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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운동의 전 세계적인 성공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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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독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이하 코협)는 2020년 2월 베를린 미테구 ‘도시공간 예술 위원회’에 소녀상 설치를 신청하여 2020년 7월에 공식 허가를 받았다. 소녀상 설치의 주목적인 김학순 님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2020년 8월 14일에 제막을 하려고 했으나, 도로공사로 인해 6주 후인 2020년 9월 28일, 베를린 미테구 모아빗에서 공식적으로 제막식을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제막 하루 뒤인 9월 29일,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현 후생노동상)은 정례 기자회견에서 “이번 결정은 정부의 입장과 지금까지의 조치와 맞지 않아 대단히 유감스러운 결정이며 (일본) 정부로서는 계속 (독일의) 여러 관계자에게 접근해 일본 정부 입장을 설명하고 동상(소녀상)의 신속한 철거를 요구하겠다”고 강조했다. 독일 외에도 세계 각국에 소녀상이 설치될 경우 “지금까지 일본의 움직임에 따라 실제로 (소녀상 설치가) 수습된 사례도 있다”며 “계속 국제사회로부터 정당한 평가와 이해를 얻을 수 있도록 향후에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10월 1일 산케이 신문은 일본의 모테기 외무상이 파리에서 독일 하이코 마스 외교부 장관을 만나게 되면, 베를린 소녀상 철거를 요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고위급 관리까지 동원하여 소녀상 철거를 공식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전에는 일본 대사가 현지에서 관계자들과 암암리에 만나 철거를 요청해왔었다. 일본의 이러한 요구에 당황한 독일 외교부, 베를린시 정부는 미테구청장에게 압력을 가해 10월 7일 시급히 철거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공문에 담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코리아협의회는 미해결된 한일 갈등 문제에 독일을 끌어들여 한국의 편을 들도록 하는 난감한 상황을 일으켰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도 일본군과 같은 죄를 범했는데 일본만 일방적으로 공격을 하고 있는 비문에 문제가 있고, 그 외에도 100개 국가 출신의 이주민들 사이에 갈등을 불러일으켜 평화로운 공존을 파괴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7일 안에 소녀상을 철거하지 않으면 2500유로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이 함께 담겼다. 처음 철거 명령을 받았을 때는 부당함에 눈앞이 깜깜해지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소녀상을 세우기 위해 2년간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 순식간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소녀상을 설치한 지 꼭 10일 만이었다. 도시 공간에 조형물을 세우려면 건물과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코협은 2018년도에 2층 사무실에서 1층으로 이사를 하고, 일본군‘위안부’ 박물관 설립을 계획했다. 박물관 설립을 위한 준비 과정의 일환으로 2019년 1월 사진전과 예술 작품 전시회를 열어 정치가들을 초청했다. 미테구 도시공간 예술위 실무자가 전시장을 방문하고 소녀상 설치를 위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우리는 1년간 정성 들여 신청서를 준비했다. 더하여, 지역 주민들과 연대해 소녀상 설치에 대한 공식 허가를 받게 되었다. 코협과 같은 작은 단체에게는 1.5톤에 달하는 동상을 한국에서 독일로 가져오는 과정도 큰 부담이었기에 철거 명령은 정말 치명적이었다. 철거 명령이 떨어진 순간 지인을 통해 행정 전문 변호사를 추천받아 철거 하루 전인 10월 13일 베를린 행정 재판소에 가처분 신청서를 아슬아슬하게 제출해 놓았다. 일단 재판에서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소녀상이 철거되지 못한다고 했다. 동시에 언론에 이 사실을 알렸다. 수십 년간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여 한일 관계에 눈이 밝은 타츠 신문사의 스벤 한센 동아시아 편집장에게 늦은 밤 직접 전화를 걸어 다급하게 상황을 알렸다. 한센 편집장이 첫 번째로 한 말은, 독일은 지방자치가 강해 중앙에서 지시를 내려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몇 주간 수차례 통화하며 서로의 정보를 교환했다. 진보 일간지인 타츠에 소녀상 관련 기사가 첫 번째로 보도되었고, 덕분에 명확한 상황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는 구의회 의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 보도에 이어 베를리너 차이퉁, 타게스 슈피겔 등 다수의 베를린 지역 신문사뿐만 아니라, 쥐트 도이췌 차이퉁과 같은 독일 전역 언론사 및 방송사, 차후 파이낸셜 타임스 및 더 네이션과 같은 영어권 신문에서까지 독일 미테구 사태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 줄지어 보도되었다. 철거 명령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응 역시 막강했다. 베를린 미테 지역구의 녹색당, 사민당 그리고 좌파당에서 즉시 반발했다. 베를린 예술인 협회에서도 표현의 자유 침범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외에 저명인사, 교수, 학자, 일반인들 모두 미테구청장에게 서한을 보냈다. 한 한인 유학생이 소녀상 철거 반대 온라인 캠페인을 올리자 삽시간에 9000개 이상의 서명이 모였으며, 코협도 공개 편지 서명을 시작해 3700개의 성명을 모았다. 10월 13일, 기자회견과 시위를 이틀 만에 준비했다. 한국, 독일, 일본 언론사가 몰려오고 낮 1시임에도 불구하고 300명 이상의 베를린 시민이 소녀상 앞에서 미테구청까지 가두 시위를 하였다. 집회 하루 전날 스테판 폰 다셀 미테구청장의 비서에게 성명서를 전달했다. 미테구청장은 시위 현장에 나타나 어차피 가처분 신청으로 소녀상 철거 명령이 보류되었으니,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일본 대사관과 코협의 관련자와 타협을 하겠다고 하여 철거 위기는 모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초 미테구청장은 철거 명령을 철회했고, 코협도 가처분 신청을 취하하여 재판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독일어권에서 유명한 단체 ‘극우를 반대하는 할머니(오마스 게겐 레히츠)’가 구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그 추운 겨울, 구의회 앞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촛불 집회를 열었다. 한인 교민들과 한인 음악가들은 자발적으로 소녀상 앞에서 연주하며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녀상을 향한 절실한 마음이 담긴, 전 세계에서 전달된 이메일은 마치 큰 파도와 같이 베를린 모아빗으로 몰려와 정치가들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소녀상이 공공장소에 세워지는 만큼, 법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미테 지역구 의원들의 의지가 가장 중요했다. 녹색당, 사민당, 좌파당, 진보당이 합심하여 지난 2년간 5회 이상 소녀상 영구 존치안을 과반수로 통과시켰다. 사실 도시공간 예술위에서는 1년 허가를 낸 후 주변 반응을 보고 1년, 2년 계속 연장하니 별 걱정 말라고 했다. 일본 정부의 압력과 미테구청장의 부당한 철거 명령이 소녀상 영구 존치에 오히려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 역사는 우연일까 아니면 이미 정해진 곳으로 움직이는 것일까? 지난 2년 동안 소녀상 영구 존치의 가장 큰 걸림돌은 미테구청장이었다. 그가 소녀상 건으로 일본 대사관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어 그쪽의 눈치를 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소녀상 영구 존치를 적극 반대했다. 그런데 다셀 구청장이 지난 9월 인사 비리로 갑자기 물러나게 됐다. 뒤이어 새롭게 선출된 여성 구청장인 레믈링어는 지난 11월 초 평화의 소녀상 존치 2년 연장을 발표했고, 이 기간 동안 소녀상이 공식 기념비가 되는 것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베를린의 소녀상은 일본 정부가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은폐하려는 야비함을 알렸고, 이어 영구 존치까지 이끌어냈다. 지난 30년간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던 차세대 교육이 저절로 이뤄지게 된 것이다. 지난 2년간, 초기에는 거의 매일, 최근에는 2주일에 한 번꼴로 독일 고등학생부터 학사, 석사, 박사 과정 학생, 기자, 학자, 여성단체, 인권단체들까지 우리에게 인터뷰를 요청해오고 있다. 베를린 소녀상에 행해진 부당한 사실이 알려진 뒤, 올 1월에는 독일 카셀 대학 총학생회장에게서 소녀상을 세우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이에 김서경, 김운성 작가 부부가 소녀상을 기증해주었다. 더하여, 독일 시민과 TBS 라디오방송 <김어준의 뉴스공장>의 힘으로 운송비까지 모금되어 영구 존치에 성공했다. 이 모든 것은 “다시는 역사적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전 세계를 다니며 증언하시던 할머님들의 뜻 덕분이기에 더욱 큰 만족감과 기쁨을 느낀다. 한국 시민들의 모금으로 일본군‘위안부’ 박물관을 설립하고 현재 밤낮으로 청소년과 시민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뒤돌아보면, 베를린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고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하루아침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평화의 소녀상은 단순히 반일, 또는 민족주의적인 산물이 아니라, 식민 지배와 가부장제하에서 가장 하위 주체인 소녀들과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긴 탈식민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인 것이다. 한국 시민사회의 불타는 정의감으로 베를린까지 소녀상이 오게 되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운동이자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운동의 한 사례로서 베를린의 많은 여성단체에 힘이 되고 있다. 베를린에서 30년 넘게 운동을 펼쳐온 독일, 한국, 일본 여성 단체들의 꾸준한 연대의 성과이기도 하다. 소녀상 영구 존치 과정에 큰 힘이 된 것은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시작된 ‘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의 가치)’ 운동이다. 이 운동을 통해 독일 사회의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에 대한 반성이 이뤄졌다. 동시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도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어, 베를린에서는 지난 3년간 반식민주의, 반인종차별, 반성차별 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이처럼 거대한 역사적 변화의 물결 덕분에 베를린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이주민에 대한 의식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제 평화의 소녀상은 독일 사회에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독일의 역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독일의 필요에 의해 독일로 오게 된 파독 간호사, 광부와 같은 ‘인력’의 1세, 2세, 3세들이 독일 영토에서 펼치는 활동은 독일의 역사가 아니라고 볼 수 있는가? 독일로 이주해온 해외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식민 지배, 분단, 독재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독일까지 오게 되었고, 이때 그들은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기억 또한 함께 가지고 왔다. 평화의 소녀상은 이제 여성 인권의 상징으로, 베를린 미테구 모아빗에서 수많은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평화를 전파하게 되었다. 아픈 자에 공감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평화이다. 베를린 주민들은 이제 평화의 소녀상을 향해 외친다. “평화의 소녀상은 우리의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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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한국YWCA는 왜 수요시위에 연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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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YWCA는 왜 수요시위에 연대하는가 한국YWCA연합회는 지난 2023년 11월과 2024년 2월, 두 차례 주관한 수요시위를 통해 전 세계의 전시 성폭력을 비롯해 각종 폭력에 저항하겠다는 평화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의 길에 앞장서고 있다. 2024년 11월에는 세 번째 수요시위도 주관할 예정이기도 하다. 한국YWCA연합회가 왜 수요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지, 그 활동과 연대의 의미를 남유진 성평등정책위원장이 소개한다. "지난 30여 년간 이 자리에서 1,622회 외침을 통해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사죄와 규명을 요구해왔지만, 일본 정부는 끊임없이 전시 성폭력에 대한 부정과 정당화를 도모해왔다. 여기에 모인 우리는 전 세계의 전시 성폭력 근절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 하루속히 선행되어야 하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촉구한다." 지난 2023년 11월 15일, '제1622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한국YWCA연합회가 발표한 성명의 일부이다. 한국YWCA연합회가 처음으로 주관한 이날 수요시위는 여성 인권과 평화를 향한 길에 국내 시민단체들과 뜻을 함께하겠다는 대시민 선언이자 약속이었다. 한국YWCA는 1922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로 창립한 이래 청년운동, 여성운동, 기독교운동, 국제운동 등을 펼쳐 온 운동체이다. 인종, 종족, 성, 계급 등 모든 차이를 넘어서서 인간은 하나이며, 독립적 주체로서의 여성과 회원이 한국YWCA연합회의 주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YWCA연합회는 '성평등 관점을 반영한 정의로운 탈핵·탈석탄 에너지 전환 사회 구축'이라는 '2024~2025 비전'을 제시하며 '탈핵기후생명운동'을 중점운동으로 설정하는 한편 성평등운동, 평화·통일운동, 청(소)년운동 등 YWCA 목적에 기반한 운동을 지역 특성에 맞게 추진하는 정책과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여기서는 한국YWCA연합회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해 온 궤적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첫 수요시위 주관… 맞잡은 손, 연대의 과정 한국YWCA연합회는 2023년 1월부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네트워크(이하 정의연 네트워크)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적극적인 연대와 단체 간의 활발한 소통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와 분쟁 하 여성 인권 침해 및 성착취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에 공감한 결정이었다. 정의연 네트워크에는 한국YWCA연합회 외에도 한국여성단체연합, 전국여성연대, NCCK여성위원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이화여대민주동우회 등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에 관심있는 여성·인권·평화 관련 국내 시민단체들이 뜻을 함께하고 있다. 정의연 네트워크에 가입한 이후 한국YWCA연합회는 1622차와 1635차 수요시위를 주관했으며, 2024년 하반기에도 한 차례 더 주관할 예정이다. 2023년 11월 15일, 1차로 주관한 수요시위에서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의 역사적 진실을 직시하고,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와 진상 규명, 법적 배상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등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분쟁과 전쟁에 반대하며, 여성에 대한 폭력을 비롯해 각종 폭력에 저항하겠다는 평화의 목소리를 강조했다. 이날 연대 발언에 나선 일본의 니시야마 나오히로 '오사카유니온네트워크' 대표는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정하는 기시다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일본 정부의 진지한 사죄와 배상을 얻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하겠다"고 해 큰 박수를 받았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 이용수 할머니는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라며 "(연대 발언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놀랬다. 말하는 것 하나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 (모든) 말이 봉오리가 돼서 활짝 피어나고 있다. 여러분, 사랑한다"는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수요시위 마지막 순서인 성명서 낭독을 맡은 한국YWCA연합회는 "삼 십여 년간 이 자리에서 1,622회의 외침을 통해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사죄와 규명을 요구해왔지만 일본 정부는 끊임없이 전시 성폭력에 대한 부정과 정당화를 도모해왔다"며 "여기에 모인 우리는 전 세계의 전시 성폭력 근절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 하루속히 선행되어야 하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 청년 활동가들과 함께 한 1635차 수요시위 2024년 2월 14일, 2차로 한국YWCA연합회가 주관한 1635차 수요시위에는 특별히 제21차 한·일YWCA청년협의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일본YWCA 청년 활동가들도 함께했다. 일본YWCA 청년 활동가들은 연대 발언과 특별 합창을 통해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여정에 힘을 실었다. 미카 미나미 일본YWCA 활동가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하며, 우리 세대가 한·일의 틀을 넘어 연결되고, 이를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이 '나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며 "오늘 그 책임과 마주하는 첫 걸음을 떼게 하는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에리 카와고에 일본YWCA 활동가 또한 "여기 있는 사람들이 홀로 사회와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오늘 우리가 여기서 만났다는 것을 떠올렸으면 한다."는 응원을 전해 환호를 받았다. 특히 에리 카와고에 활동가는 함께 연대 발언에 나선 일본 릿쿄대학교 겸임 강사이자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회원인 이령경 작가의 수업을 대학에서 수강한 남다른 인연을 밝히기도 했다. 이령경 작가의 평화학, 인권 관련 강의에서 '위안부'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켰다는 에리 카와고에 활동가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바다 건너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수요시위에 선 것이었다. 열정적으로 수업했던 강사와 그 수업에서 눈을 반짝이던 학생은 특별한 현장에서 연대 발언자로 함께 나선 이 우연한 만남에 서로 놀랐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확장하는 '연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제68차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에 참여하다 한국YWCA연합회의 연대 목소리는 국외로까지 넓어지고 있다. 지난 2024년 3월에는 뉴욕에서 열린 제68차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SW68)에 참여해 '전시 성폭력과 전후 페미니즘 운동'과 관련한 주제 발표를 했다. 2024년 3월 11일부터 22일까지 2주간 본회의 일정이 진행된 'UN CSW68'의 주제는 '빈곤 해결과 젠더 관점에서의 제도와 재정 강화를 통한 모든 여성과 소녀들의 성평등 달성 및 역량 강화 가속화(Accelerating the achievement of gender equality and the empowerment of all women and girls by addressing poverty and strengthening institutions and financing with a gender perspective)'였다. UN CSW68은 장관급 회의인 본회의(Official Meetings), 정부 및 국가기구 운영 행사인 부대 행사(Side Events), UN ECOSOC 협의 지위(편집자주-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비영리 민간조직인 NGO가 유엔에 공식적으로 등록돼 얻은 지위) NGO 행사인 병렬 행사(Parallel Event)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한국YWCA연합회가 발표한 부분은 병렬 행사였다. 이 자리에서 정의연의 협조를 받아 준비한 발표를 통해 한국YWCA연합회는 한국이 경험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하고 있는 전시 성폭력과 이후 피해자가 겪는 교차적인 피해와 빈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제 발표 후 패널로는 우크라이나YWCA 율리아네츠 회장, 한국YWCA연합회 이한빛 간사, 일본YWCA 마이코 활동가, 세계교회협의회(WCC) 니키 목사 등이 참여해 토론과 발언을 이어나갔다. 한국YWCA연합회의 발표와 토론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다시 한 번 국제적 차원에서 논의하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내 전시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여성 인권 향상 위한 함께 걷기 한국YWCA연합회는 끊임없이 굴종을 요구한 일제강점기에도 한국 여성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는 동시에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고 인권을 향상시키는 다양한 활동에 동참해 왔다. 이러한 역사와 관점을 기반으로 한국YWCA연합회는 관련 활동을 뉴스레터로 공유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네트워크와 함께 할 것이다. 또 중점 운동 아젠다인 '탈핵기후생명운동'을 중심으로, 전시 성폭력 문제에 대해 '전 세계 여성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로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는 일'임을, 지속적으로 전시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바로 '연대'가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견지하며 이를 실천해 나갈 것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운동은 전 세계 여러 곳에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되는 등 초국가적 여권 운동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 사이 수요시위는 1700차를 향해 가고 있다. 그간 두 차례 수요시위를 주관한 한국YWCA연합회는 2024년 11월 세 번째로 주관을 맡기로 했다. 과거에 그래왔듯이, 현재 그렇듯이, 미래에도 한국YWCA연합회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의 길에 동행할 것이다. 이 땅과 이 땅이 아닌 곳 모두에 상존하는 여성들의 고통을 근절하기 위해 함께 걷는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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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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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안세홍(비영리 단체 ‘겹겹프로젝트’ 대표)은 25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14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진에는 그들의 가슴 속 깊은 한이 담겼지요. ‘이것은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당도한 사진 속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안세홍 작가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에서 전합니다.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1) 이수단 이야기 –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4) 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삶 “밍니엔 뿌자이(明年不在)”[1] 박차순 1922년 전라도에서 태어남. 1942년 18세에 후난성, 난징, 우한에 4년간 동원됨.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면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피해자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추운 겨울을 잘 지내고 있는지, 식사는 잘하고 있는지, 살을 에는 듯한 환경에서 한 해를 넘기는 것이 그들에겐 남들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01년부터 중국 회이룽장성(黒龍江省) 오지에서 내륙 깊숙한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 이르기까지 수십 차례 생존자들을 만나 왔다. 사진가로서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삶을 기록해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박차순을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12월이다. 그는 우한에서 차로 두 시간을 더 들어간 샤오간(孝感)시 외곽에 살고 있었다. 운전기사가 길을 찾지 못해 그의 양딸과 여러 번의 전화 통화를 하고서야 겨우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추운 날씨를 피하고자 두꺼운 외투와 털모자를 쓴 채, 가늘게 들어오는 햇볕에 왜소한 몸을 더 움츠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한국에서 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어요.” 우리말로 인사말을 건네자 그는 무기력한 눈인사로 답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지만, 지역 특유의 사투리 때문에 베이징(北京)어는 물론이고, 우한 말로도 통하지 않아 그의 양딸을 통해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중국에서의 오랜 생활은 그에게서 고향에 대한 기억과 조선말을 빼앗아버렸다. 기억나는 조선말이 무어냐고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대전, 대구, 부산, 전주’ 등 한국 지명뿐이었다. 뒤섞인 가사로 간간이 부르는 ‘눈물 젖은 두만강’, 아리랑만이 그에게 유일한 고향이었다. 인생의 얄궂음이 이런 건가 그의 어릴 적 기억은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는 것이 전부였고, 이후로 더는 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엄마의 곁을 떠나 전주 부근의 외할머니와 백부(둘 이상의 아버지의 형 가운데 맏이가 되는 형)의 손을 오가며 키워졌다. 사춘기의 나이에는 식당과 술을 파는 가게에서 일했고, 적은 임금 탓에 주인에게 빚을 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경성의 매춘굴에 팔려 갔고, 거기서 다시 중국의 위안소로 팔려 가게 되었다. 18살에 중국 후난성(湖南省), 난징(南京)을 거쳐 우한의 우창(武昌)으로 갔다. 그가 간 위안소는 커다란 호수가 있고, 장제스(蔣介石) 동상이 보이는 곳이었다. 방이 모자라 가운데를 천으로 가린 채 양쪽에서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평상시에는 계급이 비교적 높은 군인이, 일요일에는 일반 병사 20여 명이 몰려왔다. 일본인 관리자가 모든 물품을 배급하고, 외출도 같이 해야만 할 정도로 생활이 엄격했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고서 일본군은 ‘위안부’ 여성들을 일본 조계지[2]로 집결시켰다. 자신들의 앞날을 알 수 없는 여성들은 도망치기도 했지만, 다시 잡혀와 일본군에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무서웠고,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몰랐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위안부’ 생활을 부끄럽게 생각해 결국은 남기로 했다. 현지인의 도움으로 위안소를 도망쳐 나와 샤오간 시골 마을에 살게 되었다. 당시 우한 지역의 피해자들은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해 현지에 남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박차순은 도망을 도와준 사람과 결혼을 했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위안부’ 시절의 아픔이었을까, 자신의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갓난 여자아이를 입양해 키웠다. 그리고 1970년쯤에는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해야만 했다. 겹겹이 쌓여가는 힘 그가 사는 방은 창고를 개조해 햇빛 한줄기 들지 않아 습하고 냉기 가득한 시멘트의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방안에는 난방 장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한 켠에 놓인 침대 위에 겨울 이불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따듯한 물주머니를 어루만지는 손등에 깊게 패인 주름, 도드라지게 노출된 핏줄과 검버섯이 그동안 그가 겪었을 고난을 말해주고 있었다. 겹겹프로젝트[3] 활동을 하면서 피해자를 위해 써달라는 후원금을 모아 피해자들에게 전달했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의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돈을 직접 만지기 어려웠고, 후원금은 엄한 사람들의 손에 쥐어졌다. 직접적으로 피해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그들의 생활환경과 건강을 챙기는 일을 하기로 했다. 2013년 11월,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박차순의 집을 수리하고자 25명의 시민과 68명의 후원인이 나섰다. 그가 따듯하게 겨울을 날 수 있도록 겹겹 회원들은 전기장판, 양모 이불, 겨울 생활용품 그리고 단열을 위한 건축자재를 비행기로, 버스로, 기차로 샤오간까지 손수 운반했다. 그의 방안으로 들어오는 냉기와 습도를 차단해 단열효과를 높이고,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벽은 이중으로 단열을 하고, 천장은 10cm 두께의 샌드위치 패널로 마무리했다. 온종일 공사를 지켜보며 초조해하던 그는 초저녁 잠을 청하다 공사가 걱정되는지 늦은 밤 깨어 방으로 왔다.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방문과 공사, 달라진 방의 모습과 새로운 가구로 어리둥절해하는 그의 모습이 그저 순진하게만 보였다. 같이 간 회원 한 명이 그에게 “무엇이 제일 갖고 싶어요?”라고 묻자 그는 더듬거리며 “엄마!” 그리고 “갖…고…싶…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고향의 기억은 없었지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2017년 11월 박차순의 양딸에게 그의 안부를 묻던 중 그가 한 달 넘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에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회원 네 명과 함께 방문했다. 겹겹 회원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살려 며칠 만에 한복을 만들고, 그가 기억할만한 고향 음식인 수수부꾸미, 주박[4]울외[5]장아찌, 단술 등을 만들어 그에게 전해달라며 한 보따리 보내왔다. 박차순은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우리를 반가워하면서도, 계속해서 “밍니엔 뿌자이(明年不在)”라며 내년에는 자신이 없으니 오지 말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이듬해 1월 18일 그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고, 장례식에 갈 수 없어 마음이 아팠다. [사진 설명] 겹겹 회원들이 외벽의 곰팡이를 제거하고 흰 페인트로 칠하고, 따듯한 겨울나기를 위해 창고를 개조해 만든 방 전체를 단열하고 도배로 마무리했다. 그동안 박차순은 다른 회원들과 함께 시내로 나가 처음으로 발 마사지를 받고 외식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 설명] 박차순이 어릴 적 살았던 전주에서 채취한 흙을 전해주고, 틀니 제작을 위해 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한 달 넘게 지속된 허리통증과 심한 복통을 호소해 급히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병원에서는 적절한 치료가 없었지만, 박차순은 나흘 만에 일어나 기운을 차리고 퇴원을 했다. 각주 ^ 박차순이 “(나는) 내년에는 죽고 없다”는 뜻으로 한 말. ^ 주로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 ‘겹겹 프로젝트’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기록하기 위해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140여 피해자를 만나 기록과 지원을 하는 활동으로, 안세홍 작가가 그 대표를 맡고 있다. (겹겹 프로젝트 홈페이지(https://juju-project.net/)에서 부분 인용) ^ 술지게미(술을 빚고 남은 찌꺼기) ^ 참외과에 속하는 덩굴식물 기사 게재일: 202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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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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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안세홍(비영리 단체 ‘겹겹프로젝트’ 대표)은 25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14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진에는 그들의 가슴 속 깊은 한이 담겼지요. ‘이것은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당도한 사진 속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안세홍 작가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에서 전합니다.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1) 이수단 이야기 –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4) 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삶 배삼엽 1925년 조선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태어남. 1937년 13세에 중국 내몽고 바오터우(包头)로 3~4년간 동원됨. “한국에서 살 곳도 없고, 늙어서 돈을 어디다 쓰갔어. 귀찮아.” 중국 우한(武汉)에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의경을 만난 후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야간 휘처잉워(딱딱한 침대 기차)를 타고 10시간 만에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새벽 뿌연 안개에 싸인 역에서 배삼엽이 사는 톈단(天坛) 호텔까지 택시를 탔다. 2001년 피해자의 집을 방문하면서 전화번호만 받아 두었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의 위치를 설명해 주었더니, 그는 양딸을 마중 보낸다 했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만날 수 없었다. 한참을 헤매던 중 예전에 보았던 톈단 호텔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앞에 다다랐을 때는 그의 딸이 나를 먼저 알아보았다. 첫 만남이었지만, 나의 옷차림과 큰 가방을 끄는 행색으로 나를 알아본 듯했다. 딸을 따라 회이퉁(골목길)에 들어서니 저 멀리 지팡이를 한 배삼엽이 눈에 들어왔다. 밤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길을 찾아 헤매느라 나의 모습이 초췌해 보였는지, 그는 먼저 나를 조선족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냉면 두 그릇과 만두를 시켰다. 한 그릇이면 족하다고 했지만, 남자라면 이 정도는 먹어야 한다며 주문을 했다. 피해자를 만나면서 항상 어떡하면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처음 ‘나눔의 집’에서 피해자들을 대면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가야 할지 망설여지기도 했다. 지금은 피해자들과 같이 밥을 먹고, 며칠을 지내다 보면 마음의 공감대가 형성된다. 우리말 중에는 ‘식구’라는 말이 있듯이 혈연 관계인 가족만큼 한솥밥 먹는 것을 중요시했다. 그래서인지 피해자가 주는 것들을 사양 않고 다 먹다 보면, 그것으로 마음의 문이 열리는 듯하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5층짜리 아파트 복도는 불이 들어오지 않아 안쪽에 자리한 그의 집까지는 벽을 더듬으며 들어섰다. 20㎡ 넓이의 거실 겸 침실로 쓰는 방안에는 침대, 소파, TV 등이 2년 전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그의 머리카락은 더 허예졌고, 등은 더 구부정해져 오랜 시간 바로 앉아 있기 힘들어 보였다. 1985년도부터 앓아온 백내장은 더 방치하면 실명까지 갈 수 있다 하여 수술 날짜를 잡았으나, 내가 온다는 소식에 며칠 늦추었다고 하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중국의 의료비가 얼마나 드는지 알 수 없지만, 다행히도 그가 젊었을 때 일하던 박스를 만드는 공작소에서 수술비 상당 부분을 부담해주기로 해 천만다행이었다. “‘아! 이거 속았구나’ 가슴이 철렁했어….” 배삼엽이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하동이다. 그가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3살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이 무렵 계급장이 없는 군복을 입은 사람이 찾아와 ‘만주에 가면 여러 일 중 골라서 할 수 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며 여자들을 모집하고 다녔다. 그는 엄마를 잃은 슬픔에 모집책을 따라 나설 결심을 했다. 여기에 오빠의 설득도 한몫했다. 오빠는 모집책에게 4년간 일 하는 조건으로 선금 400원을 받고 그를 중국으로 보냈다. 부산에서 경성까지 기차로, 인천에서 톈진(天津)까지 배로, 톈진에서 내몽고 바오터우(包头)까지 갔다. 역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아사히칸(朝日)’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유곽에서 화려한 화장과 기모노 차림의 여자들을 보자마자 ‘아! 이거 속았구나’ 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2층 5번 방에 배정받은 배삼엽은 그곳에서 게이코(ゲイコ)로 통했고 군인들은 ‘조쎈삐(朝鮮屄)’라 불렀다. 그가 어리고 처녀라는 이유로 위안소 주인과 일본군 장교 사이에는 하룻밤에 군표 100원이라는 거금이 오갔다. 피해자는 ‘일주일 동안 거기서 피가 나고 칼로 베는 듯 아파서 걷지도 못했다’라고 증언했다. 유곽 형태의 위안소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는지 여자 두 명이 아편을 먹고 자살할 정도였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3년이 될 즈음 그는 밥 한 술만 먹어도 피를 토하는 병에 걸렸다. 군의관은 여기서는 병명을 알 수 없고, 고칠 수도 없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라고만 했다. 위안소 주인 또한 차비를 주며 그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미련 없는 조선을 등지고 다시 중국으로 배삼엽은 부산에 도착해 이모의 집에서 한약 3첩을 먹으며 몸조리를 하고서야 병이 나았다. 이모는 조카 귀남(배삼엽의 아명)이가 돈을 벌러 싱가포르에 갔다고 말하는 순간 그곳에 무엇을 하러 갔는지 눈치챘지만, 배삽엽은 차마 이모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이야기할 수 없었다.[1] 조선에 머무는 동안 친척 집을 오가며 지냈지만, 부모님도 안 계시고 친척에게 신세 지기 싫어 그는 홀로 중국으로 향했다. 일본군을 상대하는 위안소로는 가지 않고 톈진에서 미군을 상대로 춤을 추고 돈을 받는 클럽에서 일하며 살았다. 그리고 해방을 맞으면서 베이징으로 이주해 살게 되었다. 타국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순탄할 리가 없었다. 고달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아편을 먹기도 하고 수면제 200알을 한꺼번에 먹고 자살을 여러 번 기도하기도 했다. 배삼엽은 친자식이 없어 36살 때 조선족 여아를 입양해 키웠다. 딸은 같은 아파트 3층에 살면서 그를 보살피고 있었지만, 사위가 마카오에 일자리를 구해 1년의 대부분을 홀로 지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는 베이징에 살면서도 조선말을 잊지 않기 위해 일제 강점기 시절 유행하던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등을 부엌일 할 때마다 혼자 흥얼거리며 눈물 흘린 세월이 반이라 했다. 1999년까지만 해도 그는 북조선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국적을 중국으로 바꾸고 한 달간 고향 방문을 하며 조카를 만나며 다녔다. 그는 한국에서 ‘위안부’피해자로 등록을 하려 했지만, 이미 호적에 사망신고가 되어 있고, 1년 이상 걸리는 국적 회복과정이 쉽지 않아 그냥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에도 국적 회복의 기회가 있었지만, 더는 조선에 미련이 없다며 포기했다. 2011년에 돌아가셨지만, 2014년 그의 딸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싶어 그가 살던 집으로 찾아갔다. 문이 잠겨 있었고 창 사이로 방안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그 앞을 서성이는 나를 발견한 한 청년이 아는 체를 했다. 아파트 앞 노상에서 자전거를 수리하는 이였는데, 몇 년이 지났음에도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건넨 것이었다. 그를 통해 피해자가 베이징 근교 무덤에 안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여나 마카오에서 사업을 하는 딸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안부를 묻고 연락을 부탁한다는 편지를 문틈으로 남기고 돌아왔지만, 지금까지 연락은 오지 않았다. [사진 설명] 중국 위안소에서의 삶, 그리고 남겨진 이후 삶이 평탄하지 않았다. 배삼엽은 1960년대 중국 혁명가 저우언라이(周恩来)를 본 후 직장을 구하는 등 그가 자신의 삶을 바꾸어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진을 방에 걸어 두었고 그에게는 그것이 사진 이상의 의지와 힘이 되었다. [사진 설명] 그가 유일하게 연락했던 조선인은 차로 30-40분 걸리는 곳에 사는 피해자 이귀녀이다. 서로 몸이 불편해 오가며 만날 수 없어 전화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안부를 물었다. 생전, 그의 전화 번호마저 기억에 없고 눈마저 보이지 않아 그전만큼 연락이 수월하지 않았다. 각주 ^ 가족들은 귀남이 싱가포르로 동원됐다고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는 만주와 인도네시아로 동원됐다. 기사 게재일: 202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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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공창이라는 말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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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국가와 공창제 ‘위안부’와 공창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이 말처럼 쓰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의 견해 및 지식에 따라 의미와 뉘앙스가 달라지는 말도 드물 것이다. 일본에는 ‘위안부’제도와 공창제를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나누어 보려는 견해가 있다. 즉 시기가 전시냐 평시냐, 적용된 법이 전시법이냐 시민법이냐, 규칙에 폐창규정이 있었나 없었나 등이다. 그러나 과연 식민지 조선에서 이런 이분법이 유효했을까. 식민지 조선은 평시에 시민법을 보장했을까? 조선인 창기는 폐창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을까? 우선 식민지 시기의 조선총독은 육해군 대장이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총독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으며, 3∙1운동 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경찰력은 증강되고 동화정책은 강화됐다. 해방 직후 대부분의 국민들은 공창제를 ‘일제가 이 땅에 남긴 해독’으로, 즉 일제 식민지지배의 상징이라고 생각해서 이를 폐지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일본이 조선에 심어 놓은 공창제는 과연 무엇일까. 이는 정해진 성매매 구역 내에서 업자나 여성들을 관리할 수 있게 한 제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들의 성병 검사를 철저하게 한 것이었다. 그 이전, 즉 에도막부[1] 시대에도 유곽이나 그와 비슷한 장소에서 성매매는 다양하게 존재하였으나 공권력을 동원하여 성병 검사를 조직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유곽에 있던 여성들은 외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전차금에 얽매여 성노예 상태와 같았다. 서구에서는 이런 여성들을 흑인 노예에 빗대어 ‘백노예’라고 했으나 일본 폐창운동가들은 백노예를 추업부(醜業婦)[2]라고 번역했다. 공창제는 국가가 병사나 빈민 노동자를 다스리기 위해 근대에 재편성한 것으로, 특히 군대의 병사를 겨냥한 제도였다. 일본은 유럽과 달리 자본주의보다 군사주의가 앞선 후진 제국주의였기에 근대 군대를 저렴하게 유지하기 위해 공창제를 필요로 했다. 또 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방 유력자들은 앞다투어 군대를 유치하려고 했다. 일본 정부에 고용된 프랑스 법학자 보아소나드(Boissonade)는 국가가 성을 관리하는 주체라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라고 조언했다. 그 결과 공창제를 관리하는 것이 지방 관공청이나 (민간)업자라는 오해를 하게 만든 것이다. 일본은 근대 초기 북해도를 개척하는 데 많은 죄수를 동원했고, 이를 위한 회유책으로 공창제가 이용되었다. 이때 성매매 업자와 창기에게 징수한 세액은 지방세의 80%에 달했다는 놀라운 보고가 남아 있다. 북해도에서 봤듯이 일본이 부국강병(富国強兵)의 나라가 되기 위해 공창제란 국가 성관리책이 큰 역할을 했는데 조선을 침략하는 데도 공창제는 교묘하게 활용된 것이다. 도쿄의 유명 유곽이 부산에 상륙하다 『부산고지도』(부산광역시, 2008)를 보면 1881년에는 이미 부산 거류지에 9채의 기루(妓楼∙성매매를 할 수 있는 요리집)가 존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가운데 나카고메루(中米楼)의 옥호가 용두산 산마루에 보인다. 나카고메루는 도쿄 요시와라(대표적인 유곽 지대)에서 어느 정도 이름 난 성매매 업소인데 왜 가까운 규슈지방이 아니라 머나먼 도쿄에서 부산까지 가는 모험을 하게 되었을까? 구로다 키요타카(黒田清隆)는 북해도 개척사 장관으로서 많은 병사를 관리해왔는데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전권변리대신(全権弁理大臣)으로 조선에 파견된 사람이며 조선 침략을 주장한 강경파이다. 구로다는 단골 손님으로 나카고메에 자주 출입했고, 나카고메 주인과 구로다 사이에는 조선에 관한 정보나 청탁이 오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나카고메 주인 아카구라 도키치(赤倉藤吉)는 3년 기한의 여권을 얻어서 여성 10명을 데리고 조선에 건너갔다. 일본 성매매업자가 낯선 부산에 상륙하기까지 일본 정부와의 은밀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의심되며, 결코 개인적인 기업가 정신으로 조선행이라는 모험을 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1876년 개항 후, 부산과 원산에서 일본인 거류지가 설치됐고, 1881년에 일본 영사관은 「예창기영업규칙」을 만들어 거류지에 있는 일본여성에게 세금 징수와 성병 검사를 하게 했다. 전쟁과 점령, 그리고 특별이란 수식어로 감추어진 공창제 그런데 1883년에 인천 개항 때엔 사정이 달랐다. 부산, 원산과 달리 외국인 거류지에 구미열강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일본이 거류지에서 성매매를 공공연하게 인정한다는 것이 서구열강에 알려지면 근대 문명국가로서의 체면을 구기게 될뿐더러 장차 서구와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데도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여 일본 정부는 인천에선 성매매를 금지하게 했다. 이와 같은 갑작스러운 변경에 인천 영사관에서는 맹반대를 했다. 그 이유는 관리하에 성병 검사를 해야 밀매춘(몰래 성매매하는 것)을 방지하고 성병 전염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사관과 일본 외무성과의 논쟁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고, 타협안으로 예기 영업을 1892년에 인천, 1894년에 부산, 1895년에 서울에서 허가하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청일전쟁, 또 하나의 조일전쟁이 있었다. 청일전쟁은 동학농민봉기를 구실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던 것이며, 이에 저항하는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제노사이드’[3]였다. 일본인이 그린 전쟁홍보 그림에는 청나라 병사들이 약탈, 성폭력을 저지른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실은 조선 여성들은 양쪽 나라 병사들에게 피해를 입었다. 제1군 사령관을 맡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形有朋)가 남긴 문서(일본군 병사(軍夫)가 민간인 가옥 방화, 재산 약탈, 성폭력을 저질른 것을 인정하고 경고함)를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에서 일본의 입지가 호전되리라 기대했고, 청일전쟁 전후 조선에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증가했다. 그들을 한국에 정착시키기 위해 이용한 것이 예기영업 허가였다. 청일전쟁은 따지고 보면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막으려고 일어난 전쟁이니 러일전쟁 발발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막으려던 영국은 1902년에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적극 일본을 지원했다. 이래서 조선과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싼 제국주의전쟁을 일본이 승리하게 된다. 러일전쟁 전후 조선에 건너간 일본인 숫자는 더 늘었으며 그에 따라 성매매도 활발해졌다. 그런 상황 속에서 특별요리점, 특별예기란 신조어로 교묘하게 감추어진 공창제가 등장한다.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놓고 공창제를 실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위의 광고에는 공창제를 나타내는 대좌부(貸座敷)[4]란 말이 쓰여 있다. 이것은 1902년에 가즈키 겐타로(香月源太郎)가 낸 『한국안내』에 실린 광고인데, 조선여성이 접대하는 유곽의 실체를 요리점으로 눈가림했던 것이다. 광고로 부산에서는 이 무렵에 이미 일본 성매매업자들이 조선여성을 싼 값으로 착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러일전쟁 성폭력과 성병문제[5] 러일전쟁 때의 『전역통계戦役統計』 「육군군인의 형법 기타 일반법령위반처분 죄명내역」의 「강간∙미수(未遂)∙방조(幇助)」와 「기타 신체에 대한 죄」를 보면 검찰처분은 50건, 군법회의 처단은 31건으로 되어있다. 이런 숫자 뒤에 더 많은 성범죄가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한국주차부대(韓国駐箚部隊)도 화류병(성병) 단속에 관한 지시를 러일전쟁 때 내리고 있다. 즉 「병원(兵員)의 단속을 엄격하게 안 하면 화류병 병독이 군대 안에 퍼지게 되고, 병력의 감소와 소모를 가져올 우려가 적지 않아서 각 간부들은 한층 단속을 강화하여 화류병 환자의 증발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중에 안동현(중국 단동)에 시찰하러 간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만주군 총참모장)는 군대가 유곽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축소 명령을 내렸다는 일본 외무성 경찰사의 기록이 있다. 이미지 출처: 『남만주의 상업(南満洲ニ於ケル商業)』 (킨코도서적(金港堂書籍), 1907) 고다마가 축소하라던 안동현 유곽은 일본 병참사령부가 1904년 연말에 개설한 유곽인데 이 때에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던 시기다. 사령부는 경찰상, 위생상 단속을 하는데 효율적이며 여성에 대한 성병 검사도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병에 걸린 여성은 군대가 마련한 진료소에서 바로 입원시켜서 치료를 받게 했다. 위안소를 발명한 일본 군대 군의관 후지타 츠구아키(藤田嗣章)의 회고록[6]을 보면 「철령(鉄嶺)의 병참부는 시험적으로 지역을 정하여 헌병의 단속, 감시하에서 사창(私娼)을 공인하고 매일 오전에 군의관이 성병검사를 실시했다. 합격한 여자들에게는 건강증을 발급하고 싼 값으로 병사에게 접객(接客)할 수 있게 했다. 나무 울타리가 둘러싸인 시설 입구에 헌병이 지키고 출입하는 인원을 한 사람씩 점검했다. 여성의 방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제한돼 있었다. 병사들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광경은 마치 극장 앞의 관객을 보는 것과 같았다. 군의관들이 고안한 이 시설은 성교만 하니 시간 낭비도 없었다. 경찰 감독 하에서 여자들이 건강증을 휴대하는 방법도 간이하면서 안전하므로 (전쟁 시의) 시세에 맞는 제도였다」고 군의관은 ’위안소 개설’을 회상하고 있다. 위에 소개한 사진과 같이 회상기 내용은 위안소 앞에 몰려드는 병사들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군의관들은 이 경험을 30년 후에 일어난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되살렸다. 같은 회상기에 나카무라 로쿠야(中村緑野)[7]는 법고문(法庫門)[8]에서의 경험을 후지타처럼 기록하고 있다. 「군정서(軍政署)는 드디어 임시매소부제(臨時売笑婦制)를 허가하게 되어서 상인을 시켜서 비교적 신원이 확실한 만주의 작부를 데리고 와서 유흥을 개업하게 했다. (중략) 막상 이것이 공개되니 여성의 인원수에 한계가 있어서 많은 병졸의 수요에 응하기 어려웠다. 특히 한꺼번에 몰려드는 병사를 정리하기 위해 먼저 그 지역의 건물 내부에 벽으로 막은 여러 방을 나누어 방방마다 따로 출입하게 만들었다. (중략) 여러 부대에 홍보하고 일정을 정하여 인원을 제한, 유흥비는 계급마다 차이를 둔 티켓으로 지불하게 했다. 막상 개업을 하니 무장하지 않은 병사들이 연일 밀려와서 성황이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광경은 가소롭다고 할까 전장터가 아니면 차마 못 볼 이상한 것이었다.」 유흥시설을 만든 건 군의관 자신인데 이 문장에서는 몰려드는 병사에 대한 경멸이 느껴진다. 여기서 위안소라는 명칭은 쓰지 않았으나 1930년대 이후에 일본군이 개설한 위안소의 원형을 찾을 수가 있다. 그러나 군의관에 따라 사창이라 하기도 하고 매소부라고도 했으나 아래 그림은 공창이라고 했다. 이 그림은 일본인 우키요에(浮世絵) 화가가 군인이 찍은 사진을 모사해서 『풍속화보風俗画報』에 게재한 것인데 처마 밑에 「법고문의 공창」이라는 글이 보인다. 위안소 시설로 쓰인 건물은 관제묘(関帝廟), 즉 중국인들에게는 민간신앙의 장소이다. 이런 데서 중국 여성이 일본 병사를 성접대하게 한 광경을 중국인들은 어떤 심정으로 보았을까. 러일전쟁에 동원된 어느 병사가 봉천(奉天)에서 자기 고향에 보낸 편지 속에 「(이런 시설에)들어가는데 상등은 3엔, 중등은 2엔, 하등은 1엔인데 우리 같은 계급은 들어가고 싶어도 받는 수당이 적어서 못 들어간다」[9]는 구절이 있다. 일본군은 위안소 개설의 이유를 병사의 성폭력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오히려 위안소 개설이 성폭력을 유발하는 원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러일전쟁이 종결된 후 이런 시설에 모집된 여성들은 어떻게 됐을까? 위안소는 전후 점령지에 들어온 민간인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업소가 되고, 여성들의 상대는 군인에서 민간인으로 바뀌었다. 즉 위안소가 성매매를 확대시킨 셈이다. 군의관들은 같은 여성을 가리켜 사창, 매소부(매춘부), 공창이라고 불렀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상황에 맞게 또 다른 명칭으로, 그들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불렀을 것이다. 나가며 일본은 제국주의의 초석을 형성하기 위해 군사주의를 내세워 조선과 만주를 침략했으며 병사를 다스리고 회유하기 위해 근대 공창제를 북해도와 조선, 만주에서 활용했다. 그러나 공창제의 주체가 일본제국이란 것이 드러나보이지 않도록 제도와 여성들의 명칭을 수시로 바꾸고 나중에는 업자나 여성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글을 아는 일본여성들마저 끊임없이 바뀌는 명칭에 속을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위안부’ 제도가 1930년대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에 창설되고 확대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역사는 러일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조선, 만주, 중국의 여성들은 오래전부터 군국주의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 군대가 점령한 후 군정서(軍政署)에서 민정서(民政署)로 바뀌고 위안소는 일반 유흥소나 성매매업소로 남게 된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전쟁, 그리고 위안소가 그 주변의 다양한 성매매를 낳은 모태가 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일본제국은 매춘(買春), 즉, 성을 산 것이 아니라 매춘(売春), 즉, 성을 판 것이다. 각주 ^ (편집자 주)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이 다이쇼군에 올라 에도에 개설한 중앙 집권적 무가 정권 ^ (편집자 주) 더러운 직업에 종사하는 여자 ^ (편집자 주) Genocide. 국민, 인종, 민족, 종교 따위의 차이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 ^ 1872년 예창기해방령 공포 이후 업자는 장소(座敷=다타미 방)만 빌려주는 형식으로 성매매제도의 책임을 창기에게 떠넘겼다. ^ 차경애, 「러일전쟁 당시의 전쟁견문록을 통해서 본 전쟁지역 민중의 삶」, 『中國近現代史硏究』제48집, 2010년. ^ 「戦役の回顧と戦後の経営」(전역의 회고와 전후의 경영) 陸軍軍医団編, 『日露戦役戦陣余話』 ^ 「병참근무의 추억(兵站勤務の思ひ出)」( 陸軍軍医団 編,『日露戦役戦陣余話』, 陸軍軍医団、1934年)/ 육군군의단편 / 일러전역전진여화 / 육군군의단 ^ (편집자 주) 만주의 철령 북서쪽에 있는 도시 ^ 大江志乃夫『兵士たちの日露戦争―500通の軍事郵便から』/ 오오에시오노 / 병사들의 일러전쟁 - 500통의 군사우편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