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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그 삶에 대한 축복의 이야기 - 일인극 〈캐러멜〉 제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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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극 〈캐러멜〉은 2018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간 작품이다. 처음에는 2인극으로 시작해 그해 4월 23일 도쿄에서 열린 시민집회 ‘지금 일본군성노예문제를 마주한다 - 피해자의 목소리X아트(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 성차별철폐부회 주최)’에서 첫 공연을 올렸다. 그 후 우리 극단은 이 작품을 일인극으로 재편하여 2019년부터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본격적으로 순회공연을 시작했고, 일본 각 지방을 비롯해 한국에서는 서울·부산·광주·청주·제주도에서 공연해왔다. 현재 진행중인 일인극 〈캐러멜〉은 벌써 25번째를 맞는다. 이 작품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에서 살아남아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 동포 1세의 존엄을 그린 일인극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창조한 픽션이지만, 할머니의 혁명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관객들과 함께하는 ‘귀향’ 이야기로 삼고자 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시는 가운데, 이 억울한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짓밟힌 존엄에 어떻게 빛을 비출 수 있을지, 무엇에 희망을 갖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당시 강제로 ‘위안부’가 된 조선 소녀들은 10만~20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그 가운데 정부에 등록하신 분은 고작 240명이라 한다. 피해자는 그 수를 여전히 헤아릴 수 없으며, 그중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서 숨죽여 살아온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도 남몰래 울고 계시던 분이 존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아프고 외롭고 억울하셨을까. 얼마나 고향으로 가고 싶으셨을까. 그분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셨을까. 그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질문들을 기반으로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서는 과거를 숨긴 채 세상 한 귀퉁이에서 살아온 할머니의 갈등을 비롯해 할머니와 더불어 살아온 재일 동포들의 유머와 인정을 그려내고자 했다. 동네 사람들은 삶의 힘이 넘쳐났고, 할머니와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 특히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조선학교 고등학생과 할머니의 만남에는 편견과 차별에 굴하지 않고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다짐과 희망을 담았다. 그리고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의 구석 그늘에서 살아가시던 할머니를 세상 가운데에 두고 빛을 비춰드리고자 했다. 연극이라는 행위로 웃음과 눈물이 넘치는 무대에서 할머니들의 통한을 관객들과 함께 풀어드리고 싶었다. 그러한 고민 끝에 작품을 감히 희극으로 만들게 되었다. 오사카조선고급학교 3학년인 강령미의 등굣길에는 김숙기 할머니와 홍옥순 할머니의 집이 있다. 두 할머니는 전쟁 때 캐러멜 하나에 속아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당했다. 하지만 그 과거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옥순은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령미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자 옥순은 숨을 거둬버린다. 남은 숙기는 옥순이 타던 자전거를 상여 삼아 장례식을 치른다. 그 곁에서 령미가 할머니들을 도와준다. 숙기는 옥순의 마지막 길인 만큼 원하는 대로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죽은 옥순이 어린 시절에 입었던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선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간다고 한다. “그래, 이대로는 죽을 수가 없어. 우리 그때처럼 웃으면서 선물을 갖고 돌아가자.” 살아서 가지 못했던 고향을 죽어서야 가게 되는 것이다. 배울 기회 한번 없이 애오라지 과거를 숨기며 악착같이 살아온 옥순은 자신의 죽음을 직면하고, 애써 외면해왔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잔혹한 고통에 시달리며 고독함을 견뎌온 할머니에게 삶의 존엄이란 무엇이었는지 곱씹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큰 테마다. 령미는 학교 선배에게 얻은 교복을 할머니들에게 드린다. 령미가 다니는 조선학교 교복이 마침 옥순과 숙기가 어린 시절에 입었던 치마저고리 옷차림과 비슷하게 보여서 그걸 입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령미가 옥순에게는 아주 눈부시게 비쳤던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일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옛날 조선에서는 여자가 자전거를 타면 상스럽다고 해서 남자들만 자전거를 탈 수 있었고, 할머니들도 그런 줄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가 묻은 오랜 관념을 깨고 싶었다. 매일같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가는 맑은 령미의 모습을 보면서 힘겨운 삶을 버텨낸 두 할머니의 마음이 소녀처럼 신나게 뛰었다. 옥순이 비로소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날 얼마나 시원했을까. 숙기가 상여로 삼은 옥순의 자전거에는 수많은 흰 꽃과 함께 ‘실버 드림’이라고 쓰인 깃발이 휘날렸다. 둘은 함께 큰 소리로 “우리는 여기 살아 있다”고 외친다. 령미는 그것이 할머니의 레볼루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도 따라가겠다고 외친다. 그 외침이 바로 무대에서 전하고자 하는 할머니의 삶에 대한 축복이다. 한국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관한 연극이 여러 작품 있다. 그 가운데서도 내 작품은 장례식을 치르며 인간의 존엄과 삶에 대한 축복을 곱씹게 한다. 피해자의 아픈 혼을 보러 와주시는 관객들과 함께 위로하고 한을 풀어드리려는 뜻을 담았다. 매번 공연장에 모여주시는 많은 분들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나비를 날리고 그 역사를 기억하면서 다음 세대에 바통을 이어 가고자 했다. 앞으로 언젠가, 어딘가에서 봐주실 분들이 함께 웃고 울면서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외롭게 살다 돌아가신 분들의 한을 같이 풀어주셨으면 한다. 나는 그저 영혼들의 아픔과 기쁨을 안고 춤을 춘다. 극단 돌은 2004년에 창립해 일본 시가현을 거점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전국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작품은 거의 일인극이고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재일 동포의 100년 역사를 그린 〈자이니치 바이탈 체크〉가 있다. 이번에 〈캐러멜〉을 만들게 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연극 활동을 한 지 이제 거의 30년 가까이 되지만, 연극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는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언젠가는 반드시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제작 제안을 받았을 때 적당한 시기에 나에게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작품은 너무 어려도, 너무 늙어도 못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 작품은 아주 어려운 작품이다. 그러나 그만큼 깨닫는 것도 많고 공부가 되는 것도 많았다. 순회공연을 진행하면서 문제가 생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작품과 함께 성장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하기 전부터 언젠가 사람들은 나를 희극 배우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희극 배우인 것이 참 좋았다. 아픔이나 슬픔을 무대에 올릴 때 그만큼 웃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극단 활동이 앞으로 계속 새로운 만남을 만들고, 서로를 편하게 만드는 맛있는 밥이 되면 좋겠다. 살아 있는 사람이 맛있게 밥 먹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 위로가 된다며 할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웃으시는 듯하다. 나에게 들리는 말 “밥 먹었나.”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들이 자주 하시던 인사말이었다. 조국에서도 아마 그러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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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이 일으킨 성폭력(1) - 마르디옘, 스하나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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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한 적이 두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위안소에서 처음으로 일본군에게 능욕을 당했을 때고, 두 번째는 위안소에서 있었던 치욕스러운 과거를 당신에게 이야기한 오늘입니다. 내가 쓴 『인도네시아의 ‘위안부’』(아카시 서점, 1997)라는 책의 머리말에 위와 같은 내용이 있다. 어떤 피해자와 대화를 마치고 작별 인사를 할 때, 그가 나에게 한 말이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너무 긴장해서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진심을 다해 답했다. “당신이 위안부가 된 것은 결코 당신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에요. 일본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녀는 ‘일본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란 말을 들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렇게 말해준 것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녀는 내 손을 꼭 쥐며 말하고는 돌아갔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은 전쟁 지역과 점령지에 위안소를 설치했고 위안소 이외에서도 다양한 성폭력을 자행했다. 인도네시아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17세기 초반부터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한 네덜란드와의 전투에서 단기간에 승전한 일본이 인도네시아에서 군정을 펼친 것은 1942년 3월부터이다. 마쓰우라 타카노리(松浦敬紀, 일본의 교육자-역자)가 엮은 『영원한 해군』(문화방송개발센터, 1978)에 수록된 「23살에 3천 명의 총지휘관」에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전 총리(임기 1982년~1987년)가 주계 장교(군의 행정·회계를 담당하는 장교)로서 인도네시아에 부임하여 위안소를 설치한 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3살에 3천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부대를 맡았다. 머지않아 원주민 여성을 덮치는 자와 노름에 빠지는 자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위해서 나는 고심하여 위안소를 설치해준 적도 있다.” 일본군의 위안소 설치와 운영을 감독한 것은 주계부(회계부)다. 1993년 4월 인도네시아에서는 사회부 장관이 ‘일본 군정 하에서 일본군에게 입은 피해 실태를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법률 상담 등의 지원 활동을 하는 법률구조단(LBH, Lembaga Bantuan Hukum)은 이 성명을 환영하며 1993년 9월까지 피해자 등록 작업을 실시하였고 17,245명의 ‘로무샤(강제 징용 노동자)’와 420명의 일본군‘위안부’를 포함한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자 등록을 마쳤다. 이 중 특히 열정적으로 나선 법률구조단 욕야카르타 지부에 등록된 일본군성폭력 피해자는 약 300명에 달했다. 1995년 8월, 헤이호(Heiho, 兵補) 협회에서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의 신고를 받았고 22,234명의 피해자가 등록되었다. 헤이호 협회는 일본 정부가 지급하지 않은 임금 청구를 목적으로 조직되었고 회원은 전(前) 헤이호와 그 유족까지 7만 2천명이며 인도네시아 각지에 134개 지부를 두고 있다. 나는 법률구조단과 헤이호 협회가 조사를 진행한 직후인 1995년~1996년에 두 조직의 도움을 받아 인도네시아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마르디옘 씨 이야기 마르디옘 씨는 법률구조단 욕야카르타 지부에 최초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사실을 신고해 등록된 사람이고, 이후 반자르마신 교외의 뜰라왕(Telawang) 위안소에 함께 연행되었던 여성들을 설득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마르디옘 씨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도 그가 10살 때 타계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가정부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가수나 연예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한 번은 음악단 공연에 출연한 적도 있다. 일본군이 칼리만탄(보르네오 섬) 반자르마신을 침공한 직후인 1942년 2월에서 5월까지 반자르마신의 초대 시장을 지낸 쇼겐지 칸고(正源寺寛吾)가 인솔하는 무리가 욕야카르타 인근에서 48명의 어린 여성을 모집했다. 당시 막 13살이 된 마르디옘도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가수인 렌지 씨로부터 ‘보르네오에 가서 함께 연기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수라바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그녀는 다른 소녀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수라바야에서 2주간 기다렸다가 이틀 동안 배를 타고 이동한 끝에 반자르마신에 도착했다. 함께 출발한 48명 중 절반은 극장이나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고 나머지 24명은 뜰라왕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높은 담장이 둘러진 요자형(凹字型) 건물의 번호가 매겨진 작은 방에 한 명씩 들여보냈으며 각자에겐 일본식 이름을 붙였다. 마르디옘의 방은 11번째 방이었고 그녀의 일본식 이름은 모모예였다. 마르디옘이 끌려간 곳은 일본군의 규정에 따라 일본인 치카다(チカダ)가 인도네시아인 남성을 고용하여 운영하는 위안소였다. 그녀는 위안소에 들어간 첫날부터 6명의 병사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날의 선혈과 얼얼한 아픔, 몸에 빠끔히 뚫린 구멍은 언제까지고 잊히지 않았다. 아직 초경도 시작하지 않은 몸과 마음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군인의 ‘위안’을 강요당한 것이다. 끌려간 여성들은 정오부터 오후 5시까지는 군인을, 그 이후부터 밤 12시까지는 군속 대우 관리나 전화국 직원 등을 상대했고 위안소 이용 요금은 군인은 1시간에 2엔 50전, 군속은 3엔 50전, 숙박은 12엔 50전이었다. 이용 접수를 받는 벽에는 방 번호와 ‘위안부’들의 이름을 적은 패가 일렬로 걸려 있었고 이용자는 그것을 보며 자신이 이용할 방을 지정했다. 요금과 맞바꾼 표와 위생 콘돔을 건네받은 이용자가 방에 들어가면 여성들은 이용자로부터 표를 받았다. 여성들은 하루가 끝나면 표의 장수를 위안소 관리인에게 확인받았다. 하지만 마르디옘은 치카다로부터 보수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루에 식사는 2번이었고 첫 반년 정도는 제대로 된 식사가 주어졌지만, 점점 부실해졌으며 양도 적어졌다. 치카다는 마르디옘을 자주 때렸다. 오후 5시가 되면 위안소의 이용자가 군인에서 사복 이용자로 바뀐다. 마르디옘은 식사도 하고 목욕도 하고 싶었지만, 손님이 불렀다. 바로 가지 못하면 치카다에게 얻어맞았다. 토요일에는 군의관이 찾아와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병 검사를 했고 매일 아침 8시에는 위생병이 검사를 했다. 정오부터 밤 12시까지 몸을 혹사당하고 뒷정리를 한 후에 취침한다. 이용객의 숙박이 있을 때는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마르디옘은 간혹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검사에 지각하는 날에도 치카다에게 구타를 당했다. 휴일은 한 달에 한 번이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24명 중 5명이 병에 걸려 위안소를 나가게 되었다. 마르디옘이 14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말랐던 마르디옘의 몸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치카다가 눈치채고 검진을 받게 했다. 임신 5개월이었다. 낙태약을 일주일간 복용했으나 효과가 없어 중절 수술을 받게 되었다. 약도 수술 기구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인 여성 의사가 마취약도 사용하지 않고 태아를 긁어 떼어냈다. 머리꼭지까지 달하는 지독한 고통이었다. 수술로 떼어낸 태아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남자 아이였다. 마르디옘 씨는 그 아이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의사에게 간절히 부탁해 마루디야마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땅에 묻었다. 수술 이후 마르디옘 씨에게는 3개월의 휴식이 주어졌지만,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공습으로 인하여 병원에서 위안소로 돌아왔다. 치카다는 건강이 회복되지 않은 마르디옘 씨의 긴 머리채를 휘어잡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때리고, 차고, 의식이 없어질 때까지 폭력을 가했다. 이는 ‘위안부’는 임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른 여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제재였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자 치카다는 마르디옘을 방으로 불러 몸을 만지고 강간했다. 그날부터 모모예로써의 임무가 재개되었다. “11번 방 모모예였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면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계속해서 그때의 끔찍했던 일들이 쳇바퀴처럼 맴돌아요.” 독실한 이슬람교 신도인 마르디옘 씨는 ‘기억의 쳇바퀴’를 ‘악마의 윤회’라고도 표현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14살 때 마취 없이 인공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던 고통 이상으로 내 아이를 죽이고 만 죄의 무거움에 몸이 떨리고 가슴이 아파요.” 그런 마르디옘 씨가 남편의 유족 연금을 받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수많은 수급자들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일본의 매춘부!” 욕설을 퍼부은 것은 텔레비전을 통해 마르디옘 씨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일 것이다. 스하나 씨 이야기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에서 철수한 후 일본군은 반둥 치마히에 있던 광대한 규모의 네덜란드 군 기지를 사용했다. 치마히 심팡 거리에는 ‘8개의 집’이라고 불리는 장교용 주택이 있었다. 일본군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 때의 고급 양식 주택 8채 전부를 위안소로 사용했다. 15살이었던 스하나 씨는 그 중 4번째 집에 일 년 반 동안 갇혔다.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섬은 자바섬이다. 일본군은 자바섬에 남방군의 총 병참 기지를 두고 인적, 물적 자원의 보급 기지로 삼았다. 반둥에는 제16군의 야전 보급을 위한 보급 창고가 있었고 이곳에서 남방군 전체 군수품의 조달, 제조, 보급이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남방군 야전 조병창(造兵廠, 무기, 병기를 만드는 곳-편집자 주)도 있었는데 남방군 전역에서 쓰이는 병기를 수리 및 제조했다. 치마히의 화물 창고는 군수품과 병기를 남방군 전역으로 보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스하나 씨의 부모님은 치마히 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노천 상인이었다. 어느 날, 부모님은 시장에 나가고 집 앞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일본 병사 몇 명이 스하나 씨의 팔을 잡아채더니 억지로 자동차에 태웠다. 병사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다. 스하나 씨는 이들이 자신을 죽일까봐 불안했다. 스하나 씨가 끌려간 곳은 집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떨어진 심팡 거리의 번듯한 건물이었다. 스하나 씨가 들어간 방에는 이미 어린 여성들이 많이 끌려와 있었다. 그곳에는 세 명의 중국인이 있었다. 여성이 요리사, 두 명의 남성이 그 밖의 잡무를 맡았고 매주 토요일에 군인이 와서 이 세 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헌병도 순찰하러 왔다. 스하나 씨가 끌려간 위안소에는 방이 세 개 있었고 각 방에는 침대가 3개씩 놓여있었다. 중국인들이 호명하면 여성들은 그 방에 들어가야 했다. 커튼조차도 치지 않은 3개의 침대에서 어린 여성들은 일본인 병사들에게 강간당했다. 스하나 씨는 다른 이들이 자신과 똑같이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워서 질끈 눈을 감고 있었다. 스하나 씨는 끝까지 병사들에게 저항했다. 그때마다 매를 맞았다. 스하나 씨는 어느 날 세 명의 장교에게 교대로 호출되어 마중을 나온 차를 타고 장교 숙소로 향했다. 위안소에서 머무르던 스하나 씨는 일본군 주둔지에서 벗어나 강을 따라 있는 가리담 거리에 있던 네덜란드 군 장교용 주택으로 옮겨졌다. ‘8개의 집’과 비교하면 한 채당 대지 면적은 좁았지만, 주택 수는 훨씬 많았다. 그 곳에는 콘돔도 절대 쓰지 않고 무리한 요구를 계속하는 이케다라는 장교가 있었다. 그는 스하나 씨가 주저하면 얼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때렸다. 이케다가 스하나 씨의 자궁에 상처를 입힌 것이 원인이 되어 자궁 출혈도 시작되었다. 비정상적인 양의 출혈이 있었는데도 잠깐 쉴 뿐 치료도 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쓸모가 없으니 그만 돌아가.” 중국인이 그렇게 말한 것은 출혈이 있은 뒤로부터 꽤 많은 시일이 지난 후였다. 일 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갔지만 스하나 씨가 살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스하나 씨가 없는 사이에 일어난 일을 그녀의 숙모가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는 근처에서 수군거리는 소문을 듣고 스하나 씨를 찾으러 일본군의 주둔지로 향했다. 헌병대에도 갔다. 아버지가 군인에게 간절하게 애원하는 모습을 시장에서 채소를 팔던 상인 몇 명이 목격했다. 몇 번이나 내팽개쳐져도 아버지는 군인에게 매달렸다. 군인은 군용 칼집에서 칼을 꺼내 도망치려는 아버지의 등을 베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버지는 “딸을 돌려달라”고 호소하며 땅 위로 쓰러졌다. 아버지의 시신은 근처 사람들이 집까지 옮겨 주었다. 어머니는 외동딸이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 데다가 남편까지 일본군에게 살해당하는 감당치 못할 큰 충격으로 몸져누웠고 결국 극도로 쇠약해져 병으로 죽고 말았다. 부모님의 죽음, 특히 자신을 찾으러 온 아버지가 ‘8개의 집’ 근처에서 살해당한 사실을 알게 된 스하나 씨는 정신착란에 빠지고 말았다. 자궁 출혈이 계속 이어졌다. 숙모가 차마 감당하지 못하자 숙부가 스하나 씨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상처가 곪아 개복 수술로 자궁을 적출했다. 수술비는 부모님이 남긴 집을 팔아 마련했다. 정신착란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됐으나 정신질환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 자궁에 고름이 생겨 생명의 위기를 겪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그나마 행운이었다고 스하나 씨는 말했다. 스하나 씨와 같은 위안소에 있었던 에미 씨, 에마 씨, 오모 씨의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네 명 모두 일본군이 철수한 후 줄곧 독신으로 생활해 왔다. 결혼 이야기가 있다가도 ‘일본의 여자’였다는 낙인이 상대방에게 전해져 혼담은 깨졌다. 에미 씨의 경우에는 일본이 패전했을 때 위안소에서 해방되어 돌아오니 집은 불타버리고 없었다고 한다. 지병이 있던 아버지가 일본군에게 협박을 당해 에미 씨는 강제로 위안소로 끌려간 건데 ‘일본의 여자’가 되었다며 일본에 협력한 집안으로 내몰려 반일파 인도네시아인들이 불태운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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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수많은 “성찰”의 연속에서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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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ID-19와 온라인 개최 덕분에 얻은 특혜 지난 10월 중순, 아시아연구 가을학기 대학수업의 일환으로 학부생들 20여명과 함께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COVID-19로 국제 컨퍼런스가 온라인으로 개최된 덕분에 학부생들과 함께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최근 연구와 토론을 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영상으로 개최된 덕분에 컨퍼런스가 끝난 지금도 생각날 때 마다 유튜브 영상으로 내용을 확인하고 자료를 공유하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 컨퍼런스에 함께 참가한 학생들은 K-POP을 즐기고 열광하는 학생들이다. 코로나 이전 까지만 해도 석 달에 한번, 심지어는 한달에 한번씩 서울을 오가며 팬 미팅에 참가하는 이들도 있다. 주말에 친구들과 혹은 엄마와 함께 여행삼아 한국을 오가기도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일관계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정치적 상황과는 별개로 “세대 프레임”이 일종의 설득력을 가질 만큼 또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듯했다.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_현장사진 한편 이들은 대학에 와서야 ‘“위안부’”문제를 알게 되는 세대이기도 하다 이구동성으로 다들 공교육을 통해 접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아쉬움의 감정은 회의 둘째 날 세션4의 “전쟁의 성별성과 평화의 문제”에서 던져진 질문에 대한 학생들 나름의 반응이었다. 즉, 당시 “위안부”로 끌려간 같은 또래 여학생이 ‘만약 나였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나와 결부시켜 보면 어떨까?라는 히라이 미쓰코 선생님의 질문에 학생들은 정곡을 찔렀던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걷잡을 수 없고 치가 떨린다고 했다. “관부재판”을 지원한 일본시민들 실은 학생들과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봄학기 대학수업에서 막 출판된 “관부재판”이란 신간도서(花房俊雄・花房恵美子,『関釜裁判が めざしたもの: 韓国の おばあさんさちに寄り添って』,白澤社/現代書館、2021年)를 함께 읽으면서 다양한 관점과 시각에서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5월에 번역서로 출판되었다.[1] (왼쪽부터) 도서 『관부재판』의 일본어판, 한국어판 표지 ⓒ권향숙 제공 이 책의 저자 하나후사 도시오씨와 하나후사 에미코씨는 “전후 책임을 묻는다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이하, 지원하는 모임)”을 조직하여, 관부재판의 원고를 돕고 입법 활동을 펼친 일본인 부부이다. 이 책은 관부재판을 지원하면서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고, 어떻게 소송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1998년 판결 이후 일본 사회에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등 28년간의 활동과 원고들과의 교류를 담은 기록이다. “지원하는 모임”은 2013년에 해산했다. 책에서는 이들이 그동안 할머니들과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고, 할머니들과 함께 투쟁하면서 진정한 화해와 바람직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활동과 원고로 참여한 할머니들의 증언 내용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바람직한 “지원”과 성찰 역사적 사실과 증언에 대한 참고자료와 함께 이 책을 과제도서로 정한 이유는 오직 하나다. ‘위안부’와 ‘정신대 피해자’와 함께 지내온 28년간을 돌이키며 “지원운동을 하면서 느낀 의문과 고통”을 함께 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람직한 ‘지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독자 스스로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저자인 하나후사씨 부부가 할머니들을 존중하고 진정으로 위하는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지원하는 모임”에 참여한 멤버들의 소박하고도 인간적인 면면들이 마지막 장에 고스란히 기술되어 있다. 일본의 보통 시민들이 재판을 지원하고 할머니들의 삶을 내면화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 시민 활동은 차세대들이 이 문제를 바라보고 인식하고 실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책의 행간을 통해 “나의 문제”로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에 이 “성찰”의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는 한 단어와 만났다. 그 단어는 바로 '마이크로어그레션 (microaggression)'이다. 일본어로 잘 옮겨지지 않아 카타카나로 번역서가 출판되어 있다. '아주 작은(micro)'과 '공격(aggression)'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 말 그대로 해석하면 미세하지만 공격적인 차별을 일컫는다.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차별의 대상은 인종, 젠더, 신체 등으로 겹겹이 얽히고설켜 있으며, 이러한 차별은 경계 사이 마이너리티에 대한 머조리티(majority)의 몰이해가 근원이다. 한국어로는 “먼지차별”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전시 성폭력 피해가 역사적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어났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제국의 국가 책임은 물론 “텐노우세이(천황제)”에 대한 제도적 폭력을 쟁점화하고, 진정한 사죄를 받기 위한 목소리를 낮추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자로서의 삶을 “나의 문제”로 생각할 때,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방식의 접근도 필요하지 않을까? “무지했던 나”, “행동하지 않는 나”, “방관하는 나”, 이런 내가 할머니들을 먼지 차별 속으로 몰아가는 구조적 폭력의 가담자이지는 않았을까? 그 어딘가에서 아픈 경험을 털어 놓지 못한 채 숨죽이고 계실 그리고 돌아가신 피해자 할머니들을 기리며 이런 성찰을 해 본다. 새로운 관계를 위한 시작으로 “질문”의 중요성을 새삼스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컨퍼런스 프로그램을 통해 제기된 여러 물음에 대한 사색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의식의 밑바닥을 맴돌고 있다. “너무 몸이 아파서 죽고 싶다. 그렇지만 여자로 태어났으니까 고운 옷도 입어 보고 싶다.” 고인이 되신 피해자 할머님의 역설적인 말씀이 소개되면서 던져진 폐회사 물음과 맺음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온다. 과연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과 말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어떤 자세로 무엇을 들을 것인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위한 시작점.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사람(human being). 부단한 성찰과 실천을 통해 나 자신이 수많은 관계 개선을 만들어나가는 시작이고 싶다 . 함께 읽기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폐회사 (일본군 ‘위안부’문제연구소 소장 정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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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50년만의 판결,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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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2부 - 2000년 여성법정이 시민운동에 끼친 영향 1.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2.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3. [논평] 50년만의 판결,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2018년 4월 21~22일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하 시민평화법정)이 열렸다. 이는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을 롤모델로 하여 가해국의 수도에서 가해국의 책임을 물은 민간법정이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지금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최소한 80여 개가 넘는 마을에서 9,0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평화법정은 그중 베트남 중부 꽝남성의 퐁니·퐁넛 마을 및 하미 마을 사건을 대상으로 각 마을의 생존자 2명을 ‘원고’로, 대한민국을 ‘피고’로 하여 민간인학살 사실과 책임을 다루었다. 두 사건 모두 1968년에 일어났기에, 시민평화법정이 열린 2018년은 학살 50주기가 되는 해였다. 시민평화법정 개최를 위해 수십 개의 시민단체와 995명의 개인이 준비위원으로 모였으며, 행사 양일 동안 시민들은 300여 석의 방청석을 연이어 가득 채웠고, 국내외 취재진들이 몰려들어 행사 내용이 보도, 중계되었다. 김영란 전 대법관, 이석태 변호사, 양현아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구성된 시민평화법정의 재판부는 이틀에 걸친 심리 끝에 피고 대한민국이 원고들에게 공식적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주문. 대한민국은 원고들에게 국가배상법 배상 기준에 따라 배상금을 지급하고 원고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공식 사과하라.” ‘시민법정’의 문제제기 시민평화법정은 실제가 아닌 민간법정이기에 이 법정의 판결에 구속력은 없다. 그러나 시민평화법정과 법정의 판결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를 한국 사회에 다시금 공론화하고, 앞으로의 활동을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은 2000년 여성법정을 모델로 삼았다. 2000년 여성법정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라는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판결을 내렸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공론화와 국제적 연대 확대에 기여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시민사회의 노력은 매우 컸다. 2018년 시민평화법정은 일본의 시민사회가 18년 전 2000년 여성법정을 통해 수행했던 역할을 모델로 삼고, 나아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고민한다는 것이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어떤 문제의식으로 이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는 “일본 정부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라면, 더더욱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에 있어서 가해국의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는지 물었다. 그 ‘책임’을 환기하는 과정으로 ‘시민법정’이 기획된 것이다. 시민법정은 ‘법은 정부에 속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도구’라는 전제에 기반한다. 국가가 정의를 이행하지 못한다면 시민사회가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침묵을 고수해 왔다. 한국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32만 5000여 명의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미국의 파병 요구에 따른 한미동맹과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 이 파병은 한국군의 ‘첫 해외파병’으로, 전쟁기념관과 같은 박물관에서 대대적으로 기념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학살 문제는 수십 년간 잊혀져 있었다. 한국에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1999년에 와서였다. 피해자들의 증언이 국내 언론에 보도되며 한국 시민사회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현지 생존자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소수 참전군인들의 양심적 증언까지 더해졌지만, 국방부를 비롯한 한국 정부 기구는 ‘민간인학살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불행한 전쟁’, 노무현 대통령은 ‘마음의 빚’ 정도로 언급했을 뿐이다. 이처럼 정부가 그 책임을 부인하는 가운데 2018년, 시민사회에 기반한 법정이 열린 것이다. 한편 베트남전쟁에 대한 문제 제기는 2000년 여성법정의 모델이었던 ‘러셀 법정’[1]에 기대고 있기도 하다. 러셀 법정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제안으로 베트남전쟁의 침략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1966년 열렸다. 러셀 법정은 베트남전쟁 중 발생한 미국의 범죄를 폭로하고, 한국을 미국의 공범국가라고 판결했다.[2]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와 국가의 법정에서 다뤄지지 않는 문제를 민간의 영역으로 가져와 판결하는 시민법정의 문제의식이 국경과 시대를 넘어 서로를 참조하며 이어졌다고 하겠다. 생존자의 증언, 말하기와 듣기 2000년 여성법정의 증언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필리핀의 토마사 살리노그(Tomasa Salinog)는 “정의를 요구한 지금까지 10년 간의 어려운 싸움 끝에 여성국제전범재판이 (우리가) 계속 바라왔던 정의를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에게 귀 기울이고, 진실을 추구해온 우리에게 존엄을 회복시켜준 재판은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3] 이처럼 시민법정은 피해 이후 오랜 세월을 살아낸 생존의 역사를 듣는 자리였으며, 침묵을 깨고 명예와 인권 회복을 요구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의미를 지닌다. 생존자의 증언을 듣고 사회가 여기에 답한다는 점에서 2018년 시민평화법정 역시 2000년 여성법정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시민평화법정의 토대가 된 것은 퐁니·퐁넛마을의 응우옌티탄(Nguyễn Thị Thanh)과 하미 마을에서 온 응우옌티탄(Nguyễn Thị Thanh)의 말하기, 즉 학살생존자의 증언이었다. 우연히도 두 명 모두 이름이 응우옌티탄이었다. 두 명의 응우옌티탄은 이틀간 총 13시간에 달했던 변론 시간 중 휴정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재판이 한국어로 진행돼 통역을 통해서 내용을 파악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원고들은 한국 변호사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으며, 당당한 모습으로 굳게 자리를 지켰다.[4]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은 그 당당함을 ‘살아남은 자의 소임’이라고 표현했다. 법정 전날, 그녀는 한국 국회를 방문해 발표한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해로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43년이 되었고 우리 두 사람이 학살을 겪은 지도 50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그날의 일들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학살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살아남은 우리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내일 우리는 법정에 섭니다. 한국의 친구들이 준비한 시민평화법정에 증인으로 나섭니다. 무섭고 떨리고 두렵습니다. 법정에 선다는 두려움에 한국에 오기 전부터 불면의 밤을 보냈습니다. 사실 이 자리도 많이 떨립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용기를 내는 이유는 50년 전 억울하게 희생된 우리의 가족 때문입니다. 가족을 잃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 때문입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지난날 있었던 어둡고 고통스럽고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일들을 세상에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5]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이 밝혔듯 시민평화법정에 서기까지는 많은 고민과 두려움이 있었다. 하미 마을의 응우옌티탄의 경우 시민평화법정을 향한 여정은 생애 첫 해외방문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겪은 가족의 죽음,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가해국의 수도에 가서 수백 명 앞에서 증언한다는 것이 쉬운 일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에 무력한 ‘피해자다운’ 피해자가 아니라, 반세기를 살아낸 강인한 생존자들이었다. 두 생존자는 서로를 용기로 북돋았다.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희생된 가족들의 영혼을 대신해서, 가족을 잃은 이웃들을 대표해서 증언한다고 했다. 원고들이 증언을 마칠 때마다 법정은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마침내 재판부의 판결이 내려졌을 때, 퐁니 마을에서 온 응우옌티탄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녀의 승소 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몸이 떨릴 만큼 좋습니다. 진실을 말하러 왔고, 최선을 다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겼다는 판결까지 받았습니다. 마을에 돌아가 제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겠습니다.” 응우옌티탄의 빛나는 미소에서 나타났듯이, 시민평화법정은 그동안 한국 사회가 듣지 않으려 했던 증언을 의미있게 듣고 응답하며 그 책임을 인정한 자리였다. 재판부가 선고한 약식 판결문에는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들에게 국가배상법 제3조에 따라 배상금을 지급하고,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공식선언을 할 것,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에서 대한민국 군대에 의해 발생한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살인, 상해, 폭행, 성폭력 등 일체의 불법행위 발생 여부에 관해 진상조사를 실시할 것, 전쟁기념관을 포함해 대한민국 군대의 베트남전쟁 참전을 홍보하고 있는 모든 공공시설과 공공구역에 진상조사 결과를 전시할 것’이 권고되었다.[6] 또한 재판부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왔음에도 용기를 내어 멀리 한국까지 와서 진실을 증언해준 두 원고들에게 존경과 연대의 인사를 전했다. 피고 대한민국과 ‘우리’의 책임 2018년 시민평화법정의 또 다른 의미는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던졌다는 점이다. 학살의 책임을 질 주체는 누구이며, 책임을 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피고 대한민국의 구성원으로서 ‘나’,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시민평화법정은 ‘진실을 밝히는 장소’임과 동시에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이고자 했다. 시민평화법정이 형사재판이 아닌 국가책임을 묻는 민사재판의 형식을 차용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방아쇠를 당긴 군인들과 그 명령을 내린 지휘권자를 처벌하는 형사법정은 국가범죄의 책임을 일부 군인에게만 한정시켜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형사법상 ‘유죄’를 선고하면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후의 이야기는 닫히게 된다. 시민평화법정은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를 피고로 상정함으로써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책임 역시 이야기될 수 있기를 바랐다.[7] 원고들의 대리인 역시 최후 진술에서 ‘원고들의 청구는 피고 대한민국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순간을 목격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라고 함으로써 그 같은 바람을 드러냈다. 시민평화법정은 실제 재판과 동일한 수준으로 입증 수준을 맞추려 했기에 증거 확보가 중요했고, 그 과정에서 퐁니·퐁넛 사건 당시 작전을 수행했던 사병의 영상 증언을 확보했다.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는 참전군인과 접촉하고,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 속에서 참전군인들과 어떤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 또한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민의 결과 재판 전날 법정의 일부이면서도 법정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 학술행사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 베트남전쟁에 연루된 ‘우리’>가 열리기도 했다. 여기서는 법정의 언어 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말하기와 듣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어떤 ‘우리’를 상상할 수 있는가, 어떻게 역사에 책임을 지고 기억할 것인가, 어떤 공동체를 현실에서 만들어나갈 것인가와 같은 고민을 나누었다. 법정, 그 이후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 문제가 잊혀져 가는 상황을 문제 삼고 이를 다시 공론화시키려 한 시민평화법정 이후, 학살 생존자들의 진상조사 요구와 실제 법정 투쟁이 현재 진행중이다. “우리는 한국 정부가 ‘베트남이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한국의 공무원들도 우리 생존자들에게 찾아와 ‘사과를 원하냐’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한국 정부에게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생존자들은 사과를 원한다’라는 것을 이 청원서를 통해서 분명히 알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60세가 넘은 고령으로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라는 청원처럼,[8] 이들의 요구는 한국과 베트남 양 국가 간의 문제, 외교의 문제를 넘어, 당사자들의 인권에 대한 존엄의 선언이다. 이러한 활동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과의 연대로도 이어지고 있다. 2000년대 초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가 처음 알려졌을 당시부터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은 앞장서 학살에 대해 사과하고 한베 평화 활동에 기금을 후원했다. 2015년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이 ‘나눔의 집’이었다. 당시 이옥선은 “먼 데서 찾아와줘서 고맙다. 다른 나라에도 우리와 같은 피해자가 있는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굳게 마음먹고 살자. 우린 아직도 전쟁을 하고 있다”라고 했다.[9] 2018년 시민평화법정 당시 김복동은 “내 아픔이 깊은 만큼 베트남 피해자분들의 아픔이 하루속히 회복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 저도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이지만, 한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베트남 사람들에게 제 사죄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10] 이렇게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생존자들은 상처를 치유하고 현재의 투쟁에 의미를 부여하는 연대자로서 서로를 지지해 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국적을 넘어 어떤 역사를 만들어나갈 것인가의 문제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우리 곁에 있다. 각주 ^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센터 엮음, 강혜정 옮김, 『일본의 군 ‘위안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 564쪽 ^ ‘Russell Tribunal’,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Russell_Tribunal (확인일 2020. 11. 3.) ^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센터, 위의 책. 568쪽. ^ 임재성, 「눈부셨던 응우옌티탄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시민법정이 남긴 것들」, 『문학3 2, 2018. http://munhak3.com/detail.php?number=1273 ^ ‘퐁니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 국회 기자회견 성명서’, 2018년 4월 19일. 출처 : 한베평화재단 홈페이지 http://www.kovietpeace.org/?m=bbs&bid=board01&p=18&uid=5369 베트남어를 모르는 한국인들은 응우옌티탄의 말을 베트남어에서 한국어로의 통역을 거쳐 비로소 들을 수 있다. ^ ‘2018. 4. 22. 선고된 약식 판결문’.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블로그.https://blog.naver.com/tribunal4peace/221262364287 ^ 「피고 대한민국에 '망각금지'를 선고하다」, 『프레시안』, 2018년 5월 10일.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96157?no=196157#0DKU ^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학살 피해자들의 청원서’(2019.4.4.),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블로그. https://blog.naver.com/tribunal4peace/221505240819 ^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전쟁 사라질 때까지 함께 싸워요」, 『한겨레』 2015년 4월 5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5543.html ^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자료집』,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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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2부〉 -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 재현의 딜레마: 딩링(1904년~1986년)의 작품과 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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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 재현의 딜레마: 딩링(1904년~1986년)의 작품과 피해자들 1편에서 소개한 피해자들의 증언은 허우둥어(侯冬娥, 1921년생)가 말문을 열기 시작한 1992년부터 200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허우둥어를 포함한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을 접하게 되면, 중일전쟁시기(1937년~1945년) 일본군이 자행한 성폭력 문제를 다룬 중국 작가 딩링(丁玲)의 작품과 작품에 대한 중국사회의 반향을 떠올리게 된다. 전쟁터의 성폭력과 재현, 그에 대한 전후 중국사회의 대응과 증언의 등장, 각 사안은 서로 연동되어있으며 그곳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함의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딩링은 1927년에 문단에 데뷔한 이후 1942년 정치 운동에서 비판받기까지 여성주의적 색채를 농후하게 지닌 작품을 발표한 작가이다. 딩링은 상하이(上海), 베이징(北京) 등 도회지에서 활동하다가 1936년 중국공산당 근거지인 옌안(延安)으로 간다. 딩링은 화북(華北)의 전쟁터를 돌며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일본군의 성폭력 문제를 다룬 작품을 몇 편 썼다. 1937년 작 『재회』, 1939년과 1941년에 쓴 『새로운 신념』과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가 바로 그 작품들이다. 새로운 신념 세 개의 작품은 딩링이 전쟁과 성을 직접적인 테마로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우선 1939년 『새로운 신념』의 내용을 살펴보자. 주인공 천 할머니는 마을에 온 일본군에게 손자들과 함께 잡혀서 강간당하고 ‘경로회’로 보내져 세탁 등의 잡일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일본군들 앞에서 중국인과의 성행위를 강제당하는 등의 치욕을 경험한다. 함께 잡힌 손자는 살해되고 손녀는 강간당한 후 ‘위안부’로 어디론가 보내졌다. 천 할머니는 구사일생으로 마을로 돌아왔지만, 줄곧 혼수상태가 이어진다. 천 할머니 아들은 일본군에 의해 엄마와 고향 마을, 산시, 중국이 유린당하였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사람들에게 항일을 위해 떨쳐 일어나도록 고무한다. 천 할머니는 의식이 돌아오면서 일본군이 자신에게 범한 강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어 일본군의 잔혹성을 고발한다. 그리고 아들을 홍군에 보내 항일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한편 천 할머니의 손녀 진구는 할머니의 곁에서 강간으로 깊게 상처 입은 여성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피해자 완아이화(万愛花, 1930년생)와 난얼푸(南二僕, 1912년생)의 양녀들은 피해 사실을 알게 된 후 엄마를 진심으로 이해하며 서로 따뜻한 교감을 나누었는데, 천 할머니와 진구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 딩링은 『새로운 신념』을 발표한 지 3년이 지난 후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를 쓴다. 이 작품은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전시 강간을 다루지만 전혀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새로운 신념』은 일본군의 ‘강간’을 유린당한 ‘민족’이라는 담론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분류한다면 항일전쟁을 위한 전의 고양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중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는 강간을 ‘치욕’이라 여기는 인식을 문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딩링은 1937년에 『재회』라는 희곡을 발표하였다. 희곡 속 주인공 지식인 여성 바이란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후 위장 투항해서 스파이가 될 것을 요청받는다. 이를 받아들인 바이란과 포로로 잡힌 옛 동료가 마주치면서 생기는 비극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체제 속에서 무력한 ‘개인(여자)’이 어떻게 전쟁의 도구가 되어가는지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을 1941년에 쓴『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와 함께 읽으면 『재회』에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었던 문제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의 주인공 전전은 마을에 들어온 일본군들에게 강간당한 후 끌려가 일본군 장교의 ‘위안부’가 된다. 그리고 당의 요청에 따라 일본군 아래서 스파이 활동을 하게 된다. 그 후 성병에 걸려 치료를 위해 마을로 돌아온 전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고 잔인하다. 딩링은 우선, 전전을 비난하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통해 강간을 제멋대로 행하는 일본군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라 성폭력 피해를 여성의 치욕으로 삼는 일상 의식을 문제 삼는다. 둘째, 전전의 연인 샤다바오에 대해서 “동정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과는 다른 연민을 지니고 그녀의 영혼을 따뜻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셋째, 전전을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는 젊은이들에 대해 느끼는 위화감을 묘사한다. 본래 적의 강간으로부터 여성을 지켜야 하는 존재(혁명 측)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강간을 인내할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으로 읽힌다. 마지막으로 전전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기 길을 찾아 떠나가는 것을 응원한다. 딩링이 만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딩링은 혁명 근거지에서의 경험을 쌓고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피해 여성들의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 예민한 감성을 지닌 작가 딩링은 현실을 목격한 후 이 문제의 중층적인 면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1편에서 소개한 6명의 구술내용은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의 주인공 전전의 피해와 거의 겹친다. 물론 딩링이라는 작가가 피해자 전전의 삶에 현실을 함축하고, 무엇보다도 현실 세계를 향한 희망을 담았다는 차이는 있다. 전전에게 일본군의 폭력을 견디며 스파이로 복무하라고 했던 공산당원은 허우둥어의 두 번째 피해에 협력했던 공산당 촌장 리부인으로 실재했다. 그는 ‘마을을 위해서’ 일본군의 폭력을 견뎌달라고 허우둥어에게 애원한다. 류멘환(劉面換, 1927년생)은 자신의 피해를 ‘체면이 손상될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남자친구에게도 버림을 받았다. 전전의 남자친구 샤다바오는 전전에게 결혼하자고 하지만 그의 결혼하자는 말의 저변 인식과 류멘환의 남자친구 인식 사이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완아이화는 고문과 폭력을 겪은 후 류링웨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이 살던 마을을 떠나서 가까스로 삶을 유지한다. 그리고 1992년 일본 법정에 제소하기까지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전전이 마을을 떠나 영위한 새로운 삶은 완아이화보다 덜 고통스러웠을까? 난얼푸는 일본군에게 끌려가 폭력을 당한 끝에 임신과 출산을 했다는 이유로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심각한 고초를 겪다가 자살했다. 허우둥어 역시 마찬가지로 정치 운동 속에서 당적을 박탈당한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하였다. 류멘환도 정치투쟁에서 비판받고 자기비판을 해야 했으며 과거사로 인해 자녀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위안주린(袁竹林, 1922년생)과 린야진(林亞金, 1924년생) 역시도 50년대 후반 정치투쟁 속에서 비판받고 삶이 위태로운 지경에 내몰렸다. 대부분의 중국 피해자들은 일본군의 폭력이 자행된 장소가 자신들의 마을과 가까웠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이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주위의 냉대와 멸시는 한층 더 심각하였으며, 그로 인한 심적 고통을 겪으며 살아내야 했다. 딩링은 홍군의 사기를 고양하는 ‘서북전지복무단’의 단장이 되어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화북지역의 다양한 피해자들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했다. 거기서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를 써서 일본군의 성폭력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 내부의 문제를 말하였다. 그녀는 전전의 모델이 된 소녀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전선에서 돌아온 친구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딩링은 전전의 모델이 된 인물에 대한 사회의 일상 의식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대단히 동정했다. 전쟁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희생자가 되었다. 그녀도 겪어서는 안 될 많은 고난을 겪었다. 운명 속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일을 잘 모르고 그녀를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에게 능욕당했다고 하는 이유로 그녀를 경멸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나는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피해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나온 피해자들의 구술 자료집을 읽다 보면 현실은 딩링의 작품 내용보다 훨씬 더 가혹했던 것 같다. 그런데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역사적 반혁명’이라는 딱지가 붙어 정치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던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딩링도 비슷한 시기에 사상 비판을 혹독하게 당한다. 1957년 반우파투쟁(反右派闘争)에서 문학평론가 저우양은 딩링이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에서 전전을 “일본 침략자에 의해서 창부가 된 여성을 여신과 같은 존재로 미화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비판을 거쳐 딩링은 정치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고 춥고 헐벗은 땅으로 떠나야 했다. 딩링은 피해자 전전을 통해서 피해자 여성의 언어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리라. 일본 정부를 최초로 제소한 허우둥어가 조사자 장솽빙과 10년간 교류하면서도 자신의 피해에 관해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던 상황은 많은 사실을 말해준다. 장솽빙의 끈기 있는 설득에 고통스럽게 입을 떼면서 “중일 수교가 맺어지지 않았을 때도 이 한을 풀어주고자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국교까지 수립된 지금 가능하겠는가”라는 속내를 내비쳤다. 나는 여기서 피해 여성 시점에서 일본군의 성폭력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 수 없었던 역사를 읽는다. 중국의 피해자들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한 시기는 한국의 김학순 여사의 공식 발언이 없었다면 훨씬 더 늦추어졌을 것이다. 피해자들이 입을 열자 중국 민간에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피해 여성들의 구술과 딩링의 꿈의 좌절을 통해서 지금 일본제국의 성폭력을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해의 구조와 일본군과 일본 국가의 책임을 묻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만이 물어져서는 근원적 해결로 연결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주 깊고 고통스러운 사유가 될 것이며 이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개개인의 삶을 성찰하는 일일 것이다. 거기까지 우리의 사유가 이어질 때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역사를 쓰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