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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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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상영작 이야기 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하는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한다. 2024년 8월 14일부터 8월 27일까지 퍼플레이 온라인 극장에서 함께할 수 있는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는 '입을 떼다', '귀를 열다' 두 개의 주제로 나누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결을 포착해 담아낸 국내외 영화를 소개한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을 비롯해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작품도 여럿 포함돼 있다. 웹진 <결>은 영화제 관련 소식과 함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컨텐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 (1)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1)_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2)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2)_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3)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3)_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4)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4)_ 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예닐곱 살에 재일조선인으로 사는 슬픔을 알아버린 아이가 있었다. 열세 살에 자신이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짓밟는 강력한 권력이 있다는 것을, 또 자신이 자신으로 있기 위해서는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몸소 배운 소녀가 있었다. 1935년생이니 올해로 여든아홉 살, 평생을 수많은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며 싸워온 다큐멘터리 감독 박수남 이야기다. 일본군'위안부'와 강제노동에 동원된 조선인 군속, 재일조선인 같이 '낮고 상처 많은'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온 그에게 야마타니 데쓰오 등 일본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존경을 보냈다. 특히 작가이자 편집자인 오이와케 히데코의 글에는 박 감독이 걸어온 길에 대한 웅숭 깊은 존경이 가득하다. 이번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에서도 박 감독의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을 만날 수 있다.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비프메세나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에서도 점점 주목도를 높이고 있는 박 감독의 영화를 만나기 전후 오이와케 히데코의 글 두 편을 소개한다. 소제목을 붙이고 문장을 다듬는 등 약간의 편집 과정을 거쳤음을 밝힌다. #1_ 작가 오이와케 히데코가 말하는 박수남 하얀 한의 길 박수남은 '여행'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를 계속 자문해 온 여행이다.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난 그녀가 일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그 속에서 그녀는 많은 동포의 삶과 만난다. 교수형을 당한 이진우, 히로시마의 재일조선인 피폭자, 배봉기 씨 등 조선인 '위안부', 그리고 조선인 군속들 등이다. 스스로 존재의 부조리를 물을 때, 그곳에는 마찬가지로 인생을 역사에 농락당하고 존재가 말살된 동포들이 있었다. 즉,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여행은 언제나 '역사의 어둠을 따라 내려가는 여행'이 되었다. 거기서 그녀의 저서나 영화가 탄생했지만, 그녀를 움직이게 한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와 동시에 오빠의 존재였던 것 같다. 유능했지만 젊어서 자살한 오빠의 한. 그녀는 영화 속에서 종종 '오빠와 언니를 찾는 여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언제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오빠의 인생을 겹쳐온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의 말을 잇는 무녀 박수남을 만난 것은 20년 전인 1991년, 그녀의 두 번째 작품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이 완성되어 오키나와에서 상영회가 열렸을 때였다. 당시 나는 마이니치신문사의 『LOOK BACK』이라는 연감을 편집하며, 거기에 몇 편의 르포를 썼다. 그 중 하나로 박수남을 인터뷰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찾아 약 10일간 상영위원회의 사무실에서 함께 지내며, 아카 섬과 자마미 섬에 동행했다. 당시 박수남은 55세, 온화한 따뜻함과 동시에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격렬한 분노 모두를 지니고 있었고, 그 열량의 크기와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함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실제로 눈앞에서 전화 상대와 격렬하게 말다툼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나중에 그 말다툼 중 몇 개는 영화 장면 삭제 요구였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박수남에 대해 정말 놀란 것은 그게 아니었다. 증언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계성을 소중히 여기는 그 철저한 자세였다. 예를 들어, 그 상영회 전후 아카 섬이나 자마미 섬의 노인들 집에 박수남은 자주 방문해 술을 나눴다. 그들로부터 이미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은 영화 필름에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박수남은 또 몇 번이고 방문해 귀를 기울이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박수남도 처음 방문한 집인 줄 알았다. 언론의 취재에서는 '증언 채록'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는데, 박수남의 자세에서는 그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혹독한 경험과 마음에 감추어 둔 이야기를 풀어내고 전달하기 위해, 자신이 매개체가 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말을 끌어내는 무녀처럼. 그것은 영화에서도 강하게 느껴졌다. 한국과 오키나와에서 사람들은 박수남과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말하지 않았을 생각들을 풀어내고 있다. 두 번의 큰 병을 겪고 난 박수남이 2006년 오랜만에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섬의 노인들이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한 말이 상징적이다. "네가 다시 올 수 있었던 것은, 신이 너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이 섬에서는 죽은 자도 아직 성불하지 못했다." 그런 박수남의 자세가 있었기에 2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이번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세토우치 자쿠초 씨가 영화 전단지에 써 준 글 중에 "진실은 이렇게 반드시 누군가의 힘으로 세상에 전해지는군요."라는 문장이 있다. 그렇다, 박수남은 역사의 깊은 어둠에 봉인되어 있던 진실을 이 세상에 전하는, 역사의 무녀일지도 모른다. 고마쓰가와 사건, 이진우와의 만남 박수남은 1935년 일본 미에현에서 태어나 요코하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토목 공사 현장 감독이었다. 부하라 불린 낮은 직급의 인부들은 조선인 부락에 살았지만 박씨 집은 일본인 주택가에 있었고,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다섯 살 때 치마저고리를 입은 어머니가 돌을 맞고 욕설을 들은 무서운 경험을 한다. 그녀 또한 초등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같은 눈길로 일본인들에게 배척당했다. 지금까지 함께 놀던 여자 아이들도 같이 놀지 않게 되었다. 가족에게 사랑받으며 자란 내게 밖에서 배척을 당하는 일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안데르센의 인어 이야기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었다. 만약 마녀가 나를 일본인으로 만들어준다면 목소리뿐만 아니라 다리도 기꺼이 바칠 것 같았다." 더욱이 '일본인인 척'하면 배척당하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은 더 깊은 고통을 낳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일본인인 척하고 있는 나를 견딜 수 없고, 자신이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찢겨 나간다는 것은 자연과 분리되는 것이다. 빨간 꽃이 빨갛게 보이지 않게 된다. 자연의 색 모두가 바래져 간다. 햇빛이 얇은 베일에 덮인 것처럼 보인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내 영혼은 그 당시 병들어 있었다." '고마쓰가와 사건'의 이진우와 관련이 깊어진 건 이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마쓰가와 고등학교 야간부에 다니는 여학생과 세 살 여아를 살해한 혐의로 당시 열여덟 살이던 이진우가 체포된 것은 1958년 여름이었다. 그는 극빈한 환경 속에서도 '명랑하고 활달한' 학년 리더, 일본인 '가네코 진우'로 살았다. 그러나 체포 후 "꿈속의 꿈처럼, 그녀들은 베일 너머에 있었고, 자신이 죽였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말 내가 죽인 것일까."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에 박수남은 자신이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충격이었다. 이진우는 나이기도 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쳤을 때 어떻게 인격이 분열되는지, 나는 너무 잘 알았다." 박수남은 당시 22세였다. 2년 전부터 시가현의 한 시골 초등학교에 다니는 민족학교 교사였던 박수남은 담임의 가방에서 급식비를 훔친 소년 사건을 계기로 남북 아이들이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민족교육을 제안하면서 교사 집단에서 고립됐고, 도망쳤다. 그런 박수남에게 이진우는 "그 마을에 두고 온 소년들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가와사키에서 작은 사설 학교를 열고, 유흥가를 떠도는 불량 청소년들을 "조직화"하며, "자신을 회복시키는 장소"를 만들려고 했다. 그녀는 조선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자신의 문화에 대해 알게 되면서 "색이 돌아오고, 자신이 조선인임을 느끼며 버틸 수 있게 되었다." 사설 학교에서 사용한 교재는 "내 이야기를 쓸 것이다-검고 아름답다"고 쓴 미국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의 시집 『니그로와 강』이었다. 그리고 가와사키의 동포 소년들에게 다가가듯이 이진우에게 편지를 쓰고 면회실을 교실로 만들었다. 두 사람의 편지를 묶어 엮은 서한집 『죄와 죽음과 사랑과』는 나중에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반쪽발이의 비참함, "하얀 시선의 포위" 속에서 "광대 역할을 하며" "자신을 죽여 가는" 동포들. 당시 박수남이 반복해서 쓴 문제의식이다. "우리는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에 매달려, 찢겨 나간다. 그때 갑자기 죽음이 떨어지는 것이다." 1962년 1월, 체포 후 4년 만에 이진우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22세. 그로부터 3년 전에 형이 자살했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박수남의 여행은 1964년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으로부터 '공화국의 재외 국민에게 범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고마쓰가와 사건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 당했다. 한편 1960년 민주화와 남북통일을 요구한 4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청년들에게 충격을 받아 한국 유학을 신청했지만 입국을 거부당했다. "나는 남북의 경계, 틈새에 서 있었다. 내가 설 수 있는 기반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부모의 역사를 아는 여행'은 지쿠호와 히로시마에서 시작되었다. 지쿠호의 폐허가 된 탄광 마을을 방문했을 때 검은 벽에 쓰인 세 줄의 한글 낙서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산사태 사고로 사망한, '코바토(小鳩)'로 불리던 하얀 피부의 14세 소년의 글이었다. 개와 고양이의 무덤에 묻혔다는 소년의 간절한 외침. 이것이 박수남의 원점이 되었다. "이 소년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계속 있었다. 이전 작품의 한국 로케 때 소년의 고향을 찾아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소년이 내 영혼 깊은 곳에서 계속 울려 퍼지며, 나를 여행으로, '누치가후'에 이르게 하는 여행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침묵을 촬영하다, 영상의 세계로 히로시마의 동포들이 사는 원폭 슬럼에 들어간 것도 1964년이었다. 당시는 조선인 피폭자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다. "내 여행은, 죽은 자들을 포함해 존재들을 찾아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존재 그 자체를 발굴하는 작업이다. 그들은 가난한 원폭 슬럼에 살면서도 피폭 경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박수남은 원폭 슬럼의 피폭자 집에 기숙하며, 그곳 할머니와 함께 작업화를 신고 실업대책 사업 현장을 돌며, 한 사람 한 사람 피폭자를 발굴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상에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로시마에서도 탄광에서도, 그 시대에 일본의 정책에 협력했던 조선인들은 매우 유창한 일본어로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말한다. 자기비판은 전혀 없이. 하지만 실제로 가장 고통받은 동포는 일본어는 서툴고 조선어도 소박해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 그들이 더듬더듬 말할 때의 표정과 침묵, 이것이 대단하다. 눈 속에 파란 도깨비불 같은 것이 타오른다. 한이라고 생각했다. 억울한 생각이다. 침묵이 그들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내 말로 표현하면, 그 침묵을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 이것은 영상이다, 카메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의 크랭크인은 1986년, 이듬해 완성했다. 증언 발굴부터 무려 2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 작품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1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 피폭자의 존재를 무시해 온 일본의 반전 반핵 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전국적으로 자발적인 상영이 물결처럼 퍼졌다. 그리고 상영을 계기로 1987년 세계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 처음으로 조선인의 피폭 문제가 다뤄졌고, 피폭자에 대한 국가 보상 요구까지 채택됐다. 나도 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모든 빛을 두려워하며, 깜깜한 좁은 벽장 속에 갇혀 있던 소녀, 원폭 슬럼에 사는 할머니들의 모습. 목소리를 높이는 영화가 아니다. 조용히 차분히 그 억울함과 슬픔이 다가온다. 오키나와와의 만남, 깊은 침묵의 섬으로 박수남이 오키나와와 처음 만난 것은 1972년이었다. 오키나와 반환의 해, "나는 속아서 도카시키 섬의 위안소로 끌려갔다"고 밝힌 배봉기 씨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수남의 주장은 '전장에서 성을 팔며 다닌 창녀'라는 기존의 통설이나 속설을 뒤엎고, 강제 동원된 남성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의한 성 노예'라고 인식했다.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가 상영되면서 그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를 방문한 1987년, 언론에 노출됐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강제 동원된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와 군대에 성을 판' 여자로 취급받았다. "동성으로서 그것들은 견디기 어려웠다. 같은 조선인 여성의 손으로 만든 영상으로 그녀가 고발한 진실을 복권시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오키나와, 전쟁 중에 강제 연행된 옛 군속들의 존재, 배봉기 씨. 이들에 대한 생각이 두 번째 작품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제가 조선인이라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했다. 섬 사람들에게 위안소의 여성이나 군속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면 '당신은 가족인가요?' 라고 묻곤 했다. 나라를 빼앗긴 운명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오키나와 취재는 시작됐다. 그러나 침묵은 매우 깊었다." 상영 후에도 박수남은 '위안부'들의 사죄와 전후 보상을 요구하는 싸움을 지원했고, 1997년 도카시키 섬에 배봉기 씨 등 '위안부'의 영혼을 위로하는 '아리랑 위령의 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국민 기금 정책'으로 전환된 이후 그 운동은 고립되기 시작했다. 한편 영화 상영 후인 1992년, 박수남은 살아 돌아온 군속들을 오키나와로 초대하는 데 분주했다. 이 통곡과 위령의 여행이 이번 영화의 후반부에 그려져 있다. 또한 두 번째 작품 취재를 통해 사람들의 가슴 속에 봉인된 '옥쇄'의 실체를 밝히고자 하는 생각이 생겼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영화 제작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왼쪽 눈의 실명, 맹학교 입학, 대장암, 그리고 재발…. "더 이상 영화 제작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옥쇄'의 10만 피트가 신경 쓰이고 신경 쓰여, 죽을 수도 없었다." 전환점은 2005년이었다.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참가하면서 "포기했던 영화 제작에 대한 의욕이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암 수치가 사라지고 체력이 회복되고 있음을 실감하며 후지산 등반도 했다. 2006년 1월, 박수남은 오랜만에 오키나와의 게라마 제도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자마미 섬에 주둔했던 전 육군 대장 우메자와 히로시 씨 등이 옥쇄 명령은 군 명령이 아니라며 이와나미 서점 등을 제소한 이야기를 들었다. 옥쇄 명령은 마을 조장의 명령이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제시된 것은 전후 조장의 동생이 쓴 '기억노트'였다. 그러나 15년 전, 그 조장의 동생은 박수남에게 술에 취해 속았다며 후회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 박수남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반신반의했지만, 그것이 재판의 증거로 제출되었다. 그녀는 나하의 병원에 입원 중인 조장의 동생을 찾아갔다. 동생은 중태임에도 명확히 말했다. 박수남은 그 내용을 모두 녹음하고 촬영했다. 이렇게 등을 떠밀리듯 세 번째 영화 작업이 재개되었다. 그 이듬해인 2007년 문부과학성이 교과서 검정에서 '옥쇄의 군 명령을 삭제하라'는 수정 의견을 붙였다. 옥쇄를 강요받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억울함, '치무구루시(チムグルシ. 오키나와 방언으로 한과 비슷한 뜻)'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정말로 오키나와 할머니의 말대로 '신이 당신을 다시 데려왔다'는 타이밍에 <누치가후>가 완성됐다. 아마도 박수남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50년에 걸친 '박수남의 여행'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진실의 크기와 깊이에 놀라고 있다. #2_ 박수남의 목소리 자신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은 경험도 빼앗기고 있다 영화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1991)이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듯이 나는 반생을 나 자신을 발견하고 확인하며 일본에서 살아가는 정체성을 창출해가는 여행 속에서 살아온 것 같다. 그 여행 속에는 히로시마도 있었고, 히로시마에서 오키나와로의 여행도 있었다. 패전 후 아버지는 절의 본당에서 한글 교실을 열었고, 딸에게 민족교육을 받게 하려고 나를 조선 중·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처음에는 싫었다. 그러나 거기서 역사를 배우고, 자신의 나라의 문화를 알게 되면서 색이 돌아오고, 빛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조선인임을 견뎌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으로 있기 위해선 싸워야 한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 그런데 오래지 않아 조선인학교 폐쇄 명령이 내려졌다. 어느 날 학교에 경찰이 '돌격'해 왔다. 1.5m나 되는 참나무 막대를 휘두르며 들이닥쳤다. 우리는 교실에서 쫓겨 도망쳤다. 운동장에 내몰린 학생 수백 명은 참나무 막대로 무차별 구타당해 피투성이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나는 '도망가면 죽는다!'고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조선인이 일본 학교에 왜 다닐 수 없느냐'며 맞섰다. 이것이 내가 권력과 맞선 첫 경험이었다. 13살이었다. 이때, 자신이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짓밟는 강력한 권력이 있다는 것을, 자신이 자신으로 있기 위해서는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몸소 배웠다. 조선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전학련 대회 때 갔던 센다이에서 조선인 부락을 방문했다. 아이들이 차별받아 일본 학교에 다니지 않고 방황하는 현실을 보고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음 해 민족학급의 교사가 되었다. 민족학급은 간사이 지역에 지금도 남아 있는, 공립 초등학교에 마련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방과후 교실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부임한 시가현의 사메가이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단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도망쳐 나왔다. 당시 한국 국적의 4학년 남학생 명연희라는 아이가 담임 교사의 가방에서 급식비를 훔쳐 나간 뒤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빨갱이를 싫어해 아이를 민족학급에 보내지 않았다. 다른 민족학급 교사는 '남자아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이 아니므로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했다. 그러나 같은 동포 아닌가. 재외 공민이 아니라고 배제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아이가 올 수 없는 민족교육은 무엇인가. 나는 급여와 보너스로 8천 엔을 만들어 그의 집에 찾아갔다. 끝내 그의 어머니는 학교에서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돌려주었지만, 이 행위가 영웅주의라는 비난을 받으며 나는 고립되었다. 좌절이었다. 나는 젊었고, 견디지 못해 도쿄로 돌아왔다. 그때 '고마쓰가와 사건'이 있었다. 내가 두고 온 명연희와 이진우가 겹쳐 보였다. 이진우는 명연희였다. 이진우와 명연희 이진우가 체포된 것은 1958년 여름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찔한 충격이었다. 이진우는 나이기도 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쳤을 때 어떻게 인격이 분열되는지 나는 너무 잘 알았다. 잡히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다. 살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을 빼앗긴 사람의 경험은, 경험 그 자체도 빼앗긴 것이다. 살해한 그녀와 자신 사이에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 그녀들과 자신이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녀들은 베일 너머에 있는 것이다. 그 시대, 같은 세대의 동포들 가슴에는 누구나 이진우가 있었다. '이 소년을 구하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나에게도 호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이 소년에게 직접 다가가기보다 많은 R들에게 호소하기로 선택했다. 당시 나는 가와사키의 나카토미(현 사쿠라모토)에 작은 학원을 열고 유흥가를 배회하는 '비행' 동포 소년들을 조직하고 있었다. 자신을 회복시키는 장소인 그 학원에서 사용한 교재는 '검고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는 미국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의 시집 『니그로와 강』(The Negro Speaks of Rivers)이었다. 그러다 피해자 가족의 집을 방문했다. 피해자의 나이 든 소박한 아버지는 '소년의 성장 과정도 불쌍하다, 그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준다면 딸도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피해자의 부모님은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끔찍한 일을 했음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딸 한 명을 죽인 일로 많은 조선 사람들에게 편지와 향을 받았다. 소년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여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작은 공간이지만 그를 맞이하겠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감형 운동을 부탁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먼저 그 소년을 만나 자신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와사키의 학원에서 했던 것처럼.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머지는 서한집(박수남 편 『이진우 전 서한집』)에 쓰여 있는 대로다. 편지를 쓰고 면회실이 교실이 되었다. 그러나 고마쓰가와 사건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나는 조총련에서 추방되었다. 귀환 운동이 전개되고 일한 친선 무드가 고조되는 시기에 이런 파렴치한 사건을 문제 삼는 것은 분위기를 해치고 깎아내리는 것이 된다고. 애초에 그는 한국 국적이고 공화국 공민이 아니므로 상관없다고 했다. 사회주의 환상이 고조되고 있는 '천리마의 나라'를 배경으로 한 조총련에서 추방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한, 파란 귀신불 같이 타오르는 침묵 나의 긴 여행은 1964년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이승만을 무너뜨린 청년들을 만나고 싶어서 한국에 유학하려 했으나 박정희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한 탓에 갈 수 없었다. 북쪽 나라에서도 추방당했는데 말이다. 이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개인이 자유롭게 살고, 생각하고, 발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 나는 일본에 있으면서 두 개의 국가에서 추방당하고, 배제되어, 망명자와 같은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는 이 나라에 남아 생활하는 의미를 묻기 위해 부모님의 역사를 알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히로시마로의 첫 여행은 침묵과의 만남이었다. 조선인들은 확실히 존재했으나, 피폭자로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로 가난한 원폭 슬럼에 살면서도 피폭 경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 버려진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고 싶었다. 나는 원폭 슬럼의 피폭자 집에 기숙하며, 그곳 할머니와 함께 작업화를 신고 실업대책 사업 현장을 돌아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 피폭자를 발굴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에서도, 어느 탄광에서도, 그 시대에 일본의 정책에 협력한 조선인들은 매우 유창한 일본어로 자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를 구술했다. 자아비판이나 전쟁 책임은 전혀 없이. 그러나 실제로 가장 고통받은 동포들은 일본어가 서툴고, 조선어도 소박하며, 말할 수 있는 단어조차 부족했다. 그런 사람들과의 작업은 침묵을 듣는 일이었다. 그들이 더듬더듬 말할 때의 표정이나 침묵, 그것은 대단했다. 주름 속에 깊이 새겨진 눈 속에서 파란 귀신불 같은 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한'이라고 생각했다. 억울한 마음, 그것이 눈 속에서 불타고 있었다. 그런 침묵과의 만남이 무엇보다 영화 제작의 계기가 되었다. 원폭 슬럼에서 만난 할머니를 찍고 싶었다 말이 필요 없는, 일상만을 영상에 담고 싶다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전쟁 전에 먼저 온 남편의 부름을 받고 히로시마에 왔다. 그때 폐품 수집을 위해 조선인 슬럼 밖으로 나갔다. 그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자신을 보는 눈에 놀랐다고 한다. 문명인일 것 같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보는 눈은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고, 짐승의 눈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웃었다. 그 말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마비된 듯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거리를 걷다 보면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눈은 마치 짐승을 보는 눈 같았다. 내가 마치 짐승의 자식인 것처럼. 나는 얼어붙어 걸을 수 없었다. 어머니와 함께 거리를 걷는 것이 싫어졌다. 사랑하는 엄마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조선인이 아니라고. 겨우 여섯 살, 일곱 살에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을 빼앗기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원폭 슬럼에서 만난 그 할머니는 자신들을 보는 일본인들이야말로 짐승의 눈을 가진 짐승이었다고 말했다. 예전에 나와 함께 걷던 어머니가 일본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그녀와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조선인 1세대는 그토록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던 나락의 밑바닥에서 아이들을 낳고 키웠다. 바닥에서 그들을 지탱시켜준 것은 일본인들과 맞서며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2세대는 그들의 눈을 짐승의 눈으로 생각할 수 없었고, 나 자신이 짐승의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와의 만남은 내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인간이 살 곳이 아니라고 불리는 원폭 슬럼에 사는 그녀의 집 부엌 냄비는 언제나 반짝였고, 이불 시트는 새하얗고, 그녀 자신도 언제나 풀먹인 마 치마저고리를 입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것을 찍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본인 자신으로 있는 것을 빼앗긴 일본인 이번 영화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1991)에서도 강제로 연행되어 황민화 교육의 강요 속에서 변해간 조선인의 '한'을 다루었다. 일본군'위안부'도 그것만을 분리해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천황제를 내면화해간 남자들, 여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완전히 자신을 빼앗겨 간 우리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를 보고 "어디에 '위안부'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안부'라는 시스템은 국가 폭력에 의한 일상적인 강간, 윤간이다. 그녀들은 '매춘부'가 결코 아니며, 천황의 군대에 의한 성폭력의 일방적인 피해자 이외의 무엇도 아니었다. 물론 그녀들에게 한 푼의 보상도 없었다. 그것을 정당화한 논리는 천황제였고, 천황제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는 '위안부' 문제를 근본적으로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전투력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 군이 위안소를 관리했다. 살육의 현장에서 돌아온 남자들이 그 위안소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살해하는 병사로 만들어진 남자들의 성 또한 군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었고, 삶도 빼앗겼다. 나는 과거에 나 자신으로 있는 것을 빼앗겼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일본인이 일본인 자신으로 있는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시아의 눈으로 침략자를 보는 상상력을 빼앗겼기 때문에, 전후에도 여전히 일본인은 '모모타로'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상상력을 되찾으려면 역사의 진실을 되찾아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빼앗기고 있다. 영화 <아리랑의 노래>를 본 한 학생이 말했다. "박수남 씨는 '하얀 한의 길'을 걸어왔지만, 가해자인 일본인은 '빨간 한의 길'을 걸어온 건 아니었을까." 관련 상영작품 🎬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 | 일본 | 박수남 | 1991년 상영 기간 : 8월 14일(수) ~ 8월 20일(화)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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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일본군 ‘위안소’는 130년 전부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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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소'는 130년 전부터 있었다 흔히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1932년 중국에서 일어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계기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19세기부터 이미 해외 침략에 나선 일본은 전쟁 수행과정에서 군인을 통제하기 위해 여성의 성을 동원해 왔다.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명예교수 송연옥은 여러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상하이 사변 훨씬 이전부터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여성의 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고 지적한다. 부국강병과 노동자를 회유하기 위해 설치된 국영 유곽 일본군이 전쟁 수행을 위해 만든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대개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에 특별한 이견이 없어왔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일본은 이미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많은 해외 침략전쟁을 저질렀는데, 그렇다면 그 당시에는 '위안부' 제도가 없었을까? 19세기 중엽 당시 자본주의가 덜 발달했던 제국 일본은 그 취약점을 군사주의로 메우려 하였다. 1868년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富国強兵)이라는 구호 아래 자원 확보와 남하하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홋카이도 개척에 나섰다. 이때 노동력으로 동원된 죄수들을 회유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국영 유곽이었다. 이 기획을 정부에 제안한 이는 개척사(開拓使)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로, 그는 개척사가 자금을 융자한 다음 도쿄 요시와라 유곽의 성매매 업자에게 유곽의 경영을 맡기려 하였다. 그러나 1872년의 ‘예창기해방령’과 1873년의 경기 불황으로 개설 직후 바로 폐업하고 말았다. ‘예창기해방령’은 서구 열강들이 예창기에 대해 인신매매된 노예라 비난하자 메이지 정부가 그 대응책으로서 빚 때문에 몸이 묶인 예창기들의 해방을 지시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일부 예창기가 해방되었으나, 여성들을 옭아맸던 ‘전차금(前借金. 나중에 갚기로 하고 미리 빚으로 쓰는 돈) 제도’와 유곽은 그대로 남았다. 오히려 메이지 정부는 성매매 제도를 통제할 절호의 기회라 판단해 철저한 성병 검사 실시, 세금 징수 등 공창제를 근대적으로 개편했다. 즉 유녀들을 착취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업자에게 공간을 빌려서 자유영업을 하는 자로 보고 그 형식을 바꾼 것이다. 가시자시키(대좌부(貸座敷))와 창기(공창)란 신조어가 생긴 것이 이 즈음이었다. 전차금은 높은 이율로 계속해서 창기의 몸을 구속했다. 자본이 빈약한 일본에서 성매매업은 기간산업이라 해도 될 정도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일례로 홋카이도 삿포로시의 경우 성산업에서 납부되는 세금이 지방세의 44%를 차지했다. 일본의 근대 공창제는 국가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각지방으로 관할권을 넘겼다. 그러다 1900년부터는 업자의 관리만 각 지방이 맡고 창기에 대해서는 국가가 통일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개항한 부산에 요시와라 유곽이 문을 연 이유 1876년, 일본은 운요호가 국기를 게양했음에도 조선이 포격했다고 억지를 써서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조선에 강요했다. 조약 체결 당시 전권변리대사로 조선에 온 이가 개척사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였다. 그리고 1880년, 그가 도쿄에서 단골로 드나들던 유곽인 요시와라의 나카고메루가 부산에 상륙했다. 개항 직후 어수선한 시기에 나카고메루가 부산이라는 낯선 토지로 올 수 있었던 데에는 구로다의 보증이나 요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카고메루의 업주였던 아카구라 토키치(赤倉藤吉)는 ‘상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3년 기한의 여권을 얻어 부산으로 왔다[사진 1]. 당시 그는 수하에 있던 창기 10명을 빚을 탕감해 준다는 조건으로 부산에 데려왔다. 부산에서의 성매매는 일본의 ‘가시자시키 영업규칙’이 준용되어 거류지 내에서 공창제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아카구라는 3년 후인 1882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조선 내 일본의 입지가 약화되고 조선이 잇따라 조약을 체결한 서구 열강과 대면하며 국가적인 체면을 계산하게 된 일본은 부산에서 공창제를 중지시키고, 인천에서는 애초에 가시자시키 영업을 허락하지 않았다. 송연옥 사진1.jpg 청일전쟁에 숨겨진 조선전쟁 그리고 성폭력 이후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군비를 확장하면서 대륙에서의 전쟁을 준비했다. 그런 일본에게 동학농민전쟁은 천재일우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1894년 봄부터 거세진 동학농민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 청나라가 파병하자 ‘제물포조약’을 근거로 일본도 군대를 파병했는데, 규모가 청나라보다 3배가 넘었다. 외세의 침략을 경계한 농민군은 정부와 화약을 맺고 해산했고, 조선 정부는 두 나라에 군대를 철수하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내정 간섭의 강도를 높이다가 결국 경복궁을 점령하고 전쟁을 본격화하였다. 『일청전투실기』[사진 2]라는 자료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책에는 충청남도 아산에서 청나라 병사들이 조선의 민가를 습격하고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시각적으로 청나라 병사들의 만행을 보여주고 일본이 정의롭다는 것을 각인시키려는 정치적인 함의가 담겨 있다. 송연옥 사진2.png 그림과 달리 일본군이 만행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은 일제 육군 창설자이자 일본군 최고 책임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일청전쟁미담』이라는 책에서 ‘군부가 민가를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를 능욕하는 일이 있으니 이런 일들을 엄벌로 다스릴 것은 물론이고 이를 감독해야 할 상관도 역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라고 썼다. 청나라를 향해 북상하면서 성매매와 성폭력을 자행한 일본군은 조선 남부지방에서는 농민군을 대량 학살하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1895년 청일전쟁이 종결되면서 그 전리품으로 일본은 타이완을 점령하게 되었는데, 일본은 타이완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위해 ‘성적위안시설’을 개설하였다. 1896년 타이베이현령(台北縣令) 갑 제1호 ‘가시자시키 및 창기 취체규칙’의 제정은 타이완에서 공창제가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별요리점의 발명 19세기 말 일본이 타이완에서처럼 조선에 노골적으로 공창제를 실시하지 못한 이유는 조선에 서구 열강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주요 11개 국가와 수호통상조약을 맺었고 서울에는 9개국의 공사관이 있었다.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영문 잡지에 실은 이도 서울에 주재했던 서양인이었다. 이런 정세를 의식한 일본이 공창제를 대신해 발명한 것이 ‘특별요리점’이었다. 요리점에서 고객을 접대하는 여성을 ‘예기’ 혹은 ‘작부’라고 부르고, 그 안에서 이뤄지는 성매매를 은폐하며 민간 업자에게 부도덕성의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송연옥 사진 정리.001.jpeg 가즈키 겐타로가 펴낸 『조선국 부산 안내』(1901)에 실린 광고[사진 3-2]를 보면 요리점으로 기재하고 있지만 옆에 가시자시키, 즉 유곽이라고 나란히 적어 놓아 성매매를 숨기지 않고 있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러일전쟁 이전에 이미 일본인이 조선 여성을 ‘고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가시자시키가 아닌 요리점이라 할 때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대표적인 것이 세수입의 증가였다. 요리점은 가시자시키보다 세율이 높아서 고액의 세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겉으로는 공창제를 금지한 것처럼 꾸며 놓았지만 더 많이 얻게 된 이익을 바탕으로 공창제를 재개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을 기다렸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러일전쟁과 군의들이 증언하는 '위안소' 개설 명성황후 시해사건 2년 후,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 지배에 방해가 되는 러시아를 상대로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양국 사이에서 중립을 선언하는 대한제국을 군사력으로 짓밟아버렸다. 서울을 점령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대한제국에 강요하였는데 그 내용은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의 제공, 군용지의 수용(収用) 등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중에 일본은 군대가 운용하는 ‘성적위안시설’을 설치하였다. 제4군 군의 부장을 역임한 후지타 츠구아키라(藤田嗣章)는 회고록 『전역의 회고와 전후의 경영(戦役の回顧と戦後の経営)』(1934)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증언을 하였다. 철령(鉄嶺. 랴오닝 성)의 병참(兵站)부는 시험적으로 일정한 지역에서 사창을 허가하고 병참 헌병이 단속하고 감시하게 했다. 여성들에게는 매일 오전에 군의가 성병 검사를 하고 합격자에게는 건강증을 발급, 병사들을 저렴하게 접대하게 했다. (시설) 입구에 나무 울타리를 치고 한 사람씩 점호(点呼)하고 나서 제한된 시간 내에 이용하게 했다. 여기서 후지타는 ‘위안소’라는 말은 안 썼지만 시설이나 관리 방법이 우리에게 기시감이 있는 ‘위안소’와 같다. 또 후지타는 그런 시설이 1895년 타이완을 점령했을 때부터 있었다고도 썼다. 러일전쟁 중 최대의 전투가 펼쳐졌던 봉천(현 심양) 부근에서 근무했던 군의관 나카무라 료쿠야(中村緑野) 역시 위안소에 관해 언급하였다. 그 내용은 후지타가 쓴 것과 비슷하지만 자신들이 병사를 관리하려고 만든 것임에도 병사에 대한 군의로서의 멸시감이 담겨있다. 드디어 임시 매소제(売笑制, 매춘제)를 허가하게 되었는데 상인을 시켜서 신원에 문제가 없는 만주인 작부를 데리고 왔다. 화류병(성병)에 감염되지 못하게 병사들에게 적절한 방법을 실행시켰다. 옆으로 긴 건물을 벽으로 나누어 각 방마다 출입구를 따로 만들었다. 건물 앞에는 나무로 된 낮은 담을 세우고 입구를 몇 군데 마련해서 혼잡하지 않도록 헌병의 감시 하에 이용하는 병사들을 차례로 방에 들여보내게 했다. 병사들이 수치심도 없이 건물 앞에 줄줄이 서있는 모습이 참으로 어리석고 가소로우며 전쟁터가 아니면 못 보는 괴상한 장면이었다. 주목할 것은 글을 쓰는 군인에 따라 사용한 명칭이 다르다는 점이다. 후지타는 사창제라 하고 나카무라는 매소제, 다른 군인은 공창제라고 썼는데, 이 시기에는 같은 시설이라도 호칭이 일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칭만 보고 선입견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후지타와 나카무라의 글이 실린 회고록은 1934년에 간행되었는데,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에게 참고하라고 엮은 것이었다. 송연옥 사진 정리.002.jpeg ‘위안소’는 가설 목조건물일 때도 있었으나 기존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진 4]의 좌측 그림은 봉천 북쪽 국경의 문인 법고문(法庫門)에서 일본 병사들이 여성들을 고르는 광경을 묘사한 것인데, 그 장소가 관제묘, 즉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를테면 한국의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을 모시는 사당에 위안소를 차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부끄러운 만행을 현지 사람들이 어떤 심정으로 바라봤을지 짐작할 만하다. 송연옥 사진6.jpg 이런 임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새로운 시가지를 조성하여 유곽을 건설하기까지 했다[사진 5]. 성매매 업소를 한자리에 모아 놓는 것이 단속하기에 효율적이고 위생상으로도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1904년 안동(현 랴오닝성 단동)에서 개설한 유곽은 '유원지' 라고 이름 붙였다. 유곽의 여성에게는 성병 검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성병 환자는 입원시켜 치료받게 했다. 여성의 영업 허가 연령은 일본보다 두 살 어린 16세였는데, 16세 미만이라도 성병 검사만 받으면 영업을 묵인했다. 1905년 작성된 규칙을 보면 예기 4엔, 작부 3엔, 중거(仲居. 나카이. 여관이나 요리점에서 고객을 접대하는 여성) 2엔, 하비(下婢. 하녀)1엔씩 매달 병참사령부에 세금을 납부하게 했다. 이는 군대가 포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유원지는 군정(軍政)에서 민정(民政)으로 이양된 후 민간인 업자에게 불하되었고 군인이 아니어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작부는 연령 규정이 없었으나 1930년부터 만 17세로 정해졌다. ‘위안부’ 제도는 식민지 성관리 정책의 연장선 러일전쟁 당시 일제는 한국을 병참기지로 삼으며 한국주차군을 편성하였다. 이후 1907년 고종의 퇴위와 한국군의 해산에 반발한 의병들이 일제에 항쟁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더 많은 군대와 헌병을 파견하였다. 의병 투쟁을 어느 정도 진압한 후 1908년 제정된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은 조선에서 성병검사를 포함한 성관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이는 일본 병사들을 위한 조치였으나,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을 고려해 마치 조선인들이 성병이 만연할 것이 두려워서 스스로 성관리를 요구한 것처럼 꾸몄다. 이후 서울 외의 지역에도 차츰 일본인을 상대로 한 성관리 규칙을 만들었고 1916년에 ‘식민지 공창제’를 전면으로 도입했다. 당시 일제가 제정한 성관리 내용을 보면, 일본 내지의 공창제와 달리 창기 허가 연령을 제국의 서열에 맞게 규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본 ‘내지’는 18세, 조선은 17세, 관동주와 타이완은 16세로 정해 여성들을 식민지나 전쟁터로 인도한 것이다. 이렇듯 일본제국의 성관리 정책은 상황에 따라 명칭과 내용을 바꿔가면서 실행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국가의 책임은 안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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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자료해제 일본 군인에게 '위안소 이용'이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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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인 회고록 읽기] 일본 군인에게 '위안소 이용'이 의미하는 것 '위안소'를 이용한 일본 군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세세하게 상기하며 자유롭게 집필한 많은 회고록을 남겼다. 자기를 만족시켜주고 따뜻한 정서가 있는 장소, '목숨의 세탁소', '공동변소', 안정제, 권리, 남자가 되는 과정…. 회고록에 남긴 이들의 서술을 통해 그들에게 위안소를 이용한다는 것의 사회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위안소에서 군인을 상대해야 했던 여성은 군인들의 질서 유지와 관리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군인 회고록 중 위안소 이용에 관한 서술에 주목해 위안소가 일본군에게 어떤 기능을 했는지 살펴본다.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나 '위안소'에 관해 많은 기록물을 남겼다. 특히 전 군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상기하면서 자유롭게 집필한 회고록에는 그들의 적나라한 생각이 드러난다. 일본에서 연구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일본전쟁책임자료센터(日本の戦争責任資料センター)'는 1990년대부터 군인들이 펴낸 회고록을 꾸준히 조사해 '위안소'나 '위안부'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사례를 1,000권 가량 발견한 바 있다. 필자는 오래 전 '위안소' 앞에서 웃음을 지으며 줄을 선 일본 군인들의 모습을 담은 기록을 보고 궁금했다. 힘없는 여성들이 거듭되는 성적 행위를 강요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대체 뭐가 그리 즐거웠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자들은 성욕을 참을 수 없는 건가? 전쟁터에서 계속된 싸움이 인간을 이상하게 만드는 건가? 그런데 회고록에서 관련 서술들을 연구하다가 '위안소'를 이용한다는 것의 사회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군인 회고록 중 위안소 이용에 관한 서술에 주목해 위안소가 일본군에게 어떤 기능을 했는지 살펴본다. 위안소에 갈 수 있는 권리 우선 위안소에는 어떤 군인들이 갈 수 있었을까. 회고록에는 초년병은 가기 어려웠다는 서술이 많다.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없고, 선배 병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다 이년병이 되고 후배가 생기면서 할 일이 줄고, 눈치 볼 선배도 적어지면서 위안소에 가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이년병 이상의 군인 대부분은 당연한 듯 위안소에 다니게 된다. 중국 중부지역 산둥성(山東省)에서 종군했던 일반 병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남자만 있는 매몰차고 흥취가 없는 군대 생활에서, 게다가 내일도 모르는 목숨이기 때문에 외출하는 날 찾는 위안소는 모두에게 자기를 만족시켜주고 따뜻한 정서가 있는 장소였으며, 목숨의 세탁소이기도 하여 그날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捜三十二会, 1978: 175-176)." 1937년 중국 중부지역 허베이성(河北省) 부근에 주둔했던 나가이 미치야스(長井通泰)는 다른 표현으로 '위안소'를 말한다. "우리들은 이 작은 집을 '공동변소'라고 부르고, '공동변소에 갔다온다'고 말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필수 불가결한 배설 행위로 본 것이다. 내일 전투에 목숨을 거는 젊은이들에게는 안정제와 같은 의미에서 필요했을지도 모르고, 오히려 일본군은 울적함을 발산하는 장소로 이곳을 장려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와 같이 고향에 약혼자가 있는 사람조차 당연하게 가는 분위기가 되었다(央巧友の会, 1973: 108)." 공동변소, 배설 행위, 안정제라는 표현은 모두 위안소가 군인들의 불안한 마음과 두려움을 달래주는 장소로 기능했다는 것을 거침없이 고백하고 있다. 이는 위안소 여성들을 마냥 '변기'로 취급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군에서 콘돔을 받고 의기양양하게 위안소로 향하는 모습을 기록한 군인들도 많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에 중국 상하이 부근 하이먼(海門)이라는 지역에 있었던 오사다 가즈오미(長田一臣)는 위안소에 간 날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위안소 사용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휴일에 한정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할당된 병사들은 위병소에서 점호를 받아 이름을 확인하고 '사크(콘돔-인용자)'를 받는다. 'ㅇㅇ상등병 이하 ㅇ명, 지금부터 위안소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보고하면 '응, 잘하고 와라!'라고 사령이 격려해주고 대열을 짜서 영내를 나가는데, 이럴 때는 칼을 휴대할 필요없이 무방비로 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겨우 나에게도 그날이 왔다. 위안소에 갈지 말지는 자유 의지이다. 여기에 있다는 것은 오사다 이등병이 위안소 행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長田,2001: 167)." 대열을 짜서 위안소로 향하는 군인 행렬의 일원이었던 오사다 병사는 본인의 행위에 대해 '위안소 행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썼다. 주저 없이 위안소에 다닌 병사들이 많았고, 대부분 의심없이 즐겼다. 즉 '내일도 모르는' 나날 속에 있었던 병사들은 위안소에 가는 일을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나 혜택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자를 모르는 놈 손 들어봐" 그런데 모든 군인이 처음부터 '위안소'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군인들은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에 입대한 경우가 많았고, 성 경험이 없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군인들은 위안소에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민망해하여 스스로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럴 때 동료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신해 위안소에 갈 채비를 해준 것이다. 예컨대 중국 중부지역 산둥성(山東省) 짜오좡(棗荘)에 주둔한 어떤 병사(이름 미상)는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당시 상황을 남겼다. "짜오좡에는 위안소도 있고 (동료들이 나에게–인용자) 동정을 버리도록 억지로 집어넣어 밖에서 문을 잠궈버린 곤란한 일이 있었다(谷四二〇五部隊第一中隊の集い事務局, 1980: 269)." 경리부 간부 후보생이던 니시카와 히로시(西川浩)는 교관에게 위안소에 가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다. "(교관이 명령했다.-인용자) '너희 중에 아직 여자를 모르는 놈 손 들어봐!' 간부 후보생 20명 중 손을 드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3명이었다. 국군(일본군-인용자)의 간부가 되려는 놈은 알고 있어야 하는 일이다. 전우들이 도와줘라. 다음 외출 때에는 남자가 되게 하라." 그래서 난리가 났다. (전우들은–인용자) 책임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저녁 식사 동안 소란스러웠다. 이치리키(一力)의 모모코(桃子)가 좋다던지, 아사히로(朝日楼)의 하루고마(春駒)가 좋다던지, 시노노메의 폰타를 추천한다는 등 소란스러웠다. 이제 다음 일요일에는 산 외에 있는 병료(兵寮)에 모두 다 같이 가서 마실 줄 모르는 술을 억지로 먹이고 지닝(鶏寧) 거리에 나가 모두 삐야(위안소 -인용자)에 직행한다. 나에게는 순한 애가 좋다며 아케보노의 기요코(清子)로 결정됐고, '돌격일번(일본군이 사용했던 콘돔 이름 -인용자)'이 손에 쥐어져 방으로 들여보내졌다. 쓸데없이 참견하는 놈이 있어 합판으로 만들어진 문틈으로 엿보면서 '야, 빨리 바지 내려', '맞다, 좀더 힘을 줘'라고 시끄럽게 한다. 뭐가 뭔지 모르는 사이에 21년 동안 지켜온 동정을 버렸다. 그래서 무링강(穆稜河)에 가까운 찻집 에투알(エトワール)에서 축배를 들었다. 월요일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정렬할 때 나와 다른 2명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서 교관에게 보고했다. '교관님! 니시카와 히로시 외 2명은 어젯밤 훌륭히 남자가 되었습니다. 삼가 보고하겠습니다. 경례!' '훌륭히? 축하한다.'(西川, 1985: 50-51)" 상관이나 동료들, 그리고 본인들도 위안소에 '억지로 갇혀 불편한' 척을 하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성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위안소에 가서 여성들과 성행위를 하는 것은 '훌륭한 남자가 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공유했던 것이다. 그러면 왜 그들은 성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명분'까지 제공하며 위안소에 보냈을까. 미국의 젠더학 및 비판 이론 분야 학자인 이브 세지윅(Eve Sedgwick)이 제시한 '동성사회적(homosocial)'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남성들은 함께 모여 있는 동안 동성애적 욕망을 억압하고 동성사회적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여성을 거래한다. 이를 통해 남성들은 서로가 사회성이 있음을 확인하는데, 이때 여성들은 욕망의 대상일 뿐이다. 이렇게 대상화된 여성을 거래하는 것을 매개로 남성 간 연대는 강해진다. 연대감이 필요했던 군대에서 위안소라는 공간과 대상화된 여성들의 존재가 필요했던 이유이다.. 죽음의 공포 달래기 한편으로 이런 상황에서도 위안소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군인도 존재했다. 이들은 군대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남성으로 살아오면서 대부분 군인들이 배워 익힌 동성사회성 규범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하게 다짐했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통렬하게 느꼈을 때 그 마음이 무너졌다고 토로하는 병사도 있다. "나는 결혼할 때까지는 동정으로 살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시야(西椏) 위안소의 앞을 지나가도 흥미조차 갖지 않았다. 그런데 어젯밤 부상병을 보자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내 몸', 나도 인간인 이상 죽기 전에 한번 여자의 몸을 보고 싶다! 작전을 나와서 수개월 동안 받은 급여도 그대로 있다. 한번 보는 정도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 타이르며 위안소 입구에 들어갔다(近衛歩兵第五連隊史編集委員会 1990: 141)." "초년병이나 이년병들이 '니시무라(西村) 상등병은 고집이 세네. 남자가 맞냐'라고 놀리고, 고참병은 이전부터 빈번하게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우수한 선배 전우가 하나의 탄알로 죽어가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순결을 지켜왔는데, 한 번에 죽지 않고 부상을 당해 몸이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경우 후회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나는 위안소 여성들이 돈을 벌러 오는 줄 알고 있었고, 역시 다른 사람만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小川, 2005: 101)." 이들이 위안소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유를 주목해 보자. 그들은 '결혼할 때까지는 동정으로 살기' 원했다거나 '순결을 지킨다는 이유로 위안소에 가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서 남자 청소년들은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유곽에 가는 것을 금기시하는 교육을 받았다. 교육 관계자는 건강한 가정을 이루고 출세하고 싶다면 결혼하기 전까지 성병에 걸리면 안 된다고 지도했고, 입대 때는 성병 검사를 엄격하게 실시했다. 즉 성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남성들이 행복한 미래를 꿈꾸기 위한 필수 요건이라고 교육받았으며, 그 교육을 잘 따른 군인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규범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쉽게 무너졌다.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황에서 행복한 가정이나 출세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위안소에 가지 않겠다는 다짐도 무너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글을 시작하면서 필자는 회고록을 들여다보면 일본군이 위안소를 이용한 행위의 사회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군인들은 위안소에 가는 일을 '내일도 모르는' 생활, 개인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자신들의 불안과 공포를 대체하는 선택이자 권리로 받아들였다. 또 많은 군인들은 위안소에 가지 않는 동료가 있는 상황을 불편하게 여겼다. 그런 동료들을 설득하고 회유해 위안소 이용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동성사회성을 기반으로 한 관계를 구축하였다. 이때 위안소에서 군인을 상대해야 했던 여성은 군인들의 질서 유지와 관리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출세를 위해 성병 예방을 실천하던 병사들도 죽음을 앞두고는 위안소로 향했다. 여기서도 위안소 여성들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기 위한 도구로만 간주되었다. 결국 '위안소'에 간다는 것은 군인들로 하여금 개인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고, 동성사회성을 기반으로 한 군대를 보다 강고한 조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위안소를 제공하는 것으로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잘 싸우도록 만들었다. 위안소는 일본군이 군인들을 잘 관리해 작전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인용 문헌 - 央巧友の会, 1973, 『白い星』, 私家版. - 小川健次郎ほか, 2005, 『語り継ごう元戦士たちの証言』, リープル出版. - 長田一臣, 2001, 『一陣の風』, 新潮社. - 近衛歩兵第五連隊史編集委員会, 1990, 『近衛歩兵第五連隊史:上巻』, 私家版. - 捜三十二会, 1978, 『黄塵:捜索第三十二連隊第二中隊史』, 私家版. - 谷四二〇五部隊第一中隊の集い事務局, 1980, 『山と湖と黄塵を征く:谷四二〇五部隊第一中隊史』私家版. - 西川浩, 1985, 『私の大東亜戦記』, 私家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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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인터뷰 ‘폭력’의 본질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은유 - 『용맹호』 권윤덕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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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작가 권윤덕의 신간 『용맹호』(사계절, 2021)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전쟁의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전쟁에는 온갖 폭력과 잔인함, 묵인과 공조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전군인의 몸에 그대로 남는다. 전쟁이 끝난 후 살생보다 생명에 가치를 두는 일상을 살아야 할 때, 그 간극에서 참전군인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작가의 말을 통해 그가 던진 질문을 곱씹어본다. 권 작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꽃할머니』(사계절, 2010)부터 『나무 도장』(평화를품은책, 2016), 『씩스틴』(평화를품은책, 2019), 그리고 최근의 『용맹호』까지 여러 작품을 통해 전쟁과 폭력, 가해와 피해에 대한 관점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용맹호』는 『꽃할머니』를 마무리한다는 마음으로 작업했다는 점에서 두 작품 사이의 연결고리를 주목할 만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국가 간의 갈등이 아니라 ‘전쟁과 여성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가해를 함께 다뤄야 『꽃할머니』도 끝맺을 수 있겠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10년 후 『용맹호』로 비로소 이야기의 매듭을 지었다. 그사이에 출간한 『나무 도장』과 『씩스틴』에서는 각각 제주 4.3사건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한국 근현대사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했다. 그림책을 통해 한국 역사 속의 ‘폭력’을 지적해온 작가가 앞으로 남겨둔 이야기는 무엇일까. 우리의 아픈 역사를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시각으로 써 내려온 권윤덕 작가를 만나 함께 나눈 대화를 전한다. Q. 『용맹호』 출간 이후 어떤 나날을 보내고 계시나요? 강연도 나가고, 독자들과 만나는 시간도 갖고 있어요. 『꽃할머니』를 끝내고 난 뒤 베트남전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10년이 넘어서야 책이 나왔네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성해낸 걸 자축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웃음). Q. 『꽃할머니』 작업 이후 베트남전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꽃할머니』 작업을 하면서 일본군‘위안부’의 아픔에 공감했던 일본 및 세계 여성들의 활동을 알게 되었어요. 특히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법정 자료를 읽으면서 한국군이 베트남전 당시 저지른 잘못에 대해 돌아보게 됐고, 가해국 국민으로서 무언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 결과, 다음 책에서는 베트남에 참전한 한국군 이야기를 해야 『꽃할머니』가 완성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Q. 『꽃할머니』와 『용맹호』 사이에 그림책 『나무 도장』과 『씩스틴』을 출간하셨어요. 그 이야기들은 어떻게 다루게 된 건가요. 『나무 도장』에서는 처음으로 (권력의) 수행자이자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어요. 가해자이긴 하지만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을 어느 정도 반성하고 되돌아보는 사람이죠. 누구한테나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거든요. 『씩스틴』에서는 계엄군이 주인공이지만 그 외형을 ‘총’으로 표현했어요. ‘씩스틴’은 마지막에 광장에 남아 생명을 살리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두 책의 출간 과정을 거치면서 가해자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게 됐고, 성격은 다르지만 ‘용맹호’라는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죠. Q. 그렇다면 ‘용맹호’가 호랑이로 묘사된 것도 그러한 맥락과 관련이 있을까요? 『꽃할머니』에서는 실제 인물의 증언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다큐멘터리처럼 진실하게 다가오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아쉬움이 있었죠. 그래서 『씩스틴』에서는 실제 인물 대신 총을 주인공으로 했어요. 『용맹호』도 마찬가지예요. 주인공을 참전군인인 사람으로 설정하면 그 배경과 상황에 현실적 제약이 많아요. 그러나 호랑이로 설정하면 이야기의 폭이 훨씬 넓어지죠. 가슴이나 귀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도 사람에게 적용했다면 어색했을 거예요. Q. ‘용맹호’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할 때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이 있었다면요. 용맹호 씨는 자신의 과거를 몸의 고통으로 직시해 갑니다. 그는 폭력의 구조 속에서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사람이고, 그 죄업이 자기 몸에 그대로 나타나죠. 그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착한 참전군인’이 되어서는 안 됐어요. 만약 그렇게 묘사한다면 “가해자도 피해자다”라는 식으로 가해자를 두둔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실로서의 가해 행위, 그 잔혹함을 있었던 그대로 드러내야 가해자가 겪는 트라우마도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법이고, 따라서 용맹호 씨는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 등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이어야 했어요. 그것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어요. 몸에 신체가 덧붙여지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은 퐁니·퐁넛 마을 학살사건[1]의 피해자 사진을 보고 나서였어요.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학살 후 퇴각한 곳을 미국군이 들어가서 사진으로 기록을 남겼거든요. 그중에 ‘가슴이 잘린 채 살아있는 여자’라고 설명을 달아놓은 사진이 있어요. 가슴이 잘린 끔찍한 고통을 직접 그릴 수는 없었기에 반대로 가슴이 생겨난 것으로 풀어냈죠. 전쟁이란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Q. 성폭력 장면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으셨다고요. 처음엔 성폭력 장면을 추상적으로 그렸어요. 퐁니·퐁넛 마을 학살사건 사진을 보면 여성이 쓰러져 있는 곳이 논이에요. 그래서 벼가 눕혀져 있고, ‘논라’[2]가 떨어져 있고, 슬리퍼가 나뒹구는 장면으로 그렸죠. 그런데 그 장면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보니 성폭력을 표현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더라고요. 의미가 직관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떤 상황을 설정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베트남 활동가 레호앙응언 님과 구수정 선생님(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에게 자문을 구했어요. 소개해 주신 한겨레신문 기사(할머니의 어떤 기억, 2015.04.24.)도 읽었고요.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이 실린 기사였죠. 놀라운 건 당시 막사에서 성폭행을 당한 분들이 많다는 거였어요. 팜티언이라는 분의 증언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할머니는 꾸이년의 고보이 평야에서 체포되어 뚜이프억현 프억선의 한국군 기지로 끌려갔다. 기지에는 일렬로 나란히 참호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참호 속에 한국군이 1인씩 들어가 있었는데, 그 속에 끌고 온 여성들을 집어넣었다. (출처: 한겨레, 할머니의 어떤 기억, 2015.04.24.)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꽃할머니』에 썼던 내용과 너무 똑같아서 깜짝 놀랐어요. 전쟁 상황에서 여성이 겪는 피해의 구조가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걸 알았죠. 막사를 사건 배경으로 그릴까도 생각해봤지만, 베트남전에서는 마을 수색을 나간 군인들이 여성들을 숲이나 뒷집으로 끌고 가 성폭행하는 상황이 훨씬 많았다고 해요. 그래서 기사 내용 중 레티히에우 할머니의 사례를 참고했어요. 그의 증언에 한국군이 성폭행 후 옷을 벗겨 얼굴을 가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미지가 강렬하게 그려졌죠. 뭉텅뭉텅 잘려 나간 검은색 옷으로 당시 상황을 표현했어요. Q. 『용맹호』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심각하고 무거운 반면 그림과 색감이 참 아름다워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요. 『꽃할머니』 작업 초반에는 무섭고 끔찍한 그림들로 스케치를 했었는데 심달연 할머니에게 못 보여주겠더라고요. 그때 내가 누구를 위해 이 책을 만들고 있는 건지 다시 한번 돌아봤어요. 심달연 할머니가 이 책을 보고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고, 당신이 살아온 삶이 소중하다는 걸 느낄 수 있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꽃으로 대신하며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직접적인 폭력을 그리는 대신 은유와 비유, 상징을 빌어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한 거예요. 아픈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꽃할머니』 때 알게 됐어요. 이후 작품에도 자연스럽게 묻어나게 됐고요. 특히 『용맹호』에서는 베트남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 속에서 인간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을 대비시켜 얘기해보고 싶었어요. Q. 혹시 베트남 독자들과의 만남도 염두에 두고 계신가요? 베트남 퐁니‧퐁넛 민간인 학살 피해자분들이 한국에 오시면 책을 보여드리고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베트남 사람뿐만 아니라 한국 학교에 다니는 베트남 출신 어린이는 이 책을 어떻게 볼까 궁금해요. 베트남에 번역 출간될 수 있기를 바라고요. 또 참전군인 중에는 자신의 가해 사실을 인정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분들의 얘기도 듣고 싶어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얘기할 기회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Q. 가해자를 받아들이는 게 어려운 일인 만큼 사회적으로 다양한 논의가 오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심아정 독립연구가가 ‘가해자성’에 대해 쓴 글이 있어요. “자기도 모르게 했던, 혹은 자기가 서 있는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 행해진 잘못들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인정하려 드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여기에서 자기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의 토대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해자성’의 핵심”[3]이라고 했죠. 우리 사회가 용맹호 씨를 용서할 수 없더라도 그를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회가 가해자라는 낙인을 찍어서 몰아내면 용맹호 씨는 폭력을 만들어 낸 단단한 구조 속에 숨어버리고, 끝내 잘못을 시인하기 어려워질 거예요. 가해자가 자신의 가해를 인정하고 참회할 기회를 줄 수 있는 시민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용맹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시민들이 쓰러진 용맹호 씨를 위해 달려오고 119를 불러주잖아요. 그 장면을 통해 이제 시민사회가 나서서 이 문제를 이야기할 때라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Q. 『용맹호』는 폭력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더라도 ‘용맹호’가 어떤 가해를 저질렀고 또 그로 인해 어떤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폭력의 재현에 있어 작가님이 생각하는 적절한 방식은 무엇인지요. 저는 폭력을 재현해놓은 걸 보면 누군가 모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폭력 장면에서 가학적인 면을 즐기거나 본인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할까 봐 폭력을 그대로 그릴 수 없더라고요. 더욱이 어린이가 보는 그림책에서는 더 조심하게 됩니다. 그럼 폭력을 그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폭력을 이야기할까, 매번 어려워요. 그래서 상징과 은유의 방법을 빌어와 이야기합니다. 현상과 함께 폭력이 작동하는 구조를 함께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Q. 『꽃할머니』, 『나무 도장』, 『씩스틴』, 『용맹호』 등 한국 근현대사 속 ‘폭력’을 이야기하는 그림책 작업을 계속해오고 계세요. 이를 통해 근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무엇인지, 또 작가님이 생각하는 ‘평화’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폭력의 구조에 관심이 많아요. 그것은 오랜 기간 공고하게 유지되어온 것이기 때문에 잘 무너지지 않아요. 하지만 피해자의 증언은 폭력의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지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전시 성폭력 속에서 여성 인권의 문제를 보게 합니다. 아직 많은 이해관계에 얽혀있지 않은 어린이의 시선도 폭력의 단단한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요. 평화로운 사회, 즉 누구든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고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폭력의 구조부터 점차 허물어 가야 해요. Q. 예비 독자분들이 『용맹호』를 보고 어떤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나요. 용맹호 씨는 자신이 저지른 가해 사실을 몸의 변화를 통해 고통스럽게 겪어갑니다. 독자가 그것에 공감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든지 가해 구조 속에 들어가게 될 수 있거든요.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자신의 심지를 잃지 않으면 좋겠어요. 용맹호 씨는 피해를 품은 가해자의 자리에 서 있어요.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은 ‘전쟁과 여성’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로서 일본군‘위안부’와 함께 이야기될 필요가 있고요. 또 베트남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우리의 잘못을 물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아시아의 평화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요. Q. 앞으로 그림책을 통해 또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으신지요. 『용맹호』를 끝내고 나서 아픈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고 재미있는 걸 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 아픈 이야기는 바로 세월호 이야기인데요. 큰 틀에서 구성은 짜놨지만 세세한 증언을 모두 읽어낼 자신이 없어서 당분간 멈췄어요. 그림을 그릴 때 피해자의 고통에 몰입하다 보니 『꽃할머니』나 『용맹호』 작업 중에 몸이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조금 쉬어가야 하나 보다 싶어요. 『꽃할머니』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15년 정도를 해왔으니 변화를 줄 때도 되었고요.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가벼워지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용맹호』에서 자연을 그릴 때 많이 위로가 됐는데, 앞으로 자연과 생명을 노래하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Q. 작가님에게 그림은 또 다른 ‘언어’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림은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하얀 화판 앞에 앉아서 선을 하나 그으면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해요. 어떤 상황 속으로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고 감정이 끌어올려지기도 하죠. 그게 선으로 색으로 여백으로, 제가 의도하지 않은 우연과 함께 화면에 그려져요. 그리고 한 화면 속에서 이리저리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찾아가죠.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기도 하지만 즐거움 또한 있어요. 다른 어떤 일보다 재미있고 평생 하고 싶은 일이죠. Credit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권윤덕 작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10월 27일 수요일 장소: 권윤덕 작가 자택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각주 ^ (편집자 주) 1968년 2월 12일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부대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 마을의 주민 70여 명(69~79명 추정)을 학살했다는 의혹의 사건 ^ (편집자 주) nón lá. 야자나무 잎사귀로 만든 원뿔 모양의 베트남 전통 모자 ^ 심아정,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참전군인A와 ‘함께 말한다’는 것」, 『베트남전쟁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자료집』, 2018년,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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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2023년 제2차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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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결〉 콘텐츠가 업무나 연구 활동에 얼마나 유익한가요?” “웹진 〈결〉에 전하고 싶은 의견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여러분의 소중한 참여로 만들어진 2023년 제2차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결과를 소개합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기 위해 온라인 공간에 자리를 마련한 지 어느덧 4년이 지났습니다. 웹진 〈결〉에 늘 한결같은 성원을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보내주신 의견을 참고하여 2024년에도 더 좋은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