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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오키나와 사람들과 '위안부' - 기억을 공간화하며 '위안부'의 삶을 증언하는 사람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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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수요시위 1000회를 맞아 서울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보다 3년 앞선 2008년에 윤정옥이 일본 오키나와 주민들과 함께 오키나와 현지에 '위안부' 추모비를 세웠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146곳 이상의 '위안소'가 존재한 오키나와에서 '위안부'를 목격하고 '위안부'에 관한 기억을 전해온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추모비로 '위안부'를 기억하는 사람들 오키나와에는 이시가키섬, 도카시키섬, 요미탄촌, 미야코섬에 각각 민간에서 세운 '위안부' 추모비가 있다. 오키나와에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 사람들, 그 증언을 들은 활동가, 예술가,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함께 추모비를 건립했다. 오키나와전 중에 이시가키섬의 많은 주민들이 말라리아와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이시가키섬의 향토사 연구자 오타 시즈오는 이시가키섬의 오키나와전 실태를 수 년간 조사하며 주민들의 증언을 그림과 사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던 중 그는 기록만으로는 추모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와하라라는 지역에서 '바바하루'라는 가명으로 불린 '위안부'의 죽음이 그랬다. 전후 일본군은 이 섬을 찾아와 전우들의 유골을 수습해 추모비를 세웠다. 하지만 바바하루로 불렸던 이는 인적이 드문 후미진 밭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 어디에 묻혀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오타 시즈오는 조사를 통해 바바하루가 죽었을 장소를 특정해 그 곳에 나무로 된 추모비를 세워 그를 추모했다. 1998년에 '유혼의 비(留魂之碑)'라 명명된 이 추모비 앞에서는 매년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이 때마다 민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쑥 들어와 증언을 요구하는 불청객들이 있어 주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현재 위령제는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다. 배봉기가 동원되어 '위안부'로 생활하기도 했던 도카시키 섬에는 1997년 한국의 영화감독 박수남이 주도하여 세운 '아리랑 비'가 있다. 박수남은 강제연행된 조선인을 추모하는 다큐멘터리인 <아리랑의 노래: 오키나와에서의 증언>(1991년)를 제작했다. 윤정옥의 취재기와 박수남의 영화 등을 통해 배봉기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한국의 기자들과 연구자들, 조사자들이 오키나와의 민가에 방문해 함부로 사진을 찍는 일이 늘었다. 그러나 주민 대다수가 '집단자결'[1]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이기도 한 이 섬은 방문객들에게 마냥 우호적이기만 한 곳은 아니다. 주민들은 일상이 침범당하는 상황에 예민해졌고, 사생활을 보호받기를 원했다. 단기간 방문해 모든 것을 찍고 알아가려는 태도는 주민들의 일상을 위협하기 쉽다. 따라서 기자, 연구자, 조사자들로부터 자신의 삶의 내밀한 영역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경계심을 외부인들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은 전시폭력 피해 사실을 증언하면서도, 일본군'위안부'의 생활영역을 보호하려는 이중의 노력을 해왔다. 주민들의 경계의 눈초리는 배봉기를 비롯한 많은 '위안부'의 일상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오키나와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림5. 도가시키 섬의 아리랑비(1997년 건립).jpg 한편 침묵을 강요당한 조선인 '위안부'들과는 대조적으로 군인‧ 군속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 피해자들은 해방 후 오키나와를 방문해 추모비를 직접 세웠다. 오키나와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결성한 '태평양동지회'는 1986년 오키나와를 방문했고 『오키나와 이야기』(2016년, 역사비평사)의 저자 아라사키 모리테루 교수와의 피해자 증언 모임을 통해 주민들과 교류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1999년, 경상북도 영양군에 '태평양 전쟁・오키나와전 조선반도 출신자 한의 비(이하 '한의 비)'가 세워졌다. 2006년에는 같은 추모비가 오키나와 요미탄에 세워졌다. 요미탄은 미군의 상륙 거점이었으며 오키나와전 중에 '집단자결'의 비극이 있었던 곳이다. '한의 비' 디자인은 오키나와의 조각가 긴조 미노루[2]가 맡았다. 요미탄의 '한의 비'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추도문이 새겨져 있다. 그림6. 요미탄의 한의 비(2006년 건립).jpg 별도의 제작자없이 주민들의 기억 만으로 추모비가 세워진 사례도 있다. 2008년 미야코섬에 세워진 '아리랑 비'와 '여성들에게'(한국어로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라는 이름의 추모비이다. 우연히도 필자의 조사가 이 추모비들의 건립에 작은 계기를 만들었다. 끝으로 이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그림7. 미야코 섬의 아리랑비와 여성들에게(2008년 건립).jpg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을 아름다운 여성으로 기억하는 미야코섬 사람들 1992년 ''위안소' 지도'를 만들던 당시에 상세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곳이 미야코섬이다. 오키나와전 당시 미야코섬에는 미군이 상륙하지 않았고, 이에 상대적으로 전쟁 피해가 적은 지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2006년, 오키나와전 연구자로서 오키나와 나하에서 비행기로 30분 정도 떨어진 미야코섬에 처음 방문했다. 이 곳은 오키나와전 당시 3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주둔하여 섬 전체를 일본 항공시설로 만든 '항공기지의 섬'이기도 했다. 필자는 항공기지 주변 마을 주민들을 찾아 다니며 주민들이 겪은 오키나와전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옛 일본군 비행장 활주로가 있던 노바루 부락의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바위 옆에서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농부를 만났다. "그 돌이 무엇인가요?" 그저 지나가듯 물었을 뿐이다. 슬리퍼에 허름한 추리닝을 입은 농부는 바위 옆에서 자라나고 있던 작은 꽃들에게 물을 주며 대답했다. "이 곳은 조선인 여성들이 빨래하러 가다 잠깐 쉬던 곳이라오." 그 농부의 이름은 요나하 히로토시였다. 기적과도 같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는 아주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며 질문한 내게, 자신이 겪은 오키나와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미야코섬에서 가장 큰 '위안소'가 바로 이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소년시절 섬에서 나는 고추를 따다가 조선인 여성들에게 몰래 가져다주곤 했다는 추억 등을 이야기했다. 그는 이제 기지도, '위안소'도, 아무것도 없는 넓은 허허벌판에 커다란 현무암을 놓아 그녀들을 추모하고 있노라 했다. 예전에는 현무암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나무가 있어서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여성들이 잠깐씩 쉬다가 '위안소'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요나하 히로토시는 이 돌을 어디에서 어떻게 가져왔을까? 필자는 그가 허허벌판에 노인 혼자서는 운반하기 힘들었을 커다란 돌을 가져다 놓고 홀로 '위안부'들을 기리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그는 왜 그토록 이 장소를 기억하고 싶어했을까? 필자는 이 조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침 나하에서 생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오키나와 평화투어를 하고 있던 윤정옥을 만났고 요나하 히로토시의 이야기를 전했다. 윤정옥이 생존하는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를 가장 처음 조사한 곳이 바로 오키나와였다. 윤정옥은 오키나와 방문 초기에 도카시키섬에서 유령이 되어 떠돈다는 '위안부', 하루에의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워했다. 하루에가 떠올라서였을까? 윤정옥 역시 미야코섬에 추모비가 건립되길 간절히 소망했다. 한편, 필자의 미야코섬 현지 조사는 의도치 않게 지역 내의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필자의 조사 현장을 본 미야코 시의원 한 명이 시의회에서 '종군위안부' 지도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여당 의원들이 '종군위안부'는 피해자도 꺼려하는 용어라며 반대했다. 가열되는 논쟁 속에서 사회를 보던 당시 시장이 "우리집 옆에도 '위안소'가 있었다"라는 말을 하였고, 여당 의원들은 중립을 지켜야 되는 시장이 이런 말을 했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여당 의원들의 반발로 회의 진행이 어렵게 되자, '종군위안부' 지도 제작 논의 사실 자체가 시의회 회의록에서 삭제됐다. 이 소식을 들은 미야코섬 여성운동가들은 시의회의 결정에 항의하는 의미로 이 논쟁의 시발점이 된 조사자인 필자를 초청해 강의를 열었다. 초청 강의에는 그동안 필자에게 증언을 해 준 많은 주민이 모였다. 필자의 간단한 조사 내용 발표가 끝난 뒤 여성운동가들이 미야코섬 시의회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데 휠체어를 타고 참가한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손을 들고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아리랑을 부른 뒤 울먹이듯 말했다. "이 노래는 그때 그 여성들이 부르던 거에요. 왜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려 하죠? " 아리랑에 대한 응답처럼 '위안부'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사쿠다 겐토쿠(1927년생) 씨는 필자가 미야코섬을 방문할 때 마다 옛 '위안소' 터까지 가는 길을 안내해 주곤 했다.[3] 사와다 도요조(1939년생)씨는 본인을 군국주의 소년이었다고 소개하곤 했는데, 우물에 빨래하러 가는 여성들에게 돌을 던진 일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4] 그밖에도 다 떨어진 여성들의 옷을 꿰매어 준 사연, 몰래 여성들에게 차를 대접하거나 음식을 나눠준 사연 등의 증언이 이어졌다 이후 윤정옥, 나카하라 미치코, 다카자토 스즈요를 대표로 하는 '오키나와, 한국, 일본, 미야코섬 '위안부' 문제 공동조사단'이 꾸려졌고, 멤버가 확대된 만큼 증언 수집에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공동조사단의 조사 결과 오키나와에 있었던 130여 곳의 '위안소' 가운데 17곳이 미야코섬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미야코섬에는 물이 귀하여 조선인 '위안부'와 현지 주민이 함께 우물을 사용했고, 우물을 매개로 주민, 특히 여성 주민들과 '위안부' 사이의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쟁 초기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마치 아이돌인양 일본군이 주최하는 행사에 불러내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공동조사단은 위의 증언들을 모아 '위안부'를 본 사람들의 기억을 담은 최초의 증언집을 편찬했다.[5] 미야코섬 공동조사단의 활동 소식은 오키나와 본섬에까지 알려져 반향을 일으켰다. 필자가 요나하 히로토시를 만나고 2년이 지난 2008년, 허허벌판에 놓인 현무암은 '아리랑비'가 되었다. 요나하가 가져다 놓은 그 모습 그대로, 아무런 조각도 하지 않은 기억의 돌인 아리랑비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바람이 새겨졌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이 근처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츠가 우물에서 빨래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잠시 쉬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비참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세계의 평화와 공존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비를 후세에 전하고 싶다 - 추모비, 아리랑비 요나하 히로토시 아리랑비 뒤에는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세운 세 개의 추모비가 아리랑비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이 비석들에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의해 피해를 입은 점령지 및 식민지 피해자들이 사용한 11개 지역의 언어[6]와 베트남어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일본군 '위안부'를 위한 비석에 베트남어의 비문을 추가한 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가한 가해성 역시 함께 기억해야 된다는 윤정옥의 바람이기도 했다. 12개의 언어로 새겨진 글귀는 다음과 같다. 일본군이 저지른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의 아픔을 나누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무력 분쟁에 따르는 성폭력이 그칠 것과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가 오기를 염원합니다. - 추모비, 여성들에게 미야코섬에서는 매년 9월 주민들이 주최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이 추모제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행사이다. 이 소중한 기억의 공간에서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위안부'가 부른 아리랑 노래를 기억하는 주민들과, 그들의 증언을 들은 한국, 일본, 오키나와의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어우러져 아리랑을 부른다. 12개의 언어로 새겨진 비문은 다음 세대 여성들에게 전하는 메세지로, 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염원으로 미야코섬에 자리하고 있다. '조센삐'와 '압파라기' 여성 사이에서 필자는 오키나와의 '위안소' 조사를 12년간 진행하며 많은 증언을 들었고 많은 '위안소'를 보았다. 때로는 주민들이 그려주는 그림이나 기억에 의지해 '위안소' 위치를 점으로 찍어 나타낸 '위안소' 지도로, 때로는 '위안소'로 사용된 건물과 장소에서 과거 '위안소'로 쓰인 건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증언으로 오키나와 사람들이 본 '위안부'에 관한 기억들과 만났다. 군인들은 '위안부'를 '조센삐'(삐는 여성의 성기를 낮잡아 부르는 속어로, 일본군이 '위안부'를 부를 때 '위안부'의 출신지역에 삐를 붙여 '~삐'라고 부르기도 했다 -편집자 주)라고 불렀다. 그 어감 그대로 오키나와 주민들이 '위안부'를 차별적 언어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총력전 하에서 '위안부'들이 어떻게 이용되고 버려졌는지를 기억하기에 오키나와 주민 그 누구도 이 여성들이 일본군과 '동지'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미야코섬 사람들은 '위안부'들을 '압파라기'(아름다운 여성)라 부르기도 했다. 군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는 피부가 하얀 조선의 여성들은, 태양볕에 검게 그을린 섬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여성으로 보였다고 한다. 한편, 이 여성들에게는 우물까지 빨래하러 가는 길에 잠시동안 자유가 허락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야코섬 주민 누구도 이 여성들이 자유 의지로 이곳에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민들은 3만 명 이상의 군인이 주둔한 고립된 섬은 철조망 없는 수용소였으며, 이 섬에서의 짧은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증언을 통해 말했다. 필자는 이러한 주민들의 증언과 진중일지 등의 일본군 군사자료를 분석해 『오키나와전의 기억과 위안소(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2015년, 인팍토 출판회)를 펴낸 바 있다. 일본군'위안부'와 '집단자결' 피해자 모두 전시폭력의 희생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일본군을 따르거나 스스로 자결한 것이 아니다. '종군위안부'나 '집단자결'이라는 말은 피해자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역사적 설명이 필요한 불완전한 용어이다. 이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연구는 구조적인 폭력을 가시화하여 대항언어를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연구는 그 자체가 운동과 연동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오키나와 전쟁을 연구하는 과정 속에서 '위안부' 문제와 만났고, 위안부 당사자가 아닌 '위안부'를 목격한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운동과 연구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김학순의 증언과 소송은 한국은 물론 일본의 여성과 시민운동을 결집하는 출발점이 되었고, 이후 일본의 법적 배상과 공적 책임을 묻고 한국의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시민 운동이 일본 내에서 전개되었다. 그 정점이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본 바와 같이 오키나와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운동이 펼쳐졌다. 오키나와에서 이뤄진 운동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목격자 증언의 공간화'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배봉기를 첫 '위안부'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배봉기들의 이야기를 공간의 기억으로 남겨 놓았던 오키나와 사람들의 증언에는 그 어떤 법적 효력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증언들은 투박한 지도 안의 점들로, 그림으로, 때로는 돌과 나무로, 자신의 집, 마당, 마을에서 자행된 가해의 역사로 기록되었고, 오키나와 주민 자신들의 삶의 궤적을 역사의 가해성 안에 위치짓는 역할을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긴 세월 배봉기를 기억하고, 조선인 여성들을 기록하고 추모해 온 오키나와 주민들이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 속에는 피해자들이 처했던 상황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담겨있다. 이 아름다운 타자들은 굳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증언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들이 머문 공간을 기억하며, 혹시 섬 내부에 생존해 있을지도 모르는 피해자들의 삶이 훼손되지 않도록 고민한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기억의 공간화는 위안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곳에서 함께 '본 자'로서 자신을 위치시켜야만 드러나는, 주변화된 기억을 가시화하는 #with you 방식의 운동인 것이다. 이런 듣기 방식으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러한 듣기 방식으로 증언대 위의 모습으로 피해자의 이미지를 고착화하거나,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오랜 시간 운동 및 연구를 해 왔던 이들을 손쉽게 재단하고 비판하는 수많은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타자입니까?" 라고. 각주 ^ 일본군 사령부는 패전이 임박하자 집단자결이라는 명령을 각 부대에 하달했고 수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강요된 집단자결로 목숨을 잃었다. 집단자결은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전시폭력의 실체를 드러낼 수 없는 용어이므로 따옴표 처리를 하였다. ^ 제작자인 긴조 미노루는 <표현의 부자유전>을 둘러싼 일본 내의 ‘위안부’ 논의 탄압에 항의하며 2019년에 '아리랑의 시 – 군위안부 상'이라는 목조 추모상을 완성하기도 했다. ^ 2007년 5월 11일, 지모리(地盛) 위안소 옛터, 2008년 1월 12일 지모리(地盛)의 위안소 옛터, 필자와의 인터뷰 ^ 2008년 1월 12일, 미야코 하나키리(花切) 위안소 옛터, 필자와의 인터뷰 ^ 『전장의 미야코섬과 위안소 -12개의 언어로 새긴 여성들에게 (戦場の宮古島と「慰安所」―12の言葉が刻む「女たちへ」)』홍윤신 편, 난요문고, 2009년 ^ 한반도, 일본, 중국‧대만,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괌, 티모르, 미얀마, 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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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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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한국의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문제 제기와 여론 확산은 주로 한국(남한)의 '위안부' 피해자 서사 중심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남한뿐 아니라 북한 그리고 해외동포들에게도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웹진 <결>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를 대중적 논의 차원으로 확장하고자 재미있는 대담을 기획했다. 첫 번째 대담자인 정영환 교수는 일본 지바현에서 태어난 ' 조선적 재일동포 3세'로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음과 동시에 대한민국으로 국적을 변경하지 않은 재일 한국인이다. 현재 메이지학원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재일동포 문제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대표 저작인 2016년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정영환, 임경화 옮김, 푸른역사, 2016)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부정해 논란을 빚은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이, 2013)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번째 대담자 박노자 교수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했다. 현재 한국 국적의 신분으로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보다 확장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두 교수를 모신 대담은 시간적, 물리적 제약으로 인해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에 걸쳐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1.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2.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3.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3 <DAY 1> 정영환, 박노자 선생님 안녕하세요. 웹진 <결>입니다. 두 분을 모시고 온라인 대담을 진행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본 대담 위키는 두 대담자가 물리적 거리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온라인 상에서 서로 묻고 답하는 것이 용이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온라인 대담은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진행되며,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주제의 위키가 생성됩니다. 하루에 한 번씩 본 위키에 접속해서, 새로 개설된 주제의 위키에 각자의 의견을 직접 적어주시면 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글은 기간 내에 언제든 수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첫째 날의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제기와 여론 확산은 한국(남한)의 ‘위안부’ 피해자 서사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남한뿐 아니라 북한 그리고 해외동포들 사이에서도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중요한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은 한국 외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있어서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Q1. 두 분께서 생각하시기에 대한민국(남한)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주로 남한 피해자 중심으로만 이루어졌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Q2. 더불어 대한민국(남한)에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탈분단적 시각으로 확장되기 위해선 어떤 논의와 과정이 필요할까요? Q3. 앞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으로 '위안부'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어떤 과정과 절차를 거쳐야 할까요? 박노자 A1.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의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국가주의 내셔널리즘의 틀 안에서 처음에는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들의 문제는 '우리' - 즉 남성 본위의 국가/국민 공동체 - 의 여성들에 대한 일제의 유린이라는 방식으로 많이 이해됐습니다. 그런데 '우리'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보통 '대한민국' 국경으로 확정된 공동체를 의미하는 거니까 다양한 거주지, 국적, 민족에 속하는 다른 피해자들이 잘 주목을 받지 못한 듯합니다. 그리고 박근혜 씨의 시절에는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의 문제'로 프레이밍해서, 일본 국가와의 '타결'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이건 기초부터 잘못된 접근이죠. 물론 '한일관계'와 유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양한 피해자에 대한 전시 성폭력의 문제, 즉 인권 문제이자 젠더 문제, 그리고 식민지적 폭력의 문제입니다. A2. 남한에도 북한에도 '위안부' 성노예 제도의 피해자 분들이 거주하십니다. 이북에서 거주하시는 분들 같은 경우에는 본적이 남한인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사실상 광의의 '이산가족' 범위에 속하시기도 하죠. '위안부' 문제가 논의될 때에 남이든 북이든 해외든 어디에 거주하시든 모든 피해자들이 이 논의에 포함돼야 합니다. 그리고 남북에서 '위안부' 문제가 거의 거론되지 않았던 1990년대 이전에도 이 문제에 대해 선구적으로 언급하고 활동해온 총련 등 해외 동포 단체들의 노력도 남한에서도 분단의 벽을 넘어 정당한 평가를 받았으면 합니다. A3. 식민지였던 조선의 여성들이 입었던 피해가 특히 컸다는 사실도 당연히 있지만 총체적으로 봤을 때, '위안소'란 다양한 지역, 민족, 국가 출신의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한 전시 성폭력, 성노예화 국가 범죄입니다. 이 차원에서 본다면 '한-일 프리즘'으로만 봐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죠. 이 문제의 일차적 본질은 일본 국가와 군대의 젠더적 폭력 행위지만, 동시에는 계급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빈농, 빈민의 딸들이야말로 일군의 폭력에 가장 쉽게 노출되곤 했습니다. 이 범죄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당연히 일본 국가와 군대에 있으며, 반인륜 범죄인 만큼 공소시효가 원칙상 없는 거죠. 그런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극동국제군사재판의 공소장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연합국(특히 미국)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의 책임 유기에 대해서도 한일 수교 협상 과정에서 이 문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당국자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 크지 않나 싶습니다. 정영환 A1. 이 문제를 검토할 때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규명과 과거청산을 위한 시민운동과 일반 여론이나 언론, 정치권의 동향은 구별해서 다룰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1980년대에 시작한 시민운동은 비교적 일찍이 '남한'이란 틀을 넘어 재일조선인이나 일본인, 중국, 동남아, 유럽,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피해자나 활동가들과의 연대를 이루어왔습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운동은 이렇게 볼 때 애초부터 남한 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 국경을 넘은 여성들의 연대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고, 북측의 피해자와의 만남도 1990년대에는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시도 중 하나의 도달점이 2000년의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시도를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1980년대 이래 한국 여성해방운동의 치열하면서도 창조적인 투쟁이 있었고, 특히 이 운동이 탈분단적 시각을 갖고 있었음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은 지역적,공간적으로 남한의 틀을 넘어 일본군의 성폭력 피해를 받은 각 지역의 당사자나 지원자, 활동가들과의 인연을 맺고 경험을 교환하며 함께 일본군의 책임을 추궁할 뿐 아니라,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이나 콩고 내전의 전시성폭력 피해자들과의 연대도 이루고 있어, 시간적인 제한을 넘어서 보편적인 전시성폭력문제의 해결을 위한 운동의 큰 동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이런 해결운동이 이룩한 국가적인 틀을 넘어선 연대의 성과가 남한의 대중적인 매체나 정치권에서 재현될 때 '남한 피해자 중심'적인 시각으로 전환되어버리는 데 있겠지요. 저는 일본에 거주하고 남한에서 생활하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으로 알기는 어려운데, TV나 신문, 잡지에서 다루어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질문하신 대로 '남한 피해자 중심'적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각이 발생한 원인으로 박노자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한국의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역사적인 단계를 구분해서 검토해보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1948년이래의 반공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직접 작용한 결과뿐만이 아니라-물론 반공주의를 제외하고 한국의 '분단적 시각'의 문제를 파악하지는 못합니다만--1987년의 민주화이후의 내셔널리즘이 갖고 있는 제한성과 문제점—1987년체제가 갖는 '분단적 시각'—을 도마 위에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Q2와 관련이 있기에 차후에 재론하겠습니다. A2. '탈분단적 시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개념을 정리/공유하면서 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웹진 <결> 편집팀 측에서는 '분단적 시각'을 북측이나 재외동포의 존재를 외면하여 한국의 피해자 중심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정의를 한다고 저로서는 받아들였습니다. 이 개념을 전제로 해서 제 의견을 말씀드린다면 앞서 남한과 일본의 관계에 제한된 인식의 틀이 형성된 배경에는 내셔널리즘이 작동하였을 뿐만 아니라—저는 이것은 원인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물이라고 봅니다—제2차세계대전 후의 전후세계질서, 특히 동아시아에서의 냉전체제의 심대한 영향이 있다고 봅니다. 일본의 전쟁/식민지지배 책임문제를 연합군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형사적인 책임(동경재판)도 민사적인 책임(배상청구권)도 남북은 부정당했습니다. 1948년의 분단이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일강화에 틀에서 배제되었고 한국은 또한 강화회의에 참가를 못 한 채 미국 패권하의 종속적인 위치에서 한일회담을 시작하게 됩니다(1948년, 1952년 체제). 그래서 식민지 배상문제는 애초에 '청구권문제'로 환골탈태되어 '피해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재산의 반환'이란 틀에서만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1965년에는 이 결과 한일기본조약과 각 협정이 맺어지게 됩니다. 즉 1965년체제의 형성입니다. 1965년 체제는 두 가지의 논의를 '봉인'한 체제였습니다. 첫째는 일제 식민지지배의 피해논의의 '봉인', 둘째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대화의 '봉인'입니다. 말하자면 미국이 일본이란 쐐기를 식민지기 피해자와 정부, 그리고 남북 간에 박았던 체제이지요.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여전히 '분단적 시각'에 머물러 있는 배경에는 이렇게 전후체제가 만들어낸 다층적으로 얽힌 체제—1948, 1952, 1965년 체제가 남한에서 식민지의 피해문제를 바라보는데 인식의 틀에 아직도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 문제는 남한의 대내적인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의 문제이면서도 위계적인 국제관계로서의 전후체제의 문제인 것입니다. 1987년의 민주화 이후 1965년 체제에 대한 재심판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여전히 1948년 체제는 공고합니다. 2018년 10월 30일의 신일철주금에 대해 대법원이 내린 획기적인 손해배상 판결(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1965년 체제에 대한 귀한 토전이었던 반면에 원고중에는 전시 말기에 청진의 제철소에서 강제노역을 당한 피해자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북지역에서 일어난 식민지지배하의 피해에 보상에 관한 쟁점은, 이건 대한민국 헌법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당연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논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전후체제를 근원적으로 묻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탈분단적 시각으로 확장되기 위해서 필요한 논의로서 한 가지 올리자면 반식민주의/반제국주의와 여성주의적 시각의 결합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래 재일조선인사 연구로부터 시작했는데 『 제국의 위안부』 사태를 둘러싼 논의에 개입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논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던 것은 특히 일본에서의 주류 여성주의 시각에서 반식민주의적 관점을 거의 찾아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탈민족주의/개인주의/자유주의적인 시각을 통해 한국의 논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소녀상 비판과 『 제국의 위안부』 옹호에 합류하였습니다. 한국의 경우도 반식민주의는 민족주의와 동일한 개념으로 오해될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식민주의가 가져오는 억압은 피지배자를 민족적으로 배제함과 동시에 개급, 젠더적인 차원에서의 분단을 이용하여 증복시킵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이런 근대세계가 낳은 부의 측면을 근면하게 습득하여 그 폭력성이 전면적으로 틀어난 된 제도가 일본군성노예제도였던 만큼 저희들의 시각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반식민주의에 대한 검토를 넓혀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여성인권의 보편성이란 가치는 반식민주의와 반제국주의적 시각과 결부할 때 처음으로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A3. 앞서 말씀을 드렸던 것 처럼 그간의 해결운동은 이미 '탈분단적 시각'에 입각하여 많은 실천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거듭 강조를 하게 됩니다만, 이미 운동은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실천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재일동포들도 그렇습니다. 그 실천에 배우면서 '외교적'차원에 해소되지 않는 당사자와 활동가, 연구자의 경험과 연구를 축적하며 역사화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법정에서 배우면서 일본군의 만행과 책임을 더욱 체계적으로 밝히고 남북의 교류를 통해 이북 피해자들이나 유족들의 증언수집과 경험교류가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또한 세계의 식민주의하의 전시성폭력의 진상규명을 위해 실천하는 활동가나 연구자를 맺는 거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DAY 2>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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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인터뷰 ‘틈새’의 시점에서 본 일본군‘위안부’ 운동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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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사회적 침묵 끝에 1990년대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공개 증언이 나올 수 있었던 배후에는 탈냉전과 민주화, 탈식민 여성주의 인식론이 열어젖힌 새로운 담론공간이 존재한다. 종전에 민주화운동의 하위 부문으로 치부되던 여성운동 또한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성차별과 성폭력을 비판하면서 진영이 재편되었다. 이 시기 민족과 계급, 여성 차별의 모순이 중첩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헌신했던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199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며,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야마시타 영애 분쿄대학교 교수는 1988년부터 1998년 10년간 한국에서 유학하면서 한국정신대연구소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일본인 어머니와 조선인 아버지를 둔 자이니치 일본 국적자이며, 지난 2012년 한국에 소개된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위안부 문제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박은미 옮김, 한울아카데미)의 저자이기도 하다. 내셔널한 공동체의 안과 밖, 그 사이-틈새라는 어려운 자리/비판적 위치에서 한국과 일본 사회를 경험하며 ‘위안부’ 문제를 성찰해 온 야마시타 교수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이헌미 학술기획팀장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지난 5월 16일, 야마시타 영애 교수와의 온라인 인터뷰를 진행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Q. 운동에 매진하면서 유학 전에 가졌던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이 해소되었다가, 크게 두 가지 사건, 즉 첫째, 1993년 고노담화에 대한 정대협 성명서에서 드러난 일본인‘위안부’ 인식, 둘째, 정대협의 국민기금 반대 활동을 계기로 한국 사회 및 정대협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직면하셨다고 쓰셨어요. 어떤 일들이 있으셨는지요. 특히 1993년의 사건이 저에겐 큰 충격이었어요. 고노담화 발표 직후에 정대협이 낸 성명서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었어요. ‘위안부’는 당시 공창제도 하의 일본 매춘 여성과 달리 국가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군대에서 성적 위안을 강요당한 성노예였다. “ 공창제도 하의 일본 매춘 여성과 달리”라는 말이 가장 걸렸죠. 그리고 ‘위안부’의 출신지에 관한 내용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전지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로서는 일본인을 제외하면 한반도 출신자가 많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인 여성은 성노예적 성격의 강제종군위안부와는 그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 일본인 ‘위안부’는 당시 일본의 공창제 아래에서 ‘위안부’가 되었고, 돈을 받았고, 계약을 체결하였고, 계약이 끝나면 ‘위안부’ 생활을 그만둘 수 있었다. 일본인 ‘위안부’를 은근슬쩍 이 보고에 집어넣은 것은 강제종군위안부의 성격을 흐리기 위함으로 보인다. 고노담화에 대한 정대협의 성명서(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 자료집Ⅳ 강제종군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법적책임, 1993년 9월 30일) ⓒ야마시타 영애 이 내용에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공창제도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는데,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공창제도가 들어왔잖아요. 공창제 연구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 당시 한국에서는 거의 전무했고, 일본에서는 많이 이뤄지고 있었어요. 공창제도가 있었기에 ‘위안부’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만큼 ‘위안부’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창제에 대한 연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연구해 보면 공창제 하의 여성들이 얼마나 노예적인지 알 수 있어요. 그들이 자유의사를 갖고 ‘위안부’가 됐다는 것은 남성적 시각인 거죠. 1992년경 시로타 스즈코 씨의 모습. 찾아가면 아주 반겨주셨다. 1993년 3월에 영면하셨다. ⓒ야마시타 영애 이것을 번역해 일본 단체에 보내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걱정됐죠. 그때는 여름방학으로 제가 일본에 있을 때였는데, 정대협에 연락해 그 부분을 빼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일본어판에서라도 빼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그 내용은 빠지게 됐습니다. 정대협 초기 사진 ⓒ야마시타 영애 Q. 국민기금이 나오면서 성금 분배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성, 피해자 다양성을 생각하지 않는 모습들이 보였잖아요. 그때는 어떤 고민이 있으셨나요? 정대협이 국민기금에 반대하는 건 그 때로선 당연했어요. 국민기금 정책으로 많은 일본 국민이 모금과 기부를 했고, 일본 정부가 갹출금을 내면서 애매한 모양새로 국민기금이 진행됐죠. 국민기금을 할머니들이 못 받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었어요. 저는 할머니들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대협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당시 사회적 분위기도 그렇고 정대협 분위기도 그랬는데, 국민기금의 ‘더러운 돈’을 절대로 받으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이 문제에 대해 윤정옥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선생님은 “가족 중에 당뇨병 환자가 있다고 생각해 봐라. 그분이 단 걸 먹고 싶다고 한다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셨죠. 즉 이 운동을 ‘우리’ 모두의 투쟁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지요. 증언집 작업을 하며 개인적으로 친분이 쌓인 할머니들이 몇 분 계셨는데 그분들 중에는 정대협의 말을 듣고 화를 내면서 저에게 전화를 해 오신 분들이 계셨어요. 윤정옥 선생님에게도 직접 전화가 갔으니 저보다 훨씬 많은 말을 들으셨을 거예요. 그래도 선생님은 신념이 있으셨죠.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셨고, 일본의 악랄한 행위를 경험했기 때문에 생각이 확고하셨던 거예요. 저처럼 외부에 기반을 둔 사람은 또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이고요. “너는 일본 사람이니까 우리의 마음을 모른다”는 말도 들었어요. 반은 맞는 말이죠. 그런데 납득이 안 가더라고요. 때마침 주디스 허먼의 책 『심적 외상과 회복』(한국어판 제목은 ‘트라우마’)이 1996년 12월에 일본어로 번역되어서 읽었는데 한국 활동가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식민지 피해를 직접 겪었든, 2차적으로 겪었든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그리고 그때까지 한국 사회든 정대협이든 ‘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피해로 바라보고 있었잖아요. 여성의 피해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인지 접근하는 연구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연구했어야 했는데 저도 그럴 능력이 없었어요. Q. 한국에서의 10년간의 체류 이전과 이후, 선생님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달라졌고 어떤 방향으로 진화했나요. 1993년의 그 일로 충격을 받고 나서 저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제가 한국 사람과는 생각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됐죠. 정대협 사람들과 일심동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예요. 어찌 보면 당연한 거죠. 한국과 일본처럼 가부장적인 국가 아래서 나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그런 체제하에서 양자택일 식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것은 타자를 차별하는 것과 연결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의 정체성을 국가에 소속시킬 필요가 없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자.’ 이것이 결론이었어요. Q. 일본군‘위안소’ 제도와 전시 성폭력, 성별화된 군사주의 비판 일반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자격)에 초점이 맞추어진 논의 지형에서 이슈의 젠더화 양상을 절감합니다. 특히 다양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이 존재하는데, 해결 운동 과정에서 ‘순결한 민족의 피해자’상에 맞춰 일원화, 표준화된 경향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배제되고 누락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남성중심적 성관념 비판, 여성 섹슈얼리티 및 노동의 착취와 비가시화 문제, 기지촌 여성 인권 문제와 연동되어 오늘날 현재진행형의 문제로 보편화되지 못함으로써 (일종의 끝난 운동으로서) 생명력을 잃고 게토화, 고립되는 양상과도 관련되는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990년대에는 불가피한 지점이 있었죠.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도 운동이 크게 달라지지 못했던 것 같아요. 수요시위의 ‘끝’에 대해서도 90년대에 이야기가 나왔는데 마무리 짓지 못했습니다. 수요시위는 일본에 항의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이 문제를 한국과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에요. 수요시위를 해서 일본을 규탄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요. 일본 정부는 달라지지 않아요. 더 많은 연구가 되어야 합니다. 1990년대부터 윤정옥 선생님은 정대협과 연구소가 합쳐져야 한다고 하셨어요. 운동의 중심을 연구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셨지요. 2000년 법정 직후에도 그런 논의가 있었지만 성사되지 못했어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겠지만 밖에서 보면서 아쉬웠습니다. Q. 1995년의 국민기금과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는 피해자들과 한일 활동가들을 분열시켰다는 점에서 굉장히 아쉬운, 일종의 실패한 기획으로 보입니다. 또한 1990년대와 2000년대 일본 법원을 상대로 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는 모두 기각되었습니다. 그 점에서, 일본에서의 의원입법운동(전시 성적강제 피해자 문제의 해결 촉진에 관한 법안)이 사법정의를 넘어선 ‘포스트콜로니얼’ 입법정의의 시도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관부재판 1심에서 승소한 결과 국회의원들의 입법 의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유엔의 권고가 법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됐죠. 그래서 모토오카 쇼지 의원 등이 중심이 되어 입법안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피해자 지원단체가 수긍하지 않으면 입법안을 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국민기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국민기금은 협의나 설득이 되지 않은 채 강행한 것이었잖아요. 그런 경험을 앞서 했기 때문에 정대협에서 찬성하지 않으면 진행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 입법안에서는 일본인‘위안부’를 제외했어요. 외국인 피해자들만 대상으로 한 거죠. 일단 이 법안을 제정한 후에 일본인‘위안부’도 포함하는 내용으로 개정하면 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결국 입법 자체도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Q.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2015년 한일 정부 간 합의가 가져온 논란과 운동단체장의 국회 입성과 피해자의 고발, ‘위안부’ 피해 부정론과 여성혐오의 소용돌이 속에서 너무 빠르게 기억이 휘발되고 담론 지형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피해자들과 1세대 운동가들의 작고 속에서 운동사의 정리 또한 필요한 시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2022년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의 증보판 부제를 ‘페미니즘의 과제’라고 하셨는데요.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위안부’ 문제를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다시 고찰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쓰게 됐습니다. 2020년 5월에 이용수 님의 문제 제기가 있었을 때 90년대 정대협 활동을 했던 한 사람으로서 반성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또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가부장적 시각에서 ‘위안부’ 문제 때리기 현상이 있었고 한국을 포함해서 글로벌하게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이런 세력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기존의 운동을 옹호하거나 자기 진영논리를 앞세우는 언설이 아니라 철저히 페미니즘적 시각에 서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운동이 페미니즘적 시각과 열정으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또 어떤 특성을 갖고 있었는지,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지금은 어떤 단계인지, 일본에서는 어떤 과제가 있는지 등을 써서 일본의 젊은 세대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2022년에 출간한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신간 표지 ⓒ야마시타 영애 90년대에는 조금이나마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논의가 점점 사라졌죠. 제가 2008년에 쓴 책에서도 ‘한국 페미니스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 바 있습니다. 다행히 2020년 전후로 활발해진 것 같고, 그러한 기조가 지속되었으면 합니다. 일본 사회 문제도 심각해요.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논의가 활발해지면 반드시 일본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함께 연구도 하고 토론도 하면 더 좋지요. Q. 마지막으로 현재 진행 중인 연구에 관해 말씀 부탁드리며, 향후 생각 중인 연구 방향이 있으신지 함께 여쭙니다. 한국 드라마의 역사를 한국 페미니즘의 역사와 연결 지어서 연구하고 있어요. 또 북한의 젠더에도 관심을 두고 있는데 그게 제 마지막 과제 같습니다. 민족학교를 졸업한 후 아이덴티티의 혼란을 겪어서인지 북한에 대해서는 뚜껑을 닫아버렸어요. 그 후 한국 사회나 여성문제에 대해서만 다뤘는데 뭔가 빠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북한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한반도의 가부장제가 어떤 식으로 남북한에 남아있고 또 새로 형성됐는지 들여다보고 싶어요. 일본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웃 나라인 북한에 대해서도 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핵문제나 세습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북한 드라마와 젠더를 연구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이헌미 인터뷰이: 야마시타 영애 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일시: 2023년 5월 16일 화요일 장소: 한국여성인권진흥원(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50 센트럴플레이스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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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소송 1부 - 하나의 논문으로 시작된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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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소송 1부. 하나의 논문으로 시작된 대일배상청구소송 2부.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중국은 19세기 말 일본군‘위안부’ 제도가 최초로 실행된 발원지로서, 한국과 더불어 ‘위안부’ 제도의 최대 피해국 중 하나이다. 그러나, 성적 순결을 잃은 여성을 가족의 수치이자 민족의 치욕으로 여겼던 가부정적인 중국 사회 속에서,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중국 국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시작으로 ‘위안부’ 문제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한 이후부터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또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 가장 큰 쟁점은 바로 일본의 법적 책임과 그에 따른 개인 청구권 문제이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처음 중국 국내에서 쟁점화되었을 때, 일본 정부를 향해 일관되게 피해 배상을 요구해온 민간단체와는 달리, 중국정부는 일본정부를 향해 배상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최대 피해국으로서, 전쟁배상에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는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중국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 글에서는 중국 ‘위안부’ 피해자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중국 정부와 민간단체의 입장 및 대응 차이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법학 강사 통정(童增)의 논문으로 시작된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중국 사회의 수면 위로 드러나기 이전이었던 1990년대 초, 중국 국내에는 이미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 베이징 화공 관리 간부 학원(北京化工管理干部学院)의 법학 강사였던 통정(童增)은 동유럽 국가들의 전쟁배상 소송 기사를 접한 후, 중일 간 전쟁 피해 배상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연구를 통해 「중국은 일본에 피해배상 요구를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다(中国要求日本“受害赔偿”刻不容缓,1990)」라는 제목의 논문을 작성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국가배상과 민간배상은 분리해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중국 정부에 의해 국가의 배상청구권은 포기되었으나,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통정은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 신문사, 잡지사 등 각종 매체를 찾아갔지만 민감한 문제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1] 통정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1991년 3월 베이징에서 제7기 전국인민대표대회(이하 전인대) 제4차 회의가 열리자 통정은 각 성의 인민대표들이 묵고 있는 호텔에 직접 찾아가 자신의 논문을 전달했다. 귀주(贵州) 전인대 대표단의 왕루셩(王录生)은 통정의 논문에 관심을 보였고, 이를 전인대 제5차 회의에서 의안으로 제기하고자 했다. 왕루셩은 인민대표들에 이 문제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통정에게 국제법의 관점에서 국가배상과 민간배상의 개념 차이 및 배상 문제를 자세히 설명한 글을 다시 작성하게 하였다. 이에 통정은 「국제법의 신개념—피해배상(国际法的新概念—受害赔偿)」이라는 글을 완성하고 그해 5월 『法制日报(법제일보)』에 발표하였다.[2] 이후 왕루셩을 비롯한 32명의 귀주 전인대 대표 그리고 왕공(王工) 및 38명의 안훼이(安徽) 전인대 대표가 각각 대일배상 요구에 관한 의안을 제기하였고, 이는 전인대 제5차 회의의 제7호의안과 제10호의안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두 의안은 사회 각 계층의 관심을 받았고, 현지 매체들은 통정의 글을 빠르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위안부’ 문제 민간연구가 장솽빙(张双兵)은 통정의 글을 읽고, 허우둥어(侯冬娥) 할머니를 찾아가 피해 사실을 고백하도록 설득하였다. 거듭되는 설득에 할머니는 55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피해 경험을 털어놓았다. 1992년 7월 7일, 장솽빙의 도움으로 허우둥어 할머니를 포함한 중국 산시성(山西省)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5명과 친족 3명은 주중일본대사관에 사죄 및 배상을 요구하는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는 중국의 ‘위안부’ 피해자가 처음으로 일본 정부에 제기한 피해배상 요구로서, 중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오랜 기간 숨겨왔던 자신의 피해 경험을 고백하고, 일본 정부를 향해 사죄 및 배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통정은 피해자들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맡아줄 변호사를 물색했다. 1994년 5월 6일, 중국의 대일소송 문제에 관심이 있던 한 일본 기자가 일본 민주 법률가협회 사무국장 오노데라 토시타카(小野寺利孝)에게 중국의 상황에 대해서 알렸다. 이후 기자의 도움으로 오노데라는 통정과 만남을 가졌고, 중국 피해자들의 상황을 인지하게 되었다. 오노데라는 그해 8월 통정과 협약을 맺고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대일 손해배상청구소송의 법률대리인이 되었다. 오노데라는 32년 동안 이에나가사부로의 역사교과서 재판을 담당했던 오야마 히로시(尾山宏) 변호사를 변호단 단장으로 임명하고, 그의 추천에 따라 731부대 및 난징대학살 소송 담당자 와타나베 하루미(渡边春己) 그리고 한국, 필리핀 일본군‘위안부’ 소송을 담당했던 오모리 노리코(大森典子)를 주축으로 발기인그룹을 조직했다. 이는 일본민주법률가협회 및 일본변호사연합회 변호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많은 변호사들이 중국의 ‘위안부’ 피해자 조사 및 소송 활동에 참여 의향을 밝혀왔다. 이에 따라 중국인 전쟁손해 법률조사단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총 4차례 중국을 방문해 현지를 조사하고 피해자와 만났다. 이후, 1995년 8월 중국인 전쟁 피해 배상청구사건 변호사단이 조직되면서, 대일소송을 위한 ‘위안부’ 피해자 개별 사례 조사가 정식적으로 실시되었다. 이외에도, 일본 오카야마 대학의 이시다 요네코 교수를 비롯한 일본의 학자, 변호사, 학생 및 일반인들이 중국에서 발생한 일본군대의 성폭력 진상 조사 및 배상청구 소송 지원회(이하 차명회)를 1996년 10월에 결성했다. 이들은 중국 산시성 거주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고, 동시에 대일소송을 지원했다. 이처럼 일본 민간단체의 도움과 함께, 본격적인 중국의 ‘위안부’ 피해자 대일 손해배상청구소송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중국 ‘위안부’ 피해자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사례 1995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제기된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은 총 4건이며, 4건 모두 패소하였다. 각 소송 사례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일본 재판부는 아래 논리를 원용하여 ‘위안부’ 피해자의 청구를 기각했다. 1) 군속, 일본군´위안부´ 등으로 강제동원됐던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요청을 기각하는 판결을 내놓았다." popuptitle="일본 민법 제724조" data-url="/taxonomy/term/440">일본 민법 제724조에 따라 청구권의 공소시효는 만료되었다. 2) ‘위안부’ 제도는 일본 헌법 제정 이전에 발생한 행위로 국가에 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다. ( 국가무답책) 3) 국제법상 개인이 주체가 되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할 수 없다. 4) 1952년 대만과 일본 사이에 맺은 일화평화조약으로 중국인의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었다. 5) 1972년 중일공동성명의 제5조(중화인민공화국정부는 중일 양국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의 청구를 포기하는 것을 선언한다.)에 의해 중국인의 개인청구권은 이미 소멸되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각주 ^ 童增:中国存在强大的反日、仇日、厌日情绪(2013/09/14), http://news.ifeng.com/mainland/special/ribenguan/detail_2013_09/14/29613716_0.shtml ^ 王录生:《民间对日索赔》议案提出内幕. 时代潮,2005(17):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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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이름들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것 -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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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관련 기록물의 행간을 읽어내고 엮은 책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큰 어려움 중 하나는 관련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직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문서의 상당수를 파기하였다. 일본군에게 불리한 문서들이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활용되거나, 일본군의 전시 잔학행위가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자료를 파기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를 동원하거나 관리하면서 작성된 문서들도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은 아시아·태평양의 여러 지역에서 수많은 여성을 위안소로 강제동원했고, 이들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명부나 명단을 만들었다. 명부는 일본군이 만든 제도 속에서 여성들이 이름과 숫자로 적혀 통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자, 일본군의 범죄행위를 분명하게 보여줄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명부 중 아주 일부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2019)은 현존하는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를 분석한 연구를 모아서 정리한 책이다. 7명의 저자가 이 책의 집필에 참여했으며 책은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의 발굴 현황과 이것이 작성된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본론은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된 명부들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명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글을 덧붙이는 형태로 되어있다. 부록에는 책에서 다룬 중요 자료의 일부가 원문 형태로 제공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2010년대의 연구 성과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명부나 명단들이 발견된 것은 이 문제가 알려진 1990년대부터이지만, 비교적 최근에야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연구 성과가 점점 축적되면서 명부에서 여러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연구성과들을 편집하여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명부 문제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도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는 데에 이 책의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고, 거기에서 무엇을 읽어 낼 수 있을까? 강정숙 선생님의 글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名簿) 종류와 연구의 의미」도 이 문제를 다루지만, 여기서는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명부는 작성한 주체와 목적을 중심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군이 '위안부'를 동원하고 위안소를 운영하기 위해 생산한 명부들이다. 책의 첫머리에 실린 한혜인 선생님의 글 2편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명부의 네 가지 분류 일본군이 만든 '위안부' 관련 명부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여성들을 모집하여 위안소로 이동시킬 때에 필요한 명부, 위안소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명부, 군인‧ 군속의 인원을 파악하기 위한 명부, 전후 귀환 과정에서 만들어진 명부 등이다. 전쟁이 확대되면서 일본군은 중국을 시작으로 아시아·태평양 여러 지역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들을 동원했다. 전시에 민간인 여성을 전장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의 허가가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문서들이 작성되었다. 도항(渡航) 허가서나 신분증명서, 승선명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명부들은 일본군'위안부'의 동원 실태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지만, 대부분이 파기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예외적으로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특요원('위안부') 명부가 남아있는데, 이는 여성들을 대만의 지룽(基隆) 항에서 중국 남부의 하이난으로 도항시킬 때 작성한 것이다. 최종길 선생님의 글이 이를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두 번째로 위안소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명부가 있다. 지역에 따라 위안소를 관리하는 주체가 달랐는데, 일본군이 이를 직접 관리하기도 했고, 현지의 행정기관이나 경찰이 관련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위안소 관리를 위해서는 위안소 내의 인원을 정리한 명부의 작성이 필수적이었고, 이는 정기적으로 작성, 보고되었다. 관련 문서들 대부분이 사라졌으나, 연합군이 전후에 작성한 「ATIS 조사보고서 120호, 일본군의 편의위락시설」에는 필리핀에서 연합군이 일본군으로부터 획득한 위안소 관리 문건의 예시와 서식들이 남아 있다. 작성된 명부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명부 작성을 위한 예시와 서식은 일본군'위안부'를 관리하기 위한 절차와 체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서식에 따르면 위안소 관리를 위해 '위안부'의 영업허가증, 업자가 작성하는 위안소 영업 허가 신청서 및 영업 보고서, 성병 검진 보고서, 교체 허가 신청서, 위안소의 종업원 명단 등이 작성되어야 했다. 위 명부들은 모두 일본군'위안부'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명부들이다. 특히 종업원 명단은 성명, 출생일시, 직업, 거주지, 본적 등 상세한 내용을 모두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작성된 명부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명부 작성을 위한 예시와 서식은 일본군'위안부'를 관리하기 위한 절차와 체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세 번째로는 일본군이 군인‧ 군속의 인원을 파악하기 위해 만든 명부와, 현지의 조선인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조선인들의 인원을 관리한 명부가 있다. 전자로는 「유수(留守)명부」와 「복원명부」, 후자로는 「진화계림회명부」 가 있다. 이 명부들은 본래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명부 안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볼 수 있다. 「 유수명부」 에서는 전쟁 말기 일본군이 '위안부'를 간호부로 편입했던 정황이 확인되고, 「진화계림회명부」에서는 위안소 업주로 직업을 등록한 조선인들의 기록을 통해 중국 진화에 위안소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 유수명부」는 한혜인 선생님의 글에서, 「진화계림회명부」는 쑤즈량·천리페이 선생님의 글과 윤명숙 선생님의 글에서 각각 자세히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후 귀환 과정에서 만들어진 명부들이 있다. 일본이 패전한 이후 각지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이 스스로 조직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었거나, 연합군이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귀환시키는 과정에서 만든 명부들이다. 이 명부들은 조선인의 강제동원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로 활용되지만, 그 안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흔적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강정숙 선생님은 「팔렘방조선인회명부」를 바탕으로 인도네시아 팔렘방의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피해자의 동원 상황을 분석하고 있다. 책에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연합군은 전후 포로로 잡힌 조선인 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를 발견하고 이들에 대한 보고서와 명단을 작성하기도 했다. 버마 미치나에서 연합군에게 붙잡힌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보고서인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와 중국 쿤밍의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포로들을 조사하고 작성한 「쿤밍의 조선인과 일본인 전쟁포로」가 그것이다. 이 두 보고서에 첨부된 명단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과 주소, 나이, 동원 시기가 남아 있다.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에서 버마 마니차로 동원된 여성들 20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한국 정부에 피해자로 신고하지는 않았다. 명부를 통한 연구의 어려움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를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의 글들은 일본군'위안부' 연구의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명부를 분석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보통 명부가 제공하는 정보들이 매우 단편적이고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명부가 작성된 역사적 맥락이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명부 속 이름만으로는 의미를 찾아내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는 아직 분석되지 않은 조선인의 승선명부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 승선명부에는 전쟁이 끝난 후 태평양의 여러 지역에서 귀환한 조선인들의 이름, 귀환일시, 직업, 주소 등이 남아있다. 대부분이 남성이지만 때로 여성의 이름도 발견된다. 이들이 '위안부' 피해자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이를 설명해줄 또 다른 자료가 없다면 추가적인 연구와 분석을 진척시키기 어렵다. 피해자의 증언, 동원 지역에 관한 자세한 정보, 문서 기록이 교차하지 않는다면 명부 그 자체로는 연구를 지속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명부에 기록된 내용들이 개인정보라는 점은 연구를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물이다. 지금은 논문이나 연구 결과물에서 피해자의 이름이나 주소, 인적 사항을 공개하고 있지만,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시작되던 1990년대에는 이런 정보를 학계나 일반에 공개하기 쉽지 않았다. 피해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은 이의 정보까지도 자료 공개로 인해 노출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우려하여 자료를 제공하는 공공기관이 처음부터 이름이나 여타 정보를 가린 문서들을 공개하기도 했다. 자료 활용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명부를 바탕으로 피해자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세한 증언을 바탕으로 피해 지역의 명부에서 다른 피해자의 이름을 찾아낸 사례들이 몇몇 있다. 증언이 자료와 만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발굴된 명부의 수많은 이름 중에서 이렇게 피해자로 밝혀진 사례는 손에 꼽을 만큼 적고, 여전히 많은 이름들이 베일에 싸인 상태로 남아있다. 연구자 개인 혹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명부에 남아있는 이름과 주소를 바탕으로 더 많은 피해자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피해자를 찾아내는 것이, 피해자 본인이나 가족이 바라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점이 또 발목을 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연구를 지속할 가능성 역시 갖고 있다. 많은 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가운데, 가족의 기억과 증언을 통해 명부를 바탕으로 피해자와 피해사실을 더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는 귀환자의 승선명부를 바탕으로 피해자가 태평양의 트럭 제도로 동원되었음을 확인한 사례도 있다. 다만 이것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다. 덧칠된 이름들에서 역사 발견하기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다른 자료와 달리 명부는 특정 지역으로 동원된 사람들의 수, 출신지, 연령과 같은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이런 정보는 두 가지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다. 첫 번째로 명부를 활용해 특정 지역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다. 중국 진화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팔렘방과 같이 명부가 발견된 지역에 관한 연구는 그곳에 얼마나 많은 '위안부'가 동원되었고, 얼마나 많은 위안소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증언과의 비교검토, 현지 조사가 함께 이루어진다면 명부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지역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일본군'위안부' 제도 전체의 모습을 되짚어볼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제도를 설명할 때 곤란한 부분 중 하나는 전쟁 당시 얼마나 많은 일본군'위안부'가 존재했는지, 그 중 조선인의 비율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추정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주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략적인 비율을 가늠하게 해주는 몇몇 자료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특정 지역의 연구는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어떤 지역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동원되었는지, 그들의 동원 시기는 어떠했는지, 그곳에 얼마나 많은 일본군이 주둔했는지 확인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실증적으로 규모를 추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군이 점령했던 모든 지역의 위안소가 동일한 방식으로 운영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겠지만, 여러 지역의 사례를 종합한다면 더욱 정확한 추정이 가능할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명부 연구는 아직 가능성이 많이 남아 있는 분야이다. 발견되었지만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명부도 많고, 새롭게 해외 자료보관소들에서 발견되는 명부들도 있다. 이 명부들에 관한 연구는 모두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실태를 밝혀내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연합군, 점령지의 조선인 조직들에 관한 연구와 함께 명부를 작성한 이들이 가졌던 시각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책 본론에 수록된 서민교 선생님의 일본군에 대한 연구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안소를 설치한 주체인 일본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놓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연구의 분야와 시야가 확장될 필요가 있다. 명부에 대한 연구는 일본제국의 식민지와 점령지에 대한 문제, 인종주의적 시각의 문제, 전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 등 여러 주제와 결합할 수 있고 결합해야 한다. 앞으로도 활발한 연구 성과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 목차 1부. 은폐의 기술, 제도 속에 숨겨지는 이름 발견되는 이름, 이른바 '위안부' 명부 - 한혜인 일본군'위안부'제도의 운영과 기록되지 않는 이름 - 한혜인 타이완척식주식회사의 위안소 운영 실태와 가려진 명칭 - 최종길 2부. 숨겨진 '위안부' 이름 발견하기 중국 저장성 「진화계림회명부」 속 '위안부' - 쑤즈량・천리페이 인도네시아 「팔렘방조선인회명부」 속 '위안부' - 강정숙 보론 기록과 기억의 사이에서, '위안부' 관련 명부 연구 - 강정숙 중국 당안관 자료 현황과 자료 해제(「진화성구 근황표」와 「진화계림회명부」) - 윤명숙 중일전쟁기 일본군 상황과 일본군위안소 설치 - 서민교 부록 자료 1. 인원 및 물자수송의 건 자료 2. 지나사변 이후 중남 중국에서 군에 대한 협력사항 자료 3. 타이완척식 관계 하이난도 도항자 인명표 자료 4. 하이난도 조사대용 및 군용자재 공급의 건 자료 5. 독립기념관 소장 수용인원명부 자료 6. 1946년 종전 당시 일본군 육군 주요 부대 편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