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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배봉기 이야기 - "그 전쟁 속에서 용케 살아남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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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타 후미코는 2014년 한국어로 번역된 『빨간 기와집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에서 오키나와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배봉기 씨의 증언을 생생하게,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풀어낸 바 있다. 이 글에서는 배봉기 씨뿐 아니라 오키나와 주민들과 일본군 장병들의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오키나와 게라마 군도의 미군 비행기 공습이 있었던 당시 배봉기 씨와 '위안부'들이 겪었던 상황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내가 성매매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장가 중 마비키(間引き, 원래 뜻은 '솎아내기'로 이 글에서는 갓 태어난 아이를 생활고 때문에 죽이던 에도시대의 영아 살해 풍습을 뜻한다)를 노래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마비키 자장가는 예를 들자면 이런 노래다. 만약 이 아이가 계집아이라면 거적에 싸고 줄로 묶어 눈앞 작은 시내에 휙 풍덩풍덩 밑에서는 물고기가 쪼아먹고 위에서는 새가 쪼아먹고 이 자장가에서 마비키의 대상은 여아다. 이런 가사의 자장가도 있다. 계집아이면 잉께버려라 사내아이면 거둬들여라 여기서 '잉께버려라'란 '뭉개라'는 뜻의 사투리로 살해를 의미한다. 근대 초기에는 일본 인구의 80%가 농민이었다. 농민의 대다수는 소작농이었고, 이들은 수확한 작물의 34%를 토지세(地租)로 납부하고 지주에게도 34%의 소작료를 내야 했다. 당시엔 농업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확물의 양이 적었다. 소작농들은 가뜩이나 적은 양의 작물밖에 수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수확한 작물들의 대부분을 토지세와 소작료로 지불하고 빈궁 속에 허덕이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생활고로 인해 갓 태어난 아이의 생명을 끊는 풍습이 생겼고, 영아 살해 풍습을 노래한 자장가도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 아이들은 가까스로 살해를 면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집의 애보개로 보내졌다. 조금 더 성장하면 공장에서 일하거나 주인집에 기거하는 가정부로 일해야 했으며, 심지어 부모가 전차금을 받고 게이샤로 보내거나 유곽에 들여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마비키 자장가와 딸을 파는 에도 시대의 풍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성매매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1977년 가을, 친구가 아래와 같은 부제가 붙은 신문 기사를 보여주었다. 전쟁 중, 오키나와에 동원된 한국 여성 30년 만에 '자유'를 손에 불행한 과거를 고려해 - 법무성, 특별 재류를 허가(교도통신 발신, 1975년 10월 22일 자) 이 기사에서 말하는 '불행한 과거'란 위안소로 동원된 것을 의미했다. 이 기사에는 여성의 뒷모습 사진도 함께 실렸다. 나는 기사를 대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국가가 여성의 인생을 엄청나게 훼손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사진 속 여성은 그 당사자이고……. 위 기사의 당사자인 배봉기 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12월이었다. 내가 배봉기 씨의 반생애와, 배봉기 씨와 함께 오키나와 게라마 군도(慶良間諸島) 위안소로 동원된 조선인 여성들의 발자취를 좇은 책 『빨간 기와집』을 출판한 것은 1987년 2월이다. 배봉기 씨를 처음 만나고 약 10년 후에 세상에 나온 책인데 배봉기 씨의 반생애를 고스란히 담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 이상 시간을 들여도 다 쓸 수 없을 것 같아 중간발표를 한다는 심정으로 발간했다. 아직도 중간발표 상태 그대로이지만, 누군가 내게 대표작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직도 이 책을 꼽는다. 배봉기 씨를 비롯한 조선인 여성이 각각 7명씩 배치된 위안소가 있던 오키나와의 도카시키(渡嘉敷), 자마미(座間味), 아카·게루마(阿嘉・慶留間)섬은 오키나와 전투의 참담함을 상징하는 미군 비행기 공습이 발생한 섬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내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오키나와의 전투에서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1945년 6월 23일 우시지마 사령관과 조 이사무 참모장이 자결하였고 오키나와 수비군 제32군의 전투태세가 해제되었다. 이후 미국 군정의 통치 아래에서 타 지자체들과는 다른 역사를 걸은 오키나와에서는 연구자와 각 지자체 등에 의해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나 역시도 오키나와에 있는 지인과 연구자들의 도움으로 배봉기 씨와 직접 접한 주민들, 그리고 전(前) 일본군 장병들의 수많은 증언을 들었다. 또한 도카시키섬에 주둔했던 해상 정진 제3전투부대의 진중일지(陣中日誌) 등 배봉기 씨를 포함한 4명의 '위안부'가 이 전투부대 취사반에 소속되었을 당시 전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도 입수하였다. 『빨간 기와집』에서 배봉기 씨의 인생 전체를 다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주민들과 전 장병들의 증언과 자료를 배봉기 씨의 증언과 대조하며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에 도착한 이후의 상황, 특히 전시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었다. 게라마 군도 상륙과 동시에 위안소를 설치한 일본군 일본군이 게라마 군도에 상륙한 것은 1944년 9월 9일이다. 해상 정진 기지 제1대대와 제2대대가 자마미섬에 주둔했고, 제3대대는 도카시키섬에 주둔했다. 그 뒤를 이어 해상 정진 제1~3전투부대가 게라마 군도에 도착했다. 기지 대대는 기지 구축과 수비 임무를 맡았고 전투부대는 125㎏의 폭뢰 2기를 실은 상륙용 주정으로 목표 함선에 다가가 폭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돌아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특공작전을 수행했던 전투 대원은 '지원자'란 명목의 20살도 되지 않은 젊은이들이었다. 특공 선박은 전투부대에 각각 100척씩 배치되었다. 도카시키섬에서 위안소로 정해진 곳은 군항과 가까이 자리잡은 나칸다카리 일가의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와집이었다. 이 집을 위안소로 빼앗긴 나칸다카리 일가는 어업조합의 빈방으로 거쳐를 옮겼다. 축사의 가축들이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칸다카리 일가의 장녀인 하쓰코 씨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가축들의 먹이를 주러 위안소에 드나들었고, 매월 1일과 15일에는 조상 신을 모시는 제단에 향을 피우러 위안소에 들렀다. 하쓰코 씨는 그럴 때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위안소의 조선인 여성과 얘기를 나눴다. 위안소의 옆집은 군용 매점에 해당하는 주보(酒保)로 바뀌었고 그 집의 안주인인 신자토 요시에 씨가 주보 일을 맡았다. 병사들은 주보보다는 위안소에 가기 전 들르는 대합실로 신자토 씨의 집을 사용했다. 군은 도카시키 섬의 일반 주민들이 위안소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편 도카시키 마을의 여자청년단은 임원 회의에서 위안소 설치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성매매가 이루어진 적이 없는 도카시키섬에 위안소가 설치된다면 풍기가 문란해지고 여자 청년이 병사들에게 '위안부'로 오인될 수 있다는 것 등이 그 주된 이유였다. 고하구라 요코 여자청년단장 등이 위안소 설치에 반대하기 위해 제3전투부대장인 아카마쓰 가지를 찾아갔다. 아카마쓰 전투부대장은 "전투부대 구성원은 대부분 20세 미만의 지원병인데, 위안소는 나이가 많은 소집병으로 구성된 기지대 부대용으로 설치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당시 위안소는 군의 회계를 담당하는 주계부 관할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이노우에 도시카즈 주계부 하사에게도 강하게 항의했다. 스즈키 쓰네요시 해상 정진 기지 제3대대장은 마을 사무소에 근무했던 고하구라 요코 여자청년단장을 찾아가 위안소 설치 이유를 설명했다. 일본군은 주요 주둔지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있으며 현지 여성의 몸을 군인들로부터 지키는 것도 위안소 설치 목적 중 하나라고 말이다. 이를 들은 고하구라 요코 단장은 더는 위안소 설치 반대 운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도카시키섬의 위안소에 배치된 7명의 조선인 여성에게는 각자 창녀나 기녀들이 사용하는 일본식 이름이 붙여졌다. 당시 30살로 가장 나이가 많았던 배봉기 씨는 아키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사람은 24살의 기쿠마루, 하루코와 가즈코는 23살, 스즈란은 20살, 아이코와 밋짱은 16살로 가장 어렸다. 위안소가 개설되었을 무렵, 주보 일을 맡았던 요시에 씨는 눈이 새빨개지도록 울어서 퉁퉁 부어오른 아이코와 밋짱의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고 한다. 4개의 방이 있었던 나칸다카리 일가의 집은 6실의 위안소로 개조되었고 축사 일부도 위안소 용으로 개축되었다. 축사 옆 방을 배정받은 기쿠마루는 하쓰코 씨가 가축들에게 먹이를 주러 오면 종일 "산양 울음소리가 시끄럽다"라고 투덜댔다. 기쿠마루는 이 곳에 오기 전 중국에서 하루에 수십 명의 일본 군인을 상대했다며 타고난 듯 굵은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해 주변인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급하게 마무리해야 할 특공 기지 구축 작업을 마친 휴일에는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위안소를 찾아왔다. 병사들은 방에 들어오기 무섭게 각반을 풀어 놓았다. 그러면 배봉기 씨는 바로 그것을 다시 감아 놓았다. 병사가 방을 나설 때 빨리 각반을 두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군인이 방을 나서는 시간이 늦어지면 기다리던 다음 병사가 벽을 치며 빨리 나오라고 재촉했기 때문이다. 1945년 2월 중순, 게라마 해상 정진 기지 제1~3대대가 독립 대대로 개편되어 기지 부대는 일부만 남고 모두 오키나와 본섬으로 이동하였다. 대신 조선인 징용병이 도카시키섬에 들어왔다. 이후 위안소는 한산해졌다. 1945년 3월 23일 아침, 공격이 시작되다 1945년 3월 23일 아침, 공습경보가 울렸다. 하루코가 "언니, 빨리 피해야 돼!"라고 재촉했지만, 아무도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하루코는 네 살배기 아이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도카시키의 위안소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강을 낀 건너편 산 너머로부터 집채만 한 크기의 미군기가 나타나더니 위안소 위를 뒤덮었다.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나(배봉기)는 기쿠마루, 스즈란, 가즈코와 함께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하루코와 아이코, 밋짱은 부엌으로 몸을 피했다. 욕실에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사방에 검은 연기와 먼지가 자욱하게 차올라 앞이 보이지 않고, 천장이 삐걱거리면서 물건들이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위안소 건물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기쿠마루가 욕실을 나왔다. 나도 기쿠마루를 뒤따라 나가다 출입구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정신없이 강기슭 쪽으로 달려 가시가 무성한 판다누스(Pandanus boninensis, 일본령 오가사와라제도가 원산지인 열대식물) 수풀 속으로 숨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미군기가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고 지면은 계속해서 흔들렸다.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총탄이 귓가의 공기를 갈랐다. '이번에는 맞겠다, 이번엔 정말 맞겠다.' 나는 두려움에 계속해서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미군기가 위안소로부터 멀어진 사이에 우리 일행은 강 건너편의 방공호로 도망쳤다. 강을 건널 때 "우리도 데려가!"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위안소 앞에 허벅지가 피투성이가 된 밋짱과 아이코의 모습이 보였다. 온몸을 뒤덮는 공포에 손발이 덜덜 떨려 부상당한 두 사람까지 데리고 올 여유가 나에게는 없었다. 나는 그때 하루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부엌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잠시 공습이 뜸해진 틈을 타 오키나와 본섬에서 상관의 작전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게라마 군도에 온 스즈키 대장은 당번병을 데리고 위안소로 달려갔다. 위안소에는 중상을 입은 하루코만 남겨져 있었다. 미군기는 파도처럼 공습을 계속해왔다. 당번병이 중상을 입은 하루코를 업고 강을 건너려고 할 때 하루코는 기관총에 맞아 즉사했다. 하루코를 업고 있던 당번병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날 밤 배봉기 씨 일행은 긴급 의무실로 대체된 국민학교에 도착했고, 거기서 밋짱과 아이코를 다시 만났다.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밋짱과 아이코가 아프다고 울자 "죽은 사람도 있는데 울고 있을 때냐"라며 옆에 있던 스즈키 대장이 화를 냈다. 배봉기 씨가 말했다. "하루코는 스즈키 대장의 여자였으니까." 미군 공습 이후 아카마쓰 전투부대장은 지도에만 의지해 도카시키섬에서 가장 깊은 산골인 234고지에 복곽진지(複郭陣地), 즉 최후 저항을 위한 진지를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진지 구축을 위해 게라마 해협 근처 진지에서 234고지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3월 27일 오전 2시였다. 비가 많이 오던 밤이었다. 파출소 순경이 주민들은 어떻게 할지를 물으니 아카마쓰 대장은 복곽진지 예정지 뒷쪽 계곡으로 피난할 것을 지시했다. 온나 강가에 방공호를 파고 오두막을 지어 몸을 피했던 주민들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걸으며 234고지로 향했다. 다음 날인 28일에는 복곽기지 구축이 시작된 곳에서 산봉우리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편 계곡에서 330명의 주민이 자결했다. 한 가족은 방위 대원으로부터 받은 수류탄을 둘러싸고 자결했고, 어떤 사람은 낫으로 목을 베었으며 어떤 사람은 굵은 나뭇가지를 꺾어 가족을 때려죽였다. 남자가 있는 가족 중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하쓰코 씨의 부모님과 여동생도 그 골짜기에서 목숨을 끊었다. 아비규환 속의 골짜기에 박격포가 떨어졌고 하쓰코 씨는 중상을 입은 채 며칠 동안 흙 속에 묻혀 있다가 구조되었다. 도카시키 마을은 징병율이 3년동안 전국 1위를 기록했다. 어업 종사자들이 많아 마을 주민들의 체격이 좋았기 때문이다. 막사가 지어질 때까지 장병들은 국민학교나 민가에 머물렀다. 중국에서 귀환한 병사들과 일본 병사들이 남자는 전차로 치어 죽이고 여자는 강간한 후 목을 졸랐다는 등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여러 잔학 행위를 주민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27일에 도카시키 섬에 상륙한 미군은 이미 234고지 근처의 A고지로 다가오고 있었다. A고지는 주민들이 피란 중인 골짜기 근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하쓰코 씨는 먼저 죽은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미군들에게 몸을 더럽힐 바엔 죽겠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고 한다. 그 후에도 '집단 자결'이라 불리는 참극이 자마미와 게루마, 그리고 그 외 오키나와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사망자 수가 가장 많은 곳이 도카시키였다. 내가 도카시키로 갔을 때 배봉기 씨에게 하쓰코 씨와 요시에 씨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해주었더니 배봉기 씨는 "그럼 만나러 가 볼까"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그 전쟁 속에서 용케 살아남았어." 약 30년 만에 상봉한 하쓰코 씨와 요시에 씨는 배봉기 씨의 손을 잡고 감격에 젖어 떨리는 목소리로 "그 전쟁통에서 용케도 살아남았구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배봉기 씨는 두 사람의 환대에 조금 주저하는 듯 보였다. 하쓰코 씨와 요시에 씨는 복잡한 심경으로 7명의 조선인 여성들을 대했고 그 모습을 마음에 담고 있었지만, 일본어도 오키나와 사투리도 서툴렀던 배봉기 씨에게는 두 사람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하쓰코 씨는 위안소로 사용되었던 방들이 부정을 탔다는 생각에 무녀에게 액막이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마당에 사당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일까. 배봉기 씨는 사당 앞에서 합장했다. 공습이 끝난 후 234고지에서의 생활 게라마 상공을 선회하던 미군기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춘 1945년 3월 24일 저녁, 배봉기 씨는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안소 상황을 보러 갔다. 완전히 불에 탄 위안소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불에 탄 옆집 근처에 화재의 잔해로 상반신이 뒤덮인 하루코의 시신이 있었다. 며칠 후 제3전투부대의 지넨 초보쿠 부관과 하루코를 평소 예뻐했던 하사관이 234고지에서 내려와 부패한 하루코의 시신을 시신이 있던 자리에 묻어주었다. 요시에 씨는 가족이나 친척들이 찾아왔을 때 알 수 있도록 마당에 묻혀 있던 뼈를 유골 단지에 담아두었다가 도카시키 마을의 전사자와 전몰자의 영을 기리는 시라타마 위령탑이 세워졌을 때 합사했다고 배봉기 씨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렇게까지 해 주시다니 감사하네요." 숙소에서 배봉기 씨는 감동한 듯이 말하면서도 "하지만 찾으러 오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라고 덧붙였다. 배봉기 씨와 함께 조선에서 징집되어 부산을 떠난 61명 여성들의 행선지는 가족들에게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이 게라마 제도를 공습할 때 배봉기 씨 일행은 군으로부터 지급받은 모포 한장으로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총탄과 호우를 견뎠다. 공습이 잦아든 3월 말, 일행은 인기척이 끊긴 촌락 구석에서 오두막을 발견했다. 마을 사람이 공습에 대비해 지어놓은 피란용 오두막이었다. 오두막에 남아있던 식량을 다 먹고 먹을 것이 떨어지자 위안소에서 요금 정산을 맡고 있던 가네코가 군과 의논을 한다며 234고지로 향했다. 배봉기 씨와 기쿠마루, 가즈코, 스즈란도 가네코를 따라 234고지로 향했고, 이들은 제3전투부대 취사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관공서 병사 주임이었던 도야마 마준 씨도 합세해 총 다섯 명이 234고지 골짜기로 향했다. 도야마 씨가 제3전투부대의 취사장 터를 가리켰다. 그곳은 계곡물이 1m 정도 정체되는 곳으로 계곡의 폭도 둔덕도 넓었다. 맑은 계곡물이 그 곳에서만 푸른 빛을 띠어 깊이가 꽤 깊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둔덕 옆에는 찰흙으로 만든 취사반 아궁이가 있었다. 거기서 배봉기 씨 일행은 건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멀건 잡탕죽을 매일 만들었다. 게라마 공습 첫날 제3전투부대의 식량고가 불에 타 비축되어 있던 6개월분의 식량 중 2개월 분량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취사장 옆에는 짐승들이 골짜기에서 산 쪽으로 나가는 길이 있었다. 가진 것이라곤 빈약한 무기밖에 없던 제3전투부대의 작전은 어둠을 틈타 미군을 향해 돌격하는 것뿐이었다. 돌격할 때는 짐승들이 다니는 취사장 옆길을 이용했다. 배봉기 씨는 돌격에서 끔찍한 상처를 입고 귀환한 병사들을 자주 보았다. 돌아오지 못하는 병사들도 많았다. 우리가 234고지를 다시 찾았을 때 배봉기 씨는 그 당시 짐승들이 다니던 길 근처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감고 오랫동안 손을 모아 기도했다. 역사적인 가해와 피해를 큰 틀에서 말한다면 배봉기 씨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피해를 매우 가혹하게 받아들이며 도카시키에까지 왔다. 이러한 배봉기 씨가 234고지를 다시 찾아가 가해자인 일본군의 죽음을 애도하고 명복을 빈 것이다. 하쓰코 씨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330명이 '집단자결'한 도카시키의 골짜기로 향했다. 하쓰코 씨가 속삭였다. "마지막 분향이 끝나야 사자의 영혼이 승천할 수 있는데 여기서 죽은 분들은 승천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고 해요." 죽음의 공포보다 괴로웠던 굶주림 제3전투부대 취사반에 들어간 배봉기 씨 일행은 각 부대에 배급을 마치고 냄비 바닥에 남아 있는 건더기가 많은 잡탕죽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배 곯는 것은 총탄에 맞는 것 이상으로 괴로워요." 당시를 회상하던 배봉기 씨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배봉기 씨는 도카시키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루는 아카마쓰 전투부대장이 목욕을 한다기에 징용병들이 드럼통에 계곡물을 길어서 채우고 배봉기 씨가 불을 지폈다. 폭음이 들린 순간, 천막을 관통한 기관총탄이 드럼통에 탕탕 구멍을 뚫었고 뜨거운 물이 튀어 올랐다. "빨리, 도망가!" 이노우에 하사가 소리쳤다. "도망이고 뭐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움직일 수 없었어." 눈앞의 커다란 나무가 폭탄에 맞아 갈라진 일도 있었고 박격포의 파편이 등 뒤로 날아온 적도 있었다. 배봉기 씨는 게라마가 공습을 당할 때도, 234고지에서도 찰나의 우연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경험을 거듭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보다도 굶주림이 더 참기 힘들었다고 배봉기 씨는 말했다. 제3전투부대의 진중일지에는 1945년 7월부터 영양실조로 사망한 병사들에 대한 기록이 잇따랐다. 영양실조로 사망한 병사의 기록은 패전 때까지 12명에 달했다. 전사나 병으로 사망한 사람들보다도 많은 숫자다. 이러한 굶주림 때문이었을까. 1945년 6월 말, 소네 기요시 일등병은 약 20명의 조선인 징용병을 이끌고 미군에 투항했다. 이때 두 명의 '위안부'도 함께였다. 배봉기 씨는 소네 일등병이 미군에 투항한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기쿠마루와 스즈란이 없었다고 했다. 소네 일등병은 게라마 상공을 날던 특공기가 미군의 공격에 격추되어 떨어질 때마다 "아아, 오늘도 젊은이가 개죽음을 당했어."라고 우울해하며 이 전쟁에서 일본은 패배할 거라고 확신했었다. 그는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에 투항하기로 마음먹었다. 혼자서 살아남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밀고 당할 우려가 있었기에 일본군에게 함께 투항하자고 하기에는 위험했다. 그는 투항을 하기 직전에 조선인 징용병들의 수장에게 말을 걸었다. 짧은 고민 끝에 투항을 결의한 징용병들이 소네 일등병에 동참했다. 당시 기쿠마루와 스즈란은 이들과 같은 참호에서 잠을 잤었다. 배봉기 씨와 가즈코가 잠을 자던 참호까지는 징용병 수장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수용소를 나와 오키나와를 정처없이 떠돌다 계속해서 제3전투부대에 머무르던 배봉기 씨와 가즈코는 1945년 8월 26일, 마을 국민학교 교정에서 시행된 미군과 제3전투부대 사이의 무장해제식에 참여했다. 배봉기 씨와 가즈코는 그 후 제3전투부대와 함께 오키나와 본섬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곧바로 오키나와 본섬의 이시카와 민간인 수용소로 옮겨졌다. 이시카와 수용소에 언제까지 있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전쟁 이전부터 오키나와에 체류하며 미군의 작업반장을 맡고 있던 조선인 마쓰야마가 가즈코에게 드나들더니 결국 가즈코는 먼저 수용소를 나가게 되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이 세운 기획주택이나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판자 조각, 천막 등으로 얼기설기 지은 집에 머물게 되면서 수용소가 한산해진 무렵, 배봉기 씨는 수용소를 나왔다. "처음에는 어디에 가도 마음이 불편했지. 여기에서 하룻밤, 저기서 사흘 밤, 길어봐야 일주일. "부엌일을 시켜달라."라고 부탁하면 아직 젊으니 '부엌일은 됐으니 접대나 하라'는 거야. 온종일 걷다 보니 손님은 술을 마시고 있는데 나는 졸면서 꿈까지 꾸고. 그러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면 또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져서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온다고 거짓말하고 나왔지. 온종일 걷다 보면 날이 저무는데, 깜깜해져도 잘 곳이 없으니 또 술집으로 갈 수밖에. 당시에는 작업화를 신고 있었어. 일본군의 작업화. 그걸 손에 들고 일부러 맨발로 걸었지. 낯선 나라에 와서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말도 안 통하고, 가진 돈도 없고. 자포자기 심정이었지. 인간이 그리 되더라고." 배봉기 씨는 몇 안 되는 옷가지를 챙긴 보자기 하나만 달랑 머리에 이고 일 년 동안 계속해서 걸었다고 한다. 배봉기 씨의 이야기를 듣던 내가 어두워져서 또다시 술집에 들어갈 바에야 같은 곳에 머무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짜증이 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불안해서 그래, 불안해서 그랬다고!" 배봉기 씨가 일 년간 계속해서 정처 없이 걸었던 곳은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가장 큰 전쟁의 화를 입어 잿더미가 된 중부부터 남부 지역이었다. 사람이 낯선 타국에서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가진 돈도 없는 상황에서 맨몸으로 살 수 있을까. 일 년이나 맨발로 드넓은 오키나와 땅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던 이야기는 배봉기 씨가 여러 번 경험했던 극한의 상황 가운데에서도 가장 아프게 와 닿은 극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배봉기 씨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배봉기 씨는 "아, 젠장! 나고는 어떤 곳이지? 나고에나 가봐야겠다."라고 하며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이후 배봉기 씨는 나고, 고자(현 오키나와 시), 아케나, 가데나 등을 거쳐 떠돌이 생활을 수 년째 지속하다 난조시에 정착했고, 필자는 난조시에 정착한 배봉기를 1977년 12월에 처음 만났다. 이때 시작된 배봉기 씨와의 만남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기 시작한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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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 - 창작판소리 ‘박필근뎐’과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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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결>은 202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박필근’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경북지역의 유일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로 알려지는 그는, 일본군에 의해 16세 당시 강제로 끌려가 공장에서 위안소로 옮겨져 2차례의 탈출 시도 끝에 겨우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포항의 작은 집에서 포항여성회를 비롯한 지역의 많은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박필근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지역 창작자들이 함께 모여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을 만들어 그의 삶을 알리기도 했었죠. 이렇게 역사는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를 넘어 단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박필근과 또다른 많은 박필근들. 그 모든 소중한 이름을 우리가 계속해서 불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2021 기림의 날 특집] 박필근을 만나다 1. [논평] 박필근을 기억하다 2. [포토스토리] 사진으로 만나는 박필근 3. [에세이] 소중한 우리 할머니, 박필근 - ‘시간과 기억을 잇다’ 4.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창작판소리 ‘박필근뎐’과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노트 #NOTE 1 박필근뎐 캄캄한 방 몸 하나 겨우 눕는 방 창문 하나 없이 비명소리 벽지가 된 방 나도 캄캄해져 벽 틈 사이로 들어오던 그 빛 고향하늘 달빛처럼 환한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보고 싶은 우리 엄마 2019년 5월. 포항 KBS라디오 이용일 PD님과 포항여성회 회장이자 KBS라디오 작가였던 김은주 님이 한터울 공간으로 찾아오셨다. 두 분은 포항여성회에서 펴낸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박필근 할머니의 삶을 국악으로 들려주고 싶어 했다. 구술생애사를 읽는 내내 판소리가 들렸다.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단원들에게 할머니와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할머니의 구술증언에 당시의 일본군 자료, 뉴스 기사, 증언 등을 보태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의견들이 쏟아졌다. 그렇게 뜻을 같이 한 포항의 젊은 국악인들이 박필근 할머니의 기억을 ‘우리 모두의 기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어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이 시작됐다. 나비야 살아서 날개를 꺾인 나비야 퍼덕거리고 날개를 치면 나비야, 방문 앞에 줄을 선 전쟁귀들 날개를 꺾는구나 나비야 날개를 꺾여 날지 못하는 슬픈 나비야 일본은 가장 추악한 짓을 저질러 놓고 그 추악한 짓이 인정되면 오점이 될까 봐 온갖 거짓말로 덮어왔다. 우리는 70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할머니들의 가슴에 박힌 대못을 뽑아드리지 못했다. 가족들은 부끄럽게 생각하고 많은 할머니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내가 이런 짓을 당했다’ 겨우 말하게 한 일이 못내 부끄럽다. 그런 우리에게 ‘박필근이라는 거울’을 함께 들여다보자고 이 판소리를 창작한다. 일본으로 하여금 추한 역사를 속죄하게 하고 우리도 상처를 일찍 보듬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늦은 일기쓰기,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은 그래서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라는 선언이다. 창작의도를 정리하고 대본 작업을 위해 박필근 할머니의 구술생애사와 다른 할머니들의 활동과 증언들을 찾아보며 다들 많이 울었다. 가사 한 줄 한 줄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할머니의 절망이, 고통이 느껴져 작창을 하던 소리꾼의 소리도 자주 끊어졌다. ‘고통을 덜어내는 힘’이 아니라 ‘고통을 드러내는 힘’을 내야 하는 공연이라 모두들 힘겨워했다. 기존의 판소리가 누구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듯 ‘박필근뎐’도 단원들의 ‘더늠’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앞으로 ‘박필근’이 될 더 많은 예술가들이 마음을 보탤 것이다. #NOTE 2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에 함께한 대학생 소리꾼 김채은은 “진짜 이런 일이 있었어요? 포항에 살아계시는 할머니 이야기라니 믿기지 않아요”라며 처음 접한 충격적인 사실에 놀라 “에이, 나쁜 놈들!”을 연발했다. 어느 날 자신이 맡은 어린 박필근 역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자료가 없느냐고 물어왔다. 김금숙 작가의 책 『풀』을 건네주었다. 다음 날 퉁퉁 부은 눈으로 나타나 “이런 역사를 여태까지 몰랐다는 게 부끄럽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까지 폭력적일 수 있느냐”고 했다. 그 후, 연습 때 소리가 달라진 걸 느꼈다. 우리가 ‘박필근뎐’ 공연을 본 관객들에게 바랐던 변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젊은 세대들이 할머니와 같은 ’위안부‘피해자들을 자신의 할머니처럼 가깝게 느끼며 공감하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박필근뎐’ 공연을 마친 다음 해 포항문화재단에서 지역의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공모했다. ‘젊은 포항의 소리꾼에게 포항의 이야기가 담긴 대본을 주고 작창과 소리 지도를 해줄 스승을 만나게 하고, 소리꾼으로 하여금 판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원리를 체득하게 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자신만의 판소리를 수련하여 지역을 넘어서는 큰 소리꾼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든다’는 컨셉으로 지원해 선정되었다. 전북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수궁가 이수자이자 국악방송TV <국악아니?>의 진행자이기도 한 김봉영 선생님이 연출과 작창 및 연기 지도를 맡아주기로 해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김봉영 연출은 “삶을 살아가는 것과 작품을 만드는 일은 비슷하고, 삶의 매 순간의 선택이 곧 창작이며, 축적된 선택들은 인생이라는 작품이 된다. 그래서 작품을 만드는 일은 삶의 갈등을 줄여가는 일일 것이다. 소리꾼의 내면적 성장이 주가 되고 작품은 그냥 그 과정의 자연스런 결과물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방향을 정했다. 판소리를 창작하는 전 과정을 공유하는 것도 큰 자산이 되도록 대본, 기획, 제작에 소리꾼, 고수 등 모든 스탭이 함께하는 ‘공동창작’ 제안에 모두가 흔쾌히 동의했다. 주제, 스토리, 노래 가사, 작창의 방법과 연기지도까지 모두 공유하며 함께 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아래에 소개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은 가사 ‘사방이 벽뿐인데 진로, 진로’는 회의 후 가진 술자리에서 번뜩 튀어나왔다. ‘먹고사니즘’, ‘꿈과 빚은 패키지 상품’으로 이어지는 가사는 취기 오른 이들의 ‘알코올 더늠’이다. 진로, 진로 진로라니 술 이름 한번 고약하다. 사방이 벽뿐인데 진로, 진로. 취업률 바닥인데 진로, 진로. 꿈도 없는데 진로라니. 술 술 넘어가는 게 술이라던데 그놈 참 안 넘어가는구나. 아무리 쳐다봐도 못난 년 너도 한잔. 지질이 운도 없는 년 너도 한잔. 한잔 두잔 석잔 주거니 받거니 진로가 금방 거덜 났네. 텅 비어버린 진로. 빈병 같은 청춘. 한라산 같은 꿈. 진로, 진로 진로라니! 그놈 이름 참 고약하다. 그래도 처음처럼 보다 났네. 노력해서 최종면접까지 왔는데, 다시 처음처럼 이라니! 지긋 지긋한 먹고사니즘. 열심히 살아도 신용불량. 꿈과 빚은 패키지 상품. 언제쯤 좋은 데이? 이술 저술 다 마시고 고르고 골라 참소주 그마저 짠소주. 쥐포처럼 잘근 잘근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망할 놈의 세상이야. ‘악의 평범성’은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일어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더운 여름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연습하다가 “저 밖에 있는 길고양이들은 어떻게 지낼까”라는 누군가의 한 마디에 다들 한없이 작아지던 경험도 가사가 되었다. 배고파서 먹을 거 찾는 게 잘못이냐? 아파트, 대형마트 지어 사람만 잘 사는 세상 만들었으니 삶터를 뺏긴 동물들이 배고픈 건 당연지사. 음식물 쓰레기로 연명하고 물도 구하기 어려운 도심 아픈 몸으로 고작 3-4년을 산다. (중략) 눈빛이 싫다고 돌 던지는 사람은 놔두고 돌 맞아 다리 저는 놈을 보고 절름발이라 놀리면 동물들 입장에선 얼마나 아프겠느냐.(중략) 상처를 주는 것이 나쁜 일이지 상처를 받는 게 나쁜 게 아니다! 대본 작업을 위해 박필근 할머니뿐 아니라 여러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던 중에 말년에 치매로 아기 인형을 자식이라고 애지중지하셨다는 이수단 할머니의 사진 앞에서 모두가 말을 잃었다. 친구들과 나물 캐던 ‘수단이’에서 일본 군인들이 부르던 ‘히도미’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중국인 ‘리평원’으로 생을 마치신 이수단 할머니의 삶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을 감히 상상하며 가사로 만들기도 했다. 이 못난 늙은이도 이름 세 개로 험한 시대를 살았는데 한 개 이름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우리 예쁜 다미가 못 살까 그냥 돈 몇 푼 벌어주는 직업은 꿈이 아니다 꿈을 잃지 말거라 꿈마저 잃으면 죽은 사람이야 그렇게 만들어진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는 낯선 할머니와 만난 소녀 ‘다미’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우리 안의 ‘다름에 대한 폭력성’을 성찰하고 다양한 생명들이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따뜻하게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바람을 담은 작품이 되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전쟁 중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지만 지금도 여성들과 사회적 약자, 동식물들, 심지어 지구마저도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확인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이 길고양이들에게 하는 것을 보라. 평범한 사람이 생각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일을 ‘너무나 성실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는 전쟁’을 겪었기에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하신 할머니들. 진정한 평화가 정착하려면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들의 폭력을 줄이는 일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가 길고양이를 아끼는 ‘위안부’ 할머니와 소리꾼을 꿈꾸는 한 소녀의 만남을 통해 생명을 가진 어떤 것에도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되며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상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 살자는 노래.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물론이고 코로나로 힘든 이웃들을 위한 응원가이기도 하다.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 소개 대본: 김은주 / 연출: 김도연 / 소리: 곽미정, 김채은 2019년 경북의 유일한 ‘위안부’ 피해생존자이신 박필근 할머니의 구술생애사를 바탕으로 포항 KBS 라디오에서 ‘판소리 다큐멘터리 박필근뎐’이 제작됐고 이를 기반으로 2020년에는 포항여성회에서 지역의 예술가들과 손을 잡고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을 비대면 영상으로 제작했다. 2021년에는 여성가족부가 진행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민간단체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포항에서 판소리에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한 공연으로 중앙아트홀에서 공연 예정이다. <솔직히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소개 대본: 이원만 / 연출: 김봉영 / 소리: 김채은 2020년 포항문화재단에서 지역의 문화예술지원사업 중 공공프로젝트 글로컬아티스트 육성지원사업으로 선정되어 쇼케이스로 발표했다.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는 ‘위안부’피해자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었던 할머니와 소녀의 만남을 통해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소녀 다미가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 공감으로 따뜻하게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바람을 창작판소리로 표현한 작품이다. 기사 게재일: 202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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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자료해제 유수명부와 복원명부에서 발견한 조선인 여성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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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 들여다보기] 1부 -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 종류의 연구의 의미 2부 -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에서 발견한 조선인 여성들 -상- 3부 -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에서 발견한 조선인 여성들 -하-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 들여다보기 어느 나라건 군대는 체계적으로 운영됩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일본군의 군대 관리에는 전쟁에 참여한 군인·군속(군무원의 옛말)의 숫자와 이들의 상태(사망과 부상 여부, 귀국 일시 등)를 기록하는 것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야 병력의 상황을 파악하고, 군인에게 월급이나 상벌을 주며, 군인·군속이 전쟁터에서 사망했을 경우 가족에게 사망 통보를 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이러한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기록 중 하나가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입니다.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는 군인·군속으로 동원되어 집을 떠나 전쟁터로 향한 이들의 명부입니다. 이때 '유수(留守)'는 일본어로 '부재중' 혹은 '집의 주인이나 가족이 외출한 사이에 그 집을 지키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조선인들도 일본의 군인·군속으로 동원됨에 따라 이러한 명부에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은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외에도 목적에 따라 다양한 명부를 만들었는데, 이 글에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함께 살펴볼 복원명부 역시 그중 하나입니다. '복원(復員)명부'는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반대로 병역을 마치고 제대하여 귀향하는 이들을 기록한 명부입니다. 그렇기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는 특정 인물이 전쟁 당시 군인·군속 신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지요. 이 글에서는 일본군이 작성한 명부자료 중 인도네시아 남방 제5·9·10육군병원의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그리고 남방 제9육군병원의 복원명부에서 찾은 조선인 여성들을 중심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루어보겠습니다. 한정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살펴보기 본격적으로 명부의 내용을 분석하기에 앞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먼저 살펴볼까요? 아래 그림들은 국가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의 사본입니다. <그림 1>은 남방군 제7방면군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의 표지이고, <그림 2>는 남방 제5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중 한정수라는 조선인 여성의 기록이 나와 있는 부분입니다. <그림 3>은 남방 제9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중 안원남선의 부분, <그림 4>는 남방 제10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중 김복동의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는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일까요?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는 후방에 남아 있는 명부를 만들고 이를 일선으로 파견된 부대에 전달하면, 일선의 각 부대가 현지에 편입되거나 소속 부대가 변경된 군인·군속의 이름을 추가·삭제 등을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일본군이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작성 규정을 만들어 육군에 적용한 시기는 전쟁 말기인 1944년 11월 30일부터입니다.[1] 하지만 이 시기에 <그림 2>, <그림3>, <그림4>의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만든 육군병원들이 소속된 남방군 제7방면군은 이미 인도네시아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였던 당시 전황상 인도네시아와 일본을 오고 가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 때문에 아래의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들은 현지 부대에서 직접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직접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만드느라 바빴다는 남방 제5육군병원 군인의 회고담이 있기도 합니다.[2] 그럼 이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좀더 꼼꼼히 살펴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한정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가 한정수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2000년 즈음 명지대 홍종필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홍종필 교수가 일본 오키나와에서 사망한 조선인들의 명단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홍 교수는 당시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에 전쟁 중에 사망한 조선인들의 이름을 새기는 작업을 지원하고 있었기에 이 명단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홍교수는 명단 속 한정수라는 인물을 이름만 보고 남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유가족을 조사한 결과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홍 교수가 알려준 것 이상의 정보를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제가 한정수라는 인물을 다시 만난 것은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게 제공한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3]에서였습니다. 남방 제5육군병원 간호부로 기록된 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남방 제9육군병원, 제10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 수록된 조선인 여성들의 이름을 추가로 발견했어요. 여기에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복동의 이름을 확인하면서, 한정수를 비롯한 명부 속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고 조사를 계속했지요. <그림 2>는 자바섬 자카르타에 있던 남방 제5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중 한정수가 기록된 부분입니다. 최상단 여백에 복원(復員, 병역해제) 여부를 확인한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최상단 우측의 '21.4.24' 문구는 쇼와 21년(1946년) 4월 24일에 이 사람의 병역이 해제되었음을 뜻합니다. '21.4.24' 문구의 아래 칸에는 한정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병역이 같은 시기에 해제되었다고 쓰여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한정수가 남방제5육군병원의 군속으로 편입된 시기가 적혀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편입 시기가 1945년 8월 1일로 되어 있는 것과 달리 한정수는 7월 30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아래 칸의 한자를 볼 때 이는 한정수의 사망일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칸에는 본적지, 주소, 유수 담당자 등이 적혀 있는데 주소 자리에 도장으로 '合祀 濟(합사 제)'라는 문구가 찍혀 있습니다. 이것은 한정수의 유골이 야스쿠니(靖國)신사에 합사되어 있음을 표시한 것입니다. 한정수 명부의 최하단에는 '除(제)', '死(사)'라는 글씨가 도장으로 찍혀 있습니다. 이것은 한정수의 병역이 해제되었음과 한정수가 사망했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명부의 중앙 하단에 '供(공)', '供号(공호)'라는 도장과 함께 숫자가 적힌 것은 공탁금 번호로 추정됩니다. 공탁금은 일제시기에 동원된 민간인들에게 주어야 할 임금 등을 미지급하고 공탁한 금액을 말합니다. 일본정부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이전까지 공탁금을 일제징용 노무자들에게 주지 않고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명부에 찍힌 도장들은 모두 동일한 시기에 기재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공탁금 도장은 후생성에서, '합사 제' 도장은 야스쿠니신사에서 합사 작업이 끝난 시점에 찍은 도장입니다. 다른 문구들도 각 목적에 따라 명부 위에 더해진 것이겠지요.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 담긴 여러 가지 기호와 정보들은 아직도 연구 대상입니다. 명부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앞으로 연구자들에게 남겨진 과제겠지요. 위에서 살펴본 <그림 2>와 함께 <그림 3>, <그림 4>도 살펴보죠. 남방 제9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는 77명의 조선인 여성이 1945년 8월 22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남부 팔렘방에 있던 제9육군병원에 편입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남방 제10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는 142명의 조선인 여성이 1945년 8월 30일과 31일에 수마트라섬 북부 메단의 제10육군병원에 편입되었다고 나와 있고요[4]. 각기 다른 육군병원에서 작성한 이들 명부에 실린 여성들의 직업은 간호부, 임간(臨看, 임시간호부), 용인(傭人, 최하급의 군속)등 저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명부의 형식은 비슷합니다. 일본군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의 공통 형식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 여성들이 기록된 복원명부를 발굴하다 저는 2015년 12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 재직 당시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도서관을 조사하면서 남방 제9육군병원의 조선인 여성들이 기록된 복원명부를 발굴했습니다. 그때 찾은 복원명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명부의 여백에 조선인 여성들이 남방 제9육군병원에 편입된 시기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행선지가 조선의 어느 지역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본적지, 귀국할 곳의 역 이름, 병종, 관등급, 씨명, 생년월일 등의 칸이 있습니다. 위의 복원명부에서 주목할 부분은 조선인 여성들이 남방 제9육군병원의 임간(임시간호사) 신분에서 해용(解傭, 고용계약의 해지)된 시점이 1946년 5월 24일이라는 점입니다. 1946년 5월 24일은 이들이 조선으로 돌아오는 귀국선을 탄 날짜이기도 합니다. 팔렘방조선인회명부를 정리한 강석재의 수첩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인도네시아의 조선인 여성들은 대부분 원래 있던 자바섬이나 수마트라섬에서 싱가포르로 이동한 뒤 1946년 5월 24일, 귀국선을 타고 조선으로 향했지요. 위의 복원명부를 통해 조선인 여성들이 배를 타고 귀향하는 시기에 맞춰 현지의 일본군 사령관이 이들을 해용 처리했음을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Credit 편집 : 현승인, 변지은 감수 : 윤명숙, 김소라 일러스트 : 백정미 각주 ^ 일본군이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작성하고 관리하게 된 이유는 「육군유수업무부령」, 「유수업무규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육군유수업무부령」(칙령 제313호)과 「유수업무규정」 자료는 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자료와 홈페이지(http://www.jacar.go.jp/)에서 참고할 수 있다 ^ 浜田國雄, 「一 兵卒の綴った‘ジャワの 想い出’から」 , 『南五戰史』, 199쪽. ^ 국가기록원에서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를 위해 1990년대 초 일본 정부에서 받은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를 전산화하였고, 2004년 3월부터 온라인으로 이 명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 『인도네시아 동원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이하 진상조사보고서), 2009. 12,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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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인터뷰 할머니들의 첫 ‘미술 선생’을 만나다 - 『못다 핀 꽃』 이경신 화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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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때로 예술로 피어오른다.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응어리를 그림으로 쏟아낸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다. 미처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분노와 슬픔, 고통과 회한은 흰 도화지 위에 선과 색으로써 표출됐다. 그들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은 이경신 화가의 책 『못다 핀 꽃』(휴머니스트, 2018)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나눔의 집에 거주하던 생존자들의 첫 ‘미술 선생’으로, 1993년부터 5년간 진행한 그림 수업의 뒷이야기를 20여 년이 지난 후 세상에 풀어놓았다.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나온 그는 졸업 후 사회인으로서 자신의 쓸모를 고민하다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의 한글 선생님을 구한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그곳으로 향한다. 강한 이끌림으로 할머니들을 찾았지만 막상 대면하니 말을 이어나가는 것도 어려웠던 이경신 작가는 결국 가장 자신 있는 도구를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림으로 소통하기. ‘미술 수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처음은 역시 쉽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그림 수업에 할머니들은 힘들어했고, 하얀 스케치북을 마음대로 ‘망치는’ 것도 두려워했다. 그래도 수업은 계속됐다. 그리고 변화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타났다. 할머니들은 그림을 통해 상처를 마주하고 스스로를 치유했으며 성장해나갔다. “대학시절, 그림을 그리며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 없을까 고민했어요. 그러다 할머니들을 만났죠.” 할머니들과의 시간은 20대 시절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던 작가에게 짙은 무늬를 남겼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인간의 존엄과 용기의 아름다움은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했다. 『못다 핀 꽃』으로 늦게나마 수업의 마침표를 찍은 저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끌리듯, 만남 Q. 할머니들과의 만남 말고도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많았을 텐데 특히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나요? 김학순 할머니 때문이죠. 대학 4학년인 1991년 8월 15일에 국내에서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 기사가 신문에 났어요. 김 할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50년 동안 가둬둔 비밀이 있을 줄이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일이었죠. 하지만 이후 할머니들 이야기는 잊은 채 졸업을 했고, 20대 청춘이 다들 그렇듯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며 실존적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들이 도움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김학순 할머니가 떠오르면서 매우 강하게 끌렸죠. 그 시절 제가 여성으로 살아가며 사회에서 겪은 자잘한 부당함들과 연결되면서 할머니들을 만나 뵙고 싶었어요. Q. 어떤 끌림이 있었군요. 네. 그리고 할머니들이 계신 곳이 저희 학교와 같은 동네였어요. 아마 지역이 달랐으면 조금은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웃음). Q. 할머니들과의 미술 수업이 20년 전이에요. 그때 당시를 회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겠죠. 기록을 더 많이 할 걸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래도 그림 덕분에 수업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어요. 그림 안에는 이야기가 들어있거든요. 그때 오간 대화, 할머니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들이 그림을 보고 다 떠올랐어요. Q. 그림의 힘이네요. 네. 사진과 자료를 찾아보면서 좀 더 정교하게 정리를 하긴 했지만, 그림이 없었으면 기억을 못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Q. 수업을 하며 참 많은 일이 있었을 텐데, 책에 미처 다 담지 못한 이야기가 궁금해요.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 있어요. <빼앗긴 순정>에 대한 이야기예요. 할머니는 (성폭력 피해) 당시 너무 어렸고 생리도 하지 않을 때라 남녀 관계를 아예 몰랐어요. 가족도 할머니와 본인 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자에 대해 이야기해줄 사람도 없었죠. 그래서 처음에 성폭력을 당했을 때 ‘내가 죽는구나’ 싶었다고 해요. 성폭행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거죠. 할머니는 원래 근로정신대로 공장에 있다 도망치던 중 붙잡혀서 위안소로 끌려갔기 때문에 소속이 불분명했어요. 그러다 보니 위안소 여성들로부터도 소외됐다고 하시더라고요. 철저히 혼자였던 거죠. 피해 이후 충격으로 실어증 상태가 이어졌고, 그게 굳어져 50년 동안 평생 말이 없으셨어요. 저를 처음 만났을 때도 할머니는 어둡고 눈빛이 날카롭고 예민하셨어요. 꼭 필요한 말만 하셨죠. Q. 이런 이야기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처음 들었을 때 어떠셨어요. 위로는 엄두도 못 냈죠.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저에겐 너무 힘들고 무겁게 다가왔어요. 상처를 가진 분들의 수업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도 몰랐죠. 그림을 그리면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겠다 싶어 미술 수업을 시작했고, 그게 미술 치료가 된 거예요. 초기에는 미술 치료에 관심도 없었고 할 줄도 몰랐어요. 아마도 할머니들의 충격적인 이야기들 때문에 미술 치료에 관심을 갖게 됐던 것 같아요. 상처를 가진 할머니들에게 다른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는데, 우연히 미술잡지에서 미술 치료 기사를 발견했죠. 눈이 번쩍 뜨였어요. 내가 찾고 있던 게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림을 통한 치유, 그리고 감동의 순간 Q. 『못다 핀 꽃』에는 통한의 역사를 겪어낸 당사자들의 구술과 치유 과정이 기록돼 있어요.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는 이유죠. 할머니들 그림은 어느 정도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그림에 담긴 의미와 이야기는 저만 알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그림이 그려지게 된 과정을 세상에 알리고 마침표를 찍는 게 미술 수업의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2015년 박근혜 정부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뤄졌고, 여전히 잘못을 덮으려고만 하는 일본정부의 태도에 너무 화가 나서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미술 수업의 마무리를 결심하며 책을 내게 됐죠. 피해자들이 평생 어떤 고통에 시달렸는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내야 했는지 기록해놓은 이 책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부정하는 이들에게 가장 아픈 역사적 증거가 되기를 바라요. Q. 책 작업을 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요. 어떠한 삶이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런데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산 사람들 중 하나인 할머니들이 그림을 통해 치유를 경험했어요. 할머니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변화한 과정들을 보며 제가 느꼈던 감동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죠. 할머니들이 자신의 상처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싸워냈던 용기와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되찾으려 했던 노력들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그 아름다운 분투기를 보고 독자분들도 인간의 자생적인 힘을 믿으면 좋겠어요. Q. 20년 전이면 미술 치료에 대한 개념이 생소하던 때잖아요. 어떤 점이 힘들고 또 보람됐나요. 할머니들의 상처를 그림으로 이끌어야 할 때가 가장 어려웠어요. 미술 치료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고, 너무 어리기도 했고요. 할머니들의 마음이 다칠까봐 쉽게 도전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죠. 미술 치료라고는 했지만 이게 결국 공동 작업이에요. 저는 살짝 던지기만 했거든요. 근데 할머니들이 그걸 받아서 미술 치료 첫 날부터 너무 잘 해주셨어요.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셨죠. 그걸 보고 정말 기뻤어요. 길을 헤매다가 지름길을 발견한 기분이었어요. Q.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작가님과 할머니들 간에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선생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믿어주셨어요. 그림에 한해서는 어미 오리와 아기 오리 같은 관계였죠(웃음). Q. 할머니들과의 수업 중 가장 마음에 남는 수업이 있다면요? 결정적인 순간이 여러 번 있었어요. 미술 수업의 기초인 데생 단계를 지나 자신의 마음을 끄집어내는 심상 표현 수업을 할 때였어요. 이용수 할머니가 그림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셨죠. <복잡한 세상살이>를 시작으로 의미 있는 그림들이 나왔어요. 소녀가 붉은 악귀에 잡혀 있는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을 봤을 때도 충격이었고, 본격적으로 상처를 드러낸 <빼앗긴 순정>을 보여주실 땐 소름이 돋았어요. 그 그림을 보고 자극을 받은 김순덕 할머니가 쏟아낸 <못다 핀 꽃>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대표적인 그림이 됐어요. 그리고 이용녀 할머니의 <끌려가는 조선처녀>까지…. 할머니들이 저에게 그림들을 보여주실 때마다 감동과 보람을 느꼈어요. Q. 할머니들이 그런 그림을 그리실 거라곤 예상하지 못하셨겠죠. 전혀 못 했어요. 운이 좋게도 할머니들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이 되어 점점 발전해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심상 표현 수업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상처를 표현할 때는 붓을 스케치북에 쿡쿡쿡 찍으셨어요. 가 닿을 수 없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청춘은 무지개로 표현하셨죠. 그다음부터 할머니들은 ‘상처’하면 무조건 붓을 스케치북에 쿡쿡 찍는 거예요. 유행이 된 거죠. 무지개도 그렇고요. Q. 『못다 핀 꽃』에는 할머니들의 그림뿐만 아니라 수업에 참여하던 할머니들의 모습을 재현해낸 작가님의 삽화가 함께 실렸어요. 삽화는 제가 할머니들께 받은 믿음과 사랑을 그림으로 기억하고 추모하는 작업이었어요. 미술 수업을 책으로 엮으면서 할머니들과 저의 우정을 공동 작업으로 표현하고 싶었죠. 제가 할머니들께 드리는 ‘헌화’라고 할까요? 강덕경 할머니의 <빼앗긴 순정>과 <책임자를 처벌하라>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벚나무가 나오는데 두 그림을 합해서 나무들 사이에 소녀와 할머니를 세우고 상처로 고통 받았던 강덕경 할머니의 일생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 <끌려감>에는 수많은 여성들과 군인들을 함께 넣음으로써 이것이 단순히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 인권 유린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때 그 곳에서>는 김순덕 할머니가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을 보고 자극을 받아서 ‘나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하고 그린 첫 번째 그림이에요. 처음으로 당하던 날 줄 서 있던 일본군을 그리셨는데 꼭 어린애 같아 보이거든요. 아이러니죠. 끔찍한 상황을 할머니의 선으로 나타내면 우화처럼 변해요. 그 간극이 문제를 객관화시켜서 보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Q. 할머니들에게는 미술 수업이 낯설었던 만큼 작가님 의도대로 수업을 진행하지 못한 적도 많았을 텐데,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미술 수업이 전시를 위한 것이었다거나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시작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조급함이나 목표가 없었어요. 그래서 즐길 수 있었죠. 힘들게 살아온 할머니들이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을 이용한 건, 제가 그림 그리는 재주밖에 없었기 때문이에요(웃음). 그런데 할머니들이 떠나신 후에도 그림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으니 그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Q. 할머니들과의 수업이 작가님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겠죠. 할머니들을 통해 배우게 된 점이 있다면요? 제가 할머니들을 처음 만났을 때 할머니들은 주로 누워서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셨어요. 농담이긴 하지만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사셨는데, 그러던 분들이 그림을 배우면서 당신들도 모르는 사이 달라지셨어요. 서서히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셨던 것 같아요. 창작의 기쁨과 자아실현의 순간을 경험하면서 생명력을 회복하게 되셨다고 생각해요. 폐암으로 쓰러지셨던 강덕경 할머니가 마지막 병상에서 저에게 남긴 말씀이 마음에 여전히 남아 있어요. “이제 막 재미있게 살려는데… 미술 선생, 내가 2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는데…” 나이 어린 선생인 저에게 할머니 제자가 생을 마감하며 남긴 가장 큰 선물이에요. 기억해야 할 이름과 이야기들 Q. 『못다 핀 꽃』이 올해 5월 일본에서 출간됐어요. 일본에 처음 할머니들을 모시고 갔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일본에도 참 좋은 분들이 많다는 걸 알았거든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 내 양심적인 시민분들을 만나고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봤어요. 일본 사회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사실, 일본 내에 왜곡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도 알게 됐죠. 그리고 이 일에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저는 이 책을 통해 일본 독자들이 할머니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길 바라요. 전쟁의 폭력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삶이었지만, 다시 한 번 가슴을 뛰게 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까요. Q.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14명밖에 남지 않은 현재, 지금의 독자들에게 『못다 핀 꽃』이 어떻게 읽히길 바라나요. 할머니들을 상처 있는 분들로만 생각하거나 ‘위안부’ 문제를 지나간 옛이야기로 여기는 경우가 있잖아요. 근데 그러지 말고, 한 개인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그분들에게 공감했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인생을 걸고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힌 그 순간부터 현재까지 당차게 삶을 살아낸 할머니들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해요. 할머니들은 상처받은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삶으로써 모범을 보여주셨어요. 할머니들의 마음에 항상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못다 핀 꽃』 일본어판 출판을 계기로 일본 독자들과 만남이 이루어질 것 같아요. 책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만남이 두 나라의 얽힌 매듭을 푸는 단초로 발전해 나가길 바랍니다. 만약 제게도 역할이 주어진다면 기쁘게 동참하려 해요. Credit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이경신 작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6월 9일 수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로컬스티치 서교2호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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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소중한 우리 할머니, 박필근 - ‘시간과 기억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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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결>은 202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박필근’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경북지역의 유일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로 알려지는 그는, 일본군에 의해 16세 당시 강제로 끌려가 공장에서 위안소로 옮겨져 2차례의 탈출 시도 끝에 겨우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포항의 작은 집에서 포항여성회를 비롯한 지역의 많은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박필근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지역 창작자들이 함께 모여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을 만들어 그의 삶을 알리기도 했었죠. 이렇게 역사는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를 넘어 단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박필근과 또다른 많은 박필근들. 그 모든 소중한 이름을 우리가 계속해서 불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2021 기림의 날 특집] 박필근을 만나다 1. [논평] 박필근을 기억하다 2. [포토스토리] 사진으로 만나는 박필근 3. [에세이] 소중한 우리 할머니, 박필근 - ‘시간과 기억을 잇다’ 4.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창작판소리 ‘박필근뎐’과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노트 전화벨이 울린다. 회의 중이라 통화가 어렵다. 길게 울리던 전화벨이 잠시 조용해진다. 그리고 다시 울리기를 반복한다. 조용히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는다. “회장댁인교? 심심어가 전화 했니더. 마카 잘 있능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박필근 할머니의 목소리. “할맹교? 밥은 잡샀능교? 예에 우리는 잘 있니더! 할매는 어디 아픈 데 없능교?” 할머니와 나만의 비밀병기, 경상도 사람들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할머니와 한참 통화를 하다 보면 정겨운 사투리가 전화기 너머 자유롭게 유영한다. 올해 연세가 94세이신 우리 할머니. 박필근 할머니. 한 달에 한 번 찾아뵙는 것이 전부지만, 그마저도 바쁘면 몇 달 만에 찾아뵙기도 하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늘 회장댁 회장댁 하면서 기다리신다. 할머니와의 인연은 여성회 회장을 맡게 된 2018년부터 시작됐다. 두 달에 한 번씩 할머니를 찾아뵙다가, 할머니 연세도 있으시니 활동가들이 돌아가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찾아뵙고 생필품을 사다 드리며 안부 인사를 드리고 있다. 할머니 댁을 찾을 때 준비하는 생필품 중엔 꼭 들어가야 할 몇 가지가 있다. 만약 이를 빼먹거나 잘못 사 가는 날엔 할머니의 서운함이 가득한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밤에 잘 못 주무시고 눈물이 자꾸 나 슬플 때마다 드시는 우황청심환과 붙이는 파스 작은 것은 꼭 사야 한다. 큰 것으로 잘못 사 갔다가 어찌나 서운해 하시던지. 그 다음부터는 붙이는 파스 작은 것, 요구르트와 율무차, 홍삼 사탕과 라면, 국수, 소고기 국거리 등을 꼭 챙긴다. 그중에서도 절대 빠지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쌀과 찹쌀이다. 쌀은 20kg, 찹쌀은 10kg을 한 달에 한 번씩 꼭 사다 드린다. 혼자 사시고 많이 드시지도 않는데 쌀이나 찹쌀을 저만큼 드시나? 싶겠지만 그건 절대 타협이 불가능한 물품이다. 어느 날 아드님으로부터 “어무이가 하도 배를 곯아가 흰쌀에 원한이 졌는기라요. 그래가 저래 쌀을 받아 놓골랑은 새 쌀 안 드시고 묵은쌀을 또 안 드시능교?”라는 말씀을 듣고 박필근 할머니에게 쌀은 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할머니 댁에 갈 땐 쌀을 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이 쌀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있었다. “요새도요, 흰쌀밥만 보믄, 우리 아~들이(자식들이) ‘어매요, 우리는 은제 흰쌀밥 한번 먹어 보능교?’라는 말이 귀에 생생하니더”라며 그 말씀을 하실 때마다 눈물을 훔치시곤 한다. 결혼 후에 남편 죽고, 어린 딸 다섯을 다 잃고 할머니 말에 따르면 겨우 둘이 붙들었다는 아들, 딸과 지독하게도 가난하게 사신 할머니. 배급받은 밀가루는 한 되 딱 맞춰 야속하게 주었다고 한다. 그것으로 죽을 쒀 건더기 있는 밀가루 죽은 아들, 딸에게 나눠주고 할머니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빈 그릇에 조금 남아있는 밀가루 죽에 맹물 넣어 그걸로 배를 채웠다고 하셨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 지나가는 말로 “아이고 그때부터 배급받았는데, 아직도 배급 받니더”라며 평상을 훔치며 무심히 하셨던 그 말씀이 가끔 그림처럼 떠오르곤 한다. 그때 할머니의 표정, 할머니의 한숨, 할머니의 기분 같은 게 그대로 전이되는 것 같아 할머니의 가난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그 말이 메아리가 되어 가슴에 닿았던 것 같다. 처음에 할머니 구술생애사와 판소리 ‘박필근뎐’을 준비하기로 했던 이유는 할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존재했던 할머니의 역사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물론 많은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고, 이야기를 구술하는 과정에서 할머니에게 ‘위안부’로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할머니도 연구자인 나도 힘들었다. 구술생애사를 시작한 후 할머니에게서 위안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기 쉽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입을 다물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모르니더. 기억 안 나니더”라고 말씀을 하시면 그날은 더 이상 이야기를 듣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한참을 서먹서먹하게 있다가 다시 1시간 넘는 길을 돌아와야만 했다. 그 당시 진행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도움을 주셨던 분이 바로 아드님이시다. 대구에 거주하시지만, 일요일마다 할머니 댁에 내려와 어머니의 필요를 살피는 효자시다. 처음 아드님을 만났을 때 도와드리겠다고 흔쾌히 허락하시면서 “‘위안부’로 끌려간 게 엄마 잘못이 아닌데 일본에서도 저렇게 망언을 하고 있고, 이제는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시면서 당신에게도 쉽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주셨다. 아드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가지고 할머니에게 질문하면 그나마 할머니께서 짧게나마 이야기를 전해주셔서 어렵게나마 구술생애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할머니의 아드님이신 남명식 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할머니는 지금도 고향 마을인 포항시 죽장면에 혼자 살고 계신다. 죽장면은 포항 시내에서도 1시간 이상 떨어진 산골 마을이지만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곳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산 좋고 물 좋은 포항시 죽장면 월평리의 유복한 가정에서 9남매 중에 여덟째로 태어났다. 귀한 막내딸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부유한 집에서 살았으며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나는 찰떡만 묵았니더” “집에 머슴도 둘이나 있었니더”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당시에 찰떡을 먹고 머슴이 두 명이나 있었다는 게 유복함의 상징으로 충분한 것 같다. 지금도 죽장까지 가는 대중교통이 많지 않은데 80~90년 전 상황은 더 열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산골 오지 마을에서 16살 때까지 차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박필근 할머니. 어느 날 부모님이 조 밭을 매러 간 사이 둑담(돌담의 방언) 밑에 앉아 있는데 일본 순사가 탄 트럭이 와서 할머니를 일본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며 태워 갔다고 한다. 영문도 모른 채 말이다. 그리고 트럭은 경주 안강까지 갔고, 할머니는 거기서 기차를 타고 부산을 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계셨다. 부산에서 다시 일본 가는 배를 타고 할머니는 위안소에 강제로 끌려간 것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남부러울 것 없었던 집에서 할머니는 하루아침에 위안소라는 공간으로 끌려가 운명이 뒤바뀌었다. 지금도 이 억울한 상황을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위안부’피해자를 향한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더 가슴 아픈 것은 ‘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와 국내 일부 학자들의 망언과 왜곡을 할머니가 뉴스를 통해 보고 계신다는 점이다. 어느 날 무심히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안 그래도 뉴스에서 그라데요. ‘위안부’가 자기가 원해가 갔다꼬? 아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그라소”라고 말씀하셨을 때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제발 할머니 살아 계실 때 일본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위안부’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랄 뿐이다. 제발 말이다. 또 한 가지, 할머니가 뉴스를 보고 계시니 지금부터는 ‘위안부’에 대한 망언과 왜곡을 하지 말기 바란다. 이것은 할머니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고다. 제발 말이다. 할머니는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갔지만, 그 지옥 같은 ‘위안소’를 당신의 힘으로 탈출한 용감한 분이시다. “여기서 죽으나, 나가 죽으나 매한가지”라며 고향 땅에서 당신을 기다리실 어매를 만나기 위해 죽을 각오로 탈출을 시도했고, 첫 번째 탈출에선 일본 군인에게 잡혀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고 한다. 그 상처는 아직도 할머니 다리에 그대로 움푹 패 남아있다. 한 번씩 할머니는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다리야”라며 깊은 상처가 남은 다리를 내 앞에 두시고, 나는 뼈밖에 없는 앙상한 다리를 아무 소리 없이 주물러 드린다. “할매요. 다리가 마이 아픈교?” 죽을 각오로 탈출한 위안소, 그리고 두 번째 탈출에서 기적처럼 만난 일본에 온 한국인 부부 은인들. 할머니는 그분들 덕분에 부산까지 오실 수 있었다. 배표뿐만 아니라 새 옷에 새 신발까지 사주며 탈출시켜주신 그 부부에게 할머니가 가진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 연세가 아흔이 넘으셨으니 “그분들은 이미 다 돌아가셨을 텐데, 살아생전 그 은혜를 못 갚았다”며 많이 아쉬워하신다. 할머니를 다시 살게 하신 고마우신 분들, 참 고맙습니다. 기적처럼 다시 밟은 한국, 그리고 부산에서 보름을 걸어 도착한 고향 마을. 당신을 기다렸던 어머니는 병이 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며, 어머니의 죽음이 모두 다 당신 탓이라며 한탄하시는 모습이 참 슬프기도 하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에게도 어머니는 늘 그리운 분이시구나 싶었다. “우리 어매, 우리 어매”를 부르는 할머니 모습에선 열여섯 소녀 필근이 지금도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할머니는 19살에 결혼을 하셨지만 결혼 후에 남편도 일찍 돌아가시고 자식 다섯도 여섯 살이 되기 전에 잃고 겨우 셋째 딸과 일곱째인 막내아들이 살았는데 참 찢어지게도 가난했다고 한다. 봄에는 산에서 나물 캐고 여름, 가을에는 남의 집 농사일을 했는데, 배고픈 막내아들을 열 살 딸이 업고 와 젖 먹이고 다시 돌려보내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겨울에는 땔감에 쓸 나무를 하러 산에 가셨다고 하는데, 할머니 표현대로라면 “내가 안 간 산이 없고, 안 다닌 곳이 없니더. 안 해본 일이 없니더. 장에 한번 못 가보고 그래 그래 살았니더”라며 지독한 가난은 할머니의 한숨이 되어 메아리치곤 한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남의 손 빌리지 않고 그렇게 사셨던 우리 할머니. 지금도 할머니 댁에 가보면 모든 것이 알뜰하고 정갈하게 정돈돼 있다. 마당 한편에 근사한 정원도 마련돼 있고, 도랑물을 끌어와 비닐하우스에 물을 주며 채소도 키우시고, 잘 키운 상추나 보드라운 열무는 다 뜯어서 우리 손에 쥐어 주신다. 더 줄 게 없는지 살피시는 정이 많은 우리 할머니. 올해는 흙집 허문 자리에 토마토와 고구마 농사를 지으시던데 다음에 가면 맛있는 고구마 삶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터이다. 오랜만에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는 우리가 출발하기 전부터 기다리신다고 한다. 평상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언제쯤 오는가 기다리실 할머니를 생각해 조금이라도 덜 기다리시게 하려고 출발 전화를 좀 늦게 드리기도 한다. 그렇게 극적인 상봉을 한 후에 헤어질 때면 할머니는 유모차를 끌고 와 우리를 길게 길게 배웅하신다. “가세이~~~ 또 오세이~~~~” 잘 가고 또 오라는 할머니의 목소리엔 금세 물기가 가득 고이곤 한다. 한참을 손을 흔들고 계신 할머니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오랫동안 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친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살아서 할머니들을 뵈면 다 우리 할매 같아 좋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박필근 할머니는 우리 친할머니를 참 많이도 닮으셨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더 친근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가끔 눈물 훔치며 신세 한탄을 하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긴급 처방을 내린다. “할매요. 와 멋지니데이!!”라고 화제 전환을 하며 ‘할머니 최고’라고 말하면 눈물을 흘리시다가도 금세 어깨가 으쓱해지시는 우리 할머니 박필근 할머니! 회장댁 회장댁 하며 나를 찾아주신 그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그동안 참 감사했다. 무엇보다 박필근 할머니께서 계속 건강하셔서 할머니 좋아하시는 쌀하고 파스, 우황청심환, 홍삼사탕 많이 사서 굽이굽이 죽장 골짜기를 넘어 우리를 기다리실 할머니 댁을 오랫동안 찾아가고 싶다. “할매요!! 우리 왔니데이~~~!!” 2021년 8월 기림일을 앞둔 새벽 회장댁 드림 기사 게재일: 2021.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