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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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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위안부’ 피해를 밝히는 증언자라는 사실을 넘어, 인권과 평화를 위한 거침없는 행보로 많은 이들은 그를 인권활동가, 평화활동가로 기억하고 있다. 김복동의 목소리는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그가 뿌린 평화의 씨앗은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남아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8월 14일 기림의 날을 맞이하여 웹진 <결>은 김복동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가 겪었던 피해 사실을 열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해 이후 인권·평화 활동의 궤적을 살펴 김복동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주목했다. 김복동의 곁에서 함께 싸웠던 활동가부터 그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일반 시민까지, 그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드러내고자 했다. 총 다섯 개의 콘텐츠로 구성된 [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는 김복동을 향한 우리의 기억이다. [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 1.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2. [에세이] <김복동>이 남긴 것 3.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4.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5.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군인들에게 끌려 다닐 때 나는 나를 찾지 않았어...... (중략) 나 없이 살았어, 나 없이...... 눈을 떴더니 내가 예순두 살이었어. 까만 원피스에 까만 구두를 신고 집에 돌아왔을 때가 스물두 살이었는데... 예순두 살에 나를 찾으려고 신고했어. - 김숨,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일본군‘위안부’ 김복동 증언집/김숨 소설), 현대문학, 2018, 135페이지 나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지만, 지금 세계 각지에서 우리처럼 전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성들을 돕고 싶습니다. - 2012년 3월 8일(세계여성의날), 나비기금 설립 기자회견장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 평화활동가로 불렸던 김복동의 이야기이다. 열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 스물두 살에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김복동은 자신을 찾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낯선 곳에서 일본군들에게 끔찍하고 참혹한 일들을 겪으며 당시의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때의 경험을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예순두 살에 ‘나’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신고하기까지 김복동은 그 긴 세월 동안 자기 자신을 애써 외면하고 또 외면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눈떠보니 예순두 살, 그때서야 자신의 삶을 마주해야겠다고 결심한 김복동은 2019년 1월 28일 93세의 나이로 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30여 년간 치열하게 과거의 삶과 마주하며 자신을 찾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였던 자신의 경험을 국내외에서 담담히 전하며 폭력에 짓밟히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마음을 같이 하며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계속했다. 아시아 곳곳에서 겪은 8년간의 위안소 생활 김복동은 1926년 5월 1일 경남 양산에서 딸만 여섯인 집의 넷째로 태어났다. 1941년 김복동은 양산 보통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세상이 흉흉하니 집에 있는 것이 좋겠다는 어머니의 권유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마을마다 나이 찬 여자 아이들을 끌고 간다는 소문이 돌아서, 김복동의 세 언니는 이미 서둘러 결혼을 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열다섯 살인 김복동은 어려서 괜찮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구장과 반장이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을 입은 일본사람과 함께 김복동의 집으로 와서 어머니에게 딸을 데이신타이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데이신타이가 뭐냐고 묻는 김복동의 어머니에게 그들은 군복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며 3년만 일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김복동은 끌려갔다.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부산으로 가서 이미 도착해 있는 20명 정도의 여성들과 함께 화물선을 타고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그 후 대만,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의 침략 경로를 따라 끌려다니며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다. 대만에서는 고향으로 편지를 쓰라고 해서 일본군이 불러주는 대로 적었는데, 김복동의 어머니는 그 편지를 받아보고 딸이 대만으로 끌려갔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일본군은 1939년 중국 광둥을 점령하고 위안소를 설치했다. 광둥은 일본군과 ‘위안부’가 동남아시아로 나가는 거점이 된 곳이다. 김복동 일행은 광둥에 도착하자마자 군인 트럭을 타고 위생병원 같은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일본 군의관은 옷을 강제로 벗기고 성병 검사를 했다. 그 검사가 끝난 후부터 끔찍한 위안소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홍콩으로 옮겨 석 달쯤 머물렀고 그 후 싱가포르로 이동했다. 싱가포르에서는 가끔씩 산속 깊은 곳의 군부대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위안부’ 10명쯤이 함께 갔는데 군인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저녁이 되면 다리를 펼 수 없을 정도였다. 싱가포르에서 몇 달 머문 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로 이동했다. 김복동은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잊지 않으려고 수마트라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외우고 또 외웠다. 김복동 일행은 어쩌다 쉬는 시간이라도 있으면 모여 앉아 울기만 했다. 일본이 이겨야 전쟁이 끝나고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일본이 이기기를 빌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위안소에 군인들이 오지 않았고, 보름쯤 지나자 일본 군인들이 빨간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차를 타고 와서 김복동 일행을 태우고 떠났다. 김복동 일행이 간 곳은 남방군 제10육군병원이었다. 그곳에서 김복동 일행은 간호 훈련을 받았다. 호박에다 주사 놓는 연습을 하기도 하고 병원 청소도 했다. 제16군 사령부 직할부대 제4과 남방반이 작성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 김복동은 1945년 8월 31일 용인(庸人)으로 이름이 실려있다. 김복동이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수마트라 소재의 위안소에 있다가 해방을 맞은 후 남방군 제10육군병원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김복동은 갑자기 군인이 오지 않게 된 지 보름쯤 지난 후 제10육군병원으로 이동했다고 정확히 기억했다. 제10육군병원에 있던 어느 날 이종사촌 형부라는 사람이 김복동을 찾아왔다. 군속인 형부에게 김복동의 어머니가 대만에서 딸을 꼭 찾아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미군 수용소에 있던 김복동의 형부는 조선인 여자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제10육군병원까지 왔다고 했다. 형부의 도움으로 병원에 있던 김복동은 다른 조선인 여자 300명과 함께 영국군 수용소로 거처를 옮겼다. 수용소에는 중국인, 서양인 등 1,000여 명이 있었다. 1946년 김복동은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사촌오빠와 사촌언니 그리고 어머니가 김복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났다가 스물두 살이 되는 해에 돌아왔으니 8년 만이었다. 형부는 김복동이 ‘위안부’였던 것을 안 것 같았지만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간호부 생활을 했다고만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성화를 부리셔서 김복동은 어쩔 수 없이 ‘위안부’ 생활을 했던 것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통곡을 하셨지만, 재취 자리라도 가야 부모로서 마음이 놓인다며 딸에게 결혼할 것을 종용했다. 그래서 김복동은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남편의 바람과 경제적인 문제로 끝이 났다. 아이도 없었다.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그 후 김복동은 혼자 살았다. 구멍가게를 하면서 이웃도 돕고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며 생활했다. 과거의 ‘나’를 단절시킨 채 현실만 바라보며 살아가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텔레비전을 통해 ‘위안부’ 피해 신고를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신고 전 동생에게 의논하니 동생은 조카들도 있는데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가족의 혼외 섹슈얼리티 경험, 그것도 일본 군인들에게 당한 성적 유린의 경험은 가족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수치였을 것이다. 김복동의 가족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1990년대 초반 우리 사회의 성 인식이 그랬다. 그런 우리 사회의 성 인식은 ‘위안부’ 문제가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공론화되기 시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김복동은 며칠을 고민하다 1992년 1월 17일에 피해 신고 전화를 했다. 그때부터 김복동은 가족들과 멀어져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자신과 온전히 마주하며,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수많은 세계 시민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김복동의 목소리가 울림이 되어 그때부터 김복동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감이 더해갔고,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김복동은 1992년 제1차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증언했다. 그리고 199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하여 증언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스위스, 영국,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일본 대만 등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하면서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촉구했다. 200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 원고로서 영상으로 증언하기도 했다. 법정이 열린 첫날인 12월 8일, 김복동의 사례는 ‘‘위안부’의 연행과 이송’과 관련하여 책임자 안도리키치(安藤利吉, 1944년 당시 대만총독)의 책임을 묻는 심리에서 증언으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김복동의 활동도 중간에 잠시 쉼이 있었다. 건강 때문이었다. 젊을 때 워낙 심하게 혹사당해서인지 김복동은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김복동은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몸을 돌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2009년 수술했던 눈의 증상이 재발하여 다시 서울 마포구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 머물며 2010년 재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인권과 평화를 위한 김복동의 행보는 계속되었다. 수요시위에 참여해 평화로운 세상 만들기를 호소하는 것은 물론, 고령의 몸을 이끌고 전 세계를 누비며 국제 활동을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 촉구와 전시 성폭력 피해의 재발 방지에 대한 국제여론을 이끌어 냈다. 김복동을 포함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러한 활동은 콩고와 우간다 등 세계 무력분쟁지역의 성폭력 생존자들을 비롯한 세계 성폭력 피해자들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더 강한 목소리로 더 넓게 확산시켰다. 초국적 연대의 현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한가운데 김복동이 있었다. 2012년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과 함께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나비기금을 설립했다. 2012년부터 이 기금으로 매년 콩고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분쟁지역 아이들에게 장학금도 전달했다. 2013년부터는 영역을 넓혀 베트남의 전시피해자와 그 자녀들에게도 기금을 전달했다. 김복동은 본인이 어린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가느라 학교 공부를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전쟁·무력 분쟁지역의 아이들은 자신처럼 살지 말고 꿈을 펼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러한 김복동의 활동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공감과 존경을 받았다. 2015년에는 국제언론단체에 의해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단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을 김복동과 함께 선정했다. 우리 정부도 평화와 인권을 위한 김복동의 노력을 인정해 2015년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2017년 11월 25일, 이날은 세계여성폭력철폐로 김복동은 정의기억재단과 100만 시민이 함께 드리는 ‘여성인권상’을 수상했다. 이때 받은 상금을 씨앗 기금으로 하여 ‘김복동 평화상’을 제정해 무력분쟁지역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고 전시 성폭력 철폐를 위해 활동하는 국내외활동가들과 단체를 지원한다. 이 상의 1회 수상자는 우간다 내전의 성폭력 생존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아칸 실비아가 선정됐다. 김복동의 관심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2011년 3월 일본 동북지역 대지진 피해자 돕기 모금을 제안하고 1호로 기부했다. 2017년에 재일조선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김복동 장학금을 전달했고, 그의 마지막 유지 중 하나 또한 재일조선학교 지원을 계속해 달라는 것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암 투병의 와중에도 세계 곳곳을 다니며 인권과 평화를 전하던 김복동. 마지막까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규탄하며 화해치유재단 해산과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촉구하며 2018년 9월에는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즉각 해산’을 위한 1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암 투병 끝에 2019년 1월 28일, 93세로 생을 마감하며 영면에 들어갔다. 김복동의 목소리와 행보는 전 세계 시민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다가갈 수 있도록 기꺼이 기억의 통로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를 찾고자 힘들게 내디딘 그의 발걸음은 큰 울림이 되어 우리 사회의 ‘위안부’에 대한 기억을 확장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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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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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상영작 소개 2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상영 기간 : 8월 21일(수) ~ 8월 27일(화) 상영작 🎬 가이산시와 그 자매들 | 중국 | 반중이 | 2007년 🎬 그리고 싶은 것 | 한국 | 권효 | 2012년 🎬 22 | 중국, 한국 | 궈커 | 2015년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하는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한다. 2024년 8월 14일부터 8월 27일까지 퍼플레이 온라인 극장에서 함께할 수 있는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는 ‘입을 떼다’, ‘귀를 열다’ 두 개의 주제로 나누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결을 포착해 담아낸 국내외 영화를 소개한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을 비롯해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작품도 여럿 포함돼 있다. 웹진 <결>은 영화제 관련 소식과 함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컨텐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 (1)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1)_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2)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2)_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3)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3)_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4)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4)_ 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반세기 넘는 세월이 흐르고서야 가능했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증언 앞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이어가야 하는가. <2024 기림의 날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에서 마련한 두 번째 섹션 ‘귀를 열다’의 상영작들은 생존자들이 남겨 놓은 수많은 지도와 흔적을 다시 방문하며 저마다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그려낸 맥락의 풍경화, 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곤란함에 관한 고백들이다. 1990년대 최초의 일본군‘위안부’ 증언 이후 많은 다큐멘터리가 피해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접근했다면, 2000년대 이후의 영화들은 이 증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재현하고 기록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집중한다. ‘귀를 열다’ 섹션에서는 이러한 고민을 잘 보여주는 영화 세 편을 상영한다. 1.<가이산시와 그 자매들>(2007) 기억으로 재구성하기, 재구성해서 더 오래 기억하기 1992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전후 보상에 관한 국제 공청회’는 남한, 북한, 중국, 필리핀, 대만, 네덜란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증언하는 한편, 일본 국내외의 대책위원회들이 함께 모여 이 역사적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한 국제적 연대의 순간이었다. 중국인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로, 반중이 감독의 <가이산시와 그 자매들>의 주인공인 허우둥어(侯冬娥) 역시 애초 국제 공청회에 참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건강 문제로 참가를 포기하게 된다. 중일전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전선의 확장은 일본의 병참능력의 부족함을 증명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외딴 곳까지 파견된 부대의 경우에는 그 부족한 병참지원을 현지에서 조달해나갔다. ‘위안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넓은 전선 속에서 민간여성 납치와 성폭행은 ‘위안소’라는 제도를 핑계 삼아 구조화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겪고 생존한 허우둥어를 만나서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던 감독의 기획은 그의 죽음으로 좌절된다. 대신 반중이 감독은 약 10년 동안 산시성을 방문하며 허우둥어의 주변인을 만나 그의 삶을 재구성하려 한다. 역사는 남았으나 인터뷰 대상이 사라지고 만 자리에서 출발하는 이 영화는 같은 시기 피해 당사자였던 다른 중국인 일본군‘위안부’의 인터뷰, 당시 일본군 부대원의 회상, 그리고 허우둥어를 거치며 살아온 주변인들의 인터뷰를 담아낸다. 오랜 시간에 걸친 성실한 자료 수집과 인터뷰를 통해 감독은 관객에게 가이산시는 물론, 그와 비슷한 피해를 겪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인 피해자들이 겪은 일종의 트라우마 지도를 보여준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트라우마적 사건 이후 이 ‘피해자/생존자’들의 삶이 어느 정도로 피폐해졌는지를 국가 내, 국가 간 담론의 용인과 태만의 연대기를 통해 잘 보여주는 점이다.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2.<그리고 싶은 것> (2012) 재현의 대상과 주체 사이 지도 그리기 <그리고 싶은 것>은 평화를 주제로 한·중·일 작가들이 공동 작업한 그림책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국의 권윤덕 작가와 일본군‘위안부’ 생존자 심달연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영화는 권윤덕 작가가 심달연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드는 과정을 기록하기로 하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예술가의 창작기에 머물 수도 있었던 이 프로젝트는 일본 출판사의 수정 요구와 출판 불가 위기로 상황과 방향이 급변한다. 그림책에 등장하는 쇼와 일왕의 얼굴, 황군에 대한 묘사, ‘위안부’라는 소재 자체를 문제삼은 출판사의 수정 요구가 제기되는 초반에는 표현의 자유를 지키려는 작가와 대립하는 구조가 형성된다. 그러다 영화는 중반부터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었던 폭력을 특정 국가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젠더폭력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에 집중한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책이 반일 감정을 강화하는 도구가 되길 원치 않으며, 이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며 표현의 어려움을 느낀다. 남성 동료 작가들은 권윤덕 작가의 방향과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고, “‘위안부’ 이야기를 그리면서 어떻게 일본이 중심이 아닐 수 있냐”고 묻는다. 권윤덕 작가는 할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한국인’이 아닌 ‘여성’으로 전환하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달리 표현의 어려움을 겪는다. 이러한 여러 층위의 갈등 속에서 영화의 촬영 방식도 바뀐다. 초반에는 권윤덕 작가를 중심에 두거나 얼굴, 손 부위에 집중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 단독 바스트 샷 위주로 구성되었으나, 작가의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부터 카메라는 뒤로 물러서 작가가 말할 때 다른 이들이 의견을 청취하는 모습을 담는다. 작가의 말을 들으며 곤란해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띄는 동료 작가들을 길게 보여주고, 작가를 다른 사람들 속에 같은 프레임으로 넣어 거리를 넓힌다. 이러한 촬영 방식의 전환은 작가의 이야기가 잘 전달되지 않는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싶은 것>은 전쟁 문제에 접근하면서 작가의 위치를 ‘여성’으로 놓을 때 발생하는 갈등 지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갈등이나 고민을 격화시키는 방식보다, 드러내지만 동시에 감추며 온건하게 보이는 방식을 택하는데, 이같은 영화의 접근법은 무엇이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가 놓여 있는 사회적 타자나 소수자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인식의 한계 범위를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된다.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3.<22>(2015)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과 봉인된 시간 2013년 궈커 감독은 <32>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발표했다. 40여 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1944년 일본군 부대에 연행되어 성노예로 살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한 웨이 샤오란과 당시 임신해서 낳은 일본 혼혈 아들의 현재의 삶과 소회를 보여준다. 영화는 매일 크게 다를 것 없이 흘러가는 모자의 일상을 정적인 카메라 워크로 담고, 이어 웨이 샤오란만이 프레임의 중심에 등장하는 회상 장면으로 이어가면서 70년의 세월을 따라 노년에 다다랐을 뿐, 피해 생존자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일종의 동결, 유예된 시간을 보여준다. 이러한 미학적, 서사적 결정은 <32>에 이어 서둘러 제작한 <22>에서도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더 많은 지역을 찾아가 카메라로 담지만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이들 22명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삶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담은 쇼트에 이어, 어떤 사죄나 피해 회복의 가능성도 부정당한 채, 봉인된 듯한 7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선 이들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생존자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서 관객들은 봉인되고 유예된 세월의 무게를 새삼스럽게 다시 느끼지만, 한편으로 그 유예된 세월과 역사는 아직 해원에 이르지 못했음도 깨닫게 된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반복된 시간의 쓸쓸함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 상영되기도 했던 영화 <22>는 아직은 증언과 인터뷰에 기댈 수 있는 피해 생존자들의 마지막 기록이다. 궈커 감독은 관찰자의 시선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동결된 시간과 유예의 영원함을 관객에게 전한다. 이처럼 2000년대 이후 등장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들은 이전 세대의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이들은 단순히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증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까지 담아내고 있다. 증언 이후의 과정, 예술적 재현, 국가적 혹은 국제적 인식의 변화를 탐구하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본다. 이 영화들을 보는 경험이 그 속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의 복잡성과 재현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증언 이후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과 고민을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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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인터뷰 김순악의 ‘이름’들을 부르다 - 영화 〈보드랍게〉 박문칠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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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테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 〈보드랍게〉(2022)를 연출한 박문칠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순악을 겹겹이 들여다본다. 그의 삶은 후대의 여성들에 의해 목소리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되살아난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대루코, 요시코, 마츠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 할매, 순악 씨. 살아생전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려왔던 김순악의 삶에는 우리가 몰랐던, 혹은 알려고 하지 않았던 여러 굴곡이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보드랍게〉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피해자를 기억하고 되새긴다. 더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지금의 문제로 이야기하기 위해 감독이 시도한 방법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앞으로의 더 나은 시도를 기대하게 만든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늘 ‘나’를, 사회 문제를 이야기해오고 있는 박문칠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Q. 〈보드랍게〉 개봉 후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현재 차기작을 촬영하고 있습니다. 대구의 이슬람 사원 건축을 둘러싼 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 될 것 같아요. Q.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으로부터 영화 제작을 제안받았을 때 부담을 느끼셨다고요. 얼핏 상상해도 쉽지 않은 작업이 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그럼에도 ‘해야겠다’고 결심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에 부담을 느꼈던 건, 훌륭한 작품들이 이미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또 일본군‘위안부’는 많이 다뤄온 소재이기 때문에 어떻게 다르게 접근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검토하다 보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분의 삶에 깊이 있게 들어가 보는 작업을 하면 다른 이야기나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죠. Q. 작업에 돌입하기 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증언을 비롯해 많은 자료를 살펴보셨겠지요. 그 과정 자체가 일종의 ‘배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 이후로 새롭게 배우거나 알게 된 점이 있으신지요. 그동안에는 ‘위안부’ 문제를 하나의 이슈로만 바라보거나 피해자분들을 ‘위안부’라는 커다란 범주 안에 놓고 비슷하게만 봤던 것 같아요.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저마다 살아오신 모습과 개성, 성격, 배경이 완전히 달랐어요. 각자의 고유한 성격과 삶이 있는데 ‘위안부’로만 바라봤던 게 죄송스러웠습니다. Q. 수많은 피해자분들의 이야기를 접하셨을 텐데, 그중에서도 김순악 님의 삶을 기록해야겠다고 결정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남아있는 자료나 사진, 영상을 보면 굉장히 시원시원하고 당찬 분이세요. 쭈그려 앉아 담배 태우시는 모습도 멋있고요. 캐릭터가 주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김순악 님의 구술을 모아놓은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라는 평전이 있어요. 그 책을 읽으면서 이분을 주인공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위안소의 생활은 많이 들어왔는데,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밝히기 전까지 5~60년의 삶이 참 가슴 아프고 미처 몰랐던 부분도 많았어요. 성매매, 기지촌도 그분의 삶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위안부’ 이후의 삶은 또 다른 전쟁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여순사건이나 한국전쟁 등 총알이 오가던 여러 사건을 겪으셨고요. 기지촌이라는 공간도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군대가 있는 곳이었잖아요. 전쟁의 그림자에서 한 번도 제대로 벗어난 적이 없으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피해자분들 또한 삶이 파란만장하지만 김순악 님은 항상 역사와 사회의 파도를 정면으로 맞으신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 지점을 조망해보고 싶었습니다. Q. 영화는 김순악 님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돌아보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위안부’ 피해 이전과 이후의 삶을 모두 보여주는데, 피해자의 생애사를 기록하는 데 있어 감독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은 무엇인가요. 해방 이후 피해자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만큼, 그 시기를 잘 드러내야겠다는 게 가장 큰 포인트였어요. ‘위안부’ 피해 경험이 과거의 일로 끝난 게 아니라 피해자의 삶의 행로를 결정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Q. 영화에는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김순악 님과 오랜 시간 관계를 맺어온 활동가부터 일반 청년 여성까지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로 영화가 채워지지요. 이처럼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로 김순악 님의 삶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요.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현재화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세대를 넘은 여성들의 이야기, 서사가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김순악 님의 책 제목이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인 것처럼 누구도 그 속을 100% 이해하거나 안다고 이야기하긴 힘들 것 같아요. 그래도 공감하려는 시도, 노력, 연결점들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여러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게 됐습니다. 영화 앞뒤에 김순악 님이 가지고 있는 여러 이름을 호명하는 장면이 있어요. 영화에 출연하신 모든 분들의 목소리로 만들어졌죠. 현재의 여성들이 과거의 여성, 돌아가신 김순악을 불러드리면서 그분이 살았던 여러 면들을 곱씹어보고, 되새기고, 기억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Q. 경상도 지역의 2-30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증언집을 낭독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분들을 섭외하시는 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직접 접촉하기에는 조심스러웠습니다. 대구 지역에서 미투 운동을 하신 분들이라, 여러 단체를 통해 소개를 부탁드렸어요.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 얼굴도 드러내야 해서 섭외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세 분 모두 흔쾌히 수락을 해주셨습니다. Q. 낭독 장면에 대해서는 관객이나 연구자들 사이에서 해석이 나뉜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여성이 만나고 연대하는 느낌이 들었다는 의견도 있고, 피해의 고유성이나 사회적 맥락을 생략하고 성폭력 피해자 정체성을 일원화하거나 트라우마를 가중시킨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고요. 감독님께서는 이 의견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어떠한 의도로 이 장면을 연출하게 되셨는지 함께 여쭙고 싶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현재와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아직도 ‘위안부’ 문제를 과거지사로 혹은 당사자들만의 문제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할머니들의 원을 풀어드려야 한다’는 식으로,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로 생각하는 거죠. 이 문제를 잊지 않고 계속 곱씹어볼 수 있으려면 현재적인 의미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다른 문제와 접목시키고, 대화를 시도해본 거죠. 물론 저도 성폭력 피해나 ‘위안부’ 피해가 완전히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일본군‘위안부’는 전시 성폭력 문제이고, 식민지 시절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당한 폭력이기 때문에 특수한 성격이 있어 함부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말씀에 동의해요. 연구를 하는 입장에선 피해의 고유성을 정확히 밝혀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생각해본다면, 이 문제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고민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일부 공통점이 있는 사안들 혹은 피해자들 간의 마주침을 기획한다면 새로운 대화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새롭게 생각해볼 지점이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새롭게 시도해본 방식이라고 이해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낭독 과정에서 피해 여성분들도 위로받는 경험을 하셨다고요. 어떤 이야기들을 나눠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분들이 영화에 단순히 내레이터나 낭독자로만 등장하지 않길 바랐어요. 그래서 그분들에게도 책을 드리고, 김순악이라는 사람을 느껴보고 알아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본인이 생각한 김순악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고요. 간접적이지만 그분들이 만난 김순악, 자신이 해석한 김순악을 기반으로 낭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말하자면, 성폭력 피해생존자와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만날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지요. 만남을 주선하긴 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라 두렵고 떨렸는데 다행히 참여해주신 분들이 위로가 되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분들이 그전까지는 정신없이 지내셨거든요. 미투 운동 당시에는 기자회견 하고, 재판 참석하고, 시위하면서 바쁘게 지냈는데, 모든 게 끝나고 나니 심신이 지쳐 번아웃을 겪으신 거예요. 그래서 미투 당시를 차분히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하셨죠. 근데 마침 바로 다음 해에 영화에 출연하면서 본인들이 했던 활동의 의미를 돌아보게 되셨어요. 김순악이 하나의 거울이 된 셈이죠. 영화에 참여하길 잘했고, 위로를 얻었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Q. 활동가분들의 소감은 어땠나요? 많이들 고마워하셨어요. 김순악 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이 넘었거든요. 이 영화 덕분에 잊고 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신 것 같아요. 그것들을 저희에게 많이 들려주셨고요. 출연진 중에는 활동을 계속하시는 분도 있고 다른 일을 하시는 분도 있는데, 젊은 활동가였을 때 열정을 쏟아부었던 이 운동에 대해 다시금 되새겨보는 시간에 대한 고마움을 많이 표하셨어요. Q. 김순악 님의 ‘몸’은 한국의 굵직한 근현대사를 모두 통과해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그러한 존재를 묘사할 때 자칫 잘못하면 타자화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고민하신 지점이 있다면요. 일반인이 한평생에 겪기 힘든 일들을 한꺼번에 압축적으로 경험하셨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호기심 거리나 선정적인 요소로 소비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최대한 존중하며 다루려고 노력했습니다. 자살을 시도하는 부분이나 성매매 관련 상황을 다룰 때도 너무 자극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려 했고요. 저희 영화가 전반적으로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려진 것 같다고 말씀해주시는데, 예의를 갖추기 위해 그러한 톤을 잡게 된 이유도 있습니다. Q. 애니메이션 또한 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을 영화의 한 축으로 삼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애니메이터와의 작업 과정은 어떠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이 영화에는 일부러 여러 가지의 레이어를 두려고 신경 썼어요. 증언집 낭독, 활동가 인터뷰, 압화 작품 등 여러 방식으로 김순악이라는 사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에 애니메이션을 추가하게 된 것이죠. 애니메이터인 이재임 작가님에게도 책을 먼저 드리고 김순악 님을 느껴보게 했어요. 이 영화에는 김순악에 대한 후대 여성들의 다양한 해석이 곳곳에 녹아있다고 볼 수 있죠. 누구는 목소리로, 누구는 그림으로, 누구는 음악으로 표현한 거예요. 한 영화 안에 n개의 김순악이 담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애니메이션 톤은 너무 자극적이거나 사실적인 것은 피하려고 했어요. 김순악을 복제하기보다는 작가의 해석을 기반으로 만들어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죠. 지금의 추상적이고 동글동글한 그림체가 좋아요. 왜냐하면 김순악이 겪었던 삶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 누구나 겪을 수 있었던 문제이기 때문이죠. 워낙 힘든 게 많았던 삶이니까 그림체만이라도 따뜻하고 보드라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Q. 애니메이터 작가님은 처음에 작업 제안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애니메이터에게도 책을 보내주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분도 김순악 님의 매력에 공감하고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사실 함께 작업한 모든 분들이 제가 섭외했다기보다는 할머니가 본인의 삶을 통해 자석처럼 끌어들인 것 아닌가 싶어요. 김순악이라는 사람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지점이 있으니 다들 부담을 느끼면서도 수락해주신 것 아닐까요. Q. 영화 개봉 후 접하신 반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영화에 공감해주신 이야기들이 다 좋았어요. 그중에서도 인상 깊게 남은 게 있어요. 저희가 GV(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관객 질문을 오픈 채팅방에서 받았거든요. 보통 GV가 끝나면 대부분은 그 방을 나가세요. 그런데 관객 중 한 분이 GV 당일 심야에 메시지 하나를 올리신 거예요. 그날 GV에 영화 출연자 중 미투 당사자 한 분이 함께하셨는데, 그분이 해주신 이야기를 듣고 또 영화를 보며 느꼈던 소감을 말씀해주셨죠. 관객분이 겪은 성폭력 피해 사실과 영화 및 출연자를 통해 위로받은 지점, 감사한 마음을 함께 전해주셨어요. 그것을 보고 저도, 출연자분도 깜짝 놀랐죠. 영화가 하나의 씨앗이 되어 퍼져나가 누군가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과 계기를 마련해주었구나 싶었어요. 제가 생각지 못했던 영화의 기능과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됐죠. GV에 참석하셨던 출연자분도 그 메시지를 보고 함께하기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한 명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꺼내놓는 데 기여할 수 있어 보람을 느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거나 이를 소재로 창작하는 분들은 ‘늘 반성을 거듭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위안부’ 문제를 알고, 공부하고, 기록해나갈 의무가 있겠지요. 앞으로 ‘위안부’ 문제를 기반으로 계속해서 이야기해나갈 분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분의 삶을 제 방식대로 작업해보았는데, 앞으로는 더 많은 작업이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에는 ‘위안부’ 문제를 정치·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데 힘을 쏟다 보니 당사자들의 삶에 주목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피해자 한 분 한 분의 삶이 다르고, 또 이야기할 가치가 다양하기 때문에 그분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작업들을 해주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Q. 또 다른 제안을 받게 되면 작업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제가 갖고 있는 것을 최대한 풀어냈기에 더 이상 무엇이 나올 수 있을까 싶습니다. 다만, 좋은 기회가 되거나 제게 와닿는 부분이 있다면 작품을 하는 동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순악 님과 좋은 만남을 했고, 또 다른 만남이 가능하다면 해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당장은 힘들 것 같아요. (웃음) Q. 작업하시면서 김순악 님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던 적은 없나요? ‘너무 애쓰셨다, 멋지게 사셨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Q. 그간 다큐멘터리를 통해 ‘나’를, 사회 문제를 이야기해오셨습니다. 그중에서도 〈보드랍게〉가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작품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김순악이라는 굉장히 매력적인 분을 아주 진하게 만난 것 같아요. 〈보드랍게〉는 그 진한 만남에 대한 나름의 선물,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Credit 인터뷰어/정리: 강푸름 인터뷰이: 박문칠 감독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2년 8월 26일 금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희궁1가길 7 에무시네마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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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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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림의 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991년 8월 14일, 대한민국 생존자 최초로 김학순 님이 공개 증언하고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한 세대의 통념적 주기가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초국적 참조점이 된 동시에, 여전히 ‘현재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웹진 결은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11주년인 2022년을 맞아, 경계를 넘어 ‘위안부’ 역사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조명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온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로 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맞선 젊은 여성들,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비판적 담론을 생산하고 후속세대를 교육하는 연구자들, 전쟁과 제노사이드, 이민자와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해외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위안부’ 역사의 교훈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시죠.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1.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제작하기까지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는 JTBC 뉴스 인터뷰를 통해 안태근 전 법무부 국장의 성추행을 폭로했다. 이후 한국 사회는 거대한 미투 운동의 시간으로 돌입했다. 다큐멘터리 <우리는 매일매일>(2019) 제작을 위해 한창 촬영하던 과정에서 만난 출연자들도 이 미투 운동의 흐름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 역시 제주도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직장 내 성폭력 1심 무죄 판결에 항의하는 집회를 촬영할 때 함께 분노하는 마음이었다. 미투 운동을 의심하거나 피해자를 공격하는 사회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집회에도 참여해 같이 소리를 질렀다. 2심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아침 일찍 법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너무 떨렸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재판정에 모여들었던 여성들의 목소리와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여러 현장의 열기를 다큐멘터리를 통해 기록하고 싶다는 열망이 그렇게 생겨났다. <애프터 미투>(2021)는 미투 운동 이후 한국 사회와 여성들의 일상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다큐멘터리다. 세대가 다른 여성 감독들의 시선을 모으고 연대하는 실험을 하기 위해 옴니버스 형식으로 제작됐다. 우선 박혜미, 남순아 PD와 함께 기획팀을 구성했다. 기획팀은 ‘미투 운동’이라고 했을 때 바로 떠오르는 상징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안에서 도출된 사회적 과제들을 정리하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목적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기 기획안은 언론에 주로 노출됐던 현장들과 이슈를 골자로 했다. 이후 박소현, 이솜이, 소람 감독이 연출로 합류하면서 기획안은 변경됐다. 당시 한국 사회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등 성차별적 강간문화가 드러나면서 새로운 기술이 여성들을 더 착취하고 있는 구조를 목도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여성들이 어떤 시간들을 통과하고 있는지, 미투 운동에서 놓친 질문은 무엇인지가 우리 안에서 중요해졌다. 제작진으로 합류한 감독들도 각자가 접속하고 있는 현장, 혹은 접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장이 존재했다. 이에 제작진은 치열한 논의 끝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현실과 미투 운동에서 ‘잊혀진 목소리’에 주목하기로 했다. 수정된 기획안에서는 미투 운동 과정에서 비교적 덜 주목받고, 혹은 주변화되었으며, 논의 선상에조차 서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목소리들을 전면화했다. 그렇게 다큐멘터리는 <여고괴담>,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이후의 시간>, <그레이 섹스> 등 네 가지 에피소드로 완성됐다. 형식 자체로 목소리에 오롯이 집중하는 작품, 퍼포먼스와도 같은 증언에 집중하는 작품, 몸짓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그림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는 작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는 연출됐다. 각각의 이야기 속 인물과 공간은 구체적이고 미시적이면서도 복합적인 현장을 그대로 담게 되었다. 2. <애프터 미투> 개별 작품의 문제의식 네 편의 작품은 다양한 형식으로 제작됐지만 ‘출연자의 증언을 어떻게 담을 것인지’가 모든 작품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여고괴담>은 스쿨 미투를 다루고 있다. 학교 공간 내에서 사라지지 않는 괴담과도 같은 가해자들의 재현, 동시에 이 괴담을 부숴버리기 위해 움직인 목소리들이 전면화되어 있다. 이 목소리는 변화하지 않을 것 같은 암담한 흑백의 사진 속 학교 공간의 권위와 폭력성에 균열을 일으킨다.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는 어린 시절과 결혼 생활에서의 폭력 경험을 40대에 이르러서야 말할 수 있었던 인물인 ‘행복’을 다루고 있다. 행복은 구체적인 피해를 이야기하기보다는 폭력으로 인해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했는지 성토한다. 그리고 피해로 인해 피폐해진 자신의 삶을 용서하기로 선포한다. <이후의 시간>은 문화예술계 내 피해자이면서 연대자였던 출연자가 커뮤니티의 자정을 위해 어떻게 노력해왔는지 그려낸다. 공동체 내엔 피해 당사자와 가해자, 연대자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언을 듣고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점 역시 보여준다. <그레이 섹스>는 동의와 비동의의 간극, 친밀한 관계 내 여성들의 의사소통과 협상 방식에 대한 도전적인 문제의식을 보인다. ‘틴더’(데이팅 앱)와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며 친밀함을 갈구하는 여성들이 처한 상황, 그리고 연애 관계에서 스스로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게 만들어버리는 상황 등 가부장적 사회의 고착화된 관계 안에서 여성은 자신의 감정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 <그레이 섹스>의 경우는 여전히 강고한 차별적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증언자를 보호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제작진 내부에서 가장 많이 토론했던 에피소드다. 이처럼 <애프터 미투>의 구체적인 내용은 미투 운동 시기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사례들에서 조금 비껴나 있다. 제작진은 일반 관객이 이 이야기들과 미투 운동을 연결 지을 수 있도록 ‘맥락’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증언은 전형적일수록 파급력이 있고, 지지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에 전형적이지 않은 증언일수록 피해를 의심받으며, 왜곡된 시선과 비난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상황 때문에 전형적인 방식으로만 증언이 유통되고 기록된다면 다양한 피해자들이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증언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제작자들이 종종 갖게 되는 문제의식도 여기서 발생한다. 출연자의 증언을 전형적이지 않게 재현함과 동시에 출연자의 피해를 더 적극적으로 담론화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제작진은 이러한 난관 앞에서 증언을 어떻게 맥락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고민들에 대한 답과 결론을 내렸다기보다는 그 고민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 속에 이 다큐멘터리를 위치시키는 도전을 하기로 했다. 그중 하나는 여성들의 역사를 다시 되짚기로 한 것이다. 3. 증언을 들을 준비 미투 운동은 2017년 미국 할리우드 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시초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생존자의 말하기가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우리는 그 말하기의 시작을 어디로 잡을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 논의의 결과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님의 증언이다. 여성들은 이전부터 성폭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피해를 증언해왔으며 그 길을 개척해왔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한 ‘생존자말하기대회’도 그 연장선에 있다. 비록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2000여 명이 넘는 여성들이 생존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왔다. 2017년부터는 ‘#OO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다양한 문화 예술계 내 성폭력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피해자들이 존재했다. <애프터 미투>는 2018년의 폭발적이었던 미투 운동의 흐름 역시 한국 사회의 여성들이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던 토대 위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화두를 던지기로 했다. 사실 생존자들의 외침이 계속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사회가 듣지 않으려 했던 탓에 2018년 미투 운동의 폭발력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미투 운동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은 누구나 자신의 피해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이 피해가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피해가 위계화되고,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나는 증언은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사회의 왜곡된 인식 때문에, 피해자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하거나 사회적인 틀 자체를 깨야 하는 이중 굴레에 놓여 있다. 언론이 주목했던 여러 미투 사건 중에서도 피해자가 소위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난 사건은 ‘대중’에게 지지는커녕 공격을 받았다. 또한 ‘대중’은 가해자가 누구냐에 따라서도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전도유망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가해자라고 하면 피해자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입맛’에 맞는 피해에 주로 공감하며,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악마 같은 가해자만을 가해자로 인정한다. 사실 가해자의 전형도 존재한다. 가해자의 전형이 아닌 사람에 대해 말하지 않을수록, 가해자가 권력관계를 이용해 사람을 가려가면서 폭력을 저지른다는 사실은 감춰진다. 증언을 듣고 해석할 수 있는 장이 한국 사회에는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난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익숙한 담론은 반일 감정을 자극하여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더 널리 퍼지게 했지만, 전형성의 외곽에 놓인 이야기들은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큐멘터리 <보드랍게>(박문칠, 2022)에서 조명한 김순악 님의 사례처럼 전 생애에 걸친 여성의 피해가 사회적으로 이해되려면 한국 사회에 얼마나 더 많은 시간과 준비가 필요할까. 4. 더 많은 증언이 펼쳐지기 위해 <애프터 미투> 속 출연자들도 그렇지만, 성폭력 피해자들은 단일하지 않다. 삶의 배경, 일 경험의 차이가 존재한다. 단일하지 않은 삶 위에 폭력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우리는 대체로 무지하다. 이미 있었던 목소리들도 사회의 무지로 인해 가려지고 만다. 증언은 공론장이 존재할 때 그 정치력을 펼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위계와 폭력의 경계를 흐리고, 우리의 몸을 뒤흔들고, 생각을 깨는 목소리가 펼쳐질 장이 더 절실해진다. 동시에 제작자는 증언을 기록하여 대중에게 공유할 때, 어떤 서사가 친숙하게 다가가는지 끊임없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친숙함에 기대어 익숙한 방식으로 기록하면 자칫 피해자다움을 재생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증언 기록은 여전히 도전을 필요로 하는 일이며, 도전이 있어야 더 많은 목소리가 세상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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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침묵의 번역, 혹은 번역할 수 없음의 재현 – 영화 〈침묵〉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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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번역, 혹은 번역할 수 없음의 재현[1] <침묵>을 연출한 박수남 감독은 재일조선인 2세로, 1960년대 신문기자로 경력을 시작한 이후 글과 다큐멘터리 영화로 강제징용 피해자, 원폭 피해자 등 남한, 북한, 일본 역사의 틈새에서 누락되었던 목소리들을 오랜 기간 기록해 왔다. 박수남 감독의 저술활동과 영화는 식민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군사주의, 전쟁, 차별, 빈곤 등에 의해 여러 ‘장소’에서 배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험과 기억은 물론 존재마저 부정당하던 이들과 함께하며, 민족, 젠더, 지역 경계를 가로지른다. 대표적으로 1963년에 출판된 저서 『죄와 죽음과 사랑과 罪と死と愛と』는 재일조선인 인권문제에 일본 사회의 관심을 모아 내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교사형>(1968)에 영감을 주기도 했으며, 1986년 다큐멘터리 <또 하나의 히로시마 - 아리랑의 노래>[2]는 강제연행과 피폭, 전후보상 문제에서 목소리가 누락된 조선인 피폭자들의 삶을 담아내며, 당시 일본 반핵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 내에서는 재일조선인 사회뿐 아니라 일본 소수자 인권 운동과 연구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잘 알려진 중요한 인물로, 박수남 감독의 지지자, 후원자들은 그의 상영회나 강연 행사 등을 겨냥한 우익의 위협이 있을 때마다 막아내는 힘이 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한국 내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거나 ‘위안부’ 피해자 운동 내부에서 왜곡되어 알려져 있었지만[3], 다큐멘터리 <침묵>(2017) 이후 한국 다큐멘터리 제작자들과 ‘위안부’ 문제 연구자들 사이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2021년 9월 한국예술종합학교 트랜스:아시아 영상문화연구소는 박수남 감독의 영화작업과 운동을 기리는 국제포럼 <아카이브의 주소를 묻는다: 여성, 디아스포라, 필름메이킹>을 개최하였으며, 한국영상자료원은 최근 박수남 감독의 작품을 수집하고, 자료를 KMDB에 등록하였다. 1960년대부터 촬영해왔으나 현상을 하지 못해 묵고 있던 16mm 필름들이 한국영화진흥위원회의 일부 지원과 함께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침묵, 번역할 수 없는 것 <침묵>은 1990년대 중반 한일 양국의 그 어떤 단체에도 속하지 않고 피해자 모임을 만든 ‘위안부’ 피해자들의 일본에서의 투쟁을 다루며 ‘위안부’ 피해자 운동의 역사를 다층화하는 영화이다. 2016년 약 90분 분량의 가편집본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최초 상영[4]되었으며, 이후 2017년 영화제 상영본과는 다른 약 117분 분량의 재편집본으로 일본에서 개봉되었다.[5] 영화는 1994년 당시 ‘위안부’ 운동을 대표하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나 유족회에서 독립하여 피해자만으로 결성되었던 ‘위안부 피해자회’의 일본 방문 당시 활동을 중심으로, 박수남 감독이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게 된 계기, 그리고 할머니들이 이른바 ‘국민기금’[6] 수령 이후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운동으로부터 박수남 감독이 배제된 사연, 그 후 20년이 넘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박수남 감독과 생존자 간의 우정을 담고 있다. 일본 내 ‘위안부’ 피해 최초 증언자인 배봉기(오키나와 거주) 와의 만남과 배봉기 씨의 죽음을 사회 운동의 자산으로 삼으려고 했던 총련계[7]와 민단계[8]의 갈등, 피해자회 할머니들이 국민기금을 최종적으로 수령하는 것을 결정하기까지 국민기금 측과 격렬하게 논쟁하고 투쟁한 과정 역시 그려지는데, 모두 한국의 대표적 ‘위안부’ 피해자 운동의 역사에서는 그다지 말해지지 않는 역사들이다. 그러나 박수남 감독은 이 ‘말해지지 않은’ 것을 폭로하거나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주장하기 위해 영화로 불러오지 않는다. 영화의 편집은 일본이든 한국이든 기존 운동을 회고하는 방식에 조응하거나 혹은 반대로 카운터 내러티브를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심인물이나 사건을 따라가는 편집 방식, 혹은 어떤 중심 문제의 연대기적 서술 방식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에 익숙한 관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영화의 내적 논리를 따라가기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실험적이거나 전위적인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 초반 박수남 감독은 자신이 재일조선인으로서 재일조선인 운동에 관여하던 중 운동의 모순에 직면한 후, 한일관계의 피해자이면서도 아직 조직화되지 않았던 운동들인 강제징용 피해자나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영화 내에서 자막과 자신의 예전 사진을 통해 말한다. 즉, 이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들뿐 아니라, 그와 연을 맺고 시간을 거쳐 온 감독 ‘나’ 자신과 그 위치성이 중요한 영화이다. 그러나 그 위치성은 한국인이라는 종족적 연대나 여성이라는 젠더 정체성에 근거한 보편 연대와 같은 기준으로 매끄럽게 구획되는 것이 아니며, 영화와 감독 자신도 스스로 확신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다. 일본 내, 한국 내 그리고 일본과 한국 사이 ‘위안부’ 피해자 운동의 역사서술의 균열과 그 안에서 ‘재일조선인’이라는 위치성과의 불-연속성 사이의 침묵과 삐걱거림이 이 영화 편집의 내적 논리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안민화[9]는 박수남 감독의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 등 초기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구술자 목소리 더빙 방식[10]이 더빙이라기보다 한일 간 교차하는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마이너리티들의 목소리에 대한 박수남 감독의 번역방식이라고 지적한다.[11] 박수남은 저술활동을 주로 하던 당시, 재일조선인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침묵을 비롯해 비언어적인 것들, 그리고 말 자체를 할 수 없어 하는 모습을 활자로는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영상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12] 박수남 감독의 초기 관심이 ‘번역하기’였다면 <침묵>에서의 박수남은 번역할 수 없는 것 혹은 번역할 수 없음의 문제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침묵>의 편집을 담당했던 문정현 감독은 2016년 이 영화가 재일조선인으로서 박수남 감독 자신과 ‘위안부’ 피해자들의 연대, 즉 소수자 간 연대에 대한 영화냐고 물은 적이 있다. 이 질문에 대해 박수남 감독은 “아니라요! 소수자는 또 다른 소수자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구조 속에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요! 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13] 내러티브를 구획하고자 하는 힘과 주인 없는 시선 이 영화가 최초 공개되었던 2016년의 편집판에서는 감독의 (예전 함께 투쟁했던 이옥선 님 댁을 방문하는) 여정으로, 감독 자신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위안부’ 피해자 운동사 자체라기보다는 한일 양국 사이에서 여러 운동에 관여했던 감독 자신이 중요한 영화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볼 수 있는 최종 편집판의 시작과 끝에는 감독이 아니라 이옥선 님이 등장한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투쟁 영상도 (조금은 선정적인 방식으로 발언되고 편집된) 대중 행사에서의 증언 장면이 더 많이 추가되었다. 최초 편집본이 재일조선인 여성으로서, 재일조선인 운동을 비롯한 일본 내, 일본과 한국 (그리고 북한) 사이의 사회운동에서 좌충우돌하고 끊임없이 배제되어 온 박수남 감독의 영화라는 인장이 분명하다면, 최종 편집본은 그러한 흔적들이 남아있지만,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위안부’ 피해자 서사로 편집된 것이다. 이것은 최초 공개 편집본이 더 좋다거나 무엇이 더 옳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 과정 자체가 소수자, 사회적 타자 인식의 한계범위에 대한, ‘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한 주변화된 대상을 담는 다큐멘터리들이 취할 수 있는 접근법들의 한계지점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14] 이 다큐멘터리에서 최초로 증언한 것은 아니지만 <침묵>에서 문옥주 님의 직접적인 목소리와 몸짓으로 듣는 양곤에서의 일본군 살해에 대한 증언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더 곱씹어 생각하게 되는 충격은 할머니가 격렬한 저항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일본군의 살해 위협에 받아쳤다는 말이다. “그 칼은 천황폐하가 적을 죽이기 위해 주신 칼이지 그 칼로 같은 신민을 죽여도 되겠냐”. 천황에 대한 언급은 국민기금의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성적 서비스’라는 표현에 대해 항의할 때 이옥선 님에 의해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이옥선 님은 벌떡 일어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고 나서, 일본 백성들보다 더 치켜주고 더 해준다고 우리를 끌고 가지 않았느냐고 항변한다. 이들의 발언은 (식민주의의 내화든 혹은 제국주의의 강압으로든 그 어떤 민족주의를 기반한 문제 틀로도) 이해하기 곤란하며, 민족주의와 탈식민주의 사이에서 무수한 미결정의 공간을 환기시킨다. 최종 편집본의 첫 쇼트는 이옥선 님이 등장하기 전 아무의 시선도 아닌, 도대체 누구의 시점인지 모르는 풍경이다. 주인 없는 시선, 그 미확정된 주체의 시선이 첫 쇼트로 등장하는 것이다. 인식범위 밖의 시선의 쇼트가 영화를 여는 것은 무척이나 징후적이다. 기사 게재일 : 2021.10.18. 각주 ^ 이 글은 2020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쟁점포럼 “증언과 구술의 번역 - 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를 논의하기”에서 발표했던 필자의 글 「번역의 위치와 그 경계들」과 일부 아이디어가 겹친다. ^ 일본어 원제는 “もうひとつのヒロシマ - アリランのうた”. ^ 1996년 11월 5일에 방송되었던 MBC PD수첩 <열 여섯 살 분홍치마저고리>에서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접근해서 ‘민간기금’을 받도록 종용해 왔던 재일교포”, 문옥주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소동을 일으킨 사람으로 악의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다큐멘터리 <침묵>(2017)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와의 갈등, 정대협으로부터 정부에 요청된 박수남 감독 한국입국금지가 언급된다. ^ siwff.or.kr/kor/addon/00000002/history_film_view.asp?m_idx=102620&QueryYear=2016 (2021.10.08. 검색 완료) ^ 한국의 여성영화 플랫폼 퍼플레이(purplay.co.kr)에서 볼 수 있는 판본도 2017년 재편집본이며, 이 판본을 공식판본으로 하여 제작년도를 2017년으로 기록하는 박수남 감독 측을 따라 이 글에서도 작품의 연도는 2017년으로 표기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이 최종 편집본을 2020년 재상영하였다. ^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 ^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중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에 속한 사람 ^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자치 단체인 거류민단(居留民團)에 관련된 계열 ^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메이지가쿠인대에서 영상예술학, 코넬대에서 동아시아학, 비교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미네소타대에서 동아시아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아시아의 식민주의 및 냉전의 문화를 국가주의의 틀을 넘어설 수 있는 문화 담론과 실천 등으로 모색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 간의 비교연구를 해오고 있다. (출처: YES24 작가파일) ^ 재일조선인 1세(강제징용자나 피폭 피해자)들의 조선어 혹은 조선어가 섞인 ‘브로큰 일본어’ 위에 원본 목소리를 없애지 않고 감독 스스로의 목소리로 일본어를 녹음하는 방식 ^ Minhwa Ahn, “Archive and Minor Transnational Memory: Documentary of Zainichi Korean Women as Visualizing the Testimony, Space, Image”, 한국예술종합학교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 2021년 10월 1일. [아카이브의 주소를 묻는다: 여성, 디아스포라, 필름메이킹(Addressing Archives: Women, Diaspora and Filmmaking)] ^ “CINE TALK: Sunam Park”, 국제포럼 <아카이브의 주소를 묻는다: 여성, 디아스포라, 필름메이킹>, 한국예술종합학교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 2021년 9월 30일. ^ 문정현, 「침묵」, 2016. https://www.kmdb.or.kr/story/12/1050 (2021.10.15. 검색 완료) ^ 변영주 감독은 <낮은 목소리> 연작과 관련하여 좋은 영화를 만들어 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사실은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는 보지 않아도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종종 불만스럽게 언급한다. <낮은 목소리> 연작이 당시로서는 낯선 형태의 독립다큐멘터리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그리고 감독에 따르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잘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영화가 젠더적인 문제를 제기한다기보다는 민족적인 문제, 즉 공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고 믿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위안부 할머니’ 혹은 ‘정신대 할머니’로 불리는 전시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 여성들의 피해와 상처는 여성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수난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며, 그녀들의 기억은 공적인 영역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게 취사선택되거나 가공되어왔다. 졸저, 『영화와 운동 – 독립영화로 보는 한국사회』, 한국영상자료원, 2018, 111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