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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좌담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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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기림의 날 특집 : 일본군‘위안부’ 역사, 우리 모두의 삶 오키나와의 할머니, 배봉기 님이 돌아가시고 7년이 흐른 뒤, 그 반평생을 취재하여 기사로 엮어낸 일본인 기자가 있습니다. 매 학기 대학 강의실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다양한 논점을 학생들과 토론하는 서울의 교수님들이 있습니다.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역사를 알리고 소수자 혐오범죄 및 성폭력 방지 교육활동을 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시민단체가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교훈은 저마다의 공동체와 시민적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변화를 촉구합니다. 2023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그 작지만 큰 실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1.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에서 걸어온 전후(戦後) 2.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 3.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 4.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I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칠 때 넓은 의미에서의 민족주의 담론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장휘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학생의 생애사로부터 온 코스모폴리탄적인 생각이 강의실에서 더 많이 공유되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회가 식민지 피해자 의식과 결합되어 민족주의가 강고한 나라인 건 사실이죠. 분단도 한몫을 하는 것 같고요. 하지만 아직 강의실에서 이런 얘기를 열어놓고 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또 학생들이 대중화된 역사 이슈에 대해서는 정밀한 지식을 가지지 않으려 하는 특징이 있다 보니 그 부분에 대해 가르쳐줘야 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고요. 김신현경 독일에서 한국학 공부하는 친구들을 가르칠 때가 생각납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은 그전부터 있었지만, 제대로 공부해봐야겠다 싶었던 건 그 친구들을 만나면서부터예요. 그들은 굉장히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간호사인 어머니가 한국에서 오셔서 독일 남성과 결혼한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위안부’ 이슈에 대해 굉장히 집요하게 실증적 태도를 요구하더라고요. 가령 위안소가 구체적으로 몇 개였냐는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 당시 저는 입장적 지식을 갖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런 반응이 돌아오니 당황스러웠어요.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게 숙제였습니다. 나중에 그 맥락을 이해했는데, 그 친구는 한국과 독일의 관계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었어요. 독일에서 한국학은 상대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일본학, 중국학과 비교해 볼 때 역사가 짧습니다. 이제야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대학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추세죠. 그래서 한국학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을 갖고 있는, 즉 ‘우리가 이 문제를 잘 다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저도 아시아 여성의 입장에서 ‘위안부’가 한일 관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지식으로 펼쳐 보이는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특히 서구가 어떻게 개입돼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식민주의와 냉전체제의 착종이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 복잡하게 꼬이게 했는가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습니다. 장휘 학생들에게 민족주의적으로 쓰이지 않은 글만 읽히는데도 아이들이 쓴 글을 보면 아직도 ‘한 떨기 소녀’, ‘꺾인 소녀들’이라는 표현을 써요. 온라인상에서는 그런 이미지나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현재 ‘위안부’에 관한 논의는 굉장히 확장되어 있고 다른 상황들도 펼쳐지고 있지만, 여전히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이해하려는 관성이 강해 그것을 벗어난 논의를 강의실에서 전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고, 이것을 자기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점점 더 어려운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신현경 ‘위안부’ 문제가 한일 관계와 정치외교 이전에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라는 말은 물론 맞지만, 그렇다고 그 프레임 하나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식민주의와 냉전체제, 여성에 대한 폭력과 동원 등이 복잡하게 펼쳐진 장이라는 논의로 끌고 가려고 할 때 다른 맥락의 저항이 있어요. ‘한일 민족주의가 아니고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봐야 한다’는 수준에서 멈추고 싶거나, 그 정도로 이해하는 것만도 학생들로서는 충분히 고통스러운 거죠. ‘이것이 과거에 일어난 여성 폭력인데 피해는 아직도 제대로 된 인정을 못 받고 있고, 그럼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일은 언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지금 제가 가르치고 있는 교실에선 이런 식의 역동을 관찰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이 이슈가 가진 특수성과 주목성 때문에 종종 다른 반인권적 전쟁범죄 피해(강제동원, 원폭 피해자 등)와는 고립되어 다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불어 한일 양자관계에서의 민족주의적 대결로 반복해서 이슈화됐고요. 그러다 보니, 전쟁과 군사주의가 양산해 내는 성 정치경제에 대한 제도 비판이 비교사적 시각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문 것 같은데요, 이러한 여성 인권 이슈로서의 특수성, 민족주의 이슈로서의 대중적 호소력, 전쟁의 피해에 대한 구조적 성찰보다는 개개 여성 피해자들을 반복해서 호명하는 문제 등등에 대한 선생님들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김성운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하나의 역사로 남게 되겠죠. 역사 교수로서 그것을 가르칠 의무가 있는데, 결국 기억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 같습니다. 아베 총리는 일본 정부가 여성을 강제 동원했다는 문서적 증거가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 저는 강의실에서 문서의 가치와 구술 증언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전쟁 당시의 문서가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전후에 일본군이 다 태웠기 때문이에요. 자신들의 범죄가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이란 걸 알았던 거죠.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직접적인 증언은 매우 중요합니다. 문서자료라는 것도 결국 처음에는 사람의 말에서 시작된 것이에요. 조선왕조실록도 ‘왕이 이런 말을 했다’라고 받아 적은 거잖아요. 따라서 문서화된 피해자분들의 구술 증언도 하나의 사료로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죠.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후대의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연구를 하게 될 겁니다. 결국 기억이라는 것은 문서화, 역사화 될 수밖에 없고, 이것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서도 발견할 수 있죠. 일본군‘위안부’ 피해가 과거의 일이라고 하지만, 피해자분들은 현재 살아 계시고, 또 전시 성폭력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1990년대의 세르비아 전쟁도 그랬고, 나이지리아 보코하람의 여학생 집단 납치 사건, 그리고 최근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조직적인 강간이 있었던 것을 보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성폭력 문제도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어요. 따라서 이건 보편적인 문제이고, 그런 측면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Q. 정책 환경적으로는 올해나 내년이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들은 앞으로 강단에서 ‘위안부’ 이슈를 어떻게 가르치고자 하시는지요. 장휘 큰 맥락 안에서 민족주의와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학생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려 해도 여전히 ‘힘없이 꺾인 꽃들’이라는 식의 이미지를 가지고 와서 받아들여요. 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위안부’가 어떻게 재현됐는지를 보면, 요즘에는 운동가로서의 면모도 부각되고 있지만 이전에는 그들이 겪은 피해와 고통이 주로 극화되어 재현됐죠. 그 기억들이 주변 환경이나 상황이 변화한다고 해서 한 번에 바뀔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국민 정체성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억이 됐기 때문에 정치적인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없었던 일처럼 되진 않을 거예요.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좀 더 수용 가능한 기억,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억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신현경 여성학적 관점에서 ‘위안부’ 이슈에 대한 해석을 더욱 확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의 몸과 성에 가해진 폭력이라는 것을 넘어서는 여성주의적인 분석과 연구가 많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지점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아요. 로라 현이 강 선생님의 책 『Traffic in Asian Women』(2020)을 보면, 1970년대 미국에서 강력한 페미니즘 제2물결 운동이 일어나면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가 전반적으로 제기됐을 때, 일본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온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와 기생 관광에 대해 글을 썼다고 해요. 그런데 그 당시 미국의 상황 안에서 그 글들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죠. 백인 여성의 성폭력 피해에 비해 아시아 여성의 피해는 문제 되지 않았던 겁니다. 아시아 여성의 성폭력 피해를 말할 때 ‘위안부’ 문제가 대표격이 된 것에 미국 중심의 아카데미 담론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미루어볼 때, 어떤 면에선 아시아 여성을 본질화하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따라서 성폭력이 피해자의 정체성으로 환원되는 힘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가되, ‘위안부’ 문제를 훨씬 더 보편적 지식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중이 이것을 자신의 기억 또는 이야기와 연결시킬 수 있는 언어의 발명이 필요해요. 그런 점에서 연구하고 교육해야 할 지점은 무궁무진합니다. 이런 시도를 하고, 또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의 경험을 나누고 대화를 나누는 장이 많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김성운 지금도 여전히 할머니들의 말을 부정하는 수사가 있잖아요. ‘그들의 말을 어떻게 믿느냐. 매춘하러 갔는데 변명하는 거다’라는 식으로 매도하는데, 역사 자료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리고 기억이 어떻게 역사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메커니즘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면 각자의 경험이 다를 수밖에 없고, 이를 통해 더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어요. 그런데 여전히 수정주의적인 시각이 존재하고, 그것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외교 담론으로 재생산되고 있죠. 일본 정치가들은 끊임없이 망언을 하고, 일본의 사회/역사 교과서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여전히 교실에서는 ‘위안부’ 문제는 실존했고, 심각했고, 피해자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연구자들은 민족주의를 넘어 그다음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대학 강단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Q. 장휘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문제가 한국 민족주의의 중핵이기도 하지만, 일본 민족주의의 중핵이기도 하다는 게 중요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관점을 갖고 문제를 다룬다고 해도 정서적인 측면, 즉 대중화된 민족주의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니지요. 따라서 그에 대한 교육적 대안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김현경 선생님의 말씀처럼 ‘위안부’ 이슈 자체가 이미 국제화되었기 때문에 국민국가의 안과 밖이라는, 혹은 한일 관계나 아시아라는 지리적 경계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장휘 ‘위안부’ 문제는 외국 학생들도 쉽게 이해하고 빨리 받아들여요. 다만 그들이 의아해하는 지점은 ‘이 문제에 반대할 것이 뭐가 있지?’라는 겁니다. 영화 〈주전장〉(미키 데자키, 2019)에 나오는 일본 극우들은 ‘국익을 위해 ‘위안부’ 문제에 반대하겠다’라는 어떤 전략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몸을 던진단 말이죠. 그들을 단순히 ‘이상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보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그들의 서사의 핵심과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극우 민족주의 담론 안에서 ‘위안부’ 문제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왜 중요해졌는지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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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일본군‘위안부’문제 관련 한국 정부가 취해 온 조치와 미결 과제의 대응 방향에 대한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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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문제 관련 한국 정부가 취해 온 조치와 미결 과제의 대응 방향에 대한 전망 2015년 12월 28일 한·일 양국 간에 극적으로 타결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이하 12.28 합의)가, 한국 정부의 일련의 조치를 거쳐 사실상 무용화(無用化)되었다. 이제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재협상을 거치지 않고 자체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글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이어 강제동원피해배상문제로 한·일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상황 속에서, 앞으로 한국 정부가 어떠한 방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를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외교 현안으로 대두된 1991년부터 12.28 합의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취해온 제반 조치들과 12.28 합의 및 합의에 대한 국내의 비판 내용을 사실관계 위주로 정리해보고, 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12.28 합의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부의 조치사항 1991년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그 이전까지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던 일본군‘위안부’ 피해문제가 한·일 양국에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다. 같은 해 12월 김학순 등 피해자 3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해배상소송을 제기하면서(2004년 12월 일본최고재판소에서 원고 패소 확정) 이 문제는 한·일 외교당국간의 실무 회담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여, 결국 정상회담의 의제에도 포함되었다. 한국 정부는 1992년 1월부터 일본 정부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이에 따른 후속조치를 강구해줄 것을 촉구하는 한편, 자체진상조사를 거쳐 7월에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실태조사 중간보고서」를 발표하였다. 1993년 3월 한국의 김영삼 정부는 도덕적 우위의 관점에서 일본 정부에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스스로 구제한다는 방침에 따라 피해자 1인당 500만 원을 지원하였다. 그해 6월에는 ‘생활안정지원법’을 제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매월 일정액의 생활안정지원금과 의료비를 지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일본 정부는 1992년 7월과 1993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였으며,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의 담화(이하 고노담화)를 통해 구 일본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하고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 그러나 담화내용에 피해자 배상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은 이미 종결되었다는 입장이었다.[1]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994년 6월 일본 총리에 취임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는 8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반성의 뜻을 나타내는 조치로서 민간 기금을 통한 ‘위로금’(償い金, 한국에서는 통상 위로금으로 번역하나 기금의 홈페이지 한글판에는 ‘사과금(atonement money)’으로 되어 있음) 지급 구상이 담긴 「평화우호교류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995년 6월 14일 이가라시 고조(五十嵐広三) 관방장관의 사업내용 발표에 이어, 1995년 7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약칭 ‘ 아시아여성기금’)이 설립되었다. 기금은 1년 간 모금활동을 펼친 후 1996년 8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게 일본 총리의 사과서한과 1인당 위로금 200만엔 및 300만엔 범위내의 의료·복지 지원금(일본 정부 예산)을 전달하는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일본 측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이 제안에 대해, “당사자들의 요구가 어느 정도 반영된 성의 있는 조치”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2] 그러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의 강력한 반발과 뒤이은 국내 언론들의 비판으로 곧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정대협과 다수의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 ▲책임자 처벌 ▲정부 배상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제안에 반대하였다. 외교부는 일본 외무성에 한국의 피해자 지원단체와 대화를 통해 이들의 요구가 수용된 새로운 해결방안을 모색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1998년 3월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회피한 채 기금 방식의 문제해결을 고집하자 앞선 정부와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에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방침 하에, 피해자들에게 아시아여성기금 측이 제시한 위로금(200만엔)보다 많은 액수의 지원금을 자체적으로 지원하기로 하였다. 외교부는 정대협과의 협의를 거쳐 피해자들이 기금의 위로금을 받지 않겠다는 각서를 제출토록 한 뒤, 그 해 5월 피해자들에게 1인당 3,800만원을 지급하였다. 3,800만원은 정부예산 3,150만원과 정대협 모금 650만원이 합쳐진 금액이다. 기금 측 돈을 이미 받았거나(7명) 돈을 받기 위해 각서 제출을 거부한(4명) 피해자들은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추후 일본의 기금 측 인사는 총 61명의 한국 측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전달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이중 1명은 ‘배달사고’로 돈을 수령하지 못해 실제로는 60명에게 전달), 이를 확인할 방도는 없다). 피해자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자체지원이 이루어진 후에도 피해자들과 지원단체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 등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피해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해결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하였으나, 일본 측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반복하면서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2005년 8월 한국 정부가 한일회담 문서를 전면 공개하였다. 문서공개에 따른 후속대책 논의를 위한 민관공동위원회(공동위원장 이해찬 국무총리, 이용훈 변호사)가 개최되었으며, 위원회는 회의 종료 후 배포된 보도 자료를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일 양국 정부 간에 청구권협정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었는지에 관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자, 2006년 7월 일본군‘위안부’피해자 109명은 시민단체의 지원을 받아 “피해자의 배상청구권 소멸 여부와 관련해 외교통상부장관이 청구권 협정상의 양국 간 분쟁 해결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기본권이 침해되었다”면서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2011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외교통상부장관의 행정 부작위가 위배된다는 결정(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을 내림(2006헌마788)으로써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헌재 판결 후 외교부는 2011년 9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외무성에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한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상의 분쟁해결을 위한 외교협의를 요청하였다. 일본 측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2013년 2월 25일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식에 참석한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부총리 접견 석상에서, “이웃나라인 한·일 간의 진정한 우호관계 구축을 위해서는 역사를 직시하면서 과거의 상처가 더 이상 덧나지 않고 치유되도록 노력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진심어린 이해가 있어야 한다”면서 ‘위안부’문제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성의 있는 대응을 촉구하였다.[3] 그러나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은 문제 해결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일본군‘위안부’ 동원에 대한 강제성을 부인하는 발언을 반복함으로써 한·일 관계는 악화되었다. 일본 외무성은 2014년 2월~6월에 걸쳐 ‘고노 담화’에 대한 검증을 실시하고, 6월 20일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는 없고, 고노 담화는 한·일 간 정치협상의 산물이었다”는 검증결과를 발표함으로써 한국 정부와 피해자들의 또 다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의 대통령 취임 이후 1년이 넘도록 일본과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지 않는 전례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양국 외교당국은 경색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만이 아닌 다른 현안도 함께 다루는 ‘국장급 실무협의’를 개최키로 의견을 모았다. 2014년 4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총 12차례 회의가 개최되었다. 실무협의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방안에 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게 되자,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과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국가안보국장 간 고위급 협상이 개최되었다. 수차례 협상 끝에 극적인 타결이 이루어졌다. 2015년 12월 28일 양국 외교장관이 「일본군일본군‘위안부’피해자문제에 관한 합의」를 발표하게 되었다.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입장만을 되풀이해온 일본 정부를 상대로 마침내 한국 정부가 새로운 해결책을 도출해낸 것이다. 12.28 합의, 화해·치유재단 및 그에 대한 비판 12.28 합의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총리가 사죄와 반성의 마음 표명 ▲한국 정부가 설립하는 재단에 일본 정부 예산으로 자금(추후 10억 엔으로 결정)을 거출, 양국 정부가 협력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 시행 ▲앞의 조치가 착실히 실시된다는 전제하에 양국 정부는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하고,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 ▲한국 정부는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합의에 대해 한국 국내에서는 정대협 등 피해자 지원단체를 중심으로 비판론이 제기되었으며 대다수의 언론도 비판에 동참하였다. 비판의 주된 내용은 ▲협상주체가 되어야 할 피해자가 협상과정에서 배제된 점 ▲그간 피해자들이 계속 요구해온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인정되지 않은 점 ▲일본 정부가 거출한 금액이 너무 적다는 점 등이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합의에 따라 2016년 7월 28일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하였고, 일본 정부는 8월 31일 10억 엔(약 108억 원)을 재단에 송금하였다. 재단은 피해자 치유 사업으로 2017년 12월말까지 생존 피해자 47명 중 34명에게 각각 1억원, 사망자 199명 중 58명의 유가족에게 2,000만 원을 지급하였다. 피해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지원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에도 12.28 합의와 화해·치유재단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졌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같은 해 7월 31일 외교부에 12.28 합의를 검토하기 위한 태스크 포스(이하 ‘위안부’ T/F)가 설치되었다. ‘위안부’ T/F는 5개월여의 검토 작업 끝에 12월 27일, ▲12.28 합의는 일본 정부의 책임인정, 사죄, 금전적 조치 등 면에서 과거보다 진전된 내용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양국 외교장관의 공동발표로 이루어진 합의의 형식과 성격, 일본 측 구도대로 합의가 이루어진 점, ‘최종적·불가역적’ 표현, 소녀상 관련 언급 등이 한국 내에서 논란을 야기하였으며 ▲합의에 따라 한국 쪽이 취해야 할 조치(최종적, 불가역적 해결 확인, 국제사회 비난 및 비판 자제 등)를 피해자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돈의 액수에 관해서도 피해자 의견을 수렴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이들의 이해와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 실패하였다는 비판적 결론이 담긴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T/F의 검토결과에 대한 후속조치로 2018년 1월 9일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위안부합의 처리 방향에 관한 정부입장」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가 출연한 화해·치유재단 기금 10억 엔은 전액 한국 정부 예산으로 충당 ▲‘위안부’ 피해자 중심의 해결 방안 모색 ▲생존자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 2015년 ‘위안부’ 합의로는 진정한 문제 해결 곤란 ▲그러나 일본 정부에 재협상은 요구하지 않을 방침 ▲과거사 문제의 지혜로운 해결과 한·일 미래지향적 협력, 노력, 병행 등의 입장을 밝혔다. 같은 해 9월 25일 뉴욕에서 개최된 한일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아베 총리에게 “위안부 피해 할머니와 국민의 반대로 화해·치유재단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고 고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혜롭게 매듭지을 필요가 있다”고 함으로써, 정상 차원에서 재단을 정리하겠다는 입장을 일본 측에 전달하였다. 외교부의 2018년 1월 발표에 대한 후속조치로 여성가족부는 같은 해 11월 21일 화해·치유재단의 해산을 통해 재단사업을 종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2018년 10월 말 기준으로 57.8억원이 남은 재단의 잔여기금은 7월 양성평등기금 사업비에서 마련된 103억원(일본이 재단에 송금한 10억 엔에 해당되는 금액)과 함께 일본군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관련 단체 등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합리적인 처리 방안을 마련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2019년 1월 21일 재단에 대한 허가가 취소되었다. 이러한 한국 정부의 일련의 조치에 대해 일본 정부는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이 12.28 합의를 착실히 이행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재단 해산은 한·일 합의에 비춰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한국 측에 전달하였다.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 정부의 선택지 2018년 1월 강경화 장관이 천명한 대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의 재협상을 배제한 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심의 해결방안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가능한 선택지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을 환기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일본을 압박하여 일본이 스스로 새로운 해결방안을 제시토록 하거나 ▲피해자와 피해자 단체들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이 원하는 국내적 조치를 성의껏 이행해 나가는 방안 등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강경화 장관은 지난 2월 25일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인권이사회(UNHCR)에서의 연설을 통해,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에 관한 소식을 전한 뒤 “전쟁 수단으로 벌어지는 성폭력을 철폐하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피해자, 생존자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며 이들이 결코 잊혀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강 장관의 연설은 일본 정부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일본의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菅義偉) 관방장관은 2월 26일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해결을 확인한 한·일 합의는 정권이 바뀌어도 책임을 가지고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앞으로도 유사한 공방이 계속될 것이다. 극도로 악화되어 있는 한·일 관계와 아베 총리의 장기집권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의 정치상황 등을 고려할 때, 국제사회의 여론 환기를 통해 일본이 스스로 새로운 해결방안을 모색토록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성사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일본이 이처럼 반발하더라도 현재 일본 정부의 로비로 ‘대화를 전제로 한 보류’라는 애매한 상태에 놓여있는 일본군‘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사업은 계속해서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전시 하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인권침해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을 국제 사회가 공유토록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한때 한국 정부의 공개적인 지원 하에 추진되었던 이 사업은 12.28 합의 이후 정부가 관여하지 않는 민간사업의 성격으로 전환되었으나, 12.28 합의가 무용화된 만큼 외교부, 여가부 등 관련 부처가 다시금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국내적인 조치이다. 피해자들이나 지원단체들도 이제는 더 이상 일본 측의 성의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들이 원하는 해결방안 가운데 국내적으로 가능한 방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이를 중점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정부의 예산이건 일본 측이 제공한 돈이건 그간 상당한 금액이 피해자들에게 지원되어 왔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금전적인 지원은 피해자들도 원치 않을 것이며, 사회적으로도 지지를 받기에는 무리가 있다. 금전적 지원보다도 피해자들이 더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이다. 이미 진행되고 있겠지만, 정부가 피해자와 지원단체를 만나 명예와 존엄 회복을 위해 피해자들이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듣고 협의할 필요가 있다. 최근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일본군‘위안부’연구회,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창진 시민모임,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시민모임 등 5곳의 시민단체와 몇몇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국립 일본군“위안부”역사관(가칭) 설립을 위한 전국행동’을 결성하였다. 국립일본군‘위안부’역사관 건립에 관해서는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혼재되어 있는 만큼[4], 공청회 개최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스물 한 분 남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게 되면 일본군‘위안부’문제는 그저 우리의 아픈 기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그간 우리는 일본의 사죄와 배상에 천착해 왔다. 이제는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역사적 교훈으로 기려 나갈 수 있도록 우리의 시각과 접근 방식을 서서히 바꾸어 나갈 때가 되었다. 각주 ^ 외교부, 『일본개황』, 152쪽, 2015 ^ 朝日新聞, 1995.6.15. 朝刊, “當事者の要求ある程度反映, 韓國外務省が評價” ^ 세계일보 인터넷판, 2013.2.26., “朴대통령 '日, 역사직시하며 과거상처 치유 노력해야'” ^ 『여성신문』, 2019.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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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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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허윤(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 권은선(중부대 연극영화과, 영화평론가) / 오혜진(한예종, 문학평론가) / 김청강(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1부> -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허윤 <허스토리>가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 지점을 낳았죠. 다큐멘터리 장면들을 그대로 영화 안에 포함하고, 살짝살짝 비틀면서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다 소거하고,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안해룡, 2009)에서 여러 장면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는데,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잖아요. 송신도 님은 일본어로 노래 부르는데요. 이것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했던 실제 상황이라는 정보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영화적 연출로 해석될 수밖에 없고, 대중들에게는 신선한 재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식으로 그런 이미지들을 가져와서 유통하는지 모르게 되고요. 김청강 지금은 다큐멘터리 푸티지나 사진, 이미지가 많잖아요. 그걸 이용해서 어떤 사실로서의 증명처럼 중간중간 넣어주는 방식. 그러니까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극화된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도 그래요. 요즘에 보면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너무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극화된 서사에 사실로서의 이미지를 던져주면서 이게 전체적으로 굉장히 진실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재현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오혜진 <허스토리>는 좀 나쁜 의미에서 충격적이었어요. 김희애 씨를 띄우는 것 외에 이 영화는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하는……. 김청강 김희애가 사투리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영화인 것처럼. (웃음) 허윤 너무 못 쓰지 않아요? 부산 사람들이 못 알아듣겠다고 하던데. (웃음) 오혜진 그 영화에서 여성단체의 역할이 재현된 방식도 매우 제한적이었고요. '증언하는 여성'의 힘을 보여주기에는 '배정길(김해숙 분)'과 다른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비중이 너무 작았죠. 무엇보다 그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한일 연대 법정투쟁을 다루는데, 재일조선인 변호사 '이상일(김준한 분)' 외에는 일본 시민운동의 동향이 거의 나오지 않았어요. 한일 연대 법정투쟁의 의미를 되새겨보기에는 많은 것들이 삭제됐고, '부산'이라는 지역성을 내세웠지만, 그것이 서사에서 충분히 의미화되지는 않은 듯해요. 마지막 장면은 '위안부' 역사기념관의 전시물들을 비추며 끝나는데, 마치 '위안부' 문제는 이제 박물관에 가야 하는 완결된 문제라고 말하는 듯했어요. 김청강 그러니까 그거는 성찰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인 거죠. 권은선 그런데 어떤 것은 흥미로워요. <아이 캔 스피크>랑 <허스토리> 같은 경우에 보면 타이틀이 공통점이 있잖아요. 소문자 i에서 대문자 I로 바뀌고. 히스토리에서 허스토리로 바뀌고. 어떤 담론을 대중적인 문법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자명하게 밝히고 시작한다는 부분이, 뻔하기는 한데, 재밌었어요. 그리고 상업 영화에서 '안경 쓴 여자'는 절대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거든요. 그러면 어떤 순간에만 안경 쓴 여자가 등장하느냐.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여주인공이 변신하기 이전 단계에서만 안경을 쓰고 등장하죠. 그런데 이 영화에서 여행사 사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경을 쓰고 나오죠. 분명 이런 부분은 여성주의적 재현을 의식했습니다. 오혜진 <허스토리>에서 '허(her)'는 누굴까요? 문정숙? 권은선 이 영화의 시선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재현 방식과는 좀 다릅니다. 처음부터 김희애 씨가 옷 갈아입는 장면부터 기존의 재현 방식이랑은 많이 다르거든요. 전혀 관음증적이지 않고요. 그리고 여성들을 집단으로 잡는 풀샷이 되게 많아요. 지금까지는 두 '위안부' 간의 관계가 주로 프레임 됐었다면, <허스토리>에서는 나름대로 집단으로서의 '위안부' 전체를 담아내는 쇼트를 자의식적으로 많이 넣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다큐멘터리를 차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허스토리>가 단점들이 좀 있죠. 장르 영화로서 재미가 좀 없지요. 법정 드라마로 볼 때. 그런데 저는 이 영화가 <귀향>만큼, 혹은 <아이 캔 스피크>만큼 흥행을 하지 못한 것은 이게, 한 명의 영웅 이야기로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여요. 오혜진 선생님이 아까 김희애 씨가 약간 너무 영웅 같다고 하셨는데, 오히려 이 영화는 영웅을 만들지 않아서, 배제적 동일시 지점을 만들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거든요. 오혜진 저는 너무 심한 영웅주의라고 생각했어요. 헤아려보니 한 신 빼고 모든 신에 김희애 씨가 나오더라고요. 그 한 신이 뭐냐면, 법정에서 증언하는 장면이 끝나고, 배정길이 아들과 대기실에서 화해하는 장면. 그때 문정숙이 '난 나가 있을 테니 두 분이 얘기 나누세요' 하며 자리를 마련해주죠. 권은선 그럼 영웅 맞네요. (웃음) 오혜진 게다가 법정에서 문정숙은 변호사, 통역사, 증언자, 목격자 등 모든 역할을 하며 원맨쇼를 구사하죠. <허스토리>는 명백하게 '위안부' 피해생존자보다 그들을 돕는 존재에게 재현의 초점이 이동한 사례라 흥미로운데, 이건 '위안부'의 증언을 '돕는' 수준이 아니라, 서사에서 '위안부'의 자리를 빼앗는 수준이었달까요? <아이 캔 스피크>는 그렇게 하지 않았거든요. 권은선 그렇죠.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문희 씨가 맡은 주인공이 완전한 영웅이었죠. 문정숙 캐릭터는 사실은 굉장히 신자유주의적인 주체죠. 허윤 이왕 재판을 시작했으면 이겨야 한다. 권은선 '나 돈 있어' 같은 식으로 너무나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로 묘사되는 게 재밌더라고요. 오혜진 실제로 GV에서 김희애 씨가 돈 뿌리는 기계로 지폐를 뿌리는 장면이 화제였어요. 허윤 팬덤이 붙은 거예요. 이 영화로. 근데 이 영화는 관객이 30만밖에 안 들었거든요. 오혜진 '문정숙'이 영화에서 모순적인 존재로 묘사되죠. 자기 여행사가 기생관광으로 돈을 벌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그걸로 '도의적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는지 확언할 수 없지만)을 보여주기도 하고, '위안소'에서 '엄마'라고 불리며 일종의 '중간관리인' 역할을 한 여성을 타자화하다가 곧 그녀 역시 피해자임을 깨닫고 사죄하는 모습도 보여주죠. 그런 반성의 제스쳐와 거대한 자본력으로 인해 문정숙은 '위안부' 운동을 주도할 자격을 가진 이로서 서사적으로 승인됩니다. 특히 문정숙이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주체로서 여성파워의 상징이 된다는 게 흥미로워요. '위안부' 운동을 논할 때 가장 강고한 프레임은 민족주의나 민족주의 비판론, 여성주의였는데, 이 영화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주체'를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에 가장 적합한 주체로 내세우죠. 허윤 첫 장면에서 돈 얘기하면서 시작하잖아요. 문정숙(김희애)이 부산여성경제인 연합에서 이제 여자들이 나서서 회장 해야 된다, 라고 하는데 그 장면을 보고 이 영화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혜진 문정숙이 '부자'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정체성으로 재현돼요. '위안부' 시민운동에 있어서 '경제력'을 가장 강력한 요인으로 내세우는 건 어떤 '위안부' 서사도 하지 않은 거죠. 그런 점에서 참 놀라운 영화였습니다. 최근 '위안부' 관련 학술대회가 휘황찬란한 규모로 열리는 걸 볼 때, 신자유주의적 역사 인식이 '위안부' 역사를 사유하는 데 점점 강력한 벡터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호화로운 학술대회 장소의 대형화면에는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았는지를 호소하는 자료화면이 나오는데, 정작 학술대회는 대규모의 물량을 동원해 화려하기 그지없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논의를 어서 '영어 논문'으로 작성해서 전 세계적 공인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들려올 때, (그 중요성을 모를 바 아니지만) 조금 위화감을 느꼈어요. 제게 '위안부'의 역사는 탈식민의 문제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지금 우리는 식민화된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허윤 그 지점이 <허스토리>가 실패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분위기는 1980년대고 실제 배경은 1990년대고, 담론은 2000년대인 거죠. 그런데 그 안에서 재현하는 일본은 2000년대 일본인 거예요. 관부재판이나 송신도 님의 재판이 벌어졌던 1990년대의 일본 사회의 분위기와 2000년대 이후 일본 사회의 분위기는 다르기도 한데, 영화에서 일본은 굉장히 평면적이죠. 재판을 배척하고,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 타락한 여자들이라고 말하는 프레임을 그대로 갖다 비추느라고 거기서 일본사람들이 계속 악마화하잖아요. 그래서 여관에서도 못 자게 하고, 식당에 테러하고 이런 식의 그런 장면들이 사실상 2000년대에 벌어진 일인 거죠. 제가 일본군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처음 봤을 때 제일 놀라웠던 부분이 1990년대 일본 사회 분위기였어요. 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일본에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피해 증언을 하잖아요.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일본의 중고등 학생들과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 질의응답을 하는 장면들이 제가 몰랐던 부분이었던 거예요. 제가 담론적으로는 일본군 '위안부' 투쟁이 한일의 국경과 민족을 넘어선 연대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어떤 방식으로 실제 사회에서 적용되는가는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더라고요. 그랬는데 그 다큐멘터리들에서는 이 피해생존자들이 계속 일본에서 재판이나 시위를 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극영화가 되면서 그 부분들을 완전히 다 소거시키고, 일본인 지원단체도 배경으로 처리하는 식으로 위치성을 다 제거하더라고요. 아까 말씀하신 프레임을 뜯어내고 사진만 보여주는 방식이죠. <허스토리>가 트위터나 SNS에서 여성영화로서 굉장히 호평 일색이었어요.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고. 꼭 봐야 할 영화로 추천하고, 여성들의 임파워링을 도와주는 새로운 시대의 '위안부' 영화처럼 프레임이 됐었는데, 누구의 임파워링인가를 계속 되묻게 되더라고요. 김청강 영화에 재일 동포가 주로 도와주는 사람으로 나오는 게 일본 사회에 있었던 움직임을 살짝 보여줬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진짜 일본의 맥락을 잘 보여주지는 못한 거잖아요. '위안부' 문제가 처음 막 공론화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에 역사 왜곡 문제가 나오면서, 그 당시에는 정신대 문제로 나왔었고. 그런데 그랬을 때 그 충격이 사실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건 아니고, 일본 사회에도 굉장한 충격을 줬고, 일본 사회에서 지식층들이 분노하고 그랬죠. 1980년대에 <오키나와의 할머니>(야마타니 테츠오, 1979)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것도 그 당시의 맥락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일본을 단순화하는 그런 측면들도 굉장히 문제가 되는 것이죠. <허스토리>처럼 가지고 오면 그 맥락을 상실해버리는 거죠. 일본에서 있었던 맥락들이 오히려 우리 스토리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저는 박수남 감독의 <침묵>(2016)이 너무 좋았고 감동적이었어요. 일본 쪽에서 있었던 운동의 맥락과 그 운동이 지속해왔던 세월도 보여주고요. 허윤 그리고 한국에서는 사실 여러 명의 피해생존자가 직접 일본에 가서 투쟁했다는 걸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침묵>은 그 부분을 다뤄주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근데 이런 다큐멘터리는 많은 관객을 만나는 게 쉽지 않으니까 너무 아쉽죠. 오혜진 허윤 선생님 말씀대로 <허스토리>에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간대가 엉클어져 있고, 한국 사회는 '위안부'가 '증언의 주체'로 나설 만큼 변화했는데 일본 사회는 여전히 정체된 모습으로 묘사되죠. 이건 '위안부' 역사뿐 아니라 '위안부'의 역사를 재역사화해온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허스토리>나 <귀향>은 결국 역사적 주제를 탈역사적이고 초역사적인 방식으로 다룬 거죠. '위안부' 역사에 대한 재현이 시작된 게 1950년대, 김학순 님의 증언이 1991년, '위안부' 증언자들의 법정투쟁이 2000년. 즉 '위안부' 문제는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프레임들을 이동하며 논의돼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알고 있죠. 같은 '위안부'라도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는 것. 조선인 부모나 다른 이들에 의한 인신매매 혹은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으로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고, '창기'의 신분으로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다는 것. 중국에서 '위안부'를 경험한 이들도 있고, 오키나와 혹은 미얀마나 다른 '남양군도'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이들도 있다는 것. 전쟁이 끝나고 조선(북한/남한)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돌아오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 '위안부'의 역사가 민족주의 프레임에서 논해지다가, 여성주의, 전시 성폭력 등의 프레임으로 이동하면서 국제 법정투쟁 등이 중요해진 과정 등. 그리고 이 과정에서 딜레마로 남아 있는 문제들. 이를테면, '위안부' 문제를 남성화된 민족 서사에서 구출해 가부장제 일반의 문제로 말할 때 식민지배의 문제가 사상될 수도 있다는 점, '위안부' 문제를 '전시 성폭력'으로 표준화해 전 세계적으로 논의 가능한 '보편적 문제'로 만들고자 할 때, 그 '보편성'의 언어와 논리로 '위안부'의 문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곤경들. 그런데 이제 꽤 많은 '위안부' 재현물들이 축적됐는데도, 이 같은 '위안부' 역사와 운동에 대한 여러 초점과 전략의 역사적 변화들이 대중에게 충분히 학습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위안부' 이야기, 할머니들의 고통, 연대의 중요성' 같은 뭉툭하고 당위적인 주제들만 반복되기 때문이죠. 이 화소들로만 '위안부' 역사에 대한 상상력을 구성하니, 일종의 '지체'가 있는 듯합니다. 만약 '위안부'였다가 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서 쭉 살았던 사람, 즉 일본 시민들과 협동해 '일본어'로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증언하는 '위안부' 모델을 영화로 만든다면 어떨까요? 그 영화도 <허스토리>처럼 설날 특집으로 TV에서 방영될 수 있을까요? 김청강 그런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허윤 TV 드라마 같은 데서 일본어가 많이 나오면 시청자게시판에 항의 글이 올라올 거예요. 김청강 충격을 받겠죠. 사실은 굉장히 그게 재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삭제되고 했던 부분들이 재현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2000년대 도쿄 법정(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 때도 중국은 '위안부' 보낼 때 원래 직업이 매춘부였던 사람은 삭제하고 보냈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어떤 피해자 상만이 우리 사회에서 얘기될 수 있다는 것을, 삭제했던 역사의 과정들이 사실은 어떻게 보면 재현에서도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좀 들어요. 허윤 오늘 굉장히 여러 가지 고민과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논의해볼 만한 좋은 텍스트는 어떤 것인지, 선생님들께 추천을 받고자 합니다. 이 질문은 우리 웹진을 읽으시는 많은 독자분이,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보란 말이냐!"라는 질문을 하실 듯해서요. 혹시 추천할 만한 텍스트, 영화 소설 뭐든 상관없을 것 같아요. 한 가지 정도씩 얘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청강 근데 이게 사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굉장히 선별되어야 하는 측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위안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를 보여줘도 사실 굉장히 충격을 받고, 또 거기에 대해서 알게 되는 측면이 있지만, 사실 어느 정도 알고 있고 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조금 너무 약한 거죠. 추천해주기에. 허윤 그런데 저는 그 지식의 격차라는 것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대중 운동의 폭은 넓어졌는데 대중 담론은 여전히 여러 '결'을 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부담 없이 얘기하셔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오혜진 저는 1999년에 발표된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이창래의 『A Gesture Life』를 추천하고 싶어요. 한국에는 『척하는 삶』(정영목 역, 알에이치코리아, 2014)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습니다. 이 소설은 꼭 '위안부'를 재현한 소설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위안부'를 비롯해 식민의 유산의 문제가 현재 자신의 정체성을 사유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는 깨달음을 서사화한 작품입니다. 자신을 일본계로 알고 있는 미국인 남성 엘리트의 이야기인데요. 나중에 그는 자신이 조선인의 자식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조선인의 후예라는 걸 부정하고 싶은 마음, 지배자에게 동일시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그것에 거리 두려는 욕망, 자신을 미국 주류 사회에 동일시할 수 있는 성공한 아시아 남성 엘리트로 정체화하려는 자기의식에 대한 성찰, 그 모든 고민과 갈등의 과정이 '후기 식민국가'의 일원으로서 겪는 역사적 경험임을 인상적으로 설득해냅니다. 두껍지만 추천하고 싶습니다. 김청강 사실은 저는 극영화는 추천하고 싶은 게 없고요. 박수남 감독님의 <침묵>, 아까 말씀드렸던. '위안부' 문제의 운동적인 측면이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의 맥락을 잘 보여주는 것 같고. 사실 다큐멘터리들은 대부분 그래도 훨씬 낫고, 그리고 저는 여전히 <낮은 목소리>를 학생들에게 보여줍니다. <낮은 목소리>를 수업 시간에 계속 보여줬기 때문에 한 20번도 더 봤을 거예요. 저는 1995년도에 캠퍼스 상영할 때 처음 봤었는데, 그 당시에 마지막 그 시퀀스가 너무나 정말 충격이었어요. 침묵 가운데 할머니의 그 배가 보이는 장면이, 저 개인적으로 너무 잊을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하고. 여전히 그만큼의 재현을 잘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아직도 <낮은 목소리>를 추천합니다. 권은선 저는 앞으로의 '재현의 향방'은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가 최근에 관심을 좀 가지는 것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그동안은 계속 말하는 주체를 강조했잖아요.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부터. 그런데 요즘에는 '누구에게 말하는가' '누가 듣는가'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영화 안에서의 동일시의 자리, 아까 얘기했던 좋은 청자의 자리, 누굴 향해서 이야기할 것인가.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가 한계에도 불구하고 듣는 자의 자리를 여러 가지로 바꾸잖아요. 등록된 생존자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에 대한,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조바심 같은 것들이 최근 영화에 드러난다고 했을 때, 듣는 자와 관련된 '텍스트를 통한 상속'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귀향>처럼 거리감을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상속에 필요한 어떤 성찰과 거리감을 만들어 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추천 작품 관련해서, 저는 개인적으로는 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박은미 역, 밀알, 1997)를 너무 오래전 어렸을 때 읽은 텍스트라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그런데 절판이 되어 구하기가 어렵더라고요. 흥미로운 서술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 다시 꼼꼼히 읽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화 텍스트를 추천하자면 저 역시 <낮은 목소리>입니다. 마치 김학순 님의 증언 순간처럼,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에 있어 중요한 모멘트였습니다. 허윤 저도 『척하는 삶』과 짝으로 『종군위안부』를 읽으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예전에 대학원, 국문학 전공이 아닌 다른 전공 친구들이랑 그 소설을 읽었었는데, 조금 어렵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저는 송신도 님을 다룬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를 추천하고 싶어요. 지금도 종종 공동체 상영을 하는 작품인데요, 일본에 사는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인 송신도 님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10년간 소송을 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입니다. “사람은 믿지 않는다”라고 단호하게 접근을 거부하던 송신도 '할머니'가 양징자 씨를 비롯한 지원단체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김청강 어떻게 보면 비평이 더 활성화되어야 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창작물로서의 공급과잉이 너무 심한 것에 비해서 거기에 대한 비평 자체가 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비평이 더 활성화되어야 앞으로 나올 재현물도 조금 영향을 더 받지 않을까요. 허윤 지금까지 긴 시간 다양하고, 흥미롭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대중매체로 바라본 일본군 '위안부' 재현' 좌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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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좌담 지금, 여기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란 무엇인가 〈2부〉 - ‘위안부’ 문제의 세대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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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룬 학술의 장이 마련될 때면 청년·미래 세션이 빠지지 않는다. 피해 생존자와 연결된 실질적 감각이 부재한 포스트 메모리(후-기억) 세대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기실 여성학, 법학, 외교학, 사회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진 연구자들의 연구성과는 축적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 공론화 이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이곳에서 젊은 연구자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무엇일까. 웹진 <결>은 이들의 관점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어떻게 의미화되고 있는지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좌담회 일자: 2022년 6월 22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이헌미, 황진경, 이안, 장소정 -대담: 백재예(University of Massachusetts-Amherst 정치학과 박사과정), 송혜림(연세대 비교문학 협동과정 박사과정), 전소현(성공회대 국제문화연구학과 석사과정), 정희윤(University of Massachusetts-Amherst 사학과 박사과정) Q. 증언을 생존자에게 직접 듣지 못하게 된 시대가 도래한 만큼 남겨진 연구자들의 몫이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위안부’ 문제에 있어 세대교체에 대해서도 계속 이야기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정희윤 포스트 메모리 시대라고 무엇이 달라질까 싶습니다. 재현의 문제, 실증주의적 이해의 폭력, 증언자가 증언자일 수 있게 하는 언어의 부재 등 현재 제기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요. 이는 ‘위안부’ 생존자들이 모두 돌아가신 이후에도 동일하게 잔존하는 문제 아닐까요. 그런데 이제는 다른 전장이 펼쳐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생존자들의 증언에 AI 기술을 결합하여 만든 작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가치중립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그러한 증언의 전시가 정세나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이루어질 경우, 폭력적이고 위험한 작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증언 이후의 재현물들이 특정한 구성과 배치의 결과이고 어떤 면에선 의도된 것인 만큼, 그 재현들에 어떻게 개입하고 증언이 증언일 수 있게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송혜림 정희윤 선생님이 말씀하신 ‘인터랙티브 전시’에 다녀왔는데, 진화된 기술력과 이를 흡수하는 적극적인 시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형태로 기록되느냐에 따라 기록물의 성격과 파급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시도 자체는 좋았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전시 내용 중 하나를 예로 들면, 제가 할머니에게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위안부’로 있을 때 계속 굶었어’라는 엉뚱한 대답으로 이어졌어요. 현재보다는 과거에 대한 질문과 답이 더 많았죠. 우리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을 재현하거나 표상을 만들 때 여전히 과거의 경험에만 고착돼있고, ‘위안부’라는 경험 안에서만 이들을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을 진지하게 문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위안부’ 운동을 포함해 증언을 다루는 사회적인 담론 자체가 과거 경험에 고착돼있고, 그들을 증언자로 호명하는 경험에만 천착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를 붕괴시키는 새로운 방식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전환의 이름으로 되어야지, 세대교체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소현 증언을 해석하고, 다시 말하고, 듣고, 쓰는 과정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할머님들이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되는 과정이라면, 왜 미래 세대의 문제로만 이야기되어야 하는가 의구심이 들어요. ‘내가 왜 위안부 문제를 계속해서 고민하지? 이것이 내 삶과 무슨 관련이 있지?’라는 의문에 도움이 됐던 게 영화 <보드랍게>(박문칠, 2022)였어요. 김순악 할머니의 이야기와 증언을 2010년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들려주는 작품인데요, 할머니의 이름은 김순악이기도 하지만 마마상, 요시코, 위안부, 미친개, 순악씨, 깡패 할매, 술쟁이, 개잡년, 기생, 엄마, 사다코 등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보드랍게 아우르는 목소리들이 감동적이었어요. 개인 안에서 폭력의 경험이라는 게 매끄럽게 설명되기 어렵잖아요. 자기 안에 수많은 분열이 있을 것이고, 수많은 ‘나’가 충돌하는 경험을 하게 될 텐데, 그러한 경험들을 뒷세대 여성들이 다시 한번 이야기해주고 자기 삶과 공명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분열시키는 목소리에 맞서 스스로를 수용하고 말해내는 과정이 지금의 페미니즘 활동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백재예 세대교체라는 것이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세대교체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앞서 말했을 땐 내부적 해체라고 표현했는데요, 운동과 학계를 구성하는 구심점, 가령 고착화된 논의나 주장, 접근 방식들이 분화되고 해체되는 방식으로 세대교체가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정주의자들은 곡해와 오독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내부적 해체를 통한 세대교체가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동안 축적된 증언과 자료들을 성실하고 면밀히 독해하는 것을 통해 이 운동을 왜 시작했고, 어디로 가고자 했는지, 즉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움직임이 지닌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열린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그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수도 있고, 혹은 기존에 해왔던 것을 폐기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이야기를 종합하여 듣다 보니 ‘위안부’ 문제를 사회가 큐레이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대 전환 혹은 세대교체라는 말이 들려올 때 큐레이팅된 ‘위안부’ 문제를 해석/해체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여요. 그렇다면 결국 진정한 전환이란 생물학적인 미래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모두 학술 활동 외에도 다양한 외부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문제의식이 어떻게 확장·연결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백재예 그동안 외부 활동을 따로 하지 않아서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봤습니다. 그간 유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 중 하나가 ‘위안부’ 문제를 통해 동아시아의 역사와 인종·민족 문제 등의 교차 지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전시 성폭력이라는 보편적 카테고리나 일본의 특수한 식민지배와 같은 특수성에 집중한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층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적은 서구 학계에 이 문제를 설명할 때면 늘 파편화시키지 않고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보다 광범위한 대중이나 학계를 대상으로 ‘위안부’ 문제의 복잡한 고민거리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전소현 ‘위안부’ 문제를 공부하면서 화성외국인보호소 피해자 연대 시위에도 다녀오고, 장애 인권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하게 됐어요. 외국인보호소 문제에서도 “한국이나 보호소 사람들은 보호라고 하지만 그건 보호가 아니라 감금이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걸 보면서 “‘위안부’들을 보호했다”고 하는 부정론자들의 말이 떠올랐어요. 장애인의 삶을 시설화시키는 언어들이 장애인을 자기 의사 결정이 없는 무력한 존재로 재현하곤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위안부’ 피해자나 젠더 폭력 피해 여성들을 무력한 존재로 바라보려고 하는 시각이 오버랩됩니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 문제는 여러 사안이 겹쳐있는 문제이고, 다른 사회운동과 연계‧확장될 수 있는 지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송혜림 저는 스스로를 학술장에 있는 활동가로 정체화하고 싶어요. 현장에서 순간순간을 함께하고 물리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연대의 한 방식이지만, 책상 앞에서 필요한 말들을 계속해서 전달하고 외치려는 노력도 넓게 보면 외부적인 활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는 사회적으로 재현되는 재료들로 만들어지는 증언자의 표상을 문제 삼는 조사를 하고 있어요. 영화나 문학, 언론 보도에서 증언이나 증언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고, 또 그 과정에서 내가 취해야 하는 자세는 무엇인지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법정을 자주 가게 돼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언어로서 증언의 기능을 가장 충실하게 강요하는 공간이 법정이기도 하고, 증언이 최종적으로 인정받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그 중요한 의미를 모두 가진 공간에서 증언자가 얼마나 잘 말할 수 있고 그들의 언어가 어떻게 들리는지에 대한 현장 조사를 하며 책상 앞과 법정을 오가고 있습니다. 정희윤 저도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 반성, 죄책감이 있지만 송혜림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책상머리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골과 관련된 인권 및 인종주의 담론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문제의식을 갖게 됐고, 과거청산 활동을 하며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단체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희생자들을 서울로 봉환하는 일을 하며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강제동원의 문제는 노동착취의 문제이기도 하고 현재로 끌어올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일본 놈들 나쁜 놈들’로 귀결되는 비극적인 현상과 사회의 묘한 큐레이션에 대해 고민하게 됐습니다. 뼈가 갖는 강력한 의미가 있고, 모두가 뼈를 보면 외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뼈는 끊임없이 불화를 낳거든요. 어떤 곳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윤리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키고요. 뼈는 사람인가, 이것에 오늘날의 국적을 부여하는 방식이 가능한가, 망자에 대한 인권은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 등의 문제를 야기하면서 우리 사회의 윤리를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뼈라는 기억장치-매개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러면서 ‘위안부’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위안부’ 문제는 늘 논란과 윤리적 불화의 최전선에 있기 때문인데요. 박유하 교수의 『 제국의 위안부』와 같은 문제를 보며 실증에 갇히지 않으려면 해석 싸움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됐고, 뼈를 통해 오늘날 이 사회에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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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2) 송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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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옥 (문화센터 아리랑 관장 /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명예교수)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 명예교수.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식민지 역사와 여성사의 기틀을 마련한 연구자로서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주요 저서로 『군대와 성폭력』, 『동아시아 일본군 위안부 연구(공저)』, 『한국 여성사 연구 70년(공저)』, 『식민주의, 전쟁, 군 ‘위안부’(공저)』, 『동아시아의 전쟁과 사회(공저)』 등이 있다. Q. 송연옥 선생님에 대해 잘 모르는 웹진 결 독자분들을 위해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1947년에 태어난 재일조선인 2세입니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교육은 일본 교육기관에서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언어인 일본어가 저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모어가 되겠지요. 식민주의가 신체화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했을 시절, 민족 차별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있었어요.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자 한국에 민족사를 배우러 갔는데, 당시 조국의 정치적인 계절은 겨울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왔고, 다시 한국에 가게 된 건 1992년부터입니다. 역사 연구를 단념한 시기도 있었으나, 50세 때 도쿄에 있는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교수로 채용되어 그 후에는 제대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어요. Q.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대학교를 졸업한 몇 년 후에 센다 카코(千田夏光)의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双葉社, 1973)를 읽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읽고서 큰 충격을 받았으나, 센다의 책에는 여성주의적인 시각은 약했어요. 그래서 언젠가 ‘위안부’ 피해자의 한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막연한 바람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러나 그 당시는 피해를 당한 당사자가 한국에 살아 계시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대부분이 전쟁터에서 죽거나 버려졌을 걸로 생각했었습니다. Q. 선생님께서 그동안 진행하셨던 일본군‘위안부’와 관련한 연구들을 소개해주세요. 『개벽』77호(1948년 2,3월호)에 최정석이란 사람이 쓴 ‘해방되는 창기 5천명’이란 글이 있는데 그걸 보고 일제시대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습니다. 글의 앞부분에 ‘일제가 여성에 관해서 이 땅에 남긴 해독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공창제도(公娼制度)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봉건적인 노예여성관을 유지, 연장시킨 것이다’란 구절이 있었습니다. 물론 최정석은 ‘위안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포함해서 공창제를 ‘日帝(일제)의 搾取(착취)와 이 땅의 社会悪(사회악)을 가장 醜悪(추악)한 가운데 가장 端的(단적)으로 나타내는 実証(실증)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군‘위안부’제도가 1932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일제가 조선 여성의 성적인 신체를 유린·착취하고, 가난한 여성들을 인신매매한 것은 훨씬 이전부터 진행된 거잖아요. 개항 이후의 일제 침략 과정을 보고, 최정석의 글을 해독한 후 일제가 식민지지배 정책으로 이용한 공창제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구를 하다 보니 식민지 조선에 적용된 공창제는 일본에서의 공창제와 같은 명칭이 쓰이지만, 그 내용은 일본 공창제보다 업자들에게 더 유리하게, 여성들에게는 더 불리하게 만들어졌더라고요. 이러한 식민지 공창제가 ‘위안부’제도의 전제가 되었다는 연구를 해왔습니다. Q.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군‘위안부’를 연구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위안부’문제를 연구과제로 하면 일본인이라도 대학 교수로 채용되기가 어렵다고 해요. 반일 사상의 소유자란 낙인이 찍히는 거지요. 제가 1993년에 조선사연구회 대회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국가적 관리매춘’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한 적이 있어요. 연구한 결과, 중일전쟁 시기에 조선인의 성매매업 종사율이 높아진 결론을 얻었어요. 그것은 조선인이 전쟁 체제에 휘말려 들어 간 것을 증명한 건데, 제 발표를 들은 한국 남자 유학생이 저에게 막 비난하는 말을 퍼부었어요. 제가 하고자 하는 취지를 단순하게 오해한 거였지만, 그런 식의 민족주의에 회의를 느낀 것도 사실입니다. 해방 후에도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은 민족 차별 속에서 3D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면 그런 반응은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Q. 연구하시면서 만났던 ‘위안부’피해자 중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계신가요? 1992년 8월 말, 한중국교가 체결되기 직전에 중국 목단강까지 가서 김순옥 할머니(1922~2018)를 만났어요. 김순옥 할머니의 존재는 우연히 알게 됐어요.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는 시민단체 사람들이 조사차 러시아 국경에서 가까운 둥닝(東寧)까지 간 적이 있었어요. 예전에 일본 병사였던 사람이 안내를 해줬죠. 조사 마지막 날에 마을 노인이 ‘카이코’라는 여자가 옛날에 ‘위안부’였다고 가르쳐줬어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중국 여행이 어려울 때라 귀국 날짜를 연기할 수가 없어서 당시 일행은 숙제를 남긴 채 그냥 돌아왔어요. 이후, 저와 김영희씨가 연변대학 임희준 교수님의 도움을 받고 둥닝까지 조사하러 갔는데, 옌지(吉林)에서 둥닝까지 가기도 쉽지 않았어요. 10시간이나 택시를 달려서 저녁에 간신히 도착했죠. 그런데 할머니는 집에 안 계시고 목단강에 있는 딸 집에 갔다는 거예요. 할 수 없이 그날은 둥닝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목단강으로 출발했어요. 중국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했어요.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 않아서 장거리 이동만으로도 너무 지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김순옥 할머니를 만났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할머니한테도 저희들이 외부에서 처음으로 찾아온 동포였는지라 정말 기뻐하시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처럼 대해주셨어요. 딸한테도 얘기 못 했던 아프고 쓰라린 경험을 한꺼번에 쏟아내듯이 얘기 해주셨던 추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만나 뵈니까 ‘카이코’의 수수께끼도 풀렸어요. ‘카이코’는 카요코란 일본 이름으로 위안소에서 붙여진 것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를 그렇게 불렀답니다. 동네 사람들이 ‘카이코’라고 부를 때마다 할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착잡하기만 합니다. Q.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연구자의 시각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일본 교육기관에서만 배운 재일조선인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일본을 평가하는 눈이 냉철하다는 겁니다. 일본 역사학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일찍 지적해왔습니다. 일본에선 1931년부터 1945년까지 15년간의 전쟁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만,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15년 전쟁이 아니라 50년 전쟁이라고 주장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그리고 분단된 현실에서 어쩔 수 없으나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소평가에서 과대평가까지 눈높이가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며 ‘위안부’ 연구에서도 그것을 느낍니다. Q.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여러 문제 중에서도 선생님께서 주목 혹은 집중하고자 하셨던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제가 상해 위안소에 관한 연구를 한 결과 얻은 결론은 상해와 같이 전쟁터였다가 점령지가 된 지역은 위안소를 중심으로 다양한 성매매업이 확대·번창했다는 거예요. 성매매 요리점은 위안소를 보완하고 또 국가가 개설한 위안소가 있으므로 다른 성매매업도 대의명분을 얻어 서로가 번창하는 그런 전쟁 사회상을 더 밝혀야 해요. 공창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시기와 지역에 따른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고 봅니다. 또 지금 일본에서 ‘위안부’제도와 구별해서 공창제를 정의하는데 시민법, 평시, 폐창의 규정을 그 근거로 들지만, 과연 일제강점기 조선은 시민법이 적용된 평시였을까요? 그런 공창제 정의는 식민주의와 전쟁 사회사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연구자 혹은 개인으로서 선생님의 인생에서 ‘위안부’ 연구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일본군‘위안부’ 연구를 놓지 않고 끊임없이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저는 재일조선인 여성으로서 살아오는 과정에서 성차별, 민족 차별, 계급차별을 복합적으로 경험했고 정신적인 상처도 깊이 입었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차별의 상징이 ‘위안부’문제라고 생각해요. 문제의 뿌리인 식민주의는 최근에 일본 사회에서 나타난 헤이트 스피치와도 상통합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고 저희를 일상적으로 괴롭히고 있으니 건전한 사회를 만들려는 희망으로 연구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다양한 학문적, 사회적 이슈 중에서도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민감한 최전선의 이슈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후학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방향으로 연구를 더 확장해가면 좋을까요? 연구하는 후학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위안부’문제는 많은 증언과 연구,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아직 낡은 담론과 틀 속에 갇혀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를 연결하여 보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 많지만, 공창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를 시기와 장소에 따라 구체적인 실상을 밝힐 연구가 앞으로 많이 나와야 합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보편적 이슈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감정적 층위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한해서 말씀드린다면 민족적인 시각은 강해도 여성적, 계층적인 시각을 복합해서 보는 것은 아직도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민 통합을 위한 해방 후에 만들어진 민족주의도 강하고요. 역사학계에선 친일이냐 항일이냐 하는 2항 대립적인 단계를 넘어선 연구가 많이 진척되었으나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대중적인 시선에 관해서는 그런 성과가 잘 반영되어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일제강점기 사회사 연구가 더 다양하게 진전되어야 하고 일본의 침략전쟁 하에서 국내외에서 생활한 동포의 실상이 더 많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은 아직까지 성매매에 대한 표리일체로 된 호기심과 멸시감, 혐오감이 강한 사회입니다. 공창제 운운할 때 나오는 거부감도 여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여성주의적인 가치관을 더 일상화해야 하고 성적인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여야 합니다. Q. 위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 연구소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역사학을 전공하는 저로서는 ‘위안부’ 문제를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이 낳은 문제이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문제로 봐야 한다고 조언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위안부’ 제도를 낳은 배경, 즉 식민지 지배하 조선의 사회와 경제 상황을 지방마다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는 연구가 나와야 합니다. ‘위안부’ 문제만 보면 정치적인 담론의 영향을 받아서 오히려 실증적인 연구가 소외될 우려도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구조적으로 중첩적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선 중국에 있는 자료도 계속해서 발굴·수집해서 그 성과를 널리 공개해 젊은 연구자들을 양성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