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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상처와 함께 열리는 새로운 정치 지평 - <2022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 참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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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6-27일 이틀에 걸쳐서 <2022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주관으로 개최되었다.[1]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된 이 행사의 주제는 ‘전쟁, 식민주의와 여성폭력’으로, 러시아의 여성인권운동가 나스차 크라실니코바의 특별 기조연설 「우크라이나 전쟁과 여성폭력」으로 시작되었다. 나스차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 지역에서 자행되고 있는 여성 강간을 이야기하며, 전시 성폭력은 민간인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군사 기술이라는 점을 일깨우고 전쟁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후 세계 각국의 인권운동가, 연구자,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전시 성폭력과 여성인권 침해에 대항하는 다양한 논의를 펼쳤다. 행사를 지켜보면서 일본군‘위안부’운동은 더 이상 한일관계에 국한된 민족주의적 의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일본군‘위안부’는 전쟁의 가부장성을 비판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트랜스내셔널 페미니즘의 주제이자, 여전히 종식되지 않는 여성 성폭력 문제와 닿아있는 표상이었다. 이렇듯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흥미롭고 문제적인 기획이라는 점에 주목하며,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수치심으로부터 피해자를 해방시키기 개인적으로는 행사 이튿날에 이루어진 방글라데시의 여성작가 샤힌 아크타르와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인 전승희의 대담에 관심이 컸다. 샤힌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시기에 파킨스탄 군에 납치당해 성노예가 되었던 여성의 수난과 성장을 탁월하게 그린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The Search)』의 작가로 초대되었다. 샤힌은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던 중, 사라예보 전쟁 아동 박물관(War Childhood Museum)에서 자신을 사로잡은, 전쟁 성폭력으로 태어난 어린이의 증언을 들려주었다. 샤힌의 목소리로 듣는 “내 전체 인생은 가해자 한 사람의 이름으로 점철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수치심은 내 몫이 되었다”는 어린이의 발언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자기 존재에 대한 수치심을 겪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부조리한 사태임이 다시금 환기되었다. 자신을 짓밟은 이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사랑으로 길러야 하는 여성과, 자기 존재를 부적절하다고 보는 이들 속에서 살아갈 피해자의 삶이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최근에 읽은 책 『여성의 수치심』(에리카 L. 존슨·퍼트리샤 모런 엮음, 손희정·김하현 옮김, 글항아리, 2022)이 떠올랐다. 이 책의 저자들은 수치심은 언어로 표현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수치심이란 개인적인 경험이 되기 쉬운, 완전히 혼자서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수치스러운 생각, 행동, 감정에 대해 온전히 홀로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스스로를 결함 있고 부적절한 사람으로 느끼고 자기혐오에 빠지는 데 적어도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간과되기 쉽다. 가령 성폭력이 성적 수치심을 강요함으로써 피해자의 입을 막는 과정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수치심은 그 어떤 감정들보다 개인이 타인과 맺는 관계의 문제다. 일본군‘위안부’야말로 강요된 수치심의 폭력성을 증거하는 존재다. 일본군‘위안부’는 당사자의 증언이 있기 전까지 소문 속에서 떠돌던 흐릿한 존재였다. 피해자가 수치심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침묵을 깨야 하지만, 수치를 드러내고 표현할수록 더 많은 치욕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증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비로소 어렵게 증언이 이루어졌지만,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고 피해자는 수치심의 폭력 속에 여전히 갇혀 있다. 연구자로서 학술 발표들이 다소 특별하게 다가왔는데, 그 이유는 전시 성폭력은 단지 학문적 주제가 아니라 연구자가 온몸으로 상처 입으며 사건의 당사자와 관계 맺고 이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지평을 여는 의미심장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혼자만의 굴욕 속에 내던져지지 않도록 연구자, 활동가 그리고 양심적 시민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수치심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려면 전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정동정치로서 수치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수치심’은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길들이고 통제하는 내밀한 테크놀로지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인간의 인간됨을 심문하는, 즉 가장 인간다운 자가 인간 혹은 인간성에 대한 이상의 불가능성과 마주할 때 느끼는 윤리 감정일 것이다. 1부 ‘폭력의 세계, 공존의 존재론’에서 이루어진 도미야마 이치로의 발표 「폭력, 이후」는 사건 바깥의 사람들이 피해자의 증언을 나누어 갖는 일의 가치와 그 방안을 모색하게 해주는 글이었다. 도미야마는 증언이나 애도 논의에서 그간 자주 거론되었던 피해자가 “말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피해 사건의 당사자들은 자주 “결코 폭력에 대한 기억을 말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 말은 폭력에 의한 경험이 당사자에게 남긴 트라우마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도미야마는 “말할 수 없다”는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 같은 세계에 존재하고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규범이나 제도가 계속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자료집, 30쪽)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폭력은 폭력적 행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폭력 이후 우리들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비단 과거의 피해자에게만 연관되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는 폭력에 노출된 모든 사람과 관련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말할 수 없다”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하면 새로운 정치적 지평이 열린다. 이러한 발견은 현재에 대한 환상을 박살냄으로써 우리를 상처 입히는 파상적 경험이지만, 사건의 당사자와 사건 바깥의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폭력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쳐 온 것을 부끄러움과 함께 아는 것”(자료집, 36쪽)으로 표현된 상처입기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여는 정동적 자원이 될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는 단지 오욕된 역사가 남긴 특수한 사건이 아니고, 현재에도 여전히 발생하는 젠더폭력의 한 양상임을 깨닫는 것은, 폭력 이후를 피해자와 사건 바깥의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길을 열 수 있다. 이번 행사와 연계된 온라인영화제에서 상영되고, 또 2부 ‘침묵과 몸짓: 증언의 영화적 번역’에서도 논의된 박문칠 감독의 〈보드랍게〉(2022)는 제국/식민의 기억 속에 갇혀 있던 일본군‘위안부’를 오늘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지평 속에서 재의미화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김순악이 열여섯의 나이로 만주로 끌려가 일본군‘위안부’가 되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한 기지촌에서 “양공주”로, 집창촌 포주로, 때로 식모를 전전해온 생애사를 이야기한다. 동시에 오늘날 미투 운동의 고발 주체들에게 김순악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내레이터 역할을 맡김으로써 여성 성폭력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일본군‘위안부’ - 전쟁과 폭력의 세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폴리스의 창설자 앞서도 말했듯이 이번 국제 컨퍼런스를 통해 일본군‘위안부’는 한국의 성공한 시민사회 운동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글로벌한 참조점”(자료집, 4쪽)으로서 트랜스내셔널 페미니즘 운동을 열어가는 주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군‘위안부’운동은 그간 한국에 국한되지 않고 필리핀, 중국 등 아시아 각 지역의 피해자에 대한 논의로 이어져 아시아 페미니즘 운동으로서의 가능성마저 보여주었다. 한국의 일본군‘위안부’운동은 그간 탈식민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그 역할을 다 했으므로, 이제는 여성혐오와 백래시로 나타나는 전 세계의 보수화 흐름에 맞서 페미니즘 운동의 새로운 어젠다로 도약해 갈 필요가 있다. 일본군‘위안부’가 트랜스내셔널 페미니즘의 맥락 속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4부 ‘(포스트)냉전과 ‘피해자다움’’에서 발표된 김현경의 「냉전과 일본군‘위안부’: 배봉기의 잊혀진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이 포착한 장면은 지극히 문제적이다. 1914년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1944년 오키나와의 ‘위안부’가 된 배봉기는 1975년 재류특별허가를 신청하기 위해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식민주의와 냉전, 국가 및 남성에 의해 여성폭력을 응집한 하나의 육체”(자료집, 147)라고 할 수 있는 배봉기의 증언은 국가 간 틈바구니에서 유령화되었다. 전후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형성 과정에서 공산주의의 방파제로 자리잡은 일본은 전쟁 범죄 책임을 부정함으로써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에 안착했고, 박정희 정권 역시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파트너를 자처하며 배봉기의 존재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1991년 사망한 후에도 배봉기는 한동안 귀국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오키나와 민단과 조총련이 상이한 이념을 내세워 자신들이 배봉기의 삶과 경험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며 유골을 두고 소유권 분쟁을 벌인 것이다. 배봉기의 비극적 사례는 일본군‘위안부’가 더 이상 국경이나 문화에 갇히지 않는 트랜스내셔널한 전쟁 기억의 일부가 되어야 하며, 민족의 수치를 환기시키는 표상이 아니라 사회진화론과 약육강식의 논리에 기초해 온 남성 중심적인 근대문명 담론에 균열을 내는 주체여야 함을 보여준다. 이혜령의 「페허, 바다의 기억 – 일본군‘위안부’는 셀 수 있는가」는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 개념과 독일 작가 제발트의 논의를 빌어, 일본군‘위안부’를 “모든 전쟁의 중지와 폭력적 팽창을 추구하는 남근 중심적 세계질서의 파국”(자료집, 54쪽)을 요청하는 존재로 재위치화한다. 이혜령은 김학순에게 증언은 전쟁과 전장을 떠올리며 다시금 죽음의 공포에 노출되는 정동적 체험의 반복이었다고 일깨운다. 그리고 김학순이 본 폐허, 즉 죽음에 대한 당사자의 공포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이들이 유령처럼 배회하는 심연을 상상하라고 말한다. 또한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전에 없던 새로운 공동체 내지 폴리스의 창설자”가 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한다. 3부 ‘[라운드테이블] 지금-여기, 일본군‘위안부’운동’과 6부 ‘[아시아 청년포럼] 여성과 폭력, 아시아 청년의 눈으로 묻고 답하다’는, 국경을 넘어 전쟁과 성차별에 반대하는 새로운 폴리스 만들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단초다. 3부 도로테아 믈라데노바의 「평화의 소녀상과 ‘위안부’ 문제의 독일 현지화」는 독일에서 소녀상 설치를 위한 시민운동이 비교적 성공하게 된 이유를 소개하고 있는 흥미로운 글이다. 발표자에 의하면 소녀상 설치를 주도한 “‘위안부’ 워킹 그룹”은 “종족 간 연합을 통해 국경을 초월하는 탈국가적 또는 초국적 활동”(자료집, 109쪽)을 함으로써 보편주의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폭력을 은폐하는 메커니즘과 성폭력을 조장하는 구조를 폭로하고 독일인들이 성폭력에 대해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급진적 현지화’를 시도했다. 민족이나 국적이 상이한 구성원들은 종족 간 만행의 역사를 수치스러워하며, 페미니즘에서 역사의 실타래를 풀 자원을 발견하고자 했다. 성폭력을 아시아의 야만으로 치부하고 서구인에게 은밀한 우월감을 안겨주는 식으로 소녀상이 전유되지 않고, 현존하는 젠더 폭력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일본군‘위안부’를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라 전쟁과 폭력의 세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폴리스의 창설자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1960-1970년대 군산, 송탄 등 미군 기지촌에서 “양공주”였던 김연자의 자기 서사인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 분 전까지 악을 쓰다』(삼인, 2005)를 읽고 있었던 탓인지 자주 일본군‘위안부’와 “양공주”라는 조롱 섞인 이름으로 불리는 외국군 성매매 여성들이 겹쳐졌다. 김연자가 날마다 죽음을 꿈꾸던 절망의 땅이 바로 나의 고향이었고, 강렬한 기억 하나가 있었던 탓일 듯하다. 오래전 고향에서 관광호텔과 버스터미널 사이에서 미군과 함께 있는 고3 짝꿍과 마주친 적이 있다. 저개발의 공간이 감추지 못한 옹색함과 무질서 속에서 미군과 한국 여성의 조합은 강렬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사라진 탓에 소식이 궁금한 친구였지만 인사조차 건넬 수 없었다. 친구가 나를 외면하게 만든 것은 수치심이었을 것이다. 내가 느낀 것도 종류는 다르지만 약간의 수치심이었다. 이번 국제포럼은 역사 속 여성 피해자들이 강요된 수치심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방의 조건이 무엇이며, 어떤 활동들이 필요한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일본군‘위안부’만이 아니라 “양공주”까지로 상상이 미치면, 식민과 냉전에 대한 여성주의 연구는 이제 겨우 한 걸음을 뗀 것처럼 보인다. 할 일이 많다는 것은 다행일까? 슬픔일까? 앞으로도 ‘여성인권과 평화’에 대해 이처럼 큰 질문을 던지는 뜻깊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각주 ^ 한국어, 영어, 일어로 제작된 <2022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자료집은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발간자료 게시판에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https://www.stop.or.kr/multicms/multiCmsUsrList.do?category=pd&srch_menu_nix=nFog4NJ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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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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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상영작 이야기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하는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한다. 2024년 8월 14일부터 8월 27일까지 퍼플레이 온라인 극장에서 함께할 수 있는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는 '입을 떼다', '귀를 열다' 두 개의 주제로 나누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결을 포착해 담아낸 국내외 영화를 소개한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을 비롯해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작품도 여럿 포함돼 있다. 웹진 <결>은 영화제 관련 소식과 함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컨텐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 (1)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1)_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2)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2)_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3)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3)_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4)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4)_ 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2024 기림의 날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의 첫 상영작인 <오키나와의 할머니>.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은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하기 12년 전인 1979년 일본에서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여러 해에 걸친 자료 조사에 이어 마침내 배봉기 할머니를 만난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은 '누군가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말을 남겨 놓았다. '최초'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가 나오기까지 감독의 심경을 쫓아가본다. 남자인 내가 여성의 시점으로 이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애초에 무리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별로 다뤄지지 않았던 침략당한 측의 가난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여성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기록자의 의무가 아닐까. 1979년 <오키나와의 할머니>를 완성한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이 직접 작성한 '감독 노트' 중 5월 3일에 남긴 기록의 일부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배봉기 씨를 처음 취재하기 시작한 1977년부터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야마타니 감독의 마음 한 켠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것은 자신이 이 기록을 남길 '적격자'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내면의 끊임없는 질문이었다. 그는 남성인 자신보다는 같은 민족의 여성이 이 기록을 받아 적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회의감에 내내 휩싸였으나, 그럼에도 끝끝내 카메라를 놓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기록자로서의 의무감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야마타니 감독은 "언젠가 나타날 여성 기록자에게 바통을 넘겨줄 생각"으로 <오키나와의 할머니>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서 증언하는 이가 배봉기 씨 혼자일지라도 그녀의 말 뒤에 수많은 여성들이 있음을 상기하기를, 영화를 통해 '위안부'들의 존재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며 첫 상영 소감을 짧게 남겼다. 그로부터 40여 년 뒤인 2016년 , <오키나와의 할머니>가 한국DMZ영화제에 초대받아 한국에서 상영되었다. 영화는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 작품을 본 재일한국인 박수남 감독이 야마타니 감독에게 연락을 하게 되면서 두 감독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그리고 2018년 12월 일본 업링크 시부야에서 <오키나와의 할머니>와 박수남 감독의 <침묵>(2016)이 함께 상영되었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넘치는 관객들을 그대로 돌려보낸 것이 미안하고 아쉬워 3개월 뒤 같은 장소에서 앵콜 상영까지 진행하였다.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야마타니 감독은 궁금했다. 40년 가까이 지난 '낡은 영화'에 왜 이다지 관객들이 모이는가! 이 '서툰' 영화의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2018년 <침묵>과 동시상영을 했던 당시, 야마타니 감독이 남긴 소회의 글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감독 나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첫째, 감독(나) 자신이 '위안부'였던 배봉기 할머니의 말에 넘어가, 미소라 히바리의 '사과의 추억'을 음치인 목소리로 열창하는 것이다. 배 할머니는 전후, 오키나와의 술집에서 일하며 남자를 다루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 장면에서는 조용했던 관객석이 폭소로 가득 찼다. 하지만 나는 부끄럽다. '위안부'를 일면적인 피해자로 '섹슈얼라이즈'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위안부'라는 존재는 인간적으로 더 복잡한 면을 지니고 있다. 둘째, 배 할머니는 누구에게나 "일본이 이기기를 바랐어요. 네, 저는 이길 줄 알았어요"라고 태연하게 단언한다. '전 조선인 위안부'가 자신 있게 단언하면, 녹음하고 있던 내가 주눅이 들 정도였다. 내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그대로 동시녹음 마이크에 담겨 있다. 전쟁 전,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내선일체'가 배 할머니에게는 전후에도 살아있다. 배 할머니는 철저한 '황국 할머니'였다. 일본이 36년간 조선반도에서 무엇을 했는지, 배 할머니가 그 생생한 증인이다. 셋째, 영화는 공개 직후, 전국적으로 반향이 있었고, 배 할머니에게 많은 성금이 모였다. 나는 즉시 그 성금을 가지고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할머니가 처음 산 것은 금반지(조선에서는 결혼의 상징)였다. 그리고 나를 집에서 준비한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었고, 식사 후 "맛있었네, 부부 같아."라고 갑자기 고백하는가 하면,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했던 소녀 시절을 떠올리며 울기도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야마타니 감독이 생각하기에 일본군'위안부'라는 존재가 가진 인간적인 복잡성이야말로 <오키나와의 할머니>에 깃들어 있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었다. 굳어진 선입견을 버리고, 치밀하고 복잡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힘이 이 영화에 있었다. 그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 그것이 <오키나와의 할머니>가 이토록 오랫동안, 지금도 여전히 상영되는 의미이다. 관련 상영작품 🎬 오키나와의 할머니 | 일본 | 야마타니 데쓰오 | 1979년 상영 기간 : 8월 14일(수) ~ 8월 20일(화)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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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증언, 공동의 목소리 - AI 인터랙티브 증언콘텐츠 전시 〈증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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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과의 우연한 조우 한국여성인권진흥원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중앙대학교 HK+접경인문학연구단이 주관한 AI 인터랙티브 증언콘텐츠 전시 〈증언을 만나다〉가 지난 10월 27일부터 11월 7일까지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열렸다. 인터랙티브 증언콘텐츠가 중심이긴 하지만, 이번 전시는 기술적 상연을 넘어 증언을 한다는 것, 그리고 증언 이후 증언을 마주하는 장에 관한 다양한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전시였다. 특히 “증언을 만나다”는 국문명보다 “Encountering Testimonies”라는 영문명이 전시의 성격을 보다 잘 보여주는데, ‘증언들’과의 예상치 못한 마주침, 하나가 아닌 복수의 증언들과의 마주침의 계기들을 설명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증언은 하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닌 마주치는 것이다. 이 마주침이 가능한 이유는 증언이 이미 행해졌고 그로 인해 그 자리에 던져졌기 때문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시 서문은 증언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증언은 이들의 기억뿐 아니라, 현재 삶의 모습, 방향, 의지를 드러내는 ‘말’ 모두를 의미한다. 이 말은 발화되면서 증언자를 떠나, 그 자체의 생명을 지니며 퍼져나갔다.” 여기에서 행해진 증언은 더 이상 피해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닌 피해자를 떠난 말들이다. 도미야마 이치로[1]가 지적했듯이 ‘증언’이 대신 말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리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모순적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행위의 소유격과 행해진 말의 소유격의 비일치에서 증언을 둘러싼 담론장의 곤경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증언의 발화 행위가 필연적으로 청자를 소환한다는 점에서 증언은 누구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닌 집단의 발화 행위가 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는 나치 친위대(SS) 군인들의 ‘청자 없음’에 대한 경고가 생존자들에게 지속적 잔상으로 남아 있음을 지적하며 증언자와 청자의 문제를 연결시킨다. 시몬 비젠탈은 SS 군인들이 냉소적으로 포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면서 즐거워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중략) 설령 몇 가지 증거가 남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너희 중 누군가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너희가 얘기하는 사실들이 믿기에는 너무도 끔찍하다고 할 거야. 연합군의 과장된 선전이라고 할 거고 모든 것을 부인하는 우리를 믿겠지. 너희가 아니라. 라거(강제수용소)의 역사, 그것을 쓰는 것은 바로 우리가 될 거야.” 희한하게도 이와 똑같은 생각(“우리가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믿어주지 않을 거야”)이 한밤의 꿈의 형태로 포로들의 절망의 수면 위로 떠오르곤 했다.[2] 발화의 유효성은 청자에게 도달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염려를 동반한다. 증언은 늘 청자를 염두에 둔 말하기라는 점에서 공동의 발화를 요청한다. 또한 소영현의 지적처럼 증언이 이루어지는 구술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증언이 “‘말하는’/‘듣는’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집합적 목소리”라는 점은 분명하다.[3] 그렇다면 이 집합적, 공동의 목소리는 누구에 의해 누구에게 어떻게 도달 가능한 목소리인가? 이어 말하기 이번 전시는 증언집과 같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의 증언 내용을 상세하게 전달하는 전시는 아니다. 그것보다 이미 행해진 증언이 다른 시기와 형식 속에 놓였을 때의 맥락과 수용에 대해 고민해보는 전시다. 전시는 크게 네 개의 파트로 이루어졌다. 인트로 영상과 정정엽 작가의 회화 및 사진 작업, AI 인터렉티브 콘텐츠, 그리고 최경준 감독의 미디어아트 작업이다. 관람순서를 바꿔볼 수도 있겠지만, 관람객이 많지 않다면 일직선으로 나열된 각각의 공간을 따라 이동하는 동선이 가장 자연스럽다. 인트로 영상은 피해생존자 고(故) 김학순의 증언을 시작으로, 이후 이어진 증언의 과정과 증언하기의 고통, 그럼에도 증언을 해야 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피해생존자들은 증언하기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알리고 기억하기 위해” 증언을 계속했고, 이를 통해 “지지자들을 만났”으며 “자신도 조금씩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이들은 “피해자, 운동가, 증언자”로 등장하고 “영원한 증언자로 남았다.”[4] 여기에서 증언은 피해생존자를 규정하는 절대적 존재가 된다. 이런 증언의 절대성에 대해 프리모 레비는 ‘운 좋게’ 생존한 이들은 증언하기 위해 살아남은 자들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5] 그리고 증언은 행해진 말뿐만 아니라 신체에 각인된 폭력의 흔적(정정엽, <벚꽃보다 나팔꽃이 더 예쁘다>)이나 삐뚤빼뚤 쓰여진 글씨(최경준의 미디어아트 작업)와 같이 비언어적 형태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음성화되지 않고, 가시화되지 않은 경험도 증언이 될 수 있을까?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소개된 에밀리 정민 윤의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과 박문칠 감독의 다큐멘터리 <보드랍게>는 이런 발화되지 못한 증언과 발화되었으나 가시화되지 못한 증언들에 주목한다. ‘찾은 시(found poetry)’라는 이름을 붙인 에밀리 정민 윤의 작업은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시의 형태로 재구성하면서, 시의 여백과 증언 사이의 함축과 침묵, 공백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보드랍게> 역시 피해생존자 고(故) 김순악의 생전 인터뷰 영상에 기반한 일종의 ‘찾은 장면(found footage)’ 영화인데, 여기에선 왜곡의 우려로 인해 발화되었으나 삭제된 김순악의 귀환 후 삶이 조명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found’ 작업과는 달리 두 작품은 자신들이 발견한 작업물을 재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돌출하기보다 다른 맥락들 속에 ‘원본’을 다시 꺼내듦으로써 일종의 이어말하기와 따라 쓰기로서 ‘증언’의 재독해를 요청한다. 이는 이번 전시에 소개된 다른 작품들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다. ‘증언’을 따라 말하고(최경준, 박문칠의 작업), 관람자가 직접 필사하고(필사테이블), 말해진 언어들을 자신의 표현 수단을 통해 재배치(정정엽, 에밀리 정민 윤의 작업)함으로써 말해진 증언은 다시 생명을 얻는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증언의 청자들에 대해 “청자는 기꺼이 증언을 공유하고, 증언자의 시공간을 확장하도록 돕는 공동의 목격자, 또는 2차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6] 행해진 증언을 따라 말하고, 다시 쓰고, 배치하는 과정에서 청자는 단순히 듣는 사람이 아닌 공동의 목격자가 되고 이를 통해 증언은 다시 공동의 목소리가 된다. 듣기에서 ‘다시’ 묻기로 전시장의 메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AI 인터랙티브 증언 콘텐츠로, AI 기술을 이용해 이용수와 이옥선 두 명의 피해생존자의 사전 녹화된 증언 데이터베이스에서 질문자의 질문에 호응하는 답변을 찾아주는 새로운 형태의 전시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당초 더 이상 증언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예비하며 증언의 지속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처음 이름은 ‘영원한 증언’이다. 그러나 증언의 다양한 경험들이 이야기하듯 증언은 증언자와 증언이 놓인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증언 자체가 변하기도 하고, 해석도 달라진다는 점에서 증언의 영속화는 불가능한 기획에 가깝다. 또한 모니터 화면(screen)을 통한 대화가 어쩌면 증언의 생동성을 가리는 장막(screen)이 되는 것은 아닐지, 또 테크놀로지가 구현할 수 있는 기술적 한계들과 ‘매칭 시스템’이 증언을 평면화하고 모범적 답변들만을 제시하는 일종의 ‘계몽용’ 프로젝트가 되지는 않을지에 대한 우려 역시 관람 전 존재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전시 프로젝트를 마주하는 순간 증언이 놓인 담론장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질문으로 바뀌었다. 전시는 두 개의 스크린으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관람자는 각 스크린을 통해 이용수, 이옥선을 각각 대면하게 된다. 실물 크기로 제작된 초고해상도의 화면은 전시 서문에 쓰인 “본 전시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직접’ 마주하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게 한다. 특히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던 화면 속 인물들이 금세 환하게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할 때는, 관람 전 가지고 있던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비인간성에 대한 경계는 사라지고, 뜻밖의 친밀감마저 형성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인사말을 하고 난 뒤에 무엇을 물어야 할지, 어떤 언어로 물어야 할지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난감함을 덜어주고자 전시에는 예시 질문들이 준비되어 있지만, 이들의 이야기에 익숙한 이들에게 오히려 이 질문지는 지나치게 정형화되어 있고, 그렇다고 정형화된 질문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문들을 만들어내기에 나의 상상력은 빈곤하다. 결국 한참의 고민 끝에 내뱉은 말이 “식사는 하셨어요?”다. 결국 나는 한참이나 근황에 관한 질문만 이어가야 했다. 그 순간, 증언집 4권 이후, 그리고 이용수의 기자회견 이후 제기되었던 ‘청자의 공동체’에 대한 고민과 ‘묻기에서 듣기로’의 사고 전환 과정에서, 정작 듣기란 묻기를 포함하는 것임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 실감형 AI 인터랙티브 증언콘텐츠가 관람자에게 던지는 질문의 유효성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무엇을 들을까가 아닌 무엇을 물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다시 제기하는 것. 잘 물어보기 위해서는 질문자의 끊임없는 고민이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묻기로의 재전환이나 회귀가 아닌 듣기의 과정 안에 묻기를 복원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AI와의 대화가 개방된 장소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루어진다는 점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증언자의 증언이 사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든, 공개된 장소에서 이루어지든, 그것이 공적 장 안에서 다루어지는 한 공적 발화의 성격을 지닌다면, 질문자의 질문은 그동안 공적 장에서 쉽게 가려져 왔다. 질문자의 언어는 매끈하게 정리된 채로 기술되거나, 질문자 자체가 카메라 뒤로 물러나 있거나 하는 과정에서 질문자의 목소리와 얼굴은 지워진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질문자는 개방된 장소에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해야만 한다. 수많은 트라우마적 사건의 증언자들이 고백하듯 증언하기는 증언자에게 고통을 남긴다. 증언함으로써 사건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고통과 더불어 공적 장에서 발화해야 하는 행위 자체가 불러오는 주목의 문제가 여기에 존재한다. 김수진은 대면 인터뷰 상황에서 질문자 역시 트라우마적 전이를 경험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7] 물론 이번 전시 프로젝트에서는 스크린이라는 막이 이러한 전이 경험으로부터 관객을 ‘보호’한다. 그럼에도 관람자는 자신의 언어가 공적 장소에서 ‘얼굴이 공개된 채’ 발화될 때 그 무게와 곤경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앞서 말한 증언콘텐츠가 갖는 단순화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남는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비디오 증언이 법정의 증언이나 자전적 기술과 다른 점은 “멈춤, 침묵의 시간, 불완전한 문장, 빈정거림과 같은 열린 단락의 여지를 남기는 덜 정교한 형태”를 띄기 때문이라고 말한다.[8] 물론 이 말은 비디오 증언 역시 편집이나 자막, 사운드 보정 등을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비디오 증언이 언어가 드러내지 못하는 증언자의 제스처, 표정, 휴지(休止)를 초과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은 분명하다.[9] 그러나 증언자의 침묵과 제스처는 AI 콘텐츠에서는 삭제되거나 제한되고, 침묵을 대신한 기술적 오류들–질문자의 질문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질문에 매칭되는 답이 없거나 하는 오류들–이 증언자가 아닌 관람자의 휴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기술적 오류들은 어느 정도의 개선이 가능하겠지만, 모든 질문에 가능한 모든 대답 영상을 준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AI 증언콘텐츠의 한계를 직시하되, 다른 한편에서 이런 오류는 증언콘텐츠가 생산된 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애당초 모든 것을 증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조망하는 눈은 피해생존자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말해진 것을 어떠한 맥락과 형식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이를 각자의 몽타주로 그려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청자, 공동의 목격자, 공동의 목소리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 도미야마 이치로(2002), 『전장의 기억』, 임성모 역, 이산. ^ 프리모 레비(2014),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소영 역, 돌베개. ^ 소영현(2019), 「목격-증언의 자리와 공진하는 ‘위안부’의 몸」, 『구보학보』 22. 673-702쪽. ^ 따옴표 안은 인트로 영상에서 발췌. ^ 프리모 레비, 위의 책. ^ Assmann, A. (2006). “History, Memory, and the Genre of Testimony”. Poetics Today, 27(2), 261–273. ^ 김수진(2013), 「트라우마의 재현과 구술사: 군위안부 증언의 아포리아」, 『여성학논집』 30(1), 35-72쪽. ^ Assmann, A. 위의 글. ^ 그러나 이 몸짓 역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거나 위반되는데, 김한상(2021)은 카메라 앞의 증언자의 몸짓이 이들이 마주하는 특정한 사회적 역할과 맥락 속에 놓인다는 점에서 이를 ‘사회적 몸짓’의 인용과 모방이라고 말한다 (김한상, 「다큐멘터리의 몸짓과 영상사회학적 실험/실천: <숨결>과 <보드랍게>의 피해생존자들의 경우」, 『현대영화연구』 44, 29-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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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3부〉 -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 용서와 화해란 누가 청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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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대한’ 정책에 따른 ‘결정’ 중국에서 일본군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청구하는 재판을 시작한 것은 1992년이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강간에 대한 조사와 논의로 1997년 북경출판사의 『일본군 중국침략 폭행실록』이 나왔다. 그전까지는 중국에서 일본군‘위안부’나 성폭력은 거의 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중국 정부는 1,000명이 넘는 전범 용의자를 구류하였으며, 피해자 측과 아울러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1945년 러시아 군대에게 체포되어 러시아로 압송되었던 일본전쟁범죄자들은 1950년 7월 중국에 인도되어 푸순(抚顺) 전쟁 범죄자 관리소(사진1)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1956년 4월 25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국침략 전쟁 중 일본전쟁범죄자 처리에 관한 결정」(이하 ‘결정’으로 약칭)이 통과되어 마오쩌둥(毛澤東) 주석령으로 공포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은 이 결정에 따라서 특별군사법정을 조직하여 1956년 6월과 7월, 랴오닝성(辽宁省) 선양(沈阳)시와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시에서 공개재판을 했다. 재판의 공소서와 변론은 모두 ‘결정’에 근거하여 주장되고 판결되었다. ‘결정’은 일본의 전범들이 국제법과 인도에 반하는 죄로 중국의 인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마땅히 엄벌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곧바로 일본이 투항한 지 10년이 지나면서 상황과 환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중일 양국 인민의 우호 관계가 발전하였다. 게다가 구속 기간 중 전범자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절대 다수가 자신의 죄를 반성하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결정’은 ‘관대한’ 정책에 따라 전쟁 범죄자들을 분별 처리한다고 선언한다. 이 ‘결정’은 두 차례에 걸쳐 ‘관대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전범에 대한 사면을 암시한다. 실제로 법정 변호인단의 변론 역시도 상투적이다시피 ‘결정’이 제시하고 있는 관대 이유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세 가지는 현재 상황 변화, 피고인의 사죄와 반성, 중일 양국의 우호적 관계 회복 등을 말한다. 그리고 일본 전범자들에 대해 관대한 판결을 요구하는 변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피의자가 제국주의 국가와 군부, 그리고 각각의 국가기관에 속해있는 구조 속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둘째, 군국주의 교육과 환경 속에서 군국주의자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정부의 교화 노력을 통하여 깊이 반성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은 1950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인도받은 포로들에게 ‘세심하고도 꾸준한 배려’에 입각한 ‘교화’사업을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포로들의 “인식과 태도에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났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교화사업에 성공했다는 자신감이 재판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공산당 정부의 교화사업은 판단 여하에 따라 제네바 협약 총칙 제3조 ‘신앙에 따른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조항을 위반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사회주의 교화에 대한 낙관적 정치철학이 주요한 전범자들을 옹호하는 변호 논리로 작용하였다. 다케베 류조(武部六藏) 등 28명의 전쟁범죄안건에 대한 공소인은 리푸산이었다. 그는 돌아가신 분들의 마음을 품고 공소자인 자신이 국제법과 인도를 위반한 전쟁범죄자들에게 응분의 책임에 따른 징벌을 내려 달라고 요청한다고 하였다. 이외 스즈키 히라쿠(鈴木啓久) 등의 공소 내용을 보면 상당수의 양민학살과 부녀자들에 대한 강간, 그리고 “중국부녀를 일본군대 ‘위안소’로 보내어 강간한 일” 등을 중요한 공소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재판은 시종일관 ‘결정’의 원칙에 따라 변호와 공소가 제기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범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변론의 주요한 논거에 대한 검찰의 이의제기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스즈키 히라쿠 등 8명의 전쟁범죄를 기소한 것은 왕즈핑이었다. 그는 개인이 사회의 영향과 역사적 제약을 받는 존재이지만, 결코 개인의 능동적 역할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과거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일본에는 이를 추종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진보적인 힘도 있었다. 그런데 피고인은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심을 저버리고 ‘목적의식적으로 다양한 죄악을 저질렀다.’ 따라서 그들이 저지른 엄혹한 죄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피고인의 범죄행위가 명령의 집행이었다고 하지만 일정한 직책을 지닌 자들은 국제법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비무장 양민학살과 마을 파괴, 부녀강간, 독가스 살포 등이 모두 엄중한 범죄행위임을 알고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양심을 지닌 인간이라면 상급의 명령을 변경하거나 저지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에 중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고 하지만 “초기에는 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국침략이 일본 군인의 직무”라고 저항하였다면서 그 죄를 묻고 있다. 그러나 이후 어떤 변호사도 이 점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공소인도 충분한 이해를 표하면서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다. 결국, 타이위안에서 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120명이 유죄를 인정했지만 불기소되었다. 9명 전범의 죄상 중에는 강간 범죄가 3명이었다. 120명 중 자료가 남아있는 118명이 강간, 윤간을 자행하였으며,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만든 죄가 있는 자가 43명이다. 그중 70명은 수십 명을 강간, 윤간하였으며 유아 강간을 인정한 자도 있다. 여기서 불기소된 120명의 범죄의 중요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강간, 윤간이라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다. 그럼에도 대부분 불기소 처분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 재판을 통해서 전쟁범죄를 따지고자 했다기보다 중국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정의’의 실현을 통하여 일본과의 국교 수립이라는 실리를 꾀했던 것 같다. 당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6월 28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 “중국 정부의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처리는… 양국이 빠른 시일에 정상적 관계를 회복하기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라고 솔직하게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어떠한 심정으로 재판에 임하고 재판과정을 지켜봤을까? “돌아가신 분들의 마음을 품고 죄를 묻는 일이” 공소인들에게 부여된 권능일까?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용서의 주체는 누구일까? 증인으로 출석하여 자신들이 겪은 피해를 진술한 많은 이들은 입을 모아 정부를 향하여 자신들을 대신해 원수를 갚아 달라고 호소하였다. 용서와 화해란 누가 청할 수 있는 것일까? 전범자들 중에는 앞서 논한 산시성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인 가해를 입혔던 스미오카 요시카즈(住岡義一), 사가라 게이조(相樂圭二) 등도 있었다. 이들이 산시성 일대에서 자행한 부녀에 대한 폭력(강간, 윤간, ‘위안소’)으로 심신이 망가진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도 재판 과정의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판이 끝나자마자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 이들을 제외하고 기소를 면한 이들과 질병으로 석방을 허락받은 이들은 3차에 걸쳐 일본의 적십자에서 보내온 일본 윤선 고안호를 타고 귀국하게 된다. 복역을 선고받은 이들도 대부분 형기를 앞당겨 1960년대 중반까지는 모두 석방되어 일본으로 귀환한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귀국하는 고별사의 보도 내용이다. 1차로 불기소 처분되어 귀국하는 도미나가 준타로(富永順太郞)는 ‘잘못을 하면 바로 고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過則勿憚改)’는 고사성어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확실히 잘못했다. 오늘 나는 충분히 반성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아주 기쁘다. 많은 재난과 고통을 입은 중국 인민에게 죄송하다. 나는 사람이 변하여 좋은 사람이 된 것보다 더 유쾌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부터 인생의 제일보를 걷고자 한다. 나는 후반생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지금 내 마음은 유쾌함으로 충만해 있다.” 귀국자들은 “일본과 중국은 빨리 국교를 회복하여 정상화하여야 하며 재차 형제와 같은 우정을 만들어 가야 한다”며 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돌아갔다. 물론 이와 같은 내용은 중국의 보도자료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이 남긴 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중국 정부가 이 보도를 통하여 전범자들을 불기소 처리하고 귀국시킨 이유를 유추해볼 수는 있다. 피해자의 절규와 중국 정부의 ‘관대’하고 ‘정의로운’ 재판, 그리고 스스로 용서받아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전범자의 자부를 보면서 용서와 화해를 청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무엇이 전제되었을 때 용서와 화해란 가능한 것일까? 라는 사유가 과제로 제기된다. 법학자 이재승은 용서와 화해에도 도덕적 문법이 있는가 고민하면서 국가권력이 범죄자의 처벌과정을 독점하고, 정의의 유일한 실현자로 나선다면 피해자의 소외, 배제, 파멸이 예정된다고 말하였다. 이재승의 지적은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허우둥어(侯冬娥)의 고통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중국의 전범관리소에서 ‘교화’되어, 관대한 전범 재판을 거친 일본 군인들은 귀국하여 ‘중국귀환자연락회’를 조직하여 중·일의 친선을 위하여 노력했다. 그런데 피해자 허우둥어는 자신의 피해를 말하겠다는 고통스러운 결심을 한 날에도 한나절 동안 비통한 눈물만 흘렸을 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중일수교가 맺어진 지금(1992년)은 책임을 묻는 일이 더욱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1952년 장제스 국민당 정권(타이완)은 일본과 맺은 평화조약인 「일화조약·부속의정서(日華條約·附屬議定書)」 1항에서 “일본 인민에 대하여 관대하고 우호적인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중화민국은 스스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14조 갑항 제1항의 일본국이 제공해야 하는 용역의 이익을 포기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후인 1972년 9월 29일 중국과 일본 양국 대표는 인민대회당에서 중일 수교 정상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서 제7조는 전쟁배상 문제에 대해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선언한다. 중일 양국 인민의 우호 관계를 위하여 일본국에 대한 전쟁배상 요구를 포기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엄청난 피해는 발생했지만 그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개인’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일본군에 의해서 자신의 존엄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은 피해가 ‘창부’라는 오욕으로 뒤바뀌어 일상생활에서도 심대한 타격을 입으며 다시 한번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거기다 그녀들을 ‘지키지’ 못했던 남성들의 자존도 깊게 상처 입어 ‘대국’ 중국의 과시에 편승하여 피해의 실태를 알면서도 봉인함으로써 피해 여성들은 존엄을 회복할 길을 오랫동안 잃어버리게 되었다. 피해 여성들 대부분은 가난하고 편벽한 시골에서 태어나 전족을 하고 있었으며, 글자도 모르고 마을에서 발생한 엄청난 폭력적 상황이 왜 생겨났는지 채 알지 못하였다. 그런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에 대해서 입을 열고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들의 증언은 피해를 ‘목격’했던 딩링(丁玲)이 1941년 작품 속 주인공 전전을 통해서 만들고자 했으나 채 만들 수 없었던 피해 여성 시점의 바로 그 언어일 것이다. 그 언어가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언어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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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약하고 낮고 투박하지만 - 박숙이 생애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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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 피해자 고(故) 박숙이 할머니(1922.3.4. ~ 2016.12.6.)는 2012년 9월, 만 90세에 정부 피해등록자 240명 중 236번째로 등록하셨다. 경남 남해군 고현면 관당리에서 부모님과 언니 오빠가 1명씩 있는 집에서 태어나셨다. 16살이 되던 1939년, 이웃마을인 갈화에 살던 이종사촌인 17살 장쌍가매 언니와 조개 캐러 가는 길에 일본 군인에게 납치되어 부산, 나고야, 만주, 상해를 거쳐 상해 위안소에서 해방되던 1945년까지 6년간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해방된 줄도 몰랐는데 위안소에 왔던 군인들도, 위안소 관리인도 일본이 전쟁에 지니 조선인들이 좋아한다며 화를 냈고, 군인들도 사나워졌고, 부대와 위안소 안팎이 이상할 만큼 어수선했다고 한다. 아무도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사촌 언니가 밖을 내다보려고 나갔다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 혼잡한 틈을 타서 뒷문으로 도망쳐 중국 홀아비의 헛간에 숨어들었다. 신고를 막으려고 그 집에서 살다가 조금씩 돈을 모아 1948년 고향이 남해라는 것을 몰라, 무조건 한국에 오기 위해 부산행 배를 탔다. 부산 영도에서 식모살이하다가 ‘화방사’라는 절 이름을 간신히 기억해내고 1949년 고향 남해로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다. 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오빠도 어딘가로 살러 가서 소식이 닿지 않아 혼자 살았다. 정상적인 결혼은 하지 못했고, 양아들 1명과 양딸 2명을 키웠다. 손자들이 장성하여 남해를 떠나고 난 뒤 만 90세에 피해 등록을 마쳤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로 세상에 나와 4년의 삶을 살고, 2016년 12월 6일 만 94세로 고단한 삶을 마쳐 경남 남해군 서면 연죽리 남해 추모누리 공동묘지에 묻히셨다. 2013년 1월 19일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의 이경희 대표님 전화를 받고 함께 찾아간 박숙이 할머니의 지붕 낮은 방 안.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91세 박숙이, 피해자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보살피며 사회운동과 지역 운동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 운동가 65세 이경희, 지역 여성회를 만들고 일궈가는 44세 김정화, 세 여성이 무릎을 마주하고 앉은 것이 출발점이었다. 어쩌면 박숙이 할머니와 남해여성회원들의 만남은 몇 겹의 우연과 필연이 빚어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시대와 공간의 접점이 딱히 없는 듯한 우리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연결고리로 이어져 서로의 삶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남해여성회는 긴급운영위를 열어 일본군‘위안부’ 사업을 중심사업으로 결정했다. 할머니가 가장 하고 싶어 하시는 강연 사업을 추진했고, 피해자 심리정서 안정 사업, 청소년 교육 및 증언 영상 기록사업 등을 숨 가쁘게 진행했다. 지금 생각해도 퇴근 후 밤에 모여 의논하고 주말에는 나들이, 생일잔치, 교육사업 등 그 고단하고 버거운 일을 어찌 해냈나 싶다. 그러면서도 하루하루 달라지는 할머니 건강 상태를 살피는 일까지 어느 하나 조심스럽지 않고 힘겹지 않은 것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남해여성회 회원들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우리들, 즉 여성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일본군의 성노예로서 아픈 생을 살아 낸 한 여성의 삶을 마주하며 연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와 남해여성회가 서로 의지하고 마음을 나누고 연대하여 일궈낸 빛나는 자매애는 지금도 잊지 못할 자랑거리다. 비록 약하고 낮고 투박하지만, 이토록 애절하고 슬픈 만남과 헤어짐을 그저 개인의 특별한 경험으로 남겨둘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박숙이 할머니께서 생전에 “내가 살아서는 기어서라도 학상들한테 역사 강연할낑께, 내가 죽고 나면 내 얘기를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니가 책으로 맹글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겁 없이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고도 3년이 흘렀고, 일생의 강렬한 만남이었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깊은 상실감과 그리움으로 매우 힘든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나는 경남의 중고등학교 교사 8명과 2019년 8월 6~9일 마창진시민모임 주최로 청소년의 인권 평화 교육 자료 수집을 위한 교사 역사탐방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중국 난징과 상해의 위안소 흔적들을 찾기 위해 낯선 골목을 다니며 자료수집 그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 중국 난징의 리지상 위안소와 그 흔적, 난징대학살 박물관과 상해의 최초 일본군 위안소인 대일 살롱과 상해 사범대학 내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임시정부청사 등을 탐방했다. 도심의 초라하고 낡고 빛바랜 옛 위안소 건물들이 고층 건물 사이에서 버려진 듯 남아 있어 이질적이었다. 마치 고향도 찾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평생을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아픔을 겪다가 이름도 없이 죽어간 숱한 ‘박숙이’와 닮았다는 생각에 깊고도 깊은 심연에 닿았다. 할머니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할 수 없었고 말해서도 안 되는 세상을 살아낸 수많은 ‘박숙이’들의 시간을 세상에 단 한 줄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 딱 그 마음으로 논문을 쓰게 되었다. 박숙이 할머니의 삶은 그저 한 개인의 삶이 아니었다. 누군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면, 할머니와 가장 자주 만나고, 가장 가까운 나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는 대전제를 마음에 새기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논문을 쓰기 위해 선행연구를 분석해보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주제로 한 논문 자료 중 생애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여성가족부의 일본군‘위안부’ e-역사관 자료실에도 두 분 이상의 피해자 사례를 묶어 나온 생애사 논문은 있었지만, 피해자 한 명을, 그것도 실명으로 밝힌 단일사례 생애사 연구 논문은 없어 놀랍기도 했다. 나의 논문은 비록 글짓기 수준의 논문이지만, 심층 면접과 참여 관찰을 통해 한 분의 삶을 담아내고, 피해자의 감정을 따라가며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적은 세상에 없던 기록물이며, 피해자가 사망한 시점에 쓰인 논문이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다. 또 연구자가 논문을 쓰기 위해 의식적으로 박숙이 할머니를 만난 게 아니라, 할머니를 만나며 쌓아 온 구체적인 경험이 그대로 연구 결과물이 되었다는 것이 다른 생애사 연구 논문과의 차이점이다. 논문에 쓰인 자료들은 수집한 것도 있지만 남해여성회가 직접 제작하거나 제작에 참여하고 주도한 것들이 더 많다. 자료 제작 과정이 곧 논문 내용이 되었고, 주 2~3회 찾아뵐 수 있는 거리에서 이웃으로 살면서 할머니를 만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할머니의 주거, 의료, 생활 욕구를 세세히 살핀 활동 결과가 그대로 논문이 되었다. 특히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일본군‘위안부’ 등록 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박숙이 할머니와 남해여성회가 함께한 사회활동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경험이었다. 할머니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런 사회적 활동을 통해 달라진 할머니의 감정과 관점의 변화는 논문에서 처음 이야기한 것이다. 유년 시절 겪어야 했던 가부장적인 양육 방식과 그로 인해 규정된 할머니의 삶, 그리고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이 깨진 것에 대한 깊은 회한을 할머니가 표현한 그대로 기록했다. 할머니의 생애에서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들은 객관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특수한 상황들을 담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서 살아내신 마지막 4년의 생활에 대한 기록은 논문 말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기에 박숙이 할머니에 대한 유일한 기록물인 셈이다. 박숙이 할머니께서 피해자임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저 우리 이웃에 흔히 있을 법한 평범한 할머니였을 것이다. 언론에 자주 모습을 드러낸 분이 아니기에 잘 알려지지도 않으셨다. 박숙이 할머니처럼 지방에서, 단독 주거 형태로, 90을 넘긴 늦은 나이에 피해자임을 밝힌 할머니들의 삶은 우리에게 어떻게 남을 것인가? 언론이나 방송에 자주 등장한 피해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증언으로 남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피해자들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나의 논문은 이 물음에 답하는 과정이며 그 고민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일본의 공식사죄와 피해자의 명예 회복은 여전히 멀고, 세계 곳곳에서 심지어 국내에서도 일본군 성노예 제도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역사부정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생존자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내 주변의 지인들조차도 ‘그동안 할머니 모시고 그만큼 고생했는데, 이젠 그만하면 되었다’며 걱정과 위로의 말을 한다. 이러다가 할머니들이 한 분도 남지 않을 때가 곧 올 텐데, 관심에서 멀어지고 기억조차 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절박함은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웠고, 책은 나중에 내더라도 논문이라도 먼저 남겨야 했다. ‘포스트 할머니 시대’에 더 강력한 문제 해결의 주체인 시민들이 ‘위안부’ 운동의 주변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기록과 기억의 사회적 재현 작업은 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였다. 생존해 계신 피해자가 10명뿐이라는 위기감과 절박감에 대한 역설로, 기록과 기억은 힘이 세다는 말을 하고 싶다. 개인의 이야기를 어떻게 사회적인 기억으로 만들고 재현할 것인가? 이는 곧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만들어 온 역사적 교훈을 어떻게 이어가고 확장할 것인가라는 행동 실천의 과제와 맞닿아 있다. 그 행동 실천 과제로 남해여성회는 매년 8월 인권 평화문화제 ‘숙이나래 문화제’를 열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가장 많은 경남지역에서는 98개의 시민사회 단체가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을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당사자와 시민사회가 일궈온 공공 역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기록과 기억 행동을 위한 사회적 연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영역에서 시도되고 있다. 기록과 기억 행동, 사회적 재현으로 지속 가능한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이어갈 때, 일본군 성노예제도와 같은 반인도적 전쟁 성범죄가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일상적인 차별과 혐오에 맞서 여성 인권과 평화, 역사 정의의 연결고리로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이 더 널리 퍼지고 이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나의 논문은 박숙이 할머니께 약속 드렸던 책을 쓰기 위한 전제이고,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아주 작은 기록이지만, 기억을 확장하고 운동을 지속시키는 데 쓰일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