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검색
-
- 2020년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
[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 1.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2. [에세이] <김복동>이 남긴 것 3.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4.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5.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활동가 선배 김복동 김복동을 기억하는 페미니스트 A 대학생 때 처음 참가한 수요시위에서 김복동 할머니를 만났다. 그날은 설 연휴였는데 연휴라서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었고, 빌딩 숲 사이로 칼바람이 부는 평화로는 유독 추웠다. 으레 집회라고 하면 소리를 지르고, 무언가 강력하게 요구하는 무서운 분위기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하던 나에게 수요시위는 그 편견을 깨뜨려주었다. 할머니의 단호함, 그리고 우리의 요구사항이 분명한 건 맞지만 험악하지도 않고 무서운 분위기도 아니었다. 여성폭력이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처음 인지한 나에게 오히려 수요시위는 '힐링'이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학생들이 힘써 달라는 말씀 한마디에, 그때부터 나는 활동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까이서 만난 김복동 할머니는 훨씬 더 단단하고 올곧으며 또 따뜻한 분이셨다. "그 험한 데에서도 살아서 돌아왔는데 그깟 암은 이겨낼 수 있다"라고 하시며 수술하고 닷새 만에 1인시위를 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아침부터 비가 엄청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외교부 앞으로 출발했는데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고, 도로는 주차장이고, 시작 시각은 가까워져 오고 나는 혼자 초조해져서 안절부절. 겨우 도착하여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당신의 몸만 한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이어나가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물에 젖고 힘들어 불평하던 나의 마음을 반성하기에 아주 충분했다. 당신이 더 아프고 힘드실 텐데도 활동가에게 고생했다는 말씀 한 번 잊으신 적 없고, 가끔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도 챙겨서 쥐여 주시던 할머니. 할머니의 죽음을 마주하고 나는 한동안 멍했다.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존경하고 사랑했기에, 김복동 할머니를 향한 마음의 크기가 많이 컸었나 보다. 추모 현수막을 제작하고 명단을 취합하고 장례식장을 지키고, 감히 상상하지도 않았던 일들을 일처럼 해내면서도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할머니가 다시 수요시위 현장에 나오셔서 일본대사관을 향해 크게 소리치실 것 같은데. 나도 이렇게 힘든데 할머니를 사랑하는 가족과도 같았던 다른 활동가들의 마음은 어떨까 걱정도 되었다. 사시사철 틀어놓으시던 모기향, 뜨끈뜨끈했던 방바닥, 늘 손에 꼭 쥐고 계시던 10원. 이런 사소한 것으로부터 문득 할머니가 떠오르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할머니는 떠나셨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잘 살아내고 있을까? 나 또한 잘 살아내고 있는 걸까? 할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지.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잊지 않고 살아야지. 끝까지 기억해야지. 누구보다 단단하게 살아낸 활동가 선배, 김복동 선생님을. 우리를 걱정하던 커다란 영혼 김목인 (뮤지션) 작년 초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앨범 <이야기해주세요-세 번째 노래들>에 참여했다. 음악 작업을 준비하면서 그즈음 돌아가신 김복동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파란만장한 삶의 행로를 노래로 담는 것은 어려웠다. 아무래도 노래 한 곡으로 요약하기에 그 삶의 무게가 커서였지 싶다. 다시 선생님을 떠올린 것은 동네에서 모르는 할머니 한 분을 뵈었던 어느 날이었다. 옆 동네에 왔다가 길을 잃으신 분이었는데, 딸이 모시러 올 때까지 내 옆에 꼿꼿이 서 계시던 모습에 김복동 선생님이 겹쳐졌다. 할머님은 내게 "바쁜데 이래도 되오?"라고 물으셨고, 나는 얼마 후 그 할머니에 대한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인물을 포갠다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김복동 선생님의 커다란 삶의 궤적은 요약도 은유도 어울리지 않는 듯했고, 나는 결국 가사 어디에도 '김복동'이 나오지 않는 어느 할머니에 대한 곡을 제출했다. 그 개운치 않던 마음은 다큐멘터리 <김복동>을 보며 조금 해소되었던 것 같다. 김복동 선생님의 생전 모습들을 보며 나는 그날 모르는 할머니께 왜 선생님이 겹쳐졌는지 알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일본 정부를 꾸짖는 용감한 영혼은 한편으로 항상 우리를 걱정하는 할머니였다. 선생님은 항상 젊은이들을 걱정하고 계셨다. 집회에서 고생하는 젊은이들, 경찰에 연행되는 젊은이들, 재일조선인학교의 학생들, 그리고 역사의 영향을 받을 미래의 젊은이들. 아마도 선생님의 모습이 굉장한 힘을 지녔던 것은 가장 고통받은 이로써 우리를 걱정하는 커다란 영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지금도, 다음 생을 기약하는 마음으로 80세에 석등 하나를 남기고 부산을 떠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라 뭉클하다. 선생님이 이후에 보여주신 삶은 타의에 의해 피해자가 된 한 인간이 자의로 존엄을 되찾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사죄는커녕 변명으로 일관하는 상대를 멀찍이 넘어서는 위대한 본보기였다. 끝까지 싸워달라는 할머니의 유언처럼 박미순 (사회복지사, 웹진 결 독자 참여) 내가 기억하는 김복동 할머니는 국제 사회에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증언하신 분이다. 당시 상처로 가득한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은 세대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공개된 자리에서 힘든 이야기를 반복하셨을 할머니의 시간을 생각하니, 내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드셨을 거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할머니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만 했지만, 그로 인해 국제적으로 많은 사람이 일본이 감추고 있던, 감추고 싶은 과거를 알게 되었다.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 등등 할머니를 기억하는 수식어는 너무나 많다. 정의를 위해 끝까지 싸우신 분, 하지만 끝나지 않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싸워달라" 는 할머니의 유언처럼 말이다. 세계의 많은 이들이 기억할 그 이름, 김복동 할머니의 웃는 얼굴과 그분의 인권 활동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기억될 것이다. 사랑합니다. 우리가 할머니의 나이가 되어도 김세진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작가) 나는 김복동 할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수요시위에서 먼발치에서 바라보거나 미디어를 통해 접한 것이 전부다. 그런 나에게 김복동 할머니는 항상 곱게 빗어 넘긴 백발, 고령에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시고 시원시원한 말씀을 내뱉는 분으로 가슴 속에 남아 있다. 9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기백으로 단상에 서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발언을 하시는 모습이 마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처럼 느껴졌다. "사죄하라", "천억을 준다 한들 진정한 사과가 없는데 받겠느냐"(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김복동 할머니가 한 말) "미친 개 같은 소리 하지 마라"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위한 1인 시위 때 김복동 할머니의 한 말) 텍스트로만 접한다면 분노가 가득 찬 외침이라 느낄 수 있으나, 실제 할머니의 음성에는 분노보다는 마치 동네 악동을 야단치는 할머니 같은 인자함이 느껴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 역사 왜곡을 일삼는 일본에 적개심을 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당시의 끔찍한 전쟁범죄 피해 당사자의 분노는 어떻겠는가. 감히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복동 할머니는 분노가 아닌 평화와 희망을 바라보며, 자애와 자비의 자세로서 가해국인 일본을 향해 손을 내밀며 그 자리에 계셨다. "나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희망을 잡고 산다." 이런 말씀을 해오시던 할머니를 보며 우리는 소녀상을 세워 평화를 외치고, 그들을 용서하기 위한 준비를 하며, 그들에게 잘못을 일깨워주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그 전쟁에서 벌인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들이 우리와 함께 미래를 향해 걸어갈 수 있는지. 김복동 할머니, 그리고 많은 피해자 할머니들이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 하지만 할머니께서 하신 말씀과 보여주신 자세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으며, 우리가 할머니의 나이가 되고 미래세대가 시대의 주역이 되어도 함께 숨 쉬고 있을 것이다.
-
- 2022년 에세이 그래픽 노블 『풀』 일본어 출판을 통해
-
1. 시작 만화 『풀』(김금숙, 보리, 2017)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이옥선 님의 삶을 바탕으로 세계 공통의 소망인 인간의 존엄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히로시마현의 중학교 교사 시절 평화교육과 성교육의 관점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또 한 시민으로서 피해자 지원 운동과 한일시민연대 활동을 해왔다. 우경화되는 일본 사회에서는 일제강점 식민지 지배의 역사와 전쟁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어렵고, 자민당 정권은 가해 사실을 왜곡·은폐하고 배상도 거부하고 있다. 일본 헌법이 보장한 삼권분립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정부의 이런 태도를 추종하는 듯한 판결을 계속 내놓고 있다. 학교 교육이 수험교육 위주로 편중되면서 근현대사는 경시되고, 뜻있는 교사와 만날 기회가 없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비롯해 과거 일본이 저지른 가해 사실을 배울 기회가 적다. 이런 상황은 전쟁이 단순히 가해와 피해의 이항 대립이 아니라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복잡하게 뒤섞이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게 한다. 나는 독서를 기피하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만화라는 매체를 이용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알리고 평화를 희구하는 태도를 배양하기 위해 『풀』의 일본어 출판에 나섰다. 2. 그래픽 노블 『풀』과의 만남 퇴직 후 2013년 한국으로 어학유학을 온 나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이나 시민들과 교류를 거듭하면서 2014년에 김금숙 작가를 만났다. 취약계층에 빛을 비추는 작품을 그려온 김 작가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교류를 하며 함께 베트남 장애인에게 휠체어를 운반하는 봉사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 8월 14일 김금숙 작가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의 삶을 그린 그래픽 노블 『풀』이 한국에서 발간됐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중단하려는 일본 정부와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일본 사회를 생각할 때 『풀』은 빛나 보였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는 어렵거나 자신과 상관없는 과거의 문제라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한 여성의 삶을 통해 문제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움직인 힘은 주인공 이옥선 할머니를 비롯해 작품과 관련된 사람들이 운동적으로 나와 연결돼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풀』이 프랑스어로 출판되고 영어판도 준비된다는 얘기를 들으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책임져야 할 일본에서 가장 먼저 읽혀야 할 책이 일본 이외의 국가들에서 먼저 출간되는 것에 조바심을 느꼈다. 서울 만화박물관에서 열린 『풀』 원화전에서 만난 한 여중생의 어머니는 “성폭력에 대해서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쉽게 가르치기 어렵지만 이런 식으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라는 다르더라도 누구나 안심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일본에 이런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서라도 이것은 어떻게든 일본어로 출판되어야 할 책이라고 확신했다. 독서를 기피하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만화라는 매체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만난 한국인 학생 자원봉사자는 만화 『맨발의 겐』(작가 나카자와 게이지가 자신의 피폭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만화)을 읽고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에게는 만화로 인류 보편의 주제를 국경을 넘어 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3. 일본어 출판 경과 일본에서 번역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다룬 한국 그림책으로는 『꽃할머니』(『花に水をやってくれないかい?』, 권윤덕, 쿠와하라 유카 번역, ころから, 2018)와 『끝나지 않은 겨울』(『終わらない冬』, 강제숙(글), 이담(그림), 양유하/쓰즈키 스미에 번역, 日本機関紙出版センター(일본 번역서 제목), 2015)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이 일본에서 출판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일본 우익세력의 공격과 그 영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출판 업체, 도서관의 태도가 장벽이었다. 그럼에도 기획자들의 열의와 시민들의 협조가 큰 힘이 되어 출판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 선례를 참고로 『풀』의 일본어 출판은 많은 시민과 협력하는 것을 중요시해 진행하기로 했다. 우선 『풀』 일본어 출판위원회를 구성했다. 공동대표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명예관장인 이케다 에리코 씨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히로시마 네트워크’ 사무국장 오카하라 미치코 씨, 그리고 나, 셋이 됐다. wam은 두 차례나 우익의 폭파 협박을 받은 적이 있고, 이케다 씨는 조금 망설이기도 했지만 『풀』 일본어 출판의 의의를 중요시하며 함께 일어섰다. 우리는 학습회와 강연회, 그동안 쌓아온 네트워크를 통해 홍보활동을 진행했다. 강연회장에서 일본어 출판을 열심히 해달라고 즉석에서 후원해 주는 지원자도 있었다. 『풀』 일본어 출판 자금 모금과 그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우리는 “세계에서 읽히고 있는 ‘위안부’ 만화 풀을 번역 간행하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크라우드 펀딩(이하 CF)을 시작했다. 2019년 9월 7일 출범한 CF는 호조를 보였고, 『풀』이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으며 프랑스 일간지 휴머니티가 선정하는 ‘휴머니티 만화상’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것도 훈풍이 됐다.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은 펀딩 금액과 뜨거운 지원의 목소리 덕분에 책 판매가격을 예정보다 낮출 수 있었고, 김금숙 작가를 일본으로 초청해 4곳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개최할 수 있었다. 접수된 응원 메시지 중에는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구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멋진 발상을 알고 응원하고 싶다”, “표현의 자유를 방해하는 움직임에 의구심을 느낀다(CF 시작 전 평화의 소녀상 등 전시를 우익이 방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풀』을 빨리 읽고 싶다” 등의 뜨거운 생각이 담겨 있었다. 당초 일본 우익의 방해를 우려했던 김금숙 작가는 일본에서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코로나 유행이 우려되는 시기였지만 과감히 일본을 찾아줬다. 4. 일본어 번역 작업의 과정 『풀』의 일본어 번역에는 몇 가지 넘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우선 번역 수준의 문제다. 이것은 우리가 시작한 샘플 번역이 한국출판문화사업진흥원의 해외번역 조성사업으로 선정되고 강력한 협력자를 얻으면서 불식되었다. 공동번역자 리령경은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회원으로 대구 경북지역 피해자들을 지원하면서 그 만남과 인연으로 평화학에 매진하는 데에 방향을 잡았다. 『풀』의 주인공 이옥선 할머니의 통역을 맡기도 한 그는 일본어 출판 운동에 관여하고 싶다고 주체적으로 의사를 밝혔다. 그는 사투리 번역뿐 아니라 사실 검증 작업에도 힘을 발휘했다. 그가 오랜 세월 피해자들의 지원 활동을 해온 것과 대구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옥선 님의 부산 사투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김금숙 작가를 크게 안심시켰다. 말풍선 안에 들어가는 글자 수로 원작의 의미를 정확히 표현해야 하는 만화의 독특한 번역 작업은 주인공인 이옥선 님과 작가의 심정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을지 늘 묻는 작업이기도 했다. 한 가지 예를 소개한다. 작중에 작자가 이옥선 님을 찾는 장면이 있다. 나눔의 집 마당에 있는 피해자들을 모티브로 한 여성 반라상 그림에는 작가의 심정이 담겨 있다. 이옥선 할머니의 끔찍한 체험을 어떻게 들려줄까 라는 작가의 갈등이 그 장면에 투영돼 있다. 직역에 가까운 번역에 출판사로부터 ‘더 시적인 표현’을 요구받았다. 피해 체험 증언은 당사자에게 피해 사실을 재현시켜 강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로부터 “증언을 한 날에는 당시 일이 떠올라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증언을 듣는 사람은 피해자의 입에서 나오는 생생한 사실을 역사의 진실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설 위치를 생각하는 지표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증언을 한다는 것은 증언자로 하여금 피해 기억이 재연되게 하고,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증언자가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증언하는 만큼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고민 끝에 이 부분의 번역은 다음과 같이 되었다. ‘벌써 도착했어! 입구에 있는 늙은 여자의 나신상이 묻는다. “당신도 자기 작품 때문에 우리에게 그 악몽을 말하게 하느냐고” 라고’. 주인공 이옥선 할머니는 ‘가시나’로 불리며 수양녀가 되어 기생이 있는 기루에서 일했다. 번역 작업을 하면서 그의 삶에 유교·도덕적 가부장제로 인한 여성의 인권 침해와 일제강점 식민지 지배로 인한 빈곤-계급 문제가 크게 관련됨을 새삼 절감했다. 번역 작업을 하며 『풀』의 작품성을 살리면서도 일본의 우익 대책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숫자 하나까지 트집을 잡아 작품 전체를,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자체를 부정하려는 우익에게 공격의 틈을 주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일본 상황을 잘 아는 김금숙 작가는 일본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쉽도록 내용을 변경해도 괜찮다고 승낙해 줬다. 작중 등장인물의 나이는 일본식으로 만 연령으로 환산하고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교수와 가사하라 도쿠지 쓰루 문과대 명예교수에게 지도와 조언을 받으면서 외국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난징대학살 장면 등에 일본어판의 독자적인 번역을 넣었다. 이 역시 원작 그림에 맞게 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5. 작가와 만나는 모임 도쿄·오사카·히로시마·후쿠야마의 네 개 장소에서 개최한 ‘작가와 만나는 모임’에는 합계 282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활동가, 재일 코리안(한국인과 조선인) 인권 문제 활동가, 조선학교 학생, 장애인 문제와 환경 문제 활동가, 단체, 교사들이 열심히 김금숙 작가와 교류했다. 한 교사는 “일년에 한번 ‘위안부’ 문제 수업을 한다.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이 조선말을 쓰면 교사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일상적이었다. 현재의 일본 정부도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다. 우리 일본인이 이웃에게 어떻게 해왔는지를 따지는 의미에서도 『풀』은 아주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며 평화와 성교육 부교재로 『풀』을 활용하겠다고 했다. 또 한 시민은 “한국에서는 젠더 문제와 함께 계급문제라는 시각이 시민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과 국가 사이에 거리를 두고 여러 문제를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총중류(總中流: 일본 국민 대다수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의식하는 현상)로 불려온 일본에서는 중산층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거기서 흘러내리지 않으려고 급급하고, 이를 위해 스스로를 국가와 일체화하려는 것 아닌가. 국가가 일으킨 죄로 학대받은 사람으로서 한국과 일본 민중이 공감하고 권력에 맞서기 위해 어떤 시각이 필요한지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풀』은 인권과 평화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가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연결시킨다는 것을 알려줬다.
-
- 2020년 에세이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
[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 1.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2. [에세이] <김복동>이 남긴 것 3.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4.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5.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우리가 기억하는 김복동은 인권활동가이자 투쟁가였다.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담담하게 증언을 하고 일본을 향해 거침없이 반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는 당당한 모습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하지만 공식 석상에서 내려오면 그에게도 여느 사람처럼 일상이 찾아온다. 김복동은 담배를 즐겨 피우고, 종종 유쾌한 농담을 즐겼다. 실명된 왼쪽 눈을 선글라스로 가리면서도, 사진에 찍힐 땐 밝게 웃는 사람이었다. [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를 준비하면서 ‘위안부’ 문제 활동가, 연구자에 국한하지 않고 최대한 많은 사람으로부터 김복동에 관한 글을 받았다.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저마다의 시각으로 바라본 김복동의 이야기를 모으고 싶었다.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모은 글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전시 성범죄를 이 땅에서 뿌리 뽑기 위해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던 김복동에 관한 내용이었다. 김복동은 많은 사람에게 인권활동가, 평화운동가로 기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단상에서 내려온 일상 속의 김복동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때마침 나눔의 집 내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연구원 마리오 씨(본명 야지마 츠카사, 失嶋 宰)로부터 김복동이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던 당시 찍은 일상 사진들을 받았다. 사진이 찍힌 정확한 일시와 당시의 상황을 모두 알 수는 없으나 김복동이 <나눔의 집>에 기거하던 시절에 찍힌 이 사진들을 통해 단상 아래로 내려온 김복동의 일상을 웹진 결의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이번 포토스토리를 기획했다. Credit 사진 제공 : 나눔의 집
-
- 2022년 논평 “국가 없는 애국자들”의 승리
-
1. 2022년 9월 29일 10시, 대법원 1호 법정에서 대법관이 판결문을 낭독했다. “원고 이○○ 외 95명, 피고 대한민국, 사건 2018다224408 손해배상(국), 상고와 부대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상고비용과 부대상고비용은 각자 부담한다.” 짧은 판결이 끝나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곧 방청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소송 원고인 기지촌 여성들, 소송을 지원한 활동가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판결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애썼다. 너무나 순식간에 끝난 판결에 처음엔 나도 당황했지만, 곧 상고 기각이 2심을 확정한다는 의미임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재판 참여자들은 법정을 나서자마자 원고대리인 중 한 사람인 하주희 변호사를 둥그렇게 둘러쌌다. 하주희 변호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큰 목소리로 승리를 자축했다. 그때야 비로소 안도와 환희의 물결이 퍼져나갔다. 2014년 6월 25일 122명의 원고를 대리하여 변호인단이 소장을 접수한 지 8년 3개월 만에 결국 원고가 승소한 것이다. 2. 변호인단이 국가 배상 소송을 청구한 원인은 네 가지다. ①한국 정부는 성매매가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지촌을 조성하고 체계적으로 관리, 유지했다. ②정부는 기지촌을 ‘특정지역’으로 지정하고, 그 종사 여성을 ‘위안부’라고 부르면서 성매매에 대한 단속은 물론 관련 불법행위를 방치했다. ③정부는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성병을 관리했다. ④정부는 ‘애국교육’을 수시로 실시하고 ‘자치조직’을 관리하면서 미군 상대 성매매를 정당화하고 조장했다. 2017년 1월 20일 내려진 1심 판결에서 재판부가 유일하게 인정한 것은 ③조직적, 폭력적 성병관리였다. 1963년 개정된 「전염병예방법」은 성병을 포함한 “제3종 전염병 환자 중 주무부령으로 정하는 자는 격리수용되어 치료를 받아야 한다”라고 규정했지만(제29조 제2항), 격리수용 대상자를 명시한 보건사회부령, 곧 「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은 1977년 8월 19일에야 비로소 제정되었다. 따라서 그 이전의 격리수용은 법적 근거를 결여했다는 점에서 위법행위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 이전에 격리 수용된 경험이 있는 원고 57명에게만 손해배상액 500만원을 지급하도록 결정했다. 이러한 판결에 불복하여 원고와 피고 모두 항소했고, 2018년 2월 8일 항소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2심 판결은 국가의 책임을 더욱 폭넓게 인정했다. 첫째, 2심 판결은 1심 판결이 일부 인정한 ③조직적‧폭력적 성병 관리의 범위를 확장했다. 재판부는 「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이 제정된 이후에도 “성병의심자에 불과한 위안부들을 곧바로 낙검자수용소 등에 격리수용한 경우”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의료 진단 없는 ‘성병의심자’의 강제 격리수용은 신체의 자유에 관한 헌법적 권리를 침해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또한 ‘성병의심자’의 강제 격리수용 조치가 공무원의 인권 존중 의무에 위반되고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했다는 점에서도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둘째, 2심 판결은 1심에서 부정되었던 ①기지촌의 조성‧관리‧운영과 ④성매매 정당화‧조장에 대한 국가 책임 역시 인정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원고들에게 외국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이를 통해 외국군의 사기 진작이나 외화 획득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는 점에서, 기지촌의 운영, 관리 전반에 걸쳐 성매매의 조장‧정당화 행위가 이루어졌다고 인정했다. 또한 담당 공무원들이 애국 교육을 실시하고, 아파트 건립이나 노후 보장 등 거짓 약속을 통해 원고들을 기만함으로써,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조장‧정당화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②국가의 불법행위 단속 면제 및 방치는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했고,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피고 측 주장 역시 배척했다. 이상의 판단에 근거하여 재판부는 ①, ③, ④가 모두 인정되는 원고 74인에게는 700만원을, ①, ④에 해당되는 나머지 원고 43인에게는 300만원을 배상하도록 판결했다. 그 후 약 4년 8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2심 판결이 확정되었다. 그 8년 3개월 동안 최초 원고 중 24명이 타계했고, 연락이 닿지 않는 3명 역시 타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3. 한국의 권위주의 정부가 기지촌을 조성, 관리,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고 조장한 책임이 있음을 사법부가 최초로 인정하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용기와 헌신이 필요했다. 기지촌 여성 인권 운동 단체들이 소송을 주도했다. 두레방, 햇살사회복지회, 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한소리회, 여성인권센터 쉬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그리고 경기여성연대가 결성한 기지촌여성인권연대는 2014년 3월부터 원고들을 모집하고 증언을 채록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현장단체인 새움터는 2014년 3월 기지촌 관련 정부 문서와 언론 보도를 수집한 『미군 위안부 역사』를 출간했고, 원고들의 증언을 수합했다. 또한 원고를 대리하여 법정에서 싸운 변호사들이 있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변호사들은 기지촌여성인권연대와 새움터의 요청으로 2012년부터 소송 법리를 구성하기 위해 관련 연구와 문헌을 검토했다. 변호인들은 2013년 3월 최초로 법리검토의견서를 작성하고, 20명이 넘는 대규모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소송을 제기했다. 변호사들은 활동가들과 함께 원고 진술서를 작성하고, 547개에 이르는 광범위한 증거자료를 수집하여 법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변호사들이 법리 구성에 활용한 연구와 법정에서 증언한 전문가들이 있었다. 캐서린 문의 『동맹 속의 섹스』(이정주 옮김, 삼인, 2002/원본출판 1997)를 필두로 기지촌의 형성과 관리,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 침해에 한국 정부가 책임이 있음을 입증하는 연구들이 생산되었다. 그중 캐서린 문, 이나영, 박정미의 연구가 증거자료로 제출되었고, 이나영과 박정미가 각각 1심과 2심에서 전문가로서 증언했다. 또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의정부 보건소의 의무사무관으로 일한 의사 문정주, 파주 기지촌을 촬영하고 성병 관리 공무원을 면접한 사진작가 조영애가 1심에서 증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소송의 가장 큰 의의는 원고들, 곧 미군 ‘위안부’ 당사자들이 투쟁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해방 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수만 명에 이르렀을 미군 ‘위안부’들을 대표하여 122명이 원고로 나섰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소송 역시 피해자들이 자신이 입은 피해를 직접 증언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원고의 진술서와 면접보고서는 법원에 증거자료로 제출되었고, 법원은 사실관계 인정에 이 증거들을 인용했다. 또한 미군 ‘위안부’ 당사자 4명이 법정에서 증언했다. 이렇듯 재판부는 여성들의 증언을 경청했고, 증언의 신빙성을 인정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원고 중 한 사람은 2심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했다. 우리에게 국가는 없었습니다. 도망가고 싶어서 도움을 요청한 파출소는 다시 우리를 포주에게 도로 돌려보냈습니다. 보건소에서는 고통스럽고 치욕스럽던 성병검진을 일주일에 두 번이나 해야 했고 성병이 없음에도 토벌, 컨텍으로 보건소에서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며 감옥 같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파도 보건소에서는 주사 한 번 약 한 번 처방해 주지 않았습니다. (…) 안에서는 달러벌이 애국자로 밖에서는 손가락질 받는 그런 삶을 살아 온 우리의 삶이 너무나 억울합니다.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핍박받은 여성들이자 “국가 없는 애국자”라는 역설적 존재들이 마침내 국가를 상대로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승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300~700만 원에 불과한 배상액은 원고들이 겪은 고통에 견주어 터무니없이 적다. 여성들이 국가에 의해, 그리고 국가를 위해 어떻게 희생되었는지 진상을 규명하고 여성들의 피해를 온전히 배상하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또한 2020년 제정되었으나 유명무실한 「경기도 기지촌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대로 시행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번 판결은 국가가 미군 ‘위안부’들에게 자행한 불의 중 일부만 인정했을 뿐이다. 일례로 미군 ‘위안부’를 수용한 또 다른 시설인 부녀보호지도소나 직업보도시설에서 발생한 인권 유린은 소송 청구 원인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더 많은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경험을 증언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한국 사회가 그들의 경험에 공감하고 과거의 폭력과 불의를 성찰하여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
- 2022년 인터뷰 [최은영-양경언 대담] 여성의 글쓰기, 위로와 치유가 되다
-
최은영 작가의 첫 장편소설 『밝은 밤』(문학동네, 2021)은 ‘증조모-할머니-어머니-나’에 이르는 여성 4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그리고 현재를 배경으로 장대한 서사를 엮어낸 이 작품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여성들의 시간을 불러내 기억하고 공유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물들은 다치고 깨지기도 하지만, 끝내 일어나 서로의 손을 잡고, 일상을 살고, 삶을 일궈나간다. 소설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통은 지금을 살아가는 ‘나’의 그것과도 맞닿아 있어 여러 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처럼 여성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읽기를 넘어 공감, 위로, 치유의 과정을 경험하게 한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자료센터가 지난 9월 <문학은 기억한다: 여성의 시간과 (불)가능한 치유>를 주제로 개최한 『밝은 밤』 북토크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최은영 작가와 양경언 문학평론가의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밝은 밤』을 중심으로 나눈 둘의 깊은 사유를 전한다. 양경언 『밝은 밤』은 여성 4대에 걸친 이야기입니다. 성씨가 다르지만 누구보다 끈끈하게 이어져 있는 여성들이 주인공인데, 그들의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최은영 처음부터 여성 4대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첫 시작은 증조모 ‘삼천’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말하는 형식으로 썼어요. 그런데 쓰다 보니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삼천과 연결돼있는 사람일 테고, 그렇다면 가족일 것이고, 딸이겠다는 결론을 냈어요. 그 이야기를 듣는 손녀 입장에서 글을 쓰게 되면서 여성 4대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양경언 『밝은 밤』을 읽은 독자들은 대체로 이런 감상을 먼저 꺼내는 것 같아요. 새비와 삼천, 영옥과 희자와 명숙, 미선과 명희, 정연과 지연, 그리고 지우와 같은 소설 속 여성 인물들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같다고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나의 할머니, 어머니, 이모, 고모, 언니, 여자친구들이 떠오른다는 얘기겠지요.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쓸 때 작가님에게 특히 영감을 주었던 여성 인물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그리고 작가님에게 영감을 준 인물을 소설로 형상화할 때 고민했던 점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최은영 저는 소설을 쓸 때 저의 캐릭터를 쪼개 넣어 쓰는 편이에요. 그래서 모든 인물 안에 제가 들어가 있어요. 이번 작품에는 저를 키워주신 할머니의 성격도 많이 반영됐고요. 한국전쟁 당시 대구로 피난을 갔다는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들으면서 자랐거든요. 지연의 엄마인 미선은 저희 엄마와 정말 다른 캐릭터의 인물이지만 엄마와 갈등을 겪었을 때 엄마가 저에게 바랐던 것들, 엄마의 가치관 등이 미선의 캐릭터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그런 부분에서 고민이 있었고, 엄마에게 제 고민을 이야기하니 무엇이든 제가 쓰고 싶은 것을 쓰라고 하셔서 감사했습니다. 양경언 결국 나의 삶을 바탕으로 글을 쓰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힘든 지점이 있겠고요. 나의 삶을 떼어다가 새로운 것을 만들다 보니 생채기가 날 수도 있고, 그것을 보기 싫어도 봐야만 하잖아요. 인물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에서 나의 모습들이 반영되는 것이 괴롭진 않았나요? 최은영 저는 오히려 글을 쓸 때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머릿속의 어지러운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화하면 덜 고통스러워지더라고요. 특히 소설을 쓰면서 제 일부를 떼어 인물을 만들 때는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받아요. 양경언 『밝은 밤』에는 역사적 사건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들이 나옵니다. 가령 증조모가 어머니와 헤어지고 증조부와 개성으로 떠날 수밖에 없게 된 배경으로 일본 사람들과 동네 사람들로부터 “힘없는 집 여자애들”이 “끌려”갔던 일이 등장한다거나, 피폭된 이들의 사연이 히로시마에서 돌아온 새비 아저씨를 돌보던 새비 아주머니를 통해 전해지기도 하고요. 피난길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한국전쟁 이후 남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가부장제를 이어가고자 했는지에 대해서도 그려지는데요. 이런 장면들을 그릴 때 작가님이 특별히 유념했던 바가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들을 토대로 공부하셨는지, 그 과정 중에 이전에는 몰랐다가 새삼 알게 된 것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작가로서 이때 들었던 고민과 생각들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최은영 제가 겪어보지 못한 시대를 써야 한다는 점이 어려웠어요. 가짜를 쓰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있었죠. 어렸을 때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남성 작가들의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요. 그 작품들에서 남성 인물은 철학적이고 생각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반면, 여성 인물은 항상 현실에 희생당하는 대상으로 그려졌어요. 우리 역사가 여성의 몸을 통해 은유적으로 묘사되는 방식이었죠. 굉장히 거북하고 기분이 나빴어요. 그래서 한국전쟁을 그릴 때 그런 식으로는 그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고, 소설 안에서 인물들이 어떤 고통을 겪더라도 그들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들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기능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실제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작품이 교조주의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되고 사람을 폭력적으로 다루게 되는 것 같아요. 한국전쟁은 제가 겪어보지 않은 일이기에 할머니에게 피난 당시의 상황을 물어봤어요. 아군이고 적군이고 구분 없이 여자는 강간하려 했고, 할머니 자신도 두려웠다고 말씀해주셨죠. 박경리, 박완서 선생님이 쓰신 작품들, 전쟁 이후 민간인들의 삶에 관한 연구 자료들, 피폭 관련 도서들도 읽어봤고요. 사실이 아닌 것을 임의로 추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공부를 하며 썼습니다. 양경언 소설은 결국 사실적인 기율을 존중하며 형성되는 허구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점에서 ‘관념적으로 다루고자 하지 않았다’, ‘가짜로 쓰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인상적으로 남습니다. ‘위안부’, ‘피폭’, ‘피난길 풍경’ 등 고통을 서사로 재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재현의 방법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고민하셨을 텐데, 그 과정에서 작가님이 세운 원칙 같은 게 있을까요? 최은영 앞서서도 이야기했지만 저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인물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 인물들을 도구적으로 전시하듯 써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했어요. 인물의 고통이나 슬픔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실현하려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며 글을 썼습니다. 인물은 작가의 마리오네트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물 위에서 내려다보며 쓰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몸 안으로 들어가서 인물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인물의 마음에 최대한 집중해서 그 마음을 함께 느끼고자 노력했습니다. 양경언 작가의 덕목은 삶에 대한 존중을 갖추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신 것 같아요. 한편, 이런 얘기도 이어서 해보면 어떨까요? 소설을 통해 고통을 직면하는 일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요. 증조모가 자신의 출신 조건 때문에 마을 공동체에서 차별당하고, 새비 아저씨가 통증을 겪으며 인간이 벌이는 전쟁의 끔찍함을 전할 때, 이러한 이야기가 고통스럽더라도 독자들이 마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최은영 읽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읽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공감해요. 그런데 인간 자체가 가만히 있으면, 그러니까 노력하거나 성찰하지 않으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요. 인간은 쉽게 잊어버리는 속성을 갖고 있잖아요. 인류 공동체가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모르면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반복하고, 그로 인해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개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저항하는 시민들이 절대다수라면 실제로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자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픽션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이었어요.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생각도 하지만 인물 안에서 실제로 그들의 고통을 감각해요. 이야기가 다 사라지고 나서도, 감정은 남아 있어요. 타인의 고통을 순간이나마 내 것으로 느낀 경험이 개개인의 인간을 공감하는 주체로 깨워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순간적인 자극이나 즐거움만 좇는 사회일수록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무뎌지고, 상대의 입장에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감 능력은 말 그대로 능력이기에, 그런 능력을 잃을 때 자기 자신에게도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읽을 때 고통스럽더라도, 고통스러운 독서의 경험은 자신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경언 이야기를 읽으면서 너무 고통스럽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이 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네요. 그런 반응 자체가 능동적인 독자가 되는 출발점일 수도 있겠고요. 최은영 우리는 감정을 느끼는 걸 죄악시하고 낭비라고 교육받으며 살아왔잖아요. 그것이야말로 만병의 근원인 것 같아요. 문학작품을 읽으면 감정적으로 동요되고 눈물이 나기도 하는데, 그럴 때 내가 느끼지 못했던, 느끼지 않으려고 억압했던 감정이 올라오며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줘요. 소설을 읽는 것이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양경언 증조모인 삼천은 천성이 “고개를 숙이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사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무리 지어 날아가는 하늘의 새들을 쳐다보느라 넋을 놓”을 줄 아는 사람(35쪽)으로 그려집니다. 할머니 영옥은 “할머니도 케이크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없어 못 먹죠”라고 장난스레 답하는(28쪽) 장면 등에서 사랑스럽게 그려지고요. 증조모와 할머니를 그릴 때 이런 성품의 사람들로 그리고 싶었던 이유가 있을까요? 최은영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쓴 것 같아요. 이 작품을 쓸 때 제 삶의 주도권을 갖고 싶었거든요. 저는 그때 제게 고통을 준 인간들에 대한 분노로 하루하루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정작 그들은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데, 왜 잘못하지도 않은 내가 고통받아야 하지,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삶을 온전히 살지 못했어요. 그로부터 1년 정도 흐르니 그들을 탓했던 시간 동안 제 삶의 주도권을 그들에게 줘버리는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에게 미안해지더라고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저 자신에게 집중해서 살아가고 싶었어요. 그런 지향 안에서 저를 돌아보는 과정이 있었고요. 큰 고통을 겪고도 단단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을 관찰했어요. 그런 분들은 유머감각이 있어요. 실제로 저희 할머니가 게임도 좋아하시고 농담도 좋아하세요. 험한 일들을 겪으셨지만 정말 즐겁게 살고 계셔서 할머니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소설 쓸 때 녹아든 것 같아요. 양경언 새비와 삼천이 나누는 감정적 교류나 편지를 보면, 이들은 웬만해선 시대를 탓하거나 서로를 원망하지 않아요. 이들이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 힘을 북돋고, 그 힘으로 삶을 살아나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최은영 삼천과 새비는 자기 인생에 책임감을 갖고 있는 강한 사람들이에요.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나는 나에게 일어난 어떤 일들에도 나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던 게 떠오르는데, 그건 제가 이야기한 것과도 연결돼요. 자기 삶에서 일어난 어떠한 일에도 자신의 책임이 있다는 말은 ‘다 내 잘못이야’라는 식으로 자기를 내모는 게 아니라 ‘내 삶의 모든 과정에서 나는 주체였어, 어떤 일이 있든지 나는 내 삶에 책임을 지고 앞으로 나아갈 거야’라는 결의가 담긴 강한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양경언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말 자체가 ‘응답하다(respond)’와도 연결되는데, 자기가 겪은 삶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주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최근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단절’하고 보자는 얘기들도 나오는데, 작가님의 작품에서는 관계를 단절적으로만 다루지 않는 것 같아요. 지연과 미선, 미선과 영옥, 이들 모녀 관계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방향으로 소설이 나아가는데요. 상처를 주고받은 관계를 그릴 때 작가님은 인물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최은영 모든 관계에는 인연에 따라 기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근데 저희 할머니를 보면 오래 가는 관계도 드물지만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아무것도 못 드셨을 때 옆집에 사시던 분이 음식을 만들어다 주시면서 먹고 살아나라고 해주신 적이 있었대요. 그런 돌봄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할머니가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시고, 80대까지도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그 분을 만나러 다니셨어요. 삼천에게는 새비가 그런 존재였을 것 같아요. 양경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작가님이 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일도 중요했을 것 같아요. 혹시 이 작품을 쓰면서 포기할까 싶을 만큼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을까요? 집필 중에 제일 힘들었던 순간은 어떤 장면을 그릴 때였나요. 그때 작가님이 갖고 있었던 ‘질문’은 무엇이고, 그에 대한 답을 어떻게 마련하셨는지요. 최은영 2화가 끝난 뒤 인물들이 대구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그 후의 그림이 구체적으로 안 그려져서 정말 막막했어요. 결국 명숙 할머니가 어느 정도 알아서 해주셨지만, 전쟁이 끝난 뒤 희령으로 가게 되면서 또 막혔어요. 그래서 3화는 초고를 버리고 완전히 다시 썼어요. 최대한 그 세계 안에 있으면서 인물들과 함께 살아보려고 노력했어요. 처음에 3화를 쓸 때는 인물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거의 다 살려뒀었는데요. 친구가 보더니 ‘언제까지 이들을 다 살려둘 거냐’고 묻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3화를 다시 쓰면서 하나씩 보내기 시작했어요. 새비 아주머니가 가실 때는 정말 이별하는 느낌이 들어 많이 울었어요. 그게 소설 쓰기인가 봐요. 3화를 쓰면서 ‘내가 과연 끝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인물들이 알아서 해주더라고요. 고비를 넘겼더니 4화는 자연스럽게 마무리됐어요. 양경언 『밝은 밤』을 읽다 보면, 공적인 역사에서 제대로 쓰이지 않고 떠돌았던 여성의 시간을 ‘문학’으로 기억하는 과정을 통해 치유에 이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것은 태양과의 연결 속에서 빛을 만들어내는 달이 어둠 한가운데서 길을 내는 듯한 ‘밝은 밤’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고요. 작가님 역시 문학작품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여성의 이야기를 접하고 치유에 이른 경험을 갖고 계신지요. 최은영 치유는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책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경험을 했어요. 최근에 샬롯 브론테가 쓴 『빌레트』라는 책을 읽었는데 19세기 당시 영국에서 프랑스로 넘어가 학교 교사를 하며 혼자 사는 여성의 이야기예요. 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책이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느낌이 들었고 인물에 공감이 됐어요. 그래서 슬프기도 하고 벅차기도 하면서 혼자가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작가는 몇백 년 전에 죽었고, 책 속의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도 관계가 없지만 위로를 받은 거예요. 굉장히 신기한 일이었어요. 양경언 독자가 작품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작품이 독자를 읽어주는 것이란 말은 마지막 질문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소설을 쓰고 읽는 일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최은영 소설은 인간의 내면을 가장 깊이 있게 묘사할 수 있는 예술 형식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오랜 시간 동안 살아볼 수 있는 경험도 할 수 있고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타인과, 세상과 단절되고 분리되는 경험을 하게 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럴 때 소외감을 느끼고, 그런 소외감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발생하곤 해요. 저는 살면서 계속해서 무언가와 끊어지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좋은 소설을 읽으면 ‘이토록 다른데도 본질적인 것은 닮아있구나’ ‘우리가 겪는 고통은 비슷하구나’라는 점에서 인간 존재라는 사실만으로도 타인과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곤 해요. 양경언 『밝은 밤』을 통해 작품과 독자들이 공동체의 기억을 새로이 형성해나가는 과정과도 연결되는 말인 것 같아요. 앞으로의 계획 여쭈면서 오늘의 대화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은영 내년 여름에 세 번째 단편집을 낼 것 같아요. 단편집은 5년 만이에요. 올해 겨울에 마지막 한 편을 쓸 예정인데, 그간 써온 단편들을 잘 묶어서 내고 싶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양경언 인터뷰이: 최은영 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사진: 오늘의 나 일시: 2022년 10월 26일 수요일 장소: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42-22 카페스페이스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