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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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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2부 - 2000년 여성법정이 시민운동에 끼친 영향 1.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2.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3. [논평] 50년만의 판결,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2015년 11월 12~1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인도에 반한 범죄에 관한 국제민중법정이 열렸다. 2015년은 적게는 50만 명에서 많게는 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희생된 인도네시아 집단학살이 시작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인도네시아 집단학살 범죄의 가해자는 인도네시아 군대, 그리고 군대에서 지도하고 훈련시킨 여러 민병대였고, 피해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이하 PKI) 당원이나 관련 민중 단체였다. 이들 민중 단체는 농부, 노동자, 여성, 예술가, 1965년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의 열성적 지지자, 대부분이 중국인 진보단체인 시민협의회(Baperki)[1] 회원이었던 화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65년부터 PKI 당원(으로 간주된 자)들을 대상으로 집단학살이 벌어지면서 수십만 명이 수감되거나 인도네시아 부루(Buru) 섬을 비롯한 집단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수감자 대부분은 고문을 당했고, 특히 여성(과 일부 남성)은 성폭력에도 노출되었다. 집, 사무실, 학교, 개인 재산은 모두 수탈되었다. 집단 학살이라는 반인도적 범죄가 시작되고 채 2년이 되지 않아 수하르토 장군은 수카르노 대통령을 축출하고 권력을 차지했으며 1968년 인도네시아 제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사건은 1965년 9월 30일, 중간 계급 군인들이 고위급 장군 6명(과 실수로 중위 한 명)을 납치해 살해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른바 '9‧30운동', 혹은 '9‧30쿠데타'라 불리는 사건이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이들 6명의 장군을 납치해 수카르노 대통령 앞에 데려가자는 것이 '9‧30 쿠데타'의 초기 계획이었다. 당시 PKI 의장도 장군들을 납치하는 작전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이들을 살해할 생각은 아니었다. 의장을 제외한 나머지 공산당 간부와 일반 당원들은 이 작전을 알지 못했다. 의장이 아무런 말도 남기지 못하고 살해되어 그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곧 습격이 벌어진다는 정보를 듣고도 상관에게 이를 보고하지 않았던 수하르토 장군의 역할도 마찬가지로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이러한 인도네시아 집단학살의 가해자 중 어느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수카르노 대통령이 축출되고 1998년까지 이어진 수하르토 장군의 독재 정권 하에서는 PKI가 스스로 파멸을 자초했다며 비난하며 집단 학살의 피해자를 국가의 배신자로 묘사하는 공격적인 선전이 벌어졌다. 당시 활동했던 공산당원들과 후손들은 여전히 그러한 낙인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집단학살 피해자들의 가족은 직업을 잃었고, 아이들은 대학 입학을 거부당했다. 수천 명의 공무원과 군인이 수카르노를 지지했다는 의혹을 받고 일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연금을 받지 못하고 해고당했다. 1998년, 수하르토 장군의 독재가 끝나자 집단학살 사건의 가해자들에게 정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국가인권위원회(이하 Komnas HAM)'는 2012년 보고서에서 당시 자행된 잔혹한 행위를 반인도적 범죄로 간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요약문과 함께 공개된 이 획기적인 보고서는 학살 목격자와 생존자 349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하지만 보고서를 제출받은 법무장관실에서는 절차상의 이유를 근거로 보고서를 돌려보냈고, 지금까지 법무장관은 집단학살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 역시도 2012년에 조슈아 오펜하이머(Joshua Oppenheimer) 감독의 영화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이 개봉되고 나서야 이 비극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액트 오브 킬링>의 개봉 뒤인 2013년 3월, 인권 활동가, 언론인, 연구자 등 인도네시아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헤이그에 있는 우리 집에 모였다. 오펜하이머 감독, Komnas HAM 위원 한 명, 저명한 여성이자 인권 변호사인 누르샤바니 까챠숭까나(Nursyahbani Katjasungkana)도 이 자리에 함께했다. 누르샤바니 변호사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이하 2000년 여성법정)에서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검사장을 맡기도 했다. 누르샤바니 변호사에게 2000년 여성법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나머지 참석자들은 국제민중법정을 통해 인도네시아 대량학살 사건에 관한 국가적·국제적 수준의 침묵을 끝내고, 피해자의 존엄성 회복을 돕고 재발도 방지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망명한 사람들과 활동가들이 누르샤바니 변호사에게 인도네시아 집단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을 조직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가 1965년 10월부터 자행한 반인도적 범죄를 국가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피해자와 그 가족의 목소리가 억압당하거나 인도네시아 정부가 범죄의 책임을 회피하도록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우리는 누르샤바니 총괄 조정관, 그리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네덜란드 헤이그 각각에 사무국을 둔 수평적 조직을 운영했다. 헤이그의 사무국은 재판 심리를 준비했다. 법정 준비를 위해 조직위원회(OC) 위원들이 이끄는 여러 팀도 만들어졌다. 누르샤바니도 자카르타 팀을 이끌며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힘썼다. 인권 운동가나 피해자 단체와 함께 세미나와 워크숍을 열었고 인도네시아 검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했으며 판사들에게 참여를 부탁하는 초대장을 보냈다. 정기적으로 헤이그에서 우리 업무를 감독하기도 했다. 2014년 3월, ‘국제민중법정재단’(Foundation International People's Tribunal)이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법정 주최 비용을 충당할 기금을 간신히 모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많은 기금 지원 기관에서는 이 문제를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국제 사법 재판의 도시로 알려진 헤이그에서 민중법정을 여는 것이 좋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50년의 침묵을 깨다 우리는 ‘50년의 침묵을 깨다’(breaking 50 years of silence)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법정을 개최한 2015년은 집단학살과 PKI의 붕괴뿐 아니라 수카르노 대통령의 축출로 이어진 '1965년 사태'가 있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판사단 최종 보고서(Final Report of the Panel of Judges)는 2016년 7월에 발표되었고, 2017년에 영어와 인도네시아어로 공개되었다. 세계의 연구자와 활동가 40명이 제출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최종 보고서의 결론은 여전히 내용 열람이 금지된 2012년 Komnas HAM 보고서의 분석과 일치한다. 특히 최종 보고서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다음의 4가지이다. 첫째, 판사단은 망명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시민권을 박탈당했다고 판단했다. 망명자들 중에는 1965년 9월 당시 해외에 있다가 인도네시아로 돌아오지 못한 공산당원들과 학생, 외교관들이 포함되어 있다. 판사단은 보고서에서 “비자발적 혹은 강제적 망명은 반인도적 행위와 별개로 상당한 규모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국가적 공격의 한 부분에 해당하며, 박해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반인도적 범죄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자발적 혹은 강제적 망명은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Rome 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명시되어 있지 않고 2012년 Komnas HAM 보고서에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판결로 논의가 시작된다면 좋을 것이다. 둘째, 살인 조장 선동에 관해 다루었다. 특히 “공산주의자 여성들이 '루방 부아야(Lubang Buaya)'라는 들판에서 알몸으로 춤을 추면서 장군들을 거세하고 죽였다”는 허위 선전을 군대가 만들고 퍼뜨렸다는 사실이 언급되었다. 판사단은 “루방 부아야에서 포로들에게 벌어졌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완전한 거짓이다. 수하르토 장군 휘하의 군 간부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고 …(중략)… PKI와 관련되었다는 의혹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지속적 선전전은 이들에 대한 박해와 억류, 살해를 정당화했다. 또한 앞서 기술한 성폭력과 일체의 반인도적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일조했다. 30년 이상 계속된 이 선전은 생존자의 시민권을 부정하고 박해가 지속되는 데 기여했다. 폭력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허위 선전을 퍼뜨리는 것은 폭력을 행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다. 범죄를 준비하는 행위는 범죄 자체와 별개로 논할 수 없다. 선전은 학살을 포함한 반인도적 행위를 조장했으며, 광범위한 폭력의 시작이자 일부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셋째, 검사는 다른 국가, 특히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해서도 공모 혐의를 제기했다. 인도네시아와 마찬가지로 이들 세 국가에도 법정에 출석해 변론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에 응한 국가는 없었다. 판사단은 공모의 정도는 다르지만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가 모두 반인도적 범죄에 연루되었으며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기소장에 따르면 특히 미국은 “인도네시아 군대가 대량 학살과 기타 범죄 행위를 자행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도네시아 군대의 반인도적 범죄 공모 혐의를 정당화할 수 있도록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민중법정은 집단학살의 발생 여부를 다루었다. 검사가 기소장에 집단학살 혐의를 포함하지 않았지만, 연구 보고서에서는 학살 혐의를 뒷받침하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집단학살 혐의가 기소장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집단학살 범죄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h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된 집단, 즉 “국가적, 민족적, 인종적, 혹은 종교적 집단”에 속하지 않는 집단에게 ‘집단학살’(genocide)이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데에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소장에 집단학살 혐의가 포함된다면, 극도로 민감한 문제를 다룸에 따라 이미 심한 공격을 받고 있었던 검사들의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민중법정은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법정은 진실을 담는 아카이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동안 인도네시아 정치계에서 지배적이었던 '가해자들의 아카이브'는 '피해자들의 아카이브'로 대체되거나 보완될 수 있었다. 세상은 생존자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비록 가해자에게 정의를 구현하지 못했고 어떠한 보상이나 배상도 뒤따르지 않았지만, 법정을 통해 피해자와 그 가족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집단학살과 여타 반인도적 범죄를 둘러싼 침묵을 깨고 그러한 범죄는 절대 잊히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이 법정은 무엇보다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각주 ^ 인도네시아 시민협의회(Badan Permusyawaratan Kewarganegaraan Indones, Baperki). 영어 명칭은 Consultative Body of Indonesian Citizenship으로 1954년 설립되었고, 이후 1965년 수카르노가 수하르토에게 실권을 이양한 후 공산당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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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가닿지 못한, 그러나 확보해야 할 전쟁 경험의 말‘들’: 베트남민간인학살 국가배상소송 1심 승소 이후 ‘민(民)’의 확장을 제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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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의 의미를 소환하며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생존자 응우엔티탄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한 것은 2020년 4월 21일이었다. 3년 동안 무려 아홉 번의 지난한 변론을 거쳐, 사건이 발생한 지 55년이 지난 2023년 2월 7일, 재판부는 당시 한국군의 ‘불법 행위’가 있었다며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또한 재판부는 청구권 소멸시효가 오래전에 지났다는 피고 대한민국 대리인의 주장에 대해서도 원고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 사유가 있었으니 피고가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고 판단했다(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 2015년부터 현지답사와 공부 모임을 시작한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의 몇몇 변호사들은 2017년에 관련 소송을 위한 TF를 꾸렸고, 그 과정에서 2018년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이하 시민평화법정)이 열리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은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을 모델로 한, 가해국의 수도 서울에서 베트남전쟁 시기에 자행된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민간법정이었다.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는 못해도, 가해국의 구성원들이 꾸린 법정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이 ‘가해의 자리’에 놓인다는 것과 베트남전쟁의 의미를 묻는 자리이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에는 퐁니와 하미 두 마을에서 ‘응우엔티탄’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피해 생존자가 각각 증언대에 올랐다. 그 후 시민평화법정에 참여했던 변호사들이 퐁니 마을 응우엔티탄의 원고 대리인단이 되어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여느 운동들처럼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 또한 사법적 해결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운동적 차원의 동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법정에서 잘 싸워줄 것이라는 믿음은 사회운동을 안온한 자리로, 응원의 자리로 한 걸음 물러서게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시민평화법정 활동의 연속체적 성격을 가지고 변호사, 활동가, 연구자, 평화단체가 모여 ‘베트남전쟁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이하 시민네트워크)를 꾸렸고, 지금까지도 정보공개 청구, 청원서 제출, 국가배상소송,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화위) 진정, 특별법 발의, 판결문 번역 그리고 각종 공론장 기획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시민네트워크는 대표도, 직인도 없는 느슨한 형태의 연대체다.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나 국가 간 관계와는 다른 층위에서 20여 년간 국경을 넘나들며 학살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을 만나며 지속적으로 민간인 학살을 문제 삼았던 이들이 존재했다. 이번 1심 승소라는 판결을 확보하기까지, 대리인단의 변호사들 외에도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법정 ‘바깥’의 말들 법정 증언을 위해 피해 생존자 응우엔티탄과 목격자 응우엔쩌이 두 사람이 한국에 머물렀던 일주일 동안 진화위 위원장 면담을 비롯하여 여섯 시간 반이나 진행된 국가배상청구소송 증인 심문과 원고 심문, 국회 토론회, 80여 명이 모인 좌담회 등 일련의 과정을 함께 하면서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응우엔티탄은 법정에서 한국 정부에 간곡한 ‘호소’가 아닌 당당한 ‘요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특히 전쟁기념관에서 베트남전쟁 관련 전시 내용에 반박하며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도 했다. 피해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일정이 큰 기쁨이자 숙원을 향해 나아가는 긍정적인 과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함께 할 수 있는 거리만큼의 ‘곁’에서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아직 들어야 할 말들을 충분히 듣지 못했다. 검색하면 쏟아져 나오는 피해 생존자의 말들은 저마다 다른 경험을 말하고 있는데도 구별이 안 될 만큼 비슷하게 들린다. 그것은 던지는 질문과 만나는 방식이 언제나 한결같았기 때문이고, 법정을 꾸리면서 사건 그 자체에 주로 집중해 왔기 때문에 들어야 할 말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쟁기념관에서의 당사자 발언만큼은 이런 의미에서 새롭다. 피해자 증언과 법정 구성은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사건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참전군인 증언까지도 확보된 지금의 상황에서, 피해와 가해의 구도 사이에 고여 있을 수많은 말들은 제대로 길어 올려지지 않고 있다. 2018년 베트남시민법정 이후 2023년 실제의 법정에서 승소하기까지 동료들과 함께 여러 공론장을 기획하며 ‘말의 자리’를 만들어왔다. 그 ‘말’은 피해 생존자나 목격자의 말, 가해 집단에 속한 병사의 말, 변호사의 말, 활동가와 연구자의 말,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에 태어난 이들의 말, 고엽제 피해자와 가족들의 말, 온 존재를 다해 비명을 지르는 땅과 바다와 강과 숲 그리고 비인간 동물의 말의 자리였다. 피해자의 말을 한국 사회에 전달하고 들리게 하는 활동은 ‘어떻게’라는 방법론에 대한 더 첨예한 논쟁이 필요하고, 이것이 당사자성에 ‘갇히지 않는’ 혹은 당사자성을 ‘확장해 가는’ 운동이 되기 위한 고민 또한 더 깊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운동이 피해 생존자의 경험이나 말만을 ‘앞세운’ 운동이 되지 않을 때, 피해 생존자의 말에‘만’ 귀 기울이는 운동이 되지 않을 때, 다양한 말과 관계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려고 할 때, 비로소 지금-이곳의 우리가 그때-그곳을 겪어낸 존재들과 이어지는 운동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지난 ‘위안부’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증언이 되지 못한 말, 통역 불가능한 순간들을 마주하고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혹은 유족을 베트남 현지에서 처음 만난 것은 2018년 2월이었다. 같은 해 4월에 개최가 예정되어 있던 시민평화법정의 조사팀으로 활동하면서 법률팀 변호사들과 함께 피해 사실에 대한 증언 확보를 위해 퐁니와 하미 두 마을을 방문하고, 사건 발생 장소를 돌아보았다. 마을을 방문하기 전날, 다낭의 모처에서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을 만나 하루 종일 증언을 들었는데, 먼 곳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낯선 이들을 익숙하지 않은 도심의 공간에서 마주하고, 50년도 더 지난 피해 당시의 참혹한 기억을 떠올리며 법정의 증언으로 ‘채택’될 수 있는 ‘효력’을 가진 말을 해야 하는 화자들의 부담과 긴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피해 생존자들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끔찍한 기억을 되새기면서도, 무엇보다 화자가 위축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편안함이 감도는 분위기였고, 이는 청자의 긴장감마저 녹여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얘기 많이 들어서 외울 정도”라고 말하는 손주들이 떠들며 뛰어다녔다. 멀리서 온 ‘손님’을 위해 잘 차려진 밥상이 준비된 거실에 둘러앉아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육하원칙에 따라 질문을 하던 변호사 한 사람이 갑자기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해 물었다. 법정에서는 쓸모없는 말이겠지만, 피해 생존자들은 비극을 겪고 난 후 비참한 시간만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자, 뿔뿔이 흩어졌던 마을 사람들은 폐허가 된 마을로 하나둘씩 돌아와, 불타버린 집터 위에 다시 집을 짓고, 누군가는 남의집살이를 하고, 누군가는 국수 장사를 하고,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누군가는 뒷마당에서 닭과 돼지를 키웠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증언을 할 때와 이후의 시간들을 ‘살아낸’ 이야기를 할 때, 화자들은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재판을 위해 청자가 꼭 들어야 할 말들은 화자가 하고 싶은 말들과 겹치기도 하지만 충돌하기도 한다. 말들의 어긋남 속에서 법정 바깥으로 밀려난 경험들을 놓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피해 생존자에게 들은 말을 청자들에게 미처 전하기도 전에 통역사가 울어버린 순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도 화자의 눈에 고인 눈물을 바라보다가 함께 울어버린 순간, 피해 생존자가 자신은 이렇게 살아왔노라며 곰방대를 쥔 손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당당하게 학살 이후의 삶을 말하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을 감싸 안는 화자를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순간…. 현지에서 마주했던 ‘통역 불가능한 순간들’이야말로 그 자리에 있던 청자들에게 ‘듣는다’는 행위를 고민케 했다. 또 하나의 학살지 하미 마을 이야기 – 진실을 회피하는 자는 누구인가 또다시 현지를 찾아가 피해 생존자들을 만난 것은 2023년 2월이었다. 퐁니 마을의 응우엔티탄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의 1심 승소 판결 소식이 베트남 사회에 전해진 직후였고, 하미 마을의 위령제가 열리는 때였다. 승소에 대한 커다란 기쁨 속에서도 또 다른 학살지 하미 마을의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이 진화위에 제출한 진정은 조사 개시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었기에, 경과를 보고하는 자리는 피해 생존자들의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며 당사자들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퐁니 마을과는 달리 법정에 제출할 증거 확보가 어려웠기에 실제 법정을 꾸리지 못하고 진화위 진정을 냈던 하미 학살. 그러나 하미 마을 사람들은 퐁니 마을의 승소 소식을 전해 듣고, 사법적 해결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민평화법정, 청와대에 낸 청원, 실제 소송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피해 생존자들은 그저 변호사의 설명을 ‘듣고만’ 있지 않았다. 시민평화법정은 법적 구속력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피해 당사자들에겐 커다란 의미를 갖는 시도였고, 베트남 사회 내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문제 삼게 된 계기였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러 지면과 보도를 통해 퐁니의 응우엔티탄과 하미의 응우엔티탄으로 대표성이 각인된 피해 생존자 이외에도, 하미의 응우엔티본 등 새로운 화자들이 등장해 자신이 겪은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응우옌티본을 포함한 하미 학살 피해 생존자와 유가족 5명은 진화위에 하미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진화위는 2023년 5월 25일, 하미 마을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절차를 시작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진실화해위원회 결정2라-12544).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 발생한 사건까지 진화위가 조사하는 것은 법률이 정한 조사대상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 발생한 사건’이니 조사조차 하지 않겠다는 진화위의 기괴한 의지는 국가적 차원에서 전쟁범죄를 방조하겠다는 이른바, ‘정의에 대한 태만’에 다름 아니다. 진정 신청인 중 한 명인 응우엔티탄은 진정을 접수하고도 일 년 넘게 ‘침묵’을 이어온 진화위에 보낸 서신에서 ‘조사할 용기’를 내 달라고 말했다. 이제 한국 정부에게 베트남전쟁 때 자행된 학살의 조사 개시는 ‘용기’까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이에 대해 시민네트워크의 일원이자 재판과 진정에 지속적으로 관여해온 임재성(법무법인 해마루)과 김남주(법무법인 도담)는 “진화위 관련 법률에는 외국인을 조사범위에서 배제하는 조항이 없고, 인권침해가 일어난 지역이 ‘외국’이라거나 ‘전쟁에서 발생한 사건’을 배제하는 조항도 없다”며 “진화위가 법률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사유를 근거로 들어 부당하게 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결국 피해 생존자들은 시민네트워크의 조력으로 지난 7월 19일,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서울행정법원 2023구합71872). 1심 승소 판결 이후, 판결문 번역과 ‘민’들의 공론장 1심 승소 판결이 난 이후에도 한동안 피해 당사자들은 한국어로 쓰인 판결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이 어떻게 인정되었는지, 재판부는 한국 정부에 어떤 책임을 물었는지, 용기를 낸 증언들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시민네트워크에서 판결문 번역을 위한 모금을 했고, 693명의 응답으로 번역을 위한 재정이 마련되었다. 판결문은 베트남어, 영어, 일본어로 번역되었고, 피해 당사자들과 유족뿐만 아니라 관련 단체와 활동가, 연구자, 국제기구에 전달되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1심 승소에 대한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 갈렸다. 승소 판결 열흘 후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국방부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우리 장병들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된 것은 전혀 없다”며 “국방부는 거기(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발언했고, 3월에 한국 정부가 항소장을 제출하면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처음으로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법원의 판단은 국가적 차원에서 말 그대로 대대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제출된 항소이유서는 자그마치 126쪽에 달한다. 1999년 〈한겨레21〉의 보도 이후로 20년이 넘도록 ‘유감’이나 ‘마음의 빚’과 같은 권력자들의 애매하고 비겁한 표현 이외에 한국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사죄는 없었다.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도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열사’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공적(功績)이 없는 죽음’인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대외적으로 문제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한국 정부가 항소한 사실이 알려지자, 베트남 외교부 부대변인은 “매우 유감”이라며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하자’는 방침이지만, 그것이 진실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 민간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게 되었다고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정부의 항소에 대해 명백한 불쾌감을 드러낸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승소 판결 이후, 시민네트워크의 기획으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판결문 ‘민’들의 언어로 읽고 말하다’라는 공론장이 열렸다. 홍보를 위해 처음에 만든 웹자보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판결문, ‘시민’들의 언어로 읽고 말하다’였다. 논의를 거쳐 최종안에서 ‘시민’을 ‘민’으로 수정했는데, 전쟁 자체가 국가주의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고, 국민으로 동원된 피해/가해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시민’으로 테두리 쳤을 때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존재들을 더 이상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지 않기를 바라면서, 전쟁을 경험한 존재들을 국가나 국경에 가두거나 인간으로만 범주화해서 논의하는 것에 대한 위화감이 생겨났다. 사실, 누군가 겪은 피해 경험을 판결문에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것처럼, 가해 경험 또한 그러하다. 법정에서 다뤄지는 ‘증언’만으로는 다 말해지지 못하는 경험들이 있다. ‘판결문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판결의 법적 내용을 이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법의 언어 너머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함께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과정에서 공동의 언어를 벼려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어떤 동시대적 고민이 필요한지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응우엔티탄의 승소는 한국 사회가 베트남전쟁에서의 가해 경험을 어떻게 자리매김하며 공유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용기를 낸 것은 비단 피해 생존자만이 아니다. 가해 집단에 속한 참전군인 R의 증언 너머, 여전히 말해지지 못한 병사들의 수많은 말과 마음들이 있고, 아직 만나지 못한 피해의 경험들도 있다. 41쪽의 승소 판결문을 함께 읽는 자리에 모인 청중들은 낯선 법의 언어 속으로 뛰어들어 여러 질문을 던지고, 법정 투쟁만이 아닌 방식의 담론과 운동에 대한 소회를 나눴다. 가까스로 확보한 가해경험과 가해구조에 대한 논의 “‘피해’와 ‘가해’는 비대칭적이다. 피해는 기본적으로 개개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겪게 되지만, 가해는 대부분 자리나 위치의 효과다. 그래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해자가 ‘나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종종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책임을 진다는 것이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식되어, 회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거기에는 연루와 자신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책임을 진답시고 죽어버리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주체성의 결여지만,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은 사회성의 결여를 뜻한다. ‘가해자’라는 사회적인 위치를 해체해 나가기 위해서는 모여서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아주 중요할 것 같다.”(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1] 1심 승소 판결이 내려진 직후에, 방청하던 법정을 나오자마자 증인 심문에서 가해 목격담을 증언해 준 참전군인 R에게 소식을 전했다. 시민평화법정 때부터 그를 인터뷰하고 만나 온 시간들이 떠올라,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홉 번의 변론기일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날은 그가 목격자로서 증언했던 2021년 11월 16일이었다.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최초로, 참전군인이, 가해 관련 증언을 한 것이다. 시민평화법정에서 증언했던 바로 그 참전군인 R이다. R은 묻는 말에 대답해야 했고, 재판에 필요한 말을 했다. 그러나 법정은 그의 전쟁 경험이 온전히 말해지는 장(場)이 될 수 없었다. R은 2018년 시민평화법정 때 증언을 하고 나서 “진실을 말함으로써 내 자신의 경험에 뒤늦게, 그러나 제대로 ‘참여’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은 병사들이 전쟁 경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서 언어화하지 못한 채 긴 시간이 지났음을 보여준다. 가해 집단에 속한 병사의 말은 전우회에서 말하는 무용담과도, 법정에서의 증언과도, 보훈병원에서 정신의학과 의사에게 하는 말과도 다른 층위에 놓여있다. 그것은 어쩌면 청자에게 ‘새로운 관계’를 전제로 하는 장(場)을 요청하는 말들이 아닐까. 참전군인의 전쟁 경험을 듣는다는 것은 지금껏 국가에 의해 강요되어온 ‘남성성’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병역과 군대에 대한 현재적인 문제들과 함께 논의될 수도 있다. 병사들의 증언은 어떤 청자들을 요청하고 있을까. 우리는 ‘베트남전쟁’이라 부르는 ‘이 전쟁’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참전군인의 증언이 있던 날, 함께 재판을 방청했던 성미산학교 은결은 판결을 앞둔 시점에 열린 공론장 〈법정에서 못다한 이야기〉에서 “‘감정’을 통해 재구성되는 전쟁”을 말했다. 은결은 아카이브평화기억과 성미산학교 포스트중등학생들이 1년간 해온 참전군인 구술작업 ‘월남으로 간 동창생을 찾아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저는 우선 ‘감정’의 중요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전쟁의 역사에서 전쟁을 겪은 이들의 감정은 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는 박물관에서도, 역사 교과서에서도 감정은 배제됩니다. 감정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며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일까요? 특히 법정에서는 이 감정의 언어들이 삭제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제가 만난 참전군인들은 저에게 감정을 공유해주었습니다. ‘무서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밤엔 코코아를 마시며 위안을 얻었다’ 같은 것들. (…) 전쟁과 관련한 감정을 말하기를 꺼려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것조차도 저는 중요한 이야기가 되고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 감정은 논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정은 원래 흔들리고 엉키며 복합적이니까요. 그렇기에 감정을 통해 재구성하는 전쟁은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감정으로 구성하는 전쟁은 이익과 손해, 피해와 가해, 규정되는 것만을 판단의 근거, 기준으로 삼으며 구성하는 전쟁보다 훨씬 복잡할 것이고 훨씬 다양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안전한 자는 없기에 우리는 전쟁의 영향을 받는 많은 이의 삶을 살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이 전쟁으로부터 해방하는 과정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이번 승소 판결 자체는 너무나 소중한 결실이지만, 전쟁에서 휘둘러진 여러 층위의 폭력을 분석하려면 ‘참전’의 주체들을 전방과 후방의 군대뿐 아니라, 전쟁을 지탱하여 고통과 이윤을 동시에 양산했던 병참 기능을 한 기업이나 강제로 동원된 소수민족과 비인간존재들까지 확장시킴으로써 베트남전쟁을 더욱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외교’ 문제로만 다뤄져서도 안 된다. 한명 한명의 목숨, 애도받지 못한 죽음, 살아남은 자의 고립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법정으로 가져가지 못한 하미마을의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은 한국군대에 의해 자행된 국가폭력으로서의 ‘가해’에 대한 진상규명이자, ‘이 전쟁’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빨갱이인지 양민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4.3의 폭력, “베트공인지 민간인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베트남전쟁의 폭력, “폭도인지 시민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5.18의 폭력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국민화’를 거절하는 마음 - ‘민(民)’의 확장을 제안하며 민간인 학살에 국한해서 베트남전쟁을 이해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젠더, 생태, 강제 이주, 공동체 소멸, 자살 병사, 장애의 양산, 재생산권, 참전군인, 남성성, 디아스포라, 소수민족과 비인간동물의 전쟁 동원, 에코사이드(생태학살), 파월노동자, 전범기업 등 조금 더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베트남전쟁을 바라볼 수 있는 모닥불 같은 공론의 장들이 곳곳에서 만들어졌으면 한다. 특히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을 언급할 때, ‘민간인’은 베트남 ‘국민’으로 한정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놓쳐왔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미군에 의해 동원되었다가 북베트남군에게 포로로 잡혀 학살당한 산악지대 소수 민족들의 죽음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통일을 이룬 베트남에서는 애도 혹은 추모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동원한 주체와 학살한 주체 각각에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이제껏 ‘비국민’의 학살 피해가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이 있었던가. ‘1심 승소’라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와중에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비국민’의 전쟁 경험과 학살피해였다. 전쟁이라는 극대화된 폭력, 가해 경험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가해에 대한 자각이 없으니, 아무리 피해를 말한들 들리지 않거나 남 얘기로 들린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청자에게 화자의 말은 가닿을 길이 없다. 1심 재판을 참관하면서, 한국의 미디어와 여론이 피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비해, 가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만하고 무감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가해의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가해 병사를 ‘색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의 자리’와 ‘가해의 구조’를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각주 ^ 후지이 다케시가 2021년 4월 15일, 공론장 〈피해를 품은 가해의 자리에서 베트남전쟁을 말하다〉를 앞두고 페이스북에 쓴 추천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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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경험과 “상황적 지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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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험에 소유격을 붙여 ‘00의 증언’이라고 설정하는 것에 폭력성을 느낀다. 생각과 감정을 포함하여 움직임이나 행위에 관한 영역을 경험이라고 한다면, 마치 몸에 옷을 걸치는 것처럼 경험이 어떠한 말을 걸치는가라는 점은 지극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처음부터 ‘00의’라는 주어 아래 두고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질문하게 된다. ‘00의 증언’이라는 설정은, 모든 움직임과 행위를 00이라는 주어의 것으로 총괄하라는 일종의 명령이다. 동시에 그것은 위의 질문을 배제하고, 움직임과 행위에 촉발되어 시작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제거해버리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야말로 폭력이 아닐까. 금기된 사랑을 둘러싸고 안티고네의 죄를 인정하게 하려는 신문(訊問) 장면에 대하여, 주디스 버틀러는 “행위자가 그 행위와 일치하는 유일한 방법은 행위와 행위자의 연결됨을 언어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논했다. 그는 이 주장에서 어떠한 말을 말로서 승인할 것인가, 어떠한 말을 사전에 배제할 것인가라는 질서가 발동하는 점을 분석한다.[1] 또한 발화를 사전에 배제하는 질서는 법과 이성애주의적인 친족 구조의 공범 결과다. 그러나 증언대에 선 안티고네는 이 주장을 끝까지 거절한다. 거부하며 신문에 노출되는 이 경험은 “지금에라도 누군가에게 달라붙을 것만 같다”.[2] 그리고 경험에 자신의 소유격을 붙이는 것을 거절한 채, 안티고네는 산 채로 매장된다. 증언에 관한 폭력이 여기서는 생매장인 것이다. 버틀러가 지적하는 주장에는, 굳이 자신이 그 행위를 받아들이려 하는 비약도 포함된다. 그러나 주장이 이미 질서를 갖는 이상, 그 비약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사태는 시작과 동시에 먼저 심판에 의해 정지당하게 된다. 생매장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티고네가 죄인인가 아니면 구제되어야 하는가라는 점이 아니다. 증언과 관련하여 필요한 것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받아들이려 하는 비약의 가능성까지 포함하여 경험으로부터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말의 모습에 대한 고찰이다. 주장에 있어서 주어는 사전에 준비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움직임이나 행위에는 사전에 준비된 주어가 달라붙어 주장되고, ‘00의 경험’으로 말해진다. ‘나’는 이 주어에 이미 선취되어 있기 때문에, 대기하고 있던 주장이 ‘나’를 덮치는 것과 같은 형식이 된다. 프란츠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흑인의 삶의 체험”을 통해 이러한 주장에 저항하며 말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3]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은, 단지 ‘나’라는 주어의 회복만은 아니다.모든 움직임이 “검둥이”라는 주장 속에서 말해진다. 파농은 이 문제를 “삼인칭 인식”이라고 말한다. 행위가 전부 삼인칭의 소유격 아래 놓인다는 것이다. 이 삼인칭은 변화가 없는 속성으로 자연화되어 있다. 또한 이 자연화하는 인식에는 때때로 과학이 이용된다. 그리고 이 자연은 ‘나’의 신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나의 신체는 자연화에 저항하며 “나 자신을 사물로 삼는다”.[4] 이 점이 바로 논의의 출발점인 것이다. 경험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복수(複數)의 경험으로서 산란하는 것이다. 나만의 일도 아니며 또한 남의 일이 아니라는 질문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초점적 확장은 과정으로서 계속되어야만 한다. 파농은 책 마지막 부분에 “아아 나의 신체여, 언제까지나 나를 질문하는 인간이게 하소서”라는 기원으로 이러한 접속을 도모해나간다. ‘나’는 처음부터 이 지점에서 선언되는 것이며, 경험은 단수형이든 복수형이든 간에 주어의 소유격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들러붙게 되며, 남의 일이 아니게 된다. 산란과 복수화를 짊어지면서 새로운 관계를 갱신해 나아가는 힘으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검둥이”를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끝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또한 복수로 만들어 주어를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안에서는 주장이 계속된다. 경험에 있어 논점은 소유격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러한 힘이다. 즉, 공통 항목이 만들어내는 우리가 아니라, 공통 항목으로는 총괄할 수 없는 곤란함을 끌어안는 우리가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 30여 년 전 다나 해러웨이는 이러한 ‘우리’를 향한 출발점을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을 통해 확보하려고 하였다. 해러웨이가 분투했던 과학 혹은 객관성이라는 것은 경험을 둘러싼 주장을 짊어진 지식이며, 삼인칭 인식이며, 자연화하는 사고이다. 그리고 자연화로부터 어떻게 몸을 떼어낼 것인가라는 질문이 해러웨이를 “상황”이라는 장소로 향하게 한다. 이 지점에 해러웨이는 말, 즉 지식을 재설정하려고 한 것이다. 파농과는 전혀 다른 문체지만 해러웨이의 “상황적 지식” 역시, 언어적 주장에 저항하면서 시작의 장을 찾아가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해러웨이가 향한 장소는 제한된 세계이며, 그 성격은 “부분적”이다. 이곳에서 “부분적 광경” 혹은 “제한된 목소리”에 기반한 말이 생겨난다. 몸에 옷을 걸치듯 경험에 걸쳐지는 것은 이러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대 일부’라는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말하는 전체 속의 부분이 아니다. 집합적 범주가 아니라 움직임이자 운동인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부분성은, 자기 완결적인 부분성이 아니라, 상황에 놓인 지식이 가능하게 되는 각 각의 결합 혹은 뜻하지 않은 시작을 위한 부분성이다”.[5] 개개의 장소는 시작의 장이며 동적인 모습 안에 있다. 주장에 저항한다는 것은 복수의 범주를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태를 확보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경험이 말을 걸칠 때, 요점은 말의 일반적 유형이 아니라, 말과 함께 생성하는 어떤 상황과 시작, 그것과 더불어 만들어지는 관계성에 있다. 이러한 일들이 기존의 상황과 관계성과의 경합 안에서 발생하는 이상, 말은 유형이 아니라 상황적인 것이다. 말은 말로서 승인되지 않은 말을 포함하여 개개의 관계성 안에서 여러 형태를 취하게 된다. 말의 모습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시작의 일단(一端)을 짊어지는 존재가 되는 일이다. 경험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며, 해설의 대상도 아니다. 경험이 움직임이자 상황 혹은 관계성의 생성이라는 의미는, 그것을 말로 하려는 ‘나’ 자신이 그 움직임 안에서 새로운 관계성의 일단을 감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상황적 지식”을 함께 확보하려고 하는 태도, 즉 앎이다.[6]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 https://www.icwrp2021.com 기사 게재일: 2021.10.6. 번역 : 정유진(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소장) 각주 ^ ジュディス・バトラー『アンティゴネーの主張』竹村和子訳、青土社、2002年、25頁。 ^ 1)과 동일、25頁。 ^ フランツ・ファノン『黒い皮膚・白い仮面』海老坂武・加藤晴久訳、みすず書房、1970年。 ^ 3)과 동일、79頁。 ^ ダナ・ハラウェイ『猿と女とサイボーグ(新装版)』高橋さきの訳、青土社、2017年、377頁。 ^ 역자 주, 도미야마 이치로/심정명 역 <시작의 앎 –프란츠 파농의 임상->,(문학과지성사, 2020) 서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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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반세기의 침묵, 억압된 기억, 지각한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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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의 침묵, 억압된 기억, 지각한 정의 과거사 청산과 화해에서 독일은 일본의 대립 모델로 여겨진다. '과거사 청산 모범국 독일'의 이미지를 완성한 계기는 2000년 독일 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설립한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을 통한 외국인 강제노역 배상이었다. 그런데도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여전히 남아 있다. 독일제국의 아프리카 식민지 '헤레로 전쟁'에 대한 사과와 배상이나, 냉전의 기억이 나치의 기억을 대체한 장소들(가령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이 그렇다. 전시에 국가와 군대가 자행한 성 착취와 성범죄 역시 뒤늦게 공론화되었다. 그리고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나치 정부가 '미풍양속' 보호와 성매매 근절을 명목으로 수용소에 격리한 여성들, 성병과 동성애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하겠다며 독일 방위군이 직접 만들고 관리한 유곽에 동원된 점령지 여성들, 남성 수인(囚人,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수용소에 갇힌 사람을 뜻하는 용어로 죄수와는 구별되어 사용된다)들의 노동력 '제고'를 위해 친위대가 수용소 안에 설치해 운영한 매춘소에 동원된 여성 수인들,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에 주둔했던 독일군의 성폭력 피해자들, 그리고 종전 후 동유럽과 독일에서 자행된 연합군(특히 소련군과 미군)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다. 은폐된 성 착취의 역사가 드러나기까지 이 이야기들이 반세기 넘게 침묵 된 끝에 세상에 나온 과정 그 자체가 이 일이 사회적으로 다루어져 온 방식을 말해준다. 함부르크의 사회학자 크리스타 파울(Christa Paul)은 1989년 가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나치 정부 시절, 수용소에서 남성 수인을 위한 강제 성매매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렵게 수용소 수인들과 피해자를 찾아내 인터뷰하고 조사 결과를 『강제성매매(Zwangsprostitution)』(1994)라는 책으로 펴냈지만, 당시에는 대중적 관심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십여 년이 지난 후 빈 대학 연구팀이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유곽을 재발견해 전시회 <나치 수용소의 성(性) 강제노역>(2005)으로 대중에 공개해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이미 종전 직후부터 내내 드러나 있었다. 다만 보지 못했을 뿐이다. 부헨발트 수용소 생존자였던 정치학자 코곤(Eugen Kogon)은 수용소 폭력을 다룬 『친위대 국가』(Der SS-Staat)를 1946년에 출간했는데 여기에 '수용소 유곽(Bordell im KZ)'이라는 제목이 붙은 2쪽 반 분량의 독립된 절이 있다. 이 책은 나치 폭력 연구의 고전이 되어 수많은 연구자가 읽고 인용했지만, 이 부분에 관심을 기울인 이는 없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1947)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독일인만 드나들 수 있는 사창가가 있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책은 1950년대 중반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이 부분을 눈여겨본 이는 없었다. 코곤의 서술에는 의도했든 아니든 성매매에 대한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담겨 있다. 그는 멀리서 본 매춘소 여성들의 얼굴에 난 부스럼 딱지를 성병의 흔적으로 단정하고 원래 난잡한 여자들이었을 것으로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매춘소 여성들 얼굴의 부스럼은 오랜 수용소 생활로 인한 영양실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코곤은 이들이 원래 여성 수인들로 6개월 후 석방을 대가로 매춘소에 자원했다고 언급했다. 성매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태도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독일의 사회학자 볼프강 조프스키가 1993년 출간한 나치 연구서 『테러의 질서: 유대인 수용소』에서는 이들이 "매춘부(Hure)"라는 멸칭으로 언급된다. 이는 당시에나 수십 년 후나, 가해자나 증언자나 연구자 모두 인습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수용소 유곽은 만들어질 때부터 이미 '수치 중의 수치'로 은폐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유곽 막사는 눈에 띄지 않게 지어졌고 관련 문서는 "기밀"로 관리되었다. 수감자들 사이에서 이곳은 시치미를 뚝 떼고 "모처(Sonderbau)"로 통했다. 종전 후에도 나치 과거사의 집단기억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유곽 막사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부터 철거되기 시작해 지금은 두 곳만 남아 있다. 최대 희생자이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유대인 집단에만 피해자 연구가 집중된 결과 주변부 희생자들(동성애자, 집시, 유전병자, 범죄자, 성매매 여성 등 사회 주변 집단)의 존재는 가려졌다. 수용소 시설을 기념관(Gedenkstätte)[1]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유곽의 존재는 의도적으로 묻혔다. 가령 구동독의 부헨발트 수용소 기념관에는 탐방객이 혹시 이에 관해 질문하거든 가능한 한 말을 아끼라는 안내 지침이 있었다. 이 일의 증인인 수용소 생존자 단체들 역시 유곽을 하찮게 치부하고 기억에서 배제했다. 기억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기 이 문제가 역사학의 관심사로 들어온 것은 1990년대 기억연구가 활성화되면서부터다. 그 배경에는 1980년대 여성사와 구술사의 성장이 있었다. 페미니즘 운동에 자극받은 여성사 연구자들은 성을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만들고 나치 연구에 젠더 범주를 추가했다. 전쟁을 둘러싼 여성의 경험이 발굴되었고 성을 매개로 한 폭력과 "잊힌" 소수 집단 피해자가 조명되었다. 2000년대 중반에 비로소 독일 사회가 이 문제에 호응한 것은 조직적 강간이 전쟁 무기로 사용된 구(舊)유고슬라비아와 르완다 내전의 참상이 알려지며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이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2007년 9월, 성(性) 노역 여성 수인 동원이 시작된 라벤스브뤽 구(舊) 여자수용소에서 열린 여름 대학은 <20~21세기 전시 강제성매매>를 주제로 나치 수용소의 성 강제노역, 동아시아 일본군‘위안부’, 동유럽 전시 강간을 나란히 다뤘다. 수용소 매춘소에 관한 로베르트 좀머(Robert Sommer)의 박사학위 논문 「수용소 유곽(Das KZ-Bordell)」이 2009년 출간됨으로써 이 주제는 나치 역사의 한 장으로 학문적 시민권을 획득했다. 강제수용소 성(性) 노역 문제를 최초로 제대로 제기한 크리스타 파울은 우연히 이 일을 알게 되었을 때 혼란을 느꼈다고 썼다. 독일 역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장으로 구석구석 파헤쳐졌다고 믿은 나치의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가 여전히 있었기 때문이다. 성매매를 금지하는 동시에 특수 목적 성매매의 포주 노릇을 수행한 나치의 이중성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이 문제가 오래도록 침묵에 갇혀있었던 이유는 첫째, 성매매 여성에 대한 인습적 편견과 성적 폭력에 대한 낮은 사회적 감수성이 전후 시대에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주변부 피해자들에게는 나치 피해자의 법적 지위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독은 정치범과 인종범죄 피해자만, 오스트리아는 정치범만을 인정했으며, 반파시즘 운동의 계승자를 자처한 동독 정부는 모든 책임 인정을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인종주의 성 정책의 결과인 나치 전시 성폭력은 유대인이 배제된 나치 범죄였다. 그 공론화를 위해 피해자 이미지를 일원화하는 홀로코스트 집단기억을 극복해야 했다. 겹쳐진 맥락에서 피해를 복원하는 일 지난 십여 년간 독일의 전시 성폭력 연구는 진전을 거듭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유럽에서 자행된 독일군의 성범죄를 넘어 마지막까지 터부시된 주제였던 연합군의 성폭력에까지 도달했다. 미리암 겝하르트의 『군인들이 왔을 때』(2015)는 성폭력의 가해자를 "붉은 군대" 뿐만 아니라 연합군 전체, 특히 미군으로 확대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전시 성폭력 문제에서는 전범국과 연합국 모두 자유롭지 못하며, 이 때문에 역사적 정의 담론의 국가적 한계가 지적된다. 독일 여성들의 전시 성폭력 피해를 역사적으로 다루는 일은 정치적으로 까다롭다. 독일인의 피해를 말함으로써 나치 범죄를 상대화하고 독일을 가해자가 아닌 희생자로 전도시킬 수 있다는 주장,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독일의 전쟁범죄를 부인하려는 이들에게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들 때문에 이 문제가 최후까지 침묵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를 이제는 꺼낼 수 있는 이유는 꾸준한 과거사 정리 노력으로 독일 사회가 더 다양한 소수집단 희생자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치 국가와 군대의 성폭력 피해자를 인정하고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작업은 느리게 진전하고 있다. 이는 이제 공공역사 차원에서 다뤄지고 있으며 피해자의 복권에도 이바지했다. 그러나 피해 사실에 대한 인정과 배상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인정과 배상이 이루어진다 해도 이제는 너무 늦어 상징적인 의미에 그친다. 그러나 강제노역 피해 배상 집행 완료 후 새롭게 밝혀진 과거사는 과거사 정리에는 종료가 없음을 독일 사회가 깨닫게 했다. 나치 시대의 역사 연구는 갱신되고 확장되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중이다. 주변부 피해자 배제의 오랜 역사는 극복되고 있지만, 지각한 정의는 피해자 집단들에 골고루 미치지 못했다. 국민국가를 초월한 정의의 공평함과 담론의 공정성 요구는 타당하지만 여전히 미래지향적 목표일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한 공론장의 논의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다. 각주 ^ 공공의 공간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을 목표로 역사적 장소의 맥락 정보를 제공하는 시설. 기념관이 위치하는 장소의 역사와 이곳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특별한 임무라는 점에서 박물관과 구분된다. 1945년 이래 독일에서 이 개념은 특히 나치 희생자를 기억하는 장소에 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