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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잊혀진 죽음과 기억의 젠더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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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는 전쟁에 대한 여성의 피해 경험 자체와 더불어,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젠더 규범 속에서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오랜 세월 묻혀있어야 했던 사실에도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 왔습니다. 웹진 〈결〉은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노근리 사건을 통해 전쟁으로 희생되었으나 가시화되지 못한 여성들의 죽음을 살펴보며 기억의 젠더정치 문제를 여성주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충북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피난민이었던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한·미 정부에 의해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며 한국 사회에 알려졌고, 2004년 ‘노근리특별법’이 제정된 것을 계기로 ‘노근리평화공원’이 조성되는 등 노근리 사건의 기억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2010년,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감독 이상우)이 개봉하며 한국전쟁기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가 대중적으로도 조명받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를 비롯한 진상규명 등 노근리 사건에 관한 역사화는 젠더를 고려하지 않았다. 노근리 사건의 희생자 중 여성과 아이, 그리고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70%에 달한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에 대한 기록과 역사화가 대부분 남성 피해생존자와 유족에 의해 주도되면서, 이와 같은 피해의 불균형과 그 맥락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위험 상황에 취약한 아이나 노인은 그렇다 치지만 왜 여성들의 희생이 많았던 것일까. 전쟁으로 어머니를 잃은 한 여성 피해생존자는 이렇게 말한다. “굴 안에 있으믄 다 죽는다. 남자들이라도 뒷산으로 (가서) 피하자고. 그래 가지고 아버지, 오빠들. 뒷산이 있잖아요? 옛날에는 흰옷을 입으면 밤에도 허옇게 보이잖아. 그러니까 옷을 벗고 뒷산으로 피해가지고. 아버지하고 큰아버지, 오빠들은 거기서(노근리 다리) 그렇게 피해가지고 살았잖아.” 폭격으로 생사를 다투는 상황에서 남자들이 먼저 탈출했던 정황을 알 수 있다. 미군의 소개령에 의해 피난을 떠난 4일 동안 노근리 쌍굴다리 안에 갇혀 있던 남성들은 미군의 총격을 피해 이웃 마을인 도동리로 탈출했다. 부계 중심의 가족 질서 안에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할 남성의 목숨과 안전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피난을 떠난 남성들도 적지 않다. 반면, 여성들은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서도 어린 자녀와 늙은 시부모를 보살펴야 했다. 이것이 학살 현장에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사망한 여성들이 많았던 이유이다. 또 여성들은 쌍굴다리에서 도망을 치더라도 낯선 남성들에 의한 강간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홀로 피난을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처럼 가부장적인 가족 질서와 성별분업, 그리고 젠더 규범은 한국전쟁기 피난의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노근리 사건에서 여성, 특히 어머니와 아이 그리고 노인의 사망이 두드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측면이 가시화되거나 논의되지 않은 것일까? 이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노근리 사건 피해생존자들이 어머니의 사망으로 초래된 가족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과 연관된다. 아내를 잃은 남편/아버지들은 남은 가족을 위해 생계는 물론 가사노동과 돌봄 역할을 떠맡기도 했지만, 자녀들을 방치하거나 자녀, 특히 딸로부터 돌봄을 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미혼의 딸들은 결혼할 때까지 아버지, 오빠, 남동생 등 남성 가족구성원들의 식사와 빨래를 도맡아 하고 농사일을 도왔다. 반면 아들들은 학업을 지속하거나 더 많은 자원과 기회를 얻었다. 아내를 잃은 남편/아버지들은 가족의 위기를 재혼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재혼으로 다시 ‘정상 가족’을 이루는 것은 전쟁의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남성의 가장 일차적이고 우선적인 행위였다. 이들과 결혼한 여성은 가사 및 돌봄 노동, 나아가 생계노동을 담당하며 사망한 여성의 성역할을 대체했고, 특히 임신과 출산이라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여성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는 동안 노근리 사건으로 사망한 여성의 죽음은 잊혀갔다. 노근리 사건으로 재혼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안민혁(가명) 씨는 제삿날마다 집안이 시끄러웠다고 기억한다. 재혼한 어머니는 조부모와 삼촌 그리고 ‘큰어머니’의 제사를 함께 준비했는데, 아버지가 ‘왜 죽은 사람의 제사를 지내냐’며 큰어머니의 제삿밥을 내동댕이치고 화를 냈다는 것이다. 또 전영희(가명) 씨는 재혼한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혼가정에서 태어난 배다른 동생들이 아버지의 무덤 옆에 노근리 사건에서 죽은 ‘전처’가 아닌 자신들의 친어머니를 모시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처럼 사망한 아내/어머니의 성역할이 딸에 의해, 혹은 남편/아버지와 재혼한 다른 여성에 의해 대리·대체되면서 그 존재는 점차 망각되었다. 그 결과 노근리 사건에서 사망한 여성, 특히 어머니의 죽음은 애도될 수 없는 전쟁 피해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에 의한 어머니의 죽음은 피해생존자의 자녀들, 특히 딸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딸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여긴다. 전쟁이 끝난 후 사망한 어머니의 성역할을 대신하며 자란 데다 결혼 후 자신이 어머니가 되면서 어릴 적 어머니의 부재를 더욱 큰 상실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육이오사변 때문에 내 인생이 망친 거지, 한마디로. 내가 엄마하고 살았으면 공부도 하고 그랬을 텐데. 그게 한이 되지. 딴 게 한이 된 거 아니여. (…) 누가 엄마라고 부르면 그렇게 부럽더라고, 엄마. 엄마가 최고여. 아버지는 아무 소용도 없어. 어쨌든 남자는 헛일이야.”(정영희(가명)) 이런 모습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거나, 어머니의 부재와 자신들의 삶을 별개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은 아들들의 경우와 대비된다. 성역할과 젠더 규범으로 인해 전쟁과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성별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부계 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전쟁의 피해이자 가족 수난의 상징으로 여겨진 남성의 죽음과 달리, 가족의 돌봄을 책임져 온 여성의 죽음은 애도조차 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에서 여성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으며, 전후 어떻게 잊혀 갔는지 살펴보는 것은 전쟁 기억의 젠더정치를 밝히는 중요한 작업이다. 한국전쟁기 노근리 사건에 의한 여성의 죽음의 맥락과 망각의 과정이 문제시될 때, 남성-아들을 넘어 여성-딸 역시 노근리 사건의 역사화 과정에서 공적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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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에세이 김학순을 추억하다 3 - ‘우리들이 죽고 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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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의 날 특집] 김학순을 추억하다 <논평> 소현숙 -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에세이> 1. 이희자 - 김학순 할머니와 나 2. 나카가와 히사코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3. 야스다 치세 - 우리들이 죽고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4. 노부카와 미츠코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우리들이 죽고 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들이 죽고 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김학순 할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항상 말씀하시던 이 말은 내 마음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피해자분들이 대부분 돌아가신 지금, 이 말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일본 국내 혹은 UN 인권기구 등에서 ''위안부'가 성노예는 아니었다.', '강제연행은 없었다.' 등의 주장을 반복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말을 증명하듯, 지금도 전시와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1991년 12월,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사건)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처음 일본에 오셨을 때, 당시 탔던 일본항공의 학 마크가 일장기로 보여 무서웠다고 한다. 2003년, 도쿄도교육위는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학교 행사에서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의무화했고, 이에 따르지 않는 교사는 처벌했다. 의무화 이후 첫 졸업식 때, 처분이 두려워 주저하는 나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워 준 것은 김학순 할머니의 말씀이었다.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나는 차마 기미가요를 부를 수 없었다. 도쿄에서의 할머니들의 숙소는,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에 있는 와세다호시엔(早稲田奉仕園)이었다. 나는 동료 교사들과 함께 숙소 및 재판소에서 할머니들을 도왔다. 한국어를 몰라 김학순 할머니가 '물 주세요' 하시면 우유를 갖다 드리는 등의 실수가 잦았지만, 한국어와 일본어 발음이 비슷한 토마토는 좋아하셨던 것이 마음속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큰 방에 모여 함께 잠을 잤던 할머니들이 사소한 일로 실랑이를 벌일 때도 김학순 할머니는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했다. 침착한 성격과 더불어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밝히고 나섰다는 점에서 김학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았다. 강순애 할머니는 “학순 언니, 학순 언니” 하며 김학순 할머니를 잘 따르셨고, 김학순 할머니와 사이가 좋았던 황금주 할머니는 김학순 할머니가 기르던 거북이를 이어받아 길렀다. 김학순 할머니는 당신을 만나러 온 많은 지원 봉사자를 누구나 똑같이 대해주셨다. 김학순 할머니께 '기념으로 사인해 주세요' 하고 소장을 내밀면, 할머니는 표지 뒷면에 당신의 이름을 작은 글씨로 써주셨다. 친한 일본인 지원 봉사자들과 선물을 주고받던 할머니들도 계셨지만, 김학순 할머니는 모든 봉사자와 담담하게 교제하셨고, 그 자리에 있던 봉사자 전원에게 장롱에 다는 장식용 노리개를 나누어 주시기도 했다. 할머니들이 한국에서 가져와 식사하실 때 반찬으로 드시던 김치 중 김학순 할머니가 가져오셨던 도라지 김치는 처음 먹어본 맛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1994년, 전후 50년을 앞두고 국회 앞에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2주간의 단식투쟁을 했을 때, 김학순 할머니는 새하얀 한복 차림으로 앉아 장구를 치셨다. 강순애 할머니의 꽹과리 연주에 장단을 맞추기도 하시고, 독주를 하기도 하셨다. 그 자리에 도착한 자원봉사자들은 할머니의 장구 소리에 넋을 잃고 귀를 기울였다. 자원 봉사자들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김학순 할머니가 혹독한 단식투쟁을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할머니는 강한 의지로 이겨냈다. 1997년 12월,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받지 못한 채로 돌아가셨다. 나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돌아가시기 직전 동료들과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할머니의 병문안을 다녀왔었다. 병세는 상당히 악화되어 할머니는 호흡 장치를 하신 채로 주무시고 계셨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얼굴을 뵐 수 있어 조금이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식투쟁이 몸에 무리를 준 듯하다. 단식투쟁까지 한 결과가 아시아여성기금 뿐이고, 여성기금을 받느냐 마느냐로 할머니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그 사이에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신 것이 할머니의 죽음을 앞당긴 것 같아 일본인으로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김학순 할머니의 묘는 망향의 동산에 있다. 연고가 없는 할머니를 위해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의 공동대표이자 유족인 이희자 씨가 할머니 생전에 묘자리를 마련하는데 힘을 써주셨다. 덕분에 이희자 씨 부친의 묘 앞에 김학순 할머니와 황금주 할머니의 묫자리를 나란히 마련할 수 있었다. 이희자 씨는 김학순 할머니의 기일마다 추도식을 열었다. 5주기에는 일본인 봉사자들과 함께 건강했던 황금주 할머니도 참석하셨다. 하지만 이제는 황금주 할머니도 김학순 할머니의 옆에 잠들어 계신다. 이희자 씨는 지금도 두 할머니의 기일에 매년 추도식을 열고 있다. 김학순 할머니의 묘 앞에는, 할머니께서 생전에 가장 좋아하시던 무궁화꽃이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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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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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쟁이 인간에게 남기는 심원한 고통에 관해 얼마나 아는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뿐 아니라 원폭 피해자와 사할린 잔류자의 인권 문제 또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배제되었다. 특히 원폭 피해는 전시 성폭력과 유사하게 몸에 직접 작용하여 성적 재생산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일종의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한다. 이에 웹진 〈결〉은 연구자 2인의 글에 원폭 피해자들의 일상을 담은 김효연의 사진 작업 ‘감각이상’을 병치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글: 김성운 X 사진: 김효연 *이 에세이는 김성운 교수의 논문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어머니와 산다면(母と暮せば)」, 「태양의 아이(太陽の子)」를 중심으로」, 『일본연구논총』 56집, 2022, 91-116를 요약, 정리한 글입니다. I. 후쿠시마에서 히로시마·나가사키로 2011년 3월 11일 일본의 태평양 연해상에서 일어난 규모 9.0의 대지진에서 비롯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여러모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을 상기시키는 사건이었다. 수소 폭발에 이은 다량의 방사능 물질이 인근 지역을 뒤덮으면서 원폭이 가져온 방사능 재해의 기억이 소환되었다. 또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으로부터 시작된 전후 일본의 원자력 정책 자체에 대한 재검토가 다방면에 걸쳐 일어났다. 유일한 피폭국이었던 일본은 전후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의 기억은 일본이 원자력 발전소를 받아들이는 데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다수의 일본인들은 핵에너지의 평화적 전환이 피폭국 일본의 책무라고 여겼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을 ‘신의 섭리’라 강조하여 ‘나가사키의 성인’이라 존경을 받았던 나가사키 의과대학 나가이 다카시(永井隆) 방사능 의학 교수 역시 원폭의 원리를 이용하여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면 인류의 행복이 증진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들의 영혼도 위로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 이러한 논리는 일본 정부의 원전 정책 추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일본에서 원전 도입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쇼리키 마쓰타로(正力松太郎)가 사주로 있었던 요미우리 신문사는 원전 관련 박람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여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1954년 도쿄 신주쿠 이세탄 백화점에서 개최된 ‘누구나 알 수 있는 원자력전’에서는 원자력 발전을 포함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사례를 히로시마 피폭의 처참한 이미지와 함께 전시함으로써, 원자력의 동력원으로서의 이용이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의 경험을 극복하는 일임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원폭 피해의 악몽을 인류의 행복으로 전환한다는 논리에서 출발한 전후 일본의 원자력 에너지 정책은 일본을 ‘원전대국’으로 만들었으며, 고도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1956년 6월 일본 원자력 연구소가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東海村)에 설치된 이래 원전 건설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1990년대 중반까지 일본 전역에 총 54기의 원자로가 건설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미국, 프랑스에 이은 세계 제3위 원전대국이 되었다.[2]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이렇게 원폭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일본의 전후 원자력 개발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역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원자로 건설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동일한 멸시를 드러내며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히로시마 피폭자들의 기억에 대한 최악의 배반이다. (중략) 우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본인들로 하여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자들을 다시금 기억하고, 원자력의 위험성을 인지하며, 그것이 효과적인 전쟁 억지력을 제공한다는 환상을 끝낼 수 있게 하기를 희망한다.[3]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역시 같은 맥락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원폭 체험과 연결시켰다. 2011년 6월 카탈루냐 국제상 시상식 연설에서 그는 히로시마·나가사키를 언급하며, 그로부터 66년이 흐른 시점에 다시금 일본이 방사능 피해를 입은 이유는 극도의 효율만을 추구했던 정부의 원자력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4] 이렇게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일본 원자력 정책의 파산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의 출발점이었던 히로시마·나가사키를 소환했다. 원폭을 그린 영화들 역시 이러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재고찰에 참여하면서 3.11 이전의 원폭 영화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글에서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개봉된 두 편의 영화 〈어머니와 산다면〉(야마다 요지, 2015)과 〈태양의 아이〉(구로사키 히로시, 2021)를 차례로 살피면서 이러한 재고찰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아볼 것이다. Ⅱ. 〈어머니와 산다면〉: 원폭의 ‘재역사화’ 3.11 이전의 원폭 영화들이 대체적으로 보여주는 내러티브 경향은 원폭 체험의 탈역사화이다. 즉 전쟁과 침략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생략되고 원폭 피해가 마치 자연재해와 같이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이 내러티브 전략은 일본인이 ‘유일한 피폭국’의 국민임을 강조하는 ‘피폭 내셔널리즘’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관습은 전후 발표된 최초의 원폭 영화인〈나가사키의 종(長崎の鐘)〉(오바 히데오, 1950)에서 시작되어, 히로시마 피폭의 참상을 끔찍한 비주얼적 요소로 표현한 대표적인 원폭 애니메이션〈맨발의 겐(はだしのゲン)〉(마사키 모리, 1983)에서 절정에 달했다.[5] 이러한 원폭의 탈역사화가 〈어머니와 산다면〉에서 어떻게 수정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지 3년이 되던 1948년 8월 9일, 조산부 노부코는 3년 전에 피폭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둘째 아들 고지의 묘 앞에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데, 바로 그날 고지의 혼령이 홀연히 노부코 앞에 나타난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정한 아들로 돌아온 고지는 특유의 유쾌한 말투로 실의에 잠긴 어머니 노부코를 위로한다. 한편 고지의 약혼녀 마치코는 고지가 죽은 후에도 변함없이 노부코의 집에 드나들며 인연을 이어 나가고, 고지는 이런 마치코에게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미 죽은 고지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하는 마치코를 안타깝게 여긴 노부코는 마치코에게 고지를 그만 잊고 다른 남자와 새 출발 할 것을 제안한다. 마치코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지만 시간이 흘러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복원병 출신의 구로다와 약혼하고 함께 노부코를 찾아간다. 노부코는 마치코의 새 출발을 축복하고, 고지도 미련을 거두고 떠난다. 한편 피폭의 영향으로 건강이 악화된 노부코는 그날 밤 숨을 거둔다. 이 영화는 오프닝 신부터 원폭 투하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다. 1945년 8월 9일 플루토늄탄을 탑재하고 출격한 B29기의 조종석과 미 조종사들의 대화를 보여주며 자막과 내레이션을 통해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경위를 설명한다. 우선 제1 목표인 고쿠라에 도착하였으나 시야가 확보되지 못하여 제2 목표인 나가사키로 방향을 돌렸고, 나가사키 역시 70% 이상 구름에 가려 시가지가 보이지 않았으나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시야가 확보되어 원폭을 투하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영화는 폭격기의 조준망원경에 잡힌 나가사키 시가지의 모습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둘러 등교하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생 고지의 일상적인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며 곧이어 발생할 비극을 예고한다. 미국이라는 존재는 이후에도 계속 등장한다. 암시장 사업을 하고 있는 ‘상하이 아저씨’는 노부코에게 연정을 품고 암시장의 물건들을 조달해준다. 미 점령군에게서 빼돌린 비누를 노부코가 마음에 들어 하자 그는 “이런 고급스러운 물건을 만든 나라와 전쟁을 했다니, 멍청한 일이지!”라고 일갈한다. 이후 그는 미군이 포로에게 제공한 외투를 입고 와서 노부코의 이웃 도미에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눈다. 상하이 아저씨: 미국은 대단해. 포로에게 이런 따뜻한 것을 입혔다니. 도미에: 일본은 질 수밖에 없었네. 상하이 아저씨: 예스! 이렇게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적국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엄청난 국력을 보유한 미국에 일본이 도전한 일은 어리석었다는 사실이 지속적으로 상기된다. 이전의 원폭 영화에서 마치 자연재해처럼 거역할 수 없는 운명으로 그려졌던 원폭 피해도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잘못’으로 묘사된다. 노부코와 고지는 고지가 나가사키 의대에 진학하던 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노부코: 의과대학이라면 징집을 연기할 수도 있고, 졸업 후 징집되더라도 군의관이 되면 죽을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안심했었는데... 고지: 결국 똑같았지 뭐. 노부코: 그랬지. 고지: 별수 없지. 그게 나의 운명이었으니까. 노부코: 운명? 지진이나 쓰나미는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운명이라 해도 이것은 막을 수 있었어. 인간이 계획해서 행한 엄청난 비극이야. 운명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이렇게 이 영화는 원폭이 운명이나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이 초래한 비극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즉, 원폭은 미국과의 전쟁의 일부였으며, 따라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비극, 즉 ‘인재(人災)’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전 원폭 영화의 탈역사화 경향을 수정한다. 이러한 원폭 영화의 ‘재역사화’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 사회에서 일어난 인식론적 변화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후쿠시마의 사고는 쓰나미가 원전의 비상 발전 시설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일어났지만 결국 이러한 재해를 예측하지 못하고 안전 관리를 소홀히 한 원전 운영자 측의 ‘인재’로 평가되고 있다.[6] 이렇게 ‘인간의 잘못’으로 원전의 노심이 녹아 폭발에 이르고, 수개월간 방사능 물질이 공기 중에 배출된 참사는 66년 전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지진이나 쓰나미는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운명이라 해도 이것은 막을 수 있었어”라는 노부코의 대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7] 이렇게 〈어머니와 산다면〉은 ‘인재’라는 고리로 후쿠시마와 나가사키를 연결한다. 각주 ^ 서동주, 「일본 고도성장기 ‘핵=원자력’의 표상과 ‘피폭’의 기억」, 『日本學報』 99집, 2014, 441-443. 전후 일본의 원전 정책과 원전 건설의 역사에 대해서는 이 논문을 참조함. ^ Yoshimi, Shun’ya, Trans. Shi-Lin Loh, “Radioactive Rain and the American Umbrella”,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71, No. 2, 2012, 321. ^ Kenzaburo, Oe, “History Repeats”, New Yorker (28 March, 2011)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1/03/28/history-repeats. ^ 川口隆行, 「대재난의 망각과 상기―포스트 3.11의 역사적 지층―」, 『일본학보』 129집, 2021.3. ^ 강태웅, 「원폭영화와 ‘피해자’로서의 일본」, 『東北亞歷史論叢』 24집, 2009, 55-64. 〈맨발의 겐〉은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경험한 만화가 나카자와 게이지(中沢啓治)의 동명 만화(1976)를 원작으로 하여 제작되었다. 원작 만화의 인기와 사회적 파급력으로 실사 영화와 드라마도 제작되었다. 또한 이 만화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 번역되어 히로시마 원폭 피해의 처참함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일조했다. 佐藤忠男, 2016, 57. ^ 전문가들은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의 원인이 안전성보다는 경제성에만 치중한 설비 건설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비상용 디젤 발전기를 밀폐성이 높은 원자로 건물이 아니라 지하에 설치한 탓에 침수 피해를 그대로 입을 수밖에 없었다. 최고 5.7m 높이의 쓰나미를 상정하고 건설된 방호벽은 14~15m로 밀어닥친 쓰나미에 무력했다. 반면 추가적으로 방호벽을 강화한 후쿠시마 제2원전은 비상용 디젤 발전기 3대 중 2대가 정상 작동하면서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오나가와(女川) 원전을 소유한 도호쿠전력(東北電力) 역시 869년에 발생한 대지진까지 연구하여 예상 쓰나미 높이를 9.1m로 높인 결과 부분적인 피해에 그쳤다. 장정욱,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원자력의 미래: 아직도 계속되는 원자력 마피아의 거짓말」, 『프레시안』, 2011.08.18.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36817 ^ 木村朗子, 「五年後の震災後文学論」, 『新潮』 113(4), 2016, 215-216. 참고문헌 ·川口隆行, 2021, 「대재난의 망각과 상기―포스트 3.11의 역사적 지층―」, 『일본학보』 129집. ·강태웅, 2009, 「원폭영화와 ‘피해자’로서의 일본」, 『東北亞歷史論叢』 24집. ·서동주, 2014, 「일본 고도성장기 ‘핵=원자력’의 표상과 ‘피폭’의 기억」, 『日本學報』 99집. ·장정욱, 2011,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원자력의 미래: 아직도 계속되는 원자력 마피아의 거짓말」, 『프레시안』,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36817. ·Kenzaburo, Oe, 2011, “History Repeats”, New Yorker (28 March)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1/03/28/history-repeats. ·Yoshimi, Shun’ya, Trans. Shi-Lin Loh, 2012, “Radioactive Rain and the American Umbrella”,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71, No. 2. ·木村朗子, 2016, 「五年後の震災後文学論」, 『新潮』 113(4). ·佐藤忠男, 2016, 「知らせることが、大切なこと」, 『キネマ旬報』 1718. ·杉田弘毅, 2005, 『検証非核の選択: 核の現場を追う』, 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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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당신은 잘 해냈단 말을 들을 자격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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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항상 내가 짐이라 느끼게 하죠”1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Committee on the Elimination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가 필리핀 당국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던 바하이 나 풀라(Bahay na Pula, 또는 ‘Red House’) 터를 보존할 수 있는 기념관을 만들거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및 생존자들을 추모하고 이들의 정의를 향한 투쟁을 기릴 공간을 따로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말라야 롤라스(Malaya Lolas)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일본 점령군이 시행한 성 착취적 ‘위안부 제도’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의 모임이다.2 CEDAW는 필리핀 정부가 피해자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배상, 사회적 지원, 인정을 거부함으로써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판단했다.3 1944년 11월 23일 당시 팜팡가 주 산일데폰소에 주둔 중이던 일본 제국군 사령부에 강제로 끌려갔다고 증언한 피해자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이사벨리타 C. 비누야(Isabelita C. Vinuya), 빅토리아 C. 델라 페냐(Victoria C. Dela Peña), 헤르미니힐다 마님보(Herminihilda Manimbo), 레오노르 H. 수마왕(Leonor H. Sumawang), 칸델라리아 L. 솔리만(Candelaria L. Soliman), 마리아 L. 킬란탕(Maria L. Quilantang), 마리아 L. 마지사(Maria L. Magisa), 나탈리아 M. 알론조(Natalia M. Alonzo), 루르데스 M. 나바로(Lourdes M. Navaro), 프란시스카 M. 아텐시오(Francisca M. Atencio), 얼린다 마날라스타스(Erlinda Manalastas), 타르실라 M. 삼팡(Tarcila M. Sampang), 에스테르 M. 팔라시오(Ester M. Palacio), 막시마 R. 델라 크루즈(Maxima R. Dela Cruz), 벨렌 A. 사굼(Belen A. Sagum), 펠리시다드 투를라(Felicidad Turla), 플로렌시아 M. 델라 페냐(Florencia M. Dela Peña), 유제니아 M. 랄루(Eugenia M. Lalu), 줄리아나 G. 마가트(Juliana G. Magat), 세실리아 산구요(Cecilia Sanguyo), 아나 알론조(Ana Alonzo), 루피나 P. 말라리(Rufina P. Mallari), 로사리오 M. 알라르콘(Rosario M. Alarcon), 루피나 C. 굴라파(Rufina C. Gulapa), 조일라 B. 마날루스(Zoila B. Manalus), 코라존 C. 칼마(Corazon C. Calma), 마르타 A. 굴라파(Marta A. Gulapa), 테오도라 M. 에르난데스(Teodora M. Hernandez), 페르민 B. 델라 페냐(Fermin B. Dela Peña), 마리아 델라 파즈 B. 쿨랄라 (Maria Dela Paz B. Culala), 에스페란자 마나폴(Esperanza Manapol), 후아니타 M. 브리오네스(Juanita M. Briones), 베르지니아 M. 게바라(Verginia M. Guevarra), 막시마 앙굴로(Maxima Angulo), 에밀리아 상길(Emilia Sangil), 테오필라 R. 푼잘란(Teofila R. Punzalan), 자누아리아 G. 가르시아(Januaria G. Garcia), 페를라 B. 발링기트(Perla B. Balingit), 벨렌 A. 쿨랄라(Belen A. Culala), 필라르 Q. 갈랑(Pilar Q. Galang), 로사리오 C. 부코(Rosario C. Buco), 가우덴시아 C. 델라 페냐(Gaudencia C. Dela Peña), 루피나 Q. 카타쿠탄(Rufina Q. Catacutan), 프란시아 A. 부코(Francia A. Buco), 파스토라 C. 게바라(Pastora C. Guevarra), 빅토리아 M. 델라 크루즈(Victoria M. Dela Cruz), 페트로닐라 O. 델라 크루즈(Petronila O. Dela Cruz), 제나이다 P. 델라 크루즈(Zenaida P. Dela Cruz), 코라존 M. 수바(Corazon M. Suba), 에메린시아나 A. 비누야(Emerinciana A. Vinuya), 리디아 A. 산체스(Lydia A. Sanchez), 로잘리나 M. 부코(Rosalina M. Buco), 파트리샤 A. 베르나르도(Patricia A. Bernardo), 루실라 H. 파야왈(Lucila H. Payawal), 막달레나 리와그(Magdalena Liwag), 에스테르 C. 발링기트(Ester C. Balingit), 호비타 A. 다비드(Jovita A. David), 에밀리아 C. 망길리트(Emilia C. Mangilit), 베르지니아 M. 방기트(Verginia M. Bangit), 길레르마 S. 발링기트(Guilerma S. Balingit), 테레시타 팡길리난(Terecita Pangilinan), 마메르타 C. 푸노(Mamerta C. Puno), 크리센시아나 C. 굴라파(Crisenciana C. Gulapa), 세페리나 S. 투를라(Seferina S. Turla), 막시마 B. 투를라(Maxima B. Turla), 레오니시아 G. 게바라(Leonicia G. Guevarra), 로살리나 M. 쿨랄라(Rosalina M. Culala), 카탈리나 Y. 마니오(Catalina Y. Manio), 마메르타 T. 사굼(Mamerta T. Sagum) 및 카리다드 L. 투를라(Caridad L. Turla). 이들은 바하이 나 풀라(레드 하우스)에 최소 하루에서 길게는 3주까지 구금되어 있었고, 강간을 비롯한 성폭력, 고문, 비인도적인 구금 환경에 반복해서 노출되었다. 모든 여성들이 신체적 부상, 외상 후 스트레스, 생식 능력의 영구적 손상, 인간 관계와 사회적 지위에 미친 피해 등 장기적인 결과를 감내해야 했다.4 필리핀 대법원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인정했다: “‘위안부’로서의 일상은 ‘극도의 비참함’ 그 자체였다. 일본군은 피해자들을 작은 칸막이로 나뉘어진 병영식 숙소로 강제로 끌고가 하루에 최대 30명의 군인과 함께 생활하고, 잠을 자고, 성관계를 맺도록 강요했다. 각 병사와의 성관계에 할당된 30분은 여성들에게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공포의 시간이었다. 질병 역시 만연했다. 군의관들은 정기적으로 여성들을 검진했지만 그 목적은 성병의 확산을 막기 위함이었고, 군인들이 빈번히 가한 담배 자국 화상, 타박상, 총검에 의한 자상, 심지어 골절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 종전까지 살아남은 여성은 30%도 되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이후에도 ‘위안부’ 생활에서 비롯된 신체적, 심리적, 정서적 상처를 안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집으로 돌아갔지만 가족에게서 배척당하거나, 자살한 이들도 있었고, 수치심에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G.R. 제162230호, 2010년 4월 28일] 그러나 대법원 판결문은 다음의 입장을 확인했다. “청원 사유에는 물론 깊이 공감하며, 일본군에게서 청원인들이 겪은 상상을 뛰어넘는 공포는 감히 이해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또한 법의 기본 원칙에 명백히 위배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청원인들이 적절한 재판을 통해 가해자에 맞설 구제책이 없어 보인다는 점에도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필리핀 정부가 국민을 기본적 인권 침해에서 보호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법원에는 행정부에 청원인 요구를 수용하도록 명령할 권한이 없다. 대법원 권한은 행정부가 청원인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촉구하고 권고하는 데 한정된다.”5 말라야 롤라스는 대법원에 2010년 4월 28일의 결정을 재고하고 “(1)필리핀 ‘위안부’들에게 자행된 강간, 성노예화, 고문 및 기타 모든 형태의 성폭력은 국제관습법상 반인도적 범죄이자 전쟁범죄이며, (2)필리핀과 일본 간의 평화 조약이 ‘위안부’ 대일본 배상 청구권 포기와 관련해 구속력을 지니지 않음을 선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말라야 롤라스는 또한 대법원에 필리핀 외무부 장관과 대통령실 수석장관에게 ‘위안부’ 피해자들의 대일본 공식 사과, 법적 및 기타 배상 청구 지지를 명령해 줄 것”을 청원했다.6 안타깝게도 필리핀 대법원은 재심 및 재심 보충 신청을 근거 부족을 들어 기각했고[G.R. 제162230호. 2014년 8월 12일] 이에 따라 말라야 롤라스는 CEDAW에 진정을 제기한다. “조용한 속박의 고통” 나탈리아 알론조(Natalia Alonzo) 외 23명의 필리핀 여성은 CEDAW 제84차 회기(2023년 2월 6일-24일) 기간 브렌다 아키아(Brenda Akia), 히로코 아키즈키(Hiroko Akizuki), 마리온 베델(Marion Bethel), 레티시아 보니파즈 알폰조(Leticia Bonifaz Alfonzo), 랑지타 데 실바 데 알위스(Ms. Rangita De Silva de Alwis), 코린느 데트메이어-베르뮐렌(Corinne Dettmeijer-Vermeulen), 에스더 에고바미엔-음셸리아(Esther Eghobamien-Mshelia), 힐러리 그베데마(Hilary Gbedemah), 야밀라 곤잘레스 페레르(Yamila González Ferrer). 다프나 하케르 드로르(Dafna Hacker Dror), 날라 하이다르(Nahla Haidar), 달리아 레이나르테(Dalia Leinarte), 마리안느 미코(Marianne Mikko), 마야 모르시(Maya Morsy), 아나 펠레즈 나르바에스(Ana Pelaez Narvaez), 반다나 라나(Bandana Rana), 로다 레독(Rhoda Reddock), 엘군 사파로프(Elgun Safarov), 나타샤 스토트 데스포자(Natasha Stott Despoja) 및 제노베바 티세바(Genoveva Tisheva) 위원이 참여한 심리에서 진술했다. 이들은 진정을 통해 필리핀 정부에 “성폭력을 포함한 전쟁 범죄 피해자에게 모든 형태의 구제를 제공할 수 있도록 효과적이고 전국적인 배상 제도를 수립하되, 피해 인정, 사회적 혜택 및 기타 지원 조치에 있어 참전 용사인 남성과 전시 성노예 생존자인 여성 모두에게 동등한 접근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현재 적용 가능한 필리핀 내 사회 보장 시스템(Pantawid Pampamilya, GSIS, SSS, PhilHealth, Pag-Ibig Fund, AFPSLAI 등)을 고려하면 이는 불가능한 요구가 아니다. 넘어야 할 장벽은 경제 당국자들의 신자유주의적 성향이다. 이미 놓친 기회가 있다면 하원 법안 9046호, 즉 ‘위안부’ 배상 및 혜택 법안(2019년에 필리핀 상원에 제출)으로, 법안이 통과되었다면 ‘위안부’ 피해자에게 월 3,000페소의 연금과 전액 무료 의료 보험이 제공되었을 것이다. 또한 필리핀재향군인청(Philippine Veterans Affairs Office)이 ‘위안부’ 피해자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사회복지개발부가 이들 여성들이 과거 일본군에 의해 겪은 시련뿐 아니라 공개적인 증언대에 서는 데 따른 고통과 아픔을 고려해 적절한 상담과 안내 프로그램을 마련하게끔 규정이 이뤄졌을 것이다.7 이보다 앞선(10년 전) 제16대 의회에서는 피아 카예타노(Pia S. Cayetano) 의원이 상원 법안 331호, 즉 ‘위안부’ 피해자에게 연금 및 의료 혜택을 제공하자는 내용의 법안을 제출한 적이 있다.8 하지만 이 법안 역시 통과되지 못했다. 문화 프로그램의 영역을 살펴보면, 필리핀 문화원과 9개의 상주 단체는 자유롭게 말라야 롤라스 소속 회원들의 문제를 다룰 수 있고, 필리핀 국립역사위원회와 박물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도 놓친 기회가 있었다. 가브리엘라당 소속 의원인 알린 브로사스 의원(Arlene Brosas)과 에미 데 헤수스(Emmi De Jesus) 의원이 작성하고, 베르나데트 에레라-디(Bernadette Herrera-Dy) 위원장이 이끄는 하원 여성및성평등위원회에서 2019년 가결한 하원 법안 372호가 그것이다. 법안은 여성의 국가 발전 공헌을 기리는 정부 정책의 이행 차원에서 국립 필리핀 여성 박물관의 설립을 이끌어냈을 것이다.9 필리핀 정부의 제9차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 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 이행 정기 보고서에서는 안전 공간법과 우편 주문 배우자 방지법이 소개되고 있으나, ‘위안부’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관련 질의에 필리핀 여성위원회는 공감 수준의 성명을 내놓았다. ‘위안부’ 문제에 가장 일관된 입장을 취해 온 것은 필리핀 인권위원회로, 동 위원회는 5년 전 평화의 소녀상(Statue of Peace)이 의문리에 철거된 사건을 개탄한 바 있다. “평화의 소녀상은 우리 역사 속 투쟁을 기억하고 기리고자 세워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권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위안부’의 고통과 투쟁을 추모하는 기림비가 한밤 중에 몰래 철거된 사태에 깊은 우려를 표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우리의 역사 의식과 국가 정체성에 대한 강탈과 같습니다.” “사적 공간으로의 소녀상 이전은 오랜 세월 숨죽여 지내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어둠에서 나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존엄성을 되찾고자 그들 인간성에 가해진 범죄에 대한 배상을 요구한 필리핀 여성들의 기억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이 기림비는 우리 과거의 암울한 단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필리핀 여성의 존엄성이 다시는 어떤 방식, 형태, 표현으로든 짓밟히고 훼손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위안부’ 할머니들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현재 생존해 계신 분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 분들의 존엄성을 기리기 위해 우리는 사람들의 의식뿐만 아니라 필리핀 역사에서 이분들을 지우려는 시도에 저항해야 합니다.”10 인권위는 최근 CEDAW의 판결에도 발 빠르게 응답했다. “필리핀의 독립적 국가 인권 기관으로서 인권위는 필리핀 정부가 특히 피해자들이 입은 신체적, 정신적, 물질적 피해와 권리 침해의 심각성에 비례하여 ‘인정과 구제, 공식 사과, 물질적·정신적 손해 배상을 포함한 완전한 배상’을 제공하라는 CEDAW의 권고 사항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이행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의 추구는 금전적 배상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인권위는 ‘위안부’들의 존엄성을 온전히 인정하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고, 마닐라만에 세워졌으나 2018년에 철거된 평화의 소녀상을 다시 세워 필리핀 ‘위안부’의 이야기와 투쟁을 기리고 전쟁의 폭력성에 대한 혐오를 상기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권고하는 바입니다.”11 그러나 대통령궁 홍보실 발표에 따르면, 필리핀 정부는 최근 CEDAW 판결에 유의하고 있다는 입장만을 밝혔다.12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뉴욕에서 열린 제67차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SW 67) 회의에서 마르가리타 구티에레즈(Margarita Gutierrez) 필리핀 내무부 차관은 온라인 아동 성학대 및 착취 방지법과 아동 성학대 및 착취물 방지법에 대해 논했으나, ‘위안부’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13 필리핀 행정부가 긍정적 답변을 내놓은 것은 CEDAW의 판결 하루 뒤로, 헤수스 크리스핀 레물라(Jesus Crispin Remulla) 법무부 장관은 기자 회견에서 의회 지도자들과 필요한 법안에 관해 논의할 계획임을 밝혔다. “필리핀 정부는 이 일을 계속해나가야 하며, 이는 우리의 국제적 의무이자 우리에게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잘 알려진 역사에 관한 일입니다. 정의의 실현을 더는 미룰 수 없으며(kasi ilan na lang nabubuhay sa kanila kaya sana mahabol pa natin), 이는 생존자들 중 소수만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법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이들을 돕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kung kaya pang habulin ‘yung tulong, ihabol natin). 심각한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돈이란 극히 적은 보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돈은 이들 생존자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결코 보상할 수 없습니다.”14 이러한 노력에 더해, 라울 바스케스(Raul Vasquez) 법무부 차관과 포괄적 ‘위안부’ 배상 정책을 다루는 연구 그룹은 모든 고등 교육 기관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필리핀 역사를 교육하도록 의무화한 하원 법안 5719호의 접근법을 통해 CEDAW 위원회의 다섯 번째 권고(중등 대학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 기관의 교과 과정에서 전시 성노예제의 필리핀 여성 피해자/생존자 역사를 주류로 다룰 것)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동 법안은 상원으로 이관되었으며, 법으로 제정될 경우 일본 점령군에 맞서 연합군이 반파시스트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한 필리핀 군인들의 영웅적 업적을 후대에 전달할 뿐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애국심과 민족주의의 가치를 교육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국가 역사 속 주인공들의 역할에 대한 가르침에는 분명 ‘위안부’와 그 정의 실현 운동에 관한 내용 역시 포함될 것이다.15 일제 강점기 필리핀 게릴라 부대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보존, 수집, 연구, 해석해 온 헌터스-ROTC역사학회(Hunters-ROTC Historical Society)는 이 법안 초안 작성에 참여하고 법안 통과를 위한 로비 활동을 전개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라는 현실 인식이 제2차 세계대전 연구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다시 요약하자면, 2023년 3월 9일 유엔 CEDAW는 필리핀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일본군에 의한 전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구제책을 모색하지 않았으며, 이는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에 따른 의무 불이행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이러한 결정은 비정부기구(NGO)인 말라야 롤라스 회원 24명이 제기한 진정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졌다.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은 현 상황에서 의미 있는 배상을 위한 필리핀 정부의 즉각적인 조치가 긴요하다. 리사 혼티베로스(Risa Hontiveros) 상원의원은 2023년 3월 13일, 필리핀 정부가 CEDAW에 따른 협약 의무를 즉각 이행하고 ‘위안부’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정당하고 의미 있는 배상을 제공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 539호를 제출했다. 제19대 필리핀 의회와 마르코스 주니어 행정부가 유엔 권고 사항을 이행하기를 고대하며, 지금까지도 필자와 제자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글로벌 정의 실현 운동과 관련한 필리핀 관료들의 지식, 태도 및 실천적 행동을 주제로 인터뷰를 지속하고 있다. 가수만큼 노래에도 집중한다면 네이버후드 브랫츠(Neighborhood Brats)의 앨범 ‘Claw Marks(발톱 자국)’에 수록된 곡 ‘Comfort Woman(위안부)’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단둘일 때 당신은 여전히 같은 식으로 날 대하죠. 당신의 기분을 낫게 해줄 ‘위안부,’ 난 아니에요, 난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That doesn't change the way you treat me when we are alone, A "Comfort Woman" to make you feel all right, I'm not the one, I'm not the one).” When you talk, you say “I'm sorry” You make me feel like I'm a burden all of the time 말할 때 “미안해”라고는 해도 당신은 항상 내가 짐이라 느끼게 하죠 A comfort woman to make you feel alright I'm not the one, I'm not the one A comfort woman when she is not around I'm not the one, I'm not the one 당신의 기분을 낫게 해줄 ‘위안부’ 난 아니에요, 난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그녀가 없을 때 난 ‘위안부’ 난 아니에요, 난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Suffering in silent bondage That don't change the way you treat me when we are alone 조용한 속박의 고통 단둘일 때 당신은 여전히 같은 식으로 날 대하죠 A comfort woman to make you feel alright I'm not the one, I'm not the one A comfort woman when she is not around I'm not the one, I'm not the one 당신의 기분을 낫게 해줄 ‘위안부’ 난 아니에요, 난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그녀가 없을 때 난 ‘위안부’ 난 아니에요, 난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A comfort woman to make you feel alright I'm not the one, I'm not the one A comfort woman fights the war at home I'm not the one, I'm not the one 당신의 기분을 낫게 해줄 ‘위안부’ 난 아니에요, 난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집에서 전쟁을 치르는 ‘위안부’ 난 아니에요, 난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I'm not the one I'm not the one I'm not the one I'm not the one 그건 내가 아니에요 그건 내가 아니에요 그건 내가 아니에요 그건 내가 아니에요 네이버후드 브랫츠(Neighborhood Brats)의 앨범 ‘Claw Marks(발톱 자국)’에 수록된 곡 ‘Comfort Woman(위안부)’ 가사 전문 각주 1. 이 글의 소제목들은 말미에 인용된 네이버후드 브랫츠(Neighborhood Brats) 밴드의 곡 ‘위안부(Comfort Woman)’ 가사에서 따왔다. 2. https://www.ohchr.org/sites/default/files/Documents/Issues/Truth/CallLegacyColonialism/CSO/Center-for-International-Law-Manila.pdf 3. https://www.ohchr.org/en/press-releases/2023/03/philippines-failed-redress-continuous-discrimination-and-suffering-sexual 4. https://news.un.org/en/story/2023/03/1134317 5. https://www.officialgazette.gov.ph/2010/04/28/vinuya-v-executive-secretary-g-r-no-162230-april-28-2010/ 6. https://elibrary.judiciary.gov.ph/thebookshelf/showdocs/1/57390 7. https://mb.com.ph/2019/02/18/move-to-grant-pension-health-benefits-for-comfort-women-gains-ground-in-house/ 8. https://issuances-library.senate.gov.ph/bills/senate-bill-no-331-16th-congress-republic 9. https://www.congress.gov.ph/press/details.php?pressid=11176&key=women 10. https://chr.gov.ph/statement-of-the-chr-on-the-removal-of-the-comfort-women-statue/] 11. https://chr.gov.ph/statement-of-the-commission-on-human-rights-supporting-the-call-for-the-philippine-government-to-provide-reparation-for-the-suffering-and-continuing-discrimination-experienced-by-comfort-women/ 12. https://www.pna.gov.ph/articles/1197151 13. https://pco.gov.ph/news_releases/pbbm-admin-sets-up-measures-safety-nets-to-protect-promote-welfare-of-ph-women/ 14. https://www.pna.gov.ph/articles/1197111 15. https://www.congress.gov.ph/press/details.php?pressid=12289&key=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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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한반도 평화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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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맥락에서 평화를 ‘여성’이라는 열쇠 말로 읽어낼 때 크게 두 관점이 교차된다. 하나는 평화 구축 과정에서의 여성 참여를 강조하는 현실적 입장과 다른 하나는 젠더를 고려하지 않은 평화적 상태는 가능하지 않음을 주장하며 여성주의적 평화 담론에 천착하려는 시각이다. 예컨대 한반도 평화와 여성의 ‘역할’을 질문할 경우에는 안보 의제나 평화 구축 과정이 남성 행위자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여성 참여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지 도출하고자 한다. 반면에 여성주의적 평화를 강조할 경우에는 한반도의 반평화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가부장성과 위계 서열 등을 문제시하면서 앞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평화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밝혀내는 것에 논의의 무게 중심이 있다. 이 짧은 글에서 두 관점을 굳이 구분하여 소개하는 이유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여성의 참여와 여성주의적 평화 구성이라는 두 축이 단계적이 아닌 동시적으로 상호 연관성의 맥락에서 실천되어야 함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 녹록하지 않은 한반도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으로 평화 구축 과정에서의 여성 참여 증진을 강조해 온 것은 평가할 만하지만 과연 여성주의적 평화를 탐색하는 데도 비등하게 역량을 모아 왔는지 성찰적으로 반성해보자는 것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여성주의적 평화에 대한 두터운 담론과 토론이 부재한 까닭에 여성 참여를 넘어서는 여성 평화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져보자는 뜻이다. 먼저 두 입장의 차이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우선 여성 참여를 강조하는 입장은 반평화 상태에서 가장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 있는 여성이 평화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식민과 전쟁, 거기에 이어진 분단체제까지 ‘전쟁과 같은 상황’에 놓인 한반도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을 역사화하고 피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와 구호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지하듯 2000년에 발표된 유엔 안보리의 ‘여성, 평화와 안보를 위한 결의안 1325호’가 이러한 시각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유엔 1325호 결의안은 예방, 보호, 참여, 구호와 재건 등 네 가지 핵심 영역 아래 전쟁이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여성 인권 침해는 지속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평화 구축 및 재건의 모든 과정에서 성인지 주류화를 강조한다. 또한 평화와 안보 의제에서 여성의 참여를 강조하고,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향상할 것을 권고한다. 특히 최근 결의안에서는 ‘전쟁’을 군사적 분쟁으로만 협소하게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나 가뭄과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 극단주의와 테러리즘과 같은 ‘전쟁과 같은’ 상황으로 확장한다. 안보 문제는 이제는 국가 수준에서 발생하는 국가 간의 전쟁에서 지구적 수준의 위기와 일상의 폭력 등과 결합하여 더욱 복잡하게 진화하고 있으며, 이에 평화도 국가 중심의 전통 안보 영역 밖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문제에 적극 조응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유엔 1325호 결의안과 이후 후속 결의안은 안보 문제의 영역이 복잡해지고 있음을 문제시하면서 여성이 마주하고 있는 다층적 현실을 성주류화를 통해 타개하여 평화에 접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국제적 조류에 따라 한국 여성계는 한반도 안보와 평화 의제에서 지속적으로 여성의 참여를 요구해왔다. 남북 대화가 본격화되었던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남북 여성 사이의 대화가 이뤄졌으며 이를 통해 정전체제 내에서 남북 여성이 경험하는 불평등이나 가부장성을 문제시하고자 했다. 특히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해서 다른 아시아 피해여성과 함께 북한 여성과의 대화와 연대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남북 대화에서 여성의 참여는 실망스러운 수준이었으며 전통 안보 혹은 경제교류협력이라는 패러다임에서 여성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다뤄져왔다. 이것의 이면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남한 당국자와 시민사회에서 여성 어젠다에 대한 시급성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화나 통일의 문제를 국가 수준이나 민족 문제로 접근하는 상황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에 대한 논의가 끼어들 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또 다른 이유는 대화와 교류 상대인 북한 여성들의 경험과 위치가 남한 여성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 여성들이 젠더적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평화에 대한 논의를 제안했을 때 북한 여성들은 체제와 문화의 차이로 인해서 이를 공감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북한 여성의 위치가 국가와 가정의 책임이라는 이중의 부담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상대적 자율성도 존재했던 까닭이다. 더 큰 문제는 북한 정권의 규율체계나 정치적 레토릭으로부터 독립적인 북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안타깝게도 여성 참여에 기반을 둔 한반도 평화 구축은 남북 모두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진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이후 남북 사이의 대화와 교류가 멈추게 되자 한반도 평화 구축 과정에 여성의 역할을 찾기란 더욱 힘들어지게 된다. 일본군 성노예, 한국군 ‘위안부’, 그리고 미국군 ‘위안부’와 같은 전쟁 폭력에 대항하는 여성들의 연대는 지속되었지만 한반도 정전체제 극복과 평화 안착을 위한 남북 여성 사이의 활발한 토론이나 실천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어젠다가 평화 담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여성 참여라는 목표는 평화를 위한 협상 테이블에 올라가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통일이나 평화 담론 지형에 여성주의적 접근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못했다. 국가 수준에서 논의되는 통일, 평화 담론에서 젠더 폭력이나 불평등의 문제가 제한적으로 다뤄져온 까닭에 여성의 위치에서 경험되는 평화의 다층성에 대한 논의도 진전되지 못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정전체제와 군사적 긴장이 지루하게 지속되면서 남한 여성들에게 한반도 평화라는 주제가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지게 되었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남한 여성들은 가상 세계를 포함한 일상에서의 성폭력과 위협, 직장이나 학업에서의 성차별이나 문화적으로 존재하는 성규범 등에 대해서는 반평화적인 문제로 감각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한반도가 여전히 ‘전쟁’ 중이며 이로 인해 여성들의 위치가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는 충분히 감각하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는 군사 중심의 ‘안보’ 문제이며, 이에 여성주의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렵다는 패배의식도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한반도의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과 위협의 대부분은 정전체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남성 중심적 문화와 권력은 정전체제라는 ‘불완전한 국가’를 빌미로 유지되고 있으며, 군대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 권력도 국가 안보라는 틀을 통해 재생산되고 있다. 다시 말해 분단 문제 극복이 여성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평화에 근접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의제 중 하나라는 뜻이다. 한반도의 맥락에서 여성주의적 평화에 대한 담론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상과 문화의 폭력과 정전체제라는 구조가 결합되어 있는 한반도적 비평화 매커니즘을 밝혀냄으로써 평화의 상을 다층적으로 확장해야 한다. 사실상 ‘전쟁이 지속되어 온’ 한반도에서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은 때로는 직접적인 성폭력과 성착취로 가시화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의 비가시적인 문화와 관습의 모습으로 여성들의 삶과 의식을 옥죄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는 단순히 두 국가 사이의 관계 개선 혹은 통일을 의미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구축된 사회 전반의 폭력과 위계 구조를 문제시하는 것이 평화 만들기의 과정이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축이 바로 젠더인 것이다. 그만큼 여성주의적 평화란 분단과 일상이 결합되어 작동하는 젠더 위계를 무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미시적 문제로 분단 구조를 문제시하는 것이며, 동시에 분단이라는 국가 수준의 폭력을 일상과 연관 시켜 사고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남북한 여성들 사이의 유다른 경험을 아우르는 여성주의적 평화 담론도 필요하다. 지난 교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남북 여성들이 현재 위치한 세계는 상당히 다르지만 이들이 여성주의적 평화라는 더 큰 미래를 공유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만들어내는 진전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여성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진전될 수 있는 상태를 한반도 평화의 일부로 포함시키기 위해 더욱 다양한 상상력들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핵과 미사일 같은 안보 영역에서의 평화도 어려운데 여성주의적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 다소 이상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단계적으로 평화에 접근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조언도 덧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주의적 평화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비전이 부재한 상황에서 현실적 수준에서의 평화 실천이나 평화 운동은 방향을 잃고 표류해왔던 것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남북 간의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는 요즘, 모두들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한반도 평화 구축의 근본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현실적 참여와 운동에 분주해 잠시 뒤편으로 미뤄두었던 여성주의적 평화에 대한 토론을 이제라도 시작했으면 한다. 앞이 보이지 않을수록 근본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말을 되새겨보도록 하자. 가장 멀어 보여 주저했던 방법이 목표로 다가가기 위한 유일한 길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