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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페미니즘 국제정치학: 또 다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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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주요 내용은 황영주, 2021, “페미니즘 국제정치이론,” 박건영·신욱희 편, 『국제정치이론』(서울: 사회평론 아카데미)에 근거하고 있다.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군사주의(militarism) 연구로 유명한 신시아 인로(Cynthia Enloe)가 1983년, 『카키색이 너에게 어울릴까?(Does Khaki Become You?)』라는 기념비 같은 저작을 통해서 여성의 삶이 군사주의와 서로 양립될 수 없다는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타 학문 영역에 비해서 국제정치학 분야에 있어서 젠더의 수용은 ‘많이’ 늦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각(遲刻)’은 국제정치학이 갖는 학문적 속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국제정치학이라는 학문은 이론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관심을 국가와 국제정치체제에 두는 경우가 많다. 즉, 국제정치학의 주요 이슈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국제정치체제 유지다. 또한 국제정치학은 국가 안보(national security) 확보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국가 안보와 세계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제기구나 국제법을 활용해야 한다는 이상주의적 정향이 있는 반면에, 군사력 확보 및 동맹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입장도 존재한다. 이러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국제정치체제를 분석의 대상으로 하는 것에는 큰 이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분석 방법으로서 젠더 수용이 늦어졌다는 점은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즉, 국가와 국제정치체제에 초점을 맞추는 학문적 속성상 젠더 또는 여성(개인)의 수용을 꺼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냉전체제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군사력 확보와 그것을 매개로 하는 권력(power) 행사에 학문적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젠더를 수용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로의 군사주의 비판은 시대를 앞선 혜안을 보여주었다 하겠다. 실제로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의 시작은 냉전 해체라는 국제정치체제의 변화에 따라 등장한 1990년대 초반의 후기구조주의 접근을 수용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 국제정치학이 젠더를 분석의 도구로 수용하게 된 것은 국제정치학자들의 다양한 또는 대안적 방법론 모색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 해체에 따른 국제정치 현실의 변화는 국제정치학에서의 전통적 접근 방법에 대한 성찰과 반성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국제정치학에서는 비판이론, 탈식민주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이론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젠더 또는 페미니즘으로 국제정치학을 분석하는 방법도 나타났다. 1992년 안 티커너(J. Ann Tickner)의 『여성과 국제정치 : 국제안보 달성을 위한 페미니즘 관점(Gender in International Relations: Feminist Perspectives on Achieving International Security)』(한국어판: 안 티커너 지음, 황영주 외 옮김,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1)은 국제정치에서 젠더를 수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저작물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티커너는 국제정치학의 전통적 주제인 안보를 각각 국가안보, 환경안보, 경제안보로 세분한 다음, 안보와 관련된 전통적인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어 이 전통적 관점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해체한 이후, 젠더를 수용하여 ‘달리 보이는’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크게 두 세대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세대는 국제정치학이 갖는 전통적 방법론, 인식론, 존재론에 도전하는 비판적 입장을 갖는 접근이다. 이들의 노력은 90년대 초반의 후기구조주의의 학문적 세례와 함께 진행되었다. 티커너 이외에도 국제관계를 ‘관계의 국제화’로 재정의를 요구하는 크리스틴 실베스터(Christine Sylvester)의 『페미니즘 국제관계이론: 끝나지 않은 여정 (Feminist International Relations: An Unfinished Journey)』(2001)이 제1세대의 대표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세대는 1세대의 이론적 재구성에 힘입어 그것을 국제정치의 다양한 영역에 적용·응용해 나가는 경향이다. 제1세대가 국제정치의 방법론, 인식론, 존재론에 대항하는 방법론적 다양성을 모색했다고 한다면, 2세대는 이미 확보된 방법론적 다양성을 실제 국제정치에 적용하는 노력에 집중한 세대이다. 그 대표적인 접근으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저작은 한국인 2세인 캐서린 문(Katherine H. S. Moon)의 『동맹 속의 섹스: 한미관계에서 군사 매매춘 (Sex Among Allies Military Prostitution in U.S.-Korea Relations)』(1997년)(한국어판: 캐서린 H.S.문 지음, 이정주 옮김, 삼인, 2002)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세대 구분 이외에도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일반 국제정치학 이론과 다른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국제정치(학)에서 여성의 존재 확인(경험), 남성의 경험을 추상화하는 국제정치(학) 비판(비판), 여성의 경험이 투영된 바람직한 국제정치(학) 만들기(규범) 등으로 그 특징을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특징으로,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여성의 경험을 국제정치학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국제정치(학)에서 여성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것은 행위자로서의 여성에 관한 관심일 뿐만 아니라, 극히 젠더화된 국제정치에서 여성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기존의 국제정치(학)가 갖는 기본적 가설 들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 속에서 여성의 경험과 활동을 확인하고자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making the invisible visible)’노력인 것이다. 이는 인로의 공헌이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다양한 저작물에서 신흥공업국의 경제발전에서 어린 여공들의 헌신, 외교 관계에서 외교관 부인의 가사노동과 공헌, 매매춘 여성들의 외화벌이와 국가 경제와의 상관성 등 국제정치에서 여성의 존재에 주목했다. 두 번째 특징으로,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기존의 국제정치학에 대한 매우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주로 국제정치학이 남성의 경험만을 추상화한다는 비판은 제1세대에서 제기되었다.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의 비판적 특징은 국제정치와 그 이론이 남성적 경험에 바탕을 둔 것으로 여성을 포함하는 인간의 경험과 이해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예컨대,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에서 국가의 권력 추구행위는 페미니즘 진영에서 볼 때는 ‘지배적인 남성성(hegemonic masculinity)’의 이념형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국제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가설 중 하나인 ‘국내-질서/국외-무질서’는 젠더의 사회적 구성과 극히 유사한 것이 된다.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자들은 이를 국내-질서-남성성/국외-무질서-여성성이라는 이원적 대립구조로 병치하여, 국제정치이론 자체가 젠더화된 속성을 갖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세 번째 특징으로,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자들은 대개 규범적 입장을 갖는다. 부분적이며 왜곡된 남성의 경험으로 형성된 국제정치(학)는 여성의 경험과 인식을 통해서 개선시켜 나가야만 한다. 권력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지배적 남성성을 가진 남성과) 다른 경험은 현재의 무질서한 국제정치 현실을 바로 잡는 데 적절한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국제정치를 국가 권력 추구 및 안보에 초점을 맞추는 전통적 국제정치에서 인간의 보편적 이익을 확보하는 것으로 그 관심을 이동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티커너의 저서에서, 안보(security)는 국가의 안전(safety of state)이라는 제한된 정의(definition)에서 벗어나 젠더 관계를 포함하는 모든 불평등한 사회관계의 제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펼쳐진다. 이렇듯,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자들의 노력은 그 이론에서 다양한 성취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도약 중 하나는 군사주의 비판과 페미니즘 평화이론이라고 할 것이다. 인로가 보여준 관심과 같이, 군사주의와 여성의 삶과의 길항관계 뿐만 아니라, 국제정치(학)의 궁극적 가치인 국가 안보 쟁취를 위한 군사력 의존은 군사주의의 재생산과 함께 여성에 가해지는 폭력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만다. “국가 안보와 결합한 군사주의는 외부 적과 위협으로부터 국가와 국민 보호를 핑계 삼아, 남성 우위의 기존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유지·강화하는데 핵심적 기제로 작동한다.”[1] 제2세대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소개한 캐서린 문의 『동맹 속의 섹스』는 1970년대 미군 군사기지촌 인근의 ‘양공주’로 명명되는 여성들의 육체가 어떤 방식으로 국가 안보를 위하여 ‘이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연구를 담고 있다. 미군 철수에 대응하기 위하여 매매춘 여성에게 ‘깨끗한 성(clean sex)’을 강제하고 그를 통해서 국가 안보를 구현하고자 하는 1970년대 국가의 군사주의적 폭력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폭력적 국가의 속성을 확인하게 되지만,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에서 보면 여성의 몸으로 체현(體現)되는 강대국과 약소국의 국제관계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의 수용은 어떨까? 한국의 활발한 페미니즘 운동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국제정치학 분야는 그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작동되고 있는 강한 가부장제를 가장 큰 이유로 들 수 있겠다. 더군다나 국제정치학 분야는 국가 권력 및 안보를 다루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관여를 극도로 저어했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도 남북한의 대치 상황은 국제정치이론에서 현실주의 관점이 우선시되어 페미니즘적 시도를 ‘순진한’ 것으로 치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국제정치학을 다루는 대표적인 학자들이 특정 국가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새로운 페미니즘적 접근을 대단히 낯설어했을 가능성도 높다.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그동안의 국제정치에서 다루지 못한 영역에 혜안을 제공할 수 있다. 전통 국제정치이론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양국의 외교 갈등의 원인으로만 조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의 시각을 채용한다면 ‘위안부’와 관련되는 한일 양국 간의 관계를 살펴보는데 다른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위안부 문제를 국가의 외교 문제로 그 관심을 두는 대신에, 각 국가 내부의 젠더 구조와 담론이 어떤 방식으로 양국 간의 갈등 구조를 완화 또는 격화시키는지 분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여전히 낯선 학문적 여정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면서 국제정치학의 젠더화된 측면을 비판하고, 무엇보다도 폭력을 종식하고 불평등한 사회관계를 개선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에 합당하는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다. 각주 ^ 황영주(2021), 앞의 책,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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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인터뷰 치유회복을 통합한 국가폭력 조사의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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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회복을 통합한 국가폭력 조사의 길을 열다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의 윤경회 간사 인터뷰 1부 그동안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 통념, 법적 권한의 한계와 함께 조사 의지를 가진 주체가 형성되지 못한 탓에 결실을 맺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2018년 9월 14일부터 시행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근거해 이듬해 12월 27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조사를 위한 법적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이 사건의 종합적인 피해 실상을 규명하고 피해자의 치유와 명예회복 방안을 마련하고자 한 첫 발걸음이었다. 2024년 6월 종합보고서를 제출하며 활동을 종료한 '5·18조사위'는 한계가 있었지만 피해자들의 증언에 부합하는 사실 자료와 정황 증거를 토대로 피해 실태를 확인하고 국가의 책임을 확인하는 성과를 남겼다. 이 과정에 조사팀장으로 참여했고, 이어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 결성의 주축이 된 윤경회 간사와 '5·18조사위' 및 '열매'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1) 치유회복을 통합한 국가폭력 조사의 길을 열다 (2) “우리는 서로의 용기, 서로의 증언자” Q : 안녕하세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사회적 참사와 과거사 조사 활동에 참여한 특이한 이력이 눈에 띕니다. 자기소개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 윤경회 : 개인적으로 오늘 웹진 <결>과의 인터뷰는 저에게 특별해요. 제 이력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닿아 있거든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던 대학 1학년 새내기 때 공익광고 제작에 관심이 많아 다큐멘터리를 꽤 봤어요. 그때 <낮은 목소리2>를 만난 계기로 역사다큐 감독을 꿈꿨는데, 이것이 사회문제에 대한 천착으로, 학생운동으로 연결된 거예요. 그러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 업무를 수행했고, 고양성폭력상담소에서 상근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조사위)'는 전임 팀장께서 건강문제로 공석이 되어 지원하게 되었구요. 2023년 3월 13일부터 출근했으니 조사 활동 종료일인 12월 26일까지 9개월을 남긴 상태에서 제가 합류하게 된 거죠. 이듬해 6월 조사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5·18조사위 활동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한 뒤에는 피해자 분들과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이하 '열매')'를 만들고 간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활동 종료 9개월 남기고 합류하고 보니… Q : 5·18민주화운동 당시 발생한 성폭력 피해에 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종합적이고 실체적인 진실에 다가가지는 못했었죠? 🧶 윤경회 : 맞습니다. 과거에도 성적 피해 사례가 언급된 적 있고, 연구자들이 진행한 구술 채록이 언론이나 다큐에 소개되기도 했어요.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공식화된 것은 2018년 말입니다. 피해자 김선옥 님의 5월 8일 인터뷰를 계기로 발족한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의 조사 활동을 통해서요. 하지만 공동조사단 활동 기간(2018.6.8.~10.31.)이 채 다섯 달도 안 됐고, 법적 권한에도 한계가 있어 종합적인 피해 실상을 확인하기는 어려웠어요. 이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근거해 2019년 12월 27일 출범한 '5·18조사위'가 2020년 4월 공동조사단의 조사 자료를 인계 받아 검토하고, 5월 11일 직권으로 성폭력 사건에 관한 조사를 개시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2021년 1월 5일 '성폭력'을 조사 범위에 포함하는 법 조항이 신설되면서 본격적인 조사 활동에 들어가게 되고요. Q : 활동 종료 9개월 전이면 조사가 상당히 진전된 상황에서 합류하신 거네요. 🧶 윤경회 : 시기상으로 그래요. 처음에는 인계 받은 조사 자료를 검토, 취합해 심의 안건까지 담은 보고서를 정리하면 될 줄 알았어요. 그 일만으로도 빠듯한 시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자료를 검토해보니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법적 효력을 가지려면 피해자의 동의부터 구체적인 피해와 관련한 질문과 답변, 간인까지 마친 진술 조서 형식이어야 하는데, 피해 입증 자료로 인정받기 어려운 단순 녹취록에 불과했어요. 이유를 봤더니 조사관이 피해자를 만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드러나지 않은 분들까지 찾아내기 위해 이전 자료나 연구까지 뒤져 전수조사해 연락했지만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냐', '피해를 밝힌 적이 없다'며 완강히 거부하는 분들이 많았던 거예요. 상황이 그러니 만나만 주십사 겨우 설득해 확보한 자료가 녹취록이었던 건데, 내용도 빈약했어요. 이분들에게는 온몸에 새겨진 40년 전의 피해를 처음으로 언어에 실어 말하는 경험이다보니 내용 여기저기가 거시기, 거시기예요. 또 울음으로 끊긴 부분도 많아요. 피해자가 우시니 조사관도 울고… 이야기가 중단되는 거죠. 단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도 없도록! Q : 피해 입증 자료 전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는 많이 당황하셨겠어요. 🧶 윤경회 : '큰일났구나!' 겁이 덜컥 났죠. 힘들게 진술하고 곧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하고 계신 분들께, 새 팀장이 와서 다시 조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상황이잖아요. 실제로 '전임은 어디 갔냐', '우사스럽게 또 하란 말이냐', '이리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안 했다'… 두어 달 동안 엄청 원성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연락을 드리고, 계속 다니다가 한 피해자의 가게에서 5시간 동안 기다린 적이 있어요. 그때가 조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운 결정적인 기회였던 것 같아요. 끝내 조사 동의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간 쌓여온 피해자들의 경험을 대변해주셨거든요. 그동안 관심이 고마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피해 경험과 아픔을 성심을 다해 얘기했는데, 어느 순간 자신들이 넘고 헤쳐온 삶의 애환은 빠진 채 여고생, 군용 트럭, 집단 강간 같은 자극적인 용어들로 그 이야기가 소비되더라는 거죠. 그러고 난 뒤에는 다시 찾아오는 사람도, 국가의 성의 있는 조치도 없었고요. 한편으로 피해자의 '말하지 않을 권리'도 저희에게 굉장히 어려운 딜레마였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피해자의 욕구이자 권리잖아요. '증언'의 의미도 있고요. 반면 말하고 싶지 않은 피해 경험도 있었어요. 한 예로, 5·18 당시 전남합동수사본부 조사 과정에서 성고문을 당했거나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됐다가 조사받으러 상무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집단적인 성적 침해 피해가 있었어요. 문제는 그 피해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용기 있는 여성의 증언이 다른 여성에게는 엄청난 공포였어요. 1980년대 정조 관념 속에서 함께 연행돼 구금, 조사받은 여성들은 '너도 그랬어?'라는 시선을 받을까봐 너무너무 무서웠던 겁니다. 누군가 밝힌 사실이 아무런 윤리의식 없이 인용, 재인용되거나 험하게 다뤄지는 걸 끔찍한 공포 속에서 봐야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Q : 보고서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질문을 다시 받으셨던 거네요. 🧶 윤경회 : 정말 난감했어요. 동시에 고마웠고요. 피해자들이 왜 진술을 거부하는지, 왜 적지 않은 분이 광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 살고 계신지, 그 고충과 저희가 뭘 모르는지를 알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작전을, 조사 설계를 다시 짰어요. 조사의 목적과 방향은 '단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도 없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첫째, 5·18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 피해자의 상황과 처지를 고려한 조사 방법과 40년 전 사건의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현실적인 판단 기준을 마련해 진상조사를 추진할 것, 둘째, 사건 후 피해자와 가족이 겪은 신체적, 정신적 피해 실상은 물론 사회관계적 피해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해 이들의 치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국가의 책임 있는 조치를 연계·도출할 것, 셋째, 국민들이 피해자의 오랜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상규명조사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함으로써 국민통합에 기여할 것 등을 설정했습니다. 이를 위해 조사팀을 새로 꾸렸어요. 5급 팀장과 6급과 7급 조사관 각 1명, 총 3명이 전부였지만요. 설득이 안돼서 결국 소수의 피해자만 조사에 동의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것, 조사를 통해 피해자라는 확신이 들었다면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국가의 통지서를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공유한, 기어코 이 일을 해내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한 인력이라는 점이 달랐달까요. 조사는 사람이 하는 거니까요. '국가폭력 피해' 전문가 없어 조사와 '치유적' 상담 병행 Q : 상담 전문가가 동행한 조사 활동이 인상적입니다. 🧶 윤경회 : 네. 다행히 전문위원을 위촉할 수 있어 성폭력, 국가폭력에 대해 이해가 있는 상담 전문가를 포함시켰어요. 피해자와 만남은 단 한 번의 조사, 그럼에도 의미 있는 조사여야 해요. 하지만 그 조사가 피해자에게는 트라우마를 재경험하는 시간이에요. 언어에 실어 누군가에게 피해 경험을 말하려면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재현해야 하는데, 몸으로 경험한 폭력이라 벌벌 떨고, 구토를 하고, 심지어 손발이 이렇게 퉁퉁 부어요. 인지적 과정이 아니라 몸으로 재현이 되는 거예요.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이하 성폭력특례법)」도 없던 때, 성폭력이 부녀자에 대한 정조의 죄였던 때, 여성으로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라 저수지로 뛰어들어야 했던 때의 피해 경험은 요즘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였어요. 성폭력 피해자 상담을 해온 저도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요. 이 때문에 조사 과정의 말하기가 치유적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준비된 상담자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국가폭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제대로 이해하는 상담 전문가가 없어요. 그간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으니까요. 결국 조사팀이 전문위원과 같이 감당해 가면서 조사와 상담을 겸하기로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지한 또 하나의 자각이 있어요. 저희가 공권력, 그러니까 군인이나 합수단 수사관에게 피해를 당해 국가와 사회에 불신이 높은 분들을 만난다는 사실이었어요. 이번에는 저희가 국가기관이고 공무원이에요. 이들이 피해를 인정받고 배·보상을 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저희인 거예요. 1980년대와 완전히 다르게, 조사 과정 전체가 공권력이 신뢰를 회복하는 '치유적 경험'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조사 활동 시작부터 함께 한 2명의 국방부지원단도 다르지 않았어요. 피해자들께 과거에는 가해자였지만 지금은 은폐된 진실을 물 위로 올리는데 조력하는 군인이라는 점, 이들의 도움으로 피해를 입증할 수 있도록 해 새로운 군인을 경험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감각 기억'과 '핵심 장면'에 주목하다 Q : 그때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재개된 셈이네요. 🧶 윤경회 : 그렇죠. 그런데 피해자 진술은 또 다른 난관의 연속이었어요. 이야기를 들어도 사건이 구성되지 않았거든요. 이들에게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장면이라 할 수 있는 강간의 시간에 대한 기억이 지워져 있었어요. 특별한 인상 착의는 없고 군복 아니면 그냥 '메리야스' 입은 남자예요. 과거의 자료나 증언을 놓고 보면 진술이 일관되지도 않고요.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취합되는 사전 정보가 있었습니다. 사건 발생부터 40년이 지난 일, 피해를 언어로 말해 보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충격적인 트라우마는 '블랙아웃', 즉 기억을 상실시킨다는 사실 등이요. 미국 9·11테러 10년 후 피해자를 추적해보니 사건 발생이 낮이었는지, 밤이었는지 기억하는 비율이 50%에 불과하다는 조사도 있어요.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무엇을 입증 자료로 쓸 수 있을까 검토하다 보니 반복되는 얘기가 보였습니다. 감각과 장면이었어요. 강간을 당할 때 느꼈던 감각, 그때 씩 웃던 군인의 표정, 장갑 낀 손, 하혈로 젖은 옷을 입고 숙소로 돌아갈 때의 축축함, 군용 트럭에서 우루루 내리는 군복 입은 사람들이 겁이 나 막 뛰었던 순간, 무서워서 셔터를 내릴 때 눈앞에서 누군가 대검에 찔려 피가 솟구치는 장면…. 이를 저희는 '감각 기억'과 '핵심 장면'이라고 명명하기로 하고, 이를 중심에 놓고 피해를 입증할 만한 진술을 서사적으로 듣기로 했습니다. Q : 서사적으로 듣는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이었을까요? 🧶 윤경회 : 녹음기를 켜놓고 피해 장소를 어떻게 가게 됐는지, 무엇을 겪었는지,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 오늘날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등을 피해자가 기억하고 말하는 대로 쭉 듣는 거예요. 그러면 조사관이 피해자의 삶을 '서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동시에 의미 있는 진술을 위해 무엇을 물어야 할지 감지하는, 어찌보면 피해자의 기억과 언어에 대해 학습하는 시간이기도 했고요. 그런 뒤 조사관이 피해자의 핵심 진술이 시간 순으로 드러나게 진술내용을 정리해요. 물론 자의적인 해석 등 부수적인 위험이 있기 때문에 진술 조서를 정리한 다음에는 소리내 읽어드리고, 마지막으로 그 내용에 피해자가 합의하면 정식 진술 양식인 '간인(間印. 함께 묶인 서류의 종잇장 사이에 걸쳐서 도장을 찍음)'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어요. 그런데 소리내 읽을 때 피해자와 저희 모두 놀라운 경험을 했어요. 피해자의 말을 조사관이 '이런 뜻이냐'고 확인하고 문장으로 표현할 때 자주 일어났는데, 에코랄까, 공명이랄까, 동시에 시공간이 울리는 느낌이에요.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을 통해 피해가 적절한 언어로 구성되고 제3자가 이해할 만한 새로운 글로 바뀌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하나의 매듭이 풀린 것처럼 '치유'의 경험을 하는 게 보였습니다. '시공간 울리는 경험' 바탕으로 19명 설득... 유형 분석 가능해져 Q : 피해자와 조사관이 어떻게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본 같습니다. 🧶 윤경회 : 그런 시간을 거쳐 진술에 동의하고 대인조사와 기록조사, 실지조사를 추진한 피해자는 총 19명입니다. 전수조사 때 파악한 52건의 피해 의혹 사례를 놓고 보면 적은 수치로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피해자와 조사관이 듣고 말하며 공명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이 결과도 어려웠을 거예요. 왜냐면 그 울림의 경험 속에서 차츰 조사를 거부하는 분들을 설득하는 '요령'이 생겨났거든요. 피해자의 신뢰를 얻는 것은 결국 지지하고, 최선을 다해 듣고, 의미 있는 질문과 정보를 찾으면서 진실에 다가가려는 저희 조사관의 태도와 의지라는 걸 여러 번 느꼈어요. 나중에 19건이 유형 분석을 하기에 충분한 숫자라는 연구자와 전문가의 평가까지 들어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Q : 이렇게 방향부터 태도까지 재설계해 진행한 '5·18조사위' 진상 규명 활동을 취합해 정리한 것이 결과보고서군요. 그 주요 내용을 소개해 주세요. 🧶 윤경회 : 조사위에서는 확인해야 할 것을 세 가지로 봤어요. 첫째는 5·18 당시 성폭력 피해 사실이 있었는가 진위 여부 파악, 둘째는 어떤 상황에서 피해가 발생했고, 책임 소재는 어디에 있는가였어요. 이건 출범 전부터 쟁점이었는데, 국가폭력이 아니라 군인 개인의 일탈일 수 있다는 시각이 있었거든요. 여기에 마지막으로 조사 재설계 과정에서 추가한 것이 사건 발생 후 현재까지 43년 동안의 신체적·정신적·사회관계적 피해였습니다. 그리고 40년만의 조사에서는 피해자들의 특성과 상황에 맞춰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조사 방법과 판단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확인 과정에 '피해자 중심적 접근' 원칙을 적용하기로 했어요. 피해자를 아픈 사람, 고통받는 사람, 약자, 배·보상을 바라는 수혜자로 보는 우리 안의 시각을 교정하고, 본인의 피해를 포함해 당시 5·18을 겪은 목격자이자 진상 규명을 위해 참여하는 권리 주체이자 국가에 증언을 각오한 증언자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을 바탕으로요. 이를 위해 피해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드리는 것은 물론 치유와 회복에 필요한 정책적 제안을 권리로 보장하고 분석해 보고서에 담기로 했습니다. 피해 진술의 일관성, 구체성, 합리성 등을 따지는 2020년의 형법 기준을 들이대면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피해를 가리기 어려우니까요. 이렇게 해서 집계된 피해 사례가 19건이었고, 최종 보고서에는 16건에 대해 '진상규명'으로 의결했습니다. 전직 계엄군의 참회와 반성 덕분에 확인된 성폭력 진상 Q : 3건은 왜 포함되지 못했을까요? 🧶 윤경회 : '진상규명불능'으로 판단된 3건 중 1건은 '진상규명불능' 원안이 가결된 것이고, 2건은 '진상규명' 원안이 부결된 건이예요. 2건 모두 시내버스에서 이루어진 성폭력인데, '대낮 도심의 시위진압작전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없다'는 통념이 강하게 작용했어요. 한 분이 이의신청을 했지만 조사활동기간 만료로 재조사 기회도 주어지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최종적으로 19건 사례를 종합 분석한 결과 먼저 성폭력 피해가 계엄군의 조직적인 작전으로부터 야기된 폭력이라는 사실, 즉 '국가의 책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피해 발생 상황은 크게 세 덩어리였어요. 하나는 광주를 고립시키려 주변 지역을 에워싸면서 진행된 외곽봉쇄작전에서 계속 발생해요. 매복을 위한 정찰 요원을 서너 명씩 보내는데, 이들이 찾고 이동하는 작전 구역 내 야산, 산골짜기 등에서 피해가 일어난 겁니다. 또 다른 피해는 도심의 시위 진압 작전이 이뤄진 터미널과 초등학교, 금남로 등지에서 나타나요. 당시 도심 집회에 대응하는 계엄군의 작전은 해산이 아니라 연행하고 체포하는 방식이었어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사진 기록에 남아 있는 것처럼 연행 후에는 속옷만 남기고 옷을 다 벗겨요. 대개 남성들이 탈의한 모습이지만 여성도 다르지 않았어요. 1979년 부마항쟁 때 시위에 참여하는 여대생들이 늘어나자 이를 새로운 현상으로 본 군 당국이 5·18 때는 창피를 당하면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해 초기부터 시위 진압 대책으로 강제 탈의를 지시하고 실행했습니다. 공용 터미널에서, 초등학교 앞에서 속옷만 빼고 다 벗겨진 여성들은 군용 트럭에 실려 전남대나 조선대 운동장으로 이동해요. 그렇게 이동하는 도중에 트럭 안에서 군인들의 추행이 자행됐어요. 계엄군에게 여성을 강간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강제 탈의 지시는 이동 트럭, 후미진 골목, 수색하는 집 등의 사각지대에서 폭력과 야만성을 부추기는 기제가 됐던 거예요. Q : 당시 계엄군의 강제 탈의 지시를 뒷받침하는 문서 기록이나 군인들의 진술도 있나요? 🧶 윤경회 : 지시 내용이 담긴 문서는 남아 있지 않았어요. 계엄군 지도부 중에 협조적인 이도 없었고요. 다만 꼭 강조하고 싶은 부분 중 하나는 5·18 성폭력 피해에 대한 진상 규명에서 피해 당사자의 용기 있는 증언이 결정적이었지만, 당시 투입된 계엄군의 참회와 반성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5·18조사위'의 주요 활동에는 당연히 계엄군에 대한 조사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국가의 책임을 판단하려면 군의 작전과 지시 상황, 피해와 연관성을 알아내야 하니까요. 그래서 당시 광주 금남로에 최초 투입된 제7공수여단 33대원을 전수조사하기 위해 총원 298명 중 주소지가 파악된 199명에게 서한문을 보내고 전화와 문자로 진술조사 참여를 요청했어요. 제가 입사하기 전 그만둔 6급 조사관의 조사 활동이었어요. 이중 약 10%인 29명이 응해 대인 조사가 이뤄졌고요. 이들을 통해 옷을 벗기라는 대대장의 지시가 있었고, 현장에서는 자기가 봐도 '미쳐 있었다'고 할 정도로 곳곳에서 여성들에 대한 추행이 벌어졌다는 증언을 확보했어요. 심지어 대검을 옷을 벗기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대원 중 1명은 대검을 날카롭게 갈아서 출동했다는 진술도 있었어요. 실제로 등에서 날카로운 것이 느껴진 뒤 옷이 벗겨지고 피를 흘렸다는 사례가 4건이고, 군용트럭에 오르다 대검에 찔려 결국 자궁을 잃은 피해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증언을 통해 전직 계엄군도 피해자들처럼 평생 수치심과 공포감을 지고 살아왔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국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 군인이 폭력의 주체였다는 부끄러움, 혹시 알아볼까 겁이 나서 제대 후에는 광주 쪽으로 아예 발길을 못한 분도 있었어요. 또 부마항쟁 때처럼 사나흘이면 광주도 진압될 거라던 예상이 어긋나니까 엄청나게 공포스러웠다는 거예요. 강도 높게 훈련받은 군인인데도 점점 인파가 늘고 차량 시위까지 격렬해지는 와중에 옆에 있던 동료가 맞고 다치고 쓰러지는 걸 보니까 눈이 돌았다고, 무서우니까 더 폭력적이 되더라는 이야기까지 하셨어요. Credit 인터뷰어 : 소현숙, 손정미 인터뷰이 : 윤경회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5년 5월 9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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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일본군의 중국 여성에 대한 잔혹행위 기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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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은 20여 년 전의 일로, 당시 나는 한일 ‘위안부’ 피해구제(redress) 운동을 주제로 졸업 논문을 쓴 바사대 학생과 함께 작업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은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아시아에서 침략 전쟁을 벌이는 동안 일본군이 설치한 강간소인 일본군 ‘위안소(ianjo)’로 수많은 중국 여성들이 납치되었지만, 그들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련이 중국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공백은 ‘위안부’ 제도의 전체 범위와 범죄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심각한 걸림돌이 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위안부’ 제도의 큰 피해자 집단 중 하나가 중국 여성들이었고, 이들의 고통은 일본군 성폭력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고자, 나는 중국인 ‘위안부’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여성들의 전시 트라우마를 글로 써나가는 일은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매우 힘든 작업이었다. 당시 필자가 만성질환을 앓고 있던 터라 더욱 그러했다. ‘위안부’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 역시 고된 과제였다. 일어일문학 강의, 여타 행정 업무와 연구 프로젝트와는 별개로 야간과 주말을 이용해 일본어, 중국어, 영어로 된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며 연구에 매진해야 했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다층적인 논의를 제공하고자 전쟁 중에 발표된 중국 민간인과 군인의 목격담, 전 일본군 장병이 작성한 문서, 중국에서 전시 잔혹행위를 목격한 외국인의 보고서와 일기 등의 자료를 활용했다. 생존자와 목격자의 증언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중국 학계의 쑤즈량(Su Zhiliang), 천리페이(Chen Lifei), 캉지안(Kang Jian), 천쥔잉(Chen Junying)과 협력했고, 그 외에도 다수의 중국 및 일본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고 번역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잔혹행위를 겪은 후에도 정의를 위해 싸워 온 여성들의 용기가 중국 ‘위안부’에 대한 책을 완성하는 데 힘이 되어 주었다. 『중국인 위안부: 제국 일본 성노예의 증언(Chinese Comfort Women: Testimonies of Imperial Japan’s Sex Slaves)』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총 세 군데의 대학 출판부, 즉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출판부(2013년), 옥스퍼드대 출판부(2014년), 홍콩대 출판부(2014년)에서 출간되었다. 중국계미국인사서협회(Chinese American Librarians Association)에서 논픽션 분야 올해의 최우수 도서(Best Nonfiction Book of the Year)로 선정하기도 한 이 책은 일본 제국군의 성노예 제도로 삶을 파괴당한 수십만 중국 여성들의 고통을 온전히 폭로한 최초의 영문 단행본이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일본의 만주 및 상하이 침략 초기(1932년)부터 난징 대학살(1937년) 이후 급속한 전쟁 확장과 1945년 패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국 본토에서 군 ‘위안부’ 제도가 확립된 과정을 추적하여 위안소 확산과 일본의 침략전 전개 간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1부에서는 또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일본 점령군이 피해자 가족에게 강요한 몸값, 소규모 부대가 교전지와 점령지에 설치했던 수많은 임시 위안소,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큰 피해자 규모 등 ‘위안부’ 제도의 숨겨진 측면 역시 조명한다. 2부에서는 위안소 생존자 12명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공동 연구자인 쑤즈량과 천리페이가 생존자들의 모국어로 녹음한 내용을 필자가 영어로 번역했다. 지리적 구분과 전쟁의 연대기적 전개에 따라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분류함으로써, 전쟁의 전체적 맥락을 배경으로 이들의 증언을 제시했다. 각 생존자들의 이야기는 전쟁 전의 삶에서 시작하여 성노예 기간과 전후에 겪은 고난으로 이어지며 위안소 생존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겪어온 고통을 드러낸다. 3부는 위안소 생존자들의 전후 삶과 중국 내 ‘위안부’ 피해구제 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생존자들이 전후에 사회적 편견과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오랜 세월 차별과 배척, 빈곤에 시달려야 했던 현실을 짚어본다. 또한 중국인 피해자들의 소송을 둘러싼 주요 법적 논쟁과 사건, 그리고 중국인 생존자들을 지원하는 초국적 활동(activism), 특히 일본인들의 활동에 관해서도 논의한다. 끝으로, ‘위안부’들의 고통과 삶의 이야기가 그 국적과 상관없이 전 세계인에게서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출간 후에도 필자의 ‘위안부’ 문제 연구는 계속되었다. 방대한 증거 앞에서도 일본의 정부 관료들과 극우주의 작가, 활동가들은 ‘위안부’ 제도의 본질이 군 성노예제였음을 끈질기게 부인하고 있고, 이런 사실이 심히 우려스럽다. 일본 부정론자들의 흔한 수사(修辭)는 ‘위안부’들이 민간 업자가 전장에서 운영한 매춘소의 전문 매춘부였으며, 일본 제국주의 정부나 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 ‘위안부’들이 일본 점령국 국민으로서 겪은 극악한 잔혹행위는 ‘위안부’ 제도의 범죄적 성격은 물론 일본군이 이 전쟁 범죄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중국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적인 납치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었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문화역사자료위원회 주도로 1995년 발간된 전국 조사 보고서인 ‘일본군이 중국 침략 당시 저지른 잔학 행위에 대한 조사 기록집(Qin Hua Rijun baoxing zonglu)’에는 이러한 성노예화 사례가 다수 기록되어 있다. 그중 한 사건은 1932년 겨울 일본 관동군 8사단 16여단 부대가 베이퍄오현 차오양시 지역을 점령했을 당시에 벌어졌다. 군대는 점령 즉시 지역 여성들을 군 막사로 납치해 끌고 가 성노예로 삼았고, 동시에 인근 마을의 여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임산부, 어린 소녀, 노인을 포함하여 1천 명이 넘는 현지 여성이 자신들의 집에서 강간당했다.1 베이퍄오현에서 일어난 일은 단독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특히 1937년 난징 대학살을 기점으로는 현지 여성을 납치하여 성노예로 삼는 일이 일본군에게는 정규 군사 행동이 되었다. 중국인 ‘위안부’의 대다수는 강제로 납치되었다. 후난성 웨양 마을의 생존자 중 한 명인 펑주잉(Peng Zhuying, 1929년생)은 2020년 우리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일본군이 1938년 자신의 고향을 폭격했다고 밝혔다. 가스 폭격으로 인해 펑은 시력을 잃었고 어머니와 남동생은 사망했다. 1939년 그의 언니는 일본군에게 붙잡혀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다. 1944년, 열다섯 살에 불과했던 펑도 일본군에 납치되어 한 달간 구금 상태에서 ‘위안부’ 역할을 강요당했다. 납치 당시 펑은 일본군에 의해 발에 부상을 입었다. 언니는 감금 중에 배를 찔렸다.2 펑주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앞서 언급한 책에 증언이 실린 12명의 생존자들은 모두 일본군에 납치되어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군 장교들은 병사들이 여성들을 폭력적으로 납치하는 것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직접 납치에 가담하기도 했다. 실제로 많은 위안소가 군 막사나 진지 안에 세워졌다. 소규모 일본군 부대가 전장 곳곳에 설치한 수많은 임시 위안소에서는 주로 현지 중국인 여성들이 노예가 되었다. 야전 부대는 계속해서 이동했으므로, 이렇듯 급조된 위안소들에서는 노예로 잡힌 여성들이 자주 교체되었고 따라서 피해자 범위도 크게 확대되었다. 허베이성 사회과학원 연구원 허톈이(He Tianyi)의 조사에 따르면 1943년 말까지 일본군은 허베이성 남부에 1,103군데의 진지를 구축했으며, 이로 미뤄볼 때 중국 북부에 구축된 일본군 진지는 총 1만 군데가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점령기간 동안 각 진지에서 보통 10~20명의 현지 여성을 노예로 삼았으므로, 일본군 진지 내 노예로 동원된 현지 여성의 수는 중국 북부에서만 10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였을 것이다.3 분명한 사실은 ‘위안부’는 매춘부가 아니었으며, 펑주잉과 언니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위안부’ 거의 대부분이 금전적 대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일본 점령 지역에서 납치된 많은 ‘위안부’의 가족들은 구금된 여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군에 거액의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산시성 우샹현 출신의 하오웨롄(Hao Yuelian)은 1943년 초여름 집에서 일본군에게 집단강간을 당했을 때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이후 하오는 다른 마을 주민들과 함께 난구의 일본군 진지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군은 하오를 비롯한 여성과 소녀들에게 현지 남성들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강제로 지켜보도록 한 후 방에 가두고 강간했다. 군인들은 전투가 없을 때마다 여성과 소녀들을 지속적으로 강간했다. 하오는 곧 심한 병에 걸렸고 하혈을 했다. 군인들이 납치해 온 다른 마을의 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까지 고통은 한 달 가량이나 지속되었다. 가족들은 하오를 고문에서 풀어주기 위해 점령군에게 몸값을 지불했다. 하오는 병세가 깊어 군인들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점령군은 돈을 챙기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하오는 또다시 일본군에 납치되어 진지로 끌려갔다. 매일 저녁 군인들이 무리지어 와서 그를 집단 강간했다. 한 달 만에 하오의 몸은 심하게 상해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우연히 마을 주민이 하오를 본 덕분에, 아버지와 오빠가 그가 갇혀 있던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둘은 군인들이 없는 틈을 타 하오를 피신시켜 집으로 데려왔고, 그는 이후 몇 달간 병석에 누워 있었다.4 일본군이 점령지 주민들의 삶을 완전히 통제함에 따라 이러한 공개적 납치와 착취는 만연했다. 1930년대 초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까지 일본 제국군은 아시아에 위안소를 광범위하게 설치했고, 위안소의 대부분이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의 침략이 지속된 중국 본토에 세워졌다. 잔혹한 범죄 행위가 이러한 임시 ‘위안 시설’에서는 흔하게 일어났다. 2017년 하이난섬 바오팅현에서 필자가 만난 생존자 천롄춘(Chen Liancun)은 열여섯 살에 붙잡혀 지아마오 진지에 구금되었다. 천은 낮에는 빨래 등의 강제 노동을 했고, 밤에는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는 탈출을 시도했지만 다시 붙잡혔고, 기절할 때까지 구타를 당했다. 천이 병들어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일본군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갈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천은 다시 군 막사로 납치됐고,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노예로 살아야 했다. ‘위안부’들의 트라우마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치유되지 못했다. 일본군의 성폭력은 이들 여성들의 신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고,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들 중 다수가 불임이 되었다. 2018년 여름 필자가 하오웨롄 할머니를 방문했을 당시, 할머니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할머니는 매일 밤 일본군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렸다. 할머니의 양녀는 할머니가 침대 옆에 놓아둔 칼을 보여주었다. 폭행당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여전해 칼을 곁에 둔다고 했다. 그 칼을 보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필자가 방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8년 9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21세기가 2분기로 접어드는 이 시점에도 일본군 ‘위안부’ 제도하에서 자행된 잔혹행위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우려는 일본의 역사 부정론자들의 집요한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고통이 끊이지 않고, 여성 강간이 여전히 무력 분쟁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오늘날 세계에서 ‘위안부’의 이야기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 되살리는 일은 중요하다. 필자는 현재 ‘위안부’정의연대(Comfort Women Justice Coalition),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쇼아재단(Southern California Shoah Foundation), 중국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박물관(Nanjing Museum of the Site of the Lijixiang Comfort Stations in China)과 함께 중국인 ‘위안부’의 영원한 증언(Eternal Testimony)을 인터랙티브 방식으로 전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USC쇼아재단에서 개발한 ‘증언의 차원 시스템(Dimensions in Testimony System)’을 사용하여 생존자 펑주잉 할머니의 증언을 기록하고 표출하여, 시청자가 할머니와의 생생한 실시간 대화를 통해 그 삶의 경험에 대해 묻고 답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현재 거의 완성 단계에 있는 이 프로젝트가 ‘위안부’의 유산을 보존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미래 세대가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교훈을 얻고 더 이상의 반인도적 범죄를 막기 위한 행동에 나설 수 있기를 바란다. 『중국인 위안부: 제국 일본 성노예의 증언』 저서는 자료센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archive814.or.kr/center/data/detail.do?controlNo=2302 각주 1. Guan Wenhua, “Rijun dui Beipiao funü de lingru” (Japanese troops’ sexual violence against women in Beipiao), in Qin Hua Rijun baoxing zonglu, ed. Li Bingxin, Xu Junyuan, and Shi Yuxin (Shijiazhuang: Hebei renmin chubanshe, 1995), 69. 2. ‘위안부’정의연대(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진행한 2020년 10월 19일자 인터뷰. 3. Peipei Qiu with Su Zhiliang and Chen Lifei, Chinese Comfort Women: Testimonies of Imperial Japan’s Sex Slaves, (London 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40-41. 4. 이 이야기는 2018년 8월 5일 필자가 하오웨롄과 그 양녀와 나눈 대화 및 다음에 수록된 하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다: Zhang Shuangbing, Paolou li de nüren—Shanxi Rijun xingnuli diaocha shilu [Women detained in the strongholds— Investigation records on the Japanese military sex slaves in Shanxi Province](Nanjing: Jiangsu Renmin Chubanshe, 2011), 1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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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할머니의 방 -속리산(이옥선) 할머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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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할머니의 방 1. 할머니의 방 1부 - 이옥선 할머니 편 2. 할머니의 방 2부 -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 편 3. 할머니의 방 3부 - 박옥선 할머니 편 이옥선 할머니와 속리산 할머니 <나눔의 집>에는 이름과 나이가 같은 두 명의 이옥선 할머니가 있다. 외부에서는 '부산 출신 이옥선 할머니'와 '대구 출신 이옥선 할머니'로 불리지만 <나눔의 집>에서는 '이옥선 할머니'(부산)와 '속리산 할머니'(대구)로 불린다. 속리산이 보은에 있는 까닭에 가끔 직원들이 보은 할머니라고 부를 때가 있는데 할머니는 바로 "왜 내가 보은 할머니야! 속리산 할머니지!"라며 역정을 내신다. 대구가 고향이신 할머니가 이처럼 속리산에 애착을 보이시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할머니는 16살에 만주로 끌려가 18살에 고향인 대구로 돌아왔다. 일본 패전 직후 일본군이 피해자들을 방치한 채 부대를 떠나자 갈 곳이 없던 할머니는 위안소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때 근처에 살던 중국 할머니들이 위안소로 찾아와 "여기 있으면 큰일 난다.", "여기 있으면 죽는다."라면서 당시 위안소에 있던 이옥선 할머니와 다른 피해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할머니는 거기에서 4일 정도를 머물렀는데 "그때 그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줘서 참 잘 먹었어." "그 할마시(할머니)들 아니었으면 난 죽었어."라며 그때의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신다. 그렇게 이름 모를 중국 할머니 집에서 4일간 머무르고 있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조선 사람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조선 큰 애기(처녀)들 나오라"면서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들은 할머니는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사람들의 도움으로 만주를 떠나 신의주로 올 수 있었다. 신의주에 도착한 할머니는 거기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인 대구로 돌아왔다. 내가 할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귀환 이후에 당연히 기뻐하는 가족들 또는 일가친척의 이야기가 등장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귀환 이후에 관한 할머니의 이야기는 굉장히 의외였다 대구에 도착한 할머니는 고향에 돌아왔다는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매일 찾아오는 동네 사람들로 인해 곤욕을 치렀다. 할머니가 고향에 돌아온 후, 매일 밤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할머니의 아버지에게 "네 딸은 살아 돌아왔는데 우리 딸은 왜 안 오느냐?", "이 집은 조상 묘를 잘 써서 딸이 살아 돌아왔는데 우리 딸은 죽었는지 돌아오지 않는다." 등등의 탄식을 쏟아 냈다고 한다. 마을의 또래 여성들이 모두 끌려갔는데 살아 돌아온 건 할머니뿐이니 동네 사람들의 탄식도 이해는 가지만, 결국 그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할머니는 부모님 몰래 홀로 고향을 떠났다. 그렇게 무작정 집을 나온 할머니는 영동·옥천을 지나 속리산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에서 만난 한 스님의 도움으로 법주사 근처에 거처를 얻어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어릴 적 국악을 배워 장구와 소리를 아주 잘하시는데, 그것을 알게 된 스님이 속리산에 오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소리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고 한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할머니는 그때부터 속리산을 찾은 관광객들을 상대로 소리 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나가셨다. 이렇게 고향을 떠나 속리산에 정착하신 할머니는 그 뒤로 70여 년을 속리산과 함께하였다. 이러한 할머니의 삶을 생각하면, 속리산에 대한 할머니의 애착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속리산 이옥선의 방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의 방 전경(일러스트: 백정미) 평생 속리산에서 사실 줄 알았던 할머니는 2018년 가을, 무릎 수술 이후에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나눔의 집>에 오시게 되었다. 그전에도 <나눔의 집>과 왕래가 있었지만 이렇게 거주를 목적으로 오신 것은 처음이었다. 할머니가 오시기 얼마 전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던 故하점연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운영진은 나에게 그 방을 정리해 할머니께 드리라고 했다. 나는 그때 그 방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입사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았던 내 말에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故하점연 할머니가 사용하시던 방은 속리산 할머니의 방이 되었다. 이 방은 <나눔의 집> 거실을 지나 복도 오른쪽 첫 번째에 있는데, 크기와 구조는 맞은편 이옥선 할머니의 방과 같다. 속리산 할머니는 갑자기 입주하게 된 데다 후원금으로 할머니들의 개인물품을 구매하지 않는 <나눔의 집>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세간살이라고 할 것이 거의 없다. 방에는 돌침대와 2단 서랍장, TV, 냉장고가 전부인데, 이마저도 모두 故하점연 할머니가 쓰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국민들이 보내온 응원의 메시지와 그림, 편지, 꽃 등이 늘어나면서 할머니의 방도 점차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속리산 이옥선의 냉장고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의 냉장고(일러스트: 백정미) 할머니의 방은 문을 기준으로 가장 먼 쪽에 창문이 있고 그 아래 돌침대가 놓여있다. 그리고 그 침대 오른편(다리방향)에는 2단 서랍장이 있고, 그 위에 TV가 있다. 또 그 서랍장 맞은편으로 오래된 행거가, 행거 위쪽에는 냉장고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냉장고는 할머니의 방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할머니는 누구보다 건강에 관심이 많고 누가 좋다고 하는 건 꼭 드셔야 하는 성미이다. 그리고 음식을 저장하는 습관이 있어 냉장고는 항상 갖가지 음식들로 가득 차 있다. 가끔 냉장고 안의 음식이 썩거나 곰팡이가 필 때가 있는데 할머니는 그런 음식들도 잘 버리지 못하게 해 할머니의 냉장고 안은 항상 다채로운 풍경을 간직한 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한번은 간병인 선생님이 할머니 몰래 냉장고를 정리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 이후 할머니는 만나는 직원마다 붙잡고 멀쩡한 것들을 버렸다며 1주일 넘게 하소연하시기도 했다. 또 할머니는 항상 박카스를 대량으로 구매해 냉장고에 꽉 채워두시고 놀러 오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꺼내주신다. 직원들은 가끔 목이 마르거나 피곤할 때 할머니에게 찾아가 박카스를 한 병씩 얻어 마시곤 한다. 박카스가 떨어지면 퇴촌면까지 나가 몇 박스씩 사와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가 제일 많이 먹었기 때문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나눔의 집> 공식 사랑방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의 방(일러스트: 백정미) 속리산 할머니의 방에는 이옥선 할머니 방처럼 추억이 깃든 물건도 사진도 없지만, 그래도 이 방은 <나눔의 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오가는 방이다. 비단 박카스 때문만은 아니다. 속리산 할머니는 유머가 있거나 남을 재미있게 하는 특기를 가지신 분은 아니지만 의도치 않은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재주가 관상 봐주기와 직원들 짝지어주기다. 먼저 할머니는 보는 사람마다 남녀노소 지위 여하에 상관없이 관상을 봐주시는데, 요청하지 않았더라도 누구도 이를 피해갈 수 없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학생이든 얼굴을 한번 훑어보시고는 "귀가 큰 게 오래 살겠다." "코가 오똑한 것이 돈을 많이 벌겠다." 등등의 덕담을 아낌없이 해주신다. 가끔 관상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말씀하실 때도 있는데 아직 겉으로 기분 나빠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또 항상 결혼하지 않은 직원들을 서로 짝을 지어주려고 하시는데 서로 애인이 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일단 할머니 눈에 들면 <나눔의 집> 안에서는 커플이 되어야 한다. 실제로 이렇게 진짜 커플이 탄생한 예도 있다. 속리산 할머니의 방에는 볼만한 세간살이도, 이옥선 할머니의 방처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임을 나타내거나 인권운동가로서의 활동을 보여주는 그 어떠한 물건도 없지만 나는 <나눔의 집>의 방 중에 이 방을 가장 좋아한다. 이 방에는 피해자가 아닌 이옥선으로 살았던 속리산 할머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0년 2월 갑자기 할머니의 몸 상태가 안 좋아지면서 할머니는 자신의 방을 떠나 집중치료실에서 생활하시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할머니의 방은 주인 없는 빈방이 되었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방은 저마다 다른 사연과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방들은 모두 속리산 할머니의 방처럼 정해진 과정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할머니든 <나눔의 집>에 오게 되면 방이 생기고, 그 방은 할머니의 역사와 추억으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하지만 그 방의 생명은 할머니의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만 이어진다. 할머니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 할머니가 병원이나 집중치료실에 가게 되거나 혹 별세라도 하시게 되면 아무리 많은 추억과 그와 관련된 물품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방은 아무도 찾지 않는 적막한 방이 된다. 항상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속리산 할머니의 방도 결국 할머니가 방을 비우게 되면서 지금은 업무 이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방이 되었다. 이전에는 새로운 할머니로 인해 기존 방이 정리되고 새 주인이 생겨 다시 활기를 찾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제 <나눔의 집>에 새로 들어올 할머니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이제 이 방들을 어떻게 보존하고 기록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항상 주장하지만, 할머니들은 피해자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예전에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또 그것을 남들이 알고 있다고 해서 평생을 피해자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언젠가는 우리 사회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넘어 그 이면에 있는 할머니들의 일상과 삶에 관해 관심을 가질 날이 올 것이다. 이에 나는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가진 평범한 할머니들의 방을 그대로 남기고 싶다. 그리고 이 방과 방의 주인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개성과 의미를 통해 피해 이후 할머니들의 삶에 대해 조명해 보고 싶다. Credit 일러스트 : 백정미 * 2020년 8월 11일, 속리산 이옥선의 방이 복원되었다. (아래 사진 참조) * 2020년 8월 20일, 복원된 방에서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나눔의 집 직원들이 겉절이를 만들고 있다. (아래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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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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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2부 - 2000년 여성법정이 시민운동에 끼친 영향 1.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2.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3. [논평] 50년만의 판결,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프롤로그 '국제법의 인민화'라는 흐름 민간 주도의 법정은 대부분 소멸시효나 면책규정 등으로 현실의 법정에서는 범죄의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시도된다. 실정법에서는 권력에 의거하여 법의 효력을 가늠하지만, 실정법으로 해소 불가능한 앙금을 다루는 '인민법정'에서는 그 효력과 권위의 토대를 '인민(people)'의 층위에 두고 있다. 2000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은 법적 실효성을 갖는 국제법정을 일본 정부의 협조 하에 개최하는 것이 더 이상 곤란해진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강구된 방법으로, 가해국 일본정부와 히로히토 천황에게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인민법정[1]이었다. 2000년 여성법정의 판사였던 크리스틴 친킨(Christine Chinkin)에 따르면, "법은 정부에 속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도구이며, 국가가 정의를 보장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시민사회가 '개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인민법정은 이러한 전제에 기반한다. 또한 인민법정은 형벌을 내리거나 보상을 명할 수는 없지만, 법적인 판결의 가치와 도덕적인 강제성에 의한 권고는 할 수 있다.[2] 따라서 인민법정의 권위는 인민에 의거하며, 법정의 판결과 그에 부수하는 권고의 집행 여부는 법정의 유래인 인민, 즉 '국경을 넘은 인민'의 힘에 달려 있다. 국제법이 국가 간의 약속이라는 낡은 사고방식을 고집해 온 일본의 법원은 '국제법을 인민화'[3]하는 당시의 국제적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뒤쳐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2000년 여성법정은 일본 사법부의 구태의연한 국가주의적 태도에 대항하는 국경을 초월한 인민들의 도전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들의 고통을, 그녀들은 나의 고통을 물려받았다" 선주민에 대한 경멸과 인종주의를 극단적으로 드러낸 과테말라 내전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미국의 내정간섭이었다. 1944년부터 아레발로(Juan José Arévalo)와 아르벤스(Jacobo Arbenz Guzmán)와 같은 과테말라의 혁신적 대통령들이 등장하여, 19세기 이래로 계속되어온 바나나 플랜테이션의 수탈구조를 개선하고자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1951년에 당선된 아르벤스는 유나이티드 푸르트(United Fruits Company) 보유지를 비롯해 착취구조의 근원들을 다수 국유화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1954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권의 군사적 개입으로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무산되었다.[4] 결국 1960년에 미국과 결탁한 정부군과 무장 게릴라 세력 간의 내전이 발발했고, 특히 반공주의 독재자 리오스 몬트(José Efrain Rios Montt)는 1982년~1983년 사이에 게릴라와 전투를 치르면서 민간인을 강제로 포섭한 자경단(Patrulla de Autodefensa Civil, PAC)과 군대를 동원하여 선주민에 대한 집단학살과 강간을 자행했다. 1999년에 발표된 '역사적진실규명위원회'(Comisió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órico, CEH)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60년부터 1996년까지의 내전 기간 동안 과테말라에서는 약 5만 명의 실종자를 포함해 20만 명 이상이 살해당했고, 전쟁고아가 약 25만 명에 이르렀으며, 약 150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5] 과테말라에서 '여성인민법정'을 발의한 요란다 아기라르(Yolanda Aguilar)는 과테말라 내전 시기 성폭력 피해자로서 2000년 여성법정 기간 중 넷째 날에 열린 국제 공청회 <현대 분쟁 하의 여성에 대한 범죄>에서 증언대에 섰던 인물이다. 요란다는 1960년대와 70년대 과테말라시티에서 가톨릭 계열의 학교를 다니며 농민과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는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에 대해 일찍 눈을 떴고, 러시아 작가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고 여성 공장 노동자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975년에 아버지와 남동생이 군부 집권세력에 의해 살해당한 후, 어머니는 무장혁명조직 FAR(las Fuerzas Armadas Rebeldes)의 활동을 시작했고, 요란다도 13세 때부터 노동자들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치거나 화염병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리고 1979년, 15세 때 전단지를 나눠주다가 체포되어 구타와 윤간을 비롯한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 요란다는 그후 3개월 동안 시력을 잃었는데, 구타로 인한 염증 때문이기도 했지만, "머리와 몸이 아무것도 보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회상한다. 1980년에 과테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갔을 때 비로소 시력이 회복되었고, 곧장 쿠바로 떠나 2년을 살았다. 성폭력 때문에 임신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낙태 수술을 받았다. 그는 1983년에 과테말라 북쪽의 접경지역 페탱(Petén)으로 가서 반군(反軍)과 함께 사회적 계층이나 계급이 없는 세계를 건설하려던 동료들과의 깊은 연대 속에서 5년을 머물렀다. 5년 뒤 다시 돌아온 과테말라에는 여전히 성폭력이 만연했다. 요란다는 강간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작업을 1992년부터 1996년까지 했지만, 당시에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정의가 구현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과테말라 내전 당시 피해자들의 증언 수집을 위해 만든 조직인 레미(REMHI)[6]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았다. 요란다는 무력분쟁의 증언을 듣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그녀들의 이야기들과 이어져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요란다는 그때의 감회를 이렇게 밝혔다. "나는 그녀들의 고통을, 그녀들은 나의 고통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았다."[7] 2000년 여성법정에서 과테말라의 성폭력 피해와 생존 경험을 나누다 요란다는 REMHI 보고서를 번역하던 일본인 여성에게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고, 2000년 여성법정에서 과테말라 내전 시기에 겪었던 성폭력 피해의 경험을 증언해 줄 것을 제안받았다. 2000년 여성법정 공청회에서 요란다는 청중들이 이미 짐작하고 있을 잔인함에 대해서 증언하는 대신 자신이 겪은 압도적인 폭력을 함께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에게서 본 힘을 이야기했다. "가장 어려운 상황, 가장 끔찍한 혼란, 가장 깊은 위기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2015년의 인터뷰[8]에서 "나는 2000년 여성법정을 통해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및 라틴 아메리카 등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자신이 겪은 폭력에 대해 기꺼이 논의하려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동했다. 그녀들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50년을 기다려온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전시성폭력 피해자로부터 변혁의 주체로' 프로젝트 요란다는 2000년 여성법정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금기시되어왔던 내전 시기 성폭력 피해의 경험을 말하고 그러한 아픔을 공유하는 장(場)을 만들 것을 여러 여성 단체에 호소하였고, 2002년에 '전시성폭력 피해자에서 변혁의 주체로'(이하, '피해자에서 주체로')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프로젝트에서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각지에서 선주민들의 언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여성 프로모터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강간'과 '성노예'는 마야 선주민들의 언어로는 쉽게 번역되는 단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야요리상 홈페이지[9]) 다음은 주요 증언들 중 하나이다. "'저놈들은 다 죽은 목숨이야.' 군인들은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즐길까' 라며 포로들을 데려왔습니다. 거기엔 남자도 여자도 병사도 있었습니다. 웃음소리가 들려와서 무슨 일인가 하고 가보았더니, 군인들이 포로들에게 여자를 강간하라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있었던 거예요. 포로들은 굶주리고 잠도 못 잔 상태여서 휘청거렸는데, 그 상태에서 강간을 강요한 겁니다." (중요증언 027 가해자 1982년)[10] 내전 시기에 여성들은 공포와 폭력으로 가득 찬 일상을 살아야 했다. 살상을 눈 앞에서 목격하면서 자기에게 다가올 죽음이 시시각각 엄습해오는 중에도 그녀들은 군인들에게 밥을 해서 나르고, 춤 추고, 강간당하고 행진을 강요당했다. 과테말라 내전은 1996년 12월 29일에 게릴라 세력인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 Unidad Revolucionaria Nacional Guatemalteca,)'과 정부군 사이에서 맺어진 평화협정으로 종결되었다. 피해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해자의 처벌과 보상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사법제도에 기반한 재판이 요청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과테말라에서는 평화협정 때 국가권력이 만든 「국민화해법」에 의해 내전 중 발생한 정치범죄에 대해서는 면책이 보장되어 있었고, 성폭력에 있어서는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적 인식이 만연했다. 이런 이유로 형사재판의 실현이 어려워지자, '피해자에서 주체로' 프로젝트에서는 2007년부터 국제사회에 피해의 실태를 호소하여 내전 중에 전투수단의 하나로서 성폭력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2010년에는 드디어 국가에 대해 재발방지를 위한 권고를 목표로 하는 민간 주최의 법정을 개최하게 된다. 2010년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성폭력에 대한 면책을 해제하다 2010년 3월 4일부터 이틀간 과테말라시티대학에서 500명 이상이 참여한 가운데,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이하 '여성인민법정')이 개최되었다. 각국이 국제 인도법과 국제 인권법에 따라 무력 분쟁 기간과 그 이후의 불/비처벌을 종식할 것을 권고하고, 특히 여성과 여아가 성폭력의 (공격) 대상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자행된 성폭력이 어떤 경우에는 전쟁 종식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것에 주목했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820'[11]이 통과된 지 2년 만이었다. 방청석에는 110명의 피해 여성들이 원고로서 앉아있었고, '명예판사'로는 과테말라에서 치안부대에 의해 구류된 여성들을 강간한 범죄에 대해 처음으로 유죄판결을 받아낸 마야족 여성 후아나 멘데스, 후지모리 정권하 페루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구라데스 카나레스, 우간다 전시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했던 티디 아팀, 2000년 여성법정의 참가자였던 아라카와 시호코(荒川志保子)가 명예판사로 임명되었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모두 법률가가 아니라 성폭력에 맞서 싸운 여성들이었다는 것이다.[12] 여성인민법정이 2000년 여성법정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원고들의 익명성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증언자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 단상의 증언석에는 증언자의 실루엣만 보일 정도로 가림막을 설치했다. 원고들 중에는 가족들 모르게 법정에 나온 이들도 있었고, 아직까지 가해자들과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첫 날 증인들의 증언에 이어 둘째 날에는 9명의 전문가 증언이 있었는데, 원고가 익명이었기 때문에 개별 사례들에 대한 증거 수집을 하지는 않았고, 내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성폭력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책임의 소재는 누구에게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명예판사들이 읽어 내려간 최종판결문에는 내전 시기 과테말라 형법 및 국제법에 의거할 때 중요한 위반행위가 자행되었음을 인정하고, 공무원 및 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행위의 책임은 정부에게 있다고 선고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최종판결은 면책과 그로 인한 불처벌이 계속됨으로 인해 성폭력이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내전 시기 인권침해에 대한 면책 해제, 국제형사재판소 설치조약의 비준, 국가 및 관계기관의 정보공개, 피해자에 대한 보상의 실행, 재발방지를 위한 정책입안 등 정부에 대해 15개 항목을 권고하였다.[13] 2016년 전직 군인이 유죄 판결을 받은 첫 사례, 세푸르 자르코 재판 '피해자에서 주체로' 프로젝트는 '침묵을 부수는 여성들' 프로젝트로 발전하였다. 이는 여성 변호사 조직인 세 단체, '과테말라 전국여성연합(UNAMG)', '사회심리행동과 공동체연구 그룹(ECAP)', '세계를 바꾸는 여성들(MTM)'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다. 2011년 과테말라 동부 세푸르 자르코(Sepur Zarco) 지역의 성폭력 피해생존자 여성 15명이 지역 여성 단체와 유엔(UN WOMEN)의 지원을 받아 과테말라 최고 법원에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2회의 청문회를 거쳐 2016년 3월 2일, 드디어 법원은 강간, 살인, 노예로 인한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전직 군인 2명을 기소하고, 여성 생존자들과 지역사회에 18개의 보상조치를 부여했다. 과테말라 국내 법원이 국내법과 국제 형사법을 이용하여 분쟁 중 성노예 혐의를 고려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14] 이들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1982년, 군에 의해 남편들이 '강제 실종'되고 집이 불태워진 후 수 년에 걸쳐 마을에 남아있던 군의 주둔지에서 성노예가 되었다. 주둔지는 1988년에 폐쇄되었고 피고는 당시 군인과 자경단원 등을 비롯한 직접적인 가해자와 명령을 내린 사령관이었다. 재판을 통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군에 의한 반란 진압 작전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싸움의 역사적인 성과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저지하고 전시 성폭력의 정의를 확립한 것이었다. 법원은 국가가 마을과 그 주변 마을에 집단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조치는 과테말라의 원주민과 농촌 지역 사회가 종종 부정당하는,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권리를 확보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처음으로 지역에 고등학교와 보건 클리닉을 세우고, 살해당한 여성의 남편들에게 기념비를 만드는 것 또한 이 조치에 포함되었다.[15] 에필로그 다시, 불/비처벌의 문제와 식민지 책임을 묻다 그러나 세푸르 자르코 재판 이후로도 성폭력과 여성에 대한 살해, 즉 페미사이드(Femicide)는 지속적으로 발생했고, 과테말라 정부는 법원이 명령한 집단 배상 조치의 대부분을 실행하지 않았다. 세푸르 자르코의 사례는 16세기부터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던 과거의 범죄에서부터 최근의 인권 침해에 이르기까지, 몇 세기에 걸쳐 공동체와 지역 사회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그럴 때마다 이에 맞서 싸워온 이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 또한 증명했다. 과테말라 내전에서는 20만 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는데, 피해자의 83%가 마야 족이었고, 기록된 626건의 학살 또한 대부분 마야 공동체에서 발생하였다. 과테말라 내전 시기 전시 성폭력은 억압받는 마야 선주민과 정부군 병사의 가해라는 구도만으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맥락에 놓여 있다. 때문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과테말라의 상황, 미국과 쿠데타 세력의 공모, 과테말라의 미사용 토지를 보유한 해외 기업의 문제,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결여, 인종주의 등이 착종하는 지점을 살피며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2000년 여성법정과 이를 계승하여 10년 뒤에 열린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은 미완의 과제로서 식민지 책임과 (식민)기업에 대한 책임, 그리고 불/비처벌의 문제를 공통으로 떠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과거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상황에도 영향을 미친다. 2019년, 과테말라에서 10~14세 여성들의 임신이 큰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는 사실이 기사화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빈곤가정 출신인 동시에 성폭행 피해자였다. 폭력의 가해자가 가족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다. 이 같은 성폭력은 선주민들이 사는 지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오지인 탓에 통신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 피해자가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렵다.[16] 이러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선주민 소녀들 사이에서 생겨난 호신술 열풍이다. 2015년 이후 태권도 등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호신술이 선주민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2019년 과테말라 태권도 대회의 우승자 미리암 쿠쿨 샘(17)은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학교에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힘이 더 세다며 항상 우리를 괴롭혔어요. 이제 남자들의 괴롭힘은 두렵지 않아요. 태권도는 나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알게 해줬어요."[17] 10대 선주민 여성들이 직면하는 어려움은 COVID-19 기간 중에 더욱 악화되었다. 인터넷, 스마트폰, 컴퓨터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은 교육의 부족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증가하는 가정폭력에 직면하고 있으며, 학대자와 계속 살도록 강요당하고 있지만 이들이 지원받을 수 있는 서비스는 제한적이다. 그 결과 10대 임신과 모자 사망률이 증가하고 있고,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현저히 부족한 농촌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이에 10대 여성들은 스스로의 문화 활동을 이끄는 Las Niñas Lideran(Girls Lead) 라는 조직을 만들어 자살율을 줄이고, 교육 접근성을 높이며 의료 서비스를 늘릴 것, 폭력 생존자에 대한 서비스를 강화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하기 시작했다.[18] 우리가 이들의 홈페이지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슬로건은 이렇다. "우리 안에 있는 에너지가 매일 우리의 행동에 반영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과테말라의 여성들은 지금도 일상화된 성폭력에 맞서기 위한 여러 시도들의 한가운데에 함께 서 있다. 재판에서 승소했으나 배상받지 못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했던 노력을 그들의 주식인 옥수수에 비유해서 말한다. "우리는 옥수수 씨를 뿌렸어요. 우리가 먹을 순 없겠지만, 우리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옥수수 씨를 말이죠." 각주 ^ 한때 금칙어였던 '인민(people)'은 한국인들에게 여전히 불편한 단어다. '인민' 대신 한국은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지배 주체인 국가 없이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 이 단어는 어쩌면 무시무시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제 '인민' 개념은 다시 사유되고 규정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는 '인민 주권'을 사실상 선거를 통한 주권의 위임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로 한정하고 있다(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 『인민이란 무엇인가』, 현실문화, 2014년, pp.185~189). 이렇듯 '인민'을 제한적으로 파악하는 '국민' 혹은 '시민' 개념은 필연적으로 비국민, 난민 등의 '배제된 존재들'을 양산하고, '민중'은 한국에서 있었던 특정한 시기의 민주화운동을 상기시키기에 people의 번역어로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새로운 인민'의 가능성, 즉 국가가 셈하는 인민과는 '다른 인민'을 산출하여 그 자체로 또 다른 공동체의 공간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people의 번역어로 '인민'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고 People's Tribunal 또한 '인민법정'이라 부르기로 한다 ^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센터 엮음, 강혜정 옮김 『일본의 군 '위안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년, pp.300~301. ^ 한일 양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나 한일협정을 근거로 줄곧 법적 판단을 미루어 왔는데, 거꾸로 그런 종류의 국제법이나 국가 간 조약 등을 피고 혹은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바로 '인민화된 국제법'이이다. 그런 점에서 2000년 여성법정은 인민화된 국제법에 상응하는 새로운 법정 혹은 새로운 법적 형식의 발명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심아정, 「'권력 없는 정의'를 실현하는 장소로서의 '인민법정'-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의 사례를 중심으로」『일본연구』 제30집, 고려대일본연구소, 2018년, 48쪽 ^ 노용석, 「20만 명 숨진 과테말라 내전, 과거사 청산의 기록들」, 『오마이뉴스』 (기사입력일: 2018년 3월24일, 기사검색일: 2020년 11월14일). ^ 박구병, 「과테말라의 내전 종식 이후: 평화협정 이행의 험로」, 『Asian Journal of Latin American Studies』 vol.31, No4, 2018년, 21쪽. ^ Recuperación de la Memoria Histórica, 일명 역사적 기억의 회복 프로젝트. 1998년 4월 26일, REMHI 프로젝트의 최종 보고서를 공개한 지 이틀 만에 이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후안 제라디 주교는 집 밖에서 암살되었다. REMHI는 36년에 걸친 과테말라 내전 기간 동안 저질러진 잔혹행위를 기록하기 위해 가톨릭 교회가 이끌었던 전례 없는 시도로, 대교구는 1995 년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 요란다의 생애는 주로 아래의 인터뷰 기사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https://storiesfromguatemala.com/ (기사입력일: 2020년5월15일 최종검색일: 2020년10월20일) ^ 2015년 2월 26일 과테말라 시티에서 Katia Orantes가 진행한 비디오 인터뷰. Stephen O'Brien이 수집한 구두증언에 대해서는 Stories from Guatemala(Oral testimony illuminating historical and social conditions)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storiesfromguatemala.com/ (기사입력일: 2020년5월15일 최종검색일: 2020년10월20일) ^ https://www.wfphr.org/yayori/award/y_2009.html(기사검색일 2020/11/02).야요리상은 전쟁과 성차별이 없는 21세기를 위해 아시아 각 지역에서 풀뿌리 운동을 하는 활동가, 저널리스트, 아티스트를 선정해 수여하는 여성인권활동장려상이다. 2000년 여성법정을 개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여성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쓰이 야요리를 기념하여 이름 붙였다. 2004년부터 10년간 '야요리상'과 '야요리저널리스트상'을 수여해왔으며 2014년에 종료되었다. ^ 관련 증언들은 마쓰이 야요리상 홈페이지의 '야요리상' 수상 기념 스피치 투어 자료집(2009년 12월)을 참고할 것. http://www.jca.apc.org/recom/sonrisa/200911yayori-siryo.pdf (기사검색일: 2020/11/02). ^ UN SCR 1820의 원문은 유엔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www.un.org/ruleoflaw/blog/document/security-council-resolution-1820-2008-on-women-and-peace-and-security/ ^ 柴田修子 「戦時性暴力の被害者から変革の主体へ⎯中米グアテマラにおける民衆法廷の仕組み」 『立命館元号文化研究(23巻)2号』, 2011年, pp.75-76. ^ 최종판결문은 과테말라 인권위원회(GHRC)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www.ghrc-usa.org/Resources/2010/tribunal_de_conciencia.htm#pronunciamiento ^ 「2012年11月14日 「沈黙を破ってーーグアテマラ戦時下性暴力スピーキングツアー2012」 アナ・アリシア・ラミセス・ポップさん」 , 同志社大学 グローバル・スタディーズ研究科, 「女性・戦争・人権」学会 홈페이지 https://www.war-women-rights.com (기사검색일:2020/11/02). ^ Sepur Zarco case: The Guatemalan women who rose for justice in a war-torn nation: UN WOMEN 홈페이지 https://www.unwomen.org/en/news/stories/2018/10/feature-sepur-zarco-case (기사입력일:2018/10/19, 기사검색일: 2020/11/02). ^ 손영식, 「여기는 남미: 과테말라 10~14살 임신 급증, 대부분 성폭행 피해자」, 『서울신문』(기사입력일: 2019/03/06, 기사검색일: 2020/11/03) ^ 변선구, 「과테말라 원주민 소녀들의 태권도 발차기, “성폭력 두렵지 않아요”」, 『중앙일보』(기사입력일: 2019/11/29, 기사검색일: 2020/11/03) ^ UN WOMEN 홈페이지 https://www.unwomen.org/en/news/stories/2020/11/i-am-generation-equality-ixchel-luc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