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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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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기림의 날 특집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 <2부> 2015년 최종적으로 7개국 14개 단체가 참여해 결성한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가 여성 인권 회복의 진행형, 나아가 인류 보편의 인권 신장과 항구적 평화에 기여하는 '세계의 기억'이 되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적인 외교로 그 의의가 왜곡되어 가고 있다.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해 웹진 <결>은 조속한 해결을 기대하며 10여 년 가까이 추진되어 온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활동을 3회에 걸쳐 조망해 본다. (1)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기억을 위한 세계시민운동 (2)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3)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현재사(現在史)로서의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어야 할 뿐 아니라 기록물이 '세계적 중요성'이라는 기준으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세계적 중요성'은 기록물이 가지는 '역사 서사'로, 다음과 같은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 기록물이 가지는 시간성(Time), 장소(Place), 인간(개인)의 업적(People), 주제(Subject/Theme), 표본(Form and Style), 그리고 사회적·정신적·문화적 중요성(Social·Spiritual·Community Significance) 등 여섯 가지이다. '시간성'의 조건은 인류 사회의 가치 변화 시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특별한 방법으로 그 시기를 반영하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를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기록물이어야 한다. '장소' 조건은 일정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의 기록물이 세계사 또는 세계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지역적 정보를 지닌 기록물이어야 한다. '인간의 업적'은 세계사 또는 세계 문화에 기여한 인물에 관련된 기록물이라는 조건을 충족해야 하고, '표본' 조건으로는 뛰어난 미적 양식을 보여주는 기록물이어야 한다. 이와 함께 이상의 조건을 충족한 기록물이 사회적·정신적·문화적으로 일정 기간 동안 세계의 특정 문화권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진 기록물이어야 한다. 이 같은 조건을 충족하면서 기록물 자체가 진본이어야 하고, 희귀성을 지니면서, 세계에서 유일하며 대체불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록물이 소실되거나 훼손될 경우 인류의 기억과 유산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다고 판단되는 기록물이어야 등재 대상이 된다.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기록물의 범주가 결정된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이나 훈민정음처럼 단일 국가의 자랑스런 역사적 기록물이 대상일 경우 단일한 하나의 기록물군이 대상이 되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이 전쟁, 식민지 등 복합적인 요인이 중첩된 사건은 피해와 가해라는 입장에서 역사의 서사를 점유하려 하기 때문에 기록물의 범주가 갈등 요소가 될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의 역사는 단순히 정부 문건 등 문서 기록물만으로는 '완전한 역사'를 그려내지 못한다. 제국이나 권력자의 언어로 생산된 소위 '공문서'라고 불리는 문자적 사료 뿐 아니라, 피해자가 체현해 낸 '기억'이라는 비문자적 기록물이 포함되어야 한다. 특히 2002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가이드라인을 개정해 문자와 비문자, 영상, 가상기록 등 디지털 자료까지 아울러 광범위한 기록 매체와 방법을 기록유산에 포함시킬 수 있도록 범주를 넓혀 놓은 것도 세계의 사회적, 정치적 약자의 역사를 인류사회가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를 반영한 결정이었다. 일본군'위안부' 역사가 가지는 '세계적 중요성'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군'위안부' 사건은 1931년 만주사변 전후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군인, 관료, 헌병 등이 직간접적으로 여성을 강제로 동원해 일본군 수용소 내부 또는 전장지 주변에 설치한 위안소에서 정신적, 신체적 노예 생활을 강요한 것으로,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엄청난 규모의 여성들이 회복하기 어려운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벌어진 사건으로만 인식했다면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수많은 사건 중 하나에 머물렀을 것이다. 실제로 심각한 전시 중 강간과 성노예 문제임에도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그 진실이 널리 알려지고 논의되기 전까지 방치되어 왔다. 국제연대위원회에서 이 사건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이유는 국제사회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용기있는 공개 증언과 함께 전시 성폭력 및 여성 인권에 대한 가치 변화, 여성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평화에 대한 인식 등 피해자와 세계 시민사회가 만들고 발전시킨 변화야말로 우리 인류사회의 궁극적인 지향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1991년 한국의 피해자 김학순이 공개 증언을 한 이후 세계 여러 나라의 피해자들이 연이어 증언에 나섰고, 세계 시민은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 시민운동을 전개해 갔다. 피해국 뿐 아니라 당사국인 일본 정부도 진상 규명 작업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통해 일본군에 의한 여성 강간이 조직적이고,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인권 침해의 정도를 인정한 바 있다. 이 문제는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회의와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회의에서 중요한 주제였다. 궁극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전시 여성 폭력 문제는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ICC) 로마 규정에 반영되어 강간, 성노예, 강제 임신 및 강제 불임 수술 등을 처벌 가능한 전쟁 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하는 데 기여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역사는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높여 여성과 성에 대해 보수적이었던 아시아의 오래된 문화를 흔들고, 나아가 여성 인권과 관련해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규범과 가치를 이끌어낸 역사가 되었다. 이는 곧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그 활동들을 기록한 기록물이 '세계적 중요도'라는 조건을 충족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성폭력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공식석상에서는 터부시되거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가해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기록물을 은폐하거나 조직적으로 폐기할 위험성이 상존한다. 기록물이 소실되거나 훼손될 경우, 1990년대 이후 강화되어온 여성 인권 가치 등 인류의 기억과 유산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야 할 강력한 이유이다. 등재 위한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범위와 분류 한편으로 등재 신청 자료의 범주를 논의해 온 국제연대위원회는 현재까지 발굴되어 있는 모든 일본군'위안부' 기록을 신청 대상으로 하기로 했다. 이어 관련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각국의 국가기록원, 문서보관소, 박물관, 자료관 등 공공기관 소장 기록물 목록을 정리한 다음 다시 각국과 기관에 연락해 공동등재 의사를 확인하고, 허가를 구했다. 또 민간단체, 민간 설립 박물관 등에도 확인했고, 개인 소장 자료도 일일이 조사했다. 그 결과 영국의 왕립전쟁기념관이 공동등재를 받아들여 국제연대위원회와 함께 공동등재 기관이 되었다. 국제연대위원회 8개국과 미국, 호주, 영국의 문서보관소 등 총 20개소의 공공기관에서 등재 신청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민간 박물관 2개소와 개인 2명의 소장 자료도 등재 신청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등재 신청한 기록물은 총 2,744건이었다. 국제연대위원회에서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에 대한 정의를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난 시기부터 피해자들과 세계 시민의 인권 회복 운동까지로 명시했다. 이에 기반해 관련 기록물은 ① 일본군'위안부' 제도를 알 수 있는 공문서와 사문서, ② 피해자 생산 문서, ③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 운동 기록 등 3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그 상세는 다음과 같다. ① 공문서는 1931년부터 1956년까지 전 시기와 전범 재판까지의 기록물로, 일본군'위안부' 정책과 위안소 운영의 역사적 원인, 경과, 결과를 나타내는 공문서 및 당시의 사문서와 1990년 이후 한국 등 피해국 정부에서 진상을 조사한 문서를 포함한다. 이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기록물 총 563건을 목록화했다. ② 피해자 생산 문서는 1990년 이후 피해 증언, 목격자 증언, 치료 기록, 심리 치료를 위한 그림과 작품 등 피해자들이 생산한 문서와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기록물은 모두 1,449건이다. ③ 시민단체 운동 기록으로는 국제연대위원회에 포함되어 있는 14개 단체의 활동 기록 중 영향력이 컸던 대표적 운동을 중심으로 목록을 정리했다. 이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기록물은 총 732건이다. 2016년 국제연대위원회는 신청 자료 목록을 선별하기 위해 세계기록유산 및 기록학 전문가와 함께 제2차 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심도있게 논의한 부분은 피해자 증언의 '원본성'과 '진실성' 조건에 관한 문제였다. 즉, 한 피해자가 여러 번 증언한 경우 어떤 것을 원본으로 취급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피해자의 증언 안에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경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서 말하는 '진실성' 조건을 어떻게 판단 혹은 심사할 것인가와 관련한 문제였다. 당시 참가했던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서는 피해자가 같은 내용을 여러 번 증언하거나 조금씩 변화하면서 증언해도 그것은 하나하나가 별도의 기록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원본'이라고 판단했다. 또 피해자 증언에서 역사적 사실과의 정합성은 역사 연구에서는 필요한 요건이지만, 세계기록유산에서는 피해자 '기억'을 담고 있는 기록 그 자체가 중요하기에 '진실성'을 가진 기록물로 보았다. 즉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증언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매체의 다양성 문제라고 판단한 것이다.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자료'라는 평가와 '정치화' 2022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집행이사회가 국가 개입 강화 규정을 개정 가이드라인에 채택하기 전에는 국제연대위원회와 같이 여러 국가가 공동등재 신청을 할 경우 국가 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홈페이지에 직접 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유네스코 사무국에서 등재 신청서를 접수한 후 국제자문위원회((IAC. International Advisory Committee) 산하 심사소위원회(RSC. Register Subcommittee) 즉, 전문가 집단을 두어 접수된 신청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조건에 부합하는지 심사하게 했다. IAC는 RSC의 결과를 참고해 심사한 다음 유네스코 사무총장에 등재 권고를 하고, 이를 사무총장이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2015년 5월, 국제연대위원회는 2,744건의 목록을 작성해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라는 제목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홈페이지에 등재 신청을 완료했다. 작성 과정에서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서에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규탄하는 내용을 기재해야 한다는 의견, 일본군'위안부'를 성노예로 표현해야 한다는 의견, 일본군'위안부' 피해 문제는 일종의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 혹은 대량 학살)'이고,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필적하는 사건이라는 의견 등이 제기됐다. 사업단은 전문가와 상의해 의견 중 일본 정부에 관한 내용은 '정치적'으로 읽힐 수 있어 신청서에 싣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성노예'가 본질이지만 일본이 '정치화' 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성노예적 상태'라는 용어로 대치해 작성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과 미국의 모 단체가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동등재 형태로 만든 신청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리고 등재 심사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2017년 4월 17일 전문가 심사소위원회(RSC)에서 심사한 결과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기록물이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기록물"로 평가했다고 알려왔다. 하지만 신청서 내에 일본군'위안부' 사건을 홀로코스트, 캄보디아 대량 학살과 비교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전해왔다. 덧붙여 RSC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프로그램의 역할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문서를 등록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러한 비교는 적절하지 않으니 해당 부분을 삭제하고 신청서를 다시 제출할 것을 권고했다. 이어 수정해 제출할 경우 IAC에 전달될 것이며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IAC가 2017년 9월 회의에서 수립한 조언에 따라 등록부에 등재할 새로운 항목에 대한 결정을 발표할 것"이라고 알려왔다. 국제연대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이 등재된다면 굳이 신청서에 홀로코스트나 캄보디아 대량 학살과 비교해 기술하지 않더라도 일본의 범죄성이 증명될 것이라 판단했다. 이에 따라 RSC가 권고한 대로 수정해 2017년 4월 23일 최종본을 제출했다. 당시 국제연대위원회는 이미 RSC가 일본군'위안부'기록물에 대해 "대체 불가능하고 독특하다"고 평가했기에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에 매우 희망적이었다. 한편으로 신청서를 제출한 일본 측 행보가 일본 정부의 적극적 관여 속에서 추진된 것임을 파악한 국제연대위원회는 일본 정부가 강력한 외교적 수단으로 유네스코 사무국을 겁박할 것을 예상해 최대한 원칙에 맞는 방법으로 유네스코 측의 의견을 수용하며 적극적으로 프로세스를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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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자료해제 중국 잡지를 통해 보는 연합군 구출 당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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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잡지를 통해 보는 연합군 구출 당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모습 만삭의 임산부를 포함해 네 명의 일본군’위안부’ 모습을 담고 있는 ‘유명한’ 사진이 있다. 1944년 연합군이 중국 윈난성 쑹산에서 촬영한 것으로, 이 사진 속 임산부는 잘 알려진 ‘위안부’ 피해생존자 박영심이었다. 구조돼 병원에서 안정을 취한 박영심은 일본의 항복 후 고국으로 송환됐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범죄 증거를 수집해온 중국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은 10여년 간의 노력 끝에 박영심을 포함해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과 관련된 새로운 단서를 찾아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25일 발행된 잡지 『대전화집(大战画集)』에 실린 기사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중국 침략 일본군 난징대학살 희생동포기념관’의 류광지안 부연구관원이 소개한다. 1944년 9월, 미 육군 164 통신사진중대 소속 이병 햇필드(Charles H. Hatfield)는 중국 윈난성 쑹산 전선에서 ‘유명한’ 전쟁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만삭의 ‘위안부’’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이 사진에는 중국군 병사와 여성 네 명이 등장하는데, 옷차림과 외모로 미루어 보아 한반도 출신으로 추정됐다. 초췌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불안한 표정의 네 여성은 웃고 있는 중국계 미군 정보장교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시선을 끄는 부분은 사진 속 가장 오른쪽에 있는 여성인데, 한 눈에 보아도 임신 상태였다.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만삭의 여성은 흙더미에 기대어 두 손을 짚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녀가 ‘박영심’이라는 이름의 조선 출신 일본군 ‘위안부’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연합군 촬영 사진 속 ‘만삭의 ‘위안부’피해자’ 당시 박영심은 동료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윈난성 쑹산의 일본군 진지에서 탈출한 직후였다. 과도한 피로와 극도의 긴장 상태였던 박영심은 다리 아래로 피를 흘리며 결국 유산하고 말았다. 구조된 박영심은 즉시 중국 원정군 제8군 야전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사산된 태아를 꺼내는 수술 끝에 목숨을 건졌다. 중국 윈난성 바오산에서 한동안 요양한 박영심은 이후 다른 조선인 ‘위안부’ 30여명과 함께 쿤밍으로 보내져 앞날을 기약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공식적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박영심과 동료 여성들은 이듬해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이후 한동안 그들의 비극적인 경험은 역사 속에서 묻히는 듯했다. 그러다가 1991년,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이 침묵을 깨고 증언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잔혹한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 한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피해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어 증언하는 대열에 박영심도 동참했다. 수많은 증언과 증거는 전쟁 중 일본군이 자행한 ‘위안부’ 제도가 여성의 권리를 심각하게 유린한 반인륜적 전쟁 범죄임을 입증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2000년 12월, 국제사회는 일본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열어 일본군의 전시 성폭력 범죄를 심판했다. 이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방문한 박영심은 숙소에 있던 목욕 가운을 보고 과거 위안소에서의 기모노가 떠올라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려운 상태에 빠져 결국 그녀의 증언은 비디오 영상으로 대체되었다. 영상으로나마 그녀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그 범죄들을 생생하게 고발했다. 2003년 11월, 박영심은 중국 난징과 윈난 쑹산을 방문해 예전 일본군 위안소 현장을 직접 지목하는 역사적인 활동을 펼쳤다. 2015년 12월 1일, 박영심이 지목한 난징 리지샹위안소 옛터에 세계 최대 규모의 ‘위안부’ 주제 기념관인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이 정식으로 개관했다. 그 후 리지샹 전시관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범죄 증거를 수집하는 데 힘써왔으며, 여기에는 박영심과 동료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작업도 포함되었다. 10년 간의 노력 끝에 찾아낸 새로운 단서 약 10년 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리지샹 전시관은 박영심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찾아냈다. 1945년 6월 25일 발행된 잡지 『대전화집(大战画集)』에 실린 ‘윈난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군의 여성들, 그녀들이 속은 경위를 털어놓다’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 기사는 한반도의 젊은 여성들이 중국 윈난까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과정과 쑹산 진지에서 겪었던 비참한 경험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1942년 봄, 일본인들은 여성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을 돕는 일을 하는 ‘여성 보조 부대(妇女辅助队)’를 모집한다고 속였다. 안전하고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가난한 농가 출신 소녀들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쉽게 현혹되었다. 그들은 일본인의 말을 믿고 지원하여 배에 올랐고, 남양에서 행복한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싱가포르가 아닌 미얀마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안전한 일자리가 아니라 일본군의 폭력이었다. 마지막에 그들은 윈난성 쑹산의 일본군 진지로 보내져 유린당했다. 중국군이 쑹산을 점령했을 당시 원래 24명이던 ‘위안부’ 가운데 살아남은 여성은 열 명이었다. 이런 내용과 함께 기사에는 사진 한 장이 함께 실려 있었다. 사진 속 열 명의 여성은 1944년 9월 쑹산 전투에서 중국군에 의해 구조된 ‘위안부’피해자들이었다. 열 명 중 한 명은 일본인, 나머지 아홉 명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약 1년간 요양을 한 사진 속 인물들은 구출 당시와 비교해 외모와 체격이 조금 달라졌지만, 모두 행복한 표정이었다. 놀랍게도 사진 맨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있는 박영심의 모습도 확인됐다. 사진 속 박영심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어 사진 촬영 당시 기분이 좋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양 1년 후, 미소를 띠고 있는 여성들 1944년 9월, 미 육군 164 사진부대는 쑹산 전투 현장에서 많은 사진과 영상을 촬영했다. 이 사진과 영상 자료는 온전히 보존되어 왔다. 『대전화집』에 실린 이 사진 속 여성 열 명을 미군이 촬영한 영상과 비교해 보니, 이들 모두가 다른 영상에도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구출된 후 건강하게 지냈고, 수술을 받았던 박영심을 포함해 누구도 낙오하지 않았다. 구출 당시 ‘위안부’피해자들의 모습은 몹시 초라했다. 옷차림이 단정치 못한 사람도 있었고, 피투성이 얼굴도 있었다. 하지만 구출 뒤 사진에서는 미군이 촬영할 당시의 불안하고 초라하며 당황스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모두 마음이 편해 보였다. 구출 당시에는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이 또 다른 지옥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다행히 고난을 겪은 이들 여성들은 구조 후 중국 군인과 현지 주민의 도움으로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이었지만 미소를 띠고 있는 여성들의 얼굴에서는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일본인 ‘위안부’든 조선인 ‘위안부’든 그들은 오직 하나의 바람만을 간절히 품고 있었을 것이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 말이다. <『大战画集』 기사와 번역문> 중국 뎬시(滇西)에서 포로로 붙잡힌 위안부들 - 자신들이 속은 과정에 대해 입을 열었다- 중국 군부대는 누장(怒江)강 전방(前线)의 쑹장(松江)강 전투에서 독특한 ‘전리품’을 얻었다. 바로 10명의 일본군 위안부이다. 그들 중에는 일본인도 있고 조선인도 있다. 지난 3개월간 그녀들은 쑹산(松山) 전투(중국의 항일전쟁 중 송산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한 적군들과 함께 생활했다. 누장강 전선 각 거점의 일본군 부대에는 일본 위안부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한번은 텅충(騰沖) 지역에서 일본군의 잔인무도한 행위가 포착되기도 했다. 일본군 화약고가 폭발될 때 한 조선인 위안부가 그대로 생매장되는 것을 당시 현장에 있는 일본군들은 모두 두고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중국 군부대에 의해 포로가 된 일본 위안부들 중 네 명이 조선인이었다. 나이는 스물네 살에서 스물일곱 살까지로 서양 여인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꽤 화사해 보였다. 이 여성들의 말에 따르면 이 서양식 옷들은 모두 싱가포르에서 사 온 것이다. 그녀들은 낮은 의자에 편안히 앉아 미국 담배를 피고 있었다. 지난 수 월간 겪었던 전쟁의 충격 속에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이 여성들은 모두 북조선의 평양 사람으로 전부 농촌 여성이었다. 1942년 봄, 일본의 정치 관계자가 이들이 있는 마을에 찾아와서 일본군이 전쟁에서 얼마나 천하무적이고, 어떻게 "부녀자 지원팀"을 모집하여 싱가포르로 보내서, 전혀 위험하지 않은 비전투 업무를 맡기고, 또 싱가포르가 얼마나 안전한 후방 지대인지, 이들이 가면 병원에서 병간호 일만 하면 된다는 등의 감언이설을 내뱉고 갔다. 비록 이런 감언이설들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이들은 당장의 돈이 너무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들 중 한 여성의 아버지는 농부인데 넘어져 다리를 다쳤는데 병원비를 부담하지 못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모집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신청 후 받을 수 있는 1,500위안의 정착비로 아버지의 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생계를 위해 속아 이곳에 왔는데… 끌려온 24명 중 14명이 숨을 거두었다. 대부분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는 열여덟 명의 여성이 1942년 6월에 북조선을 떠나 남양지역에 보내졌다. 남양으로 가는 길에서 이들은 일본군이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과 동아시아제국이 구축될 것이라는 등의 온갖 허황한 선전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싱가포르를 지나치고 멈추지 않는 것을 알아챘을 때, 마음속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기차는 미얀마 양곤에서 계속 북쪽으로 향할 때, 그녀들은 앞으로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짐작하게 되었다. 쑹산지역에 도착하자 네 명의 조선 여성은 서른다섯 살의 일본군 정식 위안부 아래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일본인 위안부도 이번 전쟁에서 우리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사진 속 왼쪽 아래 여성) 쑹산 지역 일본 군부대에는 그녀들을 포함해서 총 스물네 명의 여성이 있었다. 다른 업무 외에도, 그녀들은 일본 병사들의 빨래를 하고, 밥을 짓고, 산속 야영지의 동굴을 청소하고 했다. 중국 군부대가 쑹산을 공격할 때 이들은 일본군과 함께 전쟁의 참상을 겪었다. 스물네 명 중 열네 명의 위안부가 폭격으로 사망했다. 평소에 일본군 당국은 그녀들에게 만약 중국군에 의해 포로가 된다면 반드시 각종 수모를 겪을 것이라고 줄곧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처음에는 이 말들을 정말로 믿었다고 한다. 남은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그녀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진짜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 2년간의 생활로 인해 일본 군부대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이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고 입을 모았다. ▼박영심을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구출되는 모습이 담긴 영상. 1944년 미군 164 통신사진중대 소속 사진병이었던 에드워드 페이 병장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KB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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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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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기림의 날 특집 : 일본군‘위안부’ 역사, 우리 모두의 삶 오키나와의 할머니, 배봉기 님이 돌아가시고 7년이 흐른 뒤, 그 반평생을 취재하여 기사로 엮어낸 일본인 기자가 있습니다. 매 학기 대학 강의실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다양한 논점을 학생들과 토론하는 서울의 교수님들이 있습니다.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역사를 알리고 소수자 혐오범죄 및 성폭력 방지 교육활동을 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시민단체가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교훈은 저마다의 공동체와 시민적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변화를 촉구합니다. 2023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그 작지만 큰 실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1.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에서 걸어온 전후(戦後) 2.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 3.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 4.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I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에 위치한 사회정의교육재단은 역사의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의 소외된 역사를 알리는 데 목적을 둔 비영리 교육단체다. 역사교육을 통한 인간의 존엄성과 비판적 사고력 증진 교육을 기본 가치로 여기는 우리 재단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에는 1) 성폭력 및 젠더 기반 폭력(sexual and gender-based violence) 방지 2) 미국 내 아시안 디아스포라 역사와 이슈 3) 시민들의 저항과 단합 등이 있다. 교사의 자율성이 높은 미국에서 이 주제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이를 통한 역사교육을 적극 권장하기 위해 우리는 현직 역사 교사들과 함께 재단의 가치를 반영한 커리큘럼과 학습안을 만들고 있다. 이 글에서는 우리 재단의 설립 배경에 대한 소개와 함께, 재단의 교육활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알리는 일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회정의교육재단 설립 배경 사회정의교육재단을 애초 계획보다 앞당겨 2017년 여름에 설립하고, 재단의 첫 주제 또한 ‘미국 내 아시아 디아스포라 역사와 이슈’에서 ‘성폭력 및 젠더 기반 폭력 방지’로 바꾼 데에는 2015 한일 ‘위안부’ 합의와 이와 관련해 조선학교에 가해진 부당함에 맞서고자 한 배경이 있다. 필자는 사춘기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와 인종차별을 겪으며, 후세들이 차별받지 않게 하려면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미국 내 아시안 디아스포라 역사를 제대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샌프란시스코 공립통합학교구(San Francisco Unified School District)에서 한글 이중언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더 공고해져, 재직 중이던 1994년 샌프란시스코 공립통합학교구에 최초로 한글 이중언어 프로그램인 한‧영 이멀젼(Two-Way Immersion)[1] 프로그램을 도입시켰다. 그 후 미국 내 초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에서도 교사들이 미국 내 아시안 디아스포라 역사를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미국 내 아시안 디아스포라 역사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는 본인들의 역사와 뿌리에 대해 배울 기회를 제공하고, 비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는 미국 내 아시아인들에 대한 선입견을 지우고 이해와 존중의 폭을 넓힌다. 이를 통해 모두가 각자의 존엄성을 지키며 동등한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이 분야의 발판을 다지는 데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고 싶었다. 2015년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두 개의 결의안이 통과됐다. 9월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건립 결의안 342-15호가 시의회에서 통과됐고, 한 달 뒤 10월 샌프란시스코교육위원회에서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역사를 10학년(고등학교 1학년) 커리큘럼에 포함시키는 결의안 158-25A1호가 통과됐다. 이 결의안은 일본군‘위안부’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어난 인신매매 범죄임을 가르치고, 오늘날에도 지속되는 성매매와 성착취 방지 교육을 위해 발의됐다. 교사에게 결의안 158-25A1호는 필수가 아닌 선택사항이지만, 시 결의안은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인신매매를 반대‧방지하고, 약자의 인권과 존엄성을 기억하는 일의 필요성과 연결하여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이로부터 두 달 뒤, 피해생존자의 의사와는 상반된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졌다. 대부분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힘이 없어 피해를 당한 자들의 존엄성과 인권을 또 한 번 무시한 처사였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합의 문구 때문에 10월에 통과된 샌프란시스코 결의안 158-25A1호가 자칫 무효화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1994년에 한‧영 Two-Way 이멀젼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실시한 경험을 되살려 2016년 1월 첫째 주부터 주변 학부모들과 함께 편지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에 힘입어 캠페인 시작 2주 후에 샌프란시스코 통합학교구 인문학 커리큘럼 및 수업 부서(Curriculum and Instruction’s Humanities Department) 담당자를 만났고, 담당자로부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자료수집을 요청받았다. 이에 2016년 말 상당한 양의 자료를 인문학 커리큘럼 및 수업 부서에 제공했으나, 이곳에서는 2018년 1월까지도 여러 이유로 인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커리큘럼이나 학습안을 준비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공립고등학교에서는 주로 3월이나 4월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알게 된 필자는 하루빨리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한 교육이 시작될 수 있도록 『‘위안부’ 역사와 이슈: 교사자료집』(“Comfort Women” History and Issues: Teacher Resource Guide)을 그해 3월 말에 서둘러 발간했고, 인문학 커리큘럼 및 수업 부서는 이 책을 18개 고등학교에 배부했다. 2020년에는 교사자료집 3판과 학생자료집 『‘위안부’ 역사와 이슈: 학생자료집』(“Comfort Women” History and Issues: Student Resource Guide) 2판을 내기도 했다. 2017년 4월 한겨레신문에서 두 명의 조선학교 고등학생과 지바조선초중급학교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2016년 12월 지바조선초중급학교에서 열린 제45차 학생미술전시회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한 학생 작품 두 점이 전시됐는데, 그 두 작품은 ‘2015 위안부 합의’를 반대하는 마음을 담은 조연수 학생의 작품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을 표현한 강애향 학생의 작품이었다. 원래 지바현 지바시는 매년 시 보조금 50만엔(약 한화 500만원)을 이 학교에 지원해왔으나 구마가이 토시히토 지바시장은 이 작품들을 문제 삼아 이듬해인 2017년부터 보조금을 삭감했다. 이 소식을 듣고 필자와 두 명의 활동가는 인권과 정의를 존중하는 두 명의 여고생들과 지바조선초중급학교를 지지하기 위해 5000달러를 모으기로 결정했고 이 과정에서 우리 재단이 설립되었다. 우리 재단은 2017년 봄부터 모금을 시작했고 8월에는 5000달러를 이 학교에 전달했다. 이로부터 재단과 학교의 인연이 시작되어 매년 후원을 지속해, 2021년부터는 우리 재단이 지바조선초중급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미술대회를 개최했다. 지바조선초중급학교 외에 우리 재단이 정기 지원하는 또 다른 단체는 ‘Days for Girls International’이다. 이 단체는 전 세계 빈곤 지역에서 생리대가 없어 학교를 못 나오는 소녀들에게 3년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 가능한 생리대 키트와 보건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2017년에 설립한 사회정의교육재단의 구성원에는 필자를 비롯한 공동설립자, 현직 교사들, 샌프란시스코시에 일본군’위안부’ 기림비를 세우자는 결의안 324-15호를 상정하고 통과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에릭 마 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 인턴, 이번 가을이면 대학생이 되는 자원봉사자 그리고 학부모들이 있다. 학부모 중에는 한인 커뮤니티와의 연대를 두텁게 하고 우리 재단 관련 홍보 디자인에 힘 써주시는 분도 있다. 이분들 외에도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만들어 주시는 인쇄소 사장님과 무료와 다름없는 수고비로 재능을 기부해주고 계신 그래픽디자이너 등 우리 재단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있다. 재단의 교육활동 재단이 2017년에 설립된 배경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역사는 우리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형태의 성폭력 및 젠더 기반 폭력의 심각성을 비롯해 모든 이의 인권과 존엄성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알리고자 할 때 대표적으로 접목시키는 역사이다. 이를 위해 우리 재단은 교사 워크숍, 강의, 다양한 커뮤니티 행사 등을 갖는데, 세부 내용에는 일본군‘위안부’ 역사가 현재 사회에서 교차되어 나타나는 부분을 적극 포함시킨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면 첫째,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알리기 위해 범아시아계 시민들이 단합해 ‘강인한 여성의 기둥’ 기림비를 건립하고 일본군‘위안부’ 역사 교육활동을 펼친 지역사(local history)를 가르치고, 둘째,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을 토대로 여성혐오 범죄 및 성폭력을 방지하는 교육을 실시한다. 필자가 2018년 봄에 발간한 『‘위안부’ 역사와 이슈: 교사지침서』에는 위의 내용이 강조되어 있다. 이 교사지침서는 발간된 다음 달인 4월 샌프란시코 공립고등학교에 배부되었고, 같은 해 가을에 발간된 『‘위안부’ 역사와 이슈: 학생지침서』는 2021년 캘리포니아에 있는 세인트 메리 컬리지(St. Mary’s College)에서 ‘전쟁과 여성-환태평양 분쟁들의 기억’(Women in Wartime: Memorializing Conflicts in the Pacific Rim)이라는 가을 학기 수업 필수 교재에 포함되었다. 우리 재단은 이 수업의 커뮤니티 파트너였는데, 필자는 연구 책임자로 학생들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삶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미국에 현존하는 성‧젠더 폭력에 대해 논의했다. 그해 10월에는 이 두 책이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시에서 열린 〈‘위안부’ 프로젝트 전시〉(“Comfort Women” Project Exhibition)에서 전시되었다.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에서 특별 협의지위(special consultative status)를 공식 승인받은 우리는 여러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고 있는데, 이 자리를 빌려 우리 재단과 연대하는 모든 단체에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연대 단체 중 작년과 올해 우리 재단과 활발한 교육 활동을 한 NGO 단체는 한국의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 독일의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 e.V.) 그리고 미국의 유엔 미국여성간부위원회(US Women’s Caucus at the UN)이다. 작년 6월 경상남도교육청이 후원하고 마창진시민모임이 주최 및 주관한 교사포럼 〈일본군’위안부’역사교육 활성화를 위한 국제포럼〉에 필자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근무하는 두 명의 고등학교 교사, 그리고 에릭 마 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이 초대되어 경상남도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들과 의미 있는 논의를 하며 교류를 넓혔다. 올해 7월엔 두 명의 샌프란시스코 공립학교 고등학교 역사 교사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서 일주일간의 독일 탈식민주의(decolonization) 학술 답사를 통해 독일의 식민 지배를 받은 국가와 시민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는 활동가와 교육자들의 연대의 힘을 목격했다. 이들은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독일이 아프리카 식민지 여성들에게 가한 성폭력 역사와 연결짓는 것은 물론, 일본군'위안부' 제도와 같은 역사는 모든 식민주의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문제 중 하나로 접근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이들이 식민지 성폭력의 참상을 알릴 때 아시아와 네덜란드 등지에서 일본군'위안부' 제도 생존자들이 앞장서서 일궈낸 초국가적 여성인권 운동으로부터 큰 감동과 힘을 얻는다는 것도 잘 알 수 있었다. 탈식민주의 운동에서 여성의 신체 주권(body sovereignty)은 식민지배나 전쟁과 같은 무력으로 인해 국가의 주권을 빼앗겼을 때 “당연히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임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학술 답사 마지막 행사인 필자의 강의 ‘제국 일본의 성노예제 역사 보존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Collective Activism in SF Preserves the History of the Sexual Slavery System by Imperial Japan)에서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나 러시아군에 의해 무수히 강간당한 유럽 여성들, 특히 독일 여성들의 신체 주권과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 그리고 미국 내 소수 여성들의 침해된 주권에 대해 짧게나마 논의했다. 올해 7월 학술 답사를 위해 여러 독일 탈식민주의 운동 시민단체를 섭외해준 코리아협의회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우리 재단이 최근 활발한 연대 활동을 하는 마지막 단체인 유엔 미국여성간부위원회(US Women’s Caucus at the UN)는 여성과 소녀의 인권과 성형평(gender equity) 증진을 목표로 하며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ommission on the Status of Women)를 지지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와 NGO 연합단체다. 필자는 이 단체에서 페미니스트 외교정책 국장(feminist foreign policy director)으로 활동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이슈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이슈가 가지는 여러 중요한 의미 중 세 가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는 오늘날 성·젠더 기반 폭력[2]이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1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만 15세에서 49세 여성 약 3명 중 1명이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둘째는 성·젠더 폭력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 주권, 인권 유린, 폭력, 차별, 역사 왜곡 및 부정 등인데, 이러한 요인들은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채 현 사회로 이어져 뿌리내렸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미국 내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진화하는지 짚어보고 더 나아가 교육과 시민참여를 통해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강구한다면 미국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젠더 기반 폭력 관련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중요한 의미는 우리의 인권이나 존엄성이 훼손되었을 때, 우리 모두에게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권리가 있고, 다른 누군가가 이러한 피해를 당했을 때 그들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도울 책임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에 맞서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고 정의와 평화를 지키는 인권운동가로 거듭난 여러 나라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실천한 삶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다진 초국가적 연대와 여성인권 운동의 역사는 뿌리 깊은 차별과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미국 내 이민자 커뮤니티의 역사와 결을 같이 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미국 이민자 커뮤니티의 역사와 이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범아시아계 시민들의 단결된 힘으로 증폭되어 여성인권과 존엄성, 정의 그리고 평화와 같은 전 세계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잘 나타내는 일본군‘위안부’ 기림비와 피해자들의 역사를 지키는 지역사의 현장으로 자리 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 인권과 존엄성이 상식이 되는 공동체 만들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래서 정의로운 사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교육을 펼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우리 재단에게, 초국가적 여성인권 운동으로 자리매김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인권운동은 큰 힘이자 계승해야 할 소중한 가치이다. 각주 ^ 한‧영 이멀젼(Two-Way Immersion) 프로그램은 저학년 때에는 모든 과목을 한글로 가르치다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영어를 병행해 가르쳐 학생들이 과목의 내용을 한글과 영어 두 언어로 능숙하게 이해하고 구사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성·젠더 기반 폭력에는 강간, 성적 수치심, 가정폭력, 데이트 및 디지털 성폭력, 소수인종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를 비롯하여, 전쟁 지역에서 발생하는 전시 성폭력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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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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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허윤(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 권은선(중부대 연극영화과, 영화평론가) / 오혜진(한예종, 문학평론가) / 김청강(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1부> -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오혜진 ‘위안부’ 역사를 재현하고 비평하는 데 무엇이 핵심이어야 할까요? 강간 장면을 얼마나 자세하게 묘사했는가?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얼마나 ‘절절하게’ 담았는가? ‘위안부’인 존재에 ‘빙의’해야만 진정성 있는 고통을 재현할 수 있는가? ‘위안부’ 역사와 고통을 그런 방식으로 상상하는 게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빙의’의 상상력은 ‘내가 만약 '위안부'였다면’, 즉 ‘나’를 역사의 피해자로 상상하는 거죠. 그런데 ‘위안부’의 ‘역사’를 사유한다는 건, ‘나도 피해자일 수 있었음’을 주장하자는 게 아닙니다. 어떤 지배의 체제와 정서 구조에서 그런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사유하는 거죠. 그렇게 보면, ‘나도 피해자일 수 있었다’라는 가정에 머물 게 아니라, ‘위안부’라는 역사적 폭력의 연원인 ‘식민지 가부장제’라는 역사와 시스템을 사유해야겠죠. 그렇게 사유의 초점을 이동하면, ‘식민지 가부장제’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잔존하며, 현재의 나 역시 그 체제의 효과의 자장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최근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공동주최한 전시 <이웃하지 않은 이웃─홀로코스트 ‘집시’ 희생자와 타자의 초상>(KF 갤러리, 2019. 1. 24~2019. 2. 28)의 소개말은 흥미로웠어요. 나치 시대에 억압당했던 ‘집시’들의 모습이 담긴 독일인 한스 벨첼의 사진을 전시한 것인데요. 한스 벨첼은 ‘집시’를 ‘매력적인 친구들’이라고 생각해서 그들을 카메라에 담았지만, 결국 그 ‘집시’ 친구들을 홀로코스트로 보내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전시의 서문은 ‘우리도 언제든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이었던 우리도 언제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역사적 성찰의 초점을 바꿔보기를 요청해요. 가해자에 이입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선량한 이웃’은 역사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지 사유하자는 것이죠. 권은선 그와 관련해서, 저는 미약하게나마 조금씩 변화가 느껴지긴 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귀향> 같은 경우에는 정말 ‘고통의 전이’의 관객성을 구축합니다, 즉 관객이 정민의 몸을 빌려서, 완전히 그 몸을 통과하면서, 과거의 고통의 현장으로 가게 되는 구조입니다. 정민이라는 몸이 동일시-몸이 됩니다. “사실 그대로”의 고통의 재현과 대리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적 주된 장치는 플래시백이죠. 그런데 최근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를 보면 플래시백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아이 캔 스피크> 같은 경우에는 아주 부분적으로만 플래시백이 나오고, <허스토리> 같은 경우에는 전혀 없어요. <허스토리>는 주인공 시점의 플래시백을 사용하는 대신, 지금은 폐허가 된 위안소 터를 찾아 역사적 거리를 두고 현장을 바라보는, 증인의 자리에 일본군 ‘위안부’를 위치시키는, 다큐멘터리 관습을 차용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고통과 트라우마를 둘러싼 재현에 있어서 미세하게나마 변화된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귀향>이 나왔을 때, “이 이미지, 이 고통의 이미지 앞에서 한없이 너의 무기력함을 받아들여라.”- 이런 비평적 태도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러한 비평적 태도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 무력한 위치로 관객의 위치를 한정시켜야 하느냐는 것이죠. <눈길>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지점은 ‘내포 청자’의 위치입니다. 내포 독자가 아니라요. 영화 서사 장치 안에 ‘헬조선’의 소녀가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듣는 후속세대의 좋은 청자(good listener)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관객이 동일시 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 줍니다. <귀향>이 피해자에게 ‘빙의-되기’를 통한 죄책감의 정치였다면, 잘 듣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 ‘청자-되기’는 책임감의 정치를 촉구합니다. 최근의 영화들을 보면 어떤 조바심이 보입니다.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등록된 피해생존자의 수가 계속 줄어드는 상황에 대한 영화적 반응으로요, <22> 라는 중국 다큐멘터리도 있듯이요. 제가 아까 일본군 ‘위안부’들 간, 그리고 할머니와 후속 세대 간의 자매애 혹은 우정을 이야기했는데요, 거기에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어요. 꼭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가 한 명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을 잃어가는 것, 기억을 잃어가는 것이 하나의 역사적 망각에 대한 메타포로 작동하면서, 관객에게 “잃어버리면, 잊으면 안 돼”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는 재현에 있어서 ‘말하는 주체’로서의 위상을 강조했는데, 부분적으로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오혜진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유사 가족’의 형태를 빌어온 것, 그리고 판타지 같은 결말이요. <허스토리>는 사실 장점이 될 만한 요소들을 많이 내장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위안부' 운동을 떠올릴 때, 소녀상, 나눔의 집, 광화문과 같은 공간적 특성을 떠올린다는 거죠. 그런데 <허스토리>는 부산이라는 지역을 다루고 있다는 지점이요. 그리고 ‘법정 드라마’이기 때문에 펼쳐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가령 “법적 책임 vs. 도덕적 책임”의 문제라든지, 그런 배상과 책임을 둘러싼 (국제)법, 법리적인 것들이요. 오혜진 제가 아까 소개한 ‘감방 죄수의 무력함’에 대한 이야기는, 고통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너무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재현을 포기하고 역사적 성찰을 방기하는 상황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맥락에서 인용된 것이었어요. 다른 얘기를 해보자면, 김숨의 소설 『한 명』을 읽고 제가 깨달은 것은,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말하는 주체’가 됐다는 점이 다시 한번 물신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 소설은 마치 보고서처럼 300여 개의 각주가 달려 있는데, 그것들은 ‘위안부’가 당한 폭력을 서술하는 서술자의 증언에 신빙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동원돼요. 그 ‘폭력 묘사’의 내용은 <귀향>과 이전 ‘위안부’ 서사들이 즐겨 한 자극적인 묘사와 거의 같습니다. ‘강간’을 비롯한 폭력이 매우 선정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서술되는데요. 여기 달린 각주들은 ‘이건 서술자가 일부러 그 고통을 외설적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이 직접 한 말이니 ‘재현의 윤리’ 따위로 문제 삼지 말라’라는 뜻으로 읽히더라고요.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페티시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거죠. ‘위안부’의 역사적 맥락을 사상시킨 채 ‘위안부’의 섹슈얼리티를 재현하고 소비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고자 ‘위안부’ 피해생존자의 ‘증언’이 등장한 것인데, 그 ‘증언’을 다시 한번 물화하는 것이 대중서사의 강력한 전략이 됐다는 건 문제적이죠. 김청강 초반에 진실성의 문제가 굉장히 큰 이슈였잖아요. 말하자면 일본에서 역사적 부인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는 사실로 증명을 해야 한다는 그런 강박 내지는 필요성에 의해서 계속 사실이었다고 말한다거나. 그리고 그게 단순히 증언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증언이 신빙성이 없다는 말 때문에 자료를 통해서 증빙해야 하고. 이런 강박이 사실은 지금 말씀하신 소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일본은 계속해서 역사를 부인하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반응하는, 그런 방식으로. 그런데 약간 그런 제로섬 게임 안에서는 거기서 더 나갈 수가 없는 방식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쪽에서 부인하면 '아니야, 사실이야.' 이렇게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모습으로밖에 갈 수가 없는. 그리고 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아까 그 이전의 재현 방식에서 나타나는, 1990년대 이전에 재현의 방식에서 성인 여성으로 주로 나타났다는 그런 측면이 현재는 사라진 건데, 그 의미도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왜 그 부분이 삭제되느냐, 피해를 입었던 기간보다 한국에 돌아온 ‘위안부’ 생존자들은 한국에서 숨죽이고 견뎌왔던 세월이 굉장히 많이 삭제되는 거거든요. 물론, 최근의 영화들에서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성찰해야 한다는 시각들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소녀와 할머니로 재현되었을 때 그 사이에서 쭉 견뎌온 세월과 그사이 한국 사회의 책임에 대한 문제들이 사실은 굉장히 많이 삭제되고 있다는 것이거든요. '위안부' 문제를 얘기할 때 1990년대 이후의 서사들에 대해서 굉장히 집중하는데, 사실 이전의 맥락들을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한국 사회가 떠안아야 할, 이게 단순히 일본의 폭력으로만 회수되지 않을 지점들을, 우리 사회가 받아 안아야 할 부분들을 조금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위안부'를 그동안 잊어왔는가. 이전의 디테일한 방식들에 대해서 조금 더 성찰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도 조금 듭니다. 허윤 '위안부'가 항상 늘 대중 소설의 장르 속에 등장하는 성애화된 성인 여성이었죠. 김성종 소설도 그렇고요. 저는 재현의 기점이 바뀌게 된 것은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이승연 씨가 모바일 미디어 산업과 결합한 성인 화보 시리즈의 연장 선상에서 화보를 내겠다고 하면서 엄청난 이슈가 되고, 사람들이 분노했었죠. 이후에 성인 여성으로 재현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감각이 생긴 거죠. 그런데 그때 무릎 꿇고 사죄하고 필름 태우고 하는 식으로 사죄를 했지만, 그게 왜 문제인지, 혹은 어떻게 이런 작업을 생각할 수 있었는가를 더 묻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도 제작자는 '역사적 책임을 가지고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겠다'라는 말을 했었거든요. 일본군이 주둔했던 팔라우까지 가서 화보를 찍은 것인데, 그런 화보가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했던 데 대해서 한국 사회는 심문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혜진 이승연 씨의 화보 사건은 그 자체로 새롭다기보다는, 그 이전까지 ‘위안부’ 섹슈얼리티를 소비하던 방식의 연장 선상에서 발생한 일이죠. 식민지의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 섹슈얼리티가 남성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성애화된 여성 섹슈얼리티의 한 종류로서 간주되어온 전통. 다만 이승연 씨의 화보 사건은 그것을 ‘모바일 화보’라는 형식을 통해 매우 노골적으로 상품화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후폭풍을 맞은 거죠. 그 이전에도 이미 스포츠신문 연재소설 등에서 ‘성애화된 여성 섹슈얼리티’로서 ‘위안부’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었으니까요. ‘위안부’ 여성을 성애화된 방식으로 소비해온 구조와 역사에 대한 질문 없이, 그저 ‘위안부’ 여성이 성애화되는 건 ‘위안부’를 ‘성인 여성’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그걸 피하고자 손쉽게 ‘어리고 순결한’(그럴 것이라고 상상되는) ‘소녀’ 형상을 택한 게 최근의 일인 듯합니다. 하지만 <귀향>이나 ‘소녀상’에 대한 성희롱에서 보듯 ‘소녀’ 역시 성애화의 대상이 될 수 있죠. ‘소녀’ 역시 섹슈얼리티의 주체니까요. 김청강 저는 소녀상이 사실은 굉장히 좋은 재현의 방식의 하나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왜냐하면 어떤 커다란 동상을 세운 게 아니고, 굉장히 작고... 제가 영화에서 성인 여성들이 착취되는 어떤 그런 모습들을 쭉 보다가 소녀상을 봤을 때, 이게 당시에는 상당한 대항성을 가지고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가서 만져볼 수 있고 비가 오면 우산도 씌워 주고, 눈이 오면 모자도 씌워 줄 수 있는, 이런 만질 수 있고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재현했던 게 좋았는데, 지금은 사실은 소녀상이 굉장히 너무 과공급되면서 그 의미가 탈색됐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대항적인 부분이 사라졌을 때, 어떤 식의 대안을 가지고 재현을 할 것인가. 이제 소녀로만 얘기하기도, 성인 여성으로만 얘기하기도,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얘기하기도 굉장히 어려운 지점에 도달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권은선 돌이켜 보면,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은 일종의 해프닝이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이전까지 '위안부'에 대한 포르노그래픽한 상상이 잔여적인 이미지 형식으로 계속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김학순 님의 증언 이후, '위안부' 재현과 관련해 가장 강력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가 1995년에 등장합니다. 이런 이미지들과 담론들이 경합하는 와중에서, 이미지 생산을 둘러싼 미디어 자본이 결합하면서 나온 아주 이상한 결과물이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잔여적인 이미지 형식이 <귀향>에서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죠. 김청강 <귀향>을 보고 저는 이게 왠지 성인 여성에서 소녀로 바뀌었을 뿐이지, (물론 성폭력 피해 여성과 겹쳐지는 공감의 부분을 넣긴 했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보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권은선 ‘소녀상’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사실은 소녀상의 무한증식으로 ‘소녀’가 일본군 '위안부'의 이미지를 과점유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많은 분이 반복해서 지적했던 것처럼, 일차적으로 ‘훼손당한 민족’을 순수하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이미지 재현이 소녀이기 때문이죠. <귀향>을 분석하면서 얻은 생각은, 이러한 순수한 민족적 피해자 소녀의 고통 재현이, 결국 ‘위안부’ 피해자를 추상화하고 종교화하고 신성화하는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즉 무력한 위치를 받아들이면서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라는. 그리고 그러한 감각을 강화하는 것은 이 <귀향>이 만들어진 크라우드 펀딩, 그리고 소녀상 만들기 모금 과정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이 이미지(동상)를 만든다”라는 주인의식이 과도한 죄책감의 공동체, 공통감각-이런 것들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대해서 입을 틀어막는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일종의 ‘국민 프로듀스’ 감각이라 할 만한 것으로, “내가 프로듀서”, 마치 버라이어티 쇼의 대국민 투표에 참여하듯이, 내가 제공하는 것이라는 생각. 이런 것들이 역사적 성찰에 필요한 이미지에 대한 거리감이라든지, 유효한 정치적인 전략을 구성하는 데 저해가 된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성찰과 비평적 담론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김청강 중요한 부분을 권 선생님께서 지적해주신 것 같은데요. 국민 프로듀스가 된다는 그런 감각?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시민의식 같은 거. 그러니까 굉장히 시민의식을 갖는 손쉬운 방법으로 돼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금 들거든요. 그러니까 조금 시민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여기에 적은 돈이지만 그만큼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손쉬운 시민의식 감각으로 만들어지는 경향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허윤 지금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물이나 상품, 텀블벅과 같은 크라우드 펀딩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죠. 오혜진 100피트 운동부터 <귀향> 보기 운동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시민참여 방식 자체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걸 ‘자본주의에 침윤된 소비자운동’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위안부’ 역사 재현의 새로운 쟁점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언제든 성애화되기 십상이니, ‘위안부’를 ‘소녀’, ‘성인여성’, ‘할머니’ 중 무엇으로 재현할 것인가가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고요. 결국 ‘위안부’ 역사를 재현한다는 것은 ‘위안부’ 문제를 역사화하면서 우리가 얻은 ‘성찰’을 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재현의 윤리’에 대한 두 가지 경향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나는, 지대한 고통은 ‘재현하지 않는 것’이 곧 윤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죠. 어떤 고통은 ‘재현 불가능성’의 영역에 있다고 규정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곧 ‘재현의 폭력’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는 ‘쇼아[1]는 재현될 수 없다’라는, 재현에 대한 오랜 논쟁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위안부’ 재현 서사뿐 아니라, 최근에는 (성)폭력이 등장하는 재현물 자체를 금지와 말소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까지 있죠. 하지만 ‘재현 없는 사유’가 가능할까요? 문제는 폭력을 ‘재현’했다는 것 자체에 있지 않을 겁니다. 어떤 관점과 방식으로 폭력을 재현하는가의 문제겠죠. 어떤 대상이 절대로 재현 불가능하다거나 재현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오히려 재현된 ‘이미지’에 대한 물신화에 기인한다고 생각해요. 재현된 이미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불가변적인 것으로 사유하는 거죠. 하지만, ‘재현된 이미지’는 대상에 대한 특정 시대와 인간의 ‘역사적’ 관점과 이해를 보여주는 한 사례일 뿐입니다. 특정 대상을 ‘재현 불가’의 영역에 두는 건 그 대상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것에 가까워요. 오히려 재현된 결과물에 대해 논쟁을 하는 게 더 생산적이죠. 이건 ‘표현의 자유’ 등을 내세워 모든 재현은 용납돼야 한다는 식의 나이브한 주장과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경향은, 특정 대상을 비평할 때 ‘재현의 윤리’ 등을 문제 삼는 것을 매우 전통적이고 엘리트적인 작품론에 속한다고 보는 의견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귀향>을 비평할 때, ‘재현의 윤리’를 문제 삼아 영화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이 영화의 제작과 수용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역사와 정치에 개입하는, 작품 자체보다 ‘더 큰’ 대중운동의 정치성을 간과하는 고식적인 비평으로 간주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시도한 재현 전략을 비평적으로 사유하는 것과 영화를 둘러싼 수용의 정치를 사유하는 것은 서로 배치되지 않아요. 둘 다 필요하죠. ‘재현의 윤리’는 작품을 창작한 개인의 정치적・미학적 수준이나 취향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특정 재현이 대중적 공감을 얻고 선호되는 건 그 자체로 그 주제에 대해 한국 사회에 축적된 지식과 이해의 문제고, 이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죠. 여기서 잠깐 영화 <사울의 아들>(라즐로 네메스, 2015)과 관련된 논쟁을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수용자들을 가스실로 이끌고 시체를 처리하는 또 다른 유대인 수용자들인 ‘존더코만도’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존더코만도’ 일원 중 한 명이 나치의 감시망을 피해 어두운 소각로에서 몰래 아우슈비츠의 모습을 찍은 사진 4장이 이 영화의 기반이 된 거죠. 저는 이 영화 초반부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이 영화가 정말 나를 아우슈비츠로 끌고 간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영화에서 카메라는 언제나 주인공의 어깨 뒤에 위치합니다. 딱 그 위치에서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거죠. 아주 한정된 시야로 현재 주인공이 있는 위치를 조망하기 때문에 관객은 지금 여기가 어딘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워요. 마치 광장에서 키 큰 앞사람들의 어깨 사이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현재 광장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해야 할 때의 답답함처럼요. 이런 촬영기법들이 저한테 일종의 임장감(臨場感)이랄까요, 내가 정말 그곳에 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줬어요. 그리고 또 영화는 바로 그 한정된 시야를 통해, 떼 지어 기차에 오르는 유대인들이나, 벌거벗은 수용자들의 시체더미 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장면들은 마치 포커스 아웃, 혹은 블러 처리를 한 것처럼 희미하게 나와요. 이런 연출을 통해 관객은 아우슈비츠의 시스템 전모를 절대 파악할 수 없고, 죽음에 이르는 수용자들의 표정이나 정동 같은 것도 결코 포착할 수 없죠. 아우슈비츠라는 장소나 피해자들의 모습이 ‘스펙터클’로 제시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혹자는 이 영화가 재현의 윤리에 매우 충실하다고 평했죠. 하지만, 피해자나 시체를 ‘희미하게’ 보여줌으로써 보장되는 윤리? 그렇다면 그 블러 처리가 조금 덜 희미했다면 덜 윤리적인 재현이 되는 걸까요? 저는 그 영화에 재현의 윤리가 있다면, 그런 정교하게 기획된 촬영기법에 있다기보다는 그 영화가 말하려고 했던 바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 영화는 주인공인 한 존더코만도 ‘사울’이 나치의 감시망을 피해서, 가스실에서 죽은 한 소년을 제대로 ‘매장’하고 애도하기 위한 분투를 서사화하거든요. 심지어 그 소년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존재일지라도, 바로 그 분투를 함으로써만 겨우 스스로 감지하는 ‘존엄’의 문제를 말합니다. 마치, 소년의 매장을 위해 분투하듯, 결코 재현될 수 없는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고통을 사유하려는 영화의 ‘기투’ 자체에 윤리적인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보면, ‘위안부’의 역사를 비롯한 고통의 재현을 생각할 때 ‘재현의 윤리’에 대한 매우 협소한 이해가 고착되는 상황은 염려스럽습니다. 권은선 공감합니다. 사실 ‘재현의 윤리’ 혹은 ‘재현의 도덕’이라는 논리가 이상한 방식으로 고착되고 사유되고 있어서, 어느 순간 개인적으로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더라고요. 단순히 촬영 기법 같은 것들이 즉각적으로, 기계적으로 어떤 윤리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시각화의 장치라는 것을 통해서만 그 어떤 이미지의 의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저는 시각화 장치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쇼아>부터 ‘아우슈비츠’를 재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오래되었죠.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저는 그것을 재현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사유하고 성찰하기 위해서 재현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재현의 방식이죠. 폭력의 재현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나쁘다면 그것이 폭력의 속성을 사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향>의 재현을 옹호한 언설 중의 하나가 실제 ‘위안소’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그린 그림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재현의 윤리에 관해 어떤 것도 담보할 수 없습니다. 위안소에서 벌어진 일이 정말 나쁜 것은, 그것이 인간성이라는 것을 말살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한 것이죠. <사울의 아들> 같은 경우에는 초점 심도를 낮추는 촬영 방식 등을 주도적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수용소에 있는 수용자들에게는 초점이 명확하게 맞춰질 수 없는, 어떤 상황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사울의 아들>을 두고 디디 위베르만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곳에서는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은 감시자의 시선뿐이라는 거죠. 그런데 <귀항>에서 정말 문제적인 ‘지옥도’의 재현을 예를 들면, 그것은 그 사실이 얼마나 끔찍하고 정말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극 부감의 시점으로 전체를 조망합니다. <귀향>에서 성폭력이 남성 중심적인 가해자의 관음증적 시선으로 묘사되는 것도 문제지만, 감시자, 전체주의자의 시선을 채택하고 있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성이 탈각된 ‘스위트 홈’ 고향의 이미지가 놓여 있고요. <귀향>에서처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마치 지옥도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종교적으로 만들고, 추상화하고 신성화하는, 그런 탈역사적 재현 장치를 문제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오혜진 아까 그 존더코만도가 찍은 사진 4장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2004년에 쓴 책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오윤성 역, 레베카, 2017)을 읽어봤어요. 그 사진들에는 화장 구덩이들과 숲에서 옷이 벗겨진 채로 호송되는 여성의 모습이 찍혔습니다. 하지만 그 사진은 나치의 감시를 피해 몰래 찍은 것이기 때문에 초점도 맞지 않고 이미지도 선명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사진을 찍는 이가 있는 장소도 함께 찍혔죠. 예컨대 화장 구덩이와 그곳에서 일을 지시하는 나치들만 찍히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던 제 5소각로 가스실의 ‘어둠’이 시커멓게 찍혔습니다. 화장 구덩이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던 공간의 열린 문을 통해 간신히 보이는 장면이죠. 이 사진들에 대해 가장 빈번하게 시도된 조작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이 알고 싶은 건 ‘아우슈비츠는 어떻게 생겼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나’이기 때문에, 사진 속 시커멓게 나온 ‘어둠’은 자르고 화장 구덩이들만 클로즈업하는 식이죠. 시커먼 부분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잔여적인 부분으로 간주해서 삭제하는 겁니다. 하지만 디디-위베르만은 그 시커먼 부분 역시 아우슈비츠의 이미지임을 강조합니다. 그 까만 부분은 그 사진들이 어떤 상황을 ‘무릅쓰고’ 탄생 가능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인데, 그것을 삭제한다는 것은 ‘증언/재현이 가능한 자리’를 비가시화하는 일이라는 거죠.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당연히 <귀향>의 소위 그 ‘지옥도’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위안소’ 전체를 ‘조감’하는 시선은 어떤 자리에서 가능한가 생각해보면, 그건 권은선 선생님 말씀대로 감시자 혹은 신의 시점이죠. 결국 우리는 왜 증언/재현을 물신화할 뿐, 그것을 가능케 한 역사적 조건을 사유하지 않는가. ‘위안부’의 고통을 존중한다면서, 왜 ‘위안부’의 고통을 재현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는가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김청강 디디 위베르만 책에서 보니 여성 가슴도 조작했다고 하더라고요. 더 위로 처진 가슴을 올리는 식으로요. 왜 굳이 그렇게 해야 했을까 생각하는데, 사실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어떤 우리가 보고 싶은 이미지, 그러니까 초점을 두는 부분에 대한 조작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사실은 어떻게 보면 지금 굉장히 재현이 많이 있지만, 다 너무 초점이 그 목적에 맞게 그 재현들이 너무 클리어하게 맞춰져 있다는 게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은 최근에 경향 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극화된 것이 많다는 것이잖아요. 그랬을 때 기존의 다큐멘터리가 정말 많은 것을 숙고해서 재현했던 방식과 극영화로 만들었을 때 방식이 굉장히 다를 수밖에 없고, 특히 극영화로 만들었을 때 너무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는 거예요. 초점이 너무 클리어해지는 거죠. 대중적 소통이라는 것에 공감을 얻고, 대중적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의식과, 그다음에 그러기 위해서 동원해야 하는 수단이, 사실은 어떻게 보면 그 이슈 자체를 너무 단순화하게 만드는, 그러니까 의도는 좋잖아요. 이 이슈를 알리고 사람들이 책임감과 모든 것을 알게 해야 한다는 건 좋지만, 사실 대중적 재현을 따랐을 때는 단순화될 수밖에 없는 그런 구도, 굉장히 클리어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쭉 스토리를 끌어나가야 하는 그런 것 때문에 어떻게 보면 대중적인 서사 안에서 더 많이 재현된다는 건 사실 더 큰 우려를 낳는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오히려 정말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각주 ^ 히브리어로 '홀로코스트'라는 뜻.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영화 <쇼아>(1985)는 총 350시간에 이르는 촬영 필름을 가지고 9시간 반으로 편집된 대장편 다큐멘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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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전장 없는 '주전장'과 정쟁화된 '위안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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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 깊이 읽기 <2부> '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 깊이 읽기' 시리즈가 두 번째로 선택한 것은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가 감독한 영화 <주전장>이다.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담론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주체들의 다양한 주장을 상호 교차적으로 보여주면서 '강제성'과 '자기 의지', 미국의 책임 등 '위안부' 문제의 주요 쟁점을 논리적으로 논파해 나간다. 하지만 그 사이 정치적 언어가 증식하면서 운동의 본질을 흐려 어느새 '위안부' 문제를 가벼운 국제정치적 '논란거리'로 만드는 지점도 읽힌다. <1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서발턴'의 말하기 <2부> 전장 없는 '주전장'과 정쟁화된 '위안부' 문제 '주전장'의 참여자들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Miki Dezaki)가 감독한 영화 <주전장(主戰場)>(2019, 원제 Shusenjo: The Main Battleground of Comfort Women Issue)은 기존의 '위안부' 영화와 달리 피해자의 삶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의 담론 지형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담론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주체들, 곧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기억연대)나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활동해 온 시민단체부터 역사학자, 국제법학자, 변호사, 정치인, 역사 부정론자들, 그리고 부정론자들의 스피커가 되고 있는 백인-미국-남성 인플루언서들까지 다양한 주체의 주장을 상호 교차적으로 보여주면서 '위안부' 문제의 주요 쟁점을 논파해 나간다. <주전장>은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의 '위안부' 소녀상 설치(2013), 일본 국회의 고노담화 재검토 논의(2014),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2015.12.28) 등 국제적으로 '위안부' 논의가 뜨거웠던 2010년대 중반 일련의 사건을 비추면서 소위 '역사전쟁', '기억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위안부' 담론을 둘러싼 갈등과 그 참여 주체들의 진영을 해부한다. 강제성과 노예제도 성립의 핵심,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우선 <주전장>의 장점은 역사 부정론자들의 주장을 검증하는 논의의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의외로 부정론자들은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일본 정부를 면책하는 주된 논리는 '협의'의 강제성이 없었으며,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매춘부'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영화는 인권 변호사 토츠카 에츠로, 국제법 교수 아베 코키의 법적 견해를 통해 적절하게 반박한다. 중요한 대목이니 직접 인용해 본다. 아베 씨는 '강제'라는 단어에 대해서 밧줄로 묶어서 데리고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제'라는 단어를 법적으로 설명하자면 '자유 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유 의지가 아니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속아 넘어가는 것도 자신 본연의 의지는 아닌 겁니다. -토츠카 에츠로의 발언 (<주전장>, 00:47:30~00:48:00) 노예제라는 것은 사람이 물건처럼 취급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의해 완전히 지배당하는 상태를 뜻하죠. 이런 상태를 '전적인 지배'라고 합니다. 따라서 '위안부' 여성들이 '전적인 지배' 하에 있었다면 '노예제'가 성립됩니다. 이때 그녀들이 고액의 보수를 취하고 있었건 아니건 이는 노예제의 성립 여부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큰 돈을 받았을 때는 노예가 아니고 돈을 안 받았을 때는 노예다'라는 것은 국제법상에 일언반구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역사학자들이 밝힌 자료나 역사적 서술에 기술되어 있듯이 돈을 받거나 만찬을 즐기거나 외출을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이 본인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자유 의지를 현저하게 박탈당한 상황 속에서 '전적인 지배' 제도 하에서 허가를 받아야지만 그런 활동이 가능했던 사실을 미루어 본다면 그것은 '노예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베 코키의 발언(강조-인용자. <주전장> 01:08:37~01:10:01) 일반적으로 '강제 연행', '성노예'라고 하면 군인이 총을 앞세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해 연행하거나 쇠사슬에 묶여 지하에 감금되어 있는 극단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이러한 왜곡된 관념은 '위안부' 피해자가 '속아 넘어간 것이니', 또 '돈을 받았으니' 강제 연행이나 성노예는 아니라는 주장이 널리 통용되는데 일조한다. 그러나 법적 강제성이나 노예제도의 핵심은 '자유 의지에 반해' 혹은 '자유 의지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행위를 강제 당했다는 데 있다. 그러니 'wam'의 사무국장 와타나베 미나의 말처럼 “자유를 빼앗긴 채 지속해서 강간당했는데 1억 엔을 준다고 해서, 그걸 받았다고 하더라도, 왜 성노예라고 하면 안 되는지” 오히려 되물을 필요가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 또 다른 행위자 '미국' <주전장>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할 점은 이 영화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 미국의 책임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 우익들에게 '시카고 대디'라 불리며, 미국 사회에서 역사 부정론자들의 스피커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인 유튜버 토니 머라노.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의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며 “우리와는 상관도 없는 문제에 우리나라를 연관시키려는 사람들이 정말이지 망신스럽습니다. 이것은 일본과 미국 간에 의견만 분분하게 할 뿐이죠.”라고 말한다. 토니 머라노가 '헤이트 스피커(Hate Speaker)'이긴 하지만, 사실 이러한 논리는 '위안부' 문제에 무관심한 미국인들에게 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들의 나라가 한일 간 분쟁에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그 중에는 '위안부' 문제가 미국 내 아시아계 민족 사이의 불화를 일으킨다고 여기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주전장>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결코 외부자적 위치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2015년 한일 일본군'위안부' 합의를 겹쳐 놓으면서, 미국이 정의 구현이라는 가치보다 '한-미-일' 우방을 통해 얻어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조약에 압력을 가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종전 후 냉전체제에서 미국은 공산권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군비에 압력을 가했으며, 이를 위해 A급 전범 혐의자로 수감되어 있던 키시 노부스케를 석방하여 총리가 되도록 지원했음을 밝힌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전장>은 전후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오늘날 일본의 부정론자들을 야기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전장 없는 '주전장', 희미해지는 운동의 본질 이처럼 <주전장>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역사전쟁'의 중요한 쟁점들을 객관적 사료와 신뢰할 만한 학자들의 견해를 들어 논리적으로 돌파해 나간다. 그러나 영화 <주전장>이 관객에게 선사하는 '재미'는 단지 새로운 지식과 복잡한 담론 지형을 이해하게 되는 인식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는 특유의 시니컬한 시선을 통해 부정론자들의 자가당착과 무지성적 태도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가령, 일본 자유민주당 국회의원 스기타 미오는 고노담화의 근거는 자칭 '위안부'라 주장하는 이들의 증언밖에 없으며, 그 조차도 일관성이 없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글렌데일 시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기 위해 어느 일본계 미국인의 증언을 근거로 제시한다. 영화는 증언의 가치를 폄훼했던 그의 발언을 다시 보여주며, 스기타 미오가 자기모순에 빠져 있음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후지오카 노부카츠는 “국가는 사죄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극우 내셔널리스트의 핵심 인물인 카세 히데야키는 스스로를 역사가로 소개하면서도 “저는 타인이 쓴 책은 안 읽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영화는 이들을 어리석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존재들로 그려낸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장면은 모종의 쾌감을 준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만 해도 여러 번 나타나듯, 극우 내셔널리스트들과 역사 부정론자들이 반인륜적인 발언을 일삼아왔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파시즘적 혐오 발언을 했던 이들의 '무식한' 실체가 까발려질 때 그간의 불쾌함과 모욕감이 해소되며 통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물론 이 통쾌함에는 일본 내셔널리스트에 맞서는 한국의 내셔널리즘도 얼마간 섞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분노가 통쾌함으로 설욕되고, 내셔널리즘과 내셔널리즘이 맞서는 동안, 다시 말해 정치적 언어가 증식하고 국가주의적 파토스가 에너지를 얻는 동안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 망각되기 쉽다는 점이다. 영화의 전반에 깔려있는 냉소적 어조가 부정론자를 향한 것임에도 이 영화를 통해 얻어지는 쾌감 속에서 어느새 '위안부' 문제가 국제정치적 '논란거리'의 하나로 가벼워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인 '주전장'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우익이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는 '위안부 문제'라는 담론의 장소이고, 다른 하나는 그 치열한 담론 투쟁의 국제적 무대인 '미국'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남기는 최종적 메시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및 연대 시민단체가 30여 년 간 일관되게 주장해 온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 재발 방지에 있다기보다 현재 '위안부' 담론의 '주전장'은 어디이며, 이곳의 전세가 어떠한지 보여주는 데 있다. 이는 현실 정치의 부침 속에서 전개되는 '위안부' 운동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긴 하지만, 이러한 인식 구조에서는 여자들이 의사에 반하여 동원되고, 인신을 속박 당하여, 거대한 성폭력 범죄의 피해를 입은, 실제 사건의 장소인 전장이 누락된다. 사건의 장소인 실제 전장이 망각될 때, '위안부' 운동의 최종 목적은 역사 부정론자들과의 대결로 도착되기 쉽다. '위안부' 운동의 본질적 목적을 기억하기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와 같은 전장의 누락과 본질의 도착이 영화 <주전장>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일찌감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목소리를 내어 왔던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는 2012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되돌아보는 글의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모든 것은 1990년대부터 시작되었다.”[1] 비슷한 논법이 부정론자들과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고 밝힌 어느 연구에서도 나타난다. “'위안부' 문제는 원래 있던 문제가 표면화된 것이 아니라 문제라고 간주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작용에 의해 사회문제로 출현했다. 이 문제는 담론에 의해 구축된 것이지 전시 중에 위안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 '위안부' 문제란 구 일본군의 '위안부' 제도가 문제시되어 일본 정부가 대응을 요구하고 있는 문제이다.”[2] 이러한 인식은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1980년대 초까지 '위안부'는 불행하고 불쌍하며, 스스로 또는 남들에게 부끄럽고, 면목 없는 사람들”[3]로 인식되었으므로 “1990년 이전에 위안부 문제란 없었다”[4]고 주장하는 역사 부정론자들과 얼마나 다를까. 진영을 막론하고 공히 이들에게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담론적·정치적 대결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모든 것'에 정작 일본군에 의한 전시 성폭력이라는 '사건'은 소거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정쟁화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종종 운동의 본질적인 목적을 잊게 한다. '역사전쟁', '기억전쟁'이라는 수사 속에서 역설적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여자들이 강간을 당한 실제 전쟁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역사 부정론자들은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나아가야 할 길에 놓인 돌뿌리일 뿐이다.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위안부' 운동의 본질적 목적이다. 그것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군사적 도구로 만드는 전시 성폭력을 단죄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며, 이러한 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법과 제도,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을 가꾸는 일이다. 우리가 꿈꾸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주전장'이 한낱 돌뿌리와의 싸움일 리는 없다. 각주 ^ 우에노 치즈코, 이선이 역, 「내셔널리즘과 젠더를 다시 쓰며」(개정증보판 서문),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현실문화, 2014, p. 13. 이헌미는 이 명제가 "위안부 운동과 담론을 둘러싼 역사적 소실점(消失點. vanishing point)을 명쾌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하며, "역사의 가속화가 만들어낸 사회적 기억의 단기 소실점을 넘어서, 일본군'위안부'의 현재사에서 망각되고 누락된 지점을 짚어" 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이헌미, 「한일 위안부 외교의 역사와 쟁점」, 역사연구 42, 2021, p. 98, 102.) ^ 木下直子, 「慰安婦」門題の言說空間, 勉誠出版, 2017, pp. 1∼2. ^ 주익종, 「해방 40여 년간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 반일종족주의, 미래사, 2019, p. 346. ^ 위의 글, p. 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