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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몸을 횡단하는 역사와 삶의 회고록: 한국 여성 원폭 피해자들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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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쟁이 인간에게 남기는 심원한 고통에 관해 얼마나 아는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뿐 아니라 원폭 피해자와 사할린 잔류자의 인권 문제 또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배제되었다. 특히 원폭 피해는 전시 성폭력과 유사하게 몸에 직접 작용하여 성적 재생산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일종의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한다. 이에 웹진 〈결〉은 연구자 2인의 글에 원폭 피해자들의 일상을 담은 김효연의 사진 작업 ‘감각이상’을 병치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글: 오은정 X 사진: 김효연 1. 피폭의 횡단-신체성과 옹이 진 몸 김정순 씨는 1944년 규슈의 아키이케 탄광에 징용공으로 일하던 남편 주석문이 모범 광부로 선발되어 가족을 초청하면서 도일(度日)했다. 첫 아이 명순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945년 8월 9일, 김 씨가 나가사키역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남짓. 나가사키에 살고 있던 사촌 동생이 쌀을 마련해 준다고 하여 나선 길이었다. 아이를 등에 업고 역을 나선 순간 하늘에서 번쩍 섬광이 비추었다. 어디선가 불덩이가 달려든 것 같은 순간 정신을 잃었다. 남편 주 씨가 아내를 찾은 것은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후였다. 나가사키에 신형 폭탄이 떨어져 수만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과 자녀를 찾기 위해 나가사키 구석구석의 수용소, 시체 더미, 병원 등을 헤맨 끝이었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너무나 많았고, 중화상으로 부은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김 씨와 같이 일시 방문한 조선인들은 신원 파악조차 어려웠다. 대혼란 상황 속에서 드디어 마주한 부인의 왼쪽 눈에는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원폭 폭발 당시 튀어 나간 눈알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 이후로도 찾지 못했다. 등에 업혀 있던 아이는 다행히 큰 상처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조선으로 돌아와서 처음 낳은 사내아이는 낳은 지 몇 분 만에 약간의 경련을 보이더니 곧 숨을 거두었다. 뼈도 없고 살도 아닌 물렁대기만 한 어린 것은 사람이라기보다 흐느적대는 물체였다.”1 다음으로 낳은 사내아이는 다행히 죽지 않았지만 평생 빈혈을 달고 살았다. 만성 피로와 약한 체력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하는 데 곤란을 겪어 일용직 노동을 전전했다. 셋째 사내아이는 보통의 아이보다 반골밖에 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났는데 1·4 후퇴 때 열병을 앓다가 한 살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딸로는 둘째인 명자가 막내로 태어났다. 항상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72년 6월에 사망했다. 형편이 어려워 병원 검진 한 번 받아보지 못했다. 징용공 당시 탄광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평생 구부정하게 다니면서도 가족을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던 남편이 시름시름 앓으며 여위어 간 것도 그즈음이었다. 척추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한 달이 되지 않은 1972년 9월에 딸 명자의 뒤를 이었다. 피폭 당시에는 큰 상처가 없었던 것 같은 큰딸 명순은 10대 후반이 되면서 점점 빛을 보기 어려워했고, 어둠 속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다. 다락방에서의 삶이 지속되었다. 나가사키 원자폭탄 폭발 당시 노출되었던 방사선은 김정순 씨가 일본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와서도, 자녀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그의 몸속에서 많은 것들을 변형시키고 있었다. 빈도 높은 유산과 사산, 기형아 출산, 빈혈, 갑상선암이나 혈액암을 비롯한 각종 암, 위장병, 만성 피로, 체력 저하는 방사선에 피폭된 이들이 흔히 경험하는 만발성 후유증의 일부다. 방사선에 노출된 인체의 각 세포 속 유전자는 돌연변이를 일으키는데 그 정도에 따라 회복되는 시기도 증상도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일공동연구기관인 방사성영향연구소(RERF)의 연구에 따르면 백혈병, 유방암, 폐암, 위암, 결장암, 다발성골수종 등이 방사선량과의 상관관계가 인정되었다. 이외에도 고혈압, 척추질환, 백내장 등과 같은 질환이 대표적인 피폭 후장해에 속한다. 후장해는 평생 진행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신체를 횡단하는 방사선에의 노출 영향은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짧은 순간이나 그것이 폭발한 폭심지 부근의 장소에 머물렀던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원자폭탄 폭발 이후 다양한 종류의 잔류방사선은 인체에 여러 세포의 재생산에 작용한다. 폭발 당시에 폭심지 근처 4~5km 정도 이내에 머무르며 원폭의 영향을 받은 사람 이외에도, 폭발 이후 2주 이내에 구호나 가족 수색 등을 위해 이 지역들에 들어간 사람들(입시피폭자), 원거리에 피난 온 피폭자들을 간호했던 사람들(구호피폭자), 그리고 피폭자의 몸속에 있었던 태아들(태아피폭자)의 몸에서도 방사선 노출은 중요한 작용을 한다. 남편 주 씨가 아내를 찾기 위해 나가사키 시내를 10여 일 동안 돌아다닐 때 엄청난 양의 잔류방사선에 노출되었고 그의 몸에도 방사성 물질이 쌓였다. 신체의 세포 조직에 한번 들어온 방사성 물질은 피폭자들의 몸을 횡단하고 장기 지속한다. 광산에서 추출되어 정제되고 폭발하여 투과하는 방사성 원소의 횡단-신체적 물질성은 피폭자의 몸속에서 “위태롭고, 우발적이며, 우연적이고, 불확실하며, 고분분투하는 역동적인 삶의 회고록”2을 써 내려갔다. 원폭 피해자의 자녀들이 모두 후유증을 겪는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피폭자 2세들이 만성 피로나 체력 저하 등 면역계 증상을 경험한다는 사실도 부정하기 어렵다. 신체를 횡단하는 방사성 원소는 피폭자의 몸에 원폭을 기록하고, 역사를 기억하게 하며, 삶의 옹이를 만들어냈다. 2. 민족/국가, 장애, 가족, 그리고 여성이라는 굴레 방사성 물질에 노출된 몸은 단지 하나의 생물학적 신체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크게는 20세기 초의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적인 아시아 확장과 전쟁 그리고 강제동원과 이주를 통해 삶을 개척해야 했던 피식민 조선인들의 신산한 삶을 기록하는 것이자, 인류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무기로서 핵 개발의 역사를 상호 연결한다. 또한, 이들의 몸을 횡단하는 방사성 물질은 이들의 몸속 세포만을 변형시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딸이자 아내, 그리고 엄마로서의 삶을 요구받는 여성들의 삶을 굴절시켰다. 한국 여성 원폭 피해자의 생애사의 많은 부분은 그들의 신체에 갊아 있는 민족과 국가, 원폭증 장애, 그리고 가족과 여성이라는 굴레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엄마, 엄마는 왜 유명해졌지? 그놈의 원자탄이라고? 원자탄을 맞은 사람이 한국에서 엄마 한 사람이야? 그게 어느 세월인데 이제 와서 엄마 혼자 유명해졌느냐 말이야?” 저는 압니다. 자식들의 눈 속에서 일고 있는 그 숱한 힐문(詰問),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하면서 엄마 역시 거지꼴로 찌든 주제에 이름 석자는 무슨 이유로 떠벌여 가지고······. 그 혐오와 원망에 찬 항변을······저는 뼈아프게 압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이렇게 내친 걸음으로 입을 떼고 있는지 모릅니다. -박수복,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 182쪽. 손귀달의 「저는 罪人이 아닙니다」 중에서. 1930년 4월 22일, 일본 오사카시에서 태어난 손귀달 씨는 열세 살에 부모님을 따라 히로시마시로 이사를 갔다. 히로시마시립제2고등여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열여섯 살 여름.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전황이 기울대로 기울어진 상황에서도 학도 동원이 이어졌고, 손귀달 씨는 학교가 아닌 미쓰비시조선소 히로시마 공장으로 매일 출근해야 했다. 1945년 8월 6일 아침, 원자폭탄 폭발과 함께 공장의 유리가 깨지며 날아든 파편에 이마에 큰 부상을 입었다. 피폭 당시 나이 47세로 히로시마 체신국에서 기술직원으로 일하던 손 씨의 아버지가 중상을 입어 3년 후 사망하였고, 히로시마시청 앞에서 전신선을 까는 작업을 하는 인부를 관리 감독하던 오빠 손진두도 왼쪽 허벅지에 큰 중상과 화상을 입었다. 해방 이후 고향인 경상남도 사천으로 돌아온 손 씨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그해 이른 봄 사천에서 순경을 하던 한 사내와 중매로 결혼을 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없는 집안 형편에 밥숟가락이라도 하나 덜자는 심정으로 서두른 결혼 생활이 파탄 난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혼 2년 만에 첫 아이를 사산하고, 둘째 아이가 태어난 이후 손 씨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원폭의 후유증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손 씨의 남편은 원폭 피해자임을 숨기고 사기를 쳤다며 결혼 생활을 끝내고 싶어 했다. 이 사실이 친정까지 알려지면서 오빠인 손진두 씨 또한 부인과 헤어지게 되었다. 손 씨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아들과 조카(손진두 씨의 아들)를 데리고 부산으로 홀로 나와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했다. 해방 이후 조선으로 귀환하여 다시 전쟁의 참화를 겪은 한국의 원폭 피해자들에게는 원폭으로 인한 각종 질환들을 치료할 길이 없었다. 원폭증의 장애를 안고 행상 일로 근근이 돈을 벌던 손 씨가 일본에서 원폭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은 1965년 한일회담 전후였다. 한국 원폭 피해자들 사이에서 구호협회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부산에서는 엄분연, 손귀달 등 여러 여성 원폭 피해자들이 전단지를 붙여가며 회원들을 모아 나갔다. 1968년 9월 손귀달 씨는 일본에서 원폭증 치료를 받기 위해 행상을 해서 번 돈 5만원(당시에 부산에서 전셋집을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고 한다)을 내고 밀입국을 시도한다. 밀선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작은 통통배 수준으로 그 배에 의지해서 일본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본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원폭증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이 아니라 경찰서였다. 한국 원폭 피해자의 존재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손귀달 씨의 밀항과 체포는 일본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손귀달 씨는 밀항 직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당시 일본 시민사회의 도움으로 송환 조치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본 시민사회에 한국 원폭 피해자의 존재를 각인시킨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 그의 오빠였던 손진두 씨는 손귀달 씨와는 달리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 속에서 계획에 따라 밀항과 체포 그리고 구금을 ‘재한 피폭자 구호’라는 일본 시민사회의 운동 차원으로 전환시켰다. 손진두 씨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원폭피폭자건강수첩 발급 소송은 한국 원폭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재외피폭자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용된다. 손귀달 씨의 이야기는 1984년 당시 미국 메릴랜드대학의 교수(예술철학박사)였던 한국인 홍가이(영문 이름 Kai Hong) 씨의 영어로 쓴 희곡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일본에 있다가 귀국한 한국 여성인 영주의 비극적 삶을 통해 전쟁의 책임과 반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주인공 영주의 일본 밀항과 이 사건이 한일 양국에서 정치외교적 문제로 비화되거나 한일의 좌익계열 운동단체의 반정부 시위 구실이 되지 않도록 수습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현해탄아, 현해탄아 / 우리 영주가 세 번째로 현해탄을 건너는구나 이번엔 다정히 대하지 않을 테냐 / 현해탄아, 현해탄아 너를 건널 때마다 비극이 우릴 기다렸다 / 세 번째엔 우리 영주를 즐겁게 맞아 다오 현해탄아, 넌 우리에게 빚이 있다 / 현해탄아, 현해탄아 / 부당한 현해탄아 넌 우리에게 빚이 있다 / 넌 우리에게 빚이 있다 -희곡 〈I am a Hibakusha〉 중에서 밀입국과 강제송환 이후 손귀달 씨의 삶이 순탄치 않은 것은 자명했다. 그는 이후에도 마약 밀매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투옥되는가 하면, 후원을 받기 위해 원폭 피해자라는 상징을 앞세운다거나 일본의 좌파 운동가들과 연결된 ‘빨갱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손 씨는 “내친 걸음으로 입을 떼”었다. 3. 뚫고 나온 목소리, 공명하는 마음들 사단법인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 부산지부장 엄분연 등 회원 10명은 1일 오전 11시 대통령취임식에 참석하러온 일본 사토 에이사쿠 수상을 만나 피해환자들을 위한 의료시설, 생활대책, 자녀들의 교육대책 등을 세워달라는 호소문을 전달키위해 주한일본대사관으로 몰려갔다가 종로서로 연행됐다. (1971년 7월 2일, 동아일보) 여기 하나의 짧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기사에는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 부산지부라는 이름으로 나오긴 했지만 사실 원폭협회의 주요 간부들이 참여하지 않은 이 요망서 전달 시도는 부산에 거주하던 여성 원폭 피해자 엄분연, 손귀달 등이 감행한 것이었다. 당시 나이 마흔 전후의 중년 여성 원폭 피해자들이 경호도 가장 삼엄했을 대통령 취임식이라는 날을 잡아 광화문 한쪽에 자리 잡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중앙 간부진의 지원도 받지 않은 채 국빈으로 방문한 일본 수상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신문 지면을 통해 짧은 단신 기사로 기록을 남긴 위 사건은 일본 누노가와(布川徹郎) 감독의 다큐멘터리 『倭奴へ』(한글 제목: 왜놈에게)라는 53분짜리 영상 속에서 보다 생생하게 그려진다. 부산의 한 언덕배기 좁다란 골목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허름한 판잣집들과 헐벗은 달동네 아이들의 모습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목소리의 일본 여성이 흡사 여행 가이드처럼 내레이션을 읊는 이 영상은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카메라는 사토 일본 수상에게 재한 원폭 피해자에 대한 원호를 바라는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서울을 다녀오는 한국 여성 원폭 피해자들을 따라다닌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경찰차에 호송되어 종로서로 향하는 모습, 작은 사무실에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을 전면에 걸어놓고 사무를 보고 있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서울 사무실의 모습도 비친다. 연구자가 이제는 할머니가 된 이 영상 속의 세 중년 여성을 만난 건 2008년과 2011년이었다. 그들은 영상에 대해 이야기하자, “시위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잡혀간 것”이 아니라 시위는 당연히 못 할 것이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오히려 “잡혀가야 뉴스가 된다”고 생각해 그렇게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국교 정상화 이후 처음으로 찾아온 일본의 수상에게 한국 원폭 피해자의 현실을 알리고, 원폭증의 치료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도 그들은 다른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미디어 재현에서 일반적으로 비치는 수동적이고 비참한 모습이 전혀 아니었지만, 실제로 만난 이들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당차고 힘센 어조로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사실 한국 원폭 피해자 운동의 역사에서 여성 원폭 피해자의 존재는 잘 조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귀달의 일본 밀입국 사건이나 위의 광화문 시위처럼 한국의 여성 원폭 피해자들은 시기마다 목소리를 내왔다. 그리고 여기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반전반핵’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한국원폭피해자협회와 함께 원폭 피해자 운동을 해온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활동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활동은 주로 원폭 피해자 구호를 위한 기금 마련과 홍보 등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한국 원폭 피해자 실태조사 활동이었다. 1974년 가을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의뢰와 협력으로 이뤄진 첫 번째 실태조사, 1977년 일본에서 열리는 반전반핵평화 국제심포지엄에 참여하기 위해 이뤄진 두 번째 조사, 그리고 1979년 ‘미국장로교여선교회’ 후원으로 진행된 조사까지 모두 세 번에 걸친 조사가 그것이다. 뒤의 두 차례 조사는 당시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이 결성한 동아투위가 수행하였다. 해직 기자들의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조사비를 지급함으로써 이들을 후원하는 일환이기도 했다. 그중 마지막 실태조사 결과는 10·26과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조사를 맡았던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으로 자료를 압수당하는 등 출간에 우여곡절을 겪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로시마지부, 일본 히로시마시에 위치한 가와무라 병원, 재한피폭자를구원하는시민회(시민회), 재한피폭자문제시민회의 등 다양한 단체들도 한국 원폭 피해자의 권리를 요구하며 원폭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공명하며 연대했다. 이러한 연대의 흐름이 1987년 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23억불 보상청구운동으로 발전해갔다. 물론, 그 운동의 결과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지만, 이는 냉전이 해체된 국제 질서와 맞물려 민주화 이후의 한국에서 일본의 전후 미처리 문제에 대한 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1990년대 일본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으로부터의 전후 보상 요구에 직면해야 했다. 민주화 이후 사할린 교포, 종군위안부, 전시노무자 그리고 일본군의 군인 및 군속 등으로 강제 연행된 사람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전쟁 피해 배상 요구 재판을 시작하는 가운데, 한국 원폭 피해자들도 다양한 소송 운동에 나서며 이 역사적 흐름에 동참하였다. 각주 1. 박수복,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 68쪽. 김정순의 「다락 속의 목숨」 중에서. 2. 스테이시 앨러이모, 2018,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윤준·김종갑 역, 그린비. 참고문헌 -박수복, 1975,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 창원사. -스테이시 앨러이모, 2018,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윤준·김종갑 역, 그린비. -오은정, 2013, 『한국 원폭피해자의 일본 히바쿠샤 되기: 피폭자 범주의 경계 설정과 통제에서 과학·정치·관료제의 상호작용』,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한국교회여성연합회, 1994, 『원폭피해자 돕기 및 반전반핵평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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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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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쟁이 인간에게 남기는 심원한 고통에 관해 얼마나 아는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뿐 아니라 원폭 피해자와 사할린 잔류자의 인권 문제 또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배제되었다. 특히 원폭 피해는 전시 성폭력과 유사하게 몸에 직접 작용하여 성적 재생산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일종의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한다. 이에 웹진 〈결〉은 연구자 2인의 글에 원폭 피해자들의 일상을 담은 김효연의 사진 작업 ‘감각이상’을 병치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글: 김성운 X 사진: 김효연 *이 에세이는 김성운 교수의 논문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어머니와 산다면(母と暮せば)」, 「태양의 아이(太陽の子)」를 중심으로」, 『일본연구논총』 56집, 2022, 91-116를 요약, 정리한 글입니다. I. 후쿠시마에서 히로시마·나가사키로 2011년 3월 11일 일본의 태평양 연해상에서 일어난 규모 9.0의 대지진에서 비롯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여러모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을 상기시키는 사건이었다. 수소 폭발에 이은 다량의 방사능 물질이 인근 지역을 뒤덮으면서 원폭이 가져온 방사능 재해의 기억이 소환되었다. 또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으로부터 시작된 전후 일본의 원자력 정책 자체에 대한 재검토가 다방면에 걸쳐 일어났다. 유일한 피폭국이었던 일본은 전후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의 기억은 일본이 원자력 발전소를 받아들이는 데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다수의 일본인들은 핵에너지의 평화적 전환이 피폭국 일본의 책무라고 여겼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을 ‘신의 섭리’라 강조하여 ‘나가사키의 성인’이라 존경을 받았던 나가사키 의과대학 나가이 다카시(永井隆) 방사능 의학 교수 역시 원폭의 원리를 이용하여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면 인류의 행복이 증진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들의 영혼도 위로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 이러한 논리는 일본 정부의 원전 정책 추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일본에서 원전 도입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쇼리키 마쓰타로(正力松太郎)가 사주로 있었던 요미우리 신문사는 원전 관련 박람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여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1954년 도쿄 신주쿠 이세탄 백화점에서 개최된 ‘누구나 알 수 있는 원자력전’에서는 원자력 발전을 포함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사례를 히로시마 피폭의 처참한 이미지와 함께 전시함으로써, 원자력의 동력원으로서의 이용이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의 경험을 극복하는 일임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원폭 피해의 악몽을 인류의 행복으로 전환한다는 논리에서 출발한 전후 일본의 원자력 에너지 정책은 일본을 ‘원전대국’으로 만들었으며, 고도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1956년 6월 일본 원자력 연구소가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東海村)에 설치된 이래 원전 건설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1990년대 중반까지 일본 전역에 총 54기의 원자로가 건설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미국, 프랑스에 이은 세계 제3위 원전대국이 되었다.[2]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이렇게 원폭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일본의 전후 원자력 개발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역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원자로 건설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동일한 멸시를 드러내며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히로시마 피폭자들의 기억에 대한 최악의 배반이다. (중략) 우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본인들로 하여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자들을 다시금 기억하고, 원자력의 위험성을 인지하며, 그것이 효과적인 전쟁 억지력을 제공한다는 환상을 끝낼 수 있게 하기를 희망한다.[3]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역시 같은 맥락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원폭 체험과 연결시켰다. 2011년 6월 카탈루냐 국제상 시상식 연설에서 그는 히로시마·나가사키를 언급하며, 그로부터 66년이 흐른 시점에 다시금 일본이 방사능 피해를 입은 이유는 극도의 효율만을 추구했던 정부의 원자력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4] 이렇게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일본 원자력 정책의 파산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의 출발점이었던 히로시마·나가사키를 소환했다. 원폭을 그린 영화들 역시 이러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재고찰에 참여하면서 3.11 이전의 원폭 영화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글에서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개봉된 두 편의 영화 〈어머니와 산다면〉(야마다 요지, 2015)과 〈태양의 아이〉(구로사키 히로시, 2021)를 차례로 살피면서 이러한 재고찰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아볼 것이다. Ⅱ. 〈어머니와 산다면〉: 원폭의 ‘재역사화’ 3.11 이전의 원폭 영화들이 대체적으로 보여주는 내러티브 경향은 원폭 체험의 탈역사화이다. 즉 전쟁과 침략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생략되고 원폭 피해가 마치 자연재해와 같이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이 내러티브 전략은 일본인이 ‘유일한 피폭국’의 국민임을 강조하는 ‘피폭 내셔널리즘’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관습은 전후 발표된 최초의 원폭 영화인〈나가사키의 종(長崎の鐘)〉(오바 히데오, 1950)에서 시작되어, 히로시마 피폭의 참상을 끔찍한 비주얼적 요소로 표현한 대표적인 원폭 애니메이션〈맨발의 겐(はだしのゲン)〉(마사키 모리, 1983)에서 절정에 달했다.[5] 이러한 원폭의 탈역사화가 〈어머니와 산다면〉에서 어떻게 수정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지 3년이 되던 1948년 8월 9일, 조산부 노부코는 3년 전에 피폭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둘째 아들 고지의 묘 앞에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데, 바로 그날 고지의 혼령이 홀연히 노부코 앞에 나타난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정한 아들로 돌아온 고지는 특유의 유쾌한 말투로 실의에 잠긴 어머니 노부코를 위로한다. 한편 고지의 약혼녀 마치코는 고지가 죽은 후에도 변함없이 노부코의 집에 드나들며 인연을 이어 나가고, 고지는 이런 마치코에게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미 죽은 고지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하는 마치코를 안타깝게 여긴 노부코는 마치코에게 고지를 그만 잊고 다른 남자와 새 출발 할 것을 제안한다. 마치코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지만 시간이 흘러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복원병 출신의 구로다와 약혼하고 함께 노부코를 찾아간다. 노부코는 마치코의 새 출발을 축복하고, 고지도 미련을 거두고 떠난다. 한편 피폭의 영향으로 건강이 악화된 노부코는 그날 밤 숨을 거둔다. 이 영화는 오프닝 신부터 원폭 투하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다. 1945년 8월 9일 플루토늄탄을 탑재하고 출격한 B29기의 조종석과 미 조종사들의 대화를 보여주며 자막과 내레이션을 통해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경위를 설명한다. 우선 제1 목표인 고쿠라에 도착하였으나 시야가 확보되지 못하여 제2 목표인 나가사키로 방향을 돌렸고, 나가사키 역시 70% 이상 구름에 가려 시가지가 보이지 않았으나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시야가 확보되어 원폭을 투하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영화는 폭격기의 조준망원경에 잡힌 나가사키 시가지의 모습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둘러 등교하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생 고지의 일상적인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며 곧이어 발생할 비극을 예고한다. 미국이라는 존재는 이후에도 계속 등장한다. 암시장 사업을 하고 있는 ‘상하이 아저씨’는 노부코에게 연정을 품고 암시장의 물건들을 조달해준다. 미 점령군에게서 빼돌린 비누를 노부코가 마음에 들어 하자 그는 “이런 고급스러운 물건을 만든 나라와 전쟁을 했다니, 멍청한 일이지!”라고 일갈한다. 이후 그는 미군이 포로에게 제공한 외투를 입고 와서 노부코의 이웃 도미에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눈다. 상하이 아저씨: 미국은 대단해. 포로에게 이런 따뜻한 것을 입혔다니. 도미에: 일본은 질 수밖에 없었네. 상하이 아저씨: 예스! 이렇게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적국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엄청난 국력을 보유한 미국에 일본이 도전한 일은 어리석었다는 사실이 지속적으로 상기된다. 이전의 원폭 영화에서 마치 자연재해처럼 거역할 수 없는 운명으로 그려졌던 원폭 피해도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잘못’으로 묘사된다. 노부코와 고지는 고지가 나가사키 의대에 진학하던 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노부코: 의과대학이라면 징집을 연기할 수도 있고, 졸업 후 징집되더라도 군의관이 되면 죽을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안심했었는데... 고지: 결국 똑같았지 뭐. 노부코: 그랬지. 고지: 별수 없지. 그게 나의 운명이었으니까. 노부코: 운명? 지진이나 쓰나미는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운명이라 해도 이것은 막을 수 있었어. 인간이 계획해서 행한 엄청난 비극이야. 운명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이렇게 이 영화는 원폭이 운명이나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이 초래한 비극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즉, 원폭은 미국과의 전쟁의 일부였으며, 따라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비극, 즉 ‘인재(人災)’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전 원폭 영화의 탈역사화 경향을 수정한다. 이러한 원폭 영화의 ‘재역사화’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 사회에서 일어난 인식론적 변화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후쿠시마의 사고는 쓰나미가 원전의 비상 발전 시설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일어났지만 결국 이러한 재해를 예측하지 못하고 안전 관리를 소홀히 한 원전 운영자 측의 ‘인재’로 평가되고 있다.[6] 이렇게 ‘인간의 잘못’으로 원전의 노심이 녹아 폭발에 이르고, 수개월간 방사능 물질이 공기 중에 배출된 참사는 66년 전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지진이나 쓰나미는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운명이라 해도 이것은 막을 수 있었어”라는 노부코의 대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7] 이렇게 〈어머니와 산다면〉은 ‘인재’라는 고리로 후쿠시마와 나가사키를 연결한다. 각주 ^ 서동주, 「일본 고도성장기 ‘핵=원자력’의 표상과 ‘피폭’의 기억」, 『日本學報』 99집, 2014, 441-443. 전후 일본의 원전 정책과 원전 건설의 역사에 대해서는 이 논문을 참조함. ^ Yoshimi, Shun’ya, Trans. Shi-Lin Loh, “Radioactive Rain and the American Umbrella”,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71, No. 2, 2012, 321. ^ Kenzaburo, Oe, “History Repeats”, New Yorker (28 March, 2011)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1/03/28/history-repeats. ^ 川口隆行, 「대재난의 망각과 상기―포스트 3.11의 역사적 지층―」, 『일본학보』 129집, 2021.3. ^ 강태웅, 「원폭영화와 ‘피해자’로서의 일본」, 『東北亞歷史論叢』 24집, 2009, 55-64. 〈맨발의 겐〉은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경험한 만화가 나카자와 게이지(中沢啓治)의 동명 만화(1976)를 원작으로 하여 제작되었다. 원작 만화의 인기와 사회적 파급력으로 실사 영화와 드라마도 제작되었다. 또한 이 만화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 번역되어 히로시마 원폭 피해의 처참함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일조했다. 佐藤忠男, 2016, 57. ^ 전문가들은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의 원인이 안전성보다는 경제성에만 치중한 설비 건설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비상용 디젤 발전기를 밀폐성이 높은 원자로 건물이 아니라 지하에 설치한 탓에 침수 피해를 그대로 입을 수밖에 없었다. 최고 5.7m 높이의 쓰나미를 상정하고 건설된 방호벽은 14~15m로 밀어닥친 쓰나미에 무력했다. 반면 추가적으로 방호벽을 강화한 후쿠시마 제2원전은 비상용 디젤 발전기 3대 중 2대가 정상 작동하면서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오나가와(女川) 원전을 소유한 도호쿠전력(東北電力) 역시 869년에 발생한 대지진까지 연구하여 예상 쓰나미 높이를 9.1m로 높인 결과 부분적인 피해에 그쳤다. 장정욱,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원자력의 미래: 아직도 계속되는 원자력 마피아의 거짓말」, 『프레시안』, 2011.08.18.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36817 ^ 木村朗子, 「五年後の震災後文学論」, 『新潮』 113(4), 2016, 215-216. 참고문헌 ·川口隆行, 2021, 「대재난의 망각과 상기―포스트 3.11의 역사적 지층―」, 『일본학보』 129집. ·강태웅, 2009, 「원폭영화와 ‘피해자’로서의 일본」, 『東北亞歷史論叢』 24집. ·서동주, 2014, 「일본 고도성장기 ‘핵=원자력’의 표상과 ‘피폭’의 기억」, 『日本學報』 99집. ·장정욱, 2011,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원자력의 미래: 아직도 계속되는 원자력 마피아의 거짓말」, 『프레시안』,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36817. ·Kenzaburo, Oe, 2011, “History Repeats”, New Yorker (28 March)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1/03/28/history-repeats. ·Yoshimi, Shun’ya, Trans. Shi-Lin Loh, 2012, “Radioactive Rain and the American Umbrella”,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71, No. 2. ·木村朗子, 2016, 「五年後の震災後文学論」, 『新潮』 113(4). ·佐藤忠男, 2016, 「知らせることが、大切なこと」, 『キネマ旬報』 1718. ·杉田弘毅, 2005, 『検証非核の選択: 核の現場を追う』, 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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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4. 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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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안세홍(비영리 단체 ‘겹겹프로젝트’ 대표)은 25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14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진에는 그들의 가슴 속 깊은 한이 담겼지요. ‘이것은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당도한 사진 속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안세홍 작가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에서 전합니다.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1) 이수단 이야기 –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4) 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삶 박우득 朴又得 1919년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남. 1935년 16세에 칭다오, 상하이에 10년간 동원됨. 중국 상하이(上海)에 피해자 박우득과 현병숙을 만나러 가기 위해 서울을 출발해 부산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갔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비용 절감을 위해서 직항을 포기하고 먼 길을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상하이에 도착해 교민 잡지 ‘상하이 좋은 아침’을 만들며 피해자를 지원하던 김구정 씨가 마련해준 숙소로 이동을 했다. 그는 중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낯선 상하이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며 중국어가 능통한 유학생을 붙여 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솟아오르는 상하이의 고층 건물은 암울한 전쟁의 흔적을 순식간에 거두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건물 사이에서 중일전쟁 이전부터 있어 온 위안소를 시내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조계지[1]의 상징인 와이탄(外滩)과 가까운 우장루(呉江路)의 50층이 넘는 빌딩 숲을 헤치고 좁은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깊이 들어설수록 고풍스러운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3층짜리 건물에는 세대 수만큼 10여 개가 넘는 벨이 빼곡히 차 있었다. 꼭대기 층의 벨을 여러 번 누르니 박우득의 딸이 내려와 굳게 닫혔던 철문을 열었다. 층층이 가파른 목조 계단을 오르고, 나무로 만든 문을 여니 단칸방이 한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침대 두 개, 장롱, 텔레비전이 세간살이의 전부인 듯했다. 방 가운데 의자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그는 고개를 돌려2년 전보다 밝은 모습으로 나를 반기며,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불안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오래전부터 중풍을 앓아 오른쪽 팔다리를 못 썼고, 그동안 안면근육 경련이 심해져 2번이나 응급실에 실려가, 입원 치료를 받아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2001년 때만 해도 억지웃음을 지으실 뿐 삶의 활력이 없어 보였다. 지금도 항상 웃고 계신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 중간 웃는 모습에 한결 여유가 느껴졌다. 그에게 고향 고성에 관해 물으니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한두 채씩 집이 있고 더 떨어져서 집이 있었다며 마을의 풍광을 이야기했다. 산촌에 살던 그는 중국 땅으로 가기 전까지 외출이라곤 면에서 이루어지는 장날에 가는 게 전부였을 만큼 문밖 출입을 거의 안 하고 살아왔다. 그의 집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조그만 논이기에 많은 노동이 필요치 않았고, 큰 오빠는 남의 배를 타며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아 생활했다. 하지만 험난한 바다 일에 일찍이 목숨을 잃었다. 친 어머니도 동생을 낳다 죽고 서모가 들어와 지냈으나, 그는 서모의 구박에 못 이겨 급기야 집을 나왔다. 위안소에서 해방 후 구락부로 이쯤 박우득은 어떤 조선 여자가 중국 상하이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 1935년 16세에 10여 명의 여자들과 부산, 단둥(丹东)을 거쳐 배로 칭따오(青島)까지 갔다. 당시 칭따오는 일본군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군도 주둔해 있었다. 박우득은 위안소에서 여러 나라의 군인에게 혹사당했다. 때로는 성폭력을 거부하고, 도망치기를 반복하자 주인은 골칫덩어리라고 생각해 10개월 만에 상하이에 있는 러시아계 여자가 운영하는 마사지 가게에 그를 팔았다. 러시아 주인은 그를 ‘표요타’라 부르며 집안일과 심부름을 비롯해 군인까지 받게 하며 온갖 일을 시켰다. 해방되고 나서도 계속 상하이에 남아 구락부(俱樂部)[2]로 개조된 그 집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마사지 일을 계속했다. 러시아 주인 여자가 떠난 이후에도 그는 그 집에 남아 계속해서 살아왔었다. 자신이 아픔을 겪었던 장소를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그의 가슴속에는 지울 수 없는 고통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만 왔다. 그와 이야기하는 사이 도시 재개발과 이주 담당 공무원이 다녀갔다. 공무원은 올해 말이나 내년쯤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그의 집을 들어서는 길목과 주변의 건물들은 이미 헐리고 고층 건물이 세워지는 중이었다. 이제 머지않아 이곳마저 헐릴 계획이었다. 시골로 이주하면 딸과 손자 3대가 살기 때문에 방 3칸이 나오지만, 손자의 교육문제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의 병이 깊어지면 급하게 병원 갈 일에 걱정이 앞섰다. 방 수가 적더라도 시내 부근에 살았으면 하는 것이 그와 가족들의 바람이었다. “갈 수만 있다면 고향에 가고 싶어요.” 경남 고성이 고향인 박우득은 국적이 북한으로 되어 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고향에 갈 수 있냐며 나에게 물었다. 고향의 가족을 찾을 수 없었고,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이들 모두 죽고 없었다. 그래도 그는 고향에 돌아가 마지막 길을 가는 것이 소원이라며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 다시 만나길 약속하며 그의 집을 나섰다. 문 앞 계단까지 배웅을 나와 어둡고 가파른 계단 끝에서 조심히 내려가라며 끝까지 바라다보시는 모습에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가 살던 우장루는 개발이 지연되어 이사도 미뤄졌다. 2007년 박우득은 노환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2017년 3월 중국에 남아 있는 위안소 기록을 위해 상하이에 다녀왔다. 그는 없지만, 혹시 주변에 그의 가족들 소식을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해서 시간을 내어 발길을 그가 살던 곳으로 향했다. 큰 윤곽의 길만 남겨놓고 미로와 같던 골목길과 즐비하게 늘어섰던 러시아풍의 건물은 눈 씻고 봐도 없었다. 그곳에는 수백 채의 집을 부수고 지은 대형 백화점이 들어섰다. 과거에 찍었던 사진으로 큰 건물을 비교하며 그가 살던 집의 위치를 찾았다. 그와 같이 살던 딸과 손자의 소식이 궁금하다. 심부전증으로 힘든 일을 할 수 없었던 딸과 공부를 잘해 매번 1등을 한다며 갈 때마다 그가 자랑하던 손자를 더 이상 찾을 수도 없고, 그 이후 소식을 아는 사람들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박우득과 그의 가족들은 그저 사진으로 기억될 뿐이다. [사진 설명] 전쟁이 끝난 지 60여년이 지났지만(2003년 기준), 박우득은 위안소에 대해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 기억을 떠올릴 때면 가슴속에 묻힌 울화가 치밀어올라 분노에 찼다. [사진 설명] 20년 넘게 앓아온 무릎 관절염과 중풍은 박우득을 3층 집에 가두었다. 오래되어 반 투명해진 창으로 높게 솟은 건물에서 반사된 빛이 건설 소음과 먼지와 함께 들어올 뿐, 바깥 풍경은 삭막하기만 했다. 각주 ^ 주로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 동호회(同好會) 또는 동아리, 클럽(club)의 일본식 표현. 구락부(俱樂部)는 공통의 관심사나 목표를 가지고 정보를 나누면서 함께 즐기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하며, 이러한 모임에 사용하는 건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기사 게재일: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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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이용수 선생님 방문기 2 - ‘세렌디피티 인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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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투텐? 원투원! “아. 아… 여보세요 여보세요.” “렛 그랜마 리 카운트 텐.” “할머니, 하나부터 열까지 세보시래요.” “하나, 둘, 셋…” 10월 25일 아침. 이용수 선생님 댁 거실은 마이크 테스트가 한창이다. 영국 다큐멘터리 취재진이 선생님을 촬영하기 위해 방문했다. 카메라, 마이크 기술 테스트. 연출자와 카메라맨이 촬영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 틈에 옷매무새를 단단히 여민 선생님은 뒤에 있는 프로듀서의 팔을 톡톡 두드린다. “<아이 캔 스피크> 봤어요?” “노.. 이즈 잇 다큐멘터리?” 느닷없는 선생님의 말 걸기에 선생님 허리에 마이크를 채우던 프로듀서가 관심을 보인다. “노, 잇츠 무비.” 통역사가 선생님 대신 답한다. 미 하원에서 ‘위안부’문제 관련 결의안(HR121)을 통과시킨 이야기가 담긴 이용수 님에 관한 영화라고. “와우~! 한 번 봐야겠어요.” 프로듀서의 대답을 받아낸다. 탁월한 방송 코디네이터의 감각. 원투텐? 하나부터 열까지 갈 것도 없이 ‘원투원’으로 치고 나오신다. 당신을 취재하러 왔다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 아닌가. 엄한 곳으로 에둘러 가기 전에 당신이 생각하는 중요 포인트를 콕 짚으신다. 어떤 코디네이터도 능가하는 감각적인, 진격의 코디네이트.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수야 선생님은 본인의 침실 문을 스윽 열어 주신다. 화사한 병풍이 눈에 들어온다. 침대 머리맡에 펼쳐진 병풍 속에는 서예를 즐기고, 한가로이 나물을 캐고, 바람결에 연을 날리는 어린 수야(용수의 ‘수’. 어린 시절 가족들이 부르던 아명)가 있다. “하도 원통해서 내가 처녀 적에 이랬다고 이걸 맞췄어.” 프로듀서는 연 날리는 모습이 제일 좋다고 했다. 다들 그림에 넋을 놓고 있는 와중에 선생님은 방의 형광등을 탁! 켜신다. ‘조명빨’도 놓치지 않는 방송 전문가의 면모. 비비안나 다음엔 화장대 거울에 달린 십자가 목걸이로 이동하신다. 이 묵주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현직 교황 프란시스의 선물이다. 교황님께 직접 선물을 받은 사람이 지구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 진귀함에 모두가 놀랄 즈음, 십자가에 입 맞추시고 고개를 들어 “비비안나” 세례명 투척. “오, 뷰티풀.” 프로듀서의 감탄사는 어쩌면 예견된 수순일 뿐. 이것이 끝인 줄 알면 쑤야 선생님을 띄엄띄엄 안 것이다. 초록색 파우치 안에 고이 접힌 하얀 미사포를 살포시 꺼내신다. 카메라도 없이 속출하는 방송‘분량’들. 프로듀서는 이 모든 것을 나중에 다시 촬영해도 괜찮겠냐고 여쭙는다. “찍어야지. 기도하는 것도 찍어야지.” 그러라고 준비해 두신 것 아니겠는가. 단박에 촬영 하이라이트와 ‘분량’까지 코디네이트 완료! 곱은 거 이번엔 야외촬영이다. 촬영진을 태운 승합차는 시내 한복집 앞에 멈춰 섰다. ‘금오실크’. 선생님이 자주 가시는 한복집이다. 댁에서 가까운 이곳에는 “코리안 드레스 뷰티풀-”을 외치는 또 한 명의 진격의 캐릭터가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용수 선생님과 한복집 사장님은 방송을 위한 촬영 스케치에는 간단히 임하셨다. “곱은 거(=고운 것) 함 입히볼까?” “응.”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영국서 온 프로듀서에게 대뜸 한복을 입어보라고 종용하신다. “노노노노. 쿄오와 다분 이소가시이까라.” 일본어를 잘하는 영국 여성 프로듀서는 당황하여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오늘은 바쁘다고 완곡하지만 완강하게 거절했다. “이소가시꾸 나이. 다이조부.” 흔들림 없는 ‘그랜마 리‘의 단호한 “다이조부”(=괜찮다)로 게임 오버. 한사코 겉옷만 걸쳐보겠다던 프로듀서는 ’치마저고리‘부터 입어야 된다는 그랜마 리의 성화에 결국 탈의실로 끌려간다. “빨리 나오세요~~!” “아니야. 천천히~~!” 탈의실 앞에서 목을 빼고 조르는 그랜마 리와 ‘천천히~’를 외치는 사장님의 우당탕탕 주문들은 통역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촥! 촥!” 양쪽으로 커튼이 걷히고 프로듀서가 나타났다. “와~ 이뻐 이뻐…!” 가게 안은 물개박수와 탄성으로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진분홍 치마와 은박이 수놓인 흰 저고리, 화사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한복이 프로듀서와 썩 잘 어울린다. 자신들의 연출작에 뿌듯해진 두 총괄 연출가들은 “사진 좀 찍어두자”며 기념 촬영에 여념이 없으시다. 오마이갓 다음 행운의(?) 코리안 드레스 모델은 카메라맨. 순순히 무장해제를 선언했다. 타국에서의 촬영 첫 날. 취재진의 긴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두 연출가 앞에서 카메라맨은 온 몸을 두른 우주복 같은 촬영 장비를 하나씩 해체하는 중이다. 남자 한복은 처음 보는 것이라 기대된다며 프로듀서도 이 ‘장꾸’(장난꾸러기) 대열에 합류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 생각만해도 우섭다 “하이고 우섭다. 생각만 해도 우섭다.” 카메라맨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선생님은 연신 “재밌다”를 연발하신다. 카메라맨이 키가 큰데 과연 옷이 맞을지 궁금하다고 프로듀서도 거든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 이윽고 바지저고리에 도포까지 성장(盛裝)을 한 카메라맨이 등장했다. “모자! 머리 머리, 빨리 빨리.” 패션의 완성은 갓이다. 사장님의 주문에 직원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갓과 옷 여밈 장신구들을 챙겨 내온다. “까르륵 꺄르륵” “어메이징~” 낙엽만 굴러가도 웃음이 터질 듯한 명랑한 소용돌이. “우째 그게 또 맞는 게 있노.” 다들 반신반의했던 의혹은 걷히고, 키 큰 카메라맨에게 맞춤한 듯 딱 떨어지는 핏. 갓을 쓴 그의 모습이 어엿하다. “양반, 양반” 어느 틈에 그의 옆에 선 선생님은 양반의 복장이라며 기념 촬영 중간 중간에 적절한 해설을 더하신다. 메즈라시이 프로듀서가 방금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메즈라시이…” “에-엔니” 선생님은 사진을 가리키며 ‘드문, 희귀한(메즈라시이)’ ‘영원한(에엔니)’이라고 반복하신다. “아. 소우데스네. 포레버-” 프로듀서가 화답한다. 번갯불에 회오리바람 같은 ‘뷰티풀 코리안 드레스’ 런웨이는 성공적이었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오는 법. 두 연출가의 피날레 촬영이 이어진다. 앙드레김 패션쇼의 마지막 포즈, 이마가 닿을 듯 말듯 우아한 이 몸짓의 메시지는 아마도 ‘이 순간 주인공은 나야 나’. 트렌드세터 다음 행선지는 고즈넉한 한옥 마을에 자리 잡은 힙 플레이스, 카페 아눅이다. 단골 쑤(야) 선생님이 오셨다는 말에 출타 중이던 사장님이 돌아오셨다. 갓 구운 베이커리를 손수 내오신다. 선생님은 이 집의 양송이 크림 스프를 특히 좋아하신다. 오늘도 사장님은 선생님을 위해 양송이 크림 스프를 각별히 포장해 내어 주신다. 사장님은 처음엔 이용수 선생님이 ‘의외로’ 이곳을 자주 찾아주셔서 놀랐다고 한다. 트렌드세터(Trendsetter)에게 늘 따라 붙는 수식어 중 하나가 ‘의외’이다. 선생님은 이 곳에서 힙스터들과 어울리며 요즘 감성을 즐기신다. 오늘의 화제는 단연 카페 아눅 바리스타님의 타투였다. 왼쪽 팔뚝 전체에 커피나무를 새겨 넣은 바리스타님의 문신을 본 일행들은 ‘대단하다’며 몰려들었다. 조선 사람이기도 한 쑤야 선생님은 ‘좋다’ ‘신기하다’는 말 대신 연신 바리스타님의 팔뚝을 쓰담 쓰담 하신다. 2021년 대한민국을 사는 조선 힙스터의 유연한 리액션. 셀러브리티 인 대구 “그랜마 리 이즈 셀러브리티 인 대구.” (리 할머니는 대구의 셀럽이구나.) 선생님을 뵌 지 반나절도 안 되어 프로듀서가 질문인 듯 혼잣말인 듯 중얼거린다. 셀럽의 필수코스는 포토타임이다. 카페 앞에서 사진 촬영 요청을 수락하신 선생님은 시크하게 엄지와 검지를 포개 스몰하트를 날려주신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카메라맨이 슬그머니 자기 손가락을 겹쳐 본다. 그의 심장도 추출 성공. 한 주먹도 필요 없고, 손가락 두 개로 심장을 꺼내 흔들며 깔깔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문득 ‘대구의 힘’이 떠올랐다. ‘喜움’ 일본인들의 ‘혼마찌‘[1]였던 종로 한 복판에 희움이 살아 있는 것도, 그 희움에서 고(故) 김순악 선생님이 “난 너거캉 지금 얘기하는 게 막 재미가 나서 죽겠다”고 하셨던 것도, 이용수 선생님이 오늘 마실을 다니시며 골백번 “재밌어”를 연발하시는 것도 다 깊은 내력이 있음을 알았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끌려간 출발점인 고향을 다시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대구의 생존자들은 돌아왔을 뿐 아니라 그 땅에서 웃고 떠들고 잠을 청했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희움 역사관’ 등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이곳에는 희움을 ‘喜움’이라 부르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응달진 날에도 뜻밖의 기쁨을 동력으로 삼는 일, 형태가 없었던 즐거움을 두 손으로 주조하는 일, 펄떡이는 심장을 움켜쥐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에 대해 이곳 사람들은 흔쾌히 ‘예’라고 말하는 듯하다. 각주 ^ (편집자 주) 本町. 일본인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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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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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쟁이 인간에게 남기는 심원한 고통에 관해 얼마나 아는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뿐 아니라 원폭 피해자와 사할린 잔류자의 인권 문제 또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배제되었다. 특히 원폭 피해는 전시 성폭력과 유사하게 몸에 직접 작용하여 성적 재생산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일종의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한다. 이에 웹진 〈결〉은 연구자 2인의 글에 원폭 피해자들의 일상을 담은 김효연의 사진 작업 ‘감각이상’을 병치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글: 김성운 X 사진: 김효연 *이 에세이는 김성운 교수의 논문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어머니와 산다면(母と暮せば)」, 「태양의 아이(太陽の子)」를 중심으로」, 『일본연구논총』 56집, 2022, 91-116를 요약, 정리한 글입니다. Ⅲ. 〈태양의 아이〉: 피해자성의 거부 〈어머니와 산다면〉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과정, 등장인물들의 부상과 상실을 통해 미국과의 전쟁이라는 맥락을 다시금 상기시킴으로써 원폭의 ‘재역사화’에는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인이 입은 피해만을 강조하는 ‘피폭 내셔널리즘’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태양의 아이〉(2021)는 일본인들이 원폭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는 아시아·태평양 전쟁기 교토대학의 아라카쓰 분사쿠(荒勝文策) 연구실에서 원폭 연구를 진행했던 젊은 과학자들의 고뇌와 좌절을 그리고 있다. 핵분열을 뜻하는 ‘fission’에서 따온 ‘F호 연구’로 알려진 이 비밀 프로젝트는 당시 해군 함정 본부가 1943년 5월 아라카와 연구실에 의뢰한 연구로, 전황이 급박해진 상황에서 일본 역시 미국처럼 원폭의 개발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1] 1938년 독일 핵물리학자들이 핵분열을 발견한 후 미국을 포함하여 핵무기 개발에 뛰어든 국가는 미국과 일본을 포함, 모두 6개국이었다. 전시 일본의 핵무기 개발 과정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 역사학적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이것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일본이 전쟁 중 핵무기를 실제로 개발했다는 사실은 앞서 언급한 ‘피폭 내셔널리즘’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으로, 언론 매체가 기꺼이 다룰 만한 소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교토대학 아라카와 연구실의 ‘F호 연구’보다 더 많이 알려진 것이 도쿄대학 이화학 연구실의 물리학자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의 이름을 딴 ‘니고(ニ号) 연구’이다. 1941년 6월 육군 항공 기술 연구소의 야스다 다케오(安田武雄) 중장은 당시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았던 니시나에게 핵무기 연구를 의뢰했다. 의뢰를 받은 니시나는 1943년 초에 정식 연구보고서를 육군 측에 제출했고, 육군은 이를 근거로 같은 해 5월 니시나 연구소에 핵무기 개발을 명한다. 전쟁의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던 당시 총리 도죠 히데키(東条英機) 역시 이 프로젝트에 큰 기대를 걸었다. 1944년 봄 이후에는 이 계획이 정부의 연구 동원 회의에서 관민 공동의 국가 프로젝트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라늄이었다. 야스다에 의하면 원폭 1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우라늄을 확보하는 것은, ‘대동아공영권’을 다 뒤져도 수십 년이 걸리는 일이었다. 한편 미국은 하루에도 수십 기의 원폭을 제조할 수 있는 양의 우라늄을 확보했고 이러한 소식이 일본에도 알려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의 관계자들은 핵무기 개발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전세를 단숨에 뒤집을 수 있는 가공할 만한 ‘신형 무기’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해졌다. 44년 2월, 물리학자이자 귀족원 의원이었던 다나카다테 아이키쓰(田中舘愛橘)는 “라듐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영국 함대를 궤멸시킬 수 있는 폭탄”을 개발할 것을 군부에 촉구했다. 1940년 마이니치 신문이 우라늄-235를 ‘꿈의 동력원’으로 소개한 이후 원폭에 대한 지식은 대중들에게도 확산되었다. 1944년 7월 2일 아사히 신문은 ‘결전의 신병기’ 특집에서 “10~15그램만 있으면 대도시 1~2개 주민 정도는 식은 죽 먹기로 날려버릴” 수 있는 폭탄에 대해 소개했다. 같은 시기 대중잡지 『신청년(新青年)』에 실린 다테카와 겐(立川賢)의 소설 「샌프란시스코를 날려버리다」는 일본군이 ‘원자력 항공기’로 태평양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원폭을 투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전시 핵무기 연구는 결국 미국의 그것을 따라잡지 못했고, 일본의 전쟁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미국의 원폭에 의해 종결되었다. 이후 미국의 원폭조사단에 따르면 일본의 ‘니고 연구’는 미국 ‘맨해튼 프로젝트’의 1942년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언론인 스기타 히로키(杉田弘毅)는 ‘니고 연구’에 시간이 좀 더 주어졌더라면 일본이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 아니라 최초의 핵 사용국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영화는 교토대학 아라카쓰 연구실의 젊은 과학자 이시무라 슈와 그의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라카쓰 연구실은 해군의 의뢰를 받아 핵분열을 이용한 ‘신형무기’ 제작 실험에 돌입한다. 우라늄-235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 실험이 번번이 실패로 끝나지만 실험광 슈는 원자가 붕괴할 때 발생되는 청록색 빛깔에 이끌려 동료들과 실험을 지속해 나간다. 그러던 중 해군 파일럿에 지원했던 동생 히로유키가 일시 귀환한다. 동료들이 모두 가미카제 작전에 출격하는 상황에 자신만 빠질 수 없다는 괴로움을 토로하며 바다에 빠져 자살하려는 동생을 슈는 구해낸다. 이렇게 전쟁이 젊은이들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놓는 가운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슈를 비롯한 아라카쓰 연구팀은 히로시마로 향한다. 그곳에서 원폭의 위력을 목도한 슈는 그가 그토록 간절히 추구해온 과학적 진리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태양의 아이〉는 일본에서 원폭을 개발하는 과정을 미국과의 경쟁으로 묘사한다. 아라카쓰 연구실의 과학자들은 엄청난 살상력을 지닌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하나오카: 원자핵 폭탄이라고 하는 것은 살상 능력 면에서도 차원을 달리할 거예요. 오카노: 샌프란시스코라면 어림잡아 20만 명은 죽을 거야. 기도: 30만입니다. 제 계산으로는. 하나오카: 우리들이 여기에 가담해도 되는 것일까요? 기도: 지금 그런 걸 생각해도 의미는 없어. (중략) 기도: 우리가 하지 않으면 미국이 할 거야. 미국이 만들지 않으면 소련이 만들겠지. 먼저 원자핵 폭탄을 만드는 자가 세계의 운명을 결정해. 이렇게 일본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이나 소련과의 경쟁을 의미했다. 결국 미국에 의해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고, 폐허가 된 히로시마를 시찰하고 오는 기차 안에서 연구실의 과학자들은 “일본은 원자핵 폭탄에 당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원폭의) 개발 경쟁에서 졌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에요. 일본의 과학자는 패배했습니다!”라며 분개한다. 이렇게 히로시마를 폐허로 만든 원폭은 미국과 일본의 개발 경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단지 과학기술이 우수한 미국이 일본보다 먼저 개발에 성공했을 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태양의 아이〉는 일본의 핵무기 개발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원폭의 ‘재역사화’를 시도함과 동시에, 원폭 개발 경쟁에서 일본 역시 가해자가 될 수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태양의 아이〉에서 나타나는 원폭의 ‘재역사화’ 역시 3.11 이후의 일본 사회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이후 일본 사회는 핵에너지의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강화해왔고, 그것이 앞서 언급한 ‘피폭 내셔널리즘’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일본 정부의 원자력 에너지 정책으로 일본 사회는 원자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점차 탈바꿈했고 이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원전 시설 폭발 이후 수개월간 방사능 물질이 대기와 토양을 오염시켰고, 방사능 오염수는 바다를 타고 주변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 유일의 원폭 피해국인 일본이 결국 자국민은 물론 타 국민에게까지 방사능 오염의 피해를 입히는 가해국이 되었고, 이러한 전환의 가능성이 〈태양의 아이〉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영화는 기존 원폭 영화의 ‘피폭 내셔널리즘’ 문법을 수정하고 있다. 원폭 투하의 역사적 맥락, 즉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는 맥락을 다시금 상기시킴으로써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정부와 군부의 과오를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두 영화 모두 원폭의 경험을 일본으로 한정하며, 전시 일본의 침략의 역사를 진지하게 다루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미국의 원폭 투하를 초래한 태평양 전쟁이 사실은 1931년 일본 관동군의 만주 침략으로부터 시작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일부였다는 사실, 더 나아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병합으로 시작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아시아 이웃들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의 대략 10%가 재일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각주 ^ 杉田弘毅, 『検証非核の選択: 核の現場を追う』, 岩波書店, 2005, 15-16. 전시 일본의 핵무기 개발에 관해서는 이 책을 참조함. 참고문헌 ·川口隆行, 2021, 「대재난의 망각과 상기―포스트 3.11의 역사적 지층―」, 『일본학보』 129집. ·강태웅, 2009, 「원폭영화와 ‘피해자’로서의 일본」, 『東北亞歷史論叢』 24집. ·서동주, 2014, 「일본 고도성장기 ‘핵=원자력’의 표상과 ‘피폭’의 기억」, 『日本學報』 99집. ·장정욱, 2011,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원자력의 미래: 아직도 계속되는 원자력 마피아의 거짓말」, 『프레시안』,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36817. ·Kenzaburo, Oe, 2011, “History Repeats”, New Yorker (28 March)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1/03/28/history-repeats. ·Yoshimi, Shun’ya, Trans. Shi-Lin Loh, 2012, “Radioactive Rain and the American Umbrella”,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71, No. 2. ·木村朗子, 2016, 「五年後の震災後文学論」, 『新潮』 113(4). ·佐藤忠男, 2016, 「知らせることが、大切なこと」, 『キネマ旬報』 1718. ·杉田弘毅, 2005, 『検証非核の選択: 核の現場を追う』, 岩波書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