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검색
-
- 2019년 좌담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첫 번째 날 두 분의 답변을 들어보니 '탈분단적 시각'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남한의 '분단적 시각'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총련을 포함한 해외동포단체 등에서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을 가지고 운동 혹은 연구 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음에도, 남한의 주류 언론에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은 깊이 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위안부' 문제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동원되는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 내에서 출판되는 혐한서적에서 '위안부'는 헤이트스피치(혐오발언)의 단골 소재입니다. 일본과 맥락은 다르지만, 남한 역시도 마찬가지로 '위안부' 문제를 이용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남한의 언론에서는 누군가의 과거의 잘못에 대해 반성을 요구하거나 책임을 물을 때, 주로 ''위안부' 문제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예시로 들곤 합니다. 헤이트스피치와는 상당히 다른 결이지만, 어떤 논리를 만들기 위해 '위안부' 문제를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선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으로 '위안부'문제를 다루는 운동 혹은 연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한에서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적 차원에서 '한-일 프리즘'을 벗어나 다양한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기란 요원하기만 합니다. Q1. 그렇다면, 두 분께서 생각하시기에 '한-일 프리즘'을 벗어나 다양한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기 위해 운동적 측면에서 어떤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수요집회나, 소녀상 프로젝트 등으로 대표되는 남한의 대중적 캠페인이 보다 더 폭넓은 시각을 담기 위해선 어떤 부분이 보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Q2. 서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시간입니다. 본 대담 주제와 관련하여 정영환 선생님께서 박노자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박노자 선생님께서 정영환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1.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2.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3.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3 박노자 A1. 네, 정영환 선생님께서 훌륭하게 지적하신 대로 사실 굳이 운동 진영에는 이렇다 할만한 '주문'을 할 것은 그다지 없습니다. 초기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운동가들은 이미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인 전시 성폭력 문제의 일환으로 인식하여 그렇게 연대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보기에 귀중한 것은, 최근에 별세하신 김복동 할머니처럼 '위안부' 피해자들이 직접 베트남에서의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과 손을 잡고 연대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콩고 등지에서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도 - 위에서 정영환 선생님께서 지작하셨듯이 - 참 귀중한 성과죠. 문제는, 정영환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무엇보다 매체와 교육체계, 그리고 나아가서는 정치권입니다. 매체들은 예컨대 중국이나 필리핀, 아니면 파푸아뉴기니 여성들이 납치, 감금당하고 성노예화 당한 이야기를, 한국 독자들에게 과연 얼마나 자주 합니까? 아마도 다수의 한국인들은, '위안부' 피해자들 중에 네덜란드와 인도, 파푸아뉴기니 출신의 여성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과서에서도 '위안부' 전쟁 범죄의 국제적 성격이나 세계적 규모 등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돼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와 동시에 한국 정치권은 베트남 전쟁 시절의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당연히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적어도 대통령, 국회 차원에서 사과와 배상을 하고, 교과서에 한국 전쟁 시절의 한국군 범죄상을 정확히 기술하고 재발 방지 조치를 취하는 등 일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성해야 할 것인가를 나서서 행동적으로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정영환 A1.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연구나 활동을 하는 저에게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입니다.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획일적이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인식은 일본 리버럴들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혐한과 반일, 특히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등가로 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못합니다. 한국 사회가 그간 '위안부'문제에 대해 지속적이며 대중적인 관심을 가져왔던 것은 사실이고 그 자체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긍정적인 역할을 다해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점을 유보하면서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남한에서의 대중적 캠페인이 국내용으로 끝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애초에 증언을 하셨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일본문제입니다. 피해자의 출신지역은 다양하고 피해의 양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공통된 것은 모든 피해자들이 일본군, 정확히 말하면 천황의 군대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성노예제 피해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들의 치유와 경험의 공유나 다양한 문화적 재현 등, 남한의 국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도는 귀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동시에 일본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지는가, 이후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일본사람들이 자신들 나라의 과거의 만행을 직시하여 기억하는가, 이것이 '해결'을 위한 필수적인 쟁점이 됩니다. 아울러 Q1의 전제가 된 부분에 관해 보충 설명을 드리자면 총련을 포함한 재일동포단체에서도 여전히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주된 운동과제가 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총련 내부의 문화도 젠더 평등, 젠더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많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재일조선인 운동 내부의 젠더 불평등을 극복하려고 하는-주로 여성의-활동가들이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자진해서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에 입각한 실천을 시작하고 있다는 설명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최근 매해 4월 23일에는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을 기념하여 젊은 재일동포들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한 다양한 액션을 벌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날은 1977년에 배봉기 할머니 증언을 총련의 기관지 <조선신보>가 처음으로 보도한 날입니다. 남한에 국한된 시각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기념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1970년대 분단과 대립이 격렬했던 시기에는 남한에서 이런 증언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공유할 것은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이런 분단과 반공주의적 시각으로 인해 남한 사회가 외면해왔던 해방후의 역사를 다시 묻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Q. 박노자가 정영환에게 묻다 정영환 선생님께 여쭈어보고 싶은 것은, 일본 사회에서의 전쟁 범죄 문제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지금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차적으로, 일반인들이 식민주의와 전쟁의 사실을 과연 어디까지 인식을 하고 있습니까? 젊은 일본인들의 상당수가 아예 조선과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조차도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수차례 들었는데, 대체로 이 부분에 대한 대중적 '앎'의 형태와 지형에 대해서 한 번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A. 정영환이 박노자에게 답하다 박노자 선생님, 중요한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갖는 주제이고 또 매우 우려하고 있는 점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젊은 일본인들이 일본의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의 관해 제대로 된 지식을 배울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원래 수험의 관계상 비중이 높지 않는 근현대사는 수업에서 안배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교과서의 내용도 19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서 가해의 사실을 학교교육에서 가르쳐야한다는 기운이 한때 있기는 했는데 1997년이후 극우파의 역공의 결과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포함한 가해사실의 서술은 대폭 줄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학생들이 근현대사에 대해 거의 백지 상태로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저는 대학에서 주로 1, 2학년 학생들을 접할 기회가 많은데 역시 식민지배나 침략전쟁의 사실 자체를 모르거나 지식이 거의 없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우려가 되는 것은 서점이나 인터넷 상에는 '혐한', '혐중' 서적들이 넘쳐 청년들이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도 처음 접하는 정보가 이런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쓰여진 대중역사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학생들이 애초부터 '혐한'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고 일본의 가해 사실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학생도 있기는 한데 그런 관심을 품은 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통로가 너무나 좁다는 사실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젊은 층을 포함한 일본 대중들의 '앎'의 형태를 생각할 때,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중요합니다만, 그와 더불어 사실을 인식하는 틀이나 프레임을 매체들이 어떤 형식으로 제공하는지에 더욱 주목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TV 등의 대중매체는 기본적으로 '친일/반일' 프레임으로 대외관계를 해석하는 메시지를 거듭 제공하고 있습니다. 일본문화, 혹은 일본인이 외국에서 얼마나 환영을 받고 있는지 일본을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들(주로 구미권출신자)이 일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등등, 소위 일본 '스고이(대단하다)'의 대합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침략이나 가해사실을 적시하는 비판은 정치적 의도를 갖고 일본을 '혐오'하는 '반일'로 표상이 됩니다. 작년 2018년 10월의 강제징용문제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반응에도 나타나듯이 일본 사회의 전쟁 범죄 문제에 관한 인식은 반성은커녕 오히려 비판에 대한 반발이 우세합니다. 대법원판결 직후 아베총리는 '국제법상 있을 수 없는 판결이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는데 주류 언론들은 기본적으로 이 주장에 동조하였습니다. 1965년의 한일협정에서 최종적으로 '해결'이 되었는데 한국이 이 약속을 어겼고, 이 판결은 한일관계의 악화를 초래한다는 분석이 TV나 신문에서 반복되었습니다. '반일' 한국 때문에 외교관계가 악화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 '친일/반일'프레임은 상당히 강력합니다. 주류언론의 인식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그래서 '일부 매체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반일'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반론을 하게 됩니다. 즉 이 프레임 자체를 의심하고 일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제 관점에서 볼 때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게 지금 일본의 현실입니다. Q. 정영환이 박노자에게 묻다 이번 대담에서는 주로 '분단/탈분단'이 주제가 되었는데 저는 박노자 선생님께 좀더 다른 각도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즉 한국자본주의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한 질문입니다. 남한의 주류사회의 '위안부'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면 계급적 관점의 부재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족' 담론의 틀 내에서 '위안부'문제를 재현할 때 젠더적 관점과 함께 계급적 관점이 결여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국자본주의하의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성착취 구조나 성매매'문화'와 일본군'위안부'의 재현방식에는 연관성이 있을 것인데 박노자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분석을 하십니까? 또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A. 박노자가 정영환에게 답하다 정영환 선생님, 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자주 생각해왔습니다. 상당수 한국 지식인들이 '민족주의가 문제'라고 재단하지만, 사실 '민족주의'라는 관념은 하도 다의적이라서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 정확히 "어떤" 민족주의가 "어떻게" 문제되는지를 명기하는 게 중요합니다. 식민지라는 트라우마를 지니는 것도 '민족주의'와 이렇게저렇게 엮일 수 있는 부분인데, 식민지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를 '문제'로 삼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식민 모국이 과거에 대한 '책임'을 전혀 제대로 지지 않은데다가 한국의 지배층이 오랫동안 식민지적 습성들을 그대로 간직해온 부분들이 커서, 그런 트라우마가 크다는 건 그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일 뿐입니다. 진짜 문제,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되는 민족주의의 종류는 바로 자국 우월주의적인 태도와 국가주의적 태도, 소위 '국익주의'나 '대한민국주의' 같은 현상들입니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이런 현상들이 또 한국 자본이 침투하고 있는 지역들, 특히 동남아에 대한 불량하고 우월주의적 태도와도 불가분의 연관을 가집니다. 세계체제라는 먹이사슬에서 한국 자본들은 이미 준핵심부와 같은 위치에 올라 있습니다. 구미권 자본들이 한국의 금융권 등을 좌우하는 동시에 한국 자본들이 동남아 등지에서 저임금 노동 착취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한국 언론들이 '국익'을 위한 베트남,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정당화하고 당연시합니다. '진보언론'들마저도 미얀마 등지에서의 한국 토건 자본들의 이권 챙기기 등을 반기고 있죠. 한국 자본과 함께 각종의 섹스관광 등의 국내의 가부장적 추태들이 대량 수출되고, 한국 언론매체에서 한국인 가족의 '며느리' 역할과 한국 남성들의 성적 욕구들을 '해결'해주는 동남아 여성상이 계속 등장됩니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와 같은 현수막들을 10여 년 전만 해도 국내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아류 제국주의라고 할만한 분위기 속에서는 동남아나 파푸아뉴기니 등지의 성노예들의 비극은 자연스럽게 대중의 눈과 귀로부터 멀어지죠. 쉽게 이야기하면 한국 자본이 구미권과 일본 자본의 뒤를 열심히 쫓아가는 상황에서는 국내인들의 "제3세계"와의 연대 의식 등이 계속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정말로 부단히 국내 여론 공간에서 문제 제기해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DAY 3>에서 계속됩니다.
-
- 2019년 논평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2부 - 역사의 교차, 문화의 번역
-
이 글은 『여성문학연구』 47호(2019)에 실린 「일본의 #MeToo 운동과 포스트페미니즘: 무력화하는 힘, 접속하는 마음」의 내용을 요약‧수정한 것이다.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1부. 역사수정주의, 백래시, 그리고 ‘위안부’ 문제 2부. 역사의 교차, 문화의 번역 매개로서의 ‘위안부’ 문제 1부에서는 일본에서 미투운동이 잘 드러나지 않는 배경으로서 1990년대 이후 백래시와 역사수정주의가 결합하여 전개되었고, 그 중심에 늘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일본의 우파들은 ‘위안부’ 문제의 부정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도덕적 신념을 키워왔고, 최근에는 유엔 등 국제적인 무대에서 ‘위안부’ 역사를 부정하는 활동에 진력하고 있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를 자신들의 자원으로 삼는 것은 물론 우파들만이 아니다. 일본의 페미니즘 운동 역시 성적 존엄성의 회복을 요구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미투 운동의 시조로 되새기고자 하였다. 일본의 페미니스트들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지원운동이 '전시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창출하고, 국제적으로도 '성노예제'라는 말을 공유하게 한 성과를 말하면서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의 역사를 현재의 일본 사회와 적극적으로 접속시킨다. 그리고 미투운동이 확산되지 않는 원인을 여전히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와 사회의 체질에서 찾고 있다. 미투운동과 ‘위안부’ 문제를 연결하려는 구도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강조되었으며, 한국 시민사회를 본보기로 삼는 움직임 또한 나타났다. 젠더 연구자인 무타 카즈에(牟田和恵)는 ‘위안부’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위안부문제는 #MeToo다!〉라는 짧은 동영상을 제작하여 수요집회의 모습과 함께 ‘위안부’ 운동을 이끌어온 활동가와 연구자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영 페미니스트 예술가집단인 내일소녀대(明日少女隊)도 "‘위안부’문제는 #MeToo다"를 내세워 각지에서 '망각에 대한 저항' 퍼포먼스를 펼쳤다.[1] 그 동안 지속해온 ‘위안부’ 연구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비롯한 지원운동, 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의 추진, ‘위안부’ 소녀상을 둘러싼 시민사회의 호응, 그 속에서 한국‧일본‧재일조선인들 사이의 참조와 연대의 축적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인식의 지평이 가능했다. ‘위안부’ 피해의 역사와 연결할 뿐 아니라, 한국의 현장을 참조대상으로 삼고 일본의 미투운동을 임파워하고자 하는 시간적, 공간적 접속은 미투운동과 ‘위안부’ 운동 양쪽에서 네이션의 스케일을 벗어나는 동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이토 시오리와 서지현이라는 두 상징적 인물을 비교하는 방식보다도 훨씬 더 다이내믹하고 복잡한 시선의 교차를 낳고 있다. 미투 지원운동의 조용한 확산 2019년 4월 10일 '이토 시오리의 민사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Open the Black Box'가 결성된 것은 특기할만하다. 원래 'Fight Together With Shiori(FTWS)'라는 이름으로 준비모임을 가졌던 몇몇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 모임은"성폭력 피해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에 있는 블랙박스를 하나하나 열어가는 시작"이라는 취지를 가지고 정식 발족했다.[2] 이토의 기자회견 후 지원 서명운동을 시작한 #WeTooJAPAN 발기인인 후쿠하라 모니카(福原桃似花)를 비롯하여 변호인단과 기존 여성운동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50명이 모인 이 자리의 중심에 일본에서 일본군‘위안부’ 지원운동을 이끌어온 재일조선인 2세 양징자(梁澄子)가 있었던 점도 상징적이다. 다른 하나의 움직임은 성폭행에 대한 사법 판단에 항의하는 플라워시위다.[3] 2019년 4월 이후 매월 11일 전국 대도시에서 200~400명의 여성들이 모여 자신들의 성폭력 경험을 공유하는 시위를 진행 중이다. 항의 행동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3, 4월에 성폭행과 관련해서 전국의 지방법원에서 나온 연이은 무죄판결이었다. 2019년 3월 12일 후쿠오카 법원은 준강간죄로 고발된 남자에게 "남자는 여성이 합의했다고 착각했다"면서 무죄판결을 내렸고, 4월 4일 나고야 법원은 친딸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성적으로 학대한 아버지에게 딸이 "저항하려면 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다. 일본의 여성들은 이 시대착오적 판결에 항의하면서 피해자들에게 다가가는 마음을 담아 꽃을 들거나 꽃무늬 옷을 입고 시위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 시위를 '플라워 시위'로 명명했다. 모임을 기획한 중심인물인 기타하라 미노리(北原みのり)는 작가이자, 사업가로서 일본의 페미니즘 운동을 이끌어 온 인물이다. 그는 한류에 열광하는 여성들의 욕망을 지지하는 사람이자, ‘위안부’ 운동에 개입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일 양국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축적되어 온 ‘위안부’ 운동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한국과의 소통을 어떻게 일본 페미니즘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로 만들 것인가, 앞을 가로막아 서는 벽에 어떻게 균열을 일으킬 것인가, 그리고 여성들 스스로가 어떻게 자신들의 문제를 가시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그녀를 포함한 일본의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계속되는 고민이다. 이 글을 끝맺으려는 참인 2019년 12월 18일 오전, 이토 시오리가 일으킨 소송에 대한 1심 판결이 내려졌다. 피고 야마구치에 대한 330만 엔의 배상 판결과 함께 재판은 그의 행위의 불법성을 명시하였고, 증언의 진정성을 법적으로 인정하였다. 피고에게 한없이 관대했던 그동안의 일본의 성폭력 판결내용을 생각했을 때, 이날의 판결은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토가 시작한 미투 운동은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이 판결이 그가 버텨낸 고통의 시간을 상쇄할 수 없고, 재판 투쟁이 끝이 난 것은 아니지만 성폭력 고발의 정당성을 인정한 이 판결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크다. 이토의 투쟁과 지원 운동이 지금도 자기책임을 따지는 분위기 속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피해자에게 큰 용기를 안겨줄 것이며, 이를 계기로 일본의 미투운동은 서서히 확장될 것이다. 문화번역의 실천과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 2019년은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 2016)을 비롯한 한국의 페미니즘 문학이 일본에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82년생 김지영』 일본판은 2018년 12월 출간 후 나흘 만에 3쇄를 찍고, 4달 만에 13만 부를 찍는 돌풍을 일으켰다. 2020년 1월 20일 현재도 아마존 재팬 '아시아문학 작품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 뿐 아니다. '아시아문학 작품' 베스트 10 중 7개가 한국의 여성작가들의 작품이 차지하고 있고, 최근 "한국‧페미니즘‧일본"이라는 특집을 꾸민 『文藝』 2019년 가을호는 1933년 창간 이래 86년 만에 이례적인 3쇄를 찍는 기록을 세웠고 결국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친 한국의 여성주의 서사는 지금 일본에서 일부의 매니아층을 넘어 대중성을 획득하는 과정에 있다. 아마존 재팬에 달린 200개 이상의 리뷰에는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 "나도 김지영", "여성의 일상에 있는 무한한 절망", "비통한 감각", "절망 끝의 희망",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는 등 작품에 대한 공감을 열정적이고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부러움과 동경 또한 리뷰에서 읽어낼 수 있다. “일본의 수준은 한국보다 낫다"고 안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반대편에는 침묵을 강요하는 일본 사회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확실히 존재한다. 이들에게 한국의 사회문화적 동력은 하나의 모델을 제공한다. 직접적 정치참여를 통해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는 한국을 선망하는 모습은 그동안 촛불시위를 비롯한 사회운동 과정에서 종종 볼 수 있었는데, 폭발적인 미투운동을 거쳐 ‘김지영’ 신드롬 속에서 더 광범위하게 표출되고 있다. 사이토 미나코(斎藤美奈子)는 '일본에서 균등법, 기본법 제정 등 페미니즘의 제도화가 비교적 빨리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82년생 김지영』에 해당되는 페미니즘 입문서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다나카 미츠(田中美津)나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등 1970-80년대 저작들이 너무 빛 바래버린 현실 속에서,"K페미는 J페미의 '30년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토로하였다.[4] 다만, 한일 간 문화적 참조 관계의 역전을 강조하는 서사는 식민주의와 근대화론의 위계질서를 거꾸로 설정하는 민족주의적 욕망으로 회수될 위험성이 있다. 한국이 압축적 근대를 거쳐 신자유주의 사회의 길을 가면서도 개개인의 욕망이 집합적인 사회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탈식민 분단국가로서의 폭력의 경험과 상실감, 트라우마에 노출되면서 동시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규범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선적인 문화적 소비와 위계화의 욕망을 넘어, 서로 다른 역사성을 교차시키는 문화번역의 실천이 요구된다. 또한 이 과정을 곧바로 한일 여성연대 등으로 정리하는 안일함도 피해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시스젠더 이성애 국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둘러싼 공감은 늘 주류 여성들 간의 지적 교류에 머물고 마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재일조선인 여성 연구자, 활동가들에 의해 촉발되어 온 경험을 마지막으로 다시 상기시키고 싶다. 미투와 ‘위안부’ 문제의 접속,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문화번역의 과정은 지식인들의 담론을 넘어 대중들의 동시대적인 정동과 맞물리면서 진행되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연대의 형태조차 없는 수많은 마주침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키워가는 일이다. 역사를 해결하거나 관계의 균열을 봉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갈등의 역사를 직시하고 더 말하는 과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각주 ^ https://tomorrowgirlstroop.com/ianfu ^ https://www.facebook.com/opentheblackbox ^ https://www.flowerdemo.org ^ 斎藤美奈子, 「世の中ラボ 【第106回】いま韓国フェミニズム文学が熱い」, webちくま 2019.2.21. http://www.webchikuma.jp/articles/-/1629
-
- 2021년 에세이 [여행에세이]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 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추천코스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 → 경상감영공원 → 대구근대역사관 → 경찰역사박물관 → 북성로→ 서문시장 → 계산성당 → 서상돈 선생의 고택과 시인 이상화의 고택 #대구 근대골목에서 만나는 ‘희움’ 대구시 중구의 <대구 근대골목투어> 5개 코스 중 1코스에는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하 역사관)이 포함되어 있다. ‘대구근대골목’은 2012년 한국관광의 별,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고, 2013년에는 ‘지역문화브랜드대상’을 수상, 2014년에는 대한민국 걷기 좋은 길 등에 선정되었으며 최근 2019년도에도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는 등 많은 방문객과 지역민의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역사관은 1997년부터 대구·경북 지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복지지원사업과 문제해결활동을 전개했던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중심으로 시민들의 온정과 뜻이 모여 세워진 뜻깊은 장소이다. 많은 피해자가 세상을 떠나시게 되자 그들이 겪은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활동하며 평화와 여성인권이 존중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2015년에 개관되었다. 역사관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의 일본식 건물로서 당시의 시대성을 자연스럽게 재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안부’문제의 발생과 건물의 건립이 동시대라는 점에서 정서적 울림을 지니고 있다. 역사관 건축 리모델링 중 도배 속지로 사용된 1927년 신문이 발견됐고 다른 시대를 나타내는 여러 흔적들이 나오기도 했다. 1930년대 중반 지어진 일본식 상가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당시의 원형을 재현하고자 했으며 뒷마당 쪽 부속 건물들은 원형과 관계없다는 판단 아래 철거하고 재증축하여 전시 공간을 확보했다. 대구 중심가에 위치한 역사관 주변은 400여년 영남의 정신적, 지리적 중심지이며 일본 제국주의 자본이 최초로 이식된 곳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5만 명 이상 거주 했으며 현재까지 일본식 상가, 주택 등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어 역사적 공간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어 근대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기도 하다. 역사관이 위치한 곳은 과거 일본인의 생활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서문로에 자리하여 대구, 경북 등 지역 출신의 ‘위안부’ 피해자의 기억과 흔적이 함께 하는 곳이다. 특히 고(故) 문옥주 님의 생전 활동영역과 굉장히 가깝고, 이용수 님의 생가 및 어린 시절의 공간과도 멀지 않으며 당시 많은 피해자가 끌려가신 대구역과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또한 역사관 주위는 조선시대부터 대구지역의 최대 중심가였던 곳으로 인근에 서문약령시장, 서문시장, 경상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역사관 인근에 있는 경상감영은 현재 경상감영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1930년대 식산은행건물은 현재 대구근대역사관이며 맞은편 중부경찰서에는 경찰역사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모두 도보로 이동가능한 아주 가까운 거리이며 대구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근대사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대구 역사관은 과거 행정구역인 대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구읍성의 구역 안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는 그 흔적만 확인할 수 있는 대구읍성은 일본과 기이한 인연이 있다. 이 성벽은 임진왜란 전에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여 만들어졌는데, 1905년경부터 일본인의 거주 및 확장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한 친일파 조선인 박중양과 일본인에 의해 불법 해체됐다. 이를 둘러싼 동성로, 서성로, 북성로 및 남성로는 과거 대구의 희미한 경계이자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거리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1900년대 초 대구 서성로와 남성로에는 지역 유지들이, 동성로와 북성로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다고 한다. 때문에 역사관 인근의 북성로에는 특히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근대 지역경제의 중심이 된 곳으로, 한국 전쟁 후 미군부대가 들어서면서 대신동에 있던 공구상회들이 이 곳으로 옮겨오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수물자를 상인들이 팔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공구골목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장인과 공인의 흔적이 남아있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도 여기에 있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역사의 흔적들에 현대의 젊은 감성을 접목시킨 다양한 문화공간, 카페 등이 생기며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힙’한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역사관의 서쪽에는 과거 교역의 중심인 서문시장과 3.1운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선교사 주택, 계산성당과 제일교회, 성모당이 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 선생의 고택과 저항시인 이상화의 고택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동성로 일대는 현재의 지역명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상업거래와 많은 시민이 모이는 중심지이다. #새로운 세대로 이어져 나갈 ‘역사’를 희망하며 그리고 이곳은 최근 들어 많은 젊은 작가들과 예술가가 찾아와 도시재생을 꿈꾸는 곳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물론 전국 각지의 여행객들 역시 꾸준히 늘고 있다. 모두가 각기 다른 이유를 갖고 ‘대구근대골목’을 방문하겠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이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을 통해 아주 잠시라도 ‘위안부’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고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과거가 과거로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끊임없이 이야기되며, 다음 세대에 의해 새로운 역사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소개] 지상 2층의 일본식 건물로 1층에는 매표소, 희움스토어(굿즈 및 도서 판매), 상설전시관이 있다. 2층 기획전시실에는 현재(2021년 9월 14일 기준) <익숙한 기억, 낯선 기록>이라는 이름의 사료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며, 1930년대 일제강점기 당시 공문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발행한 군표 등 일제강점기의 다양한 사료를 잘 보여준다. 또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와 서강대학교 ‘영원한 증언팀’에서 기획·제작한 <영원한 증언> 체험 베타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이는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관람객이 일본군‘위안부’피해자와 대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역사관은 2021년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시사업(여성가족부 주관)에 선정되어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증언> 전시를 기획 중이며 올해 개최할 예정이다. ‘위안부’피해자의 증언 및 생애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탐구하고 다양한 전시방법(VR 및 미디어)을 통해 시민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역사관은 앞으로도 전쟁과 여성인권, 피해자 중심 문제해결을 위해 사실적 증거와 자료를 발굴·연구하여 객관적으로 문제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이를 통해 역사적 맥락이 우리 개개인의 삶과 맞닿아 있음을 관람객이 인식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기획 중이다.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의 목표 기억, 일제 침략기와 성노예라는 고통스러운 피해자들의 삶을 기억 약속, 피해자들의 상처와 기억을 우리의 역사로 안고, 반드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 기록, 명예와 인권을 되찾기 위한 피해자들의 노력과 함께한 사람들의 운동의 기록 희망, 평화와 인권의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희망 기사 게재일: 2021.10.15.
-
- 2019년 논평 왜 구술 증언록은 소설로 다시 쓰여야 했는가 - 김숨의 『한 명』을 중심으로
-
이 글은 『구보학보』(2019)에 실린 『목격-증언하는 자리와 공진하는 ‘위안부’의 몸』과 2019년 예테보리 국제도서전 프로그램 북에 실린 “When Literature Inquires the Gender of Labor”의 일부를 요약하고, 지난 8월 22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콜로키엄(목격-증언의 자리와 공진하는 ‘위안부’의 몸 : 김숨의 소설을 중심으로)에서의 논의 내용을 참조하여 수정한 글이다. 유익한 질문을 해주신 토론자 권김현영 선생님과 콜로키엄에 참여했던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현재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2015년 한일 ‘불가역적’ 합의 이후 지난 몇 년간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문화적 재현물은 크게 증가했다. 김숨의 ‘위안부’ 서사인 『한 명』(현대문학, 2016)과 『흐르는 편지』(현대문학, 2018)와 함께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현대문학, 2018)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 2018)도 그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출간물이다.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문화적 재현물의 관심은 대체로 전시 성폭력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 자체에 집중하며 본격화되었다. 사건이 삶에 드리운 영향은 대체로 지워진 채로 다루어졌고, 일본군‘위안부’는 소녀나 할머니로 등장하거나[1] 분절된 시간을 단절적으로 사는 존재로 다루어졌다. 단 한 명의 일본군‘위안부’ 생존자가 남은 상황을 가정하는 소설 『한 명』과 중국의 위안소 풍경을 당대의 시간 속에서 다룬 소설 『흐르는 편지』에서도 일본군‘위안부’는 분절적인 시간을 사는 존재로 등장한다. 끌려간 소녀들 열에 아홉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고, 돌아온 그녀들은 식모살이를 하거나 병들거나 망가진 몸으로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관심이 점차 운동가로서의 면모에 집중하거나 조력자로 시선을 돌리는 식 혹은 담론 자체를 논평하는 식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이에 비하면 김숨의 소설은 소재적 차원에서 트라우마적 사건 자체에 여전히 집중하는 편이다. 김숨 소설의 성취와 한계는 소설의 재현이 보여주는 표면적 특질에서 연유하기도 한다. ‘위안부’의 표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평가는 문화적 재현물의 차원에서 정당하지만, 문학적 재현물이라는 차원에서 좀 더 섬세하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문화적 재현물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와 갈라지는 지점, 즉 김숨의 ‘위안부’ 서사가 갖는 문학적 의의를 검토함으로써 그 차이에 대한 부족한 논의를 보충하고자 한다. 재현의 원리와 재현된 표상을 구분하면서, 소녀와 할머니로 다루어진 표상에 대한 평가에서 나아가, 왜 김숨 소설이 소녀와 할머니를 등장시키는지, 그 효과가 무엇인지를 문학적 논의 지평 위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향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문학적 성취의 진전을 위해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지점이다. 재현물은 언제나 시대가 허용하는 재현의 한계 안에서만 구현된다. 문학적 재현물은 시대적 한계 인식의 리트머스인 것이다. 따라서 문화적 재현물의 성취 여부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일본군‘위안부’를 어떻게 다루었는가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자 했느냐는 질문으로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누락되기 쉽지만, 최근의 문화적 재현물은 표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위안부’의 문제를 바라보는 방법론적 차원의 관심을 공유한다. ‘위안부’ 문제를 현재화하려는 시도로 압축되는 방법론에 대한 공통의 관심은 시대의 인식적 한계의 최저선을 보여주려는 시도로써 다루어져야 한다. ‘위안부’ 문제를 현재화하려는 방법론적 시도가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나 있는 『한 명』을 중심으로 보자면 김숨 소설의 의미는 ‘위안부’의 문학적 재현을 재개했다는 사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새롭게 열린 한국문학의 논의 지평과 만나면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현재화하려는 김숨의 방법론적 고민은 트라우마적 폭력과 고통의 재현의 불/가능성론에 회피 없이 대결하는 방식으로 깊어지고 있다. 소설로 쓴 구술 증언록 개별 희생자로서의 ‘위안부’뿐 아니라 ‘위안부’를 둘러싼 ‘문제’ 자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는 질문 앞에서 김숨은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에서 시작된 일본군‘위안부’의 증언(“내가 피해자요”)을 각주 형식으로 소설 안의 말로 옮기고 그 말을 이어받은 수많은 다른 증언들(“나도 피해자요”)을 소설의 형식으로 구성해낸다. 김숨은 트라우마적 사건의 현재적 지속성, 그 분절 없는 고통의 감각에 좀 더 충실하면서, 민족과 젠더 그리고 인권 문제가 복합적으로 뒤얽혀 있는 ‘위안부’ 서사를 통해 시민-작가로서의 윤리를 실천한다. 김숨의 ‘위안부’ 서사는 ‘위안부’를 대상화하는 재현 방식을 피하면서도 갖가지 폭력이 새겨진 신체를 통해 제국과 전쟁의 폭력성을 가시화한다. ‘위안부’의 몸, 폭력과 억압이 새겨진 소녀의 몸, 현재형으로 남아 있는 허기와 고통, 헤어날 수 없는 죽은 이들에 대한 꿈과 살아 돌아온 이들의 피할 수 없는 수치심과 죄의식을 전한다. “만주 위안소 이름을 모르지만, 자기 피와 아편을 먹고 죽은 기숙 언니의 이빨이 석류알처럼 반짝이던” 것을, “삿쿠에 엉겨 있던 분비물에서 나던 시큼하고 비릿하던 냄새”와 “검은깨를 뿌린 듯 주먹밥에 촘촘 박혀 있던 바구미의 개수까지”(『한 명』, 151쪽), 고통의 생생한 감각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한다. *** 『한 명』이 ‘증언에 나서지 않았던’ ‘위안부’ 피해자를 내세운 ‘위안부’ 서사라는 사실은 좀 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 실제 ‘위안부’ 피해자의 구술 증언록의 말들은 소설 내에서 증언이 이루어지기 이전 기억의 형식으로 불려 온다. 작가는 공적인 발화가 이루어지기 전, 증언 이전의 침묵을 들여다보고 그 침묵이 말을 찾지 못한 ‘증언 이전의 증언’임을 독자에게 전한다. 그리하여 피해 생존자를 만나러 나선 (그녀는 자신이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라는 것을 “자신과 똑같은 일을 당한 사람”이자 “살아 있”는 사람(『한 명』, 143쪽)인 ‘다른’ 생존자에게 알리고자 한다. 그것은 곧 자신이 일본군‘위안부’였음을 밝히는 증언이 될 터인데)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소설 전체가 그 자체로 하나의 구술 증언록을 이루게 된다. 증언의 기록은 구술된 목소리를 문자로 변환하는 과정이다. 증언자의 목소리가 기록자의 문자로 변환되는 바로 그 과정은 증언의 기록에 기록자의 관점과 입장이 새겨진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미 일본군‘위안부’의 증언 채록 과정은 증언자의 사투리가 표준어 문자로 기록되거나 입말이 문어체로 기록되는 변형 혹은 정반대로 ‘~했다’ 체의 기록이 점차 입말을 살리는 쪽으로 바뀌었다[2]. 이러한 변화는 단지 표현의 변화만이 아니라, 증언자의 ‘교차적이고 중층적인’ 역사성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채록의 방법론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3] 『한 명』은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재현적 시도를 넘어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의 의미, 즉 발화 주체의 위치 설정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따지자면 그 고민은『한 명』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데, 『한 명』을 출간하던 시기에 발표된 단편소설 「녹음기와 두 여자」(2016)에서 소설 내 채록자로 등장하는 조윤주가 ‘위안부’의 증언과 채록에 대해 갖게 되는 태도에서 방법론을 둘러싼 좀 더 직접적 고민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증언을 하는 그녀의 기억만큼이나, 증언을 받아 기록하는 내 기억도 중요하다. 나는 녹음기로 녹음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녀의 옷차림을, 안색을, 표정의 미묘한 변화를, 눈동자의 흔들림을, 시선에 담긴 감정을, 몸짓 하나하나를. 손으로 아무리 밀어도 꿈쩍 않는 바위덩어리 같은 침묵을. 기억해두었다가 녹취를 글로 풀 때 함께 풀어 넣어야 한다. 괄호 속 설명으로든, 말줄임표로든, 느낌표로든, 행간으로든, 각주로든. (「녹음기와 두 여자」, 69쪽.) 그녀는 어쩌면 매순간 증언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눈빛으로, 표정으로, 그 어떤 기척으로, 침묵으로……. 탄식, 비명, 흐느낌, 발광, 침묵도 증언의 한 방식이므로. (「녹음기와 두 여자」, 75쪽.) 글자를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사람의 기억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기억과 어떻게 다른가. 자기 자신을 잊고 과거의 경험을 모두 지운 사람의 기억은 어떻게 복원될 수 있는가. 녹음기에는 기록되지 않는 것들, 목소리 사이를 채웠던 몸짓, 표정, 침묵은 과연 복원될 수 있는가. 증언과 채록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녹음기와 두 여자」는 이러한 질문과 성찰 속에서 증언자와 채록자의 자리가 선명하게 구분될 수 없으며 모두가 증언자-채록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다. “증언자를 인터뷰하면서 증언자가 되어간다.”(「녹음기와 두 여자」, 72쪽) 그러나 증언과 구술이 갖는 특성에 대한 이러한 환기는 해석자에 의한 증언의 변형과 왜곡 가능성에 대한 경계가 아니다. 어떤 증언에도 그것으로 다 소진되지 않는 증언자의 삶이 남는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녹음기와 두 여자」에서 다섯 번에 이르는 방문마다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침묵으로 일관한 정 할머니가 유일하게 했던 “다 잊었다”(76쪽)는 말은 채록자에게 “다 기억하고 있다”(76쪽)는 말로 들린다. 다 잊었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며, 사실 “기억하는 것이 망각하는 것”이고 “역으로 기억하지 않는 것이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좀 더 나아가 수치스러운 기억, 소름 끼치는 기억을 기억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잊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정 할머니는 “그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76쪽)고 조심스럽게 확신한다. 물론 이것이 다는 아니다. 다변이었던 문 할머니의 부음을 알리는 아들의 전화로 채록자에게 증언의 의미는 다시 되새겨진다. 함경도 출신 혈혈단신으로 알고 있던 문 할머니로부터 의붓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없으나, 아들은 할머니가 자신의 얘기를 채록자에게 여러 번 했었다는 얘기를 전한다. 자신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채록자를 기다렸다는 아들의 말은 할머니의 말을 믿지 못했던 채록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퍼즐 조각들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잇고 이어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육하원칙과 기승전결에 집착”했던 당시의 자신에게 문 할머니의 기억은 논리적이지 못한 데다 일관성이 없는 말들로 들렸고, 결국 할머니의 녹취된 구술은 증언록에 실리지 못했다. 매번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던, “아무에게도, 친정어머니에게도 못했다면서 들려주었던” 반복된 이야기들은 끝내 녹음기에 저장된 채로 미완의 증언 원고로 남겨졌을 뿐이다. 텅 빈 도로에 서늘한 정적이 감돈다. ……내가 다 얘기해줄게, 내가 다 얘기해줄게, 내가 다……. 이중창을 부르듯 문 할머니의 목소리에 정 할머니의 목소리가 겹쳐 도로 위를 떠돈다. (「녹음기와 두 여자」, 98쪽, 강조: 김숨) 다섯 번의 만남 동안 침묵으로 증언을 완강히 거부한 할머니와 “내가 다 얘기해줄게” “하나도 안 잊었어”(94쪽)[4].라는 말을 증언 사이에 추임새처럼 넣으며 매번 기억을 각색한 할머니, 채록자가 맡았던 두 구술자 사이에서 침묵과 증언은 다른 것이 아니다. 녹음기 앞에서의 침묵은 질문들에 '대답하지 않음'으로서의 침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기억들을 말로 하지 않는 사이에, 무엇을 말하지 않기 위해 다른 무엇을 말하는 사이에, 말들 사이에 남겨진 공백으로서의 침묵은, 어쩌면 구술이 “침묵을 덮는 과정”에 다름 아닐 수 있음을 환기한다.[5] 증언이 침묵과 말들 사이에 놓인 어떤 것이자 침묵들과 목소리들을 겹쳐 듣는 채록자의 자리에서나 사후적이고 구성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라면, 녹음기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할머니의 일관된 침묵은 증언인가 아닌가. 채록자의 녹음기에만 남겨져 있으며 증언 원고로 완성되지 못한 할머니의 말들은 또 구술 증언인가 아닌가. 발화 주체의 위치설정을 둘러싼 성찰이기도 한 이러한 인식은 결국 증언자나 증언의 말을 대상화할 수 없으며, 채록이란 ‘이미 언제나’ 구술 혹은 침묵에 연루되어 있다는 인식의 수긍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신 말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자리가 바로 증언의 영역이라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지적처럼[6], 「녹음기와 두 여자」를 통해 김숨은 채록자 혹은 작가의 자리가 대상화도, 대신 말하는 방식도 아닌 채로, 죽은 자들과 침묵을 강요당한 이들에게 목소리를 내어주는 방식 속에서 확보된다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 이 목격-증인의 자리에 대한 인식이 바로 기억되지 않는 기억의 귀환을 시작하고자 하는 김숨 소설의 출발지이다. 침묵을 증언하고 기억을 복수화하는, 귀환의 서사 물론 그 증언이 현재의 삶을 잠식한 과거 경험의 무시무시한 폭력성으로 포착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녹음기와 두 여자」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완강하게 증언을 거부한 정 할머니를 두고 짚었던 작가의 말처럼, “그녀가 위안부 시절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 시절 일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그러니까 여기서 “기억의 주체는, 그녀가 아니라 위안부 시절 경험들”(「녹음기와 두 여자」, 77쪽)이다. 그리하여 김숨 소설은 ‘대신 말하는’ 행위를 거부하고 침묵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 침묵으로 남겨진 참혹한 경험에 소설의 공간을 내어주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한 명』은 여성으로서 겪은 전쟁의 기록, 전쟁을 겪으면서 폭행이나 질병으로 죽은 이들, 전쟁이 끝나자 버려지거나 학살당한 이들, 수효를 확인할 수 없으며 생사를 확인할 수 없고 그리하여 망각도 애도도 할 수 없는 이들과 그 삶을 서사 안쪽으로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그 한마디를 평생 기다렸다는 이가 그녀는 아무래도 군자 같다. 침묵하던 그이는 갑자기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벗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다(미주 6)면서. 맨몸뚱이를 보여주지 않고서는. 그이는 블라우스 안에 입은 속옷마저 훌렁 벗더니 배 한복판에 녹슨 지퍼처럼 박힌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애기만 긁어냈으면 내가 애기 낳고 살잖아. 그런데 애기보까지 싹 들어냈지 뭐야.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애기 낳으려고 별 지랄을 다 했잖아. 절에 가 공양도 하고, 삼신령께 빌기도 하고 그랬잖아, 굿도 하고.”(미주 7) 그곳에서 열여섯 살이던 군자가 애를 가져 배가 불러오자 그들은 말했다. 저년 나이도 어리고 인물도 곱고 더 써먹어야겠으니, 저년 자궁을 들어내라.(미주 8) 미주 6) 김영숙(1927년생, 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슬픈 귀향 1부-북녘 할머니의 증언」. 이토 다카시, 뉴스타파 『목격자들』 제공 미주 7) 김복동(1927년생),『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2』 미주 8) 리경생(1927년생, 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슬픈 귀향 1부-북녘 할머니의 증언> 『한 명』 14~5쪽, 259쪽) -『한 명』의 미주 중 ‘위안부’의 증언을 인용하는 방식은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영화 <귀향>(조정래, 2016)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영화 <귀향>과는 달리 소설 내에서 미주의 형식으로 출처를 표시할 뿐 아니라 글자 모양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증언의 말에 새겨져 있는 본래의 자리를 지우지 않는다. 증언들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하지만 이어붙인 자리를 표식처럼 남겨둔다. 소설 내부에 인용 흔적을 남겨놓는 증언의 재구성 방식은 소설 내부에 구술 증언의 목소리‘들’의 자리를 마련한다. 플래시백 기법으로 과거와 현재를 인과관계로 연결 지어버리는 방식이나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영혼의 애도로 해소될 수 있다고 여기는 인식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를 단순화하고 무엇보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개인의 불운으로 다룰 위험이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영상 재현물과 언어 재현물의 차별적 지점은 뚜렷해진다고 해야 하는데, 한 사람의 목소리로 발화됨으로써 증언의 복수성이 지워지는 <귀향>의 방식과 달리, 『한 명』에서 목소리‘들’은 한 인물의 전쟁 기억으로 축소되지 않으며 반대로 각기 다른 기억이 미주를 통해 화합될 수 없는 불규칙적 단층을 이뤄 복수성을 획득하게 된다. 물론 허윤의 지적처럼 “300여 개의 각주는 잔인한 성폭력과 끔찍한 트라우마를 묘사하면서 이것이 ‘진짜’임을 증명하는 ‘팩트’로 사용”된다[7]. 이 섹슈얼리티 재현의 폭력성을 전면적으로 외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기억의 복수화의 효과로 『한 명』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 인해 과거로 이끌려 들어가는 시간 속에서 기록으로만 남은 존재들, 기록에도 남지 못한 존재들, 어딘가로 사라진 존재들[8]을 복원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집단 트라우마에 대한 논의 가능성을 열어주면서 가시화되지 않은 피해와 복원될 수 없는 폭력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생존자를 중심으로 ‘위안부’ 피해를 복원한다는 오해를 가로지르며 국가폭력이자 젠더 폭력의 피해를 폭로하고 폭력에 희생된 여성들의 귀환 자리를 마련해주는 매개자를 통해, 그녀들의 삶의 비극성과 귀환을 불가능하게 하는 현재적 문제에 집중하게 한다.[9] 그렇게 김숨의 소설로 완성된 증언록은 돌아오지 못한 여성들의 자리를 마련하면서 지금 이곳에 ‘위안부’의 자리를 마련하는 귀환의 서사가 된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제 2차 콜로키움 [목격-증언의 자리와 공진하는 '위안부'의 몸] 후기 각주 ^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허윤의 「일본군 '위안부' 재현과 진성성의 곤경-소녀와 할머니 표상을 중심으로」(『여성과역사』, 2018)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고혜정·서은경·신영숙·여순주·조최혜란, ^ 양현아, ^ 김숨, ^ 정지영, ^ 冨山一郞(임성모 옮김), 『전장의 기억』, 이산, 2002, 94~96쪽 ^ 허윤, ^ 정진성, ^ 권명아,
-
- 2022년 에세이 창원 사람들이 만든 2022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
지난 8월 11일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이하 마창진시민모임)’은 2022년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일 기념행사를 추모제와 청소년 문화제로 진행했다. 기림일 추모제에 지역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8월 14일 경상남도에서 치르는 기념식이나 주말로 예정된 8.15통일행사와 일정이 겹치지 않는 날을 선택했다. 해마다 ‘위안부’ 기림일 행사는 창원 시민과 지역단체가 함께 기획하고 준비해 왔다. 지난 7월 기획회의에는 윤소영 경남여성단체연합 대표님, 이병하 경남진보연합 상임대표님, 경남여성연대 실무자 등 여러 단체의 관계자들이 참석해주었다. 특히 5월에 김양주 할머니 장례를 치른 뒤 처음 맞는 기림일이라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회의를 시작했다. 마창진시민모임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예년보다 더 많은 지역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기획회의 이후에도 온라인과 SNS 공간에서 세부적인 논의를 이어갔다. 회의 결과 올해는 청소년 문화제와 추모제를 병행한 기림일을 만들어 보자고 결정하였다. ‘위안부’ 기림일을 청소년과 함께하는 행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설득이 필요했다. 평소 마창진시민모임의 이경희 대표님은 오늘날 ‘위안부’운동은 청소년 교육을 중심에 두고 진행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계셨다. 기획회의 직전에 이에 대한 설명을 먼저 피력했다. 이미 이경희 대표님께서는 ‘위안부’운동과 청소년 교육이 왜 중요한지를 지난 6월 3~4일 <일본군‘위안부’역사교육 활성화를 위한 국제포럼>(이하 국제포럼)을 개최하여 보여준 바 있다. 국제포럼은 일본군‘위안부’ 역사 왜곡과 부정이 심각해짐에 따라 학교 안의 역사교육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경남지역 교사와 미국 캘리포니아의 교사 및 ‘위안부’ 활동가들이 양국의 일본군‘위안부’ 교육의 수업사례를 교류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이처럼 ‘위안부’운동을 청소년 교육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바람이 올해의 기림일 행사에서도 계속되었으면 했다. 청소년과 함께하는 문화제가 되려면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참여가 활발해야 하는데 이 또한 지역단체의 협조가 빛을 발했다. 경남지역역사교사모임에서‘청소년 문화제’ 참가자 모집 공문을 학교들로 발송하고 청소년 동아리를 대상으로 하는 홍보를 맡아 주었다. 그리고 각 시민단체는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총동원하여 기림일 청소년 문화제 참가자 모집 포스터를 공유해 주었다.최종적으로 진주여자고등학교의 밴드 동아리 2팀, 창녕 남지고등학교의 합창단, 창원지역 고등학교 연합팀으로 구성된 ‘유월청소년창작가요제’ 우수상 수상팀, 창원의 중학생 두 명이 만든 댄스팀, 거창연극고 학생의 1인극 공연 등의 신청서가 접수되었다. 그밖에 경희대학교 음대 학생의 기타 연주와 오스트리아 빈 음대 유학생의 바로크 리코더 연주가 초청공연으로 더해져 풍성한 청소년 문화제를 만들 수가 있었다. 8월 11일 기림일 추모제 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걱정스러웠다. 제발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비가 오지 않길 빌었다. 추모제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비는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야외 행사를 준비하면서 끊임없이 날씨가 발목을 잡았다. 한정된 예산 때문에 의자와 천막을 넉넉하게 준비 못 한 것이 두고두고 안타깝다. 당일 아침, ‘위안부’피해자 할머니의 영정을 모시기 위한 이젤을 받으려고 일찍부터 행사장에 나와 있는데 전화가 왔다. 참석하기로 했던 창원시장의 불참 통보였다. 이어 경상남도교육감도 올 수 없고 국장이 대신 참석한다고 했다. 추모제를 준비하면서 지자체 단체장이 참석해주면 행사가 더 빛날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나마 그렇게 생각했던 점을 반성한다. 이젤을 받아 두고 다시 사무실에 들러 최종 시나리오를 챙겨서 행사가 열릴 오동동문화광장으로 갔다. 음향과 조명 팀이 부산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추모제가 열릴 광장 옆에는 ‘인권자주평화다짐비’가 있다. 오동동문화광장을 기림일 행사장으로 선택한 이유다. 다짐비 옆에 문화광장이 조성돼 있어 참으로 다행스럽다. 기림일 행사를 기해 시민들이 다짐비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1부 추모제 사회를 맡았고 2부 청소년 문화제는 경남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강만호 단장님이 맡아주셨다. 그래도 진행 부담 때문에 행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놓칠까 봐 두려웠다. 다행히 자원봉사 부대를 이끌고 경남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오민혜 선생님이 와주었다. 기림일 행사 준비를 위한 세부적인 논의는 지난 2020년에 결성된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경남지역 수요행동> 텔레그램 방에서 주로 논의했다. 오민혜 선생님은 ‘수요행동’ 텔레그램 방에 올린 행사 당일 현장 진행요원 자원봉사자 요청에 응해주었다. 또 6월항쟁정신계승경남사업회 조수현 사무국장, 그리고 마창진시민모임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임진희씨 등이 일찍부터 와서 무대 아래에서 벌어지는 온갖 잡무를 맡아 주어 한결 든든했다. 청소년 문화제 공연을 위한 리허설이 시작됐다. 강만호 단장님께서 참가자 한 팀, 한 팀의 요구를 점검하면서 공연에 필요한 준비를 해 주셨다. 밴드 공연을 신청한 진주여고 팀은 행사 몇 시간 전에 보면대 5개를 요청했고, 노래를 준비한 팀은 인원수만큼의 스탠딩 마이크를 요구했다. 기타 연주자는 팔걸이가 없는 의자를 주문했다. 행사장에는 관객용 플라스틱 팔걸이의자뿐인데 갑작스러운 요청에 당황하고 있으니 강만호 선생님께서 드럼 연주자의 의자를 빌리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음향 업체 사장님과 강만호 단장님이 청소년 출연자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심지어 미리 MR을 준비하지 않은 팀도 있어 근처 PC방으로 뛰어가 다운로드하는 상황도 속출했다. 다음 리허설에서는 공동대표단이 ‘위안부’피해자의 영정을 모시고 들어오는 동선을 연습했다. 추모제에서 진혼의식은 대부분 ‘진혼무’로 시작했는데 올해는 영정을 엄숙하게 모시는 순서로 시작해 보았다. 경남여성단체연합, (사)경남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창원진보연합, 민주노총경남지역본부, 민주노총서비스연맹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경남지부, (사)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우리민족끼리통일의문을여는통일촌, 경남겨레하나, 마산겨레하나, 6월항쟁정신계승경남사업회 등 창원지역 각 단체의 대표님들이 한 분씩 영정을 모시고 식장으로 입장하는 형태의 진혼의식을 준비했다. 단체 대표들은 워낙 바쁜 분들이어서 섭외부터 난항이었다. 어찌어찌하여 약속을 받고 추모제 1시간 전에 모여 동선을 맞추어 보기로 했다. 특히 영정 12위를 모시는 남녀 성비를 동등하게 하려고 신경 써서 조율하였다. 앞서 기획회의에서는 ‘위안부’ 운동과 수요시위를 향한 공격의 심각성을 알리고 여러 단체의 응원과 구호를 담은 현수막을 내걸어 기림일 분위기를 돋우자는 의견이 나왔다. 다들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그렇게 마창진시민모임과 함께 각 단체의 주장과 구호 50개를 담은 조각보 형태의 대형 펼침막이 만들어졌다. 펼침막을 무대배경으로 걸었더니 의도했던 장엄한 기림일 분위기가 연출됐다. 좌충우돌했던 리허설을 뒤로 하고 추모제와 청소년 문화제 본 행사가 이어졌다. ‘청소년이 기억하고 만드는 평화’라는 주제로 열린 2022년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일 행사는 가장 먼저 피해자 영정을 모셨다. 공동협력단체 대표들이 광장 끝에서 대형 위패를 앞세우고 무대를 향해 둥글게 광장을 감싸면서 입장하여 이젤 위에 영정을 올려두었다. 다음 순서로 시민들이 차례로 분향을 한 뒤 주최 단체 대표와 지역 인사의 추모사가 있었다. 추모사는 생존피해자가 없는 시대를 가슴 아파하고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를 향한 다짐이 주를 이루었다. 평화를 향한 다짐은 청소년이 꾸민 문화제를 통해 분출됐다. 밴드 공연, 일제 강점기를 기억하는 1인극, 리코더 연주, 합창, 창작곡 공연, 댄스 등을 선보인 문화제에서 청소년들의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이어가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기림일 행사 현장에서는 비옷, 간식 구입 등 발품 드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 모든 일은 지역의 시민들이 내 일처럼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행사를 치를 때 날씨 등의 돌발 상황이 생기면 의견이 분분해져 주최 측의 혼을 쏙 빼놓는데, 이날은 궂은 날씨에도 지역 시민단체 일꾼들이 여기저기 다니며 도와줘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한다. 창원 시민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는 뜻에서 기림일 행사에 참석하고 진행을 돕는 것으로 마음을 다해주었다. 일본군‘위안부’ 단체로서 시민들이 만들어 가는 기림일 행사를 지속하여 운영하는 이유이다. 청소년이 꾸민 기림일 공연은 함께 하신 분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몇몇 분은 ‘추모제’도 이렇게 멋진 문화행사로 꾸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며 감동을 받았다고 말씀해주셨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눈부신 끼와 재능이 일본군‘위안부’ 기림의 다짐으로 변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