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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2024 기림의 날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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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기림의 날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합니다!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하여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에서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합니다. 이번 온라인 영화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국내외 영화를 '입을 떼다', '귀를 열다' 두 개의 주제로 묶어 소개합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소개되는 영화나 거의 볼 기회가 없었던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온라인 영화제 일정◀ #상영 플랫폼 | 퍼플레이 온라인 극장 #주최·주관 |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관람 방법 | 퍼플레이 회원가입을 통해 누구나 관람 가능(무료) #상영 기간 | 2024년 8월 14일(수)~27일(화) #문의 | nbf@skunkworks.co.kr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주제 1.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영상기록물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현존과 그들의 목소리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에서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입을 떼다'에서는 생존자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들의 구술증언을 영상에 담는 데 집중했던 ‘위안부’ 관련 초기 영화들을 살펴봅니다. 여기에는 최초의 ‘위안부’ 피해자로 발견되었던 오키나와의 배봉기, 네덜란드 출신의 ‘위안부’ 피해자 얀 루프 오헤른의 이야기와 박수남 감독의 초기 작품이 포함됩니다. 상영 기간 : 8월 14일(수) ~ 8월 20일(화) 상영작 🎬 오키나와의 할머니 | 일본 | 야마타니 데쓰오 | 1979년 🎬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 | 일본 | 박수남 | 1991년 🎬 50년의 침묵 | 호주 | 네드 랜더 | 1994년 🎬 일용할 양식 | 호주 | 루비 챌린저 | 2018년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입을 떼다' 상영작 소개글 보러 가기 주제 2.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초기 작품들이 ‘위안부’로 동원된 피해자들의 피해사실을 그들의 증언을 통해 알리는 데 집중했다면, 생존자들이 얼마 남지 않은 2000년대 이후 생산된 작품들은 포스트 피해자 시대를 예비하며 피해자들이 남긴 증언을 어떻게 후세대에 전달하고 기억해 나갈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귀를 열다’에서는 2000년대 이후 중국과 한국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을 통해 피해자의 증언과 기억의 전승을 위한 새로운 시도들을 살펴봅니다. 상영 기간 : 8월 21일(수) ~ 8월 27일(화) 상영작 🎬 가이산시와 그 자매들 | 중국 | 반중이 | 2007년 🎬 그리고 싶은 것 | 한국 | 권효 | 2012년 🎬 22 | 중국, 한국 | 궈커 | 2015년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귀를 열다' 상영작 소개글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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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도미야마 다에코의 예술-운동: 비/인간 존재의 ‘포스트 메모리’를 기다리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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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의 도입: 가해성을 인식하고, 문답적 증언과 전형적 표상을 벗어나다 두 번째 물음. 비체험자이자 구조적 가해자의 위치에서, 어떻게 피해 당사자에게 공감하고 자신의 문제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도미야마의 예술-운동의 핵심에는 가해성에 대한 성찰이 있다. 영상 〈금지된 이미지〉에서 도미야마는 전쟁에 대한 일본의 가해성과 책임이 애매하게 이야기된다고 비판한다. 일본의 패전이란 말은 항상 애매한 말이죠. 그래서 ‘종전’이라고도 하고 전쟁을 마치 흘러간 추억처럼 이야기하기는 해도 가해적 측면에서 일본인이 아시아에 대해 뭘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말 미디어든 뭐든 깊이 다루지 않죠. 그래서 전쟁의 기억이 점차 애매해졌죠.-중략-그래서 80년 광주를 그린 뒤에는 제 일생 동안 전쟁 책임의 문제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아무도 하지 않으니까, 반드시 해내야겠다고요.(금지/5:26) 샤먼은 피식민자의 고통을 가해자의 위치에서 대변할 수 없다는 윤리의식에서 도입되지만, 바로 그 구조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도미야마는 “가해자인 일본인이 피해자를 주체적으로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해 샤먼을 끌어들이지만, 동시에 스스로 “샤먼이 되어 지쿠호 탄광에서 일해야 했던 죽은 조선인 탄광부를 불러들”인다.[1] 샤먼이 등장하는 슬라이드 작품에서는 음악, 영화, 등 다양한 장르와의 협업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변화를 일컬어 도미야마가 대위법적으로 ‘복수의 타자’의 시점을 확보한 것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2] 이처럼 샤먼은 기록될 수 없었던 ‘위안부’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녀들과 연결되어 있던 동시대인의 이야기, 더 나아가 흐느낌·탄식·바람소리·바다울림 등 비/인간의 소리를 담아낸다. 〈튀어라 봉선화〉에는 네 층위의 소리가 겹쳐진다. 질문하는 츠치모토 감독, 대답하는 도미야마, 증언·구술의 내레이션, 시·소문·의성어·의태어이다. 내레이션 낭독은 재일조선인 연극인 이려선이 담당하는데 “신세타령”, “어머니” 등은 한국어 음독(밑줄로 표시) 그대로 발음된다. ‘신세타령: 죽은 조선인 광부가 말한다’라는 첫 부분은 샤먼을 부르며 시작한다. 이후 영상이 진행됨에 따라 탄광에서 죽은 조선인의 흐느낌·울음이 뒤섞인 증언이 나온다. 제 마음에는 지금 조선 무당, 샤먼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일본이라는 이국 땅에 ‘어떤 조선인’으로 묻힌 사람들의 한의 목소리, 그 애끓는 신세타령을 말하게 해주세요. (봉선화/14:00) ‘배가 고파요, 어머니. 석탄을 캐야 하는데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자 목각으로 맞았다. -중략- 감독관 놈이 무서워 작은 목소리로 불렀어. 어머니...어머니...(봉선화/27:30) 이러한 안용한의 사정은 1981년에 출판된 『강제연행 강제동원-지쿠호 조선인 광부의 기록』에 실린 ‘안용한(49세)’의 구술과 거의 일치한다.[3] 더욱 흥미로운 것은 ‘봉선화 밤의 깊이로’ 부분에서 배경음으로 펼쳐지는 탈춤소리, 〈황토의 길〉 연작을 배경으로 들리는 노랫말과 소문 등이다. ♪쌀이 나는 논은 신작로가 되고 /말 좀 하는 이는 감옥으로 가네. /일 좀 하는 이는 공동묘지에 가고 /어려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계집은 유곽으로 보내졌네. /미쳐버린 이는 꿈에서 깨고 /멀리서 날이 밝아오고 있네.♪ 바닷길 조선해협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가면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다”고 들었다. 일본에 가면 “3년 일해 돈을 모을 수 있다”고 들었다. “한 번 데려가면 돌아올 수 없는 지옥의 연락선”이라고 사람들은 불렀다. (봉선화/17:10, 이탤릭 표시는 소리의 톤이 바뀌는 부분-인용자) 마당놀이, 탈춤소리, 노랫말, 소문…. 이 소리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세상에 대한 비판, 가난 속의 들뜬 희망 등을 담고 있는 ‘증언 속 증언’이다. 〈튀어라 봉선화〉에는 윤동주의 시가 등장하는데 이를 둘러싼 도미야마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연계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윤동주의 시 「십자가」가 〈벽 안의 원한〉을 배경으로, 「서시」가 〈유라시아 성좌에〉를 배경으로 들린다. 도미야마는 재일조선인 김소운이 번역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참고했거나[4] 민주화 운동에서 낭독되던 「서시」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구전되는 노래와 소문,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시 등은 강제동원된 당사자와 주변의 동시대인을 연결하는 ‘확장된 증언’이다. 특히, 샤먼의 도입이 그 여성주의적 의미를 심화시키는 것은 〈바다의 기억〉연작 및 슬라이드 작업에서다. 도미야마는 “남성들이 그린 것은 전장의 슬픔이었어요. 그렇지만 여성들이 마주해야 했던 것은 남겨진 사람들이었죠”(봉선화/4:15)라며 남성 화가들의 피해 의식에 젖은 전쟁 표현을 비판한다. 그리고 〈바다의 기억〉에서 저항과 해방을 외칠 수조차 없는 ‘위안부’의 경험을 그릴 방법을 모색한다. 그때 다시 등장하는 것이 ‘샤먼’이다. 〈바다의 기억〉 은 ‘바다의 기억’, ‘머나먼 남쪽 자바’, ‘태평양 해저에서’,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 ‘가룽간 축제의 밤’, ‘말하자! 목소리를 높이자!’라는 6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입인 ‘바다의 기억’은 “제2차대전 때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의 여성들에게 바칩니다”(바다/00:28)라는 말로 시작하고 이어 무당의 소리-무당에게 부탁하는 소리가 서로 응답한다. 즉 샤먼의 도입은 ‘위안부’의 증언을 문답 구조가 아닌 응답 구조로 바꾸어 놓는다. 나는 무당이다. 바닷새와 물고기의 이야기를, 반세기 전에 태평양 밑으로 가라앉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전쟁의 이야기. 나는 무당이다. 나는 죽은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바다/01:25) 무당이여, 무당이여, 들어 주소서. -중략- 우리 언니 김순덕은 대체 어디에 있나요. 살아는 있나요? 죽어버렸나요?(바다/03:00) 언니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무당은, 남태평양 바닷속을 안내해 줄 자바의 정령 와양(Wayang)을 불러낸다. 와양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인형극이다. 조선의 무당이 인도네시아의 인형극 와양을 만나 바닷속에 가라앉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듣고 끌어낸다. 사실 증언을 포함한 모든 인터뷰 형식은 고해성사, 법정 심문 등을 기원으로 한다는 점에서 경험자/해석자 사이의 위계를 심화시킬 수 있다.[5] 그러나 〈바다의 기억〉에서는 증언하는 피해 당사자와 그것을 듣는 비체험자 사이에 샤먼이 개입함으로써 이 위계적 문답 구조를 해체하고 당사자의 호소를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존재들에게 연결시킨다. ‘위안부의 이야기’에서도 ‘위안부’로 끌려갔던 피해 당사자들의 말이 직접적으로 노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무명의 집단적 발화이며, 의성어·의태어·말줄임표로 점철되어 인간/비인간 표현의 경계를 넘나든다. 아이고! 뼈가 쑤신다! 우리나라를 빼앗고, 내 청춘을 짓밟고, 내 목숨을 빼앗은 일본군! 아이유..., 그로부터 사십여 년 이 머나먼 남쪽 바다에 가라앉은 나. 외롭고 외로워.... 아무도 찾지 않는 바닷속에 묻혀버린 뼈인 나(바다/16:00). 결국, 동생은 언니 순덕을 찾지 못한다. 바다의 광활함 때문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위안부’였던 순덕을 ‘수치’로 치부해 버려 진심으로 찾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화자인 ‘나’는 남자들은 첩을 두고 기생과 놀아나도 비난받지 않는데, 전장에서 돌아온 여자들은 죄인처럼 숨어 살아야 한다고 울분을 토한다. “얼마 안 남은 인생, 고향을 꿈에 그리면서도 돌아가지 못한 여성들이여, 말해라, 목소리를 높여라!!”(바다/24:00) 이 말은 그/녀들을 맞이해야 할 공동체의 응답을 촉구한다. 마지막으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무당이 순덕이를 찾아다니며 만나는 다층적 존재들이다. 무당은 “거기 있는 당신은 누구?”라고 물으며 남태평양 해저를 종횡한다. 이 질문에 일본 배에서 새우잡이를 했던 자바인, 서핑하다 파도에 휩쓸려온 도쿄의 대학원생, 해군 병장, 육군 보병, 노무자였던 수라바야의 행상인 등이 답한다. 바닷속에는 ‘위안부’, 가족을 두고 죽는 것을 고통스러워하는 이등병,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해군항공대원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동생은 언니 대신, 대구에서 ‘위안부’로 끌려간 이혜경, 광주에서 끌려간 양지순과 만난다. 이처럼 “거기 있는 당신은 누구?”라는 질문이 닿은 곳은, 남태평양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 결코 손쉬운 ‘화해’를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죽은 존재들의 관계이다. 도미야마가 ‘위안부’를 소재로 하여 그린 바다에는 생선, 하얗게 도드라진 해골, 쇠사슬, 꽃, 인어, 소라, 일본 국기 등이 뒤섞여 서로 저항한다. ‘위안부’ 표상의 전형성을 깨뜨리는 이런 이미지에 대해서 레베카 제니슨은 표상의 지배적 시스템을 근원에서 교란하는 힘이 있다고 분석한다.[6] 이처럼 가해성의 구조적 인식에서 도입된 샤먼이라는 매개는, 증언이 지닌 문답 구조의 폭력성, ‘위안부’의 고통만을 초점화한 표상의 전형성을 벗어나, ‘위안부’와 함께 바다에 가라앉은 가해/피해가 뒤섞인 존재들 사이의 불화/연결을 상상하게 한다. #도래할 예술-운동: ‘위안부’에서 ‘자파유키’로, 그리고 비/인간 존재로 세 번째 물음. ‘위안부’ 재현이 고통의 순간을 영원히 반복하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와 연결되고 당사자와 비체험자 모두를 해방시키는 순간을 낳을 수 있을까? 한 달 전쯤 ‘위안부’ 증언을 초점화한 전시 〈증언을 만나다(Encountering Testimonies)〉[7]를 보러 갔다. 여기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AI로 구현한 콘텐츠 〈영원한 증언〉을 보게 되었다. 팸플릿에는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들의 녹화된 증언과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하여 관람자들이 증언자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제공하는 새로운 형태의 전시 프로젝트”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사실 이 콘텐츠는 이전에도 전시된 적이 있고 그에 대한 다양한 비판적 논점도 제기된 바 있다. 이지은은 〈일본군‘위안부’ 증언의 과거와 미래(2): 영원(永遠)한 증언과 ‘오지 않은(未來)’ 증언〉[8]에서 이 콘텐츠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던 학술 워크숍 〈다차원의 증언을 만난다는 것〉(2022년 7월 29일)에 참여한 토론자들의 발언을 정리해 주었다. 그 논의를 요약하면, 이 콘텐츠가 역사 부정론과 역사 왜곡의 공격이 거세어지고 고령인 피해 증언자들이 점차 세상을 떠나는 등 “오늘날 증언이 당면한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기획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자칫‘위안부’의 피해자적 면모만 부각할 수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하는 견해들이었다. 또한 발언자들은 콘텐츠의 질의응답이 사전에 모두 결정되어 있다는 점을 들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로써 집단적 기억을 만들어가는” 진정한 대화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도 제기한다. 이지은은 이 글 끝에서 “‘영원한 증언’은 증언자를 ‘보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 그야말로 ‘오지 않은(未來)’ 증인을 초대함으로써도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처럼 여러 각도에서 진심 어린 비판적 논점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이번 새로운 전시에서는 콘텐츠의 변화가 있으리란 기대를 안고 갔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앞으로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해도, 현재의 이 변화 없음은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전형화를 보여주는 한 예가 아닐까 싶어 우려된다. 이러한 고민은 도미야마 다에코의 예술-운동이 제기한 물음들─기술과 형식의 도입, 가해성을 포함한 위치성의 인식, 비체험자로 확대된 공감 가능성이 어떻게 가능할까─과도 만난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경험을 기억/기록하는 힘은, 당사자의 증언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현재에도 비가시화된 젠더기반 폭력의 문제와 싸우는 힘들과 연결될 때 비로소 펼쳐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도미야마가 일본군‘위안부’에 천착해서 만든 슬라이드 〈바다의 기억〉의 상영이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면서 만들어낸 예술-운동의 궤적은 그런 점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위안부’와 ‘팔려 온’ 태국 이주 여성 (성)노동자의 연결이다. 도미야마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 및 여성운동과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었으며[9], 일본 ‘아시아여성의모임’과 기관지 『아시아와 여성해방』[10]에 참여하는 등 아시아 여성에 대한 일본의 신식민주의적 (성)착취에 대한 비판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1989년 방콕에서 <바다의 기억>을 상영한 날 도미야마는, 다음에는 “태국을 테마로 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 약속은 〈돌아오지 않는 소녀(帰らぬ少女)〉로 구체화된다.[11] 1990년대 일본은 버블 경기였고, 태국, 미얀마, 중국, 라오스 등 아시아 여기저기서 소녀들이 일본으로 ‘팔려’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동남아시아에서 ‘팔려 온’ 많은 여성들은 ‘자파유키’라고 불렸다.[12] 〈돌아오지 않는 소녀〉를 제작하는 동안에도, 일본의 버블 경기를 떠받치고 있는 그/녀들의 죽음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태국 출신 여성 노동자가 우쓰노미야 호텔에서 피살(91년 3월)되었고, 태국 출신 미등록 이주여성이 오사카에서 투신 자살했으며(91년 3월), 이바라키현에서는 태국 여성의 구출을 요청하는(91년 5월) 일들이 연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미야마는 ‘위안부’로 끌려갔다 돌아오지 못하는 여성들과 ‘팔려 온’ 태국 이주여성 노동자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간파한다. 도미야마가 연결한 이 실타래는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여성, 난민여성, 그리고 성노동자에게로 향하게 한다. 동시에 현재 강렬한 파동을 품고 펼쳐지고 있는 한국의 이주여성, 난민여성, 성노동자 운동들은[13], 전형화된 피해자 형상에 타격을 가한다. 다른 하나는, ‘위안부’에서 비/인간 존재로의 연결이다. 식민주의와 전쟁에 대한 원체험을 안고, 소수자의 곁에 선 기록작가가 되겠다는 도미야마의 결심은, 3.11 재해 이후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함께 비/인간 존재에게로 확장된다. 〈바다로부터의 묵시〉(2012)에 삽입된 바람소리, 흐느낌, 침묵, 비명 등은 〈바다의 기억〉 속 목소리 없는 자들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비/인간 존재들의 경험을 담은 또 하나의 기억의 ‘바다’를 개방한다. 도미야마의 예술-운동은, 시공간적 거리와 인/종적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 폭력과 차별에 노출된 채 삶을 버텨온 존재들을 알리고 연결시키려는 끊임없는 시도였다. 도미야마가 드러낸 ‘위안부’와 근로정신대의 고통은 2020년 12월 농촌 비닐하우스에서 동사한 이주노동자 여성에게로, 2022년 8월 16일 부산출입국·외국인청에 구금된 지 8시간 만에 사망한 A씨에게로, 팬데믹의 원인이 된 공장식 축산 속 비/인간 동물의 죽음으로 연결되어 간다. 그리고 이 모든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와 전쟁과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속에서, 저항조차 불가능한 위치에서도 끊임없이 해수면 위로 떠오르는 비/인간 존재들의 어둠 속 몸부림을 하얗게 비춘다. 각주 ^ 富山妙子・真鍋祐子, 「対談:なぜ光州を語り, 描き続けるのかー光州事件30周年の年に」, 『月刊百科』, 12월호, 平凡社, 2010, 9쪽. ^ 마나베 유코 저, 「도미야마 다에코 화백의 작품세계 속 '무당' 모티프」, 김석화 외 지음, 『환동해지역의 오래된 현재』, 해토, 2017, 39쪽, 46쪽. ^ 林 えいだい, 『強制連行・強制労働―筑豊朝鮮人坑夫の記録』, 現代史出版会, 1981, 139~141쪽. ^ 윤동주의 시구가 “모든 죽어가는 것을”이라고 쓰여진 것을 볼 때, 김소운의 번역본(金素雲 訳, 現代韓国文学選集(第五巻詩集), 冬樹社, 1976년 4월)을 참고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히토 슈타이얼 지음, 안규철 옮김, 『진실의 색』, 워크룸 프레스, 2019, 34쪽, 37쪽. ^ 마나베 유코, 앞의 글, 2017, 48쪽. ^ 2022.10.27.-11.7. 주관: 중앙대학교 산학협력단 접경인문학연구단, 주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후원: 대한민국 여성가족부. ^ 이지은 〈일본군 ‘위안부’ 증언의 과거와 미래(2): 영원(永遠)한 증언과 ‘오지 않은(未來)’ 증언〉, <<결: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 웹진>>, 최종입력:2022.9.26, 최종수정: 2022.11.28, 링크:https://kyeol.kr/ko/node/479 ^ 이미숙, 앞의 글, 2020, 199쪽. 파리의 민주인사 정성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초대 대표였던 윤정옥 및 이효재와의 연대가 있었다. ^ アジアの女たちの会, 『アジアと女性解放』 창간호, 1977년 6월. 이 잡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졸저, 「트랜스내셔널 여성문학의 공백」, 『여성문학연구』 48호, 2019.12를 참조. ^ 富山妙子, 앞의 책, 2009, 236-237쪽. 〈돌아오지 않는 여자〉에 대한 한 단락의 설명은 이 페이지의 인용임. ^ 이미숙, 앞의 글, 199쪽. ^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에서는 2022년 12월 16일에 〈2022년 성노동자 추모행동〉으로 “성노동자, 성소수자, 약물 사용자, 이주민, HIV/AIDS 감염인, …, …, …, …, …, 모든 취약한 존재가 초대된 장례식”을 했다. 이 드물고 귀한 자리에 모인 발언자들은 취약성이란 어떤 존재에 내재된 특성이 아니라 어떤 구조적 조건 속에서 심화되는 상태임을 명확히 하고, 취약한 상태에 놓인 존재들 사이의 연결과 힘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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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인터뷰 [김숨-소영현 대담] 최초의, 최선의, 최후의 질문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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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되지 못한 말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김숨 작가의 중편소설 『듣기 시간』에 나타난 ‘침묵들이 말이 되는 자리’는 그간 우리가 놓친 증언자의 목소리를 되찾게 한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길원옥 님의 증언 구술 채록을 통해 정서를 나누고, 자신을 돌아보고, 질문하고, 기록하며 침묵을 듣는 곳까지 도달한 작가는 마침내 “최초의, 최선의, 최후의 질문은 ‘듣기’”라는 선언을 이루어낸다. ‘위안부’ 소설 『한 명』을 시작으로 『흐르는 편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증언집),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일본군 ‘위안부’ 길원옥 증언집), 그리고 『듣기 시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변화하고 또 발전했을까. 구술 채록은 증언자의 목소리를 그대로 받아적는 것이 아니라 채록자와 증언자 간의 관계를 통해 의미가 계속해서 바뀌는 작업이라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증언을 하는 자와 듣는 자 간의 관계는 때로는 조화를, 때로는 불화를 낳기도 한다. 구술 채록 과정에서 작가가 갖게 된 문제의식에 대해 들어보기 위해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김숨 작가와 문학박사 소영현(한국문학번역원 교수)의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듣기 시간』을 중심으로 ‘증언’과 ‘듣기’, ‘들을 수 있음’의 사이사이를 경유하며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소영현 증언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의 증언을 채록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성숙해졌다는 언급을 여러 차례 하신 바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경험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김숨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분들은 우리가 알고 있듯 살아 돌아오시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시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한 분들이세요.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끌어안고 하루 또 하루 살아내신 분들을 가까이에서 뵙는 것 자체가 경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소영현 김복동, 길원옥 두 분에 대한 증언소설을 다시 읽다보니 두 소설의 사뭇 다른 분위기가 새롭게 눈에 띄더라고요.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가 지닌 각각의 면모가 작품에도 녹아들었을 텐데, 두 분을 만나 뵈었을 때 느낌이 어떻게 달랐는지, 직접 구술 채록자의 입장이 되어 작업해본 경험은 어떠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숨 두 분이 정말 다르세요. 한 공간에 살고 계셨지만 다른 기질과 개성을 갖고 계셨고 다른 언어로 말씀하셨어요. 김복동 할머니는 선이 굵으셨어요. 꼭 해야 할 말씀만 아껴 하시는, 대쪽 같은 선비 이미지가 저절로 겹쳐 떠오르는 분이셨지요. 뵙자마자 권위가 느껴졌는데 할머니께서 갖고 계신 ‘강함’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겉으로 드러났어요. 굉장한 인내심의 소유자이시기도 했고요. 반면에 길원옥 할머니는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셨어요. 하지만 그분 역시 만만찮은 인내심의 소유자이시지요. 김복동 할머니를 뵈었을 때는 항암치료를 하고 계셔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말씀도 들려주시지 않는 그 시간에도 할머니께서 끊임없이 어떤 말씀을 들려주고 계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었어요. 침묵이 단지 침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길원옥 할머니는 손발이 딱딱 맞아 얼굴만 보고 있어도 그저 좋은 친구 같은 느낌을 선물해주셨어요. 할머니와의 대화가 무척 문학적으로 느껴져서 흥분이 되곤 했어요. 대화가 뜬금없고 엇갈리고 엉뚱한 곳에 도달하지만 그럼에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어요. 할머니와 대화를 계속 나누고 싶었지만 사정상 중단되어 무척 아쉽습니다. 소영현 할머님들의 성격이 증언소설에 드러난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뵈었을 때의 느낌이 반영된 것이었군요. 길원옥 할머님을 두고 쓰여진 증언소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는 특히 문학적 성격이 짙어서 시적이란 생각도 했습니다. 김숨 제가 시를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시를 쓰는 기분으로 할머니와 대화했어요. 뵙는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을 드리고, 할머니께서 뭔가 (질문과 어긋나는 대답이어도) 어떤 대답이든 해주시면, 그 대답을 듣고 떠오르는 질문을 즉흥적으로 드리는 방식이었어요. 그래서 어떤 날은 오전부터 저녁때까지 길게 대화가 이어지기도 하고 어떤 날은 짧게 끝났어요. 그리고 할머님을 뵙고 돌아오면 마치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천상 세계에, 선(善)한 세계에 다가갔다 지상으로 내려온 기분이 들었어요. 한없이 더러운 저라는 인간이 감화를 받고 조금 선해져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요. 소영현 두 분을 만나 뵙고 증언소설 집필 후 『듣기 시간』을 쓰셨죠. 이 작품은 어떻게 작업하게 되셨는지요. 김숨 『듣기 시간』은 과거에 다른 제목으로 발표했던 단편소설 「녹음기와 두 여자」를 퇴고한 것이에요. 할머니들을 뵙기 전에 쓴 소설이죠. ‘위안부’ 증언집에 증언을 채록하고 기록하신 면담자들이 남긴 후기가 실려 있는데, 그 글들이 굉장히 흥미로워 증언이 이뤄지는 과정에 대해 써보고 싶었죠. 그런데 「녹음기와 두 여자」는 그렇게 만족스러운 소설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소영현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21세기문학』에 실렸을 때 저는 좋아했는걸요. 그 작품에 대해 글을 쓰기도 했고요. 김숨 너무 허술해요. 그 소설을 잊고 있다가 다른 ‘위안부’ 소설인 『흐르는 편지』를 쓰고, 이후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뵌 뒤 두 권의 소설을 내고 나서 자연스레 그 작품을 들여다보게 됐어요. 할머니들을 짧게나마 뵙는 동안 저절로 퇴고가 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듣기 시간』은 시기상으론 가장 먼저 썼지만, 사실상 두 권의 소설(『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숭고함은 나를 뒤돌아보는 거야』) 뒤에 놓여야 하는 작품인 것이지요. 소영현 「녹음기와 두 여자」, 『듣기 시간』 사이에는 큰 변화가 있습니다. 구술 채록된 증언을 소설 안으로 들여오는 방식도 달라졌고, 채록자를 중심에 둔 성격이 좀 더 뚜렷해지기도 했고요. 피해자의 침묵 사이를 채록자의 이야기가 채우고 있는 점에도 주목하게 됩니다만, 무엇보다 단편소설에서는 두 할머니의 비중이 비슷하지만 『듣기 시간』에서는 다르죠. 주로 황 할머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문 할머니와의 일화는 거의 언급되지 않아요. 퇴고하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숨 3~40년 긴 시간을 두고 할머니들과 소통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그분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분들에 대해 좀 더 정확하고 예리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동안 저희는 언론을 통해 영웅화된 분들만 주로 뵈었던 것 같은데, 트라우마를 끝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분들도 계시고, 비관 속에 숨어 살다 돌아가신 분들이 많으시거든요. 그분들이 들려주시는 말씀도 담아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반성을 시작하며 『듣기 시간』을 퇴고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은 되도록 배제하려고 했어요. 증언 채록자분들을 만나 뵈면서, 제가 읽었던 자료들에는 나와 있지 않은 진솔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요. 할머니들이 자신이 피해자라는 걸 인식하고 선언하실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던 분들을 만나 뵙고 새롭게 깨달은 것들을 『듣기 시간』에 담으려 나름 애를 쓴 것 같아요. 그래서 「녹음기와 두 여자」와 『듣기 시간』은 저에겐 다른 소설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소영현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집을 보면 1권에서 3권으로 넘어가면서 성격이 달라집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대두된 초기에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살아 있는 증거’로서의 피해자 증언 자체가 중요했다면, (침묵이나 표정까지 포함한) 말을 문자로만 이루어진 글로 옮기는 구술 작업을 하면서 채록자들이 직접 대면해야 하는 많은 문제들이 생겨났고 구술이나 증언에 대한 고민도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지 고민이 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소설을 쓸 때도 하게 되는 고민일 것 같은데요, 그런 차원에서 『한 명』과 『듣기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증언 인용 방식의 차이는 어떤 인식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김숨 『한 명』에서는 증언을 소설 안으로 끌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 증언이 허구가 아니라는 걸 저 자신에게 일깨워주기 위해서, 독자분들에게는 피해자가 겪었던 일을 과장 없이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몸에 각인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인생을 살아내고 계신 분들의 ‘하루’를 보여드리고 싶었고요. 할머니 한 분의 몸 안에 복수의 목소리를 담아내면서 소설이 시작되었는데요, 증언들을 읽고 체화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할머니들께서 하신 말씀들을 제 안으로 갖고 오면서 소설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할머니들을 직접 뵙고 침묵을 몸소 경험하며 『듣기 시간』을 펴낼 수 있었습니다. 소영현 『듣기 시간』을 통해 “최초의, 최선의, 최후의 질문이 ‘듣기’”라고 하셨습니다. “녹음기 400개의 구멍으로도 부족하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요, 그렇다면 ‘듣기’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오랫동안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온 학자인 오카 마리(현대 아랍 문학, 제3세계 페미니즘 사상 연구자)가 강조했던 것처럼, 모든 피해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어 말해왔고,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없었던 게 아니라, 그것을 들을 귀가 없는 우리가 진짜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역사적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곳의 문제이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들을 수 있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묻고 싶습니다. 김숨 내가 듣기를 잘하는 사람인가 자문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께서 아무 말씀도 들려주실 수 없는 상태로 누워 계실 때 저 또한 어떤 질문도 던질 수 없었어요. 그래서 침묵이라도 적어보자 했지요. 침묵을 듣고 기록해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듣기가 어려운 행위라는 것 또한 깨달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묵한 채 입이 아닌 다른 것으로 끊임없이 말하기도 하니까요. 가령 눈동자의 움직임이나 표정, 몸짓, 탄식, 한숨 등으로요. 그래서 특히 피해자의 말은 온 감각을 열어놓고 들어야 해요. 침묵을 연달아 들려줄 때 침묵이 담고 있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곡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 예리한 감각으로 들어야 합니다. 돌아보자면, 우리가 ‘위안부’ 피해자들께서 들려주신 말들 중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들었던 게 아닌가, 듣고 싶은 대답을 듣기 위해 특정 질문을 반복해서 드렸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증언을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피해자들이 어떻게 끌려갔고, 어떤 고초를 겪었고, 어떻게 살아 돌아왔고, 이후 어떤 왜곡된 삶을 살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한 분의 증언조차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듣기’를 잘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저 자신부터 먼저 반성하게 됩니다. 소영현 폭력적인 고통이나 기억을 들으려고 하기보다는 듣지 않으려고 선택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거죠. 불편하다는 이유로 회피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고통의 말과 몸짓을 듣거나 봤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피해자분들이 말씀을 하셔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말을 해도 어차피 수용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더욱 말씀을 안 하게 되시는 것 같습니다. 김숨 우리가 듣기를 잘했다면 더 다양한 질문들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그 과정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넘어 인간에 대한 통찰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할머니와의 첫 만남에서 “뭐가 가장 보고 싶고 그리우시냐”고 여쭌 적이 있어요. 그런데 여태 들어보신 적 없는 질문이었는지 당황해하셨죠. 저는 할머니가 누구를 가장 그리워하는지, 어디에 가장 가고 싶으신지, 가장 좋아하는 꽃은 무엇인지 궁금했거든요. 그 질문에 할머니께서는 사적인 이야기를 차차 들려주셨고, 이전에는 말씀하지 않으셨던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지기도 했어요. 소영현 구술 채록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건넬 수 있는 적절한 질문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네요. 기본적으로 기억은 왜곡, 변형, 취사선택될 수도 있기 때문에 증언을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활용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피해자의 삶이 진상규명을 위한 증거로 축소되어버려서는 안 되고,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 모두가 증언자가 될 수도, 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기도 한데요. 작가님의 말을 듣고 보니, 증언하지 않는 방식으로 증언하거나 증언을 거부하면 거부하는 대로 그 자체로서 한 분 한 분의 기록을 남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증언인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다양한 방식의 ‘증언’에 대한 기록이 축적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됩니다. 증언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고민하면서도 이런 방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또 다른 형태의 편견을 갖고 있었던 듯하여 반성하게 됩니다. 김숨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이야기를 쓰게 된 뒤로 늘 반성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소영현 구술 채록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증언의 내용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증언이라는 것은 구술 채록자의 질문과 피해자의 답변(목소리가 아니더라도 행위, 침묵 등 모든 것)이 모두 합쳐진 작업이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구술 채록자의 면모 또한 증언이라는 전체 논의 속에서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김숨 맞아요. 구술 채록 작업을 해오신 분들의 글들도 굉장히 흥미로워요.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이 해놓으신 작업 덕분에 소설도 쓸 수 있었고요. 그분들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소영현 『듣기 시간』의 화자 성윤주가 구술 채록 작업을 회상하며 할머니와 친밀해지려고 노력한 것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대목이 있습니다. “역겹다 못해 환멸스럽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이 대목을 쓰면서 작가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김숨 면담 후기를 읽으면서 채록자분들께서 이런 감정을 느낀 순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할머니들께서 피해 경험을 말씀하시도록 하는 게 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여쭤보게 되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럴 때 저 자신에게 어떤 환멸 같은 걸 느꼈는데, 구술 채록자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을 저보다 더 진하게 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구술채록을 하는) 내 앞의 살아남은 피해자가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존경스러울 수도 있지만, 한없이 비참하게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비참함까지 담아내는 것이 문학의 역할 아닐까 싶습니다. 소영현 증언이 기록물로 남지 못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피해자 본인 또는 가족이 증언을 기록물로 남기는 걸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점에서 『듣기 시간』에 등장하는 황 할머니의 여동생 캐릭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피해자 신고를 반대하고 구술 작업에도 거부감을 드러내는 인물이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황 할머니가 자신의 삶에 대해 거의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여동생은 언니의 피해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말을 전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여동생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피해를 말할 수 없게 하는 ‘우리’를 대표하기도 할 텐데요. 그 인물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요. 김숨 증언집을 읽을 때 인상적이었던 대목이 있었어요. 자신의 피해 사실을 가족이 알게 될까 봐 할머니가 불안해하시는 부분이었는데요, 자신이 피해자임을 인식하는 것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참 어렵죠. 본인이 피해자라는 것을 세상에 말하면 가족과 절연하게 될 상황에 계셨던 분들의 증언을 읽으면서 여동생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그려졌어요. 『듣기 시간』의 여동생이 어쩌면 저 자신일 수도 있었으니까요. 소영현 ‘위안부’ 문제를 피해자 중심으로만 다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피해자 중심으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의 의미와 위험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고요. 이제 ‘위안부’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문학에서도 새로운 시선이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작가님께서는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뤄보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지요. 김숨 ‘위안부’ 소설은 쓰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부여되는 면이 있지만, 동시에 엄연히 문학이기 때문에 의미뿐만 아니라 문학적 성취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처음에 펴낸 『한 명』은 부족함이 곳곳에서 보이는 아쉬움이 많고 부끄러운 소설이에요. 마지막으로 펴낸 『듣기 시간』은 오히려 나름의 만족감을 주는 소설이고요.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보다 ‘위안부’ 소설을 다시 쓰게 된다면, 혹은 다시 퇴고를 하게 된다면, 인간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인 ‘나’ 자신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소영현 인터뷰이: 김숨 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2년 7월 7일 목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달로14가길 5 1층 흑석커피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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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타인의 고통을 경청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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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KT 케이블 TV 서비스인 올레TV 영화 검색어 카테고리 중 하나가 ‘성폭행 영화’라는 사실이 논란이 되었다. ‘성폭행 영화’ 카테고리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조정래, 2016)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역사적 고통, 실재한 피해를 재현할 때의 윤리가 창작자와 수용자(그리고 플랫폼)에 왜 중요한지를 실감하게 한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다룬 작품들은 이렇게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집중해왔고, 그에 따른 문제가 불거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듣기 시간』(김숨, 문학실험실, 2021)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게 하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경청하게 한다. 소설가 김숨은 『듣기 시간』에 이르기까지 몇 년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고통을 기록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듣기 시간』 단행본 말미에 실린 문학평론가 김형중의 설명을 빌리면 『한 명』(현대문학, 2016)에서 김숨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발언을 300여 개의 각주로 인용함으로써 소설을 일종의 ‘증언 아카이브’로 활용하는 실험을 수행한 바 있으며,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현대문학, 2018)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 2018)는 인터뷰어가 거의 개입하지 않은 채로 피해자들의 증언이 날것 그대로 소설의 재료가 된 ‘증언 소설’ 혹은 ‘인터뷰 소설’이다. 같은 해인 2018년에 발표된 『흐르는 편지』(현대문학) 역시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룬 서간체 형식의 역사소설이다. 증언을 기반으로 하는, 증언 자체가 소설의 육체적 토대를 형성하는 이러한 소설들이 태어나기까지 가장 중요했을 증언 녹취 과정 그 자체를 다룬 것이 바로 『듣기 시간』이다. 증언을 녹취하고 그 내용을 소설로 썼을 테니 『듣기 시간』은 내용상으로 보면 다른 작품보다 앞선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더 나중에 쓰였다. 김숨의 『한 명』에서부터 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보자. “군인 백 명을 상대할 자가 누구인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군인 백 명을 상대합니까.” 작지만 야무지던 석순 언니가 따지고 들자, 중대장이 병사들을 시켜 석순 언니를 앞으로 끌어냈다.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군인들은 닭 껍질을 벗기듯 석순 언니의 몸에서 옷을 벗겼다. 석순 언니의 몸은 깡말라 사내아이의 몸 같았다. 겁에 질린 소녀들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소녀들을 한 명 한 명 씹어먹을 듯 바라보는 중대장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얼른 고개를 떨어뜨렸다. 막사 뒤에서 수십 개의 못을 동시에 박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곧 끔찍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한 명』 중에서 역사적 고통을 증명하는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옮겨내는 작업은 증언을 기록하는 측면에서는 당연히 중요하다. 픽션에서는 어떨까. 『한 명』은 가까운 미래, 생존한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뿐인 어느 날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히지 않고 살아온 ‘한 명’의 할머니가 주인공인데, 그는 80여 년 전 열세 살 때 마을 강가에서 다슬기를 잡다 사내들에게 잡혀 만주로 끌려갔다. 그는 자신처럼 강제로 끌려온 다른 소녀들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성적 학대와 고문을 당했다. 당시 작가 김숨은 “피해를 증언할 수 있는 할머니들이 아무도 남아 계시지 않는 시기가 올 것이므로 소설을 통해 그런 점에 경각심을 가지게 하고 싶고, 그것이 문학의 도리라 생각한다”고 집필 동기를 밝힌 바 있는데, 한 사람의 목소리를 옮기는 구성이지만 실제로는 300여 개에 이르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제 증언을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피해자들의 증언 자체가 글의 뼈대를 이룬다. 읽는 사람은 피해자가 실제로 어떤 시간을 견뎌왔는지를 자세하게 읽게 된다. 읽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몇 번이고 눈을 돌리고 싶은 장면의 연속이다. 『한 명』을 읽다 보면 ‘왜 주인공은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히지 않으려고 했을까’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겪은 일은 과거 특정 시간에 한정된 경험이라기보다는 한 생애에 걸친 고통의 연쇄였으므로 증언의 범위가 무척 넓다. 그 시간을 다시 복기하는 일 자체가 피해자가 폭력을 다시 경험하는 트라우마적 사건이 된다는 뜻이다. 생존자의 가족들이 말하지 않기를 요구해왔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다. 책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을 막기 위해 찾아온 친척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얼마나 사정했는데...... 신고하지 말라고...... 남세스러운 일이니까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고 그냥 조용히 살라고, 내가 그렇게 사정했는데 기어코 신고해서는...... 위안부였던 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신고하면 인연 끊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기어코......” 그런데 제3자 입장에서 추측할 수 있는 그런 이유가 말할 수 없는 이유의 다는 아니다. 『듣기 시간』에서는 증언의 불가능성에 주목한다. 피해자의 증언이 대중에 알려질 때는 정제된 언어로 사건 순서에 따라 정리된 상태지만, 『듣기 시간』에서 우리는 극심한 폭력 피해에 대한 증언은 그 자체로 고통의 시간이며, ‘듣기’라는 작업은 발화자의 고통이 생생해지는 그 침묵을 듣는 일임을 알게 된다.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침묵’을 들어야 한다. ‘말할 수 없음’을 경청하라. 아마 『듣기 시간』을 요약하면 이 문장이 될 것이다. 김숨의 『듣기 시간』은 1997년 8월 9일 오후 진주의 한 주택에서 녹음기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두 여자의 침묵을 담아내며 시작한다. 녹음기는 소리를 담기 위한 것이지만 도무지 말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 듣기를 시도하는 과정을 담은 『듣기 시간』은 ‘위안부’ 역사를 재현하는 윤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김숨의 앞선 작업들보다 더 중요하게, 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묻는 작업일 것이다. 정교하게 피해를 재현하는 대신, 말할 수 없음 그 자체를 경청하게 하기. 고통을 재현할 수 없음을 재현하기.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방식이야말로 고통을 전달하는 가장 솔직한 언어가 되리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언어가 무력해지는 순간을 포착하기.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작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고통의 세부적인 면이 어느 정도는 알려져 있어야 한다.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지식이 없는, 혹은 피상적인 이해만 있는 사람이 『듣기 시간』을 읽는다면, 책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있을 듯한 타이밍에 소설이 끝나버린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황수남(아마 실명은 아닐 것이다) 할머니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첫 번째 말은 “새벽에 깼어......”이다. 그 다음으로는 “커졌어......”라는 말. 시계가 커졌다고 하는데,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 알기 어려운 분절된 문장과 단어의 나열만이 이어진다. 구술 증언 채록자인 인터뷰어 성윤주(김숨 작가의 분신일)는 생각한다. “그녀가 상실한 건 ‘말’이 아니라 ‘말 구사력’인지도 모른다. 죽은 물고기들처럼 낱낱으로 흩어져 부유하는 낱말들을 어순에 맞게 배열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인지도. 주어, 목적어, 수식어, 술어를 조합하지 못해서.” 그리하여, “나는 그녀를 들은 적 없다.”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문맹이라서 제대로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하고 조직화할 수 없다. 때로는 기억하지 않아서 미치지 않을 수 있었고 기억하지 않아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증언할 수 있었을 수많은 피해자들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즉, 『듣기 시간』에서 듣는다는 일은, 우리가 들을 기회가 있던 증언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만큼이나 들을 기회를 갖지 못한 증언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침묵을 듣는다는 작업은 그런 뜻이다. 동시에 듣기란 기다리기다. 『듣기 시간』에서는 구술 증언을 채록하기 위해 성윤주가 계속 여러 일상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답을 기다리며 중요한 증언 내용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나온다. 이 작업은 마침내 성윤주의 어떤 깨달음, 즉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에 다다른다. ‘말할 수 없음’이야말로 핵심적인 증언이 된다. 이 침묵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한국 사회의 (또한 국제 사회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았을까. 피해와 고통의 경험에 대한 재현윤리를 고민한다는 일의 어려움은 여기 있다. 그 고통을 이해하는 이들만이, 침묵 속에서 고통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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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새로운 연대를 발명하는 ‘팀(Team) 『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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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숙 작가의 『풀』 김금숙 작가의 『풀』(『Grass』 by Keum Suk Gendry-Kim)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이옥선의 삶을 그린 그래픽 노블입니다. 한국에서는 2017년 8월 14일에 출간되었고 2018년에 프랑스어로, 다음 해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올해 2월 14일 출간 이후 약 5개월간 2,300부 이상 팔렸습니다. 한국처럼 일본도 2월 초부터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4월 7일부터는 주요 지역에 긴급사태 선언이 내려졌습니다. 지금은 긴급사태가 해제되었지만, 일상이 급격하게 바뀐 가운데 2월 21일 교도통신의 보도를 시작으로 6월 1일까지 11개의 언론사가 『풀』을 소개했으며 8개의 서평이 여러 매체에 실렸습니다. 3월에 예정되었던 『풀』 원화 전시나 나눔의 집 방문 기획 등은 모두 취소되었지만, 팬데믹의 일상 속에서도 『풀』이 일본 독자들에게 닿고 있습니다. 『풀』이 엮어준 네 사람의 인연 코로나19의 위협에도 『풀』의 높은 작품성과 '풀 한 포기를 전하려는' 진심은 독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이 만남은 쓰즈키 스미에(都築寿美枝)씨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스미에 씨는 일본 히로시마현의 체육 교사였습니다. 1991년, '위안부' 피해자 고 김학순 선생님의 공개 증언이 세상에 나오자 그는 관련 신문 기사를 교재로 만들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1994년 2월에는 직접 한국을 방문해 나눔의 집에서 피해자들을 만났습니다. 스미에 씨는 계속해서 피해자들을 만났고 자신이 만난 그들의 삶과 '위안부' 범죄의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정년퇴직 후에는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지금 그는 성공회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평화 운동과 인권 교육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풀』을 처음 읽은 스미에 씨는 ''위안부' 문제는 어렵다', '나와는 관계없는 과거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일본의 젊은이들도 만화 『풀』이라면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번역과 출판을 결심했습니다. 이런 스미에 씨의 결심과 김금숙 작가를 이어준 사람은 강제숙 씨입니다. 강제숙 씨는 1990년대 초반 도쿄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1995년부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원폭 피해자 지원과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해 왔으며 지금은 동남아시아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스미에 씨와 강제숙 씨는 1990년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현장에서 만난 오랜 동지입니다. 강제숙 씨는 『풀』에도 등장하는데, 김금숙 작가와 함께 나눔의 집을 방문하고, 이옥선의 삶을 찾아 중국으로 떠나는 모습이 책에 그려져 있습니다. 저는 대구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활동에서 강제숙 씨를 만났습니다. 시민모임 관련 행사에서 강제숙 씨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을 이어주는 든든한 통역자이자 길잡이였습니다. 제가 스미에 씨를 만난 것도 그때였습니다. 90년대 후반 관부재판 지원을 위해 대구 시민모임을 방문한 스미에 씨와 함께 김분선, 이용수 선생님의 집을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 방문한 일본인에게 경계심을 풀지 않던 두 분이 나중에는 마음을 열고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위안소에서 배운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도 노래와 춤을 즐기셨지만 그렇게 오래 일본어를 말하고 군가를 부르는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피해자들에게 일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번역 불가능한 기억과 경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모두 듣기 위해 우리가 더 많은 준비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동시에 가해국의 시민과 함께 하는 운동에 대해 고민하고 마주하기로 했습니다. 그 시간을 함께한 스미에 씨가 저에게 『풀』을 함께 번역하자고 했습니다. 90년대 후반 대구에서 시작된 인연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순간이었습니다. 『풀』이 만든 새로운 연대의 장 2019년 8월 23일, 쓰즈키 스미에, 강제숙 씨와 함께 김금숙 작가를 만났습니다. 번역자로서 작가와 상의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끝낸 뒤 도란도란 밥을 먹는데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20년 전 '위안부' 피해자들이 맺어준 인연으로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고, 귀한 선물 같은 작품을 만나 번역이라는 공동 작업으로 새로운 연대를 이어가게 되었으니까요. 이 연대는 세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풀』의 일본어 출판은 처음부터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일본어 출판위원회 공동대표가 되어 준 이케다 에리코(池田恵理子)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의 명예 관장과 오카하라 미치코(岡原美知子) 씨도 스미에 씨의 오랜 동지입니다. 미치코 씨는 히로시마현의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스미에 씨와는 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함께 했습니다. 미치코 씨는 1993년에 열린 심포지엄 '제4회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한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 진정한 화해를 바라며'에서 처음으로 피해자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당시 본명을 숨긴 채 증언한 한국의 피해자가 김복동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2016년이 되어서야 알았다고 합니다. 이후 미치코 씨는 한국, 중국, 필리핀의 피해자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여전히 안전하게만 사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을 계속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년퇴직 후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 히로시마 네트워크'(2012년 4월 결성, 이하 히로시마 네트워크)의 사무국장을 맡았습니다. 히로시마 네트워크는 매달 첫 번째 수요일에 일본 히로시마 시내에서 시위를 엽니다. 지난 6월 27일에는 유엔이 정한 '분쟁 하 성폭력 철폐의 날(6월 19일)'을 맞아 인도네시아 피해자 관련 행사를 열었습니다. 스미에 씨, 에리코 씨, 미치코 씨 세 명과 함께 출판사 고로카라(こらから)가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습니다. 2019년 9월 7일 시작된 모금은 4일 만에 목표액 145만 엔을 달성했습니다. 예상 밖의 호응이었습니다. 2차 모금도 순식간에 목표액을 달성했고 이후에도 응원의 손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총 432명의 시민이 펀딩에 동참해준 덕분에 일본어판 가격을 낮출 수 있었고, 2020년 2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 도쿄, 오사카, 히로시마, 후쿠야마에서 일본어판 『풀』 출판 기념 <김금숙 작가와의 만남>도 열 수 있었습니다. 지난 30년간 '위안부' 피해자들과 인연을 맺고 활동해 온 4개 지역의 시민들을 포함해, 히로시마에서는 원폭 문제 운동, 후쿠야마에서는 부락민 차별 문제 운동을 하는 시민들을 주축으로 행사가 열렸습니다. 21일 도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건물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 행사는 자료관의 스태프들과 대만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한 시바 요코(柴洋子)같은 활동가들 덕에 가능했습니다. 시바 씨는 『풀』의 배경이 되는 지역과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같고, 이옥선은 대만의 피해자와 다를 게 없다고 했습니다. 시바 씨 외에도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오랜 시간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 온 사람들은 이옥선과 함께 각지의 피해자들을 떠올렸습니다. 히로시마에서는 히로시마조선중고급학교 학생이 사회를 봤고, 후쿠야마에서도 고등학생이 사회를 봤습니다. 이 학생들에게 30년 '위안부' 운동의 바통이 넘겨질 것입니다. 이 만남은 '위안부' 피해 역사를 뉴스로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역사와 제대로 대면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22일 오사카 행사의 공동 주최는 '다민족 공생 인권 교육센터'였습니다. 오사카에서의 행사장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고 있었는데, 쓰루하시에서 재일조선인 고령자 복지 시설 '바다'를 운영하면서 인권 운동을 하는 송정지 씨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그의 남편 김동휘 씨는 모국인 한국에서 유학하던 1975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북한의 간첩으로 조작된 국가폭력의 피해자입니다. 제가 재일한국인 조작 간첩 사건의 재심 재판을 지원, 연구하면서 만난 인연입니다. 당일 손님들을 맞이하고 열심히 책을 판 사람은 김오자 선생님을 비롯한 조작 간첩 피해자와 가족분들이셨습니다. 고문 수사관, 조작에 관여한 검찰, 사법부로부터 제대로 된 사죄를 받지 못한 조작 간첩 피해자들은 『풀』의 이옥선이 “일본놈들이 나빠, 아베가 사죄해야지, 배상해야지”라고 하는 원통함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오사카 행사의 뒤풀이 자리에는 같은 지역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했던 조작 간첩 사건 당사자들과 관계자, 지역에서 '위안부' 운동을 해온 분들이 한데 모였습니다. 『풀』을 통해 국가 폭력과 인권을 다시 생각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에 전하는 30년 운동의 역사 『풀』의 그림은 단순함이 극대화된 흑과 백의 수묵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최대한 간결하게 묘사된 등장인물은 내가 되기도 하고, 붓 터치에 따라 표정을 바꾸는 바람, 비, 산, 나무, 나뭇잎, 풀, 새는 이옥선의 마음을 상상하게 합니다. 김금숙 작가가 그려낸 위안소에서의 직접적인 폭력은 누군가가 배당받았을 군화, 검은 묵으로 채운 3쪽 18칸의 어둠, 그리고 뼈마디 굵고 거친 이옥선의 손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방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검은 여백 속에 배인 짐승 같은 울부짖음, 평생 이옥선이 안고 온 고통의 깊이는 독자가 상상해 내야 합니다. 이 책을 읽는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은 남영동, 서빙고의 몇 호실을 떠올리고, 지원자들은 피를 토하듯 생존자들이 남긴 증언을 떠올립니다. 『풀』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딸로 태어나 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옥선이, 전쟁이 끝나고도 여성이자 성폭력 피해자로서 겪어야 했던 구조적 폭력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풀』의 특별한 점은 작가가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 아무리 열심히 작품을 해도 먹고 살기 힘든 『풀』 속의 '나'는 이옥선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을 거듭합니다. 작가는 엄마 배에서 나와 여태껏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이옥선을, 형제끼리 의지하며 살려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왔는데 뭣 하러 왔나 싶다는 이옥선을, 폭 안아드릴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대신에 작가는 15살 옥선이 걸었을 중국 연길의 거리를 걸으며 공기를 느끼고, 연길 동 비행장에서 서시장을 지나 위안소였던 건물의 복도에 섭니다. 『풀』 속의 작가를 따라 이옥선과 마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독자는 이옥선의 삶으로 대변되는 역사와 내가 사는 오늘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잔혹한 폭력의 실상, 70여 년 전의 과거사, 일본에 대한 증오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옥선은 어떻게 살고 싶었던 존재였을까?', '나는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우리 사회는 괜찮은가?' 자문하게 됩니다. 피해자가 부재하는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에게 『풀』은 소중한 작품입니다. 해외에서도 『풀』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2019 미국 뉴욕타임스 최고의 만화', '2019 영국 가디언 최고의 그래픽 노블'에 선정되었고, '프랑스 휴머니티 만화상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습니다. 지난 6월에는 만화계 시상식 중 가장 영예로운 '아이스너 어워드' 3개 부문에 후보작으로 올랐습니다. 일본에서는 항상 그래왔지만, 지금 한국에서도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움직임이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과 당당히 맞서왔고 지금도 맞서고 있는 각국의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와 지원 운동을 해 온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옥선들'의 삶으로 대변되는 참담한 역사로 '모험'을 떠나는 시민들이 있습니다. 현재까지 일본에서 팔린 2,300여 권의 『풀』은 역사를 지우려는 힘에 맞서고자 하는 누군가의 손에 전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국경을 넘은 '위안부' 운동 30년 역사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