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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에세이 김학순을 추억하다 2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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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의 날 특집] 김학순을 추억하다 <논평> 소현숙 -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에세이> 1. 이희자 - 김학순 할머니와 나 2. 나카가와 히사코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3. 야스다 치세 - 우리들이 죽고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4. 노부카와 미츠코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1991년 12월,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 사죄와 명예회복을 요구하며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사건 )했을 때, 많은 일본인이나 재일한국인들이 할머니들을 지원하기 위해 힘썼다. '군위안부'의 존재는 센다 가코(千田夏光)의 책 『종군위안부』나 시로타 스즈코씨의 호소로 알고 있었지만, 한국인, 조선인 피해자들의 모습은 미지의 것이었다. 1970년대 만들어진 '위안부' 관련 기록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에서도 감독 야마타니 테츠오(山谷哲夫)가 서울에서 피해자들을 수소문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던 상황이 담겨 있다. 시로타 스즈코 씨를 알게 된 것은 1986년의 일이다. 어느 날 밤 TBS 라디오에서, 시로타 스즈코 씨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각한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었다. "팔라우를 떠날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비는 팔라우의 산속에 숨어 떠나는 배를 바라보면서 이런 몸으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울던 여성들의 눈물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은 그녀는, 존재가 잊혀지고 있던 이름 없는 여성들을 위해 비석을 세우고 싶다고 호소했다. 그녀의 바람은 방송 이후에 실현되어, 치바 현 카니타 부인의 마을에 '아아, 종군위안부'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졌다. 이 잊혀진 여성들 대부분이 한국, 조선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비참한 경험들이나 위안소의 실태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고백과 그녀를 뒤따라 증언한 할머니들 덕분이었다. 일본에서도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투쟁에 공감하여 재판을 응원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우리 노조 여성부 일부 회원들은 위안부 문제 해결에 힘쓰는 모임을 결성하여 재판을 지원하고 국가보상을 요구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재판의 원고인 김학순 및 다른 할머니들과는 숙소 생활을 도와드리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취사가 금지되어 있던 숙소에서 식사 시간이면 할머니들은 큰 주전자에 찌개를 끓이셨고, 마지막에 황금주 할머니가 간을 보면 완성. 할머니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특히 김학순 할머니는 할머니들의 리더 같은 존재였다. 할머니를 따라다니는 열성적인 팬도 있었다. 어느 날, 신문기자였던 나는 우연히 쇼와 천황이 사용하는 타올을 미쓰비시 백화점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할머니들의 숙소로 가는 도중 이케부쿠로의 미쓰비시 백화점에 들러 그 수건을 몇 장 사서 선물로 들고 갔다. 할머니들께 천황이 쓰는 수건이라고 설명해 드리자, 김학순 할머니가 천천히 일어서시더니 '히로히토 녀석! 천황이 다 뭐냐!' 하고 소리치며 하얀 수건 포장을 발로 밟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할머니들도 각자의 수건을 밟으며, 함께 소리치며 즐거워했다. 나는 김학순 할머니의 의외로 장난스러운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할머니들의 뜨거운 투지에 압도되어버렸다.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국회 앞 농성에는 학생들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했고, 참가자들은 밤을 새우기도 했다. 가을이라 태풍도 오고 춥기도 해서 고령의 할머니들께는 혹독한 싸움이었다. 나는 할머니들을 격려하러 오는 국회의원들이 사비를 털어 할머니들을 가까운 호텔에 모시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다. 국회의원회관 앞에서 강순녀 할머니가 굿을 한 이후, 갑자기 김학순 할머니가 '저도 하겠습니다' 하면서 장구채를 손에 쥐었다. 노오랗게 빛나는 은행잎 아래에서 김학순 할머니는 씩, 미소를 짓고나서 천천히 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꽃과 같은 웃음이라는 말은 바로 할머니의 미소를 가리키는 듯 주변이 갑자기 밝아졌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할머니의 장구 소리에 끌려들어 갔다. 옆에 있던 동료들은 와, 하고 경탄했고, 나 역시 '훈련받은 프로는 다르구나' 하고 감동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연주는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 연주를 듣게 된 것은 전후 보상 운동에 참가한 나에게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였다. 나는 재판을 위한 증거 확보를 위해 김학순 할머니를 도운 적도 있다.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에게 연행된 '칵카현 철벽진(カッカ県ゼッペキ鎭)' 을 중국 지명집에서 찾아보았지만, 중국은 시 아래에 현이 있고, 그 아래에 진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정도로 중국 지리에는 문외한이었다. 누군가는 단순히 "'후오루(獲鹿)'를 '칵카현(カッカ県)'이라고 불렀겠지" 하고 말했지만, 그 현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진은 없었고, 허베이성 석가장의 주변에서 트럭으로 갔을 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그 외에 허베이성에는 트럭으로 갈 만한 거리에 '허젠현(河間)'이라는 곳이 있었지만 거기에도 비슷한 이름의 진은 없었다. '훠자현(獲嘉)'은 있어도 허난성에서 너무 멀었다. 결국 유감스럽게도 지명을 특정하지는 못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군의 위안소를 탈출하고 각지를 전전하며 마지막으로 프랑스 조계의 정안사로에 정착하여 전당포를 열었고, 이후 일본은 패전을 맞았다. 당시 이야기를 들으면, 할머니는 훙커우 공원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연설을 들으러 갔다고 한다. 훙커우 공원은 윤봉길이 상해파견군 총사령관들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두 명을 암살한 곳이다. 이 공격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김구 주석의 연설로 그곳은 광복과 독립의 열기로 가득 차, 그 자리에 있던 김학순 할머니 부부의 기쁨도 컸을 것이다. 할머니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후, 헤이본샤(平凡社)에서 출판된 『백범일지』(『白凡逸志』, 1973)를 가져가니, 할머니는 일본어로 된 그 책을 손에 꼭 쥐고 계셨다. 한편 우리가 지원하고 있던 재판도 아시아여성기금 설립에 의해 크게 방향이 바뀌고 말았다. 재판의 주임변호사가 국민기금을 추진하여 변호사로서 입장을 의심할 만한 상황이 되었고, 한국 단체를 지원하고 있던 일본 단체도 국민기금 추진을 둘러싸고 분열되었다. 우리 모임도 예외가 아니어서, 회원 사이에 의견이 어긋나 해산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패배감에 서울에 연 2회 정도 할머니들을 뵈러 가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학순 할머니와 만날 기회도 없어졌다. 1997년 어느 날, 김학순 할머니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변기자 씨를 만나, 할머니가 서울의 이화여자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녀가 말하길, 자신은 조선적이기 때문에 한국에 입국할 수 없으니 만약 서울에 간다면 병문안을 가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11월에 나눔의 집을 방문하고, 김학순 할머니를 찾아갔다. 벽에는 아이들이 보낸 편지들이 붙어있었고, 할머니는 매우 건강해 보여서 안심했다. 그러나 12월이 되자 변기자 씨로부터 김학순 할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어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친구와 둘이서 서울의 병원에 갔다. 마침 크리스마스 전이어서, 병실의 문에는 트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머니는 주무시고 계셨다. 일본에서 왔다고 하자, 간병인이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우리는 그렇게 세게 흔들어도 괜찮을까 걱정했다. 눈을 뜬 할머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듯했다. 간병인이 사정을 말하자, 미소를 지으며 기뻐해 주셨다.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일본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할머니께 물어봤으면 좋았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할머니의 몹시 쇠약해진 모습에 놀라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나왔다. 오래 사시지는 못할 것 같다는 우울한 기분으로 희미한 빛 속을 걸었다. 그리고 16일에 부고를 들었다. 우리는 김학순 할머니를 추도하고 그녀의 원통함을 일본인에게 전하고 싶어서 오랜만에 예전 동료들에게 연락하여 국회 앞에 모였다. 그중에는 물론 변기자 씨도 있었다. 할머니의 사진이나 꽃, 슬로건을 걸었고, 국회의원 츠지모토 기요미(辻本清美)가 지나가자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만약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 없었다면(부산의 이귀분 할머니는 자기가 먼저 부산 방송국에 갔었는데 상대해주지 않았다고 불평하셨지만!) 일본군 여성 인권침해는 역사의 어둠 속에 묻힌 채로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가, 그리고 그를 뒤따른 할머니들의 용기가 올해 노벨평화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할머니들이 노벨상을 탄 것이다![1] 각주 ^ 본 에세이는 2018넌 12월에 작성되었다.2018년 노벨평화상은 이라크 소수민족 야지디족 여성운동가 나디아 무라드와 내전 성폭력 피해자 치료에 앞장선 의사 드니 무퀘게가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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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인터뷰 ‘위민 인 블랙 베오그라드’ 스타샤 자요비치 인터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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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 - 에이드리언 리치 여성연대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해외 전시 성폭력 및 여성인권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글로벌 여성평화운동 단체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25주년에 항의하는 의미로 일군의 여성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1988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각자 처한 지역과 상황에 따라 전쟁, 군사주의와 폭력이 여성들에게 다르게 경험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위민 인 블랙은 고정된 조직이 아니라 실질적 소통과 행동을 강조합니다. 서울의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이 ‘위민 인 블랙 베오그라드’의 활동가 스타샤 자요비치(Staša Zajović)를 서면으로 인터뷰한 내용, 지금 만나 보시죠.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스타샤 자요비치 저는 1991년 창립된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의 공동 설립자이자 활동가 스타샤 자요비치(Staša Zajović)라고 합니다. 그 전신인 유고슬라비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에서도 활동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의 마지막 모임은 1991년 6월 류블랴나에서 열렸습니다. 일찍이 1978년 베오그라드에서 동유럽 최초의 페미니스트 회의가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모두 우리의 페미니스트 유산입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유엔 등 여러 국제기구에서 만든 여성인권 국제규범들이 위민 인 블랙 운동에 어떤 의미를 갖나요? 가령 유엔이 제시하는 여성인권 담론 및 키워드가 위민 인 블랙 활동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치나요? 위민 인 블랙 베오그라드가 여성인권 국제규범을 만드는 데 참여한 경험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스타샤 자요비치 우리는 시민단체로서 국제기구 외부에서 활동하며, 법치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993년부터 대안적인 회의들을 조직하기 시작한 것이 국제기구로서 유엔이 하는 매우 중요한 활동입니다. 예를 들어, 1993년 6월에 우리 중 약 20명이 비엔나 세계인권회의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전쟁에서 강간당한 보스니아 여성들을 만나 증언을 들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유엔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권리가 곧 인권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1994년 카이로에서 열린 세계인구회의에도 참가했습니다. 저는 아프리카, 아랍 국가 등에서 온 여성들과 함께 근본주의, 즉 문화적 목적으로 종교·문화유산·인종을 남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네트워크에 있었습니다. 유엔 대표보다 시민단체 출신이 더 많았고, 낙태가 여성의 인권이라는 공식적 차원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이 회의는 역사적이었습니다. 또한 젠더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광범위하고 세계적이며 위험한 운동이 일어났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근본주의자가 함께 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독교 및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조직적으로 여성과의 전쟁을 시작한 상황이며, 오늘날 세르비아에서 공식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격은 바티칸에서 시작되었고, 폴란드와 크로아티아 등에서 계속 이어졌습니다. 세르비아에서 출산율이 낮다는 이유로 여성을 공격하는 것은 위험한 민족주의 정책의 일부가 되고 있습니다. 1995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도 초대를 받았지만 끄라이나(Krajina. 편집자 주: 크로아티아 내에서 독립을 선언했던 국제 미승인 세르비아계 국가) 사람들의 추방 문제와 시기가 맞물려서 가지 않았습니다. 1993년 5월 25일은 기념비적인 날입니다. 유엔이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자행된 학살과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 ICTY)를 헤이그에 설립했기 때문입니다. 헤이그전범재판소가 없었다면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어떤 범죄자가 유죄 판결을 받았을지 알 수 없으므로 유엔이 한 일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페미니스트, 활동가,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 법률 전문가에 귀 기울인 유엔 대표단의 노력 덕분에 유엔이 사상 최초로 강간을 전쟁범죄로 규정함으로써 인류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 것도 매우 위대한 성취였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진행 중일 때 유엔에서 있었던 이 일은, 무엇보다 보스니아 여성과 보스니아 여성 활동가들의 시너지 덕분입니다. 그들은 유엔 관료가 아니었지만 여성의 자유에 엄중한 기여를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1998년의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Rome 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 또한 인도에 반한 죄에 성폭력의 개념을 확장시켜 포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로마 규정은 러시아, 미국, 중국과 우크라이나에서 비준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 규정에 가입한 나라가 123개국이라는 점에서 ICC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ICC가 푸틴 대통령을 우크라이나 전범으로 기소한 데 대해 그 법령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제 인권 규범의 실행 여부는 지정학적 전개와 유엔에 대한 공세에도 달려 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평화·안보에 관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1325호도 수립되었습니다. 특히 여성과 소녀들에 대한 성폭력을 포함한 집단 학살과 반인륜 범죄 및 전쟁 범죄에 대한 불처벌 종식과 기소 책임을 명시적으로 국가에 지우고 있는 11조 때문에 우리는 이 결의안을 국가에 압력을 가하는 도구로 생각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유엔과 그렇게 많이 협력하지 않습니다. 유엔의 힘은 주요 강대국들에 비해 많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우크라이나 항구를 통한 곡물 수출 협정을 맺었지만, 이후 푸틴은 유럽 및 서방의 러시아 제재에 대한 반격으로 흑해를 봉쇄해버렸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곡물에 의존하던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고통받았습니다.[1]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을 파괴하는 대규모의 글로벌 캠페인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2014년 돈바스에서 충돌이 있었을 때 우리는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항의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여성들은 포럼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이 돈바스에 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푸틴이 파견한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정치적 의도를 가졌던 것처럼, 평화유지군은 때때로 매우 모순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보스니아에서는 유엔 평화유지군이 성범죄 가해자였으며 위민 인 블랙은 유엔 평화유지군의 면책권 폐지 캠페인을 펼쳐 2016년 이를 채택시켰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리아, 예멘, 우크라이나 등 모든 곳에서 더 이상 유엔 평화유지군에 의한 성범죄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따라서 저는 국제기구를 통한 평화유지군뿐 아니라 민간 평화 사절단이 우크라이나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전시 성폭력을 둘러싼 침묵에 관하여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한국에서는 1991년 김학순이 일본군‘위안부’ 경험을 증언하기 전까지 수많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 같은 문제는 여전하여 세계 곳곳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침묵하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현실 속에서 침묵시위의 저항성 혹은 급진성 등에 관하여 위민 인 블랙 베오그라드가 생각하는 바를 듣고 싶습니다. 스타샤 자요비치 여성에 대한 강간은 전쟁의 의무처럼 간주되었습니다. 여성들이 전쟁에서 입은 피해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여성들은 침묵을 강요받았고, 강간당한 여성들과 함께 일해 보았기 때문에 많은 여성이 지금까지도 침묵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는 권리가 아니라 사회적 낙인의 문제이며, 가족에 대한 보복, 가족의 안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폭력에 관해 이야기하는 여성들은 모든 차원에서 불안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많은 여성은 남편과 형제들에게 그들이 겪은 피해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사회 공동체나 국가에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여성을 지키는 것이 남자의 명예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에 여성은 더욱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세르비아에서는 코소보 전쟁에 20만 명이 동원되었습니다. 저는 코소보에서 50km 떨어진 세르비아 중부에서 온 여성들과 함께 일하면서 남성들에게 코소보에서 경험한 일을 물어본 적이 있는지, 그들이 성폭력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지 물었고 부정적인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르비아 여성의 30%가 가족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세르비아에서는 코소보 출신의 세르비아 여성이 알바니아인에게 당한 성폭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코소보 출신의 알바니아 여성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녀들은 세르비아인에 의한 강간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낙인이 코소보보다 세르비아에서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여성들의 경우에도 자신이 세르비아인들에게 당한 강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한국에서 전개된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흐름 중에는 콩고나 동티모르 등 다른 지역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지원하고, 그들과 교류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전쟁에서 발생하는 살상과 강간은 전쟁 이후에도 여러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가령 성폭력 피해로 인한 출산 및 그 2세의 문제, HIV 감염 등의 문제는 전시 살상 및 강간이 전후 사회 문제로까지 이어진 사례입니다. 위민 인 블랙 베오그라드는 반전운동 이외에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개입하는지요? 또 어떠한 형태의 직접행동을 전개하시는지요? 이상의 질문과 관련하여 자유로운 조직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위민 인 블랙 베오그라드가 전시 성폭력 관련 의료 및 심리 지원을 전개할 때 어떠한 전략과 방법을 취하는지 궁금합니다. 스타샤 자요비치 1991년 시위를 시작한 이래 매주 수요일마다 우리는 공화국광장에 가서 전쟁에 항의하고 전시 성폭력에 반대하는 행동을 조직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범죄 피해자를 위한 정의를 요구했고, 전시 강간을 전쟁 범죄로 인정하도록 세르비아에 압력을 가했으며, 2015년 유엔은 6월 19일을 분쟁 중 성폭력 근절을 위한 국제적인 날로 제정했습니다. 우리는 매년 이날 공화국광장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반대하는 행동을 조직합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구 유고슬라비아 친구들과 제3국에서 끊임없이 회의를 했습니다. 이는 접점과 연결 통로를 구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략이었습니다. 우리는 범죄 현장 방문도 여러 번 조직했습니다. 우리는 범행을 저지른 현장을 찾아가 피해자 유족들을 만나 조문하고 장례를 치렀으며 2005년부터 특별재판소에서 전범 재판을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살해당한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그곳에 옵니다. 대부분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위민 인 블랙 베오그라드가 2005년부터 그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해 온 결과입니다. 한편, 다양한 국적과 지리적 영토의 여성들이 2015년 구 유고슬라비아 여성 법정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목격자들은 ‘평화를 위한 연대의 어머니들’ 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스레브라니차 혹은 1999년 NATO 폭격 중에 RTS에서 사망한 아들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2] 여성 법정에서 증언한 여성들은 그들만의 비공식 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브라츠 섬에는 크로아티아 여성들이 독일인들에게 물려받은 집이 있는데, 모든 국적의 여성들이 매년 2주씩 그곳에서 휴가를 보냅니다. 우리는 1년에 두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페미니스트 실천 아이디어 등을 함께 배우는 데 깊은 관심을 보이는 여성들에게 엄청난 진전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재판 없는 사과를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화해 프로그램에서 일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상호 신뢰를 배웁니다. 화해의 개념과 실천이 의전으로 전락하고 국가공무원들의 무의미하고 공허한 경험으로 전락한 데 대한 국제사회의 책임이 크기 때문입니다. 각주 ^ (편집자 주) 이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 기사들을 참고할 수 있다.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1045602.html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084479.html ^ (편집자 주) RTS(Radio-televizija Srbije)는 1929년에 창립한 세르비아 공영방송이다. 코소보 전쟁 중 1999년 4월 23일 NATO군에 의한 폭격으로 16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다치는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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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실천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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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실천인 이유 마침내 일본 <표현의 부자유전> 성사시킨 '시민연대'의 힘 전시를 통해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과 인권을 옹호하는 시민들의 실천! 평화와 인권을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에서 획득한 또 하나의 의미이다. 공공 시설에서 정당하게 계획된 일본군'위안부' 이야기와 소녀상 전시가 우익 세력의 협박으로 중단되는 일이 거듭되는 현실을 목격한 일본 시민들의 대응은 <표현의 부자유> 전시였다. 거의 10년에 걸쳐 이 전시를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시민들을 연결한 힘이었던 선의와 배려, 열정과 감성, 자발성과 자율성 등이 큰 역할을 했다. 2022년 4월에 개최된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일본 소카대 쿠라하시 코헤이 교수가 이에 대해 소개한다.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한국에서 '수요 시위' 1000회를 기념해 건립됐다. 이후 한국에는 80개 이상의 소녀상이 세워졌고, 미국과 독일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당사자국인 일본에는 소녀상이 하나도 없다. 일본에서 소녀상을 볼 수 있는 곳은 주로 <표현의 부자유>라는 전시회다. 이 미술전은 정치적 이유 등으로 거부된 작품을 전시하는 장이다. 사실 일본에서는 그동안 소녀상을 둘러싸고 전시 성폭력 피해자가 '소녀'라는 표상에 한정되어 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우파와 정부 또한 소녀상을 '위안부상'이라고 부르며 <표현의 부자유>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전방위적으로 방해해 왔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소녀상 전시회'는 다시 기획되고 지역을 순회하며 열리는 과정이 지속돼 왔다. 심지어 법적 판단을 구하기도 하고, 전시를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변호사들이 참여했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한 걸까? 방해와 위협으로 거듭 좌절된 일본 소녀상 전시 일본에서 '소녀상'은 매우 강한 혐오의 대상이다. '말뚝을 박고', '얼굴에 종이봉지를 씌우고', '차는' 등 우파 지지자들의 직접적인 파괴 행위가 계속돼 왔다. 또 공격적으로 '폭파'를 언급하거나 '정액을 끼얹겠다'고 발언한 국회의원과 저명한 소설가도 있었다. 이런 행위에는 '위안부' 문제가 국제화되는 것과 피해자의 이미지가 '소녀'로 여겨지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는 어떤 경위로 시작됐을까? 계기는 201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12명을 만나 촬영해온 나고야시 거주 사진작가 안세홍은 도쿄 니콘살롱에서 <겹겹-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 사진전 개최를 추진했다. 1년 전 확정된 전시회 상황이 급변한 것은 개최 한 달 전이었다. 사진전을 소개한 아사히신문의 기사가 우파의 눈에 띄었고, 항의가 거세졌다. 당시 안세홍은 법원에 가처분 절차를 밟아 장소 사용 결정까지 받아냈으나 결국 개최 사흘 전 전시회는 취소됐다. 이로부터 두 달 뒤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도쿄도미술관에서 'JAALA미술가회의(Japan Asia Africa Latin-American Artist Association)'가 주최하는 <제18회 JAALA 국제교류전>에 소녀상 미니어처와 작가 박윤빈의 유화 '위안부!'가 전시되었다. 그런데 전시회 4일째, 미술관 측이 무단으로 작품을 철거했다. 하지만 이 일은 안세홍 전시 때와는 달리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일련의 사건을 접한 미디어 아티스트 오에노키 준은 전시가 거부된 작품을 미술관 벽에 프로젝션으로 투사해 보여주는 것으로 전시회 파행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련의 '사건'에 대한 항의 운동으로 2014년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실행위원회'가 출범하고, 2015년 도쿄의 갤러리 후루토에서 열린 첫 전시회에 '평화의 소녀상'이 전시되었다. 실행위원회를 이끈 오카모토 유카 씨에 따르면 섬유강화플라스틱(FRP) 재질로 만든 동상이라면 일본에서 전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 소녀상 작가 김서경-김운성 부부에게 소녀상을 의뢰했다. 전시를 흔쾌히 수락한 작가들은 예산이 부족한 전시회 측의 사정을 듣고 직접 자비를 들여 소녀상의 수송을 도왔다. 일본에 반입하기 위해 크기가 큰 조각상은 3등분으로 분할되었고 그것을 현장에서 다시 조립하고 색을 칠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드디어 전시되었다. 작가들은 전시 후 일본을 떠나기 전 "이 소녀상은 일본에 있어야 한다"면서 소녀상 뒷면에 "일본에 남긴다"고 서명했다. 이로써 마침내 일본에 소녀상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이 소녀상은 도쿄도 내 어느 극단의 오두막에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으며, 무료로 대여되고 있다. 연극 상연이나 영화 촬영 시 대여된 적도 있다. '사라져야 했던' 소녀상을 드러내기 위해 이 소녀상이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19년 예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이하 아이트리 2019)에서 선보인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 전시이다. 나고야시 아이치현에서 3년마다 열리는 아이트리는 월 관람객 수가 25만 명을 상회하는 일본 최대 규모의 유명 국제 예술제이다. 이 예술제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에 소녀상이 출품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우파의 협박, 일부 정치인들의 반발 등 논란이 일었고, 결국 개최 3일 만에 전시가 중단되고 말았다. 다음 달에는 일본 문화청이 예술제에 보조금 약 7,800만 엔을 전액 교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이후 감액 지급). 예술제에 참가했던 예술가들은 표현의 자유를 겁박하는 이런 행태에 대해 작품 봉인 및 전시 거부, 성명서 발표 등을 통해 연대하며 고발했다. 그 후 보조금 지급을 둘러싸고 시와 현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은 다카스 클리닉의 다카스 카츠야 원장, 햐쿠타 나오키, 다케다 쓰네야스, 아리모토 카오리 등 우파 지식인들과 함께 오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에 대한 소환 서명운동[1]을 전개했다. 그러나 2021년 선거관리위원회 조사에서 모인 서명 중 83.2%에 위조 등의 부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그런데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에서 '사라져야 했던' 이 소녀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를 두고 '또 다른 출발'이라 해야겠다. '아이트리 2019'에서 소녀상을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일본 각지에서 독립적인 전시회를 기획하는 주최 단체가 생겨났고, 도쿄를 시작으로 관련 기관들이 협력하는 형태로 연대해 각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모든 개최 예정지에 우익의 항의 시위와 압력, 방해가 있었지만 시민들의 투쟁에 힘입어 도쿄와 나고야, 오사카 등에서 전시할 권리를 획득해 갔다. ▶ 연기된 도쿄 전시회 첫 소녀상 전시회 지역은 도쿄였다. 2021년 6월 25일부터 7월 4일까지 신주쿠의 갤러리 세션하우스 가든에서 기획된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는 사전 공지 및 관람 신청을 개시했지만 우파의 방해와 가두 선전이 계속되자 결국 갤러리 대표가 이웃에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해 '대관 불가' 입장으로 돌아섰다. 많은 시민들의 격려를 받으며 급히 다른 장소를 물색했지만 모두 거절당해 개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휴관 끝 중단된 나고야 전시회 '아이트리 2019 사건' 이후 만들어진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를 잇는 아이치의 모임'은 2021년 1월 나고야시 시민갤러리 사카에에서 <우리의 표현의 부자유전 그후>를 개최하려 했다. 역시 방해가 예상되었기에 시설 관리자와 경찰과도 협의하는 등 신중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7월 6일부터 11일까지 개최가 발표되자 가두시위, 관계자에 대한 직접적인 협박이 계속됐다. 게다가 8일에는 갤러리로 수상한 우편물이 도착해 스태프와 변호사까지 퇴거 명령을 받았다. 경찰 입회 하에 우편물을 개봉하자 폭죽 같은 것이 터졌다. 협의를 시도했으나 시설과 행정이 응하지 않고 휴관을 연장해 결국 주최 측은 전시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 허가 취소된 오사카 간사이전 나고야전의 작품을 이어받은 오사카 실행위원회는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엘오사카(오사카부립노동센터)에서 <표현의 부자유전 간사이>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6월 25일 행사장 쪽에서 '안전 확보'를 이유로 시설 사용 허가를 취소했다. 실행위원회는 처분 철회를 요구하며 오사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7월 9일 사용 불허 취소 결정을 받아냈다. 이후 고등법원, 대법원에서도 항소가 기각돼 공공시설 전시회를 막을 명분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 드디어 개최된 도쿄전 오사카 재판 결과를 바탕으로 공공시설에서 개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얻은 실행위원회는 전시회 한 달 전부터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해 최종 462명에게 341만 2,900엔을 후원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2022년 4월 2일부터 5일까지 쿠니타치시민예술소홀에서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를 개최했다. 전시회를 방위하라! 치열했던 도쿄전 안팎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이하 도쿄전)> 전시회에 실제 스태프로 참여한 나는 내부자로서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도쿄전에서 가장 치밀하게 준비한 미션 중 하나는 전시회를 지키는 일, 곧 '방위'였다. 먼저 매일 약 40명, 총 240명의 자원봉사자와 70명의 변호사가 참여하여 교대 근무 등의 치밀한 경비 배치 계획을 세우고, 법적 조치도 확인했다. 또 경찰과도 협의했다. 역시나! 전시회 개최 중에 40여 개 우익 단체가 몰려와 가두선전을 하며 "존재하지도 않았던 종군위안부를 조작하고 동상을 상징처럼 만들어 그것을 예술이라며 하며 전시하는 너희는 바보냐, 이봐!"라고 스피커로 떠들어댔다. 우익들은 가두선전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소녀상 전시를 방해했다. 전시회를 무단 촬영 한다든지, 행사장 앞에서 항의문을 낭독한 뒤 실행위원에게 전달하는가 하면, 아예 티켓을 구매해 갤러리에 입장하는 우익도 있었다. 또 전시회를 찾은 우익을 촬영해 유튜브와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평소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혐오 발언)'에 대항해 활동하던 방위 담당자는 이들 '요주의 인물'을 식별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등 주의 깊게 감시했다. 현장 밖에서도 각 지역 '카운터 운동[2]'과 연계해 '○○가 부자유전에 간다고 인터넷에 글이 올라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이들의 움직임을 계속 추적했다. 혐오 발언과 함께 우익의 시위가 격해지면 그에 대항하는 카운터 운동도 격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쿄 부자유전에서는 그런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간사이전에서는 마네킹 플래시몹 퍼포먼스도 조용한 카운터로 진행됐다. 도쿄전 방위 자원봉사자들도 혐오 발언을 동반한 우익의 가두선전이나 도발에 일절 대응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 그보다 실행위원들이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개최지인 쿠니타치시 지역의 시민활동 네트워크와 연계하는 일이었다. 실행위원들은 자신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부자유전에 협력할 쿠니타치 시민을 찾아 '예술전 개최를 실현하는 모임'을 발족했다. 이를 통해 경찰과 시설, 실행위원과 쿠니타치 시민의 연대로 안전하게 전시회를 개최할 '방위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한편 공안경찰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초기부터 협의해온 이들이 전시회 진행자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전시 첫날 스태프를 가장한 경찰관이 갤러리 내에 무단으로 진입해 직원들이 그를 저지하는 일이 빚어졌는데,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둘째날 오전에는 전 스태프에게 '공안, 경찰이 쿠니타치시청 명찰을 달고 있다'는 정보가 공유되었고 '경찰은 우리 편이 아니니 조심하라'는 주의가 전 스태프에게 전달되었다. 게다가 시설 측이 설치한 방범 카메라 18대 중에 경찰 카메라가 3대 포함되어 있다는 민원이 제기됐다. 변호사를 대동하고 교육위원회와 경찰에 확인한 결과 정황이 상당했다. 경찰이 가져가겠다고 한 카메라 3대의 영상 데이터는 예술소홀과 시교육위원회 입회 하에 지우기로 했다. '부자유전'의 다른 이름은 시민 자원봉사자들의 연대와 선의, 열정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로 모였을까? 방위 담당의 핵심 멤버와 변호사는 실행위원회, 경험자, 전문가이므로 경찰과의 사전 절차 등 준비는 매우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그 외에는 기본적으로 실행위원회의 인맥을 통해 믿을 만한 사람의 소개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준비 과정을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에서 했기에 직업이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전시장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나중에 보니 개최지의 시민운동가부터 학생, 재일코리안 등 다양했고, 노숙자와 고령자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행사장 운영은 재미있게 표현하면 '엉망진창'이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현지 재일코리안의 요리점에서 매일 배달해준 도시락은 맛있었다. 반드시 '한국 요리'일 필요는 없었지만, 이 도시락이 역시 이 전시회가 '평화의 소녀상'을 중심으로 한 미술전임을 실감하게 해 준 것이기도 했다. 도쿄 전시회를 비롯해 그동안 개최된 지역별 <표현의 부자유전> 모두 전국적인 조직이 아닌, 콜렉티브 방식의 운영이었다. 직업은 물론 이름조차 모르지만, 선의와 열정으로 함께 모여 함께 실천하고, 함께 해산하는 집합-이산 형태였다. 전시 장소 또한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공용이었다. 따라서 협상이나 운영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끊임없이 논의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하는 실천의 의의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하는 일은 어떤 의의를 가질까? 이 실천의 첫 번째 의의는 홋카이도대학 현무암 교수가 『〈포스트 제국〉의 동아시아』(세이토샤, 2022)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소녀상은 국가 간 대립의 산물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전시성 폭력에 저항하는 시민적 연대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 실천은 모두 운동 문화의 '친밀권(intimate sphere)'[3] 안에서 '무보수'이자 'DIY(Do it Yourself)', '집단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함께 모여 실천하고 해산하는 집합-이산의 과정에서 가해국 시민들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파트너라는 응답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이 실천은 공공 영역의 확대로 이어졌다는 의의를 지닌다. 한동안 <표현의 부자유전>은 민간 갤러리에서 열렸다. 그러나 지금은 공공 시설에서 열리고 있다. 물론 우익이 찾아오기 때문에 경비에 대한 우려로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공공 공간 또는 공적 매체에서 '위안부' 문제를 쉽게 다룰 수 없는 일본의 현실에서 이 실천은 '위안부' 문제를 공공 영역으로 가져오게 한 중요한 투쟁이다. 또한 일본 시민운동 자체의 공공 영역으로의 확대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 번째로 이 실천을 통해 '이동'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는 소녀상이 일본에 세워지지 못하는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소녀상을 전시하는 운동에 참여하면서 생각을 바꿨다. 오히려 일본 사회의 경우 특정 장소에 건립하는 것보다 전시회 개최를 통해 지역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지역에서의 전시회는 도쿄의 실행위원회가 전국 투어를 하는 식으로 개최되는 것이 아니다. 각지에서 개최될 때마다 지역별로 실행위원회가 조직되어 그 지역의 시민운동과 자원봉사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는 방식으로 전시회가 조직된다. 이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시민들은 행정과 경찰, 우익의 편견과 혐오, 폭력 등에 맞서 나간다. 이처럼 일본에서 소녀상 전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연대의 친밀권이 공공권(公共圏)[4]을 쟁취해 나가고, 피해의 기억을 상징하는 소녀상이 이동하며 '기억의 장소'를 확대해 나가는 실천이 되고 있다. 편집자주 ^ 소환 서명운동 : 당시 대표적으로 활동한 이들이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을 잇는 아이치의 모임' 공동대표인 나카타니 유지 변호사와,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실행위원회 공동대표 오카모토 유카 공동대표 등이다. ^ 카운터 운동 : '카운터스(counters) 운동'으로도 표현하며, 2000년대 초반부터 일본에서 극렬해진 혐오와 인종차별에 맞서 반혐오, 반차별 운동을 전개한 자발적인 시민 운동이다. 일본 내 '혐오표현금지법' 제정을 이끈 주역이다. ^ 친밀권 : '당사자 간 연대’의 형태를 포함한 사랑과 지지의 공간을 의미한다. ^ 공공권 : 국가적 공공권, 공적 공공권, 시민적 공공권 등 학문적으로 여러 논의가 있으나 여기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항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는 공간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특히 언론처럼 비국가적이고 비시장적인 영역으로서의 시민 사회에 자발적으로 형성된 강제나 배제 없는 대화의 공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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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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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를 둘러보기 위해 5월의 따뜻한 햇살이 나무들을 비추는 아름다운 창원대학교를 방문했다. 작년 가을 준비가 한창일 때 방문하고 나서 두 번째임에도 그리워지는 장소다. 나는 남편인 도시오(俊雄)와 함께 ‘전후 책임을 묻는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에서 1992년 발족 준비부터 2013년 해산될 때까지 사무국을 담당했다. 이번에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를 준비하신 선생님들과 대학원생들, 박물관 분들을 만나 뵙고 싶었다. 2018년 영화 〈허스토리〉(민규동 감독)를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영화에 그려진 것은 증오로 가득 찬 일본 사회 속에서 고립된 채 싸우는 원고단의 모습이었고, 동원 과정이나 피해 실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근로정신대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고의로 혼동시켜 관부재판의 원고를 전원 ‘위안부’ 피해자로 묘사하고 있었다(관부재판의 원고는 10명으로, 그중 3명이 전 ‘위안부’, 7명이 근로정신대다). 전후 줄곧 이러한 혼동으로 고통받으며 30년 가까이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한일 양국에 호소해온 근로정신대 분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의 지원자들과 원고 피해자들이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함께 존엄을 회복해 가며 성장해 나간 이 운동의 핵심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에 실망했다. 아울러 ‘위안부’ 원고가 승소한 1심 시모노세키(下関) 판결의 경우, 원고단과 변호인단의 호소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재판관들의 용기와 성의가 이 판결을 쓰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정신대 피해자들의 호소는 닿지 못했다. 이 기쁨의 실현과 실의의 낙차가 관부재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에 바탕을 둔 영화라고 명기하면서 이러한 관부재판의 특징과 의의를 왜곡해 알맹이를 쏙 빼 버린 이 영화가 한국의 다음 세대들에게 사실로 기억되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때문에 더더욱 관부재판을 진지하게 다뤄준 이번 창원대학교 전시회가 기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문숙 이사장님이 남기신 방대한 자료를 앞에 두고 전시 방향성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을 들었던 만큼, 어떤 전시가 되어 있을지 몹시 기대되었다. 그리고 전시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심사숙고하고 논의한 흔적들이 곳곳의 짧은 코멘트에 드러나 있었다. 또한 원고 피해자들, 김문숙 이사장님, 우리가 등신대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었고, 어떠한 과장도 없다는 점에 감동받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강제노동 문제를 다루면서도 무겁지도 어둡지도 않았고, 그로 인해 무언가 느끼도록 강요하는 분위기도 없이, 조용히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공간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여 이 전시회를 실현해 주신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일제강점기 침략전쟁의 한국인 피해자들이 일본에 와서 재판을 벌인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일본인이 돕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별로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는 상태에서 지원운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잠재의식 속에는 우리가 아버지 세대의 범죄 피해자들을 만나 함께 투쟁함으로써 부모 세대의 가해 책임을 조금이나마 갚으려 하지 않았나 싶다. 김문숙 이사장님의 용기와 행동력 덕분에 그런 기적적인 만남이 가능했다. 관부재판을 지원하며 우리가 마음먹은 것은 원고인 피해자들을 일본 사회의 품 안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전후의 일본을 모른 채 50년가량 세월이 흐른 뒤 일본을 찾은 분들에게는 ‘일본’이 당연히 두렵게 느껴질 것이고, 그런 분들을 호텔에 묵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 우리 집에 모시기로 했다. 동행인이었던 남편 도시오는 정성껏 식사를 준비했고, 나는 가능한 한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긴장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재판에서 함께 싸우며 희로애락을 같이 느끼는 시간 속에서 그들의 영혼이 해방되어 가는 궤적을 목도하며 그들을 향한 경애심이 깊어진 것 같다. 그것은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이번 창원 방문에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와 함께 하는 마창진 시민모임 측으로부터 ‘어떤 운동을 하려 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1990년대 일본과 비교해 현재 일본은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으로 변했고, 아베 정권을 계승한 현 정부와 일본 언론의 식민지 피해자들과 군에 의한 조직적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싸늘한 시선 속에서, ‘해결’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내게 그 질문은 아주 뼈아픈 것이었다. 영화 〈허스토리〉 제작자에게 항의문을 쓰고, 항의문만으로는 모를 테니 관부재판에 관한 책을 쓰라는 조언을 얻어 『관부재판』(도토리숲, 2021. 일본어판 『関釜裁判がめざしたもの』)을 한국과 일본에서 출판했으니, 그것으로 내 몫은 다했다고 여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새로운 ‘전전(戰前)’이라고도 불리는 현재, 세계 각지에 전쟁이 발발해 전쟁 피해자가 늘어나고 성폭력이 빈발하고 있다. 나라 위치를 바꿀 수도 없는 이웃인 일본과 한국 시민들은 정치적으로는 어렵더라도 시민 차원의 신뢰와 우호를 쌓으면서 평화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부재판 원고들의 일이나 그들과 함께 투쟁한 우리들을 잊지 않고, 잊히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은 그들이 준 선물이며 숙제다. 창원대학교에서 학생, 대학원생, 연구자, 시민운동가들로부터 날카로운 질문을 받으면서 관부재판을 축으로 한일 시민교류가 더 활발해질 것을 기대했다. 또한 이번에 일본에서 관부재판이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신진 연구자와의 동행을 통해 한일 연구자간 교류도 한층 깊어질 것을 예감했다. 한일 시민에 의한 기억과 기록 네트워크 확대에 앞으로도 참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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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말라야 롤라스'의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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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야 롤라스'의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필리핀 항일 국민군의 거점 마파니크에서는 일본군의 잔인하고 끔찍한 전쟁 범죄가 자행되었다. 일본군은 남성들을 총살한 뒤 시신을 9세에서 14세 사이의 소녀들 앞에서 불태우고, 이어 소녀들을 성폭행하고 ‘위안부’로 동원했다. 시간이 흘러 ‘말라야 롤라스’, 즉 ‘자유로운 할머니’가 된 이 소녀들은 이제 자신들 뿐 아니라 마파니크 지역, 학살된 남성들, 그리고 전쟁 중 성폭력과 ‘위안부’ 제도의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끈질기게 투쟁하고 있다. 필리핀 인권변호사로, 일본군 성 노예 범죄에 대한 법적 투쟁 등 다양한 활동에 함께하고 있는 버지니아 수아레즈 변호사가 말라야 롤라스의 저항과 투쟁 이야기를 전한다. ‘말라야 롤라스(Malaya Lolas. 자유로운 할머니들)’는 필리핀 마파니크 전투의 생존자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 저항한 ‘후크발라합(Hukbalahap. 항일 국민군)’의 거점이었던 마파니크는 잔인하고 끔찍한 공격에 시달렸다. 일본군은 남성들을 총살한 뒤 그들의 시신을 9세에서 14세 사이의 소녀들 앞에서 불태웠다. 심지어 거꾸로 매달려 있던 한 남성의 입에는 잘린 성기가 물려 있기도 했다. 이러한 잔혹한 행위에 이어 일부 소녀들은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고, ‘위안부’로 동원됐다. 그 소녀들이 바로 지금의 말라야 롤라스이다.[1] 노년에 이른 지금도 이들은 자신들 뿐 아니라 마파니크 지역과 학살된 남성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행해진 군사적 폭력과 ‘위안부’ 제도의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말라야 롤라스의 투쟁에서 얻는 교훈 말라야 롤라스의 이야기는 일본군 점령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동시에 전쟁과 군사화 속에서 여성의 신체를 점령하려는 시도에 맞선 저항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들의 투쟁은 단순히 일본군의 성폭력에 맞서는 것을 넘어 전쟁 중 여성의 신체를 점령함으로써 저항 운동을 약화시키고 필리핀을 종속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전쟁과 군사화에 따르는 악행과 공포를 고발하는 말라야 롤라스의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말라야 롤라스의 대표적인 활동은 제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의 법적 투쟁이다. 말라야 롤라스는 필리핀 대법원에서 12년에 걸쳐 직무 집행 명령 소송을 벌였다. 필리핀 정부가 일본 대법원이나 정부에 말라야 롤라스 사건을 제소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대법원은 ‘법원 권한 밖에 있는 정치적 문제’라며 이 역사적인 ‘롤라 이사벨리타 비누야 사건’을 기각했다.[2] 말라야 롤라스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The Committee on the Elimination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에 제소하기도 했다. 필리핀 법정에서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법적 구제 수단을 동원했지만 벽에 부딪히자 정의를 찾아 외부로 눈을 돌린 것이다. 말라야 롤라스 사건은 CEDAW에 제출되었다. 2023년 세계 여성의 날, CEDAW 전문가위원회는 19쪽 분량의 문서를 통해 말라야 롤라스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견해를 제시하며 필리핀 정부가 일본의 전쟁 범죄 피해자들의 권리를 옹호하지 못했다고 판단했고,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구제책을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 첫째, 피해자들이 겪은 지속적인 차별에 대한 전면적인 배상이다. 여기에는 피해 인정, 공식 사과, 물질적 및 정신적 손해 배상, 존엄성과 명예 회복을 포함한 보상, 재활 및 원상 회복이 포함된다. 물질적 배상은 피해자들이 겪은 신체적, 심리적, 물질적 피해의 정도와 권리 침해의 심각성에 비례해야 한다는 점도 명시했다. 둘째, 전쟁 범죄, 특히 성폭력 피해자 모두에게 모든 형태의 구제를 제공하는 효과적인 전국적 배상 제도 구축이다. 여기에는 전쟁 참전 용사인 남성과 전시 성 노예 생존자인 여성 모두를 인정해 사회적 혜택 및 기타 지원 조치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을 포함한다. 셋째, 전쟁 범죄, 특히 제도화된 전시 성 노예 제도의 여성 피해자들에게 보상 및 기타 형태의 배상을 제공해 그들의 존엄성과 가치, 개인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도록 국가가 승인한 기금을 조성하라는 권고이다. 넷째, '붉은 집(Bahay na Pula)' 유적지를 보존하거나 전시 성 노예 피해자・생존자들이 겪은 고통을 기리고 그들의 정의를 위한 투쟁을 기념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기념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다. 다섯째, 모든 교육 기관(중등 및 대학 교육 포함)의 교육 과정에 필리핀 여성 피해자 및 생존자들의 역사를 포함시키라는 권고이다. 이는 여성들이 겪은 인권 침해 역사를 ‘민감하게’ 이해하는 동시에 인권 신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같은 범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중요한 조치이다. 다양한 캠페인, 지역을 넘어 국내외 연대로! 말라야 롤라스는 여성인권단체 ‘카이사 카(Kaisa Ka, 여성자유를 위한 연대)’의 지원을 받아 피해 회복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해 왔다. 연대 단체 중에 ‘말라야 롤라스를 위한 정의(Justice for Malaya Lolas)’가 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전쟁 범죄 인정을 전제로 한 진정한 공개 사과, 배상, 재활 및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캠페인이다. 대부분 일본 대사관 인근에서 시위 형식으로 진행되며, 3・8세계 여성의 날과 11월 23일 마파니크 피해자 추모일, 필리핀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거나 일본 총리가 필리핀을 방문할 때, 또는 무역 협정이 논의될 때마다 시위가 이어진다. ‘전쟁반대여성연대(Women Against War)’는 제국주의 전쟁과 군사화에 맞서는 캠페인이다. 카이사 카는 모든 전쟁이 영토 뿐만 아니라 여성의 몸까지 점령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형언할 수 없는 전쟁에 대한 공포는 여성들에게서 훨씬 강력하게 나타난다. 소위 ‘평화로운’ 시대에도 여성들은 군인들의 휴식과 오락을 위해 이용 당하고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 ‘말라양 카바타안(Malayang Kabataan. 자유로운 젊은이들)'은 말라야 롤라스를 접한 다양한 학생들의 느슨한 연대 조직으로, 현재 말라야 롤라스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관리하고 있다. 마파니크와 ‘붉은 집’을 방문하기도 하는 그들은 전시회와 패션쇼, 기타 기금 마련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카이사 카, 롤라를 위한 꽃(Flowers for Lolas), 다른 학생 및 미디어와 협력해 미디어 보도, 방문 및 토론 등도 진행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필리핀에는 말라야 롤라스와 폭넓은 연대를 이루는 활동들이 있다. 청년, 여성, 노동자, 교사, 농부, 어부 등으로 구성된 다부문 조직인 ‘국가민주화운동(KILUSAN. para sa Pambansang Demokrasya)’은 전쟁과 군사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운동은 전쟁의 악영향을 폭로하고 말라야 롤라스의 고통을 전쟁의 부정적인 결과 중 하나로 강조한다. 즉, 전쟁이 여성과 아동을 착취하는 것은 물론 군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여성의 몸을 이용하며, 말라야 롤라스와 같은 성노예 피해자들을 단순한 부수적 피해로 취급한다는 점을 부각한다. 국가민주화운동은 2004년부터 격년으로 평화행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반전 단체들의 광범위한 연합체인 ‘전쟁 중지(STOP THE WAR)’는 말라야 롤라스를 전쟁의 악행과 공포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인으로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중요하게 다룬다. 필리핀이 미국 주도의 군사 동맹에 휘말려 여러 전쟁과 군사화에 끌려들어 가는 상황에서 롤라스의 고통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과 필리핀이 미국-필리핀 상호방문협정(VFA)과 유사한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하면서 롤라스의 고통은 다시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반전 단체들의 광범위한 연합체인 '전쟁 중지(STOP THE WAR)'는 말라야 롤라스를 전쟁의 악행과 공포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인으로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중요하게 다룬다. 필리핀이 미국 주도의 군사 동맹에 휘말려 여러 전쟁과 군사화에 끌려들어 가는 상황에서 롤라스의 고통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과 필리핀이 미국-필리핀 상호방문협정(VFA)과 유사한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하면서 롤라스의 고통은 다시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생존자들의 단체인 ‘롤라를 위한 꽃(Flowers for Lolas)’도 빼놓을 수 없다.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 단체인 이곳은 중국 혁명가 후손 등이 포함된 광범위한 연합체이기도 하다. 필리핀 대학교에서 포럼을 개최하는가 하면 미디어 포럼, 시위 활동 등을 진행했다. 또 ‘위안부 동상’ 프로젝트도 펼치고 있다. 예술가에게 의뢰해 제작한 ‘위안부’ 동상을 마닐라 로하스 대로에 설치했으나, 필리핀 정부에 의해 며칠 만에 철거되었다. 롤라를 위한 꽃은 일본 대사관의 요청에 의해 동상이 철거되었다고 믿고 있다. 사라진 ‘위안부’ 동상을 찾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고무적인 것은 청년들이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것 필리핀 정부는 말라야 롤라스와 성 노예 피해자들을 위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 부인해 왔지만 실제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여러 비정부기구(NGO)가 작성한 대항 보고서는 필리핀 정부가 전쟁 범죄 피해자인 말라야 롤라스에 대한 별도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의 결의안도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사회복지개발부를 통해 제공하는 지원 또한 CEDAW의 권고와 거리가 멀다고 강조했다. 많은 단체와 인권위원회는 CEDAW 보고서에 말라야 롤라스의 사례와 문제를 포함시켰다. CEDAW가 말라야 롤라스에게 유리한 결의안을 채택한 후 다음과 같은 여러 조치들이 이어졌다. 2024년 5월 13일, 필리핀 대통령이 대통령실 공보부를 통해 모든 정부 기관에 지시 서한을 발송했다. 또 사회복지개발부의 지원 및 조치와 함께 상원의원 리사 혼티베로스(Risa Hontiveros)가 ‘상원 결의안 539’를 발의, CEDAW 결의안의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했다. 또 외교관계위원회의 상원 청문회가 열리는 한편 여러 개인 및 기업(Tulay Foundation, Wha Chi Foundation, Wilcon Builders, Feedmmix, Prologue Café, Kamuning Bakery, House of Justeas, 목사, 사진작가, 의사, 블로거 등)도 지원 대열에 참여했다. 이와 함께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 마파니크 지역 사회에서도 롤라스의 투쟁을 이어받은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롤라스의 손자와 손녀들은 ‘포토보이스(Photovoice)’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롤라스가 손자, 손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 촬영을 해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하는 세션이다. 이 과정을 촬영한 사진들은 여러 대학에서 전시되었다. 마파니크 초등학교의 역사 교사들은 롤라스의 이야기와 마파니크 포위 공격의 역사를 수업에 포함시켰다. 또 마파니크의 바랑가이 의회는 일본군에 의해 고문당하고 살해된 남성들의 이름을 기록하기로 약속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이제 청년들이 롤라스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홀리엔젤대학, 유니버시티 오브 더 이스트, 앤젤레스대학 등의 학생들은 말라야 롤라스의 사건을 논문 주제로 삼아 연구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민족주의 및 민주주의 청년모임(Youth for Nationalism and Democracy)과 카이사 카의 청년 조직 등 다양한 학생들과 청년 단체들이 포럼과 원탁 토론을 주도하고 있다. 재편되는 안보 협력의 이면은 지역 군사화 한편 2024년 7월 8일, 필리핀과 일본은 양국 군대가 합동 군사 훈련을 위해 서로의 영토에 출입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되는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남중국해에서 필리핀과 중국 간, 그리고 동중국해에서 일본과 중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에 체결되었다. RAA는 필리핀과 일본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최근의 연결고리이다. 일본-필리핀 RAA는 미국-일본-필리핀 3국 안보 협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체결되었다. 이 협정으로 필리핀과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필리핀, 미국, 일본, 호주 사이의 4자 안보 협력체인 ‘SQUAD’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다. 미국은 ‘글로벌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을 ‘규범 기반 국제 질서’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 지정했으며, 3국 안보 협력, SQUAD, QUAD(미국과 일본, 호주, 인도 등 4개국 안보 협력 체제), AUKUS(미국, 영국, 호주 등 3개국 안보 동맹) 프로젝트는 모두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미국 전략의 일환이다. 이는 더 많은 동맹국을 참여시켜 미국의 지정학적, 경제적 목표를 취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미국의 방문군협정(VFA)을 통해 이런 협정들이 주로 외국 군대-이 경우에는 일본군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할 뿐 필리핀 군대에는 동일한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다. 미국의 VFA처럼, 실제로 일본군은 세관 및 형사소송 절차에서 면제되는 특권을 누리지만 필리핀군은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 VFA는 미군에게 특권을 제공했으며, 이는 미군 병사가 필리핀 루손섬의 수빅에서 필리핀 여성을 성폭행한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RAA 역시 유사한 사건 발생 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군사적 태세 강화와 전쟁 준비의 결과로 군비 지출 증가가 예상된다. 미국의 전략과 유사하게 일본 정부는 군사 장비를 과시하며 필리핀에 구매를 유도할 것이다. 필리핀 국민은 군비 지출이 모든 측면의 안보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군비 지출은 사회복지 서비스에 필요한 자금을 빼앗아가고, 우리의 무력에 대한 의존성만 높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필리핀 국민들은 실탄 사격 훈련과 기타 군사 작전으로 인한 위험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독성 폐기물과 화학 물질로 인한 위험에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군사 동맹은 미국의 지정학적 목표에 의해 부분적으로 추진되는 지역의 군사화 심화로 이어져, 필리핀이 이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대리 국가로 이용될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남중국해의 긴장 완화를 위해서는 군사적 틀이 아닌 신뢰, 협력, 연대에 기반한 새로운 공동 안보 체제가 필요하다. 군사화는 긴장을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다. 전쟁의 잔혹성과 상처를 상징하는 말라야 롤라스! 말라야 롤라스를 위한, 그리고 말라야 롤라스에 의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본이 미국과 적극적으로 공모하는 가운데 전쟁, 군사화, 외세의 개입과 점령은 여전히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위안부’ 세대를 막기 위해 진실을 말해야 한다. 롤라스와 함께 하는 국제적 연대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각주 ^ [편집자주] 이후 자연스럽게 단체 이름으로도 부르고 있다. ^ [편집자주] 보고에 따르면 필리핀에서는 미성년자까지 포함된 1,000명 이상의 여성이 납치, 감금된 상태에서 성 노예로 학대당했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는 1951년 일본과 전시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