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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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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대학교박물관에서 영화 <허스토리>의 모티브가 된 여성운동가 고(故) 김문숙의 삶을 통해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한 단 한 번의 순간이었던 ‘관부재판’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전시를 마련했다. 전시 기간은 2023년 2월 15일부터 5월 19일까지다. 관부재판은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인과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이 부산(釜山)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를 오가며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 재판이다.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이사장은 원고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재판을 이끈 주역이다. 창원대는 2021년 김문숙 이사장의 별세 후 여성가족부가 주관하는 조사·전시사업의 일환으로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던 관부재판 관련 기록물을 조사했으며, 이번 전시회는 그 결과를 선보이는 자리이다. 자료조사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한 김문숙 이사장의 개인 소장 자료와 관부재판 관련 기록은 당시 치열했던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군‘위안부’를 바라보던 관점과 달리, 한국과 일본 시민들의 공동노력으로 이뤄냈던 관부재판을 재조명하면서 앞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고민해 보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전시를 담당한 학예연구사로서 이번 전시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여기에 있는 휴지 한 조각까지 다 가지고 가겠습니다 2022년 4월 신동규(창원대 사학과), 문경희(창원대 국제관계학과) 교수가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안타까운 상황을 알리며,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 공모하는 자료조사와 전시 사업에 함께 하자고 하였다. 고고학을 공부하는 필자는 생소한 일본군‘위안부’ 전시에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당시 창원대학교박물관에서는 하와이 한인 이민자 묘비 조사와 전시 준비로 인해 추가적인 전시를 진행하기에는 벅찼고, 자료를 이전하여 수장・정리할 공간도 마땅치 않아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 직접 가서 확인하고 결정하기로 하였다.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 도착했을 때 첫 느낌은 ‘정말 많은 것이 전시되어 있구나!’였다. 전시실이 자료로 가득했다. 많이 보여 주고 싶어 한 김문숙 이사장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렇게 많은 자료를 어떻게 모았을까 싶었다. 방문한 학생들이 남긴 방명록, 응원의 글과 창고에 쌓인 자료를 살펴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중요한 자료는 창고에 넣어 두고 사진과 그림만 전시하고 있었다니 노출되지 않은 자료가 오히려 노다지였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 있는 관부재판 자료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이미 듣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전시회를 개최한다면 관부재판 자료만으로는 전시가 불가능하며 김문숙의 생애 속에서 관부재판을 조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용기였는지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은 사명감이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따님인 김주현 관장님께 “김문숙 이사장이 없는 관부재판은 상상할 수도 없고 관부재판 자료는 그가 남긴 자료 중에 아주 작은 일부분입니다. 관부재판 자료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중요하니, 휴지 한 조각까지 우리가 다 가지고 가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다소 긴장한 듯 보였던 김주현 관장이 그제야 화색이 돌고 약간의 미소를 지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문숙 이사장의 삶이자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서 관부재판 자료만 중시하고 나머지 그가 모은 자료와 스크랩 등은 모조품이나, 휴지조각으로 치부되었던 그간의 설움을 우리가 해소해 드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5톤 트럭 2대 분량에서 보물을 찾다 나와 이심전심으로 신동규, 문경희 두 분 교수님은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외부 간판까지 다 가져가자고 했다. 모두 가져가겠다고 했지만 이 엄청난 양의 자료를 어떻게 정리하고 운반할지 걱정이 앞섰다. 크레인까지 동원하여 3개의 대형 간판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창원대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얼마 후 <민족과 여성 역사관> 건물은 철거되었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지금 창원대박물관 전시실 입구에 <민족과 여성 역사관> 간판이 설치된 모습을 보면 가져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5톤 트럭 2대 분량의 방대한 양을 정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함께한 연구자들과 대학원생이 고생하여 1,500페이지가 넘는 ‘민간기록물 조사·수집 사업 결과보고서’를 제출했다. 김문숙 이사장 개인이 수집하고 남긴 자료는 일본군‘위안부’를 비롯한 한일관계사의 중요한 자료였던 것이다. 자료를 살펴보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관부재판 과정의 긴박한 상황과 한일 시민 연대의 사료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남긴 자료는 정말 소중한 것이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김문숙 이사장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는 교육사 및 생활사 연구에, 1950년대와 1960년대 부산지역 문화예술인과 교류한 자료는 문학사 연구에, 그리고 서울이 아닌 지방의 여성운동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적 가치와 역사적 의의를 가질 수 있다. 한마디로 김문숙 이사장이 남긴 관부재판의 여정과 그가 성공한 여성경제인에서 여성운동가로 변화하는 모습은 모든 이에게 본보기가 되리라 생각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다보니, 김문숙 이사장과 그가 이룩한 관부재판에 대한 논문이나 글이 거의 없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자료가 나타날 때마다 전시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부담감과 걱정이 배가되었다. 일본군‘위안부’ 전시지만 밝고 예쁘게 표현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수많은 전시가 있었다. 이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웠던 필자는 그들의 아픔을 어떻게 전시에 표현해야 할지 상당한 고민이 있었다. 관부재판으로 일본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은 할머니들의 일본체류기 자료에서 할머니들이 약주를 드시며 즐겁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분들도 웃을 수 있구나. 이분들도 흥겹게 노래를 부를 수 있네. 할머니들도 즐거워할 수 있구나. 지금까지 할머니들이 눈물을 흘리거나 억울하고 상처받은 모습만 보았고,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분들도 당연히 즐겁게 노래하며 밝게 웃는 사람인데 지금까지 언론과 전시에서 보았던 모습은 어둡고 슬픈 모습뿐이었다. 이분들은 밝고 일상이 즐거웠을 수도 있는데, 전시를 하는 사람, 즉 우리 학예사들이, 우리 모두가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결국 일본체류기 자료에서 보았던 할머니들의 즐거운 모습은 전시에 표현되지 못했다. 하나의 치유과정이고 마땅히 그렇게 하여도 문제가 없는데 전시를 준비한 나 스스로가 검열을 한 것이다. 전시를 여러 번 준비하고 개최하였지만 이번 ‘위안부’ 전시만큼 문구 하나하나 사진, 색감 등 모든 것에 조심한 적은 없었다. 그만큼 잘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자기반성도 있었다. 이번 전시를 밝고 예쁘게 하고 싶었다. 아들이 전시회에 와서 알록달록하다고 했을 정도로 색을 많이 넣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전시와는 또 다른 관점에 서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자 하였다. 지금까지의 전시가 할머니들의 아픔을 나누는 전시였다면 한일 시민들이 연대하여 일본사법부에서 일본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였던 관부재판 과정을 희망적으로 소상히 알리고 싶었다. 이분들을 돕고 재판을 준비하고 아픔을 함께한 시민들의 당당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들이 어떻게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을 도우며 함께 하였는지 말이다. <‘종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한 단 한 번의 순간,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이 역사를 지울 수 없다> 긴 제목이 완성되다! 먼저 전시 제목이나 주제부터 결정하기 힘들었다. 김문숙 이사장과 관부재판과 관련된 연구가 전혀 없었고, 후손이 살아 있는 가운데 진행하는 전시라 더욱 고민이 많았다. 수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줄기 전시 방향을 찾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고 의견이 분분했다. 다행스럽게도 김문숙 이사장의 ‘50년 만의 피눈물’이라는 친필원고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동시대 할머니들의 아픔을 전혀 모르고 살았지만, 이를 각성하며 관부재판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을 전시하기로 하였다. 먼저 포스터 제작은 시모노세키 재판소에 소장을 제출하고 나오는 김문숙과 그녀들, 그리고 변호사들의 비장하고 당당한 걸음을 마치 영화 <범죄와의 전쟁> 포스터를 연상하듯 표현하였다. <‘종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한 단 한 번의 순간,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로 전시제목을 정하고 <민족과 여성역사관> 설립 취지에 있던 ‘이 역사를 지울 수 없다’를 추가하여 부제를 붙였다. 그리고 명함 같다고 넣지 말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관부재판 판결문을 배경으로 넣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제목을 정하고 포스터가 완성되었다. 김문숙의 일대기를 15m 길이의 연표로 길게 만들고 어린 시절 김문숙과 동시대에 살았던 일본군‘위안부’ 및 여자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모습을 비교하는 공간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50년 만에 피눈물을 흘리며 각성하여 할머니들과 함께 손잡고 관부재판으로 가는 길을 여러 섹션으로 분리하여 긴 여정을 펼쳐 보였다. 김문숙은 초중고 및 대학까지 진학하는 유복한 생활을 하였지만, 동시대에 태어난 할머니들은 학교에 한 번도 가지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끌려가는 상반된 삶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많은 고민이 있었다. 할머니들의 직접적인 모습보다 김순덕, 김복동, 이용녀, 강덕경 등 할머니들이 그린 원색의 색감이 아주 강한 그림을 넣어, 가슴 아프지만, 오히려 더욱 예쁘게 전시하고 싶었다. 김문숙과 할머니들은 노란 나비를 배경으로 50년 만에 손을 잡고 당당하게 관부재판으로 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공간이 가장 맘에 들었고 관람자들의 만족도도 아주 높았다. 김문숙의 방을 만들다! 엄청난 자료를 모두 전시할 수 없었기에 김문숙 그 자체를 표현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는 광적으로 수집하고 글쓰기에 몰두한 분이었다. 언제나 가위를 들고 신문스크랩을 했고 스크랩한 자료를 활용하여 교육하고 영감을 얻어 그대로 실천한 삶을 살아왔다. 누군가가 신문 스크랩이 주를 이루는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자료가 디지털 아카이브 시대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혹평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우리는 이 자료가 김문숙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흔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사진 속 김문숙 이사장의 책상과 책꽂이를 그대로 묘사하여 김문숙의 방을 만들었고 그가 스크랩한 자료를 쌓았다. 전시 후 김문숙을 기억하는 분들이 관람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안도가 되었다. 관부재판을 숫자로 관부재판 과정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을 만들어 내야 했다. 공간 전체를 붉은색으로 당당함과 마땅함을 표현했다. 관람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육하원칙과 숫자로 간단하게 관부재판을 정리했고 어려운 법률용어가 가득한 판결문도 5개의 짧은 문장으로 요약했다. 여기에 더해 김문숙 이사장이 재판 날짜에 맞춰 준비한 여권과 비행기 표, 그리고 많은 도움을 준 일본 시민들의 모습을 전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부재판은 한마디로 서울과 도쿄가 아닌 지방에서, 정부가 아닌 한일 시민들이, 중심이 아닌 주변에서 일어난 전설이었던 것이다. 영화 <허스토리>, 고민에 들다 2018년 개봉 영화 <허스토리>를 통해 대중적으로 소개된 주제이기 때문에 전시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서는 영화가 반드시 활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전시팀원들 간 찬반이 있었다. 영화 <허스토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지만 상당한 극적 요소의 가미로 많은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확한 사료에 기반한 사실을 대중에게 설명하는 전시에 허구가 가미된 영화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실화보다 영화의 허구적 내용이 부각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활용을 통해 팩트 체크 형식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관부재판과 김문숙을 제대로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쌍가락지와 역사관 잘 부탁한데이! 마지막은 바로 김문숙 이사장이 만든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전시한 공간이다. 처음 역사관을 방문했을 때의 전시물로 가득 찬 모습과 대조적으로 아무것도 전시하지 않고 간판만 부착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중앙에 작은 진열장에는 김문숙 이사장이 마지막까지 소지했던 반지와 안경, 그리고 '위안부'할머니를 조사하던 녹음기, 카메라를 전시하였다. 수십억 자산가가 여성인권운동을 하며 마지막으로 딸에게 남긴 것은 쌍가락지와 “역사관 잘 부탁한데이”라는 말이었다. 전시 소개를 마치며 전시를 준비하면서 비록 사진이었지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이제까지 ‘위안부’ 전시는 마치 이렇게 해야 한다는 공식이 있는 것처럼 눈물, 어둠, 아픔이 묻어나는 전시가 대부분이었다. 이번 전시는 김문숙과 그녀들이 일본사법부에서 일본정부의 잘못을 인정한 단 한 번의 순간이었던 관부재판으로 가는 당당한 여정을 전시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아픔을 함께 하였던 시민운동가의 모습을 담았다. 그들을 밝고 예쁘게 표현한 전시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할머니들이 웃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당연한 그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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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시체 구덩이’의 응시와 ‘위안부’ 피해 기억의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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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된 몸의 (비)재현 얼마 전 제27회 제네바국제영화제에서 가상현실(VR)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소요산>(김진아, 2021)은 이른바 ‘미군 위안부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한국 정부가 미군 기지촌 여성들을 성병 치료를 명분으로 강제 수용했던 장소를 배경으로 이 작품을 만든 김진아 감독은 전작 <동두천>(2017)을 통해서 1992년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에게 살해당한 여성 윤금이 씨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두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영화의 촬영과 형식이 가상현실 기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과 다루고 있는 주제가 미군 ‘위안부’ 문제라는 점뿐 아니라 바로 그 두 공통점이 재현의 윤리에 대한 감독의 고민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1992년 동두천에서 주한미군에 의해 벌어진 윤금이 씨 살인사건은 피해 기억의 재현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대표적으로 악명이 높은 사례를 만들어 놓은 사건이기도 하다. 피의자 마클의 신병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의 불평등성이 부각되면서 SOFA의 개정과 주한미군 범죄 근절을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 문제에 대중의 주목을 원한 운동단체들이 피해자의 시신 사진을 그대로 일반에 공개했던 것이다. 훼손된 시신과 참혹한 사건 현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이 이미지는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하며 운동의 확산에 기여했지만, 당시만 해도 이와 같은 재현이 갖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운동 내부에서 큰 논란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학생 때 이 운동을 접했던 김진아 감독은 그와 같은 “폭력의 재현은 보는 사람에게도 그 피사체에게도 굉장한 폭력”[1]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피해자(의 이미지)를 착취하지 않고” 이 사건을 재현하는 문제를 25년 가까이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2] 그 오랜 고민 끝에 만든 <동두천>은 1992년의 사진과는 달리 폭력의 피해를 손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360° 가상현실 카메라로 촬영된 동두천 거리에서 관객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보아야 할지 쉽사리 판단 내리지 못한다. 셔터가 내려간 클럽 뒤편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누군가의 하이힐 소리가 들리고, 그 발소리를 따라 혹은 스치듯 마주치고 지나간 어느 여성이 사라진 쪽을 따라 들어가면 비좁은 단칸방에 도달한다. 방금까지 누군가 있었을 듯한 그 좁은 방바닥에는 널브러진 옷가지 사이로 흥건한 피가 고여 있다. 김진아 감독은 이 작품에서 자신이 취한 전략을 “몸의 부재(absence of the body)”라고, 다시 말해 가상현실로 관객이 도달한 사건의 현장에 “사체는 없지만 대신 살해의 흔적이 남아”있도록 하는 ‘보여주지 않음’의 전략이라고 말한다.[3] 시체구덩이 사진(death pit photograph) 윤금이 씨의 시신 사진 공개가 제기하는 재현 윤리의 문제와 이에 대한 <동두천>의 대답은 김진아 감독의 표현처럼 “후기식민지 사회에 사는 여성”[4]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후기식민지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의 피해는 어떻게 재현되며 여기에는 어떤 응시가 작동하는가의 문제, 그 응시가 궁극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제국주의적 폭력에 저항하는 명분으로 피해자의 훼손된 신체를 담은 사진을 보여주고자 한 이들은 그 사진에서 무엇을 보았(다고 믿었)으며 또 대중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인가의 문제. 비슷한 재현의 문제는 그 이후에도 반복되었는데, 2002년 주한미군이 모는 장갑차에 두 명의 중학생이 치어 숨진 사건 당시에는 SOFA 개정 운동과 함께 두 피해자의 훼손된 신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고 현장 사진이 시위 장소에서 피켓이나 리플릿에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그리고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발굴되어 2018년 일반에 공개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로 추정되는 시신들이 구덩이에 쌓여있는 사진과 영상기록물은 그처럼 훼손된 신체의 사진적 재현이 인터넷2.0이라는 플랫폼을 만남으로써 제국주의 피해에 대한 문제적 응시가 어떻게 우리 일상에 편재하는 것으로 자리 잡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연구팀에 의해 디지털로 배포된 영상은 언론사의 채널들을 통해 즉각적으로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에 따라 노출되었고, 이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개개인의 일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사진 1] 참조. 문제가 되는 사진 이미지를 흐리게 처리하였다). 이른바 ‘시체구덩이 사진(death pit photograph)’으로 불리는 이러한 유형의 피해기록들은 서구 사회의 홀로코스트 피해 기억 재현에 있어서도 박물관과 여러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자주 활용됐으며, 가해자 집단의 잔혹성을 강조하는 데에 효과적이라고 믿어져 왔다. 그러나 훼손된 신체들이 사물처럼 쌓여있는 사진적 기록들은 이미지 자체의 충격적인 도상적 표현과는 무관하게 실상 그 피해를 낳은 폭력과 피해당사자가 당한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해도 제공하지 않는다. 사진사학자 야니나 스트럭은 이와 같은 이미지들이 과거의 파편(fragment)이기 때문에 그 파편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제공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사진적 이미지가 과거의 진실을 반영한다는 순진한 믿음은 오히려 그 이미지를 현재에 공개하고 전시하는 이들에 의해 언제든지 이미지의 서사가 새롭게 가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비판한다.[5] 중국 윈난성에서 30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학살당한 사건은 연구팀이 영상자료와 함께 공개한 미군 작전일지 문서자료에서 확인되지만, 공개된 시체 구덩이 영상자료가 이 문서자료 속 사건의 결과를 찍은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영상 공개는 오히려 이 영상자료에 대한 NARA 메타데이터의 부정확성으로 인해 일본 극우 역사 부정론자들과의 불필요한 논란을 낳았다. 즉, 이 사건에서도 영상자료는 그 자체만으로는 과거의 파편일 뿐, ‘위안부’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증거 역할을 하거나 그 사건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후기식민지 여성과 시체 구덩이의 응시 미디어학자 바비 질라이저는 한발 더 나아가 잔혹한 피해의 사진적 재현이 잔혹 이미지를 도상적으로 친숙하게 만듦으로써 “잔혹행위의 정상상태화(normalization)”를 초래할 수 있음을, 따라서 현재에도 존재하거나 언제든 발생 가능한 고통을 간과하게 만들 수 있음을 지적한다.[6] 윤금이 씨의 시신 사진도, 일본군‘위안부’ 추정 피해자들의 시신이 쌓인 구덩이를 찍은 영상도 그들이 그와 같은 폭력에 노출되기까지 삶의 구조적, 문화적 맥락에 대해서는 조금도 말해줄 수 없고, 단지 발생한 폭력을 도상적으로 스펙터클화하여 관람자들이 관음적으로 소비하게 만들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론적인 비판에 그칠 것이 아니라 김진아 감독이 말한 “후기식민지 사회에 사는 여성”의 문제라는 측면에서도 이러한 전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홀로코스트의 시체 구덩이와 달리 후기식민지 한국에서 바라보는 2차대전 당시의 시체 구덩이는 잔혹함의 구덩이일 뿐 아니라 어떤 실패의 상징이기도 하다. 식민 상태에 있었기에 존재할 수 없었던, 그래서 피해자들을 구출할 수 없었던 민족국가의 실패, 그리고 민족국가의 수립 이후에도 “지켜주지 못해 미안”[7]한 가부장의 실패. 사진학자 존 택은 다큐멘터리적인 사진적 이미지가 관람하는 자와 관람되는 자(피사체) 사이를 특정한 지배와 종속의 온정주의적 관계로 봉인하는 것은 그것이 ‘과학적 증거’라는 밋밋한 레토릭보다는 ‘경험에 관한 감정에 호소하는 드라마’적 요소가 작동하기 때문이라 말한다.[8] 파괴되기 쉬운, 구출되어야 할 존재로서의 여성, 그리고 그러한 구출의 참혹한 실패라는 감정의 드라마가 동두천 셋방과 중국 윈난성 마을의 시체 구덩이 이미지를 향한 응시로 완성되는 것이다. <동두천>에서 사람이 없는 빈 단칸방을 VR로 보여준 김진아 감독의 ‘보여주지 않음’의 전략은 달리 말하면 빈 구덩이만 보여주는 전략, 아니 그보다는 그 빈 구덩이 속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실패한 ‘구출’의 대상으로 타자화, 사물화된 시체 더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 구덩이 밖에서 구출의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누군가로 자신을 동일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는 재현, 그 구덩이 속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재현. 이것은 어쩌면 일본군‘위안부’ 피해 기억의 재현에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각주 ^ 씨네21, 2021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PIFAN Daily, “‘소요산’ ‘동두천’ 김진아 감독, VR을 통해 여성 재현의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했다”, 2021.7.14.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ixi media, “‘동두천’, ‘소요산’의 김진아 감독 인터뷰”, 2021.7.17. https://medium.com/ixi-media/case-study-동두천-소요산-의-김진아-감독-인터뷰-af0277d1a246 (2021.12.17. 검색완료)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ixi media, 위의 글.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ixi media, 위의 글. ^ Janina Struk, Photographing the Holocaust: Interpretations of the Evidence, New York: Routledge, 2004, pp.212-213. ^ Barbie Zelizer, Remembering to Forget: Holocaust Memory through the Camera’s Ey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p.212. ^ 2002년 주한미군 장갑차 사건 당시 슬로건. ^ John Tagg, The Burden of Representation: Essays on Photographies and Historie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 pp.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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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인터뷰 노란색 나비로 파도와 바람 만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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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나비로 파도와 바람 만들어요 블로그 통해 '위안부' 활동 알리는 성미산학교 학생들 2024년 5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개관 12주년 및 김복동 5주기 특별전시 '여러분에게 평화' 개막 행사 소식이 전해졌다. 특히 시선을 끈 부분은 공연을 펼치고 있는 성미산학교 학생들의 모습. 알고 보니 성미산학교 학생들의 노래와 몸짓 실력은 이미 소문나 있고, 3년째 5월이면 한 주를 정해 수요시위를 주관하는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꾸준히 참여해오고 있었다. 이 소식을 확인하다 두 학생 이야기를 접했다. 주인공은 올해 4월부터 굿즈를 만들고 블로그를 통해 박물관을 홍보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이연우, 이자민 학생. 두 학생과 두 학생의 담임을 맡아 함께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교사 '둘리'(이선정. 둘리는 성미산학교에서 부르는 별명)를 만났다. "지나간 어제 다가올 내일 그 사이 수요일 거리로 나가는 사람들 다른 곳에 있어도 같은 햇살 아래 너의 오늘은 어떤지 언제나 이곳에서 안부를 물어, 안녕 네가 답해준다면, 네가 옆에 있다면 더 크게 외칠 수 있어 노란색 나비로 파도를 만들자 정의의 물결이 일렁이도록 보랏빛 날개로 바람을 만들자 진실의 외침이 퍼져나가도록" <나비바람>이라는 곡의 노랫말이다. 작사·작곡자는 모두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 학생들. 직접 '뮤직비디오' 영상까지 제작해 지난 7월 12일 유튜브에 공개한 학생들은 노래의 탄생 배경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 매주 수요일이면 거리에 모이는 사람들의 마음, 또 함께했던 우리의 마음을 생각하며 가사를 적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혐오가 재생산되는 요즘,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지나간 어제'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가올 내일'입니다. 우리가 만들어갈 내일, 이미 만들고 있는 오늘이 '정의의 물결이 일렁이고, 평화로운 모습이길 바라며' 이 노래를 들을 여러분의 오늘은 어떤지 안부를 묻습니다." 매주 수요일이면 박물관으로 향하는 두 학생 학생들은 이 노래를 2025년 5월 성미산학교 학생회가 주관할 예정인 수요시위에서 부를 예정이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좀더 특별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포스트 중등 11학년 이연우 학생과 12학년 이자민 학생이다. 성미산학교 학제는 초등 5년, 중등 5년, 관심 영역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실행해보는 과정인 포스트 중등 2년 등 12학년제로 운영되는데, 일반 학제와 비교하면 고2, 고3에 해당한다. 두 학생은 지난 4월부터 매주 수요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하 박물관)을 찾아 다양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노랫말과 맞춤하게 '노란색 나비로 파도를 만들고, 보랏빛 날개로 바람을 만들고 있는' 학생들이다. 피해 생존자들이 세상을 떠나 '포스트 할머니시대'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는 시기,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미체험 세대의 관심이 반가워 두 학생과 역사를 가르치는 이선정 교사를 만났다. Q. 먼저 박물관에서 어떤 자원봉사 활동이 이뤄지고 있는지 소개해 주세요. 🧶 이자민 : 지난 4월부터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3시 반까지 활동하고 있어요. 3월에 상의드릴 때는 약간 방치돼 있던 블로그를 다시 활성화해 박물관 홍보를 하기로 했었어요. 방문객들의 연령대가 상대적으로 높아 젊은 분들과 교감할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해 박물관을 알리자 한 거예요. 그런데 활동을 시작하니 급히 해야 할 수작업이 많더라고요. 방문객들께 나눠드리는 티켓 정보가 바뀔 때마다 수정 스티커를 제작해 붙이는 일부터 행사에 사용할 노란 나비 메시지 카드나 대표적인 박물관 기념 굿즈인 나비팔찌, 나비반지 만들기 등 일손이 필요할 때마다 하고 있어요. 🧶 이연우 : 박물관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나비메시지도 관리해요. 방문객들이 남긴 나비메시지는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고, 또 새로운 메시지가 들어갈 자리가 필요하니까 일정 기간 지나면 정리를 하는 거예요. 우선 나비메시지를 떼어낸 다음 거기에 적힌 내용을 촬영해요. 방문객들의 마음이잖아요. 그러고 나서 나비메시지는 상자에 보관해요. 🧶 이자민 : 일본에서 많은 자료를 받은 지난 6월에는 한 달 동안 박물관 수장고에 가서 스캔하고 기록을 정리하는 작업도 했어요. 일본어로 된 신문 기사나 잡지, 지도, 사진, 포스터 등이었어요. 내용을 좀 알았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일본어를 배워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어요. 하필 에어컨이 고장나서 더워서 엄청 힘들었어요.(웃음) Q. 그럼 블로그 활동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 이자민 : 스캔 작업을 마치고 7월 17일 '박물관 이모저모-마농의 박물관 자원활동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첫 글을 올렸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네 차례 더 글을 업로드했는데, 나비메시지에 담긴 글, 박물관 스티커로 '다꾸(다이어리 꾸미기)'한 이야기, 나비팔찌를 만드는 과정 등을 담았어요. 9월 말에 올린 글에는 박물관에서 제가 좋아하는 공간인 2층 계단과 벽 이야기와 김복동 특별전시관, 추모관, 정원 등을 소개했어요.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여성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어요'처럼 벽돌 벽 사이사이에 전시돼 있는 할머니들의 메시지와 사진을 보고 감동 받고, 힘을 얻은 경험을 나눴어요. 🧶 이연우 : 2주에 하나씩 올리려고 했는데, 계획만큼은 안 되고 있어요.(웃음) 블로그 콘텐츠 기획해 박물관 홍보… 1차 목표는 이웃 100명 늘리기! Q. 블로그 활동에 대한 반응은 좀 어때요? 🧶 이자민 : 지금까지 '좋아요'와 '댓글'은 대부분 친구들이 남긴 거예요.(웃음) 블로그 이웃을 100명 더 늘리는 게 올해 1차 목표예요. 장기적으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사람들에게 좀 더 가볍게 스며들었으면, 또 박물관이 쉬는 날 좀 더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더 홍보가 될까 고민하고 있어요. 오늘 웹진 <결>과 인터뷰한 이야기도 써야겠어요. 🧶 이연우 : 사실 저는 그동안 개인적으로 일도 있었고, 아이디어가 없어 많이 참여하지 못했어요. 대신 소재를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려 올려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 이선정 : 맞아요, 연우가 그림을 잘 그려요. 🧶 이연우 : 여기 박물관 시설이나 마당부터 시작해 수요시위 현장 모습도 그려보고 싶어요. 그림이라는 특성 때문에 보다 편하게 보실 것 같아요. 🧶 이자민 : 나비메시지를 정리하다 보면 감동적인 소감글이 많아 지속적으로 소개하려고 해요. 그 사이에 활동가 분들 인터뷰, 박물관 소장품에 얽힌 이야기도 해보고 싶어요. Q. 다양한 콘텐츠가 기다리고 있네요. 이제 활동한 지 6개월 정도 지났는데, 보람이랄까 성취랄까, 활동하면서 느끼는 소감이 있을 것 같아요. 🧶 이자민 : 엄청 대단하거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실제로 계속하고 있는 스스로가 조금 뿌듯하긴 해요. 🧶 이연우 : 단순 반복적인 작업이 많아요. 그래도 박물관에 도움이 되고, 주위에서 여성 인권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칭찬을 받을 때는 좋아요. 자부심을 가지고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처음엔 열 받고 슬펐는데 점점 대단하고 존경스러워"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박물관에 대한 진심이 뚝뚝 묻어난다. 그런데 두 학생은 언제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 배경에 성미산학교와 이선정 교사의 특별한 교육방식이 있다. Q. 성미산학교 학생들이 수요시위를 주관하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학생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혹은 하게 된 계기나 과정이 궁금합니다. 🧶 이선정 : 대안학교라 정규 교육 과정에 따른 수업 지도 방식에서 자유로운 성미산학교는 큰 틀에서 생태교육을 지향하고 있어요. 환경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중심으로 각 과정을 운영하는데, 저희는 초등은 생태적 감수성을, 중등은 생태적 지혜를 익히는 시간이라 표현해요. 이를 바탕으로 포스트 중등은 생태적 용기를 내는 과정이고요. 각 과정마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교사가 중요하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정해요. 역사를 전공한 제가 성미산학교에 온 때가 2019년입니다. 당시 여러 갈등으로 한일관계가 빠르게 안 좋아질 때였어요. 포스트 중등 1학년 학생들과 어떤 프로젝트를 하면 좋을까 고민 중이었는데, 우연히 모두 여학생이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함께 공부해보자고 제안했더니 흔쾌히 동의해서 한 학기 동안 공부했어요. 그 다음에는 아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해서 프로젝트를 하게 됐고요. 다큐멘터리나 논문을 보고 할머니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뉴스를 놓고 토론하고, 수요시위에도 같이 참여하고 있어요. 학교 가까이 있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과 고(故) 김학순・김복동 할머니를 모신 천안 국립망향의동산도 찾았어요. 현장에 가기 위해 미리 공부하고, 가서 또 생생하게 배우니까 학생들의 관심이 깊어져요. 이 과정이 이어졌고, 점차 중등 수업에서도 다루게 됐습니다. 🧶 이자민 : 저도 초중등 때 박물관에 서너 번 왔어요. 처음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피해 할머니의 고통에 대해 들었을 때 놀라고, 열 받고 그랬어요. 돌아와서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는 너무 슬펐던 게 기억나요. 그런데 알수록 분노 같은 마음이 점점 존경심으로 바뀌었던 것 같아요. 단순히 용기 있다는 말을 훨씬 뛰어넘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요시위에서 활동가 분들을 만난 것도 큰 계기였던 것 같아요. 진실을 위해 꾸준히 일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어려서부터 노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는데, '위안부'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활동하는 분들을 만나면서 점점 쌓이고 합쳐져서 올해 박물관에서 필드워크까지 하게 됐어요. 🧶 이연우 : 저도 중등 때부터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아 좀 더 깊이 알고 싶고, 활동도 해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수요시위에 참여하면서 뭔가 연대하는 마음이 들면서 현재까지 이어졌어요. 🧶 이선정 : 성미산학교의 중등과 포스트 중등 과정 학생회는 학생 자치뿐만 아니라 주제를 정해 학생들끼리 학습을 하기도 하고,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여러 연대 활동에 참여하기도 해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해본 학생들이 있으니, 학생회에서 수요시위를 직접 주관해보면 어떻냐고 제가 제안했습니다. 학생회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수요시위도 어떻게 진행할 지 기획하고, 대본 쓰고 합창이나 몸짓(율동) 등을 다 준비해서 주관했어요. 2021년부터 해마다 5월에 한 번씩 했으니까 그동안 세 번 주관했네요. 올해는 자민이 사회를 봤어요. 🧶 이자민 : 혼자는 아니고 다른 친구와 같이 사회를 봐서 그렇게 긴장하지는 않았어요. 7~8개 정도 되는 합창과 몸짓 레퍼토리는 미리 연습했고, 대본도 있었거든요. 근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연대 발언 챙기고,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오신 분들 바로바로 파악해 소개하느라 정신이 좀 없긴 했어요.(웃음) 🧶 이연우 : 저는 단체 합창에 참여했는데, 같이 간 친구한테 엄청 감동 받았잖아요. 평소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두려워하는 친구인데 연대 발언을 맡은 거예요. 조마조마 걱정했는데, 또박또박 엄청 당당하게 발표하는 걸 보니까 멋지더라고요. 사실 날도 덥고 피곤했는데 친구의 용감한 모습도 보고 어른들께 와줘서 너무 고맙다는 말도 듣고 나니까 오길 잘했구나, 이게 힘이 되는구나, 내년에 또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생각이 살짝 들었어요. 반대시위나 부정 댓글에는 상처받지 않아요 Q. 수요시위 현장에는 맞대응 반대집회나 방해하는 이들도 있어 학생들이 위험하지 않냐는 우려도 있었을 것 같아요. 🧶 이선정 : 수요시위에는 보호 펜스가 설치돼 있기도 하고, 대비도 하니까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없어요.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교사도 함께 해요. 또 학생들에게 미리 반대시위가 있어도 놀라거나 상처 받을 필요 없다, 험한 댓글도 있을 거다, 이 또한 우리 사회의 목소리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해 설명해요. 실제로 차 타고 지나가면서 빵빵 경적을 울리거나, 창문을 내리고 '교사가 학생들에게 매춘을 가르치냐'고 소리치고, 돌아와서 또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고요. 학생들에게 '너희가 저 소리를 이길 수 있다'고 응원하기도 하고, 농담처럼 '봐라, 저 분들도 자기 목소리를 전하려고 저렇게 열심히 산다'고 하기도 해요. 🧶 이자민 : 수요시위 때는 미리 얘기를 듣고 해서 괜찮은데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걱정스러울 때가 있어요. 왜곡된 정보를 먼저 배우고 거기에 기준이 맞춰지면 그 뒤에 다른 사실이나 진실을 알게 돼도 거부감이 없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게 않게 접근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블로그 활동도 이런 걸 고민하면서 하게 된 측면도 있어요. 🧶 이연우 : 현수막을 펼치고 반대시위 하는 사람들을 본 적도 있고, 인터넷 게시글이나 댓글에서 잘못된 이야기도 봐요. 근데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그런 거니까 안타까워 하며 지나치게 돼요. 🧶 이선정 : 사회에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옳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상대방을 설득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는 않고 있어요.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방향에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자고 이야기하죠. 그래도 되는 존재는 없다! Q. 대안학교 학부모님들이라 여러 활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일 거 같은데, 주위에서 걱정하는 목소리는 없나요? 🧶 이선정 : 학생들이 시위만 하러 다니는 게 아니냐, 그런 자리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게 아니냐 등의 오해와 비난을 건너건너 들은 적도 있어요. 그런 것에 일일이 해명할 필요는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기에 학생들이 그런 말에 상처받지도 않고요. 다만 학생들이 공부하고 활동하는 내용들을 잘 정리해서 공유하려 애쓰고 있어요. 사실은 학생들의 활동에 감명을 받아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웃음) Q. 마지막으로 두 학생께는 계획을, 선생님께는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릴게요. 🧶 이자민 : 시한은 따로 없고, 2025년 2월까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블로그 등 여러 자원봉사 활동을 쭉 할 예정입니다. 저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블로그 봐주시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웃음) 🧶 이연우 : 박물관과 '위안부' 이야기를 그림에 담아 블로그에 올리고, 행사가 있으면 합창과 몸짓 열심히 연습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어요. 🧶 이선정 : 현재 성미산학교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위안부' 문제 말고도 국가폭력, 동물권, 전쟁 등 다양해요. 미군기지 모니터링, 난민 문제도 있고요. 이 모든 주제들의 교집합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래도 되는 존재는 없다'는 거예요. 생명의 존엄, 생태적 상생을 위해서는 현장만큼 좋은 교재가 없고요. 연우와 자민 모두 본인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로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분명히 기여하고 있어요. 자랑스러워요. 꾸준히 오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참, 웹진 <결>에도 부탁이 있어요. 10대들이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는 콘텐츠도 많이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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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일본의 양심, 도쓰카 에쓰로 국제 변호사 인터뷰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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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김학순의 공개회견을 통한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 이후, 1992년 유엔 인권위원회(CHR, 현 인권이사회)에서 ‘성노예(Sex slave)’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식 제기한 한 명의 일본인 변호사가 있었다. 자국 기자들로부터 가장 큰 비난을 받아가면서도 목소리를 굽히지 않았던 도쓰카 에쓰로(戶塚悅朗). 이듬해 유엔 인권위원회 차별방지·소수자보호 소위원회에서 전시 노예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국제 공론의 장에 올라왔다. 1942년 출생, 한국 나이로 올해 78세의 노법률가는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한일 양국과 세계를 오가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의 불법성을 알리는 등 국제 인권과 평화를 위한 법률 활동에 힘쓰고 있다. 연구소에서는 지난 8월 기림의 날을 앞두고, 일본의 대표적 양심 도쓰카 에쓰로 변호사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문제 해결에 다가가기 위해, 냉정하게 매진한 법률 연구 Q. 유엔에서 문제를 제기하실 때 ‘성노예’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는데, ‘성노예’라는 용어가 어떤 면에서 중요한가요? 유엔에서는 ‘국내법 위반’이나 ‘피해자가 걱정된다’ 등의 이유로는 발언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유엔 헌장이나 세계인권선언 등의 국제법 위반을 주장해야 합니다. 저는 할머니들의 체험담을 듣고 ‘내가 피해자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몸이 떨렸습니다. 개인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강제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노예라고 생각할 것이기에, ‘성노예’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겁니다. 국제법에서 노예제가 일찍이 금지되었던 것은 법률가로서는 상식인데요, 많은 분이 알고 계시겠지만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까지 감수하며 노예제와 싸웠던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입니다. 1926년 국제연맹이 노예금지협약을 채택했을 때 상임이사국이었던 일본 제국은 비준을 약속했지만, 전쟁으로 유야무야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노예제 금지가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국제관습법이었다는 것은 세계적인 상식입니다. 일본 외에 그 사실을 부정하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메이지 초기, 당시 일본 정부가 노예무역 금지를 이유로 페루 선박에 실려 가던 중국인 쿨리를 구출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이제 와서 노예제 금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요. 유엔 국제인권위원회, 인권소위원회, 국제사법재판소, 유엔 아카데믹 임팩트(UNAI), 특별보고관도 결국 같은 판단을 내렸죠. Q.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오랫동안 활동하시면서, 가장 주목하거나 집중하셨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연구에 가장 집중했습니다. 런던정경대(LSE)에서 국제법을 가르치셨던 로잘린 히긴스(Rosalyn Higgins) 선생님은 여성 최초로 국제법률가협회(ICJ, 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 소장이 되셨는데요, 제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법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선생님께 조언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시면서 ‘굉장히 흥미로운 문제를 만났군요!’ 하시고는 도서관에 가보라는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그 조언은 이제까지 받았던 가르침 중 가장 훌륭한 가르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실제로 도서관에 가서 연구에 몰두했는데요. 연구하면 할수록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발견으로 여겨지는 것은 1) 범죄성(1936년 나가사키 지방재판소 판결 문서의 발견) 2) 젠더 문제(성 문제와 생활의 문제는 한 세트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1]) 3) 화해의 본질(사실을 인정하고 성실한 사죄를 할 수 있다면 중대한 범죄도 용서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일본은 친구를 얻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국가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등이 있습니다. Q.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활동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한국뿐만 아니라 북한, 필리핀, 대만 등에서도 할머니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김학순 씨는 국민기금의 대표와 만날 때 동석한 적이 있습니다. 유엔에서 함께 활동한 황금주 씨와 강덕경 씨도 잊을 수 없습니다. 여러 훌륭한 여성 활동가 분들께 많이 배웠습니다. 일본의 남성 신문기자 대부분은 반면교사였지만, 개중에는 훌륭한 저널리스트도 있었습니다. 마이니치 신문의 이토 요시아키(伊藤芳明) 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마츠이 야요리(松井やより) 씨는 아사히 신문에서 퇴직한 이후에도 제게 질타와 격려를 보내주었습니다. 런던정경대(LSE) 대학원에서 만났던 박원순(2019년 기준, 현 서울시장) 씨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공부한 일도 잊을 수 없습니다. 피해자를 생각하며, 우리는 계속해서 배워야 한다 Q. 일각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주장은 오류라는 의견서를 한국의 헌법재판소에 제출했습니다. ‘2015년 한일 합의에서 양국 간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확인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것은 정부 간의 합의에 지나지 않으며 피해자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일본 총리가 성의 있는 사죄는 커녕 ‘성노예’ 라는 표현을 하지 않는 것으로 비밀 협의를 요청했다는 것인데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한일 합의는 무효(대세적 의무의 위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타 쓰토무(羽田孜) 총리가 할머니와 비공식적으로 만났을 때의 에피소드[2]를 떠올려보면, 어떤 사죄가 할머니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알 수 있을 겁니다. Q. ‘위안부’ 문제가 양국 간의 합의를 통해 종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 혹은 국가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려운 질문이군요. 제가 여러 번 화해를 제안한 바 있습니다만, 일본의 주류 정치인들은 모두 거부해 버렸습니다. 화해할 기회가 있었지만 도망친 겁니다. 한국 측과 타이밍이 어긋난 적도 있습니다. 일본인들, 특히 정치인들은 일본의 가해 사실을 알기 위해 더욱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제가 무지했다는 사실, 남성 중심 사회에 푹 젖어 있었다는 사실을 ‘위안부’ 문제를 통해 배우고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Q. 최근에는 어떤 문제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계십니까?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에 관한 논의는 일본에서 금기였습니다. 이것이 역사 인식의 부족이나 역사 왜곡을 낳았고, 일본과 한국의 화해를 가로막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보통 사람들, 그리고 변호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법률가들 역시 정보가 부족해 역사 인식이 결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대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난 7년 간의 연구를 정리하여 책으로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과 북한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면에서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한국·북한에서도 일부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한 만큼, 동시에 스스로의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도 매우 어렵지만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각주 ^ 도쓰카 에쓰로, 『ILO와 젠더(ILOとジェンダー:性差別のない社会へ)』, 日本評論社, 2006. 참조 ^ 山下英愛「金学順―半世紀の沈黙を破る」『ひとびとの精神史〈第8巻〉バブル崩壊―1990年代』2016年、岩波書店、198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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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일본군 전범 진술서를 읽으며 드는 단상(斷想)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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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중국 피해자와의 만남 자주 뜨거운 감자가 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중국인 피해자를 처음 접했던 것은 딩링이라는 중국 작가가 1941년에 쓴 『내가 노을마을에 있었을 때』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당시 이 소설은 중국문학 연구자들에게도 상당히 난해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휴양을 위해 마을에 온 ‘나’가 일본군‘위안부’가 되어 중국공산당 스파이로 활동하다 병이 들어 돌아온 주인공 ‘전전’과 마을 사람들을 관찰하는 형태로 써 내려간 이야기이다. 피해 여성 전전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 ‘나’조차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전전의 고통을 이해는 못 하지만 공감한다. 때때로 피해자의 피해를 전유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대변할 수 있다는 듯이. 이 소설이 쓰인 후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피해자의 언어로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다면 당시 전전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피해자의 자리에서 사유하는 것 정도가 가능할 뿐이다. 딩링이 전전을 그린 후 50여 년이 지나 현실 속 중국의 전전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강하게 울린 이에 허우둥어라는 피해자가 있다. 그는 마을 촌장이 일본군에게 제공한 여성이었다. 폭력이 행사되는 장에서조차 자신보다 약한 이를 위한 희생을 감내했다고 다른 피해자들은 증언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의 폭력 희생자였다는 이유로 2차, 3차 피해를 겪어내야만 했던 여성이다. 허우둥어의 피해가 과연 ‘위안부’ 피해인가라는 논의가 전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장에서 일상화된 여성에 대한 폭력의 연속선에서 본다면 그 차이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전장이 된 중국으로 군대와 함께 조선과 일본의 일본군‘위안부’들이 끌려왔다. 그리고 일본군은 중국의 여성들을 강간하고, 강간센터(위안소)에서 지속적으로 폭력을 자행했다. 강간과 강간센터, 위안소 사이에는 실질적인 간극이 놓여있지만, 일본군이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을 ‘전투의 보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폭력의 연쇄 사슬 끝 실행자 일본군 전범 피해자 구술 자료가 말하는 폭력의 참상을 읽어 가다 보면 그 끔찍함으로 인해 가해자인 일본군에 생각이 미친다.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어떻게 전쟁터로 왔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그토록 잔인한 일이 가능했을까? 중일전쟁 전범들을 인터뷰하여 『악한 사람들(Evil Men)』(제임스 도즈 지음,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20)을 저술한 제임스 도즈는 “악은 사악하고 무언가 다른 것인 동시에 평범하고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며 우리는 “자유롭고 자주적으로 결정하는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 환경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이 역설은 전장에서 행해진 일본군의 폭력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 같다. ‘악은 사악하고 무언가 다른 것’이라고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무엇으로 나와 우리의 외부에 둘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무엇이 특정한 ‘환경’과 만나면 (남성) 누구나 일본군 전범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된다. 이 불편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우리는 가해자 일본군을 고민해야 하는 것 같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일본의 중국 침략전쟁에서 ‘난징의 강간’을 필두로 일본군의 강간은 일상화되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중국의 푸순과 타이위안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어 있던 1190명 중 842명의 자필진술서를 묶어 2015년과 2017년에 출간된 『중앙당안관 소장 중국 침략 일본전범의 자필진술서 선편(中國欓案館藏 日本侵華戰犯筆供選編)』(이하 『선편』)이 있다. 이 자료집의 중문 요지를 분석한 이코 도시야에 따르면 위안소 관련 진술을 한 전범은 23명이다. 그 외 강간 관련 진술을 한 사람은 모두 591명이며, 강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자는 251명에 그친다. 전체 수록 전범 842명 중 65%가 강간 관련 진술을 한 것이다. 일본군의 압도적 다수가 범했거나 목격한 강간보다 ‘위안부’에 대한 폭력이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맥락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수전 브라운밀러는 강간의 역사를 다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오월의봄, 2018)에서 “전시에 강간 이야기는 이용 가치가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더이상 여성의 말을 믿어주거나 여성만 겪는 특수한 비극을 중요하거나 의미 있는 주제로 간주할 정치적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강간은 적을 악마화하여 ‘전쟁에 뛰어들 감정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자주 이용되어 왔다. 그것이 여성에 대한 강간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피해자 여성의 자리에서 전장의 강간을 문제 삼는 일은 그다지 관심을 끄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때로 그런 시도는 위험시되기도 한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자주 뜨거워진다. 그러나 그 뜨거움이 ‘여성만 겪는 특수한 비극’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연결되어 앞으로 나가는 데에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개조’와 ‘세뇌’ 사이에서 생각한다는 것의 의미 『선편』에 실린 전범 자필 진술서는 전범 관리소에 수감되어 있던 1000여 명의 전범들에게 행한 ‘학습’과 ‘인죄탄백(認罪坦白, 숨김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다)’ 운동 과정에서 작성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 자필 진술서를 토대로 특별군사법정을 마련하여 1956년 전범재판을 진행했다. 랴오닝성 선양과 타이위안에서 열린 특별군사법정의 기소자는 45명이었다. 나머지는 즉각 석방되어 귀국했다. 운동 과정에서 나온 진술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는 또 하나의 과제이다. 진술서 작성 과정에 대한 평가 역시 엇갈린다. 2차 세계대전 후 냉전이 심화되면서 전후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일본의 전범들은 버젓이 살아남아 전후 일본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 인물들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쇼와 일왕을 들 수 있고 지금도 일본의 천황제는 사회 구성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근저에서 묻지 않는 것이 일본 사회의 주요 흐름인데, 이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중국의 군사 법정에서 불기소된 자들은 곧바로, 기소된 자들도 형기를 다 마치지 않고 1960년대 중후반에는 전원 귀국했다. 귀국한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중국귀환자연락회(이하 중귀련)를 구성하여 활동했다. 중귀련 멤버들은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증언하는 일을 통하여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해왔다.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이들과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그들이 중국에서 세뇌당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중국 정부는 학습을 통한 사상 개조라고 말한다. ‘세뇌’와 ‘개조’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중귀련 증언자들은 전범관리소 수감 이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를 떠올리게 하여 인상적이다. 전범 관리소에서 레닌의 『제국주의론』, 마오쩌둥의 『모순론』, 『실천론』, 노로 에이타로의 『일본자본주의 발달사』 등을 읽었다고 한다. 문맹의 전범에게 동료 수감자가 글자를 가르쳐주고, 어려운 책은 대학 출신 동료가 가르쳐주었다. 이에 대해 중귀련의 멤버 다카하시 데쓰로는 “우리는 전범이 되어서 처음 인간다운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책을 읽고 처음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나바 이사오는 중귀련 상임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귀국 후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인물이다. 그는 “그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내가 무엇을 했는지 …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죽였는지 점점 더 알게 되었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닫기 시작했어요. 진짜 악마였다는 걸”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란 배우고 생각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번역, 한길사, 2006)에서 아이히만이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본군 전범들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군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상당히 컸고 그럴수록 잔인해졌다. 다케우치 유타카는 군의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성병으로 인한 전력 상실을 막기 위해서 부임지마다 위안소 설치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는 단지 군의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전범관리소에 들어온 이후에야 생각이 미쳤다고 말한다. 나카이 큐지는 1897년 생으로 메이지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도쿄지방재판소 등에서 민·형사 사건 판사로 있다가 만주국의 진저우 등지 지방법원에서 재판관으로 있었다. 그는 만주국의 사법관료였기 때문에 죄목이 살인, 약탈, 학살, 강간 같은 ‘전쟁범죄’가 아니라 법관으로서의 직무 수행이었다. 그는 법관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법부 업무를 한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전쟁과 식민지배(=괴뢰국)를 작동시키고 있다는 데 그는 자부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나카이는 만주국 법관으로서 했던 일들에 대해 자필 진술서에서 범죄행위로 책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도 범죄라고 여겼을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의 행위는 타인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의 순간, 그것이 미치는 영향의 파급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우리가 행위를 선택하면서 그것이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안의 악화에 어느 정도의 브레이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혹되고 위태롭다고 한 공자의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우리 세계의 불행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닐까. 중국의 사상개조가 ‘강력한 심리적 강압체계’였던 측면은 무시할 수 없는 사안이다. 중압감으로 자살에 이른 전범도 존재했다. 하지만, 자신이 한 행위를 보다 확장된 관계 속에서 생각하도록 해 자신의 일들이 누군가에 대한 ‘범죄’였음을 인정시킨 운동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이선이 필자가 편역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세창출판사)를 2022년 12월 중 발간 예정입니다.