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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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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림의 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991년 8월 14일, 대한민국 생존자 최초로 김학순 님이 공개 증언하고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한 세대의 통념적 주기가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초국적 참조점이 된 동시에, 여전히 ‘현재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웹진 결은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11주년인 2022년을 맞아, 경계를 넘어 ‘위안부’ 역사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조명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온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로 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맞선 젊은 여성들,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비판적 담론을 생산하고 후속세대를 교육하는 연구자들, 전쟁과 제노사이드, 이민자와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해외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위안부’ 역사의 교훈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시죠.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지난 30여 년간 부산에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김문숙 회장이 2021년 10월 별세했다. 고(故) 김문숙 회장은 1991년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부산정대협)의 회장을 맡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알리고 피해자의 인권 회복을 위해 매진한 운동가이자 활동가이다. 일본이 ‘위안부’ 책임을 일부 인정한 관부재판을 이끌었던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2004년에 사재 1억 원을 들여 부산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개관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피해 사실과 관부재판 과정, 이외에 그가 피해자들과 함께 진행한 운동 과정 등이 담긴 기록 1000여 점이 전시된 역사관은 후속 세대를 위한 여성인권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김문숙 회장의 부재 이후 그가 실천해온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계승과 역사관의 지속적인 운영 방안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특히 역사관에 소장된 기록물의 목록과 DB가 없다는 점에서 소장 기록물 목록화 작업의 시급성이 학계에서 제기된 바 있다.[1] 이에 김문숙 회장의 뜻을 계승해 2021년부터 역사관을 운영한 김주현 관장은 2022년 4월에 역사관 소장 기록물의 목록화 사업을 위해 한국여성인권진흥원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소장자료를 재평가하고, 김문숙 회장이 수집한 자료를 여성인권과 평화를 위한 공공역사의 기록물로 추진”한다는 것이 사업의 주요 취지이다.[2] 이로 인해 오랜 기간 부산에서 민간차원에서 독자적으로 전개한 일본군‘위안부’ 운동과 개인이 수집한 자료가 정부 지원하에 공공역사의 기록물로 보존 및 활용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뿐 아니라 부산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운동을 주도한 김문숙의 삶과 생각, 또한 그를 통해 관찰된 피해생존자의 이야기도 공공 기록물로 공유될 예정이어서 향후 일본군‘위안부’ 운동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상황은 지난 30여 년간 진행되어온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틀과 방향성은 물론이고 운동의 담론 지형과 방법론에 대한 변화를 요구받는 실정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이라는 뚜렷한 목표”에 운동의 역량이 집중되었고, 그로 인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틀과 방향성이 불가피하게 축소된 측면이 있다.[3] 이는 가해자 일본에 법적 책임을 묻는 방향으로 운동의 틀이 강화되면서 피해자들을 침묵시킨 한국 사회의 여성 억압적 구조를 바꿔나가는 데 운동의 역량이 미치지 못했다는 지적으로 이어졌다.[4] 다른 한편,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현 정의기억연대)의 역할이 컸던 만큼 정대협의 경계 안팎을 오가며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이어진 시민운동이 주목받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5]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역동성을 입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복수의 문제의식과 실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로 귀결된다.[6] 게다가 생존자 없는 ‘위안부 운동’ 시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는 점에서 식민지 시기 전시 성폭력에서 비롯된 여성의 고통에 대한 기억을 이어가고, 더 많은 자료 발굴과 연구를 통해 미래 세대에게 널리 알리는 작업의 방향성과 방법론에 대한 성찰과 고민도 요구되고 있다. 김문숙 회장의 별세로 인해 야기된 부산정대협과 역사관의 변화 노력은 최근 새로운 전환의 시점에 직면해 있는 국내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몇 가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는 운동의 틀과 방향성,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김문숙 회장이 이끈 부산정대협은 정대협과 이름은 유사하지만, “정체성이나 이념적, 조직적 이력이나 지향”에 있어서 정대협과 동질적이지 않은 단체였다.[7] 부산정대협 연구를 진행한 문소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은 부산정대협의 정체성을 세 가지 특성으로 요약한다. 첫째, 부산의 지역적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과제로 삼는다는 점, 둘째,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하여 정대협과 공동대처를 지향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정대협과 이념적·조직적으로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부산정대협은 1991년 정신대 신고 전화 설치, 1992년부터 약 10년간 관부재판 추진, 2004년 ‘민족과 여성 역사관’ 개관, 2016년 평화의 소녀상 건립 등 일본군‘위안부’ 관련 주요 사업을 진행해왔다. 이 사업들은 정대협이 제시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7가지 요구사항에 포함된 활동들이다. 즉, 정대협의 ‘위안부문제 공동대처’라는 명분에는 부합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겹치지만 분리되어 차이성 내지 혼종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소정의 설명이다.[8] 부산정대협의 활동이 정대협의 활동과 유사하지만, 다르거나 혼종적이었다는 점은 국내 ‘위안부’ 운동의 동질성을 드러내면서도 중앙과 지방, 정대협과 지방 시민사회 조직 간의 균열과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유사하지만, 무엇이 또는 누가, 왜 부산정대협과 정대협 사이의 균열과 차이를 만들어냈는가? 또한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균열과 차이가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전국 또는 지역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부산정대협과 김문숙 회장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지난 30여 년간 진행된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다양한 문제의식과 실천 방법을 찾아내는 데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두 번째로, 김문숙 회장의 별세는 이미 성큼 다가와 있는 생존자 없는 일본군‘위안부’ 시대에 이어 초기 또는 제1세대 운동가 없는 ‘위안부’ 운동 시대 또한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1990년 전후 시점부터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뛰어든 활동가들에게도 고령화는 진행되고 있다. 제1세대 운동가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증언을 채록하거나 일상에서 그들과 친밀한 소통을 해왔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과 삶의 궤적, 더불어 피해자의 내면과 가족·사회적 관계 등에 대해 특별한 이해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일본군‘위안부’운동을 주도했던 운동가이자 또한 피해자들을 지원했던 활동가라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들의 삶을 관통한 피해 고통과 생애 경험을 대신 말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피해자들과 함께 경험한 사적 시간과 생활 공간의 재구성을 통해 피해자들의 개인적 고통의 사회적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이 지속되는 조건을 살펴보며 역사적으로 맥락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9] 제1세대 운동가들은 “가부장적 차별 사회 속의 젠더 문제를 비롯해 계급, 민족, 한반도의 분단체제와 냉전질서 등이 교차하는 현실”을 살아낸 주체들로서 포스트 식민시대에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간 피해자들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10] 따라서 피해자가 일생 동안 겪은 고통을 ‘역사’로 서술하는 작업에 초기 또는 제1세대 운동가들의 증언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김문숙 회장의 소장자료에는 본인이 직접 운영한 부산정대협과 여러 여성단체 관련 자료를 비롯해 피해자들의 삶과 관부재판 과정이 담긴 기록들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군‘위안부’ 운동 관점에서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전시자료를 살펴봤을 때, 관부재판 과정에서 일본 시민사회와 전문가들과의 연대 활동이 두드러진다. 실질적으로, 운동 초기 단계부터 김문숙 회장은 수차례 일본 방문과 일본 피해자 및 피해자 지원단체, 전문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출판 작업을 진행했다. 또한 그가 설립한 여성단체의 여성 성폭력 피해자 구제 및 보호 지원체계 구축 과정에 일본 여성단체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부산에서 진행된 초기 일본군‘위안부’ 지원 운동과 관부재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 활동 및 그 이후의 이야기가 전시자료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같은 맥락에서,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전시자료를 지역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전시물이나 자료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기존 전시자료에는 재판을 위해 시모노세키에 배편으로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부산이 위치한다는 점이나 일본군‘위안부’들의 삶의 공간이자 운동의 공간적 배경으로 부산이 등장한다. 하지만 부산 거주 피해자들의 생활 공간이나 개인적인 소장품, 유품 등의 전시를 통해 지역민으로서 그들의 삶의 조건이나 현실을 보여주는 전시자료는 거의 없다. 또한 그들을 지원했던 활동가들과의 상호교류를 보여줌으로써 부산의 피해자들이 누구와 어떤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운동가로 변모했는지, 또는 운동에 참여하지 않을 때 부산 ‘아지매’이자 ‘할매’로서 어떤 일상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자료가 부재하다. 앞서 기술했듯이, 지역민으로서 그들의 삶의 공간과 생활 공동체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들은 일상사와 생활사적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의 삶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진행 중인 김문숙 회장의 수집자료 정리 과정에서 부산 출신 피해자들의 일상사와 생활사를 보여주는 유용한 자료가 발견되기를 희망해본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의 공간과 생활 조건, 사회적 관계 등에 초점을 맞춘 자료나 연구 결과물이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부산을 포함한 경남지역에 일본군‘위안부’로 등록된 피해자 수가 가장 많다고는 하지만, 실제 지역에 초점을 맞춰서 일본군‘위안부’ 동원 체제나 동원 과정과 귀환, 귀환 후 생활에서 드러난 특성 등을 고찰한 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도 지적된 바 있다.[11] 지역과 지역성에 초점을 맞춘 자료와 연구 부족 문제는 현재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건립을 추진 중인 경상남도가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김문숙 회장의 별세와 부산 ‘민족과 여성 역사관’ 소장자료 목록화 및 기획 전시 사업을 계기로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부산과 일본 시민사회 간의 연대 활동 등에 대한 전반적인 재평가와 연구가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이는 획일화되고 전형적인 이야기 뒤에 숨겨진 지역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숨겨진 역동성을 찾아내는 일이자, 일본군‘위안부’ 연구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각주 ^ 남영주,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기관의 기억재현과 기억의 확장: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사례를 중심으로”, 『인문사회 21』, 2017, pp.129-148. p.139. ^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부산 ‘민족과 여성 역사관’ 소장자료, 여성인권을 위한 공공역사 기록물로 재탄생: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민족과 여성 역사관 소장자료 관리·보존을 위한 업무협약(MOU) 체결”, 보도자료, 2022.4.29. ^ 이지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 초기 증언의 교차적 듣기: 『조선인 군대 위안부(朝鮮人軍隊慰安婦)』(1992)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2(1993, 1997)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제 42호, 2021, pp.61-96. p.65. ^ 이유미, “시론-위안부 문제와 정의연 운동의 쟁점”, 『사회진보연대』 172호, 2020, p.-126. p.65. ^ 이지은, 2021, p.65. ^ 앞 저자, p.65. ^ 문소정, “부산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사이성에 관한 연구: 부산정대협을 중심으로”, 『항도부산』, 2021, 제 41호, pp.471~499. p.483. ^ 앞 저자, p.481. ^ 신동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연구의 새로운 방향 모색: 식민지 시대의 피해자에서 포스트 콜로니얼 시대 여성으로의 전환”, 2022, pp.5-9. p.7 ^ 앞 저자, p.9. ^ 강정숙, “경상남도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 <경상남도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건립 추진방안 도민 소통 포럼> 자료집, 2021, pp.16-22.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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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편집회의 2부 - '위안부' 문제로 대중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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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명아 (동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김헌주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 소현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 여순주 ((전)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 / 윤명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팀장) / 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 임경화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연구교수) /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 / 정용숙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 / 허윤 (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편집회의 1부 -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편집회의 2부 - '위안부' 문제로 대중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위안부' 문제로 대중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소현숙 말씀해주신 것처럼 연구자와 피해자와의 관계라든지, 대중매체에서의 ‘위안부’의 재현, 그리고 내셔널리즘과 페미니즘 사이의 긴장, 자발성과 동원의 문제 등 굉장히 다양한 논점들이 제기되었다. 굉장히 논쟁적인 주제들이고 앞으로 웹진<결>에서 이런 주제들을 다루게 될 것 같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웹진 <결>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 만드는 웹진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다른 '위안부' 지원단체가 만드는 웹진과는 차별성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우선은 연구 내용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필요가 있겠지만, 어쨌든 대중들과 만나는 작업이기 때문에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역할들을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용숙 '위안부' 문제는 미디어에서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다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있는 것들이 표면적인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도의 깊이가 각기 다르다. 웹진 <결>이 타깃으로 삼는 ‘대중’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가? 소현숙 연구소에서 처음 웹진 사업을 기획할 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더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정보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웹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연구자들이 이 웹진을 통해서 관련 주제의 새로운 연구 경향을 파악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콘텐츠들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헌주 어차피 대중적으로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관련 전공자나 지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대중이 웹진 <결>을 찾으리라 생각한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웹진 <결>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레퍼런스다. 예를 들면 유사 역사학이 유행했을 때, 그 논쟁을 진화하는 데 주요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위키피디아에 정리된 레퍼런스들이었다. 누군가 유사 역사학을 비판한 전문가의 글을 찾아서 정리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웹진의 글들은 '위안부' 문제의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리라 생각한다. 윤명숙 웹진의 독자를 상정하여 크게 둘로 나눈다면, 하나는 연구자나 관심이 많거나 지적 수준이 높은 대중들이고 또 하나는 상당수가 학생들이 될 것이라고 본다. 전자는 지금껏 대부분 출간 서적에서 정보를 얻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서 가르친 경험에서 말하자면, 학생들의 경우는 책보다는 주로 블로그나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같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습득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웹진 <결>이 신경 써서 상대할 주 타깃 중 하나를 대학생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다만, 문장은 중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평이한 문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연구자지만 연구자들의 글쓰기는 대부분 딱딱하고 어려운 편이다. 웹진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은 있으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전제하고 중학생 정도가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함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연구 논문이나 담론 논의와 같이 학문적인 분야까지 평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권명아 이미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상당히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90년대부터 이 문제를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로 다루는 연구가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이 '위안부'와 관련된 연구가 부족하다든지, 너무 민족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한다. 모든 연구가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담론을 형성하는 통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예를 들면 '위안부' 문제는 일본에서 아주 오랫동안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혐오발언)의 원재료로 사용되어 왔다. 헤이트 스피치로 가공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내러티브가 따로 있는 것이다. 최근에도 일본에서 '위안부'와 강제징용 재판 두 개의 주제를 이야기하는 헤이트 스피치 책이 출간됐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버전으로 갱신되고 있다. 소위 혐한 출판물이라고 하는 책들이 대중적인 버전으로 나오고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위안부'에 대한 올바른 정보들이 많이 부족하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책보다는 인터넷에서 이야기가 많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에 대항할 수 있는 '위안부'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정보들이 대개는 비전문적인 채널인 경우가 많아서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고, 일본 우익의 헤이트 스피치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짚어줄 수 있는 미디어가 너무 절실하다. 대항 내러티브는 훨씬 더 전문적이고, 기존의 내러티브의 맹점을 잘 짚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올해 일본에서 출간된 헤이트 스피치 책에서도 '한국이야말로 성매매 천국’이라고 나온다. "이런 한국이 '위안부' 동원에 대해 문제 제기할 자격이 있느냐”고 써놨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족주의 교육은 단일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인종차별이다. UN에서도 한국의 민족주의 교육을 철폐해야 한다고 권고를 받았다”라면서 “일본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문제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일본의) 연구자들도 '위안부' 동원이라는 것이 국가에 의한 성 관리와 전시 성폭력이 결합한 (보편적인 문제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2차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도 그랬다면서 말이다. 이런 교묘한 내러티브에 대항하는 내러티브를 만들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누구도 하고 있지 않다. 조경희 자꾸 일본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웹진 <결>이 향후 다언어로 발신되리라 생각해서 말씀드린다. 90년대 탈냉전기가 ‘증언의 시대’가 된 것은 동아시아에서는 특히 '위안부' 피해자들의 커밍아웃과 증언의 힘이 크다. 이것은 ‘경험’이나 ‘기억’ 혹은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학술적 경향이나 담론 전반에 반영되었고 이에 대한 반감이나 혐오는 어느 선진국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특히 일본의 젊은 대중의 경우 ‘착한 이야기’를 하는 리버럴 세력을 기득권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더욱 쉽게 역사 수정주의적인 담론에 끌리게 된다. 권명아 선생님이 지적하셨듯이 혐오 세력들은 점점 교묘해지고 있다. 그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재일조선인을 혐오하고 LGBT(성소수자) 차별도 한다. 행동으로까지 옮긴 사람은 소수지만, 담론으로는 지속적인 대중적 영향력을 갖게 된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이 웹진 <결>의 주된 타깃은 아니지만, 탈진실이나 반지성이라 말하는 시대에 대한 상상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가 이미 그만큼 담론투쟁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윤명숙 구체적인 관점이나 담론 형성 등에 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데, 나는 이에 더해 역사 사실을 어떻게 조화롭게 다루는 것이 좋을지 말하고 싶다. 먼저 역사 사실, 즉 팩트도 중요하고, 관점도 중요하다. 중요한 건 웹진에서 팩트를 통해서 다양한 관점이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운동의 경우에는 해결이라고 하는 절명의 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훨씬 더 민족주의에 치우쳐서 바라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 교사들의 경험을 빌려 말하자면, 학교 교육에서도 기존 교재를 가지고 수업을 하다 보면 ‘일본놈 나쁜 놈’이라는 식으로 끝나기 쉬운 커리큘럼이 많았다고 한다. 앞으로 웹진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조금씩 극복할 수 있는 내용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전공을 가진 편집위원들이 모인 만큼, 웹진에서 각자의 문제의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팩트냐 관점이냐가 아니라, 팩트는 팩트대로 중심에 놓고, 팩트를 통해서 다양한 관점이 확장될 수 있는 방식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웹진 <결>에서 다뤘으면 하는 콘텐츠 이선이 2015년 12월 28일 한일 양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합의를 했다. “불가역적이고 최종적 해결”이라고 한국 정부가 선언했다. 그 선언 자체가 엄청난 충격이었다. 피해자가 명백히 있는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는 어쩌면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만으로는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과정에서 비판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고, 이 문제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다양한 시사점들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웹진 <결>에서 이러한 고민을 잘 담아냈으면 좋겠다. 김헌주 언론에서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다룰 필요도 있다. 국민기금 문제라든가 일본 내에서 있었던 고노담화라든가. 연구자 사이에서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문제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위안부' 프로젝트를 하면서 한일 언론에서 기사들을 뽑고 정리하는 작업을 했는데, 그것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한국 언론은 한겨레신문부터 조선일보까지 모조리 일본의 우익 담론만 보도한다. 그게 언론에서 소비하기 좋은 거다. 일본 내부의 우익 담론만 보도하고 리버럴, 진보계열 등의 다양한 주장들이 언론을 통해서 전달되지 않고 있다. 국회 속기록도 정리한 적이 있는데, 일본 내의 중도정당이나 좌파정당에서는 아베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런 목소리들이 국내에서는 전혀 소개되지 않는다. 대중들은 언론에서 제공하는 기사들을 통해서 '위안부'에 대처하는 일본의 상을 형성하게 되는데, 일본 내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웹진 <결>에서 보여줄 필요가 있다. 권명아 그래서 일본을 포함한 해외의 일본군'위안부' 지원단체나 기관을 소개하는 콘텐츠가 필요하다. 일본의 많은 진보적인 단체와 학자들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고 연구도 상당하다. 그런 것들이 한국에 잘 소개가 되지 않아서 국내에서 바라보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의견이 다 뭉뚱그려져 있다. 여순주 국내에도 관련된 단체들이 많이 있다. 아무래도 '위안부'와 관련된 활동의 중심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가지고 있어 그 위주로 소개되면서 다른 지방에 있는 단체의 활동은 보도가 잘 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웹진 <결>이 국내의 다양한 단체를 소개하고 연대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건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작년에 광주에서 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이 진행돼서 4년 만에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직접적으로 '위안부'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제 때 강제노동과 관련된 부분이라 웹진 <결>에서 소개해주면 좋을 것 같다. 당시에 신문에 딱 한 면만 나오고 추가로 보도가 되지를 않더라. 그런 것도 연결해서 다뤄주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윤명숙 여순주 선생님 발언 중에 여자 근로정신대는 '위안부'와 무관하지 않다. 간단하게는 1990년대 초반까지도 한국에서는 '위안부'를 정신대로 호칭했다. 또 식민시기 조선에서 업자들이 농촌에서 딸들이 근로정신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개해주는 공장에 가면 된다고 속이는 등 '위안부' 동원에 취업 사기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연구소는 '위안부' 문제와 직접 관련된 자료만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소·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는 모두 수집해야 할 것이다. '위안부' 동원에 활용된 취업 사기를 예로 들면, 당시 식민지기 조선의 여공 실태를 알아야 하니 여공 관련 자료 소개나 연구 성과를 웹진 <결>을 통해 국내외 연구자나 대중에게 제공하면 좋을 것이다. 정용숙 돌발적으로 외교 현안 같은 것으로 '위안부' 문제가 소환될 때, 그 불쑥 튀어나온 사건 밑에 있는 저간의 과정과 맥락을 전문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은 잘 모른다. 예전에 들었더라도 꾸준히 관심 두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그래서 상황 파악을 표면적으로밖에 못 하고, 같은 얘기 반복하고, 일회성 이슈 소비로 끝나고. 그래서 그런 걸 짚어주는 역할을 웹진 <결>이 해야 할 것 같다. 웹진이 정기적으로 나온다면 선제적으로 이슈를 다뤄줘도 좋겠다. 예를 들어 8월이라면 '위안부' 문제 관련해서 그달에 있었거나 기억해야 할 일들을 다룬다든가. 시사적인 면에도 관심을 기울이면 좋을 것 같다. 허윤 저의 지인이 BTS 팬이 되어서 ARMY(BTS 팬클럽) 활동을 시작했는데, BTS의 원폭 티셔츠 사건 때 며칠 밤을 새우면서 일본과 미국의 혐한들과 싸웠다. BTS를 파시스트로 프레이밍 한 것은 혐한 세력이 만든 의도적인 비난이라는 맥락에 놓여있는 것이라면서. 이에 대항할 자료를 찾기 위해서 영미권의 자료들을 검색하는데, 일본군'위안부'나 원폭 문제와 조선인의 관계 등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거다. 결국, ARMY들이 선택한 방식은 원폭 피해자 협회와 '위안부' 할머니에게 기부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팬덤)는 역사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 나가도록 노력하겠다." 이런 방식으로 대응해 나가더라. 적극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공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것처럼 웹진 <결>에는 일종의 대중적 이슈 파이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제가 너무 어렵고 문턱이 높으면 ‘웹진’이라고 하는 형식으로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한국 사회가 상식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전형화된 서사를 좀 풍성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오히려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나는 이미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태도인 것 같다. 그런 고정관념을 깨면서 담론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소현숙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느낀 건데, 학생들이 이 문제를 잘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이 문제는 굉장히 쉬운 문제, 일본이 사죄하면 끝나는 문제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강의를 통해 이 문제가 사실은 쉽지 않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되면 꽤 놀라는 것 같다. 저는 그런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를 비판하고 헤이트 스피치에 대항하는 근거 담론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웹진이 해야겠지만, 또 한편에서는 일본군은 왜 여성을 성적인 도구로 만들어야 했었는지, 그 역사적 경험은 왜 한국군 위안소, 미군 기지촌의 역사로 해방 후까지 이어졌는지, 왜 피해자들은 전후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 일본인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이 문제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등에 대해서 한 번쯤 자기 문제로 고민해 볼 수 있는 콘텐츠들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조경희 저는 작년부터 신입생들 대상으로 세미나 수업도 하고 ‘인권과 평화’라는 과목도 맡았는데, 특히 작년에는 미투 때문에 여학생들은 '위안부' 문제를 젠더 폭력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았다. 한편에서 식민주의나 재일조선인 문제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관심이 많지 않았고, 선생님들이 말씀하신 대로 과거사 문제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사죄를 끌어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거꾸로 보면 '위안부' 문제만큼 다양한 문제에 걸친 사안도 없다. 계급, 여성폭력, 동원체제, 미 군정, 반공주의, 민주화, 탈냉전 등 하나하나 특집으로 꾸며볼 수 있겠다. 다만 어떤 점에 초점을 둬도 '위안부' 문제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면 여전히 피해자들의 증언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원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웹진에서 직접 증언을 다룰 수 없어도 대중들이 증언을 접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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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자료해제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名簿) 종류와 연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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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에 수록된 이들은 누구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역사적 과제로 국내에서 논의된 시점은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세미나 '여성과 관광문화'(1988년)부터입니다. 이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조직되었고(1990년), 1991년 8월 14일엔 김학순의 증언 등이 이어지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활동의 장이 한국에서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유엔을 비롯한 전 세계로 확대되었습니다.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문제에 대한 연구주제도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다양한 연구주제 중 일본군 '위안부' 관련 명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작년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에서 여러 명의 연구자가 명부 이야기를 다룬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2019)을 출판했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더 많이 알고 싶다면 위의 책을 참고해 주십시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몇 가지 용어를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첫 번째는 명부(名簿)와 명단(名單)이란 용어입니다. 이 두 용어는 함께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명단은 '어떤 일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표'이고, 명부는 '어떤 일에 관련된 사람의 이름, 주소, 직업 따위를 적어 놓은 장부'를 뜻합니다. 명단이 다소 개별적이고 단순한 이름표라면 명부는 이보다 더 체계적이고 묵직한 느낌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위안부' 관련 명부라는 표현입니다. 이 글에서는 '위안부' 관련 명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문건 작성자들이 '위안부' 명부라는 표현을 일괄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연구자들이 발굴한 명부 중에서 '위안부' 명부라고 명명할 수 있는 문건은 제한적입니다. 현재 발굴된 명부 중에 '위안부'만을 대상으로 작성된 문건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명부가 작성된 과정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명부에 기록된 모든 여성을 '위안부'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일본의 패전후 조선으로 귀환할 당시에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에서 만들어진 명부에는 귀환자 전원의 명단이 수록되었기에, 치밀한 검토과정 없이 이를 '위안부' 관련 명부라고 한다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한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고, 작성 경위를 파악할 수 있는 명부를 '위안부' 관련 명부로 보고 소개합니다. '위안부' 관련 명부들은 일련의 의도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의도와 필요가 각기 달랐기에 명부의 명칭은 작성 주체에 따라 제각각입니다. 아래 표는 이 글에서 소개할 명부를 작성 주체와 장소, 그리고 시기를 중심으로 구분해 정리한 것입니다. 시기를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전쟁 중에 작성된 명부와 일본 패전 뒤에 작성된 명부의 목적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고 : 연도를 기록한 명부(명단)를 제외하고는 일본의 패전 전후에 만들어진 명단. 전쟁 중 지역별 전세 차이가 있어 버마, 필리핀 등지 명부는 공식적인 일본 항복 이전에 만들어짐. 1. 주더란 편(朱德蘭 編), 『대만 ‘위안부’ 조사와 연구 자료집(臺灣慰安婦調査と硏究資料集)』, 타이페이 중앙 연구원 종산 인문사회과학연구원(臺北中央硏究院中山人文社會科學硏究所),1999. 56쪽(수록자료는 타이완성문헌위원회에 소장된 타이완척식주식회사자료군에서 발굴한 자료).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 편,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최종길 논문, 284쪽). 2.『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쑤즈량·천리페이, 윤명숙 논문)과 박정애 논문(「중국 저장성(折江省) 진화(金華)의 위안소와 조선인 '위안부'」, 『페미니즘연구』, 2017.4. 3. 민족문제연구소 사본 소장. 중국 상하이 명부에서는 피해자 한 명만 확인되었다 4. 위와 동일 5. 오키나와현립 도서관 소장자료. 강정숙,「일제 말기 오키나와 다이토(大東)제도의 조선인 군 위안부들」, 『한국민족운동사연구』4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4. 6.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소장자료. RG 313 Entry 1352 Box 1967 7. 일로일로 환자요양소, [성병 검사 성적의 건 통보], 여성을위한아시아평화국민기금 편(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國民基金 編),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관계자료집성(關係資料集成) 3권, 69쪽 8. 연합군작성 포로명부(NARA 소장자료, 한국 국가기록원 복사본 소장.) 9. 타이의 연합군 및 타이군에 의해 작성된 수용소 명부(타이국립기록원 소장) 10. 버마 미치나 인도 레도 수용소. 정진성편, 『일본군'위안부'관계미국자료』3, 127쪽 11.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강제동원명부해제집 1』 231, 242-3. 원자료는 NARA 소장자료, 국사편찬위원회에 복사본 소장 12.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 2009, 31쪽, 40쪽 13. 남방조선출신자명부 : 위 책, 44쪽 명부가 보여주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성격 산야(三亞)방면행 특요원 명부<그림 1>[1]는 1939년 5월 일본 정부 국책회사인 타이완척식주식회사(이하 타이완척식)가 생산한 보고서[2] 자료 중의 일부입니다. 특요원은 바로 '위안부'를 지칭합니다. 특요원 명부를 통해 이 지역의 일본군 '위안부'가 대부분 대만인, 일본인, 조선인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명부와 함께 나온 자료에선 도항자(渡航者, 배나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이동하는 자-편집자) 명부, 인명표라는 명칭도 쓰고 있습니다. 특요원 명부가 포함되어 있는 희귀한 도항자 명부인 셈이지요. 특요원 명부와 함께 발굴된 자료는 특히 중요한데 일본 해군과 총독부, 타이완척식, 타이완척식의 자회사인 후다이(福大)공사 등이 군 위안소 건축과 '위안부' 동원에 관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면 일본 해군은 총독부를 거쳐 타이완척식에 중국 하이난도(海南島)의 해군 위안소 건축과 군 '위안부' 동원을 요청합니다. 타이완척식은 자회사인 후다이공사를 통해 위안소 건축 완료 후 해군으로부터 대금을 받기로 하고 '위안부'로 삼을 여성들을 동원했습니다. 게다가 이 자료 더미 속에는 당시 동원된 여성 수십 명의 명단이 있습니다. 일본의 우파 학자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도 위안소 경영을 위한 비용은 일본군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었던 '임시군사비'에서 나왔다고 인정한 바 있습니다. 오키나와 다이토 제도(大東諸島) 4중대 진중일지 <그림 2>에 수록된 조선인 여성의 수는 적지만, 이 명단이 기록된 진중일지에는 다이토 제도에 배치된 '위안부'들의 이름, 다이토 제도로 오기까지의 이동 경로, 그리고 '위안부'들이 전쟁 중에 처한 상황 등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진중일지는 패전이 임박하자 관련 기록물 소각을 명한 일본군 상부의 지시사항까지 적힌 상태로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당시 기록물 소각 명령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 4중대 중대장의 결단 덕분이죠. 일본군이 이와 같은 기록물을 폐기하지 않았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진중일지와 유사한 명부들을 발굴해 '위안부' 피해 실태를 비롯한 더 많은 사실을 밝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 일본군은 '위안부' 명부를 작성하였을까 위에서 언급한 도항자 명부, 진중일지 외에도 여성들이 위안소 소재지에 도착한 이후 그 지역 일본군이 작성하거나 위안소 업자가 작성해 일본군에게 제출한 '위안부' 명부들이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군정감부가 낸 「군정 규정집」 제3호[3](1943.11.11.)에는 '지방장관은 위안시설 및 여관영업자 명부와 가업부(稼業婦, '위안부'를 지칭-필자) 명부를 비치하고 이동이 있을 때마다 정리할 것', '가업부는 취업과 폐업 시에도 관할 지방장관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은 왜 '위안부' 명부의 작성과 관리를 중시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군 기밀 보안 등의 이유로 전쟁터에서 일본군 관련 시설에 있는 이들의 신분을 확인한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일본군이 여성들을 전쟁터에 동원한 목적은 군인의 성병 예방과 성욕 해결 등이었으므로 '위안부'로 동원한 여성들을 상대로 성병 검사를 하고 관리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필리핀의 파나이섬 성병 검사 결과를 보고한 성병 검사 성적(검미성적)에 관한 건 통보(1942.6) <그림 3>라는 공문을 살펴보겠습니다. 파나이섬의 환자요양소나 군정 의료기관에서는 지역 내 위안소 여성 수십 명을 대상으로 일정 기간마다 성병 유무를 진단하여 그 결과를 한 명 한 명 정리해 상부 기관에 보고했습니다. 성병 검사 상태 보고가 목적이므로 이름, (나이), 병 상태 정도만 적은 간단한 것이지만 그 지역 관할 군 혹은 군정에서는 이를 일상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공문은 파나이섬에서만 작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림3>은 발굴된 자료 중 중요한 자료입니다. 안타깝게도 일본 측이 원본의 이름 부분을 검게 지워 지금으로서는 조선인 여부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명부의 발굴을 통해 이 지역 외에도 각지에서 성병 검사와 관련한 명부들이 생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명부 분석을 통해 영웅으로 둔갑한 위안소 업자를 밝혀내다 중국에서 발굴된 저장성의 진화계림회 명부는 일본군에게 점령된 중국 진화 지역에 거주한 조선인회가 만든 명부입니다. 이 명부는 1945년 1월에 진화현의 한 관리가 쟝이밍(將一嗚) 지사에게 제출한 것으로, 조선인 '위안부'들의 정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본 패전 이전의 기록이어서 당시 저장성 지역 상황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진화계림회 명부와 관련하여 제가 언급하고 싶은 지점은 '위안부'보다 위안소 업자들의 직종 변경이나 장소이동이 상당히 잦다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귀환하는 조선인 남성들의 경력을 다룬 명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조선인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했던 일제의 인력이용 방식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주목할 것은 당시 위안소 업자였던 남성이 미담의 주인공으로 소개된 사례입니다. 중국 상하이 한국부녀공제회 회장이었던 공돈은 '위안부' 들을 구제한 영웅으로 신문에 등장합니다(「일본에 의해 끌려간 조선여성들이 상해 동포들에게 구제」, 『서울신문』, 1946.5.12.). 하지만 그는 1942년에는 위안소를 경영한 업자였음이 명부(1942, 『재지반도인인명록』[4])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앞으로의 명부 연구가 만들어낼 가능성 필리핀·축제도(Chuuk Islands, 통칭 트럭섬)·일본 오키나와·버마·타이의 연합군이 작성한 명부 중 필리핀 포로수용소 명부<그림4>는 비교적 자세한 개인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개인 신상만이 아니라 수용소 간 이동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입니다. 이에 비해 남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 축제도 명부, 일본 오키나와 명부는 주소와 이름이 적혀 있을 뿐입니다. 버마, 타이 명부에는 이름만 있을 뿐 주소도 없고, 이름도 창씨개명 이후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단편적인 명부를 도대체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요.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한 가지 구명줄이 있습니다. 바로 이미 발간된 피해자들의 증언집입니다. 한국정신대연구회(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지역단체 등에서 만든 증언집만 10권 이상입니다. 북측에서 만든 증언집도 있습니다. 이러한 증언집의 내용에 기초하여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과거 점에 불과하던 명부 속 피해자들의 존재가 선과 면으로 연결되어 입체적 존재로 여러분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역사 현실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강화해야 단순하지 않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다면성을 이해하고 해결 방향도 제대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초기에는 명부를 주로 한국인 생존자를 찾고, 당시 일본군의 책임을 묻는 용도에 국한해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보다 자료 상황이 나아졌습니다. 명부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할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이 국내외에 발굴되어 있기 때문이죠.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을 토대로 ▲명부를 작성한 일본군, ▲연합군, ▲명부 작성에 관여한 현지인의 다양한 역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민족별 대응 방식의 차이, ▲위안소 내 힘의 관계, ▲젠더 문제 등 다양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명부 연구에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 많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책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2019)에서 좀더 자세하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다음 글에서는 인도네시아에 있던 조선인 여성들의 정보가 기록된 유수(留守)명부와 복원명부에 대해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Credit 편집 : 현승인, 변지은 교정/교열 : 금혜지 감수 : 윤명숙, 김소라 일러스트 : 백정미 각주 ^ 타이완에서 하이난도(海南島)으로 건너간 여성명단 중 일부.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78쪽(최종길, 도항자 인명표)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 2019, 75~76쪽. 타이완척식의 사업과장이 총독부 임시 남지조사국 이사장에게 보낸 1939년 5월 9일자 보고서는 “해군무관실이 귀국(타이완총독부-인용자)을 통해 조회한 건에 관하여 별지대로 수배를 마치”고 “2. 특요원(싼야 방면행) ㈎ 10인 1조(5월 23일 金令丸로 출항 예정) ㈏15인 1조(현재 수배 중)”를 하이난도로 도항시킬 예정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용한 타이완척식의 자료에는 '위안부' 관련 명부가 4개 존재한다. ^ 마라이군정감(馬來軍政監部), 군정규정집(軍政規定集) 3호: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國民基金), 『 정부조사(政府調査)「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 관계자료집성(關係資料集成)3』, 龍溪書舍, 1997, 25쪽. ^ 백천수남(白川秀男) 편, 『재지반도인명록(在支半島人名錄)』, 백천야행(白川洋行), 1941, 1942. 황선익, 「해방 후 중국 上海지역 일본군 ‘위안부’의 집단수용과 귀환」, 『한국독립운동사연구』54, 2016.5,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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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3) 강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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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숙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중이며 한국근대 여성사를 전공하였다. 정신대연구소,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 규명과 더불어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의 증언 녹취 작업을 진행하는 등 초창기 ‘위안부’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주요 논저로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 조사』, 「제2차 세계대전기 인도네시아 팔렘방으로 동원된 조선인의 귀환과정에 관한 연구」 「일본군성노예제문제와 관련한 남북교류와 북측의 대응」, 「일본군 위안소 업자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Q. 강정숙 선생님을 잘 모르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 독자분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도 말씀해주세요. 저는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사(농민운동)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여성사를 하면서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느껴 1992년부터 한국정신대연구회에 들어가 조사연구하기 시작하여,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2010년에는 <일본군'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에도 이 주제를 비롯하여 여성사와 관련된 연구활동 등을 해왔습니다. 제가 처음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건 고등학교 때 읽은 소설책을 통해서였어요. 집에 ‘위안부’를 소재로 쓴 책이 한 권 있었는데, 제목도 기억이 안 나요. 일본 책이 번역되어 들어왔던 것 같아요. 여성들을 굉장히 성적 대상으로 삼아서 쓴 책이었어요. 읽고 굉장히 불쾌해서 태워버렸어요. 아버지 책인데 그리 중요한 책은 아닌 것 같아서.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부터예요. 90년대에 『한국여성사 근대편』을 쓸 때 ‘위안부’ 부분을 제가 쓰게 되면서 이 문제가 민족, 계급, 젠더 등 다양한 문제들이 농축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가 마침 ‘위안부’ 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였어요. 1992년 3월에 제가 한국정신대연구회(이후 한국정신대연구소)에 가입했거든요. 원래 한국여성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있던 연구자 한 분이 한국정신대연구회에 역사연구자가 부족하니 저에게 같이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파견 나간 기분으로 정신대연구회로 갔죠. 그런데 그게 잠시가 안 되더군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피해자 할머니들과 만나고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Q. ‘위안부’ 문제 연구 중 선생님께서 가장 주목하고자 했던 부분은 어떤 것이었나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부정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근거 자료를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같이 할머니 이름이 적혀 있는 수용소 명부, 귀환자 명부 같은 것을 저의 연구 주제로 삼았죠. 이러한 명부들은 당시 현장의 미묘한 부분들을 보여주는 아주 귀중한 자료죠. 그렇지만 제가 발굴했던 명단들은 엄밀히 말하면 ‘위안부’ 명단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명단에 있는 할머니들이 진짜 ‘위안부’였는지 아닌지는 제가 증명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직접 할머니를 찾아가 증언을 듣거나, 그 외의 군인 군속 등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교차 조사를 했죠. 그래서 결국 사실이라고 확인되었을 때 연구자로서 보람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리고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에도 관심을 가졌어요. ‘강제적’인 동원이라는 말도 고민해봐야 해요. 만약 ‘강제’가 ‘물리적인 강제’만을 뜻하는 것이라면, 저는 ‘강제’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아요. 물리적인 강제 동원도 있었지만, 물리적인 강제 없이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것도 있단 말이에요. 구조적인 측면에서 ‘위안부’ 제도는 공창제와 다름이 없어요. 공창제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강제성과 폭력성이 있잖아요. 강제라는 의미를 폭넓게 이해해야 해요. 이 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과제라고 봐요. 지금 우리 사회는 ‘위안부’ 제도와 공창제를 구분하는 데 관심이 있지, 서로 연동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잘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이걸 대중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한데 자꾸 뒤로 미뤄요. 저의 바람이자 과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일본 욕만 하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문제의식은 무엇이고, 어떤 도덕적 기준을 가져야 하는지 논의를 확장하는 거예요. Q. 선생님께서 처음 만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누구인가요? 당시 구술했던 정황들이 궁금한데요. 그때가 할머니들께서 당신들의 존재를 이제 막 드러내는 시기였기 때문에 취재 형식의 짧은 인터뷰를 참 많이 하셨어요. 그러다 증언집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죠. 당시 저는 강덕경 할머니와 박옥련 할머니를 만났어요. 증언집 1집에 이야기들이 들어있죠. 당시 제 나이가 35, 6세 정도 됐을 때예요. 할머니 눈에는 당시의 제가 완전 새댁이었어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말을 가려서 하시더라고요.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으신 거예요. 할머니들이 봤을 때 저는 딸뻘이고 세상의 쓰라린 맛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하신 거죠. 그리고 당시는 국민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관한 관심이 높았던 시기잖아요. 관심이 너무 지나치면 사실 연구하기가 쉽지가 않은 부분이 있어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안부'의 이미지가 있었어요. '처녀'여야 하고,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물리적 폭력을 당해야 하고, 엄청난 학대를 당해야 하는 거죠. '위안부' 피해자를 생각하는 일반적인 이미지가 그렇잖아요? 할머니들은 그전까진 어디 가서 자기가 피해자라고 말하지도 못했던 약자였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피해 사실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안부’ 피해자 이미지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봐 두려움을 갖고 있었겠죠. 그러면 할머니들이 말을 어떻게 하겠어요? 실제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원하는 이미지 틀에 맞춰요. 그게 제일 편하고 안전한 거예요. 그래서 연구자는 할머니의 증언을 가려들으면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해요. Q. 말씀하신 것처럼 ‘위안부’ 연구 초창기에는 연구를 진행하시기에 어려웠던 점도 많았을 것 같아요. 혹시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1996년 무렵이었나. 일본 방송국 NHK에서 같이 조사를 하자고 의뢰가 왔어요. 필리핀 수용소 기록에서 발견된 피해자 중 한 분인 김소란 할머니를 같이 찾아보자고요. 그래서 필리핀 수용소 기록을 들고 일본에서 할머니를 찾기 시작했어요. 그때 저하고 여순주 선생님이랑 같이 조사를 했어요. 당시 할머니의 한국 출신지 면사무소 도움을 받아서 제적부를 찾았죠. 그때는 제적부를 개인이 볼 수가 있었어요. 지금은 못 보죠. 그런데 할머니가 미국에 계시더라고요. 미국에 계신 할머니의 연락처를 간신히 찾아내고 당시 LA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결국 할머니를 찾긴 찾았어요. 그런데 빠뜨린 게 있었죠. 할머니의 입장은 어떨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료의 사실을 확인한다는 생각만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에 ‘이게 할머니한테는 엄청난 충격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것은 할아버지가 이 할머니의 과거사를 다 아시고 결혼을 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할머니는 영주권 때문에 잠깐 미국에 가 계셨던 거고, 원래 생활은 한국에서 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할머니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죠. 그렇지만 당시 할머니가 건강 상의 문제가 있었고, 이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셨기 때문에 저희한테 사진 한 장 안 남겨주셨어요. 김소란이라는 이름도 가명이에요. 김소란 할머니의 구술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정신대연구회가 발간한 세번째 ´위안부´ 피해자 증언집. 증언집 1, 2권과는 다르게 사투리, 구어체 등 피해자들의 말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표기하여 피해자들의 정서와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또한, 피해자들의 증언과 함께 강제로 동원되어 남양군도 파라오에서 군생활을 했던 홍종태 씨가 경험하고 목격한 위안소 및 ´위안부´에 대한 증언도 담았다." popuptitle="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3" data-url="/taxonomy/term/393">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3에 있는데, 거기엔 포로수용소에서 찍힌 사진이 조그마하게 실려있어요. 연구자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알아내고 싶어 하잖아요. 할머니가 어떤 심정일지를 생각을 잘 못 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할머니 삶이 일차적이고 중요한 거죠. 오키나와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뻔했는데, 오키나와에 있는 활동가 선생님이 “그게 할머니한테 뭐에 도움이 되는 건데?” 이렇게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선배란 이런 거구나’ 그런 걸 느꼈었는데요, 그래서 스톱 했어요.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할머니의 생활과 미래 등을 고려했을 때 도움이 안 되는 것이 많더라고요. Q. 지금은 역사학계 안에서 구술사가 방법론으로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런 시각을 바꾸게 한 것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었던 것 같아요. 구술 작업을 하시면서 특별히 신경을 쓰셨던 부분들이 있었을까요? 할머니는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정확하지 않죠. 오래된 기억인데다가 트라우마도 있으니까요. 그런 부분을 우리가 이해해야 해요. 그래서 할머니 구술 중의 특정 내용을 어떤 시간에, 어떤 공간에 위치해야 하는가를 계속 고민하고, 반복해서 질문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그 전의 이야기와 엉키거나 그 전의 이야기가 번복되기도 하고 그래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이야기를 해야 할머니가 어떤 맥락에서 이야기하는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어요. 할머니가 거짓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구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거죠. 게다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담긴 증언집이 일본 우익에게 부정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굉장히 조심스러운 접근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구술사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방법적인 부분은 굉장히 미숙했다고 봐야죠. 그때 우리 사회가 짜임새 있는 방법론을 전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은 할머니는 이렇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걸 이렇게 본다, 이렇게 한 거죠. 대부분의 사회문제 해결이 운동이 선행되고 연구가 뒤를 따르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구를 놔두고 운동만 앞서서 진행되면, 연구자가 해야 할 말을 못 하는 경우가 생겨요. 예를 들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만든 영화나 연극 같은 것이 역사적 연구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지면 굉장히 자극적인 것 위주로 연출하게 되고, 사실과 점점 멀어질 수가 있는 거죠. ‘위안부’ 연구도 비슷한 문제가 있습니다. Q. 아까 군인 군속 등 할머니 외에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는데, 좀 더 부연 설명해 주시겠어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보다 당시 현지에서 일했던 군인 군속들이 비교적 좌표가 잘 잡혀요. ‘위안부’ 피해자가 있었던 지역에 동원됐던 군인이나 군속, 노무자 이런 사람들이요. 우리가 그 당시에 산 사람이 아니어서 감이 안 잡히는 부분을 이 할아버지분들은 말을 해줄 수 있어요. 게다가 이 할아버지 중엔 위안소를 갔던 분도 계시거든요. 이 ‘위안부’가 누구다라고까지는 말을 못 하지만, 당시 그곳에 위안소가 몇 개가 있었고, 대략 몇 명이 있었는지는 말해줄 수 있는 거죠. 할머니들의 증언과 함께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교차 조사가 되고 훨씬 더 풍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그래서 제가 군인 군속을 조사하고 연구도 했는데, 연구자금이 부족하다 보니까 중요한 기회와 많은 분을 놓쳤어요. 그때가 그분들도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의 시간이었는데, 시간을 많이 놓쳐버렸어요. 지금은 살아계신 분이 별로 많지 않을 거예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후학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연구자들은 자기가 관심이 있는 쪽에서부터 시작을 하게 될 텐데요. 연구할 때 연구하려는 방향, 내용 이런 것들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면, 잠시 멈춰서 스스로 생각하는 연습을 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 자기식으로 찾아보고 연구하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거기에 대한 소신이 있으면 더 좋고요. 예를 들면 민족주의적인 감정으로 쓰인 연구들도 있잖아요? 이럴 때 감정적으로 동의는 되지만 역사 자료를 보면 이렇게 말하지 않는데? 하고 의심할 수 있는 감, 그런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야 새로운 연구가 나올 수 있고, 의미 있는 연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냥 따라가는 거죠. 새로운 연구를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Q.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신 거 같아요. 기존 연구 자체가 만들어 놓은 어떤 틀이 후학들에겐 때론 장벽이 될 수 있는데, 거기에 매몰돼서 쫓아가기보다는 과감하게 문제 제기 해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려면 적어도 10년을 할 생각을 하고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단기적인 프로젝트로 연구자를 키울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연구자를 키워야 한다는 거죠. 연구를 맡겼으면 한 번 발표시키고 끝낼 것이 아니라 2탄, 3탄 계속할 수 있게끔 기회를 줘야 해요. ‘위안부’ 문제는 꾸준히 하지 않으면 정말 어려운 주제예요. 티끌만 한 자료 하나 가지고 끄집어내고 해석해야 하거든요. 크게 안 보여요. 작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꾸준히 계속할 수 있게끔 연구 지원을 해줘야 해요. 이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와 같은 곳이 생겼으니까, 이 기관에서 지원을 꾸준히 해줬으면 좋겠어요. 당장 연구 성과를 내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얼마큼 성실하게 연구를 이어가느냐 중요해요. 성실하게 연구를 해야 뭐가 나와요. 이른 시간 안에 자꾸 큰 거를 요구하면 오독이 나와요.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Interveiwer : 소현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Interviewee : 강정숙 정리 : 슬로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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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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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림의 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991년 8월 14일, 대한민국 생존자 최초로 김학순 님이 공개 증언하고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한 세대의 통념적 주기가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초국적 참조점이 된 동시에, 여전히 ‘현재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웹진 결은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11주년인 2022년을 맞아, 경계를 넘어 ‘위안부’ 역사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조명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온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로 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맞선 젊은 여성들,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비판적 담론을 생산하고 후속세대를 교육하는 연구자들, 전쟁과 제노사이드, 이민자와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해외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위안부’ 역사의 교훈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시죠.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들어가며 1990년대 초기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이하 ‘’생략)재판이 일본에서 총 8건 시작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한국인 2건, 재일한국인 1건, 중국인 2건, 대만인 1건, 필리핀인 1건, 네덜란드 1건입니다. 관부재판의 특징은 피고 일본국의 수도 도쿄가 아니라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 있는 재판소에 제소되었다는 점과 원고 10명 중 위안부 원고는 3명, 그 외는 여자근로정신대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1심 재판에서 위안부 원고가 승소하여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재판이라는 점입니다. 부산 정대협(고 김문숙 회장)에 신고한 위안부 피해자와 여자근로정신대피해자 각각 두 분이 1992년 12월에 야마구치재판소 시모노세키지부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회와 유엔에서 공식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제소하였습니다. 후쿠오카에 피해자분들을 모시고 재판지원을 준비하고 있던 우리 회원 10여명이 직접 요리를 만들어 나누면서 환영회를 열었습니다. 원고의 한 분이셨던 박두리 님은 “일본인은 모두 악마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친절하게 해주는 거냐”고 말씀하시며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지원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던 만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진행된 추가 제소에서는 위안부 원고 3명, 여자근로정신대 원고 7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원고들이 관부(関釜) 페리 연락선을 타고 와서 재판에 참여한다는 뜻에서 통칭 ‘관부재판’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원모임의 연회비 3,000엔과 후원금은, 원고들의 재판을 위한 연 4회 도항비, 체류비, 관부재판 뉴스레터 발행비용 등으로 썼습니다. 원고 분들은 우리 집과 교회에서 숙박하고 지원모임 회원들과의 식사 모임과 교류회를 통하여 점차 친분과 신뢰를 쌓아갔습니다. 방청석을 가득 채운 지원자들이 경애의 마음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원고들은 재판에서 일본국 대리인에게 피해를 호소하고 규탄하였습니다.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자존감을 회복하시며, 재판을 이유로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즐거워하시게 되었습니다. 1998년 4월 27일 시모노세키 판결이 나왔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가혹한 피해가 받아들여져 승소하였습니다. 일본정부에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입법조치를 명하는 획기적인 판결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여자근로정신대 원고는 “위안부 원고에 비해 피해가 가볍다”는 이유로 패소하였습니다. 그 후, 원고와 피고 모두 상급 법원에 항소하였습니다. 히로시마고등재판소의 재판관은 국가에 ‘위안부’ 이슈와 관련하여 이견을 말할 수 있는 줏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심은 2001년 3월에 패소하였으며, 2003년 3월 최고재판소에서 상고 기각되었습니다. 여자근로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 2021년 1월과 4월에 서울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소한 재판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판결문의 “위안부 모집”항목에 “학교 등을 통해서 모집하는 방식”, “근로정신대 *** 동원 방식”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재판소에 제출한 역사 인식과 관련한 내용은 정대협(정의연)이 작성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이용수 님은 2020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정대협의 윤미향 님을 향한 기자회견을 열어 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는 다르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용수 님은 관부재판, 히로시마 고등재판소 재판 지원 모임에 여러 차례 참가하셨습니다. 당시 교류회에 참석한 근로정신대 원고 한 분이 “해방 후, 정신대인데 위안부라고 잘못 알려져서 부끄러웠다”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이용수님은 “나는 부끄럽지 않다. 부끄러운 것은 위안부 제도를 만든 일본정부다”라고 말씀하시며 격노하셔서 발언자가 사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용수 님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 가운데 위안부라고 여겨져 가정폭력이나 이혼을 당하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고생하며 산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되셨습니다. 저는 그 때문에 2020년 회견에서 이용수 님이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정대협을 비판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여자근로정신대는 초등학교 6학년 혹은 졸업 후 1~2년 정도가 되는 소녀들이 1944~45년에 걸쳐 담임 선생님에게 “너는 애국을 위해 일본 공장에 가서 일해라, 일하면서 여학교에 다닐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라고 권유받아 지원하였습니다. 도야마현 후지고시 공장에 1,060명, 나고야 미쯔비시 비행기 공장에 300명, 시즈오카현 도쿄아사이토 공장에 300명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녀들은 남성 노동자가 군대에 간 사이 빈 자리로 남아있던 선반공 등의 중노동을 감당하였습니다. 식사량도 적고, 학교에 다니지도 못하고, 밤에는 미군 공습에 위협당하는 가혹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속아 월급도 받지 못한 채 결국 야윈 얼굴로 부모 곁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사기와 강제 노동에 대해 사죄하라, 급료를 돌려달라는 너무나 당연한 요구를 하면서 재판에 임했습니다. <관부재판> 한국어판 출판 계기와 영화 <허스토리>에 대한 문제의식 2018년 한국에서 관부재판을 주제로 그린 영화 <허스토리>(민규동, 2018)가 제작되었습니다. 지인이 보내준 DVD를 보고, 그 내용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자근로정신대 박OO님(익명)이 일터에서 위안부로 여겨졌고, 원고들이 재판 때 일본에 방문하면 돌멩이가 날아들었으며, 재판에 우익이 몰려들어 더러운 욕설을 퍼붓고, 숙박했던 여관에서 차별받는 등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 일색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일본사회가 위안부 차별로 만연해 있는 듯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당시 일본사회는 외국인 전쟁피해자에게 호의적이었고, 60건 이상의 전후 보상재판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원 모임을 만들고, 변호사들은 무보수로 자원하여 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를 동일시하며 일본 사회를 향한 편견을 조장하는 내용을 방치할 수 없어서 감독에게 항의문을 보냈더니 감독과 프로듀서가 후쿠오카를 방문하였습니다. 감독은 “여자근로 정신대에서 위안부가 되었다는 내용이 담긴 증언집이 한국에서 출판되었다”고 해명했습니다. 여자근로정신대 세 분의 증언이 있다는 것을 일본에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후지코시 공장실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실상과 다른 내용이 책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증언집에는 “공장이 공습으로 불에 타고 일이 없어지고, 회사로부터 아오모리현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에 30명 가량 보내졌다”는 내용도 있는데, 후지코시 공장에 공습피해는 없었고 패전을 맞을 때까지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몇몇 다른 부분도 저희가 아는 내용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자에 국한하여 생활 지원을 하는 점,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고통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자 감독은 당황하며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라는 자막을 영화의 첫 장면에 넣겠다고 답하고 돌아갔습니다. 2015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한국사회에서 반일 감정을 그리는 영화가 잇달아 제작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관부재판 내용과 일본사회의 실상을 전달하고 싶어 『관부재판』 한국어판(2021, 도토리숲 출판)을 냈습니다. 저는 소녀상이 근로정신대의 소녀를 모델로 한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의연한 모습의 소녀상은 13세부터 15세 때 동원된 여자근로정신대의 분위기와 닮아있습니다. 위안부로 동원된 농촌의 가난한 소녀, 세 갈래로 머리를 땋은 그녀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 역사인식의 공동연구를!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이 외에도 동원 과정, 피해자 수, 패전 당시의 처우 등에 관해서 일본과 한국 두 사회의 인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양국의 대립은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악순환에 빠져 있습니다. 문제의 극복을 위하여 위안부 이슈 관련 역사 인식을 한일 시민들이 함께 다각적으로, 냉철하게 연구 검토하면서 공동의 인식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읽을 글] ·하나후사 도시오, 하나후사 에미코 지음, 고향옥 옮김, <관부재판: 소송과 한국의 원고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한 28년의 기록>(서울: 도토리숲, 2021) (책소개 >>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1223391) ·<민족의 희생자 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한 관부 재판의 기록(시모노세키)>, (사)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민족과 여성역사관, 2007. ·김문숙 펴냄, <소녀와 할머니: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해 온 시간의 기억>, (사)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민족과 여성역사관, 2018. ·허윤, “목적(어) 없는 ‘기억하겠습니다’: 일본군’위안부’의 서사화와 역사적 상상력”,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 35권 (2021). ·박정애, “총동원체제기 식민지 조선에서 정신대와 위안부 개념의 착종 연구: 정신대의 역사적 개념 변천을 중심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아시아여성연구> 59(2) (2020). 번역: 퍼플레이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