이 프로젝트를 통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자료를 보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작업을 시작하면 집중해서 잘 정리하고 싶다는 욕심이 났습니다. 경택 씨가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모든 일에 참여했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아무 생각 없이 하면 됩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민경택 역사관에서 자료들을 정리하며 옮기는 과정에서 ‘이분은 뭘 위해 이렇게까지 하셨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어요.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 또한 그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연세가 아흔이 넘으신 후에도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건가, 이렇게까지 집중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던 분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지역사회는 그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는지 묻게 되었죠. 장찬영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 알고 싶다는 욕망이었습니다. 역사관에 처음 갔을 땐 관부재판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나 근로정신대 문제가 어떻게 연관되는지 몰랐죠. 그런데 이 작업을 하면서 김문숙 이사장님이 이 공간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묻고, 사진 하나조차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김효영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이사장님의 운동사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듯 이사장님은 호주제부터 시작해 모든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셨어요. 실제로 일본에서 성폭력 예방 수업을 듣고 강사 수료증을 받고, 국제연대대회에도 참여하셨죠. 여성 운동사를 직접 겪고 만들어나가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Q. 이 연구 사업에 여러 이유로 참여하게 되셨는데, 참여 전과 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이 변화한 것을 느끼시나요? 김효영 이전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나와는 관련 없는 문제로 여겼는데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을 스스로 정돈할 수 있게 됐어요. 이 문제를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내가 도움이 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이번 작업 이후 이 운동이 수많은 분들의 활동과 노력, 연대를 통해 이뤄졌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또 피해자분들이 계속해서 증명하는 과정을 통해 인정과 관심을 받게 된 걸 보며 이 문제가 나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진정으로 ‘위안부’ 문제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민경택 이전에는 ‘위안부’ 운동이라 하면 수요집회, 나눔의 집 행사 등을 중심으로 생각했는데, 지역에서 활동하는 분들의 구술사를 들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1세대 활동가분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남들과 다름없이 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던 것 같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노력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어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 변화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성폭력 문제와 피해자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인식 변화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찬영 첫 번째로는, 이야기되지 않은 기억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커다란 주류담론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이 정말 많아요. 저 역시 관부재판을 알지 못했고 교육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예요. 일본군‘위안부’라는 문제 안에는 수백 가지의 이야기가 있고,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기억이기에 문제의 핵심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할머니라는 호칭이 국제적으로 피해자들에 대한 고유 명사(Granma 또는 Halmoni)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역사관에서 가져온 자료에는 피해자분들의 사진도 있었는데, 그 사진들을 보면 행복해하시는 모습이 많았어요. 웃고 계시거나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피해자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깨졌습니다. 힘든 경험을 하셨지만 이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냥 ‘할머니’로 보이는 것이었겠구나, 그렇기에 우리가 이분들을 할머니로 부르는 것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걸 가장 잘 이해해주신 게 김문숙 이사장님과 한일 시민단체였고요. ‘위안부’ 문제의 해결방안이 무엇이냐 물으면 거창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국가 차원에서의 중재와 일본의 사죄도 물론 중요하지만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시민들끼리 연대하고, 할머니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피해를 이해하는 것 또한 문제 해결의 단초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Q. 세 분은 논문을 준비 중인 대학원생이시죠. 지난 1년 동안 이 사업의 연구보조원으로 참여하면서 굉장히 바쁘셨을 것 같습니다. 문제의식이 벼려지는 건 좋지만 시간이 부족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이 일이 현재 공부하고 계신 것과는 어떤 접점이 있나요? 장찬영 기억과 기억의 재현, 이것이 가져오는 효과를 주제로 삼아 졸업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폭력, 트라우마가 왜 우리 민족의 기억 안에 존재하고, 이것이 한일관계나 ‘위안부’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리고 ‘위안부’ 문제 안에서 우리가 가진 기억의 재현이 무엇을 보여주고, 어떤 결과를 낳게 될 수 있는지 쓰고 있습니다. 김효영 ‘위안부’ 문제를 공부하며 거대 담론과 실천 사이의 괴리를 목격할 수 있었고, 실천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주체들의 실천 의지가 나중에 더 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것을 제 졸업논문에도 적용시켜 실천들의 연결고리, 접점, 접속의 지점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민경택 고대사를 전공으로 삼고 있어 이 프로젝트와 제 학위논문 간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습니다. 다만, 삼한 시대에 있었던 변진한에 24개 정도 되는 나라가 영남지역에 분포돼있었고, 지금의 시군 분포와 유사할 거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가장 많은 곳이 경상도이고, 제 학문적 관심사가 지역이다 보니 피해자분들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지역, 공간에 대한 궁금증도 있습니다. 피해자들의 삶 전체가 궁금하고, ‘위안부’로 끌려가기 전에는 어떤 유소년기를 보냈는지 알고 싶어요. 그것을 파악하는 데에는 그분들이 살았던 지역의 산과 강, 농산물, 풍속, 민속, 축제 등도 유효한 정보가 됩니다. 그것들이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그분들의 삶이 어떤 사회적,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뤄졌는지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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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분노로 그치지 말고, 현재의 내 문제로 바라봐 주세요 -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활동가 백선행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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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경상감영길, 근대와 현대가 뒤섞인 거리에 하얀색 2층 건물이 있다. 1920년대 일본식 목조건물의 형태의 외관, 문 옆에는 “NO 아베” 네 글자가 작지만 선명하게 걸려있다. “내가 죽어도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고(故) 김순악 할머니의 유언과 유산에서 시작되어 수많은 시민의 힘으로 완성된 희움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이하 ‘희움역사관’)이다. 대구·경북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과 피해자들의 복지 지원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사단법인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의 부설 역사관으로 2015년 개관해 지금까지 쉼 없이 다양한 전시로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올바르게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만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전시’라는 형태가 되면 고민은 더 깊고 섬세해질 수밖에 없다. 이곳에도 문옥주와 심달연과 김순악의 제각기 달랐던 삶의 궤적이자, 동시에 과거와 현재, 우리나라와 전 세계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현실인 이 문제를 계속해서 ‘전시’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고민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서늘한 가을비가 쏟아지던 날, 희움역사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백선행 팀장을 만났다. 희움역사관이 전시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일본군‘위안부’ 문제 활동가의 삶과 고민까지 이야기가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대학생 자원활동가에서 ‘위안부’ 역사관을 책임지는 상근활동가가 되기까지 Q. 안녕하세요. 먼저 웹진<결> 독자 여러분께 짧은 소개 부탁드려요. 네, 저는 희움일본군‘위안부’ 역사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 백선행입니다. Q. 대학생 때부터 시민모임에서 자원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계기는 정말 사소한데요, 한·중·일 청년이 모여 템플스테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했어요. 중국어 전공이거든요. 근데 가서 보니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와 함께 하는 평화 인권 캠프였어요. 2007년에 시민모임이 주최한 행사였는데, 중국 청년은 한 명도 없는 게 반전이었죠. (웃음) 돌이켜 보면 어릴 때부터 관심은 있었던 것 같아요. 17살 때 도서관에 갔다가 『천황의 군대와 성노예』(미네기시 겐타로, 박옥순 옮김, 당대, 2001)라는 책을 봤어요. 제목이 자극적이잖아요. 그걸 읽고 엄청나게 놀랐던 기억이 또렷이 나요. 학교에서‘위안부’ 문제를 배우긴 했지만, 그 책을 읽고 나서야 이것이 제도적, 계획적으로 저질러진 전쟁범죄라는 생각을 처음 했죠. 그러고 나서 잊고 살다가 캠프로 시민모임을 만나면서 그때부터 자원 활동을 쭉 하고, 아르바이트 시작하면서 후원도 시작하고, 졸업하고 다른 일 조금 하다가 다시 일을 찾을 때 여기서 활동 제안을 해주셔서 상근을 시작했어요. Q. 자원 활동을 꾸준히 이어간다는 게 사실 쉽지 않잖아요. 또래 자원활동가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 사람들과 모여서 무언가를 하는 게 좋았어요. 할머니들 재가방문도 함께 하고, 행사나 집회도 같이하면서 친밀해지는 게 즐거웠어요. 그런데 할머니들의 존재가 처음부터 와닿았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재가방문도 열심히 즐겁게 다녔지만, 생존자를 아주 살갑게 대하지는 못했던 것 같고요, 시민모임에서 하는 조직사업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Q. 상근활동가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사실 저도 고민은 많았어요. 이쪽을 커리어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인연이 닿아서 시작하게 됐는데, 조직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제 몸에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2015년 7월 말부터 일하기 시작했는데, 역사관 개관 직전이라 닥치는 대로 업무를 하게 됐죠. 전시를 만들고 홍보하고 교육하면서 역사관의 모든 활동이 내 일이구나, 재밌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쭉 역사관 업무를 맡고 있죠.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Q. 지금 기획전시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을 진행하고 계시는데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준비하셨나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했어요. 저희는 대구와 경북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생존자들과 굉장히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왔고, 이 부분이 차별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만났던 생존자들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시리즈를 기획했어요. 2년에 한 번씩 진행할 계획으로 2016년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1 옥주씨,>전을 했는데, 2019년이 되어서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을 열게 됐어요. 왜 김순악인가, 많이들 물어보세요.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라 근현대를 조망하는 계기가 됐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알아 온 대구 경북 할매들 중에서 김순악이라는 사람의 삶이 일본군‘위안부’, 여순 항쟁, 기지촌, 한국전쟁, 베트남전까지 역사의 큰 흐름에 휩쓸리지 않은 적이 없더라고요. 전체 기획은 올해 서울시와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에서 했던 <기록 기억 :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 전시 총괄하신 문호경 님이 맡아 주셨는데, 저희는 김순악의 그 파란만장하고 울퉁불퉁하고 매끈하지 않은 일생을 전하고 싶었어요. 할머니는 일대기 『일본군 ‘위안부’ 김순악 :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김선님, 일일사, 2008)도 발간하셨지만, 정작 당신은 글자를 모르잖아요. 그래서 김순악이 돌아와도 이해할 수 있는 전시를 만들자, 울퉁불퉁한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자고 기획했어요. 설령 그게 관람객에게는 가닥이 안 잡히고 난해하게 느껴지더라도요. Q. 전시장의 모습이 조금 독특합니다. 벽에 꽃무늬도 있고요. 시민모임이 찾아갔던 김순악의 방이에요. 할머니는 일흔이 넘어서 알코올 중독 같은 상태로 쓰러져 있다가 이웃 주민에게 발견돼 영구임대 아파트로 들어가셨어요. 그런데 처음 입주했을 때 그곳이 너무 좋아서 그대로 누우셨대요. 이런 네모반듯하고 따뜻한 방을 생전 처음 가져봤다면서. 그 방 그대로는 아니지만, 정서적으로 느껴볼 수 있도록 재현하려고 했어요. 그때 그 벽지와 김순악이 남긴 물건들, 남긴 말이 있고 멀리서 김순악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장소죠. Q. 전시는 어떻게 구성하셨나요?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데, 첫 번째 <우째 살았는가 싶으고> 파트는 김순악이 그의 방에서 저희 활동가들을 처음 만난 순간이에요. 그래서 피해 당시부터 순서대로 이야기가 가는 게 아니라 말하지 못했던 당신의 심정, 너무나 하고 싶었던 말들부터 시작돼요. 두 번째 섹션 <난 너거캉 지금 얘기하는 게 막 재미가 나서 죽겠다>는 해방 이후 복잡하고 험난했던 귀향의 과정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결코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할머니는 사람과 만나서 말씀하시는 걸 굉장히 기뻐하셨어요. 그리고 ‘위안부’ 피해에 대한 부분은 굳이 또 재현할 필요가 있나 생각해 전시하지 않았어요. 마지막 <순악할매 어떻게 지내세요> 섹션은 김순악이 시민모임을 만난 이후, 시민모임의 활동가, 회원들이 할머니에 대해 남긴 기록들과 김순악의 공적 활동들을 엮었어요. Q. 전시 해설을 직접 하고 계시죠. 어떤 분들이 오시는지, 반응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청소년 단체 관람객이 가장 많고, 최근에는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르신 팀들도 오고 계세요. 10인 이상 단체는 누구나 해설을 신청하실 수 있는데요, 해설을 듣고 관람하는 분들이랑 그냥 보시는 분들이랑 확실히 반응은 조금 달라요. 아무래도 저희가 전문 학예 팀이 갖춰지지 않아서 객관성이나 전문성 같은 것들은 신경 쓰여요. 그래도 이곳의 전시는 해결 운동의 맥락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할머니를 직접 만나 왔고 문제를 늘 고민하는 활동가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는다는 점에서 관람하는 분들이 남다른 느낌을 받으시는 것 같아요. 그저 속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내고는 그나마 속이 조금 시원하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리고 할머니를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은 기억하고 전해야 하는 책임감도 함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展> 전시 소개 문구 중 부족하더라도, 활동가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Q. 기획전시는 계속 새롭게 준비하실 계획인가요? 지금 두 가지 시리즈를 가져가고 있어요. 하나는 대구 경북 생존자 중에서 한 명을 선정해서 그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시리즈, 또 하나는 2017년 동티모르로 시작한 <아시아의 일본군 성노예 생존자들>이에요. 교대로 하고 있는데요, 둘 다 이야기하고픈 것은 인식의 확장이에요. 이 문제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로 많이 인식되고 있잖아요. 근데 사실은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고, 아시아 각국에 피해자가 있고, 양상은 다 다르지만 그럼에도 해결 운동은 연대해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아시아> 시리즈에서 하고 싶어요. <당신> 시리즈에서는 생존자 한 분 한 분이 모두 다 다른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한 사람의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저희가 만나왔던 ‘당신들’을 추모하는 방식이에요. 그리고 삶은 모두 달랐지만, 그 안에서 겪었던 문제는 여성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구조적 폭력이라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Q. 1층에서 상설 전시를 운영하고 계시는데요, 함께 소개해 주시겠어요. 역시 외부에서 아트 디렉터와 큐레이터 팀을 모셔서 기획했고, 개관을 세 번이나 연기할 정도로 고민 많이 하면서 준비했어요. 시민모임의 소장자료를 통해 전시가 만들어지는데, 객관적으로 일본군‘위안부’ 역사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고, 동시에 ‘시민모임’이라는 단체가 가진 역사, 생존자를 만나면서 남긴 고유한 기록도 설명되어야 하니까요. 저희 소장자료 중 “돌격 1번[1]” 을 전시할지 말지, 정말 마지막까지 고민했는데 결국 전시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것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선정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고, 그 하나로 인해 나머지 전시품이 매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거예요. 물품 자체로 분명히 의미가 있더라도 충분히 잘 해석해서 기획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면 전시하지 않는 것도 맞다고 생각해요. 이런 전시 방향에 대한 평가는 나뉠 수 있을 거예요.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피해 사실에 관해 구체적인 자료를 보여달라는 피드백도 계속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활동가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그게 가장 진정성 있고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한 이야기라는 걸 전시를 준비하고 관람객을 만나면서 저희도 깨닫게 됐거든요. 준비하다 보면 잘 될 때도 있고 되게 아쉬울 때도 있어요. 자료가 부족할 때도 많고 디자인이 아쉬울 때도 있고요. 그래도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없는 것은 없는 대로 꾸준히 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가고 있습니다. 준비할 때 고민은 많지만, 막상 펼쳐 놓으면 전시를 채워주시는 건 관람객이더라고요. 예상 못 한 반응도 많고, 좋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없는 경우도 있고요. 몇 번의 전시 후에 ‘결국 모든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건 관람객 여러분이구나, 자신감을 좀 가지고 이야기를 해 봐도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자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관람객 Q. 이곳에서 전시를 관람한 어느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다시 찾아왔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나요? 대부분은 일회성으로 관람하시지만, 적극적으로 해결 운동에 참여하시는 팀들도 꽤 있어요. 준비를 많이 하는 팀들은 사전에 영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2017), <귀향>(조정래, 2016), <허스토리>(민규동, 2018)나 책 『꽃할머니』(권윤덕, 사계절, 2010) 등을 먼저 보고 그다음에 여기 오셔서 관람하면서 해설 듣고, 외부 강연까지 요청하셔서 듣고, 그리고 희움 브랜드 제품을 구매해 가셔서 다시 판매하거나, 아예 직접 물품을 제작해서 판매 수익을 모아 여기에 기부금 전달식까지 하러 오세요. 청소년들이 해결 운동에 스스로 참여하는 과정에 저희는 교육 공간으로 끼워져 있더라고요. 정말 놀랐어요. 예전에는 문제 해결 운동이 단체 주도였다면, 최근에는 양상이 많이 바뀌고 있잖아요. 평화의 소녀상 건립도 시민이 주체가 되었고, 지금은 더 나아가서 청소년이 스스로 계획해서 실천해요. 그 가운데서 이제 저희는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Q. 유독 마음에 남았던 사례가 있나요? 사실 여러 팀이 기억나서, 한 팀만 언급하기 어렵네요. 전교생이 몇 명 안 되는 작은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온 적이 있어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플리마켓을 열어서 스스로 기부금을 모으고 저희한테 와서 그동안의 활동을 다 설명해 주더라고요. 동전으로 한가득이었는데 다 세어서 기부금 영수증을 드렸었죠. 고등학생들이 기금을 모아오는 경우는 좀 있었는데 어린이들이어서 놀랐어요. 한 번은 어느 학교에서 6학년이 다섯 개 반인데 다 같이 오겠다고 신청해서 놀라기도 했어요. 어느 반에서 일본군‘위안부’ 관련 수업을 하고 『꽃할머니』 책을 같이 읽었는데, 한 학생이 교장 선생님께 희움역사관 견학을 하러 가고 싶다고 제안을 해서 허락을 받았대요. 그 소식을 다른 반 학생이 듣고 서로서로 ‘우리도 가자’ 해서 결국 학년 전체가 오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럴 땐 현장에서는 좀 힘들긴 하지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굉장히 많구나, 새삼 깨달아요. Q. 시민이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시겠어요. 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죠. 여기서 전시해설 할 때 항상 ‘희망‘을 얘기해요. 아직 이 문제를 이야기하면 공감과 분노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해결 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이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느껴온 것은 희망이라고요. 성폭력 문제에서 희망을 얘기하면 되게 낭만적인 얘기로 들릴 수 있는데, 가난하고 불쌍하고 병든 것처럼 묘사된 이 ‘위안부’ 피해자들이 생각해보면 전쟁과 성폭력을 뚫고 살아남은 생존자잖아요.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증언자고, 인권 운동가고, 어떤 분들은 예술가가 되셨고요. 해결 운동도 당사자가 힘있게 앞서서 견인해왔기 때문에 시민들도 함께 해 온 거고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게 굉장히 큰 희망이죠. 그래서 항상 희망을 가지고 동참해 달라고 이야기해요. 여기 이름도 ‘희움‘, ‘희망을 모아 피움‘이잖아요. 제발 분노로 그치지 말아 달라고요. 연민이나 동정, 분노도 타자화잖아요. 같이 주체로 행동해 달라는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이미 주체가 된 분들도 많은 거예요. 그게 너무 좋아요. 저는 이 문제가 여전히 ‘민족의 딸들이 당한 고난과 수치‘로 묘사되는 것에 매우 큰 의문을 품고 있어요. 이걸 현재화하려면 결국 여성 인권, 여성 폭력에 대한 문제로 확장해야 해요. 그러려면 역사관이 관람객에게 이 문제를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고 해석하고 자기화할 기회를 주는 역할을 해야겠죠. 그래서 이곳의 재현 방식도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게, 분노에 갇히지 말고, 너무 비관에 젖지 않게, 들어왔을 때부터 나갈 때까지 밝은 느낌을 받을 수 있게, 이런 합의를 가지고 있어요. 그걸 관람객들이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계셔서 너무 멋지다고 생각해요. Q. 외국인 관람객도 계신가요? 몇 달 전부터 통계를 내 보고 있는데 7~8% 정도로 계속 오고 계세요. 절반 정도는 영어를 사용하시고, 절반은 일본어를 사용해요. 일본어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해결 운동이나 인권운동을 해 오던 분들이라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지금 외국어 서비스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서 그걸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적극적인 분들은 검색해 가면서 보고 질문하실 때도 있지만, 저희는 아주 아쉬운 부분이죠. Q. 외국인 관람객의 반응은 어떤가요? 문화권, 언어권별로 인식의 토대가 다르다는 게 느껴져요. 사실 깊게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못했지만, 일본에서 오신 분들은 한국 분들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영어를 쓰시는 분들은 문제 인식의 기반이 분명히 달라요. 일본 분들은 스스로 가해 역사라고 인정하거나, 긴가민가하지만 보면서 물어보시는 편이고 다른 언어권 분들은 인식이 명백하게 인권 문제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손성숙 선생님도 인터뷰에서 미국 교육 현장에서는 이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아니라 인권 문제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딱 그게 느껴져요. 또 중국 내륙에서 온 관람객과 대만에서 온 관람객의 결이 달라요. 중국에서 온 분들은 확실히 이 문제를 민족주의, 국가 관계에서 바라보시다가 중일 관계로 연결하면서 화를 내시기도 해요.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 바로가기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 단체관람 신청하기 당사자를 만나는 마지막 세대, 이후를 고민하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 활동가로 산다는 건 어떤가요? 사실 어떤 시민사회 이슈보다도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이슈라는 걸 많이 느껴요. 그게 정말 대단한 것 같고, 무엇보다 생존자들이 스스로 운동을 견인해 오셨기 때문에 이 운동이 이만큼 성장했다는 점에서 생존자들과 함께 온 것이 너무나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제 저희가 당사자를 만나는 마지막 세대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이 많아지고 있어요. 이후에 ‘포스트 당사자’라고 명명되는 사람들은 활동가이고 연구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시시콜콜 기록을 남기려고 노력하고 있고, 기록의 역할이 뭔지, 사람들이 뭘 기대하는지도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Q. 활동가로 일하는 게 몸에 맞는 느낌이라고 하셨지만 고민도 많으시네요. 생존자가 없을 때에도 이 운동이 이전만큼 주목받을 수 있을까, 지금만큼의 물적인 토대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되죠.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재현할지, 그 재현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지금만큼 많을지… 지금이 ‘위안부’ 운동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고,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고민도 많고 두려움도 커요. 또 현실적으로 활동가들은 항상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 활동을 하는데, 역량 강화의 기회에 대한 갈증과 아쉬움도 있고요. Q. 앞으로 어떤 활동가로 살고 싶으세요? 저는 사실 긴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이 현장에서는 계획을 세우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매일 느껴요. 할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실 수도 있고… 다만 기념 사업의 비중이 커지고 있으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 성노예 문제에 대한 인식을 조금 더 확장하기 위해 만들 수 있는 콘텐츠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더 깊이 이해할까, 하루하루 생각하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달리다가 소진될 때 같이 공감하고 고민하는 활동가들, 연구소처럼 이 분야에 매진하고 계신 분들을 만나면 보람을 느끼면서 또 에너지를 받아서 다시 힘을 내게 돼요. 지금 나의 문제로, 순악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Q. 저희 웹진 <결>에 기대하시는 점이 있나요? 우리 사회에 바라는 점도 궁금합니다. 처음 <결>을 봤을 때 “너무 읽을 맛 난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기존 매체나 미디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보다 훨씬 넓고 다양한 분야를 깊이 있게, 심지어 세련되게 써주셔서. 쭉 계속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더 넓은 분야에서 더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결>이 있다는 게 많이 알려지면 좋겠어요.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든 없으신 분이든, 이것을 자신의 문제로 바라봐 주시면 좋겠어요. 100년 전에 나랑 상관없었던 여성들, 할머니가 겪었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라는 문제에서 바라보면 우리 책임이 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국 정부에서는 기념 사업과 할머님들에 대한 지원 사업 정말 너무 감사하지만, 법적인 해결을 위해서도 더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씀 남겨주세요. 희움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의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 두번째 이야기 김순악> 전시는 2020년까지 이어져요. 오셔서 순악 씨를 만나주세요. 제가 활동가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나 재미있었고, 우습지만 순악 씨를 생각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생각해보면 제가 처음 갔던 평화 인권 캠프에서 처음 만난 ‘위안부’ 생존자가 김순악이었어요. 그때 템플스테이 했던 곳도 지금 김순악 할머니를 모신 영천 은해사고요. 저희처럼 순악 씨를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순악 씨 좀 만나러 와주세요. 각주 ^ 도쓰게키이치반(突擊一番). 당시 ‘삿쿠’라고 불렸다. 일본제국 군인에게 군수품으로 지급된 군용 콘돔으로 위안소에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