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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3) 강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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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숙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중이며 한국근대 여성사를 전공하였다. 정신대연구소,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 규명과 더불어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의 증언 녹취 작업을 진행하는 등 초창기 ‘위안부’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주요 논저로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 조사』, 「제2차 세계대전기 인도네시아 팔렘방으로 동원된 조선인의 귀환과정에 관한 연구」 「일본군성노예제문제와 관련한 남북교류와 북측의 대응」, 「일본군 위안소 업자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Q. 강정숙 선생님을 잘 모르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 독자분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도 말씀해주세요. 저는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사(농민운동)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여성사를 하면서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느껴 1992년부터 한국정신대연구회에 들어가 조사연구하기 시작하여,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2010년에는 <일본군'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에도 이 주제를 비롯하여 여성사와 관련된 연구활동 등을 해왔습니다. 제가 처음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건 고등학교 때 읽은 소설책을 통해서였어요. 집에 ‘위안부’를 소재로 쓴 책이 한 권 있었는데, 제목도 기억이 안 나요. 일본 책이 번역되어 들어왔던 것 같아요. 여성들을 굉장히 성적 대상으로 삼아서 쓴 책이었어요. 읽고 굉장히 불쾌해서 태워버렸어요. 아버지 책인데 그리 중요한 책은 아닌 것 같아서.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부터예요. 90년대에 『한국여성사 근대편』을 쓸 때 ‘위안부’ 부분을 제가 쓰게 되면서 이 문제가 민족, 계급, 젠더 등 다양한 문제들이 농축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가 마침 ‘위안부’ 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였어요. 1992년 3월에 제가 한국정신대연구회(이후 한국정신대연구소)에 가입했거든요. 원래 한국여성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있던 연구자 한 분이 한국정신대연구회에 역사연구자가 부족하니 저에게 같이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파견 나간 기분으로 정신대연구회로 갔죠. 그런데 그게 잠시가 안 되더군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피해자 할머니들과 만나고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Q. ‘위안부’ 문제 연구 중 선생님께서 가장 주목하고자 했던 부분은 어떤 것이었나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부정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근거 자료를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 유수명부’와 같이 할머니 이름이 적혀 있는 수용소 명부, 귀환자 명부 같은 것을 저의 연구 주제로 삼았죠. 이러한 명부들은 당시 현장의 미묘한 부분들을 보여주는 아주 귀중한 자료죠. 그렇지만 제가 발굴했던 명단들은 엄밀히 말하면 ‘위안부’ 명단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명단에 있는 할머니들이 진짜 ‘위안부’였는지 아닌지는 제가 증명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직접 할머니를 찾아가 증언을 듣거나, 그 외의 군인 군속 등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교차 조사를 했죠. 그래서 결국 사실이라고 확인되었을 때 연구자로서 보람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리고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에도 관심을 가졌어요. ‘강제적’인 동원이라는 말도 고민해봐야 해요. 만약 ‘강제’가 ‘물리적인 강제’만을 뜻하는 것이라면, 저는 ‘강제’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아요. 물리적인 강제 동원도 있었지만, 물리적인 강제 없이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것도 있단 말이에요. 구조적인 측면에서 ‘위안부’ 제도는 공창제와 다름이 없어요. 공창제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강제성과 폭력성이 있잖아요. 강제라는 의미를 폭넓게 이해해야 해요. 이 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과제라고 봐요. 지금 우리 사회는 ‘위안부’ 제도와 공창제를 구분하는 데 관심이 있지, 서로 연동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잘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이걸 대중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한데 자꾸 뒤로 미뤄요. 저의 바람이자 과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일본 욕만 하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문제의식은 무엇이고, 어떤 도덕적 기준을 가져야 하는지 논의를 확장하는 거예요. Q. 선생님께서 처음 만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누구인가요? 당시 구술했던 정황들이 궁금한데요. 그때가 할머니들께서 당신들의 존재를 이제 막 드러내는 시기였기 때문에 취재 형식의 짧은 인터뷰를 참 많이 하셨어요. 그러다 증언집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죠. 당시 저는 강덕경 할머니와 박옥련 할머니를 만났어요. 증언집 1집에 이야기들이 들어있죠. 당시 제 나이가 35, 6세 정도 됐을 때예요. 할머니 눈에는 당시의 제가 완전 새댁이었어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말을 가려서 하시더라고요.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으신 거예요. 할머니들이 봤을 때 저는 딸뻘이고 세상의 쓰라린 맛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하신 거죠. 그리고 당시는 국민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관한 관심이 높았던 시기잖아요. 관심이 너무 지나치면 사실 연구하기가 쉽지가 않은 부분이 있어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안부'의 이미지가 있었어요. '처녀'여야 하고,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물리적 폭력을 당해야 하고, 엄청난 학대를 당해야 하는 거죠. '위안부' 피해자를 생각하는 일반적인 이미지가 그렇잖아요? 할머니들은 그전까진 어디 가서 자기가 피해자라고 말하지도 못했던 약자였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피해 사실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안부’ 피해자 이미지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봐 두려움을 갖고 있었겠죠. 그러면 할머니들이 말을 어떻게 하겠어요? 실제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원하는 이미지 틀에 맞춰요. 그게 제일 편하고 안전한 거예요. 그래서 연구자는 할머니의 증언을 가려들으면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해요. Q. 말씀하신 것처럼 ‘위안부’ 연구 초창기에는 연구를 진행하시기에 어려웠던 점도 많았을 것 같아요. 혹시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1996년 무렵이었나. 일본 방송국 NHK에서 같이 조사를 하자고 의뢰가 왔어요. 필리핀 수용소 기록에서 발견된 피해자 중 한 분인 김소란 할머니를 같이 찾아보자고요. 그래서 필리핀 수용소 기록을 들고 일본에서 할머니를 찾기 시작했어요. 그때 저하고 여순주 선생님이랑 같이 조사를 했어요. 당시 할머니의 한국 출신지 면사무소 도움을 받아서 제적부를 찾았죠. 그때는 제적부를 개인이 볼 수가 있었어요. 지금은 못 보죠. 그런데 할머니가 미국에 계시더라고요. 미국에 계신 할머니의 연락처를 간신히 찾아내고 당시 LA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결국 할머니를 찾긴 찾았어요. 그런데 빠뜨린 게 있었죠. 할머니의 입장은 어떨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료의 사실을 확인한다는 생각만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에 ‘이게 할머니한테는 엄청난 충격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것은 할아버지가 이 할머니의 과거사를 다 아시고 결혼을 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할머니는 영주권 때문에 잠깐 미국에 가 계셨던 거고, 원래 생활은 한국에서 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할머니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죠. 그렇지만 당시 할머니가 건강 상의 문제가 있었고, 이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셨기 때문에 저희한테 사진 한 장 안 남겨주셨어요. 김소란이라는 이름도 가명이에요. 김소란 할머니의 구술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3에 있는데, 거기엔 포로수용소에서 찍힌 사진이 조그마하게 실려있어요. 연구자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알아내고 싶어 하잖아요. 할머니가 어떤 심정일지를 생각을 잘 못 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할머니 삶이 일차적이고 중요한 거죠. 오키나와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뻔했는데, 오키나와에 있는 활동가 선생님이 “그게 할머니한테 뭐에 도움이 되는 건데?” 이렇게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선배란 이런 거구나’ 그런 걸 느꼈었는데요, 그래서 스톱 했어요.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할머니의 생활과 미래 등을 고려했을 때 도움이 안 되는 것이 많더라고요. Q. 지금은 역사학계 안에서 구술사가 방법론으로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런 시각을 바꾸게 한 것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었던 것 같아요. 구술 작업을 하시면서 특별히 신경을 쓰셨던 부분들이 있었을까요? 할머니는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정확하지 않죠. 오래된 기억인데다가 트라우마도 있으니까요. 그런 부분을 우리가 이해해야 해요. 그래서 할머니 구술 중의 특정 내용을 어떤 시간에, 어떤 공간에 위치해야 하는가를 계속 고민하고, 반복해서 질문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그 전의 이야기와 엉키거나 그 전의 이야기가 번복되기도 하고 그래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이야기를 해야 할머니가 어떤 맥락에서 이야기하는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어요. 할머니가 거짓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구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거죠. 게다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담긴 증언집이 일본 우익에게 부정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굉장히 조심스러운 접근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구술사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방법적인 부분은 굉장히 미숙했다고 봐야죠. 그때 우리 사회가 짜임새 있는 방법론을 전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은 할머니는 이렇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걸 이렇게 본다, 이렇게 한 거죠. 대부분의 사회문제 해결이 운동이 선행되고 연구가 뒤를 따르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구를 놔두고 운동만 앞서서 진행되면, 연구자가 해야 할 말을 못 하는 경우가 생겨요. 예를 들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만든 영화나 연극 같은 것이 역사적 연구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지면 굉장히 자극적인 것 위주로 연출하게 되고, 사실과 점점 멀어질 수가 있는 거죠. ‘위안부’ 연구도 비슷한 문제가 있습니다. Q. 아까 군인 군속 등 할머니 외에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는데, 좀 더 부연 설명해 주시겠어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보다 당시 현지에서 일했던 군인 군속들이 비교적 좌표가 잘 잡혀요. ‘위안부’ 피해자가 있었던 지역에 동원됐던 군인이나 군속, 노무자 이런 사람들이요. 우리가 그 당시에 산 사람이 아니어서 감이 안 잡히는 부분을 이 할아버지분들은 말을 해줄 수 있어요. 게다가 이 할아버지 중엔 위안소를 갔던 분도 계시거든요. 이 ‘위안부’가 누구다라고까지는 말을 못 하지만, 당시 그곳에 위안소가 몇 개가 있었고, 대략 몇 명이 있었는지는 말해줄 수 있는 거죠. 할머니들의 증언과 함께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교차 조사가 되고 훨씬 더 풍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그래서 제가 군인 군속을 조사하고 연구도 했는데, 연구자금이 부족하다 보니까 중요한 기회와 많은 분을 놓쳤어요. 그때가 그분들도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의 시간이었는데, 시간을 많이 놓쳐버렸어요. 지금은 살아계신 분이 별로 많지 않을 거예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후학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연구자들은 자기가 관심이 있는 쪽에서부터 시작을 하게 될 텐데요. 연구할 때 연구하려는 방향, 내용 이런 것들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면, 잠시 멈춰서 스스로 생각하는 연습을 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 자기식으로 찾아보고 연구하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거기에 대한 소신이 있으면 더 좋고요. 예를 들면 민족주의적인 감정으로 쓰인 연구들도 있잖아요? 이럴 때 감정적으로 동의는 되지만 역사 자료를 보면 이렇게 말하지 않는데? 하고 의심할 수 있는 감, 그런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야 새로운 연구가 나올 수 있고, 의미 있는 연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냥 따라가는 거죠. 새로운 연구를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Q.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신 거 같아요. 기존 연구 자체가 만들어 놓은 어떤 틀이 후학들에겐 때론 장벽이 될 수 있는데, 거기에 매몰돼서 쫓아가기보다는 과감하게 문제 제기 해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려면 적어도 10년을 할 생각을 하고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단기적인 프로젝트로 연구자를 키울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연구자를 키워야 한다는 거죠. 연구를 맡겼으면 한 번 발표시키고 끝낼 것이 아니라 2탄, 3탄 계속할 수 있게끔 기회를 줘야 해요. ‘위안부’ 문제는 꾸준히 하지 않으면 정말 어려운 주제예요. 티끌만 한 자료 하나 가지고 끄집어내고 해석해야 하거든요. 크게 안 보여요. 작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꾸준히 계속할 수 있게끔 연구 지원을 해줘야 해요. 이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와 같은 곳이 생겼으니까, 이 기관에서 지원을 꾸준히 해줬으면 좋겠어요. 당장 연구 성과를 내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얼마큼 성실하게 연구를 이어가느냐 중요해요. 성실하게 연구를 해야 뭐가 나와요. 이른 시간 안에 자꾸 큰 거를 요구하면 오독이 나와요.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Interveiwer : 소현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Interviewee : 강정숙 정리 : 슬로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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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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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림의 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991년 8월 14일, 대한민국 생존자 최초로 김학순 님이 공개 증언하고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한 세대의 통념적 주기가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초국적 참조점이 된 동시에, 여전히 ‘현재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웹진 결은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11주년인 2022년을 맞아, 경계를 넘어 ‘위안부’ 역사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조명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온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로 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맞선 젊은 여성들,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비판적 담론을 생산하고 후속세대를 교육하는 연구자들, 전쟁과 제노사이드, 이민자와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해외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위안부’ 역사의 교훈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시죠.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들어가며 1990년대 초기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이하 ‘’생략)재판이 일본에서 총 8건 시작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한국인 2건, 재일한국인 1건, 중국인 2건, 대만인 1건, 필리핀인 1건, 네덜란드 1건입니다. 관부재판의 특징은 피고 일본국의 수도 도쿄가 아니라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 있는 재판소에 제소되었다는 점과 원고 10명 중 위안부 원고는 3명, 그 외는 여자근로정신대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1심 재판에서 위안부 원고가 승소하여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재판이라는 점입니다. 부산 정대협(고 김문숙 회장)에 신고한 위안부 피해자와 여자근로정신대피해자 각각 두 분이 1992년 12월에 야마구치재판소 시모노세키지부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회와 유엔에서 공식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제소하였습니다. 후쿠오카에 피해자분들을 모시고 재판지원을 준비하고 있던 우리 회원 10여명이 직접 요리를 만들어 나누면서 환영회를 열었습니다. 원고의 한 분이셨던 박두리 님은 “일본인은 모두 악마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친절하게 해주는 거냐”고 말씀하시며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지원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던 만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진행된 추가 제소에서는 위안부 원고 3명, 여자근로정신대 원고 7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원고들이 관부(関釜) 페리 연락선을 타고 와서 재판에 참여한다는 뜻에서 통칭 ‘ 관부재판’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원모임의 연회비 3,000엔과 후원금은, 원고들의 재판을 위한 연 4회 도항비, 체류비, 관부재판 뉴스레터 발행비용 등으로 썼습니다. 원고 분들은 우리 집과 교회에서 숙박하고 지원모임 회원들과의 식사 모임과 교류회를 통하여 점차 친분과 신뢰를 쌓아갔습니다. 방청석을 가득 채운 지원자들이 경애의 마음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원고들은 재판에서 일본국 대리인에게 피해를 호소하고 규탄하였습니다.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자존감을 회복하시며, 재판을 이유로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즐거워하시게 되었습니다. 1998년 4월 27일 시모노세키 판결이 나왔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가혹한 피해가 받아들여져 승소하였습니다. 일본정부에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입법조치를 명하는 획기적인 판결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여자근로정신대 원고는 “위안부 원고에 비해 피해가 가볍다”는 이유로 패소하였습니다. 그 후, 원고와 피고 모두 상급 법원에 항소하였습니다. 히로시마고등재판소의 재판관은 국가에 ‘위안부’ 이슈와 관련하여 이견을 말할 수 있는 줏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심은 2001년 3월에 패소하였으며, 2003년 3월 최고재판소에서 상고 기각되었습니다. 여자근로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 2021년 1월과 4월에 서울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소한 재판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판결문의 “위안부 모집”항목에 “학교 등을 통해서 모집하는 방식”, “근로정신대 *** 동원 방식”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재판소에 제출한 역사 인식과 관련한 내용은 정대협(정의연)이 작성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이용수 님은 2020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정대협의 윤미향 님을 향한 기자회견을 열어 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는 다르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용수 님은 관부재판, 히로시마 고등재판소 재판 지원 모임에 여러 차례 참가하셨습니다. 당시 교류회에 참석한 근로정신대 원고 한 분이 “해방 후, 정신대인데 위안부라고 잘못 알려져서 부끄러웠다”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이용수님은 “나는 부끄럽지 않다. 부끄러운 것은 위안부 제도를 만든 일본정부다”라고 말씀하시며 격노하셔서 발언자가 사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용수 님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 가운데 위안부라고 여겨져 가정폭력이나 이혼을 당하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고생하며 산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되셨습니다. 저는 그 때문에 2020년 회견에서 이용수 님이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정대협을 비판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여자근로정신대는 초등학교 6학년 혹은 졸업 후 1~2년 정도가 되는 소녀들이 1944~45년에 걸쳐 담임 선생님에게 “너는 애국을 위해 일본 공장에 가서 일해라, 일하면서 여학교에 다닐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라고 권유받아 지원하였습니다. 도야마현 후지고시 공장에 1,060명, 나고야 미쯔비시 비행기 공장에 300명, 시즈오카현 도쿄아사이토 공장에 300명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녀들은 남성 노동자가 군대에 간 사이 빈 자리로 남아있던 선반공 등의 중노동을 감당하였습니다. 식사량도 적고, 학교에 다니지도 못하고, 밤에는 미군 공습에 위협당하는 가혹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속아 월급도 받지 못한 채 결국 야윈 얼굴로 부모 곁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사기와 강제 노동에 대해 사죄하라, 급료를 돌려달라는 너무나 당연한 요구를 하면서 재판에 임했습니다. < 관부재판> 한국어판 출판 계기와 영화 <허스토리>에 대한 문제의식 2018년 한국에서 관부재판을 주제로 그린 영화 <허스토리>(민규동, 2018)가 제작되었습니다. 지인이 보내준 DVD를 보고, 그 내용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자근로정신대 박OO님(익명)이 일터에서 위안부로 여겨졌고, 원고들이 재판 때 일본에 방문하면 돌멩이가 날아들었으며, 재판에 우익이 몰려들어 더러운 욕설을 퍼붓고, 숙박했던 여관에서 차별받는 등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 일색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일본사회가 위안부 차별로 만연해 있는 듯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당시 일본사회는 외국인 전쟁피해자에게 호의적이었고, 60건 이상의 전후 보상재판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원 모임을 만들고, 변호사들은 무보수로 자원하여 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를 동일시하며 일본 사회를 향한 편견을 조장하는 내용을 방치할 수 없어서 감독에게 항의문을 보냈더니 감독과 프로듀서가 후쿠오카를 방문하였습니다. 감독은 “여자근로 정신대에서 위안부가 되었다는 내용이 담긴 증언집이 한국에서 출판되었다”고 해명했습니다. 여자근로정신대 세 분의 증언이 있다는 것을 일본에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후지코시 공장실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실상과 다른 내용이 책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증언집에는 “공장이 공습으로 불에 타고 일이 없어지고, 회사로부터 아오모리현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에 30명 가량 보내졌다”는 내용도 있는데, 후지코시 공장에 공습피해는 없었고 패전을 맞을 때까지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몇몇 다른 부분도 저희가 아는 내용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자에 국한하여 생활 지원을 하는 점,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고통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자 감독은 당황하며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라는 자막을 영화의 첫 장면에 넣겠다고 답하고 돌아갔습니다. 2015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한국사회에서 반일 감정을 그리는 영화가 잇달아 제작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관부재판 내용과 일본사회의 실상을 전달하고 싶어 『 관부재판』 한국어판(2021, 도토리숲 출판)을 냈습니다. 저는 소녀상이 근로정신대의 소녀를 모델로 한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의연한 모습의 소녀상은 13세부터 15세 때 동원된 여자근로정신대의 분위기와 닮아있습니다. 위안부로 동원된 농촌의 가난한 소녀, 세 갈래로 머리를 땋은 그녀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 역사인식의 공동연구를!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이 외에도 동원 과정, 피해자 수, 패전 당시의 처우 등에 관해서 일본과 한국 두 사회의 인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양국의 대립은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악순환에 빠져 있습니다. 문제의 극복을 위하여 위안부 이슈 관련 역사 인식을 한일 시민들이 함께 다각적으로, 냉철하게 연구 검토하면서 공동의 인식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읽을 글] ·하나후사 도시오, 하나후사 에미코 지음, 고향옥 옮김, < 관부재판: 소송과 한국의 원고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한 28년의 기록>(서울: 도토리숲, 2021) (책소개 >>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1223391) ·<민족의 희생자 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한 관부 재판의 기록(시모노세키)>, (사)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민족과 여성역사관, 2007. ·김문숙 펴냄, <소녀와 할머니: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해 온 시간의 기억>, (사)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민족과 여성역사관, 2018. ·허윤, “목적(어) 없는 ‘기억하겠습니다’: 일본군’위안부’의 서사화와 역사적 상상력”,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 35권 (2021). ·박정애, “총동원체제기 식민지 조선에서 정신대와 위안부 개념의 착종 연구: 정신대의 역사적 개념 변천을 중심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아시아여성연구> 59(2) (2020). 번역: 퍼플레이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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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필리핀에서의 ‘위안부’ 문제와 사회적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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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의 ‘위안부’ 문제와 사회적 인식 필리핀에서 일본 점령기에 발생한 ‘위안부’ 문제는 필리핀 국민들의 인식 속에 그다지 깊이 자리 잡고 있지 않다. 필리핀의 언론들도 ‘위안부’ 피해자들의 시위나 요구를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필자가 2017년 12월 마닐라만 산책로에 세워진 필리핀 ‘위안부’ 동상을 방문했을 때에도 주위의 필리핀 사람들에게 동상의 의미를 물었더니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필리핀에서 ‘위안부’ 문제가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은 1992년 핸슨(Maria Rosa Henson) 할머니가 자신의 ‘위안부’ 경험을 최초로 대중 앞에서 증언하면서부터였다. 그녀의 증언 이후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면서 어두운 역사의 진실이 드러났다. 조사에 따르면 당시 필리핀에는 약 1,000여 명의 ‘위안부’가 존재했으며, 그들 중 174명의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이 공식적으로 증언했다. 현재 이들 대부분은 사망했고 일부 생존자들은 두 개의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일본으로부터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필리핀 ‘위안부’ 문제의 실체는 그 맥락에 있어서 한국인들의 경험과 일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인권 유린과 전시 성폭력 그리고 이로 인한 고통의 무게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필리핀에서 발생한 ‘위안부’ 피해 사실의 실체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존재한다. ‘위안부’ 문제 관련 시민단체에서 피해자들의 다양한 인터뷰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고, 또한 좀 더 대중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들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기억과 재현들의 모태가 되었던 것은 핸슨의 증언과 본인이 직접 쓴 자서전(『Comfort Woman: Slave of Destiny』, 1996)일 것이다. 핸슨의 자서전에는 그녀의 출생부터 성장배경, 그리고 ‘위안부’ 경험과 그 후의 생활 등 험난한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함으로써 필리핀 ‘위안부’ 문제의 실체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 보고자 한다. 소녀 마리아의 ‘위안부’ 이야기 핸슨의 엄마인 줄리아는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14살 어린 나이로 지주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줄리아가 지주로부터 겁탈을 당해 낳은 아이가 바로 핸슨인 마리아였다. 마리아의 출생은 지주의 집에는 비밀이었으며, 지주인 마리아의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남몰래 돈을 보내 마리아와 그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마리아는 가족을 위해 자기의 삶을 희생한 엄마를 무척이나 사랑했고, 엄마 또한 마리아가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다. 마리아는 함께 살지는 않지만 은밀하게라도 돈을 보내 가족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해준 아버지에 대해 그리움과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며 총명한 소녀로 자랐다. 마리아의 학창시절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웃에 있는 병원의 의사이자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그 모델이었다. 그 의사는 마리아를 볼 때면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니 꼭 의사가 될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마리아의 삶에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14살이었던 1941년 12월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마닐라로 몰려오는 일본군을 피해 마리아는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떠나 시골 한 동굴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동굴 생활의 어려움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본군의 점령지가 된 마닐라로 다시 돌아왔다. 마리아의 삼촌들은 생계를 위해 인근에 있는 과거 미군기지에서 땔감을 모아다가 파는 일을 했다. 1942년 2월 마리아는 일을 나서는 삼촌들을 쫓아 땔감을 모으러 나갔다. 미군기지 인근에 도달하여 땔감을 줍던 마리아는 일본군 병사 2명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마리아를 겁탈하려 했고, 마리아는 이에 강하게 저항했다. 그때 일본군 장교 한 명이 나타나 병사들에게 소리치며 꾸짖었다. 마리아는 그 장교가 자신을 구해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자신이 먼저 마리아를 겁탈한 후 두 병사에게 넘겨주었다. 두 병사는 차례로 마리아를 겁탈한 후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 떠났다. 다행히 그곳을 지나던 인근에 사는 농부가 쓰러져 있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치료해 주었다. 이틀 후 회복된 마리아는 철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자신이 겪었던 사실을 얘기하니 엄마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다시 2주가 지나고 마리아는 엄마의 허락도 없이 다시 이웃들을 쫓아 땔감을 구하는 일에 나섰다. 마리아는 함께 간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땔감 줍는 장소에 도달했을 때 또다시 일본군 병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중에는 일전에 마리아를 최초로 겁탈한 장교도 있었다. 그는 다시 마리아를 붙들어 일행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겁탈하고 떠났다. 그 일을 알게 된 마리아의 엄마는 자신의 고향으로 마리아를 데리고 떠났다. 마리아가 새로이 머물게 된 곳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팜팡가 지역 앙겔레스 인근 숲속에 있는 한 마을이었다. 마리아는 엄마와 함께 대나무로 엮어 만든 삼촌의 집에 머물렀다. 당시 삼촌은 비밀리에 일본군에 저항하는 게릴라 조직(Hukbalahap, 항일국민군)의 지휘관이었다. 그 집에서는 게릴라 대원들의 회의가 자주 열렸다. 자신을 겁탈한 일본군에 대한 증오심이 컸던 마리아는 곧 게릴라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그녀의 임무는 주로 마을로부터 게릴라 대원들이 쓸 음식과 약 그리고 옷가지 등을 모아서 전달하는 것이었다. 위험한 일이기는 했지만, 마리아는 그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함께 부르던 게릴라 대원들의 노래 가사 중 “그들이 우리의 재산을 강탈하고, 우리의 여자들을 겁탈한다”라는 대목이 나올 때면 마리아의 눈에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1942년 4월 미군이 필리핀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호주로 철수한 후, 필리핀 사회는 일본군과 마카필리(Makapili)라고 불리던 일본군 앞잡이들의 횡포로 공포의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마리아는 게릴라 조직의 연락책 활동을 계속했다. 1943년 4월 어느 날 마리아는 다른 게릴라 대원과 함께 보급품을 숨긴 수레를 끌고 일본군 검문소를 지나게 되었다. 수레를 수색한 일본군 초병은 마리아 일행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잠시 후 일행을 다시 불러 세워 마리아만 남기고 다른 사람들은 보냈다. 그들은 마리아를 일본군이 거주하는 막사로 데리고 갔다. 그 막사는 과거 마을의 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그들은 마리아를 건물 2층으로 데려가 문도 없이 커튼으로 가려진 작은 방에 넣었다. 방 안에는 작은 대나무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일본군 막사에는 마리아와 같은 처지의 여섯 명의 다른 여성들이 있었다. 그날부터 오후 2시경부터 저녁 10시경까지 줄지어 들어오는 일본군 병사들의 ‘위안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12명씩 짝을 지어 오는 병사들을 상대하고 나면 30분씩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1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병사들이 자신의 성욕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면 상대 여자에게 폭력으로 화풀이를 했다. 그렇게 매일 마리아는 20~30명의 일본군 병사를 상대해야 했다. 병사들이 오지 않는 오전에는 칸막이도 없는 막사 한쪽 물가에서 병사들이 훔쳐보는 가운데 몸을 씻고 빨래를 해야 했다. 매주 수요일에는 검진을 위해 의사가 방문하는데 대부분 일본인 의사였고, 가끔 필리핀 의사도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한 달에 한 번 생리하는 며칠 동안 쉴 수 있었지만, 아직 생리를 시작하지 않은 마리아는 그런 휴식도 없었다. 마리아는 병원 건물 막사에서 3개월을 보낸 후 다른 여자들과 함께 정미소로 사용되던 건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도 전과 마찬가지로 ‘위안부’ 생활이 계속되었다. 하루는 장교 몇 명이 찾아와서 여자들을 데리고 지주의 저택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겁탈한 후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런 생활을 거듭하던 마리아는 말라리아에 걸려 심하게 앓기도 했다. 하루는 하혈을 많이 해서 의사에게 검진을 받으니 태아를 유산한 것이라고 했다. 아직 생리도 시작하지 않은 자신이 임신하고 유산했다는 의사의 말을 마리아는 믿을 수 없었다. 매일 밤 마리아는 어떻게 하면 도망갈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는 우연히 병사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마리아의 집이 있는 마을이 게릴라 근거지로 밝혀져 일본군이 습격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마리아는 막사 인근을 지나던 사람에게 몰래 이 사실을 알려 마을에 전하도록 했다. 일본군이 마을을 습격했을 때 이미 모두가 떠난 것을 알았고, 마리아가 정보를 누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일로 마리아는 모진 구타를 당해 탈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때 인근 마을에서 활동하던 게릴라들이 마리아가 있던 일본군 막사를 습격했다. 그들은 탈진해 있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데리고 가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길가 어두운 곳에 남겨두고 달아났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마리아를 인근에 살고 있던 마리아의 이모가 알아보고 엄마에게 연락하여 데려가도록 했다. 그때가 1944년 1월이었다. 그 날은 마리아가 일본군에 붙들려 ‘위안부’ 생활을 한 지 9개월 만에 자유를 얻게 된 날이었다. 상처받은 삶, 무거운 기억 돌아온 마리아는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2달 만에 정신이 제대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겁탈과 폭력의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걷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다. 말라리아 후유증으로 머리가 모두 빠져 마리아는 언제나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몸은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말을 더듬고 또한 입가에서 침이 흘러나오는 증상은 지속되었다. 마리아의 엄마는 세탁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미군 부대에서 일하며 빨랫감을 가져오던 도밍고라는 남자가 자주 들렀다. 엄마는 남자에게 공포심이 있는 마리아가 도밍고처럼 좋은 남자를 만나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마리아를 설득하여 서로 사귀도록 했다. 마리아는 도밍고에게 자신이 일본군으로부터 겁탈을 당했다고 고백했지만, 차마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 일은 오직 마리아와 엄마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마리아는 친절하고 이해심 깊은 도밍고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 생활은 그리 길게 지속되지 못했다. 어느 날 남편 도밍고가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반정부 게릴라 조직의 일원이 되었고, 그 후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도밍고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둘과 아들 하나는 오로지 마리아의 책임이 되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인근 담배회사에 청소부로 일을 시작한 마리아는 1990년 6월 63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그 회사에서 일했다. 1992년 6월 어느 날 핸슨 할머니는 라디오에서 일본군 점령 시기에 있었던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방송 끝에 피해 당사자를 찾고 있다는 광고를 들었다. 처음에는 지금까지 지켜온 비밀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그 광고를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점차 그동안 마음속 깊이 쌓아 놓았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망설이다 핸슨은 방송국에서 알려준 주소로 연락해 1992년 9월 10일 ‘위안부’ 대책위원회 관계자를 집 근처에서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증언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대책위원회 관계자의 설득과 또한 자신처럼 무거운 기억을 짐처럼 안고 살아가고 있을 피해자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2년 9월 18일 핸슨은 필리핀에서 최초로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위안부’ 경험을 폭로했다. 그 후 핸슨은 국내외적으로 ‘위안부’ 문제 관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의 활동에 용기를 얻은 다수의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다. 1995년 말 핸슨은 자신이 직접 쓴 자서전을 필리핀 한 언론 기관(PCIJ)에 가지고 갔다. 그녀의 기록이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판단한 그 기관에서 이를 편집하여 1996년에 핸슨의 자서전으로 출판했다. 자서전 말미에 핸슨은 “내가 죽기 전에 정의가 바로 세워지기를 바란다”라고 썼다. 핸슨은 자신이 부르짖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997년 8월 18일 69세의 나이로 고인이 되었다. 기억의 소환과 재현 그리고 역사 핸슨의 증언과 자서전은 필리핀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라는 과거의 기억을 현실로 소환하여 기록하고 재현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필리핀 ‘위안부’ 문제는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외침과 함께 영화나 기념비 등으로 재생산되어 대중들의 인식 속에 전파되고 있다. 이러한 과거 기억에 대한 소환과 재현은 오늘날 필리핀 국민들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1994년에 필리핀에서 개봉된 영화 <‘위안부’ : 정의를 위한 외침>은 필리핀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다룬 최초의 영화였다. 이 영화의 내용 중에는 일본군에 저항하는 게릴라의 활동이 특히 부각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게릴라 조직이 일본군을 응징하고 ‘위안부’를 구출해 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의 주제가 ‘위안부’에 관한 것이지만 그 초점을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전시 폭력과 인권 유린의 진실보다는 일본군에 대한 집단적 저항과 해방에 두고 있다. 2000년에 개봉된 또 다른 영화 <마르코바: 게이 ‘위안부’>는 마르코바라는 한 게이의 고백을 중심으로 ‘위안부’ 문제에 게이라는 다소 드라마틱한 인물을 등장시켰다. 필리핀의 유명 배우 부자(父子)가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아 대중적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각종 영화제에서 다수 수상함으로써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 마르코바가 게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역경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일본군 점령기에 클럽 무용수로 일하다가 동료 게이들과 일본군에게 겪게 되는 수모를 다루었다. 이 영화의 장면 중에는 핸슨의 자서전을 떠오르게 하는 정미소, 저택, 그리고 저항과 같은 소재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내용의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은 필리핀 ‘위안부’ 문제와 피해자들의 증언 전반에 대한 대중적 불신으로 이어질 여지를 남겼다. 필자가 필리핀 사람들과 ‘위안부’ 문제를 놓고 대화할 때 일부는 ‘위안부’ 문제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위안부’ 문제라는 무거운 역사적 비극을 하나의 흥미로운 볼거리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필리핀에서 ‘위안부’ 문제의 당사자이자 피해자들은 기억의 소환과 재현 과정에서 주변적 인물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필리핀 사회에서 일부 시민단체와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과와 보상을 위한 외침이 그다지 대중적 공감을 사지 못하고 사회적 이슈로 부각 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필자는 지난 2017년 마닐라만 산책로에 세워졌던 필리핀 ‘위안부’ 동상의 작가와 많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가 ‘위안부’ 문제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동상 제작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이후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때야 비로소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가 ‘위안부’ 피해자들로부터 느끼고 동상에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은 “비탄”(grief)이었다. 즉 피해자들의 슬픔, 고통 그리고 실망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동상의 얼굴에 묘사했다고 했다. 그러한 감정은 단지 가해자인 일본군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과거 사실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오늘날 국가와 국민을 향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작가로서 그들의 정의를 위한 외침이 끊임없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동상에 표현했다고 했다. 마닐라만 산책로에 세워졌던 필리핀 ‘위안부’ 동상은 2018년 4월 27일 세워진 지 4개월 만에 철거되었다. 필리핀 언론에서는 ‘위안부’ 동상의 제작 배경과 일본으로부터의 외교적 압력,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필리핀 정부의 태도 등, 다양한 내용이 보도되었다. ‘위안부’ 동상 제작을 의뢰한 단체는 중국계 필리핀 사업가가 만든 뚤라이 재단이며, 이는 필리핀보다 ‘위안부’ 문제가 더 심각한 중국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을 듣기도 했다.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여 재현하는 행위는 다름 아닌 역사 쓰기의 과정이다. 파편적 기억들이 소환되어 모아지고, 또한 기념비와 동상 그리고 책이나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되살아나 현재를 사는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되는 것이다. 비록 복잡한 국제관계와 국익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고, 외침에 울림이 적을지라도 ‘위안부’ 문제가 잊혀지지 않고 후세에 기억되기 위한 올바른 역사 쓰기는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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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는 셀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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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과 내용은 다음 졸고에서 추린 부분이 많다. 이혜령, 「그녀와 소녀들: 일본군 ‘위안부’ 문학/영화를 커밍아웃 서사로」, 오혜진 외,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민음사, 2018.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폐기와 재협상을 촉구하는 논의가 장미대선으로 당선된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활발했던 당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가 몇 분 남았는가가 각별한 관심사였다. 2017년 7월 23일 김군자 님이 돌아가셨을 때, 한 신문은 「이제 37송이, 시간이 없다」는 헤드라인으로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폐기와 재협상을 촉구하는 1면 기사를 내보냈다.[1] 그 후로도 여러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윤석열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 기정사실화되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외에 다른 전쟁 또한 유발될 것 같은 신냉전의 세계정세 속에서였다. 2022년 5월 2일 또 한 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이자 운동가이셨던 김양주 님의 별세를 알리는 기사가 올라왔다. 김양주 님의 부고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장례식이 치러지는 과정은 지역과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위안부’ 문제가 더 활성화되는 정치적, 사회적 연결망들을 드러내는 것 같다.[2] 그 기사는 2022년 5월 2일 정부 등록자 240명 중 11명이 생존해 있음을 아울러 보도했다.[3] 기사는 1면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2017년에는 정부 등록자가 239명이었는데, 그 사이에 등록자가 1명 늘어 240명이 되었지만 피해 생존자는 이제 11명이다. 부고와 함께 셈해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숫자는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중 살아있는 이들의 숫자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란 1993년 6월 11일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 제정과 함께 피해자 신고, 심의, 결정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자를 뜻한다.[4] 이것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를 셀 수 있게 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피해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았으며 그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위안부’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정작 피해 생존자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고 진행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만이 아니라 피해자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시민들에게서도, 또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운동해왔던 생존자들에게서도 주장되는 바이다. 최근 이용수 할머니는 “살아있는 내가 책임이 너무 무거워서 요즘 잠이 오지 않는다. ‘할머니들 다 죽기를 바라느냐’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하지 않았다. 남아있는 할머니들 소원이라도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5] 그런데 애초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는 셀 수 있는 존재였던가? 어떻게, 얼마나, 어디에서 모집, 동원되었는지 그 전모를 증명할 증거 따위는 없다는 것이 일본 정부와 국내외 역사부정주의자들의 기본 입장이며, 발굴 및 공개된 증거는 부분적인 것일 뿐이기에 그 주장은 과장되거나 날조된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런 따위의 증거 부족, 증거 부재야말로 ‘위안부’는 셀 수 없는, 애초에 그 삶과 죽음이 셀 필요조차 없는 존재였음에 대한 역설적 웅변 아닌가. 20만 명을 상회할지도 모른다고 추정되는 조선인 ‘위안부’는 그 추정치가 일본군, 일본군 부대의 숫자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6] 일본군‘위안부’에 비해 일본군으로 동원된 조선인 수의 추정은 아주 구체적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통계 가운데 최저치를 적용하면 육군특별지원병 16,830명, 학도지원병 3,893명, 육군징병 166,257명, 해군(지원병 포함) 22,299명 등 군인 동원 총수는 209,279명이라고 한다.[7]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세세히 셈해질 수 있었는가? 다카시 후지타니는 “조선인의 전시동원으로 인해 이들은 직접적으로 생명, 건강, 생식, 그리고 행복의 가치가 있는 인구 구성원이 되었다. 즉 조선인들은 생명관리권력(bio-politics)과 통치성의 레짐 안으로 편입하게”[8]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도 그들의 죽음까지 셈할 수 없었다는 데서 문제가 있으나, 조선인 일본군‘위안부’는 생명, 건강, 생식, 그리고 행복의 가치가 있는 인구 구성원 자체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는 비단 조선인 ‘위안부’에 국한되지 않는 특성일 것이다. 셀 수 없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셀 수 없는 자들을 셀 수 있는, 가시적이고 기지적(旣知的)인 존재로의 범주화는 피해 생존자 김학순(1922-1997)의 커밍아웃에서 본격적으로 개시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과 거기에 조응한 한국 정부의 지원에 따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신고 및 등록에 의해 이루어졌다. 신고 및 등록은 피해자/생존자를 셀 수 있는 범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신고와 등록 절차에는 커밍아웃이라는 과정이 수반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등록은 커밍아웃으로서의 증언, 증언으로서의 커밍아웃을 공신력 있는 것으로 만드는 장치였다는 점에서 운동을 안정화, 규범화하는 데 기여하였다.[9] 증언의 집적인 일본군‘위안부’ 증언집은 신고와 등록의 절차를 밟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성과로 주어진 대상자 등록이란 최종적으로는 심의와 결정, 통지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라는 진술이 심의 결과 부정되어 등록되지 못한 분들은 과연 없었을까? 해봄직한 상상 아닌가? 신청사항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본인 진술서, 사진이나 목격자 등 제3자의 증언)가 있었다면 어땠을 것인가? 대상자 등록 신청은 한 번의 기회만이 주어진 것일까? 결정을 통보받지 못한다면, 그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인가 아닌가?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성과로서의 이 법의 제정과 시행 과정을 폄하하기 위함이 아니다. 법의 제정과 시행 또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출현과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함을 말하기 위함이다. 또한 일본군‘위안부’를 한국 정부의 법적 등록의 대상으로 범주화하고 거기에 안착해 있는 상황은 이제 한계 지점에 이른 것 같다. 지금까지 효과를 발휘했던 범주화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중층적이고도 복합적인 이해를 어렵게 만든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김학순의 증언이 있기 16년 전인 1975년 자신이 일본군‘위안부’였음을 증언한 피해 생존자 배봉기(1914-1991)의 삶은 이 지점에서 시사점을 던져준다. 미군이 통치하던 오키나와가 1972년 일본으로 반환된 후 오키나와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법적 지위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자 1975년 배봉기는 자신이 일본군‘위안부’로 오키나와에 오게 되었음을 증언함으로써 ‘특별 재류’ 자격을 얻게 된다.[10] 임경화는 “이로써 배봉기는 30년 만에 국가에 등록되었다”[11]라고 썼다. 배봉기의 삶은 보이지 않게 살았던, 즉 셈해질 필요가 없었던 존재로서의 일본군‘위안부’의 비인구적 성격을 삶 자체로 구현하고 있다. 그러한 성격은 한편으로 침묵됨으로써 생겨났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김현경은 “귀환하지 않은/못한 일본군‘위안부’”인 배봉기의 삶과 죽음은 포스트식민 냉전 체제라는 힘이 주조했으며 미국, 일본, 남한 간의 위계질서의 착종 속에서 일분군‘위안부’ 문제를 비가시화하고 서발턴의 침묵을 지속시키고 있었음을 날카롭게 논증하였다.[12] 미국 신탁 통치하 오키나와 조선인을 불가시화화하는 법적 구조의 포위망 속에서, 또 일본군‘위안부’로서의 삶과 전쟁 경험, 전후의 고통을 발화할 수 있는 장이 없었기 때문에 배봉기의 삶은 가시화될 수 없었다. 1975년 공적 증언에 의해 배봉기의 삶이 알려졌으나, 냉전의 남북 체제 대결 구도가 일상화된 남한 사회에서 그즈음 조총련 활동가들과 친분을 맺고 있던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청중은 없었다. 나아가 그의 유골의 소유권을 두고 민단과 조총련은 배봉기를 대신하여 말하고자 함으로써 배봉기의 목소리를 지우고 말았으며, 남한에서는 당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이슈화가 한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경계 안에 있지 않은 ‘위안부’들에 대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채로 그의 주검과 귀향을 둘러싼 논의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한다.[13] 국가의 경계 안에 있는 ‘위안부’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삶과 죽음이 비가시화와 침묵의 세계 속으로 가라앉지 않을 것인가의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국내 반페미니즘 정서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확고해진 신냉전에의 편승 기류가 심상치 않다. 여성가족부 사이트에 시, 도별 지원 대상자의 수를 써넣은 간단한 도표는 언젠가 축소되어 마지막 한 명조차 유명을 달리해 사라질 날을 초조하게 또는 공연히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그나마 등록자가 240명이었음을 그 표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헌미는 240명과 20만 명 사이에서 ‘가라앉은 자’들의 이름을 불러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4] 이헌미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말을 언급했지만, 나는 도미야마 다에코(1921-2021)의 그림 <바다의 기억> 시리즈가 떠올랐다.[15] 남태평양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죽어서도 살아있는 ‘위안부’들과 해골들, 일본군, 총과 사물들, 샤먼과 원주민들, 물고기와 새, 나무들. 그 존재들을 셈할 수 있는가? 배봉기와 김학순, 그리고 결코 계량화될 수 없는 증언들이 열어젖힌, 전쟁 속에서의 살아남음과 목격한 죽음들, 강간과 모욕과 멸시와 가난, 체념과 침묵, 그리고 원망과 의지의 카오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이라는 과제를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처음인 것처럼 반복해야 하는 자맥질일 것이다. 도미야마 다에코 작가의 ‘바다의 기억’ 연작 중 <남태평양 해저에서> 이미지는 다음 기사를 참조 >> 한겨레, 일본 100살 거장의 ‘기억’…야만 들추고 약자 보듬다, 노형석 기자, 2021.03.24. 각주 ^ 『경향신문』, 「이제 37송이, 시간이 없다」, 2017.7.23. ^ 다음을 참조. 정갑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양주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결』(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http://www.kyeol.kr/ko/node/457 게시일: 2022.06.10 최종수정일: 2022.06.14 ^ 『한겨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양주 할머니 별세…생존자 11명」, 2022.5.2 ^ 등록 절차와 관련된 법은 2002년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개정된다. 2018년 법률명 등이 바뀌어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시행되었으며 2020년 일부 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법률 제정은 정대협 운동의 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편찬위원회 엮음,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20년사』, 한울, 2014, 59-62쪽. ^ 『한겨레』, 「주일대사 내정자 만난 ‘위안부’ 피해 이용수 할머니…“죽기 전에”」(김규현 기자), 2022.6.21 ^ 강정숙, 「일본군 ‘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 조선인 ‘위안부’를 중심으로」,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2010, 75-80쪽 참조. 특히 표2-2 군‘위안부’총수에 대한 여러 의견, 79쪽 참조. ^ 대일항쟁기간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편, 『위원회 활동 결과보고서』, 2016, 124쪽. 다음에서 재인용.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사이트 https://www.fomo.or.kr/kor/contents/40 ^ 다카시 후지타니, 박선경 역, 「죽일 권리, 살릴 권리: 2차 대전 동안 미국인으로 살았던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살았던 조선인들」, 『아세아연구』 제51권 2호, 고려대 아세아연구소, 2008, 23쪽. ^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별지 제1호서식) (개정 2018.6.5.)>인 <대상자 등록신청서>에는 신청인(피해자)의 신원과 함께 ‘일제하 당시 생활했던 상황’에 대한 란이 마련되어 있다. ‘강제동원 연도(년, 월)’, ‘강제동원 장소’, ‘귀환 연도(년, 월)’, ‘귀환 장소’, ‘강제동원 상황’, ‘현지 생활’, ‘귀환 상황’, ‘현재 생활’에 대한 진술을 해야 한다. 신청인 제출서류로는 다음 세 가지가 제시된다. 1. 재외 국민등록부 등본 1부(국외 거주자만 해당합니다) 2. 보호자임을 증명하는 자료(보호자가 대신 신청하는 경우에만 해당합니다.) 3. 그 밖에 신청사항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본인 진술서, 사진, 목격자 등 제3자 증언 등) ^ 임경화, 「마이너리티의 역사기록운동과 오키나와의 일본군 ‘위안부’」, 『대동문화연구』112,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20, 493~495쪽. ^ 위의 글, 494쪽. ^ 특히 “포스트식민 냉전체제”라는 용어와 서발턴의 침묵을 지속시키는 다양한 층위를 분석하는 데 있어 활용된 방법적 개념과 관련한 대목을 볼 것. 김현경, 「냉전과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의 잊혀진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 『한국여성학』제37권 2호, 한국여성학회, 2021, 208~214쪽. ^ 위의 글, 216~229쪽 참조. ^ 이헌미, 「당신의 이름은」, 『결』(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http://www.kyeol.kr/ko/node/456 게시일: 2022.06.07 최종수정일: 2022.06.08 ^ 5.18 광주의 화가로 더 잘 알려진 도미야마 다에코는 윤정옥, 이효재와의 만남을 통해 큰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모두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세대였다. 도미야마 다에코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의 문제를 ‘위안부’를 주제로 한 <바다의 기억> 시리즈를 1986년 완성한다. 이에 대해서는 미나베 유코, 「월경하는 화가, 도미야마 다에코의 인생과 작품 세계: 포스트콜로니얼리즘과 페미니즘의 교차지점으로부터」, 『민주주의와 인권』제21권 1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1, 94-10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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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1부 - ‘남성영화’로서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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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1부 ‘남성영화’로서의 <귀향> 이 글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요청에 따라 『페미니즘 리부트』(손희정, 나무연필, 2017)에 수록되어 있는 「기억의 젠더 정치와 대중성의 재구성: 대중 ‘위안부’ 서사를 중심으로」를 요약하고 수정한 글입니다. 남성영화의 시대와 ‘위안부’ 영화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는 대체로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남성 중심 서사에 몰두해 왔다. 2015년이 되면 이런 경향에 대한 비판이 점점 강해지는데, 아마도 ‘벡델 테스트’의 인기는 이렇게 여성 캐릭터를 소외시켜온 한국 영화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였을 것이다. 미국의 만화가 앨리스 벡델이 고안한 이 양성평등지수 테스트는 “영화에 1.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둘 이상 등장하는가 2. 그 두 여성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3. 그 대화의 내용이 남자에 관한 것이 아닌가”를 질문한다. 사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그 작품이 바로 ‘여성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21세기 한국 영화의 현주소란 이 정도의 테스트조차 까다로워 보이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는 대중들에게 유의미한 기준으로 회자되었다. 한편, 2017년의 경우 흥행 한국 영화 15위 안에서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2017) 단 한 편이었다. 이 역시 살펴볼 만하다. 지난 3년간, 소위 여성영화로서 화제를 불러 모으거나 흥행을 한 작품 안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가 특히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2016년 개봉한 <귀향>(조정래)은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놀라운 흥행성적을 올렸다. KBS 특집 드라마로 제작되어 영화로 재편집된 <눈길>(이나정, 2017)은 대중들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손희정, 권명아, 권은선, 주유신 등) 비평가들 사이에서 <귀향>과 함께 비교해서 볼만한 작품으로 계속 회자되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웰메이드 상업 영화로서 흥행하면서 여성 아티스트 나문희에 대한 관심을 불러모았고, <허스토리>(민규동, 2018)는 충성도 높은 팬덤인 ‘허스토리언’의 탄생을 불러왔다. 여전히 남성의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여성의 이야기는 잘 상상되지 않는 한국 영화판에서, 여성 서사 중에서는 유독 ‘위안부’ 서사가 큰 관심을 받는 것은 왜일까? 이전까지는 ‘위안부’ 문제가 한국 영화에서 그다지 주목받는 소재가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이는 좀 특이한 일이었다. 앞으로 2회에 걸쳐 소개될 본 글은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귀향>에서부터 <허스토리>에 이르기까지 최근 한국 대중에게 소개된 ‘위안부’ 영화들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각각의 영화들은 ‘위안부’에 대한 다른 재현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맥락 안에서 관객을 만났고, 또 각기 다른 의미망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여기서 ‘안’은 서사와 이미지의 문제를, ‘밖’은 작품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과 관객성을 의미한다. 물론 이 안과 밖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귀향>의 화제성과 『 제국의 위안부』라는 맥락 2016년, ‘위안부’ 문제는 또다시 대중적 관심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2015년 출간된 박유하의 『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와중에 12.28 불가역적 합의가 서둘러 선언되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 두 가지 사건에 전면적으로 반박하는 작품인 <귀향>이 개봉했다. <귀향>을 둘러싼 갑론을박은 뜨거웠다. 한쪽에서는 이 작품이 강간을 시각적 스펙터클로 구성하여 고통을 쾌락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 영화가 촉발한 감정의 역동과 그 정치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나 『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역사를 왜곡하고 있을 때, 그에 반박하는 대중 서사로서 <귀향>이 선보이는 식민지배와 그 폭력에 대한 저항이 이 작품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귀향>에 대한 열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이 소통되는 사회적 맥락 중 하나였던 『 제국의 위안부』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 제국의 위안부』와 <귀향>은 어떤 점에서 달랐던 것일까? 전자가 ‘위안부’ 피해자의 징모 과정에서의 자발성을 강조할 때, 후자는 성노예화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 제국의 위안부』는 조선인 ‘위안부’ 여성들이 겪은 폭력이나 고통이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공유하고 있었던 가부장제의 문제이지 제국의 지배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위안부’ 여성들에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한 것은 그녀들을 팔아넘긴 부모거나 그녀들을 징모하고 판매했던 조선인 포주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책의 설명에 따르면 ‘위안부’ 제도는 가난한 여성들이 가족을 위해 매춘을 했던 ‘가라유키상’ 전통의 연장선에 있으며, 조선 여성들의 사정은 당시 일본 매춘 여성의 사정과 다르지 않았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 사이의 동질성에 대한 주장은 중국 여성과 조선 여성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조선 여성들은 일본군 남성들의 ‘동반자이자 동료’로서 서로 정을 나누는 보호의 대상이었던 반면, 중국 여성들이야말로 일본군 남성들의 강간과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 제국의 위안부』의 ‘동지적 관계’라는 상상력은 이렇게 발동된다. 그리고 이 상상력의 재료가 되는 것이 ‘위안부’ 피해자의 구술에서 발견되는 징집 과정에서의 자발성과 ‘즐거운 한때’에 대한 기억들이다. 『 제국의 위안부』는 남한의 가부장제와 착종된 민족주의적 사유체계 및 그를 바탕으로 하는 ‘폭력적인 운동’이 ‘위안부’ 피해자를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 속에 가둬 넣어야 했기 때문에 이 기억을 지웠다고 주장한다. 『 제국의 위안부』는 피상적으로 보편적 성 체제인 가부장제만을 문제 삼으면서 가부장적 군사주의에 기댄 일본 제국주의의 작동 기제에 면죄부를 주는 오류를 범한다. 이 책의 부제는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다. “기억을 ‘헤게모니 투쟁의 장’으로 명명함으로써” 그는 공적 기록에서 사라진 ‘여성기억’을 복원해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부장제에 기반하고 있었던 제국주의에 면죄부를 줌으로써 여성기억을 가부장제에 복무하는 ‘역사 다시 쓰기’로 치환해 내고 재영토화시킨다. 기실 페미니즘의 문제의식 안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려면 일본과 조선/남한의 제국주의, 군사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가부장제와 어떻게 교차적으로 작동하였는가를 살펴야지, “가부장제가 제국주의, 군사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보다 더 근원적인 지배 체계다”라는 주장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 작업은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등장하여 12.28 불가역적 합의라는 외교 정치적 사건과 협업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왜곡된 역사 인식을 대중적으로 만들어냈다. 매혹이 된 폭력, 남성으로 젠더화되는 대중 <귀향>은 『 제국의 위안부』와는 대조적으로 보편적인 가부장제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예민하게 인식하면서도 ‘위안부’ 동원 체제를 성노예화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관객을 이끌었다. 가부장제와 제국주의의 공모를 이해하면서 가부장제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서로 접속시켰다. 이는 무엇보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영매인 은경(최리)에게 귀신이 들리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은경이 낯선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은경의 아버지가 그를 공격하자 두 남자 사이에 싸움이 붙는다. 그리고 둘 다 은경의 몸 위에서 죽고 만다. 은경은 보편적인 성폭행 피해자이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 가부장제의 희생양이었던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영매가 된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장면에서 자신이 성폭행범을 연기함으로써 ‘위안부’ 제도를 가능하게 했던 욕망을 가진 남성으로서 속죄를 하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잠재적 가해자’로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독의 고백은 동시에 그 ‘욕망’을 자연화시키면서 오히려 위안소 제도에 대한 변명거리를 제공한다. 더불어서 감독의 이런 태도가 영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이 영화에 드러나는 영화적 시선의 주인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남성’이 되며, 이를 따라가는 관객 역시 (반드시 그런 젠더화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으로 젠더화된다. 이때 우리는 <귀향>의 대중성을 적극적으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관객이 <귀향>에 몰입하고 열광하도록 했던 대중성은 영화의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적 서사-이미지’(권은선)가 선보이는 선정성에 놓여 있었다. 여성의 신체와 강간을 일종의 볼거리로 만들고 그 피해의 고통을 물신화함으로써, 영화는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봉합시킨다. 물론 영화는 텍스트 내에 이미 남성적인 선정성에 대한 변명을 담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미술치료 작품에 바탕하고 있음으로 ‘사실적 묘사’에 충실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방대한 양의 증언에서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가는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성노예화 과정을 그리기 위해 강간 장면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심지어 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무조건 대표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은 이 사회가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이 직접적인 성폭력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과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것인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남성’들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것인지 모호해진다. 이런 의심은 <귀향>의 연작인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조정래, 2018, 이하 <귀향2>)를 보면 더욱 강해진다. <귀향2>는 <귀향>에 출연했던 한 배우가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합창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흑백 기록 영상과 <귀향>의 컬러 영상이 교차 편집된 작품이다. 현재의 시점을 담은 흑백 영상은 사실 아무런 서사의 의미 값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귀향2>는 <귀향>의 재탕에 불과하다. 영화는 전작의 성공에 기대어 만들어진 아류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류작을 통한 자기 복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렇게 아류를 만들고야 마는 감독의 나르시시즘에 놓여있다. 감독은 <귀향>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위안소 첫 집단 강간 시퀀스’를 재생하면서 그 위로 ‘위안부’ 피해 당사자의 구술을 보이스오버로 배치한다. 그 목소리를 영상 위에 그대로 입히면서 “내 영화는 피해자의 증언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재차 강변하는 것이다. 이때 피해자의 목소리는 감독의 정당성을 보증하기 위한 변명으로 전락한다. 심지어 <귀향2>는 <귀향>의 재현 영상과 현실 기록 영상을 구분하기 위해서 ‘위안부’ 피해자의 구술 기록 영상조차 흑백으로 색을 빼버린다. 관객들로 하여금 두 푸티지의 성격을 쉽게 구분하도록 하기 위해, 기록영상은 철저하게 죽은 이미지로 박제되고 도구화된다. <귀향2>에 이르면 “과연 <귀향>은 여성영화였을까?”라는 의구심에 대한 답은 분명해진다. <귀향>은 ‘여성영화’였다기보다는 오히려 남성으로 젠더화된 관객성에 소구하면서 남성의 이야기를 여성의 피해 서사를 통해 표현한 ‘남성영화’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