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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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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기림의 날 특집 : 일본군‘위안부’ 역사, 우리 모두의 삶 오키나와의 할머니, 배봉기 님이 돌아가시고 7년이 흐른 뒤, 그 반평생을 취재하여 기사로 엮어낸 일본인 기자가 있습니다. 매 학기 대학 강의실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다양한 논점을 학생들과 토론하는 서울의 교수님들이 있습니다.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역사를 알리고 소수자 혐오범죄 및 성폭력 방지 교육활동을 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시민단체가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교훈은 저마다의 공동체와 시민적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변화를 촉구합니다. 2023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그 작지만 큰 실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1.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에서 걸어온 전후(戦後) 2.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 3.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 4.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I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에 위치한 사회정의교육재단은 역사의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의 소외된 역사를 알리는 데 목적을 둔 비영리 교육단체다. 역사교육을 통한 인간의 존엄성과 비판적 사고력 증진 교육을 기본 가치로 여기는 우리 재단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에는 1) 성폭력 및 젠더 기반 폭력(sexual and gender-based violence) 방지 2) 미국 내 아시안 디아스포라 역사와 이슈 3) 시민들의 저항과 단합 등이 있다. 교사의 자율성이 높은 미국에서 이 주제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이를 통한 역사교육을 적극 권장하기 위해 우리는 현직 역사 교사들과 함께 재단의 가치를 반영한 커리큘럼과 학습안을 만들고 있다. 이 글에서는 우리 재단의 설립 배경에 대한 소개와 함께, 재단의 교육활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알리는 일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회정의교육재단 설립 배경 사회정의교육재단을 애초 계획보다 앞당겨 2017년 여름에 설립하고, 재단의 첫 주제 또한 ‘미국 내 아시아 디아스포라 역사와 이슈’에서 ‘성폭력 및 젠더 기반 폭력 방지’로 바꾼 데에는 2015 한일 ‘위안부’ 합의와 이와 관련해 조선학교에 가해진 부당함에 맞서고자 한 배경이 있다. 필자는 사춘기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와 인종차별을 겪으며, 후세들이 차별받지 않게 하려면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미국 내 아시안 디아스포라 역사를 제대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샌프란시스코 공립통합학교구(San Francisco Unified School District)에서 한글 이중언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더 공고해져, 재직 중이던 1994년 샌프란시스코 공립통합학교구에 최초로 한글 이중언어 프로그램인 한‧영 이멀젼(Two-Way Immersion)[1] 프로그램을 도입시켰다. 그 후 미국 내 초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에서도 교사들이 미국 내 아시안 디아스포라 역사를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미국 내 아시안 디아스포라 역사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는 본인들의 역사와 뿌리에 대해 배울 기회를 제공하고, 비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는 미국 내 아시아인들에 대한 선입견을 지우고 이해와 존중의 폭을 넓힌다. 이를 통해 모두가 각자의 존엄성을 지키며 동등한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이 분야의 발판을 다지는 데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고 싶었다. 2015년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두 개의 결의안이 통과됐다. 9월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건립 결의안 342-15호가 시의회에서 통과됐고, 한 달 뒤 10월 샌프란시스코교육위원회에서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역사를 10학년(고등학교 1학년) 커리큘럼에 포함시키는 결의안 158-25A1호가 통과됐다. 이 결의안은 일본군‘위안부’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어난 인신매매 범죄임을 가르치고, 오늘날에도 지속되는 성매매와 성착취 방지 교육을 위해 발의됐다. 교사에게 결의안 158-25A1호는 필수가 아닌 선택사항이지만, 시 결의안은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인신매매를 반대‧방지하고, 약자의 인권과 존엄성을 기억하는 일의 필요성과 연결하여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이로부터 두 달 뒤, 피해생존자의 의사와는 상반된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졌다. 대부분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힘이 없어 피해를 당한 자들의 존엄성과 인권을 또 한 번 무시한 처사였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합의 문구 때문에 10월에 통과된 샌프란시스코 결의안 158-25A1호가 자칫 무효화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1994년에 한‧영 Two-Way 이멀젼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실시한 경험을 되살려 2016년 1월 첫째 주부터 주변 학부모들과 함께 편지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에 힘입어 캠페인 시작 2주 후에 샌프란시스코 통합학교구 인문학 커리큘럼 및 수업 부서(Curriculum and Instruction’s Humanities Department) 담당자를 만났고, 담당자로부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자료수집을 요청받았다. 이에 2016년 말 상당한 양의 자료를 인문학 커리큘럼 및 수업 부서에 제공했으나, 이곳에서는 2018년 1월까지도 여러 이유로 인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커리큘럼이나 학습안을 준비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공립고등학교에서는 주로 3월이나 4월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알게 된 필자는 하루빨리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한 교육이 시작될 수 있도록 『‘위안부’ 역사와 이슈: 교사자료집』(“Comfort Women” History and Issues: Teacher Resource Guide)을 그해 3월 말에 서둘러 발간했고, 인문학 커리큘럼 및 수업 부서는 이 책을 18개 고등학교에 배부했다. 2020년에는 교사자료집 3판과 학생자료집 『‘위안부’ 역사와 이슈: 학생자료집』(“Comfort Women” History and Issues: Student Resource Guide) 2판을 내기도 했다. 2017년 4월 한겨레신문에서 두 명의 조선학교 고등학생과 지바조선초중급학교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2016년 12월 지바조선초중급학교에서 열린 제45차 학생미술전시회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한 학생 작품 두 점이 전시됐는데, 그 두 작품은 ‘2015 위안부 합의’를 반대하는 마음을 담은 조연수 학생의 작품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을 표현한 강애향 학생의 작품이었다. 원래 지바현 지바시는 매년 시 보조금 50만엔(약 한화 500만원)을 이 학교에 지원해왔으나 구마가이 토시히토 지바시장은 이 작품들을 문제 삼아 이듬해인 2017년부터 보조금을 삭감했다. 이 소식을 듣고 필자와 두 명의 활동가는 인권과 정의를 존중하는 두 명의 여고생들과 지바조선초중급학교를 지지하기 위해 5000달러를 모으기로 결정했고 이 과정에서 우리 재단이 설립되었다. 우리 재단은 2017년 봄부터 모금을 시작했고 8월에는 5000달러를 이 학교에 전달했다. 이로부터 재단과 학교의 인연이 시작되어 매년 후원을 지속해, 2021년부터는 우리 재단이 지바조선초중급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미술대회를 개최했다. 지바조선초중급학교 외에 우리 재단이 정기 지원하는 또 다른 단체는 ‘Days for Girls International’이다. 이 단체는 전 세계 빈곤 지역에서 생리대가 없어 학교를 못 나오는 소녀들에게 3년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 가능한 생리대 키트와 보건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2017년에 설립한 사회정의교육재단의 구성원에는 필자를 비롯한 공동설립자, 현직 교사들, 샌프란시스코시에 일본군’위안부’ 기림비를 세우자는 결의안 324-15호를 상정하고 통과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에릭 마 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 인턴, 이번 가을이면 대학생이 되는 자원봉사자 그리고 학부모들이 있다. 학부모 중에는 한인 커뮤니티와의 연대를 두텁게 하고 우리 재단 관련 홍보 디자인에 힘 써주시는 분도 있다. 이분들 외에도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만들어 주시는 인쇄소 사장님과 무료와 다름없는 수고비로 재능을 기부해주고 계신 그래픽디자이너 등 우리 재단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있다. 재단의 교육활동 재단이 2017년에 설립된 배경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역사는 우리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형태의 성폭력 및 젠더 기반 폭력의 심각성을 비롯해 모든 이의 인권과 존엄성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알리고자 할 때 대표적으로 접목시키는 역사이다. 이를 위해 우리 재단은 교사 워크숍, 강의, 다양한 커뮤니티 행사 등을 갖는데, 세부 내용에는 일본군‘위안부’ 역사가 현재 사회에서 교차되어 나타나는 부분을 적극 포함시킨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면 첫째,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알리기 위해 범아시아계 시민들이 단합해 ‘강인한 여성의 기둥’ 기림비를 건립하고 일본군‘위안부’ 역사 교육활동을 펼친 지역사(local history)를 가르치고, 둘째,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을 토대로 여성혐오 범죄 및 성폭력을 방지하는 교육을 실시한다. 필자가 2018년 봄에 발간한 『‘위안부’ 역사와 이슈: 교사지침서』에는 위의 내용이 강조되어 있다. 이 교사지침서는 발간된 다음 달인 4월 샌프란시코 공립고등학교에 배부되었고, 같은 해 가을에 발간된 『‘위안부’ 역사와 이슈: 학생지침서』는 2021년 캘리포니아에 있는 세인트 메리 컬리지(St. Mary’s College)에서 ‘전쟁과 여성-환태평양 분쟁들의 기억’(Women in Wartime: Memorializing Conflicts in the Pacific Rim)이라는 가을 학기 수업 필수 교재에 포함되었다. 우리 재단은 이 수업의 커뮤니티 파트너였는데, 필자는 연구 책임자로 학생들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삶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미국에 현존하는 성‧젠더 폭력에 대해 논의했다. 그해 10월에는 이 두 책이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시에서 열린 〈‘위안부’ 프로젝트 전시〉(“Comfort Women” Project Exhibition)에서 전시되었다.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에서 특별 협의지위(special consultative status)를 공식 승인받은 우리는 여러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고 있는데, 이 자리를 빌려 우리 재단과 연대하는 모든 단체에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연대 단체 중 작년과 올해 우리 재단과 활발한 교육 활동을 한 NGO 단체는 한국의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 독일의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 e.V.) 그리고 미국의 유엔 미국여성간부위원회(US Women’s Caucus at the UN)이다. 작년 6월 경상남도교육청이 후원하고 마창진시민모임이 주최 및 주관한 교사포럼 〈일본군’위안부’역사교육 활성화를 위한 국제포럼〉에 필자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근무하는 두 명의 고등학교 교사, 그리고 에릭 마 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이 초대되어 경상남도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들과 의미 있는 논의를 하며 교류를 넓혔다. 올해 7월엔 두 명의 샌프란시스코 공립학교 고등학교 역사 교사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서 일주일간의 독일 탈식민주의(decolonization) 학술 답사를 통해 독일의 식민 지배를 받은 국가와 시민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는 활동가와 교육자들의 연대의 힘을 목격했다. 이들은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독일이 아프리카 식민지 여성들에게 가한 성폭력 역사와 연결짓는 것은 물론, 일본군'위안부' 제도와 같은 역사는 모든 식민주의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문제 중 하나로 접근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이들이 식민지 성폭력의 참상을 알릴 때 아시아와 네덜란드 등지에서 일본군'위안부' 제도 생존자들이 앞장서서 일궈낸 초국가적 여성인권 운동으로부터 큰 감동과 힘을 얻는다는 것도 잘 알 수 있었다. 탈식민주의 운동에서 여성의 신체 주권(body sovereignty)은 식민지배나 전쟁과 같은 무력으로 인해 국가의 주권을 빼앗겼을 때 “당연히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임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학술 답사 마지막 행사인 필자의 강의 ‘제국 일본의 성노예제 역사 보존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Collective Activism in SF Preserves the History of the Sexual Slavery System by Imperial Japan)에서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나 러시아군에 의해 무수히 강간당한 유럽 여성들, 특히 독일 여성들의 신체 주권과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 그리고 미국 내 소수 여성들의 침해된 주권에 대해 짧게나마 논의했다. 올해 7월 학술 답사를 위해 여러 독일 탈식민주의 운동 시민단체를 섭외해준 코리아협의회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우리 재단이 최근 활발한 연대 활동을 하는 마지막 단체인 유엔 미국여성간부위원회(US Women’s Caucus at the UN)는 여성과 소녀의 인권과 성형평(gender equity) 증진을 목표로 하며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ommission on the Status of Women)를 지지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와 NGO 연합단체다. 필자는 이 단체에서 페미니스트 외교정책 국장(feminist foreign policy director)으로 활동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이슈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이슈가 가지는 여러 중요한 의미 중 세 가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는 오늘날 성·젠더 기반 폭력[2]이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1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만 15세에서 49세 여성 약 3명 중 1명이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둘째는 성·젠더 폭력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 주권, 인권 유린, 폭력, 차별, 역사 왜곡 및 부정 등인데, 이러한 요인들은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채 현 사회로 이어져 뿌리내렸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미국 내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진화하는지 짚어보고 더 나아가 교육과 시민참여를 통해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강구한다면 미국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젠더 기반 폭력 관련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중요한 의미는 우리의 인권이나 존엄성이 훼손되었을 때, 우리 모두에게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권리가 있고, 다른 누군가가 이러한 피해를 당했을 때 그들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도울 책임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에 맞서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고 정의와 평화를 지키는 인권운동가로 거듭난 여러 나라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실천한 삶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다진 초국가적 연대와 여성인권 운동의 역사는 뿌리 깊은 차별과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미국 내 이민자 커뮤니티의 역사와 결을 같이 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미국 이민자 커뮤니티의 역사와 이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범아시아계 시민들의 단결된 힘으로 증폭되어 여성인권과 존엄성, 정의 그리고 평화와 같은 전 세계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잘 나타내는 일본군‘위안부’ 기림비와 피해자들의 역사를 지키는 지역사의 현장으로 자리 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 인권과 존엄성이 상식이 되는 공동체 만들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래서 정의로운 사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교육을 펼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우리 재단에게, 초국가적 여성인권 운동으로 자리매김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인권운동은 큰 힘이자 계승해야 할 소중한 가치이다. 각주 ^ 한‧영 이멀젼(Two-Way Immersion) 프로그램은 저학년 때에는 모든 과목을 한글로 가르치다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영어를 병행해 가르쳐 학생들이 과목의 내용을 한글과 영어 두 언어로 능숙하게 이해하고 구사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성·젠더 기반 폭력에는 강간, 성적 수치심, 가정폭력, 데이트 및 디지털 성폭력, 소수인종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를 비롯하여, 전쟁 지역에서 발생하는 전시 성폭력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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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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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허윤(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 권은선(중부대 연극영화과, 영화평론가) / 오혜진(한예종, 문학평론가) / 김청강(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1부> -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오혜진 ‘위안부’ 역사를 재현하고 비평하는 데 무엇이 핵심이어야 할까요? 강간 장면을 얼마나 자세하게 묘사했는가?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얼마나 ‘절절하게’ 담았는가? ‘위안부’인 존재에 ‘빙의’해야만 진정성 있는 고통을 재현할 수 있는가? ‘위안부’ 역사와 고통을 그런 방식으로 상상하는 게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빙의’의 상상력은 ‘내가 만약 '위안부'였다면’, 즉 ‘나’를 역사의 피해자로 상상하는 거죠. 그런데 ‘위안부’의 ‘역사’를 사유한다는 건, ‘나도 피해자일 수 있었음’을 주장하자는 게 아닙니다. 어떤 지배의 체제와 정서 구조에서 그런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사유하는 거죠. 그렇게 보면, ‘나도 피해자일 수 있었다’라는 가정에 머물 게 아니라, ‘위안부’라는 역사적 폭력의 연원인 ‘식민지 가부장제’라는 역사와 시스템을 사유해야겠죠. 그렇게 사유의 초점을 이동하면, ‘식민지 가부장제’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잔존하며, 현재의 나 역시 그 체제의 효과의 자장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최근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공동주최한 전시 <이웃하지 않은 이웃─홀로코스트 ‘집시’ 희생자와 타자의 초상>(KF 갤러리, 2019. 1. 24~2019. 2. 28)의 소개말은 흥미로웠어요. 나치 시대에 억압당했던 ‘집시’들의 모습이 담긴 독일인 한스 벨첼의 사진을 전시한 것인데요. 한스 벨첼은 ‘집시’를 ‘매력적인 친구들’이라고 생각해서 그들을 카메라에 담았지만, 결국 그 ‘집시’ 친구들을 홀로코스트로 보내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전시의 서문은 ‘우리도 언제든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이었던 우리도 언제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역사적 성찰의 초점을 바꿔보기를 요청해요. 가해자에 이입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선량한 이웃’은 역사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지 사유하자는 것이죠. 권은선 그와 관련해서, 저는 미약하게나마 조금씩 변화가 느껴지긴 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귀향> 같은 경우에는 정말 ‘고통의 전이’의 관객성을 구축합니다, 즉 관객이 정민의 몸을 빌려서, 완전히 그 몸을 통과하면서, 과거의 고통의 현장으로 가게 되는 구조입니다. 정민이라는 몸이 동일시-몸이 됩니다. “사실 그대로”의 고통의 재현과 대리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적 주된 장치는 플래시백이죠. 그런데 최근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를 보면 플래시백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아이 캔 스피크> 같은 경우에는 아주 부분적으로만 플래시백이 나오고, <허스토리> 같은 경우에는 전혀 없어요. <허스토리>는 주인공 시점의 플래시백을 사용하는 대신, 지금은 폐허가 된 위안소 터를 찾아 역사적 거리를 두고 현장을 바라보는, 증인의 자리에 일본군 ‘위안부’를 위치시키는, 다큐멘터리 관습을 차용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고통과 트라우마를 둘러싼 재현에 있어서 미세하게나마 변화된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귀향>이 나왔을 때, “이 이미지, 이 고통의 이미지 앞에서 한없이 너의 무기력함을 받아들여라.”- 이런 비평적 태도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러한 비평적 태도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 무력한 위치로 관객의 위치를 한정시켜야 하느냐는 것이죠. <눈길>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지점은 ‘내포 청자’의 위치입니다. 내포 독자가 아니라요. 영화 서사 장치 안에 ‘헬조선’의 소녀가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듣는 후속세대의 좋은 청자(good listener)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관객이 동일시 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 줍니다. <귀향>이 피해자에게 ‘빙의-되기’를 통한 죄책감의 정치였다면, 잘 듣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 ‘청자-되기’는 책임감의 정치를 촉구합니다. 최근의 영화들을 보면 어떤 조바심이 보입니다.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등록된 피해생존자의 수가 계속 줄어드는 상황에 대한 영화적 반응으로요, <22> 라는 중국 다큐멘터리도 있듯이요. 제가 아까 일본군 ‘위안부’들 간, 그리고 할머니와 후속 세대 간의 자매애 혹은 우정을 이야기했는데요, 거기에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어요. 꼭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가 한 명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을 잃어가는 것, 기억을 잃어가는 것이 하나의 역사적 망각에 대한 메타포로 작동하면서, 관객에게 “잃어버리면, 잊으면 안 돼”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는 재현에 있어서 ‘말하는 주체’로서의 위상을 강조했는데, 부분적으로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오혜진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유사 가족’의 형태를 빌어온 것, 그리고 판타지 같은 결말이요. <허스토리>는 사실 장점이 될 만한 요소들을 많이 내장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위안부' 운동을 떠올릴 때, 소녀상, 나눔의 집, 광화문과 같은 공간적 특성을 떠올린다는 거죠. 그런데 <허스토리>는 부산이라는 지역을 다루고 있다는 지점이요. 그리고 ‘법정 드라마’이기 때문에 펼쳐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가령 “법적 책임 vs. 도덕적 책임”의 문제라든지, 그런 배상과 책임을 둘러싼 (국제)법, 법리적인 것들이요. 오혜진 제가 아까 소개한 ‘감방 죄수의 무력함’에 대한 이야기는, 고통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너무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재현을 포기하고 역사적 성찰을 방기하는 상황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맥락에서 인용된 것이었어요. 다른 얘기를 해보자면, 김숨의 소설 『한 명』을 읽고 제가 깨달은 것은,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말하는 주체’가 됐다는 점이 다시 한번 물신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 소설은 마치 보고서처럼 300여 개의 각주가 달려 있는데, 그것들은 ‘위안부’가 당한 폭력을 서술하는 서술자의 증언에 신빙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동원돼요. 그 ‘폭력 묘사’의 내용은 <귀향>과 이전 ‘위안부’ 서사들이 즐겨 한 자극적인 묘사와 거의 같습니다. ‘강간’을 비롯한 폭력이 매우 선정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서술되는데요. 여기 달린 각주들은 ‘이건 서술자가 일부러 그 고통을 외설적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이 직접 한 말이니 ‘재현의 윤리’ 따위로 문제 삼지 말라’라는 뜻으로 읽히더라고요.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페티시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거죠. ‘위안부’의 역사적 맥락을 사상시킨 채 ‘위안부’의 섹슈얼리티를 재현하고 소비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고자 ‘위안부’ 피해생존자의 ‘증언’이 등장한 것인데, 그 ‘증언’을 다시 한번 물화하는 것이 대중서사의 강력한 전략이 됐다는 건 문제적이죠. 김청강 초반에 진실성의 문제가 굉장히 큰 이슈였잖아요. 말하자면 일본에서 역사적 부인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는 사실로 증명을 해야 한다는 그런 강박 내지는 필요성에 의해서 계속 사실이었다고 말한다거나. 그리고 그게 단순히 증언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증언이 신빙성이 없다는 말 때문에 자료를 통해서 증빙해야 하고. 이런 강박이 사실은 지금 말씀하신 소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일본은 계속해서 역사를 부인하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반응하는, 그런 방식으로. 그런데 약간 그런 제로섬 게임 안에서는 거기서 더 나갈 수가 없는 방식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쪽에서 부인하면 '아니야, 사실이야.' 이렇게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모습으로밖에 갈 수가 없는. 그리고 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아까 그 이전의 재현 방식에서 나타나는, 1990년대 이전에 재현의 방식에서 성인 여성으로 주로 나타났다는 그런 측면이 현재는 사라진 건데, 그 의미도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왜 그 부분이 삭제되느냐, 피해를 입었던 기간보다 한국에 돌아온 ‘위안부’ 생존자들은 한국에서 숨죽이고 견뎌왔던 세월이 굉장히 많이 삭제되는 거거든요. 물론, 최근의 영화들에서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성찰해야 한다는 시각들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소녀와 할머니로 재현되었을 때 그 사이에서 쭉 견뎌온 세월과 그사이 한국 사회의 책임에 대한 문제들이 사실은 굉장히 많이 삭제되고 있다는 것이거든요. '위안부' 문제를 얘기할 때 1990년대 이후의 서사들에 대해서 굉장히 집중하는데, 사실 이전의 맥락들을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한국 사회가 떠안아야 할, 이게 단순히 일본의 폭력으로만 회수되지 않을 지점들을, 우리 사회가 받아 안아야 할 부분들을 조금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위안부'를 그동안 잊어왔는가. 이전의 디테일한 방식들에 대해서 조금 더 성찰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도 조금 듭니다. 허윤 '위안부'가 항상 늘 대중 소설의 장르 속에 등장하는 성애화된 성인 여성이었죠. 김성종 소설도 그렇고요. 저는 재현의 기점이 바뀌게 된 것은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이승연 씨가 모바일 미디어 산업과 결합한 성인 화보 시리즈의 연장 선상에서 화보를 내겠다고 하면서 엄청난 이슈가 되고, 사람들이 분노했었죠. 이후에 성인 여성으로 재현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감각이 생긴 거죠. 그런데 그때 무릎 꿇고 사죄하고 필름 태우고 하는 식으로 사죄를 했지만, 그게 왜 문제인지, 혹은 어떻게 이런 작업을 생각할 수 있었는가를 더 묻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도 제작자는 '역사적 책임을 가지고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겠다'라는 말을 했었거든요. 일본군이 주둔했던 팔라우까지 가서 화보를 찍은 것인데, 그런 화보가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했던 데 대해서 한국 사회는 심문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혜진 이승연 씨의 화보 사건은 그 자체로 새롭다기보다는, 그 이전까지 ‘위안부’ 섹슈얼리티를 소비하던 방식의 연장 선상에서 발생한 일이죠. 식민지의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 섹슈얼리티가 남성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성애화된 여성 섹슈얼리티의 한 종류로서 간주되어온 전통. 다만 이승연 씨의 화보 사건은 그것을 ‘모바일 화보’라는 형식을 통해 매우 노골적으로 상품화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후폭풍을 맞은 거죠. 그 이전에도 이미 스포츠신문 연재소설 등에서 ‘성애화된 여성 섹슈얼리티’로서 ‘위안부’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었으니까요. ‘위안부’ 여성을 성애화된 방식으로 소비해온 구조와 역사에 대한 질문 없이, 그저 ‘위안부’ 여성이 성애화되는 건 ‘위안부’를 ‘성인 여성’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그걸 피하고자 손쉽게 ‘어리고 순결한’(그럴 것이라고 상상되는) ‘소녀’ 형상을 택한 게 최근의 일인 듯합니다. 하지만 <귀향>이나 ‘소녀상’에 대한 성희롱에서 보듯 ‘소녀’ 역시 성애화의 대상이 될 수 있죠. ‘소녀’ 역시 섹슈얼리티의 주체니까요. 김청강 저는 소녀상이 사실은 굉장히 좋은 재현의 방식의 하나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왜냐하면 어떤 커다란 동상을 세운 게 아니고, 굉장히 작고... 제가 영화에서 성인 여성들이 착취되는 어떤 그런 모습들을 쭉 보다가 소녀상을 봤을 때, 이게 당시에는 상당한 대항성을 가지고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가서 만져볼 수 있고 비가 오면 우산도 씌워 주고, 눈이 오면 모자도 씌워 줄 수 있는, 이런 만질 수 있고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재현했던 게 좋았는데, 지금은 사실은 소녀상이 굉장히 너무 과공급되면서 그 의미가 탈색됐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대항적인 부분이 사라졌을 때, 어떤 식의 대안을 가지고 재현을 할 것인가. 이제 소녀로만 얘기하기도, 성인 여성으로만 얘기하기도,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얘기하기도 굉장히 어려운 지점에 도달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권은선 돌이켜 보면,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은 일종의 해프닝이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이전까지 '위안부'에 대한 포르노그래픽한 상상이 잔여적인 이미지 형식으로 계속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김학순 님의 증언 이후, '위안부' 재현과 관련해 가장 강력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가 1995년에 등장합니다. 이런 이미지들과 담론들이 경합하는 와중에서, 이미지 생산을 둘러싼 미디어 자본이 결합하면서 나온 아주 이상한 결과물이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잔여적인 이미지 형식이 <귀향>에서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죠. 김청강 <귀향>을 보고 저는 이게 왠지 성인 여성에서 소녀로 바뀌었을 뿐이지, (물론 성폭력 피해 여성과 겹쳐지는 공감의 부분을 넣긴 했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보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권은선 ‘소녀상’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사실은 소녀상의 무한증식으로 ‘소녀’가 일본군 '위안부'의 이미지를 과점유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많은 분이 반복해서 지적했던 것처럼, 일차적으로 ‘훼손당한 민족’을 순수하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이미지 재현이 소녀이기 때문이죠. <귀향>을 분석하면서 얻은 생각은, 이러한 순수한 민족적 피해자 소녀의 고통 재현이, 결국 ‘위안부’ 피해자를 추상화하고 종교화하고 신성화하는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즉 무력한 위치를 받아들이면서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라는. 그리고 그러한 감각을 강화하는 것은 이 <귀향>이 만들어진 크라우드 펀딩, 그리고 소녀상 만들기 모금 과정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이 이미지(동상)를 만든다”라는 주인의식이 과도한 죄책감의 공동체, 공통감각-이런 것들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대해서 입을 틀어막는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일종의 ‘국민 프로듀스’ 감각이라 할 만한 것으로, “내가 프로듀서”, 마치 버라이어티 쇼의 대국민 투표에 참여하듯이, 내가 제공하는 것이라는 생각. 이런 것들이 역사적 성찰에 필요한 이미지에 대한 거리감이라든지, 유효한 정치적인 전략을 구성하는 데 저해가 된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성찰과 비평적 담론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김청강 중요한 부분을 권 선생님께서 지적해주신 것 같은데요. 국민 프로듀스가 된다는 그런 감각?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시민의식 같은 거. 그러니까 굉장히 시민의식을 갖는 손쉬운 방법으로 돼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금 들거든요. 그러니까 조금 시민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여기에 적은 돈이지만 그만큼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손쉬운 시민의식 감각으로 만들어지는 경향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허윤 지금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물이나 상품, 텀블벅과 같은 크라우드 펀딩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죠. 오혜진 100피트 운동부터 <귀향> 보기 운동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시민참여 방식 자체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걸 ‘자본주의에 침윤된 소비자운동’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위안부’ 역사 재현의 새로운 쟁점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언제든 성애화되기 십상이니, ‘위안부’를 ‘소녀’, ‘성인여성’, ‘할머니’ 중 무엇으로 재현할 것인가가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고요. 결국 ‘위안부’ 역사를 재현한다는 것은 ‘위안부’ 문제를 역사화하면서 우리가 얻은 ‘성찰’을 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재현의 윤리’에 대한 두 가지 경향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나는, 지대한 고통은 ‘재현하지 않는 것’이 곧 윤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죠. 어떤 고통은 ‘재현 불가능성’의 영역에 있다고 규정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곧 ‘재현의 폭력’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는 ‘쇼아[1]는 재현될 수 없다’라는, 재현에 대한 오랜 논쟁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위안부’ 재현 서사뿐 아니라, 최근에는 (성)폭력이 등장하는 재현물 자체를 금지와 말소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까지 있죠. 하지만 ‘재현 없는 사유’가 가능할까요? 문제는 폭력을 ‘재현’했다는 것 자체에 있지 않을 겁니다. 어떤 관점과 방식으로 폭력을 재현하는가의 문제겠죠. 어떤 대상이 절대로 재현 불가능하다거나 재현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오히려 재현된 ‘이미지’에 대한 물신화에 기인한다고 생각해요. 재현된 이미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불가변적인 것으로 사유하는 거죠. 하지만, ‘재현된 이미지’는 대상에 대한 특정 시대와 인간의 ‘역사적’ 관점과 이해를 보여주는 한 사례일 뿐입니다. 특정 대상을 ‘재현 불가’의 영역에 두는 건 그 대상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것에 가까워요. 오히려 재현된 결과물에 대해 논쟁을 하는 게 더 생산적이죠. 이건 ‘표현의 자유’ 등을 내세워 모든 재현은 용납돼야 한다는 식의 나이브한 주장과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경향은, 특정 대상을 비평할 때 ‘재현의 윤리’ 등을 문제 삼는 것을 매우 전통적이고 엘리트적인 작품론에 속한다고 보는 의견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귀향>을 비평할 때, ‘재현의 윤리’를 문제 삼아 영화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이 영화의 제작과 수용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역사와 정치에 개입하는, 작품 자체보다 ‘더 큰’ 대중운동의 정치성을 간과하는 고식적인 비평으로 간주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시도한 재현 전략을 비평적으로 사유하는 것과 영화를 둘러싼 수용의 정치를 사유하는 것은 서로 배치되지 않아요. 둘 다 필요하죠. ‘재현의 윤리’는 작품을 창작한 개인의 정치적・미학적 수준이나 취향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특정 재현이 대중적 공감을 얻고 선호되는 건 그 자체로 그 주제에 대해 한국 사회에 축적된 지식과 이해의 문제고, 이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죠. 여기서 잠깐 영화 <사울의 아들>(라즐로 네메스, 2015)과 관련된 논쟁을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수용자들을 가스실로 이끌고 시체를 처리하는 또 다른 유대인 수용자들인 ‘존더코만도’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존더코만도’ 일원 중 한 명이 나치의 감시망을 피해 어두운 소각로에서 몰래 아우슈비츠의 모습을 찍은 사진 4장이 이 영화의 기반이 된 거죠. 저는 이 영화 초반부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이 영화가 정말 나를 아우슈비츠로 끌고 간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영화에서 카메라는 언제나 주인공의 어깨 뒤에 위치합니다. 딱 그 위치에서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거죠. 아주 한정된 시야로 현재 주인공이 있는 위치를 조망하기 때문에 관객은 지금 여기가 어딘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워요. 마치 광장에서 키 큰 앞사람들의 어깨 사이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현재 광장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해야 할 때의 답답함처럼요. 이런 촬영기법들이 저한테 일종의 임장감(臨場感)이랄까요, 내가 정말 그곳에 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줬어요. 그리고 또 영화는 바로 그 한정된 시야를 통해, 떼 지어 기차에 오르는 유대인들이나, 벌거벗은 수용자들의 시체더미 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장면들은 마치 포커스 아웃, 혹은 블러 처리를 한 것처럼 희미하게 나와요. 이런 연출을 통해 관객은 아우슈비츠의 시스템 전모를 절대 파악할 수 없고, 죽음에 이르는 수용자들의 표정이나 정동 같은 것도 결코 포착할 수 없죠. 아우슈비츠라는 장소나 피해자들의 모습이 ‘스펙터클’로 제시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혹자는 이 영화가 재현의 윤리에 매우 충실하다고 평했죠. 하지만, 피해자나 시체를 ‘희미하게’ 보여줌으로써 보장되는 윤리? 그렇다면 그 블러 처리가 조금 덜 희미했다면 덜 윤리적인 재현이 되는 걸까요? 저는 그 영화에 재현의 윤리가 있다면, 그런 정교하게 기획된 촬영기법에 있다기보다는 그 영화가 말하려고 했던 바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 영화는 주인공인 한 존더코만도 ‘사울’이 나치의 감시망을 피해서, 가스실에서 죽은 한 소년을 제대로 ‘매장’하고 애도하기 위한 분투를 서사화하거든요. 심지어 그 소년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존재일지라도, 바로 그 분투를 함으로써만 겨우 스스로 감지하는 ‘존엄’의 문제를 말합니다. 마치, 소년의 매장을 위해 분투하듯, 결코 재현될 수 없는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고통을 사유하려는 영화의 ‘기투’ 자체에 윤리적인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보면, ‘위안부’의 역사를 비롯한 고통의 재현을 생각할 때 ‘재현의 윤리’에 대한 매우 협소한 이해가 고착되는 상황은 염려스럽습니다. 권은선 공감합니다. 사실 ‘재현의 윤리’ 혹은 ‘재현의 도덕’이라는 논리가 이상한 방식으로 고착되고 사유되고 있어서, 어느 순간 개인적으로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더라고요. 단순히 촬영 기법 같은 것들이 즉각적으로, 기계적으로 어떤 윤리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시각화의 장치라는 것을 통해서만 그 어떤 이미지의 의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저는 시각화 장치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쇼아>부터 ‘아우슈비츠’를 재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오래되었죠.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저는 그것을 재현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사유하고 성찰하기 위해서 재현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재현의 방식이죠. 폭력의 재현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나쁘다면 그것이 폭력의 속성을 사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향>의 재현을 옹호한 언설 중의 하나가 실제 ‘위안소’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그린 그림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재현의 윤리에 관해 어떤 것도 담보할 수 없습니다. 위안소에서 벌어진 일이 정말 나쁜 것은, 그것이 인간성이라는 것을 말살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한 것이죠. <사울의 아들> 같은 경우에는 초점 심도를 낮추는 촬영 방식 등을 주도적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수용소에 있는 수용자들에게는 초점이 명확하게 맞춰질 수 없는, 어떤 상황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사울의 아들>을 두고 디디 위베르만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곳에서는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은 감시자의 시선뿐이라는 거죠. 그런데 <귀항>에서 정말 문제적인 ‘지옥도’의 재현을 예를 들면, 그것은 그 사실이 얼마나 끔찍하고 정말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극 부감의 시점으로 전체를 조망합니다. <귀향>에서 성폭력이 남성 중심적인 가해자의 관음증적 시선으로 묘사되는 것도 문제지만, 감시자, 전체주의자의 시선을 채택하고 있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성이 탈각된 ‘스위트 홈’ 고향의 이미지가 놓여 있고요. <귀향>에서처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마치 지옥도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종교적으로 만들고, 추상화하고 신성화하는, 그런 탈역사적 재현 장치를 문제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오혜진 아까 그 존더코만도가 찍은 사진 4장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2004년에 쓴 책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오윤성 역, 레베카, 2017)을 읽어봤어요. 그 사진들에는 화장 구덩이들과 숲에서 옷이 벗겨진 채로 호송되는 여성의 모습이 찍혔습니다. 하지만 그 사진은 나치의 감시를 피해 몰래 찍은 것이기 때문에 초점도 맞지 않고 이미지도 선명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사진을 찍는 이가 있는 장소도 함께 찍혔죠. 예컨대 화장 구덩이와 그곳에서 일을 지시하는 나치들만 찍히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던 제 5소각로 가스실의 ‘어둠’이 시커멓게 찍혔습니다. 화장 구덩이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던 공간의 열린 문을 통해 간신히 보이는 장면이죠. 이 사진들에 대해 가장 빈번하게 시도된 조작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이 알고 싶은 건 ‘아우슈비츠는 어떻게 생겼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나’이기 때문에, 사진 속 시커멓게 나온 ‘어둠’은 자르고 화장 구덩이들만 클로즈업하는 식이죠. 시커먼 부분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잔여적인 부분으로 간주해서 삭제하는 겁니다. 하지만 디디-위베르만은 그 시커먼 부분 역시 아우슈비츠의 이미지임을 강조합니다. 그 까만 부분은 그 사진들이 어떤 상황을 ‘무릅쓰고’ 탄생 가능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인데, 그것을 삭제한다는 것은 ‘증언/재현이 가능한 자리’를 비가시화하는 일이라는 거죠.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당연히 <귀향>의 소위 그 ‘지옥도’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위안소’ 전체를 ‘조감’하는 시선은 어떤 자리에서 가능한가 생각해보면, 그건 권은선 선생님 말씀대로 감시자 혹은 신의 시점이죠. 결국 우리는 왜 증언/재현을 물신화할 뿐, 그것을 가능케 한 역사적 조건을 사유하지 않는가. ‘위안부’의 고통을 존중한다면서, 왜 ‘위안부’의 고통을 재현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는가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김청강 디디 위베르만 책에서 보니 여성 가슴도 조작했다고 하더라고요. 더 위로 처진 가슴을 올리는 식으로요. 왜 굳이 그렇게 해야 했을까 생각하는데, 사실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어떤 우리가 보고 싶은 이미지, 그러니까 초점을 두는 부분에 대한 조작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사실은 어떻게 보면 지금 굉장히 재현이 많이 있지만, 다 너무 초점이 그 목적에 맞게 그 재현들이 너무 클리어하게 맞춰져 있다는 게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은 최근에 경향 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극화된 것이 많다는 것이잖아요. 그랬을 때 기존의 다큐멘터리가 정말 많은 것을 숙고해서 재현했던 방식과 극영화로 만들었을 때 방식이 굉장히 다를 수밖에 없고, 특히 극영화로 만들었을 때 너무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는 거예요. 초점이 너무 클리어해지는 거죠. 대중적 소통이라는 것에 공감을 얻고, 대중적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의식과, 그다음에 그러기 위해서 동원해야 하는 수단이, 사실은 어떻게 보면 그 이슈 자체를 너무 단순화하게 만드는, 그러니까 의도는 좋잖아요. 이 이슈를 알리고 사람들이 책임감과 모든 것을 알게 해야 한다는 건 좋지만, 사실 대중적 재현을 따랐을 때는 단순화될 수밖에 없는 그런 구도, 굉장히 클리어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쭉 스토리를 끌어나가야 하는 그런 것 때문에 어떻게 보면 대중적인 서사 안에서 더 많이 재현된다는 건 사실 더 큰 우려를 낳는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오히려 정말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각주 ^ 히브리어로 '홀로코스트'라는 뜻.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영화 <쇼아>(1985)는 총 350시간에 이르는 촬영 필름을 가지고 9시간 반으로 편집된 대장편 다큐멘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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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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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림의 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991년 8월 14일, 대한민국 생존자 최초로 김학순 님이 공개 증언하고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한 세대의 통념적 주기가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초국적 참조점이 된 동시에, 여전히 ‘현재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웹진 결은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11주년인 2022년을 맞아, 경계를 넘어 ‘위안부’ 역사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조명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온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로 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맞선 젊은 여성들,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비판적 담론을 생산하고 후속세대를 교육하는 연구자들, 전쟁과 제노사이드, 이민자와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해외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위안부’ 역사의 교훈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시죠.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지난 30여 년간 부산에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김문숙 회장이 2021년 10월 별세했다. 고(故) 김문숙 회장은 1991년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부산정대협)의 회장을 맡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알리고 피해자의 인권 회복을 위해 매진한 운동가이자 활동가이다. 일본이 ‘위안부’ 책임을 일부 인정한 관부재판을 이끌었던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2004년에 사재 1억 원을 들여 부산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개관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피해 사실과 관부재판 과정, 이외에 그가 피해자들과 함께 진행한 운동 과정 등이 담긴 기록 1000여 점이 전시된 역사관은 후속 세대를 위한 여성인권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김문숙 회장의 부재 이후 그가 실천해온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계승과 역사관의 지속적인 운영 방안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특히 역사관에 소장된 기록물의 목록과 DB가 없다는 점에서 소장 기록물 목록화 작업의 시급성이 학계에서 제기된 바 있다.[1] 이에 김문숙 회장의 뜻을 계승해 2021년부터 역사관을 운영한 김주현 관장은 2022년 4월에 역사관 소장 기록물의 목록화 사업을 위해 한국여성인권진흥원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소장자료를 재평가하고, 김문숙 회장이 수집한 자료를 여성인권과 평화를 위한 공공역사의 기록물로 추진”한다는 것이 사업의 주요 취지이다.[2] 이로 인해 오랜 기간 부산에서 민간차원에서 독자적으로 전개한 일본군‘위안부’ 운동과 개인이 수집한 자료가 정부 지원하에 공공역사의 기록물로 보존 및 활용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뿐 아니라 부산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운동을 주도한 김문숙의 삶과 생각, 또한 그를 통해 관찰된 피해생존자의 이야기도 공공 기록물로 공유될 예정이어서 향후 일본군‘위안부’ 운동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상황은 지난 30여 년간 진행되어온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틀과 방향성은 물론이고 운동의 담론 지형과 방법론에 대한 변화를 요구받는 실정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이라는 뚜렷한 목표”에 운동의 역량이 집중되었고, 그로 인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틀과 방향성이 불가피하게 축소된 측면이 있다.[3] 이는 가해자 일본에 법적 책임을 묻는 방향으로 운동의 틀이 강화되면서 피해자들을 침묵시킨 한국 사회의 여성 억압적 구조를 바꿔나가는 데 운동의 역량이 미치지 못했다는 지적으로 이어졌다.[4] 다른 한편,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현 정의기억연대)의 역할이 컸던 만큼 정대협의 경계 안팎을 오가며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이어진 시민운동이 주목받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5]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역동성을 입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복수의 문제의식과 실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로 귀결된다.[6] 게다가 생존자 없는 ‘위안부 운동’ 시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는 점에서 식민지 시기 전시 성폭력에서 비롯된 여성의 고통에 대한 기억을 이어가고, 더 많은 자료 발굴과 연구를 통해 미래 세대에게 널리 알리는 작업의 방향성과 방법론에 대한 성찰과 고민도 요구되고 있다. 김문숙 회장의 별세로 인해 야기된 부산정대협과 역사관의 변화 노력은 최근 새로운 전환의 시점에 직면해 있는 국내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몇 가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는 운동의 틀과 방향성,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김문숙 회장이 이끈 부산정대협은 정대협과 이름은 유사하지만, “정체성이나 이념적, 조직적 이력이나 지향”에 있어서 정대협과 동질적이지 않은 단체였다.[7] 부산정대협 연구를 진행한 문소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은 부산정대협의 정체성을 세 가지 특성으로 요약한다. 첫째, 부산의 지역적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과제로 삼는다는 점, 둘째,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하여 정대협과 공동대처를 지향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정대협과 이념적·조직적으로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부산정대협은 1991년 정신대 신고 전화 설치, 1992년부터 약 10년간 관부재판 추진, 2004년 ‘민족과 여성 역사관’ 개관, 2016년 평화의 소녀상 건립 등 일본군‘위안부’ 관련 주요 사업을 진행해왔다. 이 사업들은 정대협이 제시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7가지 요구사항에 포함된 활동들이다. 즉, 정대협의 ‘위안부문제 공동대처’라는 명분에는 부합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겹치지만 분리되어 차이성 내지 혼종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소정의 설명이다.[8] 부산정대협의 활동이 정대협의 활동과 유사하지만, 다르거나 혼종적이었다는 점은 국내 ‘위안부’ 운동의 동질성을 드러내면서도 중앙과 지방, 정대협과 지방 시민사회 조직 간의 균열과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유사하지만, 무엇이 또는 누가, 왜 부산정대협과 정대협 사이의 균열과 차이를 만들어냈는가? 또한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균열과 차이가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전국 또는 지역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부산정대협과 김문숙 회장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지난 30여 년간 진행된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다양한 문제의식과 실천 방법을 찾아내는 데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두 번째로, 김문숙 회장의 별세는 이미 성큼 다가와 있는 생존자 없는 일본군‘위안부’ 시대에 이어 초기 또는 제1세대 운동가 없는 ‘위안부’ 운동 시대 또한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1990년 전후 시점부터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뛰어든 활동가들에게도 고령화는 진행되고 있다. 제1세대 운동가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증언을 채록하거나 일상에서 그들과 친밀한 소통을 해왔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과 삶의 궤적, 더불어 피해자의 내면과 가족·사회적 관계 등에 대해 특별한 이해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일본군‘위안부’운동을 주도했던 운동가이자 또한 피해자들을 지원했던 활동가라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들의 삶을 관통한 피해 고통과 생애 경험을 대신 말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피해자들과 함께 경험한 사적 시간과 생활 공간의 재구성을 통해 피해자들의 개인적 고통의 사회적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이 지속되는 조건을 살펴보며 역사적으로 맥락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9] 제1세대 운동가들은 “가부장적 차별 사회 속의 젠더 문제를 비롯해 계급, 민족, 한반도의 분단체제와 냉전질서 등이 교차하는 현실”을 살아낸 주체들로서 포스트 식민시대에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간 피해자들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10] 따라서 피해자가 일생 동안 겪은 고통을 ‘역사’로 서술하는 작업에 초기 또는 제1세대 운동가들의 증언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김문숙 회장의 소장자료에는 본인이 직접 운영한 부산정대협과 여러 여성단체 관련 자료를 비롯해 피해자들의 삶과 관부재판 과정이 담긴 기록들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군‘위안부’ 운동 관점에서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전시자료를 살펴봤을 때, 관부재판 과정에서 일본 시민사회와 전문가들과의 연대 활동이 두드러진다. 실질적으로, 운동 초기 단계부터 김문숙 회장은 수차례 일본 방문과 일본 피해자 및 피해자 지원단체, 전문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출판 작업을 진행했다. 또한 그가 설립한 여성단체의 여성 성폭력 피해자 구제 및 보호 지원체계 구축 과정에 일본 여성단체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부산에서 진행된 초기 일본군‘위안부’ 지원 운동과 관부재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 활동 및 그 이후의 이야기가 전시자료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같은 맥락에서,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전시자료를 지역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전시물이나 자료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기존 전시자료에는 재판을 위해 시모노세키에 배편으로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부산이 위치한다는 점이나 일본군‘위안부’들의 삶의 공간이자 운동의 공간적 배경으로 부산이 등장한다. 하지만 부산 거주 피해자들의 생활 공간이나 개인적인 소장품, 유품 등의 전시를 통해 지역민으로서 그들의 삶의 조건이나 현실을 보여주는 전시자료는 거의 없다. 또한 그들을 지원했던 활동가들과의 상호교류를 보여줌으로써 부산의 피해자들이 누구와 어떤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운동가로 변모했는지, 또는 운동에 참여하지 않을 때 부산 ‘아지매’이자 ‘할매’로서 어떤 일상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자료가 부재하다. 앞서 기술했듯이, 지역민으로서 그들의 삶의 공간과 생활 공동체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들은 일상사와 생활사적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의 삶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진행 중인 김문숙 회장의 수집자료 정리 과정에서 부산 출신 피해자들의 일상사와 생활사를 보여주는 유용한 자료가 발견되기를 희망해본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의 공간과 생활 조건, 사회적 관계 등에 초점을 맞춘 자료나 연구 결과물이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부산을 포함한 경남지역에 일본군‘위안부’로 등록된 피해자 수가 가장 많다고는 하지만, 실제 지역에 초점을 맞춰서 일본군‘위안부’ 동원 체제나 동원 과정과 귀환, 귀환 후 생활에서 드러난 특성 등을 고찰한 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도 지적된 바 있다.[11] 지역과 지역성에 초점을 맞춘 자료와 연구 부족 문제는 현재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건립을 추진 중인 경상남도가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김문숙 회장의 별세와 부산 ‘민족과 여성 역사관’ 소장자료 목록화 및 기획 전시 사업을 계기로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부산과 일본 시민사회 간의 연대 활동 등에 대한 전반적인 재평가와 연구가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이는 획일화되고 전형적인 이야기 뒤에 숨겨진 지역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숨겨진 역동성을 찾아내는 일이자, 일본군‘위안부’ 연구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각주 ^ 남영주,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기관의 기억재현과 기억의 확장: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사례를 중심으로”, 『인문사회 21』, 2017, pp.129-148. p.139. ^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부산 ‘민족과 여성 역사관’ 소장자료, 여성인권을 위한 공공역사 기록물로 재탄생: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민족과 여성 역사관 소장자료 관리·보존을 위한 업무협약(MOU) 체결”, 보도자료, 2022.4.29. ^ 이지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 초기 증언의 교차적 듣기: 『조선인 군대 위안부(朝鮮人軍隊慰安婦)』(1992)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2(1993, 1997)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제 42호, 2021, pp.61-96. p.65. ^ 이유미, “시론-위안부 문제와 정의연 운동의 쟁점”, 『사회진보연대』 172호, 2020, p.-126. p.65. ^ 이지은, 2021, p.65. ^ 앞 저자, p.65. ^ 문소정, “부산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사이성에 관한 연구: 부산정대협을 중심으로”, 『항도부산』, 2021, 제 41호, pp.471~499. p.483. ^ 앞 저자, p.481. ^ 신동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연구의 새로운 방향 모색: 식민지 시대의 피해자에서 포스트 콜로니얼 시대 여성으로의 전환”, 2022, pp.5-9. p.7 ^ 앞 저자, p.9. ^ 강정숙, “경상남도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 <경상남도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건립 추진방안 도민 소통 포럼> 자료집, 2021, pp.16-22.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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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편집회의 2부 - '위안부' 문제로 대중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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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명아 (동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김헌주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 소현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 여순주 ((전)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 / 윤명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팀장) / 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 임경화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연구교수) /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 / 정용숙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 / 허윤 (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편집회의 1부 -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편집회의 2부 - '위안부' 문제로 대중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위안부' 문제로 대중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소현숙 말씀해주신 것처럼 연구자와 피해자와의 관계라든지, 대중매체에서의 ‘위안부’의 재현, 그리고 내셔널리즘과 페미니즘 사이의 긴장, 자발성과 동원의 문제 등 굉장히 다양한 논점들이 제기되었다. 굉장히 논쟁적인 주제들이고 앞으로 웹진<결>에서 이런 주제들을 다루게 될 것 같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웹진 <결>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 만드는 웹진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다른 '위안부' 지원단체가 만드는 웹진과는 차별성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우선은 연구 내용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필요가 있겠지만, 어쨌든 대중들과 만나는 작업이기 때문에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역할들을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용숙 '위안부' 문제는 미디어에서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다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있는 것들이 표면적인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도의 깊이가 각기 다르다. 웹진 <결>이 타깃으로 삼는 ‘대중’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가? 소현숙 연구소에서 처음 웹진 사업을 기획할 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더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정보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웹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연구자들이 이 웹진을 통해서 관련 주제의 새로운 연구 경향을 파악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콘텐츠들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헌주 어차피 대중적으로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관련 전공자나 지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대중이 웹진 <결>을 찾으리라 생각한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웹진 <결>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레퍼런스다. 예를 들면 유사 역사학이 유행했을 때, 그 논쟁을 진화하는 데 주요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위키피디아에 정리된 레퍼런스들이었다. 누군가 유사 역사학을 비판한 전문가의 글을 찾아서 정리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웹진의 글들은 '위안부' 문제의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리라 생각한다. 윤명숙 웹진의 독자를 상정하여 크게 둘로 나눈다면, 하나는 연구자나 관심이 많거나 지적 수준이 높은 대중들이고 또 하나는 상당수가 학생들이 될 것이라고 본다. 전자는 지금껏 대부분 출간 서적에서 정보를 얻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서 가르친 경험에서 말하자면, 학생들의 경우는 책보다는 주로 블로그나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같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습득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웹진 <결>이 신경 써서 상대할 주 타깃 중 하나를 대학생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다만, 문장은 중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평이한 문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연구자지만 연구자들의 글쓰기는 대부분 딱딱하고 어려운 편이다. 웹진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은 있으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전제하고 중학생 정도가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함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연구 논문이나 담론 논의와 같이 학문적인 분야까지 평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권명아 이미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상당히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90년대부터 이 문제를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로 다루는 연구가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이 '위안부'와 관련된 연구가 부족하다든지, 너무 민족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한다. 모든 연구가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담론을 형성하는 통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예를 들면 '위안부' 문제는 일본에서 아주 오랫동안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혐오발언)의 원재료로 사용되어 왔다. 헤이트 스피치로 가공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내러티브가 따로 있는 것이다. 최근에도 일본에서 '위안부'와 강제징용 재판 두 개의 주제를 이야기하는 헤이트 스피치 책이 출간됐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버전으로 갱신되고 있다. 소위 혐한 출판물이라고 하는 책들이 대중적인 버전으로 나오고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위안부'에 대한 올바른 정보들이 많이 부족하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책보다는 인터넷에서 이야기가 많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에 대항할 수 있는 '위안부'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정보들이 대개는 비전문적인 채널인 경우가 많아서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고, 일본 우익의 헤이트 스피치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짚어줄 수 있는 미디어가 너무 절실하다. 대항 내러티브는 훨씬 더 전문적이고, 기존의 내러티브의 맹점을 잘 짚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올해 일본에서 출간된 헤이트 스피치 책에서도 '한국이야말로 성매매 천국’이라고 나온다. "이런 한국이 '위안부' 동원에 대해 문제 제기할 자격이 있느냐”고 써놨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족주의 교육은 단일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인종차별이다. UN에서도 한국의 민족주의 교육을 철폐해야 한다고 권고를 받았다”라면서 “일본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문제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일본의) 연구자들도 '위안부' 동원이라는 것이 국가에 의한 성 관리와 전시 성폭력이 결합한 (보편적인 문제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2차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도 그랬다면서 말이다. 이런 교묘한 내러티브에 대항하는 내러티브를 만들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누구도 하고 있지 않다. 조경희 자꾸 일본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웹진 <결>이 향후 다언어로 발신되리라 생각해서 말씀드린다. 90년대 탈냉전기가 ‘증언의 시대’가 된 것은 동아시아에서는 특히 '위안부' 피해자들의 커밍아웃과 증언의 힘이 크다. 이것은 ‘경험’이나 ‘기억’ 혹은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학술적 경향이나 담론 전반에 반영되었고 이에 대한 반감이나 혐오는 어느 선진국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특히 일본의 젊은 대중의 경우 ‘착한 이야기’를 하는 리버럴 세력을 기득권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더욱 쉽게 역사 수정주의적인 담론에 끌리게 된다. 권명아 선생님이 지적하셨듯이 혐오 세력들은 점점 교묘해지고 있다. 그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재일조선인을 혐오하고 LGBT(성소수자) 차별도 한다. 행동으로까지 옮긴 사람은 소수지만, 담론으로는 지속적인 대중적 영향력을 갖게 된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이 웹진 <결>의 주된 타깃은 아니지만, 탈진실이나 반지성이라 말하는 시대에 대한 상상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가 이미 그만큼 담론투쟁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윤명숙 구체적인 관점이나 담론 형성 등에 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데, 나는 이에 더해 역사 사실을 어떻게 조화롭게 다루는 것이 좋을지 말하고 싶다. 먼저 역사 사실, 즉 팩트도 중요하고, 관점도 중요하다. 중요한 건 웹진에서 팩트를 통해서 다양한 관점이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운동의 경우에는 해결이라고 하는 절명의 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훨씬 더 민족주의에 치우쳐서 바라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 교사들의 경험을 빌려 말하자면, 학교 교육에서도 기존 교재를 가지고 수업을 하다 보면 ‘일본놈 나쁜 놈’이라는 식으로 끝나기 쉬운 커리큘럼이 많았다고 한다. 앞으로 웹진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조금씩 극복할 수 있는 내용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전공을 가진 편집위원들이 모인 만큼, 웹진에서 각자의 문제의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팩트냐 관점이냐가 아니라, 팩트는 팩트대로 중심에 놓고, 팩트를 통해서 다양한 관점이 확장될 수 있는 방식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왼쪽부터) 허윤, 이선이, 정용숙 웹진 <결>에서 다뤘으면 하는 콘텐츠 이선이 2015년 12월 28일 한일 양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합의를 했다. “불가역적이고 최종적 해결”이라고 한국 정부가 선언했다. 그 선언 자체가 엄청난 충격이었다. 피해자가 명백히 있는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는 어쩌면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만으로는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과정에서 비판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고, 이 문제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다양한 시사점들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웹진 <결>에서 이러한 고민을 잘 담아냈으면 좋겠다. 김헌주 언론에서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다룰 필요도 있다. 국민기금 문제라든가 일본 내에서 있었던 고노담화라든가. 연구자 사이에서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문제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위안부' 프로젝트를 하면서 한일 언론에서 기사들을 뽑고 정리하는 작업을 했는데, 그것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한국 언론은 한겨레신문부터 조선일보까지 모조리 일본의 우익 담론만 보도한다. 그게 언론에서 소비하기 좋은 거다. 일본 내부의 우익 담론만 보도하고 리버럴, 진보계열 등의 다양한 주장들이 언론을 통해서 전달되지 않고 있다. 국회 속기록도 정리한 적이 있는데, 일본 내의 중도정당이나 좌파정당에서는 아베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런 목소리들이 국내에서는 전혀 소개되지 않는다. 대중들은 언론에서 제공하는 기사들을 통해서 '위안부'에 대처하는 일본의 상을 형성하게 되는데, 일본 내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웹진 <결>에서 보여줄 필요가 있다. 권명아 그래서 일본을 포함한 해외의 일본군'위안부' 지원단체나 기관을 소개하는 콘텐츠가 필요하다. 일본의 많은 진보적인 단체와 학자들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고 연구도 상당하다. 그런 것들이 한국에 잘 소개가 되지 않아서 국내에서 바라보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의견이 다 뭉뚱그려져 있다. 여순주 국내에도 관련된 단체들이 많이 있다. 아무래도 '위안부'와 관련된 활동의 중심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가지고 있어 그 위주로 소개되면서 다른 지방에 있는 단체의 활동은 보도가 잘 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웹진 <결>이 국내의 다양한 단체를 소개하고 연대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건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작년에 광주에서 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이 진행돼서 4년 만에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직접적으로 '위안부'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제 때 강제노동과 관련된 부분이라 웹진 <결>에서 소개해주면 좋을 것 같다. 당시에 신문에 딱 한 면만 나오고 추가로 보도가 되지를 않더라. 그런 것도 연결해서 다뤄주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윤명숙 여순주 선생님 발언 중에 여자 근로정신대는 '위안부'와 무관하지 않다. 간단하게는 1990년대 초반까지도 한국에서는 '위안부'를 정신대로 호칭했다. 또 식민시기 조선에서 업자들이 농촌에서 딸들이 근로정신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개해주는 공장에 가면 된다고 속이는 등 '위안부' 동원에 취업 사기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연구소는 '위안부' 문제와 직접 관련된 자료만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소·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는 모두 수집해야 할 것이다. '위안부' 동원에 활용된 취업 사기를 예로 들면, 당시 식민지기 조선의 여공 실태를 알아야 하니 여공 관련 자료 소개나 연구 성과를 웹진 <결>을 통해 국내외 연구자나 대중에게 제공하면 좋을 것이다. 정용숙 돌발적으로 외교 현안 같은 것으로 '위안부' 문제가 소환될 때, 그 불쑥 튀어나온 사건 밑에 있는 저간의 과정과 맥락을 전문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은 잘 모른다. 예전에 들었더라도 꾸준히 관심 두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그래서 상황 파악을 표면적으로밖에 못 하고, 같은 얘기 반복하고, 일회성 이슈 소비로 끝나고. 그래서 그런 걸 짚어주는 역할을 웹진 <결>이 해야 할 것 같다. 웹진이 정기적으로 나온다면 선제적으로 이슈를 다뤄줘도 좋겠다. 예를 들어 8월이라면 '위안부' 문제 관련해서 그달에 있었거나 기억해야 할 일들을 다룬다든가. 시사적인 면에도 관심을 기울이면 좋을 것 같다. 허윤 저의 지인이 BTS 팬이 되어서 ARMY(BTS 팬클럽) 활동을 시작했는데, BTS의 원폭 티셔츠 사건 때 며칠 밤을 새우면서 일본과 미국의 혐한들과 싸웠다. BTS를 파시스트로 프레이밍 한 것은 혐한 세력이 만든 의도적인 비난이라는 맥락에 놓여있는 것이라면서. 이에 대항할 자료를 찾기 위해서 영미권의 자료들을 검색하는데, 일본군'위안부'나 원폭 문제와 조선인의 관계 등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거다. 결국, ARMY들이 선택한 방식은 원폭 피해자 협회와 '위안부' 할머니에게 기부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팬덤)는 역사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 나가도록 노력하겠다." 이런 방식으로 대응해 나가더라. 적극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공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것처럼 웹진 <결>에는 일종의 대중적 이슈 파이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제가 너무 어렵고 문턱이 높으면 ‘웹진’이라고 하는 형식으로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한국 사회가 상식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전형화된 서사를 좀 풍성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오히려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나는 이미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태도인 것 같다. 그런 고정관념을 깨면서 담론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소현숙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느낀 건데, 학생들이 이 문제를 잘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이 문제는 굉장히 쉬운 문제, 일본이 사죄하면 끝나는 문제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강의를 통해 이 문제가 사실은 쉽지 않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되면 꽤 놀라는 것 같다. 저는 그런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를 비판하고 헤이트 스피치에 대항하는 근거 담론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웹진이 해야겠지만, 또 한편에서는 일본군은 왜 여성을 성적인 도구로 만들어야 했었는지, 그 역사적 경험은 왜 한국군 위안소, 미군 기지촌의 역사로 해방 후까지 이어졌는지, 왜 피해자들은 전후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 일본인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이 문제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등에 대해서 한 번쯤 자기 문제로 고민해 볼 수 있는 콘텐츠들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조경희 저는 작년부터 신입생들 대상으로 세미나 수업도 하고 ‘인권과 평화’라는 과목도 맡았는데, 특히 작년에는 미투 때문에 여학생들은 '위안부' 문제를 젠더 폭력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았다. 한편에서 식민주의나 재일조선인 문제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관심이 많지 않았고, 선생님들이 말씀하신 대로 과거사 문제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사죄를 끌어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거꾸로 보면 '위안부' 문제만큼 다양한 문제에 걸친 사안도 없다. 계급, 여성폭력, 동원체제, 미 군정, 반공주의, 민주화, 탈냉전 등 하나하나 특집으로 꾸며볼 수 있겠다. 다만 어떤 점에 초점을 둬도 '위안부' 문제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면 여전히 피해자들의 증언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원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웹진에서 직접 증언을 다룰 수 없어도 대중들이 증언을 접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왼쪽부터) 여순주, 윤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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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자료해제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名簿) 종류와 연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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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에 수록된 이들은 누구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역사적 과제로 국내에서 논의된 시점은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세미나 '여성과 관광문화'(1988년)부터입니다. 이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조직되었고(1990년), 1991년 8월 14일엔 김학순의 증언 등이 이어지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활동의 장이 한국에서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유엔을 비롯한 전 세계로 확대되었습니다.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문제에 대한 연구주제도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다양한 연구주제 중 일본군 '위안부' 관련 명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작년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에서 여러 명의 연구자가 명부 이야기를 다룬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2019)을 출판했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더 많이 알고 싶다면 위의 책을 참고해 주십시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몇 가지 용어를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첫 번째는 명부(名簿)와 명단(名單)이란 용어입니다. 이 두 용어는 함께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명단은 '어떤 일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표'이고, 명부는 '어떤 일에 관련된 사람의 이름, 주소, 직업 따위를 적어 놓은 장부'를 뜻합니다. 명단이 다소 개별적이고 단순한 이름표라면 명부는 이보다 더 체계적이고 묵직한 느낌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위안부' 관련 명부라는 표현입니다. 이 글에서는 '위안부' 관련 명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문건 작성자들이 '위안부' 명부라는 표현을 일괄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연구자들이 발굴한 명부 중에서 '위안부' 명부라고 명명할 수 있는 문건은 제한적입니다. 현재 발굴된 명부 중에 '위안부'만을 대상으로 작성된 문건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명부가 작성된 과정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명부에 기록된 모든 여성을 '위안부'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일본의 패전후 조선으로 귀환할 당시에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에서 만들어진 명부에는 귀환자 전원의 명단이 수록되었기에, 치밀한 검토과정 없이 이를 '위안부' 관련 명부라고 한다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한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고, 작성 경위를 파악할 수 있는 명부를 '위안부' 관련 명부로 보고 소개합니다. '위안부' 관련 명부들은 일련의 의도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의도와 필요가 각기 달랐기에 명부의 명칭은 작성 주체에 따라 제각각입니다. 아래 표는 이 글에서 소개할 명부를 작성 주체와 장소, 그리고 시기를 중심으로 구분해 정리한 것입니다. 시기를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전쟁 중에 작성된 명부와 일본 패전 뒤에 작성된 명부의 목적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고 : 연도를 기록한 명부(명단)를 제외하고는 일본의 패전 전후에 만들어진 명단. 전쟁 중 지역별 전세 차이가 있어 버마, 필리핀 등지 명부는 공식적인 일본 항복 이전에 만들어짐. 1. 주더란 편(朱德蘭 編), 『대만 ‘위안부’ 조사와 연구 자료집(臺灣慰安婦調査と硏究資料集)』, 타이페이 중앙 연구원 종산 인문사회과학연구원(臺北中央硏究院中山人文社會科學硏究所),1999. 56쪽(수록자료는 타이완성문헌위원회에 소장된 타이완척식주식회사자료군에서 발굴한 자료).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 편,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최종길 논문, 284쪽). 2.『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쑤즈량·천리페이, 윤명숙 논문)과 박정애 논문(「중국 저장성(折江省) 진화(金華)의 위안소와 조선인 '위안부'」, 『페미니즘연구』, 2017.4. 3. 민족문제연구소 사본 소장. 중국 상하이 명부에서는 피해자 한 명만 확인되었다 4. 위와 동일 5. 오키나와현립 도서관 소장자료. 강정숙,「일제 말기 오키나와 다이토(大東)제도의 조선인 군 위안부들」, 『한국민족운동사연구』4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4. 6.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소장자료. RG 313 Entry 1352 Box 1967 7. 일로일로 환자요양소, [성병 검사 성적의 건 통보], 여성을위한아시아평화국민기금 편(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國民基金 編),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관계자료집성(關係資料集成) 3권, 69쪽 8. 연합군작성 포로명부(NARA 소장자료, 한국 국가기록원 복사본 소장.) 9. 타이의 연합군 및 타이군에 의해 작성된 수용소 명부(타이국립기록원 소장) 10. 버마 미치나 인도 레도 수용소. 정진성편, 『일본군'위안부'관계미국자료』3, 127쪽 11.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강제동원명부해제집 1』 231, 242-3. 원자료는 NARA 소장자료, 국사편찬위원회에 복사본 소장 12. 유수명부와 복원명부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 2009, 31쪽, 40쪽 13. 남방조선출신자명부 : 위 책, 44쪽 명부가 보여주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성격 산야(三亞)방면행 특요원 명부<그림 1>[1]는 1939년 5월 일본 정부 국책회사인 타이완척식주식회사(이하 타이완척식)가 생산한 보고서[2] 자료 중의 일부입니다. 특요원은 바로 '위안부'를 지칭합니다. 특요원 명부를 통해 이 지역의 일본군 '위안부'가 대부분 대만인, 일본인, 조선인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명부와 함께 나온 자료에선 도항자(渡航者, 배나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이동하는 자-편집자) 명부, 인명표라는 명칭도 쓰고 있습니다. 특요원 명부가 포함되어 있는 희귀한 도항자 명부인 셈이지요. 특요원 명부와 함께 발굴된 자료는 특히 중요한데 일본 해군과 총독부, 타이완척식, 타이완척식의 자회사인 후다이(福大)공사 등이 군 위안소 건축과 '위안부' 동원에 관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면 일본 해군은 총독부를 거쳐 타이완척식에 중국 하이난도(海南島)의 해군 위안소 건축과 군 '위안부' 동원을 요청합니다. 타이완척식은 자회사인 후다이공사를 통해 위안소 건축 완료 후 해군으로부터 대금을 받기로 하고 '위안부'로 삼을 여성들을 동원했습니다. 게다가 이 자료 더미 속에는 당시 동원된 여성 수십 명의 명단이 있습니다. 일본의 우파 학자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도 위안소 경영을 위한 비용은 일본군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었던 '임시군사비'에서 나왔다고 인정한 바 있습니다. 오키나와 다이토 제도(大東諸島) 4중대 진중일지 <그림 2>에 수록된 조선인 여성의 수는 적지만, 이 명단이 기록된 진중일지에는 다이토 제도에 배치된 '위안부'들의 이름, 다이토 제도로 오기까지의 이동 경로, 그리고 '위안부'들이 전쟁 중에 처한 상황 등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진중일지는 패전이 임박하자 관련 기록물 소각을 명한 일본군 상부의 지시사항까지 적힌 상태로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당시 기록물 소각 명령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 4중대 중대장의 결단 덕분이죠. 일본군이 이와 같은 기록물을 폐기하지 않았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진중일지와 유사한 명부들을 발굴해 '위안부' 피해 실태를 비롯한 더 많은 사실을 밝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 일본군은 '위안부' 명부를 작성하였을까 위에서 언급한 도항자 명부, 진중일지 외에도 여성들이 위안소 소재지에 도착한 이후 그 지역 일본군이 작성하거나 위안소 업자가 작성해 일본군에게 제출한 '위안부' 명부들이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군정감부가 낸 「군정 규정집」 제3호[3](1943.11.11.)에는 '지방장관은 위안시설 및 여관영업자 명부와 가업부(稼業婦, '위안부'를 지칭-필자) 명부를 비치하고 이동이 있을 때마다 정리할 것', '가업부는 취업과 폐업 시에도 관할 지방장관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은 왜 '위안부' 명부의 작성과 관리를 중시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군 기밀 보안 등의 이유로 전쟁터에서 일본군 관련 시설에 있는 이들의 신분을 확인한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일본군이 여성들을 전쟁터에 동원한 목적은 군인의 성병 예방과 성욕 해결 등이었으므로 '위안부'로 동원한 여성들을 상대로 성병 검사를 하고 관리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필리핀의 파나이섬 성병 검사 결과를 보고한 성병 검사 성적(검미성적)에 관한 건 통보(1942.6) <그림 3>라는 공문을 살펴보겠습니다. 파나이섬의 환자요양소나 군정 의료기관에서는 지역 내 위안소 여성 수십 명을 대상으로 일정 기간마다 성병 유무를 진단하여 그 결과를 한 명 한 명 정리해 상부 기관에 보고했습니다. 성병 검사 상태 보고가 목적이므로 이름, (나이), 병 상태 정도만 적은 간단한 것이지만 그 지역 관할 군 혹은 군정에서는 이를 일상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공문은 파나이섬에서만 작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림3>은 발굴된 자료 중 중요한 자료입니다. 안타깝게도 일본 측이 원본의 이름 부분을 검게 지워 지금으로서는 조선인 여부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명부의 발굴을 통해 이 지역 외에도 각지에서 성병 검사와 관련한 명부들이 생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명부 분석을 통해 영웅으로 둔갑한 위안소 업자를 밝혀내다 중국에서 발굴된 저장성의 진화계림회 명부는 일본군에게 점령된 중국 진화 지역에 거주한 조선인회가 만든 명부입니다. 이 명부는 1945년 1월에 진화현의 한 관리가 쟝이밍(將一嗚) 지사에게 제출한 것으로, 조선인 '위안부'들의 정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본 패전 이전의 기록이어서 당시 저장성 지역 상황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진화계림회 명부와 관련하여 제가 언급하고 싶은 지점은 '위안부'보다 위안소 업자들의 직종 변경이나 장소이동이 상당히 잦다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귀환하는 조선인 남성들의 경력을 다룬 명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조선인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했던 일제의 인력이용 방식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주목할 것은 당시 위안소 업자였던 남성이 미담의 주인공으로 소개된 사례입니다. 중국 상하이 한국부녀공제회 회장이었던 공돈은 '위안부' 들을 구제한 영웅으로 신문에 등장합니다(「일본에 의해 끌려간 조선여성들이 상해 동포들에게 구제」, 『서울신문』, 1946.5.12.). 하지만 그는 1942년에는 위안소를 경영한 업자였음이 명부(1942, 『재지반도인인명록』[4])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앞으로의 명부 연구가 만들어낼 가능성 필리핀·축제도(Chuuk Islands, 통칭 트럭섬)·일본 오키나와·버마·타이의 연합군이 작성한 명부 중 필리핀 포로수용소 명부<그림4>는 비교적 자세한 개인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개인 신상만이 아니라 수용소 간 이동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입니다. 이에 비해 남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 축제도 명부, 일본 오키나와 명부는 주소와 이름이 적혀 있을 뿐입니다. 버마, 타이 명부에는 이름만 있을 뿐 주소도 없고, 이름도 창씨개명 이후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단편적인 명부를 도대체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요.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한 가지 구명줄이 있습니다. 바로 이미 발간된 피해자들의 증언집입니다. 한국정신대연구회(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지역단체 등에서 만든 증언집만 10권 이상입니다. 북측에서 만든 증언집도 있습니다. 이러한 증언집의 내용에 기초하여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과거 점에 불과하던 명부 속 피해자들의 존재가 선과 면으로 연결되어 입체적 존재로 여러분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역사 현실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강화해야 단순하지 않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다면성을 이해하고 해결 방향도 제대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초기에는 명부를 주로 한국인 생존자를 찾고, 당시 일본군의 책임을 묻는 용도에 국한해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보다 자료 상황이 나아졌습니다. 명부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할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이 국내외에 발굴되어 있기 때문이죠.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을 토대로 ▲명부를 작성한 일본군, ▲연합군, ▲명부 작성에 관여한 현지인의 다양한 역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민족별 대응 방식의 차이, ▲위안소 내 힘의 관계, ▲젠더 문제 등 다양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명부 연구에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 많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책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2019)에서 좀더 자세하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다음 글에서는 인도네시아에 있던 조선인 여성들의 정보가 기록된 유수(留守)명부와 복원명부에 대해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Credit 편집 : 현승인, 변지은 교정/교열 : 금혜지 감수 : 윤명숙, 김소라 일러스트 : 백정미 각주 ^ 타이완에서 하이난도(海南島)으로 건너간 여성명단 중 일부.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78쪽(최종길, 도항자 인명표)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 2019, 75~76쪽. 타이완척식의 사업과장이 총독부 임시 남지조사국 이사장에게 보낸 1939년 5월 9일자 보고서는 “해군무관실이 귀국(타이완총독부-인용자)을 통해 조회한 건에 관하여 별지대로 수배를 마치”고 “2. 특요원(싼야 방면행) ㈎ 10인 1조(5월 23일 金令丸로 출항 예정) ㈏15인 1조(현재 수배 중)”를 하이난도로 도항시킬 예정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용한 타이완척식의 자료에는 '위안부' 관련 명부가 4개 존재한다. ^ 마라이군정감(馬來軍政監部), 군정규정집(軍政規定集) 3호: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國民基金), 『 정부조사(政府調査)「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 관계자료집성(關係資料集成)3』, 龍溪書舍, 1997, 25쪽. ^ 백천수남(白川秀男) 편, 『재지반도인명록(在支半島人名錄)』, 백천야행(白川洋行), 1941, 1942. 황선익, 「해방 후 중국 上海지역 일본군 ‘위안부’의 집단수용과 귀환」, 『한국독립운동사연구』54, 2016.5, 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