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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지구는 평평하지 않습니다 - 영화 〈나는 부정한다〉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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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부정한다>(믹 잭슨, 2017) 드라마 / 미국, 영국 / 레이첼 와이즈 출연 / 110분 ‘지구는 둥글다’, ‘엘비스는 죽었다’를 어떻게 증명할까? 영화 <나는 부정한다>(믹 잭슨, 2016)는 지구가 평평하다거나 엘비스는 살아있다는 것처럼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싸운 기록이다. 우리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만큼 당연한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영화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역사학자 사이의 명예훼손 재판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윤리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1994년 미국의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레이첼 와이즈)는 히틀러 연구자인 데이빗 어빙(티모시 스폴)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한다. 립스타트가 자신의 책 <홀로코스트 부정하기>(Denying the Holocaust, Penguin Books, 1993)에서 데이빗 어빙을 역사 부정주의자라고 칭하며 그의 명예를 훼손했고, 이후로 여러 출판사에서 책의 출판을 거절당하는 등 생계를 곤란하게 했다는 이유다. 어빙이 사실 입증의 책임이 피고에게 있는 영국에서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에, 립스타트는 이제 법정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부정주의자들의 말하기 <나는 부정한다>에 등장하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의 주장은 익숙하다. 그는 생존자들의 기억이나 사료 등에서 작은 오류를 찾아, ‘이게 틀린 걸 보니 저 사람이 증언한 것은 다 틀렸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사소한 왜곡을 통해서 전체 그림을 바꾸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의 부정론자들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통해서 이미 만난 바 있다. 그들은 ‘정신대’라는 용어를 문제 삼고, “군표나 돈을 받았으니 성매매다. 국가는 책임이 없다”와 같은 주장을 한다.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다큐멘터리 <표적>(니시지마 신지, 2021)은 일본군‘위안부’의 생존을 일본에 최초로 보도한 전(前) 아사히 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의 법정 소송을 통해 부정론자들과의 재판을 기록한다. 일본의 ‘위안부’ 부정론자를 대표하는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는 우에무라의 기사가 ‘사실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사쿠라이는 우에무라의 기사에 실린 김학순 님의 증언을 거론하며 ‘정신대’는 노동에 동원된 여성들을 지칭하는 것이지 ‘위안부’가 아닌데, ‘정신대’라고 하고 있다면서 증언의 신빙성을 훼손시키려 한다. 심지어 일본군‘위안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이것은 엄청난 범죄이기 때문에 일본이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의 꼬투리 잡기는 ‘증거를 가져오라’는 요구로 이어진다. 일본군‘위안부’나 유대인 학살을 지시했다는 문서를 제시하라는 요구다. <나는 부정한다>의 첫 장면도 여기서 출발한다. 어빙은 대학에서 열리는 립스타트의 북토크에 찾아와,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의 학살을 명령했다는 증거를 가져오면 1000달러를 주겠다며 돈다발을 흔든다. 청중은 수군거리고 경비원은 그에게 나가라고 요구한다.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 사실이 아니라는 방식의 문제 제기는 마치 홀로코스트 부정도 하나의 역사 해석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가 스스로를 공식 역사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재야 학자로 포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식 역사는 주류의 시선만을 반영하여 새롭고 급진적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 같이 독학으로 공부한 비주류의 이야기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아카데미의 학자들도 모르는 것이 있다, 혹은 평범한 사람이 더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방식의 수사학은 꽤 성공을 거둔다. 지금도 유튜브를 비롯한 1인 미디어 채널에서는 역사 부정론자들의 포스팅이 이어진다. 마치 새롭고 객관적인 것처럼 포장해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탈진실(post truth)’은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인 사실보다 개인적인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이때 포스트는 진실이 퇴색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불편한 진실 때문에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진실에 도전하는 쪽을 택한다는 것이다.[1] 홀로코스트나 일본군‘위안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대안적 진실’을 선택한다. <나는 부정한다>에서 데이빗 어빙은 히틀러에 대한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를 부정한다. 홀로코스트가 없었던 것이 된다면, 히틀러가 비난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의 역사를 긍정해야 한다는 ‘애국적’ 사고가 ‘위안부’와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데 이른다. 생존자들의 말하기 부분을 확대해서 사실을 호도하는 부정론자들의 방식은 생존자의 증언을 둘러싸고 첨예해진다. 홀로코스트와 일본군‘위안부’를 증명하기 위해, 가장 빠르고 분명한 방법은 무엇일까? 영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2017)와 <허스토리>(민규동, 2018)는 일본군‘위안부’의 증언을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설정한다. <아이 캔 스피크>의 옥분(나문희)은 미국 의회에서 영어로 증언을 하며 일본 관료들에게 호통을 치고, <허스토리>의 서귀순(문숙)은 법정에서 자신이 평생 숨겨왔던 비밀을 꺼내놓는다. 그들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론장에 밝히는 증언 장면은 재판의 승패를 좌우하며, 피해생존자의 압도적인 현현을 재현한다. 그러나 <나는 부정한다>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재판정에 세우지 않는다. 생존자들이 직접 증언하겠다며 찾아왔음에도, 립스타트가 자신의 변호사에게 그들의 증언을 여러 차례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지 않겠다는 것일까? 립스타트 재판의 변호사 줄리어스(앤드류 스캇)는 생존자들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고 그 때문에 재판장에서 어빙에게 공격당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작은 실수에도 역사부정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다. “1945년 이후 이 증언으로 돈을 얼마나 벌었습니까?”라는 식의 공격이 법정에서 심문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줄리어스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청자의 존재가 증언의 선제 조건임을 보여준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 피해 당사자의 증언을 생존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배제할 수 있다. 이것이 청자의 윤리다.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사상사를 연구하는 도미야마 이치로(冨山一郎)는 증언을 듣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전 배제(foreclosure)’되어 있는 이야기들은 자연스레 말해지지 않는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청자가 있어야만, 그 이야기들은 발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폭력적 상황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의 말을 포함해 ‘우리’의 언어 영역 자체가 ‘사전 배제’를 추인하고, 스스로의 삶에 대한 위험성을 슬그머니 용인하면서 어떤 사람들의 삶을 계속해서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2] 생존자들을 재판정에 세우지 않겠다는 변호단의 결정은 ‘듣지 않을’ 청자에게 증언자들의 삶을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는 순간, 재판을 받는 것은 어빙이 아니라 생존자들이 된다. 지금 일본의 역사부정론자들이 일본군‘위안부’ 증언자들을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운동의 전면에 소녀상과 나란히 선 ‘우리 할머니’들이 일본군‘위안부’의 존재를 대변했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이야기는 얼마만큼 가서 닿았을까? 소녀상을 세우고, 김학순, 김복동 등의 이름을 꼽을 수 있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김숨의 소설 『한 명』(현대문학, 2016)은 일본군‘위안부’ 생존자가 한 명만 남은 상황을 가정하며 쓴 소설이다. 여기에는 증언할 수 있는 생존자들이 사라지면, 기억도 함께 사라질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피해를 증언할 수 있는 생존자가 사라진 이후,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부정주의는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증언은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오히려 너무 많은 증언이 고통의 기억을 계속 되살려왔던 것은 아닐까? 지금부터 물어야 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제대로, 충분히 듣고 있느냐가 되어야 한다. 누구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 <나는 부정한다>의 초반부에서 립스타트는 줄곧 강력하게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과는 대화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립스타트에게 홀로코스트는 의견이 아니라 ‘사실’의 문제다. 그런데 재판을 거치며 립스타트는 보다 적극적으로 역사부정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TED 강연에서 그는 홀로코스트 부정주의자들이 거짓말을 ‘의견’으로 만들기 위해 글을 쓰고, 학술지를 만들고, 책을 출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사실과 거짓말을 섞어 대중을 호도하는 상황에 대항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싸워야 한다고 청중을 설득한다.[3] 이는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지겹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반응과 연결된다. 영화에서 변호단 신참의 애인은 이제 그만 슬퍼해도 되지 않냐고 이야기한다. 홀로코스트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충분히 들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러한 목소리가 있다. 일본군‘위안부’ 이야기는 그동안 충분히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들은 것은 무엇일까? 제대로 듣기부터 시작해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우리는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때다. 각주 ^ 『포스트트루스-가짜 뉴스와 탈진실의 시대』, 리 매킨타이어 지음, 김재경 옮김, 두리반, 2019. ^ 도미야마 이치로, 「증언 ‘이후’」, 『전쟁, 여성, 폭력: 일본군 ‘위안부’를 트랜스내셔널하게 기억하기』, CGSI EPUB, 2019, 54~55쪽. ^ 데보라 립스타트, 홀로코스트 부정이라는 거짓말의 이면, TEDXSkoll, 2017(https://www.ted.com/talks/deborah_lipstadt_behind_the_lies_of_holocaust_denial?language=ko 2021.11.5. 검색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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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송신도 이야기 - "사람 속마음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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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1992년 1월 14일부터 16일까지 '위안부 110번 신고전화' 핫라인이 개설되었다. '위안부 110번' 실행위원회에서는 신고자로부터 들어야 할 기본적인 내용이 담긴 조사카드를 사전에 준비했다. 그리고 신고 전화를 받을 때 그 내용을 조사카드에 기록했다. 이때 미야기현(宮城県) 오나가와(女川)에 살던 송신도의 정보도 들어왔지만, 실행위원회에서는 그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본인이 직접 제공한 정보가 아닌 데다가 정보제공자의 연락처도 확실하지 않아 송신도를 방문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와타 후미코는 배봉기의 증언을 오랜 시간 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독단적으로 송신도를 방문했다. 송신도도 배봉기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당시의 상황을 말하고 싶어하고, 소송도 제기하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신도와 '재일 '위안부'재판을 지지하는 모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도입부에, 가와타 후미코가 송신도의 집에 처음 방문하여 함께 나눈 대화가 위안소가 있었던 우창(武昌)을 따라 흐르는 '장강(長江)/양쯔강(揚子江)'의 화면과 오버랩 되어 나온다. 가와타 후미코가 고다츠에 앉아 찾아온 용건을 말했을 때, 송신도가 내뱉은 첫 마디는 "아, 잘 왔다"였다. 대전에서 태어나 16세 때 중국 우창(武昌)의 위안소로 끌려가 7년간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송신도는 가와타 후미코와의 이날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이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에 뛰어든다. 이 글은 송신도를 '위안부 110번 신고전화 실행위원회'와 연결시켜 준 가와타 후미코가 기억하는 송신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람 속마음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 그래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살아왔어. 계속 속기만 했으니까 말이여. 하지만 재판을 하고, 또 내가 겪은 일을 터놓고 나니 조금 위안이 되었네. 나도 조금은 사람다워졌어. 완전히 때 빼고 유식한 할머니가 되었지." 1993년 4월 5일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이후 10년 동안 일본 내 유일한 원고로서 '위안부' 재판에서 투쟁해온 송신도 씨는 일본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해 패소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감상을 이렇게 말했다. 제소 이전과 패소 이후의 감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발언이었다. 송신도 씨는 긴 인생 속에서 삶의 격변을 두 번 체험했다. 중국 위안소로 끌려갔을 때와 일본이 패전한 후 일본군 출신이었던 남자에게 청혼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다. 두 번의 격변은 모두 남에게 속아서 일어난 결과였다. 송신도 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나는 잘 속아" 라면서 몇 번이나 스스로 경계하듯 말했다. 그가 오랫동안 사람을 믿지 못한 채 살아왔던 것은 이 두 번의 격변이 원인일 것이다. 결혼을 피해 고향에서 중국으로 송신도 씨는 16살 무렵 어머니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식을 치렀다. 피로연을 마치고 침실에서 11살 연상인 신랑이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 순간, 뒷간에 가는 척하며 속옷 차림으로 신혼집을 뛰쳐나와 논개구리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밤길을 정신없이 달려 친정으로 도망쳤다. 친정집은 모두 잠이 들었는지 조용했다. 몸에는 속옷만 걸치고 있어 추웠던 송신도 씨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불이 꺼진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여동생이 아궁이 속에서 잠든 송신도 씨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그 소리에 달려 나와 크게 화를 냈다. 그 당시에는 결혼 후 3년간은 친정에 올 수 없다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송신도 씨는 이 집에는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친정을 나왔다.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면서 쫓아왔지만 붙잡히지는 않았다. 이후 그는 친구 집에 머물면서 아기 돌보아주는 일을 했다. 어느 날, 중년의 여성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위한 일을 하면 결혼을 안 해도 혼자서 살 수 있어." 그 중년의 여성은 송신도 씨가 왜 친구 집에서 아기 돌보는 일을 하고 있는지 자초지종을 들었을 것이다. '나라를 위한 일'이 어떤 일인지 그는 잘 알지 못했지만, '시집 안 가도 된다'는 말에 끌려 여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본 패전 이후 일어난 두 번째 격변 두 번째로 속은 것은 일본이 패전한 직후 중국 후베이성 셴닝(咸寧)의 위안소에 있었을 때다. 갑자기 일본군이 위안소를 찾지 않았고 그곳의 여주인과 송신도 씨를 비롯한 '위안부'들도 어찌 처신해야 할지 모른 채였다. 그 시기, 송신도 씨가 몇 개월 전까지 머문 웨저우(岳州) 위안소에 드나들던 일본군 하사관 '이다 가네사쿠(井田金作)'가 돌연 나타나 송신도 씨에게 청혼했다. 이다는 군인보다 민간인들이 더 빨리 귀국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군에서 이탈한 뒤 부부 동반 귀국으로 위장하려고 송신도 씨를 이용한 것이다. 송신도 씨에게 이다는 위안소를 드나들던 수많은 군인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송신도 씨는 이다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7년이나 되는 긴 세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본군 장병에게 성적 대상으로만 다뤄졌던 그는 자신은 결혼과는 인연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이때의 송신도 씨는 상대가 누가 됐든 누군가가 자신에게 청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올랐을 것이다. 이다는 가진 돈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둘은 그동안 송신도 씨가 모아온 돈을 쓰고 노숙을 하면서 배를 탈 수 있는 한커우(漢口)로 향했다. 한커우의 일본 조차지(租借地, 한 나라가 다른 나라로부터 빌려 통치하는 영토)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인양선[1]을 기다리는 일본인이 대거 몰려 있었다. 송신도 씨는 일본인들 사이에 섞여 거적으로 만든 좁은 공간에서 이다와 약 9개월간 지내게 되었다. 가진 돈은 점점 줄어들었다. 송신도 씨는 패전 이전부터 일본 조차지에서 살고 있던 일본인들의 집을 돌면서 주문을 받아 세탁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일이 없었던 이다는 몇 명과 공모해 중국인과 결혼한 일본인의 집에 잠입하여 집주인을 살해하고 금품을 빼앗아 공범들과 나누어 가졌다. 송신도 씨는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양선을 기다리는 사람 중에는 생후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 여성은 전염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자 아기만 남겨두고 죽을 수는 없다며 자신도 약을 먹고 아기에게도 약을 먹여 같이 죽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성만 목숨을 잃고 아기는 살아남았다. 인양단 관계자가 갓난아기를 키울 사람을 구했지만 송신도 씨는 양육자로 나설 마음이 없었다. 송신도 씨는 위안소에 있을 때 사산도 하고 민간요법으로 낙태도 한 적이 있었다. 두 명의 아이를 무사히 낳긴 했지만 위안소에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래서 자신의 아기도 건사하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의 아기를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다는 송신도 씨의 의사를 무시하고 갓난아기를 무작정 떠맡았다. 자살한 여성의 짐보따리에는 저비권(儲備券, 1941년부터 중국 중앙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과 옷가지, 금시계, 금반지 등 고가의 귀중품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다는 그것을 노린 것이다. 저비권은 이미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다는 여성이 갖고 있던 귀중품 중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돈으로 바꾸었다. 드디어 인양선이 도착했다. 아기에게 먹일 분유를 구할 수 없었다. 배가 출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밤,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잠들고 송신도 씨도 깊게 잠들었을 때 이다는 컴컴한 장강(長江) 속으로 갓난아기를 던져버렸다. "그게, 나의 가장 큰 죄여." 비록 이다가 저지른 범죄였지만, 송신도 씨는 아기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침통해 하며 중얼거렸다. 배가 하카타(博多)에 도착한 날, 이다는 한커우 관청에 신청하여 교부받은 송신도 씨와의 임시 혼인 증명서를 찢어 버렸다. 한커우에서 하카타로 출발한 배 안에서 일본군 간부 출신의 일본인이 군대 내에서 혹사당했던 조선인들에게 둘러싸여 격렬한 항의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송신도 씨는 이러한 광경을 본 이다가 조선인 여성과의 혼인에 불안을 느껴 임시 혼인 증명서를 찢어 버린 것이라고 여겼다. 이다는 임시 혼인 증명서를 찢어 버린 것으로 모자라 송신도 씨에게 자신이 일본 조차지에서 벌인 강도, 살인 범죄와 아기를 바다에 버린 사실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다. 일반인이 된 이후의 이러한 행위는 모두 범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전쟁 중 침략군의 하사관이었던 이다의 주변에서는 살육도 약탈도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이다는 사이타마현 후카야(埼玉県深谷)의 본가로 송신도 씨를 잠시 데려갔지만, 결혼도 하려하지 않고 다시 오사카부 쓰루하시(大阪府鶴橋)로 끌고 가 "몸이라도 팔아라"라는 매정한 말을 남기곤 그대로 떠나버렸다. 송신도 씨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모모다니(桃谷) 장화 공장에서 일하면서 기찻삯을 마련하고 선물을 준비해 이다의 본가를 찾아갔다. 이다의 모친과 그의 형이 "네가 데려온 여자인데 매정하게 굴지 말라"고 이다를 설득했지만, 이다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송신도 씨는 쌀 한 되 오 합(약 2kg)과 간편복(원피스) 한 벌 분의 옷감을 받아든 채 다시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의 종착역인 우에노(上野) 역 안에는 부랑자들이 많았다. 우에노 역에 도착한 송신도 씨는 소변이 마려워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공중화장실의 위치를 물었다. 한 남자가 흔쾌히 짐을 맡아 주겠다고 하여 그가 가르쳐 준 장소로 갔지만 화장실을 찾을 수 없었다. 짐을 맡긴 곳으로 돌아가니 짐과 함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짐 속에는 귀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 임시 혼인 증명서는 이다가 찢어버렸고 귀환 증명서도 우에노에서 분실하고 말았다. 이제 송신도 씨는 일본에 머물 길이 뚝 끊기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그는 마침 정차해 있던 열차에 올라탔고 한참을 흔들거리다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송신도 씨는 목숨을 건졌지만, 유산하고 말았다. 이다의 아이였다. 열차에서 뛰어내린 송신도 씨를 도호쿠(東北) 본선 선로 근처 농가 사람이 구해주었다. 송신도 씨가 뛰어내린 곳은 이시코시(石越) 근처였다. 농가에 출입하던 암거래 쌀 장수 남성이 오나가와에서 함바집을 관리하는 조선인이 있으니 식모라도 해 볼 것을 권해 주었다. 송신도 씨는 밥은 못 하지만, 잡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함바집을 찾아갔다. 오나가와의 함바집을 찾아간 송신도 씨는 그곳에서 하재은 씨를 만났다. 송신도 씨는 이로리[2] 곁에서 그가 묻는 말에 모두 대답했다. 그는 송신도 씨의 더러워진 스웨터를 이로리 불 가까이에 가져가 쬐면서 "아니고 딱해라, 딱하기도 하지."하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하재은 씨가 송신도 씨의 얘기를 듣는 동안 불을 쬔 이들이 올 스웨터의 올 사이사이에서 기어 나와 이로리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송신도 씨는 하재은 씨와 함께 살게 되었다. 위안소 제도가 파괴한 것들 중국으로 가면 결혼을 피할 수 있다는 꾀임에 속아 중국으로 향한 송신도 씨는 1938년 늦가을에 우한(武漢) 작전으로 일본군이 막 점령한 직후의 우창 위안소로 끌려갔다. 벽돌로 지어진 건물 출입구에는 핏덩어리들이 말라붙어 있었고 뒤뜰에는 시체가 늘어서 있었다. 우창 위안소는 '세계관'이라 불렸다. 세계관은 원래 식당으로 쓰인 건물이었는데 목수나 미장이 출신인 군인들이 건물을 작은 방으로 나누어 위안소 용으로 개조했다. 곧 여성들이 도착한다는 사실을 안 병사들은 위안소 개설 허가가 나기 전부터 세계관으로 모여들었다. 위안소에 도착하고 처음, 송신도 씨는 방으로 들어온 병사를 몸을 한껏 움츠리며 거절했다. 거절할 때마다 병사들과 위안소 관리인에게 두들겨 맞았다. 몇 번이나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발각되어 관리인에게 맞고 발에 차이며 긴 머리채를 잡혀 휘둘렸다. 그리고 "그렇게 여기서 나가고 싶다면 여기에 오는 데 든 비용을 지금 당장 전부 내놔!"라는 협박을 당했다. 설령 위안소에서 빠져나간다 한들 중국의 말도 글도 모를뿐더러 가진 돈도 없었다. 송신도 씨는 중국으로 향하기 직전 동생을 만나러 갔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들은 참이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엔 고향은 너무나도 멀었고, 고향으로 돌아간들 몸을 의탁할 만한 곳도 없었다. 그 때문에 있을 곳이 여기 밖에 없다며 그는 점차 탈출을 포기하게 되었다. 우창에는 병참기지가 마련되어 있어 전선으로 향하는 부대는 병참기지에 들러 무기와 탄약, 식량을 보충하고 전선에서 돌아온 부대는 우창에서 휴식을 취했다. 우창에 주둔해 있는 부대만이라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우창을 통과하는 부대가 오는 때면 송신도 씨의 방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병사는 하루에만 70여 명에 달했다. 송신도 씨는 위안소에서 생활하던 중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임신 7개월에 들어선 어느 날, 배가 이상하게 차가워졌다. 점점 고통이 강해지면서 가늘고 다 자라지 못한 한쪽 발이 바깥으로 나왔다. 한쪽 발은 나왔지만, 그 후로 진전이 없었다. 옆에 있던 주먹밥을 양 볼 안에 욱여넣고 온몸의 힘을 짜내어 몇 번이나 배에 힘을 주자 드디어 몸이 나오고 머리도 나왔다. 해삼 같은 형상의 사산아는 포도색을 띠고 있었다. 송신도 씨는 싸늘해진 주검을 안고 혼자서 위안소 뒷산 기슭으로 가 아이를 묻었다. 두 번째로 임신했을 때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한커우의 해군 위안소로 이동해 잡무를 맡게 되었다.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다. 하지만 위안소에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었다. 아기는 한커우 교외에 사는 조선인 여성에게 보내지고 송신도 씨는 웨저우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웨저우는 낡은 동네로 위안소는 2~3곳 밖에 없었다. 웨저우는 전선과 가까운 곳이라 웨저우의 '위안부'들은 소탕전에 나서는 부대를 따라다녔다. '종군'은 경험이 많은 '위안부'만 가능했다. "철모를 쓰고, 각반을 두르고 전선으로 끌려나갔지. 사람이 겨우 한 명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구멍을 파고 담요 하나 깔고 거기서 했어. 여름에는 괜찮지만, 겨울에는 눈이 내리니까. 추운 곳에서 30분이나 엉덩이를 까고 있으니 공알이 얼 것만 같았지. 죽기보다 괴로웠어." 군의 명령에 따라 장안(長安)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역시나 '위안' 용도로 판 구멍에서 병사를 상대하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 위로 총탄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송신도 씨는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는데도 병사는 "지금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하며 떨어지지 않았다. 웨저우(岳州)에서 잉산(応山)으로 보내졌을 때는 송신도 씨가 있던 옆 위안소에서 일하던 도시코가 전염병에 걸려 혈변을 보았다며 알고 지내던 병사를 거절한 일이 있었다. 화가 난 병사는 밖에서 자고 있던 도시코에게 큰 돌덩이를 던졌다. 도시코는 병사가 던진 돌덩이에 배를 맞아 복막염으로 죽고 말았다. 위안소의 여자들이 도시코의 시신을 수습해 화장했다. 나무를 몇 그루나 쌓아 그 위에 시신을 올리고 화력이 약해지면 나뭇가지를 던져 넣어가며 뼈를 주울 수 있을 때까지 오랫동안 태웠다. 도시코는 전라남도 출신이었지만, 유골은 근처 산에 매장했다. 그리고 송신도 씨가 웨저우에서 셴닝의 위안소로 옮겨진 지 수 개월이 지났을 때 일본이 전쟁에서 패했다. 7년에 걸쳐 새겨진 깊은 상처들 송신도 씨의 몸에는 매우 많은 흉터가 있다. 목 부근에는 작은 콩알 정도 크기의 팬 곳이 있어 일본군이 입힌 상처인지 물었더니 막 태어났을 때 원하던 사내아이가 아니어서 어머니가 찌른 흔적이라고 했다. 신도라는 이름은 출산 전에 지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일 테다. 왼쪽 팔에는 세계관에서 이름을 잊어버리지 말라며 새겨준 '가네코(金子)'라는 한자 문신이 있다. 송신도 씨는 글자를 읽을 수 없다. 나는 위안소에서 여성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이 문신을 새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왼쪽 옆구리에는 약 10cm 크기의 검상 자국이 있다. "1940년 즈음인가, 병사들이 미쳐 날뛰는 현장이었고, 일요일이었는데 정말 무서웠어. 또 칼을 빼 들고 설쳐 대는 거여. 군인들끼리 싸우는 놈들도 있었고 질투 때문에 칼을 빼든 놈도 있었어. 나는 이렇게까지 널 사랑하는데 안 해줄 거냐면서. 자기 손을 베고 내 여기(옆구리)를 베더라고. 상처가 크고 깊었는데 피는 별로 나오지 않았어. 붕대를 감고 신음하면서 울어도 병사들 상대는 계속해야만 했지." 손목에도 동반 자살을 강요당한 흔적이 있다. 허벅지 끝부분의 상처는……. "나한테 위로 올라가라고 하질 않나, 옆쪽이나 뒤에서 해대는데, 싫다 하면 칼을 가지고 있으니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누워서 떡 먹기잖여. 우창을 통과하는 부대가 오는 날이면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샅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지." 위안소에서 병사들과 있었던 일들을 말하는 게 더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일까. 송신도 씨는 이제 나에게 이런 얘기는 그만 시키라고 했다. 파괴와 살육을 되풀이하던 전장에서의 잔학행위를 '위안부'의 몸을 희롱하면서 달래고자 했던 상식을 벗어난 병사들의 행위에 대한 혐오감, 견딜 수 없는 원통함이 되살아난 것일 수도 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송신도 씨와 동거했던 하재은 씨는 주변인들로부터 일본인이었다면 관직을 맡던지 교사가 되었을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는 인물이었다. 송신도 씨는 하재은 씨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그 이상으로, 낯선 일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을 때 구해주었던 은혜를 평생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겨왔다. 세간의 부부처럼 생활했지만, "아빠, 아빠"하고 여길 뿐 성적인 교류는 없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도쿄 지방 법원의 본인 심문에서 그는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위안부'로 일해 온 사람이고, 역시 몸도 망가져 버렸으니 그럴 마음이 전혀 안 들지. …중략… 육체관계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안 하게 되었지. 남자만 봐도 저 자식, 뭐지 하는 생각부터 들 정도니까. 남자는 얼굴만 봐도 징그러워." 위안소에서 7년에 걸쳐 새겨진 깊은 상처였다. 이다의 아이를 포함해 송신도 씨는 일본 군인의 아이 다섯 명을 임신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자신의 손으로 키울 수 없었다. 일본군의 위안소 제도가 파괴한 것은 송신도 씨의 심신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네 거기는 양동이처럼 크다며." "하도 많이 해서 굳은살이 배겼던데." 처음 만났을 때 송신도 씨는 오나가와에서 살면서 이런 듣기 거북한 말로 야유당한다고 말했었다. 송신도 씨의 이웃에는 중국 전선을 경험한 사람도 있었다. 이다처럼 선봉 부대에 소속된 사람도 있었다. 송신도 씨는 중국 위안소에 있었던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송신도 씨를 향한 이런 소름끼치는 야유는 그의 몸에 새겨진 전쟁 당시의 상흔을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송신도 씨는 '사람 속마음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전후 시대를 살아왔다. 하지만 제소 후 송신도 씨는 자신의 재판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많은 지원자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대법원에서 패소가 확정된 후에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집과 세간살이가 모두 떠내려가 도쿄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지금이 제일 행복해."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송신도 씨가 일본 정부, 일본군, 일본 사회로부터 받은 처절한 피해에 비하면 지원자 한 명 한 명의 힘은 너무나도 약소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귀하다. 송신도 씨는 2017년 12월 16일, 별세했다. 각주 ^ 여기에서 인양은 일본의 외지나 점령지 등에서 생활하던 일본인이 패전 이후 국가 정책에 따라 일본 본토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식민지인의 귀환이나 강제성의 의미가 강한 송환과는 구별되어 사용된다. ^ 일본 농가 등에서 마룻바닥을 사각형으로 도려 파고 난방·취사용으로 불을 피우는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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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인터뷰 전국의 소녀상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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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과거사 문제를 의제화하는 사회예술로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한편에서는 소녀상으로 인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연약한 소녀의 모습으로만 각인되고 소녀와 할머니 사이의 시간이 사라지며,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까닭은 평화의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녀상은 ‘위안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함께 소환된다. 소녀상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 웹진 <결>은 소녀상을 직접 관찰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소녀상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누구보다 많은 소녀상을 자세히 관찰한 김세진 작가와의 인터뷰, 그리고 2016년 ‘효녀연합’으로 활동했던 어효은 작가가 하나의 소녀상을 2주간 관찰하고 느낀 바를 적은 에세이를 준비했다. 두 개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소녀상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갖추기를 기대한다 [소녀상을 마주하다] 1. [인터뷰] 김세진 - 전국의 소녀상을 만나다 2. [에세이] 어효은 - 2주간의 소녀상 관찰기 소녀상과 함께 함께 만난 사람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작가 김세진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75개의 평화의 소녀상(이하 소녀상)을 그림으로 기록했습니다. 2018년엔 책으로 엮어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보리, 2018)를 출판했어요. Q. 처음 소녀상을 그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러 다니기 전에 ‘소녀상 농성 대학생 공동행동’에서 소녀상 지킴이를 했어요. 어느 날 어떤 분이 저에게 ‘전국의 소녀상이 몇 개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사실 생각해본 적도 없었어요. 주변 친구들에게도 물어보니 저와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죠. 그래서 다른 지역에는 어느 곳에 어떤 소녀상이 있는지 조사해봤어요. 그런데 소녀상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더라고요. 그림뿐 아니라, 사진으로도 제대로 기록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저는 당연히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전국을 다니며 소녀상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딱 그 정도의 생각이었어요. 소녀상의 의미를 알리자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단지 어디에 어떤 소녀상이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죠. Q. 전국의 소녀상을 그리러 다니면서 겪었던 일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청주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스케치는 겨우 끝났고 채색만 하면 되는데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는 거예요.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죠. 카페 안에서 그림을 마저 그리고 있는데, 카페 사장님이 제 그림에 관심을 보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하는 작업에 관해 설명해 드렸죠. 제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저더러 오늘 잠은 어디에서 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지금 저렇게 비가 많이 오니까 찜질방을 가야겠죠?” 말하니까 그러면 자신이 카페 열쇠를 줄 테니 여기서 자고 가라는 거예요. 여기서 씻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만큼 그리다가 자고 가라고요. 실제로 제게 가게 열쇠를 맡기고 퇴근하셨어요. 그게 엄청나게 감동이었어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게 열쇠를 맡긴다는 게 대단한 거잖아요. 남해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머리를 자르려고 미용실에 갔는데, 그곳 사장님도 저더러 뭘 그리냐고 물어보시더니, 또 어디서 자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아마 노숙을 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리니, 열쇠를 줄 테니 가게 소파에서 자라는 거예요. (웃음) Q. 작가님의 작업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니까 환대를 해주셨던 거겠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아주 많은 분을 만나셨을 것 같아요.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시나요?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만났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분들하고 계속 연락이 닿고 있어요. 자기 지역에서 함께 전시회를 열자고 문의도 들어오고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이 또 있어요. 저는 막연하게 전국 각 곳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간에 네트워크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없더라고요. 네트워크가 없으니 소녀상 건립에 대한 노하우 역시 공유되고 있지 않은 거예요. 어느 지역을 가도 비슷한 시행착오를 똑같이 겪고 있었죠. 본의 아니게 제가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게 된 곳도 있어요. 각 지역의 추진위끼리 연결을 해주기도 하고, 소녀상을 건립할 때 주의해야 할 점 등을 알려드리기도 했어요. 제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작업을 하면서 느낀 보람 중에 하나죠. Q.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각지의 소녀상을 그림으로 기록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이런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저도 솔직히 모르겠어요. 가끔 스스로 물어봐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까지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지를요. 글쎄요. 일단은 시작했고, 사람들이 의미가 있다고 말을 해주니까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소녀상을 그림으로써 소녀상은 먼 곳이 아닌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요. 소녀상은 어디에나 있거든요. 우리 동네에도 있고, 옆 동네에도 있어요. 수요시위는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진행되지만, 소녀상은 가까운 곳에 언제나 늘 있어요. 누군가 제 작업을 보고 ‘어, 우리 동네에도 소녀상이 있었네?’ 하는 반응을 보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그걸 알리는 게 목표였으니까요. 75개의 유일무이한 소녀상들을 마주하다 Q. 소녀상 이미지에 관한 비판 중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이미지를 소녀로 고정한다는 비판이 있어요. 여기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소녀상은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이 만든 소녀상이겠죠. 우리가 소녀상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습의 소녀상은 두 작가님이 만든 작품이니까요. 저는 소녀상의 이미지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달라요.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소녀상은 현대미술로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요. 두 작가님은 소녀라는 이미지를 통해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피해자들을 기리고 싶었던 거예요. 실제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대다수가 피해 당시 어린 소녀였던 것도 사실이고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연약한 소녀가 아니고, 인권운동가라는 의견이 있는 걸 알아요. 하지만 모든 ‘위안부’ 피해자가 인권운동가로서 활동한 것은 아니고요, 그중 몇 분이 인권운동가로서 활동한 것 역시 피해 이후의 일이죠.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대 형성과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소녀상은 현대미술 작품 중 하나고요. 일본대사관 직원들이 소녀상을 보면 무섭대요. 소녀상이 마치 계속 자기를 보고 있는 것 같대요. 소녀상을 볼 때 내면에 있는 자신의 시각이 비추어져서 그런 거겠죠. 그런데 우리는 소녀상을 보면서 두려움이 아니라 슬픔을 느끼죠. 재밌는 건 소녀상의 표정은 언제나 무표정이라는 거예요. 무표정한 표정에 감정을 씌우는 건 소녀상을 보는 우리 자신이죠. 이게 현대미술의 역할이고요. Q. 소녀의 이미지가 계속 복제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어요. 김세진 작가님은 직접 다양한 곳의 소녀상을 보셨잖아요. 실제로는 어떤가요?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소녀상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김학순 할머니를 모델로 한 소녀상도 있어요. 말하자면 소녀상이 아니라 할머니상이죠. 또 소녀가 아닌 젊고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 소녀상도 있어요. 많은 작가님이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의 소녀상 이미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어요. 물론, 가장 많은 것은 두 작가의 소녀상이죠. 지역에서 소녀상 건립을 추진할 때 여러 작품이 후보로 올라오는데요, 대다수의 지역에서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의 작품이 투표를 통해 선정되곤 해요. 아무래도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니까요. 대부분의 사람이 원하는 소녀상의 이미지는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이에요. 오죽하면 지역 작가님이 만든 소녀상을 제치고 예의상 후보로 올려놓은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의 소녀상이 선정되는 일도 있었겠어요. 심지어 두 작가님의 소녀상이 진짜 소녀상이고, 나머지는 가짜 소녀상이라는 말을 하는 분도 계세요. 두 작가님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계세요. 소녀상의 이미지가 본인들의 작품으로 고착되는 것을 경계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본인들 외에 다른 작가가 만든 소녀상 중에도 좋은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도 하시고요. Q. 혹시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의 소녀상 외에 인상 깊게 보았던 소녀상이 있나요? 부천 소녀상 같은 경우에는 뒷모습이 정면을 향하고 있어요.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하고 돌아가서 앞모습을 보면 얼굴이 있는 자리에 동판 거울이 내 얼굴을 비추고 있어요. 제가 본 동상의 뒷모습은 다름 아닌 나의 뒷모습이었던 거예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굉장히 멋진 작품이죠. 그리고 이화여대 입구 대현문화공원에 있는 소녀상은 파란색 나비 날개를 가지고 있어요. 전국의 대학생들이 참여한 이 소녀상의 파란 나비 날개는 환생·희망·자유·평화의 의미를 담고 있대요. 중구 프란체스코 회관 앞에는 전국 고등학생들이 십시일반 모금해서 만든 소녀상이 있어요. 고등학생들이 참여해서 그런지 왠지 학생의 느낌이 있어요. 부산 소녀상의 경우에는 굉장히 당당한 표정을 띠고 있고요. 화정 소녀상은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각 지역의 소녀상마다 다양한 이미지들이 있어요. 상주는 곶감이 유명하잖아요? 상주 평화의 소녀상 뒤에는 조그맣게 곶감이 조각되어 있어요. 깨알 같죠. 소녀상이 왜 이리 한결같냐고 비판하기 전에 다양한 모습의 소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소녀상은 문제 해결을 바라는 시민의 염원이다 Q. 처음에는 기록의 필요성을 느끼셔서 시작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작업을 계속 진행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소녀상의 의미가 있나요? 개인적으로 김복동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정말 슬펐어요. 이전에 다른 할머니들이 돌아가셨을 때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정도였는데, 김복동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그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날 또 다른 피해자 할머니가 돌아가시기도 했고요. 하루에 두 분이 돌아가신 건 처음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그날 느꼈던 감정이 이전과는 달랐어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확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기미는 전혀 안 보여요. 이제 우리는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신 다음을 준비해야 해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우리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결을 향한 움직임이 우리 다음 세대에도 또 그 다음 세대에도 계속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소녀상이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도 언젠가는 늙고, 우리 아래 세대도 지금의 우리 나이가 되고 또 할머니의 나이가 되는 날이 올 거예요. 하지만 현재 우리와 함께 있는 소녀상은 누군가 철거하고 부수지 않는 한 미래에도 늘 그 자리에 있을 거예요. 소녀상을 매개로 진실과 정의를 향한 의지가 계속 이어질 수 있어요. 물론 정의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존재했다는 진실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현재의 진실은 아직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미래의 진실은 우리가 이 문제를 여전히 잊지 않을 것이라는 걸 소녀상이 알려주는 거거든요. 그렇다고 소녀상을 과하게 신성시하거나 너무 많은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은 경계해야겠죠. 본질은 어디까지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니까요. Q. 관리 문제에 있어 소녀상을 현충 시설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어요. 개인적으로 현충 시설까지는 아니지만, 공공조형물 지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니까요. 하나의 소녀상이 세워지는 데에는 매우 많은 시민의 염원과 노력이 필요해요. 소녀상이 있다는 것은 시민들의 염원이 있다는 거고, 지자체는 시민들의 염원을 이어받아 소녀상을 지속해서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거죠. 그러나 건립과 관리의 책임을 모두 지자체에 떠넘겨 버리면 소녀상이 무분별하게 난립할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어요. 소녀상은 여러 시민이 함께 참여해서 민주적인 절차로 추진될 때 비로소 의미가 발생하는 거잖아요. 시민 참여 없이 지자체 혼자 덩그러니 세워버리거나, 지역 정치인들의 훈장이 돼버리면 본래의 의미가 훼손되는 거죠. 시민들의 염원이 반영되지 않은 소녀상은 결국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겠죠. 이런 문제들을 막기 위해 소녀상 건립은 반드시 시민의 주도로 이루어지게 하고, 관리 감독은 지자체가 하되, 관리 운영을 잘 할 수 있는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별거 아닌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들 Q. 최근에는 소녀상을 만든 작가님들을 인터뷰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네. 전국의 소녀상 건립을 추진한 다양한 분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있어요. 실제로 제작을 했던 작가님들을 만나 소녀상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등의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에요. 현재는 실험하는 정도이지만, 조만간 본격적으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할 계획입니다. 공공예술에 참여한 예술가는 쉽게 잊히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 들면 천안에 있는 국립 망향의 동산에 매우 큰 ‘위안부’ 피해자 추모비가 있는데요, 거기에 여성가족부 장관 이름은 크게 있지만, 작가 이름은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 했지만,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터뷰를 통해 알리고 영상으로 기록하고 싶어요. Q. 다른 방식으로 소녀상을 기록하는 일을 하시는 거네요. 소녀상을 그리는 작업도 앞으로 계속하실 계획이세요? 해야죠. 소녀상은 지금도 계속 건립되고 있으니까요. 점점 할 일이 늘어나고 있어요. 안 그래도 출판사 쪽에서 4~50개 정도의 소녀상을 더 그려서 개정판을 만들자는 제안을 해왔어요. 그리고 준비 중인 전시도 있고요. Q. 혹시 김세진 작가님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예술 작업을 하려고 하거나 혹은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저는 대단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아무 생각 없이 게임을 하고, 애니메이션을 보고, 내일 어떤 커피를 마시면 좋을지 고민하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저는 그냥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눈앞에 소녀상이 있었기에 소녀상을 그린 것뿐이에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보다는 그냥 눈앞에 있는 간단한 것부터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대단한 사람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아요. 저희같이 별거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는 거죠. 별거 아닌 사람들이 땅바닥에 뿌려져 있는 조각을 주워서 퍼즐을 맞추는 거예요. 그러니까 많은 분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부터 시작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Credit 인터뷰 : 금혜지 글/편집 : 현승인 그림 : 김세진 일시 : 2020년 5월 23일 토요일 장소 : 서울시 은평구 불광역 청춘 스터디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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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2023년 제1차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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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결〉의 콘텐츠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시나요?” “가장 유용한 카테고리는 무엇인가요?” 여러분들의 소중한 참여로 만들어진, 2023년 제1차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결과를 소개합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기 위해 온라인 공간에 자리를 마련한 지 어느덧 4년이 지났습니다. 웹진 〈결〉에 늘 한결같은 성원을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하반기에도 더 좋은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2023년 1차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결과 * 조사 기간: 2023.6.14.(수) ~ 7.5.(수) | 참여자 107명 1. 성별 여성 72.9% 남성 19.6% 밝히기 원치 않음 7.5% 2. 연령 30대 34.6% 40대 29% 50대 16.8% 20대 15% 3. 직업 직장인 52.3% 연구자 15.9% 프리랜서 11.2% 학생 8.4% 활동가 4.% 기타 7.5 4. 어떤 채널로 웹진 결을 알게 되었나요? 지인 추천 27.1% 한국여성인권진흥원 홈페이지 25.2% 연구소 행사 14% 연구소 페이스북 13.1% 연구소 인스타그램 9.3% 광고 5.6% 기타 5.7% 5. 웹진 결의 콘텐츠에 대해 전반적으로 만족하시나요? 매우 그렇다 61.7% 그렇다 30.8% 보통이다 7.5% 6. 웹진 결 콘텐츠 내용은 참신성을 지녔나요? 매우 그렇다 59.8% 그렇다 30.8% 보통이다 8.4% 그렇지 않다 0.9% 7. 웹진 결 콘텐츠가 업무나 연구 활동에 유익한가요? 매우 그렇다 58.9% 그렇다 29.9% 보통이다 11.2% 8. 웹진 결의 내용 중 가장 유용한 카테고리는 무엇인가요? 인터뷰 32.7% 특집 25.2% 논평 17.8% 에세이 16.8% 좌담 5.6% 자료해제 1.9% 9. 웹진 결에서 보완했으면 하는 카테고리는 무엇인가요? 자료해제 30.8% 인터뷰 19.6% 특집 14% 논평 12.1% 에세이 12.1% 좌담 11.2% 10. 웹진 결의 디자인(이미지, 문단 배열, 글씨 크기 등)에 대해 전반적으로 만족하시나요? 매우 그렇다 53.3% 그렇다 30.8% 보통이다 15.9% 11. 주변에 웹진 결을 추천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가요? 매우 그렇다 65.4% 그렇다 29.9% 보통이다 3.7% 그렇지 않다 0.9% 12. 웹진 <결>에 전하고 싶은 의견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중인 분들의 이야기를 인터뷰로 더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덕분에 몰랐던 사실들 배워갑니다 한국 중국 대만인 정도만 위안부가 있었는 줄 알았는데 세계 여러 곳에 일본군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곳을 통해 알게 되었네요. - 신진 연구자들의 좌담회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앞으로도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토론이 활성화 될 수 있도록 좋은 글 많이 부탁드려요. -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자료로 제시하기에도 유용합니다. 앞으로 나올 기사들도 기대하겠습니다. - 위안부 문제와 여성인권과 관련된 이슈들 사이의 연결성을 강화해주시면 좋을 듯 합니다. - '위안부'관련하여 많은 공부가 됩니다. - 일반인이 포털 검색, 기사 등으로는 접하기 쉽지 않은 이슈나 자료, 인터뷰 등을 웹진으로 받아볼 수 있어 유익합니다. 특히 '연구소 소식' 란에서 몰랐던 행사 일정이나 이슈를 알게 되어 참여하기도 하는 등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위안부'에 대한 많은 자료 해체와 해외 자료 공개 등이 이어져 잊지 않고 정의가 바로 세워 지기를 기대합니다. - 일본군 성노예의 역사를 기억하고, 자료를 모으고, 토론하고, 널리 알리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온라인 잡지가 너무 깔끔하게 잘 편집되고 내용도 좋아서 새로운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에 감동입니다. 영상시대이니, 영상자료까지 함께 만들어 놓으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본 정부는 절대 반성하지 않겠지만, 반성을 요구하는 역사는 계속되어 결국 일본을 반성하게 할 것 입니다. 참혹한 역사를 꼭 기억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합시다. 노력하고 싸워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치지 마시고, 즐겁고 행복하게, 줄기차게 싸워주세요. 존경합니다. 파이팅. - 자료해제가 계속 업데이트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글과 신선한 기획에 감사드립니다. - 재미와 유익함 모두 잡아서 좋아요. 많이 배웁니다. - 전쟁범죄와 인권유린의 현장을 꿋꿋이 지켜내 주세요. - 절대로 잊혀지거나 묻혀서는 안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전파할 수 있도록 해야 겠습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와 웹진 <결>에 응원과 격려의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 정부나 정책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오래 오래 그자리에 있어주세요! -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다 꼼꼼히 볼 수는 없지만 언제나 노고에 감사드리며 한줄이라도 더 읽으려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요즘 극우단체들이 온오프라인에서 위안부 관련 거짓날조를 퍼뜨리고 있는데 온라인에서 횡횡하는 거라도 한번 좀 깊게 다뤄주시면 좋겠습니다. 학생들이 보고 잘못된 지식정보를 습득하고 있어서 크게 걱정이 됩니다. - 현재 영어 번역 서비스만 제공되는 걸로 아는데 혹시 가능하다면 일본어도 제공되면 좋겠어요. 얼마 전에 일본 지인들에게 웹진을 추천해줬었는데 사진이나 그림만 알아볼 수 있다고 아쉬워하더라구요. 웹진 결의 진심어린 이야기가 분명 많은 일본인들에게도 큰 울림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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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위안부’ 문제와 일본 국회 입법운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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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입법해결운동의 어려움: 현실적인 두 개의 벽!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는 데 있어 두 가지 큰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 사태의 해결을 위해서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피해자 측이 환영할 만한 법안을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길이었다. 필자는 입법 해결을 위한 개인적인 구상안1을 만들어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피해자 측에 설명하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하지만 몇 번이고 회의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필자가 작성한 입법 구상안에 대한 동의를 얻을 수 없었다. 둘째, 국회 내에서도 어려움이 있었다. ‘조약의 항변’을 돌파할 필요가 있었다. ‘조약의 항변’을 이유로 ‘입법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정부와 국회(보수파) 관계자들은 국가 보상을 위한 입법행위 자체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위배된다고 보았다. 그러한 입법행위는 조약을 준수해야 할 국가공무원인 국회의원의 헌법상 의무에 위배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의원입법 노력 자체를 막으려 했다. 이 논리를 뚫고 참의원 법제국의 협력을 얻어내지 못하면 의원들이 법안을 제출해도 인쇄되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 두 개의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토오카 쇼지 참의원 의원을 중심으로 국회의원들과 입법운동에 나선 필자와 다른 시민들은 5년 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필자는 필자의 구상안이 한국 피해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한 채 1998년 2월 미국 시애틀 워싱턴대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 직전에 당시 정대협 고문이었던 박원순 변호사에게 왜 필자의 구상안이 환영받지 못하는지 이유를 작성해달라고 한 뒤, 그 의견서를 모토오카 의원과 참의원 법제국 책임자에게 전달했다. 참의원 법제국 직원들은 정대협의 의견서를 진지하게 읽은 뒤, 어떤 법안이 피해자들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을지 성실하게 연구해 주었다. 거기서 생겨난 것이 바로 ‘사죄’를 목적으로 하는 모토오카 법안이었다. 1999년 9월 8일 모토오카 쇼지 참의원 의원은 노나카(野中) 관방장관에 대한 국회 질문에서 의원입법에 의한 보상 법안이 조약 위반도, 헌법 위반도 아니라는 답변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2 그 결과 참의원 법제국으로부터 공식적인 협력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전시 성적강제피해자 문제의 해결 촉진에 관한 법률안’(통칭 ‘모토오카 법안’)의 입안에 성공했다. 이 법안에는 필자의 구상안에는 없었던 ‘사죄’라는 단어가 들어있었다. 이 법안을 가지고 한국을 방문한 모토오카 의원은 직접 정대협 대표를 만나 설명했고, 환영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모토오카 쇼지 참의원 의원은 두 가지 어려운 장애물을 극복하고 입법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2000년 4월 10일 제147회 정기국회에서 모토오카 의원이 중심이 되어 마련한 법안이 민주당 법안으로 참의원에 제안된다. 2000년 10월 30일 제150회 임시국회에는 민주당, 공산당, 사민당이 각각 비슷한 법안을 동시 제안함에 따라 3당이 협의하여 법안이 단일화되었다. 2001년 3월 21일 제151회 국회에 3당 공동 제안 법안이 제출되었고, 이후 2008년 제169회 정기국회까지 10회에 걸쳐 야당 공동 제안 법안이 참의원에 계속해서 제출되었다.3 그러나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찬성하지 않아 입법에는 실패했다. 5. 회상: 왜 입법이 실현되지 못했는가? 2009년 9월 대망의 정권교체가 실현되면서 민주당 중심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 정권이 성립되었다. 하토야마 총리를 누가 설득할지가 과제였다. 필자에게는 아직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하토야마 총리는 첫 방문 국가로 한국을 선택했을 정도로 한일 관계를 중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나 한국의 시민운동 모두 왜 일본 정부가 이 법안을 국회에 제출해서 입법 해결을 추진하도록 강력하게 압박하지 않았는가?’라는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필자가 그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수요집회에서 발언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집회는 세미나와 달리 입법 운동의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장소였다. 정대협 관계자에게 ‘연구에 더욱 힘써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다. 세미나를 개최하지 않더라도 필자의 논문 등을 관계자들 사이에서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본 정부와 국회에 ‘입법을 통한 해결’을 압박할 절호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한국 정부나 운동단체 모두 일본 정세에 대한 정확하고 적확한 정보가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입법해결운동의 주축으로 활약하던 민주당의 여성 국회의원 오카자키 도미코(岡崎トミ子) 참의원 의원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정대협의 부탁으로 서울 주재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서 발언한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오카자키 의원은 일본 국회에서 보수파 의원들로부터 “일본의 국회의원이면서 ‘반일’운동을 했다”는 부당한 공격을 받고 민주당 내 직책에서 물러나게 되어 입법해결운동도 정체되고 말았다. 수요집회는 한국의 국내 운동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내 운동의 실효성이 떨어지지 않으려면 연구 활동에 힘을 쏟아 일본 정부와 국회를 압박해 ‘위안부’ 문제를 입법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2000년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가 이끌던 민주당의 차기 내각을 모토오카 의원이 설득했을 때, ‘모토오카 법안’을 의원입법으로 국회에 제출하기로 결정한 것은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 본인이었다. 2009년 하토야마 정권이 들어섰을 때, 모토오카 전 참의원 부의장(2004년 정계 은퇴)이 상경해 하토야마 총리를 만나 ‘모토오카 법안’을 민주당 내각의 정부 법안으로 국회에 제출해 달라고 요청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히라노 히로부미(平野博文) 관방장관4이 사전에 ‘무슨 일로 총리를 만나려는 것이냐?’라며 자유로운 면담을 방해했다. 히라노 관방장관은 모토오카 의원에게 “‘위안부’ 문제의 입법 해결을 요청하려는 게 아니냐? 모토오카 씨가 부탁하면 하토야마 총리는 아마 진행하자고 할 게 뻔하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 ‘위안부’ 문제 이야기를 꺼낼 요량이라면 면회를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때문에 모처럼 하토야마 총리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모토오카 전 참의원 부의장은 요청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필레 유엔인권고등판무관에게 연락하여 빠른 시일 내에 일본을 방문하여 총리를 만나 달라고 요청했다. 필레 씨는 곧바로 일본 정부에 방일 수용을 요청했지만 외무성은 다양한 구실을 대며 방일 시기를 최대한 늦추려 저항했다. 가까스로 방일 및 하토야마 총리와의 면담이 성사됐고, 총리는 심야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필레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면담은 2010년 5월에야 이루어졌다.5 얼마 지나지 않아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사임을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이는 바람에 입법 해결의 절호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입법 해결을 가로막은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여성차별이다. 필자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 시애틀의 워싱턴 대학에서 젠더 문제를 연구했다. 그 결과 일본의 여성차별은 구조적이고 심각한 문제로, 쉽게 개선할 수 없는 매우 어려운 문제임을 뼈저리게 느꼈다.6 일본의 남성 중심 사회야말로 ‘위안부’ 문제를 일으킨 근본 원인이다. 결국 이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일본 국회가 자력으로 입법 해결을 하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입법운동의 한계는 일본 국회에서 여성 의원 숫자가 극단적으로 적고, 열세라는 틀림없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각주 1. 일본변호사연합회는 입법 해결을 제언했지만, 그 법안은 작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가 개인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밖에 없었다. 戸塚悦朗, 「従軍「慰安婦」被害者個人賠償法案」, 戦後補償実現キャンペーン‘96, 『戦後補償法案を考える』, 1996년 4월 26일, 65-67쪽. 2. 本岡昭次,『「慰安婦」問題と私の国会審議』, 本岡昭次東京事務所(2002년), 115쪽. 3. 그 사이에도 정계개편이 이어지며 격동이 계속되었다. 모토오카 쇼지 의원은 2001년 8월부터 참의원 부의장으로 임명되면서 위치가 바뀌었기 때문에, 오카자키 토미코 참의원 의원 등 야당 여성 의원들이 입법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이어받게 되었다. 앞의 책 本岡 『私の国会審議』, 앞의 논문 戸塚 「市民が決める「慰安婦」問題の立法解決」. 4. 히라노 관방장관은 전 마쓰시타전기산업노조 출신으로 민주당 내 보수파였다. 민간 노조도 연합 차원에서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한 기부운동을 펼쳤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은 충분히 할 만큼 했다. 입법 해결은 필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5. 戸塚悦朗, 「「パンドラの箱」をあけようーー菅政権は国連勧告を尊重して 希望に満ちた未来を拓くことができる)」, 季刊, 『中帰連』, 2010.11, 48号30-37쪽. 6. 戸塚悦朗, 『ILOとジェンダーー性差別のない社会へ』, 日本評論社,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