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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현재사(現在史)로서의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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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기림의 날 특집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 <3부> 2015년 최종적으로 7개국 14개 단체가 참여해 결성한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가 여성 인권 회복의 진행형, 나아가 인류 보편의 인권 신장과 항구적 평화에 기여하는 '세계의 기억'이 되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적인 외교로 그 의의가 왜곡되어 가고 있다.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해 웹진 <결>은 조속한 해결을 기대하며 10여 년 가까이 추진되어 온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활동을 3회에 걸쳐 조망해 본다. (1)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기억을 위한 세계시민운동 (2)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3)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현재사(現在史)[1]로서의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통상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은 소규모의 유네스코 본부 인원과 기록유산 전문가 14명 등으로 구성된 국제자문위원회(IAC)가 함께 한다. 국제자문위원회는 산하에 심사소위원회(RSC)를 두고 등재 가능성에 주목해 신청서를 사전 심사한 다음 국제자문위원회 회의에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해왔다. 전체적으로 국제자문위원회가 사업 운영을 주관하고, 2년마다 회의를 열어 제출된 등재 신청서를 선별, 등재 후보를 결정한 다음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등재 결정을 권고하는 수순이다. 이후 이 결과를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것이다. '대화'를 전제로 한 등재 보류 결정 그런데 2017년에는 이러한 흐름과 사뭇 다른 '이상한' 일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2016년 3월 말이었던 신청서 마감이 5월 31일로 연기됐다. 이어 2017년 9월로 예정되어 있던 국제자문위원회도 아무런 설명 없이 10월 24일로 미뤄졌다. 더 놀라운 일은 국제자문위원회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일본군'위안부'기록물에 대한 등재 결정이 연기될 것이라는 일본의 보도가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의 진행 과정과는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연기된 국제자문위원회를 열흘 가량 앞둔 10월 16일, 유네스코의 핵심 의사결정기구인 집행이사회가 열렸다. 집행이사회는 "상충되는 견해를 가진 두 신청 간에 '대화'를 요구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는 문구를 삽입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또 10월 24일 열린 국제자문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 등재 여부에 대해 "대화를 전제로 한 연기"라는 기존에 없던 방식의 결정을 내렸다. 이를 전달받은 사업단은 즉각 발언권을 얻어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10월 30일,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별다른 조처없이 한국과 일본에서 제출한 '두 신청자의 대화 진행'이라는 심의 결과를 발표했다. 2016-76 개별 일본-미국(NGO): '위안부와 일본군 규율에 관한 문서' 2016-101 일본군'위안부' 문서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위원회: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2017년 10월 16일 회의에서 UNESCO 집행이사회의 결정에 따라(202 EX/PX/DR 15.8, 항목 15) 사무총장에게 UNESCO가 신청자(No. 101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및 No. 76 '위안부와 일본군 규율에 관한 문서')와 관련 당사자들 간의 대화를 진행할 것을 권고합니다. 또한 IAC는 가능한 한 모든 관련 문서를 포함하는 공동 등재로 이어질 목적으로 이 대화를 위해 당사자들에게 편리한 장소와 시간을 정할 것을 권고합니다.[2]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절차에서 생긴 이러한 이상 현상은 일본 정부가 만들어낸 것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신청서 마감 기한이 연기된 사이 일본 측이 신청서를 급조해 제출했고, 이는 결국 일본군'위안부'기록물에 대한 '상충되는 견해'가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이를 근거로 국제자문위원회를 미루고, 집행이사회에서 결정된 '대화' 규정을 인용함으로써 이전에 없던 '대화를 전제로 한 연기'라는 전례없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이용되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 : 누가 역사 갈등을 만들어가는가? 사실 일본의 공세적인 외교 활동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유네스코를 둘러싼 역사전을 놓고 대개 2014년 중국이 난징대학살 기록물과 일본군'위안부'기록물에 대해 등재를 신청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시작은 2014년 군함도 등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 한 일본의 움직임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일본은 아베 신조 전 수상이 내건 '강한 일본, 자랑스런 일본'이라는 기치에 따라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석탄, 탄광 산업유산 등재를 추진했다. 등재 대상에는 아베 전 수상이 존경했다는 우익의 대두 요시다 쇼인(吉田 松陰)이 운영한 학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도 있었다. 제국주의의 산실로 알려진 쇼카손주쿠를 포함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인정받겠다는 의미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은 군함도 등 산업시설에서의 조선인, 중국인의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역사는 소거했다. 일본의 이런 도발에 대해 당연히 중국과 한국의 비판이 거셌고, 유네스코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중국이 난징대학살 기록물과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을 등재 신청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부정해 온 두 역사적 사실, 난징대학살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함으로써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가해 책임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이전까지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사업을 민간에 맡겨 놓고 있었던 중국과 일본 정부는 이 시기부터 직접 전면에 나섰다. 아베 전 수상은 중국이 유네스코를 정치적으로 오염시켰다고 비난했지만, 그 이면에서는 이처럼 두 나라 정부 모두 유네스코의 의사 결정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중국은 난징대학살 기록물과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을 등재 신청했지만, 둘 다 성사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일본과 갈등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두 신청 모두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중국은 초점을 난징대학살 기록물 등재에 맞추고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은 양보를 얻어낼 카드로, 그러니까 일종의 희생타로 제출했다. 물론 이때 국제연대위원회가 중국을 포함한 8개국 15개 단체를 모아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의 등재 신청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도 '희생'을 고려할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실제로 난징대학살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성공한 후, 중국 정부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 등재를 더 이상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업단이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를 등재 신청할 때 중국이 방해한다고 느낄 정도였다. 타이완의 국명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이나 중국 모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역사전의 전면에 내세워 이용하거나 희생시켜 왔다. 한편 2015년 난징대학살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자 일본 우익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는 아베 정권에서 본격적으로 역사전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베 전 수상은 자민당 의원과 면담에서 "2년 후에는 '위안부' 문제가 나온다. 지금부터 만전을 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혀 일본군'위안부'기록물에 대한 강도 높은 등재 방해를 예고했다. 이후 일본은 유네스코 분담금 납부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고, 유네스코에 등재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일본이 노골적으로 외교적 압박을 가해오자 유네스코는 버티지 못하고 규정 개정 작업에 착수하겠다고 선언했다. 2015년 국제자문위원회가 이 문제를 의제로 채택해 논의를 진행했다. 당시 일본은 2017년 회의 전까지 개정 작업을 끝내고 새로운 규정으로 심사를 진행하면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등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규정 개정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제202차 집행이사회는 자구책 혹은 절충안으로 "상충되는 견해를 가진 두 신청 간에 '대화'를 요구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202 EX/PX/DR 15.8, 항목 15)는 문구를 삽입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후 국제자문위원회는 위 문구를 근거로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등재를 연기해 버렸다. 이에 대해 한국 외교부가 반발해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활동은 5년 넘게 멈춰 섰다. 새롭게 생성되는 '현재사' 기록들 : 더디게 가는 '대화' 프로세스 2024년 8월 말 현재,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은 중단된 상태지만 일본군'위안부'기록물 두 신청자는 합의 하에 '대화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유네스코 사무국의 지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무국은 대화 프로세스가 구체적으로 언제 시작되고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언제 대화가 종료되고 대화가 결렬되면 어떻게 되는지 등 세부적 사안에 대해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 국제연대위원회의 일관된 주장은 2017년 등재 신청을 했기에 새로 만들어진 규정이 아니라 구 규정을 따라야 하고, 대화 종료 후에는 심사소위원회(RSC)의 평가를 받아들여 공동등재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단체 3곳과 미국 단체 1곳이 공동 신청하는 형태로 구성된 일본측 신청자들이 등재 신청한 자료는 총 6건이다.[3] 이 신청 기록물 자체는 객관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문서들이다. 그중 미국공문서관 소장 자료와 일본 방위청 소장 자료[4]는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에도 포함된 중복 기록물이기도 하다. 그외 방위청 소장 사료와 미디어보도제작연구센터 소장 자료는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포함할 수 있는 중요 기록물이다. 따라서 국제연대위원회에서는 기록물에 대한 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2018년 5월, 유네스코 사무국은 어떤 주제와 방법으로 대화할 지 등 사전 정보 교환도 없이 중재자를 선발했다고 알려왔다. 그럼에도 국제연대위원회는 성실하게 대화 프로세스를 진행할 것을 결의하고, 중재자를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첫 중재자는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대화 프로세스를 진행하지 못하고 1년 만에 사임했다. 유네스코 사무국은 2019년 6월 두 번째 중재자로 잉그리트 패런트(Ingrid Parent)를 임명했다. 그는 캐나다인으로 국제도서관 협회연합회(International Federation of Library Associations)의 회장을 지내기도 한 기록학의 대가이다. 잉그리트 패런트는 두 신청자가 대화할 수 있도록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일본군'위안부' 관련 후보 2건에 대한 '대화' 개최 조건(Terms and Conditions for holding a dialogue regarding two nominations concerning 'Comfort women' for the memory of the world international register)'을 합의하는 것을 목표로 한 듯했다. 국제연대위원회는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중재자와 3번의 비대면 회의와 수십 차례의 이메일 교환을 통해 '대화' 개최 조건을 합의해 갔다. 하지만 일본측이 번번이 추가 조건을 내세우면서 결국 대화가 개최되지 못한 채 잉그리트 패런트는 임기를 다하고 말았다. 앞으로 어떤 과정으로 대화 프로세스를 진행할 것인지, 유네스코 사무국도 현재까지 별도의 안내가 없는 상황이다. 2022년 일본의 공세적 외교의 결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규정이 개정되면서 앞으로 모든 기록물은 국가를 통해 신청해야 한다. 또 기록물 관련국이 이의를 제기하면 심사 프로세스에 들어가지 못하고 소위 '대화'라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 규정에 따르면 일본이 등재를 반대하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에 대해서는 어떤 피해국이 신청해도 심사에 이르기도 전에 모두 좌절하게 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7개국 각각의 시민들의 모임인 14개 단체는 곳곳에서 나타나는 암초를 때로 피하고 때로 뛰어 넘으며 등재 신청 과정을 진행해 왔다. 지난한 시간을 거쳐 어렵게 신청한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공동등재 추진이었기에 더더욱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강하게 공유하고 있다. 국제연대위원회는 유네스코라는 장에서 벌어지는 역사전의 최선두에서 이 모든 불합리한 과정을 온 몸으로 견뎌내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성실하게 대화 프로세스에 참여해, 결국 이겨낼 것이다. 또 세계적 기록물을 여러 위험에서 보호하는 것은 물론 '세계의 기록유산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완전하게 보존되어야 하며, 문화적 관습과 실용성을 적절히 인정해 모두가 방해 없이 영구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원칙과 비전을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도록 관련 활동과 압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기록은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현재의 문제까지 포괄하며 모든 피해자들의 정의를 지키는 일임을 증명하는 '현재사(現在史) 기록물'이 될 것이다. 각주 ^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현재사라는 용어는 주진오 교수가 쓴 『주진오의 한국현재사-역사학자가 마주한 오늘이라는 순간』(추수밭 2021.11. 03.)에서 차용했다. ^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결정문을 번역한 내용이다. ^ 일본측 등재 신청 문서는 다음과 같다. (1)미국공문서관(NARA) 소장 3건( 1.1 Japanese Prisoner of War Information Report No.49 on Oct. 1, 1944 0f United States Officeof War Information, 1.2 Allied Translator and Interpreter Section, South West Pacific Area (ATIS),1.3. South East Asia Translator and Interrogation Center (SEATIC) (2) 일본국립공문서관 소장 1건 (2.1 1945.9.4. 「米兵の不法行為対策資料に関する件」) (3) 일본방위청 소장 1건 (3.1 1938.3.4.「軍慰安所従業婦等募集に関する件」) (4) 일본 미디어보도제작연구센터 소장 (4.1 2006年昭和研究所特別年鑑(元軍人の証言資料)) ^ 일본 정부가 일본군‘위안부’의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은 그간 발굴된 공문서를 총리 관저로 보내는 운동을 했다. 일본위원회는 이 공문서 보내기 운동을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 자료로 판단해 그 문서의 사본을 등재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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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필리핀에서의 ‘위안부’ 문제와 사회적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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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의 ‘위안부’ 문제와 사회적 인식 필리핀에서 일본 점령기에 발생한 ‘위안부’ 문제는 필리핀 국민들의 인식 속에 그다지 깊이 자리 잡고 있지 않다. 필리핀의 언론들도 ‘위안부’ 피해자들의 시위나 요구를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필자가 2017년 12월 마닐라만 산책로에 세워진 필리핀 ‘위안부’ 동상을 방문했을 때에도 주위의 필리핀 사람들에게 동상의 의미를 물었더니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필리핀에서 ‘위안부’ 문제가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은 1992년 핸슨(Maria Rosa Henson) 할머니가 자신의 ‘위안부’ 경험을 최초로 대중 앞에서 증언하면서부터였다. 그녀의 증언 이후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면서 어두운 역사의 진실이 드러났다. 조사에 따르면 당시 필리핀에는 약 1,000여 명의 ‘위안부’가 존재했으며, 그들 중 174명의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이 공식적으로 증언했다. 현재 이들 대부분은 사망했고 일부 생존자들은 두 개의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일본으로부터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필리핀 ‘위안부’ 문제의 실체는 그 맥락에 있어서 한국인들의 경험과 일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인권 유린과 전시 성폭력 그리고 이로 인한 고통의 무게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필리핀에서 발생한 ‘위안부’ 피해 사실의 실체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존재한다. ‘위안부’ 문제 관련 시민단체에서 피해자들의 다양한 인터뷰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고, 또한 좀 더 대중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들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기억과 재현들의 모태가 되었던 것은 핸슨의 증언과 본인이 직접 쓴 자서전(『Comfort Woman: Slave of Destiny』, 1996)일 것이다. 핸슨의 자서전에는 그녀의 출생부터 성장배경, 그리고 ‘위안부’ 경험과 그 후의 생활 등 험난한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함으로써 필리핀 ‘위안부’ 문제의 실체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 보고자 한다. 소녀 마리아의 ‘위안부’ 이야기 핸슨의 엄마인 줄리아는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14살 어린 나이로 지주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줄리아가 지주로부터 겁탈을 당해 낳은 아이가 바로 핸슨인 마리아였다. 마리아의 출생은 지주의 집에는 비밀이었으며, 지주인 마리아의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남몰래 돈을 보내 마리아와 그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마리아는 가족을 위해 자기의 삶을 희생한 엄마를 무척이나 사랑했고, 엄마 또한 마리아가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다. 마리아는 함께 살지는 않지만 은밀하게라도 돈을 보내 가족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해준 아버지에 대해 그리움과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며 총명한 소녀로 자랐다. 마리아의 학창시절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웃에 있는 병원의 의사이자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그 모델이었다. 그 의사는 마리아를 볼 때면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니 꼭 의사가 될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마리아의 삶에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14살이었던 1941년 12월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마닐라로 몰려오는 일본군을 피해 마리아는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떠나 시골 한 동굴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동굴 생활의 어려움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본군의 점령지가 된 마닐라로 다시 돌아왔다. 마리아의 삼촌들은 생계를 위해 인근에 있는 과거 미군기지에서 땔감을 모아다가 파는 일을 했다. 1942년 2월 마리아는 일을 나서는 삼촌들을 쫓아 땔감을 모으러 나갔다. 미군기지 인근에 도달하여 땔감을 줍던 마리아는 일본군 병사 2명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마리아를 겁탈하려 했고, 마리아는 이에 강하게 저항했다. 그때 일본군 장교 한 명이 나타나 병사들에게 소리치며 꾸짖었다. 마리아는 그 장교가 자신을 구해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자신이 먼저 마리아를 겁탈한 후 두 병사에게 넘겨주었다. 두 병사는 차례로 마리아를 겁탈한 후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 떠났다. 다행히 그곳을 지나던 인근에 사는 농부가 쓰러져 있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치료해 주었다. 이틀 후 회복된 마리아는 철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자신이 겪었던 사실을 얘기하니 엄마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다시 2주가 지나고 마리아는 엄마의 허락도 없이 다시 이웃들을 쫓아 땔감을 구하는 일에 나섰다. 마리아는 함께 간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땔감 줍는 장소에 도달했을 때 또다시 일본군 병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중에는 일전에 마리아를 최초로 겁탈한 장교도 있었다. 그는 다시 마리아를 붙들어 일행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겁탈하고 떠났다. 그 일을 알게 된 마리아의 엄마는 자신의 고향으로 마리아를 데리고 떠났다. 마리아가 새로이 머물게 된 곳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팜팡가 지역 앙겔레스 인근 숲속에 있는 한 마을이었다. 마리아는 엄마와 함께 대나무로 엮어 만든 삼촌의 집에 머물렀다. 당시 삼촌은 비밀리에 일본군에 저항하는 게릴라 조직(Hukbalahap, 항일국민군)의 지휘관이었다. 그 집에서는 게릴라 대원들의 회의가 자주 열렸다. 자신을 겁탈한 일본군에 대한 증오심이 컸던 마리아는 곧 게릴라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그녀의 임무는 주로 마을로부터 게릴라 대원들이 쓸 음식과 약 그리고 옷가지 등을 모아서 전달하는 것이었다. 위험한 일이기는 했지만, 마리아는 그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함께 부르던 게릴라 대원들의 노래 가사 중 “그들이 우리의 재산을 강탈하고, 우리의 여자들을 겁탈한다”라는 대목이 나올 때면 마리아의 눈에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1942년 4월 미군이 필리핀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호주로 철수한 후, 필리핀 사회는 일본군과 마카필리(Makapili)라고 불리던 일본군 앞잡이들의 횡포로 공포의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마리아는 게릴라 조직의 연락책 활동을 계속했다. 1943년 4월 어느 날 마리아는 다른 게릴라 대원과 함께 보급품을 숨긴 수레를 끌고 일본군 검문소를 지나게 되었다. 수레를 수색한 일본군 초병은 마리아 일행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잠시 후 일행을 다시 불러 세워 마리아만 남기고 다른 사람들은 보냈다. 그들은 마리아를 일본군이 거주하는 막사로 데리고 갔다. 그 막사는 과거 마을의 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그들은 마리아를 건물 2층으로 데려가 문도 없이 커튼으로 가려진 작은 방에 넣었다. 방 안에는 작은 대나무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일본군 막사에는 마리아와 같은 처지의 여섯 명의 다른 여성들이 있었다. 그날부터 오후 2시경부터 저녁 10시경까지 줄지어 들어오는 일본군 병사들의 ‘위안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12명씩 짝을 지어 오는 병사들을 상대하고 나면 30분씩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1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병사들이 자신의 성욕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면 상대 여자에게 폭력으로 화풀이를 했다. 그렇게 매일 마리아는 20~30명의 일본군 병사를 상대해야 했다. 병사들이 오지 않는 오전에는 칸막이도 없는 막사 한쪽 물가에서 병사들이 훔쳐보는 가운데 몸을 씻고 빨래를 해야 했다. 매주 수요일에는 검진을 위해 의사가 방문하는데 대부분 일본인 의사였고, 가끔 필리핀 의사도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한 달에 한 번 생리하는 며칠 동안 쉴 수 있었지만, 아직 생리를 시작하지 않은 마리아는 그런 휴식도 없었다. 마리아는 병원 건물 막사에서 3개월을 보낸 후 다른 여자들과 함께 정미소로 사용되던 건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도 전과 마찬가지로 ‘위안부’ 생활이 계속되었다. 하루는 장교 몇 명이 찾아와서 여자들을 데리고 지주의 저택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겁탈한 후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런 생활을 거듭하던 마리아는 말라리아에 걸려 심하게 앓기도 했다. 하루는 하혈을 많이 해서 의사에게 검진을 받으니 태아를 유산한 것이라고 했다. 아직 생리도 시작하지 않은 자신이 임신하고 유산했다는 의사의 말을 마리아는 믿을 수 없었다. 매일 밤 마리아는 어떻게 하면 도망갈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는 우연히 병사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마리아의 집이 있는 마을이 게릴라 근거지로 밝혀져 일본군이 습격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마리아는 막사 인근을 지나던 사람에게 몰래 이 사실을 알려 마을에 전하도록 했다. 일본군이 마을을 습격했을 때 이미 모두가 떠난 것을 알았고, 마리아가 정보를 누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일로 마리아는 모진 구타를 당해 탈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때 인근 마을에서 활동하던 게릴라들이 마리아가 있던 일본군 막사를 습격했다. 그들은 탈진해 있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데리고 가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길가 어두운 곳에 남겨두고 달아났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마리아를 인근에 살고 있던 마리아의 이모가 알아보고 엄마에게 연락하여 데려가도록 했다. 그때가 1944년 1월이었다. 그 날은 마리아가 일본군에 붙들려 ‘위안부’ 생활을 한 지 9개월 만에 자유를 얻게 된 날이었다. 상처받은 삶, 무거운 기억 돌아온 마리아는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2달 만에 정신이 제대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겁탈과 폭력의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걷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다. 말라리아 후유증으로 머리가 모두 빠져 마리아는 언제나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몸은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말을 더듬고 또한 입가에서 침이 흘러나오는 증상은 지속되었다. 마리아의 엄마는 세탁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미군 부대에서 일하며 빨랫감을 가져오던 도밍고라는 남자가 자주 들렀다. 엄마는 남자에게 공포심이 있는 마리아가 도밍고처럼 좋은 남자를 만나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마리아를 설득하여 서로 사귀도록 했다. 마리아는 도밍고에게 자신이 일본군으로부터 겁탈을 당했다고 고백했지만, 차마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 일은 오직 마리아와 엄마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마리아는 친절하고 이해심 깊은 도밍고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 생활은 그리 길게 지속되지 못했다. 어느 날 남편 도밍고가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반정부 게릴라 조직의 일원이 되었고, 그 후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도밍고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둘과 아들 하나는 오로지 마리아의 책임이 되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인근 담배회사에 청소부로 일을 시작한 마리아는 1990년 6월 63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그 회사에서 일했다. 1992년 6월 어느 날 핸슨 할머니는 라디오에서 일본군 점령 시기에 있었던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방송 끝에 피해 당사자를 찾고 있다는 광고를 들었다. 처음에는 지금까지 지켜온 비밀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그 광고를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점차 그동안 마음속 깊이 쌓아 놓았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망설이다 핸슨은 방송국에서 알려준 주소로 연락해 1992년 9월 10일 ‘위안부’ 대책위원회 관계자를 집 근처에서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증언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대책위원회 관계자의 설득과 또한 자신처럼 무거운 기억을 짐처럼 안고 살아가고 있을 피해자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2년 9월 18일 핸슨은 필리핀에서 최초로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위안부’ 경험을 폭로했다. 그 후 핸슨은 국내외적으로 ‘위안부’ 문제 관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의 활동에 용기를 얻은 다수의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다. 1995년 말 핸슨은 자신이 직접 쓴 자서전을 필리핀 한 언론 기관(PCIJ)에 가지고 갔다. 그녀의 기록이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판단한 그 기관에서 이를 편집하여 1996년에 핸슨의 자서전으로 출판했다. 자서전 말미에 핸슨은 “내가 죽기 전에 정의가 바로 세워지기를 바란다”라고 썼다. 핸슨은 자신이 부르짖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997년 8월 18일 69세의 나이로 고인이 되었다. 기억의 소환과 재현 그리고 역사 핸슨의 증언과 자서전은 필리핀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라는 과거의 기억을 현실로 소환하여 기록하고 재현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필리핀 ‘위안부’ 문제는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외침과 함께 영화나 기념비 등으로 재생산되어 대중들의 인식 속에 전파되고 있다. 이러한 과거 기억에 대한 소환과 재현은 오늘날 필리핀 국민들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1994년에 필리핀에서 개봉된 영화 <‘위안부’ : 정의를 위한 외침>은 필리핀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다룬 최초의 영화였다. 이 영화의 내용 중에는 일본군에 저항하는 게릴라의 활동이 특히 부각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게릴라 조직이 일본군을 응징하고 ‘위안부’를 구출해 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의 주제가 ‘위안부’에 관한 것이지만 그 초점을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전시 폭력과 인권 유린의 진실보다는 일본군에 대한 집단적 저항과 해방에 두고 있다. 2000년에 개봉된 또 다른 영화 <마르코바: 게이 ‘위안부’>는 마르코바라는 한 게이의 고백을 중심으로 ‘위안부’ 문제에 게이라는 다소 드라마틱한 인물을 등장시켰다. 필리핀의 유명 배우 부자(父子)가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아 대중적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각종 영화제에서 다수 수상함으로써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 마르코바가 게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역경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일본군 점령기에 클럽 무용수로 일하다가 동료 게이들과 일본군에게 겪게 되는 수모를 다루었다. 이 영화의 장면 중에는 핸슨의 자서전을 떠오르게 하는 정미소, 저택, 그리고 저항과 같은 소재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내용의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은 필리핀 ‘위안부’ 문제와 피해자들의 증언 전반에 대한 대중적 불신으로 이어질 여지를 남겼다. 필자가 필리핀 사람들과 ‘위안부’ 문제를 놓고 대화할 때 일부는 ‘위안부’ 문제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위안부’ 문제라는 무거운 역사적 비극을 하나의 흥미로운 볼거리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필리핀에서 ‘위안부’ 문제의 당사자이자 피해자들은 기억의 소환과 재현 과정에서 주변적 인물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필리핀 사회에서 일부 시민단체와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과와 보상을 위한 외침이 그다지 대중적 공감을 사지 못하고 사회적 이슈로 부각 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필자는 지난 2017년 마닐라만 산책로에 세워졌던 필리핀 ‘위안부’ 동상의 작가와 많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가 ‘위안부’ 문제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동상 제작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이후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때야 비로소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가 ‘위안부’ 피해자들로부터 느끼고 동상에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은 “비탄”(grief)이었다. 즉 피해자들의 슬픔, 고통 그리고 실망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동상의 얼굴에 묘사했다고 했다. 그러한 감정은 단지 가해자인 일본군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과거 사실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오늘날 국가와 국민을 향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작가로서 그들의 정의를 위한 외침이 끊임없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동상에 표현했다고 했다. 마닐라만 산책로에 세워졌던 필리핀 ‘위안부’ 동상은 2018년 4월 27일 세워진 지 4개월 만에 철거되었다. 필리핀 언론에서는 ‘위안부’ 동상의 제작 배경과 일본으로부터의 외교적 압력,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필리핀 정부의 태도 등, 다양한 내용이 보도되었다. ‘위안부’ 동상 제작을 의뢰한 단체는 중국계 필리핀 사업가가 만든 뚤라이 재단이며, 이는 필리핀보다 ‘위안부’ 문제가 더 심각한 중국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을 듣기도 했다.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여 재현하는 행위는 다름 아닌 역사 쓰기의 과정이다. 파편적 기억들이 소환되어 모아지고, 또한 기념비와 동상 그리고 책이나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되살아나 현재를 사는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되는 것이다. 비록 복잡한 국제관계와 국익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고, 외침에 울림이 적을지라도 ‘위안부’ 문제가 잊혀지지 않고 후세에 기억되기 위한 올바른 역사 쓰기는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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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는 셀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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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과 내용은 다음 졸고에서 추린 부분이 많다. 이혜령, 「그녀와 소녀들: 일본군 ‘위안부’ 문학/영화를 커밍아웃 서사로」, 오혜진 외,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민음사, 2018.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폐기와 재협상을 촉구하는 논의가 장미대선으로 당선된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활발했던 당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가 몇 분 남았는가가 각별한 관심사였다. 2017년 7월 23일 김군자 님이 돌아가셨을 때, 한 신문은 「이제 37송이, 시간이 없다」는 헤드라인으로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폐기와 재협상을 촉구하는 1면 기사를 내보냈다.[1] 그 후로도 여러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윤석열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 기정사실화되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외에 다른 전쟁 또한 유발될 것 같은 신냉전의 세계정세 속에서였다. 2022년 5월 2일 또 한 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이자 운동가이셨던 김양주 님의 별세를 알리는 기사가 올라왔다. 김양주 님의 부고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장례식이 치러지는 과정은 지역과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위안부’ 문제가 더 활성화되는 정치적, 사회적 연결망들을 드러내는 것 같다.[2] 그 기사는 2022년 5월 2일 정부 등록자 240명 중 11명이 생존해 있음을 아울러 보도했다.[3] 기사는 1면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2017년에는 정부 등록자가 239명이었는데, 그 사이에 등록자가 1명 늘어 240명이 되었지만 피해 생존자는 이제 11명이다. 부고와 함께 셈해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숫자는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중 살아있는 이들의 숫자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란 1993년 6월 11일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 제정과 함께 피해자 신고, 심의, 결정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자를 뜻한다.[4] 이것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를 셀 수 있게 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피해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았으며 그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위안부’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정작 피해 생존자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고 진행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만이 아니라 피해자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시민들에게서도, 또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운동해왔던 생존자들에게서도 주장되는 바이다. 최근 이용수 할머니는 “살아있는 내가 책임이 너무 무거워서 요즘 잠이 오지 않는다. ‘할머니들 다 죽기를 바라느냐’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하지 않았다. 남아있는 할머니들 소원이라도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5] 그런데 애초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는 셀 수 있는 존재였던가? 어떻게, 얼마나, 어디에서 모집, 동원되었는지 그 전모를 증명할 증거 따위는 없다는 것이 일본 정부와 국내외 역사부정주의자들의 기본 입장이며, 발굴 및 공개된 증거는 부분적인 것일 뿐이기에 그 주장은 과장되거나 날조된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런 따위의 증거 부족, 증거 부재야말로 ‘위안부’는 셀 수 없는, 애초에 그 삶과 죽음이 셀 필요조차 없는 존재였음에 대한 역설적 웅변 아닌가. 20만 명을 상회할지도 모른다고 추정되는 조선인 ‘위안부’는 그 추정치가 일본군, 일본군 부대의 숫자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6] 일본군‘위안부’에 비해 일본군으로 동원된 조선인 수의 추정은 아주 구체적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통계 가운데 최저치를 적용하면 육군특별지원병 16,830명, 학도지원병 3,893명, 육군징병 166,257명, 해군(지원병 포함) 22,299명 등 군인 동원 총수는 209,279명이라고 한다.[7]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세세히 셈해질 수 있었는가? 다카시 후지타니는 “조선인의 전시동원으로 인해 이들은 직접적으로 생명, 건강, 생식, 그리고 행복의 가치가 있는 인구 구성원이 되었다. 즉 조선인들은 생명관리권력(bio-politics)과 통치성의 레짐 안으로 편입하게”[8]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도 그들의 죽음까지 셈할 수 없었다는 데서 문제가 있으나, 조선인 일본군‘위안부’는 생명, 건강, 생식, 그리고 행복의 가치가 있는 인구 구성원 자체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는 비단 조선인 ‘위안부’에 국한되지 않는 특성일 것이다. 셀 수 없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셀 수 없는 자들을 셀 수 있는, 가시적이고 기지적(旣知的)인 존재로의 범주화는 피해 생존자 김학순(1922-1997)의 커밍아웃에서 본격적으로 개시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과 거기에 조응한 한국 정부의 지원에 따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신고 및 등록에 의해 이루어졌다. 신고 및 등록은 피해자/생존자를 셀 수 있는 범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신고와 등록 절차에는 커밍아웃이라는 과정이 수반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등록은 커밍아웃으로서의 증언, 증언으로서의 커밍아웃을 공신력 있는 것으로 만드는 장치였다는 점에서 운동을 안정화, 규범화하는 데 기여하였다.[9] 증언의 집적인 일본군‘위안부’ 증언집은 신고와 등록의 절차를 밟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성과로 주어진 대상자 등록이란 최종적으로는 심의와 결정, 통지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라는 진술이 심의 결과 부정되어 등록되지 못한 분들은 과연 없었을까? 해봄직한 상상 아닌가? 신청사항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본인 진술서, 사진이나 목격자 등 제3자의 증언)가 있었다면 어땠을 것인가? 대상자 등록 신청은 한 번의 기회만이 주어진 것일까? 결정을 통보받지 못한다면, 그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인가 아닌가?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성과로서의 이 법의 제정과 시행 과정을 폄하하기 위함이 아니다. 법의 제정과 시행 또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출현과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함을 말하기 위함이다. 또한 일본군‘위안부’를 한국 정부의 법적 등록의 대상으로 범주화하고 거기에 안착해 있는 상황은 이제 한계 지점에 이른 것 같다. 지금까지 효과를 발휘했던 범주화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중층적이고도 복합적인 이해를 어렵게 만든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김학순의 증언이 있기 16년 전인 1975년 자신이 일본군‘위안부’였음을 증언한 피해 생존자 배봉기(1914-1991)의 삶은 이 지점에서 시사점을 던져준다. 미군이 통치하던 오키나와가 1972년 일본으로 반환된 후 오키나와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법적 지위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자 1975년 배봉기는 자신이 일본군‘위안부’로 오키나와에 오게 되었음을 증언함으로써 ‘특별 재류’ 자격을 얻게 된다.[10] 임경화는 “이로써 배봉기는 30년 만에 국가에 등록되었다”[11]라고 썼다. 배봉기의 삶은 보이지 않게 살았던, 즉 셈해질 필요가 없었던 존재로서의 일본군‘위안부’의 비인구적 성격을 삶 자체로 구현하고 있다. 그러한 성격은 한편으로 침묵됨으로써 생겨났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김현경은 “귀환하지 않은/못한 일본군‘위안부’”인 배봉기의 삶과 죽음은 포스트식민 냉전 체제라는 힘이 주조했으며 미국, 일본, 남한 간의 위계질서의 착종 속에서 일분군‘위안부’ 문제를 비가시화하고 서발턴의 침묵을 지속시키고 있었음을 날카롭게 논증하였다.[12] 미국 신탁 통치하 오키나와 조선인을 불가시화화하는 법적 구조의 포위망 속에서, 또 일본군‘위안부’로서의 삶과 전쟁 경험, 전후의 고통을 발화할 수 있는 장이 없었기 때문에 배봉기의 삶은 가시화될 수 없었다. 1975년 공적 증언에 의해 배봉기의 삶이 알려졌으나, 냉전의 남북 체제 대결 구도가 일상화된 남한 사회에서 그즈음 조총련 활동가들과 친분을 맺고 있던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청중은 없었다. 나아가 그의 유골의 소유권을 두고 민단과 조총련은 배봉기를 대신하여 말하고자 함으로써 배봉기의 목소리를 지우고 말았으며, 남한에서는 당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이슈화가 한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경계 안에 있지 않은 ‘위안부’들에 대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채로 그의 주검과 귀향을 둘러싼 논의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한다.[13] 국가의 경계 안에 있는 ‘위안부’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삶과 죽음이 비가시화와 침묵의 세계 속으로 가라앉지 않을 것인가의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국내 반페미니즘 정서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확고해진 신냉전에의 편승 기류가 심상치 않다. 여성가족부 사이트에 시, 도별 지원 대상자의 수를 써넣은 간단한 도표는 언젠가 축소되어 마지막 한 명조차 유명을 달리해 사라질 날을 초조하게 또는 공연히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그나마 등록자가 240명이었음을 그 표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헌미는 240명과 20만 명 사이에서 ‘가라앉은 자’들의 이름을 불러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4] 이헌미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말을 언급했지만, 나는 도미야마 다에코(1921-2021)의 그림 <바다의 기억> 시리즈가 떠올랐다.[15] 남태평양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죽어서도 살아있는 ‘위안부’들과 해골들, 일본군, 총과 사물들, 샤먼과 원주민들, 물고기와 새, 나무들. 그 존재들을 셈할 수 있는가? 배봉기와 김학순, 그리고 결코 계량화될 수 없는 증언들이 열어젖힌, 전쟁 속에서의 살아남음과 목격한 죽음들, 강간과 모욕과 멸시와 가난, 체념과 침묵, 그리고 원망과 의지의 카오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이라는 과제를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처음인 것처럼 반복해야 하는 자맥질일 것이다. 도미야마 다에코 작가의 ‘바다의 기억’ 연작 중 <남태평양 해저에서> 이미지는 다음 기사를 참조 >> 한겨레, 일본 100살 거장의 ‘기억’…야만 들추고 약자 보듬다, 노형석 기자, 2021.03.24. 각주 ^ 『경향신문』, 「이제 37송이, 시간이 없다」, 2017.7.23. ^ 다음을 참조. 정갑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양주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결』(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http://www.kyeol.kr/ko/node/457 게시일: 2022.06.10 최종수정일: 2022.06.14 ^ 『한겨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양주 할머니 별세…생존자 11명」, 2022.5.2 ^ 등록 절차와 관련된 법은 2002년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개정된다. 2018년 법률명 등이 바뀌어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시행되었으며 2020년 일부 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법률 제정은 정대협 운동의 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편찬위원회 엮음,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20년사』, 한울, 2014, 59-62쪽. ^ 『한겨레』, 「주일대사 내정자 만난 ‘위안부’ 피해 이용수 할머니…“죽기 전에”」(김규현 기자), 2022.6.21 ^ 강정숙, 「일본군 ‘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 조선인 ‘위안부’를 중심으로」,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2010, 75-80쪽 참조. 특히 표2-2 군‘위안부’총수에 대한 여러 의견, 79쪽 참조. ^ 대일항쟁기간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편, 『위원회 활동 결과보고서』, 2016, 124쪽. 다음에서 재인용.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사이트 https://www.fomo.or.kr/kor/contents/40 ^ 다카시 후지타니, 박선경 역, 「죽일 권리, 살릴 권리: 2차 대전 동안 미국인으로 살았던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살았던 조선인들」, 『아세아연구』 제51권 2호, 고려대 아세아연구소, 2008, 23쪽. ^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별지 제1호서식) (개정 2018.6.5.)>인 <대상자 등록신청서>에는 신청인(피해자)의 신원과 함께 ‘일제하 당시 생활했던 상황’에 대한 란이 마련되어 있다. ‘강제동원 연도(년, 월)’, ‘강제동원 장소’, ‘귀환 연도(년, 월)’, ‘귀환 장소’, ‘강제동원 상황’, ‘현지 생활’, ‘귀환 상황’, ‘현재 생활’에 대한 진술을 해야 한다. 신청인 제출서류로는 다음 세 가지가 제시된다. 1. 재외 국민등록부 등본 1부(국외 거주자만 해당합니다) 2. 보호자임을 증명하는 자료(보호자가 대신 신청하는 경우에만 해당합니다.) 3. 그 밖에 신청사항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본인 진술서, 사진, 목격자 등 제3자 증언 등) ^ 임경화, 「마이너리티의 역사기록운동과 오키나와의 일본군 ‘위안부’」, 『대동문화연구』112,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20, 493~495쪽. ^ 위의 글, 494쪽. ^ 특히 “포스트식민 냉전체제”라는 용어와 서발턴의 침묵을 지속시키는 다양한 층위를 분석하는 데 있어 활용된 방법적 개념과 관련한 대목을 볼 것. 김현경, 「냉전과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의 잊혀진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 『한국여성학』제37권 2호, 한국여성학회, 2021, 208~214쪽. ^ 위의 글, 216~229쪽 참조. ^ 이헌미, 「당신의 이름은」, 『결』(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http://www.kyeol.kr/ko/node/456 게시일: 2022.06.07 최종수정일: 2022.06.08 ^ 5.18 광주의 화가로 더 잘 알려진 도미야마 다에코는 윤정옥, 이효재와의 만남을 통해 큰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모두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세대였다. 도미야마 다에코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의 문제를 ‘위안부’를 주제로 한 <바다의 기억> 시리즈를 1986년 완성한다. 이에 대해서는 미나베 유코, 「월경하는 화가, 도미야마 다에코의 인생과 작품 세계: 포스트콜로니얼리즘과 페미니즘의 교차지점으로부터」, 『민주주의와 인권』제21권 1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1, 94-10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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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1부 - ‘남성영화’로서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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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1부 ‘남성영화’로서의 <귀향> 이 글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요청에 따라 『페미니즘 리부트』(손희정, 나무연필, 2017)에 수록되어 있는 「기억의 젠더 정치와 대중성의 재구성: 대중 ‘위안부’ 서사를 중심으로」를 요약하고 수정한 글입니다. 남성영화의 시대와 ‘위안부’ 영화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는 대체로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남성 중심 서사에 몰두해 왔다. 2015년이 되면 이런 경향에 대한 비판이 점점 강해지는데, 아마도 ‘벡델 테스트’의 인기는 이렇게 여성 캐릭터를 소외시켜온 한국 영화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였을 것이다. 미국의 만화가 앨리스 벡델이 고안한 이 양성평등지수 테스트는 “영화에 1.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둘 이상 등장하는가 2. 그 두 여성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3. 그 대화의 내용이 남자에 관한 것이 아닌가”를 질문한다. 사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그 작품이 바로 ‘여성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21세기 한국 영화의 현주소란 이 정도의 테스트조차 까다로워 보이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는 대중들에게 유의미한 기준으로 회자되었다. 한편, 2017년의 경우 흥행 한국 영화 15위 안에서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2017) 단 한 편이었다. 이 역시 살펴볼 만하다. 지난 3년간, 소위 여성영화로서 화제를 불러 모으거나 흥행을 한 작품 안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가 특히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2016년 개봉한 <귀향>(조정래)은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놀라운 흥행성적을 올렸다. KBS 특집 드라마로 제작되어 영화로 재편집된 <눈길>(이나정, 2017)은 대중들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손희정, 권명아, 권은선, 주유신 등) 비평가들 사이에서 <귀향>과 함께 비교해서 볼만한 작품으로 계속 회자되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웰메이드 상업 영화로서 흥행하면서 여성 아티스트 나문희에 대한 관심을 불러모았고, <허스토리>(민규동, 2018)는 충성도 높은 팬덤인 ‘허스토리언’의 탄생을 불러왔다. 여전히 남성의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여성의 이야기는 잘 상상되지 않는 한국 영화판에서, 여성 서사 중에서는 유독 ‘위안부’ 서사가 큰 관심을 받는 것은 왜일까? 이전까지는 ‘위안부’ 문제가 한국 영화에서 그다지 주목받는 소재가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이는 좀 특이한 일이었다. 앞으로 2회에 걸쳐 소개될 본 글은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귀향>에서부터 <허스토리>에 이르기까지 최근 한국 대중에게 소개된 ‘위안부’ 영화들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각각의 영화들은 ‘위안부’에 대한 다른 재현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맥락 안에서 관객을 만났고, 또 각기 다른 의미망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여기서 ‘안’은 서사와 이미지의 문제를, ‘밖’은 작품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과 관객성을 의미한다. 물론 이 안과 밖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귀향>의 화제성과 『제국의 위안부』라는 맥락 2016년, ‘위안부’ 문제는 또다시 대중적 관심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2015년 출간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와중에 12.28 불가역적 합의가 서둘러 선언되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 두 가지 사건에 전면적으로 반박하는 작품인 <귀향>이 개봉했다. <귀향>을 둘러싼 갑론을박은 뜨거웠다. 한쪽에서는 이 작품이 강간을 시각적 스펙터클로 구성하여 고통을 쾌락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 영화가 촉발한 감정의 역동과 그 정치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나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역사를 왜곡하고 있을 때, 그에 반박하는 대중 서사로서 <귀향>이 선보이는 식민지배와 그 폭력에 대한 저항이 이 작품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귀향>에 대한 열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이 소통되는 사회적 맥락 중 하나였던 『제국의 위안부』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제국의 위안부』와 <귀향>은 어떤 점에서 달랐던 것일까? 전자가 ‘위안부’ 피해자의 징모 과정에서의 자발성을 강조할 때, 후자는 성노예화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제국의 위안부』는 조선인 ‘위안부’ 여성들이 겪은 폭력이나 고통이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공유하고 있었던 가부장제의 문제이지 제국의 지배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위안부’ 여성들에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한 것은 그녀들을 팔아넘긴 부모거나 그녀들을 징모하고 판매했던 조선인 포주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책의 설명에 따르면 ‘위안부’ 제도는 가난한 여성들이 가족을 위해 매춘을 했던 ‘가라유키상’ 전통의 연장선에 있으며, 조선 여성들의 사정은 당시 일본 매춘 여성의 사정과 다르지 않았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 사이의 동질성에 대한 주장은 중국 여성과 조선 여성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조선 여성들은 일본군 남성들의 ‘동반자이자 동료’로서 서로 정을 나누는 보호의 대상이었던 반면, 중국 여성들이야말로 일본군 남성들의 강간과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의 ‘동지적 관계’라는 상상력은 이렇게 발동된다. 그리고 이 상상력의 재료가 되는 것이 ‘위안부’ 피해자의 구술에서 발견되는 징집 과정에서의 자발성과 ‘즐거운 한때’에 대한 기억들이다. 『제국의 위안부』는 남한의 가부장제와 착종된 민족주의적 사유체계 및 그를 바탕으로 하는 ‘폭력적인 운동’이 ‘위안부’ 피해자를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 속에 가둬 넣어야 했기 때문에 이 기억을 지웠다고 주장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피상적으로 보편적 성 체제인 가부장제만을 문제 삼으면서 가부장적 군사주의에 기댄 일본 제국주의의 작동 기제에 면죄부를 주는 오류를 범한다. 이 책의 부제는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다. “기억을 ‘헤게모니 투쟁의 장’으로 명명함으로써” 그는 공적 기록에서 사라진 ‘여성기억’을 복원해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부장제에 기반하고 있었던 제국주의에 면죄부를 줌으로써 여성기억을 가부장제에 복무하는 ‘역사 다시 쓰기’로 치환해 내고 재영토화시킨다. 기실 페미니즘의 문제의식 안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려면 일본과 조선/남한의 제국주의, 군사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가부장제와 어떻게 교차적으로 작동하였는가를 살펴야지, “가부장제가 제국주의, 군사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보다 더 근원적인 지배 체계다”라는 주장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 작업은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등장하여 12.28 불가역적 합의라는 외교 정치적 사건과 협업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왜곡된 역사 인식을 대중적으로 만들어냈다. 매혹이 된 폭력, 남성으로 젠더화되는 대중 <귀향>은 『제국의 위안부』와는 대조적으로 보편적인 가부장제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예민하게 인식하면서도 ‘위안부’ 동원 체제를 성노예화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관객을 이끌었다. 가부장제와 제국주의의 공모를 이해하면서 가부장제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서로 접속시켰다. 이는 무엇보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영매인 은경(최리)에게 귀신이 들리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은경이 낯선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은경의 아버지가 그를 공격하자 두 남자 사이에 싸움이 붙는다. 그리고 둘 다 은경의 몸 위에서 죽고 만다. 은경은 보편적인 성폭행 피해자이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 가부장제의 희생양이었던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영매가 된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장면에서 자신이 성폭행범을 연기함으로써 ‘위안부’ 제도를 가능하게 했던 욕망을 가진 남성으로서 속죄를 하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잠재적 가해자’로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독의 고백은 동시에 그 ‘욕망’을 자연화시키면서 오히려 위안소 제도에 대한 변명거리를 제공한다. 더불어서 감독의 이런 태도가 영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이 영화에 드러나는 영화적 시선의 주인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남성’이 되며, 이를 따라가는 관객 역시 (반드시 그런 젠더화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으로 젠더화된다. 이때 우리는 <귀향>의 대중성을 적극적으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관객이 <귀향>에 몰입하고 열광하도록 했던 대중성은 영화의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적 서사-이미지’(권은선)가 선보이는 선정성에 놓여 있었다. 여성의 신체와 강간을 일종의 볼거리로 만들고 그 피해의 고통을 물신화함으로써, 영화는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봉합시킨다. 물론 영화는 텍스트 내에 이미 남성적인 선정성에 대한 변명을 담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미술치료 작품에 바탕하고 있음으로 ‘사실적 묘사’에 충실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방대한 양의 증언에서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가는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성노예화 과정을 그리기 위해 강간 장면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심지어 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무조건 대표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은 이 사회가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이 직접적인 성폭력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과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것인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남성’들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것인지 모호해진다. 이런 의심은 <귀향>의 연작인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조정래, 2018, 이하 <귀향2>)를 보면 더욱 강해진다. <귀향2>는 <귀향>에 출연했던 한 배우가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합창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흑백 기록 영상과 <귀향>의 컬러 영상이 교차 편집된 작품이다. 현재의 시점을 담은 흑백 영상은 사실 아무런 서사의 의미 값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귀향2>는 <귀향>의 재탕에 불과하다. 영화는 전작의 성공에 기대어 만들어진 아류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류작을 통한 자기 복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렇게 아류를 만들고야 마는 감독의 나르시시즘에 놓여있다. 감독은 <귀향>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위안소 첫 집단 강간 시퀀스’를 재생하면서 그 위로 ‘위안부’ 피해 당사자의 구술을 보이스오버로 배치한다. 그 목소리를 영상 위에 그대로 입히면서 “내 영화는 피해자의 증언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재차 강변하는 것이다. 이때 피해자의 목소리는 감독의 정당성을 보증하기 위한 변명으로 전락한다. 심지어 <귀향2>는 <귀향>의 재현 영상과 현실 기록 영상을 구분하기 위해서 ‘위안부’ 피해자의 구술 기록 영상조차 흑백으로 색을 빼버린다. 관객들로 하여금 두 푸티지의 성격을 쉽게 구분하도록 하기 위해, 기록영상은 철저하게 죽은 이미지로 박제되고 도구화된다. <귀향2>에 이르면 “과연 <귀향>은 여성영화였을까?”라는 의구심에 대한 답은 분명해진다. <귀향>은 ‘여성영화’였다기보다는 오히려 남성으로 젠더화된 관객성에 소구하면서 남성의 이야기를 여성의 피해 서사를 통해 표현한 ‘남성영화’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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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오키나와 사람들과 '위안부' - 기억을 공간화하며 '위안부'의 삶을 증언하는 사람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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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수요시위 1000회를 맞아 서울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보다 3년 앞선 2008년에 윤정옥이 일본 오키나와 주민들과 함께 오키나와 현지에 '위안부' 추모비를 세웠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146곳 이상의 '위안소'가 존재한 오키나와에서 '위안부'를 목격하고 '위안부'에 관한 기억을 전해온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추모비로 '위안부'를 기억하는 사람들 오키나와에는 이시가키섬, 도카시키섬, 요미탄촌, 미야코섬에 각각 민간에서 세운 '위안부' 추모비가 있다. 오키나와에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 사람들, 그 증언을 들은 활동가, 예술가,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함께 추모비를 건립했다. 오키나와전 중에 이시가키섬의 많은 주민들이 말라리아와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이시가키섬의 향토사 연구자 오타 시즈오는 이시가키섬의 오키나와전 실태를 수 년간 조사하며 주민들의 증언을 그림과 사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던 중 그는 기록만으로는 추모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와하라라는 지역에서 '바바하루'라는 가명으로 불린 '위안부'의 죽음이 그랬다. 전후 일본군은 이 섬을 찾아와 전우들의 유골을 수습해 추모비를 세웠다. 하지만 바바하루로 불렸던 이는 인적이 드문 후미진 밭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 어디에 묻혀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오타 시즈오는 조사를 통해 바바하루가 죽었을 장소를 특정해 그 곳에 나무로 된 추모비를 세워 그를 추모했다. 1998년에 '유혼의 비(留魂之碑)'라 명명된 이 추모비 앞에서는 매년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이 때마다 민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쑥 들어와 증언을 요구하는 불청객들이 있어 주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현재 위령제는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다. 배봉기가 동원되어 '위안부'로 생활하기도 했던 도카시키 섬에는 1997년 한국의 영화감독 박수남이 주도하여 세운 '아리랑 비'가 있다. 박수남은 강제연행된 조선인을 추모하는 다큐멘터리인 <아리랑의 노래: 오키나와에서의 증언>(1991년)를 제작했다. 윤정옥의 취재기와 박수남의 영화 등을 통해 배봉기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한국의 기자들과 연구자들, 조사자들이 오키나와의 민가에 방문해 함부로 사진을 찍는 일이 늘었다. 그러나 주민 대다수가 '집단자결'[1]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이기도 한 이 섬은 방문객들에게 마냥 우호적이기만 한 곳은 아니다. 주민들은 일상이 침범당하는 상황에 예민해졌고, 사생활을 보호받기를 원했다. 단기간 방문해 모든 것을 찍고 알아가려는 태도는 주민들의 일상을 위협하기 쉽다. 따라서 기자, 연구자, 조사자들로부터 자신의 삶의 내밀한 영역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경계심을 외부인들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은 전시폭력 피해 사실을 증언하면서도, 일본군'위안부'의 생활영역을 보호하려는 이중의 노력을 해왔다. 주민들의 경계의 눈초리는 배봉기를 비롯한 많은 '위안부'의 일상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오키나와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림5. 도가시키 섬의 아리랑비(1997년 건립).jpg 한편 침묵을 강요당한 조선인 '위안부'들과는 대조적으로 군인‧군속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 피해자들은 해방 후 오키나와를 방문해 추모비를 직접 세웠다. 오키나와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결성한 '태평양동지회'는 1986년 오키나와를 방문했고 『오키나와 이야기』(2016년, 역사비평사)의 저자 아라사키 모리테루 교수와의 피해자 증언 모임을 통해 주민들과 교류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1999년, 경상북도 영양군에 '태평양 전쟁・오키나와전 조선반도 출신자 한의 비(이하 '한의 비)'가 세워졌다. 2006년에는 같은 추모비가 오키나와 요미탄에 세워졌다. 요미탄은 미군의 상륙 거점이었으며 오키나와전 중에 '집단자결'의 비극이 있었던 곳이다. '한의 비' 디자인은 오키나와의 조각가 긴조 미노루[2]가 맡았다. 요미탄의 '한의 비'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추도문이 새겨져 있다. 그림6. 요미탄의 한의 비(2006년 건립).jpg 별도의 제작자없이 주민들의 기억 만으로 추모비가 세워진 사례도 있다. 2008년 미야코섬에 세워진 '아리랑 비'와 '여성들에게'(한국어로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라는 이름의 추모비이다. 우연히도 필자의 조사가 이 추모비들의 건립에 작은 계기를 만들었다. 끝으로 이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그림7. 미야코 섬의 아리랑비와 여성들에게(2008년 건립).jpg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을 아름다운 여성으로 기억하는 미야코섬 사람들 1992년 ''위안소' 지도'를 만들던 당시에 상세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곳이 미야코섬이다. 오키나와전 당시 미야코섬에는 미군이 상륙하지 않았고, 이에 상대적으로 전쟁 피해가 적은 지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2006년, 오키나와전 연구자로서 오키나와 나하에서 비행기로 30분 정도 떨어진 미야코섬에 처음 방문했다. 이 곳은 오키나와전 당시 3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주둔하여 섬 전체를 일본 항공시설로 만든 '항공기지의 섬'이기도 했다. 필자는 항공기지 주변 마을 주민들을 찾아 다니며 주민들이 겪은 오키나와전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옛 일본군 비행장 활주로가 있던 노바루 부락의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바위 옆에서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농부를 만났다. "그 돌이 무엇인가요?" 그저 지나가듯 물었을 뿐이다. 슬리퍼에 허름한 추리닝을 입은 농부는 바위 옆에서 자라나고 있던 작은 꽃들에게 물을 주며 대답했다. "이 곳은 조선인 여성들이 빨래하러 가다 잠깐 쉬던 곳이라오." 그 농부의 이름은 요나하 히로토시였다. 기적과도 같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는 아주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며 질문한 내게, 자신이 겪은 오키나와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미야코섬에서 가장 큰 '위안소'가 바로 이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소년시절 섬에서 나는 고추를 따다가 조선인 여성들에게 몰래 가져다주곤 했다는 추억 등을 이야기했다. 그는 이제 기지도, '위안소'도, 아무것도 없는 넓은 허허벌판에 커다란 현무암을 놓아 그녀들을 추모하고 있노라 했다. 예전에는 현무암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나무가 있어서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여성들이 잠깐씩 쉬다가 '위안소'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요나하 히로토시는 이 돌을 어디에서 어떻게 가져왔을까? 필자는 그가 허허벌판에 노인 혼자서는 운반하기 힘들었을 커다란 돌을 가져다 놓고 홀로 '위안부'들을 기리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그는 왜 그토록 이 장소를 기억하고 싶어했을까? 필자는 이 조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침 나하에서 생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오키나와 평화투어를 하고 있던 윤정옥을 만났고 요나하 히로토시의 이야기를 전했다. 윤정옥이 생존하는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를 가장 처음 조사한 곳이 바로 오키나와였다. 윤정옥은 오키나와 방문 초기에 도카시키섬에서 유령이 되어 떠돈다는 '위안부', 하루에의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워했다. 하루에가 떠올라서였을까? 윤정옥 역시 미야코섬에 추모비가 건립되길 간절히 소망했다. 한편, 필자의 미야코섬 현지 조사는 의도치 않게 지역 내의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필자의 조사 현장을 본 미야코 시의원 한 명이 시의회에서 '종군위안부' 지도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여당 의원들이 '종군위안부'는 피해자도 꺼려하는 용어라며 반대했다. 가열되는 논쟁 속에서 사회를 보던 당시 시장이 "우리집 옆에도 '위안소'가 있었다"라는 말을 하였고, 여당 의원들은 중립을 지켜야 되는 시장이 이런 말을 했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여당 의원들의 반발로 회의 진행이 어렵게 되자, '종군위안부' 지도 제작 논의 사실 자체가 시의회 회의록에서 삭제됐다. 이 소식을 들은 미야코섬 여성운동가들은 시의회의 결정에 항의하는 의미로 이 논쟁의 시발점이 된 조사자인 필자를 초청해 강의를 열었다. 초청 강의에는 그동안 필자에게 증언을 해 준 많은 주민이 모였다. 필자의 간단한 조사 내용 발표가 끝난 뒤 여성운동가들이 미야코섬 시의회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데 휠체어를 타고 참가한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손을 들고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아리랑을 부른 뒤 울먹이듯 말했다. "이 노래는 그때 그 여성들이 부르던 거에요. 왜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려 하죠? " 아리랑에 대한 응답처럼 '위안부'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사쿠다 겐토쿠(1927년생) 씨는 필자가 미야코섬을 방문할 때 마다 옛 '위안소' 터까지 가는 길을 안내해 주곤 했다.[3] 사와다 도요조(1939년생)씨는 본인을 군국주의 소년이었다고 소개하곤 했는데, 우물에 빨래하러 가는 여성들에게 돌을 던진 일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4] 그밖에도 다 떨어진 여성들의 옷을 꿰매어 준 사연, 몰래 여성들에게 차를 대접하거나 음식을 나눠준 사연 등의 증언이 이어졌다 이후 윤정옥, 나카하라 미치코, 다카자토 스즈요를 대표로 하는 '오키나와, 한국, 일본, 미야코섬 '위안부' 문제 공동조사단'이 꾸려졌고, 멤버가 확대된 만큼 증언 수집에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공동조사단의 조사 결과 오키나와에 있었던 130여 곳의 '위안소' 가운데 17곳이 미야코섬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미야코섬에는 물이 귀하여 조선인 '위안부'와 현지 주민이 함께 우물을 사용했고, 우물을 매개로 주민, 특히 여성 주민들과 '위안부' 사이의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쟁 초기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마치 아이돌인양 일본군이 주최하는 행사에 불러내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공동조사단은 위의 증언들을 모아 '위안부'를 본 사람들의 기억을 담은 최초의 증언집을 편찬했다.[5] 미야코섬 공동조사단의 활동 소식은 오키나와 본섬에까지 알려져 반향을 일으켰다. 필자가 요나하 히로토시를 만나고 2년이 지난 2008년, 허허벌판에 놓인 현무암은 '아리랑비'가 되었다. 요나하가 가져다 놓은 그 모습 그대로, 아무런 조각도 하지 않은 기억의 돌인 아리랑비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바람이 새겨졌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이 근처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츠가 우물에서 빨래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잠시 쉬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비참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세계의 평화와 공존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비를 후세에 전하고 싶다 - 추모비, 아리랑비 요나하 히로토시 아리랑비 뒤에는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세운 세 개의 추모비가 아리랑비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이 비석들에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의해 피해를 입은 점령지 및 식민지 피해자들이 사용한 11개 지역의 언어[6]와 베트남어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일본군 '위안부'를 위한 비석에 베트남어의 비문을 추가한 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가한 가해성 역시 함께 기억해야 된다는 윤정옥의 바람이기도 했다. 12개의 언어로 새겨진 글귀는 다음과 같다. 일본군이 저지른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의 아픔을 나누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무력 분쟁에 따르는 성폭력이 그칠 것과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가 오기를 염원합니다. - 추모비, 여성들에게 미야코섬에서는 매년 9월 주민들이 주최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이 추모제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행사이다. 이 소중한 기억의 공간에서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위안부'가 부른 아리랑 노래를 기억하는 주민들과, 그들의 증언을 들은 한국, 일본, 오키나와의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어우러져 아리랑을 부른다. 12개의 언어로 새겨진 비문은 다음 세대 여성들에게 전하는 메세지로, 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염원으로 미야코섬에 자리하고 있다. '조센삐'와 '압파라기' 여성 사이에서 필자는 오키나와의 '위안소' 조사를 12년간 진행하며 많은 증언을 들었고 많은 '위안소'를 보았다. 때로는 주민들이 그려주는 그림이나 기억에 의지해 '위안소' 위치를 점으로 찍어 나타낸 '위안소' 지도로, 때로는 '위안소'로 사용된 건물과 장소에서 과거 '위안소'로 쓰인 건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증언으로 오키나와 사람들이 본 '위안부'에 관한 기억들과 만났다. 군인들은 '위안부'를 '조센삐'(삐는 여성의 성기를 낮잡아 부르는 속어로, 일본군이 '위안부'를 부를 때 '위안부'의 출신지역에 삐를 붙여 '~삐'라고 부르기도 했다 -편집자 주)라고 불렀다. 그 어감 그대로 오키나와 주민들이 '위안부'를 차별적 언어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총력전 하에서 '위안부'들이 어떻게 이용되고 버려졌는지를 기억하기에 오키나와 주민 그 누구도 이 여성들이 일본군과 '동지'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미야코섬 사람들은 '위안부'들을 '압파라기'(아름다운 여성)라 부르기도 했다. 군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는 피부가 하얀 조선의 여성들은, 태양볕에 검게 그을린 섬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여성으로 보였다고 한다. 한편, 이 여성들에게는 우물까지 빨래하러 가는 길에 잠시동안 자유가 허락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야코섬 주민 누구도 이 여성들이 자유 의지로 이곳에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민들은 3만 명 이상의 군인이 주둔한 고립된 섬은 철조망 없는 수용소였으며, 이 섬에서의 짧은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증언을 통해 말했다. 필자는 이러한 주민들의 증언과 진중일지 등의 일본군 군사자료를 분석해 『오키나와전의 기억과 위안소(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2015년, 인팍토 출판회)를 펴낸 바 있다. 일본군'위안부'와 '집단자결' 피해자 모두 전시폭력의 희생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일본군을 따르거나 스스로 자결한 것이 아니다. '종군위안부'나 '집단자결'이라는 말은 피해자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역사적 설명이 필요한 불완전한 용어이다. 이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연구는 구조적인 폭력을 가시화하여 대항언어를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연구는 그 자체가 운동과 연동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오키나와 전쟁을 연구하는 과정 속에서 '위안부' 문제와 만났고, 위안부 당사자가 아닌 '위안부'를 목격한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운동과 연구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김학순의 증언과 소송은 한국은 물론 일본의 여성과 시민운동을 결집하는 출발점이 되었고, 이후 일본의 법적 배상과 공적 책임을 묻고 한국의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시민 운동이 일본 내에서 전개되었다. 그 정점이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본 바와 같이 오키나와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운동이 펼쳐졌다. 오키나와에서 이뤄진 운동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목격자 증언의 공간화'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배봉기를 첫 '위안부'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배봉기들의 이야기를 공간의 기억으로 남겨 놓았던 오키나와 사람들의 증언에는 그 어떤 법적 효력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증언들은 투박한 지도 안의 점들로, 그림으로, 때로는 돌과 나무로, 자신의 집, 마당, 마을에서 자행된 가해의 역사로 기록되었고, 오키나와 주민 자신들의 삶의 궤적을 역사의 가해성 안에 위치짓는 역할을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긴 세월 배봉기를 기억하고, 조선인 여성들을 기록하고 추모해 온 오키나와 주민들이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 속에는 피해자들이 처했던 상황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담겨있다. 이 아름다운 타자들은 굳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증언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들이 머문 공간을 기억하며, 혹시 섬 내부에 생존해 있을지도 모르는 피해자들의 삶이 훼손되지 않도록 고민한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기억의 공간화는 위안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곳에서 함께 '본 자'로서 자신을 위치시켜야만 드러나는, 주변화된 기억을 가시화하는 #with you 방식의 운동인 것이다. 이런 듣기 방식으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러한 듣기 방식으로 증언대 위의 모습으로 피해자의 이미지를 고착화하거나,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오랜 시간 운동 및 연구를 해 왔던 이들을 손쉽게 재단하고 비판하는 수많은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타자입니까?" 라고. 각주 ^ 일본군 사령부는 패전이 임박하자 집단자결이라는 명령을 각 부대에 하달했고 수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강요된 집단자결로 목숨을 잃었다. 집단자결은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전시폭력의 실체를 드러낼 수 없는 용어이므로 따옴표 처리를 하였다. ^ 제작자인 긴조 미노루는 <표현의 부자유전>을 둘러싼 일본 내의 ‘위안부’ 논의 탄압에 항의하며 2019년에 '아리랑의 시 – 군위안부 상'이라는 목조 추모상을 완성하기도 했다. ^ 2007년 5월 11일, 지모리(地盛) 위안소 옛터, 2008년 1월 12일 지모리(地盛)의 위안소 옛터, 필자와의 인터뷰 ^ 2008년 1월 12일, 미야코 하나키리(花切) 위안소 옛터, 필자와의 인터뷰 ^ 『전장의 미야코섬과 위안소 -12개의 언어로 새긴 여성들에게 (戦場の宮古島と「慰安所」―12の言葉が刻む「女たちへ」)』홍윤신 편, 난요문고, 2009년 ^ 한반도, 일본, 중국‧대만,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괌, 티모르, 미얀마, 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