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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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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한국의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문제 제기와 여론 확산은 주로 한국(남한)의 '위안부' 피해자 서사 중심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남한뿐 아니라 북한 그리고 해외동포들에게도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웹진 <결>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를 대중적 논의 차원으로 확장하고자 재미있는 대담을 기획했다. 첫 번째 대담자인 정영환 교수는 일본 지바현에서 태어난 '조선적 재일동포 3세'로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음과 동시에 대한민국으로 국적을 변경하지 않은 재일 한국인이다. 현재 메이지학원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재일동포 문제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대표 저작인 2016년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정영환, 임경화 옮김, 푸른역사, 2016)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부정해 논란을 빚은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이, 2013)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번째 대담자 박노자 교수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했다. 현재 한국 국적의 신분으로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보다 확장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두 교수를 모신 대담은 시간적, 물리적 제약으로 인해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에 걸쳐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1.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2.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3.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3 <DAY 1> 정영환, 박노자 선생님 안녕하세요. 웹진 <결>입니다. 두 분을 모시고 온라인 대담을 진행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본 대담 위키는 두 대담자가 물리적 거리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온라인 상에서 서로 묻고 답하는 것이 용이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온라인 대담은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진행되며,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주제의 위키가 생성됩니다. 하루에 한 번씩 본 위키에 접속해서, 새로 개설된 주제의 위키에 각자의 의견을 직접 적어주시면 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글은 기간 내에 언제든 수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첫째 날의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제기와 여론 확산은 한국(남한)의 ‘위안부’ 피해자 서사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남한뿐 아니라 북한 그리고 해외동포들 사이에서도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중요한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은 한국 외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있어서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Q1. 두 분께서 생각하시기에 대한민국(남한)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주로 남한 피해자 중심으로만 이루어졌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Q2. 더불어 대한민국(남한)에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탈분단적 시각으로 확장되기 위해선 어떤 논의와 과정이 필요할까요? Q3. 앞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으로 '위안부'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어떤 과정과 절차를 거쳐야 할까요? 박노자 A1.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의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국가주의 내셔널리즘의 틀 안에서 처음에는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들의 문제는 '우리' - 즉 남성 본위의 국가/국민 공동체 - 의 여성들에 대한 일제의 유린이라는 방식으로 많이 이해됐습니다. 그런데 '우리'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보통 '대한민국' 국경으로 확정된 공동체를 의미하는 거니까 다양한 거주지, 국적, 민족에 속하는 다른 피해자들이 잘 주목을 받지 못한 듯합니다. 그리고 박근혜 씨의 시절에는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의 문제'로 프레이밍해서, 일본 국가와의 '타결'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이건 기초부터 잘못된 접근이죠. 물론 '한일관계'와 유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양한 피해자에 대한 전시 성폭력의 문제, 즉 인권 문제이자 젠더 문제, 그리고 식민지적 폭력의 문제입니다. A2. 남한에도 북한에도 '위안부' 성노예 제도의 피해자 분들이 거주하십니다. 이북에서 거주하시는 분들 같은 경우에는 본적이 남한인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사실상 광의의 '이산가족' 범위에 속하시기도 하죠. '위안부' 문제가 논의될 때에 남이든 북이든 해외든 어디에 거주하시든 모든 피해자들이 이 논의에 포함돼야 합니다. 그리고 남북에서 '위안부' 문제가 거의 거론되지 않았던 1990년대 이전에도 이 문제에 대해 선구적으로 언급하고 활동해온 총련 등 해외 동포 단체들의 노력도 남한에서도 분단의 벽을 넘어 정당한 평가를 받았으면 합니다. A3. 식민지였던 조선의 여성들이 입었던 피해가 특히 컸다는 사실도 당연히 있지만 총체적으로 봤을 때, '위안소'란 다양한 지역, 민족, 국가 출신의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한 전시 성폭력, 성노예화 국가 범죄입니다. 이 차원에서 본다면 '한-일 프리즘'으로만 봐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죠. 이 문제의 일차적 본질은 일본 국가와 군대의 젠더적 폭력 행위지만, 동시에는 계급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빈농, 빈민의 딸들이야말로 일군의 폭력에 가장 쉽게 노출되곤 했습니다. 이 범죄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당연히 일본 국가와 군대에 있으며, 반인륜 범죄인 만큼 공소시효가 원칙상 없는 거죠. 그런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극동국제군사재판의 공소장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연합국(특히 미국)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의 책임 유기에 대해서도 한일 수교 협상 과정에서 이 문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당국자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 크지 않나 싶습니다. 본 온라인 대담은 팀과 커뮤니티를 위한 민주주의 플랫폼 '빠띠'에서 이루어졌다 정영환 A1. 이 문제를 검토할 때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규명과 과거청산을 위한 시민운동과 일반 여론이나 언론, 정치권의 동향은 구별해서 다룰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1980년대에 시작한 시민운동은 비교적 일찍이 '남한'이란 틀을 넘어 재일조선인이나 일본인, 중국, 동남아, 유럽,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피해자나 활동가들과의 연대를 이루어왔습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운동은 이렇게 볼 때 애초부터 남한 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 국경을 넘은 여성들의 연대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고, 북측의 피해자와의 만남도 1990년대에는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시도 중 하나의 도달점이 2000년의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시도를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1980년대 이래 한국 여성해방운동의 치열하면서도 창조적인 투쟁이 있었고, 특히 이 운동이 탈분단적 시각을 갖고 있었음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은 지역적,공간적으로 남한의 틀을 넘어 일본군의 성폭력 피해를 받은 각 지역의 당사자나 지원자, 활동가들과의 인연을 맺고 경험을 교환하며 함께 일본군의 책임을 추궁할 뿐 아니라,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이나 콩고 내전의 전시성폭력 피해자들과의 연대도 이루고 있어, 시간적인 제한을 넘어서 보편적인 전시성폭력문제의 해결을 위한 운동의 큰 동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이런 해결운동이 이룩한 국가적인 틀을 넘어선 연대의 성과가 남한의 대중적인 매체나 정치권에서 재현될 때 '남한 피해자 중심'적인 시각으로 전환되어버리는 데 있겠지요. 저는 일본에 거주하고 남한에서 생활하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으로 알기는 어려운데, TV나 신문, 잡지에서 다루어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질문하신 대로 '남한 피해자 중심'적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각이 발생한 원인으로 박노자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한국의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역사적인 단계를 구분해서 검토해보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1948년이래의 반공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직접 작용한 결과뿐만이 아니라-물론 반공주의를 제외하고 한국의 '분단적 시각'의 문제를 파악하지는 못합니다만--1987년의 민주화이후의 내셔널리즘이 갖고 있는 제한성과 문제점—1987년체제가 갖는 '분단적 시각'—을 도마 위에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Q2와 관련이 있기에 차후에 재론하겠습니다. A2. '탈분단적 시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개념을 정리/공유하면서 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웹진 <결> 편집팀 측에서는 '분단적 시각'을 북측이나 재외동포의 존재를 외면하여 한국의 피해자 중심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정의를 한다고 저로서는 받아들였습니다. 이 개념을 전제로 해서 제 의견을 말씀드린다면 앞서 남한과 일본의 관계에 제한된 인식의 틀이 형성된 배경에는 내셔널리즘이 작동하였을 뿐만 아니라—저는 이것은 원인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물이라고 봅니다—제2차세계대전 후의 전후세계질서, 특히 동아시아에서의 냉전체제의 심대한 영향이 있다고 봅니다. 일본의 전쟁/식민지지배 책임문제를 연합군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형사적인 책임(동경재판)도 민사적인 책임(배상청구권)도 남북은 부정당했습니다. 1948년의 분단이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일강화에 틀에서 배제되었고 한국은 또한 강화회의에 참가를 못 한 채 미국 패권하의 종속적인 위치에서 한일회담을 시작하게 됩니다(1948년, 1952년 체제). 그래서 식민지 배상문제는 애초에 '청구권문제'로 환골탈태되어 '피해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재산의 반환'이란 틀에서만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1965년에는 이 결과 한일기본조약과 각 협정이 맺어지게 됩니다. 즉 1965년체제의 형성입니다. 1965년 체제는 두 가지의 논의를 '봉인'한 체제였습니다. 첫째는 일제 식민지지배의 피해논의의 '봉인', 둘째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대화의 '봉인'입니다. 말하자면 미국이 일본이란 쐐기를 식민지기 피해자와 정부, 그리고 남북 간에 박았던 체제이지요.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여전히 '분단적 시각'에 머물러 있는 배경에는 이렇게 전후체제가 만들어낸 다층적으로 얽힌 체제—1948, 1952, 1965년 체제가 남한에서 식민지의 피해문제를 바라보는데 인식의 틀에 아직도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 문제는 남한의 대내적인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의 문제이면서도 위계적인 국제관계로서의 전후체제의 문제인 것입니다. 1987년의 민주화 이후 1965년 체제에 대한 재심판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여전히 1948년 체제는 공고합니다. 2018년 10월 30일의 신일철주금에 대해 대법원이 내린 획기적인 손해배상 판결(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1965년 체제에 대한 귀한 토전이었던 반면에 원고중에는 전시 말기에 청진의 제철소에서 강제노역을 당한 피해자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북지역에서 일어난 식민지지배하의 피해에 보상에 관한 쟁점은, 이건 대한민국 헌법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당연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논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전후체제를 근원적으로 묻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탈분단적 시각으로 확장되기 위해서 필요한 논의로서 한 가지 올리자면 반식민주의/반제국주의와 여성주의적 시각의 결합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래 재일조선인사 연구로부터 시작했는데 『제국의 위안부』 사태를 둘러싼 논의에 개입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논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던 것은 특히 일본에서의 주류 여성주의 시각에서 반식민주의적 관점을 거의 찾아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탈민족주의/개인주의/자유주의적인 시각을 통해 한국의 논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소녀상 비판과 『제국의 위안부』 옹호에 합류하였습니다. 한국의 경우도 반식민주의는 민족주의와 동일한 개념으로 오해될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식민주의가 가져오는 억압은 피지배자를 민족적으로 배제함과 동시에 개급, 젠더적인 차원에서의 분단을 이용하여 증복시킵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이런 근대세계가 낳은 부의 측면을 근면하게 습득하여 그 폭력성이 전면적으로 틀어난 된 제도가 일본군성노예제도였던 만큼 저희들의 시각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반식민주의에 대한 검토를 넓혀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여성인권의 보편성이란 가치는 반식민주의와 반제국주의적 시각과 결부할 때 처음으로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A3. 앞서 말씀을 드렸던 것 처럼 그간의 해결운동은 이미 '탈분단적 시각'에 입각하여 많은 실천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거듭 강조를 하게 됩니다만, 이미 운동은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실천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재일동포들도 그렇습니다. 그 실천에 배우면서 '외교적'차원에 해소되지 않는 당사자와 활동가, 연구자의 경험과 연구를 축적하며 역사화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법정에서 배우면서 일본군의 만행과 책임을 더욱 체계적으로 밝히고 남북의 교류를 통해 이북 피해자들이나 유족들의 증언수집과 경험교류가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또한 세계의 식민주의하의 전시성폭력의 진상규명을 위해 실천하는 활동가나 연구자를 맺는 거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DAY 2>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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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인터뷰 국제사회 왜곡 막고 공감 넓힐 영문 ‘위안부’ 증언집 발간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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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 윌리엄스 사회교육학 부교수 & 필리스 김 CARE 대표 인터뷰 <2부> 미국 사우스다코타대학교 사회교육학 징 윌리엄스 교수와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의 필리스 김 대표, 미국인들에게 '먼 나라의 오래전 불행한 역사'라 할 수 있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고 인권 문제로 접근해 교육하고 활동하는 이들이다. 2018년에 처음 만난 이후 '위안부' 문제 연대 활동을 해온 두 사람은 현재 공동 저술 작업을 진행 중이다. 내년쯤 나올 예정인 이 책은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는 방법을 담은 첫 번째 출간물이 될 예정이다. 웹진 <결>은 연구차 한국을 방문한 징 윌리엄스 교수와 서울에 체류 중인 필리스 김 대표를 인터뷰해 2회에 걸쳐 싣는다. <1부> 미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는 자국중심주의 극복하는 글로벌 시민교육 <2부> 국제사회 왜곡 막고 공감 넓힐 영문 '위안부' 증언집 발간되길 교육 현장에서 활용할 수업 지도안, 자료집 중요 Q. 사실 지금 한국에서는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 등을 부정하고 오히려 왜곡하는 역사 수정주의가 강화되고 있고, 그들의 주장이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유포되면서 이를 접한 학생들이 선생님을 공격하거나 수업을 흐트러뜨리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도 그런 분위기가 보이나요? 🧶 징 윌리엄스 : 사실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면서 부정하거나 공격당한 경험은 없습니다. 자료를 준비할 때 CARE에서 받은 자료,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송 근거 같은 일본 정부의 기록, 또 미군의 증언 등 역사적 자료를 기반으로 하고, 강의가 서로의 생각이나 의견을 나누는 대화와 토론 방식이라 공격적인 태도를 드러내기 어려울 겁니다. 다만 아직도 이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우리는 잘못된 의견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설명을 덧붙이기는 합니다. 🧶 필리스 김 : 2016년에 캘리포니아 주 교과 과정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포함시키기 위한 캠페인을 할 때 주 교육부에서 주최한 큰 공청회가 있었어요. 다양한 이슈가 논의된 그 자리에서도 '위안부'는 거짓말이다, 매춘부였다, 포함되면 안 된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결국 이사회에서 저희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정됐어요. 그랬는데 마지막에 주 교육부 관계자가 나와서 '뜨거운 논쟁이 있었던 이슈가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위안부' 문제였다, 상반되는 의견이 팽팽해 타협안으로 '위안부' 문제를 포함시키되 마지막에 한국과 일본 정부가 2015년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합의했다는 문구와 함께 일본 외무성의 링크를 포함을 시키기로 했다'는 발표를 했어요. 그 상태로 개정안이 통과가 된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도 주 교육부에 와서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했더라고요. 저희도 할 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교육 현장에서 활용할 수업 지도안이나 자료집이 더욱 중요해요. 어쨌든 '위안부' 문제가 주제로 포함되기는 했으니까 선생님들을 돕는 자료집을 만들었어요. 선생님들이 이용하기 쉽게 온라인에도 올리고요. 그런데 한 번은 사회학 컨퍼런스에 설치한 우리 부스에 한 교수님이 와서 캘리포니아 교사들을 위한 '위안부' 문제 자료집을 만들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잘됐다 하면서 초안을 공유해주면 피드백을 드리겠다고 했어요. 초안이 왔는데, 문제는 일본측 시각이 강한데다 2015년 합의문을 과도하게 분석하는 등 적절한 자료에 근거하지 못한 내용이 상당했어요. 일본이 엄청난 예산을 들여 왜곡된 주장을 많이 퍼트려놨기 때문에 그런 정보를 접하기가 쉬웠을 거예요. 바로 연락해 여러 참고문헌과 자료를 제공하면서 저희를 언급하지 않아도 좋으니 잘못되거나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은 꼭 반영해 달라고 했어요. 결과물에 100%는 아니지만 다행히 꽤 반영이 됐고요. 한편으로는 일본과 대조적으로 다양한 자료 제공에 소극적인 한국 현실도 많이 아쉬웠어요. 할머니들이 증언하신 지가 30년이 넘었는데 학술적으로 '사이테이션(citation)', 공식적으로 인용할 수 있는 증거 자료가 정말 부족하거든요. 사실 교사나 학생, 나아가 연구자들에게 할머니들의 증언만큼 중요한 출처이자 진실이 어디 있겠어요. 일본 공문서도 1차 자료로 중요하지만 할머니들의 증언에는 거기에 담기지 못한 진실이 훨씬 많잖아요. 할머니들을 모시고 '스피킹 투어'를 다니다 보면 '서바이버', 즉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힘있는 자료인지 느낄 수밖에 없어요. 미국에서는 지금도 항상 억눌려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더 들어야 한다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화두라 '위안부' 문제에서도 피해 할머니들의 목소리와 생생한 증언이 제대로 전달이 되는 게 너무나 중요한데 이걸 인용할 수 있는 학술적인 증언집이 없다는 게 너무나 안타깝고,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Q. 저희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중요한 숙제를 받은 것 같습니다. 🧶 필리스 김 : 그동안 비매품으로 번역되어 나온 증언집이 있긴 한데, 많은 할머니들이 익명으로 처리돼 있어요. 또 시대적 배경이나 문화적 차이 등에 대한 설명, 할머니들의 증언도 여러 이유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을 불식시킬 수 있는 설명 등을 담은 영문 번역집을 제공하는 게 정말 필요해요. 일본 정부의 역사 수정주의가 자금력을 바탕으로 추진되고 있어 저희도 우려를 하면서 휘둘리지 않기 위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Q. 수업 지도안이나 교재를 적용하다 보면 현장에서 수정 아이디어나 보완이 필요한 사항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혹시 '위안부' 수업을 하면서 접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 징 윌리엄스 : 자료는 오랜 시간 고민하며 준비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만족합니다. 학생들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경험에 많이 공감하고 정서적으로 유대감을 쌓는 경험을 하게 되고요. 강의 후 설문조사를 할 때 만약 할머니를 실제로 만날 수 있으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물어봤는데 '사실 어떤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우리는 이미 들었고 알고 있고 전혀 잊지 않았고 우리가 대신 분노하고 있기 때문에 억울해하지 마셨으면 한다'는 반응이 기억납니다. "제 '위안부' 강의 보호가 가장 큰 어려움" Q. 과정에서의 어려움, 그러니까 미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는 교육자로서의 어려움 혹은 도전 과제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징 윌리엄스 : 제 강의가 항상 효과적이고 실용적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우스다코타라는 주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제가 가르치는 주제와 미국 주의 기준이 어느 정도 맞아야 된다는 거예요. 사우스다코타는 굉장히 보수적인 주이고 주지사가 '글로벌 스터디스(Global Studies)'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이기도 합니다. 사우스다코타 고등학교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왜 발발했는지, 전 세계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등을 가르쳐요. '위안부'는 그 전쟁의 일부이자 일부의 역사라는 생각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저로서는 제 강의를 보호하는 일 자체가 가장 큰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 필리스 김 : 저의 도전과제를 말씀드리면, 사실 모든 활동이 도전입니다. 교육은 교실에서만 이뤄지지 않잖아요. 저희 단체 이름이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인데, 배상 파트가 있고 교육 파트가 있어요. 배상에는 금전적인 요구만이 아니라 영어로 '리드레스(redress)', 원래 상태로 복구시키는 모든 것을 아울러요.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들에게 정의를 가져다 드리는 모든 캠페인, 의료 지원 활동, 또 소녀상을 세우는 활동도 배상 활동입니다. 교육 활동은 배상을 위한 캠페인, 액티비즘하고 많이 겹쳐요. 예를 들면 저희가 많이 한 소녀상과 기림비 설치 운동은 인식을 높이는 과정에서 교육적인 효과도 있으니까 배상 활동인 동시에 교육 활동이에요. 소녀상 설치를 추진하는 분들과 협력해 캠페인을 하고, 컨퍼런스를 열고, 독일어 등 현지어로 교육 자료집을 만들어 나눠드리는 일이 다르지 않고요. 또 계속 새로운 일을 만듭니다.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마다 콘테스트를 열고 있어요. 첫 해는 그림, 이듬해는 동영상, 세 번째는 에세이 순으로 콘테스트를 했는데, 학생들이 점점 적극적으로 참여해 창의적이고 훌륭한 작품도 나와요. 한 고등학생은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 이용수 할머니와 연결시켜드렸더니 너무나 훌륭한 1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더라고요. 작년부터는 기부를 받아 미국 소재 6개 대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일을 시작했어요. 장학금을 받은 분들은 프로젝트를 해요. 그림이나 영화, 음악이 될 수도 있고 연구 과제도 가능해요. 저희는 다 모아서 발표회를 열고요. 올해도 진행 중인데, 오는 7월과 8월 중순에 각 2명씩, 그 장학금을 받는 학생 중 4명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에요. 연구소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교수님 중에도 관심을 나타내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식으로 미국 사회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작은 씨앗을 심는 거죠. 또 '영원한 증언 프로젝트', 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1차 번역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한 'UCLA 한국학연구소' 온라인 아카이브도 만들고 있어요. 아카이브에는 정리를 마친 1차 자료뿐 아니라 다큐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할머니들 증언이나 인터뷰도 올렸어요. 수업 지도안 같은 자료도 조만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소녀상을 세운 다음 그곳을 중심으로 계속 활동이 있어야 돼요. 저희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마다 거기서 추모제를 지냈어요. 그때 항상 커뮤니티 동포들이 와주시고 중국계, 아르메니아 분들도 와서 같이 추모했어요. 계속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 연례 행사도 하고요. 작년에 10주년 행사를 크게 했죠. 올해는 캘리포니아 LA시에서 운영하는 사회정의박물관에서 '위안부' 문제와 함께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알리고 학생들의 예술 작품을 포함한 전시회도 열고 있어요. 징 교수님도 도와주셨어요. 또 '위안부' 문제에 관심있는 교수님들이 저를 직접 부르는 경우가 있어요. 액티비스트 관점을 학생들한테 알려주고 싶은 거죠. 이 이슈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호응을 얻게 된 이유가 여러 캠페인을 하면서 싸움이 일어나고 논란이 증폭되면서 왜 그럴까 하는 관심으로 옮아가는 거잖아요. 학생들한테 사회 변혁을 위해서는 시민들의 풀뿌리 운동이 중요하다는 걸 가르치는 거예요. 그런 분들은 너희가 해온 활동에 대해서도 알려달라는 요구를 하세요. 저희가 '위안부' 문제와 함께 미국에서 어떤 활동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해주면 학생들이 굉장히 관심 있어 해요. 나중에 보면 중고등학교 때의 인연으로 대학에 가서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학생도 있는데, 그럴 때 엄청난 보람을 느낍니다.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는 방법 담은 첫 출판물 준비 중 Q. 말씀 중에 글렌데일 소녀상 이야기가 잠깐 나왔습니다. 소녀상과 관련해 민감한 이슈가 생기고 있는 상황이라 글렌데일 소녀상의 근황을 여쭤봅니다. 🧶 필리스 김 : 상징성이 큰 글렌데일 시 평화의 소녀상은 시의회에서 정식으로 통과된 다음 시에서 제공한 부지에 세워졌어요. 부지에 약간의 변동 사항이 있긴 했지만 시 소유라 잘 보호되고 있습니다. 시를 상대로 한 일본의 철거 소송도 이겨냈거든요. 저희가 소녀상을 반드시 공공부지에 세워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그런 안전성, 안정성 때문이에요. 지금도 일본 총영사가 바뀔 때마다 대놓고 소녀상을 없애는 것이 최우선 목표라는 얘기가 들리지만, 글렌데일 소녀상은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Q.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두 분은 협업하며 액티비스트 못지않게 많은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자료 조사를 하던 중 지금 책 발간 작업을 함께 하는 중인 걸 알았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진척됐고 각각 어떤 내용을 담을 예정인지 궁금합니다. 🧶 징 윌리엄스 : 작년에 필리스 김 대표님과 미국 유일의 사회학 교사 단체인 '전미사회학컨퍼런스(NCSS)'에 함께 참가했어요. '위안부' 관련 책을 출판할 수 있는 공신력 있고 잘 알려진 출판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출판물이 있으면 선생님들이 많은 걸 배울 수 있겠다 싶어서요. 같이 그런 출판사를 찾아 헤맸는데 잘 안됐어요. 그러다 NCSS에서 출판됐다고 하면 많은 선생님들이 공신력을 믿고 사용할 것 같아 저희가 제안을 했습니다. NCSS도 저희 제안에 관심이 많은데, 출판되면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는 방법을 담은 첫 번째 출간물이 될 겁니다. 다만 NCSS에서는 '위안부' 문제만이 아니라 인권 문제, 성별 문제 등 연관될 수 있는 다른 주제도 함께 포함해 달라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목차를 개략적으로 말씀드리면 첫 번째 챕터는 '위안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구조를 보면 각 챕터가 있고, 그 챕터 관련 내용과 함께 가르칠 수 있는 45분 정도 분량의 레슨 플랜, 수업 지도안으로 구성됩니다. 질문 중에는 '위안부'는 누구인가, 전 세계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 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수요시위는 무엇인가, 그리고 미국은 '위안부'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왜 이렇게 뜨거운 논쟁인가, 지금 생존하고 계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 등이 있습니다. 또 한국과 일본 간 2015년 협상은 어떤 내용이고, 무슨 문제가 있는가, '위안부'에게는 인권이 있는가, 그리고 가장 최근 '위안부'를 부정한 사건은 무엇인가, 이런 내용들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각 토픽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옆에는 레슨 플랜을 제시하고 있어 역사를 배우면서 가르치는 방법까지 깨닫게 되는 출판물입니다. 또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영어 어린이책, 다큐멘터리 리스트 등과 함께 할머니들의 증언과 자료도 정리할 거예요. 미래 선생님들이 지도안을 만들 수 있도록 최대한 풍부하게 자료를 담을 예정입니다. 🧶 필리스 김 : 이 한 권을 보면 어느 정도 믿고 가르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길 수 있는 책을 만들려고 합니다. 미리 말씀 드리는 건 부담스러운데, 내년에 나올 수 있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Q. 출판이 돼 국내 교육에도 활용되길 기대하겠습니다. 책이 나오면 한국의 교사들도 영감을 받을 거 같은데, 미국과 한국의 역사 교사들이 협업해 볼 수 있는 기회나 방법도 좀 있을까요? 🧶 필리스 김 : 사실 한국, 중국, 일본 교사들 간 협업은 여러 차례 있었고,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에서도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제가 한국이라는 특성 때문에 어려운 지점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위안부' 문제를 너무 민족주의적인 관점으로 보는 거예요.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보편적인 여성 인권 문제로 보거든요. 이런 관점이 우리 한국 사회 내 인식에도 상당히 변화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와 바람이 있습니다. 관련해 선생님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한 축이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선생님들께 응원을 전합니다. Credit 인터뷰어: 손정미, 소현숙 인터뷰이: 징 윌리엄스 사회교육학 부교수, 필리스 김 CARE 대표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4년 6월 3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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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인터뷰 ‘틈새’의 시점에서 본 일본군‘위안부’ 운동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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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사회적 침묵 끝에 1990년대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공개 증언이 나올 수 있었던 배후에는 탈냉전과 민주화, 탈식민 여성주의 인식론이 열어젖힌 새로운 담론공간이 존재한다. 종전에 민주화운동의 하위 부문으로 치부되던 여성운동 또한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성차별과 성폭력을 비판하면서 진영이 재편되었다. 이 시기 민족과 계급, 여성 차별의 모순이 중첩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헌신했던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199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며,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야마시타 영애 분쿄대학교 교수는 1988년부터 1998년 10년간 한국에서 유학하면서 한국정신대연구소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일본인 어머니와 조선인 아버지를 둔 자이니치 일본 국적자이며, 지난 2012년 한국에 소개된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위안부 문제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박은미 옮김, 한울아카데미)의 저자이기도 하다. 내셔널한 공동체의 안과 밖, 그 사이-틈새라는 어려운 자리/비판적 위치에서 한국과 일본 사회를 경험하며 ‘위안부’ 문제를 성찰해 온 야마시타 교수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이헌미 학술기획팀장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운동에 매진하면서 유학 전에 가졌던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이 해소되었다가, 크게 두 가지 사건, 즉 첫째, 1993년 고노담화에 대한 정대협 성명서에서 드러난 일본인‘위안부’ 인식, 둘째, 정대협의 국민기금 반대 활동을 계기로 한국 사회 및 정대협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직면하셨다고 쓰셨어요. 어떤 일들이 있으셨는지요. 특히 1993년의 사건이 저에겐 큰 충격이었어요. 고노담화 발표 직후에 정대협이 낸 성명서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었어요. ‘위안부’는 당시 공창제도 하의 일본 매춘 여성과 달리 국가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군대에서 성적 위안을 강요당한 성노예였다. “공창제도 하의 일본 매춘 여성과 달리”라는 말이 가장 걸렸죠. 그리고 ‘위안부’의 출신지에 관한 내용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전지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로서는 일본인을 제외하면 한반도 출신자가 많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인 여성은 성노예적 성격의 강제종군위안부와는 그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 일본인 ‘위안부’는 당시 일본의 공창제 아래에서 ‘위안부’가 되었고, 돈을 받았고, 계약을 체결하였고, 계약이 끝나면 ‘위안부’ 생활을 그만둘 수 있었다. 일본인 ‘위안부’를 은근슬쩍 이 보고에 집어넣은 것은 강제종군위안부의 성격을 흐리기 위함으로 보인다. 이 내용에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공창제도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는데,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공창제도가 들어왔잖아요. 공창제 연구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 당시 한국에서는 거의 전무했고, 일본에서는 많이 이뤄지고 있었어요. 공창제도가 있었기에 ‘위안부’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만큼 ‘위안부’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창제에 대한 연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연구해 보면 공창제 하의 여성들이 얼마나 노예적인지 알 수 있어요. 그들이 자유의사를 갖고 ‘위안부’가 됐다는 것은 남성적 시각인 거죠. 이것을 번역해 일본 단체에 보내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걱정됐죠. 그때는 여름방학으로 제가 일본에 있을 때였는데, 정대협에 연락해 그 부분을 빼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일본어판에서라도 빼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그 내용은 빠지게 됐습니다. Q. 국민기금이 나오면서 성금 분배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성, 피해자 다양성을 생각하지 않는 모습들이 보였잖아요. 그때는 어떤 고민이 있으셨나요? 정대협이 국민기금에 반대하는 건 그 때로선 당연했어요. 국민기금 정책으로 많은 일본 국민이 모금과 기부를 했고, 일본 정부가 갹출금을 내면서 애매한 모양새로 국민기금이 진행됐죠. 국민기금을 할머니들이 못 받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었어요. 저는 할머니들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대협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당시 사회적 분위기도 그렇고 정대협 분위기도 그랬는데, 국민기금의 ‘더러운 돈’을 절대로 받으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이 문제에 대해 윤정옥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선생님은 “가족 중에 당뇨병 환자가 있다고 생각해 봐라. 그분이 단 걸 먹고 싶다고 한다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셨죠. 즉 이 운동을 ‘우리’ 모두의 투쟁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지요. 증언집 작업을 하며 개인적으로 친분이 쌓인 할머니들이 몇 분 계셨는데 그분들 중에는 정대협의 말을 듣고 화를 내면서 저에게 전화를 해 오신 분들이 계셨어요. 윤정옥 선생님에게도 직접 전화가 갔으니 저보다 훨씬 많은 말을 들으셨을 거예요. 그래도 선생님은 신념이 있으셨죠.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셨고, 일본의 악랄한 행위를 경험했기 때문에 생각이 확고하셨던 거예요. 저처럼 외부에 기반을 둔 사람은 또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이고요. “너는 일본 사람이니까 우리의 마음을 모른다”는 말도 들었어요. 반은 맞는 말이죠. 그런데 납득이 안 가더라고요. 때마침 주디스 허먼의 책 『심적 외상과 회복』(한국어판 제목은 ‘트라우마’)이 1996년 12월에 일본어로 번역되어서 읽었는데 한국 활동가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식민지 피해를 직접 겪었든, 2차적으로 겪었든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그리고 그때까지 한국 사회든 정대협이든 ‘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피해로 바라보고 있었잖아요. 여성의 피해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인지 접근하는 연구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연구했어야 했는데 저도 그럴 능력이 없었어요. Q. 한국에서의 10년간의 체류 이전과 이후, 선생님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달라졌고 어떤 방향으로 진화했나요. 1993년의 그 일로 충격을 받고 나서 저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제가 한국 사람과는 생각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됐죠. 정대협 사람들과 일심동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예요. 어찌 보면 당연한 거죠. 한국과 일본처럼 가부장적인 국가 아래서 나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그런 체제하에서 양자택일 식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것은 타자를 차별하는 것과 연결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의 정체성을 국가에 소속시킬 필요가 없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자.’ 이것이 결론이었어요. Q. 일본군‘위안소’ 제도와 전시 성폭력, 성별화된 군사주의 비판 일반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자격)에 초점이 맞추어진 논의 지형에서 이슈의 젠더화 양상을 절감합니다. 특히 다양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이 존재하는데, 해결 운동 과정에서 ‘순결한 민족의 피해자’상에 맞춰 일원화, 표준화된 경향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배제되고 누락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남성중심적 성관념 비판, 여성 섹슈얼리티 및 노동의 착취와 비가시화 문제, 기지촌 여성 인권 문제와 연동되어 오늘날 현재진행형의 문제로 보편화되지 못함으로써 (일종의 끝난 운동으로서) 생명력을 잃고 게토화, 고립되는 양상과도 관련되는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990년대에는 불가피한 지점이 있었죠.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도 운동이 크게 달라지지 못했던 것 같아요. 수요시위의 ‘끝’에 대해서도 90년대에 이야기가 나왔는데 마무리 짓지 못했습니다. 수요시위는 일본에 항의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이 문제를 한국과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에요. 수요시위를 해서 일본을 규탄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요. 일본 정부는 달라지지 않아요. 더 많은 연구가 되어야 합니다. 1990년대부터 윤정옥 선생님은 정대협과 연구소가 합쳐져야 한다고 하셨어요. 운동의 중심을 연구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셨지요. 2000년 법정 직후에도 그런 논의가 있었지만 성사되지 못했어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겠지만 밖에서 보면서 아쉬웠습니다. Q. 1995년의 국민기금과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는 피해자들과 한일 활동가들을 분열시켰다는 점에서 굉장히 아쉬운, 일종의 실패한 기획으로 보입니다. 또한 1990년대와 2000년대 일본 법원을 상대로 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는 모두 기각되었습니다. 그 점에서, 일본에서의 의원입법운동(전시 성적강제 피해자 문제의 해결 촉진에 관한 법안)이 사법정의를 넘어선 ‘포스트콜로니얼’ 입법정의의 시도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관부재판 1심에서 승소한 결과 국회의원들의 입법 의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유엔의 권고가 법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됐죠. 그래서 모토오카 쇼지 의원 등이 중심이 되어 입법안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피해자 지원단체가 수긍하지 않으면 입법안을 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국민기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국민기금은 협의나 설득이 되지 않은 채 강행한 것이었잖아요. 그런 경험을 앞서 했기 때문에 정대협에서 찬성하지 않으면 진행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 입법안에서는 일본인‘위안부’를 제외했어요. 외국인 피해자들만 대상으로 한 거죠. 일단 이 법안을 제정한 후에 일본인‘위안부’도 포함하는 내용으로 개정하면 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결국 입법 자체도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Q.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2015년 한일 정부 간 합의가 가져온 논란과 운동단체장의 국회 입성과 피해자의 고발, ‘위안부’ 피해 부정론과 여성혐오의 소용돌이 속에서 너무 빠르게 기억이 휘발되고 담론 지형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피해자들과 1세대 운동가들의 작고 속에서 운동사의 정리 또한 필요한 시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2022년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의 증보판 부제를 ‘페미니즘의 과제’라고 하셨는데요.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위안부’ 문제를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다시 고찰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쓰게 됐습니다. 2020년 5월에 이용수 님의 문제 제기가 있었을 때 90년대 정대협 활동을 했던 한 사람으로서 반성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또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가부장적 시각에서 ‘위안부’ 문제 때리기 현상이 있었고 한국을 포함해서 글로벌하게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이런 세력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기존의 운동을 옹호하거나 자기 진영논리를 앞세우는 언설이 아니라 철저히 페미니즘적 시각에 서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운동이 페미니즘적 시각과 열정으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또 어떤 특성을 갖고 있었는지,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지금은 어떤 단계인지, 일본에서는 어떤 과제가 있는지 등을 써서 일본의 젊은 세대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90년대에는 조금이나마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논의가 점점 사라졌죠. 제가 2008년에 쓴 책에서도 ‘한국 페미니스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 바 있습니다. 다행히 2020년 전후로 활발해진 것 같고, 그러한 기조가 지속되었으면 합니다. 일본 사회 문제도 심각해요.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논의가 활발해지면 반드시 일본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함께 연구도 하고 토론도 하면 더 좋지요. Q. 마지막으로 현재 진행 중인 연구에 관해 말씀 부탁드리며, 향후 생각 중인 연구 방향이 있으신지 함께 여쭙니다. 한국 드라마의 역사를 한국 페미니즘의 역사와 연결 지어서 연구하고 있어요. 또 북한의 젠더에도 관심을 두고 있는데 그게 제 마지막 과제 같습니다. 민족학교를 졸업한 후 아이덴티티의 혼란을 겪어서인지 북한에 대해서는 뚜껑을 닫아버렸어요. 그 후 한국 사회나 여성문제에 대해서만 다뤘는데 뭔가 빠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북한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한반도의 가부장제가 어떤 식으로 남북한에 남아있고 또 새로 형성됐는지 들여다보고 싶어요. 일본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웃 나라인 북한에 대해서도 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핵문제나 세습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북한 드라마와 젠더를 연구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이헌미 인터뷰이: 야마시타 영애 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일시: 2023년 5월 16일 화요일 장소: 한국여성인권진흥원(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50 센트럴플레이스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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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인터뷰 미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는 자국중심주의 극복하는 글로벌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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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 윌리엄스 사회교육학 부교수 & 필리스 김 CARE 대표 인터뷰 <1부> 미국 사우스다코타대학교 사회교육학 징 윌리엄스 교수와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의 필리스 김 대표, 미국인들에게 '먼 나라의 오래전 불행한 역사'라 할 수 있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고 인권 문제로 접근해 교육하고 활동하는 이들이다. 2018년에 처음 만난 이후 '위안부' 문제 연대 활동을 해온 두 사람은 현재 공동 저술 작업을 진행 중이다. 내년쯤 나올 예정인 이 책은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는 방법을 담은 첫 번째 출간물이 될 예정이다. 웹진 <결>은 연구차 한국을 방문한 징 윌리엄스 교수와 서울에 체류 중인 필리스 김 대표를 인터뷰해 2회에 걸쳐 싣는다. <1부> 미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는 자국중심주의 극복하는 글로벌 시민교육 <2부> 국제사회 왜곡 막고 공감 넓힐 영문 '위안부' 증언집 발간되길 Q.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자기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 징 윌리엄스 : 저는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언어에 관심이 많아 천진사범대에서 영어영문학 번역 석사를 마쳤어요. 2014년 미국 오하이오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곧바로 임용된 사우스다코타대학에서 사회교육학 부교수로 일하며 초등 및 중등 사회 연구 방법론을 가르친 지 10년 정도 됩니다. 🧶 필리스 김 : 저는 스무 살, 대학 2학년 때 가족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갔어요. 한국 이름은 김현정입니다. 대학을 마치고 법정 통역사로 활동했습니다. 지금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COMFORT WOMEN ACTION FOR REDRESS & EDUCATION. 이하 CARE)'의 대표로 있는데요, 2020년 '영원한 증언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왔다가 코로나사태로 발이 묶인 후로 서울에 장기 체류 중입니다. 물론 전시나 행사가 있을 때 미국을 오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목하게 된 계기 Q. 교육, 특히 역사 교육에 대한 중요성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항상 강조돼 왔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더 특별한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미국 사회에서 보자면 아무래도 오래 전 먼 아시아에서 전쟁 중에 일어난 '남의 나라의 불행한 역사'일 텐데, 그 안에서 꾸준히 연구하고 관련 활동을 해오신 두 분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 징 윌리엄스 : 말씀드렸다시피 중국 태생이라 난징 대학살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군이 동아시아 전역에서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미국으로 유학간 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보니 전시 하 아시아 역사는 아주 간략하게 다루는 반면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가득했습니다. 너무나 대조적이라 왜 그럴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된 거죠. 역사 교육을 계속 연구하는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를 조금 더 깊숙이 파게 됐고, 선생님 혹은 교육자가 돼서 가르칠 때 이 내용을 꼭 포함시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목표 중 하나는 사회학을 가르칠 때 전 세계적인 관점을 녹여내는 것입니다. 🧶 필리스 김 : 이민 간 지 얼마 안 된 1992년 4월 29일, 저희 가족이 살고 있던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사회에 엄청난 피해와 후유증을 남긴 'LA폭동'이 일어났어요. 그 현장 한 가운데 있다 보니 미국 내에서 한인으로 산다는 것, 나아가 이민자 커뮤니티와 인종 갈등, 사회 정의, 여성 문제 같은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커졌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만난 직접적인 계기는 2007년 채택된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 Res. 121)' 캠페인이에요. 전국 네트워크 중 하나인 서부 캘리포니아 캠페인팀에서 이용수 할머니를 미국으로 초청했는데, 제가 통역사다 보니 할머니의 눈과 귀가 돼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결의안이 채택되면서 제 역할은 끝난 줄 알았는데 이후에도 사죄나 책임보다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 변함이 없고, 오히려 국가 차원에서 '역사 전쟁'을 치르는 것을 보고 '뭔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 특히 미국에서의 활동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2007년 캠페인을 함께 했던 분들과 단체를 만들고 2013년 글렌데일 시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캠페인, 2017년 중국계 분들이 주도해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선보인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설치 프로젝트 등에 참여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계속 '이슈'를 만드는 일본 때문에 멈출 수도 없었어요. 글렌데일 시에 소송을 걸고, 샌프란시스코 기림비가 설치되자 오사카에서 자매도시 인연을 끊겠다 하고, 일본 외교관이 교과서 저자인 교수에게 '위안부' 관련 문구를 삭제하라고 압박했다는 소식이 언론으로 전해지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그런 방해가 양날의 검이기도 했던 게 저희의 기운을 빼고 정치인을 의기소침하게 하기도 했지만, 교육계·법조계 등에서 '위안부' 문제를 주목하게 되는 효과도 있었어요. 이해관계가 없는 분들에게는 더 깊게 이해하고 지지하는 계기도 됐고요. Q. 거대하고 다양성이 강한 미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활동을 접한 시민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잘 가늠되지 않습니다. 실제 현장에서 체감하게 되는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필리스 김 : 미국 사회 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이 10년 사이 얼마나 변했다 하는 걸 보여주는 데이터나 연구는 없지만 획기적인 변화 중 하나가 캠페인을 벌인 캘리포니아 주에서 '위안부' 문제를 '성노예 제도의 예로 가르칠 수 있다'는 문구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 과정에 포함된 것입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캘리포니아, 뉴욕 주 같은 곳에서 먼저 진보적인 변화가 시작되고, 다른 주들이 따라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때가 2016년이었어요. 사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교과 과정에 포함시켜도 아무도 가르치지 않으면 효과가 없잖아요. 직접 선생님들을 만나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부터 전국 단위까지 다양한 컨퍼런스에 다녔습니다. '레슨 플랜', 그러니까 수업 지도안 같은 교육 자료를 싸들고 가서 세션도 열고, 프리젠테이션도 하고, 부스를 마련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질문하는 선생님이 있으면 알려드리기도 했죠. 그렇게 해도 2017년, 2018년 무렵까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에 대한 선생님들의 이해가 낮았어요. 그러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2023년 11월에 다시 대면으로 열린 전미 사회학 컨퍼런스에서 윌리엄스 교수님과 세션을 하고, 얼마 뒤에는 캘리포니아에서도 세션을 했어요. 그때 깜짝 놀란 게 많은 선생님들이 세션이나 부스를 찾아와 '나 '위안부' 문제 알아, 더 좋은 자료 있니?' 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가르쳐 봤어.' 하는 거예요. 몇 년 전만해도 '위안부' 문제를 설명하면 성과 폭력이 들어가 있어 부담스러운 주제라며 두려움과 우려를 나타냈다면 이제는 ''여성 인권'에 대한 문제로 아이들에게 정말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좀 더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더 알려 달라'라고 하는 걸 보면서 변화를 체감했습니다. 🧶 징 윌리엄스 : 필리스 김 대표님 말씀처럼 10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도 제가 얘기하면 그때서야 많은 교육자분들이 큰 충격에 휩싸여 '어떻게 내가 몰랐을까' 했어요. 제가 고등 교육을 담당했는데, 처음에는 '위안부' 문제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일어난 난징 대학살을 연구하려고 했어요. 난징 대학살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강간을 당하고 피해를 입는지를 연구하게 됐고, 그래서 '위안부' 문제를 집중 조명하게 되었습니다. 필리스 김 대표님과 저는 전미 사회학 관련 컨퍼런스 때 부스에서 처음 만나 2018년 이후부터 같이 일해 왔습니다. CARE에서 받은 자료 사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을 사용해 제가 약 90분 분량의 '레슨 플랜'을 만들었어요. 그 지역 고등학교에서 한번 사용해 보기로 했죠. 아이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들려줬는데 역시 '충격'이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객관적 역사와 정서적 공감에 기반한 수업 지도안 Q. 그렇게 인식을 변화시키는 교수님의 수업 지도안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 징 윌리엄스 : 90분 정도 진행되는 수업은 제가 일본의 전반적인 역사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요. 일본 제국과 메이지 시대, 그리고 어떻게 군사화와 근대화가 가능했는지, 20세기 일본이 어떻게 해외 진출을 하게 되었는지를 개략하는데, 갑자기 일본이 이랬어라고 말하기보다 역사 전후를 알려주는 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일본이 중국 북동 지역을 어떻게 침략했는지, 난징 대학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특히 난징 대학살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는지 설명하다보면 위안소를 설치해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한 사실 등과 만나게 됩니다. 물론 수업에서 너무 적나라한 이미지나 사실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시각적으로 자극적인 이미지나 자료는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으니까요. <디 어폴로지(The Apology)>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며 조금씩 설명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에는 중국, 한국, 필리핀 '위안부' 할머니 세 분이 나와요. 학생들은 할머니들의 증언을 자연스레 듣게 됩니다. 다큐멘터리를 본 다음 제가 몇 가지 질문을 해요. 어떻게 이 할머니들이 끌려가게 되었는지, 당시 할머니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얼마나 오랜 기간 '위안부'로 생활했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 후에 할머니가 아이를 출산한 경험이 있는지, 할머니가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일지 등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공감해야지만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만약 일본 정부가 사과한다면 상황이 조금 나아질까? 할머니들의 마음이 그나마 좀 풀릴까?' 물어봤더니 '아니다. 할머니에게서 가장 중요한 걸 앗아갔기 때문에 사과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데 사과조차 안 했으면 어떻게 할까'라고 했더니 '인정할 수 없다, 그건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업은 대략 이렇게 진행됩니다. 저는 '위안부' 문제 같은 민감한 사안을 '디피컬트 히스토리(Difficult History)', 풀이하면 '어려운 역사'라고 하는데요. 어렵고 민감한 사안에는 강간, 성폭력이 포함돼요. 또 이렇게 '어려운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서도 가르칩니다. 대학에서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될 사람들이에요. 어려운 주제의 예시로 '위안부' 문제를 들어 '나는 이렇게 가르칠 것 같다'고 생각을 나누고, 학생 자신들이 가르치고 싶어 하는 주제에 대해 어떻게 커리큘럼을 꾸려나갈지 함께 레슨 플랜을 짜기도 합니다. Q. 말씀을 들으니 수업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주제를 놓고 상호 교감을 이뤄가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미국의 중등, 대학 교과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약간 부가적인 설명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 필리스 김 : 미국은 주에서 고등학교 세계사 과정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제시해 주는 주제들이 있어요. 대개 8~10년에 한 번씩 개정하면서 새 이슈를 넣고, 특정 설명을 바꾸기도 합니다. 아까 캘리포니아 주에서 '위안부' 문제를 '성노예 제도의 예로 가르칠 수 있다'는 문구가 교과 과정 아이템에 포함됐다는 건 고등학교 세계사 과정에서 배워야 하는 여러 주제 중에 '위안부' 문제가 들어갔다는 의미예요. 그 중에 교사가 주제를 선택해 가르치게 됩니다. 그런데 교사가 원하는 주제를 가르치려면 준비가 필요하잖아요. 45분짜리 수업 2개로 구성된 징 윌리엄스 교수님 수업 지도안은 그 교사들이 수업에서 활용할 자료예요. 교수님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예비 교사니까 지도안을 이들에게 활용하기도 하고, 실험적으로 고등학교에 실제로 가서 수업 지도안을 활용해 '테스트 티칭'을 하기도 하고요. '위안부' 교육은 미래를 위한 씨앗을 심는 일이기도 Q. 도입부에도 나왔지만 한국이나 아시아 국가는 자신들의 과거사이고, 피해 경험이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자기 문제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여성 인권처럼 보편성에 기반해 공감할 수 있지만 미국 사회는 대개 제3자의 역사로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이런 미국 사회에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게 어떤 중요성을 가지는 걸까요? 🧶 징 윌리엄스 : 제가 사회학을 연구하고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글로벌한 관점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도 미래 교육자로서 글로벌한 관점으로 가르치길 바라고요.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겠지만 특히 자국중심주의가 강한 미국은 자국과 연관이 없으면 교육에서 배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글로벌 교육, 글로벌 시민에 대한 정의는 다양할 것 같은데, 저는 전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일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사람들을 '케어'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더 큰 세상으로 나갈 기회가 있습니다. 글로벌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인 일에 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단순히 '위안부' 할머니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인권 문제입니다. 제 수업에 여학생들이 많은데, 우리가 지금은 안전한 곳에 살고 있지만 몇 년 전에 이 나라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단순히 이 문제를 꼭 끝내야 된다는 게 아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이 그 첫 단추를 꿰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몇 년 뒤에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 여성 인권 옹호자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저는 '미래를 위한 씨앗을 심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여성 인권과 연결하면 아이들은 관심을 보입니다. 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등에서 오늘도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특히 여학생은 ‘위안부’ 할머니에 대해 더 깊이 공감하고 마음 아파합니다. 수업이 끝난 후 받은 설문조사를 하는데,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어요. 한 학생의 대답을 짧게 요약해 볼게요. '일본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기적이고 잔인하고 인간적이지 않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들도 잘못하면 그 잘못을 인정하라고 배우는데 심지어 일본 정부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피해 여성들은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뒤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또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나서서 본인이 당한 일을 공유해 주었습니다. 특히나 한국의 문화에서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공유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강간을 당하면 바로 신고하는 게 어렵습니다. 저는 만행을 저지른 남자들은 절대 잘못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꼭 법적으로 관련 조치와 벌을 받아야 됩니다. 이 남성들은 '위안부'를 여자로 인식한 게 아닙니다. 단순히 성적 장난감으로 본 것이고 본인의 쾌락을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저는 부끄러움, 트라우마, 정의롭지 못한 행동 그리고 인정하지 않는 이 모든 행동 자체가 잔인하게 보입니다.' 아르메니아 '인종 청소'와 홀로코스트 Q. '위안부' 문제와 인권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와 공감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 필리스 김 : 돌아보니 저희가 교육이나 소녀상과 기림비 설치를 위한 캠페인을 할 때 똑같은 질문을 하는 미국인이 있었어요. 미국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미국인이 당한 것도 아닌데 왜 우리가 그걸 알아야 하느냐고요. 그럴 때 저희는 세 가지 설명을 해요. 첫째는 홀로코스트가 미국에서 일어나거나 미국인이 홀로코스트를 당하지 않았지만 배우잖아요. 너무나 중요한 인권 문제,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세계사적 비극이기에 누구나 배워야 한다라고 얘기하면 모두 동의해요. '위안부' 문제도 같은 얘기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100년도 더 지난 1910년경 아르메니아에서 일어난 '인종 청소'예요. 당시 생존자들은 자기들의 고통에 대해 한 세대가 지날 때까지 침묵을 지켰어요. 그러다 다음 세대가 그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터키 정부에 사실을 인정하고 정의를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그분들이 하는 얘기가 그때 바로 국제사회에 '인종 청소'를 알리고, 해결을 요구했더라면 홀로코스트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거였어요. 이제 4세대로 접어들고 있지만 아르메니아에서는 지금도 보편적인 인권 문제로 열심히 가르치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문제라는 거예요. 국가가 저지르는 전시 성폭력을 말할 때 항상 먼 아프리카나 중동 국가를 떠올리지만 사실 미국에서도 조직적인 성폭력, 인신매매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할머니들의 얘기와 흡사해요. 70년, 80년이 지났지만 결국 본질은 같은, 현재 우리 커뮤니티와 깊이 관련된 문제인 거예요. 마지막으로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들이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낸 최초의 어마어마한 사건이라는 점을 얘기해요. 그전에도 얼마나 전시 성폭력이 많았겠어요. 그럼에도 항상 피해 여성들이 죄를 뒤집어쓰고 부끄러워하고 숨어야 했는데, 처음으로 우리 할머니들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셨잖아요. 여성학의 관점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인데, 침묵을 깬 할머니들이 '액티비스트'로 변해 이 운동을 이끈 건 정말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해요. Credit 인터뷰어: 손정미, 소현숙 인터뷰이: 징 윌리엄스 사회교육학 부교수, 필리스 김 CARE 대표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4년 6월 3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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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소송 1부 - 하나의 논문으로 시작된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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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소송 1부. 하나의 논문으로 시작된 대일배상청구소송 2부.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중국은 19세기 말 일본군‘위안부’ 제도가 최초로 실행된 발원지로서, 한국과 더불어 ‘위안부’ 제도의 최대 피해국 중 하나이다. 그러나, 성적 순결을 잃은 여성을 가족의 수치이자 민족의 치욕으로 여겼던 가부정적인 중국 사회 속에서,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중국 국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시작으로 ‘위안부’ 문제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한 이후부터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또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 가장 큰 쟁점은 바로 일본의 법적 책임과 그에 따른 개인 청구권 문제이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처음 중국 국내에서 쟁점화되었을 때, 일본 정부를 향해 일관되게 피해 배상을 요구해온 민간단체와는 달리, 중국정부는 일본정부를 향해 배상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최대 피해국으로서, 전쟁배상에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는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중국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 글에서는 중국 ‘위안부’ 피해자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중국 정부와 민간단체의 입장 및 대응 차이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법학 강사 통정(童增)의 논문으로 시작된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중국 사회의 수면 위로 드러나기 이전이었던 1990년대 초, 중국 국내에는 이미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 베이징 화공 관리 간부 학원(北京化工管理干部学院)의 법학 강사였던 통정(童增)은 동유럽 국가들의 전쟁배상 소송 기사를 접한 후, 중일 간 전쟁 피해 배상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연구를 통해 「중국은 일본에 피해배상 요구를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다(中国要求日本“受害赔偿”刻不容缓,1990)」라는 제목의 논문을 작성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국가배상과 민간배상은 분리해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중국 정부에 의해 국가의 배상청구권은 포기되었으나,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통정은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 신문사, 잡지사 등 각종 매체를 찾아갔지만 민감한 문제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1] 통정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1991년 3월 베이징에서 제7기 전국인민대표대회(이하 전인대) 제4차 회의가 열리자 통정은 각 성의 인민대표들이 묵고 있는 호텔에 직접 찾아가 자신의 논문을 전달했다. 귀주(贵州) 전인대 대표단의 왕루셩(王录生)은 통정의 논문에 관심을 보였고, 이를 전인대 제5차 회의에서 의안으로 제기하고자 했다. 왕루셩은 인민대표들에 이 문제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통정에게 국제법의 관점에서 국가배상과 민간배상의 개념 차이 및 배상 문제를 자세히 설명한 글을 다시 작성하게 하였다. 이에 통정은 「국제법의 신개념—피해배상(国际法的新概念—受害赔偿)」이라는 글을 완성하고 그해 5월 『法制日报(법제일보)』에 발표하였다.[2] 이후 왕루셩을 비롯한 32명의 귀주 전인대 대표 그리고 왕공(王工) 및 38명의 안훼이(安徽) 전인대 대표가 각각 대일배상 요구에 관한 의안을 제기하였고, 이는 전인대 제5차 회의의 제7호의안과 제10호의안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두 의안은 사회 각 계층의 관심을 받았고, 현지 매체들은 통정의 글을 빠르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위안부’ 문제 민간연구가 장솽빙(张双兵)은 통정의 글을 읽고, 허우둥어(侯冬娥) 할머니를 찾아가 피해 사실을 고백하도록 설득하였다. 거듭되는 설득에 할머니는 55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피해 경험을 털어놓았다. 1992년 7월 7일, 장솽빙의 도움으로 허우둥어 할머니를 포함한 중국 산시성(山西省)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5명과 친족 3명은 주중일본대사관에 사죄 및 배상을 요구하는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는 중국의 ‘위안부’ 피해자가 처음으로 일본 정부에 제기한 피해배상 요구로서, 중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오랜 기간 숨겨왔던 자신의 피해 경험을 고백하고, 일본 정부를 향해 사죄 및 배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통정은 피해자들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맡아줄 변호사를 물색했다. 1994년 5월 6일, 중국의 대일소송 문제에 관심이 있던 한 일본 기자가 일본 민주 법률가협회 사무국장 오노데라 토시타카(小野寺利孝)에게 중국의 상황에 대해서 알렸다. 이후 기자의 도움으로 오노데라는 통정과 만남을 가졌고, 중국 피해자들의 상황을 인지하게 되었다. 오노데라는 그해 8월 통정과 협약을 맺고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대일 손해배상청구소송의 법률대리인이 되었다. 오노데라는 32년 동안 이에나가사부로의 역사교과서 재판을 담당했던 오야마 히로시(尾山宏) 변호사를 변호단 단장으로 임명하고, 그의 추천에 따라 731부대 및 난징대학살 소송 담당자 와타나베 하루미(渡边春己) 그리고 한국, 필리핀 일본군‘위안부’ 소송을 담당했던 오모리 노리코(大森典子)를 주축으로 발기인그룹을 조직했다. 이는 일본민주법률가협회 및 일본변호사연합회 변호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많은 변호사들이 중국의 ‘위안부’ 피해자 조사 및 소송 활동에 참여 의향을 밝혀왔다. 이에 따라 중국인 전쟁손해 법률조사단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총 4차례 중국을 방문해 현지를 조사하고 피해자와 만났다. 이후, 1995년 8월 중국인 전쟁 피해 배상청구사건 변호사단이 조직되면서, 대일소송을 위한 ‘위안부’ 피해자 개별 사례 조사가 정식적으로 실시되었다. 이외에도, 일본 오카야마 대학의 이시다 요네코 교수를 비롯한 일본의 학자, 변호사, 학생 및 일반인들이 중국에서 발생한 일본군대의 성폭력 진상 조사 및 배상청구 소송 지원회(이하 차명회)를 1996년 10월에 결성했다. 이들은 중국 산시성 거주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고, 동시에 대일소송을 지원했다. 이처럼 일본 민간단체의 도움과 함께, 본격적인 중국의 ‘위안부’ 피해자 대일 손해배상청구소송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중국 ‘위안부’ 피해자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사례 1995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제기된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은 총 4건이며, 4건 모두 패소하였다. 각 소송 사례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일본 재판부는 아래 논리를 원용하여 ‘위안부’ 피해자의 청구를 기각했다. 1) 군속, 일본군´위안부´ 등으로 강제동원됐던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요청을 기각하는 판결을 내놓았다." popuptitle="일본 민법 제724조" data-url="/taxonomy/term/440">일본 민법 제724조에 따라 청구권의 공소시효는 만료되었다. 2) ‘위안부’ 제도는 일본 헌법 제정 이전에 발생한 행위로 국가에 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다. (국가무답책) 3) 국제법상 개인이 주체가 되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할 수 없다. 4) 1952년 대만과 일본 사이에 맺은 일화평화조약으로 중국인의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었다. 5) 1972년 중일공동성명의 제5조(중화인민공화국정부는 중일 양국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의 청구를 포기하는 것을 선언한다.)에 의해 중국인의 개인청구권은 이미 소멸되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각주 ^ 童增:中国存在强大的反日、仇日、厌日情绪(2013/09/14), http://news.ifeng.com/mainland/special/ribenguan/detail_2013_09/14/29613716_0.shtml ^ 王录生:《民间对日索赔》议案提出内幕. 时代潮,2005(17):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